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학

[스크랩] 교회의 사명과 복음 선교론 - 왜 선교는 해야 하는가

수호천사1 2018. 11. 17. 20:36

 교회의 사명과 복음 선교론 - 왜 선교는 해야 하는가

 

 

 

 


 

    복음을 땅끝까지 전하라고 하는 것은 유언처럼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부탁하신 명령이다. 승천하시기 직전 땅에서 마지막 하신 말씀이 "내 증인이 되라"(행 1:8)는 부탁이었다. 그리스도의 생애와 교훈을 기록하고 있는 복음서 가운데 첫째 복음서인 마태복음의 끝장 끝절에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20)고 명하심으로 복음이 지구 상의 모든 족속에게 전파되어야 할 것을 지시하셨다.

    우리를 피로 사신 그리스도의 마지막 부탁이신 "복음 선교"의 명령을 순종하여 이루어 드리는 것이 마땅한 일이지만, 왜 선교하여야 하는가 하는 목적에 관하여는 서로 다른 견해가 있다. 즉, 복음 전파와 재림에 관하여 후천년적인 주장과 전천년적인 주장이 대립되고 있다.

1. 왕국 건설을 목표로 한 선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세운 장막의 가장 신성한 곳에 배려해 놓은 스랍 가운데 사시며 후에는 저들이 건립한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에 거하신다고 생각되었다(민 7:89, 사 37:16).⒀) 같은 맥락에서 왕의 왕(King of kings)이 되시는 그리스도께서는 인간들이 이루어 놓은 땅 위의 왕국에 왕의 자격으로 다스리기 위하여 재림하실 것이라는 주장이다. 따라서 복음선교는 땅 위에 그리스도의 왕국을 건설하는 것이 목적이며 이는 곧 재림의 주를 빨리 재림하시게 하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인위적으로 땅 위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려는 노력의 일환이 WCC가 목표하는 선교인데, 이는 1968년에 웁살라에서 열렸던 제4차 세계 교회협의회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즉 WCC가 가지고 있는 선교신학은 "하나님은 자신의 뜻에 맞게 사회구조를 개편함을 위해 고안된 계획과 행동을 원하신다"고 하는 데서 출발한다.

    이같은 선교 및 신학이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동안의 수많은 교회 강단에서 외쳐졌고 많은 교파가 발행하는 주요 간행물 속에서 옹호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선교를 수행하기 위하여 그에 따르는 예산을 배정하고 지도자를 훈련시키고 선교사를 해외에 파송하였다. 새로운 동력자원의 개발, 의학의 발달을 통한 질병의 퇴치, 과학적 영농법을 통한 기아의 방지, 가족계획을 통한 인구폭발의 종식 등 지금 시대의 흐름이 물리적,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재난을 제거하려는 WCC의 선교신학과 부합하였고 세계교회협의회는 이러한 인위적 노력을 신학적으로 뒷받침하여 왔다.

    WCC를 중심으로 하는 에큐메니칼 선교는 개인구원으로부터 사회적 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다가 급기야는 사회구원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급진적인 사회개혁과 정치적인 문제에 관심을 크게 기울이게 되었다.¹) 사회와 정치에 관여된 문제들을 해결하려는 교회의 선교는 산업선교, 도시선교 등으로 나타나 현실 세계의 구조적 모순과 악의 문제를 해결하려 노력한다.

    지금 교회시대 안에서 교회의 복음 선교와 성령의 구원 사역을 통해 영적 황금기가 도래할 것인데 그때는 모든 악과 재난이 무시해도 좋을 만큼 축소되어 지상에 천년왕국(millennium)이라고 불리우는 정의롭고 평화로운 나라가 건설될 것이며 이 왕국이 이루어져 천년이 지난 다음에 그리도께서 다스리기 위하여 재림하신다는 것이다. 선교라는 수단을 통하여 땅 위에 왕국을 이루고 그리스도를 모셔 오려는 후천년적(postmillennial) 노력이 자유주의 계통의 신학과 교회가 추구하는 선교의 목적이다.

2. 재림의 조건으로서의 복음선교
    자유주의 진영에서도 똑같이 인용하는 구절이지만 마태복음 24장 14절의 "이 천국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한 복음 선교의 당위성을 복음주의 입장에서는 달리 해석한다. 즉 복음 전파로 땅 위에 왕국을 건설하려는 것이 아니고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것 자체가 목적일 뿐이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땅끝까지 복음이 전파된 다음에야 이루어질 것으로 해석하며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려 힘쓰는 것이다. 물론 선교가 잃어버려진 영혼을 구원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만 기본 목표는 "증거하기" 위한 것이다.

