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의 영성론(靈性論)
제1부 - 요한복음의 영성 이해
I. 성령의 근거
1. 로고스와 성령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가 요한 복음서를 영적인 복음이라고 말하였지만, 성령이라는 말이 요한 복음서에 얼마나 적게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 원어 상으로 “성령”(푸뉴마 하기온)은 요한 복음서에서 단 세 번밖에 나타나지 않는다(요 1:33, 20:22). 이같은 숫자는 다른 복음서들에 비해 유별나게 적은 숫자다. 요한은 때때로 성령을 의미하는 생각으로 그저 ‘영’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으며, 그것을 번역하는 사람들은 성령으로 번역하는 때가 많다.
그러나 문제는 무엇 때문에 요한이 성령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고 영이라는 말을 더 많이 사용하고 있는지에 대한 물음이다. 아마도 성령을 다른 표현으로 대신하여 말한 것은 아닐까 하는 것이다. 요한에게는 요한 나름의 특이한 말들이 나타난다. ‘생명’이라든지 ‘영원한 생명’ 또는 ‘로고스’와 같은 표현들이다. 혹시나 그와 같은 표현들이 성령이나 성령을 따라 사는 영성 생활을 가리키는 표현들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요한복음서 서두에는 다른 복음서들과 같은 예수의 탄생 기사도 없을 뿐만 아니라 탄생에 성령이 개입한 이야기도 없다. 그 반면에 로고스가 육신으로 나타나셨다는 기록이 있다. 성령으로 태어나신 것을 부정한 것은 아닌 것이 분명하다. 로고스로 오셨다는 것은 곧 성령으로 오셨다는 요한의 표현일 수가 있다. 요한복음서의 주요 부분 가운데서 간접적인 표현이나마 요한은 말씀 곧 로고스가 성령이시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하나님이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낌없이 성령을 주시기 때문이다”(3:34) 라고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으로부터 유래한 것이며 또한 그것이 성령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그리스도의 말씀 또한 영이요 생명이라고 한다(6:62). 요한은 예수가 성령으로 세상에 오셨다는 의미가 생리적인 출생의 면보다도 영적인 면을 더 무게 있게 보았던 것이다.
성령으로 난 사람(원문에는 영으로 난 사람이라고 함)에 관해서 요한은 이렇게 말한다. “바람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와 같다”고 한다(3:8). 이 말의 뜻은 성령으로 태어난다는 것이 생리적으로 출생하는 종류의 출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일이라는 뜻이다. 성령으로 난 자라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나는 것을 뜻하는 것인데 요한복음서의 서문에서 요한은 이렇게 말한다. 그런 사람들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인간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다”(1:13).
예수의 기원에 관해서 요한은 하나님으로부터 오셨다고 하는 점을 강조한다. 그것은 곧 성령으로 오셨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초대 교회 전반에 걸쳐서 이해되고 있는 성령의 특징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심을 받게 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성령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것으로 알고 있다. 성령은 하나님께서 내려 주시는 것이다. 요한복음에서 하나님께서 보내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말씀이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것이다. 하늘로부터 내려오신 분은 인자이시다(3:13). 하나님이 세상에 주신 독생자이시고 그를 하나님께서 세상에 보내셨다는 것이 거듭 요한 복음서에는 강조되어 있다. 요한의 기독론의 특색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았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보내심을 받은 그분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해진 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3:34). 이 점에 있어서 요한의 주요 부분과 로고스 서문과의 내용이 일치한다.
서문에 따르면 말씀은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1:1). 그것은 로고스가 하나님으로부터 유래한 것이라는 로고스의 기원을 말한 것인데 하나님께서 하늘로부터 내려 주신 것은 성령이라고 초대 교회 전승들은 일반적으로 이해하고 있는데 비해서, 요한은 독특하게 하늘로부터 유래한 것이 로고스라고 하는 것을 더 강하게 역설한다. 그러므로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하늘로부터 유래하셨다고 말할 때 그것이 생리적인 출생을 가리켜 말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로고스로 세상에 오셨다는 로고스의 면을 강조한 것이며 초대 교회가 성령으로 잉태하신 것을 기적이나 초자연적인 출생으로 풀이하고 있었다는 것에 비해서, 요한은 성령의 역할을 하나님의 말씀이나 그의 뜻으로 해석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2. 예수와 성령 세례
요한 복음서에 있어서 성령에 대한 본격적인 기록은 세례 요한의 증언의 기사 가운데 처음으로 나타난다(1:29-34). 이 기록 가운데서 중요한 요지가 밝혀진다. 곧 성령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성령으로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며 그리스도는 성령을 받으신 분일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가 바로 신자들의 영성 생활의 근거가 되신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해 준다. 요한의 증언의 초점은 바로 이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분이라는 것이다. 다른 말로 설명한다면 모든 신자들의 성령 체험의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이다.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성령에 관한 기사는 분명히 초대 교회의 전승에 근거한 것이다. 요한은 그 전승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그러나 그 전승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데 있어서 요한복음서는 초대 전승과는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 요한복음은 요한복음 그 나름으로 기사를 수정하여 다시 쓰고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선명한 수정의 흔적은 세례 요한의 증언이다(1:29-34). 세례 요한은 다만의 증인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가 예수에게 세례를 주었다던가 또는 예수께서 그에게 세례를 받으셨다는 전승의 이야기는 완전히 삭제해 버린 것이다. 아마도 여기에 요한복음서 기자의 의도가 숨어 있는 것 같다. 예수께서는 세례 요한이 주는 것과 같은 물의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전혀 없으신 분으로 묘사할 의도에서 그리하였던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예수께서는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성령의 세례를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받으신 분이다. 그리고 처음부터 하나님으로부터 받으신 분으로 본 것이다.
요한 복음서에 의하면 세례 요한은 이렇게 증언한다. “나는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에서 내려와 이 분 위에 머무르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그때가 언제였는지 밝히지 않는다. 그러나 보았다(테데아마이)라는 동사의 시상은 분명히 깨달음에 이를 만한 시간을 포함한 과거의 일로 이야기한 것이다. 전에도 세례 요한은 말했다는 것이다. “내가 전에 내 뒤에 한 분이 오실 터인데 그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신 분이기 때문이다” 하고 말한 일이 있다는 것이다(1:30). 요한복음서는 시종 일관 이 점을 역설한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습니다.??그는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1:1-2).
복음서의 중도에서도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아브라함이 있기 전부터 내가 있었다”(8:58). 분명히 요한복음서는 예수가 처음부터 하늘로부터 성령을 받으신 분으로 확신하고 있다. 또한 성령은 일회적인 체험이 아니다. 하늘에서 내려와 이 분 위에 머무르는 것을 보았다는 말 가운데 머무르다(카이 에메이넨)(1:32)라는 동사와 33절의 “머무르는 것을 보거든”의 머무르다(메논)라는 동사에 대해서 학자들의 의견은 매우 무게 있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곧 예수의 성령 체험은 그가 세례를 받으셨을 때에만 있을 수 있었던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포함한 연속적인 일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는 것이다.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왔다는 기사에 관해서 요한복음서는 공관 복음서의 기사와 근본적인 차이점을 나타내 보인다. 이 기사는 전승에서 온 것은 분명하지만 각각 복음서 기자들의 이해하는 방법에는 큰 차이가 있어 보인다. 공관 복음서의 마태나 누가는 성령이 강림하는 것을 가시적인 현상이나 육안으로 체험할 수 있는 초자연적인 사건으로 묘사하고 있다.
마태에 의하면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영이 비둘기 같이 자기 위에 내려오시는(‘에르코메논’이라는 동사를 덧붙여 행동적인 면을 더 강조한다) 것을 보셨습니다”(마 3:16) 라고 말함으로써 육체적인 동작으로 묘사하였다. 누가복음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소마티코)” 내려왔다고 함으로써 그 나타난 모양이 완전하게 육체적 형태로 나타난 현상으로 묘사하였다(눅 3:22). 공관 복음의 그와 같은 면과 요한 복음서의 기사를 비교해 볼 때 확실하게 요한 복음서의 성령 강림의 모습은 영적인 현상이다. 요한은 그와 같은 육체적인 동작을 나타내는 어떤 보조적인 표현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요한에게 있어서 성령의 강림은 오로지 영적인 것이다. 그리고 그 영적인 의미의 성령 체험은 그리스도를 근거로 하여 크리스천들이 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이신 예수의 위에 성령이 강림하였다는 이야기를 보도하는 일에 있어서 요한복음서가 공관 복음서와 다른 점은 바로 이 점이다. 요한복음만이 다음의 설명을 보충하고 있다. “성령이 내려와서 어떤 사람 위에 머무르는 것을 보거든 그가 바로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인 줄 알라”는 것이다(1:33). 그리스도는 바로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이다. 신자들이 성령을 체험할 수 있고 영성 생활을 할 수 있는 방법의 하나는 그리스도를 통하는 길이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신자들은 성령을 받게 될 것이다. 세례 요한의 증언 가운데 이것이 밝혀져 있다. 그의 증언을 수록하고 있는 요한복음서의 의도는 올바른 영성 생활은 그리스도에게서 근원 된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요한복음서는 시종 이런 입장을 지키고 있다. 복음서의 주요 부분에서 이것을 시사하고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이 말한 바와 같이 그의 배에서 생수가 강 같이 흘러나올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받게 될 성령을 가리켜 하신 말씀이라는 것이다(7:38-39). 또 요한복음서의 후반부인 고별 담화문 속에서도 이것을 또 다시 다짐해 보인다(14:26).
요한 복음서에 있어서 성령 체험과 영성 생활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통해서 경험할 수 있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라서 얻어질 수 있는 것이다. 성령의 은사를 체험한다는 일이 초월적 신비에 빠지거나 비합리적인 황홀경(엑스타시) 체험이 아니다. 하나님의 로고스를 따르는 것과 로고스이신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라 사는 생활 속에서 성령의 체험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자기 멋대로의 성령 체험을 요한은 배격한 것이다.
기독교가 이방 세계로 선교를 확장해 나갈 때 흔히 있을 수 있는 현상은 선교지의 토착 신앙의 영성 체험을 본 따기 쉬운 것이다. 또한 신비적인 경험에 의지하여 그리스도의 가르치심과 상관없이 자기 식으로의 영성 체험을 내세우기도 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카리스마적 운동 가운데는 일찍이 그리스도께서 한 번도 본보여 주신 일이 없는 방법의 성령 체험으로 자기의 영적인 능력을 과시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리라고 본다. 그와 같은 그릇된 영성 체험을 견제하는 의미에서 요한은 특별히 건전한 영성 생활의 길을 제시한 것이다. 건전한 영성 생활이란 그리스도에게 근거를 둔 영성 생활이다. 그리스도에게 근거를 둔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말씀에 토대를 둔 영성 생활을 의미하는 것이며,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근거를 둔 영성 생활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을 처음부터 분명하게 하고자 하는 것이 요한복음서의 성령 이해의 특징이다.
3. 은혜와 진리
공관 복음서 전승에 의하면 세례를 받으신 다음의 예수는 성령이 충만하여 광야에서 사탄의 시험을 이기신 기사가 나타난다(마 4:1-11, 막 1:12-13, 눅 4:1-13). 마태와 마가에는 없지만 누가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성령이 충만하여 요단강에서 올라오셨다”고 한다(눅 4:1). 그러나 요한 복음서에는 그와 같이 성령이 충만하셨다는 이야기는 없다. 그와는 달리 요한 복음서에는 예수께서 은혜와 진리가 충만했다고 하는 기록이 나타난다. 공관 복음서의 성령이 충만하셨다는 기사와 비교가 된다. 공관 복음서에서와 같은 초대 교회의 전승을 요한의 이해 방식으로 해석한 것이 아닌가 추측이 된다.
충만하다는 표현의 원어(플레에레스)는 누가와 요한이 일치한다. 성령에 관련해서 사용하는 표현이다. 그러나 요한은 성령에 관한 말이 기대되는 자리에 성령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고 그 자리에 은혜와 진리라는 말을 쓴 것이다. 예수께서 성령이 충만하셨다는 것이 요한에게 있어서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셨던 것으로 이해된 것이다. 여기에 요한의 의도가 있다. 요한에게 있어서 성령의 은사라는 것은 초자연적인 능력의 충만이 아니라 은혜와 진리로 충만한 것이며 성령 체험은 은혜와 진리를 따르는 생활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이다.
사실 언어상으로 볼 때 은혜와 성령 사이에는 그다지 거리가 먼 것은 아니다. 성령의 은사를 말할 때 헬라어로는 ‘카리스마’라고 한다. 은혜의 원어도 ‘카리스’로써 ‘카리스마’와 같은 말에 속한 것이다. 그러므로 ‘은혜’도 성령의 은사 중의 하나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은혜라는 ‘카리스’가 진리라고 하는 말과 함께 사용될 때에는 히브리어의 사랑과 진리(“헤세드와 오메드”)를 헬라어로 번역한 것으로 볼 수 있는 가능성도 매우 크다. ‘헤세드’는 사랑으로도 번역할 수 있다. 사랑은 성령의 은사에 속한다. 실제로 바울은 성령의 은사의 여러 가지를 이야기할 때 사랑을 성령의 은사 중의 가장 큰 은사로 들었던 것이다(고전 12:31이하). 그리고 그것을 은혜의 선물로 여겼던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이 예수를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분으로 말할 때에는 성령이 충만하신 분이라는 것을 뜻한 것으로 보아 마땅하다.
요한복음서는 예수가 은혜와 함께 진리도 충만하신 분이라고 말한다(1:14). 진리도 성령을 의미한다. 요한은 보혜사 성령을 말할 때에 진리의 영이라고 불렀다(14:17, 15:26, 16:13). 성령의 주요한 성격을 진리로 표현한 것이다. 요한 복음서에 있어서 진리가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서는 이론이 구구하다. 한때는 영지주의나 헬라 사상적인 배경이 있는 것으로도 해석했었다.
그러나 구약성서에 나타난 진리 개념이라든지 또는 구약의 경?외전이나 사해 사본을 참작해 볼 때 요한복음서가 말하는 진리의 뜻은 유대인들의 사고방식과 매우 거리가 가까운 것이다. 잠언에 의하면 진리는 지혜를 뜻하고 그것은 하나님의 계명이다(잠 23:23). 사해 종파의 글에 있어서나 경?외전에 있어서 진리는 신도들이 행하여야 할 윤리적인 선을 의미한다. 그리고 진리의 영은 선한 일로 인도하는 영적인 힘이다(유다의 유언 20:1, 5, IQS 3:6 etc).
요한은 행한다는 말과 함께 진리라는 말을 사용한다. “진리를 행하는 사람은 빛으로 나아간다”고 한다(3:21). 요한에게 있어서 진리라는 것은 사람이 행하여야 하는 윤리적인 선을 의미하는 것이다. 요한의 진리 개념은 구약의 ‘오메드’에 가깝다. ‘오메드’는 지성적인 의미의 범주에 속한 것이 아니라 도덕적 범주에 속한 것이다. 요한의 진리가 얼마나 오메드의 뜻을 충실하게 따를 것일까에 대해서 다드(Dodd)는 어느 정도 의심을 갖기는 하지만 은혜와 진리라는 두 말의 합성은 히브리어 구약의 표현의 영향일 것으로 본다. 그것은 실천적인 것이다. “예수께서 자기를 믿는 후대 사람들에 말씀하셨다.” “너희가 내 말대로 살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게 될 것이다.” 요한은 진리가 행하여야 하는 행동적 윤리에 속한 것임을 분명하게 한다(8:31-32). 제자들이 행하여야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라고 불렀다(17:17). 그리고 그 말씀은 진리의 영이 가르쳐 주는 것이지만 하나님께로부터 들으신 말씀으로서 장차 제자들이 마땅히 행하여야 하는 일에 관한 것이라고 보았다(16:13). 크리스천들이 행할 바 도덕적인 선에 속한 것이다. 그리고 진리는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말씀을 가리킨다(8:45).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진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14:6)라고 하신다. 요한이 본 진리다. 진리가 곧 그리스도 자신이시다. 그리스도 자신이 진리이신 하나님의 계시이기 때문이다(1:17,18).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왔다”는 것과 하나님을 나타내 보이셨던 분은 바로 그분이시라는 것이다(1:17,18). 그리스도가 되시는 진리를 알게 하는 것은 곧 진리의 영이시라는 것이다(16:13).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요한의 성령에 대한 이해를 정리해 보자. 요한은 서두부터 성령의 역할을 기록해야 할 부분에서 성령을 대신하여 로고스와 로고스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통해서 사람들이 충만하게 체험할 수 있는 은혜와 진리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리함으로써 요한은 성령을 통해 일어나는 일들이 초자연적이거나 기적적인 카리스마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의 계시와 같은 면을 더욱 중요시하고 있다. 또한 그 말씀을 믿고 행함으로써 체험할 수 있는 윤리적 생활면을 영성 생활의 더욱 중요한 열매로 본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요한복음서가 뜻하고 있는 점은 영성에 속한 모든 체험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진다고 하는 점이다. 성령 체험의 원천은 그리스도라는 것을 밝히고 있다.
초대 교회는 성령 체험을 무엇보다도 소중히 여기는 집단이었다.
교회가 시작되고 발전해 나가는 데 있어서 성령의 도우심이 결정적이었다고 확신하였던 만큼 신자들은 성령의 은사를 받는 것을 가장 큰 자랑으로 삼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고린도전서에 바울은 성령 체험이라고 할 때 아마도 신비적인 방법으로나 자기도취에서 얻어질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 많이 있었던 것이라는 암시를 준다. 기독교가 유대를 떠나 안디옥으로, 또는 아라비아, 소아시아나 마게도니아 그리고 로마와 이집트로 확장되어 나가는 과정에서 그와 같은 여러 이교도들의 지역으로부터 토착적인 영성 체험의 방법을 본받았었을 가능성의 위험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어느 모로 보거나 건전한 성령 체험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으리라고 본다. 광신적이고 흥분된 상태의 모든 영성 체험이 과연 모두 올바르고 바람직한 성령의 체험일까 하는 의문을 갖게 하며 반성과 재고의 필요를 느끼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와 같은 가정 아래서 요한 복음서를 볼 때 요한복음서는 공관 복음서 전승과의 현저한 차이를 발견하게 된다.
II. 영원한 생명과 영성 생활
1. 거듭남과 성령
앞에서 이미 우리는 요한복음서가 성령이라는 표현을 조심스럽게 유보하며 로고스나 진리나 은혜와 같은 표현으로 대체해 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요한복음서는 또 다른 하나의 독특한 표현을 즐겨 사용하고 있다. ‘생명’ 또는 ‘영원한 생명’이라는 표현이다. 요한은 복음서를 기록한 목적을 다음의 짧은 글로 요약하여 말하였다. “여기에 기록한 것은 예수가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당신들로 믿게 하고 또 믿고 그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요 20:31).
생명을 얻게 한다는 것이 요한 복음서를 기록한 가장 큰 목적이라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는 생명이라는 말과 영원한 생명이라는 말은 거의 동의어가 되다시피 하는 같은 말이다. 요한은 ‘생명’ 또는 ‘영원한 생명’을 거듭 되풀이하여 강조하고 있는데 그 생명을 누린다는 것이 혹시나 요한에게 있어서 성령 체험과 영성 생활에 해당한 표현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생명을 주는 것은 영이다”(6:63). “내가(예수가) 너희에게 한 그 말은 영이요 생명이다”(6:63). 요한은 예수로 하여금 이렇게 말씀하시도록 하면서 영과 생명을 밀접하게 연결 짓는다.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는 것은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얻어지는 것으로 요한은 말하고 있다. 그것은 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말씀 때문인 것이며 말씀은 하나님께서 성령(영)을 주시기 때문이라고 한다(3:34). 예수께서 주시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4:14). 그가 주시는 물은 마시는 그 사람의 속에서 샘물이 되어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할 것이라고 한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 난 다음 곧 이어서 요한은 영과 진리로 예배드려야 한다는 말을 하고 있다(4:23). 생명이라는 말은 쓰지 않았지만 예수께서 주시는 물과 관련하여 요한은 말하면서 “믿는 사람은??그의 배에서 생수가 강같이 흘러나올 것”이라고 하며 그것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받게 될 성령을 가리켜 하신 말씀이라고 한다(7:38-39). 이렇게 생명과 성령을 밀접하게 관련된 것으로 본다.
