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학

[스크랩] 이신칭의 교리 500년

수호천사1 2019. 2. 1. 11:01

이신칭의  교리  500년


1 서론 

루터가 시작한 종교개혁은 처음 그리스도교의 복음 선포만큼 인류역사에 새로운 기원을 세웠다. 그리스도교의 시작에 전도자들은 죄로 죽음뿐인 세상에 처음으로 죽음을 벗어나 생명에 이르고 영생에 이르는 복음을 선포하였다. 복음 선포를 받은 많은 사람들이 죽음에서 생명에 이르고 악의 세력에서 놓여나 참 자유와 해방을 누리며 구원의 기쁨 속에 살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은 기쁨과 감격과 평화와 생명의 약동을 가져왔다. 성령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게 하셨기 때문이다. 복음 선포에 핍박과 박해가 끊임없이 동반하였어도 복음 선포는 계속되었다. 많은 전도자와 믿는 자들이 죽임을 당하고 고문당했어도 복음 선포는 계속되었다. 그래서 믿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교회가 많이 세워졌다. 

그러나 교회가 번창하고 제도화되면서 은혜의 선물로 받았던 구원이 인간이 획득해야 할 사항으로 변해갔다. 의 곧 구원을 받으려면 그에 합당한 자격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 되었다. 선행으로 의롭다함을 받을 자격을 얻어야 한다. 그러면 의 곧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쳤다. 

이 가르침이 교회를 완전 정복하므로 백성들은 교회의 지배와 횡포에 한 숨 쉬며 평안과 영생을 얻을 수 없었다. 날이 갈수록 구원을 획득하기 위한 노력이 가중되어 교회에 구원의 기쁨이 없어졌다. 인간의 노력과 사랑의 수고가 의와 영생을 결정한다고 믿어졌기 때문이다. 

세례 받을 때 믿음은 구원하는 믿음이 아니고 믿음의 가능성이라고 할잠재신앙 (fides implicita) 혹은 토마스의 제시대로 비형성적인 믿음 (fides informis)이라는 것이다. 이 믿음이 나를 구원하는 믿음이 되려면 사랑의 선행으로 잠재신앙을 활성화시켜야 한다. 그래야 그 믿음이 구원하는 믿음 (fides salvifica)이 된다. 은혜로 얻은 믿음은 잠재신앙이어서 나를 구원할 수 없다. 사랑의 선행으로 잠재신앙을 활성화시켜야 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객관적 구원은 이루어놓으셨지만 그것을 내 것이 되게 하는 일은 내가 다해야 한다. 사랑의 선행과 고행과 금욕 등이 나를 의롭게 만든다. 의롭게 되는 일을 할 때 하나님은 돕는 은혜는 주시지만 내가 일은 다해야 한다. 은혜는 돕고 내 본성이 일을 이루어내므로 그것이 공로가 되어 내 구원을 획득할 수 있다. 의롭게 되기 위해서 하는 선행과 금욕과 고행은 말로 할 수 없는 고역이었다. 그런대도 내 구원은 멀어지기만 했다. 

이렇게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말할 수 없는 고통과 고뇌를 당하며 신음할 때 하나님은 루터를 세우셔서 믿음으로만 구원에 이른다는 진리를 굳게 세우게 하셨다. 

그러나 오직 믿기만 하므로 구원에 이른다는 진리는 많은 반대와 배척을 불러일으켰다. 다. 종교개혁 자체 내에서도 반대와 반발이 일어났다. 그리하여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진리에 수정을 가할 정도가 되었다. 

그 후 웨슬리의 감리회 운동은 종교개혁의 이신칭의 교리를 근본적으로 부정하고 로마교회의 구원방식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20세기 후반에도 바울에 관한 새 관점이란 주제로 이신칭의 교리를 바꾸는 학적 작업이 성경학자들에 의해서 깊고 넓게 전개되었다. 새 관점을 제시하는 사람들은 믿음에 행함을 더해야 완전한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얼마나 그릇된 가르침인가? 종교개혁을 완전히 무로 돌리는 작업을 주석과 새로운 해석으로 이 일을 시도하고 있다. 이런 가르침은 갈라디아서의 가르침에 의해서는 저주받을 복음이다. 다른 복음이다. 다른 복음은 없고 오직 복음을 변질시키는 것뿐이다. 

2 이신칭의 교리의 확립 

2.1 로마교회의 신학적 정립 

로마교회가 믿음과 선행을 합해야 확실한 구원을 얻게 된다고 가르치므로 사람들이 선행과 금욕과 고행을 열심히 실행하였다. 공로가 되는 것은 선행과 금욕과 고행만이 아니었다. 큰 액수의 헌금은 연옥에서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천국으로 보낼 수 있다고 가르쳤다. 그리하여 면죄부를 발매하였다. 

이런 교회의 행습을 토마스 아퀴나스가 신학적으로 정립하였다. 그는 의롭다함을 받으려면 그에 합당한 자격을 갖추어야 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르침을 신학에 도입하였다. 

2.1.1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 규정 

로마교회의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의는 자격에 따라 공동체의 선을 배분하는 것으로 정하였다 (Nichomacheia Ethica, V, iii, 7-8). 그는 정의와 불의가 있는데 두 극단의 중도가 정의라고 규정하였다 (Nichomacheia Ethica, V, i, 1-2). 불의는 첫째로 법을 깨뜨리는 것이고 둘째는 자기의 몫 이상을 취하는 것이다. 그럼 의는 공평한 분배 혹은 공정함이다 (NE, V, I. 8-12). 자기 몫 이상을 취하는 것을 불의라고 규정하면 (NE, V, ii, 2-5) 정의도 분배의 기준이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분배할 때 공동체 회원들 간에 동등한 몫으로 나누거나 부동등한 몫으로 나누게 되기 때문이다 (NE, V, ii. 13-iii.1). 분배의 경우 불의는 부동등이고 정의는 동등이다 (NE, V, iii.2-6). 분배를 받을 두 사람이 동등하면 같은 몫을 배당해야 하고, 동등하지 않으면 같은 몫을 가질 수 없다. 동등한 사람들이 합당한 배당을 받지 못하고 동등하지 않은 사람들이 동등한 몫을 배당받으면 싸움과 불평이 일어난다 (NE, V, iii. 5-6). 

그러므로 분배할 때 일종의 자격에 근거해야만 하므로 자격에 의해서 배당하는 것이 정의라고 규정하였다 (NE, V, iii. 7-8). 이 정의의 개념을 칭의 개념에 적용하여 구원의 법을 완전히 바꾸었다. 

2.1.2 토마스의 의의 규정 

토마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를 받아들여 의의 개념을 거의 비슷하게 정의하였다. 정의는 자기의 권리를 자기에게 배정하는 것이고 빚진 것을 해당자에게 돌리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Summa Theologica, III, quaestio 58 articulus 1, a3, a4). 

그는 의의 행동도 동일하게 정의한다. 합당한 의의 행동은 자기에게 자기의 몫을 되돌리는 것이다 (ST, III, q58a11; 961a1). 더구나 공동의 선을 분배함에 있어서는 개인의 권위에 맞아야 한다 (ST, III, q61a1. 2). 곧 의는 자기에게 자기의 권리를 돌리는 것이다. 의의 행동도 자기에게 자기의 몫을 되돌려주는 것이다. 선을 분배할 때도 개인의 권위에 맞아야 한다고 하였다. 

이런 의의 개념을 구원받음 혹은 칭의에 적용하면 자격에 의해서 합당한 몫을 받는 것이다. 따라서 선물로 곧 은혜로 의를 받는 것은 성립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의롭다함을 받으려면 합당한 자격을 갖추어야 한다. 

이런 의의 개념에 근거해서 로마교회가 선행에 의해서 의롭다함을 받는 것을 칭의의 법으로 정하였다. 이 가르침을 따라 로마교도들은 선행과 금욕과 고행을 해서 자격을 갖추어 의를 얻으려고 전력하였다. 그러나 이 가르침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지 않았고 사람의 사고에 근거했으므로 구원을 얻기 위해서 노력하면 할수록 구원에서 더 멀어져갔다. 그래서 고통과 마음의 불안은 더 심해졌고 결국 죽을 때 교회의 판정에 의존하는 길 밖에 없게 되었다. 

2.2 루터의 이신칭의 

루터는 로마교회의 가르침대로 행하였다. 그러나 그는 고행과 금욕으로 결코 의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믿음으로 의로운 자가 산다는 말씀 (합 2:4)을 익히 알았어도 교회의 가르침과 관습을 벗어날 수 없었다. 늘 선행을 하고 고행을 하여도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없었다. 선행을 행해도 심판주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는 판정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절감하였다. 하나님은 자격에 미달하는 루터를 칼로 치려고 서계시는 분이셨다. 하나님은 심판주이시고 은혜로운 구원주이실 수 없었다. 그래서 루터는 내가 어찌하면 은혜로우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까 하는 절규를 계속 하였다. 자기의 행함으로는 결코 의롭다함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도 밝히 깨달았다. 

그러던 중 로마로 가서 무릎으로 피 흘리며 사닥다리를 기어오르는 고행을 할 때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것을 확신하였다. 그래서 믿음으로 의를 얻으면 전적으로 은혜로 얻는 것이므로 (sola gratia) 인간의 공적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확실히 깨달았다. 

이 깨달음으로 루터는 로마교회를 이탈하고 종교개혁을 할 수 있었다. 로마교회에 대항해서 루터가 목숨을 건 도박을 하였다. 공로로 구원 얻는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만 곧 전적으로 은혜로만 구원에 이른다고 주장하여 종교개혁을 단행하였다. 

믿음과 행함으로 구원 얻는 것이 아니고 구원은 전적인 선물이라고 외쳤다. 곧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므로 믿기만 하면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주창하였다. 행함과 공로를 전적으로 배척하였다. 구원이 은혜의 선물이므로 믿기만 하면 의롭게 된다. 하나님의 은혜와 믿음만이 모든 것이 되었다. 그리하여 이신칭의 교리가 확립되기 시작하였다. 

그의 구호는 오직 믿음 (sola fide)으로 오직 은혜 (sola gratia)로 였다. 이 구호는 로마교회의 가르침의 심장부를 꽂았다. 이 구호로 로마교회가 무너지지는 않았지만 로마교회를 강타하여 교회가 나뉘게 되었다. 하나의 교회가 둘로 셋으로 분열되어 통일 교회가 분리된 교회가 되었다. 교회의 단일 통치가 그리스도의 통치로 옮겨졌다. 

