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적 시각으로 본
삼위일체론 교육
-기독교강요 1권 13장을 중심으로-
0. 들어가면서
A. 고대 교부들의 삼위일체론의 용어 해석(I,13,1-6)
1. 하나님의 본질에 대한 해석
2. 삼위에 대한 해석
3. 새로운 신학적 용어들의 필요성과 한계
B. 성자와 성령의 인격과 신성
1. 성자의 인격과 신성
a. 성자의 인격
b. 성자의 신성
2. 성령의 인격과 신성
3. 삼위의 구별성과 일체성(16-20)
a. 한 분 하나님
b. 삼위이신 하나님
C. 칼빈의 삼위일체론 대적들(21-29)
1. 세르베투스
a. 세르베투스는 위격(位格)이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b. 세르베투스는 범신론적인 오류에 빠졌다
2. Valentinum Gentilem
a. 성부만이 하나님이라고 주장한다
b. 이들은 성자는 하나님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c. 이들은 성부와 성자의 차이점을 신성의 양으로 구별한다
d. 칼빈의 반격
D. 나가면서
0. 들어가면서
기독교인들이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왜 중요할까? 첫째는 성경의 하나님을 바로 인식하지 못하고 믿는다는 것은 우상숭배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인간은 자기가 믿고 섬기는 하나님 이해에 따라 그들의 삶의 양식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을 바로 알고 믿는 일과 하나님의 백성답게 하는 일은 같이 가기 때문이다. 특별히 고도의 사고(思考)를 요구하는 삼위일체론은 그 지역 기독교인들의 삶의 양태를 결정하는 것이다.
한국교회 성도들이 거의 대부분 양태론에 빠져 있다는 것은 자타가 공인하는 바이다. 그 원인은 교회 지도자들이 삼위일체를 설명할 때 피조물 속에서 설명근거를 가져와서 설명했기 때문인 것으로 판단된다. 즉 한국교회 지도자들이 삼위일체를 설명할 때 피조물에서 예를 가져와 설명을 시도하다가 결국 양태론에 빠졌다는 말이다. 후론하겠거니와 칼빈은 이런 시도의 위험을 간파하고 자신은 그렇게 설명하지 않는다고 했다. 말하자면 한국 기독교인들은 상당한 부분 삼위일체 하나님을 왜곡되게 이해하고 있거나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데서는 기독교인으로서 바른 정체성을 기대하기가 힘들다. 인간 이성으로 하나님을 정확하게 이해한다는 말은 이치에 맞지 않다. 작은 인간 이성으로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크신 하나님을 모두 파악한다는 것은 가능한 일이 아니다. 이런 무리한 시도는 결국 인간이 하나님을 정의하고 심판하는 오류에 빠지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 최소한 성경이 계시하는 내용을 바로 이해해 보려는 자세는 요구되는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하나님을 이용하려는 마술신앙에 빠진 한국교인들은 이런 일에 태만히 한 것이다.
칼빈이 삼위일체를 설명한 내용으로 보면 그가 성도들에게 삼위일체 하나님을 이해시키기 위해 여러 가지 노력을 한 것을 볼 수 있다. 크게는 칼빈의 기독교강요 자체는 삼위일체를 가르치는 교과서로 볼 수 있다. 그는 사도신경의 구조를 본받아 기독교강요를 삼위일체론적으로 형성했다. 제 1권은 창조주 하나님을, 제 2권은 구속주(救贖主) 하나님을, 제 3장은 구속을 우리에게 적용시키는 성령 하나님을 다룬다.
우리의 관심은 칼빈이 좁은 의미에서 삼위일체론을 어떻게 이해했고 또 어떻게 설명했는가 하는 것이다. 칼빈의 신관은 기독교강요 제 1권 10장에서 13장까지 인데, 10-12장까지의 내용은 13장에 나오는 삼위일체론의 양의 절반을 조금 넘는다.이것은 칼빈이 신론을 설명하면서 삼위일체론에 관심을 집중시켰음을 의미한다. 그는 여기서 먼저 고대 교부들의 삼위일체론을 정리하면서 자기 나름대로 삼위일체론을 설명하고(I,13,1-6) 그 다음 그는 성경의 증거에 근거하여 성자와 성령의 신격과 신성을 설명한다(I,13,7-13).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는 삼위일체론의 대적들을 비판하면서 다시 바른 삼위일체론을 설명한다(I,13,14-29). 그가 이 교리를 설명하는 내용을 보면 성도들이 이해하기에 쉽도록 설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그는 목회적인 시각으로 삼위일체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또
칼빈이 기독교강요에서 삼위일체론을 열거한 과정은 그의 교육방법을 암시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A. 고대 교부들의 삼위일체론의 용어 해석(I,13,1-6)
칼빈은 먼저 고대 교부들의 삼위체론을 간단히 점검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고대교부들이 삼위일체론을 설명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언급한 용어는 ‘하나님의 본질’, ‘삼위’, ‘위격’ 등이다. 칼빈은 이런 용어들을 차례로 설명하면서 한편으로는 고대 교부들의 삼위일체론을 점거하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성경 구절에 근거하여 그 내용을 상세하게 설명한다.
1. 하나님의 본질에 대한 해석
그러면 칼빈은 ‘하나님의 본질’(essentia Dei)을 어떻게 설명할까? 우리는 그가 두 가지로 설명함을 볼 수 있다. 그 중에 하나는 이 하나님은 인격(人格)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건전한 상태로 지키시기 위하여 그의 본질에 대해서는 별로 말씀하시지 않으시지만, 앞에서 언급한 두 가지 속성들로써 인간의 어리석은 상상을 모두 제거하시고 또한 인간의 마음의 대담무쌍함을 억제하시는 것이다”(I,13,1). 물론 칼빈은 여기서 ‘하나님이 인격이시다’라는 말을 직접 표현하지는 않는다. 칼빈이 여기서 하나님의 동작과 행위를 표현한 것을 보면 그가 인격임이 드러나는 것이다. 즉 칼빈은 하나님이 인격이심을 전제하고 하나님의 본질을 설명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런 인격성은 ‘하나님의 적응성’을 설명하면서도 드러난다. “유모가 어린 아기들을 대할 때에 흔히 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에 그렇게 우리에게 맞추어서 말씀하신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할 만큼 그렇게 지능이 모자라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주목할 만한 것은 칼빈이 여기서 세속 철학의 비인격적인 범신론을 비판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옛날 어떤 사람은 ‘우리가 보든 것이든, 보지 못하는 것이든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이다’라고 매우 그럴듯해 보이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그는 신성이 세계의 모든 개체에 주입되어 있다는 식으로 상상했다”
그 다음 칼빈은 하나님의 본질을 설명하기 위해 하나님의 속성을 두 가지 언급한다. 그것은 ‘무한하심’(immesitas)과 ‘영적임’(spiritualis natura)이다. “하나님의 무한하심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의 잣대로 그를 재지 못하도록 우리에게 두려움을 주며, 또한 그가 영이시라는 사실은 그에 관한 어떤 세속적이며 육신적인 상상에 빠지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칼빈은 이런 하나님은 인간이 도저히 파악할 수 없는 분이심을 말하는 동시에 그의 편재성을 말하여 인간 이성의 한계를 벗어난 분임을 지적한다. 이 설명 속에서도 하나님은 인격이심을 암시한다.
