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의 건국과 멸망원인
(발해)渤海, 698년 - 926년)는 한반도 북부와 만주 동부 및 연해주에 걸쳐서 229년간 존속한 나라이다. 고구려가 멸망한 지 약 30년 뒤인 698년에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 기반을 둔 고구려 유민과 속 말갈 세력이 힘을 합쳐, 대중상(또는 걸걸중상)과 대조영이 만주에서 당나라 세력이 쇠퇴해진 틈을 노려 건국하여 신라와 함께 남북국 시대의 한 축이 되었다가 926년 1월에 기마대를 이끌고 침략한 거란족의 요 태조의 침입을 받아 멸망했다.
그러나 발해의 멸망한 원인을 짚어보자. 10세기 초의 이르자 다시 귀족들 간의 권력 투쟁이 격화되기 시작하였으며, 외부에서는 부족을 통일한 거란족이 동쪽으로 점차 세력을 확대해 오고 있어 발해의 국력은 크게 쇠퇴해졌다. 또 대진국(발해)황제 대인선(발해 마지막 황제) 는 여색을 탐했다. 당시 안소홍이란 미녀가 있었는데 대인선은 평소부터 그녀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안소홍은 대인선을 버리고 당시 어느 고관-고위관리(이 고관의 이름은 전하지 않음)의 집에 애첩으로 가게 되었다. 그러자, 대인선이 이에 분노, 고관을 죽이고 안소홍을 데리고 왔다. 이에 문관들이 반대상소가 잇따르자 , 무관들과 결탁 상소문을 올린 자 관련된 자를 모두 죽였다. 이 때, 상당수 문신이 죽음을 당했다. 이번에는, 대진국(발해) 장수 대원방이 서경압록부(오늘날 요서로 추정)에서 문관들의 억울한 죽음을 슬퍼하며, 반기를 들었다.
그러나, 이 반란은 대진국(발해) 장수 이도종에 의해 진압되고, 대원방은 죽음을 당했다. 그러나, 무신들 사이에도 내분이 잇따라 이도종 또한 피살되었다. 이도종은 무장 중 명망이 높았으니 국민의 충격은 컸다. 이로써 민심은 이반되고, 많은 수의 문무백관과 백성들이 살 길을 찾아 고려로 망명을 갔다.
설상가상으로 이 모든 소식이 거란첩자에 알려져 거란 황제 야율아보기(요 태조,재위 916-926)의 귀에 들어갔다. 또 이때 백두산이 폭발, 대진국(발해)는 더욱 더 혼란에 빠졌다. 거란은 대대로원수이던 대진국(발해)정벌군을 조직했다, 거란의 8부족과 (대하)夏씨, (요연)遼淵씨,(이)李)씨 부족 그리고 외부의 지원군 (토번)티베트, (후량) 오호십육국, 특히(신라)新羅는 후3국 멸망 기에도 3만군을 파견해서, 발해를 멸망 하는 데 일조했다
중국의 소수민족-뿌이족(布依族 , 실위(失韋) 실위와 거란(契丹)은 모두 동호족(東胡族)에서 나왔다고 한다. 말갈 (靺鞨; 퉁구스계 민족, 돌궐 [Göktürks, 투르크, 튀르크, 당구트 등 여러 국가가 거란을 지원하러 왔다. 총 30만의 대군이었다.
이 때 그는 황후와 태자를 당구트 등과 같이30만의 대군을 조직, 대진국 (발해) 정벌에 나서 마침내,926년 정월(1월)에 발해를 멸망시킨다. 대진국(발해)황제 대인선은 수도 상경용천부에서 3일간 버티다, 마침내 왕비와 함께 항복했다. 하지만 이는 남아있던 대신들이 무능하여, 거란군이 오는 것을 보고, 자기 권력유지를 위해 대인선에게 항복하자 했으니 어찌 한심한 일이 아닌가
결국 230년 가까이 지속되어 오던 발해는 거란족의 침략을 받아 926년에 멸망하였다.(일부 학자들은 발해가 백두산의 화산 폭발로 황폐화가 되어 거란족에 의해 쉽게 멸망하였다고 주장한다. 이후 발해 유민들의 부흥 운동마저 실패함으로써 그동안 한민족의 주된 활동 무대의 일부였던 만주 지방에 대한 지배력이 급격히 약화되었다.
