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내가 죽어야만 사시는 분이 아닙니다.
이 번 칼럼을 시작으로 앞으로 몇 편의 칼럼을 통하여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성령님>에 대하여,특별히 신자 안에서 성령께서 어떻게 역사하시고 어떤 일을 이루시는지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 중에서 가장 많은 오해와 홀대를 받고 계신 분은 바로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오순절주의자(방언과 치유, 기적의 은사를 좇는 자들)나 은사주의자들은 성령께서 하셨다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증거가 없는 예언, 방언 등을 성령께서 주셨다고 말하면서 성령님을 모독하고 그 이름을 더럽히고 있습니다.
입에 거품을 물고 밤낮 성령충만을 위해 부르짖는 사람들로부터 성령님이 주셨다고 말하기 어려운 예언과 방언을 성령이 주셨다고 주장하는 사람들까지 수많은 사람들을 통해 성령님은 오해와 모독을 받으십니다.
그것이 지난 칼럼에서 지적했던 ”내가 죽어야 예수가 산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저지르고 있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성령님의 영감으로 기록하신 성경을 이차적인 것으로 보고 신비로운 경험, 감정, 평안함, 느낌, 확신 등을 추구하는 것으로,
심지어 성령께서 기록하신 말씀의 참 뜻을 무시하면서까지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주장하는 무서운 죄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이것은 성령님에 대한 커다란 오해이며 성령님을 심각하게 모독하는 것입니다.
“내가 죽어야 예수가 산다”고 외치는 사람들이 성령님에 대하여 갖는 또 다른 오해가 있습니다.
첫 번째 칼럼에서 제기하였던 것처럼,그들은 마치 내가 내 생각, 계획을 포기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분이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들은 성령님께서 나 자신이 나의 계획과 생각을 내려놓을 때까지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혹은 할 수 없는 분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맞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 요 15:5
그러나 반대로, 성령 하나님은 우리 없이는 아무것도 하실 수 없는 분이실까요?
우리의 생각, 지혜를 내려놓을 때까지는 우리 삶 가운데 역사하시지 않는 분이실까요? 그렇게 하실 수 없는 분이실까요?
‘내가 죽어야만 예수께서 산다’고 하는 가르침은 우리로 하여금 내가 무언가를 하기 전까지는 성령님은 아무것도 못하시는 무능력한 분이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이렇게 무능력한 분이라고 가르치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한 번 살펴봅시다.
모세와 아론이 이 모든 기적을 바로 앞에서 행하였으나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으므로
그가 이스라엘 자손을 그 나라에서 보내지 아니하였더라 (출 11:10)
하나님은 바로가 회개하고 하나님 뜻에 순종하기를 기다리셨으나 바로가 의지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어쩔 수 없이 바로와 그의 나라에 재앙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바로가 완악한 마음을 갖도록 내버려두심으로 바로가 하나님 뜻을 거스르고 이스라엘 백성을 보내지 않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의지적으로 능동적으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놔두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바로의 완악함을 계획하셨으며 거기에 특별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내가 아노니 강한 손으로 치기 전에는 애굽 왕이 너희가 가도록 허락하지 아니하다가 내가 내 손을 들어 애굽 중에 여러 가지 이적으로 그 나라를 친 후에야 그가 너를 보내리라 (출 3:19-20)
내가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고 내 표징과 내 이적을 애굽땅에서 많이 행할 것이나 바로가 너희의 말을 듣지 아니할 터인즉 내가 내 손을 애굽에 뻗쳐 여러 큰 심판을 내리고 내 군대,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낼지라
내가 내 손을 애굽 위에 펴서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낼 때에야 애굽 사람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출 7:3-5)
애굽 사람들과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신 이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신 줄 알게 하기 위해 하나님은 의지적으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내버려 두신 것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바로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회개할 수 있게 도와주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어떻게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내버려 두실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직접 하신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출 33:19)
하나님은 우리의 자유의지에 의해 좌지우지 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절대 주권을 완벽하게 사용하시는 분이십니다.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 땅에 떨어지지 않습니다.욥에게 일어난 모든 재앙은 사단이 한 것이지만 사단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강력한 주권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이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 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 (롬 9:14-18)
신자의 구원도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에 의하여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로마서 8장 29-30절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베드로는 소아시아 성도들을 이렇게 부릅니다 (벧전 1:2).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여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행 13:48)
우리가 주님을 영접하기 위해 마음의 문을 열 때까지 하나님은 아무것도 못하고 가만히 계신 분이 아니십니다 때로 복음을 전하면서 우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구원하시기 위해 모든 것을 다 하셨고 이제 당신이 그 선물을 받기만 하면 됩니다. 아무리 좋은 선물도 그 사람이 받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당신이 받지 않으면 이 구원의 선물도 아무 소용이 없어집니다.”