    이 세상은 점점 악하여져 가다가 마침내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해서 악의 세력은 정복되고 그리스도 자신에 의하여 땅 위에 왕국이 건설되고 이 정의와 평화의 나라가 천년동안 계속될 것이라고 믿는 것이 전천년설의 종말관이며 선교관이다. 세계가 점점 좋아지고 있는가 아니면 나빠지고 있는가 하는 문제는 논의의 여지가 있지만, 에큐메니칼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과학과 문명이 발달하는 것에 비례해서 세계가 좋아지고 있지 못함을 발견하게 되며 오히려 인간의 성품이 더욱 포악해지며 죄와 불법이 성해져 가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인위적인 노력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땅 위에 천녕왕국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것은 역사적 전천년설의 입장이나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에서 똑같이 믿고 주장한다.

    예수께서도 마지막 때에는 불법이 성해 가리라고 이미 예언하셨는데(마 24:12), 말씀하신 대로 세상은 점점 악해져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죽어가고 있는 영혼을 구함과 함께 구원의 복음을 모든 민족에게 전파함으로 모든 사람에게 증거를 삼아야 할 것이며, 이 일이 마쳐질 때 비로소 끝, 즉 그리스도의 재림이 실현될 것을 기대한다.

3. 선교 방법론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 그 방법론 역시 선교신학에 따라 차이가 있다. 에큐메니칼 입장에서는 사회구원에 역점을 두는 까닭에 선교의 방법이 가난의 구제, 질병의 퇴치, 정치적 억압에 대항하는 등 "운동(movement)"에 치중한다. 복음을 전하라고 파견된 선교사들이 지나치게 세속적인 사업, 즉 교육, 문화, 의료사업 등에 개입하게 된 것은 후천년적 종말관에 기인한다. 인간의 노력과 복음전파로 땅 위에 의의 왕국을 건설하려는 목적이 선교의 방법을 세속적인 면에 치중토록 한 것이다.

    복음전파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때로는 이적을 베풀어 주시므로 귀신도 나가고 병도 고쳐진 것을 인정하며(막 16:17 18), 현대의 복음 선교에 있어서도 선교의 방법으로 의료 또는 교육사업을 이용할 수 있을 것이나 사업 또는 운동 그 자체가 선교의 목적일 수는 없다. 잃어버린 영혼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것, 그리함으로 죽은 영혼을 살려내는 것이 복음 선교의 목적이다.

    구원받은 영혼이 그가 속한 사회 속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여 또 다른 영혼을 구하고 이 사회를 좀더 좋게 만들어가야 할 책임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개인구원에 앞서 사회구원에 몰두하는 것은 복음적인 선교라 할 수 없을 것이다.

4. 선교의 실제
    선교의 지상명령(至上命令)을 수행함에 있어서 선교사의 숫자면에서나 전교인당 선교사 파송 비율에서 한국교회는 아직 서구 교회를 따라갈 수가 없다. 그러나 미국과 캐나다를 중심한 서구 교회의 선교사 지원자가 감소하고 있고 또한 선교 현장에서 그들이 반대와 배척을 당하는 일이 많아, 선교의 공백을 메우며 선교의 주역으로 등장할 한국교회가 어떻게 효과적인 선교활동을 전개해 나가야 할 것인가를 살펴보려 한다.

  1) 한국교회가 세계선교를 담당할 이유
    선교 역사상 100년이라는 짧은 기간 안에 한국에서와 같이 비약적인 교회성장이 이루어진 예가 없다. 일본, 중국, 인도에서는 우리보다 훨씬 먼저 복음을 전해받고 또 중요한 선교적 성과가 없지 않았으나 정치적 변혁으로 말미암아 기독교가 멸절되다시피 했고 기독교 선교가 금지되고 있다.

