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학

[스크랩] 유대교와 기독교

수호천사1 2018. 12. 5. 16:05

유대교와 기독교

                   바울에게서 시작된 두 종교의 분열에 대한 사회사적 고찰



유대인과 기독교인의 최초의 갈림길은 바울에게서 나타난다. 그가 선교사로서 공동체를 개척했을 때, 그는 거기에 들어오는 조건으로 유대교로의 개종(할례를 통한)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는 신학자로서 “믿음과 율법” 혹은 “믿음과 행함”과 같은 상반되는 명제를 통해 모(母)종교로부터 하나의 새로운 종교의 경계를 세웠다. 그러나 그는 또한 유대인과 기독교인의 통합을 시도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그리하여 바울은 하나님이 그들을 마지막 날에 다시 통합시킬 것이라는 희망(롬 9-11장)으로 두 종교의 공존적 의미를 부여했다.

 

이와 같이 간명한 신학사적 의의를 갖는 이 주제는 그의 평생 사역에 대한 사회사적 고찰을 가능하게 한다. 그의 삶과 사역은 유대교와 기독교의 분열의 도화선이었기 때문이다. 이 분열을 사회사적으로 해명하기 위해서 우리는 고대의 기독교와 유대교 공동체 연구에 대한 더 많은 토대가 필요하다. 따라서 이 논의는 단지 하나의 시험적인 시도가 될 뿐이다.

 

이 글의 첫째 단락에서는 유대교와 기독교의 관계를 규정하기 위한 세 가지 모델이 제시될 것이다. 즉 초기 기독교(Urchristentum)는 유대교와 유사(Parallele), 유대교의 확장(Entschrnkung) 그리고 유대교의 변형(Transformation)으로 각각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단락에서 우리는 유대인과 기독교인의 관계에 대한 바울의 신학적 해석을 다룰 것이다. 이 세 가지 모델 모두는 (신학적 표현 양식으로) 바울에게서 나타난다. 세 번째 단락에서 우리는 각각의 모델에 대한 사회사적 가설을 세우게 될 것이다. 요컨대 유대인과 기독교인의 관계에 대한 바울의 신학적 해석은 그가 처했던 사회적 현실에서 ‘개연성의 근거’(Plausibilitaetsbasis)를 가진다는 것이다.

 

I. 유대교와 기독교의 관계설정에 대한 세 가지 모델


1. 첫째 모델: 유대교와 유사한 기독교

이 모델과 상당히 동떨어진 관점은 유대교와 기독교의 로마제국에로의 유입은 전적으로 동양제의의 확장의 한 부분이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기원후 역사에서 사회와 문화의 ‘동양화’(東洋化) 현상을 발견할 수 있다. 볼케슈타인(H. Wolkestein)은『기독교 이전 고대시대의 자선과 가난한 자 구제』(1939)라는 그의 저서에서 동양의 자비의 에토스를 예로 들어 그러한 동양화의 과정을 사회사적으로 밝혀냈다. 그의 주장은 서양이 동등한 자들 사이의 사회적 상호성에 강조를 두었다면, 동양은 약한 자들에 대한 강한 자들의 사회적 책임을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즉, 서양의 평등의 에토스는 동등한 권리를 가진 시민을 전제하고 있다는 것인데, 이는 공화정 도시국가 구조와 연관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동양의 자비의 에토스는 사회적 약자가 강자에게 의존하는 동양의 전제적 사회구조로 규정된다. 유대교와 기독교를 통해서 이 동양의 자비의 에토스가 서양에서 확산되었다면, 이것은 그리스와 로마의 사회구조가 동양화된 것과 연관된다. 그리스의 폴리스 제도는 그 중요성을 잃고 로마의 군사적 전제왕정의 강력한 위계구조에 의해서 점점 그 가치가 하락된다. 기원 후 3세기까지 오랫동안 정체된 로마사회의 위기 가운데 사회변화를 불러왔던 일련의 과정이 진행되는데, 이 결말은 기독교화로 맺어진다. 달리 말하면 역사적 전환기를 중심으로 시작된 위계적 사회로의 전환은 ‘인간의 연대’라는 새로운 모델을 요구하게 되었고, 유대교와 기독교는 그것을 제시하였다는 것이다. 바울은 이러한 상황에 처해 있었을 것이다.

 

그의 은총론은 신학적으로 표현된 새로운 가치를 제공한다. 강한 자에게 요구된 약한 자를 향한 자비는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은총에서 더욱 급진적으로 표현되고, 그 은총에 상응하는 인간의 행동이 요청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유대교와 기독교는 고대 동양의 신념 세계와 유사한 변수를 갖는 개념으로 생각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과 주변 종교 간의 차이가 상쇄되는 것같이 두 종교 간의 차이도 소멸된다. 물론 비록 유대교와 기독교가 그 주변세계의 종교와 분명히 구별된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말이다. 유대교와 기독교는 다신론적 세계에서 유일신론적 교의에 서 있다. 그들은 구성원들에게 사회적으로 철저하게 주변 세계와 구별된 삶을 요구했다. 또한 이 두 종교는 당시 로마제국으로 유입된 동양적 문화 중에서도 양자 모두가 특별한 위치를 점하였다. 바로 그러하기에 그들은 ‘유사한 것’으로 나타난다. 

 

2. 둘째 모델: 기독교는 유대교의 확장

그러면 두 그룹을 구분하는 것은 무엇인가? 왜 기독교만이 그 사회를 정복했고 유대교는 할 수 없었는가? 유대교는 사회의 주변에 위치했기 때문인가? 슐리히터(W. Schlichter)는 고대 유대교에 대한 관점과 아울러, 고대사회에서 유대인의 “주변적 위치”로 이것을 설명하려 했다. 그리하여 그는 이렇게 주장한다. “다양한 역사적 전환기에서나 여러 다른 나라가 유대민족의 내부적 성향을 비난하는 것과 같이, 외부적 환경에서 볼 때 유대인들은 넓은 의미로 귀속적(askriptiv)으로, 다시 말해 출생을 통하여 소집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제의적 틀을 통하여 외부와 폐쇄된’ 이 특수한 공동체는-정치적인 자치기구가 없었다 해도-개인적인 차원에서는 아니지만 집단적인 차원에서는 외부에 대하여 낯설게 되었고, 또 스스로에 의해 부과된 주변적 위치에 머물렀다.” 그는 유대인들을 주변적 위치에 있게 한 것은 “디아스포라 유대교의 수준 높은 혁신능력이 상대적으로 낮은 그들의 융합능력과 연결되는 것”이었다고 한다.

 

사실 기독교만이 전 사회를 관통할 만큼 이 ‘융화력’을 충분히 발전시켰다. 그들은 유대교와는 달리 할례나 음식규율 같은 분리주의적인 규범을 포기했다. 이것은 인간의 수평적 연대를 파괴할 수 있는 (혼인관계나 식탁공동체의) 규범의 포기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기독교가 유대교와 같이 주변세계의 위치에 남아 있을 가능성을 배제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고대세계에서 기독교는 ‘비유대인들도 들어갈 수 있는 유대교’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양자의 가장 결정적인 차이는 분리적인 사회 규범의 철폐를 통한 사회 개방의 여부였다.

 

바울의 역사적 의미를 이러한 관련에서 규정할 수 있다면, 그는 비유대인을 위한 또 하나의 유대교를 구상하였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그는 분리주의적 규범 포기를 신학적으로 기초하고, 교회적 지도력으로 그것을 관철시켰다. 유대교의 이러한 사회적 개방은 좀더 깊은 유대교의 내적인 변화를 설명하고 있지 않았을까? 또 바로 바울이 유대교의 이 변화를 기독교로 추진하지 않았을까?

