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학2

[스크랩] 웨슬리의 칭의론

수호천사1 2018. 2. 19. 10:48

웨슬리의 칭의론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를 중심으로 

 

 

이 논문은 웨슬리의 칭의론을 의의 전가를 중심으로 다룬 것이다. 웨슬리는 초기에는 칼빈과 동일한 의미에서 칭의론을 말했다. 즉 그리스도의 능동적 복종과 수동적 복종을 그리스도의 의로 보았고 그 의가 믿는 자에게 전가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 후에 웨슬리는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가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고 죄악을 즐기며 사는 자들이 자신의 죄악을 덮는 방패로 사용하는 것을 보고 이것은 그리스도를 죄의 조성자를 만든다고 비판했다. 그 결과 그는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전가를 부인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의 논지는 신자는 화평함과 거룩함이 없으면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한다(히12:14)는 것에 기초한다. 즉 신자는 거룩함, 즉 성화와 그 열매인 선행이 없으면 최종칭의, 곧 영생을 얻지 못한다. 죄 사함만으로는 영생을 얻지 못한다. 회개의 열매인 선행이 없이는 영생을 얻지 못한다. 결국 웨슬리는 믿음과 회개의 열매인 선행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으로 결론짓는다. 그의 최종 입장은 혼인잔치 비유에서 예복은 그리스도의 의가 아니라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능동적인 복종은 신자들에게 직접 전가되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그리스도의 속죄를 완전하게 하기 위한 전제 조건에 불과하다. 신자들의 선행은 비록 부족하지만 그리스도의 피로 온전하게 씻겨지고 영생의 근거가 된다.

 

웨슬리는 믿음으로 칭의되고 성화된다고 했지만 이 믿음은 확신이며 이 확신에 이르기 위해서는 경건의 일과 자비의 일인 선행을 열심히 해야 한다. 그 때 비로소 확신이 주어진다. 결국 선행의 필수성을 강조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웨슬리의 칭의론은 신앙과 선행에 의한 칭의에 가까우므로 이신칭의를 주장하는 전통적인 입장과 다소 다른 것이다. 그러므로 논자는 예수님을 왕으로 영접하여 순종하는 의지적 믿음, 제사장으로 영접하여 죄사함 받는 감정적인 믿음, 선지자로 영접하여 그의 뜻을 깨닫고 확신하는 지적인 믿음을 강조하여 전인적인 믿음에 의지하여 칭의를 이룬다는 견해를 웨슬리의 칭의론을 보완하는 것으로 제시한다. 이런 견해는 이신칭의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이 시대의 문제점인 행함없는 믿음, 즉 죽은 지적인 믿음에 대한 경종을 울릴 수 있을 것이다.

 

서론

 

 클리포드가 말한대로, 오직 믿음으로 (sola fide) 칭의된다라는 원리를 반대한 로마 카톨릭과 소시니안 신학자들, 그리고 그들과 연계된 개신교들이 있었는데, 그들의 반대의 주된 초점은 그리스도의 전가된 의의 교리였다. 17세기 정통주의는 칭의가 죄사함 이상인 것으로 믿었다. 즉 그리스도의 수동적이고 능동적인 복종이 칭의 시에 신자에게 전가된다고 믿었다. 알미니안들과 다른 사람들은 그런 가르침이 실천적 경건의 관심에 적대적이라고 믿었고, 초기 도덕무용론 자들에 대한 그들의 반응은 칭의론이 의의 전가라기 보다는 내재적으로 의롭게 되는 것으로 생각했다. 따라서 알미니우스를 창의적으로 수용한 웨슬리에게 그리스도의 전가된 의가 어떻게 이해되었는가를 살피는 것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웨슬리의 성화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연구했고 논문을 썼다. 그러나 “웨슬리의 의인 (칭의)의 교리는 다른 모든 것들의 척도와 결정적 요소가 되었다”는 캐논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웨슬리의 칭의론에 관한 책을 쓴 학자는 많지 않다. 더구나 칭의론의 핵심인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에 대한 웨슬리의 명료한 입장을 다룬 글을 찾기는 쉽지 않다. 유태주는 그의 박사학위 논문에서 웨슬리의 칭의론이 “산 믿음을 강조한 칼빈의 칭의론과 조금도 차이가 없”다고 말한다.

 

웨슬리가 칼빈처럼 살아있는 믿음에 근거한 칭의론을 말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에 있어서도 같은 견해인지 아닌지를 고찰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쉬운 일이다. 크로우는 모라비안 형제단이 루터를 따라서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의 개념을 주장했지만, 웨슬리는 “개인적이고 내재적인 의의 필수성”을 주장하는 경건주의를 따랐다고 말한다. 크로우의 견해는 웨슬리가 루터의 입장에서 본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를 부인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벵크 헤그룬트는 웨슬리가 1738년의 회심 직후에는 오직 이신칭의 만을 가르쳤지만 후에는 결국 행위를 칭의의 조건으로 간주함으로 영국신학에 다시 가까워졌다고 보았다. 이는 웨슬리가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의의 전가에 의한 칭의를 수정했다는 의미와 같다. 프레더릭 브루너는 웨슬리가 그리스도의 대리적 사역,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 율법의 비전가를 부인했다고 하였는데 반하여, 토마스 오덴은 웨슬리가 그리스도의 전가된 의를 확증했다고 주장했다. 위와 같은 견해들은 웨슬리가 과연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를 인정했는지 안 했는지, 그리고 어떤 의미로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를 이해했는지를 살펴볼 것을 우리에게 요구한다.