왜 이렇게 말하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죽어가는 영혼을 안타깝게 바라보고 구원의 복된 소식을 받아들이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에 이렇게 말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그 영혼을 구원하시기로 하셨다면, 하나님은 반드시 그렇게 하시는 분이십니다.그 영혼을 구원하시기로 하셨지만 당사자가 믿지 않아서 어쩔 줄 몰라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왜 내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니? 나는 너를 구원하기를 정말로 원하는데? 너만 허락한다면 나는 네 안에 들어가서 너와 영원히 동행하고 싶은데 왜 허락하지 않니? 네가 허락하지 않으면 난 아무것도 못한단다…
하나님은 절대로 이런 분이 아니십니다.
구원 받기로 태초 전에 이미 예정하신 분도 하나님이시며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셔서 구원의 복음을 듣게 하시는 이도 하나님이시며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을 허락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며 거듭나게 하시고 거룩한 삶을 살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며 마지막 날에 영화롭게 만드실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엡 2:8-9)
그러므로 모든 신자는 하나님께 찬송과 감사를 드릴 수 밖에 없습니다. 사도바울처럼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고전 15:10)
라고 우리는 찬송과 경배와 영광과 존귀를 하나님께 돌려 드릴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시작하지 않으셨다면 하나님께서 의지적으로 능동적으로 내 삶 가운데 역사하지 않으셨다면 내 마음의 눈을 열게 하셔서 복음의 진리를 깨닫게 하지 않으셨다면 지금의 나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신자의 구원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가 절대로 간과할 수 없으며 무시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에 의해 정하신 것이요 하나님께서 이루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영혼들 옆에서 하나님이 제시한 구원 복음 서류에 그들이 사인하기를 기다리시다가 그들이 사인하면 그들을 구원할 수 있는 분이 아니십니다 사람들의 허락과 승인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분이 아니시란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은 의지적이고 능동적으로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이 여기시고 완악하게 하실 자를 완악하게 하시는 절대 주권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왜 어떤 사람에겐 긍휼을 베푸시고 어떤 사람은 완악하게 하십니까? 공평하지 않은 것 아닙니까? 라고 물으실지도 모릅니다.
사도바울은 이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냐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냐 하리니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 (롬 9:19-23)
인간으로서 갖을 수 있는 가장 최악의 환경을 가졌던 욥, 자식들이 한 순간에 죽고 동시에 모든 재산을 잃고 극심한 육체적 고통을 겪었던 욥, 그는 자신이 겪는 고난의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런 욥에게 하나님은 미안하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왜 그런 고난을 주셨다고 말씀하시지도 않으셨습니다. 욥기 38장부터 40장까지 하나님은 계속해서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하나님의 뜻과 섭리에 대하여 질문을 하셨습니다.
