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선교민족의 뿌리와 사명

[스크랩] 배달민족의 9천년 일회일비 역사

수호천사1 2008. 10. 4. 17:04

배달민족의 9천년 일회일비 역사

 

 

환인천제)桓因天帝의, 밝은 빛은 온 우주를 비추고 큰 교화는 만물을 낳았도다. 이를 환국이라 하고, 그를 가르켜 환인 (천제)天帝라고 불렀다. 우리 (민족)民族)은 (환인천제)桓因天帝의 자손이다. 九千년 역사를 가진 (천손)天孫이다.

 

한데 기원전(BC 6992년(환인)桓因의 아들 (환웅)桓雄은 자신(自身)의 형상(形狀)인 (인간세상)人間世上의 뜻을 두고 천상(天上)으로 부터 천부인 三개를 받아 三천에 무리를 거느리고 태백산(백두산) 정상(頂上) 의 내려와 그 곳을 신시(神市)(서울)이라 부르고 단웅천왕 (檀雄天王)이 되어 곡식, 수명, 질병, 형벌, 선악 등 인간의 360여 가지을 주관하였다라고 하였다,

 

한데 배달국은 ‘밝달국이고, 밝다(응달 양달 하듯이 달은 땅을 의미함)의 ‘밝은 나라라는 뜻이다. 나라의 이름이 의미하듯이 밝은 나라인 배달국은 그 당시의 (문명)文明 선진국(先進國)으로 홍익인간(弘益人間), 이화세계(理化世界)의 이념으로 나라를 다스림으로 (백성)百姓들이 어질고 의로웠다고 한 다.

 

이 배달국을 다스리는 통치자를 ‘환웅’이라고 불렀으며 또는 ‘천자(天子)’이라고도 했다. 한데 군주(君主)를 천자(天子) 즉 하늘의 아들이라고 (호칭)呼稱한 시기(時期)가 환웅 때였다 고한다. 천손(天孫)의 임금이라는 뜻으로 天子라고 호칭했다고 한다. 한데 중화 족이 그들 왕을 天子라고 호칭한 것도 배달국에서 (군주)君主을 천자라고 호칭한데서 본떠 쓴말이라고 한다.

 

또 우리민족이 동이족이라고 불리었던 시기는 배달국 15대 자오지 환웅(치우천황) 때부터다. 치우(治尤는 상고시대(BC2,700년경)의 인물로서 이른 바 '천하융사지주 (天下戎事之主)'라고 평가되던 전설적 영웅이다.

 

치우천황은 상통천문(上通天文)하고. 하달지리(下達地理)하고, 지리능통(地理能通)하고 천문지리병법(天文地理兵法)하여, 백전백승(百戰百勝)하여, 탁 록 대전에서 쥐나인의 시조라고 하는 헌원을 격파 후 치우천황은 동쪽으로 진격하여 회대(淮垈)의 땅을 취하여 성읍으로 삼았으며 지금의 산동 성과 안휘, 강소 성까지 영토를 확장시켰고 수도를 청구로 옮겨 배달국 역사의 새 기원을 열었다.

 

그 후 치우천왕은 태백산 (백두산)에 신시(서울)를 청구(지금의 산둥반도 일대) 태산 아래로 옮기고 그의 치세를 열어 갔다. 그 강역이 북으로는 바이칼호 일대 남으로는 한반도와 서해안일대 (지금의 중국 해안 지역),서쪽으로는 몽골사막 ,동쪽으로는 태평양까지 남북 5만리. 동서.2만리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리하여 현재에도 치우천황의 능이 중국 산동 성에 남아 있는데 그 높이가 일곱 길이나 된다고 한다. 이후 진(秦), 한(漢) 시대에 이르기까지 동이족과 한족은 매년 10월에 치우천황의 (능)陵에 제사를 지내며 추앙했는데, 그때마다 붉은 기운이 비단처럼 솟아올라 사람들은 이것을 ‘치우기’라 불렀다. 그래서 치우의 이름이 ‘치우기(蚩尤旗)’라는 별[星]이름으로 남아있는 것이다. 중국 현지에 가면 지금도 치우가 팠던 우물이라든지, 진을 쳤던 자리 등에 대

