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지서에 대한 성경신학적 재해석
목 차
1. 서 론
2. 현존 신학의 역사적 발생 경위와
문제점
3. 선지서 해석의 다양관점에 대한
비판적 고찰
4. 선지서의 구조적 이해
5. 선지서의 중심 주제
6. 결론을 대신하여
- 선지서의 신앙적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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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론
이 글은 선지서에 대한 종래의 해석의 관점과 틀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기존 선지서 해석에 대한 전면적인 재해석을 시도하고자 한다. 이 글이 검토 하고자 하는 기존 신학의 성경해석에 대한 문제점은 어떤 부분이나 지엽적인 것에 국한되어 있지 않다. 이 글이 기본적으로 취하고 있는 성경신학적인 입장은 기존 신학의 기본 틀 자체를 문제 삼는다. 여기서 기존 신학이란 보수신학과 자유주의 신학 양자를 포함한다. 그러나 이 글의 입장인 성경신학이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보수신학의 기본적 입장, 즉 모든 신학적 작업의 정당화는 성경의 절대적 권위에 의해 사정된다는 것을 거부하는 새로운 원칙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성경신학은 기존의 보수신학이 강조해온 대로 성경이 절대적 하나님의 계시임을 더욱 확고히 하면서 보수신학이 올바른 보수신학이 되기 위해서는 성경의 진리성이 성경자체의 논리와 증거에 의하여 정당화되어야 함을 주장한다. 이 말은 현존 보수신학이 성경의 절대적 권위를 강조하는 듯하지만 실상 신학적 작업과 정당화는 성경의 구조적 논리에 의거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전승되어온 교리 체계를 더 우선시하는 문제점를 지적한다. 말하자면 이 글이 취하는 성경신학적인 입장은 16세기 이후 면면히 이어온 보수신학의 비판적 계승을 목표로 삼는 셈이다.
종래의 선지서 해석의 방향은 크게 보아 세 부류로 나누어 진다.
첫째는 가장 전형적인 보수신학의 입장이며,
둘째는 성경 계시의 신적 기원을 반대하고 나온 자유주의 신학권의 해석이며,
셋째는 구체적 신학적 프로그램을 갖지 못했으나 역사상 간헐적으로 등장한 미래 예언 중심의 종말론적, 묵시적 해석이다.
보수신학적 해석에 의하면, 선지서의 예언은 죄에서 인간을 구속하기 위해 오실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와 잘못된 신앙 생활을 회개하라는 촉구로 되어 있다고 이해된다. 우리는 이를 구속사적 선지서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 비평이라는 파괴적 성경 해석 방법론에 의하여 성경의 권위와 통일성을 철저히 부정해 버리고 하나님의 역사 지배를 불신하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에게는 미래에 대한 예언의 성취나 종말론적 내용은 선지자들의 환상적 기대의 소산으로 치부하거나 이방 종교의 무속적 점술과 같은 것으로 간주한다. 그들이 선지서를 보는 관점은 윤리적, 특히 사회 정의적인 것이다. 그래서 선지자의 외침은 미래의 사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부패한 사회에 대한 고발이고 정의로운 선포라고 본다. 이는 성경의 계시적 성격을 완전히 윤리적으로 왜곡시켜 버린 것이다. 종말론적, 묵시적 해석은 언제나 역사적으로 볼때 사회적 불안과 교회의 타락의 온상에서 생겨났다. 그래서 선지서를 마치 점쟁이가 미래의 사실을 알려 주는 듯이 사용하는 것이다. 시한부 종말론의 입장이 전형적인 예이다. 이 해석은 구체적인 신학적 논리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불확실한 세상에서 불안해 하는 종교 심리를 이용하는 일종의 무속 현상이다.
우리는 이 글에서 이 세 가지 선지서 해석의 관점들을 분석, 비판하되 앞의 두 입장을 보다 체계적으로 다루기로 한다. 놀라운 사실은 오늘날의 선지서 해석의 경향은 보수신학에서 조차 사회정의적 관점이 점차 우세하게 나타나고 있는 실정이다. 그 만큼 보수신학적 해석의 틀이 허술하고 설득력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이런 현상의 근본적 이유는 무엇일까? 그 해결의 방법은 무엇인가? 성경신학의 입장에 의하면 위에서 언급한 세 부류의 해석의 관점은 모두 성경 전체의 구조적인 논리의 틀을 갖지 못한 채 성경의 한 부분에 해당하는 선지서의 내용을 해석하려는 데에서 오는 오류이다. 다시 말하자면 이들은 성경 전체를 포괄하는 신학적 틀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들도 모두 성경전체를 포괄적으로 바라보는 해석적 틀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문제는 그 틀이 과연 성경 자체의 구조적 논리와 부합하느냐이다. 따라서 필자는 선지서 해석의 구체적 내용을 검토하기에 앞서, 먼저 선지서를 해석하는 신학적 관점과 입장을 문제 삼고자 한다. 이 문제에 대한 충분한 검토가 없이는 이 글이 겨냥하는 포인트를 전달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이 글의 일차적 과제는 선지서의 구조와 내용에 대한 종래 해석의 문제점을 극복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데 있다. 그러나 이글이 궁극적으로 밝히고자 하는 것은 선지서를 해석하는 올바른 관점과 틀이 무엇인가이다. 앞에서 밝힌 대로 이글이 취하는 입장은 박용기 목사에 의하여 새롭게 제시된 성경신학적 입장이다. 이 입장의 구조적 논리와 성경적 정당화 작업은 이미 여러 권의 책을 통하여 발표되었다. 이 입장은 19세기에 자유주의 신학권에서 개진된 역사 비평적 입장에서의 성경신학과는 완전히 다른 문제 의식에서 출발하며, 이는 또한 20세기 초 자유주의 신학의 도전에 의해 반동적으로 태동된 보수신학내에서의 성경신학과도 전혀 성격을 달리한다. 역사 비평적 성경신학이 성경을 계시로 믿지 않고 단지 인간이 기록한 역사적 문서로서 간주하여 그런 성경의 복원 작업을 역사적으로 재구성하려는 데 있다면, 보수신학권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성경신학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수용하지만 이들 작업의 주안점은 성경 계시의 역사적 유기적 전개과정 그 자체를 서술하는 데 있다. 그러므로 양자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수용하느냐 않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 성경 연구의 분석틀은 유사하다. 즉, 성경 내용에 대한 수평적이며 현상적인 차원에서의 분석에 불과하다. 이런 분석과 논의의 차원이라면 단연코 훨씬 더 오래된 역사와 연구 전통를 지니고 있는 역사 비평적 방법론을 가진 자유주의 신학이 절대적으로 우세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오늘날 세계 신학계의 대세는 자유주의 신학의 판도로 기울어 지고 말았다.
그러나 이 글이 취하는 성경신학은 성경 내용의 수평적 차원의 분석에 멈추지 않는다. 성경신학은 성경에 현상적으로 드러나는 모든 사건이나 교훈 그리고 예언들은 하나의 의미를 드러내기 위해 엄밀하게 구조화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그 구조가 다름아닌 언약과 성취의 틀이라고 본다.이 언약과 성취의 틀에 의해 역사가 진행되고 찬양이 이루어지고 예언이 행해진다. 더 나아가서 예수가 오고 성령이 오며 교회가 이루어져 가며 마침내 종말이 온다고 보는 것이다. 성경 전체의 틀을 이루는 이런 언약과 성취는 하나님 계시의 방편으로서 하나님이 여호와이시고, 따라서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다라는 단 하나의 신학적 의미를 드러낸다고 본다. 이 점에서 이 글이 취하는 성경신학은 종래의 신학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성경 해석적 관점을 갖고 있음을 우리는 감지할 수 있다. 요컨대 이 글은 선지서 해석을 둘러싼 다양한 관점들을 검토하면서 방금 언급한 성경신학적 해석틀의 정당성을 다른 관점들과 대비적으로 입증하려는 데 있다.
이 글은 이상과 같은 문제 의식을 가지고 논의의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문제들을 검토하려고 한다.
먼저 이 글이 문제삼는 종래 선지서 해석의 신학적 입장의 문제점을 드러내기 위하여 현존 신학의 양대 흐름인 보수신학과 자유주의 신학의 역사적 발생 경위와 문제점을 분석한다.
그 다음 그에 따른 선지서 해석의 관점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여기서 해석학적 문제를 다루게 될 것이다.