이신칭의 교리는 인간 스스로 하늘에 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품에 안아 하늘에 이르게 하는 것임을 만천하에 밝혔다.

2.2.1 이신칭의 교리의 확립 

루터는 이신칭의를 교회의 서고 넘어짐의 조항 (articulus stantis et cadentis ecclesiae)으로 세웠다. 종교개혁 교회가 일치해서 이신칭의를 교리로 세우므로 종교개혁 교회의 교리가 되었다. 

루터는 죄인이 율법의 행함 없이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확신 (엡 2:8-9; 롬 1:17; 5:1; 갈 3:11; 히 10:38)을 많은 투쟁을 통해서 얻게 되었다. 의란 하나님이 죄인을 의롭고 합당하게 벌주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라고 단언하였다. 의는 사람이 자기의 노력과 공로로 획득하는 것이 아니다. 죄인이 할 일은 오직 그리스도의 구원을 선물로 받아들이는 것뿐이다. 

칭의란 하나님의 법정적인 행동이다. 이로써 하나님은 주 예수를 믿는 죄인을 무죄라고 선언하시고 그에게 그리스도의 의를 주신다. 오직 그를 믿는 믿음에 근거해서 그렇게 하신다. 의롭다함을 받은 자들은 선한 행실들로 그 생명과 능력을 드러낸다. 그것은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는 것과 같다. 선행과 거룩한 삶은 믿음의 필수적인 현시이다.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의 교리가 복음의 총화이고 실체이다. 이 교리가 기독교의 핵심이고 교회의 서고 넘어짐의 조항이다. 기독교 전체가 모여서 결정하지는 않았지만 종교개혁교회 곧 루터교회와 개혁교회는 지역별로 모여서 신앙고백서 (confessio fidei)를 작성하였다. 행함이 아니라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진리를 교리로 채택하였다. 

2.2.1.1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서 (Confessio Augustana, 1530) 

루터의 종교개혁 후 1530년 처음으로 종교개혁교회가 아우구스부르크에 모여 이신칭의 교리를 채택하였다. 

공로나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받을 수 없고 오직 은혜로 의롭다함을 받는다. 그리스도가 대신 속죄로 우리의 죄를 다 용서하셨기 때문에 죄용서를 믿기만 하면 의롭다함을 받는다. 

4조: 교회들은 가르친다. 곧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그들의 능력이나 공로나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받을 수 없다 (죄용서와 의롭다함을 얻을 수 없다). 그러나 사람들이 자기들이 은혜로 받아졌다고 믿으면 또 그리스도가 그의 죽음으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셨기 때문에 그리스도로 자기들의 죄가 용서되었다고 믿으면 값없이 (은혜로) 의롭다함을 받는다. 이 믿음을 하나님은 자기 앞에서 의라고 여기신다(롬 3장과 4장)

2.2.1.2 일치공식 (formula concordiae, 1580, 혹은 1576)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서 후에 신학자들 사이에 시비가 된 부분들에 대해 일치를 보아 일치공식을 작성하였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하나님 앞에 의롭다함을 받고 구원받는다. 

3조: 하나님 앞에서 믿음의 의에 관하여 (De Justitia Fidei Coram Deo) 만장일치에 의해 (하나님의 말씀의 규칙과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서의 판단에 따라) 우리 교회에서 가르친다. 곧 우리 가장 비참한 죄인들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받고 구원 받는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의이다. 

2.2.1.3 제 2 서서 신앙고백서 (Confessio Helvetica Posterior, 1566) 

죄인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받고 행함이나 공로로 말미암아는 전혀 의롭다함을 받지 못한다. 

제 15 장 신자들의 참된 칭의에 관하여 (De Vera Fidelium Justificatione) 1. 의롭다함은 칭의에 관한 시비에서 사도에게는 죄들을 사하는 것과 죄과와 형벌을 면제해주는 것과 은혜로 받아들이는 것과 의로운 자라고 공포하는 것을 지시한다. 2. 그런데 우리 모두는 본성으로 죄인들이고 악행한 자들이며, 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악행한 자로 정죄받고 또 죽음에 해당하는 자들로 정죄되었음이 가장 확실하다. 의롭다함을 받음은 곧 심판주 하나님으로부터 죄와 죽음이 면제된 것은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은혜으로이고 어떤 우리의 공로나 고려 때문이 전혀 아니다. 3. 사실은 그리스도가 세상의 죄들을 자기에게로 받아지시고,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오직 고난 받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와 화해하셨다. 우리의 죄를 우리에게 전가하지 않으시고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의 것으로 전가하셨다. 

이렇게 우리는 죄에서 깨끗하게 되었고 씻어졌고 거룩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가 주어졌으며 죄와 죽음과 정죄에서 놓여났으며, 의로운 자들이 되어 영생의 상속자들이 되었다. 더 합당하게 말하면 하나님 한분만이 우리를 의롭다고 하시고 정확하게 말하면 그리스도 때문에 우리를 의롭다고 하신다. 그는 우리에게 죄들을 전가하시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하신다. 

4. 우리는 이 칭의를 받되 어떤 행동들로 말미암아서가 아니고 하나님의 자비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받았으므로 죄인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의롭게 되고 율법이나 어떤 행함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님을 사도와 함께 가르치고 믿는다. 

2.2.1.4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Heidelberg Catechismus, 1563) 

내가 의롭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의를 믿음으로만 된다. 우리의 선행은 결코 우리를 의롭다고 할 수 없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61-62 문답에서 믿음으로만 의롭게 됨을 밝히고 있다. 

문 61. 왜 당신은 믿음으로만 의롭다고 말합니까? 라고 묻는다. 

답. 나는 믿음의 가치 때문에 내가 하나님께 마음에 들 만하게 되는 것이 아니고 오직 그리스도의 배상과 의와 거룩이 하나님 앞에서 나의 의이기 때문입니다. 또 나는 의를 받되 오직 믿음으로만 받을 수 있고 달리는 결코 내 의로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받으실 우리의 의는 오직 그리스도의 의뿐이고 믿음으로만 의를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친다. 

문 62. 그러나 왜 우리의 선행들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의의 일부나 전부가 될 수가 없습니까? 

답.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수 있는 의는 철저히 완전해야하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법에 일치해야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현재 삶에서 우리의 가장 선한 행위들도 불완전하고 죄로 더럽혀져 있습니다. 

우리의 선행이 하나님 앞에 의가 될 수 없는 것은 우리의 선행은 하나님의 법에 완전해야 하는데 그럴 수 없고 전적으로 일치할 수도 없기 때문이고 더구나 죄로 물들어있기 때문이기 때문이라고 가르친다. 

2.2.1.5 불란서 신앙고백서 (Confessio Fidei Gallicana, 1559) 

그리스도의 완전한 희생제사로 완전히 의롭다함 곧 모든 죄에서 구출되었다. 이 죄용서를 믿는 것이 의이다. 

불란서 신앙고백서는 칼빈이 작성하였다. 

17조: 주 예수가 십자가에서 드린 완전한 희생제사로 우리는 하나님과 화해하였고 그 앞에서 의롭다함을 얻었다고 우리는 믿는다. . . . .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깨끗하게 되었고 완전해졌다는 것을 우리는 선언한다. 그의 죽음에 의해서 우리는 온전히 의롭다 함을 받았고 오직 그로 말미암아서 우리는 우리의 불의와 범죄들로부터 구출되었다. 

그리스도의 죽음 곧 그의 희생제사로만 우리가 의롭게 되었고 모든 죄에서 구출되었다는 것을 강조한다. 

18조: 우리의 모든 칭의는 우리의 죄 용서에만 달려있다는 것을 우리는 믿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받을 수 있는 다른 모든 수단들을 배척한다. 또 어떤 덕이나 공로를 주장함이 없이 우리는 단지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만을 의뢰한다. 

칭의는 전적으로 믿음만으로 이고 모든 다른 수단들 곧 덕이나 공로를 배척한다고 선언하였다. 

20조: 우리는 이 칭의에 오직 믿음만으로 동참자들이 되었음을 믿는다. . . . . 이처럼 믿음으로 말미암은 우리의 칭의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의 사랑을 선언하고 증거하신 값없이 주신 약속들에만 의존한다. 

우리가 칭의에 동참은 전적으로 믿음으로만 된 것이다. 반복적으로 같은 진리를 반복한다. 

2.2.1.6 화란 신앙고백서 (Confessio Belgica, 1561)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우리의 죄가 다 용서되었다. 이것을 믿음으로만 받는다. 

22조; 바른 믿음은 성령이 일으키시는데 그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공로를 받아들이고 그를 자기 것으로 삼으며 그리스도 외에는 어떤 것도 구하지 않는다. 그 안에 모든 것이 다 있으므로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한 자들은 그 안에서 완전한 구원을 가진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는 충분하지 않아서 그 외에 다른 어떤 것이 더 요구된다고 단언하는 것은 총체적 참람이 된다. 그러면 그리스도는 반쪽의 구주가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울과 함께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만 곧 행함 없이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정당하게 말한다. 그러나 더 분명히 말하는 것은 믿음 자체가 우리를 의롭다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우리의 의이신 그리스도를 영접해 들이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소유하는 것은 우리의 완전한 구원을 소유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충분하지 않아서 다른 어떤 것을 더 요구하는 것은 큰 참람이다.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받는다. 그러나 믿음자체가 우리를 의롭다하는 것이 아니고 믿음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도구일 뿐이다. 

23조: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죄들을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사면하는 것임을 믿는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의가 되는 것을 뜻한다. 

또 바울 사도가 말하기를 우리는 그의 은혜로 값없이 곧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받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근거를 굳게 붙들고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고 우리 자신을 그 앞에서 겸손하게 한다. 또 우리 자신의 실상을 인정하고 우리 안에 있는 어떤 것을 신뢰하지 않고 우리의 공로도 의지하지 않으며 오직 십자가에서 하신 그리스도의 순종만을 의지하고 신뢰한다. 우리가 그를 믿으면 그의 순종이 우리의 것이 되기 때문이다. 

2.2.1.7 영국교회 39개조 (Articuli XXXIX Ecclesiae Anglicanae, 1562)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 때문에 그 구속을 믿는 것이 의가 된다. 

11조: 우리는 오직 우리 주와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 때문에 믿음에 의해 하나님 앞에 의롭다고 받아졌다. 그리고 우리의 공로나 우리의 자격 때문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만 의롭게 되었다는 가장 건전한 교리 (doctrina est saluberima)이고 위로가 가득하다. 