요컨대 칼빈은 하나님의 본질을 설명하면서 그가 인격이라는 것과 그는 인간의 이성의 능력을 벗어난 무한하신 분임을 지적한 것이다. 즉 그는 하나님이 인간 이성을 초월하는 크신 분임을 독자들에게 인식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마술신앙에 빠져 하나님을 자기 목적을 이루기 위해 이용하는 미성숙한 교인들에게 일침을 가하는 것이다.
2. 삼위에 대한 해석
칼빈은 ‘하나님의 본질’에 대해 설명한 다음 하나님은 한 분이지만 이 하나님은 구별된 삼위로 존재하심을 설명한다. “그는 자신을 유일하신 한 분으로 선언하시는 한편, 동시에 세 분의 위격으로(삼위로) 구별되게 바라보도록 그렇게 자신을 계시하신다” 칼빈은 이 같은 사실을 ‘하나님 안에 세 본체가 계신다’라고도 표현한다.
그 다음 칼빈은 세 분이 구별된 분임을 설명한다. 우선 그는 성부와 성자는 구별됨을 설명한다. 그는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은 “그 본체의 형상”이라고 말씀하는 히브리서 1:3을 인용한다. 그는 이런 표현 속에는 성자와는 다른 어떤 특질이 성부에게 있음을 의미한다고 말하여 이 두 분은 구별됨을 지적한다. 그러면 성부와 성자는 어떤 관계에 놓여 있을까? 칼빈은 성자 안에서 성부가 자신을 온전히 표현한다는 사실을 지적함으로써 이 두 사이의 관계를 설명한다. “그러나 성부께서는 비록 그가 그의 고유한 특성을 통해 아들과 구별되지만 성자 안에서 전적으로 자신을 나타내셨기 때문에, 그가 성자 안에서 자신의 본체를 나타내셨다고 주장하는 것은 충분한 이유가 된다.” 위의 내용을 도식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칼빈은 성령 역시 성부와 구별되는 분임을 지적한다. “그가 성부와 다른 분이신 것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는 여기서 성령과 성부의 구별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고 성령은 하나님인 동시에 이 하나님 안에 있는 세 본체 가운데 하나임을 말한다.
이와 연관하여 칼빈은 고대 교부들의 ‘위격’ 내지 ‘본체’ 이해를 설명하면서 동방 교부들과 서방 교부들은 이 점에서 일치함을 지적한다. 칼빈에 의하면 라틴 교부들은 ‘위격’이라는 말에 persona라는 단어를 사용했는데 그것을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subsistentia(실재)이고 희랍 교부들은 ‘하나님 안에 세 얼굴이 계시다’(προσωπα in Deo esse)라는 표현을 사용했는데 그 의미는 동일하다고 한다(I,13,2).
지금까지 내용을 도식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신약성경이 증거하는 대로 성령이 성자를 드러낸다면, 결국 성자 뿐 아니라 성자가 반영하는 성부의 본체도 성령 안에서 반영된다고 볼 수 있다. 칼빈은 여기서는 이 문제를 언급하지는 않았다.
3. 새로운 신학적 용어들의 필요성과 한계
칼빈은 ‘삼위일체’, ‘위격’과 같은 용어들을 만들어 성경의 진리를 설명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본다. 특히 대적들에게 대답하려고 할 때 이런 용어들이 매우 유용함을 지적한다. “즉 생각하는 것과 말하는 것의 확실한 규범을 성경에서 찾고, 마음의 생각과 입으로부터 나오는 일체의 말을 여기에 순응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해하기 어렵고 난해한 성경의 내용들을 보다 명백한 말로 설명하는 것을 누가 못하게 하는가?”(I,13,4). 즉 칼빈은 거짓 교사들을 폭로하기 위해 ‘삼위일체’, ‘위격’과 같은 표현들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여겼다. 이를테면, 칼빈은 아리우스에 대항하여 ‘호모우시오스’(동일본질)라는 용어가 효과적으로 작용했고 사벨리우스에 대항하여 ‘위격’ 곧 ‘한 분 하나님 안에 삼위가 일체로 계심’이라는 용어가 효과적이었음을 지적한다.
그럼에도 칼빈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 정확하게 이해한다면 ‘삼위일체’ 또는 ‘위격’이라는 용어는 잊혀져도 좋다고 생각한다(I,13,5). 말하자면 이런 용어들은 진리를 인식하는데 도구 역할을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용어 문제를 두고 고대의 수많은 교부들은 일치하지 않았음과 이들이 새로운 용어를 사용하는 것을 매우 주저하며 신중했음을 지적한다.(Inst I,13,5). 칼빈은 어거스틴도 새로운 용어를 사용하는 것을 주저했음을 지적한다. “즉 그는 이와 같은 중대한 문제를 논하기에는 인간의 말이 빈곤하기 때문에 ‘휘포스타시스’라는 용어를 부득불 사용하게 되었으나 이러한 용어로는 하나님께서 어떠한 분이시라는 것을 설명할 수 없고, 다만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실재가 존재한다는 것을 묵과하지 않기 위해 사용한 것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칼빈은 이들이 새로운 용어들을 사용하는 것이 필요함을 인식하도록 설득해야 된다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고대 교부들이 당시에 등장한 여러 대적자들과 싸울 때 이런 용어들이 있었더라면 더욱 효과적으로 물리칠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아리우스에 대항하여 성부와 성자의 본질이 같음을 말하면 아리우스의 정체가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성부와 그 본질이 동일하시다고 주장해 보라. 그러면 이 변절자의 가면을 벗길 수 있을 것이다” 또 사벨리우스 곧 성부와 성자, 성령의 명칭은 신격의 구별을 표시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벨리우스에게 ‘하나님의 본질 안에 삼위가 있다’라고 주장하면 그의 공허한 다변을 억제케 함을 지적했다.
그 다음 그는 삼위일체론을 정리한다. “본체들의 하나됨” 그리고 “한 본질 안의 셋이 있다는 것은 삼위일체의 세 위격을 의미한다” 이것은 그가 위에서 언급한 자기의 삼위일체론에 기초하여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성부, 성자, 성령이 한 분 하나님이시나 성자는 성부가 아니며 성령 또한 성자가 아니며 그들 각자는 서로가 어떤 특성에 의하여 구별된다”
칼빈은 지금까지의 내용을 마지막 절에서 자기의 삼위일체론을 요약 정리한다.
1) “위격”은 하나님의 본질에 속하며 세 “위격”들은 상호 관계하며 각기 비공유적 특성으로 서로 구별된다.
2) 실재인 “위격”은 본질과 분리될 수 없으며 특별한 표지가 있어서 본질과 구별된다. 칼빈은 이 말을 다시 설명한다. “그래서 나는 세 실재는 상호 관계를 맺고 있으면서도 각자의 특성에 의하여 서로 구별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3) 각 위에게 고유한 것은 어떤 것이라도 전달될 수 없다.