    일본에 기독교가 전해진 것은 1549년인데 신교의 선교사가 첫 발걸음을 일본에 디딘 1859년 이후 꾸준히 선교활동을 해오고 있지만, 명치유신을 기해 애국주의적 열의 속에 서구 기독교는 배척을 당했다. 특히 1890년에 내린 교육에 대한 황국칙령(Imperial Rescript on Education)으로 기독교의 신학과 도덕률이 금지되고 신도(神道)의 조상신을 경배토록 명령됨에 따라 일본에서의 기독교 신자는 전인구의 1%미만인 130만명에 불과한 형편이다.
중국에 공산혁명이 있던 해인 1949년에 세례교인이 70만명, 전기독교인이 150만명이던 것이 공산당이 중국 본토를 지배하고부터는 감소되기 시작했고, 1951년에는 선교사들이 축출 또는 구속되는 사태로 기독교가 박해를 받았다. 특히 1966~69년의 문화혁명 기간에 기독교가 금지되어 선교는 물론 예배 행위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1976년 모택동이 죽고 4인방이 체포된 이후 자유화의 물결을 타고 교회의 문이 열리기 시작했으나 선교는 금지된 채 삼자운동(三自原則:自助, 自治, 自傳)에 따라 제한적인 교회 활동이 허용되고 있는 현실이다.

    선교 백년을 지나며 한국교회는 받는 교회에서 주는 교회로 탈바꿈을 하고 있고 인구의 30%에 가까운 기독교 신자와 수많은 신학교를 통해 배출되는 일꾼들이 세계선교를 위한 무한한 인적 자원을 공급할 수 있게 되었다. 반면 서구의 교회들은 그 노쇠화 현상으로 젊은 이들은 교회를 떠나고 지금 활동 중인 선교사들은 은퇴를 앞두고 있으니 선교 일선에서 일할 일군의 부족이 심각한 형편에 있다. 이 공백은 제3세계, 특히 한국교회를 통해 메워져야 할 것이다. 보수적인 신앙으로 무장되고 뜨겁게 기도하는 한국교회 성도들은 말세의 추수군으로 예비된 잠재적 선교사이다. 때가 오고 문이 열리면 세계를 향해 복음을 들고 나갈 준비를 하나님께서 해놓으신 줄 안다.
  
    기록적인 기독교의 발전 외에도 한국이 세계 선교를 감당하기에 적합한 역사적 조건이 있다. 즉 1945년 이후에 탈서구화의 물결을 타고 제3 세계에서 활동 중인 선교사들이 배척을 받아 그 활동 무대가 좁아져 가고 있으나 한국인 선교사는 제3세계와 서구 세계를 잇는 가교의 역할을 해야 할 때를 맞았다. 식민지 민족으로 제국주의에 착취를 당한 쓰라림을 함께 나눈 한민족은 다른 제3세계를 접할 수 있는 위치에 서 있다. 반면 우리는 서구 세계에 대해서도 좋은 유대를 갖고 있다. 다른 제3세계는 서구인에 의해 점령되고 식민정책에 시달려 왔으나 한국은 일제의 압박 아래 서구의 동정과 도움을 받아왔다. 특히 서구의 선교사들은 일제 통치 아래의 한국인과 함께 고통을 당하며 한국의 독립과 자유를 위한 투쟁에 음으로 양으로 교회를 도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기독교가 서구 식민지 정책의 도구로 오해되고 이용되던 다른 제3세계의 정황과는 달리 한국에서는 일제치하에 오히려 기독교가 발전하였고 한국의 독립에 결정적 역할을 한 서구 연합군은 침략자가 아니라 해방자로 인식되어 좋은 관계를 맺어오게 된 것이다.

    한국이 제3 세계와 또 서구와 맺어온 좋은 관계는 복음을 전달할 마지막 때의 선교사명 수행에 적합하고도 유리한 조건을 제공한다. 또 다른 세계 선교의 적합성은 한국의 경제발전에 기원한다. 아무리 역사적 조건이 유리하고 인적자원이 풍부하더라도 경제적으로 선교의 능력이 없으면 세계 선교는 그림의 떡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한국은 세계를 시장으로 하여 물화(物貨)를 공급하는 주요 수출국으로 부상되었고 상위 중진국으로 발돋음한 경제 수준이 세계 선교를 감당할 역량을 키워온 것이다.

    예루살렘에서 출발한 기독교 복음이 로마로, 유럽으로 또 영국을 거쳐 미국으로 서진(西進)하였고 다시 서쪽으로 태평양을 건너 한국에 상륙하여 꽃을 피웠다. 이제 한국은 이 복음을 예루살렘을 향해 전달하는 마지막 서진(西進)의 과정에서 주역을 담당해야 한다. 한국에서 예루살렘에 이르는 도정(途程)에서 중공의 10억 4천만명을 위시하여 동남아와 아프리카까지 복음으로 세계를 정복하는 세계선교의 주축은 한국교회와 한국 기독교인이어야 한다.