이와는 경우가 다르기는 하지만 목숨이나 생명을 가리킬 때에도 영이라는 표현을 썼다. 예수께서 운명하실 때 “다 이루어졌다”라고 말씀하신 후 머리를 떨어뜨리고 숨을 거두셨다고 하는데 원문에는 유일하게 요한복음서만 영(프뉴마)을 거두셨다는 표현을 쓰고 있다(19:30). 목숨을 ‘프뉴마’(영)로 표현한 것이다. 위에서 살펴본 구절들을 통해 볼 때 요한이 말하는 생명과 영원한 생명이라는 것은 성령이나 영과 밀접히 관계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생명을 갖는다는 말은 영성 생활의 목적에 도달한다는 말이기도 하며 생명을 누린다는 말이 곧 영성 생활을 의미하는 것 같이 보인다.
생명과 성령이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잘 드러내 주는 것은 거듭나는 생활에 관한 니고데모와 예수와의 담화 가운데 잘 나타난다. 요한에게 있어서 생명은 거듭나는 체험을 통해서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거듭남의 목표가 생명이라는 말을 직접으로 하지는 않는다. 거듭남의 목적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일이라고 한다(3:5). 또는 하나님의 나라를 볼 것이라고도 한다(3:3)(본다는 말은 경험한다, 맛본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과 영원한 생명을 차지하게 된다는 말이 거의 같은 의미로 사용된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공관 복음서의 전승을 살펴봄으로써 확인할 수가 있다. 니고데모와의 담화와 같은 전승의 배경을 가진 것으로 보이는 율법 학자와의 대화가 공관 복음서에 나타난다. 마가에 따르면 어떤 율법 학자가 가장 큰 계명에 관해서 예수께 물었다(막 12:28-34, 마 22:34-40, 눅 10:25-28). 마가에 따르면 그때 예수께서는 대답하셨다. “너는 하나님 나라에서 멀지 않다”(막 12:34).
공관 복음서에서 니고데모와 같은 율법 학자의 질문은 어떻게 하면 하나님 나라를 소유할 수 있는지에 관한 물음이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것이었지만 누가의 보도에 따르면 율법 학자는 이렇게 물었다는 것이다.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겠습니까?” 물음의 내용을 영원한 생명에 관한 것이었다고 본 것이다(눅 10:25). 공관 복음서의 저자에게도 이미 율법 학자의 하나님 나라에 관한 물음이 영원한 생명에 관한 것이라는 것이 밝혀져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공관 복음서에서 이것을 보충할 만한 기사를 찾아볼 수 있다. “누구든지 어린이의 심정으로 하나님 나라를 맞아들이지 않으면 결코 거기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는 말씀이다(막 10:15, 마 18:3, 눅 18:17). 그런데 이 경우에 있어서도 누가는 의회원 중의 한 사람의 질문과 연결 지어 놓는다. “선하신 선생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겠습니까?”(눅 18:18).
분명한 사실은 이미 공관 복음서의 기자들 사이에서도 하나님 나라에 관한 질문은 곧 영원한 생명에 관한 질문과 동일한 것이라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요한은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거듭남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된다는 말을 하고 난 다음에 다시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는다. 반면에 영원한 생명이 이 대화의 주제로 계속 나타난다(3:15,16, 34). 거듭남으로 얻게 되는 것은 영원한 생명이라는 것이다.
거듭나는 체험이란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이라는 것이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한다(3:5). 곧 성령을 뜻하는 ‘영’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거듭남의 이야기는 세례의 이야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1장에서 요한은 예수께서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분이라는 말을 세례 요한으로 하여금 증언하도록 한 바 있다(1:33). 3장의 니고데모의 이야기까지 세례의 주제는 끊어지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 2장에서 가나의 혼인 잔치에도 곧 세례와 같은 정결 예법에 관한 기사가 나타난다. 세례라고 하는 주제를 이어받아 성령으로 거듭나는 문제로 화제를 옮겨간다.
요한은 의도적으로 물로 만의 세례의 중요성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를 보인다. 예수께서 세례 요한으로부터 물로 세례를 받으셨다는 전승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보도하지 않는다. 아마도 의도적으로 보도를 생략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하는 숨은 의도는 명확하다. 비록 물의 세례가 중요한 것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물로 주는 세례 의식만으로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판단인 것으로 보인다. 예수께서는 물의 세례를 요한으로부터 받으실 필요가 없으신 분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 반면에 세례의 참 뜻은 성령을 받는 일이라고 본 것이다. 그리고 성령은 예수로부터 받을 수 있는 것임을 밝히려고 한 것이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성령 체험은 영적인 것이며 물과 같이 형태를 가진 물리적 현상이 아니라는 것을 밝혀 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요한의 예수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바람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성령으로(영으로) 난 사람은 다 이와 같다”고 하신다(3:8). 그러므로 니고데모의 대화 속에 나타난 거듭남의 이야기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에 관한 말씀이었음과 동시에 그것이 성령 체험을 의미하는 것이었음이 분명하다.
2. ‘생명’,‘영원한 생명’
요한에게 있어서 생명을 누린다는 것은 곧 영성 체험(혹은 성령 체험)을 한다는 말이다. 생명은 성령의 또 다른 표현인 것이다. 요한은 성령의 은사를 받아 삶을 얻게 되는 영성 체험을 영생을 누린다는 말로 표현한 것이다. 생명이 영성 생활을 뜻하는 것임을 요한은 거듭 강조하고 있다. 사마리아 여자와의 대화 중에서 예수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속에서 샘물이 되어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할 것이다”(4:14). 이 말씀이 있고 난 다음 또 이렇게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그에게 예배드리는 사람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4:24). 더욱 더 직선적인 표현이 발견된다. “생명을 주는 것은 영이다”라는 말씀이다(6:63). 예수께서는 자신의 말씀에 관해서 “영이요 생명”이라고 하신다(6:63).
“영원한 생명”이 성령 체험과 깊은 관계가 있다는 것을 또 다른 각도에서 살펴볼 수 있다. 언어 상으로 헬라어의 “영원한 생명”(조에 아이오니오스)은 순수한 헬라어라기보다는 히브리어나 아람어가 번역된 표현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묵시문학에서 종말론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용어로 “오는 세대”(하예 올람)이라는 말이 있다. 그 말이 헬라어로 번역될 때에 “영원한 생명”이라고 번역될 수 있는 것이다(단 12:2).
다니엘서를 제외한 다른 묵시 문학에서도 그와 같은 예가 발견된다(제4에스라서 7:12-13). 다드(Dodd)는 그것이 묵시 문학의 마지막 날에 해당하는 앞으로 오는 미래적인 새 날을 뜻하는 표현이었다고 판단한다. 그의 판단은 충분한 문헌적 근거가 있는 말이다. 사실 요한도 역시 영원한 생명이 종말론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았음이 분명하다. 요한은 수시로 마지막 날에 대한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그때에 영원히 누리게 될 생명에 관해서 말하고 있다(11:23-26). 마지막 날의 종말론적 의미가 있는 것이라면 성령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가 없다. 요엘서를 인용하는 초대 교회는 마지막 날에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각 사람에게 부어 주실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행 2:17).
쿰란 종파의 종말 사상에도 성령 강림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것을 참작해 볼 때 요한은 바로 극적인 성령 강림을 직접으로 말하고는 있지 않지만 영원한 생명이라는 종말론적 표현을 사용하고 있으므로 종말론적 새 시대에 반드시 성령 강림이 수반되는 것이라고 믿고 있던 묵시 문학적 종말 인식을 전연 외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요한이 종말론적 의식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성령 체험을 말하지 않고 있다는 데 대해서 의문을 가져 볼 수 있다. 요한이 생명 또는 영원한 생명이라는 말로 종말론적인 삶을 표현한 것이라면 거기에 어떤 의도가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요한은 마지막 날에 맛보게 될 성령 체험이 어떠한 것이어야 할지를 남달리 관심 하였던 것이 아닌가 한다. 마지막 날에 받아야 하는 성령의 체험을 생명 또는 영원한 생명을 누린다는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 아닐까? 요한은 종래의 성령 체험에 대한 관념을 일부 시정을 하고 참으로 올바른 방법으로 영성의 체험을 하는 것이 옳은 일이라는 변화의 정신으로 표현을 바꾸어 사용한 것은 아닐까 하는 것이다.
사람은 물의 세례와 같은 종교 행사만으로는 영성 생활이 가능해지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영성적 체험이 동반해야 한다. 성령의 세례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령의 세례는 물리적 현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생리적인 현상도 아니다. 요한은 초대 교회 안에 있어 왔던 성령 체험의 신체적으로 일어나는 여러 모양의 ‘카리스마’ 영성 체험을 장려하지 않고 그것과 대치할 수 있는 영성 생활을 천거한 것이다. 바람직한 영성 체험은 영적인 것으로서 물리적이거나 신체적인 기적 현상을 목표하는 것이 아니다. 영성 체험은 참 삶을 누리는 것이다. 요한의 표현을 따른다면 생명 또는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일이다. 그리고 그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방도는 어떤 방도보다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그를 통해서 나타내 보여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 말씀이 영성 생활의 근거가 된다. 말씀을 따라서 영성 생활을 하는 것이다. 또한 영성 생활에 요긴한 양식이라는 것이다. 그의 말씀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일을 실천하는 것이 생명의 양식이다. 이미 요한은 영성 이해에 있어서 초대 교회로부터 전승을 이어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점에 강조의 초점을 두고 있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3. 신령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
성령의 체험이나 영성 생활은 예배를 통해서 경험할 수 있다. 요한은 신령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를 추천한다. 예배라고 하면 일정한 장소에서 정규적으로 드리는 예배가 있고 그 밖에도 특별하게 드리는 성례전이 있다. 성례전으로는 세례와 성찬이 초대 교회 안에서는 대표적인 것이다. 세례가 영성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에 관해서는 이미 언급했으므로 여기에서는 세례의 문제는 제외하기로 한다. 다만 일반 예배와 그리고 성례전의 하나인 성찬 예식으로 한정해서 요한의 뜻하는 영성 생활과의 관계가 무엇인지를 알아보기로 한다.
초대 교회의 예배의 순서에는 성경 읽기와 기도와 찬미와 말씀의 증언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와 같은 예배의 순서들을 통해서 영성 체험을 기대하는 것도 바람직한 일이다. 신령과 진리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먼저 여기에서 지적된 것은 유대인들의 고정 관념을 시정한 것이다. 유대인들은 성전에서 예배드려야 한다고 한다. 신령으로 예배드린다는 것은 그와 같은 고정 관념을 시정하는 것이다. 요한은 2장에서 이미 그것을 시정하고 있다. 성전은 예수 자신이라는 것이다(2:13-22). “이 성전을 허물라. 그러면 내가 사흘만에 다시 세우겠다”(2:19)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그 성전은 자기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2:21). 신령으로 드리는 예배가 무엇을 뜻하는지를 이미 분명하게 밝힌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신다. 이 산 위에서도 아니오 예루살렘에서도 아닌데서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드릴 때가 올 것이다”(4:21). 그리스도를 통해서 드리는 예배이다. 예배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있어야 하며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영을 받음으로 드리는 예배이다. 그리스도가 영성 생활의 모든 기초가 된다. 예배를 새롭게 하는 영적 새로움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유대교나 이방 종교나 할 것 없이 그들의 고질적인 문제의 또다른 하나는 우상 숭배였다. 우상 숭배는 인간이 만든 예배의 대상이다. 인간이 만든 것을 숭배하는 것이다. 그것은 참다운 진리의 예배가 아니다. 영과 생명이 없는 허수아비의 예배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므로 영과 생명력이 있는 예배라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께 드리는 예배라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라는 것을 다시 일깨운다(4:24). 신령으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신령이 인간의 신령함을 말하는 것은 결코 아미라는 브라운의 지적은 매우 날카로운 지적이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떠나서 사람 스스로의 영적인 능력으로 과시하려는 영성은 영성이 아니다.
브라운이 역설하는 것은 여기에서 신령이라고 하는 영이 사람의 영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을 말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과 사람의 영, 곧 사람의 신비적 체험을 엄연하게 구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예배드리는 태도에 관한 문제이다. 자기도취의 황홀경은 진정한 의미의 신령한 예배가 아니다. 신령으로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에 부합되는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신령과 진리의 예배는 예배의 근거가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 있다는 것을 골자로 한 것이다.
성령은 유형한 형태가 아니다. 눈에 보이는 형상이 아니다. 그러나 성령의 활동은 분명하다. 하나님이 영이시라는 말은 바로 이런 뜻도 있는 것이다. 요한은 처음부터 바로 이 무형적 속성에 더 많은 중점을 두어 왔다. 무형적인 그 속성들은 그리스도의 육신을 통해서 계시되었다. 요한의 표현을 따르면 그리스도의 그 무형적인 요소들은 ‘사랑’과 ‘진리’와 ‘생명’과 같은 것이다. 때로는 세상의 ‘빛’이라는 표현을 썼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본질을 계시하신 것이다. 요한 일서의 표현은 요한의 본 뜻을 바로 드러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하나님은 빛이시라던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것이다(요일 1:5, 4:8,16). 진리로 예배드리며 성령을 체험한다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하나님의 무형적인 심성을 체험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랑과 진리와 생명과 같은 것으로 내용을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예배와 성례전은 생명력이 있어야 한다. 살아 있는 예배라야 한다. 신령으로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예배가 생동적이어야 하며 생명력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하나님이 영이시라는 것을 이사야서 31장 3절에 비추어서 새롭게 이해해 본다면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이사야에 의하면 애굽인들은 사람이요, 신이 아니다. 그들이 타는 말은 고기 덩어리요, 정신이 아니라고 한다(히브리 원본에만 있는 것임). 하나님은 영이시라는 유대교의 신관(神觀)은 육신적 요소와 대조한 것이다. 영이란 정신이 없는 고기 덩어리와의 대조를 말한 것이다. 때때로 예배와 성례전이 고기 덩어리만의 움직임인 것으로 흘러 나간다면 생명력이 없는 것이 되어 버린다.
사람이 타는 말에 비교해 본다. 말들을 영을 가진 존재로 보지 않은 것이다. 말들과 같이 몸만이 뛰는 예배는 진정한 의미의 생명력이 있는 예배라고는 할 수 없다. 신령으로 드리는 예배란 바로 이 생명력을 부어 주시는 하나님의 영이 임재하는 예배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영으로 드리는 생동감이 넘치는 예배는 반드시 기독교의 예배만을 의미한 것은 아니다. 그와 반대로 영이 결핍된 예배가 반드시 유대교의 예배를 두고 말한 것도 물론 아니다. 낡은 계약의 유대교든지 새 계약의 그리스도 교회이든지 영으로 예배하지 않을 때에는 다함께 죽은 예배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배는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오는 생명의 말씀을 받을 수 있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음은 성례전에 관한 문제이다. 성례전 가운데는 주님의 만찬이 있다. 주님의 만찬은 ‘유카리스트’라고도 부른다. 이와 같은 만찬의 의식도 진리와 영으로 행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 문제에 관해서 먼저 야기되는 문제는 과연 요한복음이 성례전을 가리켜 말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느냐 하는 문제다. 학자들의 의견은 일치하지 않는다. 성만찬을 가리키고 있다는 암시를 주는 본문은 6장이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5천명을 먹이신 기적의 이야기(6:1-15)와 생명의 떡이신 예수에 관한 말씀이다(6:30-56).
브라운은 적극적으로 이 기록의 배후에 성찬의 의미에 관한 의도가 숨어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적지 않은 수의 학자들이 상반된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요한에 기록된 말의 표현이 초대 교회의 성찬 예문과 잘 일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요한복음 6장 51절 하반의 “내가 줄 떡은 나의 살이다”, “그것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다”라는 말은 고린도전서 11장 24절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와 누가복음 22장 19절의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다”라는 말과 내용상으로 일치한다.
성찬을 전제하였든지 아니하였든지 보다도 더 명확한 사실은 요한이 성례전에 관련되는 축자적이고 물질적인 의미들을 배격하는 의도가 있다는 점이다. 성찬을 축자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성찬의 떡이 실제로 예수의 살이라고 믿는다. 요한의 예수는 “내가 줄 떡은 나의 살이다”(6:51)라고 말씀하시지만 그 말의 오해가 없도록 설명을 덧붙이신다. “육은(살은)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요 생명이다”라고 다시 말씀하신다(6:63). 그것은 축자적인 해석을 반대하신 것이다. 때로는 성찬을 대할 때 마술적인 효능을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던 모양이다.
이그나시우스는 성찬의 떡을 죽지 않는 떡이라고도 불렀었다. 그와 흡사한 물질적 해석을 요한이 배격한 것이다. 요한은 성례전에 있어서도 성령과 진리로 행하여야 한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암시한 것이라고 본다. 신령과 진리로 성례전에 참례하는 일이란 바로 예수를 믿는 신앙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양식으로 삼아 생명을 얻는 일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생활과 그리스도의 말씀을 양식 삼아 살아가는 삶이 곧 신령과 진리로 성례전에 동참하는 것이다. 그것이 영성 체험이다.
4. 생명의 떡과 하나님의 일
신령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와 성찬은 자연히 생명의 떡과 생명의 물의 이야기로 옮겨져 갔고 생명의 물과 생명의 양식은 바로 그리스도 자신이라는 화제로 이동해 간다. 성령의 생활을 뜻하는 생명이란 그리스도를 믿는 일과 그의 말씀을 영혼의 양식으로 삼는다는 것인데 생명의 양식으로 이루어지는 영성 생활이란 하나님의 일을 실천하는 윤리적 생활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 요한의 특징이 된다. 요한은 유달리 하나님의 일(에르곤)의 ‘일’이라는 말을 빈번하게 사용하고 있다. 몇 차례의 예외를 제하고서는(3:19,20,21, 7:3,7,21, 8:39,41) 하나님의 하시는 일과 그가 뜻하시는 바를 가리킨다. 그리고 영성 생활을 의미하는 생명과 영원한 생명에 직접적으로 결부된 것으로 이야기한다.
요한의 하나님은 일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자신의 일을 나타내 보이신다. 사람에게 생명을 주시고(6:40) 빛을 주시며 자기의 뜻을 나타내신다(5:20, 9:3,4). 보내심을 받은 아들은 보내신 하나님의 일을 하신다(10:33-38). 그리스도는 기능 면에 있어서 하나님과 하나이시다.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5:17)고 하신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아들도 하기 때문이다(5:20,36). 그것은 여러 가지의 선한 일들이다(10:32).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은 사람에게 생명을 불어넣어 주시는 일이다. 살리는 일을 두고 하는 말이다. 복음서의 처음과 나중 부분에서 요한은 예수께서 성령을 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밝힌다(1:33, 20:22). 복음서의 중심 부분에 와서는 예수께서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하시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행하심으로써 사람들에게 모범을 보여 주신다. 그리고 또한 행할 것을 가르쳐 주신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믿는 신자가 실천하는 행동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얻게 되는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과정에는 그리스도를 따라서 하나님의 일을 행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생명의 떡을 얻는데 조건이 있다. 일꾼으로서의 일을 해야 한다. “추수하는 이는 삯을 받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열매를 거둔다”고 말씀하신다(4:36). 첫째로 해야 할 일은 믿는 일이다.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됩니까?” 하고 사람들이 물었을 때 예수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일이다”(6:28) 라고 대답하신다. 믿는 사람들이 다음으로 해야 할 일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실천하는 일이다. 말씀을 들어야 하며(8:47)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 “너희가 내 말대로 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게 될 것이요 진리가 너희를 자유 하게 할 것이다”(8:31)라고 말씀하신다. 진리는 행해야 하는 일들이다(3:21). 진리는 그리스도의 말씀이다(17:17). 영성 생활은 말씀의 실천을 포함하는 것이다.
윤리의 실천은 그리스도를 본받는 일이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일은 본을 보이시기 위한 것이었다. 믿는 사람들은 그를 본받아 행하여야 한다. 행할 바 일은 서로 사랑하는 일이다. 그리스도는 새 계명을 주셨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다(13:34). 영성 생활의 절정은 14장 20절에 잘 나타나 있다. “그날에 너희는 내가 내 아버지 안에 있고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며 또 내가 너희 안에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라는 것이다. 영성 체험의 극치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때 예수께서 말씀하신다. “내 계명을 받아 행하는 사람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의 사랑을 받을 것이다”(14:20-21)라는 것이다.