셋째는 선지서에 대한 구조적 이해를 시도할 것이다. 여기서도 다른 관점들의 문제점이 검토될 것이다. 넷째 선지서의 중심 주제가 무엇인가를 다루게 될 것이다. 여기서는 구약 전체의 중심 주제가 무엇인지를 다양한 관점에서 검토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선지서가 오늘의 삶에 대해 가지는 신앙적 의미를 해명해 볼 것이다. 성도의 신앙의 문제는 결국 그릇된 신관으로 말미암는다. 선지서 해석의 여러 관점들이 어떤 신관을 갖게 되며 그것은 결국 어떤 문제점들을 야기하게 되는가를 검토하게 될 것이다.
2. 현존 신학의 역사적 발생 경위와 문제점
역사적으로 전승되어온 정통적 보수신학은 이 글의 관점에 따르면 태동 당시부터 문제를 잉태하고 있었다. 우리는 현존 보수신학의 근본적 문제점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이 점을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현존 보수신학은 주지하다시피 16세기 종교 개혁의 전통에 그 젖줄을 대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역사적으로 이루어진 신학 작업의 문제점을 좀더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 좀더 거슬러 올라가 초대 교회때부터의 신학 작업이 어떠한 정황과 동기에 의하여 이루어졌으며 그것이 어떻게 전승되어 왔는가를 알 필요가 있다.
성경66권의 기록이 종결된 후 초대 교회는 많은 이단과 그릇된 주장의 도전에 직면했고, 나름대로 변증적 차원(apologetical dimention)에서 응전의 논리를 성경을 통해 모색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교리화 작업, 즉 교의 신학(dogmatic theology) 작업(19세기까지만 해도 신학의 대명사는 교의 신학이었고 이것의 역사적 무게는 대단했다고 볼 수 있다)의 첫 출발이었다. 그때만 해도 성경을 요즘처럼 66권을 통권으로 볼 수가 없었다. 따라서 교리적 변증 작업은 성경 전체의 구조와 흐름속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당대의 도전 받는 내용에 따라서 파편적으로 이루어졌다.
이것이 바로 초대 교리사에서 나타나는 많은 교회 회의들, 즉 니케야 회의로부터 칼케돈 회의에서 이루어진 교리화 작업이다. 초대 교회는 그때 그때마다 발생하는 신학적 논쟁점들을 교회 회의 방식을 통해 검토했고 그 당시의 신학적 수준에 의해 교리가 구성되었다. 각각의 문제 제기에 따라 각각의 교리화 작업이 이루어진 것이다. 예컨대 삼위일체 논쟁, 그리스도의 양성론, 성령의 인격성 문제, 교회론 문제, 자유의지 문제, 죄론, 은총론, 예정론 등이 그것들이다.
5세기 초엽 어거스틴에 와서 집대성된 초대 교회 교부들의 신학 작업은 그야 말로 지속적이고 파상적인 신학적 신앙적 도전 속에서 이루어진 산발적, 단편적인 작업의 연속이었다. 필자가 볼 때 이것은 초대교회의 정황과 신학적 수준에 비추어 볼 때 불가피한 일이었으며 그 당시의 교리화 작업은 당대의 무서운 도전으로부터 교회를 보호하기 위한 최선의 방도이었고, 그 나름대로 교회를 지키는 임무를 수행했었다. 이런 변증적 차원의 교리화 작업은 중세 천년의 신학적 암흑기를 지난 후 16세기 종교 개혁당시에도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여기서 잠시 우리는 종교 개혁 당시의 신학 작업의 성격을 확인하기에 앞서서 중세 신학 및 교회의 타락화 과정을 살펴보는 것이 우리의 논의에 도움이 되리라고 판단된다. 어거스틴 이후의 중세의 신학 작업은 희랍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에 의해 철저히 각색된 혼합 변종의 신학이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이 분석될 수 있다. 우리가 조금전에 논의해 온 대로 초대 교회 400여 년을 거쳐온 신학적 작업이란 성경 자체의 포괄적 전망에 비추어 볼 때 너무도 파편화된 교리 구성이었다.물론 그것들 각각은 나름대로 중요성을 갖고 있었으나 그것들이 성경 전체의 논리와 증거에 의해 자리매김되지 못한 채 단편화된 교리의 집적의 상태로 후대로 계속 전승되어 갔기 때문에 그것은 포괄적인 세계관을 구성할 만한 논리적 체계를 형성하지 못했다.
진리의 진리됨은 체계에 있다. 우리는 어떤 단편적 진술을 진리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진리의 힘도 그 체계성에서 나온다. 그러나 초대 교회의 교리화 작업은 이 점에서 매우 심각한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사정이 이러할 때 중세에 유입된 희랍 철학(초기는 플라톤 철학, 중기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은 너무도 인본적으로 체계적인 논리와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다. 이 체계성의 싸움에서 그 결과는 자명했다. 중세 중기를 지나면서 중세의 신학작업은 철두철미하게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의해 교리가 재구성되는 비극을 맞이했다. 이것이 중세 신학의 타락화, 철학화 과정이다. 그것은 결국 초대 교회 교리의 비체계성에 그 원인이 있다.
이러한 중세를 개혁하고 나온 것이 16세기 종교 개혁이다. 그러나 종교 개혁기와 후대의 신학 작업은 초대 교회 상황보다는 훨씬 유리한 조건, 즉 성경66권을 통채로 볼 수 있는 상황속에서 진행되었으나 우리가 앞에서 지적한 대로 그 기본 성격은 동일하다고 볼 수 있다. 즉 성경 66권의 자체 논리와 통일된 의미를 찾아가는 신학 본연의 작업이기보다는 중세의 그릇된 신학의 도전으로부터 응전하고 개혁하려는 변증적 차원의 신학이었다. 그 결과 소위 이신 칭의, 만인 제사장, 성경권위라는 종교 개혁의 삼대 교리가 형성되었다. 이 중에서 특히 이신 칭의라는 구속의 관점은 후대 보수신학의 성격을 결정하는 해석학적 틀로 격상되어 가는 문제를 낳게 되었다.
그런데 우리가 이 글에서 문제 삼고자하는 근본적인 문제는 초대 교회나 종교 개혁 당시의 신학적 작업 그 자체에 있기보다는 이를 계승하는 후대 신학자들의 신학하는 입장과 정신에 있다. 신학 작업의 궁극적 이상은 성경이 말하는 구조적 논리와 증거를 통해 통일된 의미를 온전히 드러내는 데 있다. 모든 신학 활동은 이를 목적삼는다. 이를 위한 방편적 연구로써 우리는 과거 기독 교회사와 성경의 언어와 기록 당시의 역사적 배경, 그리고 수많은 교리에 대한 검토를 수행한다. 이 말은 성경 자체의 구조적 논리가 드러나기까지는 역사적으로 형성되어온 교리는 당대로서는 나름대로의 의미를 가지지만 그것들은 어디까지나 절대적 성경의 귄위 아래 존재하는 잠정적인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올바르게 추출된 부분적 교리들도 성경 전체의 맥락에 의하여 자리매김되어야 함을 뜻한다. 이것이 성경의 권위를 주장하는 진정한 보수신학을 수행하는 올바른 태도이며 정신이다.
그러나 종교 개혁 이후에 계승되어온 보수신학의 신학적 작업은 이러 하지 못했음을 우리는 직감한다. 즉 과거의 전통적 교리 그 자체를 너무도 중요시한 나머지 교리의 형성 과정에 개입된 오류와 부분적 해석의 틀을 문제시하는 올바른 신학적 태도를 갖지 못한 채 교리 자체의 경직된 수호에 급급해 왔다. 그리하여 교리적 정당화를 위하여 성경의 부분을 인용하는 주객 전도의 신학 작업이 수행된 것이다. 말하자면 후대 신학자들이 그 이전 시대의 교리의 시대적 제한성을 직시하지 못한 채 각 시대별로 논리적 연결점을 확보하지 못하고 구성된 교리의 단편적 집적 그 자체를 금과옥조로 받아 들임으로써 각 교리들 간에 상충하는 모순을 안고 있는 비체계적 신학을 전승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이런 현상이 낳는 가장 결정적인 오류는 소위 교리주의적 해석의 문제점이다. 애초에 교리는 성경의 어떤 부분에 의해 구성된 것인데, 나중에는 그 부분적인 해석의 결과인 단편적 교리가 성경 전체를 해석하는 틀이 되어 성경보다 우위에 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의 가장 전형적인 예가 바로 구속사적 성경 해석이다. 인간의 구원의 문제를 근본 원리로 하여 성경 전체를 해석해 나가는 것이다. 우리는 이 글에서 이 문제점을 상세히 설명할 여유가 없다(여기서 분명히 해 둘 것이 있다. 이 글의 관점인 언약사적 성경 해석이 그리스도를 통한 인간의 구원의 문제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결코 아니다. 단지 그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의 계시의 방편임을 지적하는 것이다. 이를 더 자세히 알고 싶으면 지난호 필자의 글을 참조할 것). 이 글에서 주로 지적하고자 하는 문제는 보수신학의 과거와 현재의 작업이 어떤 배경과 동기에서 이루어졌으며 그것이 현재 안고 있는 문제를 지적하고자 하는 것이다. 요컨대 현존 보수신학은 출발 당시의 역사적 정황과 후대 신학자들의 그릇된 신학 태도 때문에 성경 자체의 구조적 분석과 이해에 이르지 못한 채 교리주의의 질곡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신학의 다른 맥을 형성하고 있는 자유주의 신학의 문제점을 검토할 차례이다. 일반적으로 자유주의 신학은 18세기 칸트를 위시한 서구라파 계몽주의 철학의 영향권에서 생겨난 신학으로 이해된다. 이 말은 대체로 타당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의 문제는 복합적인 원인을 가진다. 그래서 우리는 이 글에서 보다 다른 측면에서의 자유주의 신학의 발생 동기를 분석해 보고자 한다. 아마도 필자가 볼때 여기서 분석하고자 하는 원인이 보다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으리라고 판단된다.
