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선교민족의 뿌리와 사명

[스크랩] 단군과 민족사관 (박성수)

수호천사1 2008. 10. 4. 16:59

단군과 민족사관

박성수/현정회 부이사장·한국정신문화연구원 명예교수


단기4334년(서기 2001년) 9월28일(금)사단법인 현정회에서 주최한 학술심포지엄에서 발표한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박성수명예교수의 논문을 발췌하여 게재한다.(편집자 주)

'단군과 민족사관'이란 주제는 그 외연이 너무 넓어서 막연하다는 느낌을 준다. 그래서 그 구체적인 내용을 먼저 말해 둘 필요가 있다. 이 글에서 필지가 다루고자 하는 문제는 이른바 반도사관이라는 고질화된 우리의 역사인식에 대한 비판이다.

반도사관은 일제식민사관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의 사대주의 역사관과도 밀접히 연관되어 있어 그 잔재가 쉽사리 청산되지 않고 오늘의 한국학 특히 한국사학 속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그 때문에 일반인의 뇌리에도 깊이 틀어박혀 고정관념화 되고 있는 실정이다. 반도사관이란  단지 우리들의 대륙 강역에 대한 기억 상실 뿐만 아니라 일본열도 강역에 대한 망각까지를 모두 포함하는 역사적 건망증을  두고 말하는 것이다.

일제강점기의 민족사학자들에게 공통된 역사인식은 고조선과 고구려의 대륙을 잊지 말아야 하며 일본이란 별수 없이 우리 문화의 강보에서 자라난 아이란 사실을 잊지 말아라는 것이었다.

그 일부는 우리 학계에서는 끈질기게 이 같은 주장을 금기시하고 있다. 먼저 단재 신채호의 주장을 들어보자.

2. 신채호의 '조선사'

단재 신채호(申采浩 1890∼1936) 는 벌써 20대 젊은 나이에 쓴 '讀史新論' 에서 당시의 각종 역사교과서를 비판하는 가운데 일반이 단군을 마치 구약성서의 창세기 읽듯이 반신반의하게 된 것은 단군조선이 멸망한 뒤 남북 두 갈래로 갈라지는데 고구려 등 북쪽 갈래의 기록이 없어졌기 때문이라 말하고 있다.

아! 우리나라를 열으신 이가 단군이 아닌가. 그러나 지금 우리들이 단군 시대를 우러러 생각할 때 너무 멀고 아득하기 때문에 반신반의하기를 마치 구약성서의 창세기를 읽는 것과 다름이 없으니 아! 단군시대가 과연 너무나 오래 되고 불가사의한 시대이겠는가.

단군이 나라를   세운지 2천여 년에 왕조가 두 갈래로 가라졌으니 하나는 東夫餘요 다른 하나는 北夫余니 북부여가 곧 高句麗이다. 단군이 고구려 왕조의 직계 혈통의 조상인 까닭에 고구려가 남긴 글과 역사에 단군에 관한 사실들이 상세하게 실려 있었을 것이다. 아! 그러나 문서 창공하 전고(典故)들이 적의 병화에 모두 타 없어져버려 우리 역사의 첫 장이 이와 같이 텅 비어 버렸다.  

신채호의 '독사신문'

신채호는 또 '독사신문' 에서 우리민족의  祖山인 太白山이 본시 백두산인데 어느새 묘향산으로 바뀌어 버렸는데 이는 우리 스스로가 저지른 사대주의적 역사 왜곡이라 비판하였다.

살펴보건대 우리나라 역사가들이 단군이 일어난 곳을  영변의 묘향산이라 하며 국호를 정하고 정치를 베푼  곳을  평양 왕건성이라 하나 이것은 후대의 역사가들이 단지 古記에서 말하는 "신인이 태백산 박달나무 아래에 내려 왔다"는 한 구절을 근거로 태백산을 서북 일대에서 두루 찾아다니다가 묘향산에 이르러 향나무가 울창한 것을 보고 이것을 억지로 태백산이라 단정하고 장백산의 옛 이름이 태백산임을 몰랐다.