트집 잡는 자가 전능자와 다투겠느냐 하나님을 탓하는 자는 대답할지니라 (40:2)
네가 공의를 부인하려느냐 네 의를 세우려고 나를 악하다 하겠느냐 네가 하나님처럼 능력이 있느냐 하나님처럼 천둥 소리를 내겠느냐 너는 위엄과 존귀로 단장하며 영광과 영화를 입을 지니라 너의 넘치는 노를 비우고 교만한 자를 발견하여 모두 낮추되 모든 교만한 자를 발견하여 낮아지게 하며 악인을 그들의 처소에서 짓밟을지니라 그들을 함께 진토에 묻고 그들의 얼굴을 싸서 은밀한 곳에 둘지니라그리하면 네 오른손이 너를 구원할 수 있다고 내가 인정하리라 (40:10-14)
자신의 삶에 닥친 여러 가지 환경에 부당함을 호소하는 욥에게 하나님께서는 “네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항하느냐?”고 되물으신 것입니다. 쉴새 없이 하나님은 계속해서 인간의 지혜로 닿을 수 없는 창조주와 전능자만 알 수 있는 것들에 대하여 욥에게 물으셨고 욥은 결국 이렇게 대답합니다.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 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욥 42:2-3)
그 누구도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의문을 제기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뜻대로 모든 것을 이루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말씀에 기록하신대로 당신의 선하심과 인자하심, 공의와 정의를 따라
모든 것을 결정하시고 역사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자의 구원을 시작하시고 이루어 내실 뿐만 아니라 구원 이후에 성화과정과 영화롭게 변화되는 때까지 의지적이고 적극적으로 그 절대적 주권을 사용하십니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빌 1:6)
신자가 거듭나는 것과 거룩하게 변화되어가는 성화의 과정은 이처럼 하나님의 강력하신 역사하심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참 기쁘고 즐거운 것입니다.
그가 시작하신 그것을 그가 이루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님을 보내시고 예수님이 죽고 부활하시게 하시고 복음을 이루신 뒤,이제는 우리가 그것을 받아들이고 우리가 그것에 순종하게 살라고 우리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하지 않으셨습니다.
복음을 듣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받아들이게 하시며 우리로 하여금 거듭나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시며 신자로서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갈 때 그 거룩함을 이루어가는 일을 완성하실 이도 하나님이시며 그 믿음의 결국, 영혼의 구원을 이루는 영화로움도 하나님이 하십니다.
이 얼마나 위로가 되며 얼마나 힘이 되며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그래서 베드로는 이 사실에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한 것이라.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 (벧전 1:3-5)
하나님은 “내가 죽어야만” 사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내가 나의 옛 자아를 죽일 수 있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의 영광을 위해 살도록 도우시는 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내가 죽어야만” 살아서 역사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내 옛 자아를 죽이고 그리스도를 위해 살게 하시기 위해 내 안에서 강력하게 역사하시는 성령을 주신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성령께서는 어떤 모습으로 신자 안에서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도록 돕고 계실까요?
성령께서 어떻게 우리 안에서 강력하게 돕고 계시며 역사하시는지 깨달을 때에 우리는 더 힘있게 성화의 길을 걸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신 약속된 성령에 대해서 다음 칼럼을 통해 이야기 해보기를 원합니다.(오늘 칼럼에서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하여 강조하여 말씀을 드렸습니다.‘내가 죽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간과하는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사람의 역할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성령님에 대한 이야기를 마치고 신자의 성화 가운데 우리에게 맡겨진 역할 부분을 다루면서 말씀 드리기를 원합니다)
보혜사
예수님은 성령님을 “보혜사”라고 부르셨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요 14:16)
“보혜사”라는 말은 영어로 Helper로 번역되었습니다 (NIV, NASB, ESV).헬라어로는 “파라클레토스”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는데 신약성경에 5번 모두 성령님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요 14:16, 26; 15:26; 16:7; 요일 2:1 – 요일 2:1절만 예수님을 가리킴).
이 단어의 원래 의미는 ”어떤 사람을 돕기 위해 부름 받은 사람” 입니다. ”모사(Counselor),” “돕는 자,” “지지자,” “대언자,” 등 여러 가지 표현으로 해석 될 수 있습니다.
한 가지 특별한 것은 예수님께서 여기에 ”또 다른 보혜사 (“another Counselor” 혹은 “another Helper”)”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는 성령님 외에 기존에 다른 보혜사가 있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본문은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말씀해 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제 곧 십자가에 달리실 것을 아시고 제자들을 떠날 것을 말씀하시면서
내가 떠나도 “근심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 14:1).