19세기에 개화하고 20세기 현재 만발한 자유주의 신학은 18세기에서 부터 움트기 시작했다고 보아진다. 즉 자유주의 신학의 애초의 출발점은 17세기의 신앙 고백형성기를 지나면서 고착화 되어간 경직된 교리주의적 신학과 교권적 교회의 풍토에 대한 철학적 반동이었다. 16세기 종교 개혁의 비판적 돌파력과 열기가 17세기에 접어들면서 구라파 일대가 개신교의 영향권에 들어 가게 되자 점차 식어 갔고 다른 주장들의 도전앞에 방어적인 교리형성의 단계를 거친다. 여기서 우리가 앞에서 지적했던 단편화된 교리주의적 신학 작업의 문제점을 노출하게 된다. 이것은 교회의 교리적 교육의 방식을 통해 더욱 강화되고 경직화되어 갔다.여기에 문제를 느낀 자들이 자유주의 신학자들이다. 자유주의 신학의 아버지 격인 슐라이에르막허는 당대 보수 교회의 단편적인 교리의 주입과 교육에 강한 불만을 표시했다.
우리는 이 때의 분위기를 다음과 같이 그려 볼 수 있다. 교회에서 자랐지만 철학의 날카로운 질문에 노출되어 있었던 자들은 단편적인 교리로서는 해답이 안되는 보다 근본적인 질문을 퍼부었고 기존의 교회는 그 질문들을 겸허하게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 제기 자체를 원천적으로 억압 봉쇄했다. 그럴수록 더욱 교리를 절대적으로 강조하게 된다. 교권적 억압에 의한 강요는 일시적으로 문제를 미봉하는 듯하지만 실상은 더욱 문제를 심화 확대시킨다. 단편적 교리의 주입(소위 오늘날까지도 보수 교회안에 있는 대요리, 소요리 문답식 교육)에 의한 교육 방식은 성도의 신앙적 지성을 구획화, 폐쇄화 시키면서 점차 보수 교회의 생동감을 약화시켜 갔고 여기서 근원적 해답을 얻지 못한 자들은 점차 중세가 그랬던 것처럼 철학에 기대어 해답을 얻고자 했다. 18세기의 칸트와 19세기의 헤겔이 그들의 구원자였고 그들의 발걸음을 인도하는 등불이 되었다.
이렇게 해서 자유주의 신학은 본격적인 깃발을 올리게 되었고 신학의 자유화, 즉 성경의 절대적 권위로부터의 자유를 제창하며 소위 역사 비평이라는 신학적 방법론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자유주의 신학은 이 방법론에 의하여 성경을 비판적으로 분석하기 시작했고, 보수신학의 신학적 모순과 교권적 권위주의, 그리고 율법주의에 의한 신앙적 무력성을 정면적으로 도전했다. 이것이 19세기로부터 현재까지 약 200년 동안을 독일을 시발점으로 하여 전세계를 휩쓸어 버린 자유주의 신학의 위세였다. 자유주의 신학의 기본 방법론인 역사 비평의 인식론적 배경에는 칸트가 있다. 칸트에 의하면 현상계를 초월해 있는 신에 대한 지식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칸트의 인식론적 주장에 의하면 신지식으로서의 계시란 근본에서부터 가능하지 않으며 모든 인식은 현상계에 국한되고 신은 인간의 도덕적 삶을 위한 요청일 뿐이다. 소위 칸트가 말한 대로 도덕적 이성의 한계내에서의 종교일 뿐이다. 여기서 성경 계시의 역사화, 기독교의 도덕화가 이루어졌다.
역사 비평의 핵심은 이러하다. 성경 각 권이 역사적 정황에 의해 인간이 기록한 것이므로 오류가 있을 수 있으며 그것은 불가피하게 시대 정신을 반영한다. 그리고 각 권의 내용은 다양성을 띨 수밖에 없으며 성경 전체의 통일성 운운은 아예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벨하우젠을 위시로 하는 성경의 문서설은 이를 강력히 주장한다. 이것이 좀더 과격하게 진행된 궁켈의 종교사학파의 입장인 범바벨론주의에 의하면 성경의 내용은 전통적으로 믿어 오던 것처럼 독자성을 가진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주변 지역, 특히 바벨론으로부터의 유입의 산물이라고 본다. 이쯤되면 기독교는 절대적 계시의 종교가 아니라 중동 지방의 여러 종교중 하나에 불과한 신세가 되고 만다. 이들의 주장을 결정적으로 지지하는 것은 성경 자체가 도무지 내용의 통일성을 확보하지 못하고 다양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 전통적 보수신학은 성경이 한 분 성령의 감동으로 영감된 책이므로 그럴 리가 없다는 막연한 변명만을 교의 신학적인 입장에서 해왔을 뿐 구체적인 대안 제시에 실패했다. 다시 말해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므로 의미의 통일성이 있어야 한다는 당위적 수준의 주장만 있었지 그것을 성경자체의 논리와 증거에 의하여 입증하는 일을 해 내지 못했다. 그러나 이 말이 보수신학 입장에서 아무런 시도가 없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보수신학이 성경의 통일성에 대해 가지고 있는 유일한 방어적 논리가 바로 구속사적 해석의 틀이다. 그러나 이 글이 취하는 언약사적 성경신학의 입장에 의하면 이 해석의 논리는 너무도 많은 논리적 취약점을 가지고 있다. 간단히 말하자면 구속의 관점은 성경의 부분적 내용이지 결코 그것이 성경 전체를 포괄하는 원리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만약 구속사적 관점으로 성경 전부를 해석하려고 했을 때 그것은 엄청나게 많은 질문을 대면하게 된다. 이것을 날카로운 철학의 논리로 무장된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모를 리가 없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눈에 비친 보수신학의 구속사적 논리는 개인의 자기 구원 문제로 급급한 유아적인 주장으로 밖에 보이질 않는다. 물론 보수신학의 결정적인 교의 신학적 논리의 진원지인 칼빈에 의하면 성경의 중심 사상은 인간의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에 있음을 말했다. 그의 예정론에 의하면 인간의 선택과 유기 양자는 하나님의 주권적 뜻임을 명백히 했다. 인간의 구원은 하나님의 절대적 예정과 은혜의 선물임을 분명히 했다. 그는 또한 심지어 인간의 죄까지도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있음을 성경의 단편적 귀절을 통해 정당화 했다. 그러나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는가에 대한 주장을 성경을 통해 명백히 하지 못하고 미궁으로 남겨 놓았다. 이것 때문에 칼빈 이후의 보수신학은 점차 성경의 중심 사상이 하나님 영광 중심보다는 인간의 구원의 문제로 기울어 지게 되었다.
