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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바벨탑 사건을 중심으로 본 역사의 본질

수호천사1 2019. 2. 26. 13:20

바벨탑 사건을 중심으로 본 역사의 본질

                                                             (창세기 11:1-9) 


1. 들어가는 말 


사람은 시간 속에 존재하기 때문에 역사의 다양한 변화와 충돌 속에서 안정적이고 예측 가능한 삶을 확보하기 위해서 역사를 연구해 왔다. 그리고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의 문제도 과거의 역사로부터 얻고자 한다. 그러나 역사란 단지 과거의 사실을 알고 분석함으로써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역사는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서 볼 때만이 비로소 해석의 열쇠를 갖게 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이해하고,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내다보고자 한다면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과 그의 계시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성경은 역사의 본질과 흐름을 명확하게 제시해 준다. 성경은 나와 역사의 관계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아는 것이라고 말한다. 사사기 저자는 이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더라.”(삿 2:10)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를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들의 역사마저도 알지 못하는 상태에 빠졌던 것이다. 따라서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알아야 한다. 

“역사를 모르는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라는 말이 있다. 마찬가지로 역사에 무관심한 교회와 성도에게는 참된 교회의 미래를 기대할 수 없다. 왜냐하면 역사를 통해서 지나 온 과거를 돌아보게 하고, 현재를 점검하며, 미래의 목표를 설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점점 더 혼돈과 오류의 수렁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교회의 상황을 볼 때, 참된 기독교 역사관을 정립하는 일은 참된 신앙의 회복을 위한 필연적인 전제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역사를 두 가지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허용하시는 역사다. 이는 하나님께서 일반은총을 주셔서 인류로 하여금 다양한 방법으로 많은 일들을 성취해 가도록 허용하시는 역사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서 친히 만드시고 주도하시는 역사다. 우리는 바벨탑 사건을 통해서 이 두 역사가 각자 어떤 목표를 향해서 진행되며, 그것이 어떻게 통합되고 완성될 것인지를 미리 내다 볼 수 있다.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서 역사란 단지 과거 사건과 사료들을 종합하고 나름의 해석하는 것을 통해서 정의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바벨탑 사건은 이 세상 역사를 시작하시고 주관하시며 완성하시는 하나님을 알 때만이 역사의 본질과 방향을 알 수 있음을 보여준다. 바벨탑 사건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 중심의 바른 역사관을 정립하여야 한다. 우리가 기독교 역사관을 정립했을 때, 이 시대의 역사적 과업이 무엇인지를 분별할 수 있고 그에 합당한 역사적 사명을 감당하게 될 것이다. 


2. 바벨탑 사건과 역사의 성격 


노아시대 홍수심판 이후에 인류는 하나님의 일반은혜 언약의 시행으로 노아의 세 아들들로 말미암아 생육하고 번성해 갔다. 그 때 사람들의 언어는 하나였다.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에 정착하면서, 그들은 성(city)과 대(tower)를 쌓는 것을 합의하게 된다. 그들은 돌과 진흙을 사용하던 기존 공법을 대체하여 새로운 건축술의 혁명적인 발전을 이루어 냈다. 그래서 이제는 새로운 공법, 즉 벽돌과 역청을 사용하여 과거에는 불가능했던 높고 견고한 성과 대를 쌓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자 이들은 성과 대의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자기들의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고 하였다. 

왜 당시 사람들은 이런 시도를 했을까? 그리고 이런 시도는 무엇 때문에 문제가 되는가를 점검해 보아야 한다. 창세기 1장부터 성경의 계시를 면밀히 분석해보면,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의 고질적인 문제를 발견하게 된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살아야 하는 존재였다. 그러나 인간이 죄를 범하여 하나님을 거부하고 자신을 신(神)으로 삼고 자기중심적인 세계를 만들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다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과 하나님의 의(義)를 버리고, 자기 자신의 힘으로 구원을 얻고, 자기 의를 세우기 위해서 전력질주하고 있음을 본문은 보여준다. 