 

 

본론

 

 

1. 칭의에 대한 웨슬리의 정의

 

린드스트룀은 칭의의 교리에 대해서 웨슬리와 종교개혁자들의 견해가 일치한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는 분명한 사실”이라고 단언한다. 린드스트룀은 웨슬리에게 있어서 첫째, 인간의 칭의의 유일한 원인은 그리스도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이며, 둘째, 구원은 하나님이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고, 셋째, 칭의의 유일한 조건은 믿음이며, 믿음의 핵심은 “그리스도의 속죄에 대한 신뢰”라고 보았다. 이와 같은 린드스트룀의 견해는 웨슬리 자신의 말과 일치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한가지 지적해두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1738년 6월 11일에 웨슬리가 칭의를 보다 광범위하게 즉 구원과 비슷한 개념으로 설교했다는 사실이다. “죄로부터의 구원과 죄의 결과로부터의 구원은 종종 칭의라는 단어로 표현”된다. 좀더 자세히 말하면, 칭의는 그리스도의 속죄를 통한 “죄책과 처벌로부터의 구원”과 신자의 심령에 심겨진 그리스도를 통한 “죄의 세력으로부터의 구원”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이것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데 웨슬리에게 칭의가 단순히 법정적 의미만을 갖는 것이 아니라 성화를 포함하는 구원과 같은 개념으로 생각했었고 이것이 후에 최종칭의를 얻는데 있어서 신앙과 더불어 성화가 필수적인 조건이 되는 시발점이 되기 때문이다.

 

 린드스트룀의 견해는 1746년에 웨슬리는 “믿음에 의한 칭의”라는 설교에서 지지된다. 이 설교에서 웨슬리는 칭의를 성화와 분리해서 좁게 정의했다. 칭의는 성경적인 의미로 죄사함이며 실제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다. 칭의는 과거에 범했던 생각, 말, 행동에 있어서 사람의 모든 죄가 그리스도의 피흘림을 통해서 용서하심으로써 자신의 의를 보이시는 하나님의 행위다. 따라서 우리는 율법의 행위 없이 그리스도를 믿음에 의해서 칭의된다. 칭의는 “하나님이 그 영으로써 우리를 위하여 해주시는 것”을 의미하며, 그것이 죄사함과 이로 인한 하나님께 받아들여짐이다. 웨슬리의 사상에 있어서 죄사함과 받아들여짐은 구별될 수는 있어도 결코 분리될 수 없다. 죄사함은 그와 동시에 필연적으로 죄인을 하나님의 아들의 위치로 복귀시킨다. 여기서 좀 더 살펴보아야 할 것은 웨슬리에게서 칭의는 과거의 죄에 대한 처벌의 면제라는의미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의인의 성서적 정의는 죄의 용서이다….그러므로 의롭다함을 받은 자, 즉, 죄의 용서를 받은 자는 하나님께서 과거의 모든 죄를 사하시면, 기억도 않으시며, 죄가 없었던 것처럼 여기시며, 그의 사랑하시는 아들로써 하나님의 축복과 사랑과 돌보심을 받게 된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의 대속의 사건을 통해 그리스도를 믿는 자가 과거의 죄의 책임과 형벌에서 해방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루터와 칼빈이 칭의를 과거와 현재, 미래의 모든 죄의 사함으로 보는 것과 대조된다. 즉 웨슬리는 확신은 예정에 기초하고 있지 않고 과거의 죄의 사함에 대한 확신이므로 신자가 미래에도 필연적으로 견인될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미래는 신자가 하나님의 은혜에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달렸다. 그렇다면 웨슬리는 칭의를 단순히 죄사함으로만 보고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를 포함시키지 않았는가? 루이스 벌콥은 칭의의 두 요소를 그리스도의 수동적 순종에 기초한 죄사함과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에 기초한 의의 전가로 본다. 이 의는 그리스도의 공로와 같은 의미를 갖는다. 칭의의 근거는 우리에게 전가된 그리스도의 의다. 이에 대해서 다음 장에서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2. 신앙의 내용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의

 

 웨슬리는 1765년 11월 24일의 설교에서, 그리스도의 의는 신적인 의와 인간적인 의로 나뉜다고 주장했다. 그의 신적인 의는 그의 신적인 본성에 속한 고유한 것이다. 이것은 그의 “영원하고 본질적이며 불변하는 거룩이며, 무한한 정의, 자비, 진리”를 의미한다. 이 의는 하나님 아버지와 동등한 신적인 것이기에 인간에게 전가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인간적인 의인데 그것은 내적인 의와 외적인 의로 나눠진다.  그리스도의 내적인 의는 “그의 영혼의 모든 능력과 자질 위에 인쳐진 하나님의 형상”이다. 이것은 그의 신적인 의의 복사판으로서 인간의 영혼에 분여될 수 있다. 그것은 “신적인 순결함, 정의, 자비, 진리”의 복사판이며, 사랑, 경외, 성부께의 복종, 겸손, 온유, 친절, 버려진 인류에 대한 사랑, 거룩하고 천상적인 기질” 등을 포함한다. 그리스도의 외적인 의는 소극적인(negative) 의와 적극적인(positive) 의로 나뉜다. 소극적인 의는 그가 어떤 잘못된 외적인 죄를 짓지 않았다는 것을 말한다. 즉, 그는 입술에 거짓이 없었으며 한 마디의 부적절한 말이나 행동을 하지 않았다. 이것은 여인에게서 태어난 사람 중 오직 그에게만 해당되는 독특한 것이었다. 적극적인 의는 그가 모든 것을 바르게 행했다는 것을 말한다. 그의 모든 말과 행동은 하나님의 뜻과 정확히 일치했다. 그의 생애의 전 과정에서 하늘에 있는 천사들처럼 하나님의 뜻을 행했다. 그는 어떤 환경에서도 정확히 바르게 행했다. 그의 복종은 완전했으므로 그는 “모든 의를 성취했다”.