 

한 이야기가 무용담처럼 전한다. 치우천황의 명성이 멀리까지 알려지자 이때부터 중국 한족들은 우리 동방 배달민족을 동이(東夷)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한데 (동이)東夷란 한자는 동역 (동)東 (자)字 오랑캐 <이>夷자다 동쪽오랑캐라고 욕한 것이다. 한데 우리배달민족을 동쪽오랑캐라고 (위증)僞證한 (자)者는 전한 (한 무제)때 사마천이라는 위증 (사가)史家와 후 한때의 문관·역사가 반고의 의한 역사 왜곡인 것이다.

 

반면 헌원은 화하족의 조상이 되고, 당시 동이족의 영웅이 였 던 치우의 자손 중 대다수가 (한족)韓族이되었지만 소수는 묘족이 되었다. 심지어 동남아시아의 몽족도 스스로 치우의 후손이라 주장하고 있으며, 멕시코에서도 ‘치우’라고 쓰인 인디언의 유물이 발견되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렇듯 (천하융사지주)天下戎事之主 전무후무했던 (영웅)英雄 치우천황의 배달국을 이은 나라가 단군이 통치하는 고조선으로 단군은 고조선의 통치자를 의미하는 말이다. 단군(檀君)은 ‘밝달 나무 단(檀), 임금 군(君)’으로 밝달 나라 임금, 즉 ‘배달나라 임금’이라는 뜻으로 배달국을 이어온 나라의 통치자란 의미가 있다. 고조선 역시 홍익인간 이화세계를 통치이념으로 하는 밝은 나라로서 당시의 문명선진국이었다.

 

그런데도. 중국 쥐나족에 (위선)僞善사가(史家) 사마천의 사기(史記)에는 치우는 염제(炎帝)의 후예로, 81명(또는 72명)의 형제가 있었으며, 여섯 개의 팔과 네 개의 눈을 가지고 있고 소의 뿔과 발굽을 가지고 있으며 머리는 구리와 쇠로 되어 있다. 돌과 모래로 밥을 지어 먹었다. 이렇듯이 史記에 기록해 놓은 것 시다. (중화족) 中華族의 (역사가)歷史家 사마천은 치우를 괴물로 묘사해 놓았고 치우가 탁록 전에서 헌원에 붙잡혀 죽근 후 그 부족은 일부가 헌원에 협조했고, 일부는 여족(黎族), 일부는 요족(瑤族)이 되었다고 했다.

 

이 지나족 출신의 사가(史家) 사마천이 역사(歷史) 왜곡과 위증(僞證) 의 역사가(歷史家)였음을 명명 백백(明明白白)하게 알 수 있었는데도 우리 (사대사관)事大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 (사학자)史學者들이 치우(蚩尤)는 먀오족의 전설 속의 조상 격인 남방 구려족(九黎族)의 족장이며 전쟁의 (광분자)狂奔者였다고했다. 또 그 부족이 한민족에 속했다고 설명하는 기록이 있으나, 이를 인정할만한 (가치관)價値觀이 없다는 것이다.

 

한데 배달민족 (한민족)의 후손들이 우리의 (조상)祖上을 저 중국이나 일본의 위선 (사가)史家들의 역사 위증에 동조하면서 그 위대했던 백전무패(百戰無敗)의 배달국 15대 자오지 환웅을 부인 하면서 천하융사지주라 평가되던 치우천황은 붉은 악마의 대표적인 표상이 되어 있어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또한 중국과 일본이 그들 민족(民族)의 시조(始祖)를 신격화(神格化) 성역화해서 우리 배달민족 천손(天孫)의 우월한 역사의 뿌리를 위증(僞證)하고. 그들 열등(劣等)한 역사의식 의서 벗어 나기위한 위증이며, 배달민족 (한민족 韓民族)의 시조(始祖)와 역사(歷史)를 위증(僞證)하고 왜곡하여 깍 까 내리려는 음모(陰謀)인데도, 지금까지도 우리 사학자(史學者)라는 자들도 그의 동조하고 놀아나는 것이 개탄스러울 뿐이다.

