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신약

[스크랩] 온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

수호천사1 2019. 2. 11. 22:36

온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

(히12:1-29)


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성도들은 모두 상급을 얻기 위해 열심히 뛰는 운동선수들로 표현되었습니다. “경주: ἀγών G73 아곤”은 경기를 위해 모인 선수들과 관중을 의미합니다. 이 경주는 성도가 된 날부터 죽을 때까지 평생을 뛰는 경주입니다.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는 유대교의 율법을 의미합니다 (히브리서 10:38, 39).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의 정체를 알려면 이 구절이 “이럼으로”로 시작한다는 사실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이 장이 “이럼으로”로 시작함으로 앞 11장에서 설명한 것을 참고해야 합니다. 11장에서 사도바울은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과 구약 성도들이 앞으로 오실 메시아를 믿음으로 기다렸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11장 끝부분에서 그들의 열조들이 이 서신의 수혜자들을 인도하고 가르칠 믿음을 갖고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더 좋은 것을 준비하고 계셨다고 했습니다. 12장에서는 믿음의 열조들과 믿음의 선배들이 이들을 위해 길을 닦아놓고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구약 성도들은 메시아가 오시기를 믿음으로 기다렸지만 이들은 이제 메시아께서 오셔서 모든 예언을 성취 시키신 것을 뒤돌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우리의 경주를 실제로 지켜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지켜본다는 마음으로 이 믿음의 경주에 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은 지난 2천 년 동안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을 목숨으로 지키며 우리보다 먼저 간 수천만 명의 성도들이 될 것입니다. “예수를 바라보자”의 “바라보자: ἀφοράω G872 아포라오”는 다른 곳을 보던 눈을 한 곳에만 집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행동이 완전한 순종과 인내의 가장 좋은 예가 될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21-23). 2절의 “온전하게 하시는 이: τελειωτής G5051 텔레이오테스”은 완성시키고 마감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3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4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


힘들고 지쳐갈 때 예수님께서 겪으신 온갖 수모와 고통을 생각한다면 다시 기운을 얻을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인생을 다시 한번 자세히 공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본 카페의 “성경 해설: 신약 오경_연대순 복음서”는 4대 복음서의 사건들을 연대별로 다시 정리한 자료입니다. 예수님의 삶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성경에서 침묵하고 있는 예수님의 어린 시절과 청년기 시절은 시편 69편에 예언의 형태로 이미 기록되어 있습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이들 중에는 아직 순교 당한 성도들이 없다는 것을 4절에서 알 수 있습니다. 


5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6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위 구절들은 잠언 3:11-12를 인용한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를 훈련시키신다는 것과 이 훈련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의 증거라는 것을 입증하려 합니다. 이 훈련은 낮은 강도에서 시작해서 그 강도가 높아져 가며 경우에 따라 죽음을 맞습니다 (고린도전서 11:30). 5-8절에서 “아들”이라는 단어가 6번이나 쓰였습니다. 헬라어에서 “아들: υἱός G5207 위호스”로 다 성장한 자녀를 의미합니다. 다 성장한 자녀는 믿음도 성장한 상태인 것을 시사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고난을 지나야 한다는 것을 아래 구절들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의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시편 34:19 

“사람은 고생을 위하여 났으니 불꽃이 위로 날아가는 것 같으니라” 욥기 5:7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요한복음 16:33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디모데후서 3:12 


성도들이 환난을 받는 이유는 다음과 같이 여러 가지입니다. 


첫째, 우리가 저지르는 죄와 우리의 어리석음 때문에 고난을 받습니다 (베드로전서 2:20). 

둘째, 진실과 정의로움을 지키기 위해 강경한 입장을 택하기 때문에 고난을 받습니다 (베드로전서 3:14). 

셋째, 우리 삶과 함께 있는 죄로 인해 고난을 받습니다 (고린도전서 11:31). 

넷째, 과거에 저지른 죄로 고난을 받습니다 (갈라디아서 6:7). 죄는 용서받아도 그 죄로 인한 책임은 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섯째, 하나님의 높고 고귀한 계획으로 인해 고난을 받습니다 (욥기). 

여섯째, 믿음으로 고난을 받습니다 (히브리서 11). 일곱째, 하나님의 자녀들을 더 높은 곳으로 데려가기 위해 훈련과 단련을 시키심으로 고난을 받습니다 (히브리서 12:6).


성도들이 시험을 받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 번째,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기 위함입니다 (다니엘 3:16-18, 24-25).

두 번째, 저지른 죄로 인한 징계를 받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2:5-11; 야고보서 4:17; 로마서 14:23; 요한일서 1:9). 

세 번째, 우리가 죄로 빠지는 것을 예방하기 위함입니다 (베드로전서 4:1-2). 

네 번째, 자만심과 교만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고린도후서 12:7-10; 갈라디아서 4:15; 6:11). 

다섯 번째, 믿음을 키우기 위함입니다 (베드로전서 1:6-7). 

여섯 번째, 영적 성장을 위함입니다 (로마서 5:3-5). 