우리가 의롭게 된 것은 우리의 공로나 자격 때문이 아니고 오직 믿음으로만 된 것이다. 이것이 가장 건전한 교리라고 단언하였다. 

2.2.1.8 제 2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 (Confessio Fidei Scoticanae, 1580)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받는다. 제 2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는 조항들이 없고 전체로 한 단원으로 작성하였다. 그 중에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받음에 대해서 라고 하여 (de justificatione per solam fidem)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받는 것을 확실히 밝히고 있다. 

2.2.1.9 아일랜드 종교조항들 (The Irish Articles of Religion. 1615) 

칭의와 믿음에 관해서 그리스도가 피 흘리심으로 죗값을 다 지불하셨으므로 우리는 믿기만 하므로 의롭다함을 받는다. 우리의 선행이나 공로는 결코 의롭다함을 받게 할 수 없다. 

34조. 우리는 오직 우리 주와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여겨지고, 우리 자신의 행함이나 공로 때문에 의롭다고 여겨지지 않는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비와 그리스도의 공로로부터 받는 의는 믿음으로 받아들이는데 우리의 완전하고 충만한 칭의를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취해지고 허락받는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의롭다고 여겨지는 것은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공로 때문이고 우리의 공로가 전혀 아니다. 

35조. 이런 칭의가 우리에게 값없이 주어지지만, 속전을 전혀 지불함이 없이 우리에게 값없이 올 수 없다. 하나님은 우리 편에서 속전을 치르거나 배상을 함을 우리에게 요구함도 없이 큰 자비를 나타내시어 우리를 이전의 속박에서 구출하셨다. 이런 일을 우리가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모든 세계가 속전의 일부라도 스스로는 지불하기가 불가능하므로, 무한히 자비하신 우리의 하늘 아버지가 우리는 아무런 자격도 없는데도 자기의 친 아들의 가장 보배로운 공로를 우리 위해 마련하시기를 기뻐하셨다. 이로써 우리의 죗값은 완전히 지불되고 율법은 성취되고 그의 공의는 완전히 충족되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는 그를 진심으로 믿는 모든 자들에게 의이다. 

그는 그의 죽음으로 그들에게 죄에서 사내는 몸값을 지불하셨다. 그는 그의 삶에서 그들 곧 믿는 자들을 위해서 율법을 성취하셨다. 그래서 그 안에서 그에 의해 모든 참된 그리스도인은 율법의 성취자라고 불릴 수 있다. 우리가 연약하므로 할 수 없었던 것을 그리스도의 의가 성취하였다. 이처럼 하나님의 의와 자비는 서로를 포용한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칭의의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의 공의를 막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의를 막아내어 우리 자신의 행함의 의가 우리의 칭의를 정당하게 해주는 원인이 되는 것을 막는다. 

그리스도가 피 흘려 속전을 지불하므로 죗값을 다 갚으셨다. 이것이 믿는 자들에게 의이다. 인간의 공로나 자격은 전적으로 배제되고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이 우리의 완전한 의가 되었다. 

36조. 우리는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고 말할 때 참된 회개, 소망, 사랑과 하나님을 두려워함도 없이 이미 말한 의롭다고 하는 믿음만이 사람 안에 있다는 뜻이 아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이 행동과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그 자체로 우리를 의롭다고 하거나 우리를 의롭게 할 만하게 한다는 것이 아니다. … 우리는 이미 말한 우리의 덕들 곧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공로와 다른 덕과 선행의 공로를 다 버려야한다. 이런 것들은 너무 약하고 불완전하고 불충분해서 우리의 죄용서와 칭의를 받게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사랑하는 아들, 우리의 유일한 구속주, 구주시오 우리를 의롭다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들을 의뢰하는 것뿐이다. 

믿음 자체가 우리를 의롭다고 하는 것이 아니고 또 믿음을 말할 때 회개와 소망과 사랑이 함께 하지만 그런 것들은 우리를 의롭게 할 수 없다. 오직 하나님의 아들 우리의 구속주요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만을 의뢰하는 것뿐이다. 

2.2.1.10 돌트총회의 정경들 (Canones Synodi Dordrechtanae, 1618-1619) 

하나님의 아들이 죗값을 다 갚아 우리를 구속하셨으므로 믿음과 칭의와 성화를 우리에게 주셨다. 돌트총회는 알미니안 5개조를 반박하고 그에 대한 바른 공식을 제시하려고 모였으므로 칭의에 관하여 특별한 항목을 설치하지 않았다. 그러나 칭의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임을 표현하는 진술들이 드러난다. 

교리의 제 1 항목 예정에 관하여 제 7조 중에서; 택자들에게 참 믿음과 칭의와 성화를 수여하시기로 작정하셨다고 진술하여 믿음과 칭의와 성화가 다 은혜의 선물임을 강조하고 있다. 

교리의 제 2 항목 그리스도의 죽음과 그로 인한 사람의 구속에 관하여 제 2조 중에서; 우리는 우리의 인격에서 죗값을 갚아 하나님의 진노에서 우리 자신을 구출할 수 없으므로 하나님이 무한한 자비에서 그의 독생하신 아들을 주셔서 그가 우리를 위하여 죄로 정죄되시고 저주가 되시사 우리 대신에 우리를 위해 하나님의 공의에 배상하시기로 하셨다. 곧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 대신에 죗값을 갚으시므로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것을 강조한다. 

교리의 제 3, 4 항목 인간의 부패와 하나님께로 돌아감과 그 방식에 관하여 제 14조 중에서;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로 여겨져야 한다. 믿음이 실제로 사람에게 수여되고 호흡을 불어넣어졌다. 곧 하나님이 믿을 의지와 믿음의 행동을 생산하셨다. 

이로써 의롭게 되는 근본인 믿음도 하나님이 선물로 주셨고 믿도록 하는 일도 하나님이 하셨다고 말하여 칭의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물임을 강조한다. 

2.2.1.11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Confessio Fidei Westmonasteriensis, 1647) 

그리스도가 죗값을 지불하므로 의를 이루셨으므로 이 의를 우리에게 전가하여 우리를 의롭다고 하신다. 이 구속을 믿는 것이 의이다. 

제 9 장 칭의에 관하여 (De Justificatione) 

I조. 하나님이 효과있게 부르신 자들을 또한 값없이 의롭다고 하신다. 의를 그들에게 주입해 넣으신 것이 아니고 그들의 죄를 용서하셔서 그 사람들을 의롭다고 여기시고 받으시므로 의롭다고 하신다. 그들 안에서 행해지거나 실제로 행한 것 때문에 아니고 오직 그리스도 때문에 의롭다고 하신다. 믿음이나 믿음의 행동이나 복음에 순종을 그들에게 전가하시므로 아니고, 그리스도의 순종과 죗값 지불을 그들에게 전가하여 의롭다고 하신다. 그리스도와 그의 의를 믿음으로 받아들임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 

이 믿음도 그들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물이다. 하나님이 부르신 자들을 그냥 의롭다고 하신다. 의를 그들에게 주입하셔서 의롭다고 하시는 것이 아니고 그들의 죄를 용서하시므로 그들을 의롭다고 여기시므로 의롭게 하신다고 하신다. 그리스도의 순종과 죗값 지불을 그들에게 전가해서 그들을 의롭다고 하신다. 

II조. 그리스도와 그의 의를 받아들여 의지하는 믿음이 칭의의 유일한 도구이다. 그렇지만 그 믿음은 죽은 믿음이 아니고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할 때 믿음은 칭의의 하나의 도구일 뿐임을 강조한다. 

III조. 그리스도는 그의 순종과 죽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자들의 모든 죄의 빚을 다 갚으셨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 아버지의 공의에 합당하고 실제적이고 온전한 배상을 다하셨다. 그러므로 그들의 칭의는 오직 값없는 은혜일 뿐이다. 

의는 그리스도께서 모든 죄의 빚을 다 갚으심이다. 


3 로마교회의 이신칭의 교리 부정과 반대 

로마교회는 종교개혁으로 세워진 종교개혁교회를 박멸하려고 사력을 다하였다. 종교개혁교회는 굳게 섰고 이신칭의를 교리로 확정하므로 무너질 수 없는 교회로 서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로마교회는 트렌트 종교회의를 열어 이신칭의 교리를 완전히 산산조각 내므로 종교개혁을 무산시키기로 하였다. 

이 일을 위해 비종교적이고 비기독교적 단체인 예수회 (Societas Jesuitorum)를 바울 3세가 1540년 합법적인 종단으로 인허하였다. 예수회는 종교개혁을 이단으로 몰아 박멸하기 위해 공회의를 열어 신학적인 근거를 제시해주기를 바랐다. 그래서 교황은 트렌트 공회의 (Concilium Tridentinum, 1545-1563)를 소집하여 이신칭의 교리를 박살내는 결정들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예수회가 마지막 회기에서는 공회의의 결정을 주도하였다. 

트렌트 공회의의 결정 사항은 대략 다음과 같다. 

3.1 종교개혁의 신뢰믿음은 죽은 믿음이라 칭의를 가져올 수 없고 다른 행동들이 필요하다. 

트렌트 공회의는 종교개혁이 주장하는 믿음은 신뢰믿음 (Vertrauensglaube) 이어서 죽은 믿음고백이므로 그 자체로는 의롭다함의 충분한 준비가 아니라고 결정하였다. 그런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그러므로 의롭다함에는 믿음과는 별도의 행동들이 요구된다고 결정하였다 (Tridentinum, sessio 6; cap 7; Michael Schmaus, Katholische Dogmatik (KD), III/2, 333). 칭의 상태를 준비하는 행동들은 통회, 두려움, 신뢰, 소망과 시작하는 사랑과 회개라고 하였다 (Ibid.). 

3. 2 믿음은 의롭다함을 위한 준비일 뿐이다. 

믿음은 구원 얻음에 있어서 의롭다함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칭의를 위한 준비일 뿐이다. 믿음은 칭의를 위한 준비행동일 뿐이다 (Schmaus, KD, III/2, 306). 

신뢰믿음은 의롭다함에 불충분하다. 내용 있는 고백신앙이 칭의에 이르게 한다. 칭의는 신뢰로만은 안 되고 오히려 이 신뢰믿음을 배제한다고 주장하였다 (Schmaus, KD, III/2, 306-308). 그러므로 신뢰믿음으로 얻는 의는 생소한 의 (justitia aliena)일 뿐이다. 그런 의는 사람 밖에 있고 내적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라고 공회의가 결정하였다 (Schmaus, KD, III/2, 308). 