 

또(인장)印章. (옥새)玉璽의 기원은 고조선의 (건국사)建國史 환웅(桓雄)의 아버지 환인(桓因)으로부터 받았다고 하는 3개의 (신표)信表.단군(사)史에 의하면 환인은 아들 환웅이 항상 하늘 아래에 뜻을 두고 있어 천부인 3개를 주어 내려가서 다스리라고 한 것이 기원 이라고 한다. 한데 (사대사학자)事大史學者들은 인장의 기원은 중국으로부터 들어왔다고 주장한다.(사학자)史學者라기보다는 (사대주의)事大主義 신봉, (반민족자)反民族者들 같다.

2.

그리고 우리 민족(民族)의 기원(紀元)이 모세에 기적과도 겨를 수 있다. 구약성경 ,출애굽기에는 이집트에서 고통 받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어떻게 모세의 뒤를 따라 이집트를 탈출하여 가나안에 자신들에 나라를 세웟던가 뒤에는 애굽 (군)軍이 쫒고 앞에는 홍해가 가로막혔는데 모세에 지팡이로 홍해를 가르고 유태민족을 이끌고 가나안 땅의 안착 했다는 매우 우화(寓話)적으로 그려져 있다. 나의 (주관적)主觀的인 견해로는 구약성경, 신약성경을, 쓴 유태민족의 작가들은 천재성을 지닌 작가였다고 생각 된다. 사실 성경은천재성을 지닌 시(詩)다.

 

만약 우리 배달 천손(天孫) 중에 대물림을 해 성경을 쓴 유태민족. 처 럼 성위와 끊기가 있는 천재(天才) 작가가 있었다면 환웅(天子)환국 (桓國), 배달국, 고조선(古朝鮮) (고구려)高句麗로 이어지는 신화(神化)와 역사(歷史)를 신화적 역사로, 아담과, 이부, 모세의 기적, 예수의 십자가, 성경의 오묘함과 뷔페만큼 저작 할 수 있었다면 성경만 못지않은 오묘(奧妙)한 장시(長詩)가 탄생되었을 것을 조상의 얼과 저작 술이 미치지 못한 것 같다.

 

더욱이 우리 한반도내 진도에는 자연 현상적 매년 바다가 갈라지는 기적 같은 일이 있지 않은가, 사실 모세가 지팡이로 바다를 갈라 민족을 구원 했다는 구약성경의 시(詩)는 자연현상을 잘 이용 했다는 설이 된다.

3.

가야

 

가야(伽倻) 혹은 가락(駕洛), 가라(加羅), 가량(加良), 구야(狗耶)라고도 하며 삼국시대 대부분동안 한반도 남부에 위치해 있던 부족국가들의 연맹체였다. 동쪽으로 신라, 서쪽으로 백제를 접하고 있었으며 남쪽의 왜와도 교류했다. 가야의 철기(鐵器) 문화(文化)는 뛰어난 수준으로 평가된다. 가야의 건국(建國) 신화(神化)에는 “하나의 자줏빛 끈이 드리워져 6개의 둥근 알이 내려왔는데, 다섯은 각기 읍으로 돌아가고 하나만 이 성에 남았구나"라고 하였으니, 그 하나는 수로왕(首露王)이 되었고, 나머지 다섯은 각각 5가야의 주인이 되었다. 고 나와있다.

 

여기서 5가야란 대가야, 성산가야, 아라가야, 고령가야, 소가야이고, 수로왕이 남은 성이 가락국 즉 금관가야이다. 그러나 6가야에 대해서는 다른 전승도 많은데, (고려사략)(高麗史略)은 금관가야, 고령가야, 비화가야, 아라가야, 성산가야의 다섯 가야가 존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역사)歷史, 가야의 소국(小國)들은 2~3세기경에 김해부근에 있던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전기 가야 연맹을 구성했다.

