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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한자(漢字)는 누가 만들었나?

수호천사1 2018. 5. 2. 11:25

 


한자(漢字)는 누가 만들었나?

명덕외고 이기훈 교사, 한자 배경 추적한 <우리(友利) 한자 808>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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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이(東夷) 한국사》에 이어 한자의 기원과 본래 뜻을 해석한 《우리(友利) 한자 808》을 펴낸 이기훈 서울 명덕외고 교사.
한·중·일(韓中日) 세 나라가 수천 년을 함께 써온 한자(漢字). 우리는 이 한자를 만든 주인공들이 현재의 중국인이라는 것을 마치 ‘해는 동쪽에서 뜬다’는 진리처럼 믿어왔다. 과연 그럴까? 이 한자의 기원을 파헤쳐 책으로 펴낸 고등학교 교사가 있다. 바로 서울 명덕외국어고등학교에서 중국어를 가르치고 있는 이기훈 선생님.
 
이 교사는 2014년 《동이(東夷) 한국사》라는 책을 펴내 사학계에 큰 반향을 일으킨 주인공이다. 당시 그는 자신의 저서에서 중원 지역에서 문명을 일으키고, 정착했던 동이족이 한반도로 이주한 과정을 자세하게 다루었다. 이번에 그가 파헤치고 들어간 분야는 바로 한자의 기원과 뜻에 얽힌 정확한 해석이다.
 
이 교사는 수년 동안 한자 하나하나가 만들어진 배경을 추적하여 《우리(友利) 한자 808》(책미래)이라는 책으로 펴냈다. 이 교사는 “놀랍게도 한자에 반영된 풍습과 문화의 상당 부분이 중국이 아니라, 현재 한반도에 살고 있는 우리 민족에게 남아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며 “한자 속에는 우리 기억 속에 사라져 가는 고유한 풍습들이 많이 담겨 있다”고 말했다. 그는 “따라서 한자를 공부하는 것은 동아시아의 철학과 문화를 이해하는 동시에 우리가 잊었던 우리의 조상들의 삶의 모습과 철학을 깨닫는 귀중한 계기가 된다”고 말했다.
 
연세대 중문과를 졸업한 후 이 교사는 한자와 한국 문명의 밀접한 관계를 증명한 논문으로 북경어언대학교(北京語言大學校)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를 만나 한자의 기원과 한자에 얽힌 동아시아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들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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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友利) 한자 808'
-책을 쓰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나요?
 
“제가 중국어 교사이기 때문에 중국어를 가르치면서, 학생들이 어려워하는 한자를 어떻게 하면 쉽게 풀어 가르칠 수 있을까를 늘 고민해 왔습니다. 그러다가 최초의 한자라고 볼 수 있는 갑골문(甲骨文)을 분석해보니 놀랍게도 갑골문 안에 우리나라 문화가 고스란히 담긴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어요. 그 후 한자의 기원에 관해 본격적으로 연구하였고, <상나라 문화가 한반도에 미친 영향>이라는 논문으로 북경어언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습니다.”
 
-그 부분은 뒤에 좀 더 자세하게 말씀을 나누기로 하고, 먼저 책에서는 808자의 한자의 기원과 뜻풀이가 실렸는데, 수많은 글자 중에 808자를 분석한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한자 문화권인 한·중·일 삼국의 지식인들은 2013년에 서로 과거사, 영토문제 등이 끊이지 않자 문제의식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세 나라 사람들의 교류를 원활하게 하기 위해 한·중·일 공용한자 808자를 발표합니다. 이 808자는 한·중·일 세 나라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글자이기 때문에, 808개를 해석하면서 한자의 실용성을 알리고, 우리 문화와 한자가 어떻게 연결되었는지 제대로 한번 연결해 책을 쓰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글자의 개수가 808자인 이유는 중국에서 八(팔)자가 ‘돈이 많이 벌린다’는 길한 뜻이기 때문에 8자를 두 번 넣어 808자로 맞춘 것이 아닌가 합니다.”
 
상(商)나라 때 개발되고, 진시황 때 정리된 한자
 
-책 제목의 ‘우리’라는 단어에 한자 ‘友利(우리)’라고 표기했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요.

“결론부터 말하면 한자는 오랫동안 한자문화권을 같이 살아온 동북아 3국이 공통으로 만들고, 발전시켜온 글자입니다. 그래서 우리말로 ‘우리’ 한자라고 하면 중국과 일본인들이 ‘한자가 한국 것이냐’는 취지로 이해할 수도 있기 때문에 ‘友利’라는 한자를 곁들어 넣었습니다. 결국 제목에 붙은 ‘우리(友利)’는 한·중·일 세 이웃이 화합하여 잘 살아간다는 중의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책 작업을 하는데 가장 어려웠던 점이 있었다면요.
 
