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학

[스크랩] 구원론적 근거로서의 구속사적 기도

수호천사1 2019. 1. 9. 13:22

구원론적 근거로서의 구속사적 기도



성도가 기도를 바르게 할 수 있는 것은, 기도를 받으시는 분이신 하나님께 대해 확실하고도 올바른 인식을 가질 때에 가능합니다. 자신의 기도를 받으시는 분이신 하나님께 대한 이해가 없이는 인간은 바른 기도를 할 수 없습니다. 설사 기도하더라도 각종 우상종교자들이 행하는 그런 기도의 상태로 전락해 버립니다. 그래서 온갖 기복주의적인 기도 행위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의 연속성은 그 대상에 대한 지속적인 관계로부터 나옵니다. 다시 말해서 구원의 주이신 하나님과 계속적으로 교제를 누려나가는 사귐에서 기도 또한 연속성을 띠게 됩니다


*시편 86장 1-7절. "여호와여 나는 곤고하고 궁핍하오니 귀를 기울여 내게 응답하소서 나는 경건하오니 내 영혼을 보존하소서 내 주 하나님이여 주를 의지하는 종을 구원하소서 주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가 종일 주께 부르짖나이다 주여 내 영혼이 주를 우러러보오니 주여 내 영혼을 기쁘게 하소서 주는 선하사 사유하기를 즐기시며 주께 부르짖는 자에게 인자함이 후하심이니이다 여호와여 나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소서 나의 환난 날에 내가 주께 부르짖으리니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리이다." 

마태복음 6장 5-13절.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또 기도 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기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의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이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로마서 8장 26-27절.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시느니라." 

강의 목표 

자신이 믿고 있는 신에 대한 정확한 지식은 그 사람의 기도관을 정립하는데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습니까? 그 이해에 따라서 그가 가지는 기도에 대한 이해 역시 지대한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참고 : 

기도는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기도의 내용과 가치는 그가 관계하고 있는 존재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기도에서 가장 중요한 원리는, 기도의 대상이 누구이신가를 아는 일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도가 기도를 바르게 할 수 있는 것은, 기도를 받으시는 분이신 하나님께 대해 확실하고도 올바른 인식을 가질 때에 가능합니다. 자신의 기도를 받으시는 분이신 하나님께 대한 이해가 없이는 인간은 바른 기도를 할 수 없습니다. 설사 기도하더라도 각종 우상종교자들이 행하는 그런 기도의 상태로 전락해 버립니다. 그래서 온갖 기복주의적인 기도 행위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의 연속성은 그 대상에 대한 지속적인 관계로부터 나옵니다. 다시 말해서 구원의 주이신 하나님과 계속적으로 교제를 누려나가는 사귐에서 기도 또한 연속성을 띠게 됩니다. 

그래서 올바른 신지식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진정한 중보자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유일한 공로가 되십니다. 그런데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말의 진정한 의미에서 멀어져 있습니까? 통상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의지해서 드리는 기도의 원리를 구속사적인 측면에서 미처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기도 끝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를 말하여 그분의 이름을 의지(依支)할 때 대단히 미신적인 사고방식을 갖습니다. 수취인에게 편지를 발송하기 위해서 붙이게 되는 우표가 갖는 의미와 같은 그런 차원에서 기도 끝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빼먹지 않고 붙이면 기도가 그분에게 직통으로 도달하여 응답이 올 것으로 믿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식의 그릇된 사고력은 자신이 그처럼 의지하고 있는 하나님께 대해 성경적으로 바르게 지식하고 있지 못했음을 보여줍니다. 기도의 의미는 하나님께 대한 바른 지식에 의해 구속사적 안목을 가지고 있을 때에만 이해되어질 수 있습니다. 그 기도라야 비로소 하나님께서 받으십니다. 구속사적으로 드려져야 하는 기도의 중요성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들어가는 말 

우리가 구원받은 사실은 다음 세 가지가 적용되고 있는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첫 째, 본능적으로 성경을 읽고 연구하는 생활 태도를 견지해 나갑니다. 둘째,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를 생활의 한 부분으로 가집니다. 셋째, 성도들과의 관계에서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받은 사랑을 능력적으로 구현해 나갑니다. 그런데 첫 번째 조건인 본능적 성경 연구는 다른 두 조건을 꾸준히 상기시켜주는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성도들은 성경 연구를 통하여 기도와 사랑의 중요성을 항상 깨닫습니다.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서 성경 연구를 통하여 '기도의 의미'를 바르게 깨닫고 이해하는 중에 기도 생활을 실천하는 일은 구원론적인 근거를 가집니다. 즉 이 말은 바른 기도 생활화의 여부에 따라서 그 사람의 구원받은 증거를 살펴볼 수 있게 된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오직 구원받은 사람만이 합당한 기도 생활을 자연스럽게 영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참고 

성도에게서 기도는 구원론적 근거를 가집니다. 진실하지 못한 기도 행위에 습관 되어 있다거나, 아예 기도 생활에서 이탈하여 있어 신앙 생활이 '회칠한 무덤'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바른 기도 생활이 되어 있지 않아 하나님과의 관계가 막혀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서 여러 가지 종교적인 의식과 행사에만 열심인 사람이 많습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는 사실상 믿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과연 믿음은 기도에서 보여집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향하여 무릎을 꿇는다는 것 이상으로 자기의 믿음을 입증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구속의 진리를 깨달아 가면서 그 진리가 자기의 것으로 체험되고 있는 증거는 기도를 하는 데서 입증됩니다. 기도를 마치 의무감 때문에 할 수 없이 하는 것처럼 무거운 짐으로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할 때부터 기도는 외식으로 하게 됩니다.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서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도는 그리스도인만이 지닌 특권임을 알아야 합니다. 불신자들에게는 이 특권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무엇보다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기도의 중요성은 예수께서도 강조하셨습니다. 항상 낙망하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누가복음에서는 '기도하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만(눅 18:1), 마태복음에서는 무엇을 위해 기도할 것인지 그 내용까지 가르쳐 주셨습니다(마 6:9-13). 또한 예수님은 자신이 친히 기도하셨습니다. 특별히 어떤 중요한 일을 앞두고는 더더욱 기도하셨습니다. 실로 그분의 생애는 기도하는 삶이었다고 해도 결코 지나치지 않습니다(히 5:8-9). 다음 몇가지 예는 그 사실을 설명해 줍니다. 예수님은 열 두 제자들 선택하실 때 기도하셨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실 때도 기도하셨습니다. 또한 나사로를 다시 살리실 때도 기도하셨습니다. 구속의 절정인 십자가를 앞에 두시고서 도 열심히 기도하셨습니다(요 12:27-28). 예수님께서 대제사장으로서 하신 기도는 유명합니다(요 17장). 바울도 이 기도의 중요성을 도처에서 강조하였습니다(롬 1:8-10; 8:26-27, 고후 1:12, 엡 6:18, 빌 1:8-11; 4:6-7, 살전 5:17, 딤전 2:1-3). 