 

 그리스도의 적극적인 의는 그리스도의 능동적인 의라고 칭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의(그의 복종)는 그의 고난 즉,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포함하는데 이 고난은 수동적인 의라고 칭한다. 능동적인 의와 수동적인 의는 구별될 수는 있으나 분리될 수는 없다. 즉 이 둘은 하나님께 대한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을 말한다. 죄인이 하나님 앞에서 칭의되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의 덕분이다. 웨슬리는 그리스도의 의를 그의 공로와 동일시했다. 모든 신자들이 하나님께 용납되고 용서되는 것, 즉 칭의는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 때문이다. 즉,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해 행하시고 고난 당하신 덕분이다. 이것은 루이스 벌콥과 같은 견해이다. 차이점은 웨슬리가 신앙을 신자들에게 의로 간주된다고 보았다는 점이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회개와 신앙의 조건들을 성취했다는 언급을 강하게 반대했다.

 사람들이 자신들의 죄를 숨기는 대용품으로 그리스도의 의를 사용하는 것은 거룩에 대한 모욕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웨슬리는 그리스도의 의라는 말을 사용하기를 꺼려했다. “반율법주의자들이 그것을 가장 추잡한 혐오스런 것들을 정당화하기 위해 오늘날까지 그것을 사용하고 있다”고 말함으로써 그 용어의 남용을 걱정했다. 웨슬리는 ‘그리스도의 의’라는 표현보다 ‘하나님의 의’라는 표현을 더 선호했다.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자비와 죄인을 칭의시키는 그의 방법을 의미한다.

 

3.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에 대한 견해

 

 김홍기 교수는 웨슬리에게 “성도는 그리스도의 수동적이고 능동적인 의를 옷 입게 된다”고 하였으며, “수동적인 의는 믿음으로 받지만 그리스도의 능동적인 의는 수동적인 의의 결과로 뒤따르는 은총”이라고 말한다. 즉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능동적인 의가 전가되는 것이 아니라 전가된 수동적인 의의 결과로서 인간의 내면에 의로운 본성이 심겨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개혁주의 입장에서는 칭의가 아니라 중생이나 신생의 개념과 거의 같은 것이다. 이런 면에서는 웨슬리가 그리스도의 능동적인 의, 즉 그의 적극적인 복종이 신자들의 의로서 전가되었다고 단정하기가 어렵다. 따라서 우리는 좀더 깊이 이것을 다룰 필요가 있는데, 이 문제를 좀더 명료하고 구체적으로 다룬 학자들은 알란 코페지와 알란 클리포드다.

 

3.1 알란 코페지의 견해

 

 코페지는 웨슬리가 그리스도의 전가된 의는 성경적이지도 않고 필수적이지도 않으며 속죄의 객관적인 측면만을 너무 강조한 것이라고 보았다고 한다. 웨슬리는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 대신 “의로 간주된 믿음”을 강조했고 그 의는 내재적이고 전가된 것으로 보았다. 하나님께서는 신자들 안에 의와 거룩을 참으로 만들기를 원하신다. 신자들을 실제로 의롭게 만드심이 없이는 사람들을 의롭다고 간주하시지 않으신다. 만약 그리스도가 전 율법을 성취했다면 신자는 그것을 성취할 필요가 없다. 사람들이 자신들의 죄를 숨기는 대용품으로 그리스도의 의를 사용하는 것은 거룩에 대한 모욕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웨슬리는 그리스도의 의라는 말을 사용하기를 꺼려했다. “반율법주의자들이 그것을 가장 추잡한 혐오스런 것들을 정당화하기 위해 오늘날까지 그것을 사용하고 있다”고 말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란 용어의 남용을 걱정했다. 웨슬리는 자신의 불의를 덮기 위해 그리스도의 의가 나에게 전가되었다고 말하는 경우를 천 번이나 보았다고 진술한다. 허베이는 웨슬리가 오직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에 의해 칭의된다는 것을 희생하고 거룩을 지나치게 강조해서 로마교회에 너무 가까워졌다고 비판했다. 그는 그들 자체로는 악명 높은 범죄자인 신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죄 없는 복종을 가진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웨슬리가 보기에 도덕무용론을 조장하는 것이었다. 웨슬리는 허베이의 주장은 목회 현장에서 사람들을 실제적인 반율법주의자들로 이끄는 교리적, 사변적 반율법주의라고 보았다. 웨슬리는 두 가지 이유로 허베이의 주장을 반박했다.

 

첫째, 의와 칭의에 대한 허베이의 주장은 성경적이지 않다. “그것은 전체 (성경의) 구조에 중대하고 명백하게 반대되는 것이다”. “그것은 직접적으로 율법을 헛되게 한다”.

