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 언약과 원복음과의 상관성
1. 선악과 금령법으로 불려지는 아담 언약
창세기 3:15에서 주시고 있는 ‘여자의 후손’에 의한 메시야의 구원 약속이 주어지는 직접적인 요인은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 두시고 따 먹는 것을 금지하신 선악과를 아담이 불순종하여 지키지 않고 먹음으로서 범죄 한 데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이 문제를 다룬다.
“우리의 시조들은 사단의 간계와 시험에 유혹을 받아 금지된 실과를 먹음으로 범죄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범한 이 죄를 그의 지혜롭고 거룩한 계획을 따라 기쁘게 허용하셨는데, 이는 그것을 명령하심으로 그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시기로 이미 계획하셨기 때문이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6장 1항).
“이 죄로 말미암아 그들은 본래의 의를 잃게 되고, 하나님과의 교통이 끊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죄로 죽게 되었고, 영과 육의 모든 기능들과 기관들이 전적으로 더럽혀지고 말았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6장 2항).
아담이 하나님의 금령법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써 범죄한 것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6조 1항에서 말하고 있는 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범한 이 죄를 그의 지혜롭고 거룩한 계획을 따라 기쁘게 허용하신데 따른 것이다. 이로 인해서 제2항에서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인간은 이 죄로 말미암아 그들 본래의 의를 잃게 되고, 하나님과의 교통이 끊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죄로 죽게 되었고, 영과 육의 모든 기능들과 기관들이 전적으로 더럽혀지고 말았다.
웨스트민스터 제7장 1항은 이 선악과 금령법을 ‘하나님의 언약’으로 다룬다.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의 간격이 너무도 크기 때문에, 비록 이성적인 피조물에게는 하나님을 그들의 창조주로 순종해야 할 의무가 있지만 그들은 하나님에게서 무슨 축복이나 상급을 열매 맺을 수가 없었고, 오직 하나님 편에서 자원하여 베풀어 주시는 은혜로서만 가능하였다. 그런데 그 은혜를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수단으로 하여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다”(웨스트민스터 제7장 1항).
이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선악과 금령법은 하나님께서 인간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으로서 첫 번째 언약이었다. 선악과 금령법에 의한 하나님의 언약은 하나님께서 아담과 맺은 언약이기 때문에 ‘아담언약’으로도 불려진다. 그 언약의 조건은 완전하고 개별적인 순종을 요구하시는 것이었다. 아담과 그의 후손으로 오는 모든 인류는 이 언약 안에서 하나님을 그들의 창조주로 순종해야 할 의무가 있었고, 하나님께서 그러한 그들에게 베풀어 주시는 은혜에 의해서 축복과 상급의 열매를 맺을 수가 있었다.
2. 아담 언약의 신적 기원
바울은 에베소서 1장 4-6절에서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에서 다루고 있는 신적작정(神的作定, decree or divine decrees)에서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흠 없는 자로 만드실 것을 작정하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것으로 선택하셨다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우리의 존재성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속을 받아야만 하는 존재로 이미 작정되었다. 즉, 창세 전에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될 사람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속받을 것의 작정 속에서 이미 그의 생명이 작정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에 대한 실천으로 아담언약이 주어졌다. 이런 까닭에 아담언약은 그 신적 기원을 창세 전에 가지신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에 두고 있다.
아담언약은 에덴동산 중앙에 두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실을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먹으면 '반드시 죽을 것이다'는 경고와 금지를 나타내 주시고 있다. 그런데 이것을 가지고서 교회는 전통적으로 여기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실을 먹지 않으면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담겨져 있다는 것으로 견해로 가져왔다. 즉, 먹으면 죽기 때문에 죽지 않게 하시려고 금하셨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을 죽지 않게 하시려는 것이요, 이는 사람으로 하여금 영원히 살게 하려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 하나님께서 계시하여 주시고 있는 진의는 ,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실을 먹지 않게 금하신 것은 먹으면 죽기 때문인 것으로 사람의 본능적 욕망에서 나오는 것은 하나님의 금령법을 불순종하여 죄를 지을 뿐이라는 것이요 그 결과 죄 값인 죽음에 처하게 될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과연 그런가? 하는 것을 먼저 아담언약의 전통적 견해를 본 후에 이 사실을 함께 살펴볼 것이다.