또 기원 732년 발해 무왕이 장윤휴를 보내 당의 등주를 공격하자 이듬해 신라는 당의 요청으로 발해를 협공 공격하다 폭설을 만나 철군한 바 있다.
이렇듯이 신라라는 (요괴국)妖怪國은 한민족의 원수이며 지나인 들개족의 신하 식민지국이었던 것이다. 한데 더욱이 아이러니 한 것은. 우리 한 겨레 한민족의 땅을. 저 요괴 국 신라 요인 (妖人)들이, 반 토막, 남쪽 한반도 땅에서, 꼬리친다는 사실이다.
한데 신라의 뿌리가, 중국의 초나라라고 주장하는 중국 (양완쥐안)楊萬娟 교수의 주장도 있다. 또 (지나인)支那人이 (중국)中國 (한족)漢族의 95%의 주류를 이루는 (다)多 (종족)種族의 한 뿌리라고 하지만 사실은 동이, 북방민족, 서융, 지나인 등 수많은 혼합종족인 것이다. 또한 초나라 항우는 동이족의 후예라고 하지만, 그들은 오래 전부터 支那人의 동화되고 말았다. 그 신라의 뿌리가 초나라라면 역시 북방민족 흉노족이라는 뜻이다.
한데 한무제 때의 한(漢)나라의 항복하고, 한민족(漢民族)의 동화된 신라족은 (한족)寒族의 일원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한족)漢族의 왕이 된 (이세민)李世民과는 달리, (신라)新羅는 더 문명이 발달했던 배달민족으로 행세 했던 것이지만 조상이 화하족의 동화되었던 신라의 김춘추는, 쉽게 나당 연합군의 연합해서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씩일 수 있었던 것이다.
이때부터 신라는 (지나인)支那人 중국 (中國)을 상국 형님 국 부모 국으로 섬기며 변방이 되어 사대주의의 젖어왔던 것이다. 근 원이 말하듯이, 그 옛 신라 땅 사람들은 (금시) 今時대에도 (친일)親日, (친중)親中, (친미)親美, 반 겨레 사대주의를 신봉하는 것이다. 하지만 수 천 년간 이 비좁은 한반도 땅 안에서 서로 이주하며 석 겨 살고 서로의 동화되었으니 옛 신라의 인종은 우리민족의 동화 되고 말았지만 신라의 조상의 대해선 한을 풀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한데 어찌하랴 이제는 우리에 한 국토 한민족인 것을 화합하고 단결해서 국토 통일을 이룩해야 한 다. 협소한 한반도 땅 안에 분단까지 된 양(兩)대(帶) 소국(小國)을 자손 대대로 물려주어서는 안 된다. 통일에 반대하는 집단이 있다면 남북 어느 집단이라도 집권야욕은 영원히 봉쇄해야 한다.
한데 김대중 대통령을 국제통화기금 (IMF(International Monetary Fund)난(難) 수습에 기여했고 백제, 고구려후손답게 민족 대 화합의 겨레 끌어안기 등 공훈이 크지만 인명경시행위가 큰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또 이자 제한법 철폐로 인한 폭력 깡패집단의 월 이자로 1,000% 이상을 뜯어내는 살인강도 적인 (대부)貸付업자를 양성해내 얼마라 많은 서민을 생활터전을 잃고 목숨을 끊는 가하면 노숙자가 되는 슬픈 일을 저질러 던 것이다.