이렇게 사람들이 자력(自力) 구원(救援)에 집착하는 근본 원인은 교만이다. 사람들은 타락한 이성을 중심으로 하여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기고 인생의 목적을 자신의 행복에 두고 산다. 따라서 이들은 하나님 중심적인 세계관과 하나님의 구원의 방식을 철저히 거부 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노아홍수 이후에 전 지구적인 홍수로 모든 인류를 멸하시지 않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리고 그 증거로 무지개를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을 불신했다. 그들은 하나님과 상관없이 자신들의 힘과 능력으로 어떠한 자연재해와 고통스런 재난에도 견딜 수 있는 안전한 성과 대를 쌓고자 교만하게 행한 것이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원인도 교만이었다. 그들이 사단의 유혹에 넘어진 것은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교만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사단은 그들의 교만을 이용하여 미혹하였고, 그들이 자고(自高)하도록 높여 주고 추켜세웠다. 사단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한 것이다. “하나님은 너희들에게 너무나 불공평하지 않느냐? 네가 그런 자리에 있기에는 너는 너무도 크고 놀라운 존재 아닌가? 하나님은 너희에게 너무나 가혹한 분이다!” 이렇게 사단은 인간을 높여주면서 하나님을 아주 인색한 분으로 생각하도록 이끌기 위해 인간의 교만을 자극했던 것이다. 

이러한 사단의 유혹과 인간의 교만은 믿음의 사람인 노아의 후손들에게도 하나님의 언약을 저버리도록 만들었다. 노아의 후손들 역시 교만하여 자신들이 대단한 존재임을 자처했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처럼 “우리”라는 단어를 쓰고 있음을 통해 알 수 있다. 이 단어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면서 '충만한 왕적 복수'(Royal We)로 자신을 계시하실 때 처음 사용하셨다(창 1:26). 그런데 여기 바벨탑을 쌓는 사람들도 같은 의미로 “우리”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자신들을 과시하고 있다. 이는 그들이 자신들의 문명의 발전과 성취에 도취되어 자기를 창조주인 것처럼 높이고 있음을 보여 준다. 더욱이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해야 할 인간들이 이제는 자신들의 “이름을 내자”라고 말하며 자신을 영화롭게 하고 있다. 그들은 공명심에 가득 차서 자신들이 이 세상과 역사의 주인인 것처럼 행동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힘을 규합하여 문명을 발전시키고 사회를 개혁하고 정치조직 등을 효율화하여 집단적으로 결집하여 이 땅에 낙원을 건설하고자 한 것이 바로 “흩어짐을 면하자”라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어떠한 재난에도 살아남을 수 있는(특히 홍수심판 같은) 바벨탑을 쌓아서 자신들의 힘과 능력으로 구원할 수 있음을 과시하고자 했다. 이런 인간의 공명주의와 집단주의는 때때로 큰 힘을 발휘하여 역사 가운데 찬란한 문명과 업적들을 남기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성취의 결말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교만으로 말미암아 결국 자기 파멸적인 결과로 막을 내리는 것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수없이 보아왔다. 

이러한 사람들의 도전에 대해 하나님은 어떻게 반응하셨는가? 이신론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그저 뒷짐만지고 어떤 개입도 하지 않고 무력하게 지켜보고만 계시는가? 아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한 세계를 자신의 목적에 맞게 보존하시고 통치하시는 절대주권자이시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땅에서 벌어지는 이 일을 방관하지 않으셨다. 이 무리가 한 족속이고 언어가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했다고 말씀하시면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다. 그러자 그들은 성 쌓기를 그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이른바 ‘바벨’ 혹은 ‘바벨탑’ 사건이다. “바벨”이란 “여호와께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케 하셨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바벨탑 사건이 성경독자에게 주는 교훈은 한 마디로, 인간이 하나님 없이 추구하는 인본주의적인 꿈과 자력 구원의 노력은 그 자체로써도 자기 파멸적이지만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에 의해서 용납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3. 바벨탑 사건과 역사의 흐름 


여기서 ‘바벨탑 사건’이 주는 구속사적인 의미를 알아보자. 그들은 왜 “성과 대를 쌓아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는 발상을 하게 되었을까? 우리는 성경의 문맥을 따라서 계시 의존적인 사색을 해야 한다. 그들은 노아 시대 당시의 홍수 심판 사건을 구전(口傳)을 통해 익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또 다른 하나님의 홍수심판을 두려워한 나머지 바벨탑을 쌓고자 했다.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죄성을 한 눈으로 보게 된다. 즉 하나님께서 이미 전 지구적인 홍수로 다시는 세상을 심판하시지 않으시겠다고 언약하셨다. 그리고 그 증거로 하늘에 무지개 두셨다. 홍수심판 사건을 통해서 노아와 그의 가족들에게 사람들이 구원 얻는 유일한 길과 하나님의 뜻을 이미 계시해 주셨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그의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으로 얻는 다는 것을 계시해 주셨다. 온 인류가 멸망했던 홍수 심판 가운데서 노아와 그 가족이 구원을 얻은 것도 하나님의 말씀에 믿음으로 순종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의 삶의 문제와 구원의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께서 제시하시는 방법, 즉 믿음과 순종의 길로 나아갔어야 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야 했다. 그러나 이들은 정반대로 나아갔다. 그들은 영적으로 죽은 자리에서 하나님을 거부하고 자력(自力)으로 이 땅에 잘 사는 세상을 건설하고자 했다. 그것을 통해서 사람들은 자신의 지혜와 능력을 자랑하고, 자기 의를 높이면서 자위 자족하고자 했다. 

