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녀 바벨론과 짐승
(계 17:1-18)
Ⅰ. 도입
17-20장은 악의 세력의 실세들인 용과 두 짐승과 큰 성 바벨론의 멸망을 기술합니다. 이는 16:10-21에서 5-7번째 천사들의 대접재앙으로 사단의 진영인 공중과 큰 성 바벨론이 철저하게 파괴된 사실에 근거합니다. 전자는 후자를 보다 발전시키고 구체화시켜 설명합니다. 그러나 사실상은 악의 세력들에게 동시적으로 발생하는 종말적 심판사건일 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요한계시록은 두 가지 이중적인 결론을 가집니다. 사단 세력의 총체적인 멸망(17-20장)과 새 창조와 교회의 승리(21:1-22:9)입니다. 물론 이 두 결론은 공히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의 성취에 근거합니다. 요한이 계시록에서 교회공동체의 구속과 구원의 은혜의 영광을 찬양하는 대목마다 어린양을 강조하는 이유가 이런 사실로 말미암습니다(5:5-6, 9, 12, 7:10, 14, 12:11, 14:1, 15:2-4, 19:7-8, 21:22).
17-20장을 세분화시키면 바벨론의 심판과 멸망(17:1-19:10), 두 짐승의 심판과 멸망(19:11-210, 용에 대한 심판과 멸망(20:1-3, 7-10절), 짐승의 표를 받고 그 우상에게 절한 불신자들에 대한 최후의 심판과 멸망(20:11-15) 등의 내용을 포함합니다. 특별히 사단의 도성으로 간주되는 큰 성 바벨론의 구속사적 의미와 관련해 요한은 역사적 바벨론 제국의 정체성을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악의 세력으로 판정합니다. 나아가 그 필연적인 멸망을 하늘 보좌를 찬탈하려다 실패해 내어 쫓긴 사단의 패배에 비유해 설명하고 있는 이사야의 관점(사 14:12-15)을 의식합니다. 물론 이를 보다 근원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바벨사상의 근저에는 아담과 하와를 부추겨 유아독존식의 지존사상을 충동함으로 하나님을 적극 대적케 했던 사단의 반역적인 음모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런 사실은 후에 바벨탑 축조사건을 통해 공개적이고 가시적으로 드러납니다.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라”(창 11:4). 이는 피조물로서 창조주 하나님의 거룩과 존귀와 영광에 도전하는 패역하고 망령되며 배도적인 발상입니다. 선악과 시험사건 속에 은폐되었던 사단의 반역적인 지존사상은 이런 식으로 타락한 아담과 하와의 후손을 통해 바벨탑 사건 속에서 다시 한번 재현돼 구체화되기에 이릅니다. 이처럼 바벨사상은 인본주의와 인간 지존사상의 극치를 보여주는 반신(反神)적 사상과 맥을 같이합니다. 이 표현 속 어디에도 하나님에 대한 신앙심과 경외심은 발견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철저히 부인되고 외면되며 거부됩니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을 적극 대적했던 바벨사상은 바벨론 제국의 출현으로 역사 속에서 재현됩니다. 바벨론 제국은 이스라엘을 침략해 멸망시킴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한 세력의 총수인 사실을 다시 한번 재확인시켜 줍니다. 이처럼 바벨사상은 태초부터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미혹해 하나님과 원수되게 하려는 사단적 사상으로 정립돼 타락한 인간의 죄성을 통해 계승돼 나옵니다. 요한은 구약적 배경을 통해 바벨사상의 사단적 실체를 파악하고 바벨론 제국의 필연적인 심판과 멸망을 사단의 종말적 심판과 병행시키는 가운데 계시록에서 사단세력을 상징하는 주요 모티브로 바벨론의 영적 이미지를 차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 강론에서는 먼저 계 17장을 통해 큰 성 바벨론과 동격으로 소개되는 음녀(5절, 18절)와 음녀가 타고 있는 붉은 짐승(3절)에 대해 살펴봅니다. 음녀는 바벨론의 타락상과 죄악상을 의인화시켜 상징하는 표현입니다. 그래서 음녀 바벨론으로 호칭합니다.
