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론

[스크랩] 한국교회 공동체의 설교의 흐름에 관한 연구

수호천사1 2019. 2. 11. 22:20

한국교회 공동체의 설교의 흐름에 관한 연구



1. 들어가기



현대사회는 극단적 개인주의와 맘모니즘의 강력한 영향 아래 있다. 이 개인주의는 인간이 맺어야 할 인격적 관계를 피상적 관계로 만든다. 개인주의는 오직 자기 자신의 유익과 만족에만 진중하게 만든다. 또한 맘모니즘은 자본주의가 현대사회가 취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경제체제라고 인식하게 만들었다. 맘모니즘은 세상의 모든 가치를 자본, 돈이라는 관점으로 이해했고, 이 결과로 적자생존, 우성열패, 양육강식을 합리화시켰다. 맘모니즘 아래의 자본주의의 가속화는 신자유주의를 태동시켰다.

문제는 이러한 개인주의와 맘모니즘이 한국교회 안에 유입되어 교회의 본질과 정체성, 방향성을 상실하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교회 안에 유입된 개인주의는 성도의 교제를 피상적 관계로 만들었다. ‘한 몸’이라는 교회의 정체성은 점차 사라지고 있다. 개인주의는 혼자 신앙생활해도 된다는 비성경적 생각을 허용했고 신앙의 사유화를 양산했다. 또한 맘모니즘이 교회 안에서 교회의 성장주의를 가속화시켰다. 성장주의에 내몰린 교회는 표면적으로는 큰 부흥을 이룬 것처럼 보이나, 영적으로는 커다란 위기를 맞게 되었다.

그렇다면 교회가 당면한 문제를 회복하고,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가장 중요한 것은 설교의 회복이다. 김남준은 “하나님의 말씀은 교회를 세워가고 세상에 복음으로 말미암아 변화를 가져오는 유일한 하나님의 방편이며, 설교 사역은 이 일을 위한 가장 영광스러운 섬김이다.”라고 하면서 설교의 중요성을 피력했다.

설교가 교회를 세우는 기능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현재 한국교회 설교의 흐름을 진단해야 한다. 한국교회의 설교의 흐름을 정확히 진단할 때에 성경적 설교의 방향성이 제시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 논문은 한국교회 설교의 흐름을 분석할 것이다.

 

2. 한국교회 공동체 설교의 흐름



     1) 개인주의 설교



개혁주의 교회론에 의하면‘교회는 하나님 나라 백성이며, 그리스도의 몸이며, 성령의 전’이다. 교회는 하나님, 그리스도, 성령의 연합체이며, 그리스도의 몸으로 이루어진 성도간의 연합체이다. 하지만 현대사회의 개인주의는 교회의 본질인 하나됨과 연합을 파괴한다. 현대의 개인주의는 잡초 풀밭의 뜻인 ‘리좀’(rhizome)이라는 메타포로 대변된다. ‘리좀’(rhizome)은‘잡초 풀밭’의 의미로 저마다 각기 뿌리를 가진 여러 풀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는 각기 자기의 방향으로 자라는 것을 상징한다. 네이단 미첼은 ‘리좀’이라는 메타포가 현대교회의 현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모양새라고 말한다. 이‘리좀’의 현상, 즉 개인주의는 교회가‘한 몸’이라는 메타포, 즉 교회의 하나됨, 연합을 상실하게 만든 것이다.

하지만 설교자들은 개인주의가 교회 공동체와 연합을 파괴함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교회적 현상을 인식하지 못하고, 개인주의에 함몰되어 교회 공동체가 개인주의화 되는 것을 방관하고 있다. 개인의 신앙에만 집중하는 개인주의 설교는 성도간의 관계를 피상적 관계로 만들며, 교회가 ‘한 몸’이라는 정체성을 강조하지 않는다. 이에 본 단락에서는 개인주의의 역사와 출현, 그리고 개인주의와 기독교의 관계 그리고 개인주의와 설교라는 측면을 살펴볼 것이다.

 

   (1) 개인주의의 역사와 출현

현대 사회는 집단보다는 개인이 중시된다. ‘우리’라는 집단에 매몰되기보다는 자신을 찾고 느끼려는 경향이 강해진다. 19세기 이후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개인주의는 사실상 19세기에 형성된 개념이나 철학적 사조가 아니다. 개인주의의 기원은 그리스 철학자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원자들이 모여 우주를 형성하는 것처럼, 개인이 모여 사회를 구성한다고 말했다. 이후 소피스트에 의해서 발전되었는데 소피스트들의 상대주의는 개개인이 서로 다른 관점을 가질 수 있는 정당성을 부여했다. 개인주의는 쾌락주의자들에 의해서 강화, 발전되었다. 쾌락주의자들은 인간 스스로 자기가 추구할 수 있는 최고의 쾌락을 추구하라고 하였다. 하지만 이런 개인주의는 유럽 중세사회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유럽 중세사회는 인간 개개인의 인격과 가치를 로마 가톨릭과 왕권 안에 귀속시켰기 때문이다.

 

    ① 이성으로 무장된 개인주의의 탄생

개인주의는 르네상스 이후 다시금 고개를 들기 시작하였다. 에른스트 카시러(Ernst Cassirer)는 근대 인간학이 르네상스 시대에 이루어졌음에 주목했다. 근대 인간학은 로마 가톨릭과 왕권에 귀속되었던 개인의 인격과 가치를 해방시키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렇게 해방된 개인주의는 르네상스, 즉 인문주의 운동 이후 급속도로 발전하는데 이는 ‘근대 주체의 탄생’을 만들어냈다. 이‘근대 주체의 탄생’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주체적 판단을 누구도 간섭할 수 없다는 의식의 전환에서 태동하였다. 여기서‘자기중심적 자아’가 드러난다. 이 ‘자기중심적 자아’는 바로 자기 안에서 자기중심과 자기 일치성, 결속, 정체성을 발견한다. 이는‘자기중심 성향의 자아’라고 할 수 있다. ‘자기중심적 자아’는 주체적 판단의 핵심이다. 이러한 주체적 판단은 근대 철학자 데카르트에 의해 강화되었다. 데카르트는 이성이 진리를 드러내는 도구가 된다고 믿었다. 이 주체적 판단의 핵심, 즉 자기중심 성향의 자아의 강화로 인한 결과물이 바로 개인주의이다.

‘자기중심적 자아’로 무장된‘개인주의’는 계몽주의를 거치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계몽주의는 교권주의에 강력하게 대항하였다. 교권주의는 성경의 진리, 즉 계시를 이성과 대비시키거나, 성경의 진리와 계시를 이성보다 우월한 것으로 여기면서, 이성을 속박시켜 놓았는데, 계몽주의가‘주체적 자아’를 해방시킨 것이다. 즉 계몽주의는 교권주의에 속박된‘주체적 자아’를 해방시켜 성경의 진리와 계시 위에 올려놓았다. 계몽주의자들은 성경의 진리와 계시, 가르침을 ‘주체적 자아’인 이성에게 자리를 양보해야 한다고 결정하였다. 주체적 자아의 근간인‘이성’의 강력한 힘은 궁극적으로 진리나 가치판단을‘개인’에게 양도시켰다. 주체적 자아는 합리적인 이성으로 사물과 진리를 판단하였으며, 이성은 절대적인 힘을 가진 도구가 되었다. 이러한 이성의 발전은 이성과 계시를 더욱 만날 수 없는 지경으로 몰아갔다. 결론적으로 중세시대에서 교회의 전통과 신학 안에 귀속된 인식의 주체였던‘개인’은 종교개혁과 계몽주의를 지나면서 자기 주체성을 가진‘개인’으로 사회와 문화와 삶의 전반에 걸쳐 중심과 기준이 되었다. 이러한 이성이라는 주체성을 가진‘개인’은 현대사회의 경제, 정치, 문화, 예술, 모든 분야에 가장 강력한 힘으로 자리매김 하고 있으며, 이 ‘개인’은 종교적 영역까지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

