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를 '말씀'의 종교로 흔히 말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요1:1) 하나님께서는 태초에 말씀으로써 세상을 창조하셨다. 오늘날 우리 기독교의 기본이 되는 성경은 '말씀'을 모은 것이다. 우리는 성경의 말씀 한마디 한마디에 담긴 깊은 의미를 찾기 위해 이리저리 해석을 해보며 노력한다.
예배의식에서도 말씀의 해석은 가장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성경말씀에 담긴 깊은 뜻을 찾아내어 교인들에게 설명을 해주는 것이 목회자의 중요한 일이기도 하다.
어쨌든 우리 기독교에서는 '말'이 매우 중요하다. 또 말을 중시할 수 밖에 없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말을 중시하는 교회문화의 영향때문일 것이다. 말로 시작해서 말로 끝날 뿐 행동이 뒤따르지 않는다는 지적도 있기는 하다.
심오한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깨닫고 남에게 설명하고 전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인들은 매우 정확한 언어 구사능력을 체득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그러자면 그리스도인들이 쓰는 말도 그가 살고 있는 시대의 사람들이 쓰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오늘 우리의 교회에서 목회자와 교인들이 사용하고 있는 말 중에는 정확하지 못하고 성경적이지 못한 것들이 있다. 이러한 말들은 고쳐져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교회내에서 이런 말들이 여전히 널리 사용되고 있다. 잘못된 언어들이 그대로 사용되고 있음은 안타까운 일이다.
말은 문화를 낳는다. 잘못된 말은 잘못된 문화를 낳기 마련이다. 그러나 우리 교회내에서는 잘못된 것인 줄 몰라서, 또는 알지만 관행화되어 왔기 때문에 고쳐지지 않는 말들이 많다. 특히 목회자, 지도자들이 잘못된 말을 그대로 사용할 경우 교인들도 그대로 답습을 하기 쉽다. 잘못된 말을 자주 사용하는 교회에는 잘못된 문화나 가치관이 자리잡기 쉽다. 잘못된 것은 빨리 고치는 것이 성경적이다.
교회 안에서 우리가 쓰고 있는 말 중에는 잘못된 것이 많다. 사도신경, 주기도문, 찬송가, 예배 용어, 심지어 성경말씀 중에도 그런 것들이 있다. 다음의 사례들은 필자 뿐 아니라 많은 언어학자, 신학자들이 공통적으로 자주 지적하는 것들이다.
당신
하나님과 예수님을 '당신'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다. 사전을 찾아보면 '당신'이라는 말은 '상대 되는 사람을 일컫는 말'로 되어 있다. 결코 높임말은 아니다. 이 말은 평교간이나 손아랫사람을 부를 적에 그 이름 대신으로 쓰는 것이다. 부모에게 '당신'이라고 할 수 없듯이 하나님이나 예수님을 '당신'이라고 할 수 없는 일이다. 언쟁을 벌일 때에도 이 '당신'이 항용된다.
물론 3인칭으로 쓸 수 있다. 그러나 기도할 때 하나님은 결코 3인칭이 아니다. 설교자는 하나님을 '당신'으로 칭할 수 있겠지만, 기도자는 하나님을 '당신'으로 쓸 수 없는 것이다. 찬송가의 가사에도 이런 사례가 자주 보이고 있는데 빨리 고쳐야 할 것이다.
축복
'축복'이라는 말은 '빌 祝''복 福', 자이다. 그러니까 복을 빈다는 뜻이다. 즉, 사람이 하나님께 복을 빈다는 뜻의 말이다. '축복'은 하나님을 주체로 할 때에는 쓰여서는 안된다. '시므온이 저희에게 축복하고'(눅2:23)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잠10:22)에서 처럼 '축복'은 '복'과 구별하여 사용되어야 한다.