예수님은 제자들을 돕는 분이셨습니다. 그들의 영적 육적 필요를 돌아보시는 분이셨습니다. 그들을 지지해주고 지원해주시는 분이셨습니다. 그들에게 진리를 말씀해주시고 그 길을 인도하시는 분이셨습니다. 제자들을 지지하고 지켜주시며 보호하시고 대언해주시며 중보하시고 도우셨던 보혜사이셨습니다.
그런 예수님께서 이제 아버지 하나님이 계신 하늘에 처소를 예비하러 가실 것이며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주실 것이라 약속하신 것입니다. 바로 그 또 다른 보혜사가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 하나님께 구하시어 아버지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성령 하나님은 예수님이 하셨던 일을 대신하여 주십니다. 제자들을 보호하여 주시고, 지지하여 주시고, 대언하시며 도우십니다.
예수님은 새로운 보혜사 성령께서 영원토록 제자들과 함께 있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성령님을 또한 “진리의 영”이라 부르셨습니다.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요 14:17)
여기서 “진리”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허다한 가치 기준들과 진리라고 불리는 셀 수 없이 많은 것들과 비교할 수 없는 “참된 진리”를 말합니다. ”THE TRUTH”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진리, “절대 진리”를 말합니다.
세상은 지금 거짓의 아비, 사탄의 지배 아래 있습니다. 에베소서 2장 2절은 믿지 않는 자들을 가리켜 이렇게 말합니다.
그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엡 2:2)
이 세상을 주관하는 자들을 가리켜 사도 바울은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 이라고 불렀습니다 (엡 6:12).
세상은 무가치한 것들을 가치있다고 말하고 세상은 진리가 아닌 것을 참되다고 말합니다. 세상은 유한한 기쁨과 희락을 좇게 하면서 그것이 영원할 것처럼 소개하고 부추깁니다. 세상은 썩어져 버릴 것들을 갖으라고 하면서 썩지 아니할 것들을 놓으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참되다 말한 것을 의심하게 만들고 하나님이 거짓되다고 말한 것 가운데도 진리는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의롭다고 하신 말과 행동을 무식하고 융통성 없는 것이라 말하고 하나님이 악하다고 말씀하신 것들을 옳다고 말합니다.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를 허구의 인물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는 훌륭한 의인이었을지 몰라도 하나님의 아들은 아니라 말합니다. 기독교를 미신이라고 말합니다. 혹시 역사적으로 사실인 부분이 있을지라도 과장되었고 거짓이 섞여 있다고 말합니다.
다 믿을 수는 없다고 말합니다.
마치 거짓의 아비 사탄이 아담과 하와에게 접근하듯이 참된 진리를 거부하고 거짓을 섞어서 완전히 다른 것으로 변질시킵니다. 이 거짓과 어두움이 가득한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이 진리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누가 진리를 알아서 진리를 우리에게 가르쳐 줄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당신 스스로를 가리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 14:6)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예수께서 아버지 나라로 가게 되신다면 누가 이 길과 진리를 제자들에게 알려주고 그 길을 좇아 살도록 도와줄 수 있을까요? 바로 그 역할을 담당하시기 위해 예수께서 아버지께 구하여 보내심을 받은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그 참된 진리를 증거하시는 성령님을 우리는 어디에 가야 만날 수 있을까요?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요 14:17)
진리의 성령은 신자 안에 계십니다. 신자에게 내주하여 계십니다. 그 안에 거하시며 영원히 함께 하신다 약속하셨습니다.
우리를 돕기 위해, 지지하기 위해, 보호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 하나님께 구하여 오신 분이십니다.