Ⅱ. 전개
악의 세력들의 종말적 심판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는 계 17-20장 가운데, 특별히 17-18장은 큰 성 바벨론의 심판과 멸망을 소개하는 상론(詳論)의 장입니다. 16:19과 14:8을 통해 이미 바벨론의 멸망을 예고했던 것을 이제 17-18장에 걸쳐 자세하게 진술하는 것입니다. 위에서 잠간 언급했듯이 바벨론의 영적 정체성은 구속사의 진행 속에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는 적대적 세력으로 본질상 사단적 사상의 온상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것은 종교적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총망라하는 세속적인 문명의 총화를 의미합니다. 요한은 구약적 배경 속에서 이런 바벨론의 영적 실체를 파악하고 바벨론 제국의 멸망과 사단 진영의 멸망을 상호 병행시키면서 사단의 세력을 상징하는 주요 모티브로 바벨론 이미지를 차용해 계시록에 적용하고 있는 셈입니다.
먼저 17장은 바벨론과 본질상 동질성을 띠고 있는 음녀의 정체와 사역 및 멸망을 소개합니다. 18장은 큰 성 바벨론의 멸망이 상술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17장과 18장은 같은 내용을 다른 각도에서 조명한 것으로 바벨론의 멸망이라는 연속적인 주제를 형성합니다. 본장의 구성은 짐승을 타고 있는 음녀의 환상(1-6절), 천사에 의한 환상의 해석(7-18절)으로 크게 양분됩니다. 한편 7-18절은 다시 음녀와 짐승의 관계(7-14절), 음녀의 멸망(15-18절)으로 구분됩니다. 본 장에서 음녀 곧 바벨론은 하나님을 떠나 우상숭배와 각종 죄악과 욕심에 이끌려 각양각색의 향락을 탐닉하는 세상, 곧 세속주의를 가리킵니다. 한편 짐승은 용의 통치권을 대행하고 있는 사단의 하수인으로 세상 권력과 권세를 상징합니다.
1. 음녀 바벨론의 심판 환상(1-6절)
1-2절은 환상의 도입부분입니다. 일곱 대접을 가진 일곱 천사 중 하나가 요한을 찾아와 음녀와 관련된 환상을 보여줍니다(1절). 그것은 많은 물 위에 앉은 큰 음녀가 받을 심판에 관한 환상입니다. 음녀가 앉은 ’많은 물’이란 백성과 무리와 열국과 방언을 가리키는 상징적 표현입니다 (17:15). 이는 세상나라를 포괄하는 용어입니다. 곧 음녀가 큰 권세와 힘과 능력으로 세상나라를 지배하고 통치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음녀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17장 본문은 음녀를 바벨론과 동일시합니다(5절, 18절). 특별히 큰 바벨론(5절)과 큰 음녀란(1절) 표현을 통해 이런 사실을 강력히 뒷받침 해 줍니다. 이는 바벨론을 의인화시킴으로 음녀와 동격으로 간주하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따라서 17장 본문에서 바벨론과 음녀는 짐승과 더불어 유사한 개념으로 상호 교환적으로 사용됩니다. 특별히 음녀와 짐승과의 불가분의 관계는 여자가 붉은 빛 짐승을 타고 있다는 표현을 통해 확인됩니다(3절). 그렇다면 바벨론을 왜 음녀로 부르는 것일까요. 두 가지 측면에서 개연성을 찾을 수 있습니다. 첫째는 21:9에서 새 예루살렘을 어린양의 신부로 부르는 것과 의도적으로 대조시키기 위함입니다. 이런 사실은 음녀와 신부를 환상을 통해 보여주는 두 천사가 동일한 천사란 사실로부터 추정됩니다(17:1상, 21:9상). 둘째는 구약적 배경에서 하나님을 대적하고 우상숭배와 불순종하는 행위를 총칭해 영적 음행으로 간주하는바, 이런 사실을 구체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바벨론을 일컬어 음녀로 부른 것은 타당성 있는 관점입니다. 마치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숭배하고 범죄한 이스라엘을 음행을 일삼는 창기로 간주하는 것처럼 말입니다(호 1:2, 2:5). 한 마디로 하나님을 대적하고 범죄를 일삼는 바벨론의 타락과 죄악상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계속해서 천사는 많은 물 위에 앉은 큰 음녀가 받을 심판 환상을 보여줍니다. 이는 세상나라를 지배하고 있는 큰 성 바벨론이 받을 심판과 동질성을 띱니다. 위에서 살펴본 대로 음녀와 바벨론은 동격으로 간주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음녀와 바벨론의 심판의 당위성은 이미 일곱 번째 대접재앙의 결과로 큰 성 바벨론의 죄악상이 하나님 앞에 낱낱이 확인돼 진노의 포도주 잔을 받은 사실에 기인합니다. 