 

3. 셋째 모델: 기독교는 유대교의 변형

이제 우리는 유대교와 기독교의 관계에 대한 셋째 모델을 규정하려 한다. 이것은 기독교는 ‘비유대인을 위한 개방’을 통해서 그 내적인 구조가 변화된 유대교라는 것이다. 맨슁(G. Mensching)은 그의 종교사회학적 연구를 통해서 이 변형을 ‘민족종교에서 보편종교로의 길’이라고 묘사했다. 이 과정에서 단지 종교의 사회적 작용범위만이 아니라, 구원의 개념도 변화되었다. 즉, 민족종교에서 구원은 태어나면서 획득된 공동체성에 소속됨으로 주어진다. 문제는 그 구원을 어떻게 보존하고 정당화하는가이다. 반면 보편종교는 개인이 공동체와 자연에 대해 민족종교보다 더 크게 독립되어 있음을 전제한다. 구원은 미리 주어진 사회적 소속으로 획득되지 않는다. 도리어 인간에게는 구원받지 못한 상태가 주어진다. 인간은 이 상태에서 기본적인 변화와 갱신을 통해서만 구원의 상태에 도달하게 된다. 그러므로 보편종교의 특성은 구원사상에 있다.

 

바울의 신학에서 바로 이 민족종교에서 보편종교로 넘어가는 길목이 발견된다. 그가 하나님과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에 대한 유대교적 신앙을 이방인에게 표현하려 하였을 때, 그는 이방인들이 하나님에 대한 어떤 긍정적인 관계에 서 있다는 것을 전제할 수는 없었다. 그들은 여러 신들로부터 떠나 유일한 한 하나님에게로 돌아와야 했다. 그들은 구원을 필요로 하고, 그 구원을 얻기 위해 믿음과 성례전으로 말미암은 변화를 통해서 깊은 변화를 체험해야 했다. 성례전을 통해 일어난 인간의 변화에 대한 사상은 동시에 전 우주의 변화를 예시하는데, 그것이 바울의 기독교를 유대교와 구별해준다. 그 사상은 맨슁이 말하는 보편종교에 필수적인 바, 그 구원사상에 연관된 하나의 형태가 된다.

 

II. 유대인과 기독교인의 관계에 대한 바울의 신학적 해석


우리는 이제 이 두 번째 단락에서 바울이 유대인과 기독교인들의 관계를 도대체 어떻게 보았는가를 물어야 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앞에서 묘사했던 세 가지 모델에 기초해야 한다. 우리는 바울에게서도 그것이 변형된 관계형태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물론 이것이 바울에게 유대인과 기독교인의 관계를 역사적으로 해석하려는 것이 아니라, 신학적으로 해석하려 했다 하더라도 말이다.

 

1. 유대교와 기독교의 유사성: 동일한 역할

바울에게서 자주 발견될 수 있는 유대교적 믿음과 기독교적 믿음의 대립적 성격은, 이미 그러한 반대명제가 양자의 어떤 관계를 전제할 때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갈라디아서에서 조차 유대인과 기독교인은 적대적인 ‘형제들’로 해석된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와 하갈의 자녀들은 두 종교의 모형이다. 여기서 하갈은 알레고리적 위력을 통해서만 유대교로 이해될 수 있다.

 

이러한 유사성은 로마서 9-11장에서 더욱 분명히 드러난다. 여기서 바울은 유대 기독교인과 이방 기독교인을 경쟁관계로 보고 있다. 이방기독교인들은 이방인으로서 그들이 추구하지 않았던 의에 도달해 있는 반면, 유대인은 의식적으로 이것을 추구하였으나 그 의에 도달하지 못했다(롬 9:30f). 게다가 “그들은 부딪힐 돌에 부딪혔다”(롬 9:32f). 여기서 암시하고 있는 “경주”라는 상징어는 바울이 이미 9: 16f에서 사용하였던 것인데, 그는 11:11에서 이 긍정적인 언급을 위해 다시 한 번 이것을 거론한다. 유대인들은 경주를 하다가 부딪쳤을 수는 있지만 결코 실족해버리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바울은 이러한 유대인과 이방기독교인의 긍정적인 경쟁관계를 묘사하는데 더 일반적인(혹은 경제적인?) 표상인 “부족”과 “부요”를 사용함으로써 그 메타포를 바꾼다. 유대인의 넘어짐은 이방인의 부요가 된다. 왜냐하면 유대인이 복음에 부딪침으로써만 그 복음은 이방인에게로 넘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롬 11:12ff). 또한 이방인의 돌아옴은 유대인으로 하여금 시기하게 하여 이들이 다시 돌아오게 할 것이다(롬 11:11-15).

 

이 변화되고 있는 “경쟁관계”의 의미는 11장 끝에서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가 은총의 하나님 앞에서 마침내 동등하게 된다고 결론지어진다. 양자 모두는 불순종의 단계를 통과한다. 그 둘은 불순종에서는 어떠한 차이도 없다. 하나님은 그의 자비하심에 있어서도 그들에게 차이를 두지 않는다. 유대인과 기독교인의 관계에 대한 바울의 (아마도) 마지막 말은 그들이 동일한 목표를 향해 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차례로 같은 역할을 감당한다. 그들은 비록 너무 다른 가지일지라도 같은 줄기에서 갈라진 가지일 수 있다. 이들의 길은 하나님 안에서야 비로소 만나게 될 이 ‘평행’한 길이 있다는 것은 바울이 어렵게 도달한 관점이었다. 이것은 이제 다음 단락에서 보이게 될 더 머나먼 발전의 끝이었다.

 

2. 기독교는 확장된 유대교: 유대인의 역할을 하는 이방기독교인

유대인과 이방인(이방 기독교인)이 유사하게 보일 수 있다는 것은, 갈라디아서 2:15에서 자신을 “죄인들과 이방인들”과 자랑스럽게 차별하였던 바울과 같은 한 유대인에게는 하나의 혁명적인 통찰이었다. 바울은 이 관점을 그가 소명을 체험할 때에 얻었다. 그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이방인 역시, 유대인이 되지 않고도 하나님의 역사에 이스라엘과 함께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었고, 할례 없이도 유대인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바울이 이스라엘의 모든 특권(롬 9:4)을 표현하며, 그 특권이 단지 유대인만이 아니라 이방기독교인들에게도 해당된다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볼 수 있다. 그 특권은 아들 됨, 영광, 언약 체결, 율법 수여, 예배, 축복의 조상과 같은 것들이다.

 

아들 됨은 모든 인간에게 영을 통하여 수여되거나(롬 8:14f), 영을 통하여 매개된다(갈 4:6). 그 “영광”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이들에게 비추인다(고후 3:18, 4:4). 성만찬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새로운 언약이 세워지고, 모든 사람이 하나의 법을 갖게 되어 이방인도 마음에 그 법을 갖는다(롬 2:14ff).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합당한 예배”를 드린다(롬 12:1ff). 아브라함은 “우리 모두의 조상”(롬 4:16)이고, 이방 기독교인들은 이제 “하나님의 이스라엘”(갈 6:10)에 속한다. 그들은 예전에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으나,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롬 9:25=호 2:25). 이 중심 사상에 있어서 유대인으로부터 이방인으로의 전이는 바울 복음의 핵심에 속한다.

 

3. 기독교는 유대교의 변형: 이방인의 역할을 하는 유대인

구원이 이방인에게로 확장되었다는 주장은 그 구원의 이해를 필연적으로 변경시킨다. 그것은 이방인들은 여러 신으로부터 참된 하나님에게로 돌이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복음의 수용은 유대인보다 더 근본적인 변화였다. 유대인들에게 그것은 태고적 축복의 증거였다. 이방인들에게 “구원”이었던 것이 그들에게는 “성취”였다. 유대인은 머나먼 길의 종점에 도달했으나, 이방인은 완전히 새로운 것을 향해 목표를 수정해야 했다.

 

이제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이방인들에게 뿐만 아니라, 차별 없이 모든 인간들에게 구원사상을 피력한다. 유대인을 포함한 모든 인간은 심판 아래 살아간다. 이 구원사상의 보편화는 다음과 같은 하나의 ‘역할교환’(Rollentausch)을 통해서 일어난다. 유대인은 그들이 복음을 영접하지 않는 한 구원받지 못한 이방인들의 역할을 한다. 반면 이방인은 그들이 복음을 믿는다면 유대인의 역할을 한다. 이 역할 교환의 예를 들어보자.