B. 성자와 성령의 인격과 신성
칼빈은 삼위일체를 설명함에 있어서 위의 내용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것 같다. 그는 성경의 역사 속에 계시된 삼위 하나님의 활동을 점검하고 위의 내용을 확인하는 것이다. 이로 보건대 칼빈의 삼위일체론에서 특이한 것은 삼위일체 내부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하여 역사속에 계시된 삼위 하나님의 사역을 관찰하여 그 내용을 설명한다는 것이다. 즉 칼빈의 경우 먼저 교부들이 전수해준 ‘내재적 삼위일체’를 설명한 다음, ‘경륜적 삼위일체’를 설명하면서 전자를 확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은 결국 성자와 성령의 신격과 신성에 대한 내용을 점검하는 문제와 연관된다.
칼빈이 여기서 관심을 집중시키는 것은 성자와 성령 두 분 다 하나님이시라는 것과 둘은 서로 다른 분임을 드러내려고 한 것이다. 그는 이것을 철학적인 사색을 통해 드러내려고 하지 않고 성경의 증거를 통해 이것을 드러내려고 한다. 이런 시도 속에서 그가 기독교인들에게 구체적인 해당 성경 구절을 통해 삼위일체 하나님을 쉽고 효과적으로 설명하려는 노력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는 고대 교부들의 삼위일체론을 능가한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삼위의 하나님이 인격이심을 강조해야 되는 이유는 성경의 하나님이 이방신들과 다른 점이 인격성에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하나님의 인격성이 무시되면 범신론에 빠져 무신론으로 둔갑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칼빈이 열거한 내용 속에서 성자와 성령이 각기 다른 인격임과 동시에 두 분이 하나님임을 어떻게 설명하는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1. 성자의 인격과 신성
a. 성자의 인격
칼빈은 여기서(I,13,7-13) ‘성자가 인격이다’라는 말을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다만 그의 사역 내지 행동을 묘사함으로써 그가 인격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칼빈은 사도들과 솔로몬의 말을 참고하면서 성자가 만물을 창조하시고 유지하시며 섭리하신다는 말에 근거하여 성자가 인격임을 드러낸다. “사도들은, 세상이 성자로 말미암아 지음을 받았으며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셨다고 가르친다(히 1:2-3)” 칼빈은 전도서 8장에 나오는 ‘지혜’와 연관하여 성자가 인격이심을 암시한다. “지혜가 만세 전에 성부로부터 나와서 만물을 창조하고 하나님의 모든 사역을 통할하였다고 소개한 것이다(잠 8:22)” 잠언서의 이 발언은 성자가 하나님인 동시에 인격임을 암시하고 있다. 칼빈은 요한복음의 한 구절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5:17)라는 구절도 잠언서의 ‘지혜’에 대한 내용과 연관됨을 지적하면서 성자가 인격이심을 분명하게 말한다.
그 외에 아래에서 논하겠지만 칼빈이 구약이 증거하는 여호와 또는 여호와의 사자가 구약속의 그리스도로서 인격임을 말하는가 하면 구약의 많은 구절들이 여호와가 그리스도임을 증거한다는 것을 주목하는 내용은 성자가 한 분의 인격임을 명백하게 보여준다.
b. 성자의 신성
칼빈은 요한복음 1장 첫 부분에 기록된 내용이 성자가 하나님이심을 매우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성자의 신성을 강조한다. “요한은 이 말씀에 견고하고 영원하신 본질을 부여하고 그에게 고유한 것이 있음을 인정하며, 또한 하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심으로 우주의 창조자가 되셨는가를 명백히 보여주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모든 계시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영예로운 칭호로 불리는 것이 마땅하듯이, 이 하나님의 실체를 지니신 이 말씀은 최고의 자리 곧 모든 예언의 원천의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 그 이유는 이 말씀이 불변하시며 하나님과 영원히 동일하시고 바로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이다” 이 구절은 성자의 신성과 위격을 동시에 보여준다고 하겠다. 그리고 칼빈은 ‘성자의 신성’을 논하면서(I,13,7) 성자가 성부에게서 나왔음을 두 번이나 강조하며 그의 신성과 동시에 위격성을 보여준다.
칼빈은 또 “말씀의 영원성”(I,13,8)을 논하면서 성자가 시간을 초월해서 영원 속에 계신 분임을 말함으로써 그의 신성을 증거한다. 그는 창조 기사를 설명하면서(창 1:3) 말씀의 능력이 나타나기 이전에 이미 그 말씀이 존재하고 계셨음을 지적한다. 칼빈은 성자에게는 시작이 없다는 것을 요한복음 17장을 인용하여 증거하고 요한복음 1장 1-3절을 언급하면서 그의 영원성을 증거하여 그의 신성을 말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성부와 성자 사이의 관계와 그의 신성에 대해 요약 정리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한 번 굳건히 정리할 수 있다: 시간의 처음 이전에 하나님에 의해 나셨고, 영원히 그와 함께 거하셨다. 이로써 이 말씀의 영원성, 그의 참된 본질 그리고 그의 신성이 증명되는 것이다.”
그 다음 칼빈은 구약성경이 성자가 하나님임을 증거하는 구절로 고개를 돌린다. 칼빈은 예수 그리스도가 성육신 하신 말씀이라는 구절이 그의 신성을 입증한다는 사실을 언급한 다음이사야 선지자의 말이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심과 하나님의 고유한 속성 가운데 하나인 최고의 권능을 지니신 분으로 제시한다.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신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사 9:6). 칼빈은 또 예레미야의 발언 곧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 그의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공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렘 23:5-6)는 구절과 “그 날에 유다가 구원을 받겠고 예루살렘이 안전히 살 것이며 이 성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는 이름을 얻으리라”(렘 33:16)는 구절이 성자께서 영원한 하나님이라는 것을 제시한다고 말한다.(I,13,9). 칼빈은 또 에스겔이 말하는 ‘여호와 삼마’(겔 48:35)라는 표현과 모세가 말하는 ‘여호와 닛시’라는 표현 등은 여호와가 그리스도임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I,13,9.).
흥미로운 것은 칼빈이 구약에 나타난 ‘여호와의 사자(천사)’를 그리스도와 연결시킨다는 것이다(I,13,10). 그는 기드온에게 나타난 ‘여호와의 사자’가 그로부터 희생제물을 받는다는 사실에서(삿 6:11,12,20,21,22; 7:5,9), 그리고 삼손의 부모에게 나타난 ‘여호와의 천사’가 하나님이라는 사실 속에서(삿 13:16,18,20,22,23), 호세아서를 인용하여 야곱이 씨름한 그 천사가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호 12:5)이라는 사실 속에서 ‘여호와의 사자’가 창조함을 받은 천사가 아니라, 충만한 신성을 지니신 하나님이심을 말한다(I,13,10). 칼빈은 또 스가랴서 2장에 나오는 ‘다른 천사를 보내시는 천사’(슥 2:3)가 만군의 여호와임을 말하며 이사야의 발언 곧 “이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그가 우리를 구원하시리로다 이는 여호와시라”(사 25:9)고 했는데 이 여호와의 천사가 바로 그리스도임을 말한다.