단재에 따르면 이처럼 우리조선사는 남이 망친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손에 의해 망가졌다는 것이며 우리 역사 강역이 멋대로 대륙에서 한반도로 축소되었다는 것이다.

우리조선사는 내란이나 외침보다도 조선사를 저작한 사람들의 손에 의하여 더 많이 없어져 버린 것이다. 기왕의 조선의 역사가들은 매양 그가 지은 역사를  자신의 목적에 희생시켜 도깨비도 하지 못하는 땅 옮기기 재주를 부렸다. 아사달을 떠다가 황해도 구월산에 갖다 놓음으로서 조선의 강역을  압록강 이남에 국한하여 더 크지도 말고 더 작지도 말아라는  식의 역사를 만들었다.

-신채호의 조선사<총론>-

신채호는 그의 '조선사' 총론에서 우리의 지금 국토가 문약에 빠지다 보니 옛날에 국토가 넓고 무강했던 때를 잊고 역사를  기술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임금을 높이고 낮추는 춘추필법 하에서 자라난 후대 사람들이 그러한 마음을 갖고  삼국시대의 풍속을 말하며 문약에 빠지고 소국에 살기를 편안하게 여기는 조선시대 사람들이 자신의 주관대로 상고의 지리를 그려내므로 단군이나 부여나 삼국이나 고려, 조선으로 이어지는 5천년 역사가 한 도가니에 부어낸 것과 같이 면적이 커지고 작아진 것이 전혀 없다.

이렇게 우리 역사가 우리 손에 의해 축소되고 국토를 상실하게 된 것은 첫째 우리의 사서 때문이다. 본시 '神誌秘史'  '三韓古記' '海東古記' 三國史' 등이 있었는데 다 없어지고 지금 단지 삼국사기만 남았다.

조선의 역사 기록은 神誌에서 시작되었으니 신지는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수두임금인 단군의 가장 높은 벼슬 이름이니, 역대의 신지들이 매년 10월 수두대제 때 노래한 것을 후세에 이두문으로 기록해둔 것이 神誌秘史 혹은 海東秘錄이다.

<주> 조선 초기인 세조, 예종 그리고 성종 (1455-1494) 년간에 세 차레 전국에 수서령을 내린 일이 있는데 서목을 보면 '古朝鮮秘詞' '大辯說' '朝代記' '三聖記' '通天錄' '誌公記' '表訓天詞' '三聖密記' '道證記' '地華錄' 등 열 책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예종 1년 5월의 두 번째 수서령에서는  위의 10책 가운데 '지공기' '표훈천사' '삼성밀기' '도증기' '지화록' 등 다섯 책만 만들어 그해 연말까지 어김없이 바치라고 명하고 만일 숨진자가 있으면 참형에 처한다고 위협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이상의 고조선비기 다섯 책을 모두 수거하지 못한 것을 알수 있다. 단재가 말한 신지비사 등의 고기는 조선 초 수서령의 대상이 된 비기들일 것이다.

3. 백암 박은식의 역사가

백암 박은식(朴殷植 1859-1926)은 그의 '역사가 (歷史歌)에서 "압록강을 건너 만주 땅을 밟고 보니 고국산천이 한반도가 아니라 바로 우리 땅이더라"고 술회하면서 단군조선에서부터 고구려와 발해를 거쳐 금 나라에 이르기까지의 역사가 모두 남의 역사가 아니라 우리 민족의 역사라 강조하고 있다.

어화! 우리 청년들아 / 고국산천 이 땅이라.
북 부여의 단군자손 / 2천여년 형국亨國 일세
동명성왕 북래하여 / 고구려를 건설하고
환도 고성 찾아보니 / 광개토왕 비문이라
몽천부를 돌아보니 / 발해태조 상럽일세
우리 동족 금 태조는 / 백두산에 터를 닦아
2천 5백 정병으로 / 호시 천하 굉장하다.
우리 오늘 건너 온 일 / 상제 명령 아니신가.
아무쪼록 정신차려 / 조상 역사 계승하세.

- 박은식의 [歷史歌]-

박은식은 또 유명한 그의 '몽배금태조'에서 대륙 땅을 잃어버리고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조상들 그리고 스스로 小中華라 하며 자랑하다가 나라가 망한 것을 통탄하고 있다.

