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과 복음과의 관계
목 차
Ⅰ. 서론
A. 문제의 제기
B. 연구의 범위
Ⅱ. 본론
A. 율법과 복음의 어원적 의미
1. 율법
2. 복음
B. 율법과 복음의 내용
1. 복음과 율법
2. 복음과 율법의 비교
C. 율법과 복음의 여러 견해
1. 율법주의
2. 반 율법주의
3. 갈라디아인 주의
Ⅲ. 율법과 복음에 대한 바른 이해
A. 예수님의 율법이해
1. 예수와 시온 율법
2. 예수에 의해 계시된 율법
B. 바울사도의 율법 이해
1. 율법에 관련된 바울의 이해
2. 바울의 율법 이해
C.사도들의 율법이해
1. 신약시대 율법 세 가지 오류
2. 율법은 생활규범
3. 구원은 은혜로 율법은 생활 규범
D. 복음
1. 복음이신 예수님의 속성
2. 복음이신 예수님의 사역
3. 예수님의 자증
4. 성경에 나타난 예수님의 역사적인 진실
5. 영광스런 예수 그리스도
Ⅳ. 현금교회 적용의 율법이해 문제
A. 현금교회의 율법이해와 해답
1. 율법주의
2. 반 율법주의
3. 갈라디아인 주의
4. 이신득의
5. 주 예수의 사랑의 법
Ⅴ. 결론
A. 율법과 복음의 이해
B. 이신득의의 원천
참고문헌
ABSTRACT
논문개요
율법과 복음에 대한 바른 이해는 교회사 전체를 통하여 가장 중요하고도 난해한 문제이며 어려운 주제 중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이 문제들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여 많은 이단 사상들이 속출했고 율법주의와 무 율법주의의 대립과 갈등으로 점철되어 왔음을 볼 수 있다. 이는 사도시대로부터 시작하여 내려온 율법에 관한 오류로 다음 3가지가 있다.
율법주의는 사람이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이 오류에 대한 해답이 로마서이고 반 율법주의자는 모든 것이 은혜이므로 인간이 어떻게 살든 상관할 바가 아니라고 주장하며 이 해답으로 야고보서가 있다. 또한 갈라디아인 주의는 인간이 은혜로 구원을 받았지만 율법을 지키므로 구원을 보존해 간다고 한다. 즉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입을 뿐이요 궁극적인 구원은 율법행위에 결정된다는 주장이다. 이 오류에 대한 해답이 갈라디아서이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시내 산에서 주신 율법은 예수에 의해 완성되고 율법의 저주에서 구원을 얻게 되었다. 즉 예수는 시내 율법의 끝이요 완성이시며 종말론적으로 죄인을 용서하시고 원수를 사랑하는 평화의 율법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는 자가 율법 아래 있느냐 은혜 안에 있느냐 혹은 혼합돼 있느냐 이 문제는 초대교회에서 해결되었지만 다시 혼돈이 제기되었다.
바울은 사도회의에서 구원은 믿음으로, 율법은 그리스도인의 생활규범으로 확정했고 율법과 복음의 그릇된 이해로 갈등과 대립된 주장을 바르게 하기 위하여 율법주의자에게는 로마서를 주었고 반 율법주의자에게는 야고보서를, 혼합주의자들에게는 갈라디아서를 해답으로 주었다. 누구든지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고 예수 그리스도는 사랑의 본체이시며 그 사랑은 율법의 완성으로서 그를 믿는 자들에게 칭의를 입히시고 자유 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인 사랑의 법 아래 있게 하셨다. 신구약의 통일성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중심이심을 두 성경이 증명한다.
구약을 보면 모세가 시내 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율법만 받아온 게 아니요 복음(장막성전인 그리스도의 모형)도 가지고 내려왔다. 그러므로 복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는 종말론적인 시내율법이셨다. 때문에 율법의 완성으로 오신 예수님 없이 율법을 구원의 길로 재 도입하는 것은 십자가를 완전히 헐고 율법의 책임과 사명을 완전히 도외시한 처사이다. 율법의 멍에를 벗고 주님의 멍에를 메고 따라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은 구약의 약속과 예언과 대표적 전개들의 성취이다. 예수의 출생과 사역이 바로 인류의 죄와 저주와 사망의 권세에서 해방하고 자유롭게 하기 위하여 죽으심으로 화목케 했다. 율법은 처음 인류에게 요구한 순종을 계속하지만 예수께서 모든 순종을 하나님께 바침으로 더 이상 요구가 없다. 이런데도 율법을 지킨다면 복음을 이해하지 못함이 된다.
Ⅰ. 서 론
A. 문제의 제기
율법과 복음에 대한 바른 이해는 교회사 전체를 통하여 가장 중요하고도 난해한 문제이며 주제들 중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이 문제들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여 많은 이단 사상들이 속출했다. 특히 세계 교회사를 살펴보면 각 시대마다 교회들은 율법주의와 무 율법주의의 대립과 갈등으로 점철되어 왔음을 볼 수 있다.
현금 한국교회와 세계 교회도 율법과 복음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신앙의 본질과 신앙 생활의 방향을 잃어 가는 현세의 도덕적 수준은 타락의 길로 걸어가고 있다.
이는 복음과 율법과의 관계를 바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종교개혁의 거인 루터(Martin Luther, 1483~1540)는 복음과 율법과의 관계를 이해할 때 구원의 서정으로 보았고, 유대교는 율법주의로 보았으며, 사도 바울은 구원사적으로 복음과 율법을 이해하고 있다. 그런가하면 많은 사람들 중에 율법 폐기를 주장하며 은혜만을 강조하기도 한다.
또한 교회에서는 많은 설교자들이 율법의 준수를 힘있게 강조한다. 이 율법준수는 구원을 얻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삶의 터전에서 신앙을 지키며 어떻게 살아야할 생활 규범으로나 법칙으로서 강조를 받는 것이 아니라 구원 얻음에 결부되어 강조되어 왔다. 그러므로 복음과 율법과의 관계가 바르게 이해되지 못하여 혼란이 가중되고 그리스도인의 마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100% 자유와 해방을 누리지 못한다.
신구약 성경에서 우리의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고 증언한다. 즉 구약의 구원은 언약의 피이었고 신약의 구원은 갈보리 산 위의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그러므로 율법주의와 반 율법주의 그리고 혼합주의인 갈라디아인 주의의 대립과 갈등 속에서 목회자는 그 사역을 통하여 영혼을 그리스도께 인도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새 사람이 되게 하려는 목적을 수행해야 한다. 그러나 목회자가 이것보다는 교회 의식에 매이게 하는 경향이 많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받은 택한 백성들에게 은혜의 복음전파와 함께 율법이 구원의 길로 있음이 아니라 생활규범으로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가르쳐야 한다. 이는 인위적 교회구성과 율법 의식에 매이게 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신구약의 통일성은 은혜 언약인 하나님의 나라와,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새 백성이 된 새 인류가 생활규범으로서 지켜야될 법으로서 율법은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효력이 있다. 그러나 율법이 구원의 길로서는 종결되었음을 분명하게 밝힘이 본 논의의 목적이며 바른 이해임을 그 동기로 한다.
B. 연구의 범위
본 연구자는 위의 상황을 직시하고 이러한 좌우로 치우침의 오류를 해결하기 위하여 율법과 복음과의 바른 이해를 성경적인 증거를 중심으로 예수님의 율법이해와 바울의 율법이해와 그리고 사도들의 율법이해를 통해 작금의 개혁신학에서 확고히 지지되고 고백되는 구속사적인 하나님의 은혜와 복음의 관점에서 정립하고 이해하려 한다.
이를 위해서 성서 전체의 방대함을 다 다룰 수 없고 또한 다 연구할 수가 실제적으로 어렵기 때문에 그 범위를 축소하여 신구약의 통일성과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이해하고 성경에 기록 된 예수님과 바울 사도의 이해를 핵심적으로 논하므로 율법과 복음에 대한 바른 이해를 중심으로 다루고자 한다.
Ⅱ. 본 론
A. 율법과 복음의 어원적 의미
1. 율법
먼저 구약의 히브리어와 신약의 헬라어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
a. 히브리어1)
구약의 히브리어로는 율법을 ‘토라’라고 한다. 토라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는데 첫째 ‘던진다’ ‘쏜다’ 둘째 ‘교훈 한다’ ‘교육한다’는 뜻이 있다.2) 토라는 또한 계명이나 법령조서나 규례(規例)를 말한다. 또한 혹은 법도, 법률이라고 하며 혹은 종교적․도덕적․사회적 생활에 관하여 신의 이름으로 규정된 법규이며(출 13:9) 혹은 일반적으로 십계명을 중심 한 모세 오경을 가리킨다(요 10:34, 12:34, 15:25). ‘다트’라는 아랍어도‘율법 법령’으로 번역되어 사용하고 있다.3) (단 6:9) 그러므로 다트는 ‘법’ 하나님의 법 (스 7:12) ‘종교’ (단 6:9) ‘칙령 법령’ (단 2:13) ‘계획 목표’ 등으로 나타난다.4)
b. 헬라어
구약의 히브리어 성경은 헬라어 성경으로 주전 286년에 번역되었다. 이 때에 율법을 번역할 때 ‘분배한다’ ‘할당한다’는 의미가 있으나 계명율법이라는 의미가 되었다.
2. 복음
복음이란 ‘좋은 소식’5). 이는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기쁜 소식을 가리킨다(마 11:5, 눅 4:18, 히 4:2~6, 벧전 1:1~2). 신약의 기자들 가운데 바울이 가장 완벽하게 복음의 성격을 규명하고 있다. 그는 헬라어 ‘유앙겔리제스’를 21회를 사용하고 있다. 바울에 있어서 복음은 유대주의를 규정하는 규례나 율법과는 독립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주어진 하나님의 구원을 의미한다. 그리고 대부분 성경 기자들은 간혹 이러한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요한은 이 단어를 전적으로 생략한다. 마태와 마가는 예수께서 복음이 온전하게 전파된 후에야 끝이 온다고 하신 말씀을 기록하고 있다(마 24:14, 막 13:10).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자신과 그 분의 사역이다.
B. 율법과 복음의 내용
1. 율법과 복음
바울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율법을 시내 산에서 모세를 통하여 주신 것은 율법을 백성들이 지킬 수 있고 또 “율법을 지키므로 의롭다는 선언을 받을 수 있어서가 아니라” 율법을 더 하시므로 범죄가 더하게 하여 온전한 구속을 주실 주 곧 자기들을 대신하여, 자기들의 자리에서, 자기들의 죄악을 위해 율법을 온전히 지켜주실 율법의 완성 자이신 메시야 곧 “예수 그리스도를 고대하게 한 것 외에 다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6)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율법 아래 있느냐? 그렇지 않으면 은혜 아래 있느냐? 혹은 양편에 다 속해 있느냐”7) 라는 문제는 이미 초대 교회에서 해결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수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혼돈을 일으키고 있으며 “율법의 사명”과 “은혜의 사명”을 바로 구별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이 문제에 대해서 조금도 의문을 남기지 않았다. 율법은 결코 어느 누구를 구원하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 아니다. 인류 역사상 하나님의 법을 지킴으로서 구원을 얻을 사람이 단 한사람도 없는 것이다.8)
율법은 죄인 중 단 한사람도 구원할 수 없으며 성도 중 단 한 사람도 그 율법으로 그의 구원을 유지할 수 없다는 성경적인 근거를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다.9)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아래 있게 하려함이니라.” 라고 말씀하셨다. 또한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10) 또 갈라디아서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
려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육체가 없느니라.”11) 위와 같이 율법과 복음의 이해가 필수적인 문제가 된다.