또 노벨수상을 꿈꾸고 강력범의, 감옥민주화다. 사형제도 폐지 주장 등 극악 범 대책 없는 방출에 따른 양민 대학살 등 노벨수상을 위해 막대한 국민의 세금을 세계 힘 있는 者의계 뿌렸다는 후문 등 선정보다. 악정이 적지 않은 역사적 사실이다.
한데 노무현대통령은, 시골 군수 감 의는 딱 맛 지만 대통령으로서는 그 자질 부족이라고 논하는 국민도 많지만, 그리도 (장단점)長短點은 있는 것 같다. (단점)短點 (지엔피)G.N.P가 낮아지고 (실업자)失業者가 증가하고 (부실기업)不實基業이 증가하고 (강력범)强力犯 대처하는 공권력 부재로 인해, 양민대학살에 의한 사회불안. 농민학대 (부실언)不實言 남용의 의한. 대통령으로 서에 ,나라망신 등청와대 중요 문건 봉화마을 유출 등은 역적의 행위라 하겠다. (장점)長點 북녘 동포끌어안기 등이다.
한데 우리민족의 (분단)分斷 (고착화) 固着化가 된다면, 남녘이나 북녘이나 함께 (자멸)自滅하는 것이다. 반쪽 한반도 땅 면적으로는 강대국과의 어께를 겨룰 수는 없다. 아무리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이룩한다 해도, 수출에 의지하지 않고 내수 경기만으로도 나라 경제가활성화 되는 최소 인구수는 1억이라고 한 다. 한데 인구수가 작아도 외교 무대에서 큰소리치려면 이스라엘처럼 핵 같은 강력한 무기 또는 국방 자율화 같은 게 있어야 할 텐데 우리나라는 핵 포기는 선언했고 무기나 작은 부품조차 외국에서 사다 조립하니 강대국의 꿈은 요원하니 어찌 한심하지 않은가
약소민족은 언제라도 강대국에 밥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또 국제정세란, 언제라도 변 할 수 있고 또(약육강식) 弱肉强食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근자에 와서도, 자타가, 공인하고 역사 깊은 독립국가, 아프카니스탄과, 이라크를, 미국이 무력으로, 식민지화하는 것을, 보았고 저 티베트가, 옛 (강성)强盛기 때에는 토번이라 했는데 토번은 (티베트) 한때 중국북부까지 접영하자 당태종은 양녀 문선 공주를 토번국왕 송천감포에게 시집보내고 토번에 침략을 화친을 매저다. 이렇듯이 토번은 늘 중원대륙을 위협했으며 거대한 토번 오랑캐로 용맹을 떨쳤으나, 지금은 중국의 식민지가 되고 만 것이다. 지도자의 분열과 민족의 단결력 부족 등 국력이 (쇠 약)衰弱해진 티베트. 여지없이 중국 공산당의 침략을 받아 식민지가 되는 운명이 되고 만 것이다.
한데 옛 토번은 강했다. 북방한겨레의 후예가 세운 토번(현재의 티벳-단조선때는 단조선의 연방국중의 하나-신시배달국시대에는 배달국의 일원)제국의 기마군단이 당나라 서울이라고 알려진 장안(현재 서안)을 공격하자, 이를 피하고 결국 살아남고자 이세민은 자신의 양녀
문성 공주를 토번제국 송첸감포칸에게 시집보낸다.
이를 계기로 티벳에는 인도와 중국불교가 전해진다. 당시 토번제국은 북방기마유목민의 강력한 기마군단을 운용하고 있었고 이러한 군대를 동원하여 보병위주의 당나라군대를 닥치는 대로 괴멸 시켰다. 고구려침공의 선봉장이었고 전투 잘하기로 유명하여 귀족의 반열에 까지 올랐던 설인귀도 토번제국의 기마군단을 당해내지 못하고 패하였다. 결국 그 패전의 책임을 물어 당 조정은 설인귀를 평민신분으로 강등시켰고 그는 말년을 비참하게 보내다 죽었다.
