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의 위대한 세기'를 연 윌리엄 케리
솔선수범으로 전세계 교회에 복음전파 사명 불지펴
글: 이상규 교수 / 고신대학교 역사신학, 신학박사
윌리엄 케리(William Carey, 1761-1834)를 가리켜 흔히 “근대선교의 아버지”라고 부른다. 그는 어떤 인물이었으며, 어떻게 그가 근대선교의 문을 열게 되었을까? 비록 그가 근대 선교운동의 물꼬를 튼 인물로 간주되지만 그 이전에도 선교를 위한 노력이 없지 않았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유명한 찬송가 작가인 아이작 왓츠(Isaac Watts, 1674-1748)였다. 그는 1719년 “햇빛을 받는 곳마다 주 예수 왕이 되시고”(Jesus shall reign where'er the Sun, 한국 통일찬송가 52장)라는 선교적 찬송을 썼는데, 이 노래는 그 후 선교의 찬송이 되었다. 다른 한 사람은 로버트 밀러(Robert Millar of Paisley)였다. 그는 1723년 <기독교의 복음전파와 이교도 정복사>(A History of the Propagation of Christianity and the Overthrow of Paganism)를 출판했는데 그는 이 책에서 이교도를 회심시키는데 가장 중요한 방법은 중보기도라고 주장하고 중보기도를 호소하였다. 그의 호소로 약 20년 후 영국에서는 많은 기도모임이 일어났고 하나님을 모르는 이들의 회심을 위해 기도하게 된다.
윌리엄 케리 이전에도 선교를 강조한 이들이 있었으나, 케리 이후 비로소 영어권 세계의 선교사업은 본격화되었다. 즉 이방선교를 주창하는 윌리엄 케리의 1792년의 책의 발간과 그 결과로 케터링(Kettering)에서 1792년 10월 창립된 침례교선교회(BMS)는 영국과 그 이후 기독교 역사에 선교적 각성을 준 신기원을 이룬다. 이런 점에서 그를 주목하게 된 것이다.
윌리엄 케리는 1761년 영국 노스햄톤(Northampton)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직조공으로 일하는 노동자였다. 겨우 기본교육을 마친 그는 16세가 되던 1777년 구두방 도제로 들어가 28세가 되기까지 구두 수선공으로 일했다. 그러나 18세 때 회심의 경험을 하고, 비국교도 침례교에서 신앙생활을 했다. 학문에의 길에 관심을 가졌던 그는 독학으로 헬라어, 라틴어, 히브리어 등 고전어와 이태리어, 프랑스어, 화란어 등 현대 유럽언어와 후일에는 인도어 벵갈어 등 동양언어를 독학으로 습득하였다.
또 여러 가지 책을 통해 학식을 넓혀 갔다. 1785년에는 목사안수를 받고 작은 침례교회에서 사역을 시작했다. 그는 후일 레이세스터(Leicester)라는 비교적 큰 교회로 부임해 갈 때까지 가족들을 부양하기 위해 직업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쿡(David Cook, 1728-1779) 선장의 항해 기록인 <쿡선장의 마지막 항해>(Captain Cook's Last Voyages), 가스리(Guthrie)의 「지리학 입문」(Georgraphical Grammer), 요나단 에드워드가 편집한 <브레이너드의 생애와 일기>(Life and Diary of David Brainerd) 등을 읽고 세계선교에 대한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고, 또 성경연구를 통해 교회의 선교의 책임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해외선교는 교회의 가장 중요한 의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 결과 1792년에는 <이방인의 개종을 위하여 우리들이 사용해야 할 도구에 관한 연구>(An Enquiry Into the Obligation of Christians to Use Means for the Conversion of the Heathen)라는 87페이지에 달하는 소책자를 출판하였다.
당시 교회는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선교에 대한 관심을 갖지 못했다. 첫째는 선교명령, 곧, 지상명령을 오직 사도들에게 만 명하신 것으로 이해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오늘의 우리와는 무관한 것으로 이해한 점이었고, 둘째는 칼빈주의 예정론에 대한 오해 때문이었다. 즉 하나님이 구원하시기로 예정된 사람은 결국에는 구원을 얻게 됨으로 우리가 전도하고 선교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케리는 선교는 우리 개인과 교회에 주어진 가장 중요한 과제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이를 위하여 위의 소책자를 출판하게 된 것이다. 이 책이 선교에 끼친 영향은 흔히 루터의 95개조의 항의문이 교회개혁에 끼친 영향과 비교되곤 한다. 이 책에서 케리는 해외선교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먼 곳으로 선교사를 보낼 필요가 없다는 당시 주장의 오류를 설득력 있는 필치로, 그리고 논리적으로 반박하였다.
