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죽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 –
여러 교회의 홈페이지에 들어가 주일강단 설교를 들으며 정리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죽는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내 지혜, 내 생각, 내 판단, 내 결심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약할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능력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인생을 망치는 길은 내가 무언가 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내 생각과 노력으로 하면 다 실패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들의 “내가 죽어야 예수가 산다” 류의 설교에는 네 가지 특징들이 동일하게 발견되었습니다.
둘째, 나의 생각, 내 지혜는 무의미하다.
셋째, 내가 죽어야만 예수가 산다.
넷째, 예수의 생각, 지혜는 성공(승리)을 가져온다.
그것이 진정 구별 가능한 것인가?’
이 얼마나 아름다운 외침입니까? 이 얼마나 영적이고 신령한 구호란 말입니까?
하나님 말씀만이 이 혼란스러운 가르침들을 분명하게 보여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죽어야만 예수께서 사실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지, 성공적인 결과만이 우리가 제대로 죽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지…
– 내가 죽는다는 말의 참된 의미 –
우리는 “내가 죽어야 예수가 산다” 류의 설교에 대해서 몇가지 질문을 던졌습니다. 이 시간에는 그 질문 중 첫번째로 “내가 죽는다는 말의 참된 의미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로마서 6:1-14에서 찾아보겠습니다.
로마서 6장 1-14절에서 사도 바울은 1절과 14절을 제외한 모든 구절에서 “죽음”을 언급합니다.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 (2절)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 (3절)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 (4절)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 (5절)
”우리의 옛 사람이 …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 (6절)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 (7절)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 (8절)
”그리스도께서 …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 (9절)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 (10절)
”너희도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 (11절)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 (12절)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 (13절)
여기서 사도 바울은 두 가지 죽음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믿는 자의 죽음과 그리스도의 죽음이 그것입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의 논점은 두 죽음의 차이가 아닌 “연합”에 있습니다. 믿는 자의 죽음은 우리말 성경의 표현에 따르면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의 죽음입니다 (3절). 좀 더 우리에게 익숙하게 표현하자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우리” 혹은 “그리스도 예수와 연합한 우리”의 죽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왜 여기서 이런 죽음에 대해서 말하고 있을까요?
로마서 6장의 시작에서 사도 바울은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1절)
라고 묻습니다. 은혜의 복음(로마서 1-5정)은 지속적인 죄를 용납하느냐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대답은 아주 간단 명료합니다.
그럴 수 없느니라 (2절)
절대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은 왜 그러한지를 설명합니다. 그 설명의 핵심은 “믿는 자와 그리스도의 연합”에 있습니다. 그 연합에 따른 죽음과 삶에 있습니다.
먼저, 믿는 자는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죽었습니다 (3절).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영접할 때부터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로 보시기 때문에 예수님이 죽으실 때 우리도 함께 죽은 것으로 보십니다.
하지만 이 죽음이 끝이 아닙니다. 믿는 자는 또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살았습니다 (4-5절). 여기서 한가지 흥미로운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의 죽음은 죽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도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4절)
믿는 자가 죽은 것은 그가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하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새 생명”이라는 말에 주목하십시오. 이것은 단지 기존의 잘못된 것을 고친 것이 아닙니다. 완전히 새로운 것입니다. 새로운 생명을 주기 위해서는 기존의 것이 죽어야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믿는 자에게 새 생명을 주셨습니까?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고 그렇게 하셨습니다. 예전의 모습으로 그냥 살아도 된다면 굳이 새 생명이 필요없습니다. 예전과는 완전히 다른, 새 삶을 살아야하기 때문에 새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
6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 죽은 몸을 “옛 사람,” “죄의 몸”이라고 지칭합니다. “옛”은 단지 시간상 오래된 것이 아니라 “낡고 소용이 없어진”이란 의미입니다. 왜 “옛 사람”은 소용이 없어졌을까요? 옛 사람은 선을 행할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죄의 몸”은 죄의 지배를 받는 몸입니다. 죄의 지배를 받아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몸입니다. 새 생명을 얻기 전의 사람들은 선을 행할 수 없고 죄를 지을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새 생명을 얻은 자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선을 행할 수 있고 죄를 짓지 않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이고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있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10-11절). 우리는 이 극명한 사실을 믿고 확신 가운데 거해야하며 (“여기라,” 11절), 그에 따라 죄에게 지배권을 내주지 말고 (12절) 우리의 모든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13절). 이것이 믿는 자의 올바른 삶입니다. 완벽함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완벽함을 향하여 나아가는 (행하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믿는 자는 죽었습니다. 따라서 죽은 자처럼 살아야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절대 이제는 우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던가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죽은 것은 죄의 몸이 죽은 것입니다. 죄의 지배 아래 있지 않고 우리의 소욕을 따라서 살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단지 “죽음의 삶”을 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부활의 삶”을 살아야합니다. 새 생명 가운데 행해야 합니다. 우리의 지체 하나하나가 그리스도의 뜻에 따라 움직여야 합니다.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를 배우고 기도를 통한 성령의 능력으로 강하여져서 강력한 의의 무기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믿는 자의 죽음과 부활의 삶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신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다는 것의 참된 의미입니다.
