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훈련의 종류
2) 금식
금식은 가치가 높고 역사가 오래된 안식으로 들어가는 훈련의 방법으로서 상당기간 동안 음식을 끊고, 몸과 전인을 하나님이 직접 유지시켜 주심을 의식적으로 경험하는 자리이다. 음식을 끊음으로서 제멋대로인 자아를 굶주리게 하고, 의지의 측면을 하나님의 뜻에 맞추면서 교훈과 영적인 힘을 얻는 길이다. 금식은 평강이 먹는 즐거움에 얼마나 크게 의존하는가를 보여줌으로 겸손하게 한다. 금식은 신앙 없이 지혜롭지 못한 삶과 태도-자기존중의 결여, 무의미한 수고, 목적 없는 생활, 휴식이나 운동 부족-가 원인이 되어 몸속에 생긴 불편함을 진정시키기 위해 먹는 즐거움을 얼마나 이용하는지 깨닫게 된다. 금식은 육체가 우리의 강력한 결심을 거슬려 강력하고 교묘하게 제멋대로 한다는 것을 확실하게 입증한다. 금식은 생명의 원천이 먹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발견하고서 하나님만 의지하게 해낸다. 금식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의 원천이라는 것을 경험으로 알게 한다(마 4:4). 또한 세상이 알지 못하는 양식을 먹으며 살 수 있다는 것을 배우게 한다(요 4:32,34). 생명이 음식보다 훨씬 중요하다는 것도 발견하게 된다(눅 12:33). 불신자에게는 배(stomach)가 神이지만(빌 3:19;롬 16:18), 우리에게는 배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종임도 알게 한다(고전 6:13).
주께서 금식을 축제요, 마음껏 즐기며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이라고 한 것의 진의를 알게 된다(마 6:16-18). 금식(feast)은 축제(festival)가 되는 힘과 기쁨과 생명을 얻기 때문이다. 금식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실체에 더 흠뻑 빠져들어 가는 경험이 되고, 의식(사고)과 성격과 잘못된 생각(물질주의)들이 사라진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사람에게 요청되는 자기부인을 실천하는 중요한 방법이다(마 16:24). 금식할 때 하나님을 마음껏 즐기면서 행복하게 고난을 받는 방법을 배운다. 금식을 체계적인 훈련으로 잘 활용하는 사람은 하나님 안에 있는 자기들의 자원을 분명하게 끊임없이 의식한다. 모든 종류의 손실을 견딜 수 있게 하는데 도움이 된다. 절제력과 자제력을 배양시키기 때문에 모든 근본적인 욕구들에 관해 절제와 자제를 공급한다. 음식이 우리 삶의 포괄적 위치를 점하고 있기 때문에 금식 효과는 인격 전반에 미친다. 가난과 궁핍 속에서도 젖을 뗀 아이의 만족함을 경험한다(시131:4;딤전 6:6).
금식은 온 힘을 기울여 행해야 실천할 수 있으며, 하나의 훈련으로서 체계적인 금식을 습관화시킨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직접적인 예배의 일부로서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 음식에 대한 부인을 경험하면 하나님의 뜻에서 우리를 멀어지게 만드는 다른 욕망도 부인 할 수 있다. 금식의 목적은 그리스도께 집중하는데 있다. 일주일에 한 끼 부터, 일주일을 채식 만하는 방법까지, 혹은 24시간을 물만 마시는 금식으로 발전시킬 수 있다. 나중에는 형편과 하나님의 허락에 따라 40일 금식까지 가능해 진다. 금식을 통하여 욕구충족에 의존하는 상태에서 벗어나도록 재훈련시켜주고, 구체적인 실존 속에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는 중요한 요인이 되게 해준다. 원하는 것을 가져야만 직성이 풀리는 상태에서 자유하게 하는 기능도 있다. 뭔가 없을 때(뭔가 없을수록) 침착하고 평온하고 강인하게 견디는 법도 배운다. 이 때 하나님의 말씀으로 필요를 채우면 전 존재와 아울러 몸을 직접 지탱시켜 주는 능력이 있다(신 8:3-5;마 4:4;요 4:32-34). 금식은 우리를 해방시켜 하나님의 풍성함에 들어가게 해주며, 영혼을 재정비하는데 엄청나게 영향을 미친다. 금식을 잘만하면 비단 음식만 아니라 전반적으로 욕심과 감정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된다.
3)검약 혹은 가난
자신의 욕망, 곧 지위욕, 사치욕, 허영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임의로 돈이나 재물을 사용하는 것을 절제하는 것이다. 검약을 실천한다는 것은 일반적인 선한 판단에 의해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삶에 반드시 필요하고 인정된 것의 범주 안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가리킨다. 사치가 행복 추구로 비쳐지는 시대에 성경의 경고를 따르는 것이다(약 5:1;5:5). 영적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낭비적 소비가 영혼을 타락하게 만드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경배와 섬김을 떨어뜨리고, 이웃에게 상처를 준다. 사치는 육체적, 정신적 능력을 심각하게 훼손시키는 범죄이며 사회의 해악을 끼치는 것이다. 훈련으로서의 검약은 숱한 욕망들에 대한 관심과 집착에서 해방시킨다. 검약은 마리아가 택한 한 가지 필요한 , 곧 좋은 편(눅 10:42)에 집중할 수 있다. 그 중에서 최고의 자유는 경제적 빚으로 말미암은 영적 구속으로부터의 자유이다. 사랑의 빚 외에는 어떤 빚도 져서는 안 된다. 사랑을 베푸는 쪽에서는 그것이 선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롬 13:8). 위대하길 원하지만 진정으로 경건하지 않은 이유는 그들 삶에서 중요하지 않은 일에 지나치게 큰 비중을 두기 때문이다. 삶의 한 양식으로 고정된 검약은 불필요한 일에서 해방시킨다. 검소(simplicity:인간의 행복에 필수적이지 않은 것은 단호하게 물리치고 뚜렷한 목적을 지향하는 삶의 구조를 갖는 것)와 가난(모든 소유를 거부하는 것)은 충분히 검약의 표현이다.