 

그러나 가야 연맹을 고구려가 공격하면서 쇠락기에 들어섰다. 5~6세기경, 고령부근의 대가야를 중심으로 후기 가야 연맹이 구성되었다. 후기 가야 연맹은 신라와 백제사이에서 압박을 받으며 차례로 무너졌고, 562년 대가야가 신라에게 병합(倂合)되며 완전히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한데 일본과의 관계, 가야는 형성기에 일본 기타큐슈 지방의 왜와 관계가 가까웠다. 가야와 왜의 관계에 대해 일본의 수정주의(修正主義) 역사가들은 아직도 논쟁을 계속하고 있다. 일본서기에서는 가야(일본어로 미마나) 가 왜의 식민지(植民地)나 속국(屬國)으로 기록되어있다.

한국의 기록에는 이에 대한 언급이 없고 고고학적으로도 당시 가야는 철기문명을 바탕으로 다양한 마구와 판갑을 이용활용한 조직적인 군대를 운용한 선진 군사문화(軍司文化)를 이룬 반면 왜는 6세기 초까지 제련로를 만들지 못하였으며 무기도 단도와 얇은 양날창 등 초보적(初步的)으로 되어 조직적(組織的)인 군대(軍隊) 운용(運用)의 흔적이 없는 시기 였음으로 대부분의 학자는 이런 설을 부정(不正)하고 있다. 오늘날 대부분의 학자들은 가야와 왜는 가까운 관계이나 지배관계는 아니라고 인정하고 있다.

4.

그리고 역대 역사를 살펴보면, 우리배달민족이 중원대륙에서 큰 영토를 (지나인)支那人에게 다 빼앗기고 협소한 한반도 땅으로 내 쪼긴 원인은 옛 괴뢰에 땅 에 신라의 (박)朴, (석)昔, (김)金, 3개 성씨 집단 때문이다.

 

한데 (신라)新羅의 박, 석, 김, 3개 성씨 집단이 (혼합)混合해 대통을 이어온 역사를 살 펴 보면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김춘추)金春秋 602년~661년)은 신라의 제29대 (군주)君主 재위 654년~661년, 바로 이 김춘추가 당나라와 연합해 내분으로 쇠진해진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씩인 (한민족)韓民族(겨레)의 원수인 것이다.

 

그리고 신라건국의 초대 왕은 제 1대:-박혁거세부터인데, 박씨가 10대를 했다.

 

또 제 4 대;-(탈해왕)脫解王부터, (석)昔씨가 9대를 햇다

 

또 제13 대;-미추왕,(味鄒王부터, 김씨가 38대를 했다. 한데 신라가 멸망할 때 마지막왕인, 김경순 왕은, (고려)高麗를 (건국)建國한 (왕건태조)王建太祖에게 자진 합병하고, 고려의 진골 귀족이 되면서 신라는 그 막을 내렸다. 한데 아이러니한 것은 견휀의 아버지 아자개는 가족을 이끌고 제발로 걸어와 태조왕건의 상부 칭호를 받게 되었고 수10년 숙적 견휀의 일가도 제발로 거러와 왕건의 스승으로 진골귀족이 되었다.

 

견휀의 아들 딸 들도 태조 왕건에게 패망한 뒤 왕건의 의형제가 되어 고려의 진골귀족이 되었다 는 사실인 것이다. 한데 당나라 괴뢰정부 신라가, 쥐나 족 당나라와 야합해, 알타이 겨레 고구려를 멸망씩이고 고구려의 광대한 영토를, 당나라에게 다 넘겨준, 고토를 회복하기 위해, 당시 문화시중, 지금의 국무총리인데, (황제)皇帝 다음순위의 있던 이성계로 도원수를 삼아, 고토를 회복하라 했으나, 귀화 여진족출신의다, 명나라앞잡이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반역모의를 하여, 회군해서, 고려를 멸망씩이고

 

 

조선을 세우고, 고려 황제를 셋씩이나 참살 후 왕족과 왕손 12만 명을 거제도와 강화도 앞바다에서 배 밑을 구멍 뚫어 몰살씩이고, 그 피의도 부족했던지, 승을 바꾸고 숨어사는 평민 왕 씨 네도 찾아내 모조리 참살했으며, 고려 때에 벼슬을 많이 한 차씨 일가도 한마당에서 70여명을 목을 볐으며 그 친인척들도 큰 화를 입었다고 한다.