영성의 체험은 사랑의 실천을 필수적 조건으로 삼고 있다. 영성 체험이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일이라면 영원한 생명에 관해서 요한이 기록하는 예수의 기도문 가운데에 있는 말씀을 참작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영원한 생명은 오직 한 분이신 참 하나님을 알고 또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그것이옵니다”,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맡기신 일을 완성하여 땅에서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였사옵니다??그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순종하였습니다”(17:3-7).
이 기도문 가운데 영원한 생명은 하나님의 일이 무엇인지를 알고 또 행해야 하는 것이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드러내 보여준다. 그러므로 신령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와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영성 생활은 말씀에 입각한 윤리의 실천 생활을 반드시 겸하여야 한다는 것이 요한의 영성 이해인 것이다.
III. ‘파라클레토스’, ‘성령’ 그리고 ‘진리의 영’
1. 말의 뜻
요한이 특이하게 선택한 또 하나의 중요한 용어는 ‘파라클레토스’(보혜사)이다. ‘파라클레토스’는 ‘로고스’와 마찬가지로 요한 만이 특별하게 사용하는 용어 중의 하나이다. 파라클레토스는 초대 교회 전승에는 낯선 표현이었다. 초대 교회는 성령의 체험이나 성령의 활동에 관한 이야기가 지배적이었다. 그런데 그와 같은 성령을 요한은 초대 교회가 흔히 사용하지도 않는 생소한 용어를 가지고 이야기하고 있다. 파라클레토스는 요한이 초대 교회가 전하는 성령을 토착화의 과정을 거쳐서 새롭게 해석한 것이 아니었는가 하는 것이다. 성령이라는 표현이 이색적이고 피부에 와 닿기가 더딘 풍토에서는 친절하게 더 알기 쉽고 더 육감적이며 토착적인 표현을 요한이 발견하여 그것으로 전승이 믿어 내려오던 성령을 풍토에 맞게 다시 해석한 것이 아닐까 하였다는 것이다.
‘파라클레토스’의 의미가 무엇인지 또한 요한이 파라클레토스를 통하여 무엇을 의도하고 있었는지에 대해서 참으로 많은 연구가 있어 왔다. 현대에 이르러서 요한의 시대에 알아들을 수 있었던 파라클레토스라는 말이 아직도 그 많은 연구에도 불구하고 분명하게 확인해 놓을 수 없는 실정이다. 이 말은 순수한 헬라 말이다. 유대교를 배경한 초대 기독교의 많은 용어들은 히브리어나 아람어에서 기원한 것들이었고 근원을 구약이나 유대 문헌에서 찾아볼 수가 있다. 그러나 파라클레토스의 경우에 있어서는 유대적인 근원을 언어학적으로 찾아내는 일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고 그것을 시도해 보아 왔던 학자들의 견해도 매우 복잡하게 다양하다. 종교사학파의 학자들은 파라클레토스의 사상적 또는 문학적 배경에 대한 많은 연구를 제시하여 파라클레토스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지만 완전히 통일된 이론에 도달하고 있는 상태가 아니다.
요한이 어느 정도 초대 교회의 전승에 충실하였으며 어느 정도 자신의 새로운 해석을 첨가하였는지를 알아보려는 것이다. 얼마나 전승이 물려준 성령관을 요한이 충실하게 보존하고 있는지 또 얼마나 그것을 수정하고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며 새롭게 전하려고 하고 있는지를 면밀하게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이 문제에 관해서 최근까지의 연구들이 상당한 도움이 된다. 그 연구들을 바탕으로 하여 이 문제를 취급해 보는 것이 좋겠지만 결정적인 해답은 요한복음 자체의 문맥 속에서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2. 파라클레토스와 성령
파라클레토스는 신약성서 가운데서 오직 요한의 문서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표현이다. 요한복음에 4번 나타난다(14:16,26, 15:26, 16:7). 또한 요한 일서에서는 1번 등장한다(2:1). 신약성서의 어느 곳에서도 같은 말이 발견되지 않는다. 이 말은 헬라 말이다. 구약의 히브리어의 번역일 가능성도 학자들은 연구해 보았다. 그러나 칠십인 역(LXX) 어느 곳에서도 파라클레토스는 발견되지 않는다. 랍비 문학에 사용된 히브리어 가운데는 헬라어의 파라클레토스의 음을 빌어온 듯한 낱말들이 있다. ‘프르클리트’란 자음으로 구성된 낱말은 파라클레토스의 헬라어 발음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이 발견된 랍비 문학은 미슈나로서(아보트 4:11) 요한복음이 기록되기보다 아주 후대의 문헌이며 요한복음의 배경 연구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는 문헌이다. 그러므로 파라클레토스라는 낱말을 요한이 사용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요한의 독자적인 선택에 의한 것이며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경향을 따른 것이 아니라고 본다.
파라클레토스가 무엇을 의미하고 있든지 간에 이것이 요한이 독자적으로 택하여 사용한 용어이며 요한의 특이한 의도를 나타내 주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요한의 의도를 나타낼 뿐만 아니라 요한은 자신의 복음서를 읽는 독자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표현이라는 확신 아래서 이 말을 마음놓고 사용한 것이 아닌가 본다. 요한에게만 특이한 표현이기는 하지만 이 특이한 표현을 가지고 요한은 기존의 초대 교회 전승이 전해 주고 있는 성령을 가리켜 말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요한은 파라클레토스가 성령을 가리켜 말한 것임을 직접 밝힌다. 요한은 말한다. “보혜사(파라클레토스)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파라클레토스 토 푸뉴마 토 하기온’)이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겠??”(14:26)다고 하며 파라클레토스는 성령을 가리키고 있음을 분명하게 드러내 보인다. 사실 한국 교회에서는 파라클레토스와 성령을 연결 지어 “보혜사 성신”이라는 하나의 고유명사로 부르는 것은 정당한 일이며 원문에 충실한 번역에 근거한 것이 되기도 하다.
파라클레토스란 표현을 사용한 곳은 14장에서부터 17장까지의 특별한 구간에서 뿐이다. 그러나 그 말을 사용하지 않고 있는 다른 부분에서 요한은 성령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나를 믿는 사람은??그의 배에서 생수가 강같이 흘러나올 것이다”라고 예수는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받게 될 성령을 가리켜 하신 말씀”이라는 것이다(7:39).
그 구절을 14-17장의 보혜사에 관한 설명에 비추어 볼 때 보혜사는 바로 요한이 말하고 있는 성령과 동일한 것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적으로 드러내 보인다. 7장에서 요한은 믿는 사람들이 받게 될 성령을 말하고 있으나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으시지 않았기 때문에 성령이 사람들에게 임하시지 않았다는 말을 덧붙이고 있다. 14장 아래의 보혜사의 경우도 그렇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떠나가지 않으면 보혜사가 너희에게 오시지 않을 것이며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낼 것이다”(16:7).
두 구절을 나란히 비교해 볼 때 7장의 성령과 16장의 보혜사는 근본적인 공통점이 나타난다. 곧 보혜사나 성령이나 예수께서 세상을 떠나시고 난 다음에 하나님으로부터 믿는 신자들에게 보내심을 받게 될 성령을 가리킨 것이다. 성령에 관해서 요한은 어김없이 초대 교회의 전승을 계승한 것이다. 예수께서 세상을 떠나신 다음 초대 교회는 곧 성령을 받게 된 것이다(행 1:5, 요 20:22, 1:32-33, 마 28:19, 눅 24:49).
전승을 따르면 부활하신 후의 예수는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게 될 것을 예고하시고 또 그들이 성령을 받게 되면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고 그리스도는 세상 끝날 까지 제자들과 함께 계시리라는 것이다. 그러한 점에 있어서 요한의 파라클레토스는 전승의 성령과 일치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요한 역시 보혜사가??오시면 그가 예수를 증거 하실 것이며 제자들도 그리스도의 증인들이 된다는 것을 말한다. 또한 공관 복음서의 전승에서와 같이 요한의 파라클레토스에 관한 기사 속에는 그리스도께서 세상 끝날 까지 언제나 제자들과 함께 계시리라는 것이 보장되어 있다. 파라클레토스 기사 속에는 파라클레토스를 제자들에게로 보내신다는 말씀과 동시에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로 다시 오시겠다는 말씀도 함께 들어 있다(14:28, 16:16, 15장 참조).
요한의 파라클레토스와 공관 복음서의 성령의 또하나의 공통점이 나타난다. 박해와 탄압 속에서 심문을 받게 될 제자들을 위한 성령의 도움의 역할에 관한 것이다. 전승의 예수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너희가 잡혀 끌려갈지라도 너희가 무슨 말을 할까 하고 미리 염려하지 말라. 그 때에 말할 것을 지시하여 주시는 대로 말하라.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성령이시다” 라는 것이다(막 13:11). 요한의 보혜사 성령도 그와 같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14:27). 보혜사 성령이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겠”다는 것이다(14:26).
요한이 성령에 관해서 전승을 따르고 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축자적으로 전승과 동일한 표현을 반복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파라클레토스라고 하는 자기 특유의 표현을 가지고 성령을 말하고 있다는데 는 무엇인가 요한의 심정에는 성령 강림에 대하여 새로운 이해와 특별한 의미를 첨가하기 위한 의도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요한은 파라클레토스를 성령이라고 말하지만 성령이라고 말하기보다는 “진리의 영”이라고 부르는 것을 선호한다(14:17, 15:26, 16:13). 파라클레토스를 성령으로 표현한 것이 한번뿐이라는 사실에 비해서 전리의 영으로 표현한 것은 무려 세 번이나 된다. 파라클레토스를 성령이라고 하기보다 차라리 진리의 영이라고 부르고 싶어하는 것이 요한의 심정이다. 그렇게 부르는 것이 오히려 보혜사 성령에 대한 더 적절한 표현이라고 본 것이 아닌가 한다.
‘하기온’이라는 말이 붙은 성령이라는 명칭을 요한이 빈번하게 언급하지는 않지만 하기온이 없이 그저 “영”이라는 말을 가지고 성령의 역할을 자주 이야기하고 있다. 영(프뉴마) 또는 관사를 붙인 영(토 푸뉴마)이라는 말을 도합 18번이나 요한이 사용하는 것을 보아서 요한이 성령을 가리킬 때 차라리 성령이라는 표현보다는 다만 영이라는 표현을 더 선호한 것 같이 보인다. ‘영’이라는 표현을 선호하였다는 것도 성령에 대한 요한의 숨은 의도에서 온 것이 아닌가 의심스럽다.
초대 교회에 있어서 성령에 대한 이해는 몇 단계를 거쳐온 것으로 보인다. 누가?사도행전 및 공관 복음서가 이해했던 성령의 역할은 그런 것이었다. 놀라우신 성령은 물적으로 가시화 되는 결과를 낳게 되는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성령의 역사는 이적과 기사를 낳게 한다. 그것이 유대에 근거를 두었던 최초의 교회의 성령 체험이었던 것이다. 바울은 그와 같은 것을 바울 이전의 초대 교회의 교회의 양상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바울도 그와 같은 성령의 놀라운 능력의 역사를 그대로 시인하고 인정한다. 방언의 능력과 기적의 역사를 시인하였다. 그렇지만 바울은 이런 현상에 대하여 우려를 표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와 같은 일보다도 더욱 중요한 성령의 은사들이 많이 있는 것으로 판단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예언의 능력을 성령의 기능으로 더욱 중요한 것으로 보았다. 또한 성령의 능력은 윤리적으로 선한 행실을 가져오게 하는 힘이라는 면을 바울은 더욱 더 중요하게 여겼던 것이다. 바울을 거쳐 온 모든 초대 교회의 전승을 따르면서도 요한은 자기 나름대로의 새로운 이해를 첨가한다. 새로운 이해란 곧 새로운 표현을 사용한 것이다. 새로운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새로운 성령 이해를 촉구한 것이다.
요한은 초대 교회가 높이 평가하고 있었던 황홀함의 체험과 카리스마적인 요소를 겨냥하지 않고 반면에 합리적인 말씀과 은혜와 진리 면에 근거한 영성 생활면을 더 높이 평가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의도를 나타낸다. 그와 같은 요한의 특이한 의도를 살리기 위해서 요한은 파라클레토스와 진리의 영이라는 새로운 표현을 도입한 것이다. 파라클레토스는 전승과의 많은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전승과 다른 요한의 특색을 드러내는 표현으로서 우리의 관심을 끌게 된다.
그러면 파라클레토스의 뜻은 무엇인가? 흔히 파라클레토스의 연구가들은 그 말의 사전 상의 의미를 밝히는 일로부터 연구를 시작하기도 한다. 사전 상의 의미로써 그 말의 어근을 추적해 보는 일이 중요하다. 파라클레토스는 동사 파라칼레인으로부터 온 것이다. 간구한다는 뜻이다. 파라클레토스는 그 동사의 수동형으로 된 명사이다. 도움이 필요하므로 간청하여 불러들인 사람이라는 뜻이다. 일찍이 그런 의미에서 카운슬러나 변호사를 뜻하는 것이라고 해석한 것이다. 그러나 파라클레토스는 능동적인 뜻을 가진 것으로도 볼 수 있다. 그런 경우에 그 말의 뜻은 남을 위해서 간청하는 사람이라는 뜻이 되며 중보자나 대변인으로 풀이된다. 또 다른 뜻도 있다. 파라클레토스는 파라클레시스와 관련된 낱말로 위로나 위안이라는 뜻을 가진 것으로도 본다. 그런 경우에는 위로해 주는 자라는 의미로도 풀이된다. 이처럼 언어학적으로 보기만 하더라도 파라클레토스는 다양한 뜻을 가진 낱말이다.
그러나 사전 상의 의미만을 가지고 그 뜻을 헤아려 본다는 것은 충분한 방법이 되지 못한다. 요한의 시대에 그 말이 하나의 고유명사로 사용되고 있었을 가능성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을 가리켜 사용되어 온 고유명사였는지를 알아보아야만 한다. 그것을 알아볼 만한 직접적인 문헌은 없다. 요한을 제외한 신약의 다른 곳에서나 또한 인접의 문헌 가운데서도 바로 그 말이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 파라클레토스가 직접 발견된 문헌이 없다 하더라도 간접으로나마 그 용어의 배경에 관한 연구를 통해서 파라클레토스의 의미를 보다 세밀하게 설명할 수가 있을 것이다. 또 다른 하나의 방법은 요한의 전체에 흐르는 문맥을 통해서 요한이 어떤 신학적인 의미를 적재시켜 이 말을 사용하고 있는가를 알아보는 방법이다. 이 두 가지의 연구를 통해서만 비로소 요한의 파라클레토스의 충분한 의미를 정의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의 연구, 곧 역사적인 배경 연구와 요한복음서의 전체의 맥락에 관한 모든 연구가 마무리되었을 때만 파라클레토스의 의미를 충분히 설명할 수 있게 될 것이다.
3. 파라클레토스에 관한 배경 연구
이십세기에 들어서면서 파라클레토스 사상의 기원에 대한 역사적 연구가 널리 시도되어 왔다. 주로 종교사학파의 학자들이 위주가 되어 배경의 연구를 한 것이다. 위에서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파라클레토스라는 헬라어가 직접 사용된 문헌은 없었다. 다만 간접적인 방법으로 유사한 다른 용어와의 비교를 통해서 배경 연구를 하여보는 것이다. 그같은 연구들을 크게 다음의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만다교의 야와르(Yawar) 사상
한동안 종교사학파의 거장들은 요한 복음서의 역사적 배경을 헬라적이고 노스틱적인 세계에 가까운 것으로 보아 왔었다. 요한의 사상이 노스틱주의 사상에서 영향을 받은 바가 크다고 보았던 것이다. 요한의 파라클레토스도 노스틱 종교였던 만다교의 표현에서 빌어온 것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만다교의 문헌에는 야와르란 존재가 있다. 그는 천사적인 존재로써 도움을 주는 역할을 한다. 20세기 초반에 바우어(W. Bauer)는 바로 요한복음서가 있기 전에 만다교가 있었고 만다교의 영향이 요한의 파라클레토스 사상에까지 미친 것이라고 본 것이다. 그보다 앞서 루돌프 불트만(R. Bultmann)은 만다교 등의 노스틱 문서와 요한복음의 유사한 증거를 더 많이 제시하면서 요한의 파라클레토스 사상이 만다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서 만다교의 도우시는 천사, 야와르에게서 요한의 파라클레토스와 같은 존재로 볼 수 있다고 하였다. 만다교의 야와르도 요한의 파라클레토스와 같이 의인들의 있을 곳을 마련하며 계시자의 역할을 하며 박해를 직면한 신자들을 돕는다.
요한의 파라클레토스가 만다교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는 견해는 불가능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첫째의 이유로 위에 언급한 학자들이 비교의 도구로 사용한 만다교의 문헌들은 요한과 동 시대의 문헌도 아닐 뿐만 아니라 요한 보다 몇 세기 후대의 문헌이라는 점이다. 후대의 만다교로부터 이전의 요한 복음서가 영향을 받을 수는 없는 일이다. 다드(C.H. Dodd)는 만다교의 문헌들이 신약 시대의 기독교보다 아주 후대의 문헌이라는 것을 매우 설득력 있게 결론짓는다. 그 뿐만이 아니다. 보른캄과 레이몬드 브라운을 위시한 많은 학자들은 여러 가지 면에 있어서 만다교의 야와르는 요한의 파라클레토스와 다르다는 점들을 지적하고 있다. 드로우어(E.S. Drower)의 비교 연구에 의하면 만다교의 야와르가 도우시는 신화적 존재를 뜻하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이 있을 뿐만 아니라 브라운에 따르면 요한에 나타난 파라클레토스라는 헬라어가 도우시는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는 것이다. 보른캄은 만다교의 영향을 받았으리라는 가능성에 반대되는 점들을 지적하였다.
노스틱 사상이 아니더라도 헬라의 영향을 받은 유대 사상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닌가 하는 의아심을 가져 볼 수도 있다. 예를 들어서 필로의 글이나 헬마스 문학 가운데서 파라클레토스와 비교해 볼만한 것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필로의 경우 로고스는 세상을 하나님 앞에서 변호해 줄 대제사장의 역할을 하며 요한의 경우에도 하나님의 아들은 사람들의 기도를 하나님께 상달케 하는 다리의 역할을 함으로써 본질적인 공통점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보혜사를 그리스도에게 적용하여 그리스도가 하나님 앞에서의 중보자 역할을 가진 것으로 표현하는 요한복음은 필로의 보혜사 사상을 그리스도에게 적용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다드는 말한다. 그러나 다드는 한번도 파라클레토스가 직접으로 필로의 문헌에 나타났다던가 또는 필로의 중보자 사상이 요한의 그것과 비교될 만한 증거를 제시해 주지 못한 채로 그와 같은 추측을 한 것이다.
위에서 알아본 결과로서는 요한의 파라클레토스는 헬라 세계나 헬라화된 노스틱 종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증명할 만한 확실한 증거를 제시할 수는 없다는 결론에 이른 것이다. 요한은 성령을 파라클레토스라는 용어로 표현하였을 때 굳이 성령의 활동을 헬라인들에게 이해시키기 위해서 그런 용어를 택한 것이라고 볼 필요는 없을 것이다.
구약의 고별문
헬라 종교와의 관련이 거의 없는 것이라고 판단됨에 따라서 다른 가능성의 모색이 매우 활발하게 진행되어 왔다. 요한의 파라클레토스의 배경을 구약과 유대교의 문헌에서 찾아보는 것이다. 요한복음서의 파라클레토스라는 표현은 예수의 고별 담화문인 14장으로부터 17장 사이에만 나타난다. 문헌의 양식을 분석하는 연구는 요한에 나타난 고별 담화문이 일정한 문학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또 그 일정한 형식이 구약에 나타난 선생이 세상을 떠날 때의 후계자를 약속하는 고별문의 문학 형식과 매우 유사하다는 것을 지적한다.
뮬러(Muller)는 유대교의 문헌 가운데서 요한의 고별 담화와 비교가 될 만한 고별 담화 문학 형식을 지적하였다. 유대 문학에는 세상을 떠나가는 스승과 지도자들이 그들의 죽음에 실망하는 제자들과 추종자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떠나는 스승이 남기는 담화를 수록한 기록들이 많이 있다는 것이다.
