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왕국 학설에 대한 총평總評
이상 천년왕국을 둘러싸고 다투는 네 가지 학설과 그 이론의 맹점들을 살펴보았다. 이 가운데 그나마 가장 성경적인 것은 역사적 전천년설이었다. 그러나 역사적 전천년설도 곡과 마곡의 전쟁을 설명하지 못하는 치명적인 약점을 드러낸다. 학자들은 자신들이 주장하는 학설에 부분적인 과오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전체가 잘못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앞으로 되어질 일들을 말하는 묵시록의 해석이라는 점을 감안하다면 저들의 이러한 주장은 일견 타당성이 있어 보인다. 그러나 종말론의 부분적 과오가 성경 전체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한다면 부분적 과오를 합리화시키는 저들의 변명에 설득될 수는 없다는 것이 필자의 입장이다.
그렇다면, 이들의 학설이 이론적인 맹점을 드러내는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인가? 이들의 학설이 이론적인 맹점을 드러내는 근본적인 원인을 지적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 대표적인 것들의 개략을 살펴보면, 우선 이들이 주장하는 구원론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종말론은 구원론과 직결되어 있다. 구원론이 총론이라면 종말론은 각론으로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종말론에 문제가 있다면 필연적으로 구원론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방증하는 구조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의 구원론은 무엇이 문제일까?
1. 동행의 실질인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의 부재
먼저, 이들은 구원의 실질이 하나님과의 동행에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이들은 구원이 믿음에 달려 있다는 것을 이론적으로 알고 있지만 그 믿음의 실질이 히브리서 11장에 비추어 하나님과의 동행에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거짓신앙의 가장 큰 폐해이다. 지금 학자들이 주장하는 신앙생활은 학문적인 이론에 근거한 생활이지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활이 아니다. 생활은 논문으로 말하지 않는다. 누구의 생활이든 생활은 생활일 뿐이다. 인간이 먹고 싸는 것은 생활이다. 따라서 먹는 방법에 대해서 논문을 쓰지 않고 똥을 싸는 방법에 대해서 논문을 쓰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것이 생활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과의 동행도 생활이다. “아버지”하고 부르면 “왜 그러냐?”고 대답하는 생활이다. 그러나 지금 학자들은 이토록 평범한 일상의 생활인 신앙생활을 논문으로 쓰고 학설로 정립하여 이론적으로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정작 하나님과의 동행은 무엇인지를 모른다. 이런 상태에서 종말론을 논하는 것은 그 논점이 빗나갈 수밖에 없다. 문제의 핵심이 무엇인지 모르고 중심 주제를 논한다는 것은 궤변의 유희遊戱 외에는 건질 것이 없다.
종말론의 이론적 맹점이 드러나는 가장 결정적인 원인은 지금의 학자들이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가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다는 것에 있다. 한마디로 바울과 같은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경이 완성된 이후로는 하나님의 음성이 성경에 들어 있다.”는 우매한 주장의 진의는 그들이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고 알지 못한다는 것을 스스로 방증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필연적으로 계시로 배우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는 것이다.
2. 계시로 배우는 방법의 부재
“11 그러나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12 나는 그것을 사람에게서 받지도 않았고 배우지도 않았으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하여 된 것이라”(갈 1:11-12) [한글킹]
본문에서 바울 사도는 자신이 전한 복음은 사람으로부터 받지도 않았고 배우지도 않았다고 말한다. 그리고 다메섹 도상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난 후 그것을 혈과 육에 의논하지 아니하고 먼저 된 사도들에게 올라가지도 않았으며 다만 아라비아로 갔다가 3년 후에 돌아왔노라고 말한다.(갈 1:15-18, 각주참조) 바울이 전한 복음은 이론적인 성경공부를 통하여 습득된 복음이 아니라 계시를 통하여 배운 복음이다. 복음을 계시로 배우는 이 방법이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지금의 학자들은 계시를 통하여 배우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른다. 하나님과 소통을 하는 계시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근원적인 문제를 안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자들이 계시가 있어야 풀 수 있는 요한계시록을 인간의 생각으로 풀고 있기 때문에 그야말로 성경의 내용과는 전혀 일치하지 않는 소설을 쓰고 있는 것이다.
성경은 분명하게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늘의 신비를 알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마 13:11, 각주참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왜 요한계시록을 해석함에 있어서 이론적인 맹점을 풀지 못하고 허우적거리고 있을까? 이들이 말하는 복음을 바울이 전한 복음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바울은 비록 하늘에서 온 천사라 할지라도 자신이 전한 복음이 아닌 다른 복음을 전한다면 그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말한다.(갈 1:8, 각주참조) 저들이 만약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들고 있었다면 저들은 이미 구원을 얻었을 것이고,(고전 15:2, 각주참조) 또한 저들이 구원을 얻은 자들이라면 성경을 푸는 것에 있어서 인간의 생각으로 사사로이 풀지 않고(벧후 1:20, 각주참조) 계시를 통하여 성경을 해석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양들을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여 좋은 꼴을 먹였을 것인데, 저들은 자신들도 알지 못하는 수다한 이론을 만들어 그 올무 속에 자신들도 가두고 양들도 가두어 구원의 길에서 멀어지게 한 것이다. 귀 있는 자들은 성령의 외침을 들어야 할 것이다.
3. 그리스도의 심판의 재조명
학자들에게 치명적인 이론적 맹점은 인간의 생각으로 성경을 접근한 것에 그 본질적 원인이 있다는 것을 보았다. 이렇게 성경을 계시를 통해서 배우지 못하고 인간의 생각으로 접근하면 필연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등장하게 되는데, 종말론에서는 그리스도의 심판이 그것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심판은 그리스도의 심판과 백보좌 심판으로 이원화되어 있다. 그런데 지금의 학자들은 심판의 구조를 일원화시키고 있다. 즉, 최후 심판에서 그리스도가 심판을 한다고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심히 잘못된 것이다. 그리스도의 심판이 재조명되지 않으면 낙원과 음부, 천국과 지옥이 왜 나누어졌는지를 이해하지 못하여 십자가의 강도가 구원을 받았다고 말하게 된다. 그리고 곡과 마곡의 전쟁도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자세한 것은 중복을 피하기 위해서 이 책 10. 곡과 마곡의 전쟁과 11. 백보좌 심판, 11-3-1-1. 십자가의 강도가 구원을 받았는가 - 영생의 요건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4. 소결
학자들이 말하는 천년왕국에 관한 이론들은 모두 치명적인 결함을 안고 있다. 이 이론을 가지고 과연 영생을 얻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겠는가를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신앙생활이 어렵과 복잡하다면 배우지 못한 사람들은 어떻게 영생을 얻겠는가? 그 무식한 제자들은 어떻게 영생을 얻었는가? 이들의 이론을 가지고는 바울이 전한 복음을 회복할 수 없다. 지금 저들은 구원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독자들은 이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학자들과 그 이론을 답습한 지금의 목사들은 성경과는 상관없는 수다한 인간의 생각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래서 학자들이 “자신들이 주장하는 학설에 부분적인 과오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전체가 잘못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고 말하면서 다른 부분에서는 진리를 말하고 있다는 옹색한 변명에 설득당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회복시리즈 09. 성경적 종말 中 일부 발췌 / 박찬빈 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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