일곱 번째, 순종과 수양을 가르치지 위함입니다 (사도행전 9:15-16; 빌립보서 4:11-13).

여덟 번째, 다른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는 능력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고린도후서 1:3-4). 

아홉 번째,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의 실제를 증명하기 위해서입니다 (고린도후서 4:7-11). 

열 번째, 천사들에게 하나님의 지혜를 알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욥기 1:8; 에베소서 3:8-11; 베드로전서 1:12).


그리하여 다음을 얻습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야고보서 1:2-4

“7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9 또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며 살려 하지 않겠느냐 10 그들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자식들을 징계함으로 그들을 가르치십니다.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버지 됨을 증거하게 합니다. 아버지로부터 징계를 받는 아들은 아버지를 원망하고 미워하며 거리를 둘 수 있습니다. 아니면 아버지의 징계로 얻는 가르침과 교훈을 얻는 기회를 감사하고 그 기회를 십분 활용해 아버지께 더 가까이 다가서는 계기로 삼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징계는 우리를 위한 것이며 이로써 우리는 거룩함을 입을 수 있는 것입니다. 


11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12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13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14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15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여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럽게 되지 않게 하며


모든 하나님의 징계는 괴롭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연단을 받고 나면 강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13절에서는 강한 자들이 연약한 자들을 도와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출애굽기 17:10-12). 연약한 자들이 가는 길을 곧게 되도록 그들의 앞과 주변을 살피고 그들을 시험에 빠트릴 요소들을 최대한 제거하며 위로하고 격려하는 작업으로 도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형제들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 사이에 평온하고 거룩한 관계를 유지해야 할 것입니다. “쓴 뿌리”는 상대에 대해 질투와 반감 등의 쓰라린 감정을 갖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감정은 그리스도 지체 안에서 불화와 분열을 야기합니다. 이러한 감정은 투덜거리며 불평하는 것과 악의에 찬 소문을 내고 상대를 괴롭히는 것 등으로 표현됩니다 (신명기 29:18). 


16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 

17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그가 그 후에 축복을 이어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위 구절에서 음행하는 자는 영적인 음행 즉 하나님 외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망령된”은 영어로 “Profane”인데 이 단어의 어원은 두 개의 라틴 단어인 “Pro”와 “Fanum”로 이루어집니다. “Pro”는 “앞에서, 거역하는”이며 “Fanum”은 “성전”을 의미합니다. 에서의 행동은 단순히 배가 고파 장자권을 판 것이 아니라 장자권을 경멸하고 얕보았던 것입니다 (창세기 25:34). 이로인해 에서는 장자의 축복을 잃어 집안의 우두머리가 되는 권리와 두 배의 재산 상속을 놓친 것입니다 (창세기 27:30-40). 지금도 우리 역시 자신의 섣부른 결정과 행동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의 그릇을 차버리고 있지 않나 살펴야 합니다. 


성경은 장자가 자신의 권리를 빼앗긴 경우를 매우 흔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가인 vs. 셋, 야벳 vs. 셈, 이스마엘 vs. 이삭, 에서 vs. 야곱, 르우벤 vs. 유다와 요셉, 아론 vs. 모세, 이새의 아들들 vs. 다윗이 그 예입니다. 르우벤은 아버지의 첩과의 불륜으로 장자권을 잃었고 시므온과 레위는 세겜에서의 학살 사건으로, 유다는 그다음 상속자로 집안이 통치권은 얻었으나 두 배의 재산을 상속받는 장자권은 요셉에서 빼앗겼습니다. 뒤늦게 에서가 아버지의 축복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회개의 기회조차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18 너희는 만질 수 있고 불이 붙는 산(출애굽기 19:18)과 침침함과 흑암과 폭풍과(출애굽기 19:16-18; 민수기 4:11; 5:22) 

19 나팔 소리(출애굽기 19:16-19; 20:18)와 말하는 소리가 있는 곳에 이른 것이 아니라 그 소리를 듣는 자들은 더 말씀하지 아니하시기를 구하였으니(출애굽기 19:19, 20; 민수기 4:12) 

20 이는 짐승이라도 그 산에 들어가면 돌로 침을 당하리라 하신 명령을 그들이 견디지 못함이라 

21 그 보이는 바가 이렇듯 무섭기로 모세도 이르되 내가 심히 두렵고 떨린다 하였느니라


유대 크리스천들이 만약에 유대 율법으로 돌아간다면 이들은 위 구절에서 설명되었듯이 참담한 공포와 함께 시작된 옛 체제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과 특혜와 평화를 버리는 것입니다. 이 서신의 수혜자들은 아직 공포의 과거로 돌아가지는 않았습니다. 그 누구보다 하나님 앞에 직접 선 모세가 더 두려움을 느꼈고 시내 산에서의 경험을 즐기지 않았습니다 (신명기 9:19). 


