한국인에게 조선족은 누구인가?
지난 반세기 동안 한국은 중국동포인 조선족의 생사에 대해 알수가 없었다. 1980년대초 부터 중국과 한국간에 민간경제교류가 시작되면서 같은 민족인 중국의 조선족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후 1982년 4월부터 조선족의 고국방문이 허용되면서 활발한 교류가 시작되었다. 처음에 한국인은 고국을 방문한 조선족 동포에 대해 죽었다 살아온 형제처럼 따뜻하게 맞아 주었다. 그러나 1992년 한.중수교 이후 조선족에게 한국취업의 길이 열리면서 한국을 방문하는 조선족의 수가 증가하자 갖가지 불미스러운 사건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이로인해 조선족은 한국인을 증오 또는 원망하게 되고 한국인도 조선족을 불신하고 무시하는 경우가 많아 졌다.
한국과 중국의 경계인인 조선족의 존재와 기원에 대해 고찰해 보기로 한다.
중국 동북지역은 두만강과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한반도와 접해 있는 지역으로 조선족 밀집거주지역이었다. 이 지역은 두만강의 강물이 감소할 때는 걸어서 건널 수 있는 곳이 10여 곳이나 된다. 그리고 겨울철이 되면 두만강 하류 일부가 결빙되어 조선인이 자유로이 왕래할 수도 있다. 중국 동북지역과 한반도는 이러한 지리적 연관성으로 인해 옛부터 활발한 교류를 이어왔다. 10세기 초까지만 해도 오늘날 중국 동북지역의 길림성과 흑룡강성 동부는 조선인의 선조들이 폭넓게 활동했던 지역이었던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여진족이 1635년부터 스스로를 만주족(滿洲族)으로 고쳐 부르며 청(淸)왕조를 건국한 이후부터 이런 자연스런 교류가 난관에 부딪치기 시작한다. 청나라가 1712년에 백두산 일대를 탐사한 뒤 조선과 국경선을 정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조선에서도 수십명의 경비병을 배치하고 국경을 넘어가는 자가 있으면 사살하는 등 엄단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조선인은 이전처럼 압록강과 두만강을 자유롭게 넘나들 수 없게 되었다.
19세기 중반부터는 이 지역에 대한 청나라 정부의 통치력이 약해지기 시작하자 헐벗고 굶주린 조선의 농민들이 중국 동북지역으로 하나 둘 국경을 넘기시작했다. 청나라 정부는 그동안 버려두었던 이 땅에 조선인의 개간을 장려하기 시작했다. 조선인이 토지를 빌어 개간할 경우에는 5년간 소작료를 면제해 주고 가옥, 식량, 종자를 유리한 조건으로 대부해 주는 등 우대정책을 취한 것이다. 그러나 1890년 이후에는 조선인들이 중국으로 귀화는 물론 변발호족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경작하던 토지를 몰수하는 등 박해를 가하기 시작한다. 이를 거부한 조선 농민들은 만주족이나 한족 지주의 소작농,고농(雇農)으로 전락하고 만다.
20세기초 일본이 조선을 강점하자 식민정책에 따른 토지조사사업으로 토지를 빼앗긴 많은 조선의 농민들은 지금의 연변을 중심으로 중국 동북지역으로 이주해 온다. 이에 따라 국내에서의 항일투쟁에 한계를 느낀 일부 의병장들도 부대를 이끌고 조선농민이 많이 이주해온 이곳 중국 동북지역과 연해주로 이동한다. 이들은 이곳을 근거로 무장투쟁을 계속하거나 조선 청년들을 모아 문무교육을 실시하고 독립군 간부로 양성하는 등 독립투쟁을 전개해 나갔다. 한편 재력이 있는 애국지사들은 중국 동북지역에서 토지를 구입해 조선인 마을을 건설하고 학교를 설립해 민족의 자주정신과 애국심을 고양해 나간다.
그리하여 중국의 동북지역은 조선인의 후세를 지도하는 애국계몽운동의 본거지가 되었다.