3. 아담언약의 전통적 견해 : ‘생명의 언약’-‘행위언약’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주신 언약은 에덴동산 중앙에 두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실을 먹는 것을 금지한 ‘선악과’로 다루어진다. 이것을 통해서 맺으신 하나님의 언약에 대해 윌리암스(G. I. Williams)는 소요리문답 강해에서 “첫 언약은 ‘생명의 언약’이라 부르는 데, 하나님은 아담에게 생명을 약속하셨다. 또 이것을 행위언약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하나님이 선물을 주기 전에 먼저 순종을 요구하셨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박형룡(朴亨龍) 박사는 ‘교의신학 인간론’에서 웹스터대사전을 인용하여 말하기를, “타락 전에 사람은 행위언약 아래 있었는데 그것에서 하나님은 그가 그 율법을 완전히 지키면 그에게 [인류의 언약원수(言約元首) 아담을 통하여] 영원한 행복을 주시기로 약속하셨다." 라고 말하였다. 박윤선 박사도 그의 주석 창세기에서 “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신 것이 계약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행위계약(行爲契約)의 말씀이다.”라고 말하였다. 이러한 견해는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ck)의 견해에서도 그대로 볼 수 있다. 그는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주신 계명은 그 사건의 본질(本質)로 보아 언약인 것이다. 곧 아담이 순종하기만 하면 영생을 얻도록 하는 언약인 것이다” 라고 하였다.
윌리암스를 비롯하여서 각 사람이 이렇게 선악과를 통해서 주어진 하나님의 언약을 생명언약, 또는 행위언약이라고 규정한 것은, 장로교회가 신앙의 표준문서로 삼고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 이것을 다루고 있는데 따른 것이다.
“인간과 맺은 첫 번째 언약은 행위 언약이었다. 그 행위 언약으로 생명이 아담과 그 안에서 그의 후손에게 약속되었다. 그 언약의 조건은 완전하고 개별적인 순종이었다”(웨스트민스터 제7장 2항).
여기서 보는 대로, 선악과 금령법은 하나님께서 인간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으로서 첫 번째 언약이었다. 이 첫 번째 하나님의 언약은 ‘행위 언약’으로 불려진다. 그 행위 언약으로 생명이 아담과 그 안에서 그의 후손에게 약속되었다.
행위언약으로도 불려지는 선악과 금령법인 아담언약은 하나님께서 인간인 아담과 대등한 입장에서 계약을 맺는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조건들을 제시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에서는 행위언약으로도 불려지는 선악과 금령법인 아담언약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그 성격을 문답 형식을 통해서 설명해 준다.
“사람이 창조함을 받은 본 지위에 있을 때 에 하나님께서 저를 향하여 섭리하시는 중 무슨 특별한 작정을 하셨습니까?”(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12문)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후에, 완전히 순복하는 것을 조건으로 삼아 생명의 언약을 맺고, 선악을 분별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는 것은 사망의 벌로써 금했습니다”(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12문 답).
여기서 보는 대로,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에서는 아담언약을 행위언약으로 다루면서 ‘생명의 언약’을 맺는, 즉 생명을 약속하고 있는 것으로 보는 견해를 갖고 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주신 언약은 ‘생명의 언약’을 맺고 생명을 조건으로 하여서 이를 순종으로 지킬 것을 요구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완전히 순복하는 것을 조건으로 삼아” 언약을 맺었다. 하나님은 이 언약을 순복하여 지키는 행위를 통해서 아담과 그 후손에게 생명을 약속하신다. 이러한 언약의 이해에 의해서 생명의 언약인 아담언약은 행위언약으로 다루어져왔다.