요한의 보혜사 성령에 관한 기사는 고별 담화문 가운데서 발견된다. 요한복음서의 고별 담화는 13장으로부터 시작하여 17장에 이르는데 이 담화문은 고별 담화의 양식으로 되어 있다. 이 양식을 살펴보면 거기에는 몇 가지의 주요한 내용이 담겨져 있다. 첫째는 스승이신 예수께서 이 세상을 떠나시게 되리라는 것을 예고하며 제자들을 위로하는 말씀이 있고, 그 다음에는 후계자가 되는 위로자 보혜사를 선생의 대신으로 보내 주실 것이라는 약속이 따르며, 끝으로 그 후계자가 될 보혜사는 영이시라는 것과 영의 역할이 무엇이라는 것을 이야기한다. 전체를 놓고 볼 때 그 후계자는 세상에 남아 있게 될 제자들을 위로해 주는 위로의 역할을 담당한다. 그리고 보혜사라고 하는 낱말은 위로해 주시는 이라는 뜻이 있다.
구약을 중심한 유대의 문헌에도 이것과 비교해 볼 수 있는 고별 담화의 문헌들이 있다. 민족의 지도자가 되는 모세가 세상을 떠나게 되었을 때의 일을 기록한 고별의 기록이 있다. 모세는 죽기 전에 자기의 죽음을 슬퍼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마지막 말을 남겼다(신 32:44 이하). 그 기록에서 모세의 죽음이 예고된다. 모세는 세상에 남아 있게 될 그의 백성들에게 축복의 노래를 남긴다(신 33:1 이하). 이스라엘 열 두 지파의 하나 하나를 위한 축복과 기원이었다. 축복 가운데서 분명한 것은 주께서 이스라엘을 사랑하시고 보호하시며 위로해 주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을 도우시려고 하늘에서 구름을 타시고 위엄 있게 오신다는 것이다(신 33:3,26). 백성들에 대한 간곡한 부탁은 모세가 전하여 준 율법을 지키라는 것이다. 율법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 곧 그들의 생명이라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떠나는 모세와 같은 후계자를 하나님은 보내 주시리라는 것이다. 모세는 자기의 후계자로 여호수아를 안수하니 여호수아는 지혜의 영을 받게 된다. 이것은 모세라는 지도자가 세상을 떠날 때의 고별 담화의 내용이다.
열왕기 하서에는 엘리아의 고별에 대한 기사가 있다. 고별 담화가 요한의 그것과는 꼭 같은 문학의 형식은 아니지만 세상을 떠나는 엘리야는 세상에 남아 있게 될 제자, 엘리사에게 떠나게 될 것을 확실하게 밝혀 주고 난 다음 제자 엘리사에게 “내가 무엇을 네게 해 주었으면 좋겠느냐?”고 묻는다. 그때에 엘리사는 “스승님의 능력을 두배나 내게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고 대답한다. 이 기록은 담화로만 이어지지 않고 있다. 엘리사는 스승이 하였던 것과 같은 기적을 행하는데 처음에는 실패하였으나 그가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고 난 다음에는 능력을 받을 수가 있게 되었다(왕하 2:1-15). 스승이 세상을 떠날 때 스승이 가졌던 영적인 능력을 그의 제자에게 물려주었던 것이다.
위와 같이 구약 성경 안에서도 스승의 이별을 주제로 하는 담화와 이야기를 찾아볼 수 있다. 그 담화 속에는 한결같이 후계자를 세워 주게 될 것이 약속된다. 후계자는 스승이 가지고 있던 것과 같은 영을 받게 된다. 담화나 이야기의 양식이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요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고별 담화는 구약 성경의 고별 담화와 구조적으로나 성격적으로 서로 상통하는 것이 있다. 구약의 경우에서와 같이 요한의 담화문 속에서도 떠나는 스승을 계승하는 보혜사를 보내 주실 것과 또한 성령을 제자들에게 보내 주시리라는 약속을 남겨 놓으신다. 비교를 통해 볼 때 구약적인 배경은 요한의 고별문을 이해하는데 크게 도움이 된다.
4. 요한의 문맥 상으로 본 파라클레토스
파라클레토스는 성령이다. 성령 강림에 대한 요한의 표현이다. 파라클레토스는 예수가 세상을 떠나신 다음 제자들에게 하나님께서 보내 주실 성령이다(14:16,26, 16:7). 예수를 계승해서 보내심을 받게 될 보혜사 성령에 대한 요한의 기록은 주로 기능 면이 강조되어 있다. 인격적 존재로서라기보다 그가 하시는 역할에 관한 것이 비중이 크다. 첫 번째의 기능은 예수의 말씀을 다시 회상하게 하는 일이다. 파라클레토스로서의 성령의 일차적인 역할은 예수의 떠나심으로 말미암아 실망에 차 있는 제자들의 마음 속에 스승이 살아 계셨을 때에 가르치셨던 모든 교훈들을 다시 기억하게 하시는 역할이다(14:26). 예수로부터 받은 것을 제자들에게 알려 주신다(16:15). 파라클레토스 성령은 진리의 영으로서(14:17, 16:13) 제자들을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고 한다(16:13). 그것은 제자들에게 진리를 알게 하신다는 말이다. 진리는 그리스도라고 말씀하신 일이 있다.
그리스도가 진리라고 말한 것은 주로 그의 가르치심을 포함해서 말한 것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말한다면 하나님의 진리이다(요 17:17). 파라클레토스는 “자기 마음대로 말씀하시지 않고 들은 것만 일러주실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것 가운데는 미래에 관한 예언적인 말씀도 포함되어 있었다. 보혜사는 또한 앞으로 올 일을 제자들에게 알려 주신다.
파라클레토스의 또다른 중요한 역할은 예수의 부재 시에 예수를 대신하여 제자들 가운데 임재하시는 존재로서의 기능이다. 세상을 떠나신 예수는 사후에도 파라클레토스의 존재로 제자들과 영원히 함께 하신다. 물론 파라클레토스는 인격적 존재로서의 예수와 동일한 존재라는 말은 아니다. ‘다른 보혜사’(요 14:15)라고 한다. 그는 영적인 면에서 생전의 예수와 동일한 분으로 제자들 가운데 영원히 계실 것이다(요 14:15). 직선적인 표현으로 말한 곳은 없다. 그러나 여러 가지 면을 살펴 볼 때 파라클레토스는 살아생전의 예수와 같으신 존재라는 것을 암시해 준다. 병행되는 점들을 브라운은 열거해 보았다. 그 중의 몇 가지만을 예로 들어본다. 파라클레토스는 아버지로부터 보냄을 받아서 오신 분이다. 예수도 아버지로부터 보내심을 받아 세상에 오신 분이다. 예수의 요청을 받아서 아버지는 성령을 주신다. 마찬가지로 아버지는 아들을 주셨다. 아버지는 파라클레토스를 보내신다. 그와 같이 아들도 파라클레토스를 보내신다. 파라클레토스는 예수의 이름으로 보냄을 받았다. 예수도 아버지의 이름으로 보냄을 받으신 분이다.
비교를 통해서 브라운은 이렇게 결론짓는다. 실제로 모든 면에 있어서 파라클레토스에 관한 이야기는 예수에 관한 이야기와 일치하고 있다는 것이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다른 보혜사는 또 한 분의 예수라는 것이다(??“another Paraclete is another Jesus”). 보혜사의 역할은 부재 중의 그리스도가 신비로운 영성적 체험을 통하여 믿는 사람들 가운데 항상 같이하신다는 것이다. 예수의 기도 가운데서 예수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 날에 너희는 내가 내 아버지 안에 있고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며 또 내가 너희 안에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요 14:20).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모두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신다는 말씀이다(요 17:20). 영성 체험은 그리스도 체험이다. 성령의 체험은 그리스도의 동참이다. 요한의 성령은 영적으로 그리스도의 임재를 체험하는 것이다.
다음의 기능은 위로자의 역할이다. 박해를 직면하여 공포에 떨고 있는 신도들을 도우며 그들에게 위안과 용기를 주신다. 그것이 파라클레토스의 중요한 역할 중의 하나이다. 고별 담화는 위로로 시작된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요 14:1).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세상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했다는 것”을 기억하라고 예수는 말씀하신다(요 15:18 이하).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은 신자들이 걸려 넘어지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다(요 16:1). 보혜사 곧 진리의 영이 오시면 신자들에게 기쁨을 안겨 줄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신다. “너희는 울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슬픔에 싸여도 그 슬픔이 기쁨으로 변할 것이다”(16:20). “내가 다시 너희를 보게 될 때에는 너희의 마음이 기쁠 것이며 그 기쁨을 빼앗을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하신다”(요 16:22).
끝으로 보혜사 성령은 선교의 사명을 도우신다. 초대 교회의 전승은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선교의 사명을 당부하신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는 부탁이다. 요한은 부활하신 예수께서 친히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시며 받으라고 하신다(요 20:22). 보혜사가 오시면 자기를 증거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또한 믿는 신자들도 그의 증인이라는 말씀을 하신다(요 15:26-27). 증인이 된다는 것은 선교를 의미한다. 파라클레토스가 오심으로 믿는 자에게 주시는 사명은 선교의 사명과 전도의 능력이다.
IV. 맺는 말
클레멘트가 요한복음서의 특징이 영적인 것이라고 말하였는데 그가 말하는 영적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초대 교회의 영성 이해와는 다르다는 것이다. 클레멘트는 요한복음이 진정한 의미의 영성적인 복음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요한의 영성 이해는 초대 교회의 성령 체험과 동일하지 않다. 공관 복음서보다도 늦은 시기에 기록된 요한에게는 같은 전승의 계승자이면서도 영성 운동에 대한 갱신의 흔적을 보인다. 요한은 영성 생활이 확고하고 건전한 근거 위에 서야 하는 것이라고 본다. 크리스천의 영성 생활의 표준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제시해 준다. 그 표준은 성령의 근원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 근원은 하나님과 또 그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그리스도시라는 것이다.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근거로 하는 영성 체험이 크리스천으로써 참된 영성 체험을 하는 것이다.
초대 교회의 카리스마 체험은 가시적이다. 뜨거운 불로 표현되기도 하고 초자연적인 기적에 더 치우친다. 그리고 방언과 엑스타시적인 것을 선호한다. 그러나 요한은 그렇지가 않다. 처음부터 합리적이다. 성령의 성격을 로고스나 은혜나 진리와 같은 말로 표현하면서 합리적이고 건전한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의 진리에 근거한 성령의 체험을 강조한다. 성령 체험을 요한은 생명이나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일로 표현한다. 그 때마다 체험은 말씀을 영혼의 양식으로 받아들이는 믿음에 의한 것이라는 것을 밝히고 있다. 성령 체험은 인간의 일시적인 도취에 빠져드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신령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의 생활이다. 영성 생활에 필요한 양식은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나신 말씀이다. 동시에 요한의 영성 생활의 중요한 부분은 윤리적인 실천이다. 생명에 이르는 생활의 방법 가운데는 진리를 행하는 일이 포함된다. 건전한 영성 생활은 실천 생활이 동반해야 하는 것이다.
결국 요한의 영성론은 말씀에 근거하는 믿음의 생활이다. 믿음의 생활은 실천을 동반해야 한다. 요한의 성령론은 영성론이다. 생활 체험을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요한에게 있어서 성령은 영성 생활로서 의미가 있는 것이다. 삶을 뜻하는 것이다. 생명력을 가진 살아 있는 삶이 영성 체험이다. 그것이 생명이라는 것이다. 이것으로 보아서 요한의 영성 이해는 초기의 초대 교회에 비해서 매우 진보되고 갱신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요한의 영성 이해는 오늘의 교회의 건전한 영성 생활의 좋은 모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영성 체험은 성령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삼아야 하고 그의 보내심을 받아서 그의 말씀과 진리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그리스도를 바탕으로 하는 영성 생활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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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 요한복음의 보혜사 성령 이해
제2부의 목적은 제1부 III장에서 거론한 요한복음서의 “파라클레토스”(보혜사)의 의미를 보다 더 명확하게 파악해 보려는 것이다. “파라클레토스”(παρακλητο?)는 신약 성경의 다른 아무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고 다만 요한 복음서와 요한 일서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말로 요한의 독특한 표현이다. 요한 복음서에 있어서 파라클레토스는 성령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초대 교회가 공통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성령”이라는 표현을 유달리 요한만은 그것을 파라클레토스라고 부른 것이다. 요한은 어떠한 의도에서 성령을 파라클레토스라고 말하였는가? 요한의 의도를 묻고자 하는 것이다. 초대 교회의 성령관에 대한 요한의 이해가 어떠한 것인지를 알아보고자 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성령을 파라클레토스라고 표현한 요한의 의도에 관해서 학자들은 요한의 사상적 배경 연구에 많은 관심을 기울여 왔다. 파라클레토스가 초대 교회에 있어서 매우 낯선 낱말이었고 요한 만이 특이하게 이 말을 사용하고 있는 까닭에 이 말을 사용하게 된 요한의 사상적 배경을 추구해 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요한과 요한이 속해 있던 공동체가 어떠한 문화적인 환경 가운데서 이 말을 이해하고 있었는가 하는 것이 요한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배경 연구의 결과는 적지 않는 혼동을 초래하였다. 더러의 학자들은 파라클레토스의 개념이 어떤 영지주의 종교 사상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며 또다른 학자들은 그와는 반대로 유대교 사상에 그 유래가 있었던 것으로 보는데 의견을 모으기는 하지마는 서로의 판단이 일치하지 않거나 대립되기도 했다. 더러의 학자들은 사해 사본과 같은 유대의 문헌들을 배경으로 삼고 다방면의 연구를 시도해 보았다. 이런 상황 하에서 의견들은 적지 않은 혼선을 가져오기에 이르렀다.
참으로 오늘날의 해석들은 구구하여 파라클레토스의 표현의 유래와 배경을 다양하게 설명하기도 한다. 파라클레토스는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를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교회사를 통해 볼 때 이같은 위험이 분명하다. 때때로 요한에 나타난 보혜사 성령을 신약 성경의 다른 곳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카리스마적인 성령과 동일한 것으로 보아 성령에 관한 가장 중요한 본문으로 요한을 인용하기도 하는 때가 있었다. 요한 복음서 자체의 맥락에 대한 집중적인 연구가 때로는 가볍게 취급되어 배경 연구나 교리적인 관점에 지배를 받아 요한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그릇된 해석을 하는 일이 없지 않았다. 뒤늦게 발전되어 내려온 삼위일체의 교리의 영향을 받아서 성령을 인격화된 존재로만 해석하는 경향에 이끌리기도 하였다.
배경 연구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요한의 맥락이다. 요한의 맥락을 통해서 요한이 파라클레토스라는 표현으로 성령을 말할 때 무엇을 의미하였는가 하는 문제가 더욱 중요한 것이다. 그는 과연 신약의 다른 모든 기자들이 말하고 있는 성령을 그대로 전하였는가? 아니면 요한은 파라클레토스라고 하는 말을 가지고 성령에 대한 초대 교회의 이해에 대하여 새로운 변화를 주고자 하였던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그런 까닭에 이 글은 궁극적인 해결을 요한 복음서 자체의 맥락에 보다 큰 관심을 기울여 보기로 한다. 요한의 파라클레토스는 요한 복음서의 고별 담화문의 긴 문맥 속에 나타난다. 충분하지는 않지만 그 담화문의 맥락을 통해서 파라클레토스의 성격과 역할을 알아보기로 한다. 그 맥락 속에서 요한은 분명히 파라클레토스를 성령과 동일시하고 있으며 동시에 그것이 진리의 영이라는 것을 힘주어 말하고 있는데 바로 이 점에 파라클레토스의 의미를 알아내는 열쇠가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요한이 뜻하고 있는 파라클레토스는 성령의 어떤 역할을 가리키는 것이며 또 그 같은 성령을 진리의 영이라고 밝혀 말하는 요한의 뜻하는 바를 알아내 봄으로써 요한의 파라클레토스가 무엇인지를 밝혀 보려는 것이다.
I. 어휘 및 사상적 배경
1. 성령을 뜻하는 용어로서의 파라클레토스(전승과의 관련)
파라클레토스는 성령을 가리킨 것이다. 요한 자신이 이것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고별 담화문 가운데서 요한은 예수로 하여금 다음과 같이 보혜사(파라클레토스)에 관해서 말씀하시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이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겠다는 것이다(요 14:26). 고별 담화문 가운데서 파라클레토스가 성령이라는 것을 또 다시 이야기는 하지 않지만 몇 차례에 걸쳐서 파라클레토스가 곧 아버지께서 보내실 진리의 영이시라는 것을 요한의 예수는 거듭 강조하신다. 그때마다 “진리의 영”은 마치도 성령에 대한 요한의 설명처럼 나타난다. 성령의 경우에서와 같이 진리의 영은 아버지께로부터 보냄을 받아 오신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 뿐만이 아니라 진리의 영이 하고 있는 역할에 관해서도 또한 초대 교회가 성령에게 기대하고 있는 것과 같은 역할을 하시게 될 것이라고 한다.
요한에 따르면 진리의 영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증언해 주실 것이며(요 15:26) 죄와 심판에 관해서 제자들의 마음을 깨우쳐 주시고(요 16:8) 또한 진리 가운데로 그들을 인도해 주실 것이라고 한다(요 16:13). 진리의 영의 이와 같은 역할들은 공관 복음서나 사도 행전 그리고 바울 서신과 같은 같은 곳에서 찾아볼 수 있는 초대 교회 전승이 전하는 성령의 역할과 일치한다.
초대 교회 전승에 따르면 성령은 그리스도를 증언해 주실 증언의 역할을 한다(마 10:20, 막 13:11, 눅 12:10-12). 그리스도인들이 법정에 서서 그리스도를 증언해야 할 그때에 성령이 가르쳐 주실 것이다. 또한 성령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증언해 주신다(롬 8:16). 성령은 진리의 말씀을 우리에게 알게 해 주신다(고전 2:10). “성령은 모든 것을 아시므로 하나님의 깊은 경륜까지도 아신다”는 것이다(고전 2:11). 성령은 지혜의 말씀을 알게 하고(고전 12:8), 신비한 것을 말할 수 있게 하며(고전 14:2), 신자들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이 되어 주신다(엡 1:17). 그러므로 요한이 말하고 있는 진리의 영은 초대 교회가 말하는 성령과 다른 존재가 아니다. 파라클레토스가 진리의 영과 동일한 것으로 말하는 요한의 말은 곧 파라클레토스가 성령과 동일한 것이라는 말과 다름이 없다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내용에 있어서도 요한의 파라클레토스는 초대 교회가 믿고 있는 성령과 부합되는 점이 많다. 사도 행전에 의하면 예수께서 이 세상을 떠나시고 부활하신 다음 제자들에게 성령을 약속하신다(행 1:5). 그리고 난 다음에 곧 오순절을 맞게 되며 제자들은 모두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게 된다(행 2:4). 요한의 경우에도 그와 같은 면이 나타난다. 예수께서 이 세상을 떠나가시게 되면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내려 주시는 파라클레토스를 받게 되리라는 것을 예수께서 약속해 주시는 것으로 되어 있다. 강림하게 될 시기에 관해서도 초대 교회 전승과 요한은 일치한다. 성령의 강림이 예수께서 세상을 떠나신 다음으로부터 멀지 않은 때에 일어날 것으로 초대 교회는 말하고 있으며 요한도 역시 그렇다. 요한은 파라클레토스를 받게 되는 그 시기가 예수께서 세상을 떠나시게 될 때부터 그리 멀지 않은 장래에(?τι μικρ?ν) 있게 될 것이라고 본다(14:19)
바울은 성령 안에서 신자들의 공동체가 코이노니아를 누릴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고후 13:13). 요한의 경우의 파라클레토스도 다름이 없다. 파라클레토스?성령이 제자들 사이에 머무르게 될 “그 날”에 대하여 요한의 예수는 말씀하신다. “너희는 내가 내 아버지 안에 있고 너희가 내 안에 있게 될 것이라”고 하신다(요 14:20). 그것은 코이노니아를 의미한 것이다. 그리고 신자들은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지켜야 할 것을 당부하신다(요 14:15). 곧 코이노니아를 강조한 것이다. 마치도 바울이 전하는 성령은 서로의 사랑을 가장 중요한 내용으로 삼고 있는 것과 같이 요한에게 있어서도 파라클레토스를 받게 될 제자들에게는 공동체 안에서의 서로의 사랑을 가장 중요한 계명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이와 같이 요한의 파라클레토스는 초대 교회가 말하는 성령과 성질 상으로 공통된 요소를 드러내 보인다.
