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 세례의 필요성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려고 하면 그 일을 행하는 주체가 인간이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 하셔야만 가능한 일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하신다는 성경의 원리가 나타난다.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서 이루려면 하나님의 뜻을 알고 영의 원리를 알아야 한다. 그러나 그런 영의 원리는 도외시하고 인간의 생각과 계획으로 행하는 선한 일이라는 것들은 하나님의 뜻도 아니고 하나님의 계획도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룰 수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기 위해서는 우리 속에 거하시는 주님께서 하셔야만 된다는 것이 성경의 원리이다. 이 원리는 성령님의 조명 없이는 터득할 수 없다.(상세한 것은 필자의 책 ⌜영의 원리⌟ 영의 원리 14. 주권의 원리를 참조하라.)
우리 속에 거하시는 주님이 일하셔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뻐하시기까지는 많은 시간을 우리 속에 계시는 주님으로부터 배워야만, 즉 성령의 다룸을 받아야만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믿는 자들이 오랜 시간이 지나서 주의 일꾼이 되는 이유는 주님께서 우리 속에서 일하시는 영의 원리를 터득하는 것이 지금 기독교의 현실에서는 참으로 어렵기 때문이다. 영의 원리를 터득하는 것은 영의 원리를 알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으로부터 배워야 하는데 이런 원리를 터득하여 가르치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이 현재 기독교의 실정이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양육하신 것은 이 영의 원리를 전파하게 하시는 것이 실질적인 목적이었다. 신앙에서 십자가의 대속의 원리는 기본이다. 그러나 십자가의 대속의 원리는 알고 있는데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아버지와 함께 사는 방법을 모르고 있다면 어떻게 설명해도 그것은 신앙생활이라고 볼 수 없다. 신앙인으로서 예수님을 구세주로 모시고 실질적인 삶을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 제자들을 양육하신 실질적인 목적이셨다. 복음이라는 것은 영생을 얻는 것 외에 현실에 있어서도 좋은 소식이다. 현실에서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을 염려하지 말고 왕의 자녀로서 받아 누리면서 살아가는 그 방법을 알려 주어 기쁨이 넘치는 생활을 하라는 것이다. 이것이 복음 전파의 목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원리와 방법을 가르치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즉 사람을 통해서 이 방법을 가르칠 수가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 영의 원리를 하나님의 방법으로 그 자녀들에게 경험을 통하여 가르치신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가르치고자 하시는데, 자녀들은 그 음성을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에 교육을 시킬 수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과 함께 사시는 방법을 가르치시기 전에 하나님과 어떻게 소통하는가를 먼저 가르치셔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양들을 엉터리로 돌본 목자들의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목자에게 양들을 맡기셨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 양들에게 그 주인인 목자장의 목소리를 알아듣지 못하도록 가르쳤다면, 그 목자들은 양들을 어떻게 돌본 것인가? 그리고 목자장이 와서 양들을 처음부터 다시 가르쳐야 된다면 그 양들을 돌본 목자들은 그 책임을 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하나님께서는 그 자녀들에게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는 소통의 방법부터 가르치신다.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은 분명하게 하나님과 대화를 하고 그 내용을 기억하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데 처음 만난 하나님과 완벽한 의사소통을 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과 대화를 하고 있다는 것에 놀라고 그때서야 성경이 대화체로 쓰여 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들이 하나님과 교제가 안 되는 것을 우선적으로 해결하신다. 그리고 그것이 해결되면 하나님과 생활하는 방법을 가르치신다. 방법을 가르치는 것에 대해서도 사람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인데 왜 시간이 걸리느냐?”고 반문한다. 그러나 이런 반문은 영적인 우매함에서 나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의 기본 원리를 이해하고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신 것을 이해한다면 영적인 일에 원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인간이 의지를 드릴 때 하나님이 일하실 수 있다는 원리를 이해하지 못하면(상세한 것은 필자의 책 ⌜영의 원리⌟ 영의 원리 12. 의지의 원리를 참조하라.) 우매한 질문은 계속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지식이 없어서 망한다는(호 4:6, 각주참조) 호세아 선지자의 외침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여기서는 이 문제가 주제가 아니기 때문에 설명을 생략한다.)