영적 생활을 유지해 나가는데 있어서 다른 어떤 일보다도 힘들게 느껴지는 일은 단연 기도 생활에 있을 것입니다. 실제로 설교하는 일보다도 더 어려우며, 사랑을 실천하는 일보다도 더욱 어려운 것이 기도 생활입니다. 물론 중생인으로서 실제적인 경건의 연습과 훈련 속에서 높은 성숙의 차원에 올라선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는 일상(日常)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 있어서는 그렇게 되기까지는 기도가 고역으로 여겨질 것이 틀림없을 것입니다. 가령 새벽기도회나 기타 교회가 정한 공기도회에 참여하는 성도들이 갖는 심정은 어떻습니까? 매일, 또는 매번 시간과의 싸움을 합니다. 이 싸움이 자기를 부정해 나가고 그리스도를 긍정해 나가는 것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어디 그렇습니까? 기도회가 하나님의 선한 뜻에 순종하여 나가기 위하여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입니까? 그렇다고 대답합니다. 그러면 왜 기도의 내용은 틀에 박혀 있습니까? 구국 기도, 교회부흥 기도, 목사의 영력을 위한 기도, 가족을 위한 기도 등등이 참된 기도의 모습입니까? 또한 기도 시간에 들어가기가 무섭게 기도를 끝내는 것은 무엇입니까?  

기도의 어려움은 다음 몇 가지 사항과 관련하여 나타납니다. 어떤 내용으로 기도해야 합당한 것인지, 무슨 동기에 의해서 기도해야 하는지, 어떻게 기도해야 의심 없는 믿음으로 기도하는 것인지 등등의 문제들이 모든 기도의 사람들 앞에 놓여져 있습니다. 

참고 :

이 문제를 우리가 늘 드리는 '식사 기도'와 관련시켜 설명해 보겠습니다. 사실 '식사 기도'는, 음식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인정하고 그것을 감사하는 기도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이 기도만큼이나 잘못된 기도의 전형으로 나타나지는 것도 없는 것 같습니다. 기도의 형식성, 의식적으로 해치우는 습관성, 기독교인이 맛있는 음식을 먹기 전에 의무적으로 치루는 요식 행위로 전락하는 경우가 참으로 많습니다. 정해진 시간이나 환경 때문에 의무적으로 드리는 기도일수록 하나의 요식 행위로 그치기가 쉬운 법입니다. 또 하나의 예로 소위 말하는 '통성 기도'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사실 통성 기도를 하는 목적은 '합심 기도'를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면 통성 기도는 분명 성도들이 함께 마음을 모아서 한 뜻으로 한 목적을 향해 기도하는 것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의 내용에 있어서 동일성을 가져야 할 것이며, 기도하는 자세에 있어서 일체를 이루어야 할 것이며, 기도하는 동기가 성령의 간구하심을 좇아서 하는 것이어야 할 것입니다. 과연 그런 기도를 한다고 하면, 온 성도가 손을 흔들며, 주의 이름을 외치며, 울며, 뛰듯이 몸을 흔들며, 방언하다고 하며 괴상한 소리를 내며 하는 이 광경은 정말 맞지 않을 것입니다. 통성 기도로 흥분에 휩싸인 광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며 스스로 무아지경에 빠져들어 간다면 대개의 경우 진실성이 결여되기 마련입니다. 왜냐하면 어떤 인위적으로 조작된 심리적 분위기에 의하여 훈련되어진 형태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통성 기도자들은 자기 머리 속에서 떠오르는 대로 전부 쏟아놓는 형식을 취합니다. 통성 기도의 모습을 보면, 통상 장황하고 중언부언하여 산만하기 그지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쉽게 그쳐지지 않는 다변성의 특징을 보여줍니다. 단조롭기 그지없는 말들을 장황하게 늘어놓으며 홍수처럼 쏟아내고, 괴성과도 같은 탄성을 반복적으로 뱉어내며, 서서히 정신이 몽롱한 무아지경의 상태로 빠져들어 가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입에서 거품을 흘려내고 쓰러지기도 하며, 몸은 정신없을 정도로 흔들어대는데, 스피커에서 쏟아내는 괴성과 요란한 북소리, 템포 빠른 피아노의 괴음이, 통성 기도에 몰입해 있는 사람들에게 이런 심리적 상태에 더더욱 빠져들게 합니다. 

이런 실태이고 보니 기도를 바르게 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합당한 기도의 원리와 자세를 마땅히 성경에서 배워야 합니다. 그저 다른 사람들이 하는 대로 답습하려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어느날 '기도를 가르쳐 주옵소서'라는 요청에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면서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은 모범적 기도문입니다. 사실 주옥같은 금언으로 가득차 있는 산상수훈에서도 예수님은 기도의 태도와 또한 자세에 대해서 가르치셨으며 계속해서 그 내용의 중요성을 인식시켜 주시기 위하여 '주기도문'을 가르치셨습니다. 이 주기도문은 그 성격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우리에게 구속력을 발휘합니다. 즉 문자적으로 똑같이 반복하라는 말은 아닙니다만, 기도의 원리에서 벗어나서 하는 기도를 막으신 것입니다. 주기도문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무엇을 위해서 어떻게 기도해야 할 것인지를 이끌어 주고 있습니다. 

다윗의 기도로써 잘 알려져 있는 본문의 시편은 기도의 올바른 모습에 대해서 살펴볼 수 있는 대단히 훌륭한 실례가 됩니다. 그의 기도는 단순히 모범적 차원에서 이해되어서는 안됩니다. 성경적 기도로서의 구속사적 기도요, 영원히 가르쳐져야 할 구원론적 기도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는 사람이라고 확신하기를 원한다면, 마땅히 본문의 원리에서 보여지는 방식대로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1. 신지식을 바르게 갖추는 일의 중요성 

첫 번째로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기도자에게 있어서 신지식을 바르게 갖추는 일의 중요성에 대한 것입니다. 신지식의 옳고 그른 유무에 따라서 그 사람의 기도는 크게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바르게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기도에 대한 개념이 그 사람에게 자리잡게 됩니다. 여기서 시편 기자는 여호와께서 '구원론적인 관계'에서 하나님 되심을 확실하게 인식하고서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주'가 되신다고 고백합니다. 이제 시편 기자가 가지고 있었던 하나님께 대한 인식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여호와께서는 약속의 하나님이심을 인식하였습니다. 
1절에 시인은 하나님을 "여호와여!"라고 호칭하였습니다. '여호와'란 이름은 구속적 하나님을 호칭하는 표현으로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맺으신 약속은 어떤 일이 있어도 성취시키신다는 사실과 관련하여 주어졌습니다. 출애굽기 3장 15절과 6장 2-5절에서 여호와는 영원 자존자를 가리킵니다. 여호와는 영원 전부터 스스로 계신 분이십니다. 그 분은 절대적인 신이요 오직 유일한 최고의 신이십니다. 절대적인 창조주이십니다. 그리고 로마서 11장 36절을 보면 영원 자존자이신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을 지으셨고 저희를 보살피셨으며 영원한 구원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따라서 '여호와'란 이름은 구속의 역사적 발전 속에서 언약을 성취해 나가 구원의 하나님이심을 드러내시는 '언약의 하나님'을 가리키기 위해서 사용되었습니다. 그분께서는 처음부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백성과의 언약을 시작하셨고, 반드시 성취시키는 분이십니다. 그런 면에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철저하게 '제사로 맺어진 언약'의 사실에 근거합니다. "이르시되 나의 성도를 네 앞에 모으라 곧 제사로 나와 언약한 자니라 하시도다"(시 50:5). 