성경적 성화와 미신적 성화
– 내 생각, 내 지혜는 다 쓸데 없는 것인가? –
“내가 죽는 다는 말의 참된 의미”에 대하여 사도바울을 통해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은 아주 명료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라디아서 2:20)
죄의 종 노릇 하던 내가 나의 옛 자아, 나의 육체가 원하는 것을 버리고 내 안에 계신 성령이 원하시는 것을 따라 살아가는 삶인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명령합니다.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갈라디아서 5:16).
구원 받은 성도는 더 이상 죄의 종이 아닙니다.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영화롭게 변화된 몸을 입지 않았기 때문에 옛 육체, 옛 자아가 원하는 바, 죄의 종 노릇 하기를 원하는 습성이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육체의 욕심, 옛 자아를 좇지 말고 새롭게 변화 받은 영을 따라 행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말씀은 신약성경에서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주어집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롬 1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엡 4:22-24)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골 3:5-10)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살전 4:3-4)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전에 알지 못할 때에 따르던 너희 사욕을 본받지 말고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벧전 1:14-15)
사랑하는 자들과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벧전 2:11-12)
이 말씀들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옛 삶의 방식을 버릴 것과 새 삶을 입을 것이 명령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의 내면에서 벌어지는 이러한 영적 전쟁에 대하여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7:18-25절을 통해 그는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맞붙는 영적 전쟁에 대하여 말합니다.
그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24절)고 탄식합니다. 그러나 그의 탄식은 소망 없는 한탄이 아니었습니다. 로마서 8장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이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인해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의 종이었던 우리를 해방하신 것입니다!
때문에 바울은 이렇게 명령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롬 8:12-13)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는 죄와 싸워 이길 수 있는 능력과 힘을 얻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성화는 바로 옛 자아와의 전쟁이며 더럽고 추악한 죄악된 삶을 버리고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거룩함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 성화의 과정에 내 생각, 내 지혜, 내 계획은 쓸데 없는 것인가? 입니다.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도표를 보고 이후에 주어지는 질문에 대한 답을 생각해보기를 원합니다.
앞에서 본 성경 구절들에서 우리는 공통적으로 신자에게 주어진 명령을 살펴보았습니다.
1. 옛 사람을 죽이라, 버리라, 제어하라
2. 새 사람을 입으라, 거룩함을 입으라, 성령을 따라 살라
이제 질문입니다. 이 명령에 순종해야 하는 것은 누구입니까? 바로 나, 각 그리스도인 개인입니다.
모든 생각과 뜻과 지혜와 힘을 다해서 옛 사람을 버리고 새 사람을 입어야 하는 것은 바로 나입니다.