그라프(S. G. De Graaf)는 ‘약속 그리고 구원’(Promise and Deliverance)에서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금하셨다. 인간은 선과 악을 구별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선(good)이란 하나님이 명하시는 것이다. 반면에 악(evil)은 하나님이 금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God's Will)만이 선이다. 그리고 나는 의심 없이 순종해야 한다” 라고 하였다. 그리고 또한 “하나님께서는 하나의 특정한 명령을 내리심으로 인간에게 자발적 순종의 기회를 주셨다. 에덴동산에는 믿음직스럽게 보이는 열매를 가진 특별한 나무가 있었는데 인간은 그 열매를 먹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러한 명령을 받음으로써 인간은 선과 악을 알게 되었다. 여기서 ‘안다’(know)는 의미는 ‘구별한다’(distinguish)는 뜻이다. 즉 하나님께서 명령하는 것이 ‘선’(good)이며 금하는 것이 ‘악’(evil)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카일.델리취(C. F. Keil and F. Delitzsch)는 “지식의 나무 (선악과)는 사람들을 선과 악을 아는 지식에로 인도하기 위해 심어졌다” 라고 말하였다.
4. 아담 언약이 약속하고 있는 죽음
그러나 이것에 대한 이해는 이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성경의 본의(원의)에 의해서 올바르게 가져야 한다. 왜냐하면, 선악과 금령법을 말씀하신 성경 구절에서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주신 언약은 ‘생명의 언약’을 맺고 생명을 조건으로 걸며 이를 순종으로 지킬 것을 요구하는 것으로 다루어져야 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일에 생명의 언약으로 다루어져야 한다면, 그래서 이 언약을 “완전히 순복하는 것을 조건으로 삼아” 맺은 행위언약이라고 한다면, 윌리암스가 말한 대로 이 언약을 순복하여 지키는 행위를 통해서 아담과 그 후손에게 생명을 약속하시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지키면 살리라”는 것이 언약의 핵심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언약의 이해에 의해서 행위언약이 다루어져왔다.
그러나 아담언약은 죽음을 약속한다. 그것은 바울이 에베소서 1장 4-6절에서 다루고 있는 신적작정(神的作定, decree)에서 볼 때 분명히 그렇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흠 없는 자로 만드실 것을 작정하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것으로 선택하셨다. 여기서 우리의 존재성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속을 받아야만 하는 존재로 이미 작정되었다. 구속이란 죽음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러니까 창조될 사람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속받을 것의 작정 속에서 이미 죽음 또한 작정되어 있는 것이다. 이 죽음에서 다시 살아날 것, 그래서 영원한 생명을 소유할 것이 창세 전에 작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실천으로 아담언약이 주어졌다. 아담언약은 에덴동산 중앙에 두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실을 먹으면 '반드시 죽는다'는 하나님의 뜻을 강하게 나타내 주시고 있다. 이 나무의 과실을 먹지 않으면 ‘반드시 산다’는 것에서 주어진 하나님의 언약이 아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자신이 에덴동산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실을 먹을 것을 알고 계신다. 이를 알고 계시면서도 다른 나무의 과실들과 함께 이 나무의 과실을 에덴동산 중앙에 두신 것은 사람이 이를 먹고 죽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흙에서 나온 피조물의 몸으로서의 사람으로서는 하늘의 세계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흙에서 나온 몸인 육은 육이기 때문에 이 몸을 영의 몸으로 새롭게 입히시는 일을 하셔야 한다. 해서, 하나님은 피조물인 사람의 몸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영이신 그리스도께서 입으신 몸과 같은 하늘에 속한 영광스러운 몸으로 새롭게 입히실 것을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실 것을 작정하신 것이다. 카일. 델리취(C. F. Keil and F. Delitzsch)의 주석은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해석을 하고 있다. “실로 그것(생명)은 육체의 멸망을 통하여 끝나게 될 것이지만, 그것은 영구적인 지속, 즉 그 보존과 유지를 통하여 불멸성에로 올려질 수 없다. 또한 이것은 타락 이후의 사람에게 적용된 것만큼 사람의 본래 성질에도 적용된다. 땅의 재료로부터 형성된 육체는 반드시 불멸적이 될 수 없다. 그것은 반드시 땅으로 돌이켜져서 또 다시 흙으로 떨어지거나 영에 의해 혼의 불멸성으로 변형될 것이다.”