둘째, 여호와께서는 능력의 하나님이심을 인식하였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호칭함에 있어서 '여호와'라고 할 뿐만 아니라 "내 주 하나님이여'라고 했습니다. 여호와를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 호칭은 약속의 하나님이신 여호와께서는 당신의 약속이 그 어떤 방해와 훼방을 받아도 능히 성취시켜 나가시는 능력의 소유자라는 사실과 관련한 이름입니다. 그래서 이 이름은 그냥 간단하게 하나님이라고 나타나기보다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하는 형용사를 달고서 나타나는 때가 많습니다. "아브람의 구십 구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네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창 17:1). 이후 이 칭호는 더더욱 발전하여 '만군의 하나님'으로 불려지기도 합니다. 다음 성경 몇 구절에서 보겠습니다. 사무엘하 5장 10절입니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니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가니라." 열왕기상 19장 10절입니다. "저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 시편 59편 5절입니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일어나 열방을 벌하소서 무릇 간사한 악인을 긍휼히 여기지 마소서(셀라)." 

'하나님'이란 이 칭호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권능을 찬양하는 칭호입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여러 신들 중에 유난히 강한 우두머리로 존재하는 그런 신이 아니십니다. 천상천하에 하나님만이 참 신으로서 전능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을 창조하시는 전능을 발휘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특별히 구원을 베풀어주시는 일과 관련하여 이 권세를 넉넉히 가지십니다. 이 무한한 최고의 능력 안에서 여호와로서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하나님은 그 권능으로 우리의 유일한 도움과 피난처가 되십니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요새시오 나를 건지시는 자시오 나의 하나님이시오 나의 피할 바위시오 나의 방패시오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시 18:1-2). 

이러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어느 날 은혜 안에서 시편 기자에게 여기 시편 86편에 기록한 구원을 베푸셨습니다. 시편 기자와 하나님과의 사이에 인격적 관계가 형성되었습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을 단순히 하나님이라고 부르지 않고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기도할 때에 막연히 이렇게 부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그 무한하신 권능으로 자신을 구원하셨다는 사실을 철저하게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셋째, 여호와께서는 하나님으로서 그의 모든 백성에게 주가 되심을 인식하였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가리켜 "내 주 하나님이여"라고 호칭하면서 다시 그 하나님을 가리켜 '주'라고 불렀습니다. 이 호칭은 시편 기자의 여호와 하나님 인식이 자기를 구원해 주신 '은혜의 하나님'으로 인식하고서 '주'로 모시며 '자발적인 자기 복종'을 '약속'하는 사실과 관련합니다. 곧 자기의 생명이 구속사 안에서 온전히 그분께 달려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서 부르는 자기 순종적 표현입니다. 바울은 이런 은혜를 알았기 때문에 자발적으로 성육신하신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으며, 기꺼이 '그의 종'으로 부르기를 기뻐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롬 1:1). 그는 자기가 하나님의 종이 되어 그분께 철저히 복종하여 사는 것이 사실은 사는 것이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깨달았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자신의 주로 모시는 삶 속에서 자신에게 시작된 구원의 궁극적인 완성은 보장됩니다. 참으로 우리가 주를 붙드는 힘은 그분께서 안전하게 우리를 붙들고 계시는 힘에 의하여 나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구원은 확신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빌 3:12). 이 사실을 인식하는 가운데 그분은 우리의 주가 되시며 또한 우리는 그분의 종이 되기를 기뻐하게 됩니다. 시인이 하나님을 '주'로 고백하는 데는 바로 이와 같은 구속사적 사상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네째, 하나님께 대한 구속사적 이해입니다. 
이상 살펴보았듯이 시편 기자는 자신의 기도를 받으시는 하나님께 대한 인식이 '구원자이신 하나님'이었던 것입니다. 총괄적으로 말하자면 시편 기자의 이러한 기도는 '구속사적 이해'에 근거한 '하나님 인식'에서 나오는 기도였습니다. 사실상 그 기도가 바로 성경적 근거를 가진 올바른 기도입니다. 시편 기자가 하나님께 나아가 무릎을 꿇고 기도한 것은 그저 막연하게 추상적으로 하나님을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기를 구원하신 구원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을 철저하게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구속사의 이해 속에서 가져지는 기도의 중요한 원칙이 있습니다. 

먼저 기도의 내용과 목적이 정당해야 합니다. 그 정당성의 여부에 따라서 구원의 증거가 엿보입니다. 큰 원리면에서 보건대 기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것이 주된 목적입니다(요 17:1-5). 기도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는 사실과 관련하여 드려져야 할 것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문의 내용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데 있습니다. 주기도문은 우리가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할 것인지를 가르쳐 주어서 그 기도 속에 있게 하시는 구속력을 가지고 있습니다(마 6:9-13). 기도는 무엇보다도 이미 베푸신 구원의 큰 은혜를 감사히 고백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어야 합니다(살전 5:16-18). 또한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어야 합니다. 자기의 뜻을 내세우고 주장하려 하지 말고 순전한 마음으로 온전하신 하나님의 뜻을 구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찾고 발견하고 순종하는 일과 관련하여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니엘의 모범적인 기도(단 9:1-2)와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를 보십시오(마 26:39). 그리고 자기에게 이루어진 구원의 사실이 온전히 흠 없이 진행되기를 애쓰는 것과 관련하여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시 86:1-2). 

다음으로 기도의 태도 혹은 자세에 관한 것입니다. 기도 시에 청중을 의식하지 말아야 합니다. 즉 자신을 영적인 사람인양 과시하고 싶어지는 유혹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마 6:5-8). 기도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철저하게 의식하여야 합니다. 지금 막 기도를 시작하는 사람에게서 우선적으로 중요한 것은, 자신이 지금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는 중이라고 하는 의식을 분명히 갖는 일입니다. 즉 지금 자신이 하나님의 앞에 부복해 있다고 하는 사실을 철저하게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을 의식하되 단순히 존재론적 차원에서 머물지 말고, 구속사적 차원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지금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에게 아버지가 되신다라는 사실을 분명히 붙잡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자신 사이에 중보자로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를 통해 아버지께 기도를 드리고 있음을 의식하고 있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는 법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간절히 의지하는 실제적인 인식이 있어야 합니다(엡 2:18 히 10:19-22). 

끝으로 기도의 횟수와 시간에 관한 것입니다. 기도는 많이 한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기도는 단순히 많은 시간을 가지는 것이어서는 안됩니다. 단순히 시간과 횟수만이 많은 것은 잘못입니다. 일정한 시간과 횟수를 채우는 식의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기도는 의미가 없습니다. 정해진 규칙을 좇아서 시간과 양으로 하는 기도는 미신적이며, 형식과 의식에 매이게 됩니다. 그런 식의 기도는 성령으로 행하는 기도의 원리에 크게 위배됩니다. 기도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기도 행위의 외식의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합니다. 공석 기도에는 잘 응하지만 은밀한 기도의 능력은 없는 사람이라면, 그는 사실상 기도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바르게 기도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이 모든 일에 세심한 배려가 있어야 합니다. 그 사람이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이제 본문에서 말하는 내용을 좀더 접근 하겠습니다. 