만일 하나님을 주체로 하여 '축복'이라는 말을 사용하면 하나님이 그 어떤 다른 이에게 복을 내려 달라고 비는 것이 되고 만다. 하나님은 복의 근원이시므로 복을 주시는 분이지, 복을 빌어 주는 분이 아니다. 그런데도 교회마다 예배시간에 '축복을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를 하고 있다. '축복을 받으라'는 말은 더구나 정체가 분명하지 않다. '축복'이란 말이 무슨 '좋은 복'이라는 뜻으로 오해되고 있다. '축복을 해달라'는 말은 하나님께가 아니라 목사에게나 할 말이다.
아멘
'아멘'은 '확실하다', '확실히 그렇게 되어지이다', '그렇게 해주십시오'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으리는 기도의 끝에 '아멘'을 함으로써 '그렇게 되어지이다'를 공간한다. 그런데 이 '아멘'이 남용되고 있다. 서약식에서 '예'라고 대답 대신 '아멘'이 쓰이고 있다. '예'면 '예'이고, 아니면 '아니오'를 분명히 해야 하는 상황에서 '그렇게 되어지이다'라는 식의 '아멘'하는 것도 재고되어야 한다. 심지어는 출석을 부를때에도 '예'라는 대답 대신 '아멘'으로 대답을 하기도 하는데 이런 건 분명히 남용이다.
예배보다
'예배를 본다'는 말은 어디까지나 방관자적인 입장을 나타낸다. 예배는 눈으로 구경하는 '쇼'가 아니다. 남이 예배드리는 것을 구경하는 듯한 '예배본다'라는 말은 가급적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다. '예배하다', '예배드리다'가 적당하다. 이 말은 예배의 대상인 하나님을 의식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죽으시다
성경말씀이나 사도신경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는 표현이 자주 나온다. 어떤 이는 기도를 하면서도 '주님은 나의 죄 때문에 죽으셨습니다'라며 고백한다. 왜 '돌아가셨다'라는 예의바른 말을 쓰지 않고 '죽으셨다'고 하는가.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이 말이 불경스러운 것으로 여기지 않는 것 같다. 분명히 불경스러운 표현이 아닌가. '우리 아버지가 죽으셨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주어로 '죽으셨다'고 말하는 것을 만약 교회 바깥 사람들이 듣는다면 퍽 의아해할 만한 일이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고 해야지, 누가 '아버지가 죽으셨다'고 하겠는가. 누가 봐도 잘못된 것이라면 고쳐야 할 것이다.
전능하신 자
'자(者)'라는 말은 '놈 자'로써 절대로 고상하지 않는 말이다. 서로 감정이 좋지 않을 때 상대에게 이런 말을 쓰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이 말이 자주 쓰이고 있다. 그것도 지존하신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로.
하나님, 우리 목사님께 은혜를…
하나님이 들으시는 기도에 '우리 목사님', '우리 성도님'과 같은 표현은 잘못이다. 우리말 존대법에 존경을 받는 분 앞에서는 '님'자를 쓸 수가 없다. '우리'도 '저희'가 맞다.
성경을 봉독해 올리겠습니다
'봉독'이란 말은 남의 글을 받들어 읽는 것을 의미한다. 이 말은 말씀 자체가 너무 존귀해서 소중히 읽는다는 뜻이지, 듣는 사람이 귀해서 읽어 올린다는 뜻이 아니다. '받들어 봉독하겠습니다'란 말도 그냥 '봉독하겠습니다'로 해야한다. '봉독'이라는 말에 이미 '받들어'의 의미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준비찬송
'준비찬송'이라는 말은 많이 쓴다. 흔히 예배가 시작되기 전에 부르는 찬송을 그렇게 말한다. 그러나 '찬송'은 '예배'와 같은 의미를 갖는다. '찬송'으로 '예배'를 준비할 수는 없다. 우리가 찬송을 부르는 순간부터 예배는 이미 시작된 것이다. 의식만이 예배는 아닌 것이다.
