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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한글디자인, 모아쓰기가 걸림돌 될 수 없다 (정병규)

수호천사1 2008. 10. 7. 11:59

출처: 한국문화관광연구원 월간 <너울> 2008년 9월호

 



정병규 | 시각디자이너, 한국시각정보디자인협회 회장

 

한글 디자인을 말하기 위해서는 우선 한글과 디자인의 관계를 살펴보는 것이 순서다. 한글과 디자인이라고 할 때 디자인이 무엇을 말하는지에 따라 한글과 디자인이 만나서 기록되는 범주가 사뭇 달라진다. 먼저 한글을 디자인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한글의 글자꼴을 디자인하는 행위가 여기에 속한다. 둘째로 한글을 가지고 하는 디자인, 즉 한글을 사용하는 디자인을 생각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한글 타이포그래피(typography)라 불리는 한글을 표현하고 전달하는 행위가 여기에 속할 것이다. 그리고 셋째로는 한글을 대상으로 삼는 디자인을 말할 수 있다. 이 셋째 디자인은 한글을 소재로 문화상품을 생산하는 디자인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분명할 것이다.


이 글에서는 한정적인 지면을 생각해, 이렇게 한글과 디자인의 관계로 구분하는 디자인 영역마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문제 한 가지씩만 살펴볼 참이다. 물론 관심과 경우에 따라서는 이런 태도와 다르게 한글과 디자인의 관계를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본문체가 밥이라면 제목체는 반찬


한글과 디자인의 관계에서 처음 말한 디자인은 ‘한글 디자인’이라는 말로 바꾸어 말할 수 있다. 한글 디자인이란 한글이란 문자를 활자의 꼴로 만드는 디자인 행위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는 한글 활자의 글자꼴이 가장 문제가 된다. 활자의 존재는 그 활자의 이름이 가리키는 고유한 글자꼴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이다. 한글 활자의 종류는 활자 이름의 가짓수만큼 있는 셈이다. 그리고 서체 역시 그만큼 있다고 볼 수 있다. 지금 한글 디자인에서 문제로 떠오른 여러 가지 것들 가운데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한 가지만을 살펴보기로 하자. 그러기 위해서는 한글 활자의 본문체 문제를 거론해야 한다.


활자는 쓰임새에 따라 본문체와 제목체로 나눈다. 신문을 예로 들면 기사 본문에서 볼 수 있는 활자들이 본문체고, 기사의 제목으로 사용하는 활자가 제목체다. 일반적으로 본문체는 명조체들이 주로 쓰인다. 한 글자 한 글자, 즉 낱글자를 구성하는 낱자인 초성, 중성, 종성의 각 모양에 글잎(일부에서는 돌기라고 한다)이 붙은 글자꼴을 통칭 명조체라 부른다(지금 여러분이 읽는 이 활자들이 명조체 활자다). 명조체는 글잎이 있어 읽기 쉽고 편하다. 읽기 쉬운 특성(legibility)을 가진 것이다.


제목체는 일반적으로 본문체인 명조체와 다른 모습으로 디자인된다. 우리가 볼 수 있는 대표적인 것으로는 굵은 고딕체 계열의 활자들이 여기에 속한다. 우리가 고딕체라고 부르는 활자들의 특징은 글잎이 없다. 요약해서 말하자면 제목체는 본문체가 아닌 활자를 모두 아우른다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본문체가 아닌 모든 활자가 제목체인 셈이다. 우리 활자 현실을 바탕으로 말하자면 명조체 계열이 아닌 모든 활자가 제목체인 셈이다. 제목체는 본문의 읽기 쉬운 특성과는 구별되는 잘 보이는 특성(readability)이 강조되는 활자이기도 하다. 그리고 본문체를 제목체로 사용하는 경우는 흔해도, 제목체는 본문체로 잘 사용하지 않는 것이 상식이다. 물론 본문체를 제목체로 쓸 경우에는 그 크기 따위를 달리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흔히 한글의 글꼴이 다양하지 못하다고 한다. 우리가 자주 접하는 알파벳에 비해 그렇다고 한다. 사실이다. 그런 데에는 역사적, 현실적으로 여러 가지 배경이 있다. 한글의 글자꼴이 다양하지 못하다는 지적에서 한글 디자인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나 한글 글자꼴 만드는 것을 직업으로 삼은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그 말이 한글 본문체가 다양하지 못하다는 말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1980년대 한글세대가 본격적으로 디자인계에 진입한 이후 한글 글자꼴 개발의 성과는 눈부셨다. 그러나 그것은 반쪽의 성공에 불과하다. 그들은 제목체 만들기에만 급급했다. 그동안의 한글 디자인의 사정을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최정호가 만든 명조체 수준에서 거의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이 점은 우리 디자인계가 모두 수긍하고 반성할 일이다. 본문체는 밥과 같다. 그러니까 제목체는 반찬인 셈이다. 밥이 없으면 반찬은 존재할 아무런 의미가 없다. 반찬은 밥이 있는 것을 전제로 했을 때 의미가 있는 음식이다.