 

      ② 직관으로 무장된 개인주의

주체적 자아의 근간인 ‘이성’도 한계가 있음을 인지하게 된다. 이성으로도 가치와 신앙과 개념을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 있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변화는 철학적, 신학적 흐름 속에서 계시도 이성도‘진리의 중재자’로 받아들여지지 않게 되었다. 이 때 직관(intuition)이 등장한다. 직관이란 “진리에 대한 즉각적이며, 본능적인 지각으로 사유의 과정 없이 직접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하지만 직관도 이성과 다르게 작용하지만 결과는 동일하다. 이성은 논리나 지적 작업을 통해서 개인 스스로 판단하는 형태라고 볼 수 있으며, 직관은 논리나 지적 작업 없이 개인의 본능적인 지각에 의해서 스스로 판단하는 형태라고 볼 수 있다. 이성이나 직관이 작동하는 원리는 다르게 보이나 개인이 주체가 되어서 판단하고, 평가하고, 행동하는 형태는 동일하다.

 

      ③ 포스트모던시대의 개인주의

이성과 직관으로 무장된‘주체적 자아’는 포스트모던 세계에서 파괴되기 시작했다.‘주체적 자아’의 해체는 급속도로 진행되었으며, 결과적으로 인간성에 대한 모든 믿음도 흔들리게 되었다. 아울러 그런 믿음이 지탱해주던 모든 행위들까지 의심하게 되었다. 이것이 주체적 자아, 즉 근대적 자아의 붕괴현상이다. 포스트모던 사상은 근대의 자기 구성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자아가 하나의 구성물임을 알게 된 것이다. 자아가 자율적이며, 자기 의존적인 개인이라는 인간학이 허구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포스트모던 시대에서 자아는 모던시대의 자아의 정체성의 붕괴를 실제적으로 경험한다. 이에 포스트모던 시대의 자아는 인간의 정체성을 규명해줄 수 없으며, 주체적 자아, 자율적 자아가 더 이상 믿을 수 없는 허구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다. 이러한 인식의 전환은 심각한 묵시론적 회의에 빠져들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성으로 무장된 개인주의와 직관으로 무장된 개인주의, 포스트모던 시대의 개인주의는 서로 다른 측면이 존재하지만, 이 세 개의 개인주의를 하나로 묶는 끈이 있다. 이것이 바로 자아관(自我觀)이다. 이 자아관이 오늘날의 현대인들에게“당신의 것을 강조할 수 없고, 강요할 수 없으며, 당신도 옳고 나도 옳다”라는 상대주의적 개인주의와 극단적 개인주의로 발전되었다.

 

   2) 개인주의와 기독교

현대사회의 개인주의는 계몽주의의 결과물로 만들어진 개인주의와 현대화가 만들어낸 개인주의가 절묘하게 결합되었다. 계몽주의는 가치 판단의 기준과 결정권을 개인이라는 자아에 두었으며, 현대화는 세상과 단절하는 개인주의를 양산했다. 이 개인주의는 자아에 대한 과도한 집착을 가져왔다. 자아에 대한 집착은 미국에서 판매되는 도서에서 확인된다. 미국에서 판매되는 종교서적의 31%가 개인의 영감을 주는 도서이며, 15%이상이 뉴 에이지 시각에서 동일 주제를 다루는 도서이다.

종교개혁 이후의 개인주의는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며, 신앙의 결정과 신앙의 헌신을 자아 스스로 할 수 있는 긍정적인 측면을 만들었다. 하지만 개인주의 형성의 세 가지 역사적 흐름 즉 ‘종교개혁 이후의 개인주의, 계몽주의 이후의 개인주의, 현대시대 개인주의’ 본 논문의 표현방식으로는‘이성으로 무장된 개인주의, 직관으로 무장된 개인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의 개인주의’의 변화 속에 절대화된 개인주의는 최고의 선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이러한 절대화된 개인주의는 타자, 그리고 외부세계와의 단절현상을 초래했을 뿐만 아니라 다음과 같은 부정적인 결과를 낳았다.

 

첫 번째 개인주의는 관계성을 파괴했다.

개인주의는 타자와의 관계성을 파괴했다. 타자가 개인의 삶 속에 개입하거나 접근하는 것을 용인하지 않을뿐더러, 개인의 의사결정에 타자가 개입하는 것을 극도로 경계한다. 이러한 개인주의는 과학문명과 정보화된 시대 속에서 더욱 가속화된다. 개인주의가 이 시대를 지배하면서 사람들은 점점 더 고독해지며, 타자로부터 소외를 경험한다.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이 고독과 소외가 현대인의 실존적 특성이라고 하였다. 고독과 소외는 공동체로부터 개인을 분리시켜 모래알 같이 소외된 개체로 존재케 한다. 이 고독과 소외는 인간성의 상실로 연결된다. 이러한 인간성의 상실은 자기이해와 실재의 근본적인 변화를 초래하였다. 특별히 고독과 소외로 점철된 개인주의는 삶의 통전성을 상실하게 만들었고, 인격적 관계망의 중요성을 파괴시켰다. 인격적 관계망이 파괴된 시대 속의 인간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오로지 자기 자신과 자아만을 중요하게 여긴다. 이러한 개인주의가 교회 안에서 성도간의 관계를 피상적인 관계로 만들어버린다. 더 이상 성도간의 교제가 성경의 본질적 가르침이라는 사실을 거부한다. 성도들 즉 몸의 일부분인 지체와 관계 맺고 서로 사랑하며, 서로 하나되는 교제를 무너뜨린다. 이는 공동체성의 상실로 이어진다.

 

두 번째 개인주의는 전통과 공동체 신학을 거부하게 만들었다.

조성돈은 개인주의적 기독교의 형태는 초기 기독교에서부터 존재했었다고 주장한다. 예수께서 제자를 부르실 때 개인으로 부르셨고, 개인 스스로 사역의 부르심에 응답했으며, 성례에 참여했다. 부르심과 소명, 구원은 모두 개인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이다. 또한 종교개혁 이후의 기독교는 더욱 개인주의적 기독교가 강화되었다는 것이다. 종교개혁 이전에는 개인과 하나님 사이에 사제와 공회가 있어 개인과 하나님을 연결하는 작업을 했었다. 하지만 종교개혁 이후에는 개인이 직접 하나님과 대면하며, 하나님 앞에 직접 설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개신교에서는 꼭 교회가 아니더라도 신앙을 가질 수 있으며, 교회와 목사의 도움 없이도 경건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궁극적으로“개인이 기독교 전통과 성경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라는 의문을 제기했다. 이런 개인주의적 기독교의 확장은 이전의 기독교적 전통에 의해서 성경을 이해하고 해석하지 않는 경향을 보인다. 성경 계시, 정경론, 교회론, 하나님 나라, 재림의 모든 영역에서 개인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인다. 이러한 현상을 데이비드 웰스는 개인주의 속에 흘러든 자아의 변화로 인식한다. “개인주의화 된 자아는 이전 세대들의 주관심사를 등졌고, (이전에) 바른 믿음, 바른 행위, 바른 가치관을 중시하던 이전의 신앙으로부터 벗어나며 하나님으로부터 해방되었다.”고 말한다. 즉 개인주의 안의 자아는 자기를 하나님과 교회보다 더 권위 있는 존재로 여긴다. 이러한 자아로 점철된 개인주의는 외부의 권위를 불신하며, 거부한다. 이 외부의 권위를 거부한 개인은 교회와 성경의 가르침을 거부한다. 또한 절대적 진리를 부정하며, 불변의 진리를 거부하게 된다.