비단 요한 뿐만이 아니라 보다 이른 시절의 초대 교회에 있어서도 파라클레토스가 전혀 낯선 표현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파라클레토스라고 하는 바로 그 표현이 요한을 제외한 초대 교회 전승 가운데 나타나지는 않지만 파라클레토스와 어원을 같이하는 ‘파라클레시스’나 또는 ‘파라칼레인’과 같은 표현은 초대 교회 전승 속에서도 자주 찾아볼 수 있다. 그 말들의 뜻은 평안이라든가 위로나 권면과 같은 듯을 지니고 있다. 평안이나 위로 그리고 격려를 뜻하는 권면의 뜻을 가진 파라클레시스는 초대 교회에 있어서도 성령의 기능의 일면으로도 알려져 있었다는 것이 분명하다. 특히 사도 행전에 의하면 평안이라는 뜻을 가진 파라클레시스는 성령의 도우심의 결과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본다(행 9:31). 이와 같이 초대 교회 전승에 있어서도 성령의 역할 중의 하나가 파라클레토스와 어원을 같이하는 같은 파라클레시스로 불리고 있었다는 것이 확실하다.
더욱 더 놀라운 사실은 요한의 파라클레토스의 기능적인 역할이 초대 교회의 파라클레시스와 일치한다는 점이다. 초대 교회가 말하는 파라클레시스는 평안이라고 한다. 요한의 예수가 파라클레토스를 약속하시고 난 다음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평안을 너희에게 남겨 두고 간다. 나는 내 평안을 너희에게 준다. 이것은 세상이 주는 평안과 같은 것이 아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 요한 복음서의 예수는 파라클레토스를 약속하시고 난 다음 또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울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슬픔에 싸여도 그 슬픔이 기쁨으로 변할 것이다”(요 16:20). 요한의 파라클레토스는 제자들에게 평안을 주며 기쁨을 준다. 그것은 곧 초대 교회 전승이 말하는 성령을 통한 파라클레시스와 일치하는 것이다. 곧 초대 교회는 성령을 파라클레토스라고도 부를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증거를 우리는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초대 교회의 일반적인 경향은 성령을 성령이라는 명칭으로 부르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었고 파라클레토스나 파라클레시스라는 이름으로 성령을 개명하지는 않았다. 다만 요한 만이 성령을 파라클레토스라는 이름으로 불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오로지 요한 복음서만이 성령을 파라클레토스라는 명칭으로 부르려고 하였는가 하는 것이다. 비록 파라클레토스가 성령을 가리키는 용어로 초대 교회가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초대 교회는 성령이라는 명칭만으로 거리낌없이 성령을 불러내려 왔던 반면에 요한 만이 그와 같은 일반적인 관습을 거슬려서 성령을 파라클레토스라는 새로운 명칭으로 부른 것이다. 요한이 그 새로운 명칭을 선호하고 있다는 데 요한의 특별한 의도가 있지나 않을까 하는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 요한의 성령 이해에 있어서 특이한 점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성령을 파라클레토스로 설명하고자 하는 요한의 특별한 의도가 초대 교회의 성령 이해에 관한 요한의 새로운 해석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이것과 관련하여 또 하나의 중요한 문제는 파라클레토스가 인격적 존재를 뜻한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성령을 파라클레토스로 부르는 요한 복음서의 본문을 가지고 성령이 인격적 존재라고 보아 오는 교리적 관심의 근거로 삼는 위험이 항상 뒤따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과연 요한의 의도가 성령을 인격화하려는 것이었는지 아니면 그와는 반대로 인격화하고 있는 초대 교회의 생각을 교정해 보려는 것이었는지에 대하여 집중적인 연구가 필요한 것이다.
2. 어휘
요한이 남다른 의도가 있어서 파라클레토스란 말을 선택한 것이라면 대체 파라클레토스는 무엇을 뜻하는 말인지를 알아야 할 것이다. 언어 상으로 본 그 말의 뜻을 알아보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만 요한의 의도를 더 잘 파악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파라클레토스의 어휘를 앎으로써 요한이 성령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파라클레토스는 순수한 헬라어이다. 헬라의 세속 사회에서 사용되었던 용어이다. 성경에서는 흔히 찾아볼 수 없는 말이다. 요한 복음서의 특정한 부분을 제외하고서는 이 말은 신약 성경의 아무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낱말이다. 히브리어의 근원을 갖고 있지도 않는다. 히브리어를 번역한 헬라어의 칠십인 역(LXX)에도 나타나지 않는 낱말이다. 유대 사람들의 랍비 문학 가운데에서 파라클레토스와 발음이 비슷한 히브리어가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헬라어에서 빌어 온 말일 따름이다. 그런 까닭에 이 낱말의 어휘는 순수하게 헬라 사회에서 쓰여지고 있는 그대로의 의미를 먼저 알아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명사로서의 파라클레토스는 동사인 파라클레인으로부터 온 것이다. 파라칼레인은 간청한다는 동사이다. 그 동사의 수동형으로부터 명사 파라클레토스가 형성된 것이다. 따라서 이 명사는 일차적으로 수동적인 의미가 있다. 청함을 받은 사람이라는 뜻을 가졌다. 도움의 필요가 있어서 청탁을 받은 사람이다. 요한네스 베헴(Johannes Behm)은 기원전 4세기로부터 기원후 2세기에 이르는 광범위한 헬라 문학에서 파라클레토스가 사용된 실례들을 들었다. 기원전 4세기의 세속적인 헬라 문학에 나타난 이 말은 도움이 필요해서 불러들여 온 사람을 가리켰다. 법정에 나타나 피고인을 변호해 주거나 역성을 들어주는 사람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변호사나 대변인이나 보호자를 뜻하는 말이다. 유대인들의 랍비 문학에 나타난 “??????”의 뜻도 그와 같다. 종교적인 의미를 가지기는 하였지만 심판대 앞에서 변호해 줄 사람(제물이나 선한 행위 같은 것들도 포함함)을 뜻하였다. 그리고 남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서 간청하는 사람을 가리키기도 하였다. 그런 존재가 대로는 천사도 될 수 있고 또한 예언자들이나 의인들이 될 수도 있다.
순수한 헬라인은 아니지만 헬라 문학을 남긴 유대 사람이었던 필로(Philo)는 대변인이나 변호사의 뜻으로 이 말을 사용한다. 그의 경우의 대부분은 능동태적인 뜻으로 이해되고 있다. 법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옹호자나 변호자의 뜻으로 이 말을 쓰고 있다. 라틴어에서 유래한 “advocate”에 해당하는 것이다. “요셉에 관해서” 라는 필로의 글에서 요셉은 자신을 팔아 넘긴 형들을 다시 만났을 때 형들을 용서하며 이야기한다. “변명할 다른 변호인이 필요 없습니다”(메데노스 헤테루 데이세 파라클레투). “형님들이 한 모든 일을 다 잊고 용서합니다.” 악한 정치인 풀라쿠스에 관한 글에서 유대 당한 풀라쿠스의 감형을 위해 중재했던 레피두스를 파라클레토스라 불렀는데 무죄를 변호해 주며 감형을 부탁하는 의미로서의 중재자라는 뜻으로 번역된다. 또다른 곳에서는 종교적인 의미로 하나님 앞에서 죄인의 속죄를 부탁하는 변호사라는 뜻으로 파라클레토스를 사용하였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헬라어에서의 파라클레토스는 수동태적인 의미를 가진 것으로 해석되기도 하고 능동태적인 의미로도 해석되기도 한다. 그러나 수동태와 능동태 사이의 의미의 차이가 학자들이 지적하는 바와 같이 그리 큰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수동태의 뜻으로도 변호인을 의미하고 능동태의 뜻으로도 변호인을 뜻하기 때문이다. 베헴은 수동태와 능동태의 의미의 차이를 나타나게 구별하지만 그 차이점이 매우 적다는 것을 지적하는 슈나켄버그는 수동태적인 의미를 더 강조한다. 베헴의 구별을 따르고 있는 브라운은 수동태와 함께 능동태적인 의미도 중요하게 여긴다. 능동태의 뜻으로는 남을 위해 간청을 해주는 사람이나 중재자 또는 대변인을 의미한다. 또한 남을 도와주는 사람이나 위로해 주는 사람을 뜻하기도 한다. 파라클레토스는 파라크라레시스와 관련이 있는 낱말이다. 후자를 미루어 볼 때 ‘권면이나 격려를 하여 주는 이’ 라는 뜻도 있을 가능성이 크다.
이와 같이 어휘 상으로 볼 때 파라클레토스는 다양한 뜻을 가진 낱말이다. 그리고 그 다양한 의미들이 요한 복음서의 파라클레토스와 어떤 면으로서든지 부합되기도 한다. 예를 들면 파라클레토스는 재판을 받고 있는 예수를 변호하는 증인이 되기도 하며 예수와 사별하는 제자들을 위로해 주는 역할도 하며 때로는 제자들을 가르치고 인도하는 이로서의 돕는 자의 역할도 하지만 그 어느 것 하나만으로 통일하여 말하기는 곤란하다. 따라서 그 다양한 뜻의 어느 하나를 가지고 통일하여 요한이 뜻하고 있는 파라클레토스가 무엇인지를 설명하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더욱이나 보혜사라고 하는 낱말 하나로 그 다양한 뜻을 밝히기도 불가능한 것이라고 본다.
파라클레토스에 대한 헬라어의 어휘를 알아본다는 것은 요한의 의도를 파악하는데 어느 정도의 도움은 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한 두 가지의 어려운 문제가 남아 있게 된다. 대체로 어휘가 뜻하고 있는 것은 변호인과 같은 인격적 존재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렇다면 요한이 말하고 있는 파라클레토스가 인격적 존재를 뜻한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남게 된다. 또한 인격적 존재라면 그는 하늘의 존재인가 아니면 땅 위에 사는 인물로서의 존재인가 하는 문제가 따르게 된다. 또다른 하나의 중대한 문제는 요한이 과연 헬라 사람들이 사용하였던 그대로의 단순한 의미로 파라클레토스를 이해하고 있었는지 그렇지 않으면 다른 문화와 종교 사상의 상호간의 영향을 받아 가지고 이 말을 사용하였는지 하는 문제이다.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파라클레토스라는 용어가 유대교의 랍비들 가운데에서도 알려진 바 있다. 요한 역시 유대교의 사상의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니었는지 하는 것이다. 요한의 주변과 배후에 있는 종교와 문화의 영향을 요한과 요한의 공동체가 받은 일이 있었는지 혹은 없었는지 하는 문제가 뒤따르게 된다.
3. 사상적 배경
종교사학파의 경향을 따르는 학자들은 파라클레토스의 단순한 어휘를 밝히는데 그치지 않는다. 그 말의 종교사적인 배경을 연구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요한이 이해하고 있는 파라클레토스의 뜻을 올바로 알아낼 수 있다고 본다. 종교사학파들은 요한의 배후에는 다른 종교들의 영향이 있었으리라는 전제 아래에서 여러 가지의 배경 연구를 시도해 본다. 헬라의 영지주의나 유대교의 여러 가지 사상적 영향을 요한이 힘입은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알아내고 싶은 중요한 문제는 파라클레토스가 어떤 존재인가 하는 문제이다. 파라클레토스가 단지 영적인 작용을 말하는 것인가 아니면 사람과 하나님 사이를 중재하는 인격적 존재로서의 천사와 같은 신적인 존재를 가리킨 것인가 하는 궁금증을 밝혀 보려는 것이다.
(1) 영지주의의 “도와주실 분”
영지주의에 속하는 종교 가운데 만다교가 있다. 만다교의 경전에 불트만이 흥미를 갖게 된 것은 무리가 아니다. 만다교의 성경인 긴자 가운데서 “만다 드하예”(Manda dHaije)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가서 있을 곳을 마련하겠다?그리고 나서 곧 너희들에게로 다시 올 것이다”,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반드시 너희들을 찾아올 것이다.”
이 말은 요한복음서의 고별 담화문에 있는 말씀과 너무도 같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고 또 나를 믿으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있을 곳을 마련하러 간다”(요 14:1-3). 고별 담화문에서 요한 복음서의 예수는 파라클레토스를 보내 주시게 될 것을 약속하신다. 만다교의 경전에는 파라클레토스라는 말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렇게 요한과 유사한 대구(對句)가 나타나는 곳에서 요한의 파라클레토스와도 같은 존재가 보냄을 받게 되리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도와주실 분이라는 존재이다. 도와주실 분을 이 땅에 보내어서 근심하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안정을 주고 가르치며 속량하고 그들을 보호하실 것이라고 한다. 도우실 이가 영지주의 종교의 구세주이다. 긴자 문서에 이렇게 말한다. “나는 와서 모든 사람의 마음을 헤아릴 것이다?” “도우실 이는 영혼을 찾아와서 말씀하실 것이다. ‘그대는 나와 함께 있을 것이다. 그대의 마음 안에 내가 거처를 삼겠노라.’” 도우실 이는 하나만의 존재는 아니지만 구세주의 역할을 담당한다. 만다 드하예(Manda dHaije)는 그 도우실 분의 하나이다. 여러 우드라(Uthra)들도 도우실 분이다. 그 중의 대표적인 존재는 야와르(Yawar), 곧 도우실 분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존재이다. 그들은 하늘의 존재로서 하늘로부터 아래의 세상으로 보냄을 받는 신적인 존재들이다.
만다교의 도우실 이의 성격은 여러 가지 면으로 요한의 파라클레토스와 공통되어 보이는 것이 있다. 그런 까닭에 불트만은 요한의 파라클레토스 사상이 만다교와 같은 영지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영지주의의 도우실 분은 요한의 파라클레토스와 같이 위로부터 보내심을 받아 이 세상에 오시고 하늘의 계시를 전달하시며 제자들을 가르치고 권면하며 도덕적으로 올바른 행실을 하도록 일러준다. 그리고 불트만은 만다교와 같은 영지주의적인 종교 사상이 그리스도교가 생기기 이전에 유대인들의 종교 안에 이미 침투해 들어가 있었다고 보았기 때문에 그와 같은 영지주의의 도우실 이로서의 구원자에 대한 사상의 영향을 받아 요한은 파라클레토스를 이해하고 있었던 것으로 판단한 것이었다. 그러한 관점으로 본다면 요한의 파라클레토스는 만다교의 ‘도우실 이’와 같이 하늘에 속한 천사적인 존재였으며 동시에 인격적 존재이었다고 보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불트만의 이론은 많은 비판을 받게 되었고 요한의 파라클레토스가 영지주의의 ‘도우실 이’와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첫째로 불트만이 참고하였던 만다교의 경전은 요한 복음서가 기록된 연대보다도 아주 뒤늦은 사절에 쓰여진 글이었기 때문에 그것으로부터 요한이 영향을 받았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제는 대부분의 학자들이 그와 같은 견해를 정설로 시인한다. 그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만다교의 도우실 이와 요한 복음서의 파라클레토스 사이에 공통점도 있지만 차이점도 많이 있다는 것이다.
차이점들 가운데서 중요한 몇 가지를 열거해 본다면 다음과 같다.
1) 만다교의 도우실 이는 하나만의 존재가 아니다. 몇 가지의 다른 이들이 있어서 서로가 서로를 돕는 보조의 역할을 한다.
그러나 요한의 파라클레토스는 하나 뿐인 존재이다.
2) 요한의 파라클레토스는 법정에 관계되는 변호인의 뜻을 가졌으나 만다교의 도울 자는 그렇지 않다.
3) 헬라어의 파라클레토스의 우선적인 뜻은 도와주는 이라는 뜻이 아니다.
이상과 같은 점들을 참작해 볼 때 파라클레토스를 만다교의 도우실 이와 같은 존재라고 속단할 수가 없다.
(2) 구약과 유대교 문헌
구약과 유대교의 문헌 가운데서 더 가까운 유사성이 발견된다. 헬라어의 파라클레토스와 바로 동일한 헬라어를 구약의 칠십인 역(LXX)이나 유대 문헌에서 찾아볼 수는 없지만 파라클레토스에 가까운 표현을 찾아볼 수 있다.
i) 욥기
어떤 사본에 의하면 욥기에 파라클레토레스(παρακλ?τορε?) 또는 파라클레토이(παρ?κλητοι)라는 말이 나온다. 별로 도움이 안되는 위로라는 뜻이다(욥 16:2). 엘리바스의 충고에 이어 욥이 말했다. “?자네들이 한다는 위로는 기껏해야 괴로움을 줄 뿐”이다. 이 구절을 토대로 요한이 파라클레토스라는 말을 사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욥기에는 요한과 비교해 볼 만한 중보자 사상이 있다. 멜릿츠(????)라는 존재이다(욥 33:21-28). 멜릿츠는 죄를 짓고 벌을 받아 앓게 된 사람이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중보자 역의 천사적 존재인 것이다. 이와 같은 추측은 요한의 파라클레토스를 천사 중의 하나와 같은 인격적 존재로 해석하는데 크게 도움이 될 수가 있다. 그러나 다만 추측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ii) 이사야서
구약 중에서 파라클레토스에 관련 있는 동사가 나타나는 곳은 이사야서이다. 칠십인 역(LXX)의 66장 13절만 하더라도 파라칼레인이란 동사가 세번이나 쓰여지고 있다. 여호와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로하실 것이다(에고 파라칼레쏘 휘마스)라고 한다(LXX 사 66:13). 이사야서 66장은 요한이 즐겨 쓰는 중요한 단어들이 많이 발견되는 곳이다. 주님의 말씀(레마 큐리우, 톤 로곤 아우투우; 66:5), 독싸스데, 포오네(66:6)와 같은 표현들이다. 이런 낱말들이 요한복음서에 있어서는 중요한 용어들이다. 파라클레토스에 대한 말씀이 나타나는 요한복음서의 고별 담화문은 사실 많은 부분에서 구약 성경의 말씀들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특히 포도나무의 비유와 같은 것도 좋은 예이다.
이사야 66장 5절 이하에는 메시아의 오심에 관한 말씀이 있다. 여호와께서 시온에게 위로의 말씀을 보내신다는 제목이다. “어미가 자식을 위로함같이 내가 너희를 위로할 것인즉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으리니 너희가 이를 보고 마음이 기뻐서 너희 뼈가 연한 풀의 무성함 같으리라 여호와의 손은 그 종들에게 나타나겠고 그의 진노는 그 원수에게 더하리라”(66:13-14). 이것은 슬픔을 당하고 있는 이스라엘에게 친히 주께서 찾아오심으로써 그들에게 위로와 기쁨을 주시겠다는 말씀이다.
66장 10-12절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다.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여 다 그와 함께 기뻐하라 다 그와 함께 즐거워하라 그를 위하여 슬퍼하는 자여 다 그의 기쁨을 인하여 그와 함께 기뻐하라 너희가 젖을 빠는 것 같이 그 위로하는 품에서 만족하겠고 젖을 넉넉히 빤 것 같이 그 영광의 풍성함을 인하여 즐거워하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그에게 평강을 강 같이,그에게 열방의 영광을 넘치는 시내 같이 주리니 너희가 그 젖을 빨 것이며 너희가 옆에 안기며 그 무릎에서 놀 것이라.” 곧 고통을 받고 낙심해 있는 백성에게 기쁨과 평화와 위로를 보내 주시리라는 것이다. 요한의 파라클레토스도 슬픔에 잠겨 있게 될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위로와 기쁨이 되신다는 것이다.
위로의 말씀은 주님의 오심과 직결되어 있다. 위로에 대한 말씀은 이렇게 이어진다. “보라 여호와께서 불에 옹위되어 강림하시리니 그 수레들은 회리 바람 같으리로다 그가 혁혁한 위세로 노를 베푸시며 맹렬한 화염으로 견책하실 것이라”(66:15). 위로는 주님의 강림과 연결된다. 요한의 파라클레토스는 지상의 예수가 떠나가신 다음 기다리는 주님의 오심과도 관련이 있어 보인다. 초대 교회에 있어서 주님의 오심이란 세상에 이미 오셨던 그 주님이 다시 오실 것으로 풀이되었다. 다른 보혜사를 하나님께서 보내시리라고 말하는 요한은 곧 이어서 예수로 하여금 다시 오겠다고 말씀하시게 한다(14:18). 또한 주님이 오시면 이스라엘에게는 위로를 주시고 기쁨을 주시지만 그들의 원수들에게는 심판을 내리신다(66:16). 요한의 파라클레토스도 제자들에게는 기쁨과 위로가 되지만 제자들을 적대시하는 세상에게는 심판을 내리신다. 이처럼 이사야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내리시는 위로는 요한의 파라클레토스와 전연 무관한 것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초대 교회는 이사야서에 말하는 이스라엘의 위로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던 것이 확실하다. 누가복음의 시메온은 이스라엘의 위로(파라클레시스)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눅 2:25). 주님이 이 땅에 오시는 날에 경험하게 된 것으로 보았다. 이사야서와 일치한다. 이사야서에 따르면 이스라엘이 위로를 얻게 되는 것은 주님이 오시는 날에 이루어질 것으로 말하고 있다. 사도행전의 성령 강림의 장면도 이사야서에 있는 주님의 강림의 광경과 매우 흡사하다. 폭풍 같은 바람과 불꽃 가운데 나타나신다(행 2:1 이하, 사 66:16).