나의 지적 능력, 지혜, 힘, 에너지 그 자체가 더럽고 버려야 할 것이 아니라 그것이 옛 사람의 소욕을 따라 사용 될 때에 하나님 앞에 옳지 못한 것입니다. 반대로 내가 가진 지능, 재능, 지혜, 힘, 에너지, 은사가 하나님 말씀에 따라 그분의 뜻을 위해
사용 될 때에 우리는 거룩한 삶, 변화된 삶,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칼이 사람을 죽이는 데 사용될 때, 사악한 무기가 되지만 맛있는 요리를 하는 도구로 사용될 때 많은 사람에게 유익이 되는 좋은 도구가 되듯이 우리의 지혜, 지능, 힘 등은 어떤 것을 위해 사용되느냐에 따라 좋은 도구가 될 수 있고 나쁜 도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6장 13절에서 사도바울은 이를 명확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나의 생각, 지혜, 노력, 힘, 은사 그 모든 것 자체가 나쁘고 버려야 할 것이며 내려 놓아야 할 것이고, 죽여야 할 것이 아닙니다.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일에 사용하는 것입니다.
구약시대부터 율법으로 하나님께서 주시고 신약에 와서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조하신 첫째 되는 계명을 보면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신 4:29; 6:5; 11:13; 13:3; 30:2, 6; 마 22:37; 막 12:30; 눅 10:27).
마음과 목숨과 힘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할 것을 명령하고 있습니다.내 힘과 뜻과 지식과 지혜 자체가 쓸데 없는 것이며 버려야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온전히 사용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내가 죽어야 예수가 산다”류의 설교에는 이 부분에 큰 오해가 있습니다. 그들은 아마도 “우리가 하는 얘기가 바로 이것입니다. 옛 자아, 옛 자아에 속한 계획, 생각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한 번 생각해봅시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것도, ‘내가 해야지…’ 하고 계획하면 절대로 그렇게 안됩니다. 예수님을 의지하고 신뢰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내가 하는 일과 공부가 이상하게 잘 안되었습니다. 왜 그런가 생각해보니 내가 내 생각과 지혜를 따라 했던 것이었습니다.” “내 인생의 계획, 직장, 결혼 등을 내 생각과 지혜로 하려고 하면 안됩니다. 그것은 인생을 망치는 길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구하고 그 뜻을 따라야 합니다.”
의의 도구로 온전히 사용될 수도 있는 나의 지혜, 생각, 힘과 뜻이 완전히 옛 자아의 악한 것과 같은 것으로 분류된 것입니다.
”칼은 잘 사용되어져야 합니다. 칼을 잘못 사용하면 살인 도구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칼을 선한 곳에 사용할 때, 우리는 많은 유익을 얻을 수 있습니다”라고 말해야 할 것을 “칼은 무조건 나쁜 것입니다. 칼을 쓰면 망하게 되어있습니다.”라고 말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지능, 재능, 물질, 뜻과 힘, 노력은 옛 자아를 위해 사용되면 안됩니다.그것이 하나님을 위해 사용 되어야만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라고 말해야 할 것을 ”나의 생각, 지혜, 계획, 노력이 다 불필요하며 그것은 무조건 인생을 망치는 것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나의 생각, 지혜, 힘과 계획을 하나님을 위해 온전히 사용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명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오류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왜 이것이 그렇게 큰 문제가 될까요?
오늘 한가지만 언급하고 다음 칼럼에 몇 가지의 문제를 더 말씀 드리기 원합니다.
2세기 초, 초대교회가 싸워야 했던 이단의 교리 중 하나가 바로 “영지주의”였습니다.
이교도들이 가지고 있던 이원론적 종교사상을 기독교 내로 끌고 들어왔던 영향력이 큰 거짓 철학이었습니다.
실제로 사도요한이 요한일서를 통해 그 문제를 다루고 있으며 목회서신서에서도 경계하는 것을 볼 때에 그 문제가 초대교회 안에 심각한 문제를 만들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공의회 (행15장)이 율법주의를 다루었다면 325년에 있었던 니케아 공의회에서는 영지주의가 교회가 처단해야 할 이단으로 규정되고 기독교에서 축출되었습니다.
영지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오류는 이분법적 사고이며 다음과 같습니다.
영적인 것은 성스럽고 선하고 좋은 것이며 육체는 더럽고 악한 것이다.“내가 죽어야 예수가 산다”고 외치던 사람들이 가졌던 사고의 문제가 이와 같습니다. ”내 생각, 내 지혜, 내 계획은 다 악한 것이고 버려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각, 지혜, 계획, 뜻을 추구해야 합니다.”