5. 아담 언약이 신적작정과의 관계에서 갖는 죄의 이해
그에 따라서 창조 받은 사람은 필연적으로 반드시 죽어야 한다. 이 죽음에 이르게 하시는 방식으로 하나님은 ‘죄’라는 것을 사용하셨다. 여기서의 죄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계획을 이루실 것으로 사용하시는 것으로 등장한다. 곧, 아담과 그의 자손으로 오는 모든 사람을 죽음 아래 있게 하시는 것으로 사용되는 것이다. 그동안 신학은 이 ‘죄’ 문제를 피해가려고 노력하였다. 하나님을 죄의 조성자로 만들 수가 없다는 생각에서이다. 그러나 사람의 타락과 관련한 죄의 등장은 모든 사람을 죄 아래 가두고 죽음이 왕노릇 하게 하시는 것으로써의 개념을 갖는다. 죄가 와야 의의 개념이 또한 등장한다.
흙에서 나온 것으로 몸을 입은 사람은 본질상 그 몸의 특질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 이 사람으로서는 하늘의 세계인 영의 본질을 알 수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셔서 육인 사람을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영적인 존재로 만드셨다. 하지만, 사람은 하나님과 함께 하고 있는 중에서도 사람의 특성을 그대로 발휘한다. 그것은 ‘먹음직하고 보암직하여 탐스러운 열매’란 생각을 가졌을 때, 육이 갖는 먹고자 하는 본능을 좇아 행하는 것이다. 사람이 사단의 시험을 받았을 때 이 시험에 사람의 육의 본능은 그대로 노출되어 있는 것이다. 이 시험을 받을 때 창조 받은 사람의 상태가 아직 죄를 짓지 않은 무흠한 상태에 있는 존재라고 할지라도 언제든지 죄를 짓고 타락하여 죽음에 이를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존재이기에 언제나 ‘다만 하나님의 말씀만을 좇아 하나님을 경외’하는 순종을 온전히 보일 수가 없다. 그런 존재의 사람을 하나님은 ‘다만 하나님의 말씀만을 좇아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들고자 하시는 것이 육의 사람은 죽게 하고, 영의 사람으로 새롭게 살리는 일을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 놀라운 신비의 비밀을 '부활의 장'으로 불리우는 고린도전서 15장 35-53절에서 다루기를, 사람의 몸(육체)에는 흙을 취하여 만든 땅에서 나온 형체와 하늘에서 주어지는 형제의 각각 다른 형체가 있다면서 우리가 사람의 몸을 가지고 있지만 후에는 하나님께서 영적인 하늘의 몸을 주실 것으로, 아담은 땅에 있는 흙으로 지어졌고 사람은 모두 아담과 같이 흙으로 지어진 몸을 지니고 있지만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에서 오신 분으로 그리스도의 소유가 된 사람은 모두 그리스도와 같은 하늘에서 주어진 몸을 지녀 훗날에는 그리스도와 같은 몸을 지니게 될 것이라고 하면서, 왜 그래야만 하는가의 이유는 혈과 육으로 이루어진 땅 위의 몸은 썩어질 몸으로 영원히 살 수 없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우리를 다 결코 죽지 않는 새로운 몸을 얻게 하시기 위하여 부활을 시킬 것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이 죽고 썩을 수밖에 없는 땅 위의 몸은 멸망하지 않고 영원히 사는 하늘의 몸으로 변화가 될 것이라고 하였다.
하나님은 악이 없으시다. 하나님은 오직 선하시다. 하나님은 창세 전에 가시신 영원한 작정을 이루시는 섭리로 ‘죄’라는 것을 사용하셨다. 그러기에 여기서의 하나님 앞에서의 죄는 선의 개념을 갖는다. 하나님은 그 죄를 수단으로 하여서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여 타락하는 범죄의 개념으로 사람에게 갖게 하신다. 그래서 악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신다. 즉 악의 개념을 갖는 것이다. 그라프(S. G. De. Graaf)는 그의 저서 ‘약속 그리고 구원’(Promis and Deliverance)에서 “인간은 선과 악을 구별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선’(good)이란 하나님이 명하시는 것이다. 반면에 ‘악’(evil)은 하나님이 금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만이 ‘선’인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이라면 의심 없이 순종해야 한다.”라고 하였으며, 또한 “하나님께서는 하나의 특정한 명령을 내리심으로 인간에게 자발적 순종의 기회를 주셨다. 에덴동산에는 믿음직스럽게 보이는 열매를 가진 특별한 나무가 있었는데 인간은 그 열매를 먹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러한 명령을 받음으로써 인간은 선과 악을 알게 되었다. 여기서 ‘안다’(know)는 의미는 ‘구별한다’(distinguish)는 뜻이다. 즉 하나님께서 명령하는 것이 ‘선’(good)이며 금하는 것이 ‘악’(evil)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카일․델리취(C. F. Keil and F. Delitzsch)는 “지식의 나무 (선악과)는 사람들을 선과 악을 아는 지식에로 인도하기 위해 심어졌다” 라고 하였다.