4) 순결(chastity)
타인들과의 관계에서(부부관계까지) 성적인 부분을 적절하게 유지하고 사용하는 것이다. 이것의 핵심은 성, 성적 감정 및 생각을 자제하는 훈련을 실천하고, 그럼으로 그것들에 지배를 받지 않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결혼한 사람들까지도 스스로 성을 억제함으로 배우자의 성을 그의 전인격의 한 부분으로 보고 감사함과 사랑으로 대하는데 도움이 된다(고전 7장). 이 일은 더 굳세게 성적 갈등 없이 사람들에게 친숙해지는 실천을 행하게 해준다. 순결훈련이 추구하는 주요효과는 전반적인 삶 속에서 성적행위, 감정, 태도, 생각 등을 적절히 다루는 것이다. 진정한 영성은 성이 결코 삶을 지배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성은(창 1:27) 선하고 아름다우며 하나님을 섬기는 능력의 한 부분이다. 성은 우리 존재의 본질을 이룬다. 특히 순결의 본질은 정욕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 전체가 하나의 목표를 지향하는 것이다. 순결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먼저 사랑을 실천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가정, 직장, 학교, 교회 또는 이웃에서 만나는 성의 사람들의 유익을 먼저 추구해야 한다.
5) 은밀성
자신의 선한 행위와 행적을 알리기를 삼가는 것이다. 훈련이 되면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알려지지 않거나 심지어 오해를 받아도 평화와 기쁨과 자신의 의도를 상실하지 않을 수 있다. 신앙의 길을 견고하게 하는데 이 훈련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타인과의 결과와는 상관없이 하나님과의 지속적인 관계를 체험하게 된다(시 31:20). 칭찬과 비난을 초월하는 사람에게 큰 마음의 평정이 임한다. 칭찬받는다고 더 거룩해지지 않고 비난이나 무시를 받는다고 더 악해지지 않는다. 그저 나 자신일 뿐이다, 하나님이 아신다. 항상 훌륭하게 행동하면서 자신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것은 경건한 영혼의 표시이다. 다른 피조물에 의해 위안을 얻으려 하지 않는 것이 위대한 순결과 내적 신뢰의 표시이다. 자신을 위한 외적 증거를 구하지 않는 사람은 자신을 하나님께 전적으로 드리는 사람이다.
신앙의 큰 오류이면서 가장 큰 불신앙은 영적 행동과 덕성을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광고하는 것이다(마 6장). 이것은 신앙의 결핍을 드러낼 뿐이다. 숨기는 것이 불가능한 신앙의 배양은 옳은 일이지만(마 5:14,16) 바르게 실천된 은밀성은 우리의 공적 관계의 장을 전적으로 하나님의 수중에 놓을 수 있게 해준다. 최고 수준의 은밀성은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사랑과 겸손을 가르친다. 그 사랑과 겸손은 우리로 최고의 빛 속에서 동료들을 보게 하고, 심지어 그들이 우리보다 더 낫게 처신하고 더 낫게 보이는 것을 소망하는 수준까지 이르게 한다(빌 2:3). 전에 맛보지 못했던 사랑의 홍수를 경험하려면 서로 경쟁하고 있는 상황 속에서 다른 사람이 더 탁월하고 더 칭찬을 받으며 하나님께 쓰임을 받기위해 기도해야하고, 그들의 수고와 성공을 즐거워해야 한다.
6) 희생
자신의 삶에 필요한 것들을 소유하거나 누리는 것을 삼가는 것이다. 어느 정도 남아도는 것을 절제하는 것이 아니라, 희생의 훈련은 우리 수중에 있는 것으로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을 포기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주실 것이라는 믿음과 소망 안에서 어둠의 심연 속에라도 들어갈 정도로 전적으로 포기하는 것이다(히 11:19;눅 21:2-4). 희생은 봉사에 속하는 것 같지만 선을 이루기 위해서 자신을 버리사 죽으신 그리스도를 본받는 훈련에 속한다. 희생의 대가는 실제 거지처럼 살면서도 왕처럼 누리는 영적 만족이다. 자신의 마지막 남은 속옷까지 주신 예수와, 기꺼이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포기했던 바울이 그 본보기이다. 희생하고 버리면 훨씬 더 많은 것을 누린다는 것 때문에 이 일은 어렵지만 웬만해서는 누리지 못하는 행복을 누리게 한다. 특히 예수께서 자신이 누려야할 모든 부귀영화를 거의 누리지 않고 가난하게 살았던 희생과 포기의 삶을 생각하면 결코 하나님의 나라 안에 사는 사람들이 해내지 못할 훈련이 아니다. 주님은 우리를 부요하게 하기 위해 극빈자로 지냈으나 결코 구차하지 않았으며, 모든 것을 희생했으나 결코 유치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것은 큰 사랑과 자비와 희생의 모본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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