찬송이나 한 장 부릅시다
찬송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만 불려져야 한다. '찬송이나 한 장…'이란 말은 시간이 좀 남으니 하나님께 영광이나 한 번 돌리자는 무성의함의 뜻이 담겨져 있다. 시간을 때우기 위해서, 장내 정리정돈을 하기 위해서 찬송을 부른다는 것은 잘못이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아랫사람이 웃어른의 물으신, 또는 부르신 데에 대한 답으로는 '제가 여기 있나이다'가 당연히 맞다. 그럼에도 성경에는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번역되어 있다. 찬송가에도 '주여 주여 내가 비오니…'라는 가사가 있다.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웃어른이 물으실 때 '내가 여기에 있나이다'라고 대답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사회 관행이나 예절을 무시한 언어는 이미 언어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고 말 것이다.
찬양에 은혜 받으시기 바랍니다
예배란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주시는 의식이라고 볼 수 있다. 드리는 것으로는 찬양, 기도, 봉헌 등이고 주시는 것은 말씀, 은혜 등이다. 그러므로 피조물의 입장에서 예배는 하나님께 찬양하고 기도하고 봉헌하는 것이다. 말씀과 은혜는 하나님이 값없이 주시는 것이다. 우리가 찬양을 하고 기도를 하고 봉헌을 했기 때문에 그 대가로 하나님께서 말씀과 은혜를 주시는 것은 아니다.
예배는 그 자체가 훌륭한 목적이지 수단은 아니다. 예배시간에 드리는 찬송이나 찬양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신자들이 하나님께 '일방적'으로 드리는 것이다. 찬양의 행위는 이미 은혜 받은 증거이지 은혜를 받기 위한 수단은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헌금도 '은혜'를 위해서, 기도도 '은혜'를 위해서, 찬양도 '은혜'를 위해서 한다. 예배를 인도하는 사람의 잘못된 이 한마디 한마디가 우리 교인들에게 기복적 신앙관을 형성해 줄 수 있다.
당회장님의 축도로 예배를 마치겠습니다
축도는 예배의 마무리용 요식 행위가 아니다. 주기도문과 마찬가지이다. 그 자체로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럼에도 예배 인도자들이 무심코 내던지는 한마디가 축도나 주기도문을 예배순서를 마무리하는 행위로 전락시키고 있다.
'당회장'이란 말도 예배에 적합하지 않은 용어다. '당회장'이란 목사와 장로로 구성되는 당회의 의장을 말한다. 이 말은 교회를 전반적으로 책임지고 통괄한다는 행정적인 용어이다. '당회장'이란 말은 매우 관료적이고 권위적이다. 예배시간내에 그런 행정적인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예배의 근본취지에도 맞지 않다. '당회장'이란 말은 제직회나 당회, 공동의회에 적당한 말이다. 예배시간에는 '당회장'보다 '담임목사'라는 말이 잘 어울릴 것이다.
고마운신 예수님
교회학교 교사 중에는 '고마우신 예수님…'으로 기도를 시작하는 사람이 있다.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고쳐야 한다. 그래야 '예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가 성립된다.
주의 종
목사를 가리켜 '주의 종'으로 호칭하는 경우가 많다. 누구나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최대한 낮추어 '종'이라고 할 수는 있다. 그러나 제3자가 목사를 '종'이라고 부르는 것은 부자연스럽다. 나 아닌 남에게 '종'이라는 말을 쓰는 것은 바람직스럽지 못하다. 거기에다 '님'자를 붙여 '종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더욱 웃기는 말이다.
끝으로, 찬송가 뒷부분에 수록된 교독문 중 성경본문과 상이한 것이 있어 지적하고자 한다. 교독문 40번의 '내가 주께 부르짓을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는 본문(사58:9)에는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로 되어 있다. 큰 오류가 아닐 수 없다.
아울러 교회 내에서 성도들이 제직을 부를 때 '아무개 집사님'이라고 존칭을 쓰지 않고, '아무개 집사!'라고 마구 부르는 것도 재고되어야 할 점이다. 젊은 교역자들이 나이 많은 장로나 권사들에게 경어를 제대로 가려쓰지 않는 것은, 정확하지 않은 말을 쓰는 것에 못지 않은 꼴불견이다. 그럼에도 잘 고쳐지지 않는 것은, 감히 경어를 쓰라고 얘기해줄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현대크리스찬> - 이의용(수필가)
잘못된 말은 잘못된 신앙문화를 낳는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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