2절 첫 부분에서부터 기도자는 "나는 경건하오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영적 경건을 과시하거나 수준높은 영성 상태에 있음을 의로 내세우기 위해서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부분의 좀더 명료한 해석을 위해서는 성경의 난하 주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난하 주에 보면, '혹은, 주께서 은혜 주신 자니' 라고도 번역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볼 수 있듯이 자신은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를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 안에 이미 한번 시작하신 그 구원을 중간에 그만두지 말아 달라고 하는 간청입니다. 다음 성경 구절을 보십시오. 시편 138편 8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관계된 것을 완전케 하실지라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영원하오니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버리지 마옵소서." 빌립보서 1장 6절을 보십시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또한 시편 기자는"주를 의지하는 종을 구원하소서"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위의 사실에 근거하여 실제로 자신이 하나님을 신앙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로부터 자기에게 임한 명백한 은혜가 있기 때문에, 그것에 근거하여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기에게 베푸실 구원을 온 몸으로 받아들이며 자신의 기도가 응답될 것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시편 기자의 기도에서 볼 때 기도는 단순히 부르짖으며 요구하는 데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기도의 내용이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려면 먼저 기도자가 그 기도를 받으시는 하나님과 진실한 관계성을 유지하고 있어야 합니다. 


2. 신지식을 적용하는 기도 

시편 기자의 기도는 철저하게 '구원론적 차원'에서 드려진 기도였습니다. 이제 두 번째로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시편 기자는 자기가 인식하고 있었던 신지식을 좇아서 하나님을 자신의 삶에 어떻게 적용시켜 갔는가 하는 부분입니다. 

첫째, 부자관계로 적용하고 있습니다. 
1절을 보면, 기도자는 "귀를 기울여 내게 응답하소서"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기도자는 하나님의 부성애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기도자의 기도를 들으시는 인격적인 분이십니다. 그것은 기도자와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참으로 놀랍게도 '부자지간'의 관계인 때문입니다. 시편 기자는 이 사실에 근거하여 자식의 입장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인격에 호소하여 간구를 드립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의 자녀임을 철저하게 인식할 수 있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인식하지 않고서는 감히 그분 앞에 당당하게 나아가는 영적 담대함이 없기 마련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인격적인 아버지가 되십니다. 이 사실을 인식하고서 기도를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의식을 가지고서 기도를 합니까? 사실상 의문입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교회 성도들의 기도하는 현실이 기도는 정말 열심히 하는데, 하나님을 제대로 의식하지 않고서 형식적이고도 위선적으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모순은 있어서는 안됩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잊지 말아야 할 가장 소중한 원리는 '지금 자신이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고 있는 중'이라는 자기인식을 분명히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속사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고 우리는 그의 사랑 받는 자녀입니다. 그 관계성 속에서 기도자는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분'이라는 '확신'으로 기도하여야 합니다. 시편 기자는 그 확신으로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담대히 이렇게 아룁니다."여호와여 나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소서 나의 환난 날에 내가 주께 부르짖으리니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리입니다." 

시편 84편 1-12절을 보면, 구약의 기도에서 찾아지는 여덟 가지 기본 원리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① 의식(儀式)이 종종 구약의 기도와 연관되어 있긴 하지만, 성경은 공허한 형식과 마음에서 우러난 참된 예배를 분명히 구분합니다(사5:21-24 29:13). 하나님께서 전혀 받지 않으시는 의미 없는 의식도 있고 또한 기도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시인은 참된 마음에서 우러나는 정직한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② 기도로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것은 언약 관계의 결과입니다. 구약 성도가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과의 관계에 책임을 지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지금 시인이 하나님께 간구 할 때 '야곱의 하나님'(8절)이라고 호칭한 것이 그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언약적 관계의 자연적 산물이며, 개인적 관계의 표현인 것입니다. 

③ 기도에 있어서 호소는 이미 하나님과 그의 말씀 가운데 들어있는 약속이나 계시된 성품에 근거합니다. 기도자의 확신의 근거는 그가 이미 행한 일이나 앞으로 행할 일에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아는 데 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이제까지 자기들을 은혜 가운데 인도해 오신 사실을 붙잡고 있습니다. 

④ 하나님께서는 모든 종류의 간구를 들으십니다. 이스라엘이 민족을 위해 드리는 기도나 무거운 짐을 지고 괴로워하는 개인의 심령의 울부짖음인 기도도 다같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관심사입니다. 하나님께서 진심으로 당신을 의지하는 당신의 자녀에게 관심을 갖고 돌보신다는 이 확신은 기도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입니다. 

⑤ 구약의 기도는 하나님을 환경의 제한이나 제약을 받지 않으시는 분으로 인식합니다. 아무리 냉혹한 상황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자연적 과정을 통해서 혹은 자연법칙을 유보함으로써 간섭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에 제한이 없기 때문에 믿는 자는 하나님께 무한한 신뢰를 둘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인은 하나님을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8절), '우리 방패이신 하나님'(9절),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시라'(11절) 등으로 표현합니다. 

⑥ 하나님은 주권적 자주자이십니다. 어떤 신자도 하나님께 명령을 내릴 권리가 없으며, 하나님께 조언할 지혜가 없습니다. 구약 시대의 기도는 하나님을 조종하려는 노력도 아니고, 하나님께 마땅히 하셔야 할 일을 말씀드리려는 시도도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기도는 신자가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을 최고, 최선으로 확신하고서 기꺼이 순복하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이 때문에 시인의 기도도 궁극적으로는 자신이 여호와께로부터 받은 직무의 회복의 관점에서 드려지고 있습니다(10절). 

⑦ 신자는 기도할 때 하나님 앞에 정직해야 합니다. 기도에서 자신의 상태를 가장할 필요가 없으며, 감정을 감출 필요도 없습니다. 시인은 하나님께 '정직히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11절)라고 말할 수 있었을 정도로 하나님 앞에 정직하였습니다. 

⑧ 구약의 기도는 감사와 찬양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 둘은 기도가 응답될 때 드려지기도 하지만, 기도 그 자체에 수반되는 경우도 자주 있습니다. 왜냐하면, 감사는 우리가 주님과 갖는 독일무이한 관계에 있어서 적절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관계로 인해서 우리는 하나님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것입니다. 시인은 지금 이 부분에서 이러한 간구를 드리기 이전까지 이렇게 해 왔습니다(1-7절). 

둘째, 하나님의 사유하심을 의지하였습니다. 