모세 율법은 공포와 두려움 가운데 제정된 것입니다.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는 것은 공포를 주는 곳으로 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율법으로 돌아가는 것은 저주와 죽음의 사역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3:2-18). 우리 성도들은 다음 구절과 같이 율법 아래 시내산으로 갈 것이 아니라 은총 아래 시온산과 살아있는 하나님이 계시는 성인 하늘의 예루살렘으로 가야 합니다. 


22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예수님께서는 이 성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부활하시어 승천하신 후 아버지의 집에 우리가 있을 곳을 준비하신 다고 한 곳입니다 (요한복음 14:2-3). 하나님의 예루살렘은 자유를 주는 곳이며 어머니와 같이 사랑과 평안함을 주는 곳이라고 바울은 말했습니다 (갈라디아서 4:26). 아브라함이 찾던 그곳이기도 합니다 (히브리서 11:10). 사도 요한은 이곳을 부활과 휴거를 통해 구원받은 모든 성도들이 살 곳으로 설명합니다 (계시록 21:1-22:5). 


23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모임과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과


“장자: πρωτοτόκος G4416 프로토토코스”란 “첫 열매”로 불린 유대 크리스천들을 의미합니다 (야고보서 1:18). “모임: πανήγυρις G3831 파네구리스”로 잔치를 위해 모인 것을 의미합니다. “온전하게 된 의인”은 의롭게 산 구약 시대 성도들을 의미하는데 바울은 이들을 영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이는 그들이 아직 부활을 기다리며 영의 상태로 머물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여기에서도 신약 성도들과 구약 성도들의 구분을 명확하게 하고 있습니다. 


24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하는 뿌린 피니라


예수님께서는 신약의 중보자이십니다 (히브리서 8장). 여기에서 사용된 "새로운"은 헬라어로 두 개의 단어가 있습니다. 첫째는 “καινός: G2537 카이노스”로 질과 양적인 면에서 전혀 새로운 것을 의미합니다. 둘째는 “νέος: G3501 네오스”로 최근에 태어난 것 또는 시간적 개념에서 새로운 것입니다. 이곳에서는 둘째 단어를 사용하는데 예수님의 언약이 그 바탕을 구약에 두고 있고 구약이 예수님의 새로운 언약을 설명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매우 적절한 단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신약은 예수님의 죽음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의 피만이 성도들을 하나님 앞에 서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9:11,12,23,24). 성경의 피의 제사에 대한 기록은 아벨로 시작했습니다. 

아래 구절들에서는 다섯 가지의 경고 중 마지막 다섯 번째가 경고되고 있습니다. 이 경고의 배경은 출애굽기 19-20장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과 직접 대화하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출애굽기 20:19). 이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이때 이스라엘을 세상을 다스리는 왕과 제사장들을 배출하는 나라로 만들기를 원하셨습니다 (출애굽기 19:5, 6). 사도바울은 이 고조된 경고를 통해 출애굽 세대의 단점들과 크리스천의 단점들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그는 고린도전서 10장에서 이것들이 크리스천들의 혜택을 위해 쓰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25 너희는 삼가 말씀하신 이를 거역하지 말라 땅에서 경고하신 이를 거역한 그들이 피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하늘로부터 경고하신 이를 배반하는 우리일까보냐


이 장에서 앞서 말한 내용 (히브리서 12:18-24)들을 바탕으로 유대 크리스천들이 지니는 의무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서신의 독자들 역시 모세 시대의 조상들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닫는 실수를 하는 위험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26 그때에는 그 소리가 땅을 진동하였거니와 이제는 약속하여 이르시되 내가 또 한 번 땅만 아니라 하늘도 진동하리라 하셨느니라 

27 이 또 한 번이라 하심은 진동하지 아니하는 것을 영존하게 하기 위하여 진동할 것들 곧 만드신 것들이 변동될 것을 나타내심이라 

28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또는 감사하자 

29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라


26절에서와 같이 하나님의 목소리가 지구를 흔들었던 사례들은 여러 차례 있었습니다 (출애굽기 19:18; 사사기 5:4-5; 시편 68:8-9; 77:18; 114:7). 바울은 이어서 학개 2:6을 인용했는데 이는 예수님의 재림과 대 환난의 심판이 있기 전에 일어날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 후 메시아의 천년 왕국이 세워집니다. 27절은 학개를 다시 인용하면서 영원한 것은 바뀔 수가 없고 영원함을 지키기 위해 피조물들에게 변화를 주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그 진동과 변화가 이미 시작되었으나 이는 현 세상에 마지막을 가져올 진동과 변화의 시작일 뿐임을 시사합니다. 그는 예루살렘의 파괴가 곧 올 것이며 그 사건이 마지막 때를 가져올 진동과 변화의 시작으로 암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이미 변하거나 진동하지 않을 세상을 약속받았습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 축복을 은혜로 받고 일상에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 것이며 감사해야 합니다. 29절은 신명기 4:24를 인용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은총과 사랑의 하나님이시지만 은총 아래 실패한 자들에게는 심판을 내리는 두려운 하나님이라는 것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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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예수 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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