 

둘째, 그리스도의 전가된 의에 대한 강조는 중요한 거룩을 증진시키는 대신 신자들을 아무 거룩함도 없이 만족하게 지내게 한다. 이 교리는 사람들로 하여금 “믿음을 부인하고 그리스도와 그의 의를 거절할까 봐” 개인적인 거룩을 추구하는 것을 두려워하게 한다. 결국 이 교리는 선행을 열심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선행을 미워하도록 이끈다.

 

요약하면, 코페지는 웨슬리가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가 신자의 선행을 대신하는 구실로 사용되어 결국 도덕무용론으로 귀결되기 때문에 이의 사용을 반대했다는 견해이다.

 

3.2 알란 C 클리포드의 견해

 

 코페지와 유사하게, 클리포드는 웨슬리가 “전가된 의”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을 탐탁치 않게 여겼다고 본다. 즉 웨슬리는 그런 표현은 비성경적이고, 불필요하고, 모호하고 위험한 것으로 간주했다. 왜냐하면 만약 그리스도의 참된 인격적인 복종이 내가 믿는 순간에 내 것이 된다면 어떤 것이 거기에 더해질 수 있겠는가? 하나님께 대한 나의 복종이 그리스도의 완전한 복종에 무슨 가치를 더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이런 구조에서는 거룩한 자들이나 거룩하지 않은 자들이나 동일한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닌가? 웨슬리의 관점에서 그리스도의 전가된 의는 “그리스도의 수동적 복종 혹은 죽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런 관점의 정당성에 대해서 웨슬리는 다음과 같이 그의 논지를 전개한다.

 

첫째, 율법은 복종할 것이냐 죽을 것이냐 둘 중 하나만을 요구한다. 복종하면 사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죽는 것이다. 율법은 결코 둘 다 요구하지는 않는다.

 

둘째, 만약 그리스도의 완전한 복종이 신자들에게 전가된다면 신자들은 더 이상 그리스도가 가졌던 용서(pardon)이 필요하지 않다. 다시 말하면 그의 복종이 우리의 것이라면 우리는 여전히 그 안에서 복종하고 있는 셈이다. 용서는 필연적으로 하나님께 받아들여짐을 함축한다. 그 둘은 나누어질 수 없다. 그리스도의 수동적 순종(속죄적 죽음)은 죄사함을 가져다주고,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는 양자됨을 가져다준다는 오웬의 주장은 웨슬리가 보기에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는 동시에 우리는 양자가 된다. 이는 루터, 칼빈, 영국성공회 개혁자들과 마찬가지로, 즉 “칭의는 용서, 곧 죄사함”이라는 평이한 진술이다.

 

셋째, 그리스도는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건져낸 것이지 율법의 교훈에서 면제시킨 것이 아니다. 갈 3:3에서 그리스도는 우리를 대신해서 저주가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다고 기록되었는데 이것을 율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셨다고 해석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복음은 여전히 우리를 율법, 즉 그리스도의 법에 대한 복종 아래에 둔다.

 

클리포드는 칭의에 대한 웨슬리의 이런 주장이 칼빈의 주장에 의해 완전히 확증되는 것으로 간주한다. 그의 주장은 다음과 같은 칼빈의 진술에 근거를 둔다. 더욱이 우리는 그리스도의 유익에 의해서 율법으로부터 면제되어서 더 이상 율법의 가르침에 대한 아무런 복종할 의무가 없고 우리가 기뻐하는 것을 행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선하고 거룩한 삶의 영구한 규칙이기 때문이다. 클리포드는 칼빈에게 칭의는 단지 죄사함 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능동적 복종이 우리에게 전가되었다는 것은 전혀 암시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그의 주장은 칼빈이 기독교 강요에서 “칭의는 죄의 용서와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로 구성된다고” 말한 적이 있기 때문에 쉽게 지지되기는 어렵다.

 

칼빈과 웨스트민스터와의 차이점은 사보이 선언(Savoy Declaration)에서 더욱 심화되었다. 웨스트민스터 고백 11조는 그리스도의 복종과 만족의 전가를 말하고 있는데 반하여, 사보이 선언은 신자들의 칭의가 죄사함과 “전 율법에 대한 그리스도의 능동적 복종과 그의 죽음에서 보여진 수동적 복종” (즉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말한다. 이런 교리적 변화는 오웬에 의해서 이루어졌다고 백스터는 말한다. 오웬의 전가교리는 칼빈의 교리와 현저하게 다르다고 본다. 칼빈은 칭의를 죄사함에 의한 것으로 본 반면에 오웬은 죄사함과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에 의한 것으로 보았다. 웨슬리는 칼빈과 마찬가지로 칭의의 근거로서 그 기초를 그리스도의 전체적인 복종으로 확장시켰지만 (죄 있는 중보자는 결코 중보할 수 없다는 면에서), 그리스도의 복종은 신자들의 칭의를 위해서 전가된다기보다 성화를 위한 모델이라고 여겼다. 웨슬리는 요일 2:6 “그 안에 거하는 자는 그와 같이 행할지니”를 근거로 그리스도의 능동적 복종은 신자에게로의 전가보다는 신자의 모방을 위한 것이라고 보았다.