그 다음 칼빈은 신약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문제로 눈을 돌린다(I,13,11). 그는 사도들이 구약성경을 인용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내용 곧 성육신 사건을 증거하는 모든 구절들이 그의 영원한 신성을 증거함을 말한다(I,13,11). 이를테면, 바울이 로마서 9:32-33에서 이사야서 8:14를 인용하며 예언이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었다고 말함을 주목하고 그리스도가 만군의 여호와임을 천명한다. 칼빈은 이사야서 45:23을 인용하는 로마서 14:10-11 내용 속에서도 그런 내용을 본다. 또 시편 68:18을 인용하는 에베소서 4:8에서, 이사야 6:1을 인용하는 요한복음 12:41에서, 시편 102:25을 인용한 히브리서 1:10에서, 시편 97:7을 인용하는 히브리서 1:6에서 그런 내용을 본다. 칼빈은 사도들이 구약의 이런 내용들을 그리스도에게 적용하는 것은 성경을 왜곡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칼빈은 ‘일어나사 시온을 긍휼히 여기시는 분’이 바로 그리스도시오(시 102:13), ‘온 땅과 모든 섬들을 다스리시는 것으로 말씀하는 분’이 바로 그리스도로 본다(시 97:1).
그 외에 칼빈은 요한이 말씀을 하나님이라고 선포한 내용(요 1:1,14), 바울이 그리스도를 가리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롬 9:5)이라고 말한 내용,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심판대에 앉는다는 내용(고후 5:10), 또 하나님이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었다(딤전 3:16)는 내용, 그만이 모든 영광과 존귀를 받으시기에 합당하다(딤전 1:17)는 내용,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취하시고”(빌 2:6-7)라는 내용, 요한이 예수를 가리켜 “참 하나님이시오 영생이라”(요일 5:20)는 내용,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행 20:28라는 내용, 도마의 고백(요 20:28) 내용 속에서 그리스도의 신성을 본다.(I,13,11).
그뿐 아니다. 칼빈은 그리스도의 사역 속에서 그의 신성을 본다(I,13,12). 그는 그리스도의 창조와 섭리 사역은 그의 신성을 보여준다고 한다. “섭리와 권능으로 온 우주를 다스리시며 그의 능력의 명령으로 만물을 붙드신다는 것은 - 이는 사도가 그리스도의 사역을 말씀하는 것인데(히 1:3)- 오직 창조주만이 행하는 일인 것이다”나아가 칼빈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죄하심 속에서(사 43:25; 마 9:6), 사람의 마음의 은밀한 생각을 꿰뚫어 보는 일 속에서(마 9:4; 요 2:25) 그의 신성을 본다. 또 칼빈은 예수께서 스스로 베푸신 이적 속에서 그의 신성이 드러나지만, 그가 제자들에게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병자를 낫게하며, 귀신을 내어 쫓는 권능을 주셨다는 사실 속에서(마 10:8; 막 3:15; 6:7) 그의 신성이 드러난다고 말한다(I,13,13). 칼빈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이 교회의 서고 무너짐인 것처럼 그것을 규명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사실 그리스도의 신성과 삼위의 신성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 다음과 같은 벤델의 말은 주목할 만하다. “누구든지 삼위의 신성을 부인하면 그리스도의 신성을 마멸시키며 이와 더불어 기독교 신학의 모퉁이 돌을 내칠 뿐 아니라 복된 믿음을 저버리게 된다”
우리는 칼빈이 그리스도의 신성을 증거하는 내용이 동시에 그의 인격을 보여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삼위일체를 설명할 때 성자의 신성과 그의 인격은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위의 내용을 요약하면 칼빈은 성자가 성부에게서 나오셨다는 것과, 성자가 인격인 동시에 하나님임을 성경 구절을 통해 쉽게 설명했다는 것이다. 즉 칼빈은 이성에 의해 철학적인 방법으로 그리스도의 신성을 설명하지 않고 성경 계시 중심으로 설명을 시도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는 ‘오직 성경’이라는 종교개혁 원리에 충실했다고 본다.
2. 성령의 인격과 신성
칼빈은 성자에 대한 내용에 비해 성령의 신성에 대해서는 그렇게 많이 논하지 않는다(I,13,14-15). 그런데 그는 성령의 인격성과 신성을 정확하게 가르친다. 칼빈은 성령의 인격성과 신성을 동시에 설명하기 때문에 여기서는 이 두 가지를 한꺼번에 논하기로 한다.
칼빈은 성령이 창조 사역에 관여하셨음 속에서 그의 신성이 드러난다고 하는 동시에 문장 표현을 통해 그의 인격성을 암시한다. “그는(모세)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혹은 형체가 없는 물질 위에) 운행하시니라’(창 1:2)고 보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보도는 우리가 지금 지각하고 있는 우주의 아름다움이 성령의 능력 덕분에 힘있게 보존되고 있다는 것뿐만 아니라, 우주가 그런 아름다움으로 장식되기 전부터 성령께서 그 혼돈 덩어리에 관여하셨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칼빈의 발언도 성령의 인격성과 신성을 잘 반영한다. “성경이 성령께 속한 임무로 가르치고 또 경건한 자들이 실제로 성령께서 행하시는 것으로 느끼는 일들 - 세상에 가득하여 만물을 지탱시키고, 자라게 하고, 하늘과 땅에서 만물을 살리는 등의 일들 - 은 피조물이 행하는 일과는 전혀 거리가 먼 것이다. 또한 성령께는 한계로 정해진 것이 없기 때문에 그는 피조물들의 범주에 속하지 않으시며, 만물에게 생기를 주입시키시고 본질과 생명과 움직임을 불어넣어 주시는 데에서 그의 신적인 위엄이 드러나는 것이다”
칼빈은 성령의 중생시키시는 사역 속에서도 그의 신성과 인격성을 보여준다. 그는 성령의 중생시키는 사역을 설명하면서 성령의 독자성을 지적할 뿐 아니라 이 사역이 하나님께만 속한 기능임을 지적한다. “그런데 성경은 곳곳에서 성령께서 중생을 일으키시는 분으로, 그것도 빌려온 능력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능력으로 중생을 이루시는 분으로 말하고 있고, 또한 중생뿐만 아니라 미래의 영생을 베푸시는 주체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 다음 칼빈은 성도들이 하나님과 교통하는 일, 칭의와 성화 그리고 은사를 분배하는 성령의 사역을 설명하면서 성령의 독자적인 위치와 그의 신성을 설명한다. 끝으로 칼빈은 성령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 분으로서 그 분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만일 성령께서 하나님 안에 계신 실체가 아니시라면, 선택과 의지가 그에게 있다는 식으로는 결코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성령께 신적 권능이 있음을 매우 분명하게 가르치며, 또한 그가 본체로 하나님 안에 거하신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칼빈은 이것으로 그치지 않고 성령이 하나님이심을 증거하는 성경 구절을 언급함으로써 그의 신성을 증명한다(I,13,15). 먼저 칼빈은 ‘하나님의 성전’을 ‘성령의 전’과 동일시 한다는 데서(고전 3:16-17; 6:19; 고후 6:16) 그의 신성을 본다. 동시에 칼빈은 베드로가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책망할 때 사용한 성령의 명칭에서도(행 5:3-4) 그와 같은 것을 본다. 또 칼빈은 사도들이 하나님을 지칭하는 구약성경 구절을 신약에서 인용할 때 그 분을 성령으로 표현하는 것 속에서도 그의 신성을 본다(사 6:9; 행 29:25-26; 벧후 1:21; 사 63:10). 그 외에 칼빈은 성령에 대한 범죄를 설명하면서 그 분이 하나님임을 증거한다(I,13,15).