 

데살로니가전서 1:9-11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진노”에 대하여 말한다. 이 진노는 만일 인간이 참된 하나님에게 돌이키지 아니하면 모든 이에게 임할 것이고, 그의 아들을 통해서 그것으로부터 구원받을 것이다. 여기에는 물론 이방인도 해당한다. 바로 뒤 데살로니가전서 2:16에서 바울은 유대인에게도 이 진노의 심판에 대한 위협을 표명한다. 유대인들은 복음에 대한 적대감으로 인해 그들도 (믿지 않는 이방인들과 마찬가지로) 종말의 심판(ovrgh. eivj te,loj)에 떨어진다.

 

또 갈라디아서 4장에서 바울은 유대인과 기독교인들의 관계를 사라-하갈 유형론으로 설명한다. 필로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적대적 공존’의 필요성을 이끌어내기 위해 아브라함이 두 여자와 혼인한 것을 내세웠다. 그러나 바울은 비유대인 하갈을 유대교의 모형으로, 또한 사라는 기독교인의 모형으로 삼았다. 그는 그들의 관계를 단지 ‘적대적인 공존’만으로 해석한 것이 아니라, 둘의 긴장으로 해석했다.

 

이와 유사하게 바울은 로마서 9장에서도 이것을 다룬다. 여기서는 사라와 하갈, 야곱과 에서, 모세와 바로와 같은 서로 적대적인 관계의 쌍들이 나타난다. 전통적으로 하갈이나 에서, 그리고 바로는 이방인을 대변한다. 그러나 바울에게 있어서 그들은 믿지 않는 이스라엘을 대변한다. 무엇보다도 대대로 이스라엘의 적대자였던 완고한 바로는 이스라엘의 완고함을 대변하는 인물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가는 것”에서 민족들의 순례에 대한 회고를 전제할 수는 있을 것이다. 우리는 로마서 11:25f에서 그러한 역할 변경을 다시 한번 발견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전통적인 관념에 따르면 이스라엘의 구원이 비로소 이방민족들의 유입을 시작하게 한다고 보았으나, 여기서는 그것이 뒤바뀌기 때문이다. 즉, “민족들이 들어가는 것”은 모든 이스라엘이 구원받는 것의 전제가 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로마서 11:25에서 과연 유대인과 이방인의 역할 변경이 정말 전제되고 있는 것인가? 이것은 다음과 같은 문맥에서 분명히 표현할 수 있다: “너희(이방인)가 전에 하나님께 순종치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 이와 같이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그들이 순종치 아니하니, 이제 저희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함에 가두어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롬 11:30-32).

 

이렇게 이방인의 역할이 유대인에게 전이되고 있다는 사상은 바울이 정말 그러한 사고의 진전을 처음부터 가지고 있었는가를 의심해야 할 만큼 매우 대담한 진보였다. 원래 바울은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새로운 복음을 받아들일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만일 그렇다면 이방인들에게서도 요청되었던 심판에서 구원으로의 변화를 유대인들도 경험해야만 했다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을 수 있다. 그렇다면 그의 사고의 변화는 다음과 같은 것일 수 있다. 바울은 원래 이방인들만을 위해 그의 구원론을 구상했을 수 있다. 그리고 두 번째 단계에서야 비로소 그것을 일반화해서 유대인에게도 적용시켰을 것이다. 그러나 아마도 그는 보편적인 구원론을 처음부터 가졌을 것이고, 그것을 이 두 번째 시기에서 더 분명하게 표현했을 것이다. 여기에는 그렇게 발전되고 있는 두 가지 요소가 명확히 보이고 있는데, 그것은 비기독교적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바울의 이방인 선교에 대한 적대감, 그리고 이방인 선교에서 바울과 기독교적 유대주의자들과의 경쟁이다.

 

50년대 이방인 선교는 유대인 선교보다 더 성공적이었을 뿐 아니라, 유대 디아스포라 공동체의 결정적인 저항에 부딪쳤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방인 선교는 유대인과 그들 주변세계가 어렵게 유지한 긴장을 깨트렸다. 이것은 이방인 선교가 한편으로는 유대교의 중요한 동조자들(“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을 유대공동체 안으로 흡수했기 때문이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유대공동체 안에서 기독교 설교로 인해 부각된 긴장이 국가와 행정장관들의 간섭을 초래했기 때문이었다-예를 들면, 49년의 클라우디우스 포고가 그것이다. 그리하여 유대공동체들이 바울의 이방인 선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도 경쟁적인 적대자들이 되었다면, 유대인들도 이방인과 같이 심판을 거쳐야 한다는 생각은 바울에게는 개연성을 가졌을 것이다. 데살로니가전서에서 이 생각은 더욱 구체화되는데, 그것은 유대인이 이방인 선교를 방해하기에 그들이 믿지 않는 이방인과 똑같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이게 되었다는 것이다(살전 2:16).

 

바울에게 이 보편화된 구원사상의 개연성은 그가 경쟁하고 있는 유대주의자들의 이방선교를 통해서 다시 한번 부각되었다. 이것은 물론 다음과 같은 주장을 대변하는 것인데, 즉 구원은 오직 이스라엘 민족과의 연결을 통해서만 존재하며, 따라서 만일 이방인들이 완전한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일원이 되려 한다면, 그들이 유대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바울의 기독교는 이방인에게 아직도 “온전하게” 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되는 일종의 유대교의 전 단계에 불과했으리라. 마치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이방인들”의 위치가 온전한 유대교의 전 단계였듯이 말이다. 이 경쟁자들이 추진했던 이방인 선교에 대한 생각에 맞서 바울은 유대인도 모든 인간들과 똑같이 구원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생각으로 대응하였다. 이것을 보여주기 위해 바울은 토라를 평가 절하한다. 그래서 토라는 그 원래적인 목적이 구원이라 할지라도, 이방인의 우상숭배와 동일하게 인간을 예속으로 인도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비교. 갈 4:1ff).

 

바울의 삶에서 대략 10여 년간 나온 이 주장에서 구원론의 보편화는 이미 유대인과 이방인의 역할 바뀜을 통해서 실행되었다. 그는 이 주장은 분명히 어떤 일관된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나의 견해로 이 요소는 하나의 분명한 변화와 발전을 내포하고 있는 것 같다.

바울서신 가운데서 가장 오래된 데살로니가전서에서는 유대인에게 구원론의 부정적 측면만이 부과될 뿐이다. 즉, 그들도 하나님의 심판 앞에 서게 된다는 것이다. 그들에게도 하나님의 구속적인 의(하나님의 심판을 중지할)가 유효하다는 것은 여기서는 아직도 언급되지 않는다. 더욱이 바울은 이 “심판”이 종국적 심판(ovrgh. eivj te,loj)임을(살전 2:16) 일깨운다.

 