  2) 성공적 선교 전략을 위한 유기적 조직
    선교는 하나님의 일(missio dei)이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사랑하시고 또 구원하신다고 하는 복음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좋은 소식이다. 영어로 gospel의 어원이 godspel(God spell) 즉 하나님의 소식이란 말에서 연유한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성취하신 구원의 복음을 전하도록 사람을 보내기도 하시며(마 15:24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보내심, 마 10:5, 눅 10:3은 예수께서 12사도와 70문도를 보내심, 행 13:2, 4은 성령께서 바울과 바나바를 선교사로 보내심을 기록하고 있다) 전할 능력을 주신다(행 1:8). 따라서 하나님의 선교는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고 하나님의 지도에 순응함으로 성공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기본적인 선교의 원리 외에 사람이 해야 할 선교전략을 세우고 수행함이 필요한 일이다. 성공적인 선교 사업은 교회와 선교기구 및 선교사의 유기적 활동으로 이루어진다.

   ① 교회의 선교전략
    교회의 사명이 선교임을 마태복음 4장 23절에서 예수님의 초기사역을 보면 교육, 전도 또는 선교, 구제 또는 봉사가 가장 중요한 내용임을 알 수 있다. 물론 예배와 교제도 교회의 5대 사명에 들어가야 한다. 믿는 성경적 신자들은 개인적으로나 교회적으로 선교에 열심을 보인다. 개교회적으로 선교부 또는 선교 위원회를 조직하고 또 남녀 전도회나 선교회를 두어 선교하는 일을 하지만 열심에 비해 선교의 영세성을 면치 못하며, 책임자가 바뀜에 따라 선교정책의 일관성을 유지하기가 어렵다. 개교회는 교인들의 선교열을 고취하고 선교비를 모으는 일에 주력할 것이며, 장기적인 선교정책 및 효과적인 선교사업은 교단적 차원에서 전문적인 책임자를 두어 담당하고 수행하도록 하여야 한다.

    교회의 선교사업은 교회의 시작과 함께 실시되어야 하며 선교비는 일반예산과 구분하여(마치 건축기금을 다른 계정으로 구별하여 관리하듯) 편성하고 적어도 일반예산의 15%에서 25%가 편성되어야 한다(미국에서 가장 모범적인 선교활동을 하는 기독교 연합선교회, 즉 Christian and Missionary Alliance에 속한 교회들은 경상비 예산의 50%까지를 선교예산으로 책정하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하나님께 드리는 십일조 외에 선교헌금을 별도로 작정하여 정기적으로 헌금 하도록 하고, 교회에서도 선교기금을 위해 일정 비율의 선교비 예산항목을 책정하여 선교하는 일에 힘을 써야 한다. 미국에서 선교에 열심있는 교회는 선교예산이 일반예산보다 많은 경우도 있고, 한 교회에서 수십 명의 선교사를 세계에 파송하는 일도 있다.

    교회가 선교하는 일에 있어 두 가지 조심할 일이 있다. 하나는 개교회의 건축이나 경상비 조달에 쫓기다 보니 선교비나 구제비를 경시하거나 아예 무시하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외형적 전시효과에 도취되는 일이다. 재정적으로 독립하는 교회가 지교회를 세우고 미자립교회를 자매교회로 삼아 돕는 것은 좋은 일이나 우리가 몇 교회나 돕고 있다고 하는 성취감 때문에 외형적이고 산발적인 선교사업을 하는 일이다. 내 손으로 또 우리 교회에서 무슨 일을 한다고 할 때에 열심도 나고 보람도 느끼는 것이 사실이나, 지속적이고도 효과있는 선교사업 수행을 위해 개교회의 선교사업이 교단적 차원으로 결집되고, 혹 개교회적으로 벌이는 선교사업이라 할지라도 교단의 자문과 지도에 따라 교단의 전체적 선교전략의 일환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해외선교는 물론 국내선교에 있어서도 그 지원이 한곳에 지나치게 집중되거나 소외된 채 고통?당하는 경우가 없도록 교단적 차원에서 배려와 지원을 해야 한다.