위의 내용은 칼빈이 성령을 증거할 때 사변적인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오직 성경을 주목하여 그의 신성을 증명해 낸다. 여기서도 그는 ‘오직 성경’이라는 종교개혁의 원리에 충실함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그런데 칼빈은 여기서는 성자를 설명할 때와는 달리 성령이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온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그의 관심은 오직 성령의 신성에 집중한다.
3. 삼위의 구별성과 일체성(16-20)
칼빈은 삼위일체에서 성자와 성령이 어떤 분인지를 각각 성경의 증거로서 규명한 다음 세 분 사이의 관계를 설명한다.
a. 한 분 하나님
칼빈은 하나님이 한 분임을 증명하기 위해 세례와 믿음을 설명한다. 세례는 한 분 하나님 이름으로 베풀어진다는 것이다. “세례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 안에서 자기 자신을 완전히 명확하게 보여주신 한 분 하나님의 이름으로 베풀어질 것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본질 안에 삼위 - 한 분 하나님이 오직 이 분들 안에서 알려지신다 - 가 거하신다는 것이 너무나 분명하게 인식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칼빈은 믿음이 오직 한분 하나님과 관계함을 지적하는 동시에 그리스도께서 성부와 성자 그리고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는 명령은 우리가 한 믿음으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믿는 것과 연결되어 성자와 성령이 하나님의 본질임을 추론해 낸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오직 한 분이시라는 것이 이미 확실하게 세워진 원리이므로, 우리는 말씀과 성령이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질이시라고 결론짓게 되는 것이다”
b. 삼위이신 하나님
한 마디로 칼빈은 여기서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은 구별되는 분들임을 설명한다. 칼빈은 이 구별을 설명하기 위해 먼저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의 말을 인용한다. “한 분 하나님을 생각하자마자 즉시 삼위의 광채에 싸이게 되고, 삼위를 구별하여 보자마자 곧바로 다시 한 분 하나님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칼빈은 다음과 같이 이 구별을 설명한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라는 단어들 자체가 진정한 구별을 시사하여, 따라서 하나님께서 그의 사역들에 따라서 이 이름들로 다양하게 불리는 그 명칭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우리는 여기서 칼빈이 양태론과 삼신론을 동시에 경계함을 볼 수 있다.
성경에는 한 꺼 번에 세 분 곧 성부, 성자, 성령이 구별된다고 말하는 구절이 없기 때문에, 칼빈은 우선 성경에서 성부와 성자가 구별되는 것을 말하는 내용을 언급하여 그 구별을 규명해 낸다(슥 13:7; 요 5:32; 8:16; 1:3; 히 11:3). 특별히 성부가 성자를 이 세상에 보내신 사실을 언급하여 이 두 분이 구별됨을 규명한다(요 1:18; 17:5). 그 다음 칼빈은 성령이 아버지에게서 나온다는 사실과(요 15:26; 14:26) 예수께서 다른 보혜사(요 14:16)를 보내신다는 구절을 언급하며 세 분이 구별됨을 보여준다.
칼빈은 다시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 세 분의 순서를 중심으로 세 분이 각기 다른 위격임을 보여주려고 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 주제를 논하면서 삼위일체를 설명할 때 사람들의 일에서 나온 비유를 사용하는 것이 위험함을 지적한다는 사실이다. 먼저 칼빈은 하나님의 사역을 중심으로 그 순서에 대해 말한다. “모든 활동의 시작과 모든 일의 근원과 원천은 성부께 있고, 또한 지혜와 경륜과 모든 일의 질서 있는 시행은 성자께 있으며, 또한 그 활동의 능력과 효력은 성령께 있다는 사실이다”칼빈은 사람들이 먼저 성부를, 그 다음은 그에게서 나온 지혜인 성자를, 마지막으로 두 분에게서 나온 성령 곧 하나님의 계획과 작정들을 시행하는 능력을 생각한다고 말함과 동시에 고대 교회가 가르친 삼위 간의 관계를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성자께서는 오직 성부께로부터 오시고, 성령은 성부와 성자께로부터 동시에 나오신다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칼빈의 목회적인 교육 자세를 볼 수 있다. 그는 성도들이 이것을 잘 이해하기 위해 연거푸 비슷한 내용으로 설명하고 있다.
칼빈은 성부, 성자, 성령이 구별될 뿐만 아니라 이 셋은 밀접한 관계에 있음을 설명한다. “성자는 성부와 함께 한 하나님이시다. 그 이유는 그는 동시에 성부와 한 성령을 가지기 때문이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의 영이므로 성부나 성자와 전혀 상관 없는 다른 존재가 아니다”라고 한다. 칼빈은 삼위일체 세 분의 관계와 각각의 고유성에 대한 내용을 명확하게 가르치기 위해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각기 세 분에게는 고유한 특성이 있다는 것과 더불어 각 본체(위격) 안에 온전한 신적 본성이 거하시는 것이다”
칼빈은 마지막에서(I,13,20) 지금까지 삼위일체 교육 내용을 요약 정리한다. 먼저 알아야 될 것은 하나님이라는 단일하고 유일하신 본질이며 그 다음 그 안에 삼위 혹은 세 본체가 계시다는 것이다. 그리고 세 분 사이의 관계를 설명한다. 이 말은 칼빈은 각 부속품의 특성을 잘 설명한 뒤에 그 부속들이 저절로 서로 맞추어져 몸통 전체를 이루게 하듯이 성도들이 하나님의 본질, 세분의 위격의 특성 그리고 그 각각의 관계를 잘 설명하여 성도들의 머리속에서 저절로 삼위일체가 종합될 수 있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아래 도식과 같은 그림이 그려지도록 만든다는 말이다. 그리고 칼빈은 여기서 매우 목회적인 발언을 한다. “그러므로 알아서 유익이 되는 내용을 간단히 제시할 것이니, 진지함을 정말로 사랑하며 또한 주어진 믿음의 분량대로 만족하는 이들은 이를 받아들이기를 바란다”.
