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학

[스크랩] 왜 기도해야 하는가?

수호천사1 2018. 11. 17. 20:37

 왜 기도해야 하는가?

 

 

 

 



어쩌면 너무나 평범한 질문이요, 너무나 익숙한 주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토록 평범히 만 여기고 익숙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기도에 관한 중요한 면들을 놓치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써 은연 중에 기도의 목적(혹은 기도할 이유)이 무엇인지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기도를 하고 나면 뭔가 뿌듯한 느낌이 오거든,"
"성경에 두드리면 열린다고 되어 있잖아요? 열심히 기도해서 소원 성취 해야죠,"
"뭐, 열심히 기도해서 손해 볼 건 없겠죠 … 최소 아주 불행한 일은 피할 수 있지 않겠어요?"

목회자들 역시 이구동성으로 말합니다:
"기도 열심히 하는 교인들은 달라요. 무엇보다도, 영적인 일에 열심을 내죠,"
"제가 죽어라 하고 기도에만 열정을 쏟아 부었더니, 아 글쎄 … 그 때부터 교인들이 붙 더라고요 … 그 전까지는 이론적으로만 알았었는데 이제는 정말 기도의 능력을 믿습니다,"
"후배 목회자 여러분들에게 선배로서 당부할 말은 이것뿐입니다 -- 기도 많이 하십쇼. 그래야 영안이 열리고 영적 권위를 행사하게 됩니다."

여기에 소개한 진술이나 표현들이 기도의 목적을 밝히는 데 있어서, 전적으로 그릇되었다든지 아니면 일말의 진리도 담고 있지 않다고 매도할 생각은 없습니다.
사실 우리는 열심히 기도해야 합니다.
또 기도를 통해 여러 가지 실제적 유익을 얻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기도할 이유를 이상과 같이 밝히는 일은, 기도의 본질 -- 하나님과의 교제--를 불충분하게 드러내고 그리스도인들을 오도(誤導)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마땅히 경계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 때문에 기도해야 합니까?
기도의 본질을 하나님과의 교제로 규정할 때, 진정한 기도의 목적은 무엇이어야 하겠습니까?
이런 질문에 어디 정답이 있겠습니까마는, 어쨌든 네 가지 사항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 매우 독특한 심령 상태 =
우리가 기도해야 하는 첫 이유는, 기도 시만큼 우리의 심령이 하나님 앞에서 독특해지는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의식(意識)은 우리가 만나는 대상 및 연관된 활동에 따라서 상당히 다양한 형태로 변합니다.
가령, 코미디 영화를 보고 있을 때와 모임 시간에 늦어 사람들의 시선에 노출된 채 앞문으로 걸어 들어가야 할 때의 의식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연모의 대상에게 구혼의 요청이 받아들여지는 장면을 상상할 때와 독일어 동사 변화표를 암기할 때의 의식 사이에도 커다란 간극이 존재합니다.
마찬가지로, 신앙 행위 [QT, 전도, 가정 예배 등]에 몰두할 때와 일상적 삶 [설거지, 장보기, 공문서 작성, 자동자 수리 등]에 관여할 때, 둘 사이의 의식 상태에는 분명 차이가 있습니다.

심지어는, 우리가 신앙 행위의 범주에 속한다고 동일하게 분류하는 활동들에 있어서도 의식의 차이를 말할 수 있습니다.
흔한 예로서, 혼자 성경을 공부할 때와 혼자 기도할 때를 비교해 봅시다.
비록 두 가지가 다 신앙 행위의 범주에 들어가는 일들이지만, 각각의 행위자가 보유하는 의식의 상태에는 역시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성경을 읽고 공부할 때는 이러니저러니 해도 내가 의식의 주체가 됩니다.
내가 읽고 내가 관찰하고 해석하고 삶을 돌이켜 보며 반성합니다. 내가 깨닫고 내가 회개하고 내가 진리를 적용합니다 (물론 이런 것들의 제공자는 하나님이시지만 그러나 어쨌든 그런 것들을 능동적으로 자신의 영적 인식에 포함시키는 것은 자기 자신입니다.)