5절에서 시인은 기도하기를, "주는 선하사 사유하기를 즐기시며"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기도자는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이 '선하심'과 '사유하심'으로 대표되고 있습니다. 하나님 성품으로 대표되는 이 특성은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시는 분이시라는 데 있습니다. 시인은 이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담대히 그 사실을 붙잡고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였습니다. 이처럼 우리 역시 하나님께서 자기를 계시하신 역사 속에서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성품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하며, 기도시에 적극 신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제 시인이 그렇게 하고 있었던 증거가 몇몇 구절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먼저 '주'라고 아뢰고 있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시인이 하나님을 주라고 아뢰는 것은 그렇게 부르는 것이 좋을 것 같거나 편해서, 또는 사람들이 통상 그렇게 부르기 때문에 자신도 습관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철저하게 하나님이 자신의 구원의 주이심을 고백하는 호칭입니다. 그것은 시편 기자가 실제로 이처럼 하나님을 의지 - 기도 - 하고 있었던 데서 보여지고 있습니다. 또한 그의 기도가 하나님께 종일 부르짖고 있었던 것에서도 보여지고 있습니다. 시편 기자가 종일 부르짖을 수 있었다는 것은 그가 온종일 목이 쉬어가면서 외쳤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저가 하나님을 깊이 사색하였음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을 '사유하기를 즐기시는 분'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그는 기도하기를 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모든 사람은 이 사실을 굳게 붙잡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의 후하심을 적극 의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셋째,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의지하였습니다. 
5절을 보면 기도자는 하나님을 말하기를, "인자하심이 후하심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지금 기도자는 '하나님의 성품의 넓음'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자하신 분이시며 동시에 그것이 후하신 분이십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이 사실을 충분히 인식할 수 있을 때에, 그야말로 담대히 기도를 드릴 수 있는 자극을 받습니다. 이 사실을 확신하지 못하고서야 어느 누가 하나님께 감히 나아가고자 하는 담대함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하나님의 후하신 인자를 받고자 하는 소망이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을 보십시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께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히브리 기자가 이런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이제까지의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친히 움직이고 계셨던 실제적인 역사의 실존을 확실하게 인식하고 있었던 데서 나온 믿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친히 역사하셨던 분이심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 또한 구속사의 최고 절정이요 극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이루어진 구원의 사실을 이해하고 있는 믿음을 가지고 인자에 후하신 하나님을 적극 의지하는 기도를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3. 기도에 있어서 내용의 중요성 

이제 세 번째 주제로 시편 기자가 드린 간구에서 그 자신과 관련한 내용을 중점적으로 분석해 보는 것을 통하여, 오늘날의 우리가 간구하여야 할 내용이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 대해서 배우고자 합니다. 

첫째, 영접인 궁핍을 호소하였습니다. 
1절을 보면 기도자는 고백하기를 "나는 곤고하고 궁핍하오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의 '곤고함'과 '궁핍함'의 두 단어는 통상 영적 갈급함을 묘사하는 데 사용됩니다. 그는 영적인 곤고함과 궁핍함을 느끼고서는 하나님께 무릎을 꿇어야 할 필요성을 깨달았습니다. 자신이 처해 있는 영적인 가난함에 대해 절실하게 깨달을 것입니다. 

오늘날 성도들이 일상적 기도 생활에서 기껏해야 물질적 부족을 이유로 기도를 합니다. 이는 명백히 말하자면 사실상 잘못인 것입니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서는 이러한 기도는 거의 드려질 수 없습니다. 오직 영적 곤고함과 궁핍함을 깨닫는 것이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는 이유여야 합니다. 따라서 그 동기로 기도하여야 합니다. 여기서 기도 시에 주의해야 할 몇 가지 사실들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먼저 기도의 본질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께로부터 무엇인가를 얻어내는 수단이라고 하는 차원에서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기도는 수단이기 이전에 하나님과의 교제 그 자체여야 합니다. 자기의 부족을 인정하고, 고백하며, 더 깊은 순종으로 나아가야 할 필요성을 인식하고 그 은혜를 갈망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분의 영광을 아뢰는 일이 기쁨이어야 합니다. 세상이 주는 갖가지 유혹과 시련에 둘러 쌓여 있는 자신의 삶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보호의 절대적 필요성을 아뢰어야 합니다. 이런 기도일 때 진정한 평강이 있는 법입니다(빌 4:6-7). 

다음으로 기도의 태도입니다. 기도할 때 이것 저것을 아뢰며 그 응답을 요청하는 일부터 시작하는 것은 지극히 유아적인 태도입니다. 자신이 간구하는 내용이 하나님의 뜻인지에 대해서 명확히 확증 짓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이 기도는 거절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모세는 요단을 건너 가나안에 들어가 아름다운 땅과 산과 레바논을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였으나 응답은 거절이었습니다(신 3:23-26). 바울도 육체의 가시 제거를 위해 기도했으나 거절당했습니다(고후 12:7-8). 어떤 경우에는 응답이 징계로 왔습니다(시 106:15). 베드로의 요청은 책망을 받았습니다(마 16:23). 신앙적 삶의 부정함은 기도에 있어서 응답을 고대할 수 없는 법입니다(잠 28:9 시 66:18 요9:31 15:7 요일 3:22 5:14-15). 그러므로 기도를 무조건 응답해 달라고 하며 하나님께 명령하고 요구하는 식의 태도를 버려야 합니다. 기도자에게서 우선적으로 갖추고 있어야 할 태도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일입니다. 즉 기도자의 마음이 항상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로 나타나야 합니다. 

지금 시편 기자는 자기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영적 위로를 받아야만 할 자인 것을 철저하게 깨닫고 있습니다. 그는 과연 심령이 가나한 자였으며, 참으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였습니다. 우리의 진정한 부족은 언제나 여기에서 찾아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위로하시는 손길의 진행이 없는 상태에서 되어지는 우리의 삶이란, 설혹 그것이 제아무리 외적으로 윤택한 것이라 할지라도 전혀 무익할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런 사람을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자로 여기십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계 3:17-18). 

둘째, 영혼 문제를 간구하였습니다. 
2절에서 기도자는 "내 영혼을 보존하소서"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보존한다'는 말은 '지키고', '유지한다'는 뜻입니다. 그는 자기 영혼의 보존을 위해 기도하여서 자기에게 이루어진 구원을 계속 이끌어가시는 하나님의 영적 도우심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어떤 내용으로 기도해야 할 것인지를 깨닫게 해 줍니다. 기도는 그 간구하는 내용이 영혼과 관련하고 있어야 함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주기도문이 가르쳐진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주기도문은 이 시대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본받아야 하는 기도의 영원한 규례요 또한 모범으로서 모든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영원토록 그 구속력이 발휘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주기도문에서 가르쳐주신 기도의 원리를 좇아서 기도해야 합니다. 무엇을 기도해야 합니까? 주기도문을 보십시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이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마 6:9-13). '하나님의 나라와 그 분이 행하시는 의로운 일'에 관한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기도해야 합니까?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주의 뜻을 따라 살고자 하는 기도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응답은 바로 그 기도에 주어집니다. 요한복음 15장 7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또 요한일서 5장 14절을 보십시오.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구하면 들으심이라." 

예수님은 언제나 이런 식으로 기도하셨습니다. 그의 기도 내용은 언제나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유지하는 일에 있었고,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에 있었으며, 자신의 철저한 순종을 위하여 그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신약 성경의 표현을 빌리면 그 기도는 그야말로 '성령으로 하는 기도'를 가리킵니다. 이 말은 기도가 철저하게 성령의 생각과 의지에 의해서 드려져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성령으로 기도한다'는 말의 의미를 사람이 알아듣지 못하는 말로 하는 것으로라든지, 큰 소리로 외치며 온 몸을 흔들며 광란적으로 하는 것으로 잘못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시며 인격적인 분이심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믿는 자에게 내주해 계십니다. 기도는 그분과 인격적 교통을 가지는 것으로서, 어떤 방법보다도 사색이 요구되어 집니다. 하나님은 세미한 음성 가운데 계신 분 아니십니까?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가서 여호와의 앞에서 산에 섰으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의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엘리야가 듣고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우고 나가 굴 어귀에 서매 소리가 있어 저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왕상 19:11-13). 진정한 의미에서 성령으로서 드리는 기도의 모습이 절실하게 요구되고 있습니다. 다음의 성경 말씀에서 그 기도를 배우십시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27).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無時)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ㅏ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엡 6:18).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며 성령으로 기도하며"(유 20). 