 

이렇게 고려는 영욕의 세월 475년을 뒤안길로 사라지고 이 난중의 고려인구 210여만 명이, 조선조를 연 조선 초기인구는 100여만 명 정도 되었다고 한다, 태조 왕건의 선행과는, 달리 귀화 여진족출신의 악마폭군 이성계는 같은 (한민족)韓民族이라면 차마 이렇게 까지야 악마 짓을 할 수 있었을까, 이성계는 여진족, 혹은 쥐나족이라고 한다. 그는 침투왕조 족속들이기에 한민족을 파리 죽이듯 무참히 짓밟고 죽인 것이다.

 

한데 우리겨레 고구려 대제국을, 쥐나족과 짜고 멸망씩이고 고구려 大영토를 쥐나족에 넘겨준 괴뢰국 신라 (김씨)金氏의 유래는 이렇다 (한무제) 漢武帝 때 투항해온 흉노족의 왕자에게 金氏 성을 하사한 데서 시작 된다. 왜 金氏 성을 주었을까 (한무제)漢武帝)가 물었다. 자네는 고향이 어디인가 알타이 산맥입니다. 알타이란 무슨 뜻인가 금이란 뜻입니다. 그렇다면 자네 성은 지금부터 金氏다. 그래서 흉노족의 왕자는 김일제가 된 것이다. 소위 신라의 배달민족의 배신왕, 문무왕의 비문에는 나의 조상은 김일제다~는 대목이 있다.

 

(신라김씨)新羅金氏의 조상 김알지가 김일제와 같은 흉노 계라는 뜻이다. 고고학자들은, 알지. 라는 말이 알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 아니고 알타이`란 말을 알지`라고 표기한 것으로 본다. 즉 신라김씨는 몽골고원의 서쪽에 있는 알타이 부근에서 살다가 이동해온 흉노 계 기마민족이란 것이다. 한데. 흉노 계에서 한 무제에게 항복, 융합(融合)된 민족배신 흉노족이라. 같은 알타이 민족계인 고구려와 백제를 支那人과 야합해 멸망 할 수 있었던 것으로 해석 된다.

 

고로 이(시기)時期에 배달민족은 대륙에서 영토를 모두 잃고 한반도내로 좁혀지는 불행에 시기였다.(592~667)중국(中國) (당)(唐)나라의 (무장)武將. 이름은 (열)烈, (정방)定方은 (자)字. (하북)河北 사람, (당)唐나라 (태종)太宗 때에 (이정)李靖)을 따라 (동돌궐)東突厥을 (정벌)征伐하였고, 657년에는 (서돌궐)西突厥을 쳐 (항복)降伏시킴으로써 중앙(中央) 아시아 여러 나라를 모두 (안서)(安西) (도호부)都護府에 (예속)隸屬시켰다. 660년 (백제)百濟 의자왕 20년) 3월 (라당)羅唐 (연합군)聯合軍의 대총관으로서

 

13만의 당군을 거느리고 산둥 반도(半島)에서 (황해)黃海를 건너 (신라군)新羅軍과 함께 (백제)百濟를 (협공)挾攻, (사비성)泗沸城을 (함락)陷落, 의자왕과 (태자)太子 (융)隆을 사로잡아 (당)唐나라로 송치하였다. 그 이듬해인 661년(고구려(高句麗) (보장왕)寶藏王 20년에는 라 당 (연합군)聯合軍이 고구려를 침공했으나 나당연합군은 대패하여 도망치고 말았다.

 

한데 634~679년 때, 연개소문이 세상을 뜨자 연남생, 연남건, 연남산, 연정토 넷이 권력 다툼을 크게 벌였다. 결국 연남생이 얼마 동안 대막리지에 오르게 되었으나, 권력 싸움에서 패배하였다. 이에 연남생은 복수심에 사로잡혀 거란과 당나라에게 군사를 요청한다. 결국 668년, 연남생은 당나라 군대를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한다. 연남생은 요동지역 성들의 각 약점들을 당나라 장수들에게 알려 요동을 무너뜨리는데 일조하였다. 또한 안시성을 무너뜨리려고 했으나, 이 공격이 실패하여 당나라 총사령관 이적과 함께 고구려 수도인 평양성을 공격한다.