그러나 인간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모든 뜻은 이미 선포되었다(창 3:15, 4:1-15, 6:8, 9:26,27 등). 하나님께서는 여인의 후손을 통해서 인간을 구원하실 것을 이미 선언하셨고, 제사 행위(예배 행위)를 통해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도록 이미 제시해 주었다. 이를 완성된 계시를 통해서 보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인간 구원의 주체는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인간을 구원하시되, 자기 아들을 그리스도로 보내셔서 이루실 것이다. 이 구원은 죄로 인해 죽어 있는 사람들에게 ‘죄 사함을 받는 것과 의롭게 되는(칭의) 것과 양자(養子)되는 것과 성화(聖化)의 과정을 지나며,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는 시점에서 부활체를 입고 영화(榮華)롭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 바벨탑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허용하시는 역사의 흐름과 그 양상을 볼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인본주의(humanism)이다. 인본주의자들은 이 땅에 낙원, 즉 이상향(utopia)을 건설하고자한다. 인본주의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인간의 본성과 이 세계가 정상이라고 본다. 그들은 이런 전제들을 정치?경제?문화?사회?교육?법율 등 인간 활동의 모든 영역에 적용한다. 그래서 인간을 교육하고, 더 나은 환경을 만들기 위해 이 세상을 개발해서 그 꿈을 이루자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현재보다 더 나은 인간, 더 나은 사회, 더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드는 것을 개인적으로는 생애의 목표로 삼게 되었고 사회와 국가, 그리고 전 인류의 복지를 위한 과제로 생각한다. 

그러나 문제는 인본주의자들이 갖고 있는 전제 자체가 틀렸다는 것이다. 이론과 전제에 오류가 있다면, 그 결과는 당연히 나쁘게 나올 수밖에 없다는 것이 모든 학문 활동과 현실세계에서 확증되었다. 인본주의자들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인간과 이 세계의 근본적인 출처와 문제를 모른다. 따라서 그들은 인간 문제의 근본 원인도 모른 채, 자신들의 당면한 한계적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처방전들을 내놓고 있는 것이다. 그런 처방전들은 어느 정도 고통을 경감시켜 주기도 하고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상은 그 고통의 원인이 되는 질병은 더 심각하게 만들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인본주의적인 모든 해결책들은 그 문제의 본질을 치료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더 많은 부작용과 폐해(弊害)를 낳고 있음을 역사가 자증(自證)하고 있다. 

그러므로 모든 인류는 성경의 진단과 처방을 받아들여야 한다. 성경은 인간의 본성과 이 세계가 정상이 아니라고 선언한다. 인간은 하나님께 죄를 범함으로 말미암아 전적으로 부패된 존재이며, 이 세상도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저주 덮인 상태임을 선언하고 있다. 성경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로 인한 하나님의 방식만이 인류의 고통과 삶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처방임을 선포한다. 

또한 바벨탑 사건은 이와 같은 인본주의와 인본주의가 추구하는 이상(理想)(이 땅에 하나님 없이 이상향을 건설하려는 꿈)은 하나님께 대한 도전이고 죄악임을 보여준다. 따라서 그러한 인본주의적인 자력 구원은 결코 이 땅에서 이루어 질 수 없는 것임을 우리에게 경고해 준다.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을 거부하면서 인본주의를 통해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 해도 그것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허상임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계속해서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역사가 종결될 때까지 진력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진보가 인간이 자고(自高)할 만큼 최고의 절정에 달했을 때,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심판에 의해 모두 파멸 당할 것을 이 사건은 보여주고 있다. 

“바벨”이란 말이 후에 민족 국가의 명칭으로 쓰였는데, 고대 바벨론을 위시해서 기원전 6세기 바벨론 제국 등이 있다. 그리고 이 “바벨”이 구?신약 성경 전체를 통해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과 악의 세력들에 대한 총체로 묘사되고 있다. 특히 고대 바벨론 제국은 구약의 이스라엘 나라를 멸망시키고, 성전을 파괴한 하나님의 백성들의 대적이었다. 그리고 신약시대에는 로마제국 또한 이스라엘과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하고 교회를 대적하는 세력으로 바벨론이라고 지칭되었다(벧전 5:13). 특히 요한은 요한계시록에서 인본주의로써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핍박하며 자기 영광을 추구하는 이 세상 사람들과 나라를 가리켜 바벨론이라고 칭하고 있다. 