“이 책은 한자의 원뜻과 배경 문화를 같이 해석한 책입니다. 기존에는 없는 형태의 한자 학습서이면서 동시에 한자에 얽힌 문화를 설명한 인문서이기도 합니다. 저는 갑골문과 전서(篆書: 진나라 때 정리된 서체) 등 고대 한자를 연구하면서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해석이 잘못된 것이 너무 많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냥 한자의 구성을 보면서 습관적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았고, 오래전부터 잘못 내려온 것도 많았습니다.”
 
이 교사는 “중국 쪽 해석은 한국보다 조금 나은 수준이지만 틀리기는 역시 마찬가지였다”며
“한국 문화와 중국 문화를 다 아는 자신이 이번 기회에 제대로 된 한자 해석서를 내야겠다는 다짐으로 작업을 했다”고 말했다. 그는 “개인적으로 지금까지 나온 한자 해석서 가운데 이 책이 가장 정확한 책이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한자는 어떤 변천 과정을 거쳤나요.
 
“한자는 중국에서 수천 년 전부터 조금씩 발전해 오다가, 중국 두 번째 왕조로 알려진 상(商: BC1600~BC1046) 나라에 의해 대대적으로 개발됩니다. 상나라는 흔히 우리가 은(殷)이라고 부르는 나라입니다. 상나라 멸망 후 춘추전국시대(BC 770~BC 221) 혼란기에 각지에서 저마다 한자를 다른 글씨체로 발전시킵니다. 그러다가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秦始皇)에 의해 새롭게 정리되는데 소전(小篆, 전서)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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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3세기 진(秦) 시기에 진시황의 명령에 따라 재상 이사(李斯)가 만든 소전 글자(좌)와 기원후 3세기경 글자를 더욱 다듬어 새롭게 탄생한 해서(楷書) 글자(우). 한(漢) 대에 정비된 글자이기 때문에 漢字라고 한다./ 위키피디아

-오늘날 우리가 쓰는 한자는 어떻게 탄생합니까.
 
“소전이 탄생한 뒤 이후 지금부터 1800여 년 전인 한(漢)나라 말에 와서 다시 정리되는 데 그것이 오늘날 우리가 보는 한자인 해서체(楷書體)입니다. 해서는 편리하고 보기에는 좋지만, 원래 글자에서 변한 부분이 너무 많아서 한자 본래 의미를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있습니다.”
 
이 교사는 “한자 해석서를 쓰는데 진시황의 소전을 기본으로 했지만, 그것으로도 원래 뜻을 알기 어려울 때는 3300년 전 상나라 갑골문이나, 중국의 옛 문헌들을 참고해서 원뜻을 밝혔다”고 말했다.       
 
하(夏)나라, 주(周)나라와 다른 은(殷:상) 나라 문화
 
-책을 쓰면서 이 선생님께서 기존에 내려오던 해석과 다른 의미를 찾아낸 한자가 많았다면서요. 구체적인 예가 있다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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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질 인(仁)
“네, 상당히 많지만 두 글자만 예를 들겠습니다. 첫째는 어질 인(仁)자입니다. 두 이(二)자 옆에 사람 인(人)이 왜 ‘어질다’는 뜻이 되는지 그동안 한국은 물론이고, 중국 학계에서도 정확하게 해석하지 못했습니다. 아시다시피 仁은 동양을 지배한 유교의 핵심 사상 중의 하나 아닙니까. 굉장히 의미가 있고 중요한 글자인데, 어느 문헌을 뒤져도 이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해석한 사람이 없더군요.
 
 이 글자의 원래 모양을 보면 맨 위에 하늘을 의미하는 一이 있습니다. 맨 아래 땅을 의미하는 一이 있고 그 가운데 사람(人)이 들어가 있습니다. 고대 동아시아 사람들은 하늘(하느님), 땅(지신), 사람을 가장 중요한 존재라고 여기고 숭배했는데 그 철학을 표현한 글자입니다.”
 
-진나라 이후 글자가 다듬어지는 과정에서 모양이 변하면서 글자 자체로는 원뜻을 알기가 쉽지 않게 되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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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할 극(極)
“그렇습니다. 人이 옆으로 빠지면서 오늘과 같은 모습이 된 것입니다. 이 글자에서 파생되는 것이 바로 다할 극(極)자입니다. 극자 가운데 부분을 보면 어질 仁자가 들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仁자 양쪽에 ‘구(口)’와 ‘우(又)’가 추가되어 지극히 높은 도리인 인(仁)이 말하고 실천한다는 의미를 나타냅니다. 왼쪽 변에 큰 나무를 나타내는 글자 木이 추가되어 ‘지극히 높다’라는 뜻을 강조하게 된 글자로 쓰입니다.”
 
-하늘, 땅, 사람은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에도 들어가는 철학이 아닌가요.

“제대로 보셨습니다. 원래 우리 민족은 3이라는 숫자를 좋아합니다. 우리는 유사 이래 하늘신, 땅신, 사람신, 즉 삼신(三神)을 섬겨온 민족입니다. 이 하늘, 땅, 사람이 바로 한글의 모음(母音) 창제의 기본 사상입니다. 이미 3000년 전에 만들어진 仁이라는 글자를 통해 우리를 포함한 동아시아 사람들이 천지인에 대한 지극한 철학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죠.”
 