율법을 어떤 때에는 하나님 말씀 전체를 가리켜 말할 때도 있으며 어떤 때에는 모세의 오경을 나타내고 다른 성경과 구별하여 “율법”이라고 할 때도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율법과 선지자라는 말씀을 하셨다.12) 또한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구약성경을 ‘율법’ ‘시가서’ ‘예언서’ 이렇게 셋으로 구분했다. 여기서 말하는 율법은 모세가 시내 산에서 받은 이 모든 계명들과 규례를 포함하는 것으로서 시내 산에서 받은 이 모든 계명들과 규례를 포함하는 것으로서 시내 산에서 받은 십계명을 받을 때 동시에 받은 것이고 이 말씀은 출애굽기에13)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 모든 법들 즉 ‘의식 법’과 ‘시민법’과 ‘윤리 법’14) 등으로 나눈다. 이는 다 그리스도의 속죄로 성취되었다. 그렇지만 그 기능이 정지되지 않는 법이 있으니 그것이 곧 윤리의 법이다. 윤리 법 혹은 도덕법은 그리스도의 속죄 이후에 하나님의 뜻의 표현으로서 더 강화되어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에서 그대로 실현되기를 요구한다. 이는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 가는 길이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의식법의 본질과 정신도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에서 실현되어야할 요구로 나타난다. 이것이 화란 신앙고백서 제 25호가 말하는 바 율법의 의식들과 규례들의 진리와 실체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와 함께 남는다는 진술의 뜻이다.15) 가령 그리스도인들이 구원의 필수 요건으로서 안식일을 지키는데 주일을 지키되 구약백성들이 지킨 것보다 더 잘 지키도록 성령께서 역사를 하신다.
이는 율법이 구원의 길로서가 아니라 영으로 사는 백성에게 어떻게 살아야할 것인가를 가르치며 어떻게 하나님을 섬길 것인가를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대로 지켜지기를 요구한다. 즉 “율법이 언약 백성들의 생활 규범으로 역사”16)하기 때문이다. 특히 윤리 법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후에도 일점 일획의 가감 없이 더 강한 요구로 그대로 지켜지되 더 철저히 지켜지도록 요구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가게 한다.
2. 율법과 복음과의 비교
율법과 복음과의 비교에 앞서 중요한 문제는 옳은 사람이냐? 아니면 옳지 못한 사람이냐? 하는 것이다. 만일 옳은 사람이라면 무서워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우리 스스로 하나님 앞에 인정받을 수 없다면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요한1서 2:1)에게로 돌아서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마태복음 27장 51절에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었다는 말씀은 하나님이 계시는 곳으로 사람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해 놓았으나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이 장벽을 제거하신 것이며, 그 사실을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하나님이 계신 곳에 자유로이 드나들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 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 라고 말씀하셨다.
율법은 우리에게 위험한 상태를 보여주기는 하지만 그 위험을 없게 하지는 못한다. 바울 사도는 디모데에게 쓴 편지에서17) “알 것은 이것이니 법은 옳은 바램을 위하여 세운 것이요 오직 불법한 자와 복종치 아니하는 자며…”(딤전 1:9)라고 하였다.
율법과 복음을 비교해보면 아래와 같다.
1. 율법은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오는 것을 금하고 있는데 은혜는 현재의 상태 그대로 나아오라고 초대한다.
2. 율법은 죄인을 정죄 하지만 은혜는 우리를 구속한다.
3. 율법은 이것을 행하라고 명하나 은혜는 이것은 이루었다고 한다.
4. 율법은 노력하라고 하지만 은혜는 마쳤다고 한다.
5. 율법은 죄인을 저주하고 은혜는 믿는 자를 축복한다.
6. 율법은 죄인을 죽이나 은혜는 구원한다.
7. 율법은 하나님 앞에서 모든 입을 막지만 은혜는 모든 입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한다.
8. 율법은 가장 선한 사람도 정죄를 하지만 은혜는 가장 악한 사람도 용서하고 구원한다.
9. 율법은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말하지만 은혜는 하나님의 은사는 영생이라고 말한다.
10. 율법은 빚을 갚으라고 말하나 은혜는 지불되었다고 말한다.
11. 율법은 죄지은 영혼은 죽을 것이라 말하나 은혜는 믿으면 살리라고 말한다.
12. 율법은 사람들의 죄를 드러내나 은혜는 그 죄를 덮어 준다.
13.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나 은혜는 그 죄로부터 벗어나게 한다.
14.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지만 복음과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다.
15. 율법은 복종을 요구하나 복음은 순종하는 능력을 준다.
16. 율법은 돌에 새겨졌으나 복음은 마음에 기록되었다.
17. 율법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라졌지만 복음은 영원히 존재한다.
18. 율법은 우리를 속박하지만 복음은 우리를 자유 하게 한다.
19. 율법은 두려움을 일으키나 복음은 화평과 확신을 가져다 준다.
이 외에도 더 많은 비교를 추가 할 수 있으나 생략하고, 누구든지 자신의 행위와 의로움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자 한다면 이제라도 인간적인 행위에서 믿음으로, 자기 자신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돌이켜야 할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누릴 참 자유는 죄 짓는 자유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섬기고 그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자유인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축복을 내어버리고 다시 율법의 저주 아래로 되돌아 갈 수 있을까?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고 있는 이 안전을 포기하고 내 행위로 구원받고자 하는 노력으로 다시 되돌아 갈 것을 잠시인들 생각이나 할 법한 일인가? 혹은 그리스도께서 주신 구원을 버리고 내 행위로 구원 얻겠다고 피나는 노력을 다시 시작해 볼 것인가? 만일 그렇게 했다면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업을 부인했을 것이요 하나님께 돌리는 모든 영광을 자기에게 돌리며 자기 공로로 구원 받았다고 자랑할 것이다.18)
그러나 결코 그럴 수 없는 일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서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고 말씀하셨고 또한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갈 2:21).”라고 말씀하셨다.
C. 율법의 여러 견해
율법과 복음에 대한 여러 견해는 그릇된 성서 해석과 그릇된 생각으로 나타난 결과로서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특히 유대주의 적인 율법 문자주의와 반 율법주의 그리고 혼합주의이다.
1. 율법주의
율법주의가 주장하는 바는 문자 그대로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서는 올바른 행위를 가지고 율법을 지키고 계명을 다 준수해야 한다는 것이다.19)
이러한 과오는 이미 사도시대에도 있었으며 율법주의자들을 위하여 성령께서 바울을 감동시켜 영혼을 죽이는 그릇된 생각을 바로 잡기 위해서 편지를 쓰게 했고 이 편지가 곧 로마서이다. 이 로마서 전체가 말하는 바는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율법의 행위와는 상관없는 것으로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은혜로 구원된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율법주의자들은 이 복음을 거부한다. 복음을 거부한 유대주의를 살펴보면 유대교에 근거한 유대인의 ‘우월 사상’ 또는 선민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20) 그 사상의 근거는 구약에서도 가장 근본적인 모세 오경이다. 모세 오경을 율법적으로 보는데서 표면화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을 둘로 구분하여 살펴보자.
a. 바리새파
바리새파는 명목상 유대주의와 강력한 대표적 세력이다.21) 그래서 그들이 곧 바리새 즉 분리주의자 라는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 모세의 법에 근거하여서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며 모세의 법을 준수하여 선민에게 약속한 메시야를 대망하면서 백성을 선도한다고 했다.22)
그러나 그들은 신약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에 근거하면(마 5:20)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의 방식으로 하나님의 의가 있었다. 그들의 의는 자기들을 모세의 자리에 앉게 했다(마 23:1). 그러므로 그것은 그들로 화를 자초하게 했다(마 23:13~36). 그 바리새인들은 그들이 율법의 표준을 지나치게 높여서 까다롭게 지킨 것 같지만 사실상 그들은 율법의 표준을 격하시켰다. 그것은 하나님의 수준에서 인간의 수준으로 격하시키는 우를 범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인간의 수준으로 낮추어서 “문자적으로 또 외부적으로 지키면 하나님 앞에서 공로를 얻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공로가 빚보다 많으면 의롭다고 간주된다는 것이다.”23)
팔레스타인의 유대주의를 이상과 같이 율법주의 적 행위의 의24) 를 표방하는 종교로 제시한 것을 의미한다.25) 그 과정을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 오경을 표면적으로 보되 문자로 보았고(문자주의) 율법 제일주의로 보게되었다(율법주의). 이렇게 오경을 율법적으로 보다 보니 형식과 의식에 치우쳐서 형식주의자가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형식을 존중하고 그 형식을 제일로 여기다 보니 표면적으로 포장한 사람이 제일 의롭고, 제일 선하다는 자유주의가 되었고 마침 내는 독선주의자가 되었다.26)
b. 사두개파
사두개인들은 현실파들이고 실용주의자들 이었다.27) 그래서 그들은 천사의 존재와 영과 악신의 존재며 부활 심판을 믿지 않았다. 그들은 위의 바리새파와 마찬가지로 모세 오경을 왜곡하고 파괴하며 육신적이고 물질적이며 현실적으로 치우쳐서 그릇 가르치고 인도하였다. 그래서 신약에 와서 예수님은 사두개인도 바리새인들과 같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고” “화 받을 자들” 이라고 경고했다(마 23:1, 13~66). 그 이유는 하나님의 참뜻과 진리에서 떠나 자기들의 의에 근거하였기 때문이고 마침내 사두개파들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메시야를 대적하였고 해쳤기 때문에 모세의 자리에서 화를 받은 것이다.28)
2. 반 율법주의
반 율법주의란 먼저 말한 율법주의와는 정반대 되는 주장이다. 이 반 율법주의의 는 반 율법이란 뜻인데 이들의 주장은 우리가 은혜로 구원받는 것이기 때문에 어떻게 살아가든지 어
떤 행동을 하든지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29)
이것 역시 성령을 속이는 것이다. 즉 그릇된 주장이다. 이러한 반 율법주의를 반박하기 위하여 성령님께서는 신약성경 중 한 책을 쓰게 했다.30)
그것이 바로 야고보서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율법에서 구원받았지만 우리는 율법 없이 그저 내 버려지거나 율법 없는 자가 된 것이 아니라 새로운 법 즉 생명의 법 아래 있게 된 것이다. 이것을 자유의 법이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은혜로 구원받는 것을 감사하는 사랑의 법이다. 이 법은 행위 자체가 구원을 얻거나 이를 유지하는 데 있어서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결과로서 그 행위는 나타나야 된다고 가르치고 있다.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약 2:24).”31) 라고 말씀하셨다. 이와 같이 “행위가 아닌 은혜로 의롭다 함을 입는다”고 하는 바울의 가르침과 “행위로 의롭다함을 입는다”32)는 야고보의 가르침은 서로 모순되는 말씀처럼 보이나 조화된다.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의롭다함을 받고 우리의 행위로 말미암아 사람 앞에 의롭다함을 얻게 되는 것인데 이를 바울과 야고보가 말하고 있는 것이다. 즉 “믿음은 그 뿌리이며 행위는 그 열매임을 보여줄 때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생활을 들어서 믿음으로 또는 행위로 의롭다 하는 예를 삼았다.”33) 야고보서 기자는 2장 21절에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는 말씀은 믿음이 행함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고 그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된다는 것이다. 이 말씀의 조화됨을 보면서 은혜로 구원받았으니 행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반 율법주의”는 율법주의와 마찬가지로 역시 심각한 과오의 하나이다.34) 그들은 우리가 가진 구약 전체와, 또는 구약 중에 오경을 율법으로 착각하여 그것의 폐기론을 주장하는 것이다.35)
그러나 종교 개혁자 칼빈의 견해는 베드로후서 2장과 유다서 1장 10절(이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그 알지 못하는 것을 훼방하는 도다 또 저희는 이성 없는 짐승같이 본능으로 아는 그것으로 멸망하느니라)에 근거하여 율법의 폐기론 자들도 이단으로 보았다. 그러므로 율법 폐기론이 현대에 심각한 자유주의로 나타난다.