   ② 선교기구의 역할
    선교사 지망자를 선발하고 파송하며, 선교사를 물심간에 지원하고, 교회와 연결시키는 일을 선교기구가 담당한다. 파송하는 단체가 없으니 좋은 사명자를 놓치게 되고, 혹 보낼 수 있다 하여도 재정적 뒷받침이 없으면 효과적인 선교활동을 기대하기 어렵다. 전교인은 많든 적든간에 새해의 헌금을 약정할 때 선교헌금을 작정하여 헌금하게 하고 이를 각 교회에서 모아 선교국으로 송금하여 재원을 충당할 것이다. 충분한 선교기금이 확보되기까지는 TEAM(The Evangelical Alliance Mission) 선교부의 방법을 따를수도 있겠다. TEAM선교부에서는 선교사 지망자가 선교희망지에서 생활하며 선교활동을 하는데 필요한 경비를 매월 지원할 후원자를 스스로 찾아내게 한다. 즉 선교기간, 예를 들어 2년이면 이 기간동안 필요한 경비 가운데 일부분을 매월 계속적으로 2년간 지원할 수 있는 후원자와 그 서약을 받아 목표액에 이르렀을 때 선교부는 선교사 지망자를 자기 선교부의 소속 선교사로 파송하고 후원자들을 통해 행정적인 지원을 하고 있다. 후원자들은 선교부로 직접 약속한 금액을 송금하고, 선교부에서는 선교비를 파송한 선교사에게 보내며 영수증과 송금을 받게 될 선교사의 이름을 송금자에게 통보한다. 현지의 선교사는 활동내용을 선교부와 자기의 후원자들에게 정기적(보통은 월1회)으로 문서로 보고하고 기도를 요청한다.

    이와 같이 선교기구는 선교사와 교회를 유기적으로 연결해 주며 선교사에게는 재정적, 행정적 지원을 하고 기도와 후원을 유도한다. 선교사가 안식년으로 귀국하거나 여행으로 돌아올 기회가 있으면 개교회를 방문하여 선교활동 보고를 갖게함으로 선교사가 힘을 얻고, 교회가 새로운 자극을 얻도록 배려해야 한다.

   ③ 선교사
    세계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보냄을 받은 사람을 선교사(missionary)라하는데 missionary란 말은 라틴어로 보낸다는 뜻의 mitto에서 유래된 것이다. "보내심을 받은 자(one sent forth or away)"란 말은 “사도”라는 말이 의미하는 뜻이기도 하다. 선교사란 초대교회 사도들의 계승자로 본국 교회의 파송을 받고 해외에 나가 다른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들을 말하는데, 이 선교의 사명은 사도들이나 선교사들뿐만이 아니라 전교회 각 교인이 담당해야 할 예수님의 대위임(Great Commission)이다(마 28:18 20). 19세기에 일어났던 세계선교의 뜨거운 열의와 복음의 확산은 주님을 사랑하고 그의 명령을 수행하려는 복음적 기독교인의 사명 완수를 위한 노력의 결실이었다.

    인도 선교의 지도자인 요한난(K. P. Yohannan)은 "크리스챠니티 투데이" (Christianity Today) 잡지의 1986년 11월 7일자 기사에서 "미국인들로 세계를 복음화하기는 불가능하다"고 전제하고 현지인 선교사의 역할을 강조하면서 "수십억의 불신자를 전도하려면 현지인 선교사의 선교에 의존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세계문서십자군(World Literature Crusade) 총재이며 세계기독잡지사(World Christian)의 이사장인 키이츠맨(Dale Kietzman)은 "미국인들은 제3세계 기독교인들의 참여없이 세계를 복음화할 수 없다"고 말하며 미국인 없는 현지인 선교사의 협력으로 세계선교의 대위임을 수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서구 출신 선교사에게 종속적인 위치로 협력하는 것이 아니라 똑같은 입장에서 자원과 책임을 똑같이 나누어 가지며 세계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자고 제안한다. 서구 출신 특히 북미주 출신의 선교사가 숫적으로 감소하는 한편 활동영역이 제한받고 있는 현실에서 제3 세계, 특히 한국의 선교사들이 세계 선교의 남은 책임을 감당해야 할 것이나 지나친 경쟁의식이나 성과 중심의 선교활동으로 피선교지에서 불필요한 잡음이나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해야 한다. 한국에 복음이 처음 전파될 때도 다양한 선교기구와 이질적 교파들의 협조 속에 한국 선교를 위한 연합적 노력이 있었음을 잊을 수 없다. 1905년 장로교와 감리교의 선교사 150여명이 모여 재한 복음주의 선교공의회(The General Council of Evangelical Missions in Korea)를 조직하고 선교지역의 분할 등 선교의 협력을 모색했고, 1912년에는 개신교 복음주의 선교협의회(The Federal Council of Protestant Evangelical Missions in Korea)로 발전적 조직 개편을 한 바 있다.