갈라디아서나 고린도서에서 바울의 주장은 중립적이다.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이를 근본적으로 상대화해버리는 ‘차별 없음’에 대한 주장(Indifferentzaussagen)은 여러 번 등장하는데, “그리스도 안에서는 유대인도 그리스인도 없다”(갈 3:28)거나, “할례나 무할례가 무관하다”(갈 5:6; 6:15; 고전 7:19)는 언급이 그것이다. 유대인과 이방인은 동일하게 회개의 기회를 갖는다. 지금은 아직도 유대인의 마음에 너울이 씌워졌지만 말이다. 그러나 바울은 구약에 근거한 소망을 새롭게 해석한다. “만일 그가 (즉, 이스라엘의 대표자로서의 모세가) 주께 돌아간다면, 그 수건은 벗겨질 것입니다”(고후 3:16). 여기서 종국적인 심판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로마서에 나오는 “바울의 언약”에서 그는 한 단계 더 나아가는데, 여기서 보편화된 구원사상은 철저히 관철된다. 바울은 유대인이 마치 하나님의 보편적 심판의 관점에서 특권을 가진다는 식의 모든 반론을 무시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바울은 모든 면에서 보편적인 구원사상을 유대인의 특권과 조절하고자 한다. “차별 없음”에 대한 언급 이외에도 그는, 올리브나무의 비유에서 분명히 표현되는 바(롬 11:17ff), 유대인의 “우선”을 주장하고 있다. 이 prw/ton은 유대인이 믿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유효한 것으로 남는다. 왜냐하면 바로 그들의 믿지 않음을 통하여 이방인들이 구원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마지막 재림에 오시는 주님은 이스라엘을 해방하게 되고, 모든 이스라엘의 죄, 그리고 이방선교를 대항한 그들의 적대감도 용서하게 될 것이다. 바울은 고심 끝에 이러한 긍정적인 결론에 도달한다. 그것은 그가 이방인과 유대인의 ‘역할 교환’을 새롭게 해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제 이 역할 교환에서 숨겨진 유사성을 발견하고 있다.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는 심판의 상태에 도달하게 된다. 그것은 그들 모두를 하나님의 은총에 의존하게 하는 것이다. 양자 모두는 분명 “simul justus et peccator”(의인이며 동시에 죄인)이다. 유대인은 이방인 선교를 수용하지 않음으로 하나님의 원수가 되지만, 동시에 그들의 조상으로 인하여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가 된다(롬 11:28). 바로 이것은 이방인을 포함한 모든 인간에게 해당하는 바, 모든 사람이 그로 인하여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으나(롬 5:10), 그리스도로 인하여 사랑을 받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로마서 5-7장은 대략 이와 같이 서술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내가 옳게 보았다면, 우리는 이러한 ‘발전’을 전제하여 관찰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바울은 이제는 구원이 이방인들에게고 열리게 되었다는 소식을 가지고 이방인 선교를 시작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 복음은 “유대교의 확장”이다. 이에 대한 유대인의 대항은 심판의 보편화를 가져왔고, 최소한 이에 대한 분명한 명제를 성립시켰는데, 그것은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모든 사람이 심판 아래 놓여 있다는 것이다. 유대교에 의존한 구원사상은 이제 유대교 신앙의 구조를 변형시켰는데, 그것은 유대인도 구원에 이르기 위하여서는 철저히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바울은 분명히 복음을 거절한 유대인에게도 보편적인 구원사상을 새롭게 적용한다. 그들의 거절은 구원으로 향한 유대인과 그리스도인의 평행한 길의 한 단계로 보였고, 그 길은 재림에서야 비로소(아니 보다 더 정확하게는 이미 곧) 합류되게 된다. 기독교는 여기서 유대교에 대하여 유사한 어떤 것이다.

 

III. 유대교와 기독교의 사회적 현실


하나의 그룹과 그들의 사회적 현실에 대한 해석은 항상 서로 연관된다. 하나의 해석이 영향을 미칠 수 있기 위해서는 어떤 “개연성의 기초”를 가져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 번째 단락에서는 바울의 해석-유대교와 유사한, 유대교의 확장 그리고 유대교의 변형으로서의 기독교-을 유대교 공동체와 기독교 공동체라는 인식 가능한 사회적 현실로 규범화해보기로 하자. 종교적 신념을 사회적 여건으로 종속시키는 것은 “사회적인 것”으로의 제한이 아닌 다른 어떤 것을 의미한다.

 

1. 유대교와 기독교의 유사성

사회사적 관점에서도 유대교와 초기 기독교는 “형제”로서 나타난다. 그들의 상관관계는 계층복합적(diastratischem)이고 범지역적(diaspo- ralem) 결합력, 즉 사회계층과 종교를 통한 결합을 통해서 나타난다. 이 양자의 특징들은 종종 초기 기독교의 사회사적 특성으로 불리는데, 이것들은 사실상 유대교적 유산이다.

 

1) 다양한 계층적 결합

초기 기독교는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을 유대교를 제외한 그 밖의 사회에서 작용했던 통합력보다 더욱 강력하게 통합시켰다. 그래서 초기 기독교는 다양한 사회적 계층을 두루 포함하는 복합 계층적 단일체를 만들게 되었다. 그렇다고 무슨 전체 사회를 대변하는 계층의 다양성을 갖는다는 것은 아니다. 초기 기독교는 로마제국의 상층부에까지 다다르지도 않았고, 도시와 시골에서 동등하게 분배된 것도 아니었다. 그 지역의 상층민들에게서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주로 주변적인 것으로 보였고, 양적으로 어차피 이 공동체의 대부분은 하층민들에게서 유래하게 되어 있었다. 여기에서 그리스도인(고전 1:26ff)과 외부인들은 차별 없이 함께 언급되었다. “복합 계층적 구조의 문제”에 있어서는 어느 정도 분명한 합의가 이루어졌기 때문에(물론 강조점들은 다양하다), 이 점은 여기서 더 이상 전개될 필요는 없겠다.

 

이방 사회에서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이러한 계층적 통합은 어떤 새로운 형태였다. 아마 고대의 “협회들”과 신비제의들도 다양한 지위의 인간들을 통합하였을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자유인과 종이 함께했던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들은 서로 다른 법적인 지위에도 불구하고 빈번하게 사회적으로 동일한 계층으로 정착될 수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기독교적 (그리고 유대교적) 공동체만이 그러한 규범과 신념을 일상 전체 속에서 실천하려 했다. 함께 모이는 자리가 일 년에 단지 몇 번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초기 기독교에서는 매주 공동식사가 있었다. 공동체는 죽음과 질병이 그 안에 발생한 경우 어린이와 노인들을 돌보고, 여행과 사업에 있어서도 서로 도움을 준 생활공동체였다. 그리하여 초기 기독교는 이방 사회에서 하나의 새로운 “사회적 서비스”인 계층적 연대를 형성시켰던 것이다.

 

그것은 유대교에 대한 발전이자, 유사성이었다. 유대교 공동체도 다양한 시민계층에 속한 사람들을 포괄했는데, 이들은 로마시민과 여러 도시의 시민들, 폴리스에 정착한 보호 대상의 이방인들과 외국인들이었다. 그들 대부분은 동시에 개개의 유대 “자치권”(poli,teuma)하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제한적이지만 자치권이 부여되어 로마인들에 의해 인정되고 보호된 사회적 결사체였다. 이러한 법적인 신분 차이에 더하여 경제적 편차로 인한 신분 차이가 생겨난다. 그리하여 유대 공동체에서의 많은 갈등은 공동체 내부에서 가난한 자와 부유한 자들 사이의 대립에서 시작되었다. 요나단이나 키레네이카의 하층민 지지자들의 봉기가 그것인데, 유대 상층부는 그들을 제압하려 했었다(요세푸스,『유대전쟁사』7,43ff). 그러나 그러한 대부분의 대립은 유대 공동체가 그 내적인 갈등을 극복하고 놀라운 통합력을 발휘하는 데 성공했다. 이 통합은 내부로부터 토라를 중심으로 한 ‘결속의 에토스’를 통하여 일어났다. 타키투스도 “유대인들은 모든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적대적 증오심을 표출하는 반면, 자신들 가운데에서는 확고하고 신실한 통합과, 자발적으로 도움을 주고자 하는 자비가 지배하고 있었다”고 말한다(Hist V,5,1). 그러나 여기서도 이른바 유대교 스스로가 부과한 특별 역할(Sonderrolle)을 모든 이방인을 향한 적대적인 비난(adversus omnes alios hostile odium)으로 해석하는 것은 반유대적인 선입견이었다는 것-이것은 곧바로 그리스도인에게도 이전되었다(cf. 타키투스,『연대기』XV, 44,4)-은 그저 부수적으로만 언급되었다.

 

유대교나 기독교 공동체의 계층 통합적 구조는 신분 차이가 상대화되고 있다는 것으로 입증된다. 첫째가 꼴찌의 역할을 감내해야 한다는 것은 초기 기독교의 기본적인 행동원칙에 속했다(막 10:42-44). 이와 비교될 수 있는 “지위 역전”(Positionswechsel)의 관념은 필로에게서도 표현된다. 그는 토라가 명하는 안식일 준수는 남종이나 여종에게 적용되어 주인과 종의 역할 전환이 일어나는 것으로 해석한다.

그(모세)는 주인들이 스스로 손을 사용하고, 또 종들의 노동이나 도움을 기대하지 않는데 익숙하게 하려 하였다. 이것은 그들이 변화무쌍한 인간의 삶 속에서 불행한 상황에 빠져들었을 때, 자신들이 노동에 익숙하지 못해, 미리부터 지치게 하지 않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종들은 선한 소망을 포기해서는 안 되며, 도리어 매 육일마다 돌아오는 안식의 때에 자유의 불꽃과 열망을 품을 수 있기에, 그들이 주인에게 언제나 용감하고 충성되어 보인다면, 온전한 자유에 이르게 될 소망을 품을 것이다. 그러나 자유민들이 당분간이라도 종들의 노동을 떠맡고 종들이 안식에 참여하게 한다면 그들의 인간적인 삶은 온전한 덕이라는 의미에서 고귀하다 할 것이다. 이는 높거나 낮거나 그 삶의 지위에 처한 자들 모두가 동등하다는 것을 기억하여 당연히 서로가 그들의 과실을 덜어주어야 하기 때문이다(필로, SpecLeg II, 67f.).