종교개혁은 믿음만으로 의롭다함과 죄용서를 받는다고 주장하여, 공로나 행함은 무익한 것이라고 확정하였다. 로마교회는 이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여 믿음으로만 아니고 우리의 행위가 하나님이 우리를 받으시는 근거라고 결정하였다. 곧 신뢰믿음만으로는 의가 내 것이 되지 못한다고 주장하였다. 

3.3 믿음은 준비이고 사랑의 열매가 있어야 구원 얻는다. 

트렌트 공회의는 행위들이 의롭다함에 필수적이라고 하여 사랑의 행동이 믿음에 더해져야 한다고 결정하였다. 사랑의 덕은 의롭다함의 준비이고 칭의의 열매가 아니다. 

트렌트 공회의는 이신칭의 교리를 정면으로 반박하여 신뢰믿음으로는 의롭다함을 받지 못한다고 결정하였다. 세례 전에 회개해야 하고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켜야 한다 (Schmaus, KD, III/2, 306, 308). 신뢰믿음은 의롭다 함에 결코 충분하지 못하다고 결정하였다 (KD, III/2, 315). 

믿음은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길의 시작이고 끝이 아니다. 곧 믿음은 구원의 시작이고 의롭다함의 뿌리와 기초일 뿐이다. 칭의를 준비하는 믿음은 하나님에게로 돌이킴이고 또 사랑으로 채워져야 한다. 사랑 없는 믿음은 공허할 뿐이라고 트렌트 공회의는 결정하였다 (KD, III/2, 317-318). 

믿음은 준비일 뿐이다 (KD, III/2, 318). 또 믿음은 칭의로의 성향일 뿐이다. 믿음은 칭의를 위한 준비 곧 하나님을 받으려는 준비이다. 믿음은 의롭다함의 시작이고 출발점일 뿐이다 (KD, III/2, 322). 참회, 떨림, 시작하는 사랑, 의와 또 다른 행동들은 믿음의 수행방식이고 현현형식이다. 소망과 사랑 없이는 믿음은 영생을 주지 못한다고 트렌트 공회의는 결정하였다 (KD, III/2, 322). 

3.4 믿음만으로는 안 되고 계명들을 지켜야 영생을 얻는다. 

계명들을 지킴이 그리스도 앞에서 영생을 얻게 한다. 믿음만으로는 하나님 앞에 상속자로 세워질 수가 없다. 하나님은 할 수 없는 것을 명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의 도움으로 그의 말씀들을 수행할 수 있다고 결정하였다 (KD, III/2, 324). 

3.5 믿음과 회개의 열매로 구원에 이른다. 

트렌트 공회의는 믿음은 구원의 기초이고 회개는 구원의 도구적 원인이라고 결정하였다. 회개하고 열심히 일해야 한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애통을 가져야 하고 회개의 열매를 가져야 한다 (KD, III/2, 326). 믿으면 회개로 방향이 정해진다. 반면 회개는 믿음의 구체화이다. 회개하고 세례 받으므로 구체적으로 가시적인 된 믿음을 갖게 된다. 세례 받음에서 개인의 믿음이 구체화된다. 회개는 믿음의 표시이고 믿음을 선포하는 것이다 (KD, III/2, 330). 

3.6 신뢰믿음은 그 자체로 의롭다함을 얻게 하지 못하므로 칭의를 위해 선한 행위들이 요구된다. 

트렌트 공회의는 신뢰믿음 그자체로는 의롭다함을 얻게 하지 못한다고 정죄하였다. 칭의를 받으려면 믿음과 행위들이 요구된다고 선언하였다. 참회와 두려움과 신뢰와 소망과 시작하는 사랑과 회개가 칭의를 준비하는 행위과정이다 (KD, III/2, 333). 의롭다함의 근거는 그리스도의 사랑과 함께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과 통회와 회심을 말하였다. 

3.7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단정하였다. 

트렌트 공회의는 야고보서를 인용하여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단정하였다 (약 2:17). 곧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어서 결코 사람을 구원하지 못한다고 결정하였다. 따라서 믿음은 행함으로 완성되므로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 (KD, III/2, 334-5). 이로써 로마교회는 종교개혁의 믿음만으로 의롭게 된다는 가르침과 교리를 완전히 부정하였다. 

3.8 행함이 없는 믿음은 빈 믿음이다. 

가장 정통신앙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쓸모가 없다. 이런 추상적인 믿음은 머리로 믿는 믿음일 뿐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추상적으로 참이라고 여기는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이런 믿음은 빈 믿음이다 (KD, III/2, 335). 그러므로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만이 가치를 가진다고 단언하였다 (KD, III/2, 335). 

3.9 의롭다함은 믿음에서 나오지 않고 행함에서 나온다. 

의롭다함은 믿음에서 나오지 않고 행함에서 나온다. 칭의는 행함에서 나온다고 단정하였다 (Schmaus, KD, III/2, 336). 

3.10 자유의지는 은혜를 저항한다. 


사람은 자유의지가 있으므로 선행을 할 수 있고 선행으로 구원에 이른다. 하나님의 은혜는 의지의 저항을 받으면 역사하지 못한다고 하여 자유의지를 확고히 하였다. 트렌트 공회의는 루터와 칼빈 등 종교개혁자들이 하나님의 주권적 사역만 강조하였지 자유의지의 역사는 부정하였다고 주장하였다 (KD, III/2, 339-340). 

3.11 사람의 자유의지는 범죄로 상실되지 않았다. 

아담이 범죄한 후 사람의 자유의지가 상실되고 사라졌다고 주장하는 자는 배제된다고 트렌트는 결정하였다 (5 canon 6 sessionis concilium Tridentinum).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 그에게 자유의지를 수여하시어 창조된 신으로 만드셨기 때문에 자유의지를 잃을 수 없다고 하였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자유의지를 수여하시므로 자기의 의지를 따라서 걷도록 하시고 (KD, III/2, 341-343), 자유의지의 수행을 확실하게 보장하신다고 하였다 (Schmaus, KD, III/2, 275). 

3.12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하지 않았으므로 은혜 없이도 선행을 할 수 있다. 

트렌트 공회의는 사람이 구원 얻는 일에 은혜가 필요하지만 그것은 사람이 뿌리까지 썩었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고 정하였다 (KD, III/2, 279). 원죄도 인간본성을 전적으로 부패하게 한 것이 아니다. 자유는 본래 인간본성의 한 요소이므로 강압 아래서도 다치지 않는다고 하였다 (KD, III/2, 281). 사람은 은혜 없이도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하고 윤리적 선을 행할 수 있다. 타락한 인간도 은혜 없이 도덕적 선을 행할 수 있다. 사람에게 선으로의 성향과 의지의 자유가 남아있으므로 자유의지는 상실되지 않았다고 정하였다 (KD, III/2, 282). 

3.13 사람은 자유의지로 하나님도 반항한다. 

트렌트 공회의는 사람의 자유의지는 하나님에게서 온 운동도 저항한다고 정하였다. 하나님이 부르실 때 자유로운 결단으로 대답하거나 거부할 수 있다. 심지어 효력 있는 은혜 아래서도 사람은 자유롭다고 정하였다(Schmaus, KD, III/2, 341). 사람은 자유하므로 하나님을 반항할 수 있다. 하나님이 사람을 붙들고 있으므로 하나님에게 반항할 수 있다고 정하였다 (KD, III/2, 357, 363). 아담의 범죄 후에도 사람은 자유를 잃지 않았다. 그러므로 사람은 자기의 힘으로 그릇 행할 수 있다. 그런데 사람의 선행이나 악행을 하나님이 하신 것이라고 주장하는 자도 배제된다고 트렌트 공회의는 정하였다. 사람은 홀로 일하시는 하나님의 도구라고 종교개혁이 가르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은혜의 힘과 사람의 자유를 증거한다고 트렌트는 결정하였다 (5, 6 canones, 6 sessio, concilium Tridentinum; KD, III/2, 341). 

3.14 자유의지가 계시진리이므로 자유를 소홀히 하는 것이 불가하다. 

사람의 자유는 계시진리이므로 이 자유를 소홀히 할 수 없다고 트렌트는 단언하였다. 자유의지를 소홀히 하는 자는 사람에 대해서도 실패하고 하나님에 대해서도 잘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주권성과 사람의 자유 둘 다를 보존해야 한다고 정하였다 (Schmaus, KD, III/2, 352, 354). 

트렌트의 결정에 의하면 하나님은 사람이 자유로이 선을 실행하도록 창조하셨다. 자유는 선택의 자유로만 가능하다. 사람이 악을 결정하는 것은 자유의 의미 있는 실현이 아니고 자유의 오용이라고 하였다 (KD, III/2, 355). 

행함을 일으키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자유를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의 보증이시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역으로 우리의 자유가 위험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확고하게 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사역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자유를 목표하고 이루어진다고 정하였다 (KD, III/2, 356). 

3.15 트렌트 공회의는 칼빈의 선택과 유기 교리를 배척하였다. 

트렌트는 칼빈이 사람을 선택된 자와 유기된 자로 나누는 것과 선택자들의 선한 행실들은 단지 영원한 구원을 얻은 것을 지시하는 것뿐이라는 것을 배척하였다. 따라서 의롭다함의 은혜가 예정된 자들에게만 타당하고, 다른 사람들은 부름 받았으나 은혜는 받지 못한다고 주장하는 자는 배제된다고 결정하였다 (canon 17; KD, III/2, 358). 

3.16 하나님의 만인구원 의지는 인정하지만 무조건적인 구원은 부정하였다. 

트렌트는 하나님이 만인이 구원받기를 바라는 의지를 가졌다고 확정하였다 (Schmaus, KD, III/2, 359). 그러나 영원구원으로의 예정은 거부하였다. 곧 사람이 자기가 선택되었다는 것에 무조건적 확실성을 가진다는 것을 부정하였다 (KD, III/2, 366). 악에 머무르는 사람은 구원에서 배제되고 구원을 준비한 사람만 구원에 이른다고 결정하였다 (KD, III/2, 367, 369, 372). 

3.17 선행은 공로라고 확정하였다. 

종교개혁자들은 세례 받은 자가 맺는 열매는 그의 새로운 신분의 표현이고 성취라고 가르쳤다. 이에 반해 트렌트 공회의는 이 열매는 공로라고 확정하였다. 의롭다함을 받은 자들의 선행은 하나님 앞에서 공로라고 확정하였다. 하나님은 선행과 공로들에 대한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셔서 선행들에 대해서 영생으로 확실하게 갚으신다고 결정하였다 (KD, III/2, 411-413). 곧 사람이 공로를 이루어 구원을 얻는다고 확정하였다. 