 

이때 신라도 (전군)全軍의 총 동원 명령을 내리고 나당연합군을 결성하여 668년 (내분)內紛으로 (쇠진)衰盡해진 같은 한겨레의 배달민족의 나라 (고구려)高句麗 (대제국)大帝國을 멸망씩인 후, 드넓은 고구려영토, 최대영역인 북으로는 흑룡강 (아무르강)유역. 동으로는 연해주지역. 서부, 남으로는 남한강 유역. 서로는 난하유역 (하북지역과 요서지역을 양분하는 강)에 이르러 던 것이다.

 

광대한 고구려영토를, 당나라에게 다 넘겨주고, 한강 이남까지를 차지하는데 만족했다가. 그 후고구려 유민들의 힘을 빌려 당 軍을 몰아내고, 겨우 대동강이남 까지를 신라영토로 확장 할 수 있었다. 이 (요물)妖物 흉노족 거짓 뀌매낸 알, 신화. 김알지족속의, 김춘추를 만들어 내지 않았다면 신라가 민족을 배신하는 도발은 없었을 것이고.

 

광대 한 영토의 고구려는 수 당 軍의 100만 대군을 (괴멸)壞滅 한 여세처럼 배달민족의 (고구려)高句麗가 아시아에 최대 강대국으로 우뚝 서 있었을 것을, 신라라는 (요물국) 妖物國과김춘추의 김유신이라는 (괴인)怪人이 탄생해 우리 배달 한 겨레를. 비좁은 한반도에 몰아넣고. 약소민족이 되어 분단의 땅이 되고 만 것이다. (요괴인)妖怪人 (박)朴, (석)昔, (김)金,이 생겨난 신라를 생각하. 하늘이 내린 재앙이 아니었던가 생각 된다 한데 신라의 의한 우리 (한민족)韓民族의 재앙이 어디 이뿐이었던가

5.

782년 11월 고구려 유민 이정기가 중국대륙에 세웠던 제나라가 신라보다 넓은 영토를 중국에서 차지하고 당과 대립하면서 반세기 넘도록 천하쟁패를 다투었던 것이다. 제나라가 고구려의 뜻과 (혼)魂을 이은, 이납은 운주가 위치한 지역의 이름을 따 국호를 ‘(제)齊)’로 정하고 스스로 (왕위)王位에 올랐다. 우리(역사)歷史의 중요한 마침표'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이정기는 당나라 (시대)時代의 (실존인물)實存人物로 (병사)兵士들이 (추대)推戴한 최초의 절도사였다. 또 (동북지역)東北地域인 당시의 산둥성, 하남성, 강소성 등 15개 주를 차지하고 (독립왕국)獨立王國의 (기초)期初를 세웠다. 한데 (고구려유민)高句麗流民 이정기는 불행하게도 중원통일에 (원대)遠大한 꿈을 이루지 못하고 49세의 나이로 등의 종기가 (암)나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하였다. 비통함을 삼키며 고구려군은 퇴각하였다.

 

장안에 이 소식이 알려지자 당나라 덕종 이하 문무관원들은 기쁨에 겨워 3일 동안이나 잔치를 벌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정기의 아들 이납은 운주에서 국호를 제(齊)로 하여 황제 위에 올랐다. 그런데 이정기가 죽은 지 1년도 채 안되어 그의 사촌인 서주의 이유, 덕주의 이사진, 체주의 이장경이 당에 투항하였다. 그리하여 당나라는 운하를 다시 개통하였다.

 

하지만 대담하고 지혜로운 이납은 아버지가 못다 이룬 대업을 완수하기 위하여 다시 한번 운하를 끊고 변주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황하를 도강하기 위해 만들어둔 배 3천여 척이 때아닌 가을장마에 떠내려 가 버렸다. 또 한번 중원 정복의 꿈이 좌절된 것이다.