'성령으로 하는 기도'는 성도의 기도가 인위적으로 함부로 행해질 것이 아니라 참으로 조심성 있게 드려져야 할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그의 서신 도처에서 말하고 있듯이 진정한 기도는 '성령 안에서' 드려지는 때에 있습니다. 성도들은 성령 안에서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기도할 수 있을 때 '중언부언'하는 죄를 벗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성령 안에서의 기도'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로마서 8장 26-27절의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에서 보겠습니다. 

먼저,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신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 연약함'은 우리가 '어떻게 기도할지를 모른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참으로 어떻게 기도할지를 모릅니다. 죄에 의해 죽음이 왕노릇하는 우리의 육신이 비록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지만, 문제는 어떻게 그 삶을 현실적으로 누릴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연약함은 특히 기도에 있어서 나타납니다. 그래서 '마땅히 빌 바'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못하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부정적 모습은 대략 다음과 같은 형식을 가집니다. 하나님께 무엇을 구해야 할지를 모릅니다. 고작해야 기도를 자기 소원을 이루는 수단으로 생각합니다. 그들에게서는 기도가 하나님께로부터 무언가를 얻어내는 만능 수단일 뿐입니다. 그것이 만병통치약과 무엇이 다릅니까?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응답을 요청하고 강요하는 일로 기도를 시작하고, 진행하며, 마칩니다. 기도의 상황에서 마땅히 갖추어야 할 '정당한 태도'를 발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합니다. 그저 쉽게 '기도합시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행해지는 차원의 관습적이며 형식적인 것이 아닙니다. 어떤 특별한 환난이나 시련 혹은 무기력과 우울증 그리고 낙심 등등의 문제와 관련하여 무엇을 위해서, 어떻게 기도해야 할는지를 도대체가 모릅니다. 그래서 진정한 성도는 차라리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이때 '성령'께서 성도들을 도우십니다. 도우신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해야 합니다.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라고 했습니다. 이 도우심은 성령의 내주 하심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보증 사역'의 또 한 면입니다. 로마서 8장 전체는 성도들을 도우시는 성령의 사역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1절에서 구원의 확신이 선언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절은 그 이유를 말씀합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4절에서는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일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말씀합니다. 9절에서는 그 이유를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의 영을 소유했기 때문입니다. 11절은 부활의 영을 소유했다고 말씀합니다. 또한 15절에서는 양자의 영을 받았다고 말씀합니다. 이 모두는 성령 안에서 사는 성도들에게는 성령을 좇아 행하는 일이 있기 마련이라는 사실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성령께서 성도들에게 하고자 하시는 일이 무엇입니까? 그 일이 있기 때문에 성령께서는 무엇을 구해야 할지를 모르는 성도들에게 가르쳐 주시며, 또 성도들을 도우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기도를 도우시는 방식'으로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기도에는 성령께서 성도들이 무엇을 구해야 할지를 가르쳐 주시고 있는 지혜가 나타나고 있으며, 능히 그 일을 감당할 수 있게 하시는 능력이 공급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기도에서 성령께서 자신을 통해서 하고자 하시는 일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게 되며, 또 성령의 도우심을 받게 됩니다. 이처럼 '성령으로의 기도'는 성경의 중요한 사상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도우십니까?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했습니다. 여기 '돕다'라는 단어는 '순안티람바노'라는 동사를 번역한 것입니다. [TDNT]에 의하면, '돕다'라는 이 동사는 다음과 같은 세 마디의 단어들이 합쳐서 되어진 합성어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함께'라는 뜻을 가진 '순'이라는 단어, '맞서서'라는 뜻을 가진 '안티'라는 단어, 그리고 '취하다'라는 뜻을 가진 '람바노'라는 말이 합쳐진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지고 있는 짐을, 옆에서 함께 져 줌으로써 그 사람을 도와주는 상황을 묘사하고 있습니다(눅 10:40). 주의할 것은 성령께서 독단적으로 문제를 해결하시는 것이 아니라 도우시는 것입니다. 즉 기도할 수 있도록 도우신다는 것입니다. 도우시는 방법은 성도로 하여금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간구하게 하시는 것'에 의해서 입니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대신하여 아버지께 간구하십니다. 즉 우리의 참여 없이 혼자 그렇게 하십니다(요일 2:1-2). 그러나 여기서는 누가 탄식하십니까? 탄식의 주체자는 성령만이 아니십니다. 성자의 경우와는 달리 성령께서는 기도자로 하여금 탄식하도록 도우십니다. 그래서 탄식하는 자는 기도자입니다(갈 4:6 롬 8:15-16 고전 12:3 빌 2:12-13). 이처럼 성령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도우시기 때문에, 탄식의 기도조차도 하나님께 합당한 기도가 되어 응답을 체험하게 됩니다(요 15:7 요일 5:14-15). 이상의 원리에 의하여 27절에서 전개되고 있는 다음과 같은 삼단논법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기도자의 마음까지도 감찰하십니다. 성령은 기도자를 위해 하나님의 뜻에 맞게 간구하십니다. 따라서 기도자의 이 기도는 하나님께 합당한 기도이므로 응답하십니다. 

로마서 8장 26-27절 전체의 결론은 '성령 안에서 탄식하는 기도'를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간구하는 기도, 곧 탄식 기도를 들으십니다(마 6:6-8). 하나님은 우리의 말과 소리만을 의지하지 않으십니다. 우리 마음속에 있는 세세한 움직임조차도 주의 깊게 들으십니다. 기도의 원리를 좇아서 구원론적으로 드려야 할 기도가 잘 이루어지지 않을 때에는 차라리 '탄식'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공연히 오랜 시간 기도한다고 하며 미신적인 관념에 사로잡힐 경우 '중언부언'하는 죄 밖에 찾아오지 않습니다. 