그 성령께서 신자 안에서 하시는 첫 번째 일은 진리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요 14:26)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신 것처럼 (요 14:24) 성령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증거하십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신자 안에 내주하시어 증거하시고 전파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요 15:26)
여기서 주목할 것은 성령님께서 증거하시는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이 하신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이 “진리”를 전파하는 것이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부탁하신 것이기도 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마 28:20)
성령이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우리에게 증거하시고 전파하시는 “진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가르침입니다. 신자가 세상 사람들에게 이 “진리”를 전파하기 때문에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성령님은 어떤 직장이 더 좋고 편한지 알려주는 진리의 영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더 함께 살기 괜찮고 좋은 배우자인지 보여주는 진리의 영이 아닙니다.삶의 여러 가지 선택 중 어떤 선택이 나에게 더 이익이 되는지 더 위험이 적은지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진리의 영이 아닙니다. 나의 꿈과 계획 행복과 유익 건강과 복지를 위해서 성령이 더 좋은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도우시는 것이 아닙니다.
수 많은 신자가 세상에 살면서 겪는 무수히 많은 상황 가운데 성령은 한 가지 변하지 않는 “절대 진리”를 말씀해 주십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가르침입니다.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 그분이 우리를 어떻게 부르고 계신지 예수께서 우리로 하여금 이 땅에 이루고자 하시는 일, 우리를 빛과 소금으로 부르시고 사람들을 구원코자 하시는 일들,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들을 하시기에 필요한 하나님의 진리를 보여주시고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께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요 6:58)
예수께서 제자들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성령을 약속하셨습니다.성령이 제자들에게 임하였을 때 그들은 또 다른 보혜사이신 성령님을 받았습니다. 이 성령님은 진리의 영으로 영생의 말씀을 신자 안에서 영원토록 거하시면서 주십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묻습니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예수께서 이 땅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아버지와 함께 하늘 보좌에 계시니
누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온전히 알아서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진리를 가르치겠습니까?
바울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고전 2:16)
어떻게 이것이 가능합니까?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다 말할 수 있습니까? 바로 또 다른 보혜사,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계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진리를 온전히 전파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고전 2:12)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살고자 하는 신자에게,주님의 진리를 따라 하나님께 나아가기를 원하는 자들에게,주님이 약속하신 부르심의 소망과 그 영광의 기업의 풍성함을 깨달아 알기 원하는 자들에게,어떠한 상황 가운데서도 주님의 이름을 높이기를 원하는 자들이 마땅히 따라야 할 참된 진리를 알기 원하는 자들에게,성령은 “진리”를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때로 우리 안에 성령이 계시다는 사실을 망각합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나와 영원히 함께 하시며 내 안에 내주하신다는 것에 기뻐하지도 만족하지도 않습니다. 어두움과 거짓이 가득한 세상에서 유일무이한 참된 진리를 말씀하시는 분이 우리를 떠나지 않으신다는 사실에 아무런 소망도 위로도 얻지 못합니다. 내 발 앞에 떨어진 불똥을 끄기에 바쁩니다.내 일상에 젖어 그 진리의 음성을 듣는 일에 소홀합니다.
이 온 우주 만물이 날마다 자랑하는 무한한 영광의 하나님이 조금의 거짓도 섞여있지않은 빛과 같이 참된 진리를 내 가장 가까운 곳에서 나에게 영원토록 말씀해주신다고 약속하셨지만 큰 관심이 없습니다.
우리는 그 아름다운 진리의 음성보다는 주변에서 들리는 잡소리와 소음에 더 민감합니다. 염려와 걱정과 근심 소리가 더 우선시 됩니다. 위기를 벗어나면 남들이 좋다고 말하는 것들, 대단하다고 칭찬하는 것들에 귀를 기울입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들 내가 원하는 것들에 주목합니다.가치를 셀 수 없는 아름다운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말하며 계속해서 그것을 증거하시는 이의 음성은 자꾸 저 멀리 사그라집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음성을 듣고자 한다면 참된 진리를 알기 원한다면 예수 그리스도가 말씀하신 영생의 말씀을 듣기 원한다면
우리를 확실하게 도우실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멀리 계시지도 않습니다. 바로 우리 안에 계십니다. 그분은 항상 진리를 말씀하십니다. 영광스런 예수 그리스도의 영생의 말씀을 전파하십니다. 그 진리의 음성을 듣기 원하십니까? 성령께서 어떻게 그 진리를 보여주시고 밝혀주시는 지 알기 원하십니까?