 

필로도 바울과 같이 주 앞에서는 노예나 자유자가 없다고 말하지 않았을까? 필로는 유대인의 삶에 대한 그의 이상을 엣세네파 가운데 특별한 집단이 구현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것은 그들이 철저하게 모든 노예적인 것들을 거절했기 때문이었다(Prob 75-87). 그러므로 바울이 공동체 내에서 종과 자유자의 차이를 무시하려 했던 것을 아브라함의 언약의 성취로 본 것, 즉 그러한 전통을 유대적 전통으로 본 것(갈 3:28)은 옳았을까? 그러한 경향은 필로나 바울에게서 동일한데, 인간의 실제적 관계에 대한 그러한 유토피아적 주장을 하는 그러한 명백한 특징 또한 그들에게 공통적이다.

 

2) 범지역적 결합

이러한 사회적 계층의 통합은 지역적 경계를 넘어선 의사소통을 통하여 활성화되었다. 고대의 종교제의는 많은 곳으로 확산될 수 있었다. 그러나 유대교와 기독교와 같이 지역의 경계를 넘어 조직적 형태로 발전된 것은 아니다.

이미 40년대에 예루살렘에서는 이와 관련하여 다양한 기독교 공동체를 대변하는 범지역적 협의체가 나타나난다. 이른바 사도공의회가 그것이다(갈 2:1ff). 거기에서는 새로운 운동의 통합을 위해 씨름하고 있는 모습이 발견된다. 헌금이 약정되었고, 선교의 장이 나뉘었다. 그 후에는 이방 공동체에 대한 간섭을 하게 되었는데, 안디옥에서는 예루살렘에서 파견된 자들이 나타난다(갈 2:11ff). 50년대의 바울공동체에서는 선교사들이 계속해서 경쟁관계에 있다. 이들로 인해 일어난 갈등은 그들이 자신들의 신념을 범지역적적으로 모든 측면에서 통일성을 확보하려 하였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와 동시에 그들은 적극적인 여행 활동에 대하여 말한다. 소아시아 감독 아베르키오스(Aberkios)는 2세기 말에 공동체의 이러한 범지역적 통합을 그의 묘비에 새기고 있다. “나는 믿음의 형제들을 도처에서 만났는데, 바울을 나의 마차에서 만났다.” 그는 아마도 바울을 신뢰할 만한 자로 믿게 했던 바울서신을 휴대하고 다녔을 것이다. 아무튼 바울은 피난처를 얻게 되었다. 이 “믿음”은 그를 장막 만드는 자로 일하게 했다. “도처에서 나는 믿음을 따라갔고, 어느 곳에서나 연못에서 얻은 생선을 음식으로 제공받았다. 게다가 이것은 풍부하고 깨끗하였으며, 감금된 자에게 순결한 소녀가…” 그러므로 복음서 이외에도 서신서가 초기 기독교에서 중요한 문헌적 양식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서신은 흩어진 자들 간의 의사소통이었다.

 

믹스(W.A. Meeks)는 이 범지역적인 통합을 초기 기독교의 초석으로 여겼다. 그러나 나의 견해로 그것은 유대교적 유산이다. 모든 디아스포라 공동체는 예루살렘에 있는 중심체와 연결되었다. 신약성서에서는 잘 발견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우리는 공동의 축제력이 정해져 있었다고 가정해야 한다. 매년 성전세가 예루살렘으로 들어왔다. 많은 유대인들은 매년 거룩한 성전을 향해 순례했다. 역으로 예루살렘의 관청은 디아스포라에 있는 유대인을 위하여 개입했다. 성전이 파멸되었을 때 점차로 랍비 위원회(Patriarchat)는 유대교의 새로운 중심으로 발전되었다. 이것은 지역의 범위를 초월한 초기 기독교에서 몇몇의 주교들과 주교회의가 범지역적 기관으로 발전한 것과 유사성을 갖는다.

그러나 유대교와 기독교가 범지역적이었다는 것은 그들이 자신들의 범세계적(kumenische) 확산을 “분산”과 “다름”으로 해석하였다는 의미도 있다. 유대교는 로마제국의 여러 도시와 마을에서 놀라울 정도로 내부인에 의한 자치력을 가졌던 하나의 특별집단을 이루었다. 그들은 자체적으로 법과 재판관을 가졌고 세금을 징수했다. 그리고 자치도시에서 자유시민으로서의 권리와 의무를 이행하게 하여 조상의 율법을 위해 죽을 것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유대교의 순교자 사상은 정치적으로 종속된 상황에서도 그러한 요구를 지켜나갔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사상을 유대교인들로부터 전수받았다. 그래서 그들도 지상의 국가에서 다른 도시의 의무를 의식했다. 그들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었다(빌 3:20). 그들도 이 땅에서는 나그네로 살았고, 지상과 천국의 도성의 요구 사이에서 갈등해야 할 때를 알았고(Germ sim I), 구성원들에게 자발적 순교를 기대했다.

 

유대인과 그리스도인은 고대세계 내에서 분명히 “유사한 현상”으로 이해되었다. 그것은 그들이 일반적인 동양적 신념세계의 한 부분을 대변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양자는 유일신에 대항한 이단에 대하여는 같은 태도를 취했다는 것도 그 한 측면이다. 그러나 그 밖에도 유대교와 기독교 공동체는 사회적 구조에서도 유사한데, 양자는 계층적이고 지역적 연대의 새로운 ‘사회적 서비스’(Angebot)를 구현했다.

이러한 인간 사이의 연대에 대한 새로운 범례는 볼케슈타인(H. Bol- kestein)이 말하는 “고대사회의 동양화”에 대한 표현으로 볼 수 있을까? ‘평등한 시민’이라는 이상적 모습이 그 사회적 개연성의 기초를 잃어감으로 비대칭적 사회적 의무가 강조되었을까?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달리 볼 수도 있다. 즉 이상적인 평등한 시민상이 자유민이라는 그 원래적 삶의 자리에서 생겼다면, 그것은 이제 소수의 특권적 계층에서 상실되어 이방인, 노예, 여자들과 같은, 이제까지 그것에서 배제되었던 그룹들에 의해 받아들여진 것이다.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이 세 범주를 언급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이들은 시민적 삶의 특권을 박탈당하였으나, 공동체에서는 동등한 자들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바울은 유대인과 그리스인, 평등한 이방인들, 노예와 자유자들 그리고 여자와 남자를 언급했던 것이다(갈 3:28). 정치적 공동체인 “에클레시아”에서 그들이 어떤 자리도 없었던 반면, 주님의 “에클레시아”에서 자리를 찾았을 것이다. 그곳에서 그들은 천상 예루살렘의 시민으로서의 자유를 갖는다(갈 4:1ff). 여기서 “상층가치의 하향전이”가 일어난다. 즉 이제까지는 단지 특권층에게만 해당되었던 평등과 자유의 이념은 이제 비특권층에게도 해당되고 전이된다. 단지 내향화된 영성으로서가 아니라, 공동체의 사회적 현실로서 말이다. 