성령님으로부터 배우려면 성령의 언어를 알아들을 수 있어야 하는데 대부분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방법을 모른다.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는데 보이지 않는 영의 실재와의 교제를 통하여 배우고 그 내용을 이해한다는 것은 혼자서는 난해한 일이다. 주님께서는 3년 반 동안에 제자들을 만들어 내셨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30년이 지나도 예수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이런 질문에도 그때는 주님께서 직접 가르치셨기 때문이라고 항변한다. 그렇다면, 바울은 어떻게 사도가 되었는가?
“11 그러나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12 나는 그것을 사람에게서 받지도 않았고 배우지도 않았으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하여 된 것이라”(갈 1:11-12) [한글킹]
“16 나로 하여금 이방 가운데 그를 전파하도록 내 안에 그의 아들을 계시하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내가 즉시 혈과 육에 의논하지 아니하고 17 또 나보다 먼저 사도가 된 그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도 아니하고 다만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마스커스로 돌아갔노라. 18 그리고 나서 삼 년 후에 내가 베드로를 보고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그와 함께 십오 일간을 지냈으며”(갈 1:16-18) [한글킹]
바울은 예수님의 제자도 아니었고 오히려 예수를 믿는 사람을 잡아 죽이는 핍박자였다. 예수님으로부터 배운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난 후에 아라비아에서 3년 동안을 보이지 않는 주님으로부터 배웠고 주님의 제자가 되었다는 것이 본문의 내용이다. 바울이 보이지 않는 주님으로부터 계시로 배웠던 그 방법이 우리에게 전해지지 않았고 가르치는 자가 없어서 제자 양성에 오랜 시간이 소요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오랜 세월이 지나서 주님의 제자가 되는 이유는, 지금의 목회자들이 바울과 같이 보이지 않는 주님으로부터 배우는 과정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영의 실재를 만나지도 못하고, 하나님을 만나지도 못하고 설교자가 되고 목회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론만 가지고 지식적인 내용만 말하는 엉터리 목회를 하고 있기 때문에 주님으로부터 배우는 방법도 모르고, 가르칠 수도 없었기 때문에 믿는 자들이 스스로 경험을 통하여 그것을 터득하는 데에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것이다. 주님의 계시에 따라 배우고 가르친다면 지금도 3년 반이면 그 방법을 터득하여 하나님과 교제하며 성경의 인물들과 같이 살 수 있을 것이다.
영의 원리를 터득하는 것은 성령에 대한 전반적인 지식을 주님으로부터 배워 이해할 때 가능하게 된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부터 시작하여 음성을 분별하는 법도 숙지하여야 하고 영과 혼과 육의 기초적인 개념과 원리를 비롯하여 십자가의 죽음과 성령 강림, 우리 속에 내주하시는 영의 원리 등 많은 것들을 가르침과 배움, 그리고 학습이 있어야 한다.
성령 세례는 주님께서 일하신 영의 원리를 배운다는 관점에서 조명되어야 한다. 성경의 기록들을 면밀히 보면 성령 세례가 왜 필요하였는가에 대한 단서들을 곳곳에서 찾을 수 있다. 무엇을 목적으로 성령 세례가 있었는가는 제자들의 행적과 주님의 지상 사역에서 찾을 수 있다. 성령 세례가 죄를 고백시키기 위한 것도 아니고 거듭나게 하는 것도 아니다. 이렇게 주장하는 근거는 성령의 인침, 거듭남, 성령 세례, 죄의 고백 등 각 용어의 개념이 명백하게 다르다는 것에 있다. 또한, 제자들에게 성령 세례를 받으라고 하셨던 것도 그 이유 중에 하나이다. 지금도 성경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시는 분이 오직 성령님이라는 것은 변함이 없다.
그렇다면, 성령 세례를 받을 때 어떤 상태에서 받는가? 어떤 상태에서 성령 세례를 받을 수 있는가를 알기 위해서는 성령 세례를 받을 당시 제자들의 상태를 관찰해보아야 한다. 제자들은 성령 세례를 기다리면서 오순절 다락방에 모여 있었기 때문이다. 주님의 지상 사역 중 주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실 때 “너희는 깨끗하다.”고 말씀하신 것과(요 13:10, 각주참조)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다.”(요 15:3, 각주참조)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면, 오순절 날 제자들의 상태는 이미 거듭난 상태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제자들이 거듭나지 않았기 때문에 성령 세례를 받으라고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성령 세례를 받기 위해서 죄를 고백하라고 하는 것도 그럴싸해 보이지만, 실질은 그것이 아니다. 제자들은 이미 부활의 주님을 만남으로 인하여 십자가 사역을 이해하고 있었고 죄에서 벗어난 상태였기 때문이다. 또한, 죄를 고백해야 하는 수준에서 성령 세례를 받는 것도 아니다. 제자들의 믿음은 죄를 고백해야 성령 세례를 받는 그런 수준의 믿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거듭나기 위해서 성령 세례가 필요하다고 가르치는 것도 성령 세례를 잘못 이해한 것이고, 죄의 고백을 위해서 성령 세례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도 성령 세례의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고 하는 주장이다.