다시 말해 바벨론에 대한 총론적인 심판선언(16:19, 14:8)이 이제 17-18장을 통해 구체적으로 시행된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총론에 대한 해설적 의미에서 말입니다. 그렇다면 음녀가 받을 죄악상은 무엇일까요. 2절은 크게 두 가지 음녀가 범한 죄의 항목을 고발합니다. 첫째는 땅의 임금들이 음녀와 더불어 음행(우상숭배/하나님 대적)을 했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땅에 거하는 자들도 음녀의 음행의 포도주(우상숭배/하나님 대적/성도와 예수 증인들의 피, 6절)에 취하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땅에 거하는 자들’이란 표현은 계시록에서 어린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녹명되지 못한 불신자들을 총칭하는 관용구적 표현입니다(13:8, 14:8). 동시에 이들은 짐승과 그의 우상을 경배하고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입니다(14:8-10). 결국 하나님과 어린양의 인을 받지 않은 모든 불신자들이 음녀의 음행과 범죄에 동참하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3절은 환상의 장면이 바뀝니다. 천사가 성령에 사로잡힌 요한을 광야로 이끌어 갑니다. 계시록에는 ‘성령 안에서’(in the Spirit)란 문구가 네 번(1:10, 4:2, 17:3, 21:10)에 걸쳐 나옵니다. 이는 요한이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실을 가리킵니다. 성령 안에서란 문구는 요한계시록을 서론과 본론과 결론으로 삼등분하는 역할을 합니다(이필찬, 719/메릴 C.테니, 35-36). 그런 의미에서 본문의 17:3은 21:10과 함께 이중적인 결론을 유도합니다. 즉 악의 세력을 총칭하는 바벨론의 멸망(최후의 심판)과 새 예루살렘의 등장(새 하늘과 새 땅)을 대비시키는 것을 통해서 말입니다. 그렇다면 왜 천사가 성령의 감동을 입은 요한을 광야로 이끌어 갔을까요. 음녀에게 가해질 심판(1절)을 보여주기 위함인 사실을 문맥 속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3-6절은 본격적으로 음녀에 대한 환상을 보여줍니다. 여자(음녀)가 붉은 빛 짐승을 타고 있습니다. 본문에 나온 붉은 빛 짐승은 13:1에 언급된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임이 분명합니다. 이 짐승이 붉은 빛을 띠고 있다는 것은 12:3에 소개된 큰 붉은 용과 동질성을 띠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다시 말해 짐승이 용의 권세를 위임받아 사단의 통치권을 대행하고 있음을 가리킵니다(일곱 머리/열 뿔). 따라서 여자가 붉은 빛 짐승을 탔다는 것은 4절에서 자주 빛과 붉은 빛 옷을 입고 있는 여자와 짐승과 용 곧 사단이 불가분의 관계성을 맺고 있으며 영적 일체감을 갖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붉은 색은 사치, 교만, 왕적 권위 등을 상징하는 다양한 의미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여자가 타고 있는 짐승은 온 몸에 참람(blasphemy)된 이름들이 가득하고 일곱 머리와 열 뿔을 갖고 있습니다. 이 짐승의 정체는 위에서 지적한 대로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입니다. 그런데 13:1과 비교해 보면 이 짐승이 머리가 아닌 온 몸에 참람된 이름들이 가득하다고 강조해 소개합니다. 이것은 짐승의 참람된 행동을 상대적으로 강조한 표현입니다. 왜 이런 강조적인 표현이 필요했을까요. 왜냐하면 짐승이 용의 권세를 위임받은 42달의 활동기간(13:5)이 종말적 심판의 임박성으로 인해 훨씬 가까웠기 때문입니다. 최후의 발악을 하는 심정의 묘사인 셈입니다. 이는 마지막 대접재앙의 집행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회개하기는커녕 더욱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훼방하고 대적했다는 요한의 고발을 통해 이미 확인한 바 있습니다(16:9, 11, 21절). 여기서 참람된 이름이란 하나님을 훼방하고 모독하며 하나님의 권좌에 도전하려는 패역한 행실 등을 포괄적으로 함의하고 있는 표현입니다.