“힘센 음성으로 외쳐 가로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 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그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를 인하여 만국이 무너졌으며, 또 땅의 왕들이 그로 더불어 음행하였으며, 땅의 상고들도 그 사치의 세력을 인하여 치부하였도다.”(계 18:2-3) 

여기서 우리는 사람들이 인본주의를 통해서 이 땅에 이상향 건설에 최선을 다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방관하시지 않고 결국 심판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인간 역사의 흐름이 이 바벨탑 사건과 같은 양상으로 진행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은 문학, 철학, 과학, 정치경제, 예술 등 모든 방면에서 이것을 추구하고 있다. 앞으로의 남은 역사에서도 사람들은 이것을 성취하기 위해 부단히 진보와 개혁, 보수와 전통을 주장하면서 이와 같은 반복적인 활동을 계속할 것을 보여준다. 하나님을 떠난 인류는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것들을 누리면서도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여 자고(自高)하고, 이 땅에 하나님 없이 잘사는 세상을 건설하고자 한다. 이는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무시하며 대적하는 것이기에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인간의 인본주의적인 모든 활동들은 그들이 원했던 이상향 건설에는 항상 실패할 뿐이고, 마치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이 헛될 뿐이다(전 2:11). 

따라서 우리는 사람들이 이 역사 가운데 추구하는 것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통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역사의 결말도 성경의 계시를 통해서 명확히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사람이 이런 인본주의적인 노력으로는 결코 구원을 이룰 수 없음을 절감하게 될 것이다. 만약 어떤 그리스도인이 이런 인본주의적인 구원관과 자기 추구에 집착하고 있다면, 그는 영적으로 병들어 있거나 영적인 수면상태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삶에 진정한 만족을 누리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시간과 자원을 낭비하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이 역사 속에서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을 게을리 한 종으로 책망을 듣게 될 것이다. 따라서 성도들은 이런 인본주의적인 역사관을 벗어던지고 성경적 역사관을 바르게 정립해야만 한다. 성경적 역사관을 정립한 사람은 날마다 부딪치는 삶의 현장에서 역동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산다. 그런 그리스도인은 인본주의적인 구원관에 대한 모든 유혹들을 철저히 거부하고, 오직 복음 밖에는 인간에게 진정한 희망이 없음을 자신의 삶을 통해서 세상에 선포한다. 그러한 삶을 통해서 하나님만이 역사의 주관자시며,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시기위해 이 세상을 보존하시며 다스리고 있음을 증거 하는 것이다. 
  

4. 기독교 역사관 


이제 성경이 가르치는 역사란 무엇인가를 간략하게 정리해 보자. 우리가 성경에서 말하는 역사란 무엇인가를 바르게 인식하고, 참된 역사의식을 갖고 살기를 원한다면 역사의 본질에 대해 다음의 세 가지 질문에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첫째, 역사의 시종이 있는가? 둘째, 역사의 목적이 있는가? 셋째, 역사의 주관자가 있는가? 

1) 역사의 시종(始終)이 있는가?

 
역사는 어떻게 정의하든 시간 속에서 이루어지는 일련의 사건들과 분리할 수 없다. 만약 그것이 시간 세계 안에서 발생한 일이 아니라면, 그것은 환상이거나 허구(fiction)이다. 따라서 시간 세계의 시종(始終)을 어떻게 이해하느냐는 역사란 무엇인가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이에 대해서 세속 역사가들은 시간세계의 시종을 아예 없다고 단정하거나, 그것을 알 수 없다고 말한다. 그들은 시간이 계속해서 무의미하게 반복한다거나, 무한한 윤회의 연속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시간에 대한 참된 이해가 없다면 역사란 무엇인가를 바르게 정의할 수 없다. 

그렇다면 성경은 역사의 시종을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성경은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심으로써 시간과 공간이 있는 이 역사세계가 시작되었음을 선언한다(창 1:1). 역사의 시작은 우연히 되어 진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작정하셨던 경륜을 이 땅에 펼치시기 위해서 시간과 공간을 창조하심으로써 시작된 것이다. 여기서 ‘태초에’라는 말은 천지창조의 ‘시작점’이라는 뜻이다. 이 ‘태초’가 있기 전에는 영원 자존 자이신 하나님과 그의 영원세계만 있었는데, 그 영원세계 중에 시공간의 역사세계가 시작되는 바로 그 시점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태초에’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기 전에는 자존 자이신 하나님 외에는 우리가 지금 경험하고 있는 모든 것들이 아무것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영원 자존 자이신 하나님께서 창조하시자 비로소 천지와 만물이 있게 되었다. 