셋째로 물질 문제에 집착하지 않았습니다. 
시편 86편의 기도에서 놓치지 말아야 하는 중요한 사항 하나는 물질적인 응답과 관련한 내용이 전혀 나타나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그는 오직 하나님의 뜻에 맞는 영적 도움만을 요청하였습니다. 응답의 주도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의식할 수 있는 데서 나올 수 있는 당연성입니다. 응답의 주도권은 항상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분께서 그분만의 고차원적인 지혜와 판단 하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써 응답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기도자는 적극 신뢰하여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서 환경의 호불호(好不好)는 물질 소유의 정도 차원에서 논해질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쉽게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잠재의식이 항상 문제입니다. 성경은 이런 것을 가리켜 구습(舊習)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평가에 젖어 있는 구습을 신속히 벗어버려야 합니다. 이 구습에 젖어 있는 한 기도의 기복적인 세속화는 쉽게 개선되지 않을 것입니다. 대체 우리의 기쁨이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뜻 안에 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때가 아니고서는 진정한 기쁨과 만족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거론할 때에도 물질적 차원에서 다루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구속사적 차원에서 축복의 본질을 바르게 깨닫는 지혜가 절대로 필요합니다. 잠언 30:8-9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곧 허탄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하옵시며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사도 바울이 골로새서 3장 5절에서 '탐심'을 가리켜 '우상숭배'라고까지 말했을 때, 왜 그렇게 말했는가에 대해서 신중히 그 의미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물질로서 하나님의 축복이 표현되던 때조차도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축복의 본질을 찾음에 있어서 항상 하나님과의 교제를 생각했습니다. 하박국 3장 17-18절을 보겠습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하박국 선지자의 이같은 간구를 현대적인 상황에 적용하여 설명해 보자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기도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기도자의 말을 들으셔야 한다는 데서 찾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의 원리를 생각할 때에 반대의 의미가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시는 말씀을 듣는 것이 기도자가 가져야 할 정당한 태도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가 보여주고 있는 역설적인 진리의 한 면입니다. 진정한 기도의 사람은 탐심에 가득찬 말로 기도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귀를 기울여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합니다. 지금 하박국 선지자의 소원의 내용을 점검해 보면, 바로 이같은 원리가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분명히 기도를 통하여 사실상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있었습니다. 


4. 기도의 핵심 : 하나님과의 교제를 누림 

시편 기자의 궁극적인 관심은 한 마디로 '하나님과의 관계성의 회복'에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시작된 구원론적인 친밀한 교제가 끊어지지 않고 계속해서 지속되고 있음을 확신하기를 원하였습니다. 하나님과 자기 사이를 가로막는 것이 결코 있어서는 안되었던 것입니다. 사실 인간으로 하여금 가장 기도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것은, 자신이 버림받았다고 느끼는 상황에 처해 있을 때일 것입니다. 그것이 어떤 경우이든지간에, 자신이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단절되었다는 생각이 들 경우에는 기도가 중단되어야 할 때가 아니라, 도리어 기도가 새롭게 시작되어야 할 기회가 주어진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회복되고 유지되기를 갈망한 시편 기자의 기도에서 다음 문제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로 자신의 '영혼' 문제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앞에서도 시편 기자가 영혼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간구하였다는 것을 언급했습니다만, 2절을 보면 시인은 자기의 "영혼을 보존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이것은 시인의 궁극적인 관심이 과연 어디에 있는지를 잘 보여 주는 표현입니다. 시편 기자는 자기의 '영혼'을 위하여 크게 염려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영혼을 위하여 염려한다는 말의 의미는, 자기의 전인격적인 생명이 하나님으로부터 단절되지 않기를 원하였다는 뜻입니다. 그는 자신의 '영혼' 문제 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영혼 문제란 영생의 문제를 말합니다. 사실 육적인 일에 신경을 쓰는 사람이 영혼의 문제에 관심을 가진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입니다. 사람은 근본적인 구조적 특성상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합니다. 마태복음 6장 24절을 보십시오.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겨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참으로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영혼을 사겠습니까? 천하를 주면은 영혼을 살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이 문제에 대단히 깊은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마태복음 16장 26절에서 그 대답을 들을 수 있습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무슨 말씀입니까? 사람이 설사 온 천하를 얻는다 해도 정작 중요한 목숨을 잃어버리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온 천하를 얻기 위해서 자기 목숨을 잃어버렸다고 치자. 그러면 사람이 잃어버린 자기 목숨을 찾기 위해서 대신 줄 수 있을만한 가치있는 것이 이 세상에 있는 줄 아느냐? 하는 말씀입니다. 전혀 없습니다. 그러므로 정작 사람이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물질입니까? 영혼입니까? 영혼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둘째로 하나님과의 관계성 문제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3절을 보면 시인은 간구하기를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라고 했습니다. 시인은 이 기도를 통하여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확신하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의지하는 한, 자신의 생명이 유지된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닫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무능력과 시험에 싸여있는 자기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너무나도 무서운 유혹과 시험이 그를 둘러싸고 있었으며, 실제로도 그는 얼마나 많이 자주 넘어지는 삶을 살았는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기가 여전히 하나님의 관심 안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긍휼이 여전히 자기를 붙드시기를 간구 하였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관심밖에 있는 것 이상가는 비극이 사실상 어디 있겠습니까? 참으로 경건한 사람은 이 사실에 대단히 민감하게 반응하기 마련입니다. 

오늘날 이에 대한 중요성이 많이 간과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곳의 시인이 드렸던 것과 같은 기도가 좀처럼 드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저희는 이미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여 더 이상의 긍휼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뭐라고 말하고 있는지 들어보십시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3:10-14). 성도가 신앙으로 자라가고 있을 때 철저한 자기 성찰이 요구됩니다. 냉철하게 자기를 비판할 수 있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시는 사랑을 기대할 수 있는 법입니다. 사실상 하나님의 긍휼은 오직 그런 사람만의 것입니다. 그들만이 하나님의 긍휼을 누립니다. 

셋째로 하나님과의 교제를 갈망하였습니다. 
4절에 보면 시인은 간구하기를 "주여 내 영혼이 주를 우러러보오니"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시인이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그분의 위로를 누리기를 갈망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과연 기도자는 하나님과의 교제가 최고의 관심이어야 합니다.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되는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교제가 두절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여기서 기도에 관해 원론적인 질문을 다시 해 봅시다. 과연 기도란 무엇입니까? 기도는 은혜의 구원자이신 하나님과 그 은혜를 누리는 우리들 사이에 교통되는 구원의 본질로서의 인격적 교제 관계의 실존에 대한 표현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구속의 은혜를 베푸신 결과,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를 드릴 수 있는 자격을 획득하여 기도할 수 있는 자가 되었습니다. 기도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우리의 구원의 본질이기까지 한 것입니다. 즉 달리 말하자면 구속의 원리의 토대 위에서 기도의 개념이 바르게 설정되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은혜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며,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이때 그 영광스러운 관계는 기도 행위를 통해서 진행됩니다. 진실로 언약적 구속사의 큰 원칙에 비추어 볼 때, 기도는 하나님의 구원의 또 다른 양상이라고까지 설명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서 나타나는 성경적인 바른 기도 행위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이 우리에게 실제로 임하였음을 증명하는 역할을 합니다. 반대로 말하면, 성경적이지 못한 가운데 자기의 생각과 의지로 행하는 기도 행위는 사단의 조정을 받아 자신의 영혼을 팔아먹는 것밖에는 안되는 것입니다. 바른 기도를 하지 않는 데서 우리 영혼을 사단에게 내어주는 것이 됩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가 기도의 개념과 행위를 정의하고 행동화함에 있어서, 성경의 증거를 따라 바르게 설정하여야 할 필요성에 직면하게 됩니다. 진실로 올바른 기도관을 가지고 올바른 기도 생활을 하는 것은 '구원론적 증거'입니다. 따라서 헛된 소망에서 허망한 말의 되풀이를 강조하는 중언부언식의 이교적 방법은 우리에게 맞지 않습니다(마 6:7-8, 눅 11:7-8).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자녀로 삼으신 은혜에 의해서 우리가 환영을 받고 응답을 받는다는 확신 가운데서 자유롭게 하나님께 나아갑니다(히 4:14-16). 예수 그리스도를 주시기까지 하신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당신의 좋은 선물을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의 영적 필요를 채워주시리라는 것을 우리는 확실히 알고 있습니다(롬 8:32). 