-오늘날 동양 사상은 그냥 무조건 중화 민족에서 기원한 것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는데요.
 
“동양 문명의 기초는 상(은) 나라에서 시작됩니다. 흔히 중국의 초대 왕조를 하(夏)-은(殷, 상)-주(周)라고 하는데, 은(상)나라는 하(夏)나라와도 다르고, 주(周)주나라와도 다른 아주 독특한 나라였습니다. 상나라를 세운 주인공들은 마치 몽골족이나 여진족처럼 중국 동북지역에서 중국 중심으로 남하한 외래인이었던 것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종교와 한자를 획기적으로 발전시켜서 중화 문명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상나라가 멸망하고 1000년이 지난 뒤 한반도와 만주에는 우리의 조상인 예맥족(濊貊族)이 널리 분포해 살고 있었는데, 이 예맥족 풍속을 보면 당시 중국 사람들에 비해 고대 상(은)나라와 흡사한 면이 많습니다. 저는 여러 정황상 예맥족(濊貊族)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고대 상나라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상나라 시기에 고도로 발달한 제례 문화가 정착
 
-상(은)나라를 세운 이들이 우리의 민족과 관련이 많다고 말씀하셨는데, 이들이 한자를 획기적으로 발전시켰다는 것은 이해가 가는데, 종교를 발전시켰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지요.
 
“오늘날 제사문화가 바로 은나라 사람들로부터 전해진 것입니다. 은나라 사람들은 하늘에 제사지내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이 당시 청동기 문화가 매우 발달했는데, 발굴되는 당대의 청동기 대부분이 제사를 지내기 위한 그릇이나 도구들입니다. 그리고 이들이 하늘과 마찬가지로 소중하게 생각한 게 사람입니다. 그래서 조상숭배가 강하게 나타난 겁니다.”
 
-우리 민족은 조상숭배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민족이 아닐까 싶은데요.
 
“좀 전에 仁자를 통해 살펴보았듯이 그 뿌리가 아주 깊습니다. 복잡한 제례(祭禮)나 제기(祭器) 같은 엄청나게 고차원적이고 풍부한 문화가 이미 상나라 시대에 셋업이 됩니다. 상나라 사람들이 하늘, 사람, 땅에 대한 애정과 신념이 얼마나 확고했느냐 하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이들은 땅은 만물을 기르는 어머니로 여겨서 역시 중요하게 생각했고요. 그래서 이들은 어머니가 같으면 다 형제로 생각했는데, 우리 역사 문헌에 간혹 ‘동복(同腹) 형제’라고 표현된 것은 실제로 생물학적인 어머니가 같다는 게 아니라, 고향이 같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삼국사기》의 왕들을 보면 서로 혈연관계가 없어도 부여(夫餘)지역에서 내려온 사람들은 석(石)씨가 되고, 낙랑지역에서 온 신라 사람들은 김(金)씨가 됩니다.”
 
-한자의 원래 뜻을 새로 밝힌 것 중에 어질 인(仁)자 외에 또 어떤 것이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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我(나 아)
“나 아(我)자입니다. 이 글자의 원뜻을 해석하는 데도 무척 애를 먹었습니다. 갑골문에 보면 我자는 창 과(戈)자 사람 인(人)자 비슷한 게 있습니다. 그동안은 이 글자에 대해 사람을 창으로 찌르는 것으로 해석했는데, 잘못입니다.
 
제가 아무리 생각해도 ‘창’과 ‘사람’이 결합해 ‘나’라는 뜻이 나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아 중국 고대문서들을 오랫동안 뒤졌습니다. 결국 중국의 한 책에서 이 글자의 이체자(異體字) 중 勿(물)과 戈(과)로 이루어진 글자를 발견하였고, 勿(물)이 세 가닥으로 된 깃발을 뜻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교사는 “고대에 적과 전쟁을 하기 위해 먼저 사람을 모았는데 이때 勿 모양의 깃발을 창에 걸어 사용했다”며 “창에 매달려 휘날리는 깃발은 전쟁을 알리는 신호였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출정을 알리는 그 깃발을 보고 모이게 됩니다. 이렇게 모인 사람들은 모두 ‘아(我)군’, 곧 ‘우리 군’이었기 때문에 ‘우리’, ‘나’라는 의미가 된 것입니다. 이는 다시 옳을 의(義)자로 파생되는데, 깃발 아래 모인 군대 우리가(我)가 출정하기 전 신에게 흠 없는 양(羊)을 바쳤는데, 이는 자신들의 행동이 의롭다는 것을 신에게 제사로 인정받기 위함이었습니다. 즉, 전쟁을 하려는 목적이 신의 뜻, 즉 대의에 맞고 공정함을 나타냅니다. 이런 식으로 한자 속에는 우리가 미처 생각지도 못한 풍부한 고대 풍습과 문화를 담고 있습니다.”
 