한데 티베트가 민족적 통일을 이룩하고 건국한 것은 7세기의 일이다. 이 시대부터 티베트로 들어온 불교는 대승불교로 밀교를 동반한 것이었다. 특히 이슬람의 침입에 따라 많은 인도승려의 티베트 이주는 밀교융성에 박차를 가했다. 티베트에는 고유의 샤머니즘적 본교가 있었는데 밀교와 융합해서 티베트 불교의 독특한 제파(諸派)를 성립시켰다.
한데 티베트가 쇠퇴해진 것은 불교를 도입하면서 부터다. 티벳국민이 부처님 자비에 빠지면서 그 기마민족의 용맹성을 잃고 불교진리에만 빠져 나약한 국민이 되자 국론이 분열되었고 여지없이 이웃나라에 침략을 받다 마침내 원나라에 식민지가 되었고 그를 빌미로 (금세)今世에는 중국공산당에 침약을 받아 (현세)現世에는 중국 식민지가 되는 운명이 되고 만 것이다.
한데 지금의 중국은 미국이나 세계를 초토화 할만한. 핵을 수 100-수1.000기를 보유해 부국강병)富國强兵이 된 (지나인) 支那人이 이제는 미국의 그 무섭다는 우주의 핵시설 (착수)着手도 머지않아 중국의 우주 핵시설 착수 맞대응으로 미국의 무기 독주는 기가 꺾이고 말 것이다. 이렇게 성장 발전하는 중국이 이제는 한반도까지 넘보면서 동북공정을 주장한다.
(동북공정은 1983년 중국 사회과학원 산하에 변강역사 지리 연구중심이 설립된 이후 1998년 중국 지린성 퉁화사범대학 고구려연구소가 '고구려 학술토론회'를 개최하면서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2001년 6월 동북공정에 대한 연구를 계획하면서 2002년 2월 18일 중국 정부의 승인을 받아 공식적으로 동북공정이 시작되었다. 5년 동안 총연구비 약 1,500만 위안(약 23억원)을 투입했으며,
중국 최고의 학술기관인 사회과학원과 지린성[吉林省]․랴오닝성[遼寧省]․헤이룽장성[黑龍江省] 등이 연합해 추진했다. 이 동북공정을 주장하면서 (한민족)韓民族의 역사 .왜곡. 정치적 이데올로기뿐만 아니라. 한국영토는 한반도. 한강 이남이라고 노골적인. 침략발언까지 한 바 있다.
또 우리가 역사를, 깊이, 되돌아 봐야 할 일은 우리의 겨레 고구려가, 당시 동아시아의 최대강대국 수당의 100만대군의 침략을 섬멸했지만, 패망원인은. 어처구니 없이도. 내분이 원인이었다.
보장왕) 寶藏王 24년 (665) 연개소문이 죽자 집권층 내부에서 정권 쟁탈이 벌어진 것이다. 장자 인 남생은 동생 남건과 남산에게 ,쫏겨, 그 다음해인 665년 (국내성) 國內城 (진안)集安 (국내성 남벽내문, 북쪽성벽, 해자터)으로 도망가, 아들 헌성을 당에 보내 군사(軍司)원조를 요청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는 12성을 가지고 신라의 투항하는. 등, 고구려 지배층의 (단합)團合이 무너지고 있었다.
이처럼 고구려의 내부의 모순이 드러나게 되자, 당은(이적) 李勣 으로 하여금, 고구려를 침공케 하였다. (보장왕 26년 667) (당군)唐軍은, <신성 심양 >新城 深陽 부근 과 부여성(夫餘城 농안 農安 부근)을 비롯한, 만주의 여러 성을 함락하고, 마침내 평양성으로 진격하였다. 이와 동시에 (신라군)新羅軍이 총동원명령을 내리고. 당군 과 합세하여, 평양 성을 포위 공격하였다. 이때. 당군이 뒤퉁 수를 치고, 신라군이 멱을 따는 식의, 나 ,당 (연합군) 聯合軍에 공격에, 더 이상 견디어 내지 못하고, 고구려는 마침내 보장왕 27년 (668)년에 멸망한 것이다.