이렇게 명확하게 구분을 짓는 이분법적 사고입니다. 성경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 기본적인 인간의 지능, 지혜, 힘, 뜻에 대한 이분법적 사고로 영지주의가 기독교 안에 퍼뜨린 두 가지 큰 폐해를 가져옵니다.
첫째, 인간의 생각, 지능, 지혜, 힘과 계획에 대한 무조건적인 부정적 시각입니다.
영지주의가 육체적인 것은 모두 악하다고 잘못 규정한 것과 같이,특별한 설명 없이 “내 계획, 생각, 지혜는 다 쓸데 없다”, “버려야 한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비성경적일 뿐만 아니라 잘못된 죄책감을 가져옵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저는 내 생각을 가지고 쓰는지 하나님의 생각을 가지고 쓰는지 알 수 없으며 혹시나 내 생각으로 쓰는 것일까? 의구심과 죄책감을 갖게 됩니다.
대학을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학생도 그것이 자기의 지혜와 노력으로 공부하는지, 하나님의 지혜와 노력으로 공부하는지 비성경적인 이원론적 사고로 불분명한 삶을 살게 됩니다. 그 누가 내가 가진 지혜와 생각, 계획과 뜻 그 자체가 악한지 선한지를 말해줄 수 있을까요?
주의 영광을 위해 주가 맡겨주신 학업에 최선을 다하는 학생에게 ’네가 지금 하고 있는 노력과 계획은 다 인간적인 것이야, 버려야 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기본적으로 인간에게 주어진 체력과 지혜, 지식과 계획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은 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며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은 내게 허락하신 지능과 재능, 힘과 뜻을 통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라고 명령하시지만 ”내가 죽어야 한다”고 외치는 사람들은 그 자체가 불필요하고 악하며 내려놓아야 할 것이라 말합니다.
이러한 비성경적인 부정적 시각은 마치 마라톤을 뛰려는 선수에게 너의 계획과 힘과 체력을 사용하지 말고 뛰어라! 라고 말해주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너에게 주신 능력과 힘과 지혜와 계획을 최대한 활용하여 너에게 주어진 코스를 최선을 다해 뛰어라! 라고 성경은 우리 앞에 놓인 이 영적인 경주를 힘차게 뛸 것을 말씀하고 있는데, “내가 죽어야 한다”고 외치는 사람들은 내 힘과 능력과 지혜와 계획을 다 버리고 뛰라고 말함으로써 우리 앞에 주어진 경주에 수동적으로, 불확실하게, 불명확하게, 소극적으로 임하게 만듭니다.
자, 이들에 의하면 우리는 생각, 지혜, 계획, 뜻, 힘을 다 포기해야만 합니다. 그것은 악한 것이니까요.대신 우리가 신뢰하고 붙들라고 말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신비롭고 성스러운 더 나아가 미신적인 영적 계시입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주신 분명한 말씀 외에 신비주의적이며 성스러운 영적 계시를 추구하게 만듭니다.
“내가 죽어야 한다”고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때론 이런 이야기도 합니다.
”오늘 저는 말씀을 준비해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말씀 대신 다른 말씀을 마음에 주셔서 저는 어쩔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따라 하나님이 주신 것을 나누기 원합니다.”
“미리 설교를 준비해오기 보다는 하나님이 직접 주시는 말씀으로 오늘 교제하기를 원합니다.”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났는데, 자꾸 주님께서 이렇게 하라고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제가 정말 그것을 하고 싶어하지 않았지만, 주님은 저에게 새롭게 보여주셨습니다.”
“주님은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라고 보여주셨습니다.”
“주님은 …라는 마음을 저에게 주셨습니다.”
“주님은 …라는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2세기 기독교를 흔들어 놓았던 영지주의자의 두 번째 큰 오류가 바로 이것입니다.
분명하게 제시된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기 보다 영적인 것, 성스러운 것, 신비로운 것, 하나님 혹은 성령님의 음성, 영적 계시를 추구합니다.말씀에 분명하게 기록된 하나님의 뜻을 내게 주신 지혜와 힘과 뜻을 다해 순종하는 것은 이차적인 문제입니다.