한반도에 원형이 남아 있는 상나라의 제례 문화
 
-듣고 보니 재미있습니다. 고대의 풍습이 지금까지 남아 있는 글자 한두 가지를 더 설명해주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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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 조(祖)와 오른쪽 두 글자는 춤 무(舞)

“조상 조(祖) 자를 보면 왼쪽 示는 제단이나 신주이고, 오른쪽 且은 제사지낼 제물을 종류별로 세 칸에 나눠 담는 나무 그릇(俎: 도마 조)입니다. 그릇에 음식을 수북하게 담아서 조상에게 바치는 모습을 본뜬 것이고, 이 제물을 조상이 와서 먹는다고 여겨 ‘조상’이라는 의미로 사용합니다. 현재 종묘에서 이 제기를 그대로 사용합니다. 춤 무(舞)자는 죽은 사람을 위해 깃털이나 장신구를 손에 들고 춤을 추는 모습을 그린 겁니다. 이 역시 오늘날 종묘 제례의 일무(佾舞)에 이 모습이 잘 전해지고 있습니다. 3000년 전 한자를 만들 때 묘사한 장면을 한국에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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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와 양의 장기인 장, 위, 폐와 돼지껍질을 삶아서 담는 도마 천조갑(薦俎匣 : 제물을 담는 넓은 상자). 祖(시조 조)의 원형- 한국의 종묘대제 시 사용하는 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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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제사(종묘대제)에서 관리들이 양손에 장신구를 들고 춤추는 모습(일무). 중국에서는 오래 전에 사라진 3000년 전 제례 풍습이 한국에서는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조선DB

-한자에 담겨 있는 풍습 대부분이 오늘날 우리 민족에게 남아 있는 이유가 설명되는 것 같습니다.
 
“빛 광(光)을 한번 볼까요. 이 글자의 전서(篆書)를 보면 무릎을 꿇고 머리에 빛나는 황금 관을 쓴 사람이 꿇어서 제사를 지내는 모습을 그대로 형상화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빛나는 금관을 쓴 곳은 중국에는 없고, 신라, 가야지역에서 나타납니다. 북쪽에서 온 민족은 해를 숭배했기 때문에 머리에 빛나는 왕관을 썼습니다. 신라 금관도 제사를 지낼 때 사용 한 겁니다. 고대에는 빛나는 금관을 쓴 자가 하늘에 대리인으로 제사를 지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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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릎을 꿇고 머리에 빛나는 관을 쓴 채 제사를 지내는 사람을 형상화 한 光(광)자(중국 인쉬박물관)와 가야의 왕이 썼던 빛나는 금관(5세기, 롯데월드 민속박물관).

"무릎 꿇고 예의를 표하는 것은 고대 동이족 고유의 풍습"
 
-한자에는 제사라든가, 공손하게 무릎을 꿇는 모습, 무속 신앙 등의 당대 풍습을 강하게 담고 있는 글자가 많네요. 무릎을 꿇는 것이 우리 민족만의 고유 풍습인지요?
 
“사실 이는 동이족 고유의 풍습입니다. 중국에는 이미 주나라 이후 무릎 꿇는 풍습이 거의 사라졌습니다. 2000년 전에 한 중국의 고관이 부여에 왔는데 당시 부여의 번역가가 두 무릎을 꿇고 엎드려 조용히 말하는 풍습을 보면서 무척 신기한 풍습으로 기록해놓기까지 합니다.”

-얼마 전 중국에 진출한 우리나라 대기업이 직원들에게 단체로 큰 절을 시켰다가 중국인들의 지탄을 받은 적이 있는데요. 오늘날 중국인들은 무릎을 꿇는 것을 치욕이라고 생각한다고 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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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릎 꿇고 앉아 있는 진(秦)나라 신하(BC 221~206, 중국 국가박물관). 상나라, 진나라, 신라는 고대 동이족을 대표하는 소호족 계열의 국가이다. 무릎 꿇고 예의를 표하는 풍습은 고대 동이족 고유의 풍습이다.
“우리가 무릎을 꿇는 것은 치욕이 아니라 상대에 대한 존경의 표시입니다. 그런데 이미 공자(孔子)님 당시 무릎 꿇는 풍습을 나무라는 모습이 나옵니다. 동이족에게는 자발적인 예의의 표시인데, 화하족에게는 비굴한 굴욕으로 여겨진 것이지요.”
  
-그렇다면 한자는 우리 민족이 만든 것이라고 해도 되는 것인지요.
 
“그 부분을 제가 가장 우려하는 것입니다. 한자를 한국인이 만들었다고 주장하면 안 됩니다. 한자를 최초로 만들고 문명을 유지했던 고대 동이족은 아시아 곳곳에 광범위하게 분포되어 살았고, 그 후손들은 이미 각 나라에 동화되었기 때문입니다. 동아시아 역사와 문화는 동아시아 사람들이 같이 발전시킨 것입니다. 칼로 무 자르듯이 ‘이것은 네 것이고 이것은 내 것이다’라는 식으로 딱 구분을 지을 수가 없습니다.”
  