3. 갈라디아인 주의
갈라디아인의 주의란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들 중에 가장 널리 퍼져있는 사상이었기 때문이다.36) 여기서 주장하는 것은 구원은 은혜이고 행위로서가 아니라고 하지만 구원받은 다음에는 율법에 절대 순종해서 이를 지키지 못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즉 “구원은 은혜로 받는 것이지만 행위로 그 구원이 보존 된다.”는 주장이다. 이것도 역시 우리 영혼의 원수인 사단의 교묘한 속임수이다. 갈라디아인 주의는 율법에서 해방된 우리들에게 다시 궁극적인 구원은 율법을 지키는 데에 있다고 속임으로써 우리를 다시 율법으로 얽매이게 하려는 것이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부정하는 것에 불과하다.”37)
이와 같이 “구원은 은혜로 받는 것이지만 행위로 그 구원이 보존된다.”는 그릇된 교리를 반박하기 위해서 성령께서 사도 바울에게 한 편지(갈라디아서)를 쓰게 함으로 우리의 구원이 부분적으로 율법의 행위와 관계가 있다는 그릇된 교리를 일축했다. 그러므로 율법의 바른 이해가 중요하다. 그 서신이 바로 갈라디아서이다. 하나님께서는 갈라디아 지방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사도 바울을 통하여 오직 은혜로만 구원을 받는다는 진리를 가르쳤고 그들은 갈라디아서의 교훈을 믿고, 받아드렸다. 그러나 거짓 교사들이 나타나서 말하기를 “아니요 바울의 가르침은 잘못된 것이요 우리가 구원 얻는 것은 행위가 아니라 단순한 믿음으로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구원받은 다음에는 그 구원을 당신들 자신의 행위에서 보존되는 것이요 그러므로 당신들이 최종 목적지에 도달하느냐? 못하느냐는 여기(갈라디아인 주의)에 달려 있는 것이요”라고 주장했다.
여기에 빠진 성도들을 향하여 바울은 갈라디아서 3장에서 예리하게 반박했다. 즉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갈라디아서 3:13)"38)라고 말했다. 계속해서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누구든지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행하지 않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0).39)고 했다. 갈라디아인 주의는 인간이 은혜로 구원을 받지만 율법을 완전히 지킴으로 그 구원을 보존해 나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오류에 대한 대답이 갈라디아서이다.40)
이 세 가지 오류는 사도행전 15장에 나오는 초대교회의 최초의 회의에서 명확하게 규정되었고 또 서신에서도 해설되어 있지만 아직도 오류들에 대한 이해부족으로 신학적인 논쟁이 교파간에 또는 교단 안에서도 견해를 달리 하고 있다. 우리가 알 것은 예수 그리스도 초림과 공생애의 사역에서 구속을 완성하심으로 예수님은 율법의 마침이 되고, 선민의 완악함을 위하여 편법으로 주셨던 율법을 다시 선포함으로 완전케 하셨다. 이 복음에 대한 바른 이해를 위해 다음 장에서 예수님의 율법이해를 논하여 본다.41)
Ⅲ. 율법과 복음에 대한
바른 이해
성경주의(율법주의)라고 자칭한 그들은 신구약 성경의 주인이신 그리스도를 본문들에서 모시지도 않고, 그리고 성경을 그리스도인에게 내어놓지도 않고,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의로 걸러내지도 않은 상태로 직접 생활에 적용을 시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바울이 깨달은 진리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치며 특별히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을 알게 하고 믿어 순종케 함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성경의 주인으로 모시면 율법주의에 빠지지 않는다. 성경이 메시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유일한 목표를 향하여 달린다. 그리고 신약성경은 성경의 주인이신 예수님과 함께 영원한 천국을 향하여 달리되 재림을 고대한 것이다. 이것을 알지 못하면 성경이 윤리와 법전이 되고 교리로 남아 있게 될 것이다.
A. 예수님의 율법이해
1. 예수님과 시온 율법
예수의 율법이해는 구약의 시온 율법의 기대를 상기할 때 성경적으로 또한 신학적으로 가장 잘 드러나게 된다. 42) 그것은 시온 율법의 기대로부터 모세율법에 대한 예수님의 비판이 가장 올바르게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본래적인 뜻이 가장 잘 파악되기 때문이다. 즉 구약성경 내의 시온 율법의 기대를 상기할 때에만 율법에 대한 성경 전체의 통일성을 발견할 수 있다. 그래서 슈툴마터는 예수 안에서 동시적으로 발견되는 모세 율법에 대한 비판과 심화와 요약은 예수께서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를 값없이 가져오시는 인자 - 메시야이며 또 율법의 메시야적 완성자라는 권리주장을 가지고 등장할 때 가장 통찰력이 있는 것이 된다43)고 말한다. 즉 예수가 모든 사람에게 알려진 종말시의 하나님의 뜻을 수립하기 위해 이 땅에 왔다고 볼 때 신구약에 흐르고 있는 율법에 대한 전승자적인 맥락이44) 가장 체계 있게 연결되며 예수의 지상의 삶의 의미가 가장 잘 이해될 수 있다.45)
이 종말시의 하나님의 뜻을 수립하는 과정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곳은 어디인가? 그것은 예수의 식탁공동체에서이다. 왜냐하면 예수의 세리와 죄인들 즉 비 율법적인 자들과 식탁공동체는 그의 의도적인 비유행위였기 때문이다.46) 그것은 바로 메시야적 인자로서의 자아 의식과 파송 의식을 지녔던 예수님의 의식적인 하나님나라의 비유행위였다. 즉 예수 당시에 식탁교제는 화해와 평화와 공동체 회복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바로 이 비유행위 때문에 예수님은 당시 유대종교 지도자들과 충돌했고 이러한 예수의 자극적인 행위(막 2:13~17, 눅 19:2, 5, 7,)로 인하여 그는 많은 유대인으로부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눅19:7; 막 2:15-16)라는 비난을 받아야 했었고 또 죄인들을 영접하여 함께 음식을 먹는 자(막 2:15)라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비방과 야유를 받아야했다. 이러한 비유행위는 주의 만찬에서 절정을 이룬다. 그리고 예수 안에서 그리고 예수와 함께 종말론적인 하나님나라 생명질서인 시온의 율법이 계시된다. 바로 이 새로운 생명질서와 바리새인의 의를 능가하는 보다 나은 의를 계시하고 증거하며 실천하므로 주께서 당시 유대교의 모든 권위 있는 집단들과 충돌하였던 것이다.47)
하나님 나라의 선포 자로서 또 율법의 메시야적 완성 자로서 예수의 선포는 바리새인․열혈당․사두개인들과의 갈등을 초래하였고 이러한 갈등의 절정에서 예수는 모세율법(신 21:22)에 의해 저주받고 못박혔던 것이다. 이것이 율법의 완성이다. 예수께서 메시야적인 인자로서 시온 율법의 완성자라는 예수님의 권리주장은 초대교회의 산물이 아니라 역사적인 예수님의 자의식으로부터 유래하였음이 명백하다.48)
그러므로 약한 자들을 돕는 의를 실천하고 이웃사랑을 능가하는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사랑을 그의 인격과 삶 속에서 가르치셨고 특히 식탁교제 하시다가 마지막 성만찬에서 그 절정에 자리에서 자기 계시를 하실 때에 주 예수 그리스도 인자 하나님의 아들 곧 메시야로서 환하게 보여 주심으로 율법의 완성 자로 나타나셨던 것이다.
2. 예수님에 의해 계시된 율법
예수 그리스도의 전체 공생애 사역에서 메시야적 하나님 나라가 수립되었다.
즉 종말론적인 마지막 때의 도입 자 곧 성령을 소유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궁극적으로 도입하는 자로 여겼다.49)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 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며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사 61:1~2) 라는 글을 예수님께서 읽으시고 이 글이 오늘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심으로써 (눅 4:16~21) 분명히 하셨다. 나아가서 예수께서는 자신을 구약의 가장 큰 왕보다 더 크고 또 선지자보다 더 크심과 대 선지자이심을 선언 하셨다(마 12:40~42, 눅 11:29~32).
즉 자기가 구약의 모든 선지자들과 왕과 의인들이 보기를 바란 이스라엘의 메시야요 구주임을 분명히 하셨다50)(마 13:16, 17, 눅 10:23, 24). 즉 예수께서 자신을 율법의 완성 자로 밝히므로 자기의 말씀이 율법보다 즉 모세의 권위를 능가함을 밝혔고 예수의 말씀이 율법의 영감보다 월등하다는 주장을 하였다.51) 그의 한 예로 바리새인들이 이혼법 문제로 예수를 시험하였다(막 10:2~9). 예수께서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이혼 허용 법이 편법임을 밝히시고 하나님이 짝지은 것을 사람이 나눌 수 없다고 하여 무엇이 올바른 법인지를 밝히셨다. 즉 모세가 신명기에서 낸 이혼 법이 편법이라고 밝히셨다.52)
마태는 예수의 율법선포를 시내 산 계시와 시온 산 계시 전승과의 맥락에서 산성 설교로 묘사한다. 그 중 원래의 십계명에 관한 언급에서 “옛 사람에게 말한 바”의 말씀에 대한 재해석을 할 때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말씀으로 새로운 권위가 나타나며 계시사의 완성으로서 새 언약의 완전한 율법이 밝히 드러난 것이다.53)
예수께서는 새로운 생명질서와 바리새인 “의”를 능가하는 보다 나은 의를 계시하고 증거하며 실천한 자기 희생으로부터 오는 평화의 율법이었다. 그의 율법은 세상과 결별하는 초월적 세계의 거룩성이 아니라 세상 깊숙히 스며드는 화해와 사랑과 새로운 의로부터 오는 평화의 율법이었다. 그러므로 예수의 율법은 완성된 완전한 평화의 반석이었다. 그리고 그의 말씀은 새로운 율법으로서의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자기계시이다. 이것은 그의 변형 기사에 분명히 밝혀진다. 이상에서 예수는 종말론으로 완성된 시온의 계시라고 말할 수 있다. 즉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이중 계명에 관한 전승(막 12:28~34, 마 22:34~40, 눅 10:25~28)은 당시 유대인의 율법이해와는 다른 역사적 예수의 율법이해를 반영하고 있다. 가장 큰 계명에 관한 질문에 랍비의 견해와 일치한다. 이는 이중 사랑의 계명으로54) 주어진다.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의 사랑을 예수께서는 그의 인격 안에서 재현했다. 새 생명의 질서인 사랑과 새로운 의를 실천한 예수의 율법이해는 유대인의 율법이해와 구별된다.
B. 바울 사도의 율법이해
바울은 율법을 구원사적으로 이해하였다. 처음 바울은 율법주의에 속해 있었으나 다메색 도상에서 부활의 주를 만난 후 회심하여 율법주의가 복음을 거부하였음을 드러내는 율법이해로서 큰 차이가 있다. 고로 급격한 바울의 전환점은 그의 율법이해에 밀접한 관련이 있다.
1. 율법에 관련된 바울의 이해
율법주의자가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다고 당당했던 사울의 시기와 다메섹 사건 후의 그리스도를 만난 후 죄인 괴수요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자로 인해서 멸망 받을 자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딤전 1:15) 구주로 증거 했던 시기가 있다.