그렇다면 영원세계와 시공간의 역사 세계와의 상관관계는 무엇인가? 시공간의 세계는 무엇이고 영원세계는 무엇인가? 그동안에 논의되어졌던 영원세계에 대한 견해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영원세계가 시공간의 세계의 시작으로 일단락되고 시공간의 세계가 끝나면 다시 시작된다고 하는 견해다. 그러나 이 견해는 성경적인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영원세계는 자존(自存) 하신 하나님의 존재와 더불어 있는 하나님의 세계이다. 시공간의 3차원의 세계는 하나님의 피조물의 세계, 즉 인간을 위시하여 모든 피조물의 존재와 관련이 있는 세계이다. 즉 우주와 만물이 다 시공간의 세계에 속해있다. 따라서 시간세계가 시작됨으로써 영원세계가 일단락되었다는 주장은 수용하기 어렵다. 

두 번째 견해는 시공간의 세계가 끝없이 계속되는 것이 영원세계라고 본다(endless time). 그러나 이것도 성경의 지지를 받기 힘들다. 왜냐하면 영원세계는 하나님의 존재와 함께 있는 문자 그대로 영원세계이다. 이 시공간의 세계는 하나님의 천지창조로부터 시작되었고 하나님의 섭리가운데 보존되고 통치되어지다가, 하나님의 구속사가 마무리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극치에 이르게 되면, 마지막 심판 직전에 완전히 없어진다고 성경은 말한다. 따라서 태초에 시작된 시간이 끝없이 진행되는 것을 영원세계라고 보기는 어렵다. 

세 번째 견해는 영원세계의 영역 안에 시공간의 세계가 얼마동안 진행되다가 하나님의 작정하신 경륜이 이루어지면 끝나도록 되어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견해에서는 영원세계는 ‘초월적 시간’(timelessness), 즉 초시간 세계이다. 따라서 이 시공간의 세계는 영원세계의 존립에 아무런 영향도 미칠 수 없다. 쉽게 생각하자면 커다란 어떤 원 안에 아주 작은 원이 부분 집합처럼 일정기간 동안만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큰 영원세계 영역은 무한하기 때문에 시공간의 역사세계가 잠간 동안 머문다고 해서 하나님의 영원세계 영역이 축소되거나 제한 받지 않는다. 이 견해가 합리적이며 성경적이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원한 작정을 이루시려고 이 시공간의 역사세계를 창조하셨고(창 1:1), 그 하나님의 경륜이 완성되면 이 시공간의 역사세계는 일단락된다(계 21:1)고 선언한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 역사관을 직선적인 역사관이라고 한다. 따라서 역사는 하나님 나라가 극치상태에 이르도록 진행되어져 갈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는 영원세계 안에서 극치상태에 이르게 될 것이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한 눈에 이 시공간의 역사 전체를 동시에 보시면서 자신의 경륜을 완벽하게 성취하시는 분이시다(참고 사 60:19; 시 90:4; 벧후 3:8). 하나님께서는 시간에 매여 있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에 그에게는 역사 전체의 과정이 언제나 현재와 같다는 사실을 우리는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이 매일 수행하는 모든 일을 영원한 관점에서 볼 수 있어야 하고, 우리의 행위는 영원한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영원하신 하나님과의 삼자관계에서 모든 일을 행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역사의 시종을 인식하는 것은 우리의 삶의 목적과 방향을 분명하게 한다. 그래서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 앞에서의 일이며, 그것을 통해서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널리 나타나도록 해야 한다(고전 10:31; 사 43:21). 

2) 역사의 목적(目的)이 있는가? 


세속의 역사가들은 역사가 어떤 목적을 향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역사에서 우연을 하나의 중요한 변수로 보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우연을 주된 변수로 보지 않지만 종속적인 변수로 보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세속역사가들은 과거의 사건들을 어떤 식으로든 종합하고 분석하여 일반화된 원리를 끌어내어 미래를 예측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들은 객관화된 원리를 이끌어 낼 수 없었고, 실제로 가능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그런 예측을 시도한 역사가들도 있었지만, 모두 실패하였음을 역사가 증거하고 있다. 