하나님께서 에덴동산 중앙에 두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실(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은 ‘선과 악에 대한 지식의 나무’이다. 어떤 성격에서의 선과 악에 대한 지식의 나무인가 하면, ‘선과 악에 이르는 지식의 나무’로서 이다. 곧, 선에 이르는 지식의 나무, 악에 이르는 지식의 나무이다. 하나님께서는 금지한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여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는 것을 통해서 선과 악의 개념을 알 수 있게 하셨다. 그리고 악으로 사람이 하나님께 범죄하여 타락하고 부패한 죄인이며, 이 죄로 사람이 죽음의 형벌에 있게 된 사실을 알게 하셨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언약을 맺으신 것은 이렇게 사람이 죄를 짓고 죽음에 있게 될 것을 알려주시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하나님의 선하심을 알 수 있게 해주셨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함께 에덴동산 중앙에 두신 생명나무가 하나님의 언약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것은 이 나무와 함께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갖는 중요한 가치와 이 나무가 갖는 중요한 의미 때문이다. 그것은 생명나무를 먹는 것의 가치와 의미는 상대적으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데서 찾아지기 때문이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로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선과 악에 대한 지식의 나무’이다. 그러면 이러한 나무의 명칭이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 이는 하나님께서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곳으로 사람을 이끄신 것과 연결하여서 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을 창설하시고 그곳으로 사람을 이끄셔서 그곳에 두시고 살게 하신 데는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셨는데, 그 사람의 창조를 보면 하나님은 사람을 ‘산 자’(a living being; or a living soul)로 지으셨다. 그러면 사람이 ‘산 자’인 존재성이 단지 호흡[숨]을 하고,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는 데 있는가 하는 것을 생각할 때, 이는 하나님께서 복 주심으로 되어지는 일인데, 이렇게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아서 온 땅에 충만해져 가는 사람이 될 수 있는 환경 속에서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의도는 에덴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동산 중앙에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두신 일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사람이란 존재는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이란 본질적인 속성을 띤 생명을 언약을 통해서 약속 받았지만, 이것이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은 사람으로서 하나님과 함께 그 생명의 기쁨과 가치를 영원히 누려갈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 생명의 기쁨과 가치를 영원히 누리지 못할 수도 있는 존재인 것이다. 그리고 후자의 경우를 생명의 상대적인 개념인 ‘죽음’(사망)으로 표현한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을 창설하시고 또한 그곳에 온갖 나무와 함께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두시고서는 모든 나무의 열매는 임의로 먹게 하시면서도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따먹지 못하게 하신 까닭은 이렇게 하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산 자’, 곧 산 사람으로 있게 하고자 하는데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약속 받은 존재이지만 그런 그가 ‘산 자’의 평가를 받는 것은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가운데서 사는 데 있다. 그러니까 사람이 사람다운 것, 곧 사람이 ‘산 자’로서의 사람 된 진정한 모습은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가진 관계를 통해서 그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나타내는 데서 보여 지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로 주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을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생명이 있는 자로서 의미 있고 가치 있게 사는 것으로 보고 계시는 것이며, 이에 반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여서 사는 것을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생명이 있는 자로서 마땅히 여기에 합당한 생명력을 발휘하여서 의미 있고 가치 있게 살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전혀 의미 없고 가치 없는 생명으로 사는 것으로 보고 계시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약속인 그리스도를 순종(믿음)으로 받아들여 그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받기 까지는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한 생명을 부여받았으나 실상은 전혀 그 생명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실상은 죽은 자이다.