이 트렌트 공회의의 결정들은 종교개혁을 이단이라고 박멸할 근거를 마련해주었다. 이 결정들로 로마교회는 종교개혁을 이단으로 단정하고 박멸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 하였다. 그러나 성경의 명백한 가르침은 주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만 구원 얻고, 행함으로는 결코 구원 얻을 수 없다. 트렌트 공회의의 결정은 성경의 가르침과 정면 배치된다. 

4 종교개혁교회의 일부가 이신칭의 교리를 버리고 믿음과 행함으로 구원 얻는다는 로마교회의 주장으로 돌아감 

종교개혁교회는 이신칭의 교리를 굳게 붙들고 믿음생활을 잘하였다. 그러나 18세기에 이르러 개혁교회에 속한 일부 그리스도인들이 믿음만으로 구원 얻는 것이 아니고 믿음에다 행함을 더해야 온전한 구원에 이른다고 믿어 로마교회의 신학으로 돌아갔다. 

요한 웨슬리가 일으킨 감리교회는 믿음으로 의롭다 얻는 것이 아니고 믿음에 행함을 더해서 완전해지면 그것에 근거해서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주장하였다. 종교개혁 후 2세기가 지나 종교개혁교회 중에 일부가 로마교회의 방식으로 완전히 회귀하였다.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사역을 이루었으므로 그것을 받아들이는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 곧 의롭다함을 얻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그리스도의 구원사역과 믿음은 구원의 한 조건에 불과하고 사랑의 선행으로 이루어진 성화가 구원의 근거가 된다고 주창하였다. 이렇게 하여 종교개혁의 이신칭의 교리가 웨슬리와 감리교회에 의해서 완전히 폐기되는 위기를 만나게 되었다. 

그러나 감리교회의 믿음과 행함을 합쳐서 구원에 이른다는 가르침은 로마교회의 가르침보다 더 과격하게 종교개혁 정신을 벗어났다. 로마교회는 자유의지로 선행을 하되 구원은혜의 도움으로 한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웨슬리의 가르침에 의하면 사람이 구원은혜의 도움으로 자유의지가 선행을 하고 믿음을 결단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모든 사람에게 다 주어진 일반은총 곧 선행은혜 (先行恩惠)의 도움으로 선행 (善行)을 하고 믿음을 결단한다고 주장하였다. 자유의지가 일반은총의 역사를 입어 믿기로 작정하고 회개하고 성화작업을 한다. 성화작업으로 완전성화가 이루어지면 그것에 근거해서 의롭다함을 받는다. 이것은 은혜의 종교를 넘어 자연종교 영역에 이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웨슬리의 가르침의 주요점들을 살펴보자. 

4.1 선한 행위들로 구원 얻는다. 

웨슬리에 의하면 사람이 구원에 이르려면 곧 의롭다함을 받으려면 선한 행위들을 행해야 한다. 즉 선행이 구원에 본질적이다. 회개와 회개에 합당한 열매들을 맺어야 한다. 이런 것을 하지 않으면 의롭다함을 받는 것을 기대할 수 없다. 선행을 소홀히 하면 결코 칭의를 받지 못한다 (The Works of John Wesly, VI, 48). 

4.2 회개에 합당한 열매로 구원 받는다. 

웨슬리에 의하면 회개가 믿음에 절대적으로 앞서간다. 회개의 열매들은 선행하는 은혜의 결과들이다. 그러므로 믿음이 오기 전에도 행동해야 한다. 열렬한 순종, 훈련된 삶, 자기부정과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행함이 없이는 완전성화는 불가하다 (The Works of John Wesley, VI, 50). 그러나 완전성화와 의롭다함을 얻기 위해서 믿음이 조건으로 필요하다고 말한다 (Works, XI, 494). 

회개가 칭의의 조건인데 선행하는 은혜가 회개하게 하고 확신하게 한다. 이것이 구원의 첫 단계여서 참 칭의에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W., VIII, 46-47). 

4.3 선행은혜와 협동으로 구원을 성취한다. 

웨슬리에 의하면 사람이 구원 얻는 것은 특별은혜, 구원은혜로 아니고 모든 사람들에게 미리 주어진 은혜 곧 선행은혜로 된다고 한다. 이 선행하는 은혜와 협동하여 사람은 자기의 구원을 이루어낸다. 그러므로 믿음을 갖기 전에 하나님에게로 가는 운동이 시작하는데 이 운동은 선행은혜에서 나온다 (W., X, 358-360). 

4.4 구원은 불가항력적인 은혜로 되는 것이 아니다. 

웨슬리에 의하면 구원 얻는 일은 불가항력적 은혜 곧 구원 은혜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개인의 구원도 불가항력적 은혜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다. 은혜가 필수적이기는 하나 불가항력적이지 않다고 주장한다(Works, VI, 511-512; I, 427). 

4.5 칭의는 선한 행위들 곧 성화로 받는다. 

웨슬리에 의하면 칭의를 받으려면 내적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이 내적변화는 칭의 전에 일어나기 시작한다. 의롭게 되는 것은 성화로 이루어진다. 거룩하게 된 자를 하나님은 의롭다고 하신다. 곧 의로워진 사람이 의롭다함을 받는다 (Works, V, 56-57). 웨슬리는 주장하기를 선한 행위들을 게을리 하면 결코 칭의 받지 못한다고 반복한다. 회개와 회개에 합당한 열매들이 믿음과 함께 칭의에 필수적이다 (Works, VI, 50). 회개와 그 열매들이 믿음에 절대적으로 앞서간다고 하고서 회개의 다소와 열매들의 유무로 칭의가 결정된다고 주장한다 (Works, XI, 494). 

웨슬리는 칭의는 의롭게 되어 짐과 성화에서 나온다고 가르친다 (Works, VI, 71). 의가 주입되어서 내재적이 되고 (Works, IX, 343), 또 사람이 실제적으로 거룩해져서 내적으로 거룩해야 한다. 그래야 최종적인 칭의에 이른다 (Works, X, 271-283). 

위의 내용을 웨슬리의 말로 요약하면 내가 나를 구원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나를 구원하지 않으신다 (Works, VI, 511-513). 

4.6 믿음은 단지 사랑의 수단일 뿐이고 사랑의 선행으로 칭의 받는다. 

웨슬리의 가르침에 의하면 믿음은 그 자체로 목표가 아니고 목표에 이르는 수단일 뿐이다. 사람이 얻어야할 목표는 사랑이다. 믿음은 단지 사랑에 이르는 수단일 뿐이다 (Works, XII, 78-79). 사랑의 선행들 곧 합당한 회개의 열매들이 칭의에 필수적이다 (Works, VI, 48). 최종 칭의는 계속적인 선행과 마음의 거룩에서 나온 순종으로 된다고 한다 (Works, I, 321; VIII, 47). 

그러면서도 웨슬리는 믿음 없이는 아무도 칭의를 받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믿음이 칭의의 유일조건이라고 말한다 (Works, VI, 48). 또 믿음이 구원의 직접적 조건이라고 주장한다 (Works, VI, 49-54; VII, 236-238). 그러나 믿음으로 칭의가 바로 오는 것이 아니라고 웨슬리는 말한다. 선행은혜를 소홀히 하면 결코 칭의를 기대할 수 없다. 믿음 없이는 칭의를 받지 못하지만 회개의 정도로 의롭다함을 받는다. 그러므로 회개와 회개의 열매가 칭의에 필수적이라고 주장한다 (Works, VI, 48). 

4.7 완전성화로 칭의 받는다. 

웨슬리는 가르치기를 구원과 성화도 선행하는 은혜로 시작하고 완전성화로 칭의 받는다고 한다 (Works, VI, 44). 칭의는 선물이 아니고 획득사항이므로 성화하지 않는 자를 칭의하는 법이 없다. 하나님은 거룩하게 되지 않는 자는 칭의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거룩하게 된 자를 칭의하신다. 왜냐하면 의롭다함을 받은 자는 의롭게 되어졌기 때문이다 (Works, V, 57). 

종교개혁교회 중에서 특별히 개혁신학 전통에 선 교회가 웨슬리의 가르침과 개혁운동으로 칭의를 인간의 획득사항으로 만들었다. 사랑의 선행으로 완전성화를 이루면 칭의를 얻는 것으로 정하여 로마교회의 한계를 벗어나 자연종교의 영역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회개와 회개의 열매들이 구원은혜의 도움으로 아니고 선행은혜 곧 일반은혜의 역사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완전성화도 선행은혜로 시작하고 그로써 종결되기 때문이다. 

사람이 자유의지로 선행은혜의 역사를 입어 완전성화를 이루고 그로써 칭의를 받았으면 하나님의 구원사역이 잘못된 것임을 뜻한다.

IV조. 하나님은 영원부터 모든 택자들을 의롭다 하기로 작정하셨지만 때에 맞게 성령이 그리스도를 그들에게 적용하실 때 의롭다함을 받는다. 

택자들이 의롭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성령께서 시간에 맞게 적용하실 때이라고 하여 그리스도를 믿을 때 그 믿음고백으로 의롭게 됨을 강조한다. 

2.2.1.12 이신칭의가 교리로 확정됨 

종교개혁교회는 일치해서 이신칭의를 교회의 교리로 확정하였다. 종교개혁으로 두 복음주의 교회가 생겨났다. 루터교회와 개혁교회이다. 루터교회는 1530년, 1580년 두 차례 총회를 열어 이신칭의를 교리로 확정하였다. 개혁교회는 나라별로 총회를 열어 이신칭의를 교리로 확정하였다. 

이로써 이신칭의 교리가 종교개혁교회의 교리가 되었다. 따라서 이 교리를 부정하거나 다른 내용을 추가하거나 내용을 바꾸면 이단이 된다. 고대교회가 정한 삼위일체 교리와 하나님의 성육신의 교리처럼 전 기독교 세계가 다 인정하지는 못하더라도 종교개혁교회의 교리임에는 아무런 이의나 변동이 있을 수 없다. 

종교개혁교회가 종교개혁교회로 남으려면 이신칭의 교리를 굳게 붙들어야한다.