    이교적 적대 환경에 공동 대처하며 효과적인 선교활동을 수행하기 위하여 해외에 있는 선교단체들이 공동전선을 이루는 것은 긴요한 일이다. 1945년에 설립되고 83개의 선교기구가 동참하고 있는 복음의 해외선교협회(Evangelical Foreign Missions Association) 등이 그 예이다. 선교의 역사가 짧고 선교의 경험이 적은 한국의 선교기구나 선교사들도 이미 활동하고 있는 선교협의체와 긴밀한 협조 속에 세계선교의 사명을 수행해 나가야 한다.

   ④ 선교사의 교육과 훈련
    한국에서 배출되는 수많은 사역자들을 위한 국내의 일터는 제한되어 있으나 사명감 넘치는 젊은 일꾼들을 요청하는 세계선교의 무대는 아직도 넓다. 제3 세계를 대상으로 하는 선교활동 외에 서구를 향한 복음의 역수출을 위한 준비도 함께 갖추어야 하겠다. "선교를 위한 전망"이란 기사에서 복음 선교가 제3 세계에서 서구 기독교 국가로 역행할 필요를 언급하고 있음을 보는데 1900년에 세계의 기독교인 가운데 절반이 유럽에 살고 있었고 아프리카에는 2%뿐이었으나(David Barrett의 통계) 1980년에는 전세계 기독교인구의 4분의 1이 유럽에 있고 아프리카에는 15%의 기독교인이 생겼다. 20세기의 끝에는 유럽과 아프리카에 각각 20%의 기독교인이 있을 것이라 한다. 통계가 보여주는 것은 유럽과 미국의 신자가 줄어드는 반면(매주 53,000명의 신자가 교회를 떠남) 제3 세계의 복음화가 급속해져서 서구의 복음화를 위해 선교의 역행(mission in reverse)이 일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신학교는 목회자를 양성함과 동시에 선교를 위한 복음 전도자를 배출하기 위해 교과과정(curriculum)을 마련하고 선교사의 교육과 훈련에 임해야 한다.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을 만들기 위해 인격훈련은 물론 철저한 신앙훈련과 선교현장의 적응을 위한 준비가 필요할 것이다. 신학교의 부설이나 총회선교국 아래에 선교훈련원을 두어 어학 준비나 대상국에 대한 자세한 지리, 풍습, 종교적 이해가 있도록 한다. 언어의 준비는 외국의 대학이나 외국어 학원에 위탁하여 교육을 받게 할 수도 있고 피선교지의 어학훈련원(language institute)과 협력하여 현지의 적응 훈련을 겸하여 어학을 연수하게 할 수도 있다.

    선교기구는 복음을 전하는 복음 전도자를 파송하는 일 외에 선교 대상국에 필요한 직업 선교사를 파송하는 것을 선행하거나 병행해야 한다. 한국에 온 초대선교사가 의사인 알렌 선교사이었듯이 피선교지에 필요한 의사, 기사, 교사 등을 기능 선교사로 보내면 현지인과의 좋은 인간적 유대를 맺어 복음을 전할 분위기를 만들 수 있게 되며, 기능 선교사는 특히 공적으로 선교가 금지된 나라에 복음을 전하는 중요한 통로가 된다. 기능 선교사가 반드시 신학교를 졸업할 필요는 없어도 신앙적 무장과 효과적 선교를 위한 훈련을 받도록 해야한다. 법으로 선교를 금하고 있는 나라(예를 들어 중공, 중동)에서도 기독교인 기술자는 기꺼이 받아들이며 그들이 간접적으로 선교하는 것은 묵인 혹은 용인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기능 선교사의 발굴과 양성을 위해 개교회와 선교기구 또 신학교는 긴밀한 연락과 협조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미국 장로교(Presbyterian Church in America)의 해외선교기구인 MTW(Mission to the World)는 더 많은 자급(自給) 기능 선교사(tentmakers)를 파송하도록 총회의 요청을 받고 있는데 그들이 직업이나 기능을 통해 생활비를 벌며 복음도 전할 수
있는 기능인을 선교금지 지역에 취업시킬 계획을 하고 있다.