초대 교회 신자들은 주님이 곧 다시 오시리라고 믿고 있었다. 이사야서를 근거로 하여 그날에 메시아는 위안을 주시리라는 것을 이사야의 말씀에 근거하여 확신하고 있었다. 요한 역시 이사야서를 근거하여 메시아의 위로를 기대하던 초대 교회의 전승을 익숙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주님께서 다시 오시게 되는 날, 곧 파라클레토스가 오시는 그 날에는 지금 수심에 싸여 있는 제자들의 마음이 기쁨으로 변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요 16:22).
그렇게 말하는 요한은 이사야서 66장 10-19절에 있는 내용과 같은 것을 마음 속에 생각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아주 높은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이것을 참작할 때 요한의 파라클레토스는 천사적인 인격적 존재라기 보다는 메시아의 날에 메시아가 영적으로 가져다주시는 위안을 뜻하는 것으로 풀이할 수 있을 것이다. 신약의 다른 곳에서도 파라클레시스가 자주 사용된다. 그렇지만 모든 경우가 다 주님의 강림과 관련된 위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대개는 사도들이 증언이나 설교를 통하여 전해 주는 권면이나 격려와 위로를 뜻하는 말이다(살전 3:2, 롬 12:8, 히 13:22).
iii) 구약의 고별 담화
파라클레토스는 요한의 고별 담화문 가운데서만 유일하게 나타난다. 요한 복음서 14장으로부터 17장은 고별 담화의 형식으로 되어 있다. 고별 담화의 특이한 문학의 유형이 구약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요한 복음서의 고별 담화와 구약에 나타나는 고별 담화문 사이에는 내용에 있어서나 문학의 유형에 있어서나 주목할 만한 유사점이 발견된다. 요한이 구약의 형식으로부터 본을 받게 된 것이 아닌가 의심된다.
먼저 내용에 관한 유사점이다. 구약의 고별 담화 가운데는 세상을 떠나는 선생과 그의 뒤를 잇게 될 후계자의 연속적인 관계를 강조하는 이야기들이 나타난다. 보른캄(Bornkamm)은 특별히 그와 같은 선생과 그 후계자의 관계에 대한 것에 관심을 기울였다. 앞서가는 선구자와 그의 뒤를 따르는 완성자의 관계이다. 할 일을 많이 남겨 두고 세상을 떠나게 되는 지도자와 선생을 볼 때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제자가 있다. 스승의 뒤를 이어 못 다한 일을 완성할 후계자가 있다는 것이다. 모세와 여호수아의 관계가 그렇다. 또 엘리아와 엘리사의 관계도 그러한 것이라고 보았다. 모세는 민족의 위대한 지도자였다. 그가 세상을 떠나게 되었을 때 그를 따르는 백성들의 실망과 낙심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아직도 광복의 날을 실현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때에 모세는 자기의 죽음을 슬퍼하는 백성들에게 마지막 유언을 남긴다(신 32:44 이하). 유언 가운데는 백성들을 위로하는 말이 뒤따른다. 열두 지파의 하나 하나를 위하여 축복하며 위로한다(신 33:1 이하). 위로하는 가운데서 모세는 백성들을 향하여 후계자에 관한 이야기를 남긴다. 모세는 자기와 같은 예언자를 그의 후계자로 하나님께서 세워 주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후계자는 마침내 가나안을 정복하고 광복의 꿈을 이룬다.
열왕기 하서에는 엘리아의 고별에 관한 기사가 있다. 엘리아가 세상을 떠나게 될 무렵 자신의 후계자가 될 엘리사에게 고별의 담화를 남긴다. 담화 가운데서 엘리아는 제자에게 물었다. “내가 무엇을 네게 해주었으면 좋겠느냐?” 그 때 엘리사는 대답한다. “스승님의 능력을 두배나 내게 주시기를 바랍니다.” 엘리사는 스승이 하였던 것과 같은 기적을 행할 수 있기를 바랬던 것이다. 처음에는 실패하였으나 마침내 하나님으로부터 그와 같은 능력을 받게 된다. 보른캄은 요한 복음서의 고별 담화문에서도 유사한 관계를 찾아볼 수 있다고 보았다. 예수와 파라클레토스는 스승과 후계자의 관계이다. 스승으로 오신 예수가 세상을 떠나시게 된다. 그의 뒤를 잇게 되는 후계자는 파라클레토스이다. 예수는 선구자요 파라클레토스는 완성자이다. 예수는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시나 파라클레토스는 심판주가 되고 승리를 거두는 성취자로서의 선구자의 뒤를 잇게 되는 분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스승과 후계자에 대한 한 구약의 이야기는 요한의 배경 연구로 매우 중요하지만 보른캄의 판단에는 무리가 없지 않다. 첫째 요한의 예수는 선구자로서의 예수가 아니다. 그는 처음부터 그리스도시요 심판주이시며 구세주로 오신 것이다. 파라클레토스도 예수의 일을 완성하실 최종의 재림주는 아닌 것이다. 모세와 여호수아의 경우에 있어서도 그렇다. 모세는 선구자가 아니다. 모세는 성취 면에 있어서 여호수의 우위에 있다. 엘리아의 경우도 그와 같다. 비교의 초점을 다른 곳으로 돌려야 할 것이다. 스승과 후계자의 관계를 이야기한 것은 옳은 판단이지만 고별 담화의 초점은 언제나 스승에게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후계자는 스승의 영을 이어받았다고 하는 점이다. 모세의 고별 담화의 이야기의 핵심 부분에서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안수를 하고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지혜의 영을 여호수아가 받을 수 있게 하였다(신 34:9). 엘리아의 경우에 있어서도 그와 같다. 후계자가 될 엘리사는 스승이 가진 영을 얻기를 원했다. 그리고 마침내는 그 영적인 능력을 소유하게 되었다는 것이다(왕하 2:1-15). 요한의 경우도 그런 시각으로 보는 구약의 고별 담화와 비교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고별 담화의 비교는 내용에 못지 않게 그 문학의 유형의 비교가 중요하다. 뮬러(U.B. Mueller)는 구약과 구약 위경에서 그같은 담화의 형식을 수집하여 요한 복음서의 예수의 고별 담화문과 비교하였다. 구약의 정경에 못지 않게 위경에도 많은 고별문들이 있다. 열두 지파 조상들의 유언이나 유빌리서, 에녹1서, 모세의 유언(승천), 그리고 제2 에스드라서에서 조상이나 지도자들의 유언들이 발견된다. 야곱의 마지막 유언이 유빌리서에 기록되어 있다. 아들 요셉에게 남긴 말이다. 야곱은 자녀들을 축복한다. 이집트에서 나그네의 삶을 하고 있는 그의 자녀들에게 위로와 격려의 뜻으로 이집트가 장차 망하게 될 것을 이야기한다. 요셉에게는 특별히 땅을 유산으로 물려주고 야곱은 세상을 떠나 조상들과 함께 묻히게 될 것을 이야기한다. 조상들의 모든 책들은 레위에게 물려주고 대대로 물려줄 것을 당부한다(유빌 45:13-16).
에녹은 승천을 앞두고 자녀들에게 올바로 살 것을 당부한다. 현실의 세상에서는 불의한 사람들이 더 잘 살게 되는 것을 보지마는 거기에 유혹되지 말라는 것이다. 마침내 심판을 받고 불의한 사람들이 멸망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에녹 91:4 이하). 세상을 떠나는 모세는 여호수아를 앞에 놓고 유언을 남긴다. 하나님의 나라가 온 천지에 나타나고 사탄의 지배가 종식되며 모든 슬픔이 사라지게 되리라는 위로와 격려의 말을 남긴다. 그리고 여호수아를 위로한다(10-11장). 마지막으로 여호수아에게 계명을 잘 지키라는 부탁을 한다. 에스라가 죽음에 이르렀을 때의 기록이 제4 에스라서(제2 에스드라서)에 나타난다. 에스라는 백성들을 모아 놓고 다음과 같은 내용의 말을 남긴다. 조상들에게 하나님은 계명을 주셨다. 그러나 조상들은 죄를 짓고 유업의 땅에 이르지 못했다. 만일 판단을 바로하여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면 살게 되고 죽은 다음에도 하나님의 긍휼 하심을 입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14장). 에스라는 하나님께 성령을 내려 주실 것을 간구한다. 그리고 불꽃과 같은 색깔의 컵을 받아 마시고 지시대로 몇 명의 동료와 함께 아흔 네 권의 책을 썼다는 것이다(14장).
위와 같이 이스라엘의 섬김을 받아 오던 민족의 지도자나 예언자들의 임종에 대한 문헌들이 정경에 속한 구약 성경 이외에도 위명(僞名)의 형식으로 많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임종에 관한 문헌들을 폭넓게 비교해 본 뮬러는 유대교의 그와 같은 문헌들 가운데에서 발견되는 중요한 요소들이 요한 복음서의 고별 담화문 가운데도 있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스승이 이제는 세상을 떠나가시게 된다는 것을 예고한다. 불안과 슬픔에 싸여 있는 제자들에게 선생은 위로와 격려의 말을 남긴다. 위안의 근거를 약속한다. 계명을 지키라는 권면이다. 그리고 두려워하지 말하는 당부이다. 그리고 스승이 갖고 있던 성령을 이어받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비교를 통해 볼 때 더 많은 공통점도 찾아볼 수 있다. 창조 때로부터 하나님의 계획하심에 따라 새로운 후계자를 세워 주시리라는 확신이 있다. 그런 시점에서 떠나는 선생은 미래에 일어날 모든 일들을 확실히 알고 제자들에게 계시해 준다. 떠나는 스승은 도덕적 교훈을 남긴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라는 것이다. 계명을 지키라는 당부와 아울러 심판에 대한 것을 가르친다. 지금 스승의 죽음을 지켜보는 백성이나 제자들이 세상에서 슬픔을 당하고 있지만 기뻐할 때가 오며 지금 기뻐하는 세상은 죄 때문에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공통점은 떠나는 스승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영을 후계자에게도 받도록 하여준다고 하는 것이다. 떠나는 선생이 소유하고 있던 것과 같은 영을 하나님께서는 후계자가 될 인물에게도 보내 주시리라는 약속이 고별 담화의 가장 중요한 핵심을 이루고 있다. 그와 같은 점들에 있어서 요한의 고별 담화문은 유대교에 흔히 있는 문학의 유형에 가까운 것이며 유대교의 고별 담화에서와 같이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게 될 파라클레토스도 천사와 같은 인격적 존재라기보다는 스승의 영이나 하나님의 영을 말하는 것이다.
iv) 쿰란 문서
유대 문헌 가운데서 파라클레토스에 참고가 될 만한 문헌은 쿰란 문서이다. 사해 사본이 발견된 이후로부터 쿰란 문서와 요한 복음서 사이의 공통된 요소에 대한 연구가 많은 관심을 끌어 왔다. 따라서 요한이 쿰란 종파와 같은 유대의 종교와 더 많은 접촉을 가졌고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점차 커지게 되었다. 공통된 점이란 특별히 윤리적인 이원론에 관한 것이다. 쿰란 문서나 요한 문서나 다같이 윤리적인 선과 악을 선한 영?악한 영, 진리의 영?거짓의 영의 두 개의 영으로 표현하며 선악의 대립을 우주론적 차원으로 말하고 있다. 쿰란 문서에는 파라클레토스라는 표현이 전연 나타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쿰란과 요한이 다 함께 가지고 있는 윤리적 이원론에는 진리의 영이 언급되고 있고 요한에 의하면 파라클레토스를 진리의 영이라고 하므로 자연히 쿰란의 사상이 요한의 파라클레토스 사상에 어떤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의구심을 갖게 한다.
쿰란의 문서는 진리의 영과 관련하여 천사의 존재를 이야기한다. 빛들의 왕자, 또는 빛의 왕자라는 인격화된 존재이다. 구약의 욥기에서 일찍이 유대교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중보하는 천사 같은 존재를 믿고 있었다. 그리고 후대의 묵시 문학에 이르러서도 그와 같은 천사의 존재에 대한 사상이 계속 발전해 왔다. 다니엘서에서도 하늘의 일곱 수호신이 있었다는 것과 그 중의 하나가 미가엘이다. 미가엘이 도움을 주려고 세상에 내려왔고(10:13,21, 12:1) 또한 누군가가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아 다니엘을 찾아 왔다는 기사가 있다. 쿰란 문서에 있어서도 두 영의 싸움을 미가엘과 빌레알의 천사들의 우주적 싸움인 것으로 인격화해서 말하기도 한다.
벳츠(O. Betz)는 요한의 파라클레토스가 쿰란의 미가엘리스 같은 천사에 해당한 것으로 보았다. 요한의 배후에는 쿰란이나 묵시문학의 천사로서의 중보자 신앙이 있었다는 것이다. 파라클레토스도 미가엘리스와 같이 하늘의 천사이며 인격적 존재로서 하늘로부터 보내심을 받아 이 땅에 오실 분이시라는 것이다. 요한의 예수는 이 땅에 오셨다가 높이 들리심을 받고 하늘에 오르신다. 하늘로 오르신 예수는 그 곳에 계시면서 땅에 남아 있는 성도들의 중보자로서의 역할을 하신다. 예수께서 이 땅에 계셨을 때 미가엘은 하늘에 있었다. 예수께서 하늘에 오르시자 하늘의 중보자로서의 역할을 예수에게 양도하고 미가엘은 땅으로 내려와서 성도들을 위하는 땅의 중보자가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제자들을 악의 세력으로부터 보호하시고 제자들을 인도하며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증언을 하신다고 보았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벳츠의 판단으로서는 요한의 파라클레토스는 인격적 존재도 되며 하늘에 속하는 비인격적인 힘도 된다. 먼저 오신 파라클레토스 예수는 인격적 존재이고 두 번째의 파라클레토스는 하늘의 권능이시라는 것이다.
그밖에도 쿰란과 요한의 사이에는 유사점들이 많이 있다. 그 중의 하나는 “의(義)의 선생”에 관한 것이다. 리이니(Leaney)는 쿰란 문서에서 말하는 의의 선생과 파라클레토스를 비교해 보았다. 의의 선생은 구체적 인물이다. 쿰란 교단의 지도자 한 사람을 의미하는지 아니면 누구라도 그런 역할을 담당할 수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할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구체적인 인물이다. 요한의 파라클레토스와 같이 신자들을 가르치고 지도하고 격려하고 위안한다. 유대교의 선생과 같은 역할이다. 그러면 요한이 말하는 파라클레토스도 인물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점을 너무 지나치게 강조할 수는 없다는 것을 리이니는 시사한다. 참으로 지도와 위안과 중보를 해주시는 이는 그 인물의 배후에 있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쿰란의 천사적 존재나 의의 선생에 대한 개념에서 요한이 파라클레토스 사상을 받아 온 것이라는 이론에 대해서 반박이 또한 적지 않게 크다. 아무리 유사한 점이 발견된다 하더라도 요한이 직접 쿰란에서 본떠 왔는가 하는 물음에 대해서는 확증할 만한 증거를 제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존스톤의 비교에 따르면 쿰란의 천사적 표현은 인격적 존재로서의 천사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적 능력의 힘을 뜻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초대 교회는 그때까지도 유대교에서는 중보하는 천사를 널리 믿고 있었지만 요한은 그런 신앙을 배격하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존스톤은 요한이 진리의 영이라고 말하는 파라클레토스가 인격적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적으로 활동하시는 강한 힘이시라고 보았고 존스톤의 판단은 파라클레토스 연구가들의 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 쿰란에 나타나는 두 가지의 영도 랍비들이 말해 오던 바와 같은 마음 속에 일어나는 선한 충동이나 악한 충동과 같은 것을 뜻하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심리학적 이원론이라는 것이다.
II. 파라클레토스는 인격적 존재인가?
지금까지 우리는 헬라어의 어휘와 가능한 배경들을 살펴보았다. 어휘와 배경 연구를 거쳐오는 동안에 한 가지의 중요한 문제를 발견하게 되었다. 파라클레토스가 중보자나 법정에서의 변호인과 같은 역할을 하는 이라는 뜻을 가진 것이라면 그는 하늘에 속하여 있는 천사와 같은 인격적 존재를 말하는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아니면 영적인 활동을 의미하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유대교의 배경을 거쳐오는 동안에 두 가지의 경우가 다함께 가능하였던 것을 발견하였다. 이 문제를 바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제 우리는 요한의 본문 전체를 흐르고 있는 맥락에서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던 배경을 참작하며 요한 복음서 본문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파라클레토스가 언급된 본문은 고별 담화문이다. 이미 알아본 바와 같이 고별 담화문은 유대교 문헌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문학의 유형이었고 요한의 고별 담화도 그들의 깊은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본다. 요한의 고별 담화문은 요한 복음서의 저자의 표현이라는 것은 거의 모든 학자들이 시인하는 바이다. 그렇지만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본문이 처음부터 하나의 통일된 글로 쓰여진 것이 아니라 몇 단계의 전승들을 모았거나 편집 과정을 거친 것으로 판단하면서 몇 단계의 사상의 발전 과정을 읽어 내는 학자도 있다. 그렇지만 몇 가지의 단계로 나누어져 기록되었다고 하는 확실한 증거가 보편적으로 시인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요한의 고별 담화를 하나의 통일된 글로 보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 옳을 줄 안다. 고별 담화를 연구한 전문가들의 입장도 그렇다.
1. 오실“때”에 관해서
파라클레토스가 누구 신가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파라클레토스 성령이 언제 임하게 될 것인가를 먼저 알아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언제 임하게 될 것인가라고 하는 시간의 문제에 대하여 요한은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 예수께서 믿는 사람들이 받게 될 성령에 관한 말씀을 하실 때도 요한은 이렇게 설명을 덧붙였다.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7:39). 예수께서 아직 세상을 떠나시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성령을 받지 않았다는 것이다. 성령이 임하게 될 때란 바로 예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시고 세상을 떠나신 다음이라는 것이다. 요한은 때(헤 호라)에 대하여 여러 차례나 거듭하여 강조한다. 예수께서 영광을 받으시게 될 때를 말한 것이다.
고별 담화의 서두에 이것을 분명하게 밝힌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자기의 때”가 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야 할 그 때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파라클레토스를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것은 바로 그때가 지난 다음이다. 곧 예수께서 세상을 떠나신 다음에 일어날 것이다. 예수께서 세상을 떠나시지 않으면 파라클레토스가 제자들에게 오시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16:7).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불어 넣어 주신 것도 부활하신 다음이었다(20:22). 성령이신 파라클레토스가 오실 때는 예수께서 부활하신 다음이라는 것이다.
이 때와 관련하여 예수는 자신이 다시 오시겠다고 하신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내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라고 하신다(14:18-19). 이것은 예수께서 세상을 떠나신다는 것과 떠나신 다음에 자신이 다시 오신다는 말씀이다. 파라클레토스가 보냄을 받을 때도 그 때이다. 그렇다면 다시 오시는 그 예수와 파라클레토스는 동일한 존재를 뜻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동일한 존재가 아니더라도 최소한 파라클레토스는 다시 오실 그리스도가 임재하여 계시는 동안에 제자들이 체험할 수 있는 존재인 것이다. 다시 오신 그리스도는 살아 계시다(14:19). 그리고 그 날에 제자들 안에 살아 계신다(14:20). 그 날부터 파라클레토스가 임하게 된 것이라면 그 때부터 영원히 파라클레토스는 제자들과 함께 있게 될 것이며(14:16), 그리스도는 또한 제자들 안에 거하시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파라클레토스의 체험은 다시 오신 그리스도와의 공존 가운데서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다. 그리스도가 제자들 안에 거하신다는 말씀을 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다는 것을 부언 한다.