또한 개인주의는 교회의 사역과 봉사의 형태도 개인적인 주관에 따라 다르게 헌신하게 한다. 결국 교회안의 개인주의는 홀로 신앙생활을 해도 무방하다는 신학적 변화를 일으켰다. 결국 개인이 판단하고 결정한 신학이나 성경 해석이나 적용 또는 교회 사역의 범주에 대해서 어느 누구도 심지어 목회자라 할지라도 쉽게 관여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러한 개인주의로 인한 부정적인 영향을 신광은은 네 가지로 요약하여 설명한다.

“첫째, 개교회(혹은 개신자)를 원자적 고립된 존재로 본다. 둘째, 개교회(개신자)는 욕구를 극대화하려는 충동을 가진 존재이며, 그 욕구는 자연스럽고 정당하다. 셋째, 개교회(혹은 개신자)는 전적으로 자유롭고, 평등하다. 넷째, 개교회(개신자)는 다른 교회와 이해관계를 맺거나 맺지 않을 수 있는데, 이때의 관계는 기본적으로 시장을 기초로 형성된 계약관계이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뜻이나 공동체의 전통이나 운명보다는 개인이 더 중요해진 개인주의 시대에 사람들은 더 이상 하나님이 자신의 운명을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자신의 운명은 자신의 선택에 달려 있다고 믿기 시작한 것이다.

 

   (3) 개인주의와 설교

개인주의가 21세기를 지배하면서 교회 안에서 심각한 문제를 일으킨 영역이 설교이다. 마이클 퀵(Michael J. Quick)은 개인주의 설교가 현대교회 설교의 가장 심각한 문제라고 지적하였다. “무력한 설교의 첫 번째 특징은 공동체가 아니라, 한 개인의 신자의 상태와 필요에 집중한다. 설교를 듣는 청중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나의 삶, 나의 목적, 나의 미래’대신‘우리의 삶, 우리의 미래, 우리의 목적’에 관한 것임을 깨달아야한다.”. 마이클 퀵은 오늘날 설교의 중심이 바로 개인인‘나’에 집중되어 있음을 직시했다. 즉‘나의 삶과 목적, 나의 미래, 나의 소명, 나의 아픔과 문제’등 개인의 문제만 다루는 설교의 형태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였다.

개인주의 설교적 현상은 설교가 보편타당한 진리와 적용이 아니라, 개인에게 어떤 유익을 주는지 판단하고 그에 따른 해석과 적용이 이루어지는 설교의 패러다임의 전환을 만들어냈다. 이러한 현상은‘내’가 일차적 관심이 되는‘개인주의적 패러다임’의 변화라고 볼 수 있다. 즉 이전의 설교는“본문의 의미, 보편적이고 타당한 의미의 추론에 연연한 역사주의적 해석 방식”의 해석과 적용이 중심이었다면, 한국교회는“현재 내 삶의 현장에서 내가 어떻게 느끼고 행동해야 하는가?”라고 하는 개인주의적인 해석과 적용의 설교가 주를 이루고 있다. 즉‘설교 본문이 오늘날 우리, 교회 공동체와 이웃 그리고 하나님 나라와 피조세계에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가 아니라, ‘본문이 나와 어떤 연관성이 있으며, 나의 인생과 삶에 어떤 연관성이 있는가?’로 축약되는 개인적 해석과 적용이 주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해석과 적용의 무게중심이‘성경 본문, 공동체, 보편적 진리’가 아니라, ‘나, 개인, 현재 나의 삶, 나의 인생’으로 옮겨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개인주의가 교회 안에 침투함으로 설교 본연의 기능을 상실하게 만들었고, 설교의 패러다임을 변하게 만들었다. 개인주의 설교는 다음과 같은 문제점을 만들어낸다.

첫째로 개인주의 설교는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설교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둘째로 개인을 극도로 존중하는 개인주의는 다양성이라는 명목 아래 적용적 결론을 돌출하는 설교의 약화를 양산했다. 신앙의 다양성은 큰 문제가 되지 않으나, 유일한 구원을 선포하는, 하나님 나라의 절대성과 하나님 나라 안에서 삶을 강조하는 공동체적 설교는 개인주의의 강력한 힘 앞에 표류하고 있다. 셋째로 기독교 신앙과 삶의 정통성이 되는 말씀과 전통이 제각각 해석되고 이해되는 상황이 급속도로 번지고 있다. 이러한 시대의 설교는 자칫 개인주의의 신앙화를 부추겨서 사회적으로 폐쇄적인 양태로 나타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결국 개인주의 설교는 ‘나-개인’이 우선시 되는 신앙을 양산해 낸다. 개인기도, 개인 사역, 개인의 일상, 각 개인의 삶만을 중요하게 여긴다. 이러한 설교는 성도와의 관계, 공동체, 이 세상에 대한 관심을 상실하게 만든다. 오늘날 극도로 개인화된 시대에서 다양한 개인을 하나로 획일화 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나, 교회는 한 몸이며 함께 하나님 나라의 길을 걸어가는 공동체의 형태로 존재해야한다면, 개인주의 설교는 반드시 각성되고, 방향성을 다시 잡아야 한다. 개인주의적 설교의 흐름은 교회 공동체를 강조하며, 하나님 나라의 주권을 선포하며,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세상에 초점을 맞추는 설교로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2) 신앙의 사유화 설교



     (1)자아와 신앙의 사유화

포스트모더니즘적 자아는 지식과 사물이‘객관적’이라는 사실을 거부한다. 개인이 주체가 된‘자아’는 일반적 지식에 대한 이해를 인식하는‘자아’가 주체가 되기 때문에 ‘객관성’을 가질 수 없다고 믿는다. ‘일반적인 지식’이나 ‘진리를 판단하는 지식’을‘인식하는 자아’가 판단하고 평가한다. 문제는‘인식하는 자아’가 불완전하기 때문에 절대화된 진리가 존재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인식 하는 자아’가 불완전하다는 생각은 궁극적으로‘인식하는 자아’가 믿고 있는‘진리’를 상대화시켰다. 또한‘인식하는 자아’가 믿고 있는‘진리’는 살고 있는 시대의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배경에 의해 조건적이기 때문에 모든 지식과 진리는 유사하게 제한적이며,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결과는 현대인들에게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진리를 발견해낼 수 없음을 알게 했다. 또한 진리는 역사적으로 그리고 문화적으로 조건 지어져 있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 한 부분 속에 있는 단체도 상대적이라는 생각을 심어주었다. 이러한 패러다임은 보편적인 진리가 아닌 자신의 절대성을 강조하는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을 이루었다. 이러한 현상이 교회 안에 유입되어 신앙의 사유화가 일어났다. 보편적 신앙의 전통이나 신학을 거부하고, 교회 공동체가 함께 믿고 신앙하는 바를 개인이 가진 지식과 신념으로 판단하게 되었다. 신앙의 사유화는 성경의 진리가 가지고 있는 신앙의 공공성을 약화시켰다. 신앙자체가 사회적이며, 관계적이며, 정치적임에도 불구하고, 타자와 관계하는 신앙의 영역을 축소시켰다.