 

3.3 논자의 견해

 

 논자는 대체로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에 대한 웨슬리의 견해에 대한 코페지와 클리포드의 평가에 동의하지만 몇 가지 지적할 것이 있다. 첫째, 웨슬리는 1765년의 설교, “주 우리의 의” 에서 그리스도의 의가 믿을 때에 신자들에게 전가된다고 주장했다. 모든 신자들은 그들 안에 있는 어떤 것이나 그들이 행한 것, 심지어 그들의 믿음 때문도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가 행하시고 그들을 위해 고난 당하신 것 때문에” 죄가 용서되고 받아 들여진다. 여기서 웨슬리는 그리스도의 의를 그의 능동적인 복종과 수동적인 고난으로 정의했고, 신자는 “의의 전가에 의해” 칭의되는 것으로 보았으며, 의의 전가의 결과인 칭의는 “죄사함과 하나님께 받아들여짐”으로 보았다. 이것은 칼빈의 주장과 거의 같은 것이다. 웨슬리는 이런 입장을 28년간이나 가르쳤다고 했다. 웨슬리는 “나는 전가된 의를 부인하지 않는다. 이것은 또 다른 불친절하고 부당한 고소이다. 나는 항상 그랬고 아직도 계속적으로 그리스도의 의가 모든 신자에게 전가된다고 확실하게 주장한다”고 항변한다. 그리스도의 인간적인 의는 믿기만 하면 신자에게 그 자신의 의로 받아들여진다. 그리스도의 인간적인 의의 전가는 죄인의 칭의를 위한 “전체적이고 유일한 공로적 원인”이다. 그리고 웨슬리는 그리스도의 전가된 의를 부인하는 로버트 바클레이와 퀘이커 교도들을 강하게 비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설교의 후반부에서부터는 그리스도의 전가된 의의 남용에 대해 심각하게 걱정하며 비난했다. 웨슬리는 자신의 불의를 덮기 위해 그리스도의 의가 나에게 전가되었다고 말하는 경우를 천 번이나 보았다고 토로했다. 술취한 자들이 나 자신의 의는 없지만 “그리스도가 나의 의다”라고 하기도 하며 다른 이는 “토색자, 불의한자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라는 구절에 대해서 “나 자신 안에서는 불의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는 흠없는 의를 갖고 있다”고 확신있게 대답하기도 한다.

 

이런 방식으로 그리스도인의 기질이나 생활습관도 없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정신도 없고 그리스도를 따라 걷지도 않는 자들이 모든 죄책감에 대한 방패로서 “그리스도의 의”를 부른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웨슬리는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라는 표현을 절제하게 되었다. 그리고 웨슬리는 초기 칭의 후에 계속 불의한 채로 남아 있는 자들에게 강력하게 경고했다. 만약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다는 공허한 상상에 의해서 “거룩함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뵙지 못한다”는 경고를 헛되게 만드는 것은 “그리스도를 죄의 조성자로 만드는 것”이다. 만약 그들이 불의한 채로 남아 있다면 그리스도의 의는 그들에게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된 참된 목적은 “율법의 의가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게 하기 위함이며 우리가 이 세상에서 온전하게, 의롭게, 경건하게 살게 하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계속하여 웨슬리는 율법폐기주의로 가는 이런 남용만 없다면 모든 축복이 오직 “그리스도가 행하시고 나를 위해 고난당하신 덕분에” 주어진다는 표현은 사용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자신을 교황주의자 혹은 “그리스도의 의의 대적자”라고 비난하거나 정죄하지 말라고 호소했다. 따라서 코페지, 클리포드와 더불어 웨슬리가 칭의가 그리스도의 능동적인 의의 전가라고 정의하기를 의도적으로 피했다는 매덕스의 주장은 절반만 타당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에 대한 웨슬리의 개념이 개혁주의와 많이 다르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하지만 웨슬리 자신이 허베이와의 대화에서 신자들이 그리스도 덕분에 받아들여진다는 것은 인정했으나 “전가된 의를 통한 칭의는 허용할 수 없다”고 말했기 때문에, 그의 견해는 때로 일관성이 없이 상황에 따라서 다소 변하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

 

 4. 칭의의 조건으로서의 신앙과 회개

 

 웨슬리는 신앙을 칭의에 있어서 “직접적이고 필수적이며 절대적인” 조건으로 보았다. 예를 들면 예수님의 한 편의 강도는 어떤 선행도 없이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 그 어떤 흉악한 죄인이라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자비를 믿으면 죄를 용서받는다. 웨슬리는 이런 면에서 철저하게 카톨릭의 공로적인 행위에 의한 칭의를 반대한다. 공로에 의한 칭의론을 가장 위험하고 혐오할 만한 교리로 규탄한다는 것을 감히 선포한다….우리는 삶이나 죽음이나 혹은 심판 날의 칭의나 구원을 위하여…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 외에 아무것도 신뢰하거나 신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하나님 앞에서 엄숙히 선언한다. 웨슬리는 우리의 믿음조차도 우리를 의롭게 하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자비와 그리스도 의 공로만을 의지해야 한다고 했다. 적어도 이 때만큼은(1746) 칭의론에 있어서 루터나 칼빈과 같다. 즉 우리의 믿음도 아니고 우리의 선행의 공로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만이 당신의 자비를 따라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를 사하신다. 따라서 우리 칭의의 모든 영광을 하나님과 그리스도께 돌려야 한다.