한글 글꼴 개발의 걸림돌 모아쓰기…핑계에 불과해


1980년대 이후 한글 활자 개발의 짧은 역사는 마치 밥이 없이 반찬만으로도 식탁을 꾸릴 수 있다는 식이었다. 한글은 네모꼴 바탕 위에 초성, 중성, 종성의 낱자를 배치해서 한 자의 낱글자를 만든다. 낱글자란 한글의 모아쓴 꼴을 말한다. 한글은 모아쓰는 것을 바탕으로 창제된 글자다(아직도 풀어써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건 이제 지나간 해프닝일 뿐이다. 모아쓰기는 ≪훈민정음≫에 기록된 한글의 가장 큰 특징이다). 한글 활자 개발 즉 한글 글자꼴 개발의 걸림돌은 한글 모아쓰기에 있다고 모두 생각한다. 특히 본문체는 더욱 그렇다. 원칙적으로 알파벳 문자는 낱자, 즉 한글의 자음, 모음에 해당하는 글자만 만들면 그만이? 그러나 한글은 이 낱자들로 다시 낱글자를 짓기 위해 네모꼴 위에 배치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실제로 지금까지 본문체를 디자인할 때는 낱글자를 한자 한자 따로따로 만들 수밖에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소한 2,000여 자 넘게 한글 낱글자를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통상적인 문자 소통이 가능하다(한자와 특수문자를 합하면 필요한 글자는 9,000여 자나 된다).


≪훈민정음≫이 선언한, 한글의 문자로서 가장 돋보이는 특징인 모아쓰기가 한글의 글자꼴 개발이라는 면에서 보면 오히려 가장 큰 걸림돌인 셈이다. 그러나 결코 이 문제가 한글 본문체 개발이 더딘 절대적인 요인일 수만은 없다. 한글 디자인의 오늘과 내일을 위해서 우리 디자인계는 이 문제를 넘어서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결과로 말해야 한다. 이것이 한글과 디자인의 관계에서 디자인을 한글 글자꼴을 디자인한다는 의미로 생각했을 때의 문제점이며 누구든지 이해할 수 있는 문제 해결 방안이긴 하지만 그 해결책은 원론적 차원의 대안일 뿐이다. 이 대안의 구체적인 해답으로서의 실천만이 우리 한글과 나아가서 우리 한국 디자인의 밝은 미래를 가져올 것이다. 물론 이것은 쉽지 않으며 시간이 걸릴 문제다. 또 우리 디자인의 오늘과 내일의 역량과 수준을 재는 지표이기도 하다.



훈민정음에 대답과 힌트가 있다


둘째로, 한글과 디자인의 관계에서 디자인을 한글을 사용하는 것이라 규정할 때의 문제는 바로 한글 타이포그래피의 문제다. 한글 타이포그래피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를 거론할 수 있지만 여기서는 한글 타이포그래피와 훈민정음의 관계만 말하기로 하자. 한글은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모아쓰는 것을 특징으로 하는 문자다. 지금까지 우리 타이포그래피의 실천 논리는 이 한글의 모아쓰는 특징을 몹시 소홀히 했다. 우리 타이포그래피의 실천 원칙들은 거의 알파벳 타이포그래피의 논리를 보편적인 시각 조형의 차원에서 이식한 수준에 머물 뿐이다. 특히 교육이 그렇다. 한글이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문자라는 것은 한글은 창제 원리가 있고, 그에 따른 방법이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면 당연히 문자로 쓰는 방법도 한글에 맞게 독창적이어야 할 것이다. 즉 한글 타이포그래피는 한글만의 타이포그래피 원리가 있을 수 있다는 말이다. 우리는 이 문제에 거의 손을 놓고 있다. 이 문제의 대답을 탐구하기 위해서는 먼저 훈민정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훈민정음을 시각언어적으로, 한글 타이포그래피라는 면에서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태도로 한글과 한글 타이포그래피를 생각하는 분위기가 디자인 학계나 현장에서 상식이 되어야 한다.