하나님과 끊임없는 교제를 갈망하는 사람은, 항상 자신을 낮추는 가운데 겸손히 자기의 부족을 인정하고 고백하며, 더 깊은 순종을 요청하는 일의 필요성을 인식하여야 합니다. 매사에 되어지는 불순종을 고백하고, 보다 깊은 순종을 다시금 확증하는 일의 중요성이 철저하게 인식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 타락한 본능적 구조로 말미암아 미쳐 자기 자신도 깨닫지 못하는 가운데 많은 불순종의 삶을 살아가는 연약한 존재인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이러한 자기의 감추어진 마음을 솔직히 드러내고 고백하며, 그분의 영광을 아뢰는 일이 기쁨이어야 합니다. 세상 온 천하를 하나님께 바치는 노력과 헌신보다도, 단 한시간 겸손히 무릎 꿇은 중에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감사하는 일의 가치가 더욱 나은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기도를 드리지 못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을 사업적 차원에서 드러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절대적인 자기기만의 결과임을 겸손하게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네째로 하나님의 위로를 갈망하였습니다. 
4절에서 시인은 계속해서 "주여 내 영혼을 기쁘게 하소서"라고 했습니다. 시인의 영혼이 기쁨을 얻는 것은, 하나님의 위로를 얻을 때에 이루어질 것입니다. 시인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위로를 확신하는 것에서 최고의 기쁨을 회복하려고 하였습니다. 이런 차원에서 드려지는 기도가 많아져야 하며 전적으로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단지 육체의 정욕을 채우기 위해서 기도가 사용되어져서는 안됩니다. 우리 영혼의 기쁨은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온전히 확신하고 있는 데서 있기 마련입니다. 우리 영혼이 하나님을 우러러보는 그 일 안에서 최고의 기쁨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 과연 '영혼의 기쁨'을 위하여 기도하는 현대의 다윗은 어느 곳에 있습니까? 기도는 해봄으로써만 아는 경험과 체험의 영역입니다. 기도는 지식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진정으로 기도는 삶이요, 체험입니다. 기도는 살아 계신 하나님과의 교제를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 경험을 맛본 사람은 기도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압니다. 하나님은 오늘날 이런 자들을 찾으셔서 당신께서 주고자 원하시는 축복을 마음껏 베푸십니다. 자신의 삶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만족 안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는 일 속에서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은 진실로 복됩니다. 


결론 : 구속사적 기도의 중요성을 인식함 

이제 결론으로 다음 몇가지를 권면하고자 합니다. 
먼저 기도가 무엇인지를 이해하고 올바른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바른 기도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갖는 것에서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는 데 있습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기도가 아닌 헛된 습관에 빠져 있는지 모릅니다. 저희는 기도라는 이름 아래 기껏해야 자기 의를 자랑하며 위선적인 생활만 쌓아 갑니다. 또는 육체의 정욕을 채우기 위해서 탐심으로 기도를 사용합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올바른 기도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베푸신 '구원의 사실'로부터 출발합니다. 그리고 항상 그 사실을 기도의 내용으로 합니다. 또한 최종적으로 그가 기도하고 있는 목표 안에서 기도를 마칩니다. 기도를 알기를 단순히 무엇인가를 얻어내는 수단이라는 차원에 머물러 있으면 그 믿음은 유아적이다 못해서 자신의 영혼에 큰 해를 끼칩니다. 기도는 그 내용과 동기에 있어서 성경적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일년을 하루 같이 기도하더라도 전혀 무익합니다. 

다음으로 기도에 힘쓰시기를 바랍니다. 
기도는 시간이 나거나, 기도할 마음이 비로소 생겨서 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교회가 기도회를 규칙있게 정하고 있든지, 아니면 개인의 자율성에 맡겨져 있든지간에 그 방법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 어느 경우이든지간에 기도는 즉흥적이며 충동적이지 않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께로부터 구원의 은혜를 받은 때부터 그분과 생명의 기쁨을 나누는 인격적 교제 속에서 행해져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하고도 우선적으로 해야 할 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혹시라도 여러 가지 일들에 너무도 바쁜 나머지 기도할 시간이 없는 것은 아닙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지금 최고로 실패하는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진정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미처 기도할 시간을 가지지 못할 정도로까지 자신을 그렇게도 미련하게 바쁘게 몰아넣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에게서 일상에 말씀 앞에 사는 것과 함께 기도 생활에 힘쓰는 것은 본능적인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갑니다. 또한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생명을 능력있게 지속적으로 해 나갑니다. 그런데 기도 생활을 할 시간조차 갖지 못할 정도로 바쁘게 살아간다는 것은 설사 그것이 교회의 일들 때문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칭찬의 요소가 되기는커녕 도리어 사단의 꾀에 넘어간 증거만 될 뿐입니다. 

육체에 힘이 있고, 낼만한 시간이 있을 때에 기도하여야 합니다. 곧 그렇게 하지 못할 때가 찾아들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믿음이 없어져버렸기 때문에 기도할 수 없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그런 경우 믿음을 회복하는 유일한 수단은 기도밖에 없습니다. 기도는 우리의 믿음을 존속시켜주는 유일한 방법이며, 또한 잃어버린 믿음을 회복시켜주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그런 사람에게는 더욱 기도의 필요성이 절실한 법입니다. 

여기서 기도하지 못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을 회복할 수 있게끔 해주는 가장 가능성 있는 처방을 하나 제시해 보겠습니다. 오늘날의 성도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해서 기도하는 삶을 쉽게 잃어버리고 삽니다. 이에 대한 가능하고도 효과 있는 처방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기도를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을 기억하는 것입니다(시50:15 마26:41). 

하나님께서는 기도를 계명에 포함시키셨습니다. 여기서 계명은, 율법의 의미가 아닙니다. 율법은 강제적이며, 억압하는 요소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계명은 정반대의 의미를 가집니다. 계명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사랑하시는 자에게 주시는 자애로운 은덕입니다. 이 계명은 율법의 경우와 달리 객관적이거나 그 대상이 불특정 다수를 향하여 나타나지 않고, 매우 개인적이어서 다분히 주관적인 성격을 가집니다. 전능하신 인격자가 자기의 피조물을 영원한 복락 가운데로 인도하기 위하여 직접 말씀하시는 형태가 바로 계명인 것입니다. 성도란 마땅히 이 계명을 순종하여야 한다고 하는 당위성을 생각하면서 기도의 삶을 새롭게 시작해야 합니다. 

인격자이신 하나님께서는 기도를 계명으로 주셔서 인격자인 성도에게 기도를 요구하십니다(살전5:18-19).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성도임을 스스로 주장하고 있다면 기도의 삶을 회복하려 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명령을 기억하는 것 외에는 달리 효과적인 방법이 없습니다. 이 방법을 의지하고 나아가면서 하나님의 가르침에 주목해 가면, 점차적으로 기도를 합당하게 드리는 체험으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아멘 

이천우 목사

출처 : 예수 코리아
글쓴이 : 예수코리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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