그러나 기도는 다릅니다.
기도 시에 우리는 철저히 수동의 입장에 처합니다.
비록 "내가 기도한다"라는 어법을 사용하지만, 실제로는 내가 그저 하나님 앞에 부복(俯伏)할 따름입니다.
하나님께서 주도권을 쥐신 가운데 우리는 그의 장 중에 사로잡혀, 그저 그 분을 올려다볼 따름입니다.
우리가 말을 하지만, 실은 무슨 말로 기도를 이어갈지조차 알지 못합니다
(기도문을 읽지 않는 한). 우리가 기도의 상황을 컨트롤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는 철두철미하게 그의 컨트롤을 받습니다.
이것은 기도시의 호칭 사용 ["주여," "아버지여," "왕이시여," "천지의 주재시여" 등]에도 나타나고, 한국인의 경우 극존칭의 어법 ["∼하시 옵소서," "∼하나이다," "∼하옵시고" 등]에 반영되어 있으며, 무엇보다도 우리의 심령 상태 [헌신, 복종, 찬양, 순종 등]와 직결되어 드러납니다.

그런데 이런 식의 심령 상태는 기도 이외에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심지어는 성경 공부에서조차 이루어지지 않음을 위에서 밝혔습니다.)
우리가 이런 심령 상태를 정기적으로, 그리고 깊이 있게 겪으면 겪을 수록 경험적 차원에서 하나님을 아는 것이 됩니다.
만일 어떤 이가 모든 형태의 신앙 행위에 몰입하되 기도하는 일을 제외한다면, 그는 결코 하나님을 옳게 알지 못할 것이며, 하나님과의 살 깊은 교제를 누리지 못할 것입니다.

= 심리적 자유와 해방 감 =
우리가 기도해야 할 또 다른 이유는 기도를 통해서 인간이 추구하는 진정한 자유와 해방 감을 만끽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 내가 단독자로 서면서 누리는 고귀한 선물이요 신앙적 특권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때 누리는 자유와 해방 감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약간의 배경 설명이 필요합니다.

인간의 삶은 복잡한 인간 관계로 얽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어떤 사회에 살든지 인간 상호간의 관계 수립과 유지를 위해서 노력을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없이는 효과적 커뮤니케이션도 예의 범절의 준수도 가능하지 않습니다. 가령, 오늘날 한국 사회를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사람을 만나면 먼저 (비록 속으로 하는 일이지만) 상대방의 나이, 신분, 경력, 성격, 기질 등을 파악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정보나 판단에 기초하여 호칭, 존댓말 여부, 대화의 주제, 관계의 지속 여부 등을 결정합니다.
만일 이런 것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오판을 하든지 실수를 하면, 우리는 상대방을 화나게 만들든지, 다른 이들의 웃음거리가 되든지, 아니면 어쨌든 정상적인 인간 관계의 발전을 망치게 됩니다.
대부분의 경우 이런 일들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일어나지만, 이런 작업은 우리에게 심리적인 부담을 주고, 우리를 얽어 매며, 숨막히는 억압 감 속으로 몰아 넣습니다.