5. 20세기 후반 새 관점론자들이 이신칭의 교리를 부정한다 

20세기 후반부터 영국 고교회 출신 성경학자들이 새로운 관점이란 이름 아래 이신칭의 교리를 버리고 믿음에다 행함을 더해야 완전한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하므로 많은 추종자들을 얻었다. 종교개혁자들의 이신칭의 교리가 바울을 잘못 이해한데서 출발하였다는 것이다. 바울은 본래 율법을 잘 지켰는데 하나님이 예수 믿음을 내셨으므로 새로 내신 구원의 길로 옮긴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준수도 하면서 예수 믿음을 가지므로 완전한 구원에 이른다고 주장해왔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통상 새 관점 학파로 알려졌다. 

이런 주장을 널리 펼치므로 이신칭의 교리를 폐기처분한 것으로 보인다. 또 이신칭의를 유대교 신학으로 해설하는 자들도 많이 일어나게 되었다. 

5.1 E. P. 샌더스 (Ed P. Sanders) 

5.2 제임스 던 (James N. Dunn) 

5.3 톰 라이트 (N. T. Wright) 


톰 라이트는 새 관점 학파에 속한다. 그래서 그는 칭의를 말할 때 전통적인 칭의 개념에 새로운 내용을 첨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개념을 도입하였다. 교회가 말하고 있는 칭의는 바울이 뜻한 것이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전통적인 교회의 칭의 교리는 바울의 가르침을 벗어났다는 것 전통적인 칭의 교리는 잘못된 길로 들어선 것이라고 톰 라이트는 강조한다. 실수에 근거해서 전개되었고 칭의에 관련된 본문을 오용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전통적인 칭의론은 로마서에 나타난 칭의 개념을 잘못 전개하여 로마서의 본문에 폭력을 가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니 본문을 다시 읽어야 한다고 라이트는 주장한다. 

라이트에 의하면 바울은 개인 영혼의 구원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의 주된 관심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 세계를 바르게 세우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칭의는 창조와 언약과 종말론의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그러면 칭의는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을 성취하시는 데서 찾고 이해해야 한다고 한다 (What Saint Paul Really Said, 115-118, 131). 

칭의란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시고 그 언약을 성취하신 신실하심이라는 것 톰 라이트는 칭의를 하나님이 자기 언약에 신실하심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고 그 언약에 신실하시어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기어이 이루어내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언약에 신실함을 칭의라고 정의해야 한다고 제창한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그 자손들과 언약을 맺으시고 마지막까지 그의 언약에 신실하셨다는 것이다. 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의라고 톰 라이트는 주장한다. 그러면 톰 라이트에게 있어서 바울이 전파한 복음은 죄와 죽음에서 구원받는 것이 전혀 아니다. 톰 라이트는 복음과 칭의의 내용을 유대교 신학의 도식으로 바꾸는 것을 그의 과제로 설정하였다. 

톰 라이트는 일관되게 주장하여 바울에게 복음은 사람이 어떻게 구원얻는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고 한다. 하나님이 유대인들과 맺은 언약을 다 지키신 신실하심이 칭의이고 복음이다. 

톰 라이트가 말한 바울의 복음은 다음과 같다. 나사렛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죄와 죽음의 세력과 다른 악의 세력들 위에 결정적 승리를 거두었다고 한다. 또 예수의 부활은 새로운 세계를 도입하였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로 이스라엘의 포로 생활이 그치고 전 세계가 창조주 하나님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이로써 십자가에 못 박히고 부활한 예수가 이스라엘의 메시아요 왕이 되었다. 또 예수가 전 세계의 주이고 참된 왕이 되므로 모든 무릎이 그에게 꿇을 것이다. 이로써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참된 하나님이시어서 이방 민족들이 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자신 안에서 또 그로 말미암아 참 신으로 알려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What Saint Paul Really Said, 25-60, 131-133). 

그러면 톰 라이트의 새 관점 견지에서는 의롭다함은 주 예수를 믿으므로 그의 피로 죄용서를 받아 영생하게 된 것을 전혀 뜻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었는데 그 언약에 신실하시므로 예수 메시아로 언약을 다 이루시어 이스라엘의 포로를 그치게 하고 악의 세력들을 이기므로 세상을 바로 고치는 것이다. 이 일을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이루셨다. 이렇게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과 맺은 언약에 신실하시어 모든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다 이루셨다. 이렇게 하나님이 자기 언약에 끝까지 신실하심이 칭의이다. 그러면 칭의는 주 예수를 믿어 죄용서를 받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자기의 언약에 신실하심이다. 곧 하나님을 의롭다고 하는 것이라고 한다 (칭의를 말한다, 271-274; What Saint Paul Really Said, 45). 

칭의는 메시아 예수의 신실함이라고 함 

톰 라이트는 바울 (Paul In Fresh Perspective)에서도 같은 사상을 전개한다. 그는 창조와 언약 관계로 바울의 신학을 개진한다. 하나님이 전 세계를 향한 한 계획을 가지셨다. 그것은 전 세계에서 한 가족을 가지시는 것이다. 마침내 이 일을 율법을 통해서 이루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통해서 이루신다. 율법은 이방인과 유대인들 간에 큰 벽을 세우지만 메시아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의 계획대로 전 세계에서 한 백성을 이루신다. 칭의는 예수를 통해서 이루신 새 가족의 일원이 되는 것을 말한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은 새로 정의된 하나님의 가족의 일원이 되는 것을 말한다. 이 일은 토라로 아니고 메시아 예수를 통해서 이루신다. 그러므로 의는 메시아 예수의 신실하심이라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새 가족의 일원이 되었다는 표라는 것이다 (Paul In Fresh Perspective, 108-114).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통하여 전 세계를 회복하려는 계획을 예수 메시아를 통해서 이루신다. 그리고 전 세계의 회복에 그리스도인이 동참하여 한 가족을 이룬다 (Paul, 114).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한 가족을 약속하셨는데 이 언약백성을 메시아 예수를 통해서 이루신다. 이 일이 예수 메시아의 신실함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따라서 예수의 신실함이 곧 의라는 것이다 (Paul, 115). 

반론: 하나님의 섭리의 목표는 이스라엘의 회복이 아니라 온 인류를 구원하여 찬양과 경배를 받으심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구원경륜을 성취하기 위해 한 도구로 선택되었다 

톰 라이트는 바울과는 반대되게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통해서 세상을 구원하신다는 것을 일관되게 강조한다.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통해서 세상을 구원하여 한 가족을 만드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세상을 구원하신다. 이 일에 이스라엘이 도구 역할을 한 것이다. 이 목적으로 이스라엘이 선택되고 한 민족으로 조성되었다. 이스라엘을 통하여 하나님이 사람이 되시고 사람으로 오셔서 대신 속죄하시어 세상을 구원하신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제사제도를 이스라엘에 세우시고 대신 속죄제사의 법을 가르치셨다. 그리스도 오심의 통로와 대신 속죄제사로 세상을 구원하심을 알게 하시려고 이스라엘에 속죄제사의 제도를 세우셨다. 

의는 이방인을 아브라함의 가족으로 편입시킨 메시아의 신실함이라고 함

톰 라이트에 의하면 의는 하나님의 신실함인데 이 신실함이 메시아의 신실함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메시아의 신실함은 그의 순종을 뜻하는데 그의 순종의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신실함이 충분히 계시되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하도록 되어있는 것을 메시아가 해내셨다는 것이다. 메시아의 신실함으로 이방인들이 한 가족으로 편입되었다. 이렇게 하여 전 세계가 하나님의 언약에 편입된 것이 의라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이방인들이 유대인과 합하여 아브라함의 한 가족 곧 새 공동체가 되는 것이다. 언약백성에 가담은 믿음으로 된다고 하는 것을 톰 라이트는 빼지 않았다 (Paul, 120-122). 

바울은 유대교 신학을 고수했다는 것 

톰 라이트는 바울이 유대교의 신학을 버리지 않았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는 바울이 유대교의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전통적인 바울 연구의 중심점과 반대되는 것이라고 밝힌다. 바울은 이방종교의 방식을 반대하여 유대교 고유의 방식을 고수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전통적인 바울 연구의 중심점은 바울이 유대교의 속박에서 벗어나 비유대교식 종교의 새로운 형태의 기독교를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그렇게 바울을 이해하면 안 된다는 것을 라이트는 강조한다. 라이트는 바울이 유대교 신앙을 버리지 않았다는 예증을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바울은 자기가 세운 교회들로 아브라함과 율법과 선지자들의 삶을 따라 살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사는 것이 어둠의 세상 가운데서 빛의 자녀들로 사는 것임을 뜻한다고 하였다. 바울의 신앙방식은 율법을 떠나 이방종교의 방식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구약의 경우에서도 이방종교의 방식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이방 제국의 위협이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지혜가 이방 민족들에서 선택된 사람들로 한 백성으로 살게 하였다는 것이다(Paul, 128). 

톰 라이트의 주장의 핵심은 그리스도인들도 예수 메시아로 말미암아 선택되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으니 이방 세계에 살아도 구약의 족장과 선지자들처럼 율법을 잘 지키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목적으로 바울이 하나님과 그의 백성을 다시 조정하는 작업을 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바울은 그의 유대교 신학을 유지하면서 하나님의 백성이 이방인들과 유대인들로 구성된 것으로 재 구상하였다는 것이다 (Paul, 128-129). 

라이트는 유대교 신학 구도로 종말론을 해석 

톰 라이트는 또 종말론의 도식에서 바울을 해석한다. 그는 바울의 유대주의 종말론을 새롭게 재 구상하면서 포로귀환을 출발점으로 삼았다. 유대인들이 본토로 돌아왔지만 유배가 끝나지 않은 것은 하나님이 시온으로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포로 생활의 시작은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을 때부터라는 것이다. 율법을 받으므로 아담처럼 범죄자가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율법으로 말미암아 죄인으로 살던 상황에서 메시아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새 출애급을 이룬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 메시아의 구속사역으로 이방인들과 유대인이 아브라함의 가족이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예수 메시아의 구속사역을 이방세계에 전파하여 아브라함의 가족이 되게 하는 데는 영이 일하였기 때문이다. 이때는 율법을 지켜서가 아니고 예수 메시아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어 아브라함의 가족이 된다. 

성령의 임재로 하나님이 세상을 교정하여 바로 세우게 되었다. 곧 예수 메시아와 영 (the Spirit)으로 세상을 회복하게 되었다고 한다. 바울은 종말론을 재구상하면서도 유대교 종말론을 유지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세상을 교정하고 회복하는 계획을 율법으로 아니고 예수 메시아와 성령으로 이루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Paul In Fresh Perspective, 130-153; What Saint Paul Really Said, 25-62). 