이들에게 있어서 모든 상황을 해석하고 모든 삶의 결정을 계획하며 모든 환경에 대한 대처하는 법은 하나님이 직접 주시는 계시, 뭔가 신비롭고 영적이며 성스러워 보이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이러한 신비롭고 성스러운 계시는 늘 감정에 호소합니다. 뜨거운 사랑, 놀라운 계시, 뜻밖의 인도하심, 분명한 음성….성경에서 말하는 “죽음”은 늘 순종을 가리킵니다. 의지적인 순종이며 행동의 변화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우리의 모든 지체를 가지고 순종하는 것이 바로 신자가 날마다 해야 하는 “죽음의 삶”입니다.
“내가 죽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성경이 말하는 “죽음”에는 큰 관심이 없습니다.그들의 첫째 관심은 영지주의자들처럼 하나님의 영적 계시를 듣고 반응하는 것입니다. 그런 자들에게 베드로의 말씀만큼 분명한 말씀은 없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베드로후서 1장 16-18절까지 자신이 경험한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에 대하여 이야기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교묘히 만든 이야기를 따른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그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이 소리는 우리가 그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부터 난 것을 들은 것이라
참으로 놀랍고 확실한 하나님의 계시 아닙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하신 영광을 친히 눈으로 보고 하나님의 음성을 귀로 들었던 것입니다! 이보다 더 확실한 하나님의 계시가 있을까요? 베드로는 계속 말씀합니다 (벧전 1:19-21).
또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를 비추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옳으니라 먼저 알 것은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
예수그리스도의 영광스런 모습과 하나님의 음성을 경험한 베드로는 분명하게 하나님의 말씀, 성경이 더 확실한 예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죽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과 영지주의의 커다란 폐해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성경은 이차적인 것입니다. 더 확실한 것은 그들이 경험하는 하나님의 음성 영적이고 신비롭고 성스러운, 실시간으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계시인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그들의 고백에 잘 담겨있습니다.
”성경은 원래 그런 뜻으로 기록되지 않은 것을 잘 알고 있지만,하나님은 저에게 분명히 이 말씀으로 응답해주셨습니다.”
이 사람들의 눈에는 말씀에 순종함으로 일주일 동안 하나님 말씀을 준비하고 공부하며 직접 설교할 것을 연습해본 사람들은
지극히 인간적이며 자기 생각과 지혜와 계획을 좇는 사람입니다. 반대로 하나님 말씀을 전하기 위해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더라도 일주일 동안 눈물로 금식기도하고 새벽에 일찍 일어나 산에 올라가 하나님의 음성을 기다린 사람은 지극히 영적이며 옳고 아름다우며 하나님의 지혜와 생각을 좇는 사람입니다.
저는 조금 힘주어 이렇게 말씀 드리기 원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전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전할 말씀의 본문이 무엇을 말하는지 아직 정확하게 깨닫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였다면,그 본문을 가지고 강단에 올라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저는 또 이렇게 묻고 싶습니다.
당신에게 하나님께서 음성으로 말씀하셨다는 것, 하나님이 보여주셨다는 것, 환상으로 주셨다는 것, 계획과 뜻을 품게 하셨다는 것…그 모든 신비로운 표현들이 정말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어떻게 확신하십니까? 그 근거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과 사탄으로부터 온 것을 나누는 기준은 무엇입니까? 내가 원하기 때문에 그런 생각이 생긴 것이 아니라는 확실한 증거는 무엇입니까?
성경이 말씀하는 “죽음”은 분명하게 말씀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우리에게 주신 힘과 지혜와 지능과 재능을 다해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부지런히 힘쓰는 것입니다.
“내가 죽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죽음”은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힘과 지혜와 지능과 재능을 다 악한 것으로 규정하여 내어버리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는 성경 말씀 보다는 미신적이고 신비로운 하나님의 음성을 체험적으로 경험적으로 추구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이 주신 달란트 비유를 가지고 둘의 차이를 설명하기 원합니다.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 받은 자들은 “성경적인 성화”를 따라 산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처음부터 그들의 “재능”에 따라 달란트를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들의 주인이 명령하신 그 분명한 말씀에 따라 자신들에게 주어진 재능을 최대한 활용하여 달란트를 남겼습니다. 여기 한 달란트 받은 자를 생각해보십시오. 주인이 하신 명령은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재능을 사용하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한 달란트도 땅에 묻어 버립니다.