4절은 짐승을 타고 있는 여자를 소개합니다 여자는 자주 빛과 붉은 빛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미고 손에 금잔을 가졌는데 가증한 물건과 그의 음행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합니다. 본문은 여자의 모습을 이중적으로 묘사합니다. 외적으로는 부와 품위와 권위 및 극한 사치와 화려함으로 치장돼 사람들을 미혹하며 관심을 끌기에 충분히 매력적인 모습입니다. 이는 한 마디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 구성된 세상, 곧 세속주의를 총칭합니다. 그러나 내적으로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혐오하시는 가증한 것과 음행의 각종 더럽고 추한 죄악들이 손에 든 금잔 속에 가득 차 있습니다. 여기 ‘금잔’ 모티브는 렘 51:7을 반영하는 것으로 바벨론의 영적 정체를 금잔으로 묘사하면서 세상을 취하게 만드는 장본인으로 지적합니다. 이는 금잔에 들어있는 각종 가증한 것과 음행의 더러운 것들로 세상을 미혹했음을 가리킵니다. 이런 사실이 바벨론이 열국으로 하여금 그 음행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하는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잔을 마시게 했다는 내용과 병행관계를 이루게 합니다(14:8, 16:19). 따라서 금잔에 가득 찬 포도주에 비유되는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각종 배교와 우상숭배와 불순종 및 성도들에 대한 핍박(6절) 등을 가리킵니다. 이처럼 음녀는 사람들을 세속주의로 미혹했고 금잔의 내용물로 스스로 취했을 뿐만 아니라, 세상 임금들과 땅에 속하는 자들도 이 진노의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5절은 여인의 이마에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는 이름이 세 가지로 기록돼 있는데 비밀, 큰 바벨론,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고 합니다. 이마에 이름이 기록돼 있다는 것은 자신의 소속과 신분과 정체성을 밝히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일례로 그 이마에 하나님과 어린양의 이름이 있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으로 하나님 나라에 소속된 하나님의 친 백성인 사실을 증거합니다(14:1). 반면에 오른 손이나 이마에 짐승의 수인 666표를 받은 자들은 짐승에 속하여 짐승을 경배하며 추종하는 사단의 하수인들입니다. 그렇다면 여인의 이름에 담긴 정체성은 무엇일까요. 먼저 비밀(mystery)이라고 합니다. 이는 여인(음녀)의 미혹의 방식이 오묘하고 은밀해서 쉽게 정체가 드러나지 않음을 가리킵니다. 사단도 자신을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고 사단의 일군들도 자신을 의의 일군으로 위장해 성도를 미혹한다고 성경은 경계시킵니다(고후 11:14-15). 다음으로 여인의 정체는 큰 바벨론이라고 합니다. 비로소 여인의 실체가 드러난 셈입니다. 바벨론은 구약적 배경에서 따온 이미지입니다. 구약에서 바벨론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성도를 핍박하는 세상권세와 정치적 권력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여인은 바벨론이 취했던 하나님을 향한 반역적이고 불신앙적인 처사를 조장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여인의 정체는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고 합니다. 이런 표현은 4절에서 밝히고 있는 금잔의 내용물을 가리킵니다. 즉 우상숭배와 배도와 성도들을 핍박하는 일에 여인의 막강한 영향력이 동원될 것임을 시사합니다. 이처럼 음녀인 여인은 구약의 바벨론의 정체성과 동질성을 띠면서 하나님을 대적하고 교회를 핍박하는 한편, 사람들로 하여금 물질 지향적이며 기복주의적인 우상숭배 신앙관을 갖게 하는 데 최선으로 경주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음녀는 기복주의적인 신앙관을 조장하는 과정에서 하나님과 어린양에게만 충성을 맹세하고 신앙의 정절을 지키려는 성도들을 죽이기까지 핍박합니다. 이런 사실이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 취한지라’(6절)는 표현 속에 담겨 있습니다. 교회역사 속에서 이런 경우는 수없이 경험해 왔습니다. 현재도 세계 도처에서 경험되고 있습니다. 주님의 재림의 날이 가까울수록 사람들의 인식여부와 무관하게 그 강도는 더해 갈 것입니다.