그런데 ‘산 자’로 지음 받은 처음 사람의 상태는 에덴동산에서 어떤 때는 생명력을 발휘하고서 살고, 또 어떤 때는 아무런 생명력도 발휘하지 못하고서 살고 하는 것을 자기의 마음먹고 행동하기에 따라서 언제든지 달리 할 수 있는 그런 존재가 아니었다. 사람은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함으로써 그가 받은 ‘산 자’의 생명을 지속적으로 누려나가는 약속의 상태에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여서 금지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어서 죄를 지을 경우는 ‘죽음’이 약속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 약속은 어느 한 쪽의 선택권 문제가 아니라,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치 않음으로 반드시 죽음에 처하게 될 것에 대한 첫 사람에게 보여 지고 또한 있게 되는 상태를 말씀해 주시는 것이다. 그러기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은 후로의 사람은 아담만이 아니라 그의 후손으로 난 모든 인류에게는 죽음이 왕노릇을 한다. 첫 사람 아담의 대표원리가 그래서 등장한다.
6. 선악과 금령법을 어긴 아담의 범죄에서 보는 죄의 특성
아담은 하나님께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2:17)라고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말씀을 불순종하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었다. 비록 헤르만 바빙크나 그의 견해를 따른 박윤선 박사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교리문답서와 이를 해석하는 자들이 모두 이 하나님의 말씀을 ‘행위언약’의 차원에서 이해하는 견해를 가졌을지라도, 분명한 것은 이것을 ‘언약’(言約, covenant)으로 분명히 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언약은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에서 잘 나타나 있듯이 하나님의 계획으로 하나님께서 반드시 실천하실 것을 의미한다. 아담의 범죄는 이런 차원에서 이해하여야 한다. 비록 아담이 사단의 시험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함으로 범죄 하였지만, 이는 아담의 자유의지 안에서 그의 책임론으로만 다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유의지조차도 하나님이 작정하신 바 그 뜻을 온 세상을 경영해 가시는 섭리론에 두고 계신데 따른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작정에 대한 우리의 믿음이다.
아담이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불순종하여 지은 죄는 자신의 타락과 함께 자신 안에서 전인류의 타락을 가져와 죄와 죽음 아래 있게 하였다. 아담이 인류의 시조인 동시에 또한 인류의 대표자인 까닭에 아담 안에 들어 있는 그의 모든 후손들도 아담과 함께 죄와 죽음 아래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시고 그 이름을 사람을 의미하는 뜻인 ‘아담’이라고 지은 것에서 전인류의 상태가 예시되어 있었다. ‘아담’(!d:a;)이란 이름은 붉은 땅을 의미하는 말인 ‘아다마’(hm;d:a})에서 나왔는데, 이 말도 같은 어원인 ‘붉음’, '흙’, 땅‘, ’진흙‘, ’‘티끌’, 먼지’를 의미하는 ‘아파르’(rp;[;)에서 나왔다. 이렇게 붉은 흙에서 나온 인간에게서는 선한 것을 아무 것도 기대할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결과가 아담이란 이름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이며, 이는 또한 하나님의 언약을 어기는 것에서 나타난 것이다. 그러므로 흙에서 나온 인간은 흙으로 돌아간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정녕 죽으리라고 선언하신 ‘죽음’이다.
아담의 불순종으로 모든 인간은 아담 안에서 죄인이 되었다. 아담의 후손으로 오는 모든 인간은 죄의 종[노예]의 비참한 상태에 놓여 있으며, 죄 값으로 죽음의 형벌을 받는다. 이런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 더 이상 함께 있지 않고 다만 ‘흙의 형상’인 ‘아담의 형상’에서 나오는 마음에 의한 종교성에 의해서 하나님을 알면서도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고 일부로라도 거짓된 것을 섬기는 악한 죄를 행할 뿐만 아니라 육은 죄성에서 나오는 온갖 욕망에 이끌려 산다. 이것이 아담의 불순종 이후의 인간의 실상이다.