    기능 선교사는 형편에 따라 1~2년에서 몇 달간 단기적으로 봉사해도 효과가 있으나, 복음전도자는 피선교지에 교회가 서고 신앙적으로 자립하기까지 장기적 지속적 봉사를 해야한다. 복음전도자가 선교에 실패하고 물러서게 되면 다음의 선교사도 선교활동에 많은 어려움을 겪는 선교의 불모지로 남기 쉬우므로 순교적 정신과 투철한 사명감을 가지고 선교현장에 임해야 한다.

    복음전도자나 기능인으로 파송을 받는 선교사 외에 여행을 겸해 외국에 나가 복음을 전하는 선교여행도 많은 효과가 있다. 몇년 전에 수백명의 미국 침례교 신자들이 한국에 찾아와 짝을 지어 복음을 전한 일이 있는데 문화적 교류와 함께 선교의 효과도 적지 않았다. 두 문화권에 사는 개인들간의 가교역할을 하며 피선교지의 기독교인들을 격려하고 선교국 교회와 신학생들에게 신선한 감동을 전할 수 있는 장점을 가진다. 이들 선교 여행자들을 위해서도 신학교나 선교 훈련원은 단기교육을 실시할 필요가 있다. 문화적인 차이 때문에 오해가 생기지 않도록 주의를 주고 국위의 실추나 기독교인으로서 불미한 언행이 있지 않도록 해야 한다. 또 한두 마디 말이라도 여행 목적지의 인사말을 배워 좋은 인상을 심도록 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3) 피선교지 교회의 자립책
    성공적인 선교는 복음의 씨를 뿌리는 데만 있는 것이 아니라 피선교지에 교회가 서고 구원받은 신자들이 자치적으로 교회를 운영할 수 있는 데까지 이끌어야 하는 것이다. 한국선교의 초기에 채택한 네비우스(Nevius:중국 주재 선교사)의 선교정책은 한국교회 자립에 공헌한 바가 크다. 현지인 교역자를 양성하는 일과 전교인을 선교 요원화하는 것이 네비우스 정책 가운데 중요한 자립책들이었다. 피선교지의 교회를 언제까지나 선교사가 돌볼 수는 없는 일이기에 현지인 교역자를 양성하는 일이 필요하다. 개종한 신자들을 돌보며 교회를 섬길 수 있는 지도자의 양성은 교회의 설립과 함께 시행되어야 할 자립책의 하나이다.

    교회의 지도자를 키우기 위해서는 피선교지에 신학교를 설립하는 방법이 있고 유망한 인재를 선교국에 초청하여 교육을 받게 하고 다시 현지로 보내어 사역토록 하는 길이 있다. 교단의 신학교에서 장차 피선교지의 지도자를 교육할 준비가 이루어져야 하고, 피선교지에 신학교가 설립될 경우 교수의 지원과 학교 운영에 교단과 긴밀한 협조를 해야 한다. 한국에 선교를 시작했을 초기에 일본 또는 미국에서 한국인 교역자, 교수요원을 유학토록 주선한 일이든지, 한국에 신학교가 설립될 당시 선교국의 선교사를 중심하여 교수와 행정책임자 등이 신학교의 운영에 동참한 것이 귀감이 될 것이다.

    양(羊)은 양이 낳는다란 말이 있다. 이 말은 새신자를 만드는 것은 먼저 믿은 신자의 책임이라는 뜻이다. 이 일을 위해 먼저 믿기 시작한 모든 교인을 선교 요원화해야 한다. 전교인을 학생으로 삼아 배우게 하고, 배운 바를 나가 가르칠 수 있는 교사가 되도록 하는 것이 네비우스 선교정책의 일환이었다. 한국선교 초기의 교회별 지방별 사경회와 도사경회(都査經會, 교파를 초월하여 시행하는 연합 사경회) 등이 처음 믿은 신자의 신앙훈련과 교육의 좋은 예이다.