인생의 가장 고통스럽고 비극적인 순간에 혹은 가장 기쁘고 즐거운 때에,또는 아주 평범하고 일상적인 일과 속에서 변치 아니하고 영원히 동일한 참된 진리를 발견하시기를 원하십니까?
성령께서 어떻게 진리를 우리에게 알게 하시는지 함께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성령의 음성을 듣기 원하십니까?
성령의 음성을 듣고자 하는 사람들은 참 많이 있습니다. 모든 신자는 성령의 음성을 듣기를 원합니다. ’내가 죽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성령의 음성 듣기를 갈망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게 말씀해주셨다. 응답하셨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성령의 음성을 듣고자 하는 마음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보혜사이신 성령님은 신자 안에 내주하시어 영원토록 함께 동행하시면서 진리를 말씀하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성령이 어떻게 말씀해주시는가?” 입니다.
성령은 어떻게 말씀해주실까요?
첫째, 많은 사람이 우리의 감정을 통해 성령님께서 말씀하신다고 합니다.
마음의 평안, 차분함, 고요함, 안정감 등이 찾아올 때 성령이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음에 평안함이 찾아왔습니다…”
”이상하게 마음에 평안함이 없었습니다…”
이러한 감정의 변화가 바로 성령님이 주시는 응답, 음성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같은 생각에 크게 동의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은 이런 감정을 가지셨습니다.
…고민하고 슬퍼하사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마 26:37-38)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의 뜻대로 되기를 원한다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마음은 평안, 차분함, 고요함, 안정감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때문에 성령님께서 하나님의 뜻과 진리를 말씀하실 때 항상 우리에게 평안함과 차분함을 주심으로 말씀하시는 분이라고 결론 내릴 수 없습니다.
평안함과 안정감은 세상사람들이 훈련하는 심신수양 혹은 요가 등으로도 누리고 얻을 수 있는 육체적 정신적 감정 상태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을 주신다 하셨습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해주시는 하나님의 절대진리는 우리의 감정을 고요하고 평안하게 해주는 요가 수준의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감정적으로 온전하지 못하고 세상에서 끊어져 나갈 것 같은 때에도 분명하고 명확하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 뜻에 순종할 때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과 기쁨이 찾아 오는 것입니다.
둘째, 많은 사람들이 성령님께서 직접 계시로 말씀하신다고 말합니다.
사도행전을 통해 우리는 실제로 성령님께서 이러한 말씀을 주시는 것을 봅니다. 사도행전 13장 2절에서는 성령님께서 사도 바울과 바나바를 세우실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또한 예언의 은사를 가진 성도들은 성령의 직접 계시를 받기도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기록한 고린도전서 14:30절을 통해 우리는 성령께서 직접 계시를 주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오순절주의,” “은사주의” 혹은 “신사도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은사가 오늘날에도 지속된다고 믿기 때문에 성령의 직접 계시를 통한 역사하심은 더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나중에 이 “은사주의”와 “신사도운동”에 대하여 다룰 기회가 주어지면 더 자세히 이 부분에 대해서 이야기 하기를 원합니다. 여기에서는 결론만 정리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저는 성령님의 특별계시의 역사는 종료되었다고 생각합니다.이미 고린도전서 13장에 예언이 그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13:10)
10절에서 바울은 “온전한 것이 올 때에” 폐할 것이라 말하였습니다. 이 온전한 것이 곧 하나님의 말씀, 성경의 완성을 뜻하는 것이며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말씀,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계 22:18-19)
이 경고의 말씀이 신약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에 기록되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입니다.