 

이것에 대한 모델은 유대교 공동체였다. 자치적으로 뽑힌 역할과 외부에서 부여된 역할이 그들을 그 공동체 안에서 자신들의 신분의 한계를 넘어서 연결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상층가치의 하향전이”는 오래된 특권가치의 해소를 통하여 더욱 시너지 효과를 내었는데, 자유민들이 거주하는 지역의 상층계층에 로마제국의 엘리트들이 위치한다면 그 지역의 상층은 이들의 가치로 하층부와 더 밀접히 연결된다. 그렇지만 볼케슈타인에 의해 구상된, 이른바 권위구조 변화에 상응하는 가치 변화의 모델은 계층적 연대와 범지역적 결합을 연결하는 것과는 도무지 맞지 않는다. 이 범지역적 결합 또한 “상층가치의 하향전이”로 이해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런 의미 이외에도 그것은 제국의 상층부 사람들이 전세계적으로 확장된 접촉망을 가졌다는 표시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소수의 원로원과 기사의 가족들을 모집하여 형성된 권력 엘리트들은 도처에서 (역자 주-권력 접수에 대한) 결정적인 전갈을 받아들였고, 그런 의미에서 지인들과 친구들 그리고 가족의 네크워크를 구축했다. 하층민들 사이에서는 아마도 그러한 범지역적인 교류가 농민조합이나 직업적 교역관계에서 존재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관계는 어디에서도 유대인의 것만큼 분명하지는 않았다. 또 그러한 결합성은 어디에서도 그리스도인들과 같은 “작은 자들”에게서와 같이 그렇게 당연시된 곳은 없었다. 이들 말고도 코스모폴리탄적 엘리트들에게서나 찾아볼 수 있는 이러한 행동 유형이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에게서는 하층계층까지 파고들었던 것이다. 이러한 행동 유형은 분명 지역적으로 한정된 전통적 행동보다는 로마제국의 범지역적 구조에 더 잘 부합된다.

 

유대교와 기독교는 이렇게 사회적 변화에 상응하는 연대의 형태를 제공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한 연대의 동기를 직접 자신들의 믿음의 중심으로부터 도출해냈다. 부활하신 주는 하나님과 같은 자의 위치에서 종으로 강등된 급진적인 신분 포기의 원형이었다. 그래서 그는 십자가에 못 박힌 자로서 세상의 통치자가 된 모델이 되었다. 세상의 통치자로서 그는 모든 권세와 개개의 “혀”를 가진 인간의 주였다. 즉, 그는 로마제국에서 통일된 모든 나라들과 모든 문화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지배자요 주님이었다. 

 

2. 유대교의 확장으로서의 초기 기독교

그러나 유대인과 기독교인의 이 모든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그들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점이 존재한다. 유대인은 하나의 “민족”이었다. 그들의 삶의 형태는 태고적 전통에 서 있었지만, 그리스도인은 “간민족적”(inter-ethnisch)이었다. 이들의 삶의 형태는 기독교적 믿음에 대한 결단, 다시 말해서 다른 전통에 대항해야 하는 결단이었다. 문제는 유대교와 기독교 사이의 이러한 차이가 어떻게 사회사적으로 파악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우선 이러한 관점에서 초기 기독교는 유대교의 역사에 편입될 수 있다. 그것은 유대교의 헬레니즘 및 로마시대로 특징지어지는 이방 세계로부터 문화적 수용(Akkulturation)의 과정에 속한다. 이것은 문화적 동화(Assimilation)는 아니다. 기원전 175년 예루살렘에서의 헬레니즘적 개혁은 문화적 동화를 시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들의 적대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유대교의 이방세계에 대한 독특성을 제거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 개혁도 개혁하는 자의 이해에 따르면 차라리 “문화적 수용”일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여기서 그냥 그렇게 두자. 중요한 것은 “문화적 수용”은 자신의 정체성의 문제가 없이 주변세계에로 동화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초기 기독교가 문화적으로 헬레니즘을 수용하려고 하는 시도가 갖는 독특성은 어디에 있는가? 이에 대해서는 필로와 바울을 비교해 보면 많은 시사점을 준다.

 

필로는 이방 세계로부터 바울보다 더 많은 것을 전수한다. 우리는 그에게서 스토아주의, 플라톤주의 그리고 피타고라스주의적 사상을 발견한다. 그는 많은 고대 문필가들을 알고 인용한다. 그는 신비종교의 언어에 익숙하다. 바울도 주변세계로부터 분명히 많은 사상을 수용하지만, 그의 결정적인 주장은 유대교의 전통에서 나온다. 그럼에도 필로의 기본 사상은 이방인 선교사 바울보다도 훨씬 더 유대교의 틀에 머문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중요한 것은 그가 수용한 전통의 양이 아니라, “문화적 수용 과정”의 구조이다. 필로는 자신의 유대교적 신앙의 틀에서 새로이 해석한 이방적 내용을 주변 세계로부터 선별했다. 그의 가장 중요한 방법론은 알레고리적 성서해석이었다. 그는 분명-바울보다 훨씬 더 분명하게-인간의 변화와 영화(Vergottung)의 신비스런 과정을 묘사한다. 그러나 신적인 본질로 변화된 인간은 이스라엘이다. 필로에게 “신비”는 유대교적인 하나님 경외이다. 이 신비적 언어는 그로 하여금 유대교적 신앙의 요구를 유일하신 한 하나님에 대한 배타적이고 보편타당한 통로로 규정하도록 했다.

 

그러나 바울에게 이 문화적 수용 과정은 또 다른 구조를 갖는다. 바울은 이방적 전통을 상대적으로 덜 수용한다. 아마도 그에게 전해진 이방적 전통은 유대교적-헬레니즘적 전통으로부터 주어진 것이다. 그는 자신에게 익숙한 유대교적 전통 가운데서 선별한다. 이 전통에서 그는 보편화할 수 있는 요소들을 가져오고, 보편화에 대립되는 요소들, 특히 이방인들이 참된 하나님에게로 돌이키는 데 요구되었던 할례와 음식규례는 포기한다. 유대 전통에 대한 이러한 그의 ‘선별’과 ‘새로운 창조’는 유대교 전통을 넘어가는 하나의 관점에서 생긴 것이다. 그것은 다음이 아니라, 예수가 오심으로 새로운 구속사적 상황으로 들어갔다는 믿음이었다. 성서적 언약은 이제 모든 민족을 위해 성취되어간다는 것이다.

 

우리는 필로나 바울의 유대교가 그 주변 세계에 대하여 “선별적 문화수용”을 했다고 볼 수 있다. 필로는 외적인 내용을, 그리고 바울은 내적인 전승을 선별한다. 필로는 유대교적 관점에서 이방적 전통을 선별하고, 바울은 유대교적 전통을 선별하되, 이것을 넘어서는 하나의 관점(이에 대해서는 우리가 좀 더 자세히 살펴야 한다)으로 선별한다. 이렇게 바울에게서는 신학의 모든 개별적인 요소를 유대교적 전통으로부터 “유출할 수” 있지만, 이방인을 향한 개방성은 필로보다는 훨씬 더 강력한 요소로 작용한다. 비록 필로가 이방적 교육의 내용에 더 깊이 영향을 받게 되었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이러한 비유대인을 향한 유대교의 사회적 개방은 사회 전체의 관계와 쉽게 연관되었다. 로마제국은 새로이 형성되고 있는 로마사회로 많은 민족들을 통합해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되었다. 로마제국은 물론 우선 다양한 개개의 사회를 넘어서는 범지역적인 “상위구조”(Superstruktur)로서 존재하였다. 그러므로 민족과 문화의 경계를 허무는 데 적합한 종교운동들은 사회의 이러한 객관적 요구에 상응하고 있었던 것이다. 만일 이러한 요구에 부응하는 새로운 종교적 운동들이, 제국의 통치영역 안에 있는 여러 민족들의 통합에 우선적 관심이 있었다면, 국가를 지탱해주는 상층부와 그 운동들이 더욱 먼 거리에 서 있었다는 것은 납득할만 하게 된다. 그리하여 양자 모두에게 존재했던 범지역성의 요구-이것은 국가에서는 시이저요, 종교에서는 주님과 연관되었는데-가 왜 이 새로운 운동과 제국의 지배층간 갈등을 초래하게 되었는가를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3. 유대교의 변형으로서의 초기 기독교

우리는 유대교적 전통 하에서 바울에 의해 선별되었던 관점이, 결국 그 전통을 넘어가게 되었다는 것을 보았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이 “관점”을 정의해야 하겠다. 여기서 우리는 “유대교의 확장”이라는 핵심 개념 하에서는 상당히 어렵게 평가될 수밖에 없는 초기 기독교의 관점을 만난다. 이것에 대해 우리는 바울의 주장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여 말할 수 있다.

