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백의 기법
리바운드의 기법(Rebound Technique)
농구 경기에서 승리하려면 슛과 리바운드를 잘 해야 합니다. 공이 슛하는 선수의 손을 떠나 골대를 향해 멋진 아취 모양을 그리며 날아가서 골대 속으로 들어갈 때 점수를 얻게 됩니다. 그러나 슛을 성공시키지 못했을 때 그 공은 리바운드 됩니다. 리바운드는 골대 주위나 농구대의 백보드에 맞아 퉁겨져 떨어지는 공을 다시 살리게 합니다. 이 리바운드가 슛할 수 있는 기회를 다시 살려 득점에 연결하게 하고 결국에는 승리로 이끄는 기회를 살립니다.
영적 생활에 있어서도 모든 신자들은 하나님 말씀대로 바로 살지지 못하기도 하며 죄를 범하곤 합니다. 그러나 농구와 마찬가지로 기독교인의 삶이라는 경기도 교인이 죄를 범했을 때 그 경기가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자가 죄를 범했을 때 리바운드 하는 방법, 즉 성령 충만의 회복과, 하나님과의 교제 회복으로 영적인 삶을 향해 계속 전진해 나아갈 수 있는 방법을 은혜롭게 제공하십니다. 리바운드 (하나님 아버지께 지은 죄를 자백하는 것: 요한1서 1:9)는 신자로 하여금 기독교인의 삶에서 승자가 될 수 있는 무한한 기회를 제공합니다.
만약에 농구 경기에서 슛한 모든 공이 골대 안으로 들어가 득점하면 리바운드는 필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완벽한 선수는 없습니다. 기독교인이 절대로 죄를 범하지 않는다면 리바운드 기법은 필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완전한 기독교인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죄를 범합니다.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요한일서 1:8).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요한일서 1:10)
리바운드 !
리바운드는 오직 신자들만을 위한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아직까지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구세주로 믿지 않았다면 리바운드는 (죄를 자백하는 것)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homologeo-있는 사실을 진술하다]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취소하다]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정화하다] 것이요. (요한일서 1:9)
"만일"이라는 말은 헬라어에서 제 3 조건절로 쓰였습니다. 이 조건을 충족시키는가 시키지 않는 가는 우리의 의지에 달려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리바운드를 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어느 쪽이든 선택해야만 합니다.
자백하다로 번역되어 있는 헬라어의 ὁμολογέω Homologeo 는 "이름을 대다, 시인하다, 인정하다, 자인하다"라는 뜻입니다. 이 동사는 주로 "법정에서 범죄를 자백할 때, 법정 진술을 할 때"와 같이 재판 상황에서 사용되었습니다. 요한 일서 1:9에 사용된 그 단어도 예외는 아닙니다. Homologeo라는 말의 뜻은 하나님께 죄를 시인하거나 우리가 범한 죄의 이름을 대는 것을 의미합니다. Homologeo는 죄에 대해 후회하거나, 공개적으로 여러 사람 앞에서 죄를 말하거나 양심의 가책을 받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말 안에는 감정적인 의미가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천국의 대법정 앞에서 여러분의 죄에 대해 여러분이 어떻게 느끼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완전하게 치르신 죄 값에 인간의 어떠한 공로나 감정도 더해질 수는 없습니다. 자백할 때 진정한 양심의 가책이 동반된다 할지라도 그런 것들은 하나님의 용서하심에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단지 하나님께 범한 죄를 말하는 것만이 필요합니다.
자책이나 참회를 강요하는 자백은 불경스러우며 하나님의 은혜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죄 사함을 받기 위해 감정적인 호소를 보탬으로 하나님을 절대로 모욕하지 마십시오. 요한일서 1:9에 "만일 우리가 죄 사함을 받기 위해 간청하거나 애걸하면" 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저 여러분의 죄를 시인하십시오. (범한 죄를 그대로 말하십시오).
성경에는 정결 의식에 대한 요구나 또는 신부나, 목사 그 외에 다른 성직자에게 반복하여 암송하는 기도를 해야 하는 요구도 없습니다. 구원받는 순간 우리는 기도할 때나 자백할 때 하나님께 우리 자신들을 직접 나타내는 특권을 가진 왕 같은 제사장(왕족 제사장)이 됩니다 (베드로전서 5:5,9). 자백할 때 우리의 죄는 우리 자신의 문제이지 다른 누구도 상관할 바가 아니므로 하나님 아버지께 개인적으로 은밀히 고해야만 됩니다. 성부 하나님 한 분만이 그 죄들을 용서하실 수 있습니다.