7. 원복음인 ‘여자의 후손’(창 3:15) 약속이 주어지게 되는 직접적 요인이 되는 아담의 범죄와 타락
아담의 배필인 하와는 뱀을 통한 사단의 시험(유혹)을 받아 하나님의 금령법인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실을 따먹고, 또한 남편 아담에게도 주어서 먹게 함으로써 아담을 시험(유혹)에 빠뜨리게 하였다. 사단의 조정에 의한 뱀의 시험은 시험에 넘어간 하와에 의해 다시 확대되어서 아담에게 미쳤다. 이때 아담은 여자를 주관해야 할 위치에 있으면서 그에게 주어진 여자를 다스리는 일을 하지 못하고 아내 하와와 함께 사단이 시험한 의도에 이끌려 하나님의 금령법인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실을 먹음으로 하나님께 죄를 짓고 타락하고 말았다.
바울은 로마서 5장 12절에서 이 문제를 다루는데,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라고 ‘한 사람으로 인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왔다’라고 말하고 있으며, 또한 고린도전서 15장 21절에서 이 문제로 말미암아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다”고 말하여 아담을 지칭하는 ‘한 사람으로 인하여’ 죄와 그 값인 사망(죽음)이 세상에 왔다는 사실을 분명히 한다.
아담 한 사람으로 인하여 모든 사람이 죄인 된 것은 원죄(original sin) 교리로 가르쳐진다. 원죄란 인간이 나면서부터 갖고 오는 죄의 상태와 조건으로 아담의 원초적 죄에서 유래한다. 이 죄는 모든 인류 생활과 개인의 삶에 나타나는 죄의 뿌리이다. 뻘콥(L. Berkhof)은 “사람들이 태어나는 죄악된 신분과 상태는 신학상 ‘원죄’라는 명칭에 의해 명명이 된다“면서 이렇게 불려지는 이유는 ”인류의 원뿌리에서 기원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즉, 인류의 첫 사람으로서 인류의 시조요 대표자가 되는 아담 한 사람으로 인하여 모든 사람이 죄인 되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바울이 한 말인 “한 사람으로 인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다”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죄 아래 있는 인간의 모습은 죽은 상태에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창세기 3장 15절 ‘여자의 후손’이 지닌 구원 약속은 아담언약을 통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죄 아래에서 죽은 상태에 있는 죄인 된 인간을 구원하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계시해 주시며 이를 복음으로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함으로써 그가 받은 생명을 지속적으로 누려나가는 약속의 상태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여서 금지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어서 죄를 지음으로 ‘죽음’에 처해진 인간에게도 약속되어 있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아담의 범죄 직후 그에게 나타나셔서 그를 시험한 뱀을 저주하시는 말씀에서 ‘여자의 후손’에 의한 구원 약속을 말씀해 주시고 있는 것은 이미 그와 그의 후손들을 위한 구원의 계획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게 해준다.
비록 아담이 사단의 시험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함으로 범죄하였지만, 하나님은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작정하신 바 그 뜻을 온 세상을 경영해 가시는 섭리를 펼쳐나가고 계신다. 이에 따라서 하나님의 크고 놀라우신 은혜는 아담의 불순종 이후에도 계속되어지는데 더욱 크게 나타난다. 범죄한 아담에게 찾아오셔서, 그를 창조 하셨을 때 하셨던 것처럼 언약에 담은 생명을 구원의 약속으로 주셔서 그 약속에 따라서 구속의 역사를 경영해 가실 것을 계시하신 것이다. 아담언약은 그렇게 이 언약으로 말미암아서 올 하나님의 은혜인 구원의 약속을 가져다주기 위해서 준비되어지고 먼저 주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그 약속의 증표로 죄로 인해서 오는 수치 속에 있는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지어서 입혀 그들의 부끄러움을 가려 주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새로이 주신 약속은 그와 그에게 속한 모든 후손을 구원의 소망 속에 있게 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인간에게 하나님을 주로 모시고 섬기는 중에 소망의 성취를 기다리는 믿음을 주시는 일이었다. 인간은 하나님이 주신 구원의 약속이 있어서 소망을 가질 수 있고, 그 소망을 믿음의 내용으로 가짐으로써 하나님 앞에 있는,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간다. 이러한 관계성을 '믿음'으로 설명한다. 또한 하나님은 구원의 약속을 주어 인간을 소망 속에 두시고 믿음으로 살게 하시는 것을 통하여 그의 순종을 이끌어 내신다. 인간은 언약에서 약속으로 주시고 있는 소망을 믿음의 내용으로 가짐으로써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의에 있다
이천우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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