물론 선교에의 호소는 윌리엄 케리가 유일한 인물이었던 것은 아니다. 요한 웨슬레의 동료였던 토마스 코크(Dr Thomas Coke)는 윌리엄 케리보다 9년 앞선 1783년<이방인을 위한 선교단체조직 계획>(Plan for the Society for the Establishment of Missions Among the Heathens)이라는 문서를 발표한 일이 있고, 이로부터 3년 후인 1786년에는 메도디스트 선교기구조직을 호소한바 있다. 그리고 1786년 성탄절과 1787년 2월 사이에 최초의 감리교 선교사들을 서부인도에 파송한 바 있다. 그러나 이들의 노력은 윌리엄 케리의 겨우 만큼 광범위한 영향을 주지 못했다.
케리의 책은 미국의 대학생들에게도 영향을 주어 건초더미 기도회(Haystack Prayer Meeting)로 알려진 기도모임을 통해 미국에서의 최초의 수단(means), 곧 선교단체를 조직하게 했다.
윌리엄 케리는 1792년 5월 30일 노팅햄에서 모인 침례교 교역자 회의에서 이사야 54장 2-3절을 본문으로 “당신의 장막터를 넓히소서”라는 제목으로 대단한 열정으로 설교하면서 선교를 강조하였으나 교회 지도자들의 반응은 냉담하였다. 이 때 케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위대한 결과를 기대하고, 하나님을 위해서 위대한 일을 시도하라”(Expect great things from God, attempt great things for God)는 말로 설교를 끝냈다.
이것은 그의 선교활동의 확신이었다. 이로부터 4개월 뒤 케리의 확신에 찬 저술과 설교, 그리고 활동은 지지자들을 얻게 되었고, 1792년 10월에는 키터링(Kettering)에서 침례교선교회(BMS, Baptist Missionary Society)를 조직하기에 이르렀다. 케리의 후원자이자 이 선교회 설립 회원이었던 앤드류 풀러(Andrew Fuller)가 선교회의 초대 총무가 되었고, 의사인 존 토마스(John Thomas)가 첫 선교사로 파송되었다.
케리 자신도 선교사로 가기로 작정하였으나 심한 반대에 부딪쳤다. 그의 교회도 반대했고, 그의 아버지는 ‘미친놈’이라고 책망하였다. 그의 아내는 선교사로 가는 일을 필사적으로 반대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케리는 1793년 6월 13일 아내와 4 자녀 그리고 두 사람의 동료와 함께 인도를 출발하였는데 이것이 현대선교의 중요한 사건이 되었다.
1793년 11월 11일 인도 후글리(Hooghly)에 도착한 케리는 이때부터 약 40년간 이곳에서 사역하였다. 케리에게는 아내의 질병, 아들의 죽음 등 가정적인 어려움이 적지 않았으나 말다(Malda), 벵갈 등지를 거쳐 칼컷타에서 16마일 떨어진 포루투갈령(식민지) 세람포(Serampore)로 가서 정착하였는데, 이곳에서 34년간 사역하였다.
따라서 이곳이 인도에서 영국침례교 선교의 중심지가 되었다. 케리는 포트 위리엄 대학(Port William College)의 동양어과 교수로 초빙되었고 교수활동은 그의 선교비를 충당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인도의 방언을 익힌 그는 성경번역 사업을 중요한 과제로 여겨 벵갈어, 산스크리트어, 마라디어로 성경을 완역하였고, (동역자들과 함께) 23 개국어로 신약을 완역하였으며, 10 개국어로 성경 일부분을 번역하였다. 전도활동은 최선을 다했으나 그 결실은 미미했다. 그러나 점차 복음사역의 열매를 얻기 시작하여 사역을 시작한지 25년이 지난 1818년경에는 약 600명의 수세자와 수천 명의 입교인을 얻었다.
그가 1819년 인도학생 37명으로 세람포대학을 개교했는데 현재까지 1827년에는 덴마크 왕에 의해 문학사와 신학사 학위를 줄 수 있는 대학으로 인정을 받았다. 케리는 이곳에서 사역하다가 1834년 6월 9일 선교지에서 사망하였다.
해외선교에 대한 케리의 호소와 40년간의 선교활동, 그의 편지와 보고서 등은 선교사역에 큰 영향을 끼쳤고, 여러 선교단체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런 점에서 케리의 활동은 세계선교의 관심을 불러 일으켰고, 선교단체조직에 대한 새로운 모델을 제시하게 되었다. 그 결과로 19세기는 라토렛의 말처럼 '선교의 위대한 세기'(The Great Century of Missions)를 열어가게 된 것이다.
- 출처: 중국선교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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