 

    (2)신앙의 사유화의 태동과 발전

신앙의 사유화는 기독교 신앙을 교회 안의 신앙으로 한정짓고, 개인적인 차원에서만 신앙을 영유하려는 일련의 과정을 의미한다. 이 신앙의 사유화는 종교가 가지는 특징인 신(神)중심의 신앙과 타자중심, 공공영역에서 선을 파괴하였고, 신앙을 개인화시켰다. 이러한 현상은 서구에서 이미‘소속되지 않는 신앙’이라는 개념으로 큰 문제를 일으켰다. 신앙의 사유화 현상은 특정한 공동체 즉 교회에 소속되지 않는 신앙으로 움직이는 가교 역할을 했다. 이 신앙의 사유화 현상은 ‘네 방식대로 하라’고 가르친다. 즉 믿음도 성경에서 의미하는 바가 아닌 자신이 믿고 싶은 대로 믿고, 행함에 있어서도 자신이 행하고 싶은 대로 행한다.

신앙의 사유화는 1930년대 신비평(New Criticism)이라는 지적운동의 형태로 시작되었다. 이 시기 이후로 독자가 텍스트의 의미를 정의하고 창조하는 권한을 가진다. 독자는 텍스트를 해석하는데 철저한 독립성을 가진다. 이러한 신비평 이후에 독자는 다른 사람에게 어떤 텍스트의 의미를 강요받지 않게 되었고, 독자 스스로 텍스트를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하게 되었다. 신비평 이후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철저히 독립성이 주어진다.

이러한 신학적 흐름은 성경과 교회 안에서도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성경과 신앙 속에서 기준과 규범이 되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개인의 사고와 판단 속에서 성경을 해석한다. 철저하게 개인중심적인 성경 해석이 일어난다. 이러한 결과물로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과 하나님 나라의 이야기들이 주변부로 밀려났다. 반대로 개인의 만족과 기도응답, 치유 그리고 축복(기복) 등이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가 되었다. 이는 신앙을 교회 공동체적으로 이해하지 않을뿐더러, 성경의 가장 중요한 신학적 흐름, 구원역사와 하나님 나라에 대해 무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현대 사회적 현상, 즉 포스트모더니즘은 “거대한 이야기들과 메타 이야기”들을 거부하고, 과학적이고 객관적이라고 주장하면서 근대적 세계관을 합법화 시키고 정의와 진리를 전개하는데 도움을 주는 이야기들을 거부하게 되었다.

이러한 흐름은 세상을 보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다. 이는 객관적 세계관의 종말을 의미한다. 이러한 현상은 객관적인 사실과 보편적 진리를 통해서 세상을 인식하는 것을 거부한다. 결국 인식의 틀은 객관적 진리가 아니라, 개인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개인들 모두가 진리를 판단할 수 있고, 진리의 진위를 결정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결국 성경적 세계관의 필수적인 요소들 하나님, 목적, 의미의 제거를 통해 신과 도덕성의 죽음 및 진리의 소멸을 강화시켰다. 이러한 현상은 종교다원주의가 교회 안에 침투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했다. 다원주의에서 출발한 종교다원주의는 종교 간의 차이가‘진리’에 대한 차이가 아니라, ‘진리에 대한 인식의 문제’라고 주장한다. 모든 종교는 나름대로의 진리를 가지고 있으며, 그 진리를 존중해야 한다는 흐름이다. 이러한 흐름은 성경적 통일성이나, 객관성, 또는 전통적 변증이나 신조나 신앙고백을 외면하고, 무조건적인 다양성을 강조하는 상대주의적이며, 개인주의적 신앙으로 확산되고 있다.

이러한 신학적 흐름은 성도와 교회와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 나라와 회복의 관점에서 해석되어야 할 성경의 이야기(narrative)를 외면했다. 오직 자기 자신(개인)을 위한 신앙, 자기 자신을 위한 해석으로 신앙을 공적인 것에서 사적인 것으로 사유화시킨 것이다. 이는 하나님조차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하나님, 자기 자신의 기복을 위해 만들어진 하나님, 자기 자신의 생사화복(生死華服)을 위해 고용된 하나님으로 만들었다.

 

  (3)신앙의 사유화의 역기능 - 거대담론의 성경언어 상실

포스트모더니즘의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는 ‘해체주의적 경향’이다. 해체(deconstruction)의 의미는 'construction''에 'de'라는 접두어를 사용해서 모든 사물이나 관념을 자르고 부셔서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는 의미이다. 즉 해체는 근대의 관념이나 철학을 거부하기 위해서 사용되었다. 해체주의는 현대의 세계관의 기본적인 정신이나 관념 또는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진리들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하며, 재구성하려는 움직임이다. 이 헤체주의는 니체로 시작하여 프랑스의 철학자 자크 데리다로 이어진다. 자크 데리다는‘텍스트 이론’을 수용하는데, 이‘텍스트 이론’은 성경 텍스트를 해체시킬 위험을 가지고 있다. 즉 해체주의는 성도가 함께 공유할 성경의 진리와 함께 믿어야할 성경의 가르침, 즉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진리를 해체시킨다. 성경의 진리는 읽는 독자와 청중에 의해서 상대주의화 되며, 이는 교회 공동체가 함께 믿어야할 객관적 진리와 언어를 상실하게 만들었다.

해체주의는‘거대담론(巨大談論, meta-narrative)의 상실’을 이끌어냈다. 거대담론에 관한 주장은 리요타르가 1979년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책(The Postmodern Condition: A Report on knowledge)에 ‘거대담론의 불신’으로 소개했다. 이 책에서 리요타르는 오늘날 더 이상 ‘거대담론’이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리요타르는 일상적인 사회생활의 담론(談論) 뿐만 아니라, 모든 영역에서 획일화되고, 통일화 되는 것이 더 이상 타당성을 가지지 못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현상을 이우제는‘거대담론 (meta-narrative)’을 상실한 시대라고 표현했다. 인간이 함께 공유하고, 함께 세우고, 함께 해야 할 기초와 터가 무너졌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기초 즉 ‘터의 무너짐’의 비유는 이 시대가 공통의 토대와 그 토대가 되는 공통의 터의 상실을 의미한다.‘터의 무너짐’은 함께 바라보고 추구해야할 터가 상실된 것이며, 서로 연결되지 않는 단절된 이야기만 존재하며, 단절된 이야기는 서로에게 아무런 소속감도 연대감도 형성되지 않게 만들었다.

분명한 것은 진리는 언어와 사유에 선행하여 존재한다. 하지만 인간은 진리를 언어와 사유를 통해 적절히 파악한다. 그러므로 함께 공유된 언어와 사유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 그 언어 안에 실재로 주어진 진리를 경험할 수 없으며, 존재한다고 믿지 않는다. 이러한 관점에서 거대담론의 상실은 “존재하는 하나님 나라,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 보편적 교회, 가시적인 성만찬을 통해 실제로 임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공유된 언어의 상실로 이어진다. 이러한 거대담론의 상실로 인한 설교의 부정적 결과에 대해 이우제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거대담론’의 거절은 기독교 신앙을 전파해야 하는 설교 사역에 크게 도전한다. 공유된 진리의 언어, 기독교의 거대담론이 상실되면 실제로 기독교의 설교는 세속적 담론들 중에 일부이거나 문화의 하찮은 소리, 또는 신변잡기적인 언어로 전락해 버리고 말 것이다.”