애국지사들의 애국계몽운동 결과 1919년 3.1 독립운동시에는 각 학교의 많은 학생들이 대규모의 반일집회를 개최했다. 또한 베이징에서 5.4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자극을 받아 5월 12일 길림의 조선인 청년 학생들은 대중과 함께 길림성 의회 앞에서 집회를 벌이기도 했다. 1919년 3월부터 5월 중순까지 연변의 4개 현에서 모두 50여 차례의 반일집회와 시위가 있었으며 참가 인원은 모두 10만여명에 달했다. 의병대장과 민족주의단체 지도자들은 국권회복을 위해 항일 무장단체를 조직하고 군사학교를 설립했다. 1919년 동북 조선인 지역에서 조직되어 활동한 조선인 항일 무장 단체는 모두 45개나 되었으며 참가 인원수는 8,450명에 달했다고 한다.
이렇듯 중국땅에서의 조선인들의 끝없는 독립운동은 우리에게 조선민족의 긍지를 고취하기에 충분했던 행적들이었다.
조선인은 중국 동북지대의 개척자로서 수십년간 혁명투쟁에 참여해 중화인민공화국 건설에 기여했다. 따라서 중국 국적을 취득할 만한 당당한 권리와 자격을 갖추고 있었다. 중국 공산당은 이런 조선인들에게 중국 공민으로서 완전한 자격을 부여했고
이 과정에서 대다수 연변의 조선인은 중국 국적을 취득했다.
1948년 8월 15일 중공연변지구당위원회는 "연변민족문제에 관하여"라는 결의문을 발표하고 호적이 있는 조선인은 공민으로, 호적이 없는 조선인은 교민으로 각각 구별했다. 공산당은 조선인에게 중국 소수민족으로서의 자치권과 선거권, 피선거권을 주었다. 또한 민족집거지구의 구와 촌에서는 각 민족별 주민의 비례에 따라 대표를 선출하도록 했다. 중국 중앙정부는 권력을 완전히 장악할 때까지 각 민족의 자율성, 독자성, 다양성을 허용하는 자치제와 공산체제가 지향하는 목표 및 정책노선에 소수민족을 참여시키는 정책을 추진해 갔다.
하지만 1954년 9월에 제정된 중화인민공화국 헌법은 소수민족지역의 자치를 완전히 제도화하기보다는 중국 민족간의 통합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개편된다. 이 헌법은 대한족주의(大漢族主義)와 지방민족주의를 철저히 반대하고 더 나아가 소수민족지구가 중화인민공화국에서 분리, 독립할 수 없음을 명백하게 밝히고 있다. 결국 중국이 각 민족의 교육과 문화의 특성을 인정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중국 공민으로서 책임과 의무를 다한다는 조건 아래서만 가능했던 것이다.
모택동은 민족자치보다 사회주의혁명이 더 중요하다고 인식했다. 1956년 4월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확대회의에서는
생산수단의 개인소유에 대한 사회주의적 기본적인 개조는 이루어졌다고 판단하고 사회주의혁명을 통한 사회주의국가 건설을 강조했다. 그리고 1957년부터 전면적인 사회주의 건설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소수민족과 그들 지역에 대한 대대적인 통일정책이 실시되었다. 당시 소수민족 정책은 소수민족 문제의 실제는 계급 문제이기 때문에 계급투쟁의 형태를 통해 소수민족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논리를 기본 골자를 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1957년의 반우파투쟁을 시작으로 문화대혁명(1966~1976년)에 이르는 20년 동안 중국은 계급투쟁으로 몸살을 앓게 되었다. 조선족 역시 수많은 정치운동의 소용돌이 속에서 수많은 간부와 대중들이 박해를 받았다. 결국 이 과정을 통해 조선족은 점차 중국화, 사회주의화 되어가기 시작했다.