이 문제점을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파고 드는 것이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사랑의 속성을 근거로 예정론에 나타나 있는 인간의 유기의 문제를 비판했다(이 주장의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칼 바르트이다). 즉 하나님이 사랑이신데 어떻게 인간을 영원안에서 유기, 즉 멸망하기로 정해 놓으셨겠는가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보수신학이 주장하는 대로 만약 인간의 구원의 문제가 성경의 핵심사상이라면 개인 구원을 넘어서서 인류 전체를 염두에 두는 사회 구원쪽으로 진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한편으로는 보수신학의 은혜에 의한 구속적 주장의 원천적 근거였던 예정론을 부정함으로써 구속사적 주장의 뿌리를 잘라 버렸고,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의 구원이 성경의 중심이라는 후대 신학자들의 주장을 역이용하여 더욱 확대된 자기들의 주장의 근거로 삼아 버리는 것이다. 이쯤되면 구속사적 주장을 하는 보수신학은 자유주의 신학자 앞에서 고양이 앞에 도망칠 곳을 찾는 가련한 생쥐 격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현존 신학(보수신학과 자유주의 신학)의 역사적 발생 경위와 문제점을 개략적으로 고찰했다. 지금까지 논의된 내용의 핵심은 성경 내용의 통일된 의미의 확보가 가능한가로 압축된다. 보수신학은 성경이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므로 통일성이 있다고 막연히 주장만 했을 뿐 성경 자체의 논리와 증거에 의해 그 주장을 입증하지 못했다. 유일한 대안이 구속사적 논리이지만 그것의 심각한 헛점을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훤히 알고 있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보수신학의 비체계적이며 파편화된 교의 신학에 반발했고 철학적 세계관에 의지하여 그들의 신학 작업을 수행했다. 그의 산물이 성경의 통일성과 독자성을 전면 부정하는 역사 비평적 방법론이다. 이렇게 볼때 만약 성경의 통일성이 성경 자체 그리고 성경 전체의 구조적 논리에 의해 입증된다면 보수신학과 자유주의 신학 양자를 포함하는 현존 신학의 결정적인 문제를 해결하게 됨을 알 수 있다. 즉 성경의 통일성이 해명 확보되면 보수신학이 안고 있는 비체계적 교의 신학의 문제도 극복 해소되며 그리고 성경의 통일성을 부정하는 가장 강력한 방법론인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역사 비평 방법론의 허구적 주장도 격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은 이런 신학적 문제의 배경을 의식하면서 선지서에 관한 종래의 해석의 관점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자 한다. 이 글이 취하는 입장은 언약사적 성경신학에 근거한다. 성경신학은 언약과 성취의 틀에 의해서 성경의 통일된 의미를 확보했다고 주장한다. 성경신학의 특징과 성격은 이 글이 진행되면서 압축적인 방식으로 그 전모를 드러낼 것이고 독자는 이 글을 읽어 가면서 그 논리와 주장이 과연 성경의 맥락적 흐름과 부합하는지 검토하기 바란다.
성경신학은 성경이 40여 명의 기자에 의해 쓰여진 책이지만 실상은 성령 한 분의 영감에 의해 기록되었으므로 의미적으로 통일될 뿐 아니라 성경의 어떤 부분도 성경 전체의 구조적 논리와 전후 맥락에 비추어 해석 되어져야 함을 주장한다. 따라서 이 글이 해명하고자 하는 선지서의 내용도 선지서 그 자체로 독자적으로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니라 신구약 전체의 조망 속에서, 그리고 달리 표현한다면 일관된 신학적 관점에 의하여 이루어 질 것이다. 이러한 점이 종래의 선지서 해석과는 전혀 차원을 달리하는 점일 것이며, 이 점에서 이글의 제목을 선지서 재해석이라고 했다.
3. 선지서 해석의 다양 관점에 대한 비판적 고찰
성경의 어떤 부분에 대한 해석이라 할지라도 거기에는 이미 모종의 성경관과 해석의 관점이 반영되기 마련이다. 우리는 여기서 선지서 해석에 대한 대표적인 몇가지 입장의 관점들을 검토하면서 올바른 성경적 관점이 무엇인지를 확인해 가도록 하겠다.
먼저, 가장 오래된 해석의 관점을 가지고 있는 보수신학의 입장부터 검토해 보기로 하자. 우리가 위에서 살펴본대로 16세기 종교 개혁으로 부터 전승되어온 보수신학의 성경관은 너무도 건전하다. 즉 66권 모두가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임으로 통일성이 있다고 가정한다. 따라서 선지서도 인간이 기록했으나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계시임을 믿는다. 오늘날 대표적인 보수신학권의 구약 신학자 중 한사람인 월터 카이저에 의하면 이 점을 다음과 같이 잘 지적한다.
성경을 보면… 그것들이 다른 어떤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일관성과 통일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알수 있다. 그러나 성경의 초점은 각각 하나 하나의 행동이나 사건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사건들을 말씀하셨고 이미 영원전에 계획하신 결론대로 움직여나가는 역사를 주관하시는 영원하신 하나님 그 분께 있다. 사실 예언이란 하나님의 사역에 속한 한 자연스런 부분이며,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므로, 예언은 하나님 품성의 하나로 간주할 수 있다(카이저,1991,17~18).
보수신학의 대체적인 견해는 위의 카이저의 입장과 대동소이하며 일단 선지서를 바라보는 건전한 입장에 있어 보인다. 그러나 우리가 드러 내고자 하는 보수신학의 선지서 해석의 문제는 성경의 통일성을 무엇에서 찾으며 구체적 선지서 해석을 어떻게 하느냐를 보면 알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앞장에서 길게 검토해 온 보수신학의 역사적 발생경위에서의 문제점을 확인하게 된다. 현존 보수신학의 성경의 통일성은 종교 개혁의 유산인 구원중심의 통일성, 즉 구속사적 관점을 취한다. 이 관점에 의하면 선지서의 예언은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러 오실 그리스도에 대한 내용으로 이해된다.
이에 대해 이번에는 국내의 보수적 구약 신학자였던 홍반식의 말을 들어 보기로 하자.
구약 성경의 전반에 걸쳐 흘러 내리는 중심사상은 하나님의 영광과 구원인데, 이 진리를 증거하는 성경의 일반적인 기사의 궁극적 적용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에 연결되는 것이니 이러한 성경 부분을 일반적으로 메시아 예언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이 메시아 예언은 진전성을 가지고 있어서 )선지서 특히 이사야에 나타난 처녀의 아들…하나님의 고난의 종 등의 메시아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완성하신 구속사역을 한층 더 세밀하게 진전된 차원에서 서술하는 사실을 알 수 있다(홍반식,201).
이 구속사적 관점은 매우 오래된 전통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성경의 여러 부분들이 지지하기 때문에 적어도 성경의 신적 계시를 믿는 자들에게는 틀림없는 진리로 무게를 지녀 왔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선지서 전체를 포괄하는 해석의 관점이 될 것인가를 질문하게 될 때 문제는 그리 만만치를 않다. 선지서는 구원과 회복만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불의에 대한 고발과 책망, 그리고 재앙과 멸망의 선포도 동시에 있다. 선지서의 분량과 논조로 볼 때 후자의 측면은 결코 무시될 수 없다. 그래서 보수신학의 타협안이 나오게 된다. 즉 어떤 부분은 구속주 메시아 예언이며 다른 부분은 불신앙의 삶에서의 회개를 촉구하는 예언으로 간주한다. 그래서 선지서를 성도의 생활에 대한 윤리적 책망과 권고로 사용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소위 조건적 예언이라는 명제를 사용하는 결정적 오류를 범하게 된다.
카이저에 의하면 선지서는 명백히 조건적 예언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는 특정한 범주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즉 예언의 성취가 인간들의 어떤 행동과 반응들의 결과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카이저는 이것이 하나님의 주권과 배치되는 것이 아닌가라고 스스로 반문하면서 양자의 문제를 해소하려고 애쓴다. 카이저는 이 문제를 논의하는 후반부에 가서 선지서의 모든 예언이 조건적이 아니라는 언급을 한다. 즉 어떤 예언들은 무조건적 구원을 위한 약속이어서 인간의 공로와는 무관하게 성취됨을 말한다. 그러나 조건적 예언들은 그 성취 상황이 지연되거나 앞당겨 진다고 말한다. 이렇게 하여 선지서에는 인간의 구원을 위한 약속이 포함된 무조건적인 예언과 인간의 행위여하에 따라 성취가 결정되는 조건적 예언이 함께 있다는 것이다.(카이저,1991,67~75) 이 조건적 예언이 성도 생활의 행동 촉구로 해석되고 쓰여 지는 것이다. 여기에 이미 두가지 상이한 해석의 잣대가 적용되는 문제를 안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일관성있는 해석은 어렵게 된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재앙과 멸망의 부분이 여전히 남아 있는데 이는 어떻게 처리되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구원과 멸망이란 명백한 모순적 내용인데 이것이 선지서에 동시에 포함되어 있다. 과거 보수신학에서의 해석은 전자에만 국한시켜 해석하는 경향이었고 최근에는 예언자의 예언을 듣지 않아서 멸망했다고 하는 것을 언급한다. 이것은 시내산 언약의 근거에 의한 것이라는 것이다. 즉 시내산 언약에 의하면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를 잘 지키면 영영히 복을 받게 되고 못지키면 멸망케 된다고 했는데 유다 백성들이 불순종함으로 멸망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한 선지서 안에 불순종한 인간을 구원시키기 위해 예수를 보내준다고 하는 내용과 불순종하면 멸망한다는 내용이 팽팽히 맞서고 있는 꼴이 되고 만다. 진리는 모순의 해소를 통해 그 진리됨을 확증한다. 모순으로 보이는 구원과 멸망의 문제가 어떻게 해석학적으로 해결되는가? 이것이 선지서 해석의 가장 결정적인 난점에 해당한다. 보수신학이 이점에 대해서 명쾌한 해답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을 때 자유주의 신학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문제 해결을 시도했다.