칼빈은 지금까지 내용을 도식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C. 칼빈의 삼위일체론 대적들(21-29)
매우 흥미로운 사실은 칼빈이 자신의 삼위일체론을 열거한 다음, 항목을 정해 놓고 대적들을 비판한다는 점이다. 아마 그 당시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세력들이 교인들을 미혹했기 때문에 목회적인 차원에서 교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그렇게 한 것 같다. 칼빈은 이 부분에서 앞에서 언급한 자기의 삼위일체론을 매개로 하여 이단들을 비판하면서 교인들에게 삼위일체론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칼빈은 모든 이단의 근원이 사탄임과 이단들의 핵심 공격 내용이 성자와 성령의 신성을 부인하는 동시에 각 위격의 구별을 부정하는데 있음을 먼저 집고 넘어간다.그리고 칼빈은 처음부터 삼위일체론의 대적을 간헐적으로 언급한다. 이를테면 그는 범신론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지만 그런 사상을 비판한다. “고대의 어떤이는 ‘우리가 보는 것과 또 보지 못하는 것 모두가 하나님이시다’라고 그럴 듯한 말을 했다. 이 말에 의하면 그는 세계의 모든 부분에 신성이 침투해 있다고 상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칼빈은 마니교의 이원론적 오류를 지적하고 지나간다. “저들은 두 원리를 가정함으로써 악마를 하나님과 거의 동등한 지위에 놀려놓았던 것이다” 그리고 칼빈은 양태론을 비판한다. 또 그는 성자의 신성과 관계해서는 그것을 부인하는 유대주의를 대적으로 삼고 그들의 문제점을 논한다. 우리는 여기서 칼빈이 정식으로 비판한 그의 대적들만 분석하고 평가하려고 한다.
1. 세르베투스
칼빈은 세베르투스의 반(反)삼위일체론을 비판하면서 먼저 자신의 삼위일체론을 일목요연하게 열거하고 하고 넘어간다. 마치 칼빈은 비판의 표준을 제시라도 하는 듯이 그렇게 한다. “한 분 하나님의 본질은 단일하며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 그 본질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연장된다는 것, 그러나 반면에 성부의 고유한 속성이 성자와 다르며, 성자의 고유한 속성이 성령과 다르다는 것을” 칼빈에 의하면 이런 삼위일체론만 구비되면 아리우스와 사벨리우스는 물론 고대의 잘못된 이단들의 입을 막을 수 있다고 한다.(I,13,22).
a. 세르베투스는 위격(位格)이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면 칼빈은 세르베투스의 문제점은 어디에 있다고 보는가? 칼빈은 세르베투스가 위(位)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한 연고로 반삼위일체자가 된 것으로 판단한다. 칼빈은 지적하기를 세르베투스는 “하나님의 본질 안에 삼위가 존재하신다고 이야기하면 결국 하나님이 셋으로 분리되신다는 것이 되는데, 이 세 가지 연합은 하나의 상상인데 이는 하나님의 단일성과 모순되기 때문이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칼빈은 세르베투스가 삼위일체를 믿는 자들을 “Trinitarios”라고 부르며 이들이 무신론자들이라고 비난한 것을 주목한다.이것은 세르베투스가 고대 교부들이 창안한 위격(位格)이라는 이 단어를 바로 이해하지 못한 것을 의미한다.
칼빈은 또 세베르투스의 주장을 묘사하되 “그는 위(位)들은 하나님의 본질 속에 진정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요 우리에게 이런저런 형식으로 하나님을 나타내 주는 특정한 외형적인 관념들이라고 주장하였다. 태초에는 말씀과 성령이 본래 동일했기 때문에 하나님 안에 구별이 없었는데,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으로서 나오시고 성령이 하나님으로부터 또 다른 하나님으로 나오신 후부터 구별이 생겨났다는 것이다”라고 했는가 하면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었고, 그의 관념의 반영이었으며, 또한 성령은 그의 신성의 그림자였다는 식으로 설명하기도 했으나”라고 열거했는데, 이것은 양태론과 같은 것이다.
b. 세르베투스는 범신론적인 오류에 빠졌다
칼빈은 세르베투스가 위격을 무시한 것은 결국 범신론에 빠진 연고로 그렇게 되었음을 주목한다. 즉 세베르투스가 범신론적인 오류에 빠진 나머지 성자와 성령의 신성을 부인하는 것으로 비판한다. “결국 그는 마치 우리 속에도 실체로 있고, 또한 나무와 돌 속에도 있는 그 동일한 영이 하나님의 일부분인 것처럼, 분배의 양식에 따라서 보면, 하나님의 일부분이 성자에게나 성령에게 있는 것이라고 선언하여, 그리스도와 성령의 신성을 무(無)로 돌려버리는 것이다”(Inst I,13,22).
칼빈은 세르베투스가 위(位)란 단순히 “하나님의 영광의 가시적인 현현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을 주목하고 요한복음 1:1과 요한복음 17:5에 근거하여 성부와 성자 위격이 실재함을 규명해 낸다. 그리고 칼빈은 성령의 위격을 부인하는 세르베투스의 발언에 대항하여 그가 범신론적 오류에 빠진 결과 그렇게 주장함을 주목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저주스러운 것은 성자와 성령을 다른 피조물들과 구별하지 않고 완전히 뒤섞어 놓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본질 속에는 여러 부분들의 구분이 있는데, 그 각 부분이 하나님이시라고 공공연히 선언하고 있다. 그리고 특히 신자들의 영들이 하나님과 똑같이 영원하며 본질이 동일하다고 진술하며, 다른 곳에서는 사람의 영혼뿐만 아니라 다른 피조물들에게까지도 본질적인 신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칼빈이 본 세르베투스의 문제점이 그가 성자와 성령을 피조물과 혼합시켰다고 지적한 니이젤의 말은 매우 적절한 것이다.
한 마디로 칼빈에 의하면, 세르베투스가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이유는 그가 위격의 의미를 몰랐고 동시에 범신론적인 오류에 빠져 있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2. Valentinum Gentilem
a. 성부만이 하나님이라고 주장한다
칼빈은 여기서 괴물이라고 표현한 이 인물의 이름을 거론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칼빈 선집(OS)의 편집자를 통해 그의 이름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이 반(反) 삼위일체론자인 발렌티눔은 무엇을 주장했을까? 칼빈이 묘사한 내용을 언뜻 보아도 이 괴물은 종속론자가 아니면 아리우스의 추종자임을 알 수 있다. 칼빈이 묘사한 그의 정체는 다음과 같다. “어떤 악당들이 세르베투스의 불경스러움의 혐오와 수치를 피하기 위하여 삼위가 계시다는 것을 고백하지만, 거기에 단서를 붙이기를, 홀로 참되고 정당한 하나님이신 성부께서 성자와 성령을 만드시고 그들에게 자기 자신의 신성을 전입시켰다” 칼빈은 이 괴물의 종속론적인 발언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성부가 유일하게 본질 수여자(essentiator)라는 점에서 성자 및 성령과는 구별된다” 다음과 같은 발언도 여기에 속한다. “우선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흔히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리신다는 사실을 논지로 삼고, 이를 근거로 하여 오직 성부만이 정당한 의미에서 하나님이시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칼빈은 여기서 이들을 비판하면서 성부와 성자가 동등한 하나님이심을 드러내려고 하는 것이다.
b. 이들은 성자는 하나님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위에서 본 대로, 칼빈에 의하면, 이들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아니고 단지 성부의 신성을 전입(轉入) 받은 존재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칼빈은 이들이 어리석게도 그리스도가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그를 한 위격(位格)의 아들로 생각한다고 오해함을 비판한다. 그리고 이들은 위격(位格, persona)의 의미를 모름을 통해 이런 오류에 빠짐을 간접적으로 지적한다. 이에 대해 칼빈은 이들이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는 하나 성부만이 참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나누어지지 않는 본질의 단일성’(simplex essentiae unitas)을 보지 못한 연고라고 비판한다. 그리고 칼빈은 성부만이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결국 성자는 하나님의 지위에서 내던져지고 만다고 본다.