죄를 자백할 때 (리바운드할 때) 공개적으로 여러 사람 앞에 하는 것은 쓸데없는 짓일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정신적 태도의 죄 (마음의 죄)를 야기시킬 수도 있습니다. 과오를 공개적으로 고백하는 경우 피해자의 상처를 다시 건드리게 되며, 전에 관련이 없었던 사람들도 끌어들이게 되거나 또는 어떤 흉악하며 충격적인 죄를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는 것과 같은 매우 해로운 결과가 일어납니다.
이스라엘 왕 다윗은 오랜 기간에 걸쳐 참담한 결과를 낳는 끔직한 죄를 범했습니다. 그로 인해 비록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았지만 다윗은 하나님 한 분께 죄를 자백했습니다. "내가 주께만 범죄 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시편 51:4전반).
상처를 준 사람에게 사과하는 것은 언제나 올바른 일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과의 조화로운 관계를 복원하고자 하는 진정한 바램이 동기가 되어야지 죄책감을 덜기 위한 것이어서는 안됩니다. 사과할 때는 반드시 리바운드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교제를 회복한 후에 그 당사자에게 개인적으로 하십시오. 하나님의 용서는 오로지 하나님의 완전하신 특성에 근거하십니다.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미쁘심"은 죄를 자백하는 모든 신자들을 용서하시되 변함없이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일관성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약속을 이행하시는 데 게을리 하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절대로 그르치는 법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반복되는 리바운드에 결코 싫증을 내시지 않습니다. 그리고 절대로 '이번에는 용서받을 자격이 없다'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결코 용서받을 만한 자격을 갖춘 적이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항상 용서하십니다!
"의로우심"이란 용서의 근원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 또는 완전하신 의로우심은 의와 공의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완전하신 의로우심만이 하나님의 공의가 받아들일 수 있는 기준입니다. 하나님의 의와 공의는 타협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 참회[1]나 죄책감, 감정적인 대응 또는 이 이외의 인간의 행함 들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오직 십자가에서의 성자 하나님의, 예수 그리스도, 구원의 사역만이 성부 하나님의 완전하신 의로움을 만족시킬 수 있습니다.
[1] 참회란 뜻을 영영 사전에서는 잘 못한 것에 대해 매우 미안해하고 그 행위를 후회한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은혜와 관련이 없는 인간의 행함이 강조 된다. Someone who is penitent is very sorry for something wrong that they have done, and regrets their actions.
다음의 두 동사 "용서하시다" 와 "깨끗게 하시다"는 리바운드의 결과를 묘사하는 것입니다. 희랍어 동사 ἀφίημι aphiemi는 "용서하다, 도말 하다" 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죄를 하나님께 고하는 즉시 하나님께서는 그 죄들과 교제에서 벗어남으로 받게 되는 초기의 징계를 제거해 주십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징계가 여전히 남아있다면 그것은 징계로 인한 고통에서 축복을 위한 고통으로 바뀐 것입니다. 이제 성령 충만해진 (Filled with the Holy Spirit) 신자는 성경 말씀을 그의 고통에 적용하여 영적 성숙을 향하여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범한 죄를 잊어버렸거나 잘못된 것인지 모르고 범한 죄는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께서는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게 해주십니다. 희랍어 동사 καθαρίζω katharizo는 "깨끗하게 하다, 정화시킬 목적으로 제거하다 즉 정화시키다"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모든 죄에 적용됩니다. 아는 죄를 범할 때는 대개 모르고 있는 죄도 수반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죄를 고할 때 하나님께서는 모르고 범한 죄와 기억나지 않는 죄를 포함한 '모든' 불의로부터 우리를 용서하시며 깨끗하게 해 주십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누가복음 15:11-32)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놀라운 용서를 설명하십니다. 이 이야기는 세 등장 인물의 행동을 테마로 삼고 있습니다. 즉 아버지, 큰아들, 그리고 작은아들 입니다. 작은아들은 끊임없이 죄를 짓고 세상의 온갖 정욕에 빠져 있는 (육적인 상태의) 신자를 상징합니다. 그 작은아들이 지은 죄들은 성부 하나님을 의미하는 그의 부친과의 교제를 끊어 놓습니다. 탕자는 자기 몫의 유산을 챙겨 집을 떠나 먼 나라로 갑니다. 그의 계속된 방탕과 무절제는 그의 삶을 파멸시킵니다 - 육적인 상태의 결과들입니다. 그는 돼지들과 함께 생활하는 거지가 됩니다. 그가 가진 전 재산을 날리고서야 그가 얼마나 처절하게 파멸되었는지를 깨닫고 아버지께 돌아가려고 결심합니다.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누가복음 15:18).
