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학

[스크랩] 말로만 하나님 영광 입 안에 함정 있다

수호천사1 2018. 10. 29. 21:03

[두글자 발견 : 함정] 말로만 하나님 영광 입 안에 함정 있다


- 이지현 선임기자 (국민일보)





▲우리가 함정에 빠졌을 때 기억해야 하는 것은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요 14:18)는 약속의 말씀이다.
요셉이 긴 고난의 시간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과 멀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이 약속하신 적도, 성경이 가르친 적도 없는 것을 믿을 때가 있다. 불의를 행해도 신앙생활만 열심히 하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만사형통의 믿음, 부모가 신앙이 있으면 불신의 자녀는 결국 신앙의 자리로 돌아올 것이란 낙관적인 믿음, 절대로 절망하거나 비판하면 안 된다는 맹목적인 믿음, 자기 삶에 대한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고 정의와 불법에 대한 판단을 잃어버린 믿음, 자신의 성공만을 위해 하나님을 조정하는 믿음…. 출처가 어딘지도 모르게 시작된 그 믿음은 오랜 세월 동안 사람들 사이에 퍼져 아무 의심 없이 받아들여졌다. 또 모두 틀린 말 같지는 않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가짜 뉴스’에 빠지듯 ‘가짜 믿음’에 빠진다. 크리스천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이다.


‘가짜 믿음’과 ‘진짜 믿음’

‘바벨론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기’를 쓴 미국의 레리 오스본 목사에 의하면 이런 가짜 믿음을 기초로 내린 인생의 중요한 결정들이 결국 응답 없는 하나님에 대한 분노, 아무런 변화도 일으키지 못하는 믿음에 대한 환멸로 우리를 인도한다. 그는 ‘가짜 믿음’과 ‘진짜 믿음’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가짜 믿음은 넘어지면 일어날 줄 모른다. 유혹이나 적대주의의 바벨론 속에서 시들다가 죽어 버린다. 진짜 믿음은 다르게 반응한다. 진짜 믿음은 계속해서 쓰러져 있기를 거부한다. 이를 악물고 어떻게든 다시 일어선다. 성령의 능력으로 다시 전진할 방법을 찾아낸다. 물론, 같은 진짜 믿음이더라도 다니엘처럼 달릴 수도 있고 야곱처럼 절뚝거릴 수도 있다. 결승선까지 전속력으로 달려갈 수도 있고 겨우겨우 기어갈 수도 있다. 하지만 진짜 믿음은 어떻게든 마무리를 한다. 결코 중도에 포기하지 않는다.”(래리 오스본의 ‘바벨론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중에서)

‘진짜 믿음’을 가진 신앙인들도 함정에 빠질 수 있다. 예기치 못한 사고나 질병으로 사랑하는 가족을 잃거나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졌을 때, 난치병 진단을 받았거나 취업과 시험에서 떨어졌을 때 등 각기 처한 상황은 다르지만 칠흑 같은 어둠 속에 홀로 남겨진 심정이 된다. 그곳은 절망의 구덩이, 슬픔의 구덩이, 실패의 구덩이, 불안과 염려의 구덩이, 고통의 구덩이가 된다. 헤어날 수 없는 파국에 내몰려 스스로 생을 포기하고 싶은 지경에까지 이르기도 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구덩이는 인생의 무덤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그곳이 인생의 전환점이 될 수 있다. 10년 동안 광야 생활을 했던 다윗의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시 40:2)라는 고백처럼 그 구덩이는 장차 만인의 무릎을 그 앞에 꿇게 하는 꿈을 실현하기 위한 발판이었다.


하나님의 타이밍

구약 성경 창세기 37장에 형들에 의해 구덩이에 던져진 요셉의 이야기가 나온다. 구덩이는 세상과 차단된 곳, 희망을 품을 수 없는 곳이다. 요셉은 13년간의 종살이와 감옥살이를 하면서 자신의 꿈이 이뤄지기보다 점점 더 멀어져 가는 현실 속에서 절망했던 순간도 있었을 것이다. 형통하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기는 모든 것이 잘되고 성공적이고 번영한다는 뜻으로 알고 있지만 히브리어 형통(Tsaleach)은 추진하다, 깨뜨리고 나가다, 넘어간다는 의미가 있다.