이미 완성된 하나님의 말씀, 항상 있고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외에 성령께서 직접 계시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면
우리는 계시록 뒤에 계속해서 그 계시를 받아 적어야 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들었다고 하는 그리고 받았다고 하는 성령님의 직접 계시는 사실 조금만 생각해보면 거짓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령님이 말씀해주시는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 말씀에 대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듣고 받은 계시라는 것들은 어떤 저자에게는 책에 기록할 좋은 내용들이요 어떤 청년에게는 좋은 조건으로 결혼할 대상에 대한 것이요 어떤 사업가에게는 최적의 투자분야를 결정해주는 것이요 친구나 친척, 가족의 건강에 대한 예견. 특정 장소 시간 사람에 대한 소소한 이야기들. 결국 나와 내 삶에 대한 이야기, 내 중심적인 것들이 주를 이룹니다.
더 나아가 만일 성령께서 예수님과 그분의 말씀에 대한 것을 우리에게 직접 계시로 말씀해주신다 하여도 만일 그것이 성경에 나와있지 않은 것이라면 과연 누가 그것이 성령에게서 왔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을까요? 그것이 ‘성령으로부터 왔다’라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십니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결정할 권리가 있다면 그는 하나님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성령이 우리에게 직접 계시를 통해 말씀하신다고 볼 수 없습니다.
셋째, 어떤 사람들은 성령께서 환경을 통해 말씀하신다고 말합니다.
네, 이것도 사실입니다. 사도바울은 성령께서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셨다고 말하였습니다. 또한 비두니아로 가려고 했을 때도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않으셨다고 하였습니다.(행 16:6-7). 사실 모든 환경은 하나님의 허락 아래 주어진 것이므로 하나님께서 환경을 주관하시고 인도하신 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환경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파악하려고 하는 것은 조금 다른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가져야 할 마땅한 태도는 모든 환경 가운데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뜻을 붙들고 순종하는 것이지 변하는 환경에 따라 변하는 성령의 뜻을 분별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은 “항상” “언제나”라는 말이 종종 따라옵니다.
“항상 기뻐하라”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그리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이 명령들은 우리가 처한 환경과 관계없이 주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 감옥에서도 감사의 찬송을 드린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처한 참혹한 환경을 보고 하나님의 뜻을 찾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환경을 초월하여 분명하게 말씀하신 성령님의 음성 ”항상 기뻐하고 감사하라”는 그 말씀에 순종하여 찬송을 드린 것입니다.
우리 삶 가운데 아주 소소한 환경의 변화를 통해 성령께서 실시간으로 무언가 말씀하시고자 한다고 추정하려고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게 찾아내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성령은 너무도 분명하게 그리고 아주 확실하게 말씀해주십니다.
만약 성령님께서 감정의 변화로, 직접적인 계시로, 혹은 환경으로 말씀해주신다고 말하기 어렵다면, 어떻게 성령께서 말씀하신다는 것일까요? 먼저 분명하게 성령께서 말씀하신 것, 그리고 그것이 오늘날까지 적용 가능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 성경입니다. 베드로후서 1장 20-21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바울, 베드로, 야고보 등 여러 사람이 성경을 기록하였으나 성경의 저자는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성령께서 하나님의 뜻을 그들로 하여금 기록하게 하신 것입니다. 최면에 빠진 인간 저자들이 성령님이 불러 주시는 것을 받아쓰기 하듯이 쓰게 하셨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환경과 배경, 자신들의 특징과 문체를 사용하여 기록하였으나 그 모든 과정 속에 성령님의 완벽한 역사하심과 섭리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이라고”말씀하였습니다. 이 말씀이 참인 것은 요한복음 16장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요 16:13)
성령께서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진리 그것을 정확하고 분명하게 전달하여 성경을 기록한 인간 저자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잘 담아서 기록할 수 있도록 완벽하게 역사하시고 도우셨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호흡’이라고 표현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표현하신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직접 감동하심으로 기록하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권위와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이 놀라운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 (벧전 1:23)이라 부릅니다. 이 진리의 말씀은 죽은 영혼을 살리고 살린 영혼을 거룩하게 만듭니다. 또한 이 진리의 말씀은 오늘날 우리를 위해서도 주어졌습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에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를 위해서도 기도하셨습니다.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저희 말을 인하여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요 17:20)
바로 그 전에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요 17:17)
진리의 영이신 성령은 오늘날 성경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이 성경이 곧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이며 성령께서 아버지 하나님께 들은 것이고 성령께서 인간 저자들을 감동하심으로 기록하신 것입니다. 진리로 죽은 자를 거룩하게 하고 진리로 산 자를 거룩하게 하는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 성경을 통해 진리의 영이신 성령은 우리를 진리로 인도하십니다.