이것은 작은 아들의 리바운드 (자백) 기도입니다만 다음에 이어지는 말은 용서에 대해 그가 잘못 이해하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누가복음15:19).
탕자는 그가 제멋대로 행한 타락 때문에 그의 아버지가 자기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으며 아들로 여기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는 자기 희생이나 죄책감으로 자기의 죄를 참회하면 그의 아버지가 그를 용서해 주고자 하는 마음이 더 생길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틀렸습니다. 용서는 그의 아버지의 성품에 근거합니다. 기독교인들도 자주 하나님의 용서하심에 대해 똑같은 실수를 합니다.
탕자가 집에 돌아왔을 때 그는 아버지의 사랑과 측은히 여겨 주심과 용서에 깜짝 놀랐습니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리라.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누가복음 15:20).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기 위해 어떻게 하시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전지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범하게 될 모든 죄를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또한 우리의 모든 자백을 예상하고 계십니다. 예수께서 우리가 범한 죄에 대한 값을 지불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와 공의는 우리에게 용서를 보증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치르신 그 죄 값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은 자유롭게 그의 사랑을 우리에게 부어주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자백할 때 우리를 불쌍히 여기실 것을 보증하십니다.
우리가 죄를 하나님께 고할 때 하나님께서는 마치 탕자의 아버지와 같이 달려오셔서 두 팔로 안아 주시며 입맞춤으로 돌아 온 것을 환영해 주십니다. 용서받은 죄들은 더 이상 우리와 하나님과의 교제 관계에 영향을 끼치지 못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따금씩 율법주의적인 경향이 있는 사람들은 리바운드가 죄를 지어도 되는 면허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언짢해 합니다. 죄를 범한 신자들 가운데 일부는 리바운드 기법을 정확하게 그 목적에 맞게 사용할 것입니다. 하지만 리바운드(자백)는 신자로 하여금 영적인 삶을 살며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위치로 되돌려 놓는 것이지 죄를 변명하고 합리화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성령 충만을 통해서만이 오는 하나님의 능력을 떠나서는 어느 신자도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을 수 없습니다. 리바운드 (자백) 만이 죄로 말미암아 벗어난 하나님과의 교제를 회복하고 성령 충만을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자백 후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자백한 죄를 끊어버려라.
죄를 하나님께 자백한 후에는 다음 세 단계를 밟아야만 합니다: 자백한 죄는 단절하고 잊어버려야 하며 그리고 계속해서 영적인 삶을 향해 나아가야만 합니다. 이 단계를 밟는 것이 죄의 연결 고리를 통하여 계속되는 육적인 상태를 막아줍니다.
너희는 돌아보아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또 쓴[악독한, 모진, 증오에 찬]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배설물을 뒤집어쓸까] 두려워하고 (히브리서 12:15).
땅으로부터 영양소를 흡수해 식물에 공급하는 뿌리는 식물의 근간이며 바탕입니다. 혼 안에 "증오가 가득함, 악독과 모진 것"이 뿌리내려 있으면 파괴적인 죄 -마음으로, 말로 그리고 드러나는 행동에 의한 죄-의 연결 고리가 싹틉니다. 증오에 참, 악독과 모진 것은 분노와 증오와 앙심을 무르익게 하고 험담과 중상모략, 폭행 또는 심지어 살인까지도 저지르게 될 당연한 근거로 발전하게 합니다. 하지만 과거의 불평 거리나 용서받은 죄를 기억해 내어 또 다른 죄를 초래하도록 방치해서는 안됩니다. 연쇄적으로 반응하는 죄의 연결 고리를 끊어 버리기 위해 과거의 죄는 현재로부터 단절되어야만 합니다.