 

 

그 후 이납은 꿋꿋이 제국을 잘 지켜 나갔지만 불과 41세의 나이로 단명하였다. 이납에 아들 이사고는 제위에 오르자 부국강병책을 써 나라와 백성을 부유하게 했다. 그러나 그도 명이 짧았다. 겨우 14년간 제위에 있다가 38세의 젊은 나이에 죽었다. 뒤를 이사고의 이복 동생 이사도가 이었다. 이사도는 이납이 중국인 후처에게서 얻은 아들이었다.

 

그래서 그의 아내도 어머니가 정해 준 중국 여인 (위씨)魏氏였다. 그런데 그녀는 제국의 대소사에 관여하기 시작하더니 자신의 친척인 중국인들을 데려다 제국의 요직에 앉혔다. 이사도의 말년에는 정무와 군무까지 독단하다시피 하였다. 이사도는 당 헌종이 (제)齊국을 침략하기 위하여 준비한 (하음전운원)河陰轉運院이라는 150칸이나 되는 큰 창고의 200만 섬의 군량미를 불질러 버렸다. 그리고 낙양성을 기습하여 궁궐을 불살라 버렸다. 또한 하남 이곳 저곳에 산책을 만들어 당나라의 후방을 교란시키는 게릴라전도 감행하였다.

 

그러나 말년에 이르러 중국인들이 제국의 요직을 차지해 가면서 점차 나라의 기강과 고구려의 정신마저 서서히 병들어 갔다. 제국이 사양길로

 

접어들자 당황제 헌종은 선무, 위박, 의성, 무령, 횡해 등의 여러 절도사에게 제국 공격을명하였다. 또 당나라는 바다 건너 신라에게까지 원군을 요청하여 818년 7월, 당과 신라의 연합군이 제국을 총 공격하였다. 나당 연합군에 의해 고구려, 백제가 멸망한 이후 또 한번의 가슴아픈 동족상잔이 벌어진 것이다. 연합군 수십만이 사방에서 협공하니 한점 섬처럼 고립된 고구려인의 제국은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그러나 그 가 (세운)世運 濟나라는

 

그의 (후손)後孫인 이납, 이사고, 이사도로 이어지면서 4대 55년 동안 당을 압박하고 뒤흔들었다. 또 이사도는 당과의 전면전을 준비하고 구체적인 계획을 준비한 때였다. 중국의 정사로 꼽히는 '신·구당서' 자치통감' 등은 당나라는 제나라를 회유하기 위해 수시로 이정기와 그의 후손들에게 관직을 내렸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중국 청주박물관 부관장인 샤밍차이는 "제나라는 조세와 법률 등을 독자적으로 시행했던 산둥성 전체와 하북, 안휘성을 다스렸던 독립왕국이었다"고 말한다, 제나라와 신라, 나아가 해상왕 장보고와의 관계에도 주목한다.

 

신라인이 활동했던 밀주와 등주 일대는 제나라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제나라의 동의없이는 교역이 불가능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정기와 제나라가 왜 우리 역사책에 등장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필자는 '중국 안 넓은 지역을 다스렸던 고구려 유민'이라고 유일하게 기록한 육당 최남선의 '국민조선역사'에서 답을 찾는다.

 

즉 전통적인 시조 문학의 진흥과 계몽성을 드러낸 창가·신체시·기행수필 등을 썼고, 단군조선을 비롯한 민족의 상고사 연구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말기에 학병권유 등의 친일 행위를 하여 전반기에 보여주었던 민족주의자로서의 활동에 오점을 남겼던 者다.

 

한데 ,당의 제후국임을 자처했던 신라와. 여진족출신의 이성계정권과 그 후손이 중국을 부모국, 상국으로 섬기며 중국 제후국, 변방 노릇을 자처하며 (상국)上國 문화의만 고집하던 유교사상이 지배이념으로 자리 잡은 신라와 귀화 여진족 출신에 이성계 조선에서 (상전국)上典國인 (당)唐 (명)明의 감히 당과 패권을 두고 다퉜던 고구려 유민 계 국가인 제나라에 관해 함부로 필을 놀릴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출처 : MyLove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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