그리고 이상(異常)의 얘기지만 내란이 국민의 인명피해에 얼마나 큰 재앙을 부르는지 수 당 전쟁에서 예를 들어보겠다. 선비족 출신의 수 문제 (604경)시대에는, 支那人(호수)戶數는 890만호의 4.600만 명이었는데. 어찌 된 일인지 수나라를 무너뜨렸든, 같은 선비족 출신의 당태종이 건국한 (당)唐 초기에는 300만 호에 1,600만 명 정도라고 한다. 허면, 동족상잔을 하며 내분으로 정권을 바꾸거나 통일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자국국민의 인명피해와 재앙이 큰 것인지 (역사적)歷史的으로 증명해주고 있다.
또 수 당 (내란)內亂이 얼마나 치열하였으면 (지나인)支那人의 3.000만 명이 행방불명 됐거나. 살해당한 것인지, 이해가 아니 된다. 또 (고려)高麗를 멸망씩인, 여진족추장이었던 이성계가 고려에 귀화한 고려장수 (이성계)李成桂 명나라 앞잡이가 명나라 지시로 고려를 (멸망당시)滅亡當時, (고려인구)高麗人口수는, 210만명 정도였지만 ,이성계가 (조선)朝鮮을 세운 조선 초기 인구수는 100여만명 정도 였다고 한다.
포악했던 여진족출신 역적이성계가, 역신(逆臣)정권 조선을 세우는 과정에서, 고려인구의 절반인 100여만 명에 (양민)良民을 대 학살했다는 역사적 증언이다. 한데 (고려 이전까지는 민족의 인구 통계가 다 들 쑥 날 쑥 할뿐 정확한 통계 자료가 없었음), 이렇듯이 (내란)內亂이, (외란)外亂 보다도 오히려 더 큰 민족의 재앙(災殃)을 불을 수 있는 것이다.
또 우리민족이 외세의 의한6.25 (동족상잔)同族相殘에도 양쪽을 합하여 전사자, 부상자, 민간인 사망자, 피랍 자, 행방불명자 등 인적 손실은 이스라엘 총인구수에 곱이 넘는 520만에 달하였고, 1천만의 이산가족이 발생했던 슬픈 참화였다.
한데 참고로. 고구려 멸망당시, 고구려 인구수는, 69만 호에 552만 명, 백제 76만 호에 인구수 608만 명, 신라 70만 호 인구수 560만 명, 정도 되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3국 인구. 총계 1.720만 명이 된다. 한데 당시 (당)唐나라는 내란으로 (멸문지환)滅門之患을 당해 890만호에 4600만 인구에서 300만호에 인구1600만 명 보다. 1.20만 명이 많다.
그렇다면(신라)新羅라는 (당)唐나라 (괴뢰)傀儡국이 민족배신을 하지 않고 (배달민족)倍達民族이 뭉쳐 (당군)唐軍을 대적했다면 배달민족이 (지나인)支那人을 이길 수 있는 전쟁이었으며 한민족이 중원을 평정하고, 중원의 주인이 될 수도 있었던 절호에 기회를, 저 괴뢰에 땅 신라가 배신하고(이민족)異民族인 支那人과, 야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하고,
광대한 고구려 영토를 다 당의 넘겨주고. 괴뢰국 신라는, 그것도 고구려 유민들의 도움을 받아 대동강 이남까지 영토 구걸을 하여. (한민족)韓民族은 (지나인)支那人의 (식민)植民. 약소민족으로 절락 하고 만 것이다.