이것이 “내가 죽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주장하는 “성화”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맡겨주신 재능, 지식, 힘, 뜻은 다 땅에 묻어버리고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 나에게 분명하게 주신 명령도 크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미신적이고 신비로운 영의 음성을 듣고 그것이 신령한 것처럼 만족하는 것입니다. 그 만족감과 뜨거운 감정이 하나님을 닮아가며 동행하는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성경적인 성화는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는 너무도 확실한 길이지만
이 사람들이 주장하는 성화의 길은 미신적이고 신비로운 계시와 경험을 추구하는 알 수 없는 길이요 불확실한 삶인 것입니다. 이 불확실성이 맺는 열매들은 참 다양합니다.
다음 칼럼에서는 “내가 죽어야 한다”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성화의 개념이 주는 여러 가지 폐해들에 대하여 나누기를 원합니다.
“내가 죽어야 예수가 산다”라는 가르침의 문제에 대하여 이야기 하였습니다.
사실, “내가 죽어야 예수가 산다”는 것은 성경적인 명제이며 우리가 추구해야 할 삶의 방향입니다.모든 신자는 마땅히 옛 자아를 죽여야 하고,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전히 사실 수 있도록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날마다 주와 동행하고 조금씩 더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야 하며, 우리에게 요구된 아버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닮아가야 합니다. 우리에게 최종적으로 주어질 영화(glorification)로 우리는 나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왜 “내가 죽어야 예수가 산다”라는 설교에 문제가 있다고 말하는 것일까요?
첫 번째 칼럼에서 제가 의문을 제기한 것처럼,“내가 죽어야 예수가 산다”라고 말하는 사람들 가운데 성경적인 성화에 대하여 오해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나의 옛 자아를 죽이라는 말 대신 내가 가진 지능, 재능, 힘, 뜻 등 하나님께서 주를 위해 사용하라고 주신 것까지 다 부정적으로 보고 그것들을 다 죽이라, 내려 놓으라, 없이 하라는 가르침의 문제입니다.
또한 성령님에 대한 잘못된 이해로 인해 분명히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격려하고 권면하기 보다는 신비롭고 성스러워 보이는 미신적인 성령의 음성, 환상, 감정의 변화, 평안함을 추구하는 것의 문제입니다.
이러한 성경적인 성화에 대한 오해에 대하여 웨인 그루뎀도 그의 <조직신학>에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애석하게도 오늘날 성화의 이 소극적인 역할,즉 하나님께 모든 것을 드리고 ’그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을 의지해야 할 것이 지나치게 강조됨으로써 마치 성화를 위해 하나님의 백성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뿐인 것처럼 인식되기도 한다. 그래서 ‘그냥 하나님이 하시게 두어라’는 유행어가 때로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요약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하지만 그것은 성화의 교리를 왜곡시킨 것이며 성화의 반만 강조한 것으로서 이 역할만 강조한다면 우리는 모두 게으른 신자가 될 수밖에 없고 바울이 롬 8:13에서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라’라고 말한 성화에서의 적극적인 역할을 소홀히 하게 될 것이다.< 웨인 그루뎀의 조직신학 중권, 407p>
그루뎀이 이야기한 것처럼, “내가 죽어야 예수가 산다”를 외치는 많은 사람들은 성화의 소극적인 역할,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는 것을 극단적으로 강조한 나머지 성화의 적극적인 역할, 말씀에 순종함으로 성화를 이루어야 할 우리의 의무를 간과하고 있는 것입니다. 웨인 그루뎀은 이 두 가지 역할을 잘 이해하고 균형 있게 유지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함으로써 소극적인 역할을 하는 것도 중요하고 동시에 우리의 삶을 통하여 좀 더 순종하고 거룩함을 추구하는 적극적인 역할도 또한 중요하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순종하기 위한 적극적인 면을 소홀히 한다면 우리는 소극적이고 게으른 신앙인이 될 것이다.
