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이드 존스, 산상 설교]
/ 그리스도인과 맹세
“또 옛 사람에게 말한바 헛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땅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네 머리로도 하지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마 5:33-37)
- 현대 세계에서 우리가 엄청나게 큰 문제들에 직면하고 있는 이 때, 이런 단순한 문제를 살펴보는 것이 유익한가? 라고 묻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이 자세한 사항들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영향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삶에 매우 중요한 것이다. 현시점에서 이것이 가장 유력한 전도방법의 하나가 됨에 틀림없다. 우리는 모두 관찰당하고 있다. 우리가 행하는 것은 무엇이든 정말 매우 중요하다. 신약성경 서신들의 저자는 교리를 한결같이 삶의 여러 상세한 점들과 관련해서 전개하였다. 복음은 항상 교리를 제시한다. 그리고 또한 삶과 삶의 가장 미미한 점들에 관심을 가진다. 이 말씀에서 그 실례를 보는 것이다.
- “또 옛 사람에게 말한 바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 구약에서는 아무데도 이렇게 정확한 표현을 찾아볼 수 없다. 이 대목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제시한 모세 율법에 대한 거짓된 해석을 들추어내고 이것을 주의 적극적 해석과 대조시키고 있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녕되이 일컫지 말라”(제 3계명)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섬기며 그 이름으로 맹세할 것이니라”(신 6:13)
“너희는 내 이름으로 거짓 맹세함으로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레 19:12)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이 성경 구절들에서 “너희는 헛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는 가르침을 뽑아내었다.
1. 모세의 율법 – 모세의 율법과 위의 인용한 여러 진술의 목적은 무엇이었는가?
모세가 취급해야 했던 가장 큰 문제 하나는 다른 사람에게 거짓말하는 경향과, 사실이 아닌 것들을 고의로 말하는 경향이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말과 진술을 믿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삶이 혼란해 지고 있었다. 그래서 이 점에서 율법의 주된 목적의 하나는 이것을 저지하고 통제하는 데 있었다. 또 다른 목적은 맹세를 심각하고 중요한 문제들에 제한하는 것에 있었다. 그들은 아주 경미한 구실꺼리만 있어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를 했다. 맹세는 매우 엄숙한 문제로, 이 법은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관계를 상기시켜, 그들의 삶을 하나님을 향해 살 듯 살아야 한다는 것을 상기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었으므로 말과 대화에서, 특히 맹세를 함에 있어 모든 일은 하나님이 그들을 내려다 보고 계시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가운데서 행해져야 할 것을 상기해야 했다.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2.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가르침 - ‘헛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였는데 주님은 이것을 노출시켜 바로 잡으려 하셨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궁극적으로 문제되었던 것은 그들의 태도가 형식에 구애되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영보다 율법조문에 더 관심을 가졌다. 그들은 이혼에서와 같이 그 의미를 달리 해석하여 법적 형태로 바꾸어 표현하여 율법의 정신에 철저히 배치되는 일들을 행할 자유를 허용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이 법의 전 목적을 위증죄를 범하는 문제에 국한시켰다. 그들은 온갖 유의 맹세를 할 수 있으며 온갖 유의 일들을 다 할 수 있었으나, 그들이 위증죄를 범하지 않는 한 그들은 율법을 범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율법주의는 아직 우리 속에도 있다. 이 율법주의적 태도를 오늘의 많은 사람들의 태도에서 보기는 어렵지 않다. 우리들은 어떤 것을 ‘그것은 죄다, 네가 그것을 하지 않는 한 다 괜찮다’라고 말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이 현대의 성결관이 되어 있다. 사람들은 성결과 세속을 성경의 어법에서 거리가 먼 양태로 정의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세속화가 영화관에 가는 것을 뜻하며, 그것을 세속의 전부로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이 이렇게 하지 않는 한 그들은 세속적이 아니라고 생각해 버린다. 하지만 그들은 그들의 교만과 육체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을 잊어버린다. 이것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헛되이 맹세하지 않는 한 사람이 아무 때든 맹세하는 것에 해가 없다고 생각했으며, 하늘로, 예루살렘으로, 거의 그 무엇으로도 맹세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언제나 무슨 문제에 대해서든 맹세를 할 수 있는 문을 열어놓았다.
그들의 거짓된 해석의 또 다른 특징은, 그들은 여러 가지 맹세들을 구별하여 어떤 맹세는 구속력이 있고 어떤 것들은 구속력이 없다고 말한 것이다. 제단으로 맹세하면 그 맹세는 지킬 필요가 없지만 제단 위에 있던 제물로 맹세하면 그것은 절대의 구속력이 있었다. 마태복음 23장에서 주님이 이렇게 제시된 율법의 왜곡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이 모든 것의 철저한 부정직성에 대하여 경멸하고 조롱하셨던 것을 보게 된다. 기독교 신앙과 관련해서 이렇게 처리되어야 할 것들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해이하고 나약한 시대에서 원칙에 대한 신념을 가질 수 없게 되어 여기서 보게 되는 탄핵을 싫어하여 이렇게 말씀하신 주님을 거의 정죄할 정도가 되어 있다. 하나님의 일과 관련된 이 철저하게 고약스런 부정직은 마땅히 드러나서 탄핵을 받아야 한다. 그 결과 엄숙한 맹세가 일상에서나 모든 일에서 가볍게 행하여졌다.