 

바울은 물론 유대교와 기독교의 차이를 pi,stij(믿음)과 no,moj(율법)의 안티테제를 통해서 하나의 개념으로 확립하려 하였다. 그는 이 안티테제를 이중적으로 상대화하고 있는데, 율법은 문자나 계명과 같아서, 문자로서의 계명뿐만 아니라 믿음을 향하고 있는 언약을 포함한다. 문자로서 율법은 믿음에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문자를 증거한다. 다른 한편으로 계명으로서의 율법은 믿음에 대립되지만은 않는다. 

왜냐하면 모든 율법은 사랑의 계명으로 요약되기 때문이다. ‘사랑을 통해 역사하는 믿음’은 이런 의미에서 율법의 완성이다. 믿음과 율법의 안티테제가 가지고 있는 이 이중적 상대화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바울에게서 믿음과 율법, 혹은 “믿음”과 “공로”의 대립을 항상 발견하게 된다.

 

우리가 오늘날까지 이 대립의 본질이 무엇인가라고 의아해하는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우리는 “율법의 종 됨”-이로부터 예수에 대한 믿음이 자유롭게 되는-을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율법의 부정적인 측면은 무엇인가? 그것이 실제로 성취되지 못해서인가? 아니면 원칙적으로 성취되지 못해서인가? 다른 것을 무가치하게 하는 교만함에서인가? 바울은 인간이 범하게 되는 율법이 갖는 살인과 폭력적인 성격에 저항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율법과 연관된 잘못된 태도를 비판하는 것인가? 그러면 여기서 이러한 질문이 생긴다. 이 잘못된 태도는 이미 율법과 함께 주어졌는가? 아니면 그것은 예수의 오심에 대한 응답인가? 아니면 바울은 근본적으로 율법에 대항하여, 율법을 연결시키는 것이 새로운 계시의 인정을 방해하였다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인가?

 

나는 이 모든 대답이 어떤 하나의 진리를 내포한다고 생각한다. 어찌하든 한 가지는 분명하다. 그것은 “율법”이 이스라엘에게서 가졌던 역할, 즉 하나님의 선택의 기초 위에 그 신실함을 증거하고, 인간의 신실함을 요구하는 율법의 역할을 이방인에게서는 수행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이방인에게 모든 인간의 행위에 앞서 존재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선택이라는 의식은 존재하지 않는다. 만일 이방인이 율법을 전수하였다면, 구원의 상태가 율법의 성취를 통하여 확고히 된다는 의미에서 율법은 “구원의 길”로 되었을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그들에게 율법은 유대교에서처럼 구원의 선물, 즉 인간적 행위보다 앞서 주어진 구원의 표징이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바울의 율법 비판은 그가 이방인을 율법으로부터 지켜내려고 할 경우에는 무엇보다도 강렬하게 나타난다. 율법의 전수를 통해 비록 이방인의 하나님에 대한 태도를 정초하지 못하고, 도리어 “완성”한다 할지라도 말이다.

 

그럼 이제 모든 인간적인 행동에 앞서 있는 ‘선민에 속함’의 자리에는 무엇이 오는가? 이 자리에 인간의 믿음과, 성례전에서 명백하게 되는 믿음을 통한 변화의 힘이 온다. 달리 표현하여, 출생을 통하여 선민에 속하게 된다는 유대인의 선언(Indikativs)의 자리에, 이방인에 대하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한 인간 변화의 선언이 대신한다. 그리하여 “믿음”과 “율법”은 안티테제로 정형화된다.

이 반명제는 종교사회학적인 고찰의 도움으로 설명될 수 있다. 바울이 여기에서 상호 대립시키는 것들은 서로 다른 두 종류의 종교적 정당성이다. 우리는 이것을 막스 베버가 순수이상형으로 분류한, 다음과 같은 권위와 지배의 세 가지의 정당성 형태로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1. 전통적 정당성: 권위는 출신을 통하여, 즉 태생, 승계된 지위(Sukzession), 전통이나 관습을 통하여 정당화된다.

2. 반면 카리스마적 권위는 어떤 한 인물(Person)에게 존재하는 일상화되지 않은 힘(Macht)이 타인에게 유출되지 않는 채로 그에게 현존한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물론 그는 자발적 인정을 얻을 능력을 지닌 자이어야 한다.

3. 합법적 권위는 비자발적인 규칙을 근거로 한다. 이 규칙은 인물과는 독립된 유효성을 가지며, 또한 명백성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유대교와 기독교는 양자 모두 공통의 전통적 권위, 즉 성서에 기초하고 있다. 이 성서의 해석을 중심으로 유대인과 기독교인들 간에 하나의 “정당성 논쟁”이 야기된다. 양자 모두는 유일하고도 참된 해석을 점유하려 한다. 바울은 유대인의 마음에 있는 성서와 율법의 참다운 이해를 가로막는 “수건”을 본다(고후 3:14). 유대인은 기독교인의 성서 해석을 자의적인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양자 모두에게 율법은 “성서”(grafh,)로서 논쟁할 수 없는 명백한 권위가 된다.

 

이 공통이 되는 전통적 정당성의 토대위에 로마와 헬레니즘 시대를 통하여 시대에서 두 가지 형태의 종교적 정당성의 구조가 발전한다. 한 측면에서는 랍비적-바리새적 운동(그리스도인 이전의 바울도 여기에 속했다)이 유대교를 관통하고 있는데, 이것은 성서의 토대위에 적법한 권위구조를 유대교에게 부여한다. 이 권위구조는 제의와는 독립된 지식과 하나님의 뜻의 성취를 가능하게 하며, 성전이 멸망한 후에 제의를 대치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우리는 적절한 해석학적 과정의 도움으로 하나님 앞의 삶에 대한 유대인들의 비자발적인 규정을 탐구해야 한다. 제사장적 성결을 세계의 일상 속에서도 실현할 수 있게 하는 규정 말이다. 우리는 실천적인 규정을 실용적으로 적용할 뿐만 아니라, 그 밖에도 제의를 통해 이룩되는 성결에 참여하는 것 모두를 탐구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유대교와 초기 기독교의 분열은 참으로 깊다. 왜냐하면 초기 기독교에서는 성서라는 공동의 토대위에서 다른 ‘정당성의 구조’(Legitimationsstruktur)를 만들어 이와 함께 하나의 종교를 발전시켰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은 성서 안에서 적법한 해석의 과정을 통하여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에 대한 ‘인물 카리스마적’(personal- charismatische) 연결과 이 연결을 통하여 경험할 수 있는 성령을 통하여 발견되는 것이다. 신학적이고 윤리적인 기독교적 신념을 기초하기 위하여 우리는 이제 마지막으로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현존과의 연관에 호소해야 한다. 이 인물 카리스마적 연관을 바울은 “믿음”이라고 부른다. 이 믿음은 신비적 연결을 향해 나아가는 예수와의 강력한 내적 결합이다. 바울은 이 연관에서 성서를 읽고, 유대교적이고 구약성서적인 전통에서 보편화될 수 있는 것을 선택한다. 이 인물 카리스마적 연관은 그가 유대교가 “선별적 문화수용”을 추진했던 바로 그 관점이다.

 

이 새로운 종교의 세 가지 특성은 나의 견해로는 이 인물 카리스마적 토대로부터 설명될 수 있다고 본다. 이 토대는 보편종교로서, 회심의 종교로서 그리고 해방의 종교(Universal-, Konversions- und Erloesungs- religion)로서의 성격이다.