칼빈은 이들에게 대항하여 성경의 증거를 통해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심을 명확하게 설명한다. 칼빈은 구약을 인용하는 신약의 기자들이 이해한 내용을 매개로 하여 구약의 하나님이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임을 증거함을 지적한다. 이를테면 요한이 이사야서 6:1에 나오는 하나님이 그리스도로 단정하는 것이라든가(요 12:41),바울이 이사야가 말씀하신 하나님이 바로 그리스도라고 증거한 내용(롬 9:33), 그리고 바울이 이사야서 49:18과 45:23에 나오는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해석한 것을 주목하며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심을 규명한다. 그리고 칼빈은 히브리서가 시편을 인용하여 그가 창조자이심(히 1:10; 시 102:25-26)과 천사의 경배를 받으실 분()히 1:6; 시 97:7)임을 지적함을 통해 그가 하나님임을 보여준다.
또 칼빈은 구약 성경의 ‘여호와’라는 이름이 그리스도에게 적용될 수 있으며 성부로부터 신성이 전이(轉移)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존하신 분이며 이사야가 말하는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사 44:6)는 구절은 그 하나님이 바로 그리스도임을 지적한다. 칼빈이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창조자이신 성자는 자존하시며 성부로부터 신성의 본질을 전입 받은 것이 아님을 강조한다.
이런 설명은 성경의 통일성과 사도들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을 전제한다. 우리는 칼빈의 설명에서 사변적인 논리 장난이 전혀 보이지 않고 오직 성경에 근거하여 자기가 주장하는 펼치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이들이 그런 잘못된 주장을 하는 것은 그들의 사고방식이 범신론적인 데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c. 이들은 성부와 성자의 차이점을 신성의 양으로 구별한다
칼빈은 발렌티눔이 성부와 성자 사이의 차이점을 본질의 양의 차이로 봄을 주목한다. 칼빈은 이들이 성자가 본질(essentia)을 부분적으로 공유한다고 여기며 신성을 부분적으로만 소유하는 성자를 반신(反神)으로 만든다고 비판한다. 또 이럴 경우 하나님의 본질을 찢어놓는 오류를 범한다고 비판한다. 그리고 칼빈은 만일 이들이 “성부가 본질을 성자에게 주시면서도 여전히 유일한 하나님으로 남아 계시고 그에게 신적 본질이 그대로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결국 “그리스도는 상징적인 하나님, 곧 겉모양과 이름은 하나님이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이 아닌 존재가 되어 버릴 것이다”라는 결론을 얻게 된다고 지적한다. 즉 성부가 성자에게 자기의 신성을 부어주면 그만큼 성부에게는 신성이 부족할 텐데 그럼에도 성부가 온전한 하나님으로 남는다면, 성자에게로 신성이 흘러들어가지 않게 된다는 말이다. 칼빈은 여기서 이들의 자가당착을 포착한 것이다. 말하자면 이것은 이들이 존재론적인 사고방식에 빠진 나머지 위격의 구별과 각 위격의 특성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비판한 것이다. 칼빈은 이들의 경우 성자가 신적인 본질을 부여받은 것이라면 그것을 빼앗길 경우에는 하나님이 아님을 주목한다. 그 결과 칼빈은 이들이 명목상으로는 그리스도를 하나님이라고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그를 하나님으로 보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이에 대항하여 칼빈은 전통적인 삼위일체론을 소개하면서 독자들로 하여금 이들의 오류에 빠지지 않게 한다. “성부와 성자는 모두 신적 본질을 전체로서 완전하게 공유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다면, 본질에 관해서는 성부와 성자 사이에 구별이 없는 것이다”
d. 칼빈의 반격
칼빈은 이런 이단에 대항하여 삼위 세 분 모두 하나님임을 성경을 통해 규명한다(I,23,24). 먼저 칼빈은 성부만이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는 이 이단에 대항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임을 성경 구절로 규명해 낸다. 그 다음 삼위 세 분이 하나님임을 말한다. “그러므로 창조의 능력과 명령할 수 있는 권세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공통되는 것이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I,23,24). 또 칼빈은 요한복음 4:24에 나오는 “하나님은 영이시니”라는 구절이 성부, 성자, 성령께 동등하게 적용된다고 말함으로써, 세 분 모두 하나님임을 말한다.
칼빈은 이들이 위격과 본질 사이의 관계를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하여, 즉 각 위(位)가 신적 본질 가운데 자기 자신의 분리된 몫을 지니고 있다면 삼신론(三神論)에 빠질 것으로 비판한다(I,13,25). 이들을 비판하기 위해 칼빈은 먼저 전통적인 삼위일체론을 언급하고 그들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하나님의 본질이 하나이며, 따라서 성자와 성령의 본질이 낳은 바 된 것이 아니지만, 성부께서 순서상 첫째가 되시고 또한 바로 앞에서 논의한 바대로 그가 친히 그의 지혜를 낳으셨으므로, 성부를 가리켜 신성 전체의 시초요 근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옳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단서가 없는 그냥 하나님은 나신 바 되지 않으신 분이요, 또한 성부 역시 그의 위격에 관한 한 나신 바 되지 않으신 것이다”(I,13,25). 그리고 칼빈은 이들이 전통적인 삼위일체론을 오해하여 그것을 ‘사위일체’로 비웃음을 지적한다. 이들은 세 위격과 본질의 관계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이에 대항하여 칼빈은 “우리는 위격을 본질과 분리시키는 것이 아니고, 각 위들이 그 본질 내에 머물러 있는 상태에서 서로 구별된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I,13,25)라고 말한 다음, 만일 이들의 주장대로 위격이 본질과 분리되었자면 삼신을 하나로 결합하는 것과 같은 결과가 생길 것이라고 말한다. 칼빈에 의하면, 이들의 삼위일체론은 결국 한 하나님과 두 피조물의 결합인 것이다.
그 다음 칼빈은 이들이 생트집을 잡는 문제들에 대항하여 대답한다. 이를테면 이들은 성경에서 그리스도가 성부보다는 위상이 낮은 것으로 표현한 구절을 대며 종속론적인 발언을 하나 칼빈은 성경 내용에 근거하여 그들의 발언에 쐐기를 박는다(I,13,26).