성경의 예언이란 성경신학적 입장에서 보았을 때 하나님의 작정과 역사 지배의 주권을 가장 강력하게 표현하는 계시의 방식이다. 왜냐하면 예언이란 이미 어떤 계획을 논리적으로 전제하며 그리고 그 예언은 뒤에 이루어질 성취를 함축한다. 계획없는 예언이란 성립할 수 없고 성취를 포함하지 않는 예언의 개념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언의 근거는 작정된 계획이며 한 번 예언된 내용은 반드시 성취될 때 그 예언은 참 예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예언과 성취의 주관자로서의 하나님의 존재를 확증해 준다. 그러나 성경이 하나님의 계시임을 부정하고 하나님의 역사의 절대적 지배에 대해 회의를 품으며 인간의 자유 의지에 의한 역사 주도권을 신뢰하기 시작한 자유주의 신학자의 눈에는 예언이 미래에 대한 일을 미리 예고하고 또한 그것이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등의 말은 어불성설로 비쳤다. 그래서 현대로 올수록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예언이란 앞으로의 사실을 미리 예고하는 것이 아니라 사건이 일어난 후의 기록이라는 사후 예언의 개념을 만들어 내었다(카예,23). 이렇게 하여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로서의 성격을 완전히 부정해 버렸고 예언은 단지 시대의 문제에 대한 역사 의식의 산물로서 불의한 시대를 향한 정의감과 윤리적 분노의 표현으로 이해했다.
특히 위에서 언급한 대로 보수신학자들이 해석하기 어려워 하는 선지서의 재앙과 멸망의 종말론은 선지자들의 윤리적 분노의 자연적 산물로서 처리된다(보스,319). 다시 말해 그것은 미래의 종말에 이루어질 내용이 아니라 현 시대의 불의에 대한 윤리적 분노를 그런 방식으로 표현했다는 것이다. 이들이 선지서에서 취하는 신관은 윤리적 유일신론이다. 생각의 배후에는 이스라엘의 초대 제의 종교가 예언자들에게 이르러 윤리종교로 변모하였다고 보는 발전론적 견해가 지배적이다.민속종교가 개인 종교로, 다신론이 유일신론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장일선,1982,31). 여호와는 정의로우시고 약하고 가난한자의 편이시라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과 표준에 의하여 선지서의 미래의 약속적이고 종말론적인 것은 선지자들의 환상적인 기대로 치부되고 점차 본문 비평에 의하여 해석의 중심부에서 배제되었다(보스,233,318). 구약의 양식 비평가인 궁켈에 의하면 동방의 고대 종말론이 선지서에 유입되어 들어 왔다는 견해를 표명함으로써 선지서를 분할 비평하고 통일성을 제거 시켜 버렸다.(보스,320)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자기의 구미에 맞는 것만을 선택하고 나머지는 배제하는 격이다.
이는 인간의 윤리적 이성의 권위 아래 성경을 굴종시키고 난도질해 버린 것이다. 그 결과 인간의 도덕적 이상을 하나님에게 부과하여 신을 인간의 자기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도구로 삼고 말았다. 이는 칸트의 도덕적 요청으로서의 신존재의 신학적 적용이다. 이 말을 좀더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옳고 그름의 가치판단은 이미 인간의 이성이 내려 놓고 그 기준대로 신은 역사를 심판해야 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래서 신은 정의롭고 가난한 자의 편에 서야 한다는 것이다. 이때 정의의 규정은 인간이 이미 설정한 대로이다. 신이 심판자라는 것은 언어적 표현일 뿐 실상은 인간이 규정해 놓은 정의의 규범을 따라야 하는 인간의 종이다. 요컨대 신이라는 절대적 허울을 빌려 인간의 윤리적 자기 주장의 실현을 꾀하는 철저한 인본주의적 계략이다. 여기서 자유주의 신학의 반신앙적 철학적 진면목이 드러난다. 그러나 성경에서 하나님이 정의(공의)로우시다는 것은 우리 인간의 수평적이고 윤리적인 정의의 개념과는 완전히 차원을 달리한다. 그것은 윤리적 개념이 아니라 계시적 개념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뜻대로 역사를 진행시키고 심판하신다는 것이다. 구원받기로 정한 자를 구원시키고 바로처럼 멸망받기로 정한 자를 멸망시키는 것이 당신의 의로우신 행위인 것이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능력의 영광을 계시하시는 것이다. 철학적 사유에 붙잡혀 있었던 자유주의자들은 이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는 오늘날 보수신학자들에게도 마찬가지로 드러난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사실은 이와 같은 파괴적인 역사 비평 작업과 철학적 전제에 의해 설명되는 선지서의 사회 윤리적인 해석이 오히려 보수신학의 구속사적 설명과 개인적 행동 촉구의 이중적 설명보다는 더 설득력을 지니고 있어 보인다. 그리하여 보수신학권에서도 이를 하나님의 공의를 설명하는 논리로 수용하고 이제는 점차 하나의 목소리로 자리 잡아 가고 있는 실정이다. 그리하여 이제 보수신학의 선지서 해석은 갈피를 잡지 못한 채 다양 기준의 적용으로 지극히 혼란스럽게 되었고 자유주의 신학의 해석에 대한 방어는커녕 오히려 그들의 입장에 동조하는 진풍경이 일어나고 있다.
이제 마지막으로 미래 예언 중심의 종말론적, 묵시적 해석의 문제점을 검토해 보기로 하자. 이는 주로 시한부 종말론자들이나 현실 도피적인 성향을 가진 신비주의자들의 관점이다. 이들은 뚜렷한 신론이나 기독론,인간론과 같은 신학적 논리를 갖추고는 있지 않지만 현실적 영향력은 만만치가 않다. 이들은 주로 기성교회가 성도에게 신앙적 평안을 주지 못하고 사회적으로 매우 불안정할 때마다 그 틈바구니로 파고 드는 독버섯과 같은 주장이다. 이들은 현재 계시가 계속된다는 그릇된 계시사상을 가지고 선지서를 세상 종말과 직접적으로 관련시켜 과격하게 해석함으로써 예수님의 재림 날짜를 언급하고 매우 현실 도피적인 이원론적인 생활을 영위한다. 이는 선지서를 포함하는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자기 계시라는 기본적 진리의 무지에서 말미암는다. 선지서의 예언은 실제 미래의 사건을 예고해 주는 데 그 근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역사적 예언과 성취를 통하여 하나님이 어떠하신 분이심을 계시하려는데 있다. 다시 말해 선지서를 통하여 미래 사건의 예고의 목적인 신지식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사건 자체에 관심을 집중시키게 되면 선지서는 계시의 말씀이 아니라 미래의 길흉을 예시해 주는 점술적 책으로 전락되고 만다. 뚜렷한 신학적 입장을 갖지 못한 신비주의자들은 선지서를 이렇게 사용한다.
과연 선지서의 해석의 올바른 관점은 무엇인가? 보수신학의 구속사적 해석과 개인 생활에 대한 회개 촉구의 이중잣대를 극복하고 역사 비평에 의한 자유주의 신학의 사회윤리적 해석을 근본적으로 비판하는 관점은 무엇인가? 그리고 미래의 길흉을 예시하는 점술적 관점을 가진 신비주의적 해석을 배격하는 성경적 관점은 무엇인가? 이는 다름아닌 계시적 관점이라고 성경신학은 주장한다. 이 말은 보수신학에서는 기본적으로 사용하는 말인 것처럼 들리지만 그 구체적 내용을 따져 보면 그 성격을 달리 한다. 보수신학은 전통적으로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라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실제 성경의 해석은 앞장에서 살펴본 대로 인간의 구원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이는 성경의 근본 기록 목적과는 위배된다. 성경은 타락하여 만물을 보고서는 하나님을 알 수 없는 인간에게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하나님 자신을 계시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이며 그것을 읽는 사람은 하나님 지식에 궁극적으로 촛점을 맞추어야 한다. 인간의 구원의 문제도 성경의 중요한 주제임에는 틀림없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을 계시하는 하나의 방편이다. 요컨대 계시적 관점이라는 것은 성경 자체에 붙박혀 있는 내재적 해석적 원리라는 것이다. 여타 모든 관점들은 성경 밖의 인간의 철학적 전제나 실제적 필요에 의해 구성된 것이다.