 

 웨슬리가 말하는 신앙은 교회의 교리에 대한 맹목적으로 동의가 아니라,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확실한 신뢰이며 용서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확신”이다. 이 믿음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자신을 주셨다는 확신을 분명히 의미한다”. 그것은 또한 그리스도를 선지자요, 왕이요 제사장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나 성화는 확신이 없이는 성취되지 않으므로 확신은 최종구원에 필수적이다. 이 믿음이 칭의의 유일한 조건이며 우리의 의로 간주된다. 신앙이 신자의 의로 간주된다는 것이 개혁주의와의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웨슬리는 신앙을 칭의의 유효적(efficient) 원인이라고 보는 반면에 개혁주의는 도구적 원인이라고 본다. 아무튼 웨슬리에게는 이 칭의가 인간의 행위와 무관하지는 않다. 칭의를 원하는 자는 가만히 기다리기만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하신 은혜의 수단인 기도, 성경읽기, 성찬 등의 수단에 의해 갈망해야 한다. 즉 그리스도의 공로와 믿음만이 칭의의 유일한 원인이지만 인간의 참여와 행동을 게을리해서는 안된다. 이런 인간의 노력이 수행될 때 하나님께서 칭의에 대한 확신을 선물로 주신다. 그리고 확신만이 성화를 이룬다. 성화를 성취하는 믿음, 내적, 외적 거룩함이 있는 믿음만이 인간을 최종적으로 구원하는 믿음이다. 웨슬리는 칭의시키는 믿음에도 정도의 차이, 즉 확신의 정도가 있을 수 있다고 하였다. 확신이 부족해도 죄인은 칭의된다. 이때의 칭의는 과거의 죄사함과 하나님의 호의를 회복하는 초기칭의를 말한다. 그러나 확신이 없으면 성화와 최종칭의는 성취되지 않는다.

 

그래서 웨슬리는 회개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강조한다. 회개는 신앙의 문이므로 회개 없이는 참된 신앙을 가질 수 없다. “우리가 복음을 믿기 전에 회개해야만 한다”. 회개는 자기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는 것이다. 회개는 율법적인 회개와 복음적인 회개로 나눈다. 전자는 죄에 대한 철저한 깨달음이요, 후자는 깨달은 죄에서 거룩한 것으로 마음을 바꾸는 것이다. 이런 회개는 다른 말로 하면 자기 의에 대한 의뢰에서 철저하게 벗어나는 것이다. 웨슬리에게 회개와 그 열매가 어떤 의미에서는 칭의에 필수적인 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그의 입장은 1770년에 명료하게 표명되었다. 그러나 회개와 그 열매는 신앙과 동등한 의미에서의 필수적인 조건은 아니다. 신앙이 칭의의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원인이라면 회개와 그 열매는 간접적이고 시간이 주어지는(remotely) 조건이다. 시간과 기회가 있다면 신자들은 반드시 회개의 열매인 선행을 행해야 한다. “신앙은 결코 선행을 배제하지 않는다. 신앙 이후에 그런 것들은 반드시 행해져야 한다”. 신앙이 없는 선행이 칭의의 조건이 될 수 없지만 신앙으로 말미암은 선행은 칭의에 필수적인 조건이다. 이것은 거룩함이 없이는 주님을 뵐 수 없다는 성경에 근거한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웨슬리에게 신앙과 회개가 칭의의 조건이라는 매덕스의 견해는 옳다. 웨슬리는 선행이 신앙을 지속하는데 필요하며. 신앙은 불신앙에 의해서 상실되며 불신앙은 지속적인 불복종에서 비롯된다고 하였다.

 

 선행이 칭의의 간접적인 조건이란 표현은 칼빈주의자들에게 강한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예를들면 헌팅톤 백작부인과 그 동조자들은 웨슬리가 카톨릭으로 돌아갔다고 비난을 했으며 로마카톨릭 학자인 비버리지 신부는 1770년의 연회록에서 개신교 신앙위주에서 선행을 강조하는 카톨릭적 경향이 구체적인 형식으로 현저하게 나타났다고 환영하였다. 더구나 1756년에 웨슬리는 허베이가 칭의는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에 기초하기 때문에 증가될 수 없다고 했을 때 하나님의 호의에 있어서는 많은 등급이 있을 수 있다고 했다. 물론 이 호의는 인간의 선행과 비례한다. 웨슬리는 칭의를 하나님의 호의의 회복이라고 칭한바 있다. 따라서 이 언급은 칭의와 선행을 혼합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죠지 셀은 웨슬리가 선행을 공로로 하여 칭의된다는 카톨릭의 공로주의도 배척하고 오직 믿음, 오직 은혜로 칭의된다고 하는 루터와 칼빈의 이신칭의에 기초하면서도, 이신칭의가 빠지기 쉬운 도덕무용론을 피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선행은총에 능동적으로 응답하는 인간의 선행도 강조했다 고 보았다. 하지만 이런 평가는 웨슬리가 이신칭의를 넘어서고 있는 것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5. 최초칭의와 최종칭의의 조건

 

콜린 윌리암스는 웨슬리의 설교, “믿음에 의한 칭의”(1746)를 해석할 때 최종칭의의 유일한 조건으로서 믿음을 말했다.