요한은 음녀의 상반된 이중적인 모습과 그녀의 무정하며 잔인하고 죄악된 성향에 경악합니다(6절하). 천사가 보여주겠다던 환상의 내용은 분명 큰 음녀가 받을 심판의 환상이었습니다(1절). 그런데 요한이 목격한 환상의 내용은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음녀가 받을 심판과는 달리 여왕처럼 군림하며 하나님과 어린양을 향해 신앙의 정절을 지키려는 성도들을 무자비하게 죽이기까지 하는 여인의 극한 핍박과 박해를 보는 요한의 심정은 당혹스럽고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요한이 환상 중의 ‘여인을 보고 기이히 여기고 기이히 여겼다’는 의미입니다. 현실 속에서도 동일한 경우가 얼마든지 발생합니다. 진리가 오히려 훼방을 받고 외면을 당하기 일쑤입니다. 비진리가 승승장구합니다. 정직과 공의와 공법이 웃음거리가 됩니다. 불의와 불법이 활개를 치며 득세합니다. 큰 소리 치는 자가 이깁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단과 죄성이 지배하는 세상나라의 질서이기 때문입니다. 오래지 않아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될 것입니다.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으로 대변되는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할 것입니다(롬 14:17). 그때는 죄와 사단으로 말미암았던 일체의 세상적인 요소들이 말끔히 제거될 것입니다. 천상적인 것으로 대체될 것입니다. 주님의 재림이 이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려놓게 될 것입니다. 처음 것들이 회복될 것입니다.
2. 환상에 대한 천사의 해석(7-18절)
천사는 당황해하는 요한에게 재차 나타납니다(7절). 위로하며 안심을 시킵니다. 이번에는 여자와 그 탄 바 일곱 머리와 열 뿔 가진 짐승의 비밀에 대해 알려주겠다고 전합니다. 이는 이후 전개되는 환상내용이 앞의 1-6절에 대한 해석인 사실을 감지하게 됩니다.
짐승의 정체(8절)
여자가 타고 있는 짐승은 일곱 머리와 열 뿔이 달린 괴기스런 모습입니다. 이런 짐승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런 가상의 짐승을 통해 저자의 의도를 알리려는 표적적 상징입니다. 이 과정에서 여자와 그의 탄 바 짐승의 비밀을 알려주겠다고 말합니다(7절). 그러면서 여자의 비밀에 관해서는 언급을 회피하고 짐승의 비밀부터 기술합니다. 여기서 짐승의 비밀이란 이후에 설명되는 짐승의 정체와 일곱 머리 및 열 뿔에 관한 내용을 말하고 있음을 문맥을 통해 발견할 수 있습니다(8-13절). 이 과정에서 음녀의 비밀이 생략된 것은 아마도 음녀의 정체를 설명하고 있는 4-6절에서 이미 언급한 바가 있기에 반복을 피하기 위해 본 절에서는 생략된 듯합니다. 4-6절은 바벨론의 영적 타락상과 죄악상을 음녀가 진두지휘하며 적극 조장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다시 말해 바벨론의 타락상과 죄악상을 음녀를 통해 상징적으로 묘사하는 방식을 통해서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음녀는 바벨론을 의인화시켜 설명하는 셈입니다. 음녀의 이름을 큰 바벨론으로 표현하고(5절), 음녀를 큰 성과 동일시여기는 내용(18절)이 이런 사실을 뒷받침해 줍니다.
8절은 짐승에 관한 비밀과 관련해 우선 짐승의 정체부터 설명합니다. 짐승에 관한 정체를 바르게 정립하지 않으면 이후 소개되는 일곱 머리와 열 뿔의 비밀에 대해서도 바르게 이해 할 수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천사가 요한에게 짐승에 대해 설명합니다. “네가 본 짐승은 전에 있었다가 시방은 없으나 장차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와 멸망으로 들어갈 자”라고 소개합니다(8절상). 천사의 설명을 통해 이 짐승의 정체가 무저갱에 결박된 채 일천년 동안 갇혀 있는 용에 대해 말하는 것임을 간파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미가엘과 하늘의 전쟁에서 패해 땅으로 내어 쫓긴(12:7-9) 후, 뒤쫓아 온 천사에 의해 쇠사슬로 결박당해 일천년 동안 무저갱에 갇힌 용말입니다(20:1-3). 요한은 이 짐승을 가리켜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고 고발합니다(12:9). 때문에 미가엘과의 전쟁에서 패하기 전에는 활동했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구속사역의 성취 이전까지를 말합니다(12:1-5). 지금은 무저갱에 갇혀 있기에 직접 활동할 수 없습니다(20:1-3). 그래서 시방은 없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대신 짐승이 용의 왕권을 대리적으로 수행합니다(13:1-2). 그러나 일천년이 차면 용은 잠간 석방돼 교회를 핍박하겠지만 이내 불못에 들어갈 것입니다(20:7-10).