무릇 백두산은 단군 대황조께서 발상하신 땅이요 북으로 흑룡강에 이르는 광활한 대륙은 모두 우리 조상이 개척하신 땅이다. 어찌하여 자손된 우리들이 조상의 피와땀을 이어가지 못하고 압록강 이남의 한 모퉁이를 차지하는 것만으로 만족하는가. 이로써 몰 때 천년 이래에 우리 민족은 모두 조선의 죄인이요 우리 역사는 타국의 노적(奴籍)이다. 그 조선의 죄인된 것은 반성하지 아니하고 스스로 동방예의 지국이라 자랑하며 타국의 노예가 된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小中華라하였다.             

- 박은식의 '夢拜金太祖'-

일제 강점기의 역사가인 호암 문일평(文一平 1888-1939)도 그의 '조선역사 강좌'에서 민족사의 강역을 한반도와 만주대륙이라 하면서 두 지역은 지리적으로나 역사적으로 분리될 수 없는 지역이라 하였다.

옛날 조선은 백두산 남쪽, 압록강 동쪽인 한반도뿐이 아니라 저 만주 대륙까지 합하여 칭한 것이기 때문에 압록강은 대동강이나 한강과 같은 국내의 강이었다. 그럼으로 조선역사의 출발점을 반도 안에서 찾으려고 함은 옳지 못한 것이다. 반도와 만주 대륙은 지리적으로나 역사적으로 나눌 수 없는 것이다.

- 문일평의 [조선역사 강좌]-

문일평은 또 우리 민족의 구성에 대해서도 단군의 직손이 주류를 이루어 주변의 여러 부족이 지류로 합류한 것이라 하였고 민족문화의 원류는 단군을 모시고 제사를 들이는 神敎였는데 그것이 외래 종교인 불교속에 살아 남았다고 주장하였다.

조선인은 단군의 직손이 주체가 되어 주변 제족을 동화하여 오늘날과 같이 된 것이다. 조선문화의 원류를 고찰할 때 단군으로부터 출발한 원시적 조선문화가 제사祭祀 중심의 신교神敎였다. 그러더니 인도계의 문화가 유입됨에 따라 일부는 불교에 융합되어 불교의식으로 변형되었다. 가령 10월 대제가 팔관회로 변한 것과 같다. 그러나 불교가 들어온 뒤에도 신교가 갑자기 세력을 잃은 것은 아니다.

- 문일평의 [조선역사강좌]-

4. 정인보의 '5천년간 조선의 얼'

위당 정인보(鄭寅普 1892-1950)는 단재 신체호의 순국을 애도하면서 '5천년간 조선의 얼' (일명 '조선사 연구')을 썼는데 거기서 그는 한국학의 잘못을 날카롭게 비판하였다. 정인보는 1930년대의 소위 조선학을 진정한 국학이 아니라 일본학에 지나지 않다고 비판하였다.

오호라. 수 백년간 조선의 역사는 실로 "없는 것을 사실처럼 얽어서 만든" 허虛와 "있는 사실을 거짓으로 꾸민" 가(假)로서 연출한 자취라 할 것이다. 조선왕조 수 백년간의 학문은 오직 유학이 하나 있을 뿐이요 그 중에도 특히 주자학을 신봉하였다. 그런데 근래에 와서는 영국이나 프랑스의 학자들이 주장하는 언설(言說) 즉 그들의 말을 '말씀'으로 알고 그것을 그대로 옮기는데 급급하게 되었다.

영국의 모 학자, 프랑스의 모 대가, 독일의 모 박사, 러시아의 모 동무의 말씀(언설)이라면 그것으로 그만이다. 더 이상 따질 것이 없다. 우리의 '마음'이야 어찌되었건 저들의 '말씀'이 세계적인 대학문(大學文)이니 맹종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실심(實心)은 죽고 남들의 타설(他設)만 살아 남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위당이 일본학이라 비판한 바로 1930년대의 진단사학이 오늘의 한국학에 이어져서 우리의 주장이 없고 남의 말씀과 남의 언설만 있는 사학, 자기 학설은 없고 타설만 있는 역사학이 팽배하고 있는 것이다. 위당에 따르면 이 같은 학문상 맹종은 조선시대 주자학의 버릇이라는 것이다.