라이트는 이스라엘이 할 사명을 예수 메시아가 한 것으로 보는 것이 새 관점이라는 것 

톰 라이트는 칭의를 회심과 믿음으로 구원 얻음이라고 한 것은 바울에 대한 그릇된 옛 관점이라고 단정한다. 예수는 율법에 대해 부정적인 발언을 하지 않았으므로 바울과 예수를 대립적으로 볼 것이 아니라고 한다. 바울에게 있어서 예수는 이사야서에 나오는 여호와의 참되고 궁극적인 종이다. 

바울은 예수의 작업을 계속 수행하는 종으로 부름 받은 자라는 것이다. 그는 이스라엘이 다시 민족들에게 빛이 되도록 하는 작업을 하게 부름 받았다는 것이다. 바울이 사도로서 일하면서 고난당한 것은 참된 이스라엘의 몫을 수행하므로 당하는 것이었지, 유대교의 변절자가 되었으므로 유대인들로부터 고난당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바울은 예수 메시아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해서 메시아 공동체를 세우므로 유대인들의 질투를 받은 것일 뿐이다. 바울이 이방세계에 전한 하나님의 복음은 언약이 성취되어 새 창조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이로써 예수가 이스라엘의 메시아이고 온 세상의 주님이라는 것을 전파하는 것이 바울의 사명이라는 것이다. 가이사가 주가 아니고 이스라엘의 메시아인 예수가 세상의 주님이라는 것을 전파하는 것이라고 한다.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 예수와 영으로 이 일을 이루셨다. 그러므로 바울은 복음을 전파하므로 메시아 공동체를 세워 참되신 하나님을 경배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교회는 스스로를 하나님의 구속받은 인류라고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메시아 공동체에 가입은 세례로 이루어진다. 세례로 믿는 자의 신분이 변하기 때문이다. 

바울에 관한 라이트의 새로운 논의의 요점은 이방인들이 메시아 공동체에 가입하는 것은 유대인들의 영적 특권에 동참하는 것이라고 한다. 라이트는 바울이 그렇게 강조하는 죄용서와 영생에 이름에 대해서는 아예 눈을 감았다. 

예수 메시아를 중심으로 다시 정의된 하나님의 백성은 단일 가족이므로 사랑의 원리로 살아야 한다고 바울이 가르쳤다고 라이트는 제시한다. 유대인의 특권에 동참하는 것이면 율법으로 살아야 한다고 제시해야 하는데 사랑의 원리로 살아야 한다고 바울이 가르쳤다는 것이다. 예수 메시아를 중심하고 영 안에서 재 정의된 하나님의 한 가족 곧 이방인들과 유대인을 한 가족으로 조성하고 유지하는 것이 바울의 실제 전략이었다고 톰 라이트는 제시한다. 

라이트는 후기 유대교 신학으로 바울의 모든 행적을 설명

톰 라이트의 주장에 따르면 바울의 모든 신학은 하나님의 구원경륜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후기 유대교 신학에 근거하고 있다. 유대교의 종말사상을 예수 그리스도로 보충해서 설명하고 있다. 후기 유대교 사상에 의하면 하나님이 유대인들과 언약을 체결하였으므로 이 언약백성을 위해서 하나님이 세계도 창조하신 것이 된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에게 세계지배가 필연적으로 귀속된다. 그러면 종말에 하나님은 메시아 왕국을 필연적으로 세우셔서 유대인들로 세계를 지배하도록 전개되어야 한다. 이것이 톰 라이트가 일관되게 강조하는 하나님이 세계를 교정하는 일이 될 것이다. 

라이트의 주장을 따라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을 전개하면 그리스도는 온 인류를 구원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 돌이키는 것이 아니고 유대인을 위한 왕국설립을 위해서 오신 것이 된다. 그러면 톰 라이트는 율법준수를 하나님의 백성 되는 요건으로 주장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런 주장은 제시하지 않았다. 

그런데 현존하는 유대인들의 대부분은 아브라함의 육신적 후손이 아님이 밝혀졌다. 이런 상황에서 바울의 복음전파 사역을 후기 유대교의 신학으로 풀어 교회를 유대인이 중심이 된 한 가족으로 만드는 것이 정당한 이해인가? 이런 시도는 새로운 세계의 질서 곧 세계단일정부 수립을 위한 준비 작업으로 볼 수밖에 없다. 

톰 라이트만 고찰해도 바울을 새 관점으로 이해하는 것이 무엇인지 특히 복음과 칭의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고 보인다. 

5.4 유보적 칭의론 

유보적 칭의론을 제창하는 주장이 한국교회에 널리 퍼져있다고 들린다. 필자는 이런 주장을 제시하는 글을 직접 읽지 못해서 확실한 것을 말할 수 없지만 들은 것을 몇 마디로 옮기고자 한다. 주 예수를 믿음만으로 의롭다함을 얻지 못하고 이 믿음에 행함을 더해야 한다는 주장이 새 관점의 핵심이다. 믿는 자의 행위가 다 끝난 종말 심판 때 칭의가 선언된다는 것이 유보적 칭의론이다. 믿는 자들의 행함이 다 끝나기 전에는 의롭다하는 선언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종말 심판 때 최종적인 칭의가 선언된다는 것이다. 

믿음과 행함으로 완전한 구원에 이른다고 하면 사람이 살아있는 동안은 행함이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역사의 끝에 최종판단을 내려 구원 여부를 결정한다. 이 주장은 하나님의 원래 계획대로는 역사의 끝에 세상을 바르게 한다고 주장하는 톰 라이트의 신학에서 빌려온 것 같이 보인다. 그러면 마지막 날 심판을 받기 전에 죽은 성도들은 어디로 갈 것인가? 

심판주가 아직 판정을 내려주시지 않았으니 천국은 못갈 것이고 그렇다고 지옥으로 바로 간다고도 할 수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믿는다는 사람들이 악만을 행하고 살지 않았고 열심히 선행을 하려고 애썼으니 그냥 지옥으로 갈 수도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유보적 칭의론자들은 옛날 로마교회의 연옥교리 같은 것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죽을 때까지 최종판정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죽은 후 어디로 갈 것인가를 결정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러나 종말 전에 죽은 사람들을 누가 연옥과 지옥으로 보낼 것인가? 유보적 칭의론에 의하면 심판주는 종말까지 심판을 유보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또 어떤 기준으로 의를 받기에 합당한 선행을 행했다고 판정할 것인가? 

이신칭의 교리에 의하면 처음 믿을 때 받은 칭의가 종말론적인 칭의 선언이다. 따라서 믿는 자들은 지금 죽어도 하나님 앞으로 직접 간다. 우리는 주 예수를 믿는 그 순간 의롭게 되었으므로 죽으면 하나님 품으로 바로 간다. 심판과정을 거쳐서 천국행이냐 지옥행이냐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유보적 칭의론은 부질없는 사람들의 잠꼬대이다. 부질없는 주장이 한국교회를 어지럽게 하고 있다. 

본 필자는 처음 구상에서는 새 관점을 시작한 E. P. Sanders와 James Dunn도 다루려고 하였으나 시간이 부족하여 톰 라이트 한 사람만 다루게 되었다.


6. 하나님의 창조경륜의 견지는 새 관점 논의를 종식함 

바울을 후기 유대교 신학의 틀에 매어두어야 하느냐 아니면 하나님의 구원경륜의 범위에서 이해해야 하는 문제는 바울의 편지에 나타난 칭의와 관련된 성경본문들의 주석만으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창조경륜의 관점에서 이해해야 바른 해답이 나온다. 하나님은 유대교 신학의 틀 안에서 그의 구원경륜을 펴시지 않았다. 

하나님은 창조경륜을 이루시기 위해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다. 창조경륜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가지시고 그 백성 가운데 거하시며 찬양과 경배를 받으시는 것이다. 이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하나님은 사람을 인격체로 지으시고 그와 언약을 맺으시어 창조주만 하나님으로 섬기도록 정하셨다. 

창조주만을 하나님으로 섬기도록 하기 위해서 선악과계명으로 언약을 체결하셨다. 선악계명은 창조주만을 하나님으로 섬기도록 하는 계명이다. 창조주 하나님을 섬기면 그것이 선이어서 생명과 영생에 이르고, 하나님 섬김을 거부하면 그것이 악이어서 죽음과 영원한 형벌에 이르게 정하신 것을 말한다. 그런데 언약체결 시 하나님은 선악계명을 한 나무에 매셨다. 

그 나무의 열매를 먹지 않으면 하나님의 계명대로 하나님 섬김을 바르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언약체결 후 첫 인류는 창조주만을 전심으로 섬겼다. 늘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탐구할 때도 거기서 창조주의 무한한 지혜와 권능을 보고 늘 그를 찬양하고 경배하고 감탄하였다. 그러다가 유혹이 왔다. 자주자가 되어 선악을 스스로 결정하고 살라는 유혹에 넘어져 창조주 하나님 섬김을 거절하는 반역을 일으켰다. 언약이 파기되어 하나님은 자기의 백성을 잃게 되었다. 창조경륜이 무너지게 되었다. 

반역을 일으켰으므로 언약의 법대로 하나님은 범죄자들에게 죽음과 저주를 선언하셨다. 이제 이후로 죽음이 인격적 존재들의 세계에 철칙으로 세워졌다. 사람은 죽음의 법을 고치거나 해소할 수 없다. 죽음의 법이 세워지고 저주가 임하여 오므로 인류가 많은 고통과 질병과 자연재해들로 죽음을 독촉하는 삶을 살게 되었다. 이대로 가면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해야 할 존재들이 다 없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창조주 하나님은 반역한 백성을 돌이켜 다시 자기의 백성 삼기로 정하셨다. 그러려면 죄를 용서하고 무효화해야 한다. 사람의 범죄를 무효화하고 용서하려면 죗값을 갚아야 한다. 사람이 범죄하였으므로 사람이 죗값을 갚아야 한다. 하나님의 공의의 법에 따라 범한 죗값을 사람이 갚아야 그 죄가 용서되어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다. 

그러나 아담의 후손은 다 범죄자이고 파산선고를 받은 사람들이어서 아무도 죗값을 갚을 길이 없게 되었다. 죗값을 갚아 죄를 속량하지 않아서는 모든 인류는 다 반역죄를 지은 범죄자들이므로 멸망하는 길밖에 없다. 그러면 하나님은 창조경륜을 이루실 수 없게 된다. 곧 하나님은 자기 백성 가운데 거하시며 찬양과 경배를 받으실 수 없게 된 것이다. 범죄한 인류는 죗값을 갚을 수 없으므로 하나님이 사람을 대신해서 죗값을 갚으시기로 하셨다. 이 작정을 이루시려면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오셔서 사람으로서 죗값을 갚으시는 길밖에 없다. 