예수께서 세상을 떠나시자 마자 즉시 다시 오신다는 것이 아니다. “조금”이라는 시간이 지난 다음이다(16:18). “조금 있으면”이라는 시간은 숨은 뜻을 가지고 있다. 제자들은 그 뜻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의문을 일으켰다고 한다(16:18). “조금 있으면”이라는 시간에 대한 언급은 파라클레토스의 오심을 암시하는 말도 될 수 있다. 요한의 예수는 그것이 해산의 고통과 같은 것을 가리킨 것이라고 말씀하신다(16:21). 여인은 해산할 때가 되면 얼마 동안 고통을 당한다. 해산의 때가 왔기 때문이다. 해산을 하게 되면 고통이 변하여 기쁨이 되리라는 구약 성경의 비유를 뜻한 것이다. 이사야서에서는 그런 비유가 메시아의 오심을 가리키는 비유로 사용되었다(사 26:17-18). 이스라엘이 임신한 여인처럼 괴로워하고 해산한 여인처럼 몸부림쳤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흩어진 백성들을 모아 오시고 그들의 슬픔을 씻어 주실 위로자로 오시는 것이다. 다시 오실 주님은 위로자 곧 파라클레토스가 되신다. 파라클레토스가 오시게 될 때에 관한 증언들은 결국 다시 오시는 예수를 암시한다.
2. 예수와 파라클레토스
파라클레토스는 예수를 가리켜 말한 것인가? 갑작스러운 물음같이 보인다. 그러나 요한은 오시리라는 파라클레토스를 또 “다른 파라클레토스”라고 불렀다. 마치도 전에 오신 예수를 한 분의 파라클레토스로 여기며 앞으로 오시리라는 파라클레토스를 또다른 하나의 파라클레토스로 말씀하신 것과 같이 말이다.
요한이 기록한 고별 담화문 이전의 역사적 예수의 모습과 고별 담화문에 나타나는 파라클레토스의 모습이 너무도 같다. 유사점을 열거한 브라운의 비교에 많은 학자들은 동감한다. 그가 지적한 유사점들은 다음과 같다. 파라클레토스는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아 오신다. 예수도 그러하였다. 예수의 이름으로 파라클레토스는 오실 것이다. 예수도 아버지의 이름으로 오셨다(5:43). 파라클레토스는 진리의 영이시다(14:6). 예수도 진리이시다. 파라클레토스는 성령 곧 거룩하신 영이시다. 예수도 하나님의 거룩하신 분이시다(6:69). 제자들은 파라클레토스를 알아볼 수 있는 특권을 가지고 있다. 그와 같이 그들은 예수를 알아볼 수 있는 특권을 가지고 있다(14:7,9). 파라클레토스는 제자들 안에 머물러 있게 될 것이다. 예수도 그들 안에 머물러 있다(14:20,23, 15:4,5, 17:23). 파라클레토스는 제자들을 가르친다. 예수도 그렇다. 파라클레토스는 예수에 대한 증언을 한다. 예수도 자신에 대한 증언을 하신다. 파라클레토스는 미래에 일어날 일을 이야기한다. 예수도 그렇다(4:25-26). 파라클레토스의 모든 역할들이 예수의 영광을 드러낸다. 예수의 모든 일들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세상이 대하는 태도도 같다. 세상을 파라클레토스를 받아들이지도 않고 알지도 못하며 인정하지도 않는다. 예수에 대해서도 그렇다.
이상과 같은 유사점들을 열거하면서 브라운은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요한이 말하는 또다른 파라클레토스는 또다른 예수이다(“another Paraclete is another Jesus”) 세상을 떠나 부재 중이신 예수가 임재하시는 것이 파라클레토스이다(“the Paraclete is the presence of Jesus when Jesus is about”). 전에 오신 예수는 첫 번째의 파라클레토스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가 떠나신 다음에 오시리라는 다른 파라클레토스는 다시 오실 예수이시라는 것이다. 먼저 오신 예수와 다시 오실 파라클레토스의 비교를 통해서 확실하게 드러나는 것이 있다. 곧 육신의 예수와 파라클레토스 사이에 근본적인 연속성이 있다는 것이다. 성령은 역사적 예수와 분리할 수 없다. 초대 교회 신자들이 체험하는 성령 체험은 땅 위에 생존해 계시던 그 예수의 성령과 연속된 것이라야만 하며, 또 그분의 임재를 현재적으로 체험하는 것이라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에 그가 인격적 존재이시라면 제자들의 마음 속에 살아 계신 예수로서의 인격적 존재이시다.
3. 인격적 존재로서의 하늘의 중보자가 아닌 하나님의 영
파라클레토스가 육신의 예수의 뒤를 이어 오시는 분이시라는 것과 그리고 그분은 다시 오시는 주님이시라는 것을 특별한 요한은 강조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면 다시 오시는 주님으로서의 파라클레토스는 인격적 존재를 말하는 것일까? 다시 오실 그리스도와 파라클레토스의 체험에 관해서 요한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14:20). 곧 제자들의 마음 속에 거주하시게 될 그리스도시라면 그분은 영으로 계시는 분이시다. 또한 그와 같은 체험은 그리스도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에 있어서도 동일하다. 예수는 하나님 안에 계시며 또 하나님은 예수 안에 계시다는 것이다. 예수 안에 계시는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이시다. 여기에서 요한의 의도가 드러나 보인다. 곧 크리스천들이 체험해야 하는 성령의 체험은 영적 체험이다. 그리고 영적으로 체험하는 영적 체험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체험이라야 한다. 성령은 그리스도를 근거로 해서 체험하는 체험이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을 받으신 분이시다. 그러므로 크리스천들이 그리스도에게 근거를 둔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받으신 하나님의 영을 계승하는 것이다. 이 경우에 있어서 파라클레토스는 인격적 존재라기보다 영이시다. 다만 영을 인격화하였을 따름이다.
그러나 초대 교회 신자들 가운데는 영을 인격화할 뿐만 아니라 영을 구체적인 인물로 대치하기도 하고, 또는 하늘에 있는 천사와 같은 인격적 존재로 믿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적어도 요한의 교회 시대에는 그런 사람들이 교회 안에 큰 문제를 일으키고 있었던 것 같이 보인다. 따라서 그런 사람들은 자신들이 마치도 특별한 계시라도 받았거나 영계의 인물과도 접촉한 것처럼 행하기도 하고 성령의 특별한 능력을 소유한 듯이 말하며 사람들을 유혹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와 같이 개인적으로 영적 능력을 내세우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이나 인격을 통하지 않고 직접 영계의 성령 체험을 내세웠던 모양이다. 그런 까닭에 요한 일서의 저자는 다음과 같은 경고를 한 것이라고 본다.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이제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요일 4:2-3).
우리가 요한의 성령을 인격적 존재로만 해석하게 되는 또하나의 원인은 삼위일체 교리의 영향이기도 하다. 오랫동안 기독교는 삼위일체의 교리를 통해서 성부 성자 성령 사이의 인격적 구별을 지나치게 강조해 왔다. 삼위의 구별에 있어서나 동질성을 주장할 때에 있어서도 인격적 존재로서의 구별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던 것이다. 그와 같은 결과로 우리는 요한의 보혜사 성령을 인격적 존재로 해석하게 되며 따라서 예수와 독립된 존재로만 보게 되는 경향을 갖게 된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교리는 후대의 산물이다. 요한 복음서가 기록된 것은 교리보다도 아주 이른 시절이었다는 것을 생각해서 우리는 요한의 본래의 심정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는 것이다. 요한에게 있어서 파라클레토스, 곧 성령은 예수를 떠나서는 있을 수 없다. 그 성령은 본질상 예수의 행하심과 가르치심과 그리고 그가 물려주시는 영을 이어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파라클레토스를 곧 하나님께서 예수의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이라고 말한 것이다(14:26).
III. 예수의 가르치심과 파라클레토스
위에서 우리는 요한의 파라클레토스가 인격적 존재라기보다 성령이시라는 것을 지적하였다. 성령이신 보혜사는 다시 오실 그리스도와 같으시다. 다시 오실 그리스도는 이미 오신 그리스도와 동일하신 그리스도시다. 그분도 보혜사와 같으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다시 오실 그리스도와 함께 한다는 체험은 영적인 체험이다. 영적인 체험, 곧 성령의 체험은 열광적 체험이 아니다.이미 오신 그리스도의 가르치심과 그의 생애를 통해 나타난 그의 영을 체험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영이 계시다. 파라클레토스는 그 하나님의 영을 그리스도를 통해서 신자들이 체험할 수 있도록 하여 주신다. 파라클레토스가 영적인 활동이시라는 것은 요한의 고별 담화문에서 더 분명해진다. 요한은 파라클레토스를 진리의 영이라고 부르고 있다. “진리의 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또한 파라클레토스를 그렇게 부르는 의도가 무엇인지를 알아보아야 할 것이다.
1. 진리의 영
더욱 더 빈번하게 요한은 파라클레토스를 진리의 영이라고 부른다. “그는 진리의 영이시다”(14:15).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가 나를(예수 자신을) 증거 하실 것이다”(15:26). “보혜사 곧 진리의 영이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다”(16:13). 이렇게 여러 차례에 걸쳐서 반복하여 가면서 파라클레토스가 진리의 영이시라는 것을 요한은 예수로 하여금 말씀하시게 한다. 이것은 아마도 요한이 강조하고 싶어하는 그의 의도를 예수의 말씀을 통하여 더욱 분명하게 표현한 것이라고 본다.
요한의 의지가 무엇인지를 알아보기 전에 우리가 먼저 물어야 할 문제가 하나 있다. 곧 진리의 영이 단지 영적인 성격을 가리킨 것인지 혹은 그렇지 않으면 인격적 존재를 가리킨 것인지 하는 문제이다. 진리의 영은 사해 사본(쿰란 문서)에서도 발견되는 명칭이다. 학자들 중에는 그것이 쿰란 문서에서 인격화된 존재로 불려지는 빛의 왕자나 하늘에 속한 천사와 같이 인격적 존재로 풀이되는 경우가 있다는 의견을 가진 이들이 있다. 그러나 영 개념에 있어서 쿰란과 요한의 차이가 있을 뿐만 아니라 요한에게는 쿰란에서 찾아볼 수 있는 천사론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이 말하는 진리의 영을 천사론과 결부시켜 인격화해 버린다는 것은 부당한 일이다. 오히려 존슨의 견해와 같이 요한은 당시의 그같은 유대의 풍조를 따라서 천사의 중보 역할을 믿고 있는 사람들을 공박하기 위해서 진리의 영이라는 명칭을 택한 것이라고 볼 수가 있다. 진리의 영은 영이다. 진리는 영이기 때문이다. 요한 일서는 이 점에 있어서 요한 복음서와 의견을 같이한다. 요한 일서는 열은 곧 진리라고 하는 것과 같이 요한 복음서는 영과 진리를 같은 위치에 두고 말한다. 요한 복음서에 의하면 참된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영과 진리로” 예배드릴 때가 온다고 하고(4:23), 하나님을 나타내 보이시는 그리스도를 진리라고 부르며(14:6), 또 “하나님은 영이시라”고도 함으로써(4:24) 진리는 영과의 긴밀한 관계를 잘 드러내 보이고 있다.
요한에게 있어서 진리는 도덕적 의미를 갖는다. 진리라는 말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요한은 다분히 후기의 유대적인 사고를 따르고 있다. 유대교에 있어서 진리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명을 따라 행하는 것과 같은 충성스러운 행위를 의미한다. 그러나 후기의 유대교에 있어서도 도덕적인 의미는 여전하지만 그것도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경륜에 대한 계시와 신비를 동시에 의미한다. 후기 유대교의 사상이란 지혜 문학이나 묵시 문학, 그리고 쿰란 문서에 나타난 사상을 가리킨다. 요한은 그와 같은 후기의 유대 사상에 더 지배적인 영향을 받고 있다. 요한의 진리 개념은 헬라적인 이해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헬라 사람들에 있어서 진리는 실체에 관한 객관적인 지식을 의미한다. 불트만이나 다드와 같은 더러의 학자들은 헬라적인 배경을 더 강조하면서 요한의 진리 개념을 풀이하지만 포터리(Potterie)는 의견을 달리한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요한은 후기 유대주의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후기 유대교에서와 같이 요한에게 있어서 진리란 도덕적 의미를 가진 것이다. 도덕의 결과가 심판의 날에 드러나게 된다. 진리는 그와 같은 심판에 관한 계시도 동시에 의미한다. 도덕적 진리의 말씀과 미래 심판에 관한 하나님의 계시를 동시에 의미한다는 것이다.
“진리의 영”도 역시 도덕적 의미를 나타낸다. 요한복음을 제외한 신약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운 이 표현은 후기 유대교 문헌의 하나인 쿰란 문서의 애용어(愛用語)가 되다시피 하고 있는 표현이다. 요한과 함께 쿰란 문서에서도 이 말을 잘 사용한다. 공통적으로 잘 사용할 뿐만 아니라 진리와 진리의 영은 때때로 ‘행한다는 의미의 동사’와 함께 사용되며 윤리적인 행위나 실천 면에 더 가까운 의미를 나타낸다. 행하다, 실천하다(포이에인)이라는 동사와 함께 요한은 진리를 행하는 사람(3:21)이라는 말을 하고 있는데 그때의 진리를 행하는 사람이란 악을 행하는 사람의 반대의 사람을 가리킨다. 같은 경우를 요한일 서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요일 1:6). 또한 “인도한다”(오데게세이)와 같은 윤리적인 의미를 암시하는 동사와 함께 진리라는 말을 요한은 사용하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요한은 “보헤사 곧 진리의 영이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다”라고 한다(16:13).
2. 예수의 말씀과 행하심
진리는 예수이다. 그리고 진리의 영은 예수의 생애와 가르치심을 통해 나타내 보이신 예수의 영이시다. 예수를 말미암지 않고서는 참된 의미의 영성 체험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보혜사 성령 곧 진리의 영은 “가르치심”을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요한의 예수는 말씀하신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14:26). 곧 성령을 의미하는 보혜사의 역할은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말씀을 다시 기억하게 하여 주신다는 것이다. 보혜사 곧 진리의 영은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언해 주실 것이다(15:26). 고별 담화에 뒤이어서 예수의 마지막 기도가 있다. 기도문 가운데서 예수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며 저희는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17:8). 보혜사 성령을 보내 주시리라는 약속 끝에 하신 말씀이다. 요한은 여기에서 초대 교회가 체험하는 성령 체험이 그리스도의 가르치심을 근거하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을 힘주어 말한 것이라고 본다.
진리는 말씀이다. 진리의 영을 따르는 것은 말씀에 근거를 두는 생활을 의미한다. 궁극적으로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시고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는 것이지만 그리스도의 말씀과 행하심을 통해서 나타나신 것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다만 그가 가르치신 말씀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의 행하심과 그의 모든 생애를 다 포함한 것이다. 곧 그리스도의 존재 자체가 말씀이신 것이다. 진리는 말씀하신다는 동사(레게인, 릴레인)와 함께 자주 사용된다. 예수의 말씀이 진리이기 때문이다. 보혜사를 언급하실 때 예수는 진리를 말씀하신다고 한다(16:7). 예수께서는 하나님께로부터 들은 진리를 사람들에게 말씀하신다(8:40,46). 기도문 가운데서도 예수는 말씀하신다. “아버지의 진리로 그들을 거룩하게 해주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이옵니다.” 이렇게 요한은 말씀에다 중점을 두며 성령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리스도가 곧 진리라는 말씀에는 그의 윤리적인 가르치심에 많은 역점을 두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말씀의 뒤를 이어 요한의 예수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가 나를 알았다면 내 아버지도 알았을 것이다. 이제는 너희가 내 아버지를 알았고 또 보았다.” “?내가 행하는 그 일을 보고 믿으라.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행하는 일을 그도 행할 것이요 이보다 더 큰 일도 행할 것이다”(14:7-12). 크리스천에게 있어서 진리를 말할 때 행함이 있어야 하며 행함의 근거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와의 합일의 체험에다 두어야 한다. 곧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내 보여주신 일들을 실천하며 또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것과 같은 윤리적인 실천을 통한 하나님과의 합일의 체험이 곧 성령 체험이다. 진리의 영이 오실 때 합일의 체험을 하게 된다는 말씀이 따른다(14:20). 그리고 난 다음에는 반드시 그리스도의 계명을 받아 행하는 사람이 되라는 것과 그리스도의 말씀을 지키라는 윤리적 실천에 관한 교훈을 첨부하신다(14:21,23). 이것은 요한의 특징이다. 요한은 보혜사 성령의 체험에 있어서 열광적인 도취나 어떤 신비적인 환상의 체험보다도 윤리적인 실천을 강조한다.
IV. 박해 시대의 공동체와 파라클레토스
¤ 위에서 우리는 요한의 성령관의 어떤 특이한 점을 보게 되었다. 초대 교회의 성령 이해와는 무엇인가 색다른 분위기를 엿볼 수 있다. 초대 교회에서 강조하던 것과 같은 뜨거운 체험이나 기적의 능력은 강조하지 않는다. 영적이고 윤리적인 삶의 실천을 강조한다. 그리스도의 말씀과 윤리적인 계명을 따르는 생활을 권장하는 분위기로 바뀌어 가고 있다. 교우들 사이의 사랑과, 그리스도와의 영적인 연합이 보혜사 성령 체험의 핵심적인 부분이 된다. 요한의 특수한 사정은 무엇이었을까? 요한의 공동체가 처해 있던 상황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들의 역사적 상황을 배경으로 하여 요한이 말하는 파라클레토스의 성격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1. 위기와 박해
고별 담화문에는 위기의 분위기가 감돌고 있다. 담화문에서 너희라고 불리는 제자들은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고 박해를 당하게 된다고 한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세상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했다는 것을 알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했으면 너희를 또한 박해할 것이요”?“그들은 내 이름 때문에 이런 모든 일을 너희에게 행할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나를 보내신 이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15:18-2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실족치 않게 하려 함이니 사람들이 너희를 출회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 하리라”(16:1-2). 시련의 정도가 아니다. 죽임을 당하며 생명을 잃게 되는 험악한 상황이다.
이런 상황이 반드시 고별 시대의 상황이라고는 할 수 없다. 후대의 상황을 반영한 것이다. 아마도 요한 복음서의 저자의 시대보다도 더 나중의 시대로 보는 학자들이 많이 있다. 곧 고별 담화의 일부를 남겨 놓은 요한의 뒤를 이어 이 부분을 첨가한 편집자의 시대로 보는 것이다. 반드시 편집자의 추가설을 비판 없이 따를 수는 없다. 고별 담화의 처음 부분부터 파라클레토스에 관한 말씀이 일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크거나 작거나 위기를 당하면서 어려움에 빠지게 된 제자들에 관한 말씀이 처음부터 일관되어 있다.
요한복음서의 마지막 단계가 기록된 시대가 기원 70년이 지난 다음이라는 것은 더 말할 여지가 없고 다른 복음서들이 기록된 시기보다도 아주 늦은 시대로서 예수의 목격자의 역할을 하던 제자들이 사라져 가던 때였으리라는 데 많은 의견들이 모아진다. 크리스천들은 유대인들의 회당에서 추방되어 유대인들과 대립이 되고 또한 낯선 이방 세계의 우상 숭배와도 맞서게 됨으로써 법정에 끌려가 재판을 받게 되고 죽임을 당하는 위험에 빠지게 된 상황에 처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법정에서 재판을 받게 될 때에 재판 받는 크리스천들을 변호해 주는 이가 있어야 한다. 이미 공관복음의 전승 가운데는 성령이 변호하는 증인이 되어 주신다는 것이다. 크리스천들이 총독들과 왕들 앞에 끌려가서 재판에 넘김을 받게 되리라는 것이다. 그때에 무슨 말을 할까 걱정하지 말라는 것이다. 말하여 주시는 이가 그들 안에 계시다는 것이다. 그들 안에서 말하여 주시는 이는 “하나님의 영” 곧 성령이시라는 것이다. 성령을 파라클레토스라고 표현한 것은 공관복음서 전승의 성령과 잘 부합된다. 그 말이 법정에 해당하는 용어이기 때문이다. 피고인을 도와주는 사람으로서 변호인을 의미한다. 피고인의 증언을 돕는 것이다.