그 당시 支那人 총인구수가16.00만 명이라고 한다면, (지역민) 地域 民 20명당 (병졸)兵卒 1명을 (입대)入隊씩인다면,(당군)唐軍은80만 軍이 된다. 당시 백제 신라 고구려 3국 총인구수는 17.20만 명이라고 한다면, 85만 대군을 이룰 수 있었다. 또 3 國 兵士는, 支那人 병사 보다 용맹했다.
또 수효도 우위 였는 데도, (한민족)韓民族의 분열과 대립으로 (자멸)自滅 하고, 약소민족으로 절락 하고 만 것이다. 문제는 (지금)至今 이(시대)時代의도, 이데올로기 (정치)政治싸움이, 3국 시대의 이데올로기 싸움으로, 저 支那人에게 어부지리(漁父之利)를 주고, 멸망한 것과 같아 걱정이다.
특히, 옛 괴뢰의 땅 영남 인들의, 대북 화해의 부정적인 불만이 그것이다. 또 내분으로 민족자멸을 한, 역사는 아주 많다. 支那人이 오랑캐라고 억지 멸시를 하던 흉노족은, 몽골족과 투르크족이, 혼합된 민족인데 그 용맹성이 뛰어나서, 중국의 진시황도 흉노족을 두려워하여 만리장성을 쌓았다고 한다.
기마와 궁술에 능하고 용맹했던 흉노족도 결국은 한무제의, (은)銀 (금)金, 보화를, 앞세워, 흉노지도층을. 매수해 분열하고.(제후)諸侯로 봉하며, 이간책을 써, 드디어, 기원 후 582년에, 동 돌궐과, 서돌궐로 분산씩이 는 데 성공하고, 약 50년간(603-680년) 동족상잔의 (쇠진)衰盡해진. 양대 흉노민족은, 지도력의 부재와, 동족간의 대립 (동족상잔)同族 相殘 등으로, 분열되고 (쇠약)衰弱해진 틈을 타, 한 무제는 (흉노)匈奴를 철저히 파괴했다. 한데, 흉노는 중국 춘추전국시대부터 진시황의 진나라 그리고 한나라 때까지 중국 북방에서 패권을 차지한 민족이다.
이 흉노라는 나라는 지금의 터키 국사교과서에 나오는 자신들의 선조들이 세운 첫번째 국가로 되어 있다. 또한 몽골의 국사교과서에도 흉노는 자신들의 선조가 세운 첫번째 국가로 되어 있다. (우리나라 국사교과서의 고조선과 같은 것이다)흉노는 투르크족과 몽골족이 혼합된 국가라고 보면 타당할 것 같다. 흉노이후 같은 지역에서 발생한 돌궐이나 몽골족은 다 한 종족이라고,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흉노와 중국의 관계는 대부분의 전쟁에서 흉노가 이겼기 때문에 때로는 흉노가 형이 되고 중국이 아우가 되거나 심지어는 임금과 신하의 나라가 되기까지 했다. 중국이 주도적으로 이기기 시작한 것은 한나라 무제 이후이고, 그 이전 까지는 진시황도 지고 한나라 유방도 졌다. 그래서 중국 황제의 공주를 보내기도 했고 계속 흉노에 중국이 조공을 받치던 관계이다. 흉노의 무력은 대적할 상대가 없었다.