우리가 구덩이에 빠졌을 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당신의 백성을 결코 잊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이다. 혼자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절박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잊지 않으신다는 것을 말이다. 내가 혼자인 것처럼 느껴지고 잊혀졌다고 생각된 날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한 번도 우리를 잊으신 적이 없다. 여전히 그분이 모든 것을 주관하고 계신다. 그분은 분명한 계획을 세워 놓고 계시고 그분의 시간표대로 아름답게 이루어 내신다. 우린 그것을 기억하면 된다. 우린 잊혀진 존재가 아니다.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전쟁 기아 홍수 지진 심지어 폭풍 가운데서도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를 고아와 같이 내버려 두지 않겠다고 약속하셨다.(요 14:18) 다윗과 요셉이 긴 고난의 시간동안 견디고 왕과 애굽의 총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과 멀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경은 여호와를 힘써 알고 그분께로 돌아가면 상처를 낫게 하실 거라고 말하고 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호 6:1∼3)


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나

살면서 위기를 경험했던 많은 사람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지거나 끊어졌을 때 위기를 경험했다고 말한다. ‘나는 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을까.’ 현대인들이 느끼는 불안과 두려움이란 감정은 신앙생활에 영향을 미친다. 그리스도인에게 불안과 두려움은 함정이다. 불안하면 탐욕의 죄를 범하기 쉽다. 상담가들은 불안에 대한 신경증적인 대처 방안은 ‘회피’라고 말한다. 피하는 것은 쉬운 길이기에 일단 쉬운 길을 선호한다는 것이다. 회피하기 위해 게임, 인터넷, 알코올 등 다른 일에 몰두해 중독에 빠지는 경우도 있다. 점점 하나님의 말씀과 멀어진다.

이관직 총신대 신학대학원 목회상담학과 교수는 “자신의 생사화복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음을 신뢰할 때 두려움은 사라질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 때 두려움과 불안에서 멀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의 시선을 하나님께 고정하고 하나님께 부르짖고 도우심을 기다리며 소망의 하나님을 기억하라고 권면한다.

“신앙인의 삶에서 불안과 두려움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영향을 끼친다. 불안할수록 하나님을 더 의지하고 찾아야 하는데 보이는 것과 현상적인 것에 눈과 귀가 쏠릴 위험성이 커진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고 살기보다는 자신의 생각과 경험 또는 눈에 보이는 힘 있는 사람들을 의지하려는 인본적인 노력을 강구하기 쉽다. 따라서 자신의 불안과 두려움을 잘 이해하고 대처하지 못하면 믿음으로 행하는 삶을 살기가 어렵다.”(이관직의 ‘성경으로 불안 극복하기’ 중에서)

성경은 “함정을 파는 자는 거기에 빠질 것이요”(전 10:8)라고 말한다. 자신이 함정에 빠져 있으면서 함정에 빠져 있는 것을 모르는 것이 가장 큰 함정이다. 사막의 교부들이 가장 경계한 것은 라틴어 ‘아케디아’였다. 그것은 신자의 본분을 다하기 싫어하는 나태, 권태, 오늘을 살지 못함을 뜻한다.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상태가 가장 위험한 함정이다. 빛나는 보름달도 태양열이 없으면 하늘에 떠 있는 돌덩이에 불과하듯, 우리가 하나님과 연결되지 않으면 코드가 뽑힌 컴퓨터에 불과하다. 하나님을 알아가야 한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어떤 일을 하셨고 하고 계시는지를 알고 믿는 것은 불안과 두려움을 신앙적으로 대처하는 데 중요한 자원이다. 기도는 하나님의 날개 그늘 아래 피하는 최선의 방법이다. 기도하면 두려움이 잦아든다. 절망과 시련으로 뒤범벅된 인생길에서 우린 기도하는 것을 종종 잊어버린다. 그러나 어떤 어려운 환경 속이라도 말씀을 묵상하면 말씀이 마음에 길을 만들어 줄 것이다.


▒ 함정에 하나 더

세속적인 욕망과 ‘요나의 함정’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도망갔던 요나 선지자는 결국 주님의 뜻에 순종해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로 가서 예언했다. 왕을 포함한 니느웨 사람들의 회개로 그들이 재앙을 면하게 됐다. 그런데 요나는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욘 4: 1) 하나님께 자기를 죽여 달라고 항변까지 했다. 요나는 유대 나라를 여러 번 침공하고 수탈한 앗수르는 심판의 대상이 돼야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회개하는 니느웨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푸시는 것이었다. 요나의 우선순위는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민족이었다. 요나는 자신도 모르게 이런 깊은 함정에 빠져 있었다.

분석심리학의 창시자인 칼 융은 자신의 운명이나 사명을 피하려는 인간의 무의식적인 성향을 ‘요나 콤플렉스’라고 불렀다. 이런 성향은 신앙과 생활의 기준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자신이 아끼는 것으로 바뀔 때도 나타난다. 이는 교회 안에서도 발견된다.

황창기 전 고신대 총장은 한국교회가 말로만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말하고 세속적인 욕망을 이루려는 ‘요나의 함정’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고 당부했다. ‘요나의 함정’이란 선지자 요나가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원리를 저버린 것처럼 자기는 올바르게 한다고 생각하는데 사실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세상의 길로 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현재 한국교회에 파고든 물질주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잘못 이해한 데서 비롯된 것”이라며 “하나님의 영광을 앞세우면서 사실은 자신의 기준에 맞춰 하나님의 말씀을 재단하고 평가하는 함정에 빠지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출처] 국민일보

출처 : 예수 코리아
글쓴이 : 예수코리아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