결국 해체주의의 영향과 신앙의 사유화로 인한 거대담론의 상실은 성도가 함께 공유할 진리의 상실로 이어진다.

 

     (4)신앙의 사유화적 설교

현대사회는 급속도로 세속화되어 간다. 이 세속화는 다양한 결과를 양산하는데 그 중 두드러진 특징은 종교의 사유화와 탈제도적 종교성이다. 이 신앙의 사유화는 이미 한국교회 안에 광범위하게 침투해있다. 이러한 신앙의 사유화에 대해 데이비드 웰스는“이 문명은 진공 위에 세워져 있다. 그래서 개인이 책임감을 느끼는 대상, 곧 자기보다 더 높은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다. 사적인 이익이 유일한 가치가 되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이는 공적인 종교가 아닌 개인적, 사적인 종교로의 전락을 드러낸다. 존 맥아더(John F. MacArthur)는 “인간 철학의 목표는 진리를 하나님과 상관없는 것으로 인식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모든 사람이 갖고 있는 개인 영성은 자신만의 신을 원하는 대로 만들어 내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자기를 위한 사적인 종교를 만들어 낸 것이다. 이러한 현상이 신앙의 사유화이다. 토마스 루크만(Thomas Luckmann)는 종교가 세속화될 때, 보이는 종교는 쇠퇴하지만 보이지 않는 종교 즉 사유화된 개인의 종교로 여전히 의미를 지닌다고 강조했다. 종교의 사유화는 종교가 세속주의로 변해갈 때 생기는 현상 중 하나이다.

성경은 개인의 신앙을 강조하는 것뿐만 아니라, 공공성, 즉 공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다. 성경은 사회와 이웃과의 관계를 설명하며, 그 사이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 나라를 이루며, 어떻게 하나님 나라의 속성인 공의와 정의와 사랑을 실현하며 살아가야 하는지를 기록한 책이다. 성경에 기초한 신학이라면 사사로운 신학(private theology)만으로 존재할 수 없다. 성경은 공적신앙을 가르치고 있다.

하지만 신앙의 사유화 현상은 한국교회의 설교에서 나타나고 있다. 한국교회 설교는 신앙의 공적 영역을 상실한 채, 개인의 신앙생활과 개인구원에만 집중하고 있다. 이러한 결과는 예언자적 설교의 상실, 사회 윤리적 설교의 상실로 이어져 기독교의 공적 영역을 축소하였다. 이러한 설교학적 흐름은 한국교회와 성도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온 땅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게 만들었으며, 하나님을 교회 안의 하나님, 내 개인의 하나님으로 축소시켰다. 신앙의 사유화가 강조된 설교는 성도로 하여금 사회와 국가, 이 땅과 세상을 등지게 만들었다. 오로지 개인의 믿음과 그 믿음에 의해 주어지는 죽어서 가는 천국에만 소망을 두게 만든다. 이러한 설교의 흐름은 신앙의 이원론을 등장시켰다. 한국교회가 새롭게 갱신되기 위해서는 신앙의 사유화를 극복해야 하며, 한국교회의 설교는 설교의 공적인 영역을 확보해야 한다. 이에 개인적 신앙의 영역에서 공적 신앙의 영역으로, 예언자적 설교와 사회윤리를 가르치는 설교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3) 성장주의 설교



손봉호는 한국교회를 다음과 같이 진단하였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전도하라는 메시지가 끊임없이 선포되었고, 이를 강화하기 위한 축복의 약속과 재앙의 위협이 지속적으로 되풀이 되고 있다.” 손봉호는 한국교회의 현 상황을 “물량주의와 천민자본주의와 결탁하여 교회의 본질과 임무를 망각한 채 오로지 성장만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고 말한다. 성장주의 교회로 변모한 한국교회는 교회의 크기가 크든 작든 잠재적으로 대형교회를 지향하고 있다. 한국교회 설교는 이 성장주의를 부추기는 원동력이다. 본 단락에는 한국교회 안에 뿌리내린 성장주의와 성장주의 설교에 대해 서술할 것이다.

 

    (1)성장에 대한 한국교회의 이해

미국의 제도권 교회들이 소유하고 있는 재산은 부동산만 2300억 달러(근 300조원)이 넘는다. 일 년의 헌금이 110억 달러이며, 이중에서 약 18%에 해당되는 20억 달러(2.5조원)가 교회의 건물 융자 납입금, 유지비, 관리비로 지불된다. 이 통계의 수치를 근거하여 미국교회는 아주 큰 성장을 이루었다고 말한다. 이러한 결론은 한국교회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한국교회에서 소위 성장했다고 말하는 척도는 교회의 자산, 부동산, 예산, 성도수이다. 목회의 성공도 성도의 수, 교회의 규모, 교회의 재정, 교회가 가지고 있는 부동산의 크기에 따라 결정된다. 이에 목회자는 목회의 성공을 위해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수치와 통계에 혈안이 되어 있다. 이처럼 교회의 성장을 수치와 통계로 확인할 수 있다고 여기면서부터 목사는 이 통계와 수치에 민감해졌다. 이 통계의 수치 즉 성도의 수, 헌금의 액수, 새신자, 등록교인, 교회가 가진 부동산, 부흥회 집회의 참여 수 등의 수치가 이전보다 낮아지면 실패한 목사가 되는 것이 한국교회의 현실이다. 이러한 현실에 자유로울 목회자는 거의 없다. 그러므로 한국교회의 핵심 화두는 현재에도‘부흥과 성장’이다. “그 교회가 혹은 그 조직이 망하지 않고 오히려 성장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징표”라는 논리가 한국교회에 팽배하다. 이 말은 어떠한 형태의 성장이든지, 성장만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인정하시는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교회가 부흥과 성장을 하면 하나님이 역사하신 증거가 되며, 목회자의 탁월한 리더십이 칭송을 받는다. 결국 교회 안에 교회의 성장이 수치로 확인될 수 있으며, 그렇게 해야 더욱 성장한다는 논리가 내제되어 있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대형교회에 국한된 사실이 아니다. 교회의 규모와 상관없다. 많은 교회가 기회가 된다면 대형교회를 꿈꾸며, 대형교회를 지향하는 성장주의 DNA를 내재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2)성장주의의 설교

교회성장을 최고의 덕으로 삼는 한국교회의 목회적 현실에서 설교자는 성장을 추구하는 설교를 보이지 않게 강요받는다. 이에 한국교회의 설교는 성장주의를 강조하며, 정당성을 부여하게 되었다. 한국교회의 성장주의를 주도적으로 이끈 것이 한국교회의 강단이라고 이상민은 주장한다. 성장을 목적으로 삼는 성장주의 설교는 한국의 경제적 빈곤과 정치적 억압과 이념의 갈등 상황 속에서 더욱 강력하게 자리 잡았다. 성장주의 설교는 가난하고 빈곤한 성도에게 예수 잘 믿으면 복과 만사형통을 약속하였고, 가난한 이웃보다 나의‘부(富)’에만 집중하게 만들었다. 이 땅의 부정과 불법에 눈감고 죽어서 가야할 천국만 바라보게 하였으며, 성도와 세상과의 분리를 가속화시켰다. 이러한 분리는 이원론을 침투하게 만들었다. 또한 보수 진영의 성장주의 설교는 진보 성향의 교회와의 연대를 가로막았다. 성장주의 설교는 교회 성장에만 집중한 나머지 교회 공동체보다 개인을, 타자보다 나를 강조하는 성도들을 양산했다.