자백한 죄는 잊어버리고 계속 전진하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도달하려고, 계속 전진] (빌립보서 3:13)
구원받기 전에 다메섹 도상의 사도 바울은 기독교인들을 전멸시키기 위한 독선적인 (self-righteous: 자ㅅ신의 의로움) 운동으로 악명 높았습니다 (빌립보서 3:16). 하나님께서는 바울의 흉악한 죄를 용서해주셨을지라도 그 죄책감에 대한 기억이 바울의 영적인 삶을 절름발이로 만들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과거에 범한 죄를 단절하고 잊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영적 성숙을 향한 현재의 목표에 집중하였습니다.
일단 한번 자백한 죄는 하나님께서 잊으신 것처럼 우리도 잊어버려야만 합니다.(시편 103:12, 이사야 43:25). 어떤 사람이 우리를 화나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증오에 차서 (악에 차서) 화를 내고는 하나님께 그 죄를 자백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죄를 용서하시고 잊어버리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것을 잊어버리지 못하면 그 죄는 우리로 하여금 증오심이 쌓이게 하고 복수심에 목마르게 할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의 (정신적으로 범하는 죄) 죄는 우리가 그 죄를 자백하고 단절하지 않으면 말이나 행동으로 드러나는 죄에 즉시 불을 댕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하기 때문에 자백 이후에는 그 죄를 원래 속해 있던 과거에 내버려두어야만 합니다. 그리해야만 기독인의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영적 성숙을 향하여 자유롭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계속 전진]. (빌립보서 3:14).
자기 점검을 할 것인가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것인가?
우리가 죄를 범할 때마다 그 죄로 인한 징계에 대해 책임이 있습니다.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히브리서 12:6).
우리의 선택은 자기 점검을 하든지 하나님의 징계를 받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리바운드 (죄의 자백)를 게을리 하는 것이 신자로 하여금 하나님의 징계 아래 놓이게 합니다. 사도 바울은 성찬식에 관한 구절 (고린도전서 11:28-32)에서 특별히 고린도 교인들에게 이 원칙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기 전에 신자들은 반드시 자신을 "살펴보아야만" 또는 "판단"해야 합니다. 이는 죄를 자백해야 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리바운드를 하고: 죄를 자백하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고린도전서 11:28).
모든 신자는 성찬식에서 떡과 잔을 먹고 마실 권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자백하지 않은 죄를 간직한 채로 그 떡과 잔을 결코 먹고 마셔서는 안 된다고 모든 신자에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주의 몸을 분변 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하나님의 징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고린도전서 11:29)
이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경고의 징계]와 병든 자[강한 징계]가 많고 잠자는 자[죽음에 이르는 징계]도 적지 아니하니 (고린도전서 11:30).
우리가 살폈으면[리바운드를 했으면] 판단 [하나님의 징계]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고린도전서 11:31).
But if we judged ourselves rightly, we would not be judged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죄 정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고린도전서 11:32).
고린도전서 11장31절의 "만일"은 가정법의 제 2 조건절로 고린도 교인들이 자기 점검을 했었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음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 결과로 하나님의 징계가 그 회중들에게 철퇴를 가하셨습니다. 세가지 범주의 징계가 영적으로 만성적인 질병에 시달리는 육적인 고린도 교인들에게 일어났습니다 (고린도전서 11:30).
1. "약함" - 이것은 실제로 육체에 어떤 질병이 걸렸다는 것이 아닙니다. 기운이 없고 살아가는 원동력과 동기의 상실 그리고 의기 소침함이 이 범주에 포함됩니다. 이것은 신자로 하여금 리바운드 하도록 격려하기 위하여 경고하는 징계입니다.
2. "병듦" - 분명한 신체적 질병을 말하는 것이며 심지어는 환자가 되는 지경까지를 포함합니다. 이 강한 징계는 반항적인 신자로 하여금 육적인 상태에서 벗어나도록 충격을 주기 위하여 고안되었습니다.