이 교사는 “동아시아 문명의 중심은 동이족에서 기원해서 화하족으로 갔다가 다시 동이족 역사로 돌아오는 과정을 반복했다”며 “어떻게 보면 동이족에 속하는 우리의 형제들이 오랫동안 중국의 지배층이 된 것은 역사적 사실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느 단편적 사실만 가지고 한자를 우리 민족이 만들었다고 결론짓는 것은 위험하다”고 강조했다.
 
“고대 한자는 동이족 중심 지역인 산동 등지에서 단편적으로 발전되다가, 상나라가 터전을 중원으로 옮기면서 대대적으로 개발됩니다. 아시다시피 상나라는 다시 주나라에 멸망합니다(BC 1046). 고대는 전쟁에서 패하는 측은 그냥 노예가 되고, 풍습이고 뭐고 남지 않고 말살이 됩니다. 피지배층 신세가 된 상나라 사람들 상당수가 자기들과 풍습과 혈연이 더 가까운 지역으로 이주했습니다. 결국 이들은 자신들의 조상이 살던 땅으로 되돌아간 것인데, 이것이 바로 ‘기자조선(箕子朝鮮)’입니다.”
 
동이족의 한반도 이주 과정 역사는 이기훈 교사가 쓴 《동이 한국사》에 자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사기에 따르면 상은 주나라(BC 1046~BC 256)에 의해 멸망하는데, 상나라 사람들 대부분이 주나라의 통치를 피해 자신들의 땅을 버리고 도망을 가거나 강제 이주를 당했다. 이 교사는 “이들이 이주해 간 지역은 주로 자신들과 문화적 혈연관계가 깊었던 중국 동북지역, 즉 (고)조선 땅이다”라고 말한다. 계속해서 이 교사의 설명이다.
 
“고대에는 전쟁에 패하면 전부 노예가 되는 수밖에 없습니다. 상나라 유민들이 노예의 신세를 면하기 위해 이주해서 세운 것이 우리 역사학계가 부정하는 기자조선(箕子朝鮮)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상나라 중심 세력이 이주를 했기 때문에 그 풍습이 오늘날까지 한반도에 남아 있는 것입니다.
 
상나라 유민의 유입으로 기존에 요서와 요동지역에 있던 단군조선 계열의 동이족들은 더 동쪽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상나라 유민의 기자조선과 기존의 단군조선 세력이 만주 요하(遼河)를 기준으로 나뉘어 발전하다가 이후 BC 6세기경 스키타이 문명의 침입으로 하나로 섞이게 되는 과정을 거칩니다.”
 
"상나라를 이은 기자조선··· 이를 부정하면 우리는 뿌리없는 민족"
 
-한자의 기원을 이야기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주제가 동북아 고대 역사로 옮겨갑니다. 기자조선을 세운 기자는 누구입니까.
 
“상나라 최후의 왕인 주왕의 삼촌인데, 말하자면 어리석은 조카 때문에 나라를 빼앗긴 불운한 왕족인 거죠. 주나라를 건국한 무왕이 찾아가서 가르침을 청할 정도로 유명한 인물이었고 상나라를 대표하는 현자였습니다. 상나라가 망하고, 남아 있던 상나라 사람들은 주나라가 어디론가 이주시켰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이들이 남긴 청동기 유적에 그 이동 경로가 나타납니다.
 
요서지역에 이들의 청동기 문화가 발견되고, 이후 무덤 형식을 추적해보면 이들이 결국 한반도까지 이주한 것이 밝혀집니다. 결국 상나라 사람들이 고조선 지역에서 남하하여 중원을 다스리다가, 다시 고조선 지역으로 되돌아간 겁니다. 이처럼 상나라를 이은 기자조선을 부정하면 우리는 뿌리가 없는 떠돌이 민족이 되며, 역사가 도저히 이어지지 않습니다.”
 
-우리 학계가 제정신이 아닌 것 같습니다. 상나라 풍습 중에 가장 특징적인 것이 무엇인가요.
 
“우리는 해를 숭배한 민족입니다. 예전에는 해를 흰색이라고 봤는데 해의 민족이 바로 상나라 사람입니다. 흰옷을 입고, 무릎을 꿇어 절을 하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윷놀이를 하는 상나라 풍습이 고스란히 우리 민족에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학계에서 기자조선을 부정한다고 있던 역사가 부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한반도에는 기존에 단군조선 세력이 있고, 또 기자조선 세력도 유입되었습니다. 한 갈래 세력만 들어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해하는 데 좀 복잡한 면이 있습니다. 정리를 한번 해주시죠.
 