중국 지도층은 1978년부터 개혁개방 정책 아래 소수민족에 대해 보다 현실적인 민족융합정책을 채택하게 된다. 1982년 소수민족에 대한 융합정책에 따른 개정된 헌법에 의하면 중국 소수민족은 중앙정부의 권위에 도전하지 않고 중화인민공화국으로부터 탈퇴하려 하지 않으며 제3국과 불법적인 관계를 맺지 않는 한 그들의 발전목표를 추구하는 데 있어 아무런 제한을 받지 않게 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이후 조선족은 중국 공민으로서 생존을 추구해야만 했다. 대부분의 조선족들은 토지혁명시기에 토지를 분배 받아 경제적으로 기본적인 생활을 보장받았고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에는 정치적으로 또는 법적으로 사회적 신분과 지위를 보장받게 되었다. 하지만 끊임없는 정풍운동으로 인한 가치관의 변화로 전통적인 가정에 대한 의무와 책임은 국가와 인민에 대한 의무와 책임으로 전환되었다. 또한 효도중심의 전통윤리와 가치관도 봉사정신을 제창하는 전형적인 사회주의 도덕관념으로 뒤바뀌게 되었다. 이제 중국속의 조선족은 어쩔수 없이 사회주의국가의 구성원으로 변모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한.중수교 이후 양국간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조선족은 새로운 변화의 과정을 겪게 된다. 가난한 시골농촌에 살던 조선족들은 한국을 방문하게 되면서 경제적으로 윤택해졌다. 그들은 한국과의 관계가 확대되어감에 따라 시야를 넓히게 되고 한국 이외의 외국으로도 진출할 수 있는 도전 정신을 가지게 되었다. 중국 조선족은 한국기업을 통해 세계를 상대로한 시장경제원리를 체험하게 되었으며 선진기술과 경영관리방식도 배우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과정을 통해 조선족과 한국인간에 갈등이 심화되었다. 또한 조선족 집거지가 서서히 붕괴되면서 가치관이 변하기 시작했다. 결국 중국 정부가 조선족이 중국의 소수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하고 중국 통합정책에 반해 분열을 초래할까 노심초사하는 수준에 이르게 된 것이다.
한국인과 중국 조선족의 교류는 기본적으로 혈연적인 유대관계에서부터 출발한다. 하지만 지난 10여 년간의 여러 상황으로 미루어 봤을 때 동포애만으로는 양측의 교류가 지속될 수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제 한국과 조선족과의 관계를 미래지향적으로 새롭게 정립해 상호불신과 갈등을 해소하고 서로 신뢰하고 협조해 공동번영을 이루기 위한 방법을 찾아야 할 시기가 된 것이다.
조선족이 가지고 있는 한국과 중국문화의 융합으로 이루어진 이중적 문화는 한중교류에 교량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귀중한 자산이될 수도 있다. 뿐만 아니라 조선족 사회가 지니고 있는 문화적인 성격은 남북간의 정치적인 결합과 문화적인 이질성 극복에도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앞으로 연변과 조선족 집거지인 중국의 동북3성을 중심으로 중국과 한국이 보다 끈끈한 협력관계를 이룰 수 있다면 조선족의 역할이 확대되면서 이들의 사회적 지위도 급격히 상승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족이 한.중 양국에 긍정적이고 유익한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그들 스스로 한.중 양국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지를 연구해
양국에 이익이 되는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조선족사회가 한국과 중국이 요구하는 역할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이중적 문화를 유지해야 한다. 하지만 현재 조선족이 중국 전역으로 흩어지면서 그들의 모체문화와 언어를 상실해 가고 있다. 많은 중국인들이 한국어와 문화를 배우고 있는 최근 상황에서 조선족이 그들의 모체문화를 상실한다는 것은 너무나 안타깝고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중국은 21세기 세계경제를 주도할 수 있을 만큼 거대한 잠재력과 광활한 시장을 가지고 있는 국가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족의 역할이 한.중 양국에 있어 그 중요성은 계속 커질 것이다. 또한 남북한의 화해와 아태지역의 평화적인 분위기 속에 동북아가 세계경제의 중심지가 될 경우 조선족 역할 증대에 반문을 던질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조선족 공동체의 생존과 21세기의 무한경쟁시대를 대비하는 전략적 차원에서 조선족에 대한 교육의 활성화가 절실히 요구된다. 한국어는 물론 민족문화와 전통 그리고 조선족 역사를 통해 중국 소수민족으로서의 민족의식과 민족사명감을 고취해 조선족의 정체성을 유지하도록 한국과 중국정부의 보다 많은 정책적 지원이 있어야 할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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