바울은 생애의 전환점으로 율법이해와 그 문제점이 논쟁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즉 바울은 훌륭한 교육을 받은 바리새적인 율법학자요(빌 3:4, 5), 또한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이다(빌 3:6). 단지 여기에서만 언급하고 바울 서신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바리새인에 대한 언급이 발견된다. 이는 바울이 유대교에 속해있던 과거의 그릇된 자아상을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 생애의 전환점은 그의 율법이해의 분기점이 된다. 바울은 유대적 율법으로 볼 때 예수는 율법의 저주를 받았으며 메시야가 아니었다. 그러나 부활의 주께서 다메색에 현현하심을 바울의 회심은 그의 모든 가치관을 변화시켰다.
바울의 고백은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빌 3:8).”고 했다. 곧 예수 그리스도가 율법에 저주받은 자가 아니고 구원의 길로서 율법의 자리에 놓이게 되었다. 또한 바울의 회심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이방인에게 율법으로부터 자유한 복음을 선포하는 부르심으로 이해하게 된 것이다(갈 1:6~17). 그래서 빌캔스는 우리가 바울의 회심이라고 부르는 전기적 표현 (빌 3:3~11)은 “그가 로마서 10:4에서” 율법의 끝이요 완성으로 표현한 구속사적 어투와 그 이해에 있어서 일치한다고 말한다.
2. 바울의 율법이해
1) 바울의 의인과 율법개념
바울은 그의 서간에서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교리를 짜임새 있게 논했다. 로마서에서는 복음과 하나님의 의와 죄의 보편성과 의인의 근거와 구원의 성화와 하나님의 주권과 구원받은 자의 삶 등에 관해 논했고 여기서 바울은 이신득의 즉 이신득구를 말한다. 그는 인간이 의롭게 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음으로 얻어진다 하였다(율법의 행함이 없어도).55) 동시에 그는 율법이 사람을 의롭게 할 수 없다 하였다.56)
그렇다면
-율법의 목적은 무엇인가?
-율법의 역할은 무엇인가?
-율법은 하나님께서 주신 규례가 아니라는 말인가?
-율법은 하나님의 구원사와 무관한가?
-바울은 구원사를 떠나서 율법을 보는가? 등의 문제가 제기된다.
즉 바울은 전에는 율법이 하나님의 구원사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다른 것으로 교체되었다고 본다. 즉 바울의 의인과 율법자유에 대한 적극적인 이해․성령과 자유의 관계 등 “율법은 사도 바울의 중요한 관심사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율법과 육체와의 관계 같은 것들이 역사적 상황에서 파생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율법이라는 제목의 범위는 구원에 대한 유대주의 적 이해에까지 뻗어 나갈 뿐 아니라 복음을 전파하는 일로 말미암아 구원의 어떠한 가능한 방법도 그것을 의문에 붙이게 한다. 율법 특히 신학적 견지에 이해되어야 한다.57) 즉 율법은 복음을 설명하는 일에 공헌을 하는 것이며58) 그것은 하나님의 교리일59) 뿐만 아니라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계시이며60) 그 계시의 역사로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다.61)
(1) 용어문제
바울은 율법을 구약성경의 율법 또는 율법으로 간주되는 모든 구약 성경을 가리킨다. 바울은 하나님의 뜻이 어느 곳에서나 작용하며 이방인들 가운데서도 작용한다는 것과 또 어디서나 하나님은 알려져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62) 예루살렘의 헬라주의 자들과는 달리 바울은 도덕법과 의식 법을 대항하지 않는다. 모든 율법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으로서 그리스도에게서 끝이 났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다.63) 바울은 적극적인 의미에서 율법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할 때 그는 사실 도덕적 계명들을 생각하고 있다.64) 그것은 로마서 2장에서 열거한 실례들 즉 도둑질 살인 간음 등 계명을 7장에서 요약하기를 “탐내지 말라”라는 말이라고 했고65) 또 예수님을 따라서 사랑하라는 계명이 율법의 종합이라고 묘사했다.66) 그렇다면 이 율법이 어떻게 끝나버릴 수 있으며 또 어떤 의미에서 그렇게 되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해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논한다.
(a) 구원사에서 율법이 가지고 있는 기능을 정의함으로써 율법에서 벗어났음을 논한다.
(b) 적극적으로 자유 함을 받았는데 신앙의 자유를 누림으로써 율법 에서 해방되었음 을 논한다.67)
2) 율법과 구원사68)
바울은 갈라디아서 3장 이하에서 역사를 구분하여 율법이 주어지기 전 시대와 후의 시대를 구분했다. 즉 아브라함부터 모세까지와 모세로부터 그리스도까지의 두 시대이다. 아브라함은 율법을 받은 것이 아니라 약속을 받았다. 따라서 시간적으로 약속이 율법보다 앞선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후 430년 만에 모세를 통해서 주신 율법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을 무효한 것으로 만들 수는 없다.69) 그리고 율법은 언약백성의 범법함을 인하여 수여된 것이며 천사들의 시종 중 모세란 중보 자를 통해 주셨고 그 유효기간은 완전하신 중보자 그리스도가 오시기까지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해 율법의 마침이 되신 것이다.70)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구원사의 새로운 상황과 새로운 기원이 실제로 시작되었다.71) 그것이 세상에서 보여지는 것은 단지 말씀의 현존으로서 율법의 종말에 관한 선포로서 뿐이다.
이 명제는 그리스도교의 역사적 해석을 위한 하나의 원리로서 사용될 수는 없다. 그것은 단지 신앙의 본질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라고 이해될 수 있다.72) 율법의 종말은 세상적인 어떤 사건들의 상태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의 상황이다. 그러기 때문에 한편으로 율법의 요구조건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해서 수행되었다. 이렇게 하여 우리가 율법으로부터 속량을 받았으므로 율법이 한편 구원의 방도로서 끝이 났음이 분명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이 하나의 도덕적 요구로서 그대로 남아서 효력을 발휘하고 있음이 확실하다.73) 율법은 확실히 거짓이 아니라 참이요 그것은 생명을 위해서 주어질 것이다.74) 그러므로 그것을 모두 완전히 수행함으로서만 생명을 얻는다.75)
왜냐하면 그 요구는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76) 그러나 율법을 조금도 흠이 없이 완전하게 다 행한다는 것은 사람으로서는 누구도 불가능한 일이다.77) 즉 율법은 구원을 위해서 주신 것인데도 그것이 너무 높아서 아무도 그것을 (요구)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을 행함으로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에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78)라고 바울은 고백했다.
사망에 머무르는 우리를 생명으로 옮기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오셨다. 우리는 보냄을 받으신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셨다.79) 그러면 율법은 무용할 것인가? 아니다 율법은 아직도 유효하다. 믿음은 율법을 폐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운다.80) 바울이 이렇게 율법의 두 가지 모습을 구별하고 있다. 바울이 구원사적으로 객관화하여 설명하는 것을 보면
(1) 율법의 요구와 비교를 했고,
(2) 죄와 비교해서 은혜가 월등하다.
이것을 증명할 수 있는 근거들을 제시하려는데 그 의도가 있다. 즉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의 구원행위는 이미 앞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어디로부터 해방을 받았는지의 문제를 알아 눈을 뜨게 해 준다. 나는 이러한 구원행위를 내게 전달해 주는 복음을 통해서 나의 자유를 체험한다. 나는 그리스도의 안에서 자유를 가진다. 새 시대가 약속되었다. 율법의 종말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다.81)
C. 사도들의 율법이해
1. 사도들이 이해한 율법
a. 신약시대의 율법의 3가지 오류
신약의 성경 중 3권 이상이 주로 율법에 관한 오류를 시정하기 위해 기록되었다.82) 사도시대로부터 시작하여 내려온 율법에 관한 오류는 다음 3가지가 있다.
(1) 율법주의
율법주의는 사람이 율법을 지킴으로서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한다. 이 오류에 대한 해답이 바로 바울의 로마서이다.83)
(2) 반 율법주의
반 율법주의는 율법주의와는 정반대로 모든 것이 은혜이므로 인간이 어떻게 살든 상관 할 바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 오류에 대한 해답이 야고보서이다.84)
(3) 갈라디아인 주의
갈라디아인 주의는 인간이 은혜로 구원을 받지만 율법을 완전히 지키므로 그 구원을 보존해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오류에 대한 즉 믿음으로는 단순히 의롭다하심을 입을 뿐이며 궁극적인 구원은 율법의 행위에 의해 결정된다는 주장을 말한다. 이 오류에 대한 해답이 갈라디아서이다.85) 이 세 가지 오류는 초대 교회의 최초의 회의(행 15장)에서 명확하게 규정되었고 또 서신 서에서도 해설되어 있지만 아직도 이 오류들은 계속되고 있다.
2. 율법은 생활규범
율법은 생활규범으로 주어졌지 구원의 방편으로나 구원의 길로서 있는 것이 아니라 언약 백성들의 생활규범과 법칙 으로 있는 것이다.86)
넓은 의미에서 율법은 다음과 같이 분류할 수 있다.
(1) 도덕적인 율법의 계명87)
계명은 이스라엘의 신앙과 윤리적 도덕적 행위를 명시하고 있는 율법이다.
(2) 재판(민법)에 관한 율법88)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민법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3) 의식에 관한 율법89)
이는 이스라엘 종교적 의식과 의무를 다루고 있는 율법이다. 여기는 성실과 희생 그리고 제사가 포함되어 있다.90)
이상과 같은 율법이 구원을 얻음에 결부되어 강조될 성질의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이미 로마서에서 그리고 갈라디아서와 히브리서 등에서 사도들이 밝힌 바요 서신서와 초대교회의 최초회의91) 에서와 복음서에서92) 결판이 난 문제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후의 율법은 구원의 방편으로 길로서 있는 것이 아니다.
사도들의 이해는 율법은 구원의 길로서 생활에 자유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준수해서 살아야 할 생활의 규범으로서 그 몫을 가진다. 그러므로 율법은 언약백성들의 생활규범이고 법칙이다. 구원 얻은 백성은 율법을 준수해서 살아야한다.93)
바울은 이를 구속사적으로 이해하였다. 즉 율법은 복음의 예비 단계이었다. 바울에 의하면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고 율법을 지킴으로 얻는 것이 아니다. 구원의 길로서의 율법은 이제 그 기능을 완결하였다. 이는 신명기 21:21~23의 내용과 같이 즉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아주 보상적인 측면에서 이해하고 있음을 일러준다.94) 특히 사도들은 야고 보와 베드로와 바울의 지도를 따라서 율법을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생활규범으로 확정하였다.95)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율법의 폐지를 반복하고 즉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단 한번의 제사로 말미암아 아론의 제사직은 종결되고 폐지되었고96) 십자가의 피로서 구원이 이루어지므로 지금까지의 구원의 길로서의 율법과 속죄의 길로서 율법은 끝이 나고 무기력해지도 아무 구속력도 없다고 강조한다.
구원의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믿음뿐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이 아주 무관한 것은 아니다. 율법은 언약백성의 생활 규범으로 주어졌고 역사 한다. 그리고 율법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리스도의 구속을 바로 이해하는데 필수 불가결하다. 때문에 율법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그 권위를 가진다.97) 하나님께서 제사보다 순종을 원하신다고 하신 말씀은 분명히 여러 가지 애매한 점을 일소해 주고 있다. 즉 “성경은 사실상 전체가 율법에 대한 해석이며 따라서 율법이라는 명칭에 포함된다.”98)
3. 구원은 은혜로 율법은 생활규범
구원은 은혜로 얻지만 율법은 구원 얻은 그리스도인의 생활 규범과 법칙으로 존속한다.