위당은 이상의 글에서 종래의 국학이 갖는 두 가지 큰 결함을 지적하고 있다. 즉 그 하나는 조선 유학의 고질인 事大主義요 다른 하나는 개화기 이후 西學을 맹종하는 또 하나의 식민주의 조선학의 추태라는 것이다. 1930년대의 이른바 朝鮮學이 지니고 있던 植民地的 性格을 누구보다도 위당이 알고 있던 터이다. 우리들의 '마음' 즉, 실심에 기초를 둔 학문이어야 實學이요 조선학(국학)이다. 남의 마음 즉 虛心에 근거한 외국학을 조선학이라 할 수 없다. 그것은 국학이 아니라 외국학이며 實心이 아닌 실로 失心한 조선의 일본학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그것은 일제 식민 사학과 너무나 닮은 사이비 조선학이라는 것이었다. 위당이 말하는 국학은 우리 민족의 실심에 기초한 실학 實學을 말하는 것이지 남의 마음에 맞도록 꾸민 학문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름만의 국사와 국학이 어찌 그것을 국학이라 할 수 있단 말인가. 단지 한국인이 한국어로 썼다고 해서 국사요 국학이라 할 수 없듯이 이름만의 국학은 국학이라 할 수 없는 것이다. 일제 말기의 한국인 학자로서 일본말로 글을 쓴 사람 (예컨대 백남운, 인정식 등의 사회주의자와 손진태, 홍이섭등 민족주의자)이 많았고 그런 사람이 해방 후 떳떳하게 신민족주의자니 사회주의자를 자처하고 나섰고 심지어는 위당을 계승한다고 공언한 바 있었다.

5. 북애의 '규원사화'

사대주의와 민족사관을 비판한 것은 일제강점기에 비롯된 것이 아니다.이미 조선 후기의 실학자들에 의해 강하게 주창되고 있었다. 그 몇 가지 사례를 등어보기로 하자. 성호 이익(李瀷 1681∼1763) 은 그의 '동국내지'에서 이런 말을 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천하에 가장 약한 나라이다. 지역이 편벽하고 백성이 가난한 것만이 아니라 문교가 성행하여 모두가 예의의 나라라 하나 무비(武備)가 허술한 것이 더 큰 이유이다. 수성(守成)을 즐겁게 여기고 정토(征討)를 싫어하고 사대(事大)에 부지런하고 천명(天命)을 두려워 하여 상하 3천년 사이에 오직 이를 규범으로 삼았을 뿐이다.

다산 정약용 정(丁若鏞 1762∼1836)도 그의 술지(術志)에서 "차라리 단군시대가 그립구나"라고 하면서 우리나라의 사대사상을 비판하고 있다.

다산과 동시대인으로 추정되는 송규빈(宋奎斌)은  그의 '風泉遺響'에서 외치기를

한줄기 강물, 압록강을 건너가기만 하면 이미 우리 강토가 아니다. 슬프다 우리조상이 살던 옛 강토를 남의 손에 넘겨준지 어언 1천년이니 그 해독이 날로 심하여 슬픔을 금할 길이 없다.

송규빈은 조선 후기 무관으로 강력한 북벌론을 제기했던 인물인데 그의 주장의 근거는 고구려 고토 회복론이었다. 송규빈의 주장은 '揆園史話'의 저자 北崖와 거의 동시대였고 그의 생각 또한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북애는 고려 때 이명의 '진역유기'와 조선초 수서령에 걸린 '고조선 비기' '조대기'를 참고하였다고 하면서 우리나라 역사와 중국의 역사를 혼동한 사대주의적 유교사관을 통렬히 비난하면서 '중국은 중국이요 한국은 한국이다." 고 주장하였다.