“고조선 땅으로 돌아온 상나라 후손들이 중국 춘추전국 시대의 강국인 연(燕)나라와 다투다가 패하여 BC 3세기경 동쪽으로 2000여 리나 후퇴하게 됩니다. 이때 연나라에 패망한 고조선 사람들이 중국 동북 지역(만주)과 한반도로 대거 이주하면서 이 지역 역사가 소용돌이에 빠집니다. 중국 정사 《삼국지》에 당시 한반도로 이동한 고조선 왕이 바로 상나라 왕손이자 상나라 유민의 대표인 기자의 41대손인 기준(箕準)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결국 한자를 만들었던 상나라 후손들이 한반도와 만주까지 대거 유입된 것이군요.

“그 증거가 무덤 양식과 청동기 등 고고학적 자료들로 증명되고 있습니다. 기자의 후손, 즉 상나라 후손의 나라인 고조선이 2세기 초에 연나라 위만에게 찬탈당하였다가, 다시 한나라에 멸명하면서(BC 108) 소위 말하는 한사군(漢四郡)이 설치됩니다. 이 가운데 낙랑군 사람들이 중국과 고구려의 압박 속에 지속적으로 신라로 유입되어 그곳의 지도세력이 됩니다.”
  
-그렇게 볼 때 고구려, 백제, 신라 중에 한반도에서 상나라의 정통을 가장 가깝게 이은 것이 신라라고 할 수 있겠네요.
 
“저는 그렇게 봅니다. 기록에 신라 사람들이 스스로 소호 김천씨(少昊金天氏)의 후예라고 했는데 상나라가 소호족에 속합니다. 소호족은 중국 동부 동이족의 대표적인 부족으로, 하늘과 가까운 새를 숭배한 민족입니다. 소호는 ‘새후’, ‘새후이’를 한자로 음차한 것으로 봅니다. 후이는 희(히), 즉 해라는 의미이기 때문에 ‘새로운 태양’이라는 뜻이 됩니다. 신라의 고유어 국호인 서나, 서야를 해석하면 역시 ‘새로운 태양’입니다.

재밌는 것은 상나라 사람들은 자신들의 나라를 ‘의(衣), 위(衛)’라고 불렀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의’나 ‘위’라는 국호가 부여(후위), 예(후이), 왜(웨이)라는 말과 관련이 깊은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부여에서 왜(일본)까지 상나라와 관련이 깊다는 것이죠.”
 
연나라를 세운 선비족은 고구려-부여-삼한과 같은 예맥족
 
-부여는 어떤 나라입니까.
 
“상나라와 풍습이 비슷한 동이족의 한 갈래입니다. 이들이 결국 고구려와 백제의 기원이 됩니다. 부여는 상나라 멸망 이후 1000년이 넘게 상나라 달력을 사용하였고, 역시 흰색을 숭상했으며, 무릎을 꿇고 공손함을 표시하는 등 상나라와 많이 닮은 나라였습니다. 또한 만주에는 스스로 상나라의 후예라고 자처한 우리와 같은 예맥족인 선비족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만주 서부에 거주했습니다. 이들이 후에 중국을 점령하면서 스스로 상나라 시조인 황제(黃帝)의 후손이라고 기록했습니다.”
 
-그 선비족이 연나라를 건국하지 않나요? 그럼 결국 연나라는 우리 민족 계열이네요.
 
“선비족은 4세기부터 중국 고대 문명의 핵심 지역인 중원을 점령하여 다스립니다. 이 가운데 가장 세력이 강했던 모용씨 부족이 연나라를 건국했고, 나중에 탁발 선비가 세운 위나라에게 밀리자 왕과 백성이 자신들이 나라를 통째로 들어 자신들의 기원지인 고구려에 투항합니다.(43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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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중국의 중원을 다스리던 선비족의 연나라(전연, 前燕, 337~370). 선비족은 고구려, 부여, 삼한과 같은 예맥족이었는데, 모용 선비족이 세운 연나라는 탁발 선비가 세운 위나라에 멸망하면서 왕과 백성이 모두 고구려에 투항한다(북연, 436년). / 위키피디아

 
-그냥 같은 민족끼리 만들어간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네요. 그 후에는 어떻게 됩니까.
 
“당시 연나라가 고구려에 투항한 규모가 워낙 커서, 이들이 고대 한국뿐 아니라 일본 문명의 주요 세력으로 자리 잡습니다. 당시 유명한 학자 최치원이 ‘진한(신라)은 원래 연 나라 사람들이 피난해 온 곳이다’라고 했는데, 신라의 주요 세력이 연나라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지금까지 이야기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최초로 한자를 만든 것은 상나라(은나라)였고, 상나라를 이은 기자조선, 기자조선을 이은 낙랑, 낙랑을 이은 신라, 상나라와 풍습이 같았던 부여, 부여를 이은 백제, 상나라 유민의 대표인 기자를 신으로 섬겼던 고구려, 상나라-신라와 같은 소호족 계열로 중국을 통일하고 한자를 정리한 진나라, 상나라를 시조로 삼고 중원을 점령했다가 고구려에 투항한 선비족의 연나라, 진, 낙랑 이주민이 대거 유입된 진한(신라), BC 3세기부터 꾸준히 중국과 한반도에서 이주한 사람들이 주축이 되어 세워진 왜(일본) 등이 모두 고대 중원 문명과 관련이 깊은 나라로 현재 우리와도 문화, 정치, 혈연적으로 매우 가까운 나라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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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나라가 멸망할 당시(BC 11세기) 기존에 없던 상나라계 청동기가 분포한 요서 지역. 이는 상나라의 멸망과 더불어 상나라의 주요 세력이 중원에서 이 지역으로 이주했음을 뜻한다.
-동북아 역사가 우리 생각보다 상당히 밀접하게 얽혀 있군요.
 