 

    (3)성장주의 설교의 청중인식 - 소비자

성장주의 설교는 청중을 가장 중요한 설교의 요소로 삼는다. 그 이유는 청중이 경제학적 용어로‘소비자’이기 때문이다.‘소비자’를 만족시켜야 기업이 생산한 물건이 잘 팔린다는 논리가 교회에도 적용된다. 그래서 교회성장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청중을 ‘소비자’로 인식하는 것이다. 그래야 성도의 수가 늘고, 교회의 재정이 풍부해진다. 소비자인 청중을 사로잡는 가장 주된 요인이 설교이다. 그래서 설교자는 청중이 좋아하고, 듣고 싶어 하는 설교를 한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 데이비드 웰스는 목회자들의 목회방식을 시장이 지배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오늘날 이 종교시장은 경쟁적이다. 그리고 목회자는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의‘기호’에 점점 더 다가가고 있다. 이것은 구매자 시장인데, 소비자의 요구는 교회가 제공하기 바라는 것에서 크게 고려해야 할 사항이다. 이런 현상은 어떻게‘교회를 운영’해야 하는가라는 많은 실험에서 많은 요소를 변화시켜왔다. 디즈니월드가‘손님’을 위해 깨끗하고 산뜻하고 낙천적이고 쾌적한 환경을 매우 성공적으로 만들어 내는 것처럼 교회도 그러한 방식의 도입을 진행해왔다.”

이처럼 성장주의 목회는‘시장(market)’이라는 맥락 속에서 청중을‘소비자’로 인식한다. 그래서 성장주의로 물든 한국교회 역시 청중을 소비자로 인식하고, 소비자인 청중을 만족시키는 설교를 하는 것이다. 사실 청중 중심의 설교가 모두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단서를 달면 “성장을 위한 청중 중심의 설교”, 즉 “청중을 소비자로 인식하는 설교”는 아주 부정적인 결과를 야기한다는 것이다. 김승욱은 청중과 교인을 소비자라고 표현하면서 그러한 설교의 폐단을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소비자가 왕이라는 자본주의 소비자 주권사상은 교회에도 그대로 들어왔다. 목사는 교인이 떨어져 나갈 것을 염려해 소비자인 교인들의 입맛에 맞는 설교를 해야 한다. 교인들이 싫어하는 회개 촉구 설교는 조심해야 한다. 그저 축복에 대한 설교나 아이들 다루듯이 칭찬만 해주는 것이 목회자의 역할이 되었다.”

이혁배도 소비자 중심주의 설교의 대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소비자 중심주의가 교회에 유입되어 경박한 신도 중심주의가 확립되면서 예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이 아닌 심리적 안정과 세속적 성공이 설교자들의 중심 메시지가 되고 있다.”

이승진도 소비자 중심주의 설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종교 시장의 변화에 적극적으로 부응하는 감성적인 설교, 기복적인 설교, 자아계발의 비법을 제시하는 설교, 내면세계의 불확실성과 불안의 문제를 확신과 선택 그리고 결단으로 이끄는 설교로 종교 소비자들을 붙잡으려는 것이다.”

이처럼 청중을 ‘소비자’자로 인식한 설교는 교회를 바르게 세우지 못한다. 청중은 ‘소비자’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며, 그리스도의 몸이며, 한 공동체의 지체이다. 이제 설교자의 청중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청중을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인식할 때에 하나님 나라를 회복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 갈수 있는 설교를 할 수 있는 것이다.

 

    (4)성장주의 설교의 하나님 나라 확장의 왜곡

성장주의, 성장 중심의 목회와 설교가 다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그것은 교회의 성장이 하나님 나라의 확장 또는 복음 전파와 무관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교회의 성장 이데올로기는 다음과 같은 등식이 성립된다. ‘교회 성장 = 복음 전파 = 하나님 나라 확장 = 하나님의 선’이다. 에디 깁스은 이러한 등식을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현대 복음주의 교회가 마케팅적 사고방식에 내재한 신학적, 선교학적 가정들을 비판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비판의 이유는 마케팅적 사고방식에서 이루어진 교회 즉 성장주의적 교회는 대량의 자본과 더 좋은 최신 기술, 그리고 더 많은 시설과 더 좋은 인물에 의존하는 경향을 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성장주의는 두 가지 측면에서 문제를 발생시킨다. 첫째 마케팅에 빠진 성장주의 교회의 목회 방식이 교회에서 하나님의 자리를 빼앗게 된다는 것이다. 둘째 교회의 지나친 성장주의는 물질과 돈을 목회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여기는데, 이 사실을 목격한 성도는 하나님보다 돈과 재물을 탐하며, 하나님보다 돈을 더 숭배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하워드 스나이더가 보는 더욱 심각한 문제는 그 사고방식과 정신의 문제이다. 하워드 스나이더는 “성장, 대형교회 그 자체에 대한 질문보다는 서구의 문화적 가치관이라는 주제로 접근해야 한다.”고 말한다. 서구 특히 북미인들은 크기와 성장 그리고 새로운 것에 과도하리만큼 높은 가치를 부여한다. 하지만 성경 어느 곳에서도 하나님 나라 복음에 대한 신실성이 크기와 연관되어 있다는 단서를 발견할 수 없다

결론적으로 에디 깁슨과 하워드 스나이더는“현대교회의 성장, 즉 교회의 크기, 성도 수의 증가, 교회의 재정, 교회의 부동산의 확장만큼,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와 의가 확장되었다고 볼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는 교회의 성장이 성도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거나, 세상을 변화시키고, 하나님 나라가 회복되는 것과는 별 관계가 없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교회의 성장을 무조건 하나님 나라의 확장으로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교회와 설교는 마치 교회가 성장하면 복음 전파가 된 것이고, 하나님 나라가 확장된 것이라고 가르치며 설교한다.

이러한 교회의 성장주의에 대해 양희송 역시 부정적 견해를 드러낸다. “성장을 추구하는 그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성장을 배타적으로 추구하는 과정에서 개체에 대한 관심은 사라지고, 성도를 단지 숫자로 보게 하며, 집단의 한 구성요소만 파악하게 하는 것이 교회의 본질적 속성을 위태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교회와 설교자가 성장주의에 치중하게 되면 개개인의 영혼에는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결과가 나타난다. 한 개인의 회심사건과 구원 사건, 한 개인의 변화보다 그룹, 더 큰 그룹이나 대중에만 관심을 가지게 된다. 한 영혼에 대한 무관심은 교회의 본질적 속성을 상실하는 결과로 나타난다.

결국 양희송은 “한국교회의 성장주의는 한 영혼 영혼에 무관심하지만 아니러니 하게도 성도들의 숫자에는 민감하다”는 것이 문제임을 지적하는 것이다. 이는 한 영혼의 일상과 성숙에 대한 관심은 현저히 떨어지지만, 한 영혼이 ‘모인 수’에는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이다. 성장주의는 한 영혼보다는 한 영혼이 ‘모인 수’가 더욱 중요하다. 성장주의는 한 영혼에 대한 관심을 상실하게 만들었다. 이에 성장주의 설교는 교회의 성장이 곧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며 이것이 무조건 하나님의 선이라는 경향성을 가지고 있다.