하지만 한나라 때 한 무제가, 이간책을 써, 흉노가, 둘로, 갈라지는데 성공하면서 북 흉노와 남흉노로 분산 씩여 놓고, 무제가 이를 이용하여, 남흉노를 자기편으로 만들고, 북 흉노를 멀리 서쪽으로 쫓아 보냈다. 비단길을 개척한, 장건, 그리고 한나라 장군 곽거병, 위청이 이때 활동한 장수이다. 흉노가 중국보다 무력이 약해서 진 것이 아니라 흉노가 분단되었고 이틈 새를 무제가 이용한 것이라고 보면 타당하다. 흉노가 분단되지 않았다면 중국이 흉노를 이길 수 없었다고 본다. 한나라 무제는 우리나라 하고도 관련이 있다.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한사군을 설치한 사람이 바로 이 무제이다. (우리나라 사람에게는 무제가 원수이다)
한편 서쪽으로 밀려간 북흉노는 중앙아시아 초원 멀리 밀려갔다가, 훈족이라고 불리우는 한 일파가, 게르만족이 살던, 라인강 동부에서, 러시아까지의 지역을 모두 정복하고, 434년에 훈 제국은, 다뉴브 일대에서 정식으로 창건되었다. 훈제국의 영토는 동쪽의 아랄 해로부터 서쪽의 라인 강까지, 남쪽의 발칸 반도로부터 북쪽의 발트 해까지의 아시아와 유럽 두 대륙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유럽의 많은 나라의 국왕과 부족 추장들은 모두 훈 제국에 곡물을 바첬으며 신하를 자청했다. 기원 450년에 훈 제국에 아탈라(Attila 재위 434~453)대제는 군대를 거느리고 서로마에 까지 처들어갔으나, 지금의 프랑스 중부지역에서 로마와 게르만족 연합군과의 일전에서 무승부를 기록하고 그 기세가 수 그러 들었고. 지금의 헝가리는 이 훈족 후손과 또 다른 민족이 혼혈된 민족이 세운 국가이다.
흉노의 또다른 일파는 돌궐을 세우는데(돌궐과 고구려는 같은 시기에 있었던 국가이다. 서로간에 사신을 주고받던 사이이다) 이 돌궐중에 서쪽으로 이주한 사람들이 이슬람세계를 통일한 셀주르투르크이고, 거기서 더 서쪽으로 간 사람들이 북아프리카, 아라비아, 이집트, 터어키, 발칸반도, 러시아남부를 통치했던 오스만터어키 대제국을 건설했다.
서쪽으로 이주하지 않은 또다른 흉노의 일파는 그후 위그르라는 나라를 세우고 그 후손이 지금의 중국 신장성에 살고 있이다.
또 다른 흉노 일파는 칭기즈칸의 몽고족이다. 1206년에 몽골 각 부족이 칭기즈칸을 황제로 추대한 후부터 몽골은 통일된 국가가 되었으며 점차 밖으로 침략의 눈을 돌리기 시작하였다. 황하유역에 금나라를 멸하고, 몽골 장사꾼이 중앙아시아에서 450명이 몰살당한데, 분격한 칭기즈칸은 20만 대군을 이끌고 서방으로 진군하여 중앙아시아에 40만 군대를 무찌르고 잔인하게 복수, (점령)占領하고, 온 도시는 불사르고 댐을 터뜨려 도시민을 몰살 시켰다.
몽골군은 호라즘을 멸망시키고, 계속 서쪽으로 진군하여 돈 강유역의 러시아군을 격파했다. 이 4개의 왕국은 칭기즈칸의 네 아들이 각각 통치했다. 13세기 몽골은, 일본을 제외한, 아시아 전부와, 유럽의 동 반부, 영토를 거의 다 차지하였었다. 일본도 몽골군이 두 번 원 정 했으나, 섬나라의 특성상 ,상륙 직전 풍랑에 군함이 뒤 접혀 많은 군사가 수장되고 한 번도 상륙공격을 못하고 철수했다
'민족-선교민족의 뿌리와 사명'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조선상고사-제1편 총론 (0) | 2008.10.04 |
---|---|
[스크랩] 조선민족의 뿌리에 대한 권위적 해석 (0) | 2008.10.04 |
[스크랩] 배달민족의 9천년 일회일비 역사 (0) | 2008.10.04 |
[스크랩] 단군과 민족사관 (박성수) (0) | 2008.10.04 |
[스크랩] 한민족 시련과 영광의 역사 ‘아! 대한민국’ (0) | 2008.10.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