그리고 칼빈은 마지막으로 이들이 교부들을 잘못 인용하는 것을 점검하고 비판한다. 먼저 이들은 이레니우스를 잘못 이해하고 이용했다는 것이다. 이레니우스의 경우 이들과는 달리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다. 칼빈이 요약한 이레니우스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그렇기 때문에 이레니우스의 진술의 요점은 바로 이것이다. 그리스도의 아버지 이외에는 성경에서 다른 하나님을 선포하지 않는다는 것이 분명하며, 따라서 다른 신을 상상하는 것은 그릇된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높이시는 그 이스라엘의 하나님 이외에는 다른 하나님이 없다는 사실을 그렇게도 자주 강조하는 것이 전혀 놀랄 일이 아닌 것이다 …… 곧 그 옛날 족장들에게 나타나셨던 그 하나님은 다른 분이 아니라 바로 그리스도이셨다고 말이다”
또 칼빈은 이레니우스의 저서(Adv. haer.) 3권 6장을 인용하여 “성경에서 절대적인 의미로 아무런 단서 없이 하나님으로 불려지시는 분은 진실로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며, 또한 그리스도께서 절대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으로 불려지신다”라고 말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신성을 명확하게 말한다. 칼빈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임을 주장하는 이레니우스의 글을 계속 인용하면서 그의 신성을 주장한다.
또 칼빈은 이 대적들이 터툴리안의 글을 잘못 이해했음을 지적하고 터툴리안의 글을 소개하며 삼위일체 속의 성자가 하나님임을 증명하고 있다. “한 분 하나님이 존재하시며 경륜에 따라 그의 말씀이 존재하신다. 하나님은 본질의 단일성을 통해 유일하신 하나님이며 그럼에도 그 단일성은 그들의 신비로운 사역을 통해 삼위일체로 질서를 이루신다. 세 분은 상태에 따라서가 아니고 단계에 따라, 본질에 따라서가 아니라 형식에 따라, 능력에 따라서가 아니라 위격들의 수에 따라 존재한다.”
마지막으로 여러 교부들을 언급하면서 그들이 한결같이 삼위일체를 확증함을 지적하는 동시에(이레니우스, 유스티누스, 힐라리우스, 이그나티우스, 어거스틴) 아리우스가 고대의 인정을 받는 저술가를 인용하지 못함을 지적하여 그의 가르침은 정통성을 유지하지 못함을 암시한다.(I,13,29).
칼빈은 자기의 삼위일체론을 마무리하면서 목회자로서 성도들을 사탄의 세력으로부터 보호하려는 의도를 내비친다. “자 이제 경건한 독자들은, 지금까지 교리에 대한 순전한 믿음을 왜곡시키고 어둡게 만들기 위하여 사탄이 사용해 온 온갖 비난들이 지금까지의 논의를 통해서 반박된 것을 인식하리라 믿는다”(I,13,29).
D. 나가면서
1. 칼빈의 기독교강요 1권 13장에 나오는 삼위일체론은 단순히 하나의 삼위일체론을 설명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나름대로 삼위일체 교육 방법이 반영되어서 여기에는 칼빈의 목회 정신을 볼 수 있다. 그는 먼저 고대교부들의 삼위일체론을 소개한 다음, 그것을 성경 구절을 동원하여 성도들이 손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2. 칼빈의 삼위일체론은 근본적으로는 서방교회를 따르나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를 잇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는 크리소스툼의 저서를 읽으면서 동방교회 신학과 만난 것으로 판단된다.
3. 칼빈의 삼위일체론은 매우 성경적이다. 매우 사변적인 내용을 성경 구절을 통해 성도들이 쉽게 접근하고 이해할 수 있게 만들었다.
4. 칼빈은 당시의 대적들의 문제점을 자세하게 열거하고 비판함을 통해 성도들이 실족하지 않도록 했다. 이것은 매우 목회적인 것으로 높이 평가할 수 있다. 칼빈의 이런 자세는 막연하게 복음만 전하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식으로 사역하는 한국교회 지도자들에게 무언의 암시를 하고 있다. 담임목사들은 자기 주위에 등장하는 이단들을 정확하게 분석해서 성도들이 실족하지 않도록 해야 된다는 말이다.
5. 우리는 칼빈을 통해 삼위일체론을 효과적으로 가르치는 요령을 습득하게 된다. 1) 즉 먼저 우리는 세 분이 위격 내지 인격이심을 성경구절을 통해 규명해 낸다. 2) 그 다음 세 분이 하나님임을 성경 구절을 통해 설명한다. 3) 마지막으로 성부와 성자의 관계, 성부와 성령의 관계 그리고 성자와 성령 사이의 관계를 구체적인 성경 구절을 통해 규명한다. 그리고 성도들이 자연스럽게 그 마음속에서 이 세 분의 관계를 조립토록 해야 한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본질’, ‘위격’, 그리고 ‘세 분의 관계’가 삼위일체를 바르게 이해하는 관건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으로 만족할 수 없다. 이 세분의 사역 곧 창조, 섭리, 보존 등이 어떻게 이루어지며 그런 사역이 우리의 삶과 어떤 관계에 놓여 있는지 가르쳐야 한다. 이렇게 될 때 삼위일체 하나님은 성도들의 개인의 삶과 연결되어 이원론에 빠지지 않고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신앙생활의 성공 여부는 이 삼위일체 하나님과 성도 간의 인격적인 관계에 달려 있는 것이다. 칼빈은 이런 면에서 매우 모범적으로 삼위일체론을 가르친 것으로 평가된다.
참고서적
1) 1차자료
-Joannis Calvini, OS III. Chr. Kaiser: Monachii in Aedibus, 1967.
-Johannes Calvin, Unterricht in der christlichen Religion. übersetzt von O.Weber, Neukirchener Verlag, 1984. 3. Aufl.
-John Calvin,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ed. bz John T. McNeil. tr. bz Ford Lewis Battles in LCC vol. XX(Philadelphia: The Westminster Press, 1967. 4th. printing.
-John Calvin,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tr. by Henry Beveridge. Grand Rapids: Eerdmans, 1989.
-Jean Calvin, Institution de la religion chrétienne. Aix-en-France: Edition Kerygma/ Charols: Editions Exelsis, 2009.
-죤 칼빈, 『基督敎綱要』 上, 中, 下권 김종흡 신복윤 이종성 한철하 공역. 서울: 생명의말씀사, 1994. 14쇄.
-존 칼빈, 『기독교강요』 in 세계기독교고전 44. 원광연 역. 서울: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03.
2) 2차 자료
-François Wendel, Calvin. Ursprung und Entwicklung seiner Theologie. Neukirchen: Neukirchener Verlag, 1968.
-Wilhelm Niesel, Die Theologie Calvins. München: Chr. Kaiser Verlag, 1938,
-요셉 하트이안 편저, 『칼빈의 조직신학 해석』 한국칼빈주의연구원 편역. 서울: 기독교문화협회, 1986.
-Ford Lewis Battles, Interpreting John Calvin. Grand Rapids: Baker Books, 1996.
권호덕 교수(전 백석대 조직신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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