이렇게 볼때 선지서의 해석의 관점은 명료해 진다. 우리는 선지서에서 여러 가지를 얻으려고 노력해서는 안된다. 단 한 가지 목적에 집중해야 한다. 선지서는 인간사의 윤리적 지침을 말하는 것도 아니며 미래의 길흉을 예고하는 것도 아니다. 또한 인간의 구원에 국한되어 해석되어서도 안된다. 유다의 멸망, 구원 및 회복을 통해 이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어떠하신 분인가에 집중되어야 한다.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던지고 이 장의 논의을 마무리 하고자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선지서의 내용만을 잘 살펴보면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지식을 얻을 수 있는가? 다시 말해 정당한 해석의 길이 열리는가이다. 우리의 해답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66권은 실제 한 권으로써 구조적인 연결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선지서의 온전한 해석은 성경전체의 맥락 속에서만 가능해 진다. 우리는 이 문제를 다음 장에서 논의하도록 하겠다.
4. 선지서의 구조적 이해
인간의 죄성에 의한 자기 중심적 편협성은 사물을 전체적으로 구조적으로 이해하는데 매우 장애를 일으킨다. 그러나 우리가 사물의 실상을 조금만 깊이 들여다 보아도 구조적 관점을 가지지 않고서는 도무지 사물의 본질을 설명할 수가 없음을 알게 된다. 인간의 신체의 장기를 예를 들어 보자. 각각의 장기는 인간의 몸전체를 이루는 요소들이다. 이때 각 요소들을 분리시켜 각각의 기능과 역할을 이해할 수가 있는가? 초보적인 의학 지식만 있어도 그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모든 장기는 서로 유기적이며 구조적인 관계 속에서 그 기능이 수행되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이해하고자 하는 대상 세계는 구조적 성격을 띠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일반 계시적 현상이 이러한데 하물며 특별계시의 산물인 성경은 더욱 그러함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성경은 다양한 사건과 교훈들의 모음집으로 보인다. 그리고 여러 시대의 여러 기자들에 의해서 다양한 서술 방식으로 기록된 책이다. 그러므로 내용들도 다양성을 띨 수밖에 없다. 이것이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평면적이고 피상적인 성경이해의 수준에서 말하는 내용이다. 그들은 도무지 성경의 요소를 이루고 있는 다양한 사건과 교훈 그리고 예언들이 모종의 내면적 질서에 의하여 구조화 되어 있음을 파악하지 못한다. 그러면 성경은 도대체 어떤 구조적 논리의 틀이 있는 것인가? 어떤 성경의 부분을 해석하려고 할 때에도 이것이 먼저 해명되어야 한다. 이 논리가 정립되지 못한 채 성경의 어떤 부분에 대한 해석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은 것이다. 선지서 해석도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볼때 우리는 선지서를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성경전체의 구조적 성격을 파악해야 하며, 그 구조속에서 선지서를 자리매김해야 하고, 그런 다음 선지서 자체의 구조적 의미를 분석해야 함을 알 수 있다. 문제는 성경 전체의 구조적 논리의 파악이다. 성경신학에 의하면 성경은 오랜 기간 여러 기자에 의해 기록되었지만 한 분 성령에 의해 영감되어 기록되었기 때문에 구조적인 통일성이 있다고 상정하고 그것을 탐색한 결과 그 논리를 찾아 냈다. 그것은 다름아닌 언약과 성취의 논리인 것이다. 이 언약과 성취의 논리는 종래 구속사적 보수신학의 주장과는 근본적으로 상이하다. 종래 보수신학에서도 언약과 성취의 언급은 있어 왔다. 여기서 그 차별성을 모두 언급할 수 는 없지만 가장 중요한 점만을 지적하자. 구약에서 최초의 언약을 무엇으로 보느냐이다. 기존 보수신학에 의하면 언약의 출발점을 아담과 맺은 행위 언약, 즉 선악과 금과법으로 이해한다. 이 행위 언약이 아담의 타락으로 파기된 후 하나님께서는 구원을 약속하시는 것(창3:15)으로 되어 있다(핑크,14).
물론 언약에 대한 보수신학적 입장의 대표적인 견해를 제시하는 핑크같은 자들은 아담이전 영원한 언약을 언급한다. 그러나 핑크는 이 영원한 언약의 첫 번째 근원적인 공포는 창세기3:15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사역으로 간주함으로써 구속사적 언약 이해의 전형을 보여준다.
그러나 언약사적 성경신학에서는 아담과의 행위언약 이전에 은혜언약(더 근본적으로는 영원 안에서의 언약이 있음)을 맺었음을 강조한다. 즉 창세기 1장28절이 그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영원 안에서 언약을 하셨고 그것을 창세기 1장28절에서 최초로 표현하셨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면 이 양자의 차이점이 어떤 결과를 낳는가를 분석해 보자. 구속사적 보수신학에서는 행위 언약이 근간이 되고 인간이 이를 범함으로 타락했고 그 이후의 언약은 인간의 구원을 위한 방편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성경신학에서는 은혜 언약이 근간이 된다. 은혜를 은혜로 깨닫게 하기 위하여 아담을 행위언약 아래 가두고 죄를 깨닫게 한다. 그 죄에도 불구하고 은혜언약은 신실되게 이루어짐을 열조와의 언약을 통해 확증함으로써 하나님의 영원하신 은혜를 드러내는 데 있다. 그러므로 보수신학에서의 언약의 목적이 인간의 구원이라면 성경신학에서의 언약의 목적은 하나님의 자기계시에 있다. 즉 행위언약 아래서의 타락과 은혜언약에 근거한 구원이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방편으로 이해되는 것이다. 위의 논의에서 드러난 언약의 성격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선지서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근거가 된다. 왜냐하면 구약은 언약의 올바른 이해의 토대 위에서라야 그 구조적인 전모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성경신학에 의하면 구약의 역사는 언약의 성취 섭리 과정으로 짜여져 있음을 주장한다. 아담과 맺은 삼대 언약(창1:18)은 아브라함에게 계승되고 이는 구약 역사를 통해 그대로 성취된다. 즉 자손, 땅, 통치 언약이 다윗 시대까지 와서 어김없이 실현된 것이다. 그런데 선지서의 역사적 위치는 다윗과 솔로몬 이후 나라가 남북으로 나누어진 후 타락과 부패의 역사가 계속 진행되는 왕정시대 말부터 바벨론 포로기와 포로 후기에 놓여 있다. 이 시기 동안 선지자의 예언은 다름아닌 그 이전 시대의 열조와의 언약, 시내산 언약 그리고 다윗과의 언약을 근거로 선포된다. 그러므로 선지서의 이해는 앞에서도 언급한 대로 선지서 자체의 이해만으로는 불가능하며 그 이전 구약 역사에 대한 구조적 이해, 특히 그것의 핵심을 이루는 언약의 성격에 대한 이해를 필요로 한다.
성경에 나타난 언약은 위에서 언급한 대로 성격상 두 가지로 분류된다.하나는 은혜언약이고 다른 하나는 행위언약이다.(이 구분 방식은 전통적인 보수신학에서의 언약의 구분 범주이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이분법적 구분을 전면적으로 수용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전통적 입장의 문제점을 지적하기 위한 논의의 방편상 사용하는 것 뿐이다. 역사적으로는 인간의 행위 여하에 따라 복과 저주가 결정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결국 신학적 해석을 가해야 하며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사역을 가르치는 것이다. 따라서 행위 언약이란 표면적 성격을 뜻할 뿐이며 의미적으로는 그것 역시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실 하나님의 언약적 은혜를 말한다. 전통적 구분에 대한 새로운 비판적 재해석을 위해서는 별도의 논의가 더 필요하리라고 본다) 전자의 대표적인 것은 열조와의 언약이고 후자는 시내산 언약이다. 선지자들은 시내산 언약에 근거하여 불순종한 유다 백성들이 예루살렘에서 멸망하고 뽑힘을 받아 이방의 저주거리가 될 것을 말한다. 그러나 열조와의 언약 그리고 그것과 같은 성격인 다윗과의 언약(그 나라가 영원히 등불이 꺼지지 않는다는 약속) 때문에 아주 멸망하지 않고 다시 회복 될것을 약속 받는다. 여기서 선지서의 특성이 드러난다. 선지자들은 다윗 왕조의 후대부터 바벨론 포로 시기와 바벨론 포로 이후 시기까지 활동한다. 이 시기는 이스라엘의 언약사적 역사가 많이 진행된 시기이며 그 언약의 역사가 구약의 역사 후기에 어떻게 이루어지느냐를 보여주는데 매우 중요하다. 즉 열조와 맺은 삼대 언약이 역사를 통해 신실하게 이루어질 뿐 아니라 그 언약의 성취로 이루어진 다윗 왕국이 유다 백성의 타락과 관계없이 언약대로 그대로 보존되는가이다. 역대기에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대로 유다 백성의 죄악은 이루 말할 수 없었으며 심지어 열방보다 더욱 심했었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언약으로 이루어진 다윗 왕국이 보존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여기에 구약에서의 선지서의 복음적 의미가 자리매김 된다.