그에 따르면 유학에 빠져 우리나라 고유의 신앙과 학문을 잃은 선비들이 오랫동안 한적(漢籍) 에 넋을 잃어 주(周)나라를 높이고 사대주의만 옳은 것이라 하니, '먼저 근본을 세울 줄  몰랐으며 내 나라를 빛낼 줄 몰랐다'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 민족사의 자주성을 강조한 북애는, 우리의 민족성이 처음부터 문약했던 것이 아니라 무강했었다고 강조하였다. 즉 "태고에 우리 조선이 무강(武强)으로써 세상에 용명을 떨쳤으므로 중국인들이 이를 풍문에 듣고 두려워하였다.

그러기에 오제오제 때 황제와 싸운 치우천황이 중원을 유린하였고 백제가 요서(遼西)를, 신라가 요동과 일본 땅을 정벌하여 적관(赤關)의 맹약(盟約)을 맺었던 것이다.

북애에 따르면 우리 민족의 강역은 지금처럼 한반도가 아니라 압록강 이북의 백두산이 사방으로 뻗고 뻗은 골짜기와 강물이 흐르는 벌판이 우리의 강역이었던 것이다.

그는 또 발해와 삼국시대를 고비로 우리민족의 전성시대는 가고, 발해가 망하여 대륙땅을 잃게되자  사방의 적으로부터 공격을 받는 약소국이 되어 마침내는 임진왜란 병자호란과 같은 큰 국난을 당하게 되었다고 탄식하였다.

그리고 이처럼 대륙국가에서 반도국가로 축소된 우리 나라는 숙명적으로 '다시 강한 이웃 나라에 침략당할 것이니 그 이유는 첫째, 지리(地利)을 얻지 못하였으며 , 둘째, 인화(人和)가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셋째, 민족의 본성(本性)을 잃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북애는 절망하지 않았다. 한 가닥 희망이 있으나 그것은

"국가의 흥망과 번복이 무상하니 지금 조선이 불행한 것은 장차 행복해질 실마리가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이 무렵 청 나라에서는 건륭제(乾隆帝)(1736∼1795)가 '만주원류고(滿州源流考)'(1778)라는 역사서를 편찬 간행하였다. 청은  우리가 오랫동안 야만시하던 여진족의 나라이고 중원을 통일한 대국이었다. 그들이 중원의 중화민족을 통치하게 되자 자기 나름의 만주민족사관을  정립하기 위하여 역사를 재구성하였다.

그러나 청은 당초 국호를 후금(後金)이라 했듯이 금 나라의 후신이었다. 따라서 금사(金史)(9대 120년 1115∼1234)가 저들 역사의 상한선인데도 불구하고 그 이전의 역사를  모조리 자기네 역사에 편입시키고 말았다.

즉 숙신(肅愼)(고조선)·부여(夫餘)·읍루·삼한(三韓)·물길(勿吉)·백제(百濟)·신라(新羅)·말갈(靺鞨)·발해(渤海)등의 역사를 모조리 자기네 만주사 속에 포함시켰던 것이다.

사실 후금의 건국자는 신라 왕족(마의태자)의 후예였기 때문에 만주사는 오히려 한국사에 편입되어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금에서 후금 즉 청으로 이어지는 역사는 우리 역사서에서 갈라져 나간 지맥인 것이다.

그러나 18세기 후반에 편찬된 '만주원류고'에서는 반대로 부여 읍루 삼한 백제 신라 말갈 발해의 역사가 모두 만주족의 역사로 편입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 민족사의 중심부가  송두리째 만주사로 도둑질 당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만주원류고'는 청왕조가 백두산 동쪽에서 발상하였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백두산을 비롯한 여러 명산들을 성역화하고 역대 청황제가 친히 순수(巡狩)하거나 멀리서 시를 지으면서 망제(望祭)를 지내고 있는 것이다.

만일 청이 망하지 않았더라면 우리 민족의 성산 백두산은 영영 그들에게 빼앗기고 우리 역사는 모조리 만주사에 빼앗기고 말았을 것이다.

6. 대야발의 '단기고사'

발해 건국자 대조영(大祚榮?∼719)의 동생인 대야발(大野勃)이 저술했다는 '단기고사'가 있다. 이 책의 서문에 나오는 <역대 통계표>를 보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한국사의 계도와는 사뭇 다르게 되어 있다. 즉 단군조선이 망한 뒤 민족사는 세 갈래로 갈라져서 1)조선 2)청 3)몽골로 이어져 있는 것이다.