3. 주님의 가르침 -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에 율법을 주신 분이 절대 권위로 말씀하신다.
“옛 율법을 준 나는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이요, 예루살렘으로도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네 머리로도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오직 너희 말이 옳다 옳다, 아니다 아니다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
흔히 퀘이커교도라고 불리는 형제사회단원들은 이 구절에 근거하여 법정에서 마저도 맹세를 전통적으로 거부해 왔다. 이 구절을 법정에서 맹세하는 것으로 격하시킨다면 ‘박하와 회양과 근채’에 주의를 집중하고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잊어버리는 것이 된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맹세를 언제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하여 법을 제정하셨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위해 그 종에게 맹세하게 하였고, 야곱도 요셉에게 맹세하게 하였고, 요셉도 형제들에게 맹세하게 하였으며 요나단도 다윗에게 맹세하게 하였다. 즉 특별한 계기를 맞이했을 때 이 거룩한 사람들은 엄숙하고 심각하게 맹세해야 했다. 바울도 맹세를 자주 한 것을 보게 된다.(롬9:1, 고후1:23)
(히 6:16-18) “사람들은 자기보다 더 큰 자를 가리켜 맹세하나니 맹세는 저희 모든 다투는 일에 최후 확정이니라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하지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을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하지 못할 사실로 말미암아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난처를 찾는 우리에게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소극적으로 성경에 근거하여 도달할 수 있는 결론은, 맹세가 제한되어 있기는 하되 어떤 엄숙하고 사활적으로 중요한 경우, 맹세가 정당하고 합법적일 뿐만 아니라 다른 아무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엄숙성과 권위를 추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주님이 적극적으로 가르치려 하신 것은,
첫째, 맹세나 저주하는 일에 항상 성스러운 칭호를 사용하는 것을 금하는 일이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이름을 이렇게 사용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런 일은 철저하게 절대로 정죄 받고 있다.
둘째, 만물은 하나님께 속해 있으므로 아무 피조물로도 맹세하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으로서가 아니면 우리의 머리나 그 무엇으로도 맹세하면 안 된다. 여러분은 머리 터럭을 희거나 검게 할 수가 없다. 이런 일은 모두 하나님의 권한에 있다. 더구나 주님은 평상시의 대화에서도 모든 맹세를 금하고 있다. 토론할 때도 맹세를 할 필요도 없다. 여러분들에게 상기시키고 싶은 것은, 주님은 맹세나 과장된 호언이 불필요하다고 말씀하신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저 ‘네, 네, 아니요, 아니요’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주님은 항상 진실을 말할 것을 요구하신다.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
- 이것은 우리의 삶과 현대 세계에서 매우 심각한 문제이다. 사람들은 국가나 개인이 위대해지기를 원할 때 거짓말을 한다. 거짓말을 많이 할수록 성공할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국제사회에서 나라와 나라가 믿을 수 없게 되었다. 기장 성스러운 교회 연합에서도 그렇다. 맹세나 엄숙한 언질이 이제는 중요하지 않으며 가치가 없어진 상태에까지 이르렀다.
오늘의 삶의 큰 스캔들의 하나는 이혼과 부정이 증가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들이 맹세와 서약에 대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잊고 말에 있어 진실과 진리와 정직을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우리도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얼마나 같은가! 정치 연단에 서는 사람들은 국제협약의 신성성에 대해 웅변을 쏟지만 그 순간에도 그들은 그들의 결혼서약에는 참되지 못하고 있다. 국제수준에서 거짓말을 하는 것은 무서운 것이라 생각하면서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 사이의 문제가 될 때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이것은 옛부터의 오류이다. 성전은 아무것도 아니로되 성전의 금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적용된다. 우리는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 위증은 무서운 일이며 꿈도 꾸지 말아야 하지만, 거짓말하는 것도 위증만큼이나 나쁜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 존전에서 말하듯 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의 백성이다. 항상 하나님의 존전에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성령은 그것을 들으시고 아파하시며 근심하신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시기 때문이다. 그분에게 거짓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그분의 발자취를 따르며 모든 일에 그분을 닮으려 갈망하자. 우리 삶과 대화에서 모든 것은 그분의 임재 아래에 있음과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은, 다른 사람들이 그분에 대한 생각을 결정하는 것이 될 가능성이 있음을 기억하자.
“도무지 맹세하지 말찌니---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다 아니다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
출처...자기부인...바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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