 

 "이에(칭의에) 뒤따르는 성화는 살아있는 믿음이 필연적으로 그리스도가 우리 삶에 어느 정도의 참된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는 점에서만 우리의 최종칭의의 근거로서 말해질 수 있다는 것을 반복하는 것이 중요하다. 만약 아무 결과도 없다면 그 믿음은 참된 것이 아니다. 그러나 믿음은 최종칭의의 유일한 조건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의 이해력과 기회에 따라서 다양하게 성화되기 때문이며 완전 성화를 받은 사람들조차 아직 도덕적이고 법적인 의미에서 불완전하기에 속죄를 의지해야만 하기 때문이다."(논자 역)

 

 하지만 웨슬리의 결혼예복에 관한 설교(1790)를 해석할 때는 웨슬리가 “이중적인 칭의”교리를 지녔다고 주장했다. 즉 웨슬리는 성화가 최종적인 칭의의 조건이라고 설교했다는 것이다. 이런 윌리암스의 진술의 변화는 웨슬리의 생애 속에서 칭의의 조건에 대한 성화에 대한 견해가 변했음을 강하게 암시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윌리암스는 웨슬리가 언급하는 인간의 거룩은 살아있는 신앙의 열매라고 보았다. 그러나 이런 윌리암스의 견해는 웨슬리가 성화가 신앙을 가지면 결코 저절로 맺히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했다는 것을 다소 간과한 것 같다. 브록웰은 웨슬리에게 최종구원도 칭의와 마찬가지로 신앙에 의존한다고 하였으며 선행은 아무것도 얻지 못하며 행위는 완전성화된 자에게 의와 참된 거룩의 성장의 부분이며 증거라고 했다. 그러나 브록웰은 웨슬리에게 선행이 성화의 증거이자 최종칭의의 필수적인 조건임을 간과하고 있다. 브록웰과 대조적으로, 린드스트룀은 그의 책의 마지막 장에서 웨슬리가 칭의를 얻기 위한 간접적인 조건으로서, 그리고 칭의된 상태, 즉 하나님의 사랑 속에서 계속 머물러 있기 위한 조건으로서, 회개의 열매인 사랑과 복종을 시종일관 강조했다고 본다. 특히, 최종심판에 이루어지는 최종칭의 역시 믿음의 행위인 회개의 열매는 필수적이라고 본다.

 

 클래퍼는 웨슬리에게 “현재의 구원은 단지 그리스도의 공로를 신뢰함으로 주어지지만 이런 신뢰에서 오는 감사하는 봉사의 삶을 사는데 실패하여 뒤로 물러나면 최종구원을 경험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된 목적은 그 의가 우리의 삶 속에 이식 되어서 우리 삶이 효과적으로 변화되게 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즉 클래퍼는 웨슬리에게 있어서 우리 안에 이식되어 내재된 의가 없이는 그리스도의 전가된 의는 최종구원에 아무 효력이 없다는 견해이다. 이는 웨슬리 자신의 진술에(1765) 비추어 볼 때 옳은 것이다. 이런 다소 상반된 주장들의 진위를 가려내기 위해서는 칭의를 위한 조건으로서의 우리의 복종, 즉 선행에 대한 웨슬리의 입장을 연대순으로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웨슬리는 올더스게이트 이전에는 신앙과 행위에 의한 칭의를 말하다가, 체험 이후인 1738-9년에는 오직 믿음으로 칭의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성공회 신학이 말하는 최초칭의와 최종칭의를 나누는 이중칭의 개념을 부정했다. 칭의의 유일한 조건은 오직 믿음이요 선한 행위가 아니다. 1746년의 “믿음의 의”에 관한 설교에서도 웨슬리는 - 단지 신자가 끝까지 믿음을 유지할 경우에 - 믿음이 현재와 최종구원으로 귀결되는 칭의의 조건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반율법주의자들이 득세하자 이들과 대항하는 과정에서 그는 다시 회개와 그 열매로서 선행을 강조했다. 1755년에 웨슬리는 바울과 야고보가 둘 다 믿음과 행함으로 칭의된다고 가르쳤다. “선행이 단순히 믿음의 증거”라는 견해를 웨슬리는 참을 수 없었는데 왜냐하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자신을 구원하지도 못하고 그의 이웃에게도 유익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1756년에 웨슬리는 복종과 영생의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

 

"우리는 더 이상 최종 수납의 기초를 놓기 위해서 복종하는 것이 아니다. 그 기초는 그리스도의 공로 안에서 이미 놓여졌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그리스도의) 공로를 통해서 우리의 최종 용납을 위해 복종한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복종에 의해서, 우리는 영생을 얻기 위해 선한 기초를 놓는다."

 

여기에서 주의해서 살펴보아야 하는 것은 웨슬리가 최종 수납의 기초는 그리스도의 공로라고 한 반면에 영생의 기초는 우리의 복종이라고 한 점이다. 즉 최종 수납과 영생을 다른 것으로 보았다. 1774년에 웨슬리는 다시 한번 선행이 최종구원의 한 조건이라고 하였다. 우리 중 아무도 우리의 선행 때문에 받아들여진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칼빈주의자들의 비방이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우리가 행위없이 구원받지 못하며, 행위는 공로적인 원인은 아닐지라도 최종구원의 한 조건이라고 주장한다. 우리가 모든 선행을 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의와 보혈을 믿는 믿음에 의한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를 행하는 모든 사람들이 그에게 용납되는 것은 이것들 때문이다. 1789년 후반에 웨슬리는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영생을 위해서 일하라”고 하셨다는 것에 근거하여 사람의 구원은 그리스도의 공로만큼이나 하나님께 대한 신자의 신실함(충성)에 의지한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도덕무용론을 증진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웨슬리는 1790년의 “결혼예복에 대하여”라는 설교에서 은혜로 말미암는 구원을 선포한 것이 거룩함이 없이는 하나님을 볼 수 없다는 주장에서 물러난 것이 아니며 “거룩함이 영생으로 인도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강변했다. 거룩함(성결함)은 “어린 양의 결혼예식에 필요한 예복”이라고 주장했다. 칼빈주의자들이 말하듯이 이 예복이 그리스도의 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들의 실제적인 삶과 성품의 거룩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는 웨슬리가 결국 루터나 챨스 핫지가 말하는 그리스도의 능동적인 의의 전가를 부인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핫지에게는 수동적 의의 전가의 결과로 죄사함 받고, 하나님의 호의를 회복하며, 능동적 의의 전가의 결과로 양자됨과 영생을 상속하기 때문이다. 영생의 상속이 신자의 성화와 관계되는 것이 아니라 칭의, 곧 의의 전가와 관계한다. 대조적으로 웨슬리에게는 영생은 단순히 의의 전가만이 아니라 신자의 성화를 필수적인 조건으로 한다. 테드 도만이 말한대로, 웨슬리에게 개인의 거룩은 구원의 조건으로서 믿음의 동반자일 뿐만 아니라 구원의 자격으로서 칭의시키는 믿음을 보충한다.