위에서 살폈듯이 율법은 바울에 의하면 구원의 길이 아니다. 그러나 본질과 정신에 있어서는 구원받는 자들의 생활의 법칙이요 규범으로서 남는다. 왜냐하면 율법은 언약을 지키는 방패요 울타리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약시대에도 율법의 법칙성과 그 규범성을 그 본질과 정신에 있어서 윤리 법에만 해당할 뿐 아니라 의식법과 시민법에도 미친다.99)
(1) 율법의 의식 법
율법의 의식 법은 그 본질과 정신에 있어서 곧 예배와 경건 생활의 규범이 된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옛 언약의 구워 질서들 곧 모든 의식 법들의 시행을 종결시키고 폐하셨다. 그러나 의식법의 본질과 정신까지도 폐지케 하신 것은 아니다. 그 의식법의 본질과 정신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예배와 경건 생활의 규범이 되게 하셨다.100)
(2) 율법의 시민법
율법의 시민법은 현대사에서 통할 수 없는 것이 많으나 그 정신 즉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기도록 조직되고 진행되어야 한다는 진리는 모든 국가의 규범이 되어야 할 것이다.101)
(3) 율법의 윤리 법
율법의 윤리 법은 그 본질과 정신에 있어서 곧 그리스도인들의 생활규범과 법칙이 된다. 구원의 길로서 율법의 기능 종결과 폐지를 논한 히브리서도 율법 중에 윤리 법은 그리스도인들의 생활 법칙으로 강조하고 있음을 본다.102)
Ⅳ.현금 교회적용의 율법이해 문제
세계 교회사를 살펴보면 “율법과 복음의 문제는 교회사 전체를 통하여 가장 중요하고도 난해한 주제들 중의 하나이다.”103) 이 문제를 바로 이해하지 못하여 많은 이단들과 잘못된 사상들이 속출했다. 각 시대의 교회들은 율법주의와 무 율법주의와 갈라디아인주의 등의 대립과 갈등으로 점철되어 왔음을 본다. 초기 사도시대로부터 시작되어온 오류에는 3가지가 있다.104) 그것은 율법주의․반 율법주의․갈라디아인주의 등이다.105)
이는 현금의 한국교회도 위와 같다. 즉 “루터(Martin Luther)가 종교 개혁을 일으켜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진리를 발견해 준지가 오백 년이 지났어도 복음과 율법과의 관계가 바로 이해되지 못해 아직도 교회에 큰 혼란이 있다.”106)
그러므로 현금 교회가 복음과 율법과의 관계를 바로 이해하려면 바울 사도처럼 구원사적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즉 율법은 구원이신 그리스도의 백성들을 인도하기 위해서 주어진 몽학 선생이었다. 그리스도가 오셔서 율법을 다 성취하시므로 구원은 오직 그를 믿음으로이다. 아름답고 거룩하고 영광스런 구원의 축복에 대하여 율법은 더 이상의 발언권이 없어지게 되었다. 구원의 길로서는 율법이 종결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에다 율법준수를 첨가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충족성과 주권 성을 허는 것이었다.” 즉 “바울은 이 혼합주의에 목숨을 걸고 대항하였다.”107)
신약과 사도들에 의하면 율법은 구원의 길로서 그리스도의 생활에 자리를 가지는 것이 아니고 준거해서 살 생활의 규범으로서 몫을 가진다. “율법은 언약백성들의 생활규범이고 법칙.”108)인 것이다.
구원 얻는 백성은 율법을 준거해서 살아야 한다. 바울은 이것도 “구원사적”으로 이해하였다. 언약 백성들의 생활법칙으로서 율법은 육을 따라서 사는 옛 언약 백성들에게 도저히 지켜질 수 없었다. 그러기에 영을 따라서 살아가는 신령한 자들에게서 율법의 의로운 요구가 지켜지게 하셨다. 이것도 모두 그리스도의 구속의 공로 때문이다.
그러면 율법과 복음에 대한 바른 이해를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찾기 위해 다음과 같이 고찰한다.
A. 현금 교회의 율법이해의 해답
1. 율법주의 (Legalism)
율법주의는 모세의 율법을 하나님의 계시로 믿었고 이런 생각은 유대의 기본 전제이다. 이점은 예수의 견해와도 일치한다. 랍비들에 의한 율법주의 적 견해를 통해 본래의 율법정신과 목적에서 이탈하게 되었다. 그 중의 몇 가지를 살펴보자.
a. 율법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이다.
b. 율법에는 인간의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이 다 들어있다.
c. 율법에는 오류가 있을 수 없다.
d. 율법은 그 저자인 하나님과 같이 완전하다.
e. 예언자들은 모세가 선포한 것을 다만 부언하고 응용했을 따름이다. 저들의 신의에 새 것이라곤 아무 것도 보탠 것이 없다.
f. 모세의 율법에 배치되는 것을 가르치는 자는 거짓 선생이요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다. 이상의 랍비들의 논리이다.109)
g. 랍비들의 율법적용 문제
그들은 율법을 적용함에 있어서 다른 세목들을 (법률) 재정 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해석과 설명은 새로운 명령을 낳게 되었다. 그리하여 행위에 대한 무수한 정의가 내려지고 그것은 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다른 금지령을 낳게 하였다.110) 이러한 율법주의는 예수의 시대에도 확대되어 율법의 절정에 이르렀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 도다.”111) 했고,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 도다112)라고 말씀하셨다. 따라서 종교적 교훈과 지도 원은 율법 전문가들인 랍비들의 수중에 집중되었다. 이렇게 되자 저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전력으로 그들의 설교를 승인하지 않는 자들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급기야 그들은 예수를 이단으로 정죄하여 십자가에 못박은 것이다. 이러한 그들은 율법해석과 종교적 편견으로 율법의 문자와 형식에 가두어 율법의 본래적 정신과 목적에서 이탈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율법주의자였던 바울이 주님을 만나 변화 받은 후 율법주의의 오류에 대한 해답이요 바른 이해로서 로마서를113) 성령의 지도를 따라 기록했고 율법주의의 오류에 대한 해답이 된다.
2. 반 율법주의
반 율법주의는 먼저 말했던 율법주의와는 정 반대되는 주장이다. 이 반 율법주의는 율법의 폐기론으로서 즉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어떻게 살아가든 어떤 행동을 하든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114)
이도 역시 성령을 좇아 행하지 않음이다. 이러한 반 율법주의자들의 경계를 위해 역시 성령께서 신약 성경 중에 한 책을 쓰게 하셨다. 그 책이 바로 야고보서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속의 은혜로 구원을 받고 난 후에 율법 없이 그저 내버려지거나 율법 없는 자가 된 것이 아니다. 야고보서는 “그의 윤리에서는 자만을 인정하지 않는다.”115) 그리고 “말과 행위는 모든 그릇된 언행을 심판하는 자유의 율법과 조화를 이루어야한다.”116)
그리스도와 율법사이의 관계성을 잘 밝혀주는 3가지 요소를 보면 다음과 같다.
a. 율법은 더 이상 그리스도의 교회에 무분별 적이고 무제한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다. 즉 어떤 의미에선 교회가 “율법 없음”과 같이 보이게 되었다.
b. 그렇다고 하나님의 율법이 폐기된 것은 아니다.
c. 지속적인 율법의 중요성은 “그리스도의 법에 매이는 것”으로도 표현되고 있다.117)
새로운 법 즉 이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니라(로마서 8:2). 했다. 생명의 법 아래 있고, 자유의 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법은 행위 자체가 구원을 얻는 데나 이를 유지하는 데 있어서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구원 얻는 결과로서 그 행위는 나타나야 된다고 가르친다. 많은 사람들이 잘못 이해하고 있는 사실을 야고보는 다음 귀절에서 요약해 증거 한다. “이로 보건 데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약 2:24).”118) 언뜻 보기에는 이 말씀은 “율법의 행위로 그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119) 하신 말씀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즉 “행위가 아닌 은혜로 의롭다함을 입는다”는 바울의 가르침과 “행위로 의롭다함을 입는다”는 야고보의 가르침을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겠는가?120) 정말 그 말씀들은 서로 모순되는 말씀인가?121) 이 성경 말씀들을 다른 성경말씀들처럼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말씀은 무엇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가? 이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말하는 것은 한 죄인이 하나님 보시기에 의로워지는 방법을 말하고 있는 것인데 이는 믿음으로만 된다는 것이다. 반면에 야고보는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은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사람 앞에 의롭다함을 받겠느냐 하는 문제를 다루었다.
이에 대한 해답도 분명하다.122) 행위로 된다. 하나님께서는 회개한 심령을 보신다. 그리고 그를 의롭다고 선포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구원받았다는 사람의 행위를 보지 않고는 이를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그러므로 “믿음은 그 뿌리이며 행위는 속 사람의 변화된 열매이다.” 두 사도는 다같이 아브라함의 예를 들어 믿음으로 또는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것이다 라는 예를 들었다(로마서 4:3, 약 2:21).123) 이는 반 율법주의 즉 은혜로 구원받았으니 행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이론에 대한 반증이다.
d. 율법의 폐기론
(1) 신자들에게 율법무용론의 반박
율법 폐기론의 반박에는 “모세의 증거”124) (신 32:46~47)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증거 한 모든 말을 너희 마음에 두고 너희 자녀에게 명하여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게 하라. 이는 너희에게 허사가 아니라, 너희 생명이니라.” “다윗의 증거”는 “의인은 주야로 말씀을 묵상한다.”고 했다.125)
(2) 율법폐기는 양심해방과 의식폐지다.126)
(a) 도덕적 율법이 폐기된 것이 아니고 저주가 폐기되었다.127)
(b) 율법의 저주의 폐기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된 것이다.128)
(3) 의식법은 십자가로 말미암아 폐기되었다.
이러한 반 율법주의는 율법주의와 마찬가지로 심각한 과오의 하나이다. 이 문제의 해답으로 야고보서를 성령으로 감동하셔서 쓰게 하사 우리에게 바른 이해를 갖게 하셨다. 이는 공관복음이 다른 것 같으나 한 주를 증거하고 있음과 같다.
3. 갈라디아인 주의129)
율법 역할에 관한 세 번째 잘못은 무엇인가? 이는 곧 갈라디아인 주의이다. 이런 주장은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에 널리 퍼져있던 사상이다. 이에 대해 “바울은 이 혼합주의에 목숨을 걸고 대항하였다.”130) 갈라디아인주의의 특성은 행위로서가 아니라 주를 믿음으로 구원받았지만 구원받은 다음에는 율법에 절대 순종해서 ‘할례’를 받고 규례들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갈라디아인들의 경우처럼 할례를 받고 율법을 다시 지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무효화된다는 것이 바울의 주장 이다.”131) 갈라디아서가 나오게 된 배경은 바울이 교회를 세우고 다른 곳으로 전도여행을 하고 돌아와서 보자,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바울이 세워놓은 교회에 다니면서 예수를 믿어도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모세의 율법을 가르치고 지켜야 구원을 얻는다고 하여 이방 그리스도인들에게 대 혼란을 일으켰다.132)
바울이 더욱 놀란 것은 이방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 십자가 이후에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키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또 이렇게 율법을 준수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무효화된다는 진리이다.133) 그러므로 바울은 십자가 복음 외에 혼합주의 적인 다른 복음을 전하면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저주를 받을 것이니라 고 했다.134)
바울은 특히 (갈 2:15~3:29, 사 53:12)135)에 강조를 두고 말했다. 즉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바울은 여기서 “십자가 은혜를 폐하지 말라고 하였다.” 이는 사랑이신 하나님의 이신득의 원리를 로마서와 연결하여 이해하고 가르친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 혼합주의를 버려야 할 것이다. 즉 율법을 구원의 길로서 좇지 말고 성령의 생명의 법을 좇아 살아라 이는 “성령으로 시작”하였으니 성령으로 마치라는 권고이다.136) 갈라디아서 4장 1-11절은 복음의 우월성을 말한다.