선지서는 타락 부패한 유다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뜻의 전달을 포함한다. 그 뜻은 다름아닌 이전 역사에서 선포되고, 성취되어온 언약에 근거하여 제시된다. 모든 선지서는 크게 보아 두 부분으로 내용상 구별된다. 즉 선지서 전반부에는 행위언약(시내산 언약)에 근거하여 불순종한 유다 백성들을 멸하시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에는 징계와 재앙에 대한 선포로 가득차 있다. 그러나 선지서 후반부에는 행위 언약보다 먼저 주어진 열조와의 언약과 나중에 다윗을 통해 재확인된 은혜언약때문에 아주 멸망시키지 않고 회복시켜 주시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선지서의 일관된 구조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때리시지만 싸매시겠다는 것이다. 이 선지서의 구조를 전체적으로 파악하지 못해 전반부만을 보면 인간의 행위대로 징벌하시는 인과응보의 신을 소개하게 되는 오류를 범하게 되며 뒷부분의 회복 내용만을 강조할때는 시내산 언약의 무효화를 결과하는 오류를 범한다. 따라서 선지서의 구조적 이해의 중요성이 드러나는 것이다.
결국, 구약에서의 선지서는 열조와의 삼대 언약이 성취된 다윗 왕국이후의 역사 전개에서 유다 백성의 타락에도 불구하고 이미 한번 맺은 은혜언약이 그대로 유지되는가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잘 보여 준다. 때리시고 싸매시는 행위를 통해 행위 언약과 은혜언약이 하나도 어김없이 온전히 성취됨을 확증해 준다. 이렇게 볼때 이것은 앞장에서 밝힌 대로 보수신학의 선지서 해석에서 문제가 되었던 난제에 대한 해답이다. 즉 선지서에 표면상 멸망과 구원의 모순적 내용이 하나님의 언약 성취로 온전히 이루어진 것이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행위언약에 의해 죽으시고 은혜언약에 의해 살아나신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다. 이것이 선지서가 신약과의 연결점이다. 그러니까 선지서는 일차적으로는 유다 백성들의 죄악때문에 때리시고 싸매시는 역사적 과정을 보여주지만 그 역사상의 하나님의 사역은 결국 그리스도 사건, 즉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부활시키시려고 죽게 하시는 사역의 예언인 셈이다. 따라서 선지서는 구원과 회복만을 언급하는 구속사적 관점으로는 포괄적으로 설명될 수 없으며 더욱이 사회 윤리적인 관점과는 전혀 거리가 멀다. 선지서는 언약을 근거로 때리시고 싸매시는 하나님의 사역을 통해 하나님이 여호와이심을 계시하시는, 그리고 그것은 다시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확증하는 언약사적 계시적 관점으로 보아야 온전한 해석에 이를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5. 선지서의 중심주제
선지서를 망라하는 중심 주제가 있을 수 있는가? 아마 이 질문은 선지서를 연구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질문일 것이다. 이 질문은 다시 구약 성경 전체를 망라하는 중심이 있을 수 있는가로 이어진다. 이 질문의 중요성은 다름아닌 성경의 통일성의 문제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성경이 한 분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성경의 내용이 의미적으로 통일성을 가지고 있으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이는 성경을 망라하는 중심 주제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함축한다. 만약 선지서, 더 나아가서 구약 전체를 관통하는 중심주제를 찾아낼 수 있다면 성경의 통일성을 확증하는 매우 중요한 작업이 될 것이다. 앞에서 살펴본 대로 보수신학에서는 성경에 통일성이 있다는 막연한 생각은 했지만 그것을 성경적 논리와 증거에 의하여 입증하지 못했고 따라서 성경의 중심 주제도 찾아내지 못했다. 겨우 신약 성경의 주제가 예수 그리스도이라고 말할 뿐 구약의 주제는 언급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보수신학권의 구약 학자들이 구약의 중심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을때 자유주의 신학계열에서는 아예 구약의 중심 주제는 있을 수 없다는 과격한 주장을 거침없이 하게 된다. 금세기 최대의 구약 신학자라고 불리우는 폰 라드에 의하면 구약에서는 중심(Mitte)을 찾을 수 없다고 했다. 폰 라드에 의하면
구약 성경 자체에 근거하여 그 성경의 통일성 문제에 대해 답변하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 왜냐하면 구약은 신약처럼 중심이 없기 때문이다. 신약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그 중심으로 가지고 있지만 구약 성경은 이런 중심을 갖고 있지 않다. 구약의 중심을 여호와로 설정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왜 그런가? 구약 속의 여호와의 계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계시와 달리, 그 내용에 있어서 아주 다른, 일련의 긴 계시 활동으로 나누어져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구약속에는 모든 것을 다 결정하고, 다양하게 분리된 여러 활동들을 해석해 줄뿐 아니라 상호간의 신학적 연관성을 정해 줄 수 있는 중심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젤에서 재인용,176~177)
이러한 폰 라드의 고민을 우리는 일면 이해할 수 있다. 실제 구약은 신약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다양한 내용들로 구성되어 있다. 얼핏 보아 역사서와 시가서는 전혀 다른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으로 보이며 선지서 역시 다른 부분들과 연결점을 찾기 어려워 보인다. 형편이 이러하기 때문에 구약에 대한 19세기 문서설의 세련된 형태인 폰 라드식의 전승사 비평은 더욱 설득력을 가지는 것이다. 즉 구약은 다양한 신앙 고백의 전통들로 이루어져 있고, 따라서 그것들을 망라하는 중심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계시로서의 구약성경에 대한 치명적인 공격이 아닐 수 없다. 여기에 대한 보수신학의 대응 논리는 부재한 것이며 보수신학의 위기의 핵심이 바로 이 부분이다.
최근까지의 구약 신학의 논의와 쟁점들을 종합적으로 잘 보여주는 구약학자 하젤에 의하면 지금까지의 구약 신학자들이 구약의 중심 주제를 찾으려는 시도가 실패했음을 보여준다.
구약의 중심을 찾기위한 다양한 방법들과 그것에 대한 제언들이 한없이 많이 쏟아져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지난 한세기 동안 일치점을 찾지 못하고 금세기에도 찾지 못했음이 명백하다. (하젤,201)
하젤의 이러한 언급에서 우리는 구약에서 그것을 망라하는 중심 주제를 찾는 일이 얼마나 어렵고 중요한 일인가를 짐작할 수 있다. 모든 학문의 이상은 다름아닌 하나의 주제나 원리로 대상 세계를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도대체 구약을 관통하는 중심은 무엇인가? 이 질문이야말로 구약학자들의 염두에서 떠나지 않는 화두인 것이다. 하젤은 구약의 중심을 찾기는 어렵지만 그것을 추구하는 이상을 포기할 수 없으며 자기 나름대로의 중심을 설명한다. 그는 구약의 중심을 역동적인 의미에서의 하나님으로 간주한다. 그는 이를 정적인 구성원리로 삼지 않음을 말하며 이는 구약의 각 권이나 한 묶음의 책들이 각자의 신학을 말 할 수 있도록 허용할 수 있게 한다고 한다.
즉 지혜 신학이나 창조 신학과 다른 신학들을 열등한 위치에 던지거나 혹은 무시하면서까지 일직선적이며 제한된 중심이나 개념이나, 주제나 모티프에 억지로 끼워 맞출 필요가 없어진다고 주장했다(하젤, 202~205). 이런 하젤의 주장은 사실상 구약의 하나의 중심 주제에 대한 이상을 포기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이미 그는 구약안에 다양한 성경과신학이 있음을 전제하고 들어 가기 때문이다. 이는 구약을 바라보는 시각 자체에 문제가 있음을 말해 준다. 우리는 구약이 여러 기자에 의해 쓰여졌지만 실상은 한 권의 책이며 다양한 신학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신학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믿는다. 이것이 하젤과 우리의 차이점이다.