반면에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소극적인 면을 소홀히 한다면 우리는 교만과 자기 확신에 빠질 것이다 둘 중 어느 경우에 빠지든 우리의 성화는 온전히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믿음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순종하기 위한 부지런함을 유지해야 한다.< 웨인 그루뎀의 조직신학 중권, 409p>
웨인 그루뎀이 정확하게 진단한 것처럼,”내가 죽어야 한다”는 식의 성화론은 성화에 대한 단순한 오해로 끝나지 않습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우리의 성화를 온전히 이루는 것을 방해합니다.이 가르침을 따르면 우리의 성화는 온전히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것”의 정확한 뜻이 정립되지 않고 ”옛 자아를 죽이는 것과 새 사람을 입는다”는 것의 성경적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며 하나님이 주신 나의 재능, 지능, 힘, 뜻, 능력 등 나의 지체 자체를 부정한 것으로 치부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는 적극적인 역할 보다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맡기는 것만 지나치게 강조하는 ”내가 죽어야 예수가 산다”는 가르침은 이제 그만 멈추어야 할 것입니다!
“내가 죽어야 예수가 산다”는 가르침은 단순히 성경이 가르치는 성화의 소극적인 역할, 즉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모든 것을 맡긴다는 것을 지나치게 강조할 뿐 아니라 잘못된 성령론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지난 칼럼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그들은 이러한 말을 많이 합니다.
”하나님은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응답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음성으로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이런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이렇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나의 마음에 이런 감정을 넣어주셨습니다.”
가장 심각한 것은 성경 말씀을 보고 감동을 받으면 말씀의 본문과 전혀 관계 없이 그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내가 처한 상황에 대하여 직접적이고 생생한 계시를 주셨다고 믿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선교지로 떠나는 한 선교사가 창세기 12장 10절을 보고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아래로 내려가서 선교하라고 말씀을 주셨다고 합니다.
그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거류하려고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창 12:10)
선교사는 이 말씀이 원래 의미하는 것이 우리에게 어디로 내려가라, 올라가라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서 이 성경 구절을 통하여 자신이 가고자 하는 선교지역 중 아래에 위치한 마을로 가라고 확실히 말씀해주셨다고 하였습니다.
만약 이 선교사의 말이 사실이라면 성령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성령님 당신의 영감으로 쓰신 성경의 참된 뜻을 무시하고 오늘날 상황에 따라 그 뜻을 변질시키는 분이 아니십니까?
분명히 당시에 이 구절을 기록하신 뜻과 진리가 분명히 정해져 있음에도 이 선교사를 위해 그 뜻과 진리를 무시하고 새로운 해석을 제시하고 새롭게 조명하여 주시는 분이 아니십니까?
베드로가 이해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 벧전 1:24
세세토록 변하지 아니하는 말씀은 살아있고 항상 있는 것이며 변할 수 없는 진리인 것입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을 위해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 요 17:17
신자의 성화는 이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바울도 말씀을 통하여 온전하게 될 것을 가르쳤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 딤후 3:16-17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진리, 말씀이 우리가 처한 환경에 따라 변질되고 재해석되며 다른 뜻으로 설명된다고 말한다면 우리가 어떻게 그것을 변치 않는 진리라 말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어떻게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이라 말할 수 있을까요?
여기서 한 번 더 생각해봅시다.