    피선교지에 교회가 설립되고 현지인 교역자가 일어나 교회를 자치적으로 이끌 수 있게 될 때 선교기구에서는 선교사를 철수(withdrawal)시키게 되는데 파송 못지않게 철수의 방법이 중요하다. 자립할 수 있음에도 지나친 의존적 태도를 갖지 않게 유도해야겠고, 아직 자립 단계에 이르지 못한 때에 무리하게 선교부를 철수함으로 공백이 생기지 않도록 배려해야 한다.

5. 선교사 파송에 따르는 문제들
    필자가 시무하던 교회에서 한국인 선교사로 세계 각처에서 선교하던 목사님들을 모시고 선교 보고회를 가진 적이 있었는데, 현지어(아랍어, 히브리어, 중국어, 스페인어 등)를 자유롭게 쓸 수 있고 또 현지 적응 능력이 갖춰진 선교사들인데 미국에 들어와 교포교회를 담임하는 것이 그 자질에 비춰 아깝게 생각된 때가 있었다. 안타까움은 제3자가 보는 입장이고, 당사자의 경우에는 해결되어야 할 많은 문제가 있음을 발견했다.

  1) 자녀교육
    선교사 부부가 일해야 할 피선교지에서 자녀교육을 위한 준비가 갖춰지지 못했을 때 선교사역에도 문제가 있게 된다. 자녀를 동반할 수 없는 경우에는 자녀를 맡아 생활과 교육을 담당할 기구가 필요하다. 부모는 선교지에서 사역하고 자녀는 본국 또는 교육환경이 갖춰진 제3국에서 생활하며 공부할 수 있도록 선교기관에서 주선할 것이다.

    자녀를 동반하게 될 때 현지의 교육 시설이 없을 경우에는 선교사 자녀들을 위한 외국인 학교에 입학을 시켜야 되겠으니 자녀교육비를 선교비에 계상(計上)하여 지원하는 방법을 고려해야 한다. 현지에 교육시설도 없고 외국인 학교도 없는 경우에는 우리나라 문교부가 인정하는 유자격 교사를 선교단의 일원으로 함께 파송하는 것이 한 가지 방법이다. 만일 위의 어느 것도 적합한 조치일 수 없는 경우에는 선교사인 부모가 자녀를 교육하는 가정학교(home education) 제도를 확립해야 한다. 문교부가 인정하는 교재로 교육을 시키고 그 평가를 통해 진급과 진학의 법적 보장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러한 제도는 어느 한 두 교단이나 선교기구의 노력이 아니라 세계선교에 동참하고 있는 전교단 전선교기구의 공동 대처로 문교부와 정부의 인가를 얻도록 할 것이다.

    분교 형식으로 유자격 교사가 파송되어 교육한 경우나, 부모가 교사가 되어 자기 자녀를 가르친 가정학교의 경우에도 본국의 재학생과 똑같은 학력을 선교사의 자녀들이 인정받게 하고 졸업 후에 원하면 본국의 상급학교에 진학하는 길이 열려져 있어야 한다.

  2) 선교사의 노후대책
    국내의 교역자들에 대한 노후대책도 마련되지 못한 현실이지만 선교사들의 경우에는 은퇴할 때 더욱 심각한 문제가 있다. 국내의 경우에는 은퇴 후 작으나마 거처를 제공받거나 원로 목사로 생활비 보조를 받을 가능성이라도 있겠으나, 선교사는 시무하던 교회가 없으니 은퇴 후 최소한의 대책도 기대할 처지가 못된다. 교단적으로나 선교기구에서 선교사의 은퇴 후 대책을 마련하여 해외의 선교사가 노후의 염려없이 선교현장에서 최선을 다하도록 할 것이다. 은급제도를 마련하여 노후의 생계를 보장하고 은퇴 선교사들의 거처를 준비하여 노후를 안락하게 지내도록 준비할 것이다.

    은퇴한 선교사의 산 경험과 지식을 묵혀두지 않게 활용하는 방안도 강구할 것인데 신학교에서 후진을 가르치는 일이나 선교국 또는 선교훈련원의 요원으로 일할 기회를 마련하는 것도 필요하다. 일의 보람과 함께 노후의 생계유지에도 보탬이 될 은퇴 후의 일거리를 만들어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일에 동참케 해야 할 것이다. 주님 다시 오실 날이 가까운 20세기의 마지막 10년에 민족복음화와 세계선교를 위한 보다 활발한 연구와 대책이 세워지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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