사도행전 2장 38절의 내용을 성령 세례를 받기 위한 것으로 설명하는 책들이 대부분인데, 사도행전 2장 38절의 내용은 성령 세례를 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성령을 받기 위한 것이었다.(각주참조) 성령 세례를 받는 것은, 기본적으로 성령의 인침과 성령으로 인한 거듭남의 과정을 지나서 성령 세례를 받는 단계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인식하여야 한다. 성령 세례는 분명히 우리가 생각하는 그 이상의 것이다. 우리가 피상적으로 생각했던 그 이상의 상태, 즉 인침을 받고 거듭나고 제자로서 훈련을 받은 후에, 그 이상의 무엇을 하시기 위해서 성령의 세례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위해서 제자들에게 성령 세례가 필요했을까? 제자들의 행적을 순차적으로 살펴보면 주님께서 이 땅에서 제자들을 가르치셨던 지상 사역은 승천으로 인하여 끝이 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님께서 이 땅에서 사역을 하셨을 때에는 밖에서 안으로 사역을 하셨는데, 이제는 영의 원리에 따라서 내 속에서 주님을 모시고 안에서 밖으로 사역하는 전혀 새로운 방법을 배워야 했던 것이다. 이제는 보이지 않는 영으로 제자들 속에 거하시는 주님과 동행하면서 일하는 방법을 터득하여야 할 시점이 된 것이다.
성령 강림의 목적은 그리스도께서 하늘에서 영광 받으신 것을 지상에 반영시키는 것이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함께 하시며 이 땅에서 행하신 지상 사역을 제자들에게 대신 시키시기 위해서 성령님이 오셨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냈사옵니다.”(요 17:18, 각주참조)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것과 같이 예수님도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셨고, 세상일을 감당하신 예수님을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히셨듯이 제자들도 세상일을 감당하게 하시고 그 영광에 동참시키기 위해서 성령을 보내셨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셨듯이 우리도 그 영광을 받게 하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게 하시기 위해서인 것이다.(계 3:21, 각주참조) 성령 강림의 목적은 하늘에서 아버지와 함께하고 계신 그 영광에 우리를 동참시키시기 위해서이다. 이 비밀을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영적인 조명이 필요하다. 영적인 계시가 필요하고 영적인 능력이 필요한 것이다.
이 영광에 동참에게 하기 위해서는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9, 각주참조)라고 하시면서 행하셨던 주님의 지상 사역의 방법을 가르쳐야 할 숙제가 주님께 남았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성령 세례가 필요했던 것이다. 성령 세례를 통하여 제자들은 그 방법을 배우고, 성령의 능력이 함께하면서 주님께서 어떻게 지상 사역을 하셨는가를 알게 된 것이다. 성령님으로부터 배우면 스며들 듯이 이해가 된다. 학자와 같이 듣게 하시고 학자와 같이 말하게 하신다는 것을 충분히 이해한다.(사 50:4, 각주참조) 이와 같이 주님께서 지상 사역을 하실 때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여 사역하신 영의 원리를 제자들은 성령 세례를 통하여 성령의 방법과 성령의 능력으로 습득하게 되었고, 그와 똑같은 방법으로 내주하시는 성령님을 통하여 주님께서 말씀하시고 일하신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이제야 주님께서 생전에 하신 말씀과 사역을 완벽하게 이해하게 된 것이다.
성령 세례가 일회적 사건인가에 대하여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강림한 성령 세례가 일회적인지 계속적인지에 대해서는 일회적이라는 견해와 계속적이라는 견해가 대립되고 있다. 이와 유사한 논쟁으로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 성령님은 지금도 실제로 신유와 예언과 방언의 메시지를 주고 계신가? 그리스도인들이 회심 이후에 성령 세례를 받을 때 그 사역을 위해서 새로운 능력을 주고 계신가? 믿는 자의 표적이 나타나는가?’에 대해서도 은사중지론자들과 은사주의자들 사이에서 격렬한 논쟁이 있다.