성경은 역사의 목적을 분명하게 제시해 준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다. 하나님 나라는 창세기 첫 두 장에서 시작되어 출발하였으나 사단의 개입과 인간의 교만으로 인해 죄를 범함으로 무너졌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에 의해서 복원되고 더 탁월하게 완성될 것이다. 이것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이 역사 가운데 개입하셔서 모든 대적들을 제압하시고 메시아를 통해서 시작된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시기 위해 모든 것을 보존하시고 다스리신다. 그리고 이는 요한계시록 마지막 두 장에서 극치에 이르게 될 하나님 나라를 보여 줌으로써 확증한다. 모든 성경은 바로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향해 역사가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허용하시는 역사든, 직접 다스리시는 역사든 결국 이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위해 나아가고 있음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한다. 이는 모든 성경이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확증해 주고 있다(히 1:1). 특히 다니엘서는 이것을 명확하게 보여 주고 있다. 바벨론제국의 왕 느브갓네살의 꿈을 해석하면서 다니엘은 “이 열왕의 때에 하늘의 하나님이 한 나라를 세우시리니 이것은 영원히 망하지도 아니할 것이요 그 국권이 다른 백성에게로 돌아가지 아니할 것이요 도리어 이 모든 나라를 쳐서 멸하고 영원히 설 것이라.”(단 2:44)고 선언하고 있다. 구약의 모든 역사 과정은 메시아를 통해서 새롭게 회복되어질 하나님 나라의 임함을 준비하는 시기였다. 그리고 때가 차매 성육신하신 예수님께서 메시아로서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심으로 하나님 나라의 임함을 공식적으로 선포하셨다.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막 1:15). 그리고 예수님은 가르치시는 사역과 고치심(이적을 행하심)의 사역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임했음을 증거 하시면서 복음을 전하셨다(마 4:23-24; 9:35). 

예수님께서는 이런 역사의 대전환점, 즉 하나님 나라의 임함을 그의 가르치심과 이적들을 행하심을 통해서 확증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많은 유대인들은 역사의 목적인 하나님 나라에 대한 잘못된 기대를 갖고서 예수님께 물질적이고 정치적인 표적들을 계속 요구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들에게 “너희가 천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마 16:3)라고 거듭 책망하셨다. 예수님의 초림으로 인해 하나님 나라가 이미 도래했음이 그의 가르침과 표적들로써 증거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또 다른 표적을 구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의 문제는 표적의 문제가 아니라, 성경에 나타난 역사의 목적과 그 방향에 대한 무지로 인한 것임을 지적하셨다. 당시 종교 지도자들인 바리새인들이 하나님 나라가 언제 오는지에 대해 질문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는 이미 너희 가운데 현존하여 있다고 말씀하셨다(눅 17:20-21).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의 초림으로 인해 이미 그들 가운데 현존해 있었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를 가져오신 예수님께 믿음으로 반응하는 자는 누구나 하나님 나라의 복에 참여하게 됨을 선언하신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의 초림으로 인해 이 역사 가운데서 시작되었고 점점 성장하고 확장되어 그리스도의 재림과 더불어 극치상태에 이르게 될 것이다. 마태복음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의 비유 가운데 겨자씨 비유와 누룩비유가 이를 잘 보여 주고 있다(마 13:31-33). 역사는 바로 이렇게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향해서 진행되고 있음을 성경 전체가 증거 했고, 실제 역사 가운데 실증(實證)되고 있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역사의 목적으로 아는 그리스도인은 교회의 가르침을 따라 삶으로써 자신의 삶의 목표와 의미를 명확하게 아는 사람이다. 그는 교회의 권세를 힘입어 세상의 정신과 사단의 미혹을 거부하고,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시려 다시 오실 예수님의 명령을 따라 사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늘 교회의 존재 목적과 의의를 수행하기 위해 경성하여서 교회 안에서 자신의 사명에 충성하기 위해 자신을 성결하게 한다(요일 3:3). 따라서 교회를 통해 역사의 목적을 아는 그리스도인만이 인생의 목적을 아는 사람이며, 그 인생의 목적을 아는 사람만이 역사 가운데서 책임 있게 살아갈 수 있다. 

3) 역사의 주관자(主管者)가 있는가? 


역사의 시종(始終)을 아는 것과 역사의 목적을 아는 것은 결국 역사를 주관하는 분이 있는가? 라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대부분의 세속역사가들은 역사의 주관자를 인정하지 않는다. 혹은 인정하더라도 바르트주의자들과 같이 천상의 역사와 지상의 역사의 완전한 분리를 선언하고 후자는 하나님께서 간섭하지 않고 세상의 법칙에 맡겼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신론자들도 하나님의 창조는 인정하지만,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역사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 만들어 놓은 자연법칙과 이성에 의해 진행되어 간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해서 역사의 주관자가 없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인본주의적인 역사관을 갖은 사람들도 역사에서 어떤 일반화되는 원리를 발견하려고 노력해 왔음을 보았다. 그러나 앞서 보았듯이 그들 스스로 그것이 오류임을 인정하고 있다. 따라서 그들은 역사의 주관자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역사는 자신들이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의 연속, 즉 우연이라는 요소가 역사에서 중대한 역할을 하거나 적어도 일정한 역할을 한다고 믿을 뿐이다. 그들은 역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주권을 부인하려고 과도하게 집착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우연에 의해 역사가 진행된다는 그들의 논리는 바람에 흩어지는 낙엽을 보면서도 낙엽 때문에 바람이 분다고 말하는 것과 같이 어리석은 것이다. 