후기의 폰 라드 역시 구약에 중심이 있다는 점에 대해 그렇게 완강하게 거부하지 않는다. 그는 ‘여호와가 구약성경의 중심이다’ 라고 말할 수 있다고 한다. 하나님은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 저술가들의 중심에 서 계신다고 폰 라드는 말한다. 그렇지만 바로 여기에서 폰 라드의 질문이 시작된다. 결국 이분은 어떤 여호와인가?이다. 폰 라드는 결국 구원자로 묘사한다. 폰 라드에 의하면 “이 역사는 구원 역사로 설명될 수 있다. 왜냐하면 여기에서는 창조 자체도 하나님의 구원 활동으로 제시되고 있으며, 선지자들이 예언한 바와 같이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뜻은 수많은 심판들에도 불구하고 그 목표를 이룰 것이기 때문이다”(하젤에서 재인용,178). 이는 결국 여호와를 인간의 구원을 위한 존재로 보는 구속사적 관점에 불과하다. 즉 인간을 구원하시는 여호와가 중심 주제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성경신학의 입장은 이와는 전혀 다른 주장을 한다. 성경신학은 구약의 중심 주제가 하나님은 여호와라고 말한다. 이는 앞에서 하젤이 구약의 중심은 역동적인 하나님이라는 것과도 다르며, 폰 라드가 구약의 중심을 구원자로서의 여호와로서 설정한 것과도 전혀 다른 차원을 지칭한다. 하젤이 말한 역동적인 하나님이라는 주제는 이미 다양한 구약의 신학을 허용하겠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으며, 폰 라드의 여호와 개념은 구속사적으로 환원된 것이다.
성경신학에서 하나님이 여호와라는 주제는 그 뜻이 깊고도 포괄적이며, 이는 구속사적으로 설명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기 계시로 설명된다. 이때 하나님은 엘로힘으로서 전능자를 뜻한다. 여호와의 구체적인 뜻은 언약대로 신실하게 이루신다는 의미를 함축한다. 따라서 이 말은 전능자가 언약을 하시고 그 전능하신 능력으로 단독적으로 언약을 성취해 가는 분이심을 드러내시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하나님의 오대 속성 즉 전능성, 영원성, 신실성, 주권성, 자비성이 드러나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여호와라는 주제는 성경이 하나님의 계시임을 잘 드러내어 줄뿐 아니라 그 계시의 방법적 성격인 언약과 성취를 함축하는 적절한 진술임을 알 수 있다. 선지서에도 이 주제는 그대로 적용되는 것이다. 행위 언약대로 때리시지만 은혜언약 때문에 아주 멸망시키지 않으시고 싸매주심으로 하나님이 여호와이심을 확증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장차 그리스도께서 택한 성도의 죄악을 대신해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고 의롭다 하기 위해 살아나심을 말하는 것이다. 즉, 선지서의 궁극적인 의미는 장차 언약의 자손이신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이 여호와 이심을 확증하게 되는 것이다.
6. 결론을 대신하여-선지서의 신앙적 의미
우리는 지금까지 선지서에 대한 종합적 논의를 거쳐왔다. 선지서를 보는 신학적 입장과 관점의 문제점 분석, 선지서의 구조적 이해 그리고 선지서의 중심 주제를 검토해왔다. 우리는 이제 지금까지의 논의를 토대로 하여 이 논의의 결론으로서 선지서가 가지는 신앙적 의미를 밝혀 보고자 한다
신앙적 의미는 모종의 신학적 관점이 갖고 있는 신관에 따라 결정된다. 생활의 교훈으로써 선지서를 사용하는 보수신학적인 관점에 의하면 하나님은 인간의 행위 여하에 따라서 보응하시는 인과응보적인 신으로 소개된다. 따라서 신의 보응이 두려워서 복종이 강요되는 지극히 비자발적인 신앙 양태를 낳게 된다. 뿐만 아니라 메시아 예언이 하나님께서 언약을 성취시키는 계시의 방편임을 설명하지 못하고 단지 선지서가 메시아 자체를 언급하고 있고 성도는 구원을 위하여 이를 맹목적으로 믿어야 할 것으로 강조되는 억지스러움이 있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선지서 해석의 관점인 사회 윤리적 입장에 의하면 여호와는 세상의 부정의를 주관하지 못하는 이원론적 신이 되고 만다. 따라서 인간이 정의로운 역사와 사회 건설, 즉 그들의 말로 말하자면 하나님 나라을 위한 주체자로 부각된다. 인간의 힘에 의한 하나님 나라의 건설은 최근 해방 신학에 와서 극단화되었다. 선지자는 이런 도덕적 하나님 나라 건설을 촉구하는 자이며 해방운동의 참여자는 의로운 선지자연한다. 여기서는 인간이 역사의 주체자가 되고 신은 인간의 현실 역사밖으로 추방되며 참된 기독교 신앙은 들어 설 자리가 없다. 도덕적 신념만이 있있을 뿐이다.
미래 예언중심의 묵시적 관점에서는 신은 세상의 주재자가 아니라 인간의 정성여하에 따라 반응하는 무속적 신으로 묘사된다. 여기서는 실제 축복과 저주는 인간의 정성여하에 달려 있다. 불확실하게 보이는 세상에서 불안을 느끼는 인간이 미래를 자기 수중에 넣어 안정을 구하려는 무속적 심리에서 미래의 사건을 알아 보려고 발버둥치는 것이다. 이런 무속적 신관념에 의해서는 진정한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없으며 미래를 알아 보려는 불신앙적 호기심은 더욱 현실에 대한 불안감만을 가중시킬 뿐이다.
우리는 선지서의 신앙적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 먼저 구약의 선지서와 신약의 연관성을 먼저 살펴보아야 한다. 이 문제의 거론이 왜 중요한가 하는 것은 앞의 잘못된 관점들을 검토해 보면 잘 드러난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보수신학은 어떤 부분은 메시아 예언으로 간주하고 또 어떤 부분은 회개를 촉구하는 생활의 교훈으로 간주한다.
그래서 메시아 예언은 성도들에게 직접 믿을 것을 강조하며 회개 촉구 부분은 성도의 생활의 교훈으로 직접 사용한다. 그러나 성경신학의 해석학적 입장에 의하면 선지서는 오늘의 신약 성도에게 직접 적용되어서는 안된다. 이와는 정반대의 방향에서 생기는 문제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역사 비평에 의한 해석이다. 역사비평적 방법이 가지는 해석학적인 문제는 그것이 과거의 역사적 사실들을 분석하고 재구성해 보지만 그것이 현재의 신앙과 어떤 연결점을 갖는가에 대해서 아무런 설명을 못한다(하젤,96). 즉 과거 사건과 현재의 신앙과의 괴리 문제이다. 보수신학은 믿음을 빙자하여 맹목적으로 믿을 것을 강요하는 문제에 봉착해 있고 자유주의 신학은 역사적 사실의 중요성을 강조한 나머지 그것을 오늘의 신앙에 연결시키지 못하고 있다. 믿음을 강조하면 맹목성의 함정에 빠지고 역사적 사실을 강조하면 불신앙의 늪에 빠진다. 이것이 현존 신학의 딜레마이다.
그러나 성경신학은 이 양자의 문제를 모두 극복한다. 그것이 언약과 성취의 틀에 의해 역사를 설명하고 거기에서 믿음의 문제가 설명되는 것이다. 모든 구약은 먼저 그리스도로 연결되어 해석하는 것이 해석의 기본 원칙이다. 따라서 선지서의 멸망과 구원의 언약사적 역사는 성도에게 일차적으로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살으심에 관한 언약으로 이해된다. 이를 통해 성도는 하나님이 언약을 신실되게 이루어 가시는 여호와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선지서는 이런 올바른 신관을 제시함으로써 그것을 깨닫게 되는 성도로 하여금 진정한 믿음을 불러 일으킨다. 그리스도의 죽고 살으심을 통해 하나님께서 여호와이심을 확증하면 그 복음의 능력이 약속대로 오신 성령을 통해 성도의 마음속에 역사하여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옛사람은 죽고 새사람이 살아나는 진정한 예배의 삶이 이루어지게 된다. 이것이 선지서가 갖는 신앙적 의미 인것이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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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동산교회 김승일 목사 신학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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