은사 논쟁에 대해서 결론부터 말하면 그야말로 무의미한 논쟁이다. 성령님과 동행하여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하지 못한 자들이 주장하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주님과 동행하면서 성경의 내용이 구현되는 삶을 살다 보면 은사가 있다느니 없다느니 말할 필요 없이 경험으로 알게 되고, 하나님의 능력이 초대교회에서 그쳤는지, 아니면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시다.”(히 13:8, 각주참조)는 그 말씀의 내용이 무엇인지 모두가 다 알 수 있는 것이다. 신앙을 생활로 접근하는 것이 아니고 이론으로 접근하는 자들의 쟁론일 뿐이다. 이러한 쟁론은 그야말로 무익함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해악을 끼친다. 그 이유는 대부분 영의 실재를 만나지 못하고 이러한 신학적 체계에서 이론만을 가지고 살아가는 생활을 신앙생활이라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영의 실재를 만나지 못하고 이론적인 생활을 신앙생활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자들의 주장이 마치 성경의 내용인 것과 같이 생각하여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게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의 삶에는 이들의 주장이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많은 해악을 준다는 것이다.
성령 세례가 계속되는가의 문제는 은사중지논쟁과 연관되어 있지만 은사중지논쟁에 대해서는 뒤에서 따로 논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올바른 신앙적 체계와 신앙생활을 위해서 성령 세례가 일회적인가 계속적인가에 대해서만 보기로 한다.
오순절의 성령 강림 사건을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서 일회적이냐 계속적이냐가 나누어진다 할 것이다. 주님 사역의 완성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일회적 사건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갈보리 십자가 사건이 부활 사건과 승천 사건으로 이어지고 승천 후에 성령을 보낼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을 이루신 것이기 때문에 주님의 지상 사역의 완성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오순절 다락방의 성령 강림 사건은 일회적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언약의 차원, 즉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언약이 최종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언약의 차원, 즉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언약이 최종적으로 이루어져 확정되었다는 의미에서 보아도 오순절 다락방의 성령 강림 사건은 그 사건으로써 하나님의 언약이 완성되었기 때문에 일회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역사적인 측면이나 하나님의 언약의 측면이나 기독론적 측면에서 본다면 일회적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을 통해 그 성령 세례로 인하여 개개인이 영과 연합하여 살아가는 방법을 배운다는 측면과, 개개인이 능력을 받고 땅 끝까지 복음을 증거한다는 관점에서는 계속적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성령 세례를 경험하고 복음 증거를 위하여 능력을 받고, 또한 성령 세례를 통하여 바울이 배웠던 방법들을 배우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개인에게 임하는 성령 세례는 일회적이지, 계속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진리를 알지 못해서 처음 성령 세례를 받았을 때의 은혜를 갈망하며 영적인 기름부음의 충격과 은혜를 잊지 못하고 성령 세례의 재현을 고대하면서, 그 은혜의 현상이 재현되기를 갈망하고 많은 곳을 찾아다니고 배회하며 시간을 보낸다. 그러나 역사적 사건으로서의 성령 세례가 한 번이었듯이 개인에게도 단 한 번의 성령 세례에 의해서 하나님의 복음을 증거 할 때 필요한 능력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영적 연합을 통하여 사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 시작되는 것이다. 따라서 개인에게도 성령 세례는 한 번으로 그친다. 처음 성령 세례를 받았을 때의 충격과 그 은혜, 그 기름부음을 갈망하면서 많은 시간 몸부림을 쳐도 처음 이후에 그 은혜를 다시 경험하지 못하는 이유는, 개인에게도 성령 세례는 일회적으로 그치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모르고 있기 때문에 동일한 은혜를 체험하고자 여기저기를 쫓아다니는 것이다.
성령 세례는 계속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성령 세례 이후에는 그 능력들을 유지하기 위해서 성령 충만이 필요한 것이지, 그 능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처음의 성령 세례가 반복해서 임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개인에게 성령 세례가 한 번으로 그친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신앙생활에서 쓸모없는 방황을 막아준다는 점에서 실익이 있다. 또한 성령 세례가 각 개인에게 반드시 임한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성령 세례를 구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인식하는데 그 실익이 있는 것이다.
[회복시리즈 04. 그리스도의 영 中 일부 발췌/ 박찬빈 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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