1. 인간은 어떤 전제조건이나, 전력(Vorleistung) 없이 이 인물 카리스마적 관계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한 인물에 대한 “비일상적인” 힘의 인정은 매우 단순한 어떤 것이다. 인간은 이를 위해 어떤 특정한 민족적인 문화에 뿌리를 박아야 할 필요는 없다. 또 교육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성령은 민족과 사회적인 범주와 무관하게 누구나 사로잡을 수 있다. 예수에 대한 이 단순한 인물 카리스마적 관계로 인하여 비유대인도 유대인의 역할에 가담할 수 있다. “믿음”을 통하여 이방인을 하나님의 역사에 그의 백성과 함께 참여한다. 이 인물 카리스마적으로 연관된 믿음은 유대교에 존재하는 보편적 경향의 가장 끝으로 인도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2. 인간은 인물 카리스마적 연관에서 태어나지 않는다. 이 연관은 “회심”, 즉 계시의 매개자를 향한 의지적인 전환을 요구한다. 이것은 물론 이 전환으로 완전히 새로운 믿음의 내용이 받아들여진다는 의미 속에서는-다시 말해서, 만일 이방인이 유일하신 하나님을 믿기로 회심한다면-참으로 단호한 것이다. 이미 유대교에는 회심의 종교의 명제가 존재하는 것이다. 유대교는 그 주변 세계에서 강력한 흡인력을 발휘했다. 많은 사람들이 유대교에 연결됐다. 그러나 그럼에도 회심은 단지 유대인으로 태어난다는 일반적 경우에 보완되는 수용규칙일 뿐이었다. 초기 기독교에서 이 보완적 수용규칙은 초기에는 본질적인 것이었다. 바로 이것에서 초기 기독교는 유대교 안에 있는 보편적 경향성을 발전시킨 것이다.

3. 만일 인물 카리스마적 연결이 구원을 가져온다 해도, 인간이 이 연결에서 항상 사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새로운 카리스마적 연결의 수용에 앞서 심판에서 살아가야 한다. “믿음”은 “해방”을 일으킨다. 초기 기독교와 같은 하나의 인물 카리스마적 연관이 중심에 서는 종교는 해방의 종교가 된다. 이 새롭고도 구원하는 관계는 인간의 행동만이 아니라, 그의 전 존재를 변화시킨다. 그(특별히 이방 기독교인들)는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여기에서 또한 강조되어야 할 것은 해방사상이 유대교에서 이미 준비되어 있었던 하나의 경향이 발전된 것이라는 사실이다. 유대교에서는 묵시적 공동체에서 (인간과 함께) 전 세계의 변화를 생생하게 고대하였다. 바울은 이 기대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믿는 자들에게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었다.

 

요약해 보자. 바울은 유대인과 기독교인이 갔던 갈림길에서 결정적인 인물이었다. 그의 기독교는 인물 카리스마적으로 변형된 유대교였다. 반면 랍비유대교는 율법해석에 있어서 더욱 발전된 유대교였다. 이 두 종교는 동일한 전승의 기초에서 다른 권위구조로 믿음의 형태를 발전시켰다. 바울은 그가 “율법”과 “믿음”의 안티테제를 두 종교의 차이로 설정할 때 그 형태를 인식했다. 그러나 그는 그것에서 어떤 절대적인 대립이 존재할 수 있다고 보지는 않았다. 물론 그는 이 대입을 상대화 하려고 노력했다. 그것은 아마 두 종교의 형태는 다른 것이었지만, 직접적으로 대립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여기서 제안된 바, 기원후 1/2세기의 기독교와 유대교의 차이의 상대성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사실이 강조되어야 한다. 그것은 유대교가 율법 해석적인 종교, 그리고 기독교가 인물 카리스마적 권위구조를 가졌다면 이것으로 독립된 길을 가고 있는 양 종교의 압도적인 “조직원리”가 파악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 유대교에 카리스마적 인물이, 혹은 기독교에 율법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유대교의 카리스마적 인물은 분명히 토라와 그 해석에 종속된다. 랍비 엘리에젤 벤 히르카노스(R. Eliezer ben Hyrkanos)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이것을 보여준다. 그는 할라카적 결정을 지지하기 위하여 세 가지 기적과 이른바 바쓰-콜(Bath-Qol)이라는 하늘의 음성조차 열거할 수 있었음에도 자신의 서기관 동료들 다수에게 굴복했다. 그때 하나님은 하늘에서 웃었고,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의 자녀들은 나를 이겼다. 나의 자녀들이 나를 이겼다”(bBM 59b). 여기서는 기적의 카리스마가 아니라 비자발적인 율법해석이 가장 높은 권위로 보였다. 반대로 초기 기독교에서 그 카리스마는 곧바로 공동체의 법적인 체제를 배태시켰다. 클레멘스1서와 고대교회의 공동체 규율이 이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단순한 믿음의 관계에 있었다.

 

끝으로 우리는 이러한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유대교가 초기 기독교에서 인물카리스마적으로 변형된 것은 로마 초기인 제정시대(Prinzipats- zeit) 사회 전체의 구조 변화에 속할 수 있는 것일까? 로마제국은 많은 민족문화에 대하여 하향평가를 할 필요성이 있었다. 사회에서는 로마문화에 대한 기존의 소속성이 아니라, 아직도 획득하여야 할 헬레니즘-로마 문화에 대한 소속성이 더 긍정적인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로마제국 내에서의 상향 이동성(Aufwrtsmobilitt)이란 다수의 민족문화에 소속된 구성원에게는 그들의 민속적이고 문화적인 유산과 거리가 멀어지는 것을 의미하였다. 이것은 인간의 출발 상태는 부정적이었고, 이 상태로부터 해방되는 것에서의 구원을 추구하여야 한다는 종교적 사상에 개연성을 부여하였다. 상향 이동성은 종종 상층 엘리트들에 대한 개인적인 충성에 근거하여 일어난다. 주님에 대한 “인물 카리스마적 결합”이 어떤 긍정적인 작용을 가질 수 있고, 게다가 “구원”까지 일으킨다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사회적 현실에서 경험될 토대를 갖게 된다. 초기 기독교가 인물 카리스마적으로 변형된 유대교로 이해될 수 있다면, 이 변형으로 초기 기독교는 당시 사회 전체 현실의 몇 가지 측면에 부합하고 있는 것이다.

 

이 변형으로 초기 기독교는 유대교로부터 분리되었다. 유대인들이 당시의 “새로운 사회”(moderne Gesellschaft)에 적응하는 것보다 그들의 전통을 더 소중하게 여겼다는 것은 아마도 기독교인들에게는 오늘에야 비로소 적극적으로 이해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오늘날 그리스도인은 “현대 세계”에 대해 적응하려는 유혹에 대하여 그들의 전통을 더욱 더 지켜나가려고 하기 때문이다. 만일 그들이 수백 년 동안 그들이 “극복한” 유대교에 대한 자부심으로 그것을 명백한 “옛 언약”으로 평가 절하하려 했었다면, 그들도 오늘날 자신들의 신념이 “오래되어” “추월당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는 것을 경험하는 것이다. 

 

우리가 1세기에 유대인과 기독교인들이 걸어온 갈림길을 사회사적이고 종교사회학적인 관점에서 생각해본다면 아마도 이 “새로운 종교” (그리고 물론 “더 나은” 종교)를 대변하려는 그리스도인의 자기이해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자기이해와 상관없이 역사적으로는 다음과 같은 해석이 가능하다. 이를테면 성서의 종교는 당시에 변화되었고, 그것은 성서적 신앙에 기초한 두 가지의 병존적이고도 동등한 형식을 가져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유대교와 기독교이다. 이 역사적 해석이 유대교와 기독교의 신앙 이해에 대한 하나의 새로운 신학적 평가로 기여할 수 있다는 희망도 현재로서는 아마도 약간 유토피아적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이 유대인과 그리스도인의 길을 곧 다시 통합하시리라는 바울의 희망보다는 유토피아적이지는 않을 것이다. 

 

역자 주

이 글은 현재 본인이 저술 중인 ‘유대교와 기독교’ 연구의 중요한 관점을 제공하고 있는 타이센 교수의 논문, “Judentum und Christentum bei Paulus: Sozialgeschichtliche Überlegungen zu einem beginnenden Schisma,” M. Hengel/U. Heckel ed. Paulus und das Antike Judentum, WUNT 58 (T- bingen: Mohr, 1991), 331-359를 번역한 것이다.

 

이 논문은 튀엔(H. Thyen)의 60회 생신기념(1897. 4. 21)으로 발표되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주석적 작업을 통하여 유대교와 기독교의 대화를 열어나갔던 몇 안 되는 독일어권 학자 가운데 하나였다. 이 분야나 다른 많은 분야에서 그가 주었던 학문적 자극에 대하여 이 논문은 그저 작은 감사의 보답일 뿐이다.


[출처] 유대교와 기독교/ 바울에게서 시작된 두 종교의 분열에 대한 사회사적 고찰/ 게르트 타이센


출처 : 예수 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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