타이포그래피를 가르치는 교수들부터 우선 솔선수범 앞장서야 할 것이다. 디자인 계열 학과에서는 졸업할 때까지 적당한 시기에 필수적으로 훈민정음과 관련한 과목을 이수하도록 해야 한다. 나는 훈민정음 안에 알파벳 타이포그래피를 포괄하면서 밝혀지는 새로운 한글 타이포그래피의 실천원리에 대한 구체적인 대답과 힌트가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부터 훈민정음을 보는 차원을 달리해야 한다. 국어학의 훈민정음에 대한 괄목할 만한 연구 성과는 이러한 디자인적 시도에 큰 길잡이가 되어줄 것이다. 한글의 독창성과 과학성은 창제원리의 차원을 넘어서 한글의 구체적인 사용과 한글 타이포그래피를 통해서도 구현되어야 한다.



한글 문화상품에 대한 새로운 디자인적 관심 · 전략 세워야


셋째로 한글과 디자인의 접목이라는 과제는 한글의 문화상품화라는 문제로 줄여 말할 수 있다. 우선 우리 문화상품의 위상을 정리해야 한다. 우리 문화상품의 오늘의 현실로 눈을 돌려야 한다. 우리 문화상품 일반에 대해 말하는 것이 한글 문화상품화에 대해 생각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글 문화상품의 문제는 한글을 소재로 한 것에 한하는 문제가 아니라는 견해다. 제주도의 하르방을 모델로 한 상품은 전국 관광지 어디에서나 쉽게 만날 수 있다. 한글 디자인 상품, 한글 문화상품의 수준은 이를 넘어서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문화상품 전반에 대한 디자인적 관심과 전략을 새로이 해 야 한다. 솔직히 말해 문화상품에 관심을 가져야 할 법한 영역의 전문 디자이너들은 지금의 우리 문화상품의 질과 수준에는 담을 쌓고 있다. 많은 한국 문화상품들은 전문 유통업자들의 손에서 생산, 판매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름난 박물관, 미술관 한 귀퉁이에 자리 잡은 몇 점 되는 않는 디자인(?)된 상품들을 무시한다고 항의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어떻게 하면 전문 디자이너, 현장 디자이너들이 문화상품에 관심을 기울이고 이의 발전에 기여하게 할 수 있을지가 문제다. 구색 맞추어 해마다 철마다 띄엄띄엄 열리는 공모전 수준의 관심과 열기가 우리 문화상품 수준을 훌쩍 끌어올릴 것이라고 믿는 주최자나 디자이너는 없을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가 혁신적으로 바뀌어야 한다. 이것은 정말이지 디자인계의 각오와 힘만으로는 불가능하다. 한마디로 말해 국가 이미지, 국가 브랜드 차원에서 맘먹고 시간 들이고 열성을 모아야 할 일이다. 우리 문화 상품의 총체적인 생산 패러다임이 달라져야 한다. 한글 문화상품도 이런 차원에서 처음부터 기획, 생산해야 한다. 옷에다가 붓글씨로 한글을 써 붙이고, 서양 모델들이 그걸 입고 삐딱거리며 걷는 영상에 감동하는 척하며, 그것이 한글 디자인이라고 대견해할 일은 아니다. 그게 한글 디자인의 바람직한 수준이라고 박수 치는 디자이너가 과연 몇 명이 있을까. 그저 속으로 ‘저러다 말겠지, 원……’ 할 것이다.


앞으로 한글 낱자들을 이리저리 사방 연속무늬로 만들어 넥타이나 스카프에 찍어서 만든 한글 문화상품의 수준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 한글 디자인이 이런 수준에 그치는 것을 정부나 지방자치단체의 탓으로만 돌리지 말고 우리 디자인계의 할 일이고 숙제라고 자각하는 움직임이 일어야 할 것이다.

출처 : MyLove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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