 

    (5)성장주의 설교와 감정 중심적 설교의 관계

감정주의 신앙은 계몽주의 이후 주체적 자아, ‘이성’으로 무장한 합리주의가 기독교와 교회와 기존의 신앙체계를 공격하자, 이 합리주의 도전에 대항하여 도피적인 경향을 지니게 되었다. 또한 감정주의 신앙은 역사-비평적 신학의 반작용으로 교회 안에서 힘을 발휘했다. 즉 성경을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이해시키는 작업의 한계에 봉착한 교회와 설교자는 성경의 가르침과 신앙을 개인적이고 감정적인 영역, 즉 주관적인 체험으로 이해시키려고 하였다. 이는 성경이 진리이며, 이성적으로 충분히 설명되고, 이해될 수 있는 영역조차도 개인의 주관적 체험의 영역으로 이양시킨 것이다. 감정주의 신앙은 제2차 대각성 운동에서 두드러지게 드러났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어떻게 변화시키는가?”가 아니라,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는가?”로 변하였다. 이는 신앙이 성도의 인격과 삶을 변화시키는 것보다 그들의 감성을 변화시키는 것이 더 중요한 주제가 된 것이다.

특히 감성주의가 바탕이 된 감정주의 설교에 대해서 정용섭은 “이러한 설교는 성서 계시의 존재론적 능력을 무시하는 행위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스스로 계시의 존재론적 토대를 확보하고 있기 때문에 인간학적인 기술을 첨가하지 않아도 부족함이 없다”고 하였다. 정용섭은 오늘날 설교자들은 성서 계시의 존재론적 능력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설교 자체에 감정적 자극(인간의 생각과 방법)들을 덧입힌다고 보는 것이다. 정용섭은 이 감성주의 설교의 밑바닥에는 포풀리즘(Populism)이 깔려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 요인과 연결된다. 첫째 현재 한국 사회에 감정주의 문화가 발달하고 있는데 기인한다. 이러한 감정 중심의 문화는 이성이나 논리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소위 말하는 “느낌”, “필(feel)", "이미지”를 중요하게 여긴다. 이에 청중들도 예외는 아니다. 그래서 감정주의 설교가 팽배해지는 것이다. 둘째, 우리 민족의 정서와 관련되어 있다. 우리 민족은 여전히 이성보다 감성에, 논리보다 감정에 의해 움직인다. 흥이 있으며, 춤과 해학이 있다. 이런 민족적 기질을 가진 한국인에게 감정에 호소하며, 감정적 동요를 일으키는 설교는 성도들로 하여금 큰 은혜를 끼치며, 성경의 주제 전달과 상관없이 성도들에게 감동을 가져다준다. 이러한 요인으로 인하여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감정주의 설교가 만연하게 된 것이다. 궁극적으로 이렇게 감정주의 설교가 만연하게 된 이유도 성장주의와 깊은 관련이 있다. 마이클 퀵은 감정주의 설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소위 번영의 복음(prosperity gospel)에 분명하게 나타나는 현상은 청중에게 좋은 느낌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 오직 청중의 감성만을 자극하고 지성의 부분은 철저히 무시한다. 이러한 현상은 궁극적으로 온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신자 개개인을 불러내시는 하나님의 통전적 구원을 간과하고 있다.”

감정주의 설교는 성장주의 설교와 맞물려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 자라가지 못하게 하며,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 회복을 간과할 우려가 있음을 설교자는 인지해야 한다.

 

    4) 사회윤리를 상실한 설교



      (1)사회윤리의 대두

서구사회는 20세기 초반 1, 2차 세계대전을 경험한 후, 큰 난관에 봉착했다. 인간의 합리적 이성으로 세상을 경영할 수 있다는 사고는 1, 2차 세계대전을 통하여 철저하게 붕괴된 것이다. 이는 서구사회와 철학자들뿐만 아니라, 신학자들에게도 충격이었다. 또한 신학자들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의 사회적인 문제들에 대해 신학이 더 이상 침묵할 수 없다는 인식과 자기반성이 일어났다. 이 자기반성은 특별히 사회윤리라는 측면에서 더 크게 대두되었다. 사실상 교회가 윤리를 가르치지 않은 것은 아니다. 20세기 초반의 윤리는 사회적 차원보다는 개인 윤리를 많이 다루었다. 하지만 20세기 중반 이후 개인윤리만으로는 사회의 문제와 현안을 해결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사회윤리라는 영역이 대두되기 시작했다.

사회윤리는 도덕적인 행위의 사회적인 조건과 의무를 직시하며 기존의 사회구조를 비판적으로 성찰함으로써 사회개혁 또는 새로운 사회구조의 구축에 관심을 가진다. 사회윤리는 1932년 라인홀드 니버의‘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Moral man and immoral society)’의 출간으로 교회와 신학계에서 자리매김을 할 수 있었다. 사회윤리의 중요성은 많은 신학자들에 의해 강조되었는데 특히 톰 라이트는 사회윤리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성도는 예수로 인하여 새로운 생명을 얻었고, 장차 새 하늘과 새 땅을 유업으로 받기 때문에, 새로운 세상에 사는 법을 미리 배운 결과로 윤리적인 삶을 살 수 밖에 없다. 또한 예수의 부활이 성도의 부활이 되기에 부활한 몸으로 행하는 실천 즉, 윤리적 삶이 진실로 중요하다.”

이처럼 사회윤리는 현재 서구사회나 신학계와 교회 안에서 선명하게 각인되었다.

 

    (2)한국교회가 사회윤리를 외면한 원인

서구에서는 사회윤리의 중요성이 강조되었지만 한국교회에서는 여전히 사회윤리가 간과되고 있다. 사회윤리는 교회의 영역이 아니라고 인식한다. 사회윤리는 세상의 정부나 단체, 기독교 NGO단체의 몫이라고 인식한다. 여전히 교회는 사회윤리를 외면한다. 이에 정종훈은 한국교회가 사회윤리를 외면한 원인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사회윤리 실현을 어렵게 한 내적인 문제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보수주의 기독교의 초창기 선교사들은 근본주의적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하나의 교회에 대한 관심보다는 개교회와 개인적 신앙구원에 집중되었다. 또한 교회의 비정치화를 강조하면서 교회와 정치를 분리시켰다. 둘째, 보수주의 기독교는 세계교회협의회 (W.C.C.)의 신학노선을 정면에서 반대하였다. 세계교회 협의회는 세계교회의 에큐메니컬을 지향하면서, 기독교의 사회윤리를 지지하였는데, 이에 반대적으로 보수주의 기독교는 에큐메니컬 운동과 사회윤리를 부정할 수밖에 없었다. 셋째, 한국 기독교는 500년 동안 지탱해온 유교적 토대위에 기독교를 세워나갔다. 이에 충효(忠孝) 사상, 장유유서(長幼有序) 같은 이데올로기는 권위에 복종해야 한다는 로마서 13장의 가르침을 접목하여 국가와 사회의 권위에 복종하는 것을 강요했다. 이러한 결과로 인해 국가와 사회가 비성경적인 행위를 할지라도 거기에 항거하지 못하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사회윤리 실현을 어렵게 한 외적인 문제는 다음과 같다. 첫째, 한국교회는 혈연, 지연, 학연의 끈에 매여 철저한 집단 이기주의로 감염되었다. 그래서 공사의 구분이 되지 않는다. 둘째, 한국교회는 비민주적인 군사문화에 철저히 감염되었다. 셋째, 한국 기독교는 분단 이데올로기에 철저히 감염되어 왔다.”