 

 결론: 요약과 평가

 

 웨슬리의 칭의론은 청년 때의 종교적이고 윤리적인 단계, 올더스게이트 사건 이후의 복음적인 단계, 복음윤리적인 단계로 변화해갔다. 즉 신앙과 행위, 오직 신앙, 사랑으로 역사하는 신앙으로 옮겨갔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의 입장에서는 그리스도의 수동적 순종, 즉 속죄의 전가만을 인정했고 그리스도의 능동적 의(율법에 대한 순종)의 전가를 인정하지 않았다. 웨슬리의 완숙한 관점은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은 단지 수동적 순종을 위한 준비일 뿐이지 그것이 우리에게 영생을 얻기 위한 조건으로서 전가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수동적 순종(속죄의 고난)을 믿음을 통해서 죄사함과 하나님께 받아들여 진다. 그러나 영생을 얻게 하는 것은 우리의 신앙과 회개의 염려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당시의 영국 사회는 그런 명목상의 그리스도인들이 많았다. 그러나 이런 웨슬리의 입장은 이신칭의라는 전통적 용어에서 벗어나서 신앙과 회개에 의한 칭의를 말하는 것이므로 우리를 혼란에 빠뜨릴 우려가 있다. 물론 회개의 열매, 곧 성화가 구원의 일부이며 참된 신앙의 증거인 것은 맞다. 성경은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고 하며, 베드로도 여러 가지 덕목을 열거한 후에 이것들을 행한즉 그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주리라(벧후 1:5-11)고 한다. 또한 계시록에서 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주신 예수님의 말씀은 오직 이기는 자에게만 천국에 허락될 것임을 시사한다.

 

 바울도 계속적으로 범죄한 자들은 그 나라를 기업으로 받지 못할 것임을 말한다(엡5:5; 고전6:9-10; 갈5:21). 그러나 이것을 웨슬리처럼 다룬다면 열매인 성결이다. 심령과 삶의 실제적인 성화가 그리스도와 혼인예식에서 우리가 입을 옷이다. 웨슬리가 이런 입장을 취한 이유는 그리스도의 능동적 의(복종)의 전가가 영생의 유일한 근거라면 신자가 선을 행할 이유가 없어지므로 필연적으로 도덕무용론(율법폐기주의)로 기울 것을 성경적인 듯 하지만, 자칫하면 신앙과 행위에 의한 구원으로 비쳐질 우려가 있다. 물론 웨슬리는 오직 신앙으로 칭의되며 성화된다고 주장하였기에 결국에는 신앙으로 최종칭의 된다고 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기칭의 전에는 죄에 대한 철저한 확신으로서의 회개를 말했고,이후에 신앙으로 말미암는 완전성화 전에도 회개와 그 열매를 강조했으므로 결국은 신앙과 회개가 이중칭의의 조건인 셈이다.

 

 그렇다면 어떤 방식이 성경에서의 신앙에서 말미암는 선행을 강조하고 거룩을 강조하면서도 개신교 정통교리인 이신칭의를 살릴 수가 있는가? 그것은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수동적 의(대속)과 능동적 의(복종)가 둘 다 전가됨으로 의롭게 된다는 원리를 유지하되, 이 믿음이 지적인 동의와 감정적인 신뢰와 의지적인 복종을 포함하는 전인적인 것으로 정의하는 것이다. 우리를 칭의시키는 믿음은 예수를 우리의 제사장이요, 선지자요, 왕으로 영접하는 믿음임을 확실히 하는 것이다.참된 믿음은 예수님이 제사장으로서 우리 죄를 용서하심을 신뢰하는 것과, 선지자이신 그의 가르침을 지적으로 동의하는 것, 왕이신 그의 다스림에 의지로 복종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는 야고보는 예수님을 왕으로 영접하고 순종하는 믿음이 없이 제사장이신 예수님을 속죄에 대한 감정적인 신뢰와 예수님을 단순히 주님이라고 부르는 단순히 지적인 동의만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다고 주장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이렇게 인간의 심리적 요소와 그리스도의 삼중직을 연결하여 믿음을 정의한다면, 종교개혁 전통인 이신칭의를 유지하면서도 웨슬리가 말하는 이중칭의라는 다소 낯설고 위험스런 용어를 사용하지 않아도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선행과 거룩을 촉구할 수 있을 것이다.

 

     유창형 교수

 


출처 : 은혜동산 JESUS - KOREA
글쓴이 : 임마,누엘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