여러분 책장에 꽂혀있는 성경책을 한번 꺼내어 펼쳐 보십시오.교회 가방에 들어있는 성경을 한번 꺼내어 펼쳐 보십시오.
천 페이지가 넘는 이 무수히 많은 글자와 단어, 문장들이 수 천 년의 시간 동안 수 많은 저자들에 의해 쓰였지만 바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직접 그 호흡으로 말씀하신 것이며 성령께서 그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받아 기록하신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이 놀랍지 않으십니까?
이 성경은 여러분의 책장에 꽂혀있는 다른 신앙서적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인생에 대한 책, 자기 개발서와 절대로 비교할 수 없습니다. 다른 모든 책들은 아무리 번뜩이는 아이디어와 놀라운 깨달음을 준다 하여도 유한하고 제한적인 인간의 지식과 지혜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성경을 기록하신 성령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꽃과 풀이 마르고 시들어도 영원히 사라지지 아니할 진리를 바로 이 성경에 담아 기록하셨습니다. 또한 성령께서는 오늘날 이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진리를 분명하게 조명하여 주셔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진리를 말씀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고 명령한 것입니다. 계속해서 평온한 감정을 좇으라 하지 않았습니다. 성령의 직접적인 음성과 환상, 꿈과 계시를 좇으라 하지 않았습니다. 환경을 통해 성령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노력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딤후 3:14-17)
그러므로 누구든지 성령의 음성을 듣고자 하신다면 부지런히 하나님의 감동으로 쓰인 성경을 상고해야 할 것입니다.
감정도 환상이나 꿈이나 음성도, 환경의 변화도 성령의 확실한 음성을 듣는 좋은 방법이 되지 못합니다. 성경을 기록하신 성령님께서는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하나님의 진리를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바로 이와 같은 이유로 감정, 환경, 환상, 경험을 좇는 ‘내가 죽어야 한다’고 말하는 자들의 성령론은 아주 크게 위험하다고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사용하시는 메인스피커를 끄고 다른 곳에서 그분의 음성을 듣고자 노력하기 때문입니다.
신자 안에서 신자를 거룩하게 하시기 위해 성령께서는 또 여러 가지 일들을 하십니다. 오늘은 성령께서 하시는 “진리를 말씀하시는 것”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신자가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이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바로 이 진리의 음성을 좇을 때 우리는 거룩해집니다.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며 그 진리가 우리를 거룩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또 다른 놀라운 사역들을 살펴보기 앞서 다음 칼럼에서 이 성경의 권위에 대해 먼저 이야기 하기를 원합니다.
성령께서 성경을 통해 말씀하시는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그 어떤 생각, 전통, 문화, 관습, 경험, 감정 보다 이 성경의 참 뜻을 좇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진리를 말씀하신 다는 것 그 사실에 감사하시고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감추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기뻐하시는 계획을 우리와 나누셨습니다. 하나님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당신의 뜻을 알리십니다. 바로 이 진리의 영, 보혜사, 성령께서 우리 안에 영원히 내주하셔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 이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변하지 않고 썩지 않고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진리를 밝히 말씀해 주십니다.
그래서 성경을 사모하고 그 말씀을 종일 묵상하는 일을 기뻐하는 자를 하나님은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라고 부르셨을 것입니다.
성령의 음성을 듣기 원하십니까?
하나님의 진리를 알고 싶으십니까?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서 하나님의 마음에 가까이 거하기 원하십니까?
성경을 사모하십시오. 그 말씀을 종일 묵상하십시오.
여러분 안에 영원히 거하시어 그 진리의 말씀을 분명하게 증거하여 말씀해주시는 성령님을 기쁨으로 신뢰하고 그 진리에 귀 기울이시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