그러나 혼합주의는 구원은 주의 은혜로 받는 것이지만 율법을 지키는 행위로 구원이 보존된다는 주장이다. 이는 성령을 좇음이 아니다. 율법에서 해방된 그리스도인들에게 다시 궁극적인 구원은 율법을 지키는데 있다고 속임으로써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기까지 사랑하신 은혜로 구원을 받았는데 이것을 십자가를 무효화 시켜서 다시 율법으로 얽매이게 하려는 것이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우리 “하나님의 말씀”을 부정하는 것에 불과하다.137)
이처럼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 것이지만 행위로 그 구원이 보존된다는 그릇된 교리를 바르게 하기 위해 성령께서 바울을 통해 갈라디아서를 기록케 하여 이런 오류에 빠지지 않게 하신다. 즉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즉 율법 안에서 의롭다함을 얻으려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다. 우리는 갈라디아인 주의적 혼합주의의 오류에 대한 바른 이해와 통찰력을 가지고 한국교회에 뿌리를 내리려는 갈라디아인 주의를 뽑아내는 작업에 불붙는 바울의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몇 가지 논하고 저 한다.138)
a. 율법이 못하는 일
하나님의 율법은 거룩하고 영원하며 완전하고 선하다. 율법은 자신의 행위와 공로 그리고 노력으로 구원 얻으려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의의 완전한 표준이 된다. 이 율법은 능력이 있어서 낱낱의 범행에 대해서 처벌을 요구한다. 율법은 공정하기 때문에 모든 사람을 똑같이 취급한다. 율법 아래서는 차별대우가 없다. 죄짓는 영혼은 멸망하며 예외가 없다. 율법은 확고하고 엄격하기 때문에 아무리 진실한 노력도 헛되고, 그 율법의 멍에를 벗어나지 못한다고 한다. 모든 죄를 정죄하고 저주하며 죄가 관련된 한 크고 작은 죄의 차별이 없다. 왜냐하면 율법이 요구하는 것은 절대적이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않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갈 3:10) 했고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2, 23) 라고 말씀하신다.
이 율법은 영원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율법의 권세와 정죄와 저주로부터 구해주시는 하나님의 도를 거부하는 모든 사람에게 율법은 오늘도 정죄와 진노를 발하고 있다. 만일 어떤 인간이든 율법으로 구원받을 수 있었다면 스스로 구원받을 사람들을 위해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실 필요가 있겠는가?139) 만일 구원을 받은 사람이 그 구원을 보존하기 위하여 율법을 지켜야 한다면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대언 하여 주실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자신의 행위로서 의로워 질 수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그리스도가 쓸데없이 십자가에 죽으셨다고 말하는 것은 참으로 하나님께 대한 무서운 반발이며 오류를 범하게 된다.140)
b. 우리는 율법을 굳게 세운다.
우리가 율법을 지킬 수 없다고 해서 율법의 가치와 지위가 떨어지거나 약화되지 않는다. 성경은 말씀하시길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로마서 3:31) 우리가 하나님의 율법요구를 만족케 할 수 없다고 고백하는 것은 오히려 율법의 완전성을 증명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지킬 수 있다고 한다면 율법을 불안전한 인간의 정도로 끌어내리는 것이 된다. 하나님의 율법은 너무 높고 선하고 완전하고 거룩하기 때문에 우리와 같이 연약하고 보잘 것 없고 타락한 죄인은 할 수 없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 율법의 거룩함을 찬양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불완전한 곳까지 끌어내리지 말고 지킬 수 없다고 고백함으로서 율법의 완전성을 굳게 세우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한 은혜의 구원이요 성경구원이다.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로마서 4:5).” 라고 말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만이 율법을 완성케 한다.141)
c. 율법이 할 수 없다는 것
우리는 율법이 죄를 정죄할 수 있음을 보았다. 동시에 율법은 그 죄인을 구원하는 데엔 무력함을 알 수 있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녀들을 정죄 함에도 무력함을 안다. 하나님의 자녀는 영원히 이 율법에서 해방된 것이다. 주님이 우리의 승리자요 해방 자이시다. 바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로마서 7:25).”라고 고백했으며 자기의 힘으로는 속 사람인 새사람과 옛사람 사이에서 생명의 법과 사망의 법과 싸우다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김을 감사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7장에서 감사하고 8장 1절에서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 함이 없나니(로마서 8:1).”라고 말하면서 승리를 찬양하며 육신의 연약성과 옛 성품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율법에 묶여있을 때 처절한 패배에도 불구하고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당당하게 말했다. 예수 안에 있는 자의 구원은 소멸되지 않는다.142) 실패와 패배는 주님으로부터 징계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의 손해를 초래할 수는 있지만 “결코 정죄함이 없다” 율법을 완전히 지키면 정죄함이 없다가 아니다. 오직 대제사장을 모시고 그 안에 살면서 죄지은 것을 자백하기만 하면 깨끗함을 받는다.(요한 일서 1:9)
d. 육신으로 인한 연약성과 율법143)
육신으로 인한 연약한 자를 율법이 구원하거나 구원받은 성도를 보존하는데 전혀 무력하다고 살펴보았다. 또한 율법은 거룩하지만 육신으로 인한 연약한 자를 (범죄자) 거룩하게 할 수 없다. 율법은 의롭지만 불의와 부정을 의롭게 할 수 없다. 율법은 할 수도 없거니와 하려하지도 않는다. 율법의 사명은 거룩한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준다. 구원이란 바로 거룩한 하나님의 의를 요구하는데 율법이 주지 못한다. 율법은 자(尺)와 같아서 하나님의 의의 표준에 얼마나 부족한가를 가르친다.144) 그 율법의 자를 가지고 결함을 고쳐주지 못한다.
자기의 부족함을 자인하고 자신의 헛된 투쟁을 중단하고 복음이신 그리스도에게 나와야 한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 할 때 복수로 죄들이라 하지 않음은 단 한가지의 죄라도 율법의 저주를 받기에 충분함을 의미한다. 야고보는 2장 10절에 말하기를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했다. 죄는 죄이다. 그리고 아담의 원죄까지 처리되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아담과 상관없는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처녀의 몸에서 나시고, 율법이 아담 자손을 의롭게 하는 일에 실패하자 가엾은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둘째 아담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것이다. 그리고 육신 속에 있는 죄를 율법의 요구대로 독생자의 흠 없는 둘째 아담의 육체에 정죄 하사 율법의 요구를 이룬 것이다.145) 십자가의 정죄는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확실하게 보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육신 속에 있는 죄를 정죄하는 것”이라고 했다.
e. 대제사장과 율법146)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약 2500년까지 율법은 없다. 돌 비에 쓴 율법은 이스라엘이 노예생활에서 구출되고 피로서 구속된 다음에 모세에게이요 그 전에는 천성과 양심의 빛이 비추어졌을 것이다. 그 후 이스라엘 민족에게 율법을 주셨는데 3차례나 주셨다. 첫 번째는 모세에게 구두로 말씀하셔서 민족에게 전하게 하셨고 이스라엘 민족은 온전히 받아들이기로 대답했다(출 19:8). 그들은 온전히 지킬 수 없음을 깨닫지 못했다. 율법의 깊은 의미를 모르고 무작정 지킨다고 했고 장담했기 때문에 여호와께서 다시 모세를 산으로 부르시고 문자로 돌 비에 새겨주셨다. 이것이 두 번째 받은 율법이다(출 24:2, 15, 18, 31:18).
왜 사십 일 동안이나 걸렸을까 의문을 갖게 된다. 이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그 기간 동안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을 지킬 수 없음을 자각하도록 하여주기 위함이다. 이는 모세가 늦게 내려온 이유 중의 하나이다. 하나님을 온전히 섬길 수 없는 사실증명이다. 두 번째는 율법을 범한 것에 대한 심판을 면할 방법을 마련해 주시기 위해서이다. 즉 모세가 전하려 했던 율법은 지체 없이 죽음을 선고하고 있다. 따라서 죄의 값은 무엇으로 지불되지 않으면 그 백성을 모두 멸망할 수밖에 없는 형편에 있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범죄자 정죄와 저주하는 율법을 주신 동시에 그들이 저주로부터 구원함을 받을 수 있는 방법도 마련해 주셨다.
(1) 장막을 세우심147)
모세가 율법을 받으려고 시내 산에 올라갔을 때 두 돌판 외에 피 뿌리는 장막의 제사를 통해 구원받는 방법을 받아 왔다. 출애굽기 24장 12절로 18절과 37장 7절 사이에는 깨어진 율법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인 장막모형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바로 율법을 범했을 때 어떻게 구원받는가 하는 방법을 마련해 주기 위해 40일간 걸렸던 것이다. 계명만 가져왔다면 망했을 것이지만 그 외의 피로서 구원받는 복음을 가지고 내려왔다.
이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다. 히브리기자는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가라사대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좇아 지으라 하셨느니라(히브리서 8:5).” 했고 또한 광야에 있던 이 장막은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하나의 그림자였고 하나의 모형이었다. “이제 한 말에 중요한 것은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라 그가 하늘에서 위엄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으니 성소와 참 장막에 부리는 자라 이 장막은 주께서 베푸신 것이요 사람이 한 것이 아니니라(히 8:12; 9:11,12).”148) 고 하셨고 또한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짖지 아니한 곧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고 하셨다.
장막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다. 이것은 “회막”(會幕)이라고 불리웠다. 왜냐하면 피를 근거로 죄인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세는 시내 산에서 죄인을 선고한 율법과 세상 죄를 지신 하나님의 어린양인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성막의 모형을 가지고 내려 왔다.149)
모세가 두 번째 받은 돌 비의 십계명을 받기도 전에 이미 율법을 어겨버렸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실패를 예상하시고 자비를 베풀어주신다. 그것이 곧 예수 그리스도이며 그의 피의 값으로 깨어진 율법의 값을 지불하게 하시고 그로 말미암아 죄인들을 건져내신다. 장막의 부분은 어린양을 가리키고 특히 지성소 언약 궤가 그 핵심이다.
(2) 세 번째 주신 율법150)
언약 궤를 들여다보기 전에 세 번째 주신 율법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주신 돌 판은 깨어지고 피 뿌리는 성막의 설계도뿐이었다. 이로써 세 번째 율법이 주어진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두 돌 판을 처음 것과 같이 깎아 만들라 네가 깨뜨린 바 처음 판에 있는 말을 그 판에 쓰리니 아침 전에 예비하고 아침에 시내 산에 올라와 산꼭대기에서 내게 보이라. 모세가 두 돌 판을 처음과 같이 깎아 만들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그 두 돌 판을 손에 들고 여호와의 명하신 대로 시내 산에 올라가니(출 34:1, 2, 4).”라고 말했다.