“진시황이 통일을 하면서 당시까지 산동지역에 있던 동이족이 완전히 망합니다. 아마 고구려가 그래서 생겼다고 봅니다. 과거 동이족이 산동성에 세운 나라의 이름이 ‘구이’ ‘구리’였는데, 이들이 진시황을 피해서 요동에서 산동반도 사이로 꾸준하게 이주합니다. 그 사람들이 고구려를 세웠는데 고구려를 세운 주 세력이 그래서 저는 산동 출신의 동이족이라고 봅니다.

중국 산동 황하유역에서 온 어머니 유하부인 계열과 원주민인 아버지 계열이 합쳐진 게 고구려라고 봅니다. 기록에 유하부인은 물의 신인 하백(河伯)의 딸인데, 황화지역에서 왔다고 해서 하백이고, 아버지는 부여 즉 왜, 즉 해씨 집안입니다. 해모수, 해부루 등의 해씨가 고구려 건국신화에 등장합니다.”
 
"문자에 의해 말이 바뀐 중국어"
 
-다시 한자 이야기로 돌아오면,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한 후 한자를 정비하였다고 했는데. 
 
“현재 한자의 모체가 되는 소전은 진시황의 지시로 최고 신하 이사라는 사람이 만들었습니다. 화하족은 각 지방의 언어가 달라서 통일된 글자가 필요했습니다.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 한 후 통치를 위해서 인위적으로 문자를 정리하는데, 그러다 보니 중국어도 문자에 의해 많이 바뀌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중국어는 문자에 의해 말이 바뀐 세계에서 아주 특이한 사례라고 생각합니다.”
 
이 교사는 “중국어는 굉장히 체계적인 언어”라며 “모든 단어를 시간 순서대로 나열하는데, 고대로부터 내려온 언어라면 그렇게 시간관념이 체계적으로 구성될 수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인들이 착각하는 것이 고대 중국인들이 지금 같은 말과 한자를 사용했을 거라는 것입니다. 중국은 말과 글이 완전히 다른 나라였습니다. 즉, 중국어는 우리처럼 신석기부터 쭉 이어온 언어가 아니라, 통일 과정을 거치면서 지배층이 만든 인공어가 가미된 언어가 되었습니다. 고대 중국어 어순은 지금과 달리 알타이어처럼 주어+목적어+술어였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많습니다. 이 인공어가 전국에 전파되면서 현대 중국어의 모태가 되고 체계적인 언어가 된 것입니다.”
 
-하긴 우리도 한글이 발명된 이후 사라진 발음이 여러 개 있습니다.
 
“한국은 긴 역사에 비해 통합이 의외로 늦었는데, 지형적인 원인이 크다고 봅니다. 반면 중국은 평지라서 왕조가 바뀌면 모든 것이 한 번에 정리가 되었습니다. 만리장성만 뚫리면 사실상 중원은 방어할 곳이 많지 않습니다. 지금도 동아시아에서 작은 지역으로 나누어 싸우는 곳은 한국이 유일합니다. 한국은 복잡한 지형에 의지해 여러 세력이 싸웠는데, 이것이 오히려 외세의 침입을 막고 자신들만의 언어적·문화적 원형을 유지하는 데는 도움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몽골의 침입을 40년이나 막을 수 있었던 것도 일단 우리 지형이 말이 달리기 어렵고 수레가 움직이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한국인들은 중국이 큰 땅덩어리를 지배하는 것을 경외심을 가지고 보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몽골, 거란, 여진 등은 정말 소수의 인원으로 거대한 중국을 점령하고 통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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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관총과 황남대총 남분, 천마총 등 신라 고분에서 출토한 유물을 전시 중인 경주국립박물관. 같은 시기 한반도 다른 지역과 다른 신라 무덤 양식은 한반도에 여러 갈래의 동이족들이 시차를 두고 이주하며 세력을 형성하였음을 잘 보여준다./조선DB

선비족의 남하와 한반도의 세력 판도 변화
 
-동이족의 한반도 이주 과정은 《동이 한국사》에 자세하게 기술되어 있으니까 이쯤에서 생략하겠습니다. 다만 한 가지 일본과 한반도의 관계에 대해 많은 사람의 이해가 아직 부족한 것 같습니다.
 