그러다가 자연을 대면한다고 합시다.
숲을 대하고 흙을 만지며 자연에 접촉할 때, 우리는 이런 제약 감에서 풀려 자유를 느낍니다.
우리는 자연과 만나면서 더 이상 심리적 씨름 -- 상대방이 누구인지, 나는 그 대상과 어떤 위치에 놓이는 것인지, 그의 의도는 무엇인지, 왜 저런 시선으로 보는 것인지 등 --을 할 필요가 없음을 절감합니다.
그래서 자유로움과 해방 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연과의 접촉에는 한 가지 약점이 있습니다.
자연은 인격적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범신론자나 물활론자(物活論者)가 아니라면 누구나 동의할 것입니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커뮤니케이션은 불가능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기도하러 나갈 때, 이 모든 문제는 해결을 봅니다. 한편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대면하면서 인간 관계의 지속에 필요한 "통빡 굴리기"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이시고 사랑으로 대하시며 늘 선한 동기와 의도로 맞아주시기 때문입니다.
그 분은 변하지 않으시고 성실하시며 늘 똑같은 마음으로 우리를 돌보십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말할 수 없는 심리적 자유와 해방 감을 줍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께서는 자연과 달리 인격적 존재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와 인격적으로 교류하고 사랑을 표현하고 나눌 수가 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우리의 자유와 해방감은 더욱 새로운 차원으로 고양됩니다.
인간과의 관계에서도, 또 자연을 대하면서도 얻을 수 없었던 그 즐거움 말입니다.
바로 여기에 하나님께 기도로 나아갈 중요한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 자신의 참모습 노출 =
기도를 해야 할 셋째 이유는 바로 위의 항목과 긴밀히 연관이 됩니다.
인간이 추구하는 진정한 만족과 행복은, 가까운 이와 누리는 투명하고 진솔한 자기 노출 및 상호 교류에 존재합니다.
우리가 부모, 친구, 동창, 교우, 배우자 등과의 관계를 그리워하는 가장 깊은 곳에는 아마도 이런 욕구가 있을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누구이고 어떤 존재인지 흉허물 없이 공개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해도 상대방이 나를 정죄하거나 우습게 여기지 않고 받아준다는 것을 알 때, 우리의 행복감은 극에 이르르며 또 이로써 진정한 심리적 성숙과 발전 또한 가능해 집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의 이러한 욕구는 빈번히 좌절됩니다.
우리는 어느 누구와의 관계를 통해서라도 -- 심지어 부모나 배우자와의 관계라 할지라도 -- 온전한 수준의 자아 노출 및 용납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인간의 죄성과 불완전성에 기인합니다.
진정한 자아 공개가 쉽지도 않고, 또 천신만고 끝에 시도했다 한들 오해와 조소거리가 되는 수도 많습니다.
심지어는 그런 공개 내용을 듣고 질투와 경쟁 의식에 빠져 상대방을 기꺼이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결단코 이런 일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 분은 사랑과 지식, 능력에 있어서 완전하시기 때문에 나를 온전히 이해하고 받아주시고 품어주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가면을 쓰고 허영의 의상을 겹겹이 걸칠 필요가 없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특히 우리는 기도 시에 우리의 모든 것 -- 즐거움, 부끄러움, 죄악 됨, 열망, 꿈, 괴로움, 회의 --을 그대로 아뢸 수 있습니다.
기도를 통하여 나는 내 아버지 앞에 벌거벗은 채로 섭니다.
그러나 거기에 수치는 없습니다.
그리스도 자신으로 옷 입혀 주시고 끌어안아 주시기 때문입니다.
기도가 아니고서 어찌 이러한 용납과 사랑의 확인이 가능 하겠습니까?!

= 영적 안목의 변화 =
이제 기도를 해야 할 맨 마지막 항목의 제시에 이르렀습니다.
기도는 우리의 안목과 시각에 전격적인 변화를 가져다 주기 때문에, 기도 해야 합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지속적으로 뵙습니다.
우리가 정기적으로, 지속해서, 분투 정신 가운데 그 분을 뵈올 때, 우리는 드디어 그를 닮게 됩니다. (고후 3:18에는 보는 것과 닮는 것 사이에 긴밀한 연관이 있음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것 가운데 중요한 부분은 그의 심정을 깨닫는 것, 그의 마음을 품는 것, 그의 관점과 시각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처럼 보고, 깨닫고, 느끼고,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정하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반역한 죄 된 세상의 참담함을 주님의 시각으로 바라보며 견딜 수 없는 마음의 뒤흔들림을 경험합니다(cf. 마9:36).
우리는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과 이웃을 대합니다 (cf. 빌 1:8; 2:5). 우리는 자신의 겪는 역경과 고통과 아픔의 환경을 주님의 안목과 관점에서 파악합니다 (cf. 고후 4:16-18).
그리하여 내가 기도한 대로 환경의 변화가 찾아오지 않는다 해도, 오히려 환경에 대한 나의 시각이 바뀐 것 때문에 즐거워 합니다.
이러한 관점과 시각의 변화는 원하는 바대로의 기도 응답보다 훨씬 더 중요하고 귀한 일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기도의 심령으로써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갈 때, 그의 임재 가운데 머물어 쉴 때, 우리의 영적 시각과 안목은 더욱 날카로워 지고, 더욱 포괄적이 되고, 더욱 통찰력 있게 변화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를 뵈옵고 그 안에 거하며 그와 긴밀히 동행할 때마다 그의 마음은 우리의 심령에 깊이 각인되며, 우리의 심령은 주의 영과 더불어 하나가 될 것 (cf. 고전 6:17)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도는 우리에게 만족과 보람을 줍니다.
그러나 그 만족과 보람의 근거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깊은 내면에 존재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유익 때문에 기도합니다.
그러나 가장 깊은 유익은 주님 자신과의 만남에 있습니다. 기도를 하면
할수록 이런 만족과 이런 유익을 맛보기 시작합니다.
그러니 어찌 기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출처:송인규 목사/총신대학교 신학과 졸업
미국 칼빈 신학교 신학 전공시라큐스 대학 철학 전공
합동신학대원 조직신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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