우리민족은 단군조선인 백두산과 흑룡강 사이의 만주땅에서 남하하여 한반도에 정착한 갈래로서 그 일부는 일본열도까지 건너갔다. 그런데 대륙에서 남하하지 않고 만주땅에 그대로 주저 앉은 또 하나의 갈래가 있는데 말갈, 여진, 야인 등 고구려 계통의 민족이다. 그 밖에도 제3의 갈래가 이었으니 몽골족 이었다. 이렇게 보면 종래의 우리 역사는 너무나 그 시야가 좁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단재 신채호가 말하 것처럼 쥐구멍에서 우리 역사를 내다보는 격이었다.

다시 '단기고사' 서문을 보기로 하자, <배달민족이 중국을 통치한 기사(記事)>가 나온다.

대륙에 남은 고구려 계통의 우리 민족이 그 곳에다 우리보다 훨씬 큰 나라를 세워 중국을 지배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대륙에 남은 여러 계열의 민족도 우리와 뿌리를 같이 하는 동족이므로 그들이 세운 나라를 당연히 우리 민족사속에 편입 시켜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발해는 물론 신라의 마의태자 후손이 세운 금 그리고 후금 (청나라) 역사가 우리 역사속에서 설명되어야 하는 것이다. 요순시대의 순 임금부터가 동이인이 아니던가. 아니 그보다 이전의 중국 상고사가 우리 동이족의  역사가 아니던가.

지금 고구려와 발해만 우리 역사로 치부하지 그 뒤의 금 나라와 청 나라 그리고 몽고의 역사를 우리 민족사의 주변이라 기술하는 역사가가 없다. 두말 할 것도 없이 고려, 조선 1천년간의 얼빠진 사대주의 역사 그리고 36년간의 일제강점기가 우리 역사가들을 바보로 만든 것이다. 우리는 지금 또다시 새로운 사대주의 역사관 시대에 살고 있다. 올바른 민족사관을 국수주의라고 외면하는 문화식민주의에 시대에살고 있는 것이다.

7. 맺는 말

현재 학생들 배우고 있는 우리나라 역사교과서에는 민족사의 줄거리가 단 한줄기로 그려져 있다. 그 뿐만 아니다. 단군을 신화라고 하여 단군조선을 우리 역사에서 떼어 내고 없애다 보니까 우리 역사의 시작이 아주 모호하게 흐려지고 있는 것이다. 고려 태조 왕건은 고구려와 발해가 가지고 있던 광활한 대륙 영토를 저버린 인물인데 남북이 함께 그를 통일군주로 찬양하고 있는 것이다.

태조 왕건은 요즘 한창 TV드라마로 인기를 끌고 있는데 두려운 것은 어린학생들까지 그를 영웅이라 배우고 있다는 것이다. 태조 왕건은 대륙 강역을 상실하여 우리민족을 약소민족으로 전락시킨 민족사적 범죄자인 것이다.

5백년 후 위화도회군으로 요동정벌을 포기한 이성계와 더불어 왕건은 규탄 당해야 마땅한 인물인 것이다. 그런데도 일개 3류 작가에 이해 역사가 왜곡되어 있으니 이것을 어떻게 해야 하는 가. 단재 신채호가 말했듯이 왕건의 삼한통일은 반변적(半邊的) 통일에 지나지 않았다. 잃어버린 우리 강토의 반변은  왕건과 이성계의 권력욕의 희생물이 되어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 땅이 되어 버렸다.

하루빨리 반도사관의 쇠사슬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우리 가슴속에 자리잡은 내적(內賊)을 정토(征討)해야 한다. 최근의 일본역사교과서 사건에서 들어 났듯이 우리는 지금 일제식민사관의 망령과 싸우고 있으며 거기다 더해서 중화사관의 망령과 대적하고 있다. 우리는 밖으로 이 두 외적(外敵)을 물리치려면 우리들 가슴속에 병들고 있는 사대주의 역사관을 가차없이 도려내야 할 것이다.

출처 : MyLove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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