만약 성령님께서 원래 기록된 말씀의 뜻과 진리를 변질시키지 아니하시는 분이시며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조명해주시는 분이시라면 원래 성경의 의미가 아닌 것을 가지고 성령님이 혹은 하나님이 그렇게 분명히 말씀하셨다고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시내산에서 아주 특별한 명령을 주셨습니다. 자기 백성들이 마땅히 따라야 할 하나님을 섬기는 법이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십계명이라 부릅니다. 그 중에서 세 번째 계명은 이와 같습니다.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여호와는 그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출 20:7)
하나님께서 혹은 성령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은 것을 가지고 분명히 그렇게 하셨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일, 즉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것”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짧게 표현하자면 “신성모독”의 죄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 신명기에서는 신비로운 체험을 강조하며 잘못된 하나님을 가리키는 자들에 대하여 이렇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너희 중에 선지자나 꿈 꾸는 자가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네게 보이고 네게 말하기를 네가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우리가 좇아 섬기자 하며 이적과 기사가 그 말대로 이룰지라도 너는 그 선지자나 꿈꾸는 자의 말을 청종하지 말라 이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여부를 알려 하사 너희를 시험하심이니라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순종하며 그를 경외하며 그 명령을 지키며 그 목소리를 청종하며 그를 섬기며 그에게 부종하고 그 선지자나 꿈 꾸는 자는 죽이라 이는 그가 너희로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시며 종 되었던 집에서 속량하여 취하신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배반케 하려 하며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행하라 명하신 도에서 너를 꾀어 내려고 말하였음이라 너는 이같이 하여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할지니라 – 신 13:1-5
이 거짓 선지자들이 하는 것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들은 이적과 기사를 보이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진리보다 그들이 체험하고 경험하고 꿈꾸고 감정적으로 느낀 것을 추구하였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아닌 다른 하나님을 제시하였습니다. 모세는 이런 자들을 죽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가르침을 멀리하고 오직! 여호와의 명령, 그 말씀을 지키고, 청종하며, 그분을 섬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내가 죽어야 예수가 산다”고 가르치는 사람이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을 우리에게 가르치려고 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들의 동기나 자세는 의심하지 않습니다. 분명히 주님을 사랑하는 자들일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하게 우리에게 말씀하신 성경을 가지고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변질시켜서 해석하고 하나님이 분명히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주장하는 것, 나에게 체험적으로 경험적으로 실질적으로 계시하셨다고 말씀해주셨다고 주장하는 것들은 모세가 경고한 이 꿈꾸는 사람들과 같은 부류의 죄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지 않은 것을 하셨다고 주장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이고 말씀의 진리로 분명하게 드러나야 할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이 아닌 자신이 체험하고 경험한 “다른 하나님”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기록한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너희는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 처음부터 들은 것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아들과 아버지 안에 거하리라 – 요일 3:24
베뢰아 사람들의 신사적인 모습을 기억하십시오.
베뢰아의 유대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의 유대 사람들보다 더 고결한 사람들이어서 아주 기꺼이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것이 사실인지 알아보려고 날마다 성경을 상고 하였다– 행 17:11, 표준새번역
처음부터 들어왔고 영원히 변치 않을 하나님의 말씀. 우리는 그 말씀을 붙잡아야 합니다.
지금 내 삶 가운데 하나님이 음성으로, 감정의 변화로, 환경으로, 평안함으로, 환상으로 주시고 있다고 생각하는 체험과 경험을 통해 하나님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정립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성경으로 돌아가 태초부터 지금까지 변하지 않고 동일하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고 그것을 순종하며, 그 하나님을 청종하고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특별히 교회를 인도하고 강단에서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은 이 사실을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 딤후 4:1-2
우리가 전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써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내가 들은 하나님의 음성, 내가 체험한 그분의 환상 내가 느꼈던 감정들, 특정 상황 가운데 하나님이 주신 계시들 뭔가 더 신비롭고 성스럽고 영성이 깊어 보이는 듯한 말들 주님이 이렇게 하셨습니다, 저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감정을 주셨습니다, 갑자기 일을 막으셨습니다…어떤 일을 허락하셨습니다….이런 불확실한 것들을 이제 강단에서 그만 가르쳐야 합니다.
모든 성도로 하여금 말씀이 아닌 다른 신비로운 체험을 좇게 하고 감정과 경험에서 오는 하나님에 대한 앎과 지식을 추구하게 하는 이런 무서운 죄를 그만 두어야 합니다.
꿈꾸는 자가 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선지자가 되십시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영원히 변치 않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해야 합니다!
“내가 죽어야 한다”고 외치는 사람들은 이처럼 잘못된 성령론에 근거하여 심각한 죄를 짓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감동하심으로 기록하신 성령님을 그 진리를 변질시키는 분 취급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자의 성화 가운데 성령님은 어떤 일을 하고 계실까요? 성경은 성령님이 어떤 분이라고 말씀하고 있을까요?
성경이 말하는 참된 성령님의 역할에 대해서 다음 칼럼에서 살펴보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