이처럼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윤리적 순수성을 감당해야할 교회가 오히려 세속 이데올로기, 세상의 악한 문화를 받아들임으로 사회윤리를 상실하게 된 것이다. 사회윤리를 등진 한국교회는 사회문제를 기피하는 기이한 현상을 보였다. 또한 사회문제와 사회윤리를 언급하면 좌파 또는 급진적(radical) 기독교라고 폄하하고 있는 실정이다.

 

    (3)사회윤리를 외면한 한국교회의 설교

한국교회의 설교는 대부분 사회윤리가 결여되어 있다. 정치적 설교, 사회윤리 설교는 한국교회에서 기피설교이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 요소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사회윤리라는 측면이 생소하며, ‘사회윤리’라는 주제의 거부감 때문이다. 한국교회는 ‘성경의 가르침은 윤리를 초월한다.’라는 신학적 인식으로 ‘사회윤리’라는 주제를 교회 안의 신학적, 목회적, 설교적 주제로 삼는 것을 꺼리고 있다. 둘째 교회 안에서 세상의 부정과 부패, 정의와 공의가 사라진 비윤리적이고, 비성경적인 행태들을 고스란히 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에서 행해지고 있는 비윤리적 모습을 설교할 수 없으며, 성도들에게 윤리적 삶을 가르칠 수 없다. 이 윤리의식을 상실한 목회자들을 이상섭은 다름과 같이 비판한다.

“윤리의식이 에베레스트 산 정상의 산소의 농도보다 더 희박해진 설교자들은 힘없는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기업을 축복하고, 억압당하다 못해 일어선 노동자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으로 저주를 퍼붓는다. 민족을 배신하고 민족을 타민족에게 팔아먹은 자들과 그 후손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선언한다.”

이러한 사회윤리와 윤리의식의 결여는 다음 통계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설문 조사를 통한 설교 사역 분석 통계 조사 개요에 의하면“질문4 : 귀하께서는‘설교 주제’는 다음 중 어떠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라는 질문에 대한 응답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한국교회 설교자들이 윤리와 삶에 관한 설교에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



답변
 
응답률
 
합계
 

설교는 오직 하나님 말씀만 전해야 한다.
 
51.0 %
 
82.5 %
 

21세기에 맞게 현대적 주제를 다루어야 한다.
 
31.5 %
 

윤리와 생활을 강조하는 설교가 필요하다
 
9.2 %
 
 
 

교리적 주제와 교육적 주제들을 다루어야 한다.
 
8.3 %
 
 
 



사회윤리 설교가 약화된 한국교회의 설교를 김운용은 “한국교회의 설교에서 개인구원과 신앙생활에 대해서는 깊은 관심을 가지면서도 설교의 사회적인 차원에 있어서 예언적 기능은 상실했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예언적 기능의 상실이라 함은 설교의 사회적 차원, 세상 속의 복음, 세상에서의 공의와 정의, 현재 심각하게 대두되고 있는 공공(공정)신학 등을 등한시 여기는 것을 의미한다. 김운용이 언급한 것처럼 한국교회의 설교는 복음의 사회적인 차원을 도외시하고, 교회 안에서만 통용되는 편협한 복음만을 설교하였다. 하나님이 온 세상의 주인이며, 온 피조세계를 다스리길 원하심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 설교자는 복음을 교회 안에 가두어 교회 안에서만 힘을 발휘하는 반쪽 하나님을 만들어버렸다. 윤리를 상실한 설교의 결과는 한국교회가 세상 속에서 지탄을 받게 되는 하나의 큰 원인을 제공하였다.



3. 나가기



나이트(Henry H. Knight Ⅲ)는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개인과 공동체 사이의 관계가 어느 정도 서로 긴장을 이룬다고 보았다. 하지만 글렌 스타센(Glen H. Stassen)은 “현대사회는 우리가 속한 뿌리와 공동체로부터 우리를 격리시키고, 자기 자신을 스스로 만들어 가는, 곧 자율적 개인으로 생각하게 만든다.”고 주장했다. 즉 현대사회는 공동체와 개인을 분리, 격리시키고 있다. 공동체와 격리된 자율적 개인은 극단적인 개인주의 형태를 띠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다섯 가지 차원에서 공동체의 신음소리로 나타난다.

“하나는 ‘신자유주의’의 글로벌화로 인한 경제의 양극화 현상, 둘은 이와 같은 ‘신자유주의’ 이념으로 추동되는 무한 경쟁, 무한 개발, 무한 소비로 인한 생태계의 파괴, 셋은 글로벌 차원의 ‘빈익빈 부익부’로 인한 이민과 인구 이동으로 발생하는 다민족, 다문화, 다종교, 다가치의 분산(分散)이요, 넷은 세계종교들의 특수성과 다양성 속에서 도덕 윤리 차원에서의 공동체의 깨어짐이요, 다섯은 전쟁과 테러로 인한 인류 공동체의 붕괴의 신음이다.”

이처럼 공동체와 관계가 단절된 개인은 극단적 개인주의 형태를 띠게 된다는 의미를 포함하여, 공동체를 떠난 개인은 삶의 뿌리와 방향성을 상실한다. 이 현상의 결과물은 교회 공동체의 붕괴이다. 개인주의와 신자유주의로 일어난 공동체 붕괴의 심각한 문제는 공동체 안에서 성도 개인으로 하여금 어떠한 강요나 순종을 요구하지 않는 결과를 양산했다. 이 교회 공동체의 붕괴는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심각하게 왜곡시키고 있다.

이러한 사회와 교회적 현상을 타파해야할 설교도 제 기능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 이승진은 “개인주의로 인한 기독교의 세속화와 소비자 제일주의의 영향으로 현대 기독교 설교자들이 설교에서 신앙공동체의 연대와 책임을 충분히 강조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개인주의가 팽배한 한국교회는 오히려 개인주의를 강화하는 설교와 신앙의 사유화를 묵인하는 설교를 행하고 있다. 오롯이 교회의 성장만을 추구하는 목사는 청중을 소비자로 인식하고, 교회의 성장이 곧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라는 잘못된 가르침을 설교하며, 성도의 감정만을 터치하는 감정주의 설교를 시행하고 있다. 또한 복잡하고 부패한 세상을 등지고 교회에서만 통용되는 윤리, 즉 사회윤리를 간과한 설교가 행해지고 있다.

하나님은 설교를 통해서 교회 공동체를 세우신다. 그러므로 설교의 주요한 기능은 교회 공동체를 세우는 것이다. 이처럼 설교가 제 기능을 수행하려면 교회의 정체성과 교회의 현실을 정확히 인지해야 하며, 그 교회를 세우는 설교적 흐름을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



본 논문에서 주장하는 바와 같이 한국교회는 개인주의 설교, 신앙의 사유화 설교, 성장주의 설교, 사회윤리를 상실한 설교가 만연하다. 이러한 설교의 흐름은 교회 공동체를 온전히 세울 수 없음을 인지해야 한다. 이에 설교자는 자신의 설교의 흐름을 연구하고, 비판하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안적 노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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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창현 박사 (두레교회 부목사)/한국복음주의실천신학회 제2차 신학포럼/합동신학대학원 설교센터

출처 : 예수 코리아
글쓴이 : 예수코리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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