하나님은 이 구원경륜을 이루시기 위해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오시는 통로를 마련하기로 하셨다. 이 목적으로 아브라함을 불러 한 민족으로 만들기로 정하셨다. 그리하여 아브라함의 후손을 애급에서 400여 년간 양육하시고 시내산으로 인도하여 언약을 체결하여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는 백성으로 삼으셨다. 

때가 차면 그 민족을 통해서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세상에 오시기로 하셨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죗값을 갚으시므로 온 인류를 구원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 돌이키기로 하셨다. 이 일을 위해 이스라엘은 도구로 선택되고 조성되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그의 섭리의 목표로 정하시지 않으셨다. 결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섭리의 목표점이 아니다. 하나님의 구원경륜과 구원사역을 후기 유대교의 신학의 도식대로 풀면 안 된다. 

6.1 하나님의 구원경륜 

대신 속죄법을 가르치기 위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짐승으로 제사하는 속죄제사 제도를 세우셨다. 그래서 양과 짐승으로 속죄제사를 하게 하시므로 하나님이 인류를 위해 대신 속죄하실 것임을 가르치셨다. 속죄제사는 하나님이 사람을 위해서 대신 속죄를 하실 것임을 알리는 것이었다. 짐승으로 드린 속죄제사는 결코 죄를 속하지 못한다. 그 제사제도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속죄제사의 예표이고 모형이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오셔서 속죄제사의 법을 따라 대신 죽으시므로 세상 죄과를 속량하여 인류를 구원하셨다. 십자가에서 전가 받은 죄를 속량하기 위해서 피 흘리시므로 죗값을 갚으셨다. 그리하여 세상 구원을 다 이루셨다. 하나님의 본래 구원경륜이 온 인류를 구원하여 자기 백성을 삼아 그들 가운데 거하시며 찬양과 경배를 받으시기로 하셨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의 도구로 선택되었다. 하나님의 역사 섭리의 목표는 이스라엘을 높이 들어 세계를 다스리게 하는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을 도구로 택하시고 대신 속죄제사의 법을 가르침 받게 하셨다. 성육신하신 하나님이 대신 속죄제사의 법으로 세상을 구원하셨다. 온 인류를 구원하여 창조 시에 가지신 창조경륜을 이루시는 것을 목표하셨다. 

6.2 율법수여의 근본 뜻 

새 관점 학파의 주장에 의하면 예수 믿음과 율법준수를 합해야 완전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율법에 대해 예수 그리스도도 나쁘게 말하지 않았고 바울도 율법을 잘 지켰으므로 율법을 지키실 수 있다는 신념이 강하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지킬 수 있는 율법을 주셨으므로 예수 믿는 사람들도 믿음에 율법준수를 더해야 완전한 구원이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약을 맺어 언약백성이 된 이스라엘로 언약의 거룩을 지키도록 하기 위해서 율법을 주신 것으로 통상 이해된다. 그러나 율법을 주신 하나님은 사람이 율법을 지켜 구원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주신 것이 아니다. 율법이 거룩하고 선하고 의로워도 죄 있는 인간은 결코 지킬 수 없다.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신 목적은 율법을 지켜 구원 얻을 수 없다는 것을 가르치심이었다. 율법은 지키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범함만 더해진다. 율법을 범해도 망하지 않도록 제사제도를 세워 속죄를 받게 하셨다. 그러나 속죄제사로 사람의 죄가 속량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완전한 속죄제사의 예표이고 모형일 뿐이었다. 

율법도 마찬가지이다. 율법을 지켜 의롭다함을 받고 구원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주신 것이 아니다. 사람이 율법을 지켜 스스로 자기를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 주신 것이다.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범함만 더해진다. 결국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율법의 완성자를 보내주시옵소서 라고 절규하게 되었다. 때가 차매 율법의 완성자가 오셔서 율법을 성취하셨다. 그러나 율법의 조목들을 다 지켜 율법준수를 완수하신 것이 아니다. 율법의 완성자는 율법을 범한 죗값을 갚으라는 요구를 성취하시므로 율법을 성취하셨다. 계명과 율법을 범한 죗값을 그의 피로 갚으시므로 율법의 요구를 충족하셨다. 율법의 성취는 그리스도가 죗값을 지불하므로 완전하게 이루셨다. 그러므로 율법의 조문들을 다 지켜야 한다는 요구가 사라졌다. 왜냐하면 죗값을 갚음 받았기 때문이다. 더 이상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요구가 없어졌다. 이미 빚을 다 받았기 때문에 빚을 갚으라는 요구를 할 수 없게 되었다. 이 면에서 율법이 폐지되었다. 

율법이 성취된 후에는 율법준수와 믿음을 함께 해야 온전한 구원이 된다는 주장은 어불성설이다. 중세 천 년 동안 믿음과 행함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것이 완전히 실패임이 증명되어 종교개혁이 일어났다. 그런데 다시 종교개혁 이전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전적으로 불가하다. 

지금 로마교회는 전통적인 교리와 신학을 다 버렸으므로 믿음과 행함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교리는 더 이상 통용하지 않게 되었다. 지금 로마교회의 구원은 현세에서 자기를 실현하는 것 혹은 자유를 실현하는 것이다. 그들의 신학에는 믿음과 행함으로 구원 얻어 갈 내세라든가 영원세계도 존재하지 않는다. 

믿음만으로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니고 믿음과 행함으로 구원에 이른다고 가르치는 것은 복음주의 교회들을 멸하여 세계 종교 통합에 이르기 위해서 진행하고 있는 큰 기도의 일부일 뿐이다. 

6.3 유대인들과 언약체결은 그들의 세계 지배를 위해? 

후기 유대교 신학에 의하면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어 자기의 백성 삼으셨으므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해서 세계를 창조하셨다는 결론을 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해서 세계를 창조하시고 언약을 체결하셨으면 이스라엘 혹은 유대인들에게 세계 지배가 필연적으로 귀속된다. 이런 가설은 하나님의 구원 섭리에 자리를 가질 수 없다. 

하나님은 유대인들의 세계 지배를 위해서 역사를 진행하시고 구원 섭리를 진행하시는 것이 아니다. 유대인들은 주 예수를 믿지 않으므로 하나님의 백성 자리를 박탈당하였다. 더 이상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다. 그들 중에서도 믿는 자들이 있다면 그들만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편입된다. 

하나님은 온 인류를 구원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고 그들 가운데 오셔서 찬양과 경배를 받으시는 것을 목표하고 일하신다. 창조경륜이 성취되면 하나님이 주 예수를 믿어 그의 백성이 된 사람들에게 오셔서 그들 가운데 충만히 거주하신다. 하나님의 구원 경륜에 유대인들을 세계지배자로 세우는 것은 아무런 자리가 없다. 유대인들이 세계 종말에 세계 지배자로 세워져서 온 세계를 통치하는 것은 후기 유대교 신학에만 있는 일이다. 

6.4 후기 유대교 신학에서 예수 메시아 

톰 라이트는 바울이 후기 유대교 신학을 견지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이 이방인들을 아브라함의 가족으로 편입시키기 위해서 이루어졌다고 주장한다. 

바울은 예수 메시아가 구원사역을 하여 이방인들로 아브라함의 가족이 되게 했으므로 그가 온 세상의 참 주가 되셨다고 한다. 톰 라이트는 바울의 모든 활동을 유대교 신학의 구조에 넣어서 설명한다. 예수가 이스라엘의 메시아로서 온 세상의 주시라는 것을 널리 선포하고 알리는 것이 바울의 사명이라고 제시한다. 

그래서 톰 라이트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지칭하지 않고 언제든지 예수 메시아라고 한다. 바울은 예수 메시아가 온 세계의 참 주가 되셨다는 것을 강조하고 널리 선포하였다는 것이다. 톰 라이트는 예수가 유대인들의 구주이고 주이심을 강조하여 그가 이스라엘의 메시아라고 반복적으로 강조한다. 

톰 라이트의 이해에 의하면 예수가 메시아가 된 것은 유대교 신학 전통에 따라서 이다. 그가 메시아일 수 있는 것은 그가 다윗의 후손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메시아 되는 필수요건이다. 어떤 사람이 메시아가 되는 충분조건은 나라를 외국의 압제에서 독립시키는 것이다. 라이트는 예수가 메시아 되는 충분조건을 유대나라의 독립을 이룸에 두지 않고 그의 구원사역을 통해서 이방인들을 아브라함의 가족에 합류시킨 것에 두었다. 

유대교 신학에서는 메시아는 위의 두 조건을 충족하면 되지 하나님의 성육신이어야 되는 것이 아니다. 톰 라이트는 예수가 메시아 될 수 있는 것은 충분조건을 충족했기 때문이 아니고 이방인들을 아브라함의 큰 가족에 합세하게 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톰 라이트의 신학에서 예수는 한 인간으로서 구원사역을 이루었다. 하나님의 성육신으로서 한 것이 아니고 다윗의 후손인 하나의 유대인으로서 한 것이다. 예수가 한 인간으로서 구원을 이루었다면 그의 구원은 우리의 구원일 수 없다. 하나님이 구원하셔야 그 구원이 우리의 구원이 된다. 아다나시오스의 주장대로 피조물이 이룩한 구원은 우리의 구원이 될 수 없다. 바울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는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이시다. 바울을 유대교 신학의 구도에 억지로 밀어 넣을 것이 전혀 아니다. 그런 신학은 그리스도교 신학으로 성립할 수 없다. 

또 율법을 지켜야 완전한 구원에 이른다는 신학도 유대교 신학이지 그리스도교 신학일 수 없다. 바울은 믿음에 율법준수를 더함으로 완전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결사적으로 반대하였다. 

신약에 의하면 오직 주 예수와 그의 구원사역을 믿음으로만 완전한 구원을 받는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셔서 그의 피로 죗값을 갚으셨으므로 믿기만 하면 온전한 구원을 얻는다. 이 믿음에 율법준수 곧 행함을 더해서는 결코 구원받을 수 없다. 따라서 지금도 이신칭의가 그리스도교의 근본진리이고 교리이다. 
 

서철원 박사

출처 : 예수 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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