“원래 한반도의 주인은 마한을 이은 백제와 부여를 이은 고구려 세력이 먼저 터를 잡은 주인이었습니다. 낙랑을 이은 신라 세력은 꾸준히 북방에서 이주해온 외부 세력이죠. 그런데 신라 세력이 고구려 백제를 몰아내고, 한반도 남부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왜(일본)까지 밀어낸 겁니다. 일본 열도로 이주한 고구려, 백제, 왜 사람들 입장에서는 신라 세력에 의해  졸지에 고향땅에서 쫓겨난 것이죠.
 
그러니 신라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질 수가 없죠. 《일본서기》 초기 기록은 4세기까지 한반도에 있었을 당시 자기들의 이야기를 다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신라 세력에 의해 일본으로 쫓겨 가기 전에 한반도에서 소위 아주 잘 나갈 때 쓴 자신들의 이야기라는 것이죠.”
 
-한반도에서 잘 나갈 때라면요?
 
“제 분석으로 4세기 당시 한반도 대부분은 한때 예(동예)에 의해 통일됩니다. 이 예(동예)는 백제를 중심으로 동만주 일대까지 점령하며 위세를 떨칩니다. 그런데 북쪽에서 북부여(근초고왕)가 선비족에 멸망하면서 한반도로 남하하고 한반도를 점령하자(백제 건국) 한반도 예인들은 일본으로 대거 이주하는데, 일본에서 4세기 한반도 도래인이 급격히 증가하는 원인이 됩니다.

5세기 이후 북부여(백제)와 멸망한 선비족은 함께 한반도 남부를 점령하면서 동시에 일본열도를 점령하고 자신들의 역사를 최초로 기록합니다. 한반도와 일본을 정복한 백제계 선비족들은 자신들이 한반도에서 이룬 공적을 일본의 역사로 편입한 것입니다. 최근 오사카에서 5세기 가야계 토기가 발견됐다는 보도가 있었는데 당시 가야계 토기는 일본 전역에 발견됩니다. 일본에서 출토되는 당시 인형을 보면 고깔을 쓴 선비계 모습입니다. 결국 일본 열도가 선비계에 점령당했다는 의미입니다.”
 
이 교사는 “나중에 일본 열도를 점령한 선비계 후손이 무령왕과 동성왕이 된다” 며 “5세기 중반에 신라 지역에 흉노계 무덤이 갑자기 등장하는 것도 선비족 세력이 중원에서 멸망한 뒤 내려와 신라를 점령해서 지배층이 되고, 이후 일본까지 점령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한반도 세력 판도를 뒤흔든 북연은 어떤 나라입니까.
 
“북연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작은 나라가 아닙니다. 북연은 선비족이 세운 나라인데, 중원을 점령했다가 5세기에 이 사람들이 망하면서 고구려에 투항하게 됩니다. 당시 북연이 멸망하면서 한반도에 미친 영향은 아직 제대로 연구되지 않고 있습니다. 고구려가 이들이 북위에 의해 멸망하자 북위에서 멀리 떨어진 한반도 남부로 강제 이주시킨 거 같습니다. 중국을 점령했던 이들은 결국 백제, 신라, 일본까지 전부 점령한 것입니다.
 
선비족을 이어 중앙아시아를 차지한 돌궐은 6세기 흑해까지 다스렸습니다. 선비족 역시 돌궐처럼 한때 흑해에서 고구려까지 퍼져 있던 엄청난 세력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실 수나라 당나라 역시 선비계 국가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몽골제국 이전에 몽골제국과 비슷한 크기의 제국을 선비족이 세운 것입니다. 5세기 이후 북연이 신라에 유입된 후 황금보검 등 로마 유물이 발견되는 것도 어찌 보면 선비족이 유입된 신라에서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이야기를 종합하면, 어쨌거나 현재의 한국은 상나라의 문명을 정통으로 이었다고 생각되는데, 우리가 중국에 주눅이 들거나 할 필요 없이 자부심을 가져도 되겠군요.
 
“우리와 직접적으로 연관된 역사를 따졌을 때 우리는 단군계 조선(신석기 시대부터 한반도에 정착한 동이계)의 영향도 받았지만, 상나라계 동이족(청동기 문명)의 영향도 크게 받았습니다. 어느 것이 우선이냐 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좀 더 검토해야 할 문제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자신들을 한반도 역사에만 몰아넣고 중국과의 관계에 대해 외면해 왔습니다. 우리는 동아시아 여러 나라와 함께 한자와 동아시아 문명을 만들어왔던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고대에도 그러했듯이 새로운 시대에도 한자를 매개로 동양 삼국이 소통을 원활히 하여 문화 교류를 확대하며 미래를 함께 만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등록일 : 2017-05-24 16:38   |  수정일 : 2017-05-25 15:37

글 | 이상흔 조선pub 기자







 

 

 


 

 

출처 : 여호와는나와함께
글쓴이 : 알찬마루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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