다시 만든 율법은 장막 안에 있는 언약 궤 속에 꼭꼭 감추어 놓도록 되어 있다.151) 언약 궤는 장막의 중심이요 핵심이다. 장방형의 상자인 이 언약 궤는 금으로 입혀졌고 순금으로 된 뚜껑을 덮었으며 그 위에 두 천사가 날개를 펴고있는 형상을 가지고 있다. 그 속에다 돌 판을 넣어두도록 했다. 이 율법은 처벌을 요구하며 완전한 의를 요구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율법이 들어있는 상자를 속죄소라고 부르는 뚜껑으로 덮게 하셨다. 상자 속에는 사망을 선고하는 율법이 들어있지만 하나님은 이것을 덮어버릴 뚜껑을 준비하신 것이다. 이는 곧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이다(롬 3:25).152)
율법을 덮은 속죄소 위에 대제사장이 일년에 한번씩 속죄 일에 제단에서 가져온 피를 뿌렸고 그때에 영광의 구름에 쌓여 강림하셨다. 그 때 궤 속에 있는 율법은 보시지도 않고 뚜껑 위에 있는 피만 보셨다. 그 전에 이미 말씀하셨다.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출 12:13).” 라고 말씀하셨다. 이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성취되었다. 두 가지 사실은 (율법과 장막) 모세가 산 위에서 40일간 머물고 있을 때 입증한 사실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33년간 계시면서 입증하셨다.153)
율법과 장막 이 두 가지 사실은…
(a) 인간의 무서운 죄악성과 율법이 인간을 보다 선하게 변화시킬 수 없다.154)
(b) 율법이 마련하지 못한 구원을 하나님께서 마련해 주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증명하신 첫째 일은 얼마나 무서운 것이냐 하는 사실이다. 즉 우뢰와 번개로 위협을 당하면서 율법을 받은 후 천오백년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끊임없이 죄를 범해왔으며 드디어 하나님의 율법을 완전히 지키신 단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는 무서운 결과를 범하고 말았으니 그분이야말로 율법이 정죄할 수 없었던 유일한 분이었다.155) 만일 그것이 전부였다면 하나님은 어쩔 수 없이 모든 인류를 지옥으로 떨어뜨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모세는 산에서 내려왔을 때에 두 가지 법을 가지고 내려왔으니 하나는 죽음의 권세인 율법과 다른 하나는 생명을 주는 장막의 모양이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오심으로써 율법이 사람을 선하게 할 수 없음을 보이셨으며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피 흘림으로써 죄 많고 소망 없고 경건치 않은 죄인들을 의롭다고 선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율법이 할 수 없었던 일을 예수님이 행하심은 주가 피를 흘리심으로써 대속물이 되심으로서 죽음의 값을 지불하시고 부활하심으로서 율법으로 인하여 심판의 보좌가 되었던 하나님의 보좌는 자비와 생명의 보좌가 되었다.156)
f. 아브라함이 받은 복음157)
예수께서 대속의 피를 흘려 죽으시고 부활하시기 전에는 어떻게 구원을 받았을까? 갈라디아인의 할례문제는 어떻게 해답을 얻을 것인가? 아담은 어떻게 구원을 받았으며 아브라함이 구원받고 난 430년이 지나기까지 이스라엘 민족에게 율법이 주어지지 않았다고 (갈 3:17) 밝히고 있다.
아브라함은 율법을 지켜서 구원받은 것이 아니요 그 율법으로 그의 구원이 보존된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아브라함이 구원을 받았을까? 바울은 말하기를 “그러므로 사람의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 3:27).” 이것은 율법주의 적인 사람에게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진리이다. 그래서 바울은 모든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고있는 아브라함을 예로 들어 설명을 했다. 어떻게 아브라함이 구원을 받았을까? 은혜로냐? 믿음으로냐? 율법으로냐? 바울은 말하기를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할 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로마서 4:1~5).”158)라고 하셨다. 아브라함은 십계명이 돌 판에적혀지기 전에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바 되었느니라(로마서 4:3).”고 했는데 여기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계심을 믿었다는 것이 아니라 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고 곧 복음을 믿었다.159) 위의 복음은 바울의 말에 의하면 고린도전서 15장의 내용 즉 죽음과 부활을 믿고 기쁜 소식을 믿어 곧 복음인 것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기적적인 잉태와 출생의 복을 전하시고 오실 구세주 대속의 죽음과 영광스러운 부활을 알려 주셨다. 복음에는 이삭의 출생 이상의 것이었으며 약속 받은 아들이 대속물로 죽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아브라함은 성부의 모형이요 그의 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라는 것 즉 기적적인 탄생과 대속의 제물이 되는 기쁜 소식을 믿었다. 숲에 걸린 수양을 잡아 제물로 바쳐진 사건과 아들이 부활함을 믿었다. 실제로 죽지는 않았지만 부활한 것이다. 아들을 바치라고 하실 때부터 살려주기까지 사흘동안 죽은 자나 마찬가지였다. “아브라함은 시험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160) 고 했고,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히브리서 11:17, 19)고 함으로 그의 믿음이 증명되었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 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요한복음 8:56).” 말씀하셨다. 구원은 하나님을 믿거나 어떤 신을 믿음으로 받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에 대하여 증거 한 것을 믿어야 되는 것이다. 율법은 죄인에게 있어서 슬픈 소식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기쁜 소식이다.161)
4. 이신득의
바울은 율법의 행위가 구원을 얻음이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은 이신득의를 말한다. 이 “칭의”는 갈라디아서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요 위 논의에서도 핵심이며 기독교 자체에서도 중심 된 것으로 칭의를 바르게 이해해야 한다.
a. 칭의의 원천은 하나님의 은혜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받을 수 있음이 하나님의 은혜이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로마서 3:23, 24).”고 말씀하셨다.
“칭의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는 죄인들을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말한다.” 칭의는 단회적 행위이지 축적된 과정의 산물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단번에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 즉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롬 5:1).”의 말씀은 한 순간에 하나님의 축복으로 임한 것이 칭의의 축복이다.
“칭의는 인간의 성품이나 수고의 결과가 아니다.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로마서 8:33). 의 말씀을 보면 죄인이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지는 길이 율법의 행함에서가 아니요, 오히려 율법은 죄를 드러내기 위해서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희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5:21).”162)라고 바울은 고백한다.
b. 믿음으로만 얻어지는 칭의
우리가 어떻게 할 때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누릴까? 즉 무슨 방편으로 우리가 의롭다 칭함을 받는가? 이는 믿음이다. 그러나 믿음은 칭의의 조건이 아니며 방편으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함을 선언 받게 된다(로마서 3:25, 26).163) 그러므로 16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방법은 율법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이요 그 믿음을 수단으로 삼고 있음을 강조한다.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가 아니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서 의롭다함을 얻으려 함이라.” 이다.
베드로와 바울은 유대인의 입장에서 율법을 아는 특권을 소유했음에도 불구하고 믿음으로만 의롭다는 여김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기독교 신앙의 두 기둥은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죽으심이다.
c. 나타난 결과로 칭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나를 의롭다고 선포한 결과로 놀라운 구원이 이루어진다.164)
(1) 칭의로 화목됨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기 전에는 다 죄인이요 하나님은 거룩한 재판관이시다. 둘 사이의 일치점은 없다. 이 관계는 오직 그리스도의 피 권세로 인간의 죄 문제가 해결되고 그 순간부터 하나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기심이다. 은혜로우신 하나님을 통해 그리스도의 보혈의 권세로 죄 문제를 해결하심이다. “칭의는 전가의 문제로서 죄인의 그 죄악이 그리스도께로 옮기고 그리스도의 의는 죄인에게 옮겨진다(창세기 15:6, 시 32:12, 사 53:4~6, 예레미야 23:6, 로마서 5:18, 19).” 의롭다 하심에서는 성부께서 주인이 되신다. 로마서 8장 33절에서 밝히시고 거룩하심에 있어서는 성령이 주인이시다(살후 2:13).
(2) 칭의 결과로서의 성화165)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한 순간부터 하나님과 교제하므로 그리스도와 연합하므로 이루어진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부활함을 연합의 관계로서 세례를 말한다. 우리의 삶 속에는 하나님을 닮아 가는 거룩한 성화의 변화가 일어난다.
이 영광스런 결과는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성령의 임재와 능력주심을 따라 칭의가 성화로 나타난다. “만일 의롭게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아 주어진다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라고 말씀함으로 복음이 강조된다.
율법은 말하기를 ‘되라’ 또는 ‘하라’고 고한다. 그러나 복음의 은혜는 ‘되었다’ 또는 “다 이루었다”는 그리스도의 승리의 외침이다(요 19:30).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에베소서 2:8).” 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은혜 안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며 날마다 성화 되어 가는 것이다. 바울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 다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주를 믿음으로 새 백성이 되는 것이라고 한다.166)
유대교에 의하면 예수님도 유대인이니 유대교의 구원자를 믿고 유대인의 유전을 지켜야 된다고 가르치는 거짓교사들에게 바울은 복음의 진수인 이식득의를 설명하였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들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느니라(로마서 10:4).”
본 연구자는 세상 모든 이의 기준을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하고 유일한 의의 근원은 하나임을 논하고 저 한다.
첫째: 이방인들의 의는 도덕적으로 얻는 기준이다. “자기들의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로마서 10:3).”고 지적해 주셨다.
둘째: 유대인들의 의는 율법을 지키므로 얻는 의의 기준이다. “하나님께서 내신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의롭고 선하도다(로마서 7:12).” 의 말씀은 율법의 의가 너무 높아서 율법대로 의를 얻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이며 다 죄 아래 있다고 선언한 것이다(롬 3:9, 10).
셋째: 하나님의 칭의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의이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느니라(롬 10:4). 하셨고 이는 갈 2:15~21의 이신득의를 바르게 이해한 문제에 해답이다.
5. 주 예수의 사랑의 법
사도시대 이래로 그릇된 4가지 교리를 위에서 살펴보았다. 이제 필자는 율법의 저주에서 벗어나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성령님의 내주 하심을 입은 영광의 진리에 대해 살피고 율법과 복음에 대한 바른 이해를 논하고자 한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167) 즉 성화와 성령의 법이,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의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하심이니라.”168) 하셨다.
a. 복음에 진리
바울이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아니하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169) 하셨고 이에 반하여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로마서 3:31).” 하셨다. 또한 갈라디아인 주의에게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었느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치겠느냐.” 라고 강하게 권면하셨다. 그러므로 은혜의 진리인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즉 성령으로 시작하여 성령으로 마치는 복음 진리의 이해가 있어야 한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로마서 3:10), 또한 우리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 수 있는 것일까? 율법은 너무 높고 거룩하기 때문에 인간 스스로는 도저히 율법의 요구에 도달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 율법을 약화시키거나 깎아 내리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운다”고 바울은 말한다.170)
죄 있는 인간이 감히 따를 수 없는 것이 율법이라고 찬양할 때 오히려 율법의 완전성과 거룩함과 그리고 높은 수준을 드러낼 뿐이다. 율법은 완전하기 때문에 불완전한 인간은 그 요구에 만족케 할 수 없다. 우리의 불완전이 율법의 완전성을 드러낼 뿐이다.171) 그러므로 “율법은 인간을 정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로 옮겨주는 법.”172)인 것이다. 율법에 의해 정죄 되었기 때문에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고 몽학 선생이 된 율법은 인간을 죄로 잡아다가 예수님에게 넘겨주는 일을 한다. 인간은 예수 안에서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구원은 은혜 안에서 용서와 자유를 얻는다.173)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완성이시므로 율법의 의를 주 믿는 새 백성에게 칭의로 입히신다는 것이다. “본래 율법은 믿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복음은 “율법을 내신 창조주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님을 진리로 믿는 것이다. 이것이 구원이다.”174)
b. 구원도 하나님의 은혜로 보존됨
바울은 자기의 구원문제와 자신을 보존하는 문제까지도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하고 있다.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 나의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딤후 1:12).”