세속 역사가들은 역사의 주관가가 없기에 역사는 아무 의미 없고, 연관성도 없고 예측할 수 없는 사건들의 연속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실상은 자신들의 영적인 눈이 어두워져서 못 보는 것일 뿐이다(고전 2:14).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께서 역사의 모든 것을 주관하신다고 선언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하신 세계를 보존하시고 통치하셔서 자신의 영원한 경륜을 완벽하게 이루시는 절대 주권자이신 것이다. 

역사의 주관자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섭리의 주로 믿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에 영원한 작정을 하셨고, 그 작정에 따라 창조와 섭리와 구원과 심판을 행하시는 홀로 자존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하나님은 역사의 모든 상황을 주관하셔서 자신의 목적을 완벽하게 성취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때로는 사람들의 악한 꾀를 사용하셔서도 그의 뜻을 이루신다(창 50:20; 행 2:23). 따라서 역사 가운데 이루어지는 어떤 일도 하나님의 다스림 밖에서 일어나는 일은 없다. 그래서 성경은 천하에 범사(凡事)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다고 선언한다(전 3:1). 요한계시록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역사의 주관자이심을 성부하나님의 손에서 책을 취하여서 책의 인(印)을 떼시는 장면을 통해서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계 5장). 신약성경은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기 위한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이 이 종말의 때에 어떻게 성취될 것인가를 보여준다. 

하나님께서는 영원 전에 세우셨던 작정을 창조와 섭리를 통해서 이 역사 가운데 완벽하게 이루셨고, 또한 이루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구속역사뿐만 아니라 세상역사도 온전히 주관하셔서 그의 영원한 목적을 이루실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을 역사의 주관자로 믿는다는 것은 큰 역사적 사건에서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의 일상사에서도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 아래 있음을 고백하면서 그 일에 증인으로서 사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매일의 일상적인 삶이 하나님 앞에서 영원한 의미가 있음을 알 때, 우리의 삶은 변화된다. 이런 역사의식을 갖고 사는 사람은 불의와 불법에 타협하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의 명예와 이익을 위해서 다른 사람들과 교회 공동체를 이용하지 않는다. 그는 적극적으로 이 역사의 가운데 자신의 시대적 소명을 분명히 알고,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 늘 하나님을 의뢰하면서 충성하는 사람이다. 그것을 다른 사람이 알아주기를 바라서가 아니라, 그러한 삶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직무이기 때문이다(참고 고전 9:16-17). 



5. 나가는 말 


우리는 바벨탑 사건을 통해서 인류가 추구하는 것들에 대한 역사의 방향을 보았다. 하나님의 존재와 구원의 방식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힘과 노력으로 이 땅에 유토피아를 건설하려고 최선을 다해서 달려 왔다. 그래서 긴 역사 동안 그들은 때로는 많은 것들을 이루었다. 물질문명과 세상의 문화는 첨단에 첨단을 거듭하면서 인간의 외적인 삶을 변화시켜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러한 그들의 역사적 진보가 그들이 원하는 유토피아를 가져다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끝없이 연구하고 개발하고 개혁하고 진보해 왔다. 그러나 어느 시대 어떤 사회와 정부도 사람들에게 진정한 평화와 낙원을 주지 못했다. 사회보장제도가 완벽하게 갖추어진 서구 일부국가에서 조차도 사람들은 여전히 참된 안식과 평화에 목말라하고 있다. 경제적 풍요 속에서 오히려 그들의 내면의 생활과 영혼은 더욱 파괴되고 있다. 그래서 그런 문제와 고통을 제거하려는 다양한 인본주의적인 처방들이 홍수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일시적인 진통제와 같은 효과만 줄 뿐이며 부작용이 더 켰고, 질병은 더 심각하게 확대 재생산되고 있는 형국이다. 

