깐깐했던 기독교 초창기 세례 심사… 변호사도 탈락 [2018-02-06 00:03]
111년 전 새문안교회 당회록으로 본 세례식
▲1907년 서울 새문안교회에서 작성된 당회 회의록의 일부. 회의록에는 당회가
심사한 6명의 세례 준비자에 대한 신상명세와 신앙 상황 등이 기록돼 있다.
당회가 세례를 허락한 교인은 맨 윗줄에 있는 한남이(13)가 유일하다.
옥성득 교수 제공
19세기 말, 한국교회 초창기로 꼽히던 당시 세례를 받는다는 건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하는 것만큼 어려웠습니다. 사실 목숨을 걸어야 할 정도로 위험하기도 했죠. 1886년 7월 16일, 노춘경은 호레이스 언더우드 선교사의 사랑방에서 선교사들이 보초를 서는 가운데 이 땅에서 처음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듬해 1월 23일 서경조 정공빈 최명오는 언더우드를 만나 “왕이 목을 쳐도 좋소”라는 청원 끝에 세례를 받습니다. 갑신정변 이후 중국 상하이로 망명을 떠난 윤치호가 1887년 3월 10일 세례를 받고 쓴 일기도 유명합니다.
“10시에 삼가 세례를 받다. 이날 하늘은 맑고 날씨는 따뜻한데 바람도 잔잔하고 구름도 걷히어 근일에 제일 좋은 날씨이다. 이날부터 나는 삼가 주님을 받들 것을 맹세했으니 가히 일생에서 제일 큰 날이라 하겠다.”
세례가 지녔던 무게감은 상상 이상이었습니다. 1890년대 장로교회는 개인의 유익을 위해 교회에 나오는, 이른바 ‘쌀 신자’를 막기 위해 복음서와 기본 교리, 교회생활 안내서로 예비 세례자를 교육하는 ‘학습 제도’를 운영합니다. 존 리빙스턴 네비우스 선교사가 쓰고 사무엘 마펫 선교사가 번역한 ‘위원입교인규조’가 교재였습니다. 외워야 할 것도 많고 무엇보다 전도를 강조했기 때문에 한두 차례 고배를 마시는 건 예사였습니다.
이 같은 내용은 옥성득 미국 UCLA 한국기독교학 부교수가 자신의 블로그에 포스팅하면서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특히 지금으로부터 111년 전인 1907년 작성된 서울 새문안교회 당회록에는 세례에 대한 당시 분위기가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한남이(13)는 3년째 신자로 ‘잘 믿고 행위도 있어’ 두 번째 문답을 통과하고 세례를 받습니다. 반면 변호사였던 김광현(52)은 ‘아는 것이 부족하나 행위는 있다’는 평가를 받고 세례 대신 학습반에 입학해 공부를 더 하고 오라는 결정을 합니다.
옥 교수는 “초기 기독교 사회에서 세례를 받는다는 건 인생을 고스란히 하나님 앞에 바친다는 의미였다”고 했습니다. 그는 요즘처럼 세례받는 일이 쉬워진 데 대해 ‘교세의 폭발적 증가’에서 원인을 찾습니다. 다른 교회로 옮겨 다니는 신자들의 수평 이동이 늘면서 굳이 신앙생활의 기초를 가르칠 필요가 줄어들었다는 것이죠. 어려운 학습 대신 ‘등록 안내’만 하면 됐던 겁니다.
초신자들과 수평 이동 신자들이 함께 등록을 위한 안내를 받는 일이 교회 현장에서 실제 일어나는 것도 사실입니다. 한번 쉬워진 세례의 문턱이 다시 높아지는 건 어렵습니다. ‘값싼’ 세례가 만연하고 있는 셈이죠. 옥 교수의 당부가 귓가를 맴돕니다.
“한국교회가 건강성을 회복하는 길은 제대로 된 신자를 기르는 겁니다. 초기 한국기독교의 모습을 되찾으면 됩니다. 그것이 지름길입니다.” 그런 면에서 한국교회에 필요한 건 미래전략서가 아니라 우리가 걸어온 역사책이 아닐까요.
장창일 기자
[출처]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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