3. "잠" - 헬라어 단어인 koimao는 오직 신자들의 육체적인 죽음을 비유적으로 나타낼 때만 사용되었습니다(데살로니가전서 4:14). 만일 신자가 고집스럽게 육적인 상태에 머물러 있다면 주님께서는 죽음에 이르는 징계 또는 "사망에 이르는 죄"로 인해 그의 생명을 조기에 거두어 가실 수 있습니다
(요한일서 5:16 전반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대안은 자기점검 (리바운드)입니다. 지은 죄를 자백하여 (리바운드) 하나님과의 교제를 회복하고 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유익함을 위하여 다음 세 가지 중 한가지를 행하십니다.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모든 징계의 고통을 제거하십니다 (고린도전서 11:31).
둘째로, 징계의 고통은 줄어들며 축복으로 바뀔 것입니다.
셋째로 징계의 고통이 같은 강도로 지속될지라도 그 고통은 더 큰 축복을 위하여 계획되어 있습니다.
신자가 교제밖에 오래 머물러 있을수록 징계는 더욱 더 심해집니다. 오랜 기간에 걸친 육적인 상태는 매우 강한 징계를 불러오기에 어떤 신자는 그들이 결코 구원받지 못했다고 믿게 됩니다. 이런 신자는 그의 삶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과 관련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됩니다. 이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은 요한일서 1장 9절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지은 죄를 자백하고 계속 전진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영적 전진을 위한 리바운드 (죄의 자백)
신자가 오랜 기간에 걸쳐 리바운드를 하지 않고 산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탕자의 삶을 보십시오! 신약에 기록되어 있는 탕자와 같이 구약 시대의 신자의 삶에서도 죄 범하고 징계 받고, 자백하고, 하나님과의 교제를 회복하고 그리고 축복 받는 전형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여 (히브리서 12:1)
허다한 "구름같이 둘러싼 증인들"이란 히브리서 11장에 언급되어 있는 명예의 전당에 이름이 올라 있는 구약의 두드러진 영적 영웅들을 말합니다. 그들은 완전하지 않았으며 '우리보다 더 성스러운' 사람들도 아니었고 또한 죄가 없는 무구한 사람들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죄를 범했을 때 리바운드 함으로써 하나님의 은혜를 이용하였습니다. 우리 역시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려야"만 합니다. 구약 시대의 영웅들은 영적 전진을 위해서는 리바운드가 필요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추신:
죄의 자백 (요한 1서 1장 9절 말씀에 의한)의 기법이 하나님께서 신자들을 위하여 마련해 두신 은혜로운 장치인 것입니다. 자백의 법칙을 제대로 활용할 수 있는 것이 큰 축복입니다.
말씀을 배우기 전에, 예배 드리기 전에, 봉사활동 등을 하기 전에 반드시 하나님과 교제 상태에서 해야 한다는 중요성을 인식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께 지은 죄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즉 지은 죄목들을 낱낱이 열거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신실하시며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마련해 두신 은혜입니다.
영적인 삶이란 영적인 상태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가운데 다시 말해서 성령으로 충만한 가운데 - 내 능력이나 힘이 아닌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시는 힘과 능력으로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겸손 되게 하나님의 뜻을 각자의 삶 속에 이루어 나가는 것입니다. 흔히 영적인 삶을 잘못 인식하여 사람의 능력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노력하려는 분들이 주변에 많이 있습니다. 이런 행동이 사람의 관점에서 볼 때 지극히 기독교적인 것처럼 보일지라도 하나님과 교제함이 없이, 성령 충만한 상태에서 이루어 지지 않은 모든 일은 주님께서 말씀하셨듯이 '나는 너를 모른다'고 하실 것입니다. 언제나 영적인 상태 즉 성령 충만한 상태,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상태에서 행해 져야만 합니다.
기독교인의 행함은 하나님께 향한 사랑의 결과이어야 합니다 (호혜적인 사랑의 동기). 사랑을 더 받기 위하여 무엇을 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잘 모르는 무지의 소치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처음부터 완벽하십니다. 우리의 그 무엇에 따라 사랑의 증감이 없습니다. 만약 그런 사랑을 하신다면 불변의 사랑이 아니며 신실한 사랑이 될 수 없고 미덕의 사랑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본을 보여 주셨듯이 기도의 대상은 언제나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언제나 성령님과 교제하는 상태에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를 마무리해야 합니다.
함께 공유하고자 하는 이 말씀의 source 는 Bob Thieme 목사님과 Max Klein 선교사님의 저서와 말씀에 근거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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