우리의 구원이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은혜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아니거나 둘 중의 하나이다. 그리스도인은 이제 새 법 아래서 살고있는데 그것은 자유와 사랑의 법이다.175) 분명히 믿는 자는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기를 즐겨한다. 그리스도인은 율법을 멸시한 것이 아니라 더 높은 사랑의 법 아래 있게 되는 것이요 주를 기쁘시게 해드리는 일에 더욱 열중하게 된다. 이는 저주의 두려움이 아니라 사랑의 기쁨 때문이다.176)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그에게 순종할 것이다. 우리가 이웃을 사랑한다면 이웃을 해롭게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살리요.” 라는 것은 신자는 율법으로부터 벗어났고 율법에 대하여는 죽었고 그 저주로부터 속량 되었다는 것이다. 신자는 은혜 아래 있다. 구원받은 후에는 더욱 법 아래 있는데 계명의 법 대신 사랑의 법 아래 있다. 이 법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친히 주신 사랑의 법이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법이요 계명의 율법과 대조되는 사랑의 법이다.
c. 율법은 언약백성의 생활규범
율법은 언약백성의 생활규범으로 주어졌고 지금도 역사 한다. 즉 율법은 그리스도의 구속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 필수적이요 때문에 가감 없는 엄한 하나님의 권위로 서 있다.177) 여기서 율법을 세 가지로 나누어 보고자 한다.
(1) 의식법의 본질과 정신은 예배와 경건 생활의 규범 성이 된다.
(2) 시민의 정신은 국가생활의 규범성으로 사유재산 제도성이 지금도 변함 없는 법칙이다.
(3) 윤리법은 그리스도인들의 생활법칙이다. 즉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윤리 법”은 지금도 변함 없이 지켜지기를 요구하는 하나님의 법이다.
d. 사랑의 계명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사랑의 계명으로 요약하셨다. 즉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모든 율법과 선지자의 대 강령이라 규정하셨다.178) 주님의 피에 의해서 세워진 새 언약의 중보자 이시며 또 실재 언약의 설립자이신 그 분께서 최후의 만찬 석에서 자기 피를 지칭하면서 사랑의 새 계명을 주셨는데 그 사랑은 자기의 피에 기초한 사랑이기 때문에 사랑의 계명은 율법과 선지자의 ‘대 강령’이면서도 ‘새 계명’이다.179)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14). 고 교훈 하셨으니, 자기의 피를 사랑하신 것 같이 사랑함이 새 계명이다.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180) 라고 말씀 하셨고, 여기에서 신약과 구약의 통일성을 보게 하신다. 우리는 사랑의 계명을 볼 때 구약에서는 언약적인 관점에서 말하였고 그 관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기 때문에 사랑의 법은 완성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율법보다 더 큰 사랑의 계명으로써 자유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독생자를 주시고 아가페 사랑을 알게 하시고 사랑의 계명을 주셨으며 형제와 이웃 사랑을 필연적인 것으로 말씀하셨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선진들과 사도들은 위와 같이 율법과 복음과의 관계를 이해하였다. 그러므로 형제사랑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필연적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사랑보다 더 큰사랑으로 구원을 주셨다. 그리고 사랑은 곧 율법의 완성이기에 주께서 주신 사랑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케 하는 “온전한 율법”인 사랑의 법 아래 있다는 것을 성경이 증거 한다. 즉 그리스도께서 새 언약의 법으로 사랑의 계명을 주신 것이다.
e. 신구약의 통일성
바울에 의하면 신구약이 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고 구약의 모든 예비와 요구가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었다고 한다. 구약이 증거 한 메시야는 나사렛 예수님이고 이 예수님은 온 이스라엘이 바라는 “메시야”라는 것이다. 이 사건은 예수님께서 자기 계시로 그리스도 자신이 친히 밝히시며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 하는 것이로다(요한복음 5:39).”181)라고 밝히신 것이다. 마태는 다윗의 전 족보를 열거하며 그리스도가 다윗 혈통의 메시야 왕임을 증명하였고182) 히브리서 기자와 세례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출생을 구약교회의 제사 제도와 연관시켜 화목제물로 소개하였는데 곧 구약의 제사에 대한 성취와 구원 의 완성을 힘주어 말할 때 그리스도의 제사직을 지시하였다. 또한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의 출생에서 복음서를 시작하였고, 구약은 구약의 목표인 그리스도를 지시하였다. 그리고 신약은 구약의 성취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였다.
예수는 구약의 그리스도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가 신구약 전부이다.
이렇게 통일성 있는 신구약을 분리해서 읽거나 서로 다르게 해석할 수 없다.183) 즉 신구약은 상호 귀속한다. 구약 인정함이 없는 신학연구는 기독교가 아니다. 그리스도 교회는 양 성경의 통일성을 인정하느냐에 존폐를 함께 한다.184) 사도들의 선포의 결정적 증거는 “예수는 구약이 증거한 그리스도”라는 증거이다.185) 그리고 부활 자 자신이 구약을 열어 그리스도 교회로 하여금 바른 이해를 하게 된다.
신, 구약 성경이 지니는 주제의 통일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186)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구속과 통치를 확립하심이 신구약에 관통한 하나님의 사역에 중심이고 목표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해석은 반드시 신, 구약의 증거를 함께 들어야 한다.187) 하나님의 주권사상이 신, 구약 성경역사 가운데 왕적 통치를188) 볼 수 있다. 언약적인 차원에서도 옛 언약과 새 언약이 성경 중심이요 특히 성경 중심임을 알 수 있고 신구약의 통일성은 옛 언약에서 역사 하신 그 하나님이 새 언약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로 증거한 하나님이란 신앙고백에서 일치점으로 성립된다. 옛 언약과 새 언약의 역사를 결합하는 연속성은 하나님께서 소명과 선택과 구속과 심판에서 역사 하심이다. 이로서 신구약의 연관 혹은 통일성이 나타난다
Ⅴ. 결 론
이상에서 살펴 본대로 율법과 복음에 대한 바른 이해는 구약과 신약을 연결하는 중요한 문제이다. 이는 신구약을 서로 분리시키지 않고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는 율법과 복음에 대한 바른 이해라는 주제는 신구약의 통일성을 확고히 한다.
A. 율법과 복음의 이해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시내 산에서 주신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완성되고 율법의 저주에서 구원을 얻게 되었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시내 산에서 주신 율법의 끝이요 완성이시며 종말론적인 시온 율법이다. 이는 죄인을 용서하시고 원수를 사랑하는 평화의 율법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율법아래 있느냐 은혜 안에 있느냐 혹은 혼합되어 있느냐 아니면 양편에 다 속했느냐 하는 문제로 혼돈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는 초대 교회에서 해결된 문제이었는데 다시 의문을 가지고 혼돈을 일으켰다.
즉 율법의 사명과 은혜의 사명을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고 믿지 않으면 구원이 없다. 율법을 지킬 수도 없었지만 지킨다고 해도 율법이 구원한 것이 아니다. 바울은 이 그릇된 견해를 말하고 (율법주의 반 율법주의 갈라디안 주의)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를 만난 후 과거 유대주의 적 율법해석이 구속사적인 율법이해로 바뀌었음을 강조한다. 그래서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 율법이 아닌 그리스도의 법을 자유 하는 생명의 법으로 말한다. 이는 곧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 한 이해인 것이다.
즉 “예수는 구약에서 증거 한 메시야임을 이해했다.” 그리고 예수께서 서기관, 바리새인, 유대교의 모든 권위 있는 집단들과 충돌했던 이유를 알았던 것이다. 이는 곧 서로가 같은 율법을 가지고 서로 다른 이해를 함이다. 주께서 모세의 율법대로 십자가에 죽으심은 그리스도로서, 인자로서 (‘나단의 신탁’) 율법의 완성 자로서 바리새인의 의보다 더 나은 ‘의’ 곧 칭의를 우리에게 주시기 위함이셨다. 이는 율법으로 구원되는 의가 아니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그리스도의 법” 즉 평화의 율법이다. 이것이 새 언약의 시온 율법이다.
바울은 사도회의에서 구원은 믿음으로, 율법은 그리스도인의 생활규범으로 확정했고 율법과 복음의 그릇된 이해로 갈등과 대립된 주장을 바르게 했다. 즉 복음을 거부한 “율법주의에게는 로마서를 해답으로 주셨다.” 율법 폐기론 주의에게는 (반 율법주의) 야고보서를 해답으로 주셨고, 혼합주의적 “갈라디아인 주의”에게는 갈라디아서를 해답으로 주셨다. 그리고 문제 해결점으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 얻고 또한 받아 놓은 구원도 그리스도의 은혜로 됨을 가르쳤다. 특히 바울은 율법이 언약백성들의 생활규범으로 주어졌고 예수 그리스도를 닮도록 역사함을 강조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랑의 본체시오 그 사랑은 율법의 완성으로서 “그를 믿는 자들에게 칭의”를 입히시고 자유 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 곧 “사랑의 법”아래 있게 하셨다. “신약과 구약”의 통일성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경의 중심임을 양 성경이 증거 한다.
모세가 시내 산에서 율법만 받아온 것이 아니요 복음 ‘장막성전인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도 가지고 내려왔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종말론적인 시내율법이다.
B. 이신득의의 원천
위에서 논의한 바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심은 구약의 약속과 예언과 예표적 전개들의 성취이다. 예수의 출생과 사역이 바로 인류를 죄와 저주와 사망의 권세에서 해방하고 자유롭게 하였다. 이신칭의의 원천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피로 사람들의 죄를 씻고 그의 죽으심으로 화목케 했다.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사람들 안에 성령을 거주하게 하시므로 사람이 죄와 육과 또 모든 외적 얽매임에서 해방되어 영광의 자유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율법이 그리스도의 구속을 위해 주어졌고 두 번째는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구속이 있음을 가르치기 위해서 주어졌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몽학선생인 율법은 그 소임을 다하였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에 있고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절대 성립되지 안는다.
율법은 처음 인류에게 요구하신 순종의 요구를 계속하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순종을 하나님께 바쳐 드림으로 하나님께 만족을 드렸고, 하나님은 더 이상의 요구할 것이 없게 되었다. 그런데도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받으려고 한다면 복음을 이해하지 못함이 된다. 지금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주님의 순종을 내 것으로 삼는 칭의의 길 밖에 없다. 율법의 임무와 기능과 요구는 그리스도의 죽음이전 까지요 그 이후는 그를 믿는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은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가지고 영광의 자리에 이르게 된다.
이것이 구약이 말하고자 하는 것의 전부이며 또 이것이 신구약이 말하는 복음과 율법과의 관계이다. 율법이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니 그리스도에게는 풍성한 구속과 자유와 풍요로움과 영화가 있다. 그러므로 다시 율법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이다. 돌아가면 육으로 마치는 정 죄만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 율법으로 돌아갔으면 율법의 기능과 사명을 무시한 것이다.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실 때 율법은 구원의 길로서 사명을 다하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신 이후에도 율법을 구원의 길로 재 도입하는 것은 십자가를 완전히 헐고 율법의 모든 책임과 사명을 완전히 도외시한 처사이다. 인간은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게 된다. 오직 의인은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고 믿음으로 살다가 믿음으로 종신 해야 한다. 우뢰와 두려움 속에 받은 그 율법이 정죄와 저주와 두려움을 주며, 심판대 위로 끌어갈 때 우리를 대신하여 죽어주신 예수님의 권세 있는 십자가 보혈의 공로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것이다. 구속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이신득의의 원천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율법이 요구하는 멍에를 다시 메지말고 예수 그리스도의 멍에를 메고 따라야 한다.
이현채 목사/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신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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