공관복음의 전승을 참작하면 성령이 그와 같은 역할을 한다. 성령은 법정에 선 신도들의 마음 속에서 역사 하는 영이시다. 영적인 활동이시다. 인물로 나타나는 인격적 존재가 아니다. 요한의 파라클레토스도 이 경우에 있어서 진리의 영이시라고 한다. 물론 법정에서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증인은 구체적인 인물, 제자들이다. 그들이 주님에 대한 실제의 목격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증인은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진리의 영이시라고 요한은 말한다. 파라클레토스를 가리킨 것이다. 파라클레토스는 영이시다. 법정에 선 신도들의 마음 속에서 지혜를 주시는 영적인 활동이시다.
파라클레토스는 이와 같은 박해와 위기 극복의 문제와 밀접한 관련을 가진 것이다. 이런 상황을 참작함으로써 파라클레토스의 의미를 올바로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박해 상황은 묵시 문학과 쿰란과 같은 후기 유대교의 종말 사상을 불러일으킨다. 그들의 종말 사상에 따르면 세상은 악한 세력의 지배 아래 있고 선한 성도들은 그들에게 핍박을 받는다. 그리고 불의한 세상의 세력이 현세에서는 더 강하다는 것이다. 요한의 크리스천들도 같은 경우에 처해 있다. 대단히 무서운 세상의 힘의 위협 아래서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같이 무서운 탄압의 힘 아래서 사람은 올바른 길을 선택할 용기를 갖기가 매우 어려운 것이다.
후기 유대교의 묵시 문학 사상의 중점이 여기에 있다. 많은 사람들은 불의의 길을 택하게 된다는 것이다. 후기 묵시 사상은 전리의 영이 성도들의 마음을 바로 인도해 주어서 의로운 길을 택할 수 있는 용기를 갖게 하여 주는 것이라고 믿는다. 참 예언자의 정신을 택하게 되는 것이다. 위기가 닥쳐왔을 때는 거짓 예언자들이 많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거짓 영을 따른 사람들은 거짓 예언자들을 따르게 되며 참된 길을 배반하게 된다. 박해에 직면한 크리스천들의 입장도 이와 다를 바가 없다. 공포에 못 이기고 힘의 세력에 끌려가게 되며 거짓 예언자를 따라서 믿음의 길을 배신하게 되는 것이다. 파라클로토스는 그같은 기로에 서 있는 신자들의 마음을 올바르게 이끄는 영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파라클레토스는 신도들을 바르게 인도하는 “진리의 영”이시다. “보혜사 곧 진리의 영이 오시면?앞으로 올 일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라고 한다(16:13).
순교의 위험도 있었다. 박해에 관한 고별 담화문 가운데는 제자들이 최악의 경우에 순교를 당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 누구의 도움이 없이는 그럴 때에 신앙을 지키기 어려운 것이다. 그리스도를 증언하지 못하고 믿음을 버리게도 된다. 그럴 때에 굳게 설 수 있는 용기를 가질 수 있게 하는 도움이 필요하다. 파라클레토스가 바로 그런 일을 하여 주신다. 순교의 죽음을 보여 주신 그리스도 자신이 그 파라클레토스의 역할을 하시는 것이다. 그가 죽음을 받아들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 보이신 것을 본을 삼아 크리스천들은 마음으로 분발할 수 있게 하시는 정신적인 본보기가 되신 것이다.
2. 주님의 강림
초대 교회는 주님의 재림을 기다렸다. 요한 복음서도 다름이 없다. 초대 교회의 전승을 따라 주님은 다시 오실 것이라는 믿음을 받아들이고 있다. 초대 교회의 전승에 따르면 예수가 주님이시다. 주님은 인자의 모습으로 강림하신다. 오셔서 심판하신다. 불의한 사람들을 벌하시고 성도들을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신다. 그 날이 종말의 날이다. 그리고 그 종말의 날은 멀지 않은 미래에 오리라고 믿었다. 요한이 그런 미래의 종말 사상을 버리지는 않았으리라고 본다. 그러나 요한이 복음서를 완성하였을 때까지도 그 종말의 날은 아직 오지 않았던 것만은 확실한 사실이다. 아직도 요한에게는 재림이 미래의 가능성으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머지 않아 다시 오시리라는 주님의 강림이 이렇게 지연된 것이 요한의 공동체에 있어서는 난처한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는 것이 브라운의 추측이다.
재림의 지연이 가져다주는 문제에 대해서 전승의 자료에 근거를 가지고 브라운은 그 때의 역사를 재 구상해 보았다. 기원 70년이 지나간 다음까지도 주님은 오시지 않았다. 하나님의 심판이 나타나서 예루살렘은 멸망하였지만 주님은 오시지 않았다. 분명히 주님이 오실 때는 제자들 가운데 더러는 살아남아 있으리라고 말씀하셨는데(막 13:30, 마 10:23) 그리고 요한 공동체에 있어서 최소한 예수님이 사랑하시던 그 제자가 죽기 전에 오시리라고 믿었는데(21:23) 주님은 오시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제 그 제자마저도 머지 않아 세상을 떠나던지 혹은 그렇지 않으면 이미 떠나 버렸던지 하였으리라는 것이다. 주님에게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는 말을 하면서 교회의 일각에서는 재림이 지연되는 까닭을 그런 대로 적당하게 설명하기도 하였지만 요한의 공동체는 더 만족스러운 해석을 제공하였다는 것이다. 요한 복음서를 쓰신 분은 미래의 재림을 포기하지는 않으면서 이미 재림의 사건이 파라클레토스의 오심으로 실현되고 있다는 설명을 하였다는 것이다.
재림의 때에 있게 될 심판이나 인자의 나타나심이나 또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일들이 예수와 함께 그의 생존 시에 나타나셨을 뿐만 아니라 파라클레토스 안에 나타나 계시며 그를 통하여 이미 활동하고 계신 것이라고 말하였다는 것이다. 크리스천들이 하늘만 바라보며 다시 오실 인자를 기다릴 것이 아니다. 요한의 해석에 따르면 파라클레토스의 오심을 통하여 예수는 모든 신자들의 마음 속에 현존해 계신 것이라는 것이 브라운의 판단이다.
고별 담화문을 살펴볼 때 브라운의 판단은 옳은 판단이다. 제자들을 남겨 놓고 떠나시는 예수의 떠나심이 제자들에 있어서는 심각한 문제이다. 그들의 마음 속에 슬픔이 가득했다고 한다(16:5-6). 그 때의 예수는 제자들을 위로하시며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16:7). 부재 중의 예수는 곧 보혜사의 오심으로 대치가 된다. 보혜사의 오심으로 곧 예수의 부재의 문제는 해소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바로 그 무렵에 제자들은 예수를 다시 보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첨부하신다(16:16). 예수를 다시 보게 되는 때는 이별의 때로부터 먼 훗날이 아니다. “조금 있으면”이라는 짧은 시간이 지난 다음이다. 곧 사흘만에 부활하신 부활의 주님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 때의 보혜사 곧 진리의 영이 오신다는 것이다. 곧 보혜사가 오시면 예수의 부재로 말미암아 슬픔에 쌓여 있던 제자들의 슬픔이 기쁨으로 변할 것이라고 하신다. 곧 부재 중의 예수가 보혜사의 오심으로 임재 중의 예수가 되신다는 뜻이다.
결국 요한에 의하면 주임의 오심과 파라클레토스의 오심은 동일한 때가 된다. 요한복음서 기록 당시의 시점에서 볼 때 이미 과거가 되어 버린 현재이다. 곧 오시리라고 약속하신 주님은 파라클레토스 성령을 통하여 이미 제자들 마음 가운데 들어와 계신다. 파라클레토스는 요한 식(式)의 파루시아(來臨)이다. 파루시아의 주님은 부활의 주님이시다. 파라클레토스는 동시에 요한의 오순절인 것이다. 주님의 재림은 요한의 방식의 오순절로 앞당겨진 것이다. 보혜사 성령 곧 진리의 영이 오시면 이미 주님은 제자들의 마음 속에 임재해 계시게 되며 제자들은 동시에 예수 안에 거하게 되고 하나님은 또한 예수 안에 거하신다는 것이다.
파라클레토스가 오실 때 심판은 이미 현재의 사건이 된다. 심판이란 주님이 재림하실 때 일어나리라고 기대되었던 사건이다. 다시 말하면 재림의 때에 일어날 일들이 이미 과거에 이 땅에 오신 예수를 통해서 이루어졌거나 현재의 사건이라는 것을 파라클레토스가 깨닫게 하여 주시리라는 것이다. 보혜사(파라클레토스)가 오시면 “세상 사람들이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잘못 생각하고 있음을 깨우쳐 주실 것”(16:8)이라고 한다. 죄는 과거의 죄를 가리킨다. 세상이 예수를 믿지 않았다고 하는 예수 당시의 일들을 말한다. 의에 대해서라는 것은 예수가 하나님의 의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셨다는 과거의 사건을 가리킨다. 심판도 역시 세상 통치자가 이미 심판을 받은 완료된 사건으로 보고 있다(16:9-11). 파라클레토스를 통하여 신자들은 재림하시는 주님을 현재적으로 체험한 셈이 되는 것이다. 요한에게 있어서 성령 체험은 곧 그리스도의 현존하심을 체험하는 것이다. 파라클레토스 성령이 약속해 주는 것은 과거에 오셨던 그리스도와 앞으로 오실 그리스도를 동시에 만나게 되는 일이다. 기억을 통하여 과거의 그리스도와 그의 가르치심을 되새기며 아울러 미래에 오시는 재림의 주님의 심판도 이미 이루어진 현실로 신자들이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보혜사가 하는 일은 신자들이 생활 속에서 다시 오시는 그리스도를 만나게도 되며 이미 세상에 오셨다 떠나가신 육신의 예수와도 기억이나 증언을 통해 접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체험은 영적인 체험이다. 영적인 체험을 말하는 것이지, 결코 육체적인 경험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재림하시는 주님을 만나는 일도 영적인 체험이다. 또한 과거의 주님을 만나게 되는 것도 영적으로 체험하는 체험이다. 다른 보혜사가 올 때 “세상은 그를 볼 수도 없고 알 수도 없기 때문에 그를 맞아들일 수가 없지”마는, 신자들은 “그를 알고” 있는 까닭에 그가 신자들과 “함께 계시고” 또 “그들이 그 안에 있게 될 것”이라고 요한은 말한다(14:17). 이것은 영적인 만남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그가 너희와 함께 계시고 또 너희가 그 안에 있는 것”이라고 한다.
요한복음서가 기록될 당시의 요한 공동체의 특수한 상황을 알아보지 않고서는 이와 같은 재림의 현재적이고도 영적인 체험을 쉽게 이해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요한이 이 글을 기록하였을 무렵에는 예수를 목격했던 사도들은 하나 둘 세상을 떠나게 되었으며 살아 있는 증인들이 끊어지게 되었고 마지막 목격자의 구실을 하여 오던 요한 공동체의 지도자마저도 죽음을 당했거나 죽음이 임박했던 때였으리라는 것이다. 그때의 요한 공동체의 신자들이 당면하게 된 문제는 예수와의 단절이다. 더이상 실제의 예수를 증언해 주는, 살아 있는 증인들의 음성을 들을 수 없게 되면서 역사적인 예수와의 거리가 멀어져 가게 되었으리라는 것이 그 당시의 특수한 상황이다. 박해와 위기에 처해 있던 신자들에게 용기와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하는 것이 새로운 문제가 된다.
파라클레토스의 역할은 바로 그런 것이다. 법정에 나선 그들을 변호해 주며 희망과 용기를 주는 것이 보혜사가 하는 일이다. 죽음의 위험 앞에서 승리를 거두신 그리스도만이 그들에게는 유일한 힘이 되신다. 보혜사 곧 파라클레토스는 이미 사도들을 통하여 그와 같은 그리스도를 증언하셨다. 사도들이 떠나감으로써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이 더욱 더 절실해졌을 것이다. 때로는 사도들을 계승한 교회의 지도자들을 통해서 또는 신자들의 마음 속에 보혜사 성령은 예수와의 만남을 되찾아 주신다. 요한 공동체의 존재 의식은 바로 그리스도 신앙에 바탕을 두는 성령의 역사에 둔 것이다. 요한은 누구보다도 이것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다는 것이다. 슈낙켄버그를 비롯한 많은 학자들은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다. 요한에게 있어서 성령은 그 어떤 열정적인 체험보다도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되찾는 일에 힘을 기울였으며 진리의 영으로써 신자들의 마음 속으로 다가오며 영적 체험과 형제 사랑을 높이는 방향으로 성령은 신자들의 마음을 이끌어 간 것이라고 보았다. 요한의 성령은 믿는 성도들의 마음 속에서 활동하시는 영적인 활동이시며 영적인 활동은 신자들의 마음 속에서의 그리스도의 현존하심을 체험케 하고 항상 그리스도의 가르치심을 일깨워 주시는 것에 역점을 두고 있다. 이것이 요한의 파라클레토스로서의 성령의 특징적인 점이다.
V. 맺는 말
파라클레토스에 대한 다각도의 관찰을 통해서 요한의 독특한 성령 이해를 알 수 있게 되었다. 요한은 성령에 관해서 새로운 해석을 보이고 있다. 신약 성경 가운데서 유일하게 요한 만이 파라클레토스라는 이름으로 성령을 말한다. 초대 교회의 널리 알려진 성령관과 비교해 볼 때 새로운 면을 보이고 있다. 초대 교회의 성령 이해를 수정하면서 새로운 해석을 요한은 제공한 셈이다.
요한 복음서가 기록된 시절은 초대 교회가 창립된 이후로부터 많은 세월이 흘러간 다음이었다. 그 동안에 교회는 선교를 위하여 보다 넓고 새로운 세계로 진출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초대 교회의 성령 체험의 상태에 있어서도 그 새로운 세계에 적응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하였을 것이다. 또한 요한의 교회가 그 새로운 세계에서 인정을 받고 용납되기에 충분하도록 요한은 건전한 성령관을 정립한 것이다. 성령 운동은 건전하고도 확실한 바탕 위에서야 한다는 것이 요한의 의견이다. 성령의 근거는 성경과 그리스도에게 있다. 고별 담화문 가운데에서의 요한은 성경적 근거를 중요하게 여긴다. 담화문의 구조나 사상이 구약의 유형을 따르고 있다.
요한에게 있어서 성경은 구약 성경을 가리킨다. 구약에는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시다. 메시아나 또는 모세나 엘리아와 같은 민족의 지도자나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영을 받아 위대한 업적을 나타냈던 것이다. 그들이 세상을 떠날 때에도 같은 영을 후계자들에게 물려준다. 후계자들은 스승이 가졌던 그 하나님의 영을 물려받는 것이다. 요한의 예수도 구약 성경과 부합된다. 하늘로부터 보내 주시는 하나님의 영을 받으시고 그 영을 따라 예수는 말씀을 가르치시고 행하신다. 예수께서 세상을 떠나실 때에 그 하나님의 영을 제자들에게 물려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은 그리스도를 떠나서 있을 수도 없으며 생각할 수도 없는 것이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을 근거로 해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 하시던 하나님의 영을 계승해야 한다. 크리스천의 그리스도를 근거로 한 성령인 것이다. 때때로 초대 교회 안에서는 그리스도의 가르치심에 근거를 두는 것과는 상관없이 성령 충만의 체험을 내세우는 경우가 많이 있었다. 이를테면 하나님으로부터의 직접적인 은사를 주장하며 은사의 능력을 과시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적과 기사를 보이며 방언을 하는 카리스마의 능력 과시에 치중하였고 그리스도의 말씀과 행적에 나타난 윤리와 도덕을 이차적인 것으로 미루어 놓는 경향을 보였다.
요한은 눈길을 예수에게로 향하게 한다. 파라클레토스라는 용어가 적절한 표현이다. 파라클레토스는 중보자라는 의미도 되며 변호인, 증인, 그리고 권면 하는 이라는 뜻을 가진 이름으로서 요한이 묘사하는 그리스도상에 부합하는 적절한 표현이 된다. 파라클레토스의 역할은 항상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다. 그리스도를 증언하며 그의 가르치심을 기억나게 하며 그가 명하신 계명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당부한다. 파라클레토스 성령이 오시면 신자들이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신자들의 마음 속에 그리스도가 항상 함께 계시리라는 것이다. 요한에게 있어서 파라클레토스는 예수께서 육신으로는 제자들을 떠나 계시지만 영으로 함께 하심을 뜻하는 것이다. 파라클레토스는 그리스도를 대신해 주는 존재가 된다. 이미 세상에 오셨던 예수가 파라클레토스이셨던 것처럼 앞으로 오시는 보혜사 성령도 또다른 예수이시다. 성령 체험은 예수의 임재하심을 체험하는 것이다.
초대 교회 신자들은 떠나시는 예수를 멀리서 바라보며 다시 오시는 그 날만을 기다렸다. 성령은 받아도 예수는 부재 중이신 것으로 알았던 것이다. 요한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다시 오실 미래의 그리스도마저도 파라클레토스의 오심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이미 맞이하게 된 만남이 기정 사실이 된다. 이렇듯 파라클레토스 체험 곧 성령 체험은 그리스도 체험이어야만 하고 그리스도를 근거하는 체험이라야 하는 것으로 본 것이다.
그리스도를 근거로 한 요한의 성령은 윤리적 교훈에 중점을 두고 있다. 성령 체험과 영성 생활에 있어서 윤리적 실천을 무엇보다도 중요시한 것이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가르치심을 기억하고 실천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긴다. 서로의 사랑을 실천하라는 그리스도의 계명에 초점을 두었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몸소 실천하신 일들을 본받아 행할 것을 일러주신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내어 주신 그리스도를 본받아 박해와 위기를 극복해 나가야 할 것을 일러주신다. 실현된 종말론과 결부되었을 때도 윤리적인 문제에 민감하다. 죄에 대하여, 또는 의에 대하여 심판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보혜사 성령은 영이시다. 하늘의 천사와 같은 인격적 존재를 의미하지 않았다. 초대 교회 시대에는 그같은 천사의 존재를 믿었던 것이 사실이다. 보혜사 곧 파라클레토스나 중보자로서의 성령을 인격적 존재로 보는 경향도 없지 않았다. 요한은 이런 풍조를 배격한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시다. 그리스도의 생애와 교훈을 통해 나타나신 하나님의 영이시다. 신자들의 마음 속에 활동하시는 영이시다. 파라클레토스는 믿음의 안내자이다. 파라클레토스로서의 성령은 세상을 유혹을 경계한다. 특별히 믿음의 길을 택함으로써 일시적인 역경을 헤매게 되는 성도들에게 다가오는 유혹이다. 신앙을 버리고 일시적인 영광을 택하는 유혹이 많다. 성령은 이와 같은 성도들의 마음 속에 올바른 판단을 갖게 한다. 보혜사 성령을 진리의 영으로 불렀다. 진리의 영은 예언자들이나 믿는 성도들의 마음 속에 바른 판단을 하게 하는 하나님의 영이시다. 진리의 영은 환상적인 묵시 문학적인 종말 사상을 교정한다. 묵시적인 종말 사상을 따라 많은 거짓 예언자들이 범람하였다. 그들은 성도들을 당혹하게 한다. 진리의 영으로서의 성령은 거짓 예언자들을 식별하는 것이다. 거짓 예언자들의 영을 분간한다. 성령은 바르고 정통적인 신앙적인 신앙을 택하게 하는 인도자의 역할을 한다. 정통적인 신앙은 육신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스도의 생애와 가르치심에 기초한 신앙을 말한 것이다. 그리스도가 최후의 승리자시라는 것을 믿게 하는 믿음의 안내이다.
이상과 같이 요한이 말하는 보혜사 성령은 강조점에 있어서 수정된 것이 많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서 요한은 수정할 것을 수정하였다. 초대 교회의 원시성을 벗어버리고 변화와 개혁을 통하여 성령의 올바른 이해를 정리하였다. 올바른 이해란 근거를 찾는 일이다. 성령은 어디에 근거를 두어야 올바른 성령 이해가 되는 것인가? 그리스도의 생애와 가르치심에 근거를 두어야만 올바른 성령 체험이 될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계명을 실천하는 윤리가 뒤따르는 것이 성령 체험의 올바른 길이다. 이것이 요한의 견해인 것이다. 이것이 마땅히 자리를 굳혀 가는 성숙한 단계에 이른 교회가 가져야 할 단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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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호 교수
출처 : 예수 코리아
글쓴이 : 예수코리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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