이와 같은 상황을 초래한 근본적인 원인은 인본주의를 떠받치고 있는 전제에 심각한 오류 때문임을 우리는 보았다. 그들은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존귀한 자로 보지 않는다. 또한 그들은 인간의 문제가 하나님을 떠남으로 비롯되었음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인간이 처음부터 자율적인 존재라는 전제를 갖고 있다. 그렇기에 인간이 약간의 문제는 있으나,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죄의 문제가 아니라, 교육의 문제, 환경의 문제에서 기인했을 뿐 인간은 근본적으로 정상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에게 교육을 시키고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면 이상적인 인간이 되고 행복한 낙원이 되리라고 본다. 그래서 보편적 공교육이 일반화되었고, 다양한 복지제도가 세워졌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은 전혀 변화되지 않았다. 오히려 더 많은 지식과 경제적 풍요는 더 교묘하고 비인간적인 죄악들을 빠르게 유통시키면서 극단적인 소외와 절망이 관영하는 사회가 되어 가고 있다. 이는 인본주의의 기본 전제가 틀렸음을 확증하는 것이며, 사람들의 노력이 가상할지라도 결국 실패했음을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역사의 주관자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이 자신의 힘으로 이 땅에 유토피아를 건설하려는 뜻을 이루고자하는 것을 그저 방관하시지 않는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인간의 행복을 가로막는 방해꾼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거부하고 해왔던 모든 노력들이 그들에게 진정한 안식과 평화를 가져다주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더욱 심각한 고통을 유발했음을 역사와 현실이 자증(自證)하고 있지 않는가? 따라서 인간의 모든 노력으로도 성취할 수 없는 인간의 근본문제, 즉 죄를 제거하여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평화를 주시려고 하나님께서 그의 독생자를 보내신 것이다. 바로 여기에 하나님의 무한하신 자비와 긍휼이 나타난 것이다. 하나님을 향해 대적하는 사람들을 오래 참으시고 사랑과 자비를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만이 인간의 근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따라서 기독교의 복음만이 참된 인간 문제의 본질을 치료할 수 있는 유일하고 무이한 처방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복음을 통해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시고 하나님나라를 완성하기 위해 역사를 시작하셨고 끝내실 것이다. 이 모든 과정을 하나님께서는 친히 주관하고 계신다. 따라서 하나님의 통치는 모든 영역에 미치고 있다. 이러한 역사관을 갖고 사는 사람만이 인생의 목적을 알고 하나님 나라의 사명을 수행할 수 있다. 신구약의 모든 믿음의 선진들은 바로 이러한 역사의식을 가졌기 때문에 온갖 유혹과 시험, 그리고 핍박과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만을 의뢰하면서 사자 같이 담대했다(잠언 28:1; 히 11장).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의 세속화 문제의 핵심에는 바로 이러한 역사의식의 결여에 있다. 목회자들마저 세속역사가들의 빗나간 역사관을 버리지 못하고 그들의 오류를 답습하고 있다.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는 다양한 사건과 현상들을 성경적 역사관으로 바라보고 해석하지 못한다. 그저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시각으로 바라보고 그들과 똑같이 반응하고 있다. 이런 역사의식을 갖고는 하나님 중심적인 삶을 살 수 없다. 오늘날 다수의 목회자들이 교인들에게 성경과 인본주의를 교묘하게 혼합하여 가르친다. 그래서 교인들에게 인본주의적이며 현세적 복을 추구하도록 장려하며 그것을 구원의 증거로 삼기도 한다. 그래서 그들은 많은 사람들을 교회로 모으고, 대중적 인기와 명성, 재물과 권력을 얻어 행사 한다. 그들이 그렇게 환영받는 것은 그들이 전파하고 추구하도록 하는 것들이 땅에 속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땅에 속한 사람들이 자신의 사욕을 좇기 위해 그들을 스승으로 높이며 따른다. 그러므로 그들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부르고 있지만 실상은 인본주의적 구원을 전파하며 불법을 행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에게 이 시대의 역사적 의미를 바르게 분별하여 복음에 합당하게 살라고 요구하는 것은 공허한 메아리일 뿐이다. 

기차가 철로를 따라 가듯이 우리의 삶은 사상(세계관)을 따라 간다. 따라서 우리의 삶이 변하려면 우리의 사상이 먼저 변해야 한다. 오늘날 우리시대의 교회가 본질을 회복하고, 자신의 사명을 감당하려면 무엇보다 먼저 성경적 역사관을 회복해야 한다. 또한 성도들이 현실의 삶에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교회적 삶을 살기 위해서도 먼저 기독교 역사관에 투철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우리 교회와 성도들은 하나님의 구속역사의 진행 속에서 현재 자신에게 주어진 역사적 사명을 자각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이 종말의 때에 충성되고 지혜로운 청지기로서 하나님의 구속사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복된 특권을 향유하게 될 것이다.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20)


노천상 목사

출처 : 예수 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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