그렇다면 지금 천사가 요한에게 설명하는 일곱 머리, 열 뿔 달린 짐승의 정체는 사실상 용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천사는 왜 용을 짐승으로 호칭해 소개하는 것일까요. 이런 일치는 13:1-2을 통해 이미 확인한 바 있습니다. 전후의 문맥을 살펴서 다시 한번 정리하자면 이렇습니다. 하늘에서 패해 땅으로 내어 쫓긴 용은 자기의 때가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직감합니다(12:12절하). 용은 자신의 왕권을 계속 행사할 수 있는 비상강구책을 마련합니다. 그는 무저갱에 갇히기 직전에 악의 세력의 총본산인 바다(단 7:3)를 찾아가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을 만납니다. 용은 거기서 바다짐승에게 자신의 보좌와 권세와 능력 등 일체의 통치권을 일시 위임합니다(13:1-2). 이는 단순한 위임이 아닙니다. 대행의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용은 비록 무저갱에 갇혀 있을지라도 짐승을 대신해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함으로 사실상 계속해서 자신의 왕권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이 사건 이후부터 사단의 활동은 소위 용과 두 짐승에 의한 삼두정치체제를 갖추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바다짐승은 용의 왕권을 대리적으로 수행함으로 사실상 용의 화신(化身)으로 활동하게 됩니다. 특별히 짐승의 일곱 머리와 열 뿔 가진 모습은 12:2에 소개된 큰 붉은 용의 왕적 외관을 그대로 반영한 것으로 용의 왕권을 대리적으로 수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명실상부하게 보여줍니다. 따라서 당시 요한이 본 일곱 머리 열 뿔 가진 짐승은 본질상 용과 다를 바 없습니다. 동격인 셈입니다. 천사가 용을 짐승으로 대체해 부르면서 비밀이라고 말한 이유가 이런 내막 때문입니다. 이런 비밀스런 사연은 계속해서 일곱 머리와 열 뿔에 대한 해석을 통해서 이어집니다.
한편 무저갱에 갇혔던 용의 석방은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일편단심의 심정으로 믿음의 정절을 지키려는 성도들과 최후의 일전을 벌이기 위해 모든 악의 세력을 규합하게 될 것입니다(12:17, 16:14, 19:19, 20:7-8). 이때 창세 이후로 생명책에 녹명되지 못한 땅에 속한 자들이 하나처럼 이 용(짐승)을 경배하며 추종하게 될 것입니다(8절하). 여기서 무저갱에서 나온 용(짐승)을 기이히 여겨 경배하는 자들은 본질상 13:8에서 바다짐승에게 경배하는 자들과 동일한 무리들입니다. 왜냐하면 이들의 정체성 또한 ‘어린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녹명되지 못하고 땅에 거하는 자들이 바다짐승을 경배한다’고 기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바다짐승을 경배하는 땅에 거하는 자들(13:8)과 무저갱에서 올라온 짐승 곧 용을 경배하는 자들(17:8)은 이들을 수식하고 있는 ‘창세 이후로 생명책에 녹명되지 못한 자들’이란 문구를 통해 병행관계를 이루면서 사실상 동질집단인 사실을 증거합니다. 이들의 결국은 최후의 심판을 거쳐 용과 두 짐승과 함께 불못에 던져질 것입니다(20:11-15). 반면 하나님과 어린양의 이름을 가진 자들은 둘째 사망 곧 영벌의 불못에서 제외됩니다(계 20:15, 요 5:24). 어린양의 피가 이들의 죄를 구속했기 때문입니다(계 7:14, 14:1-3, 엡 1:7, 골 1:14).
일곱 머리의 해석(9-11)
천사는 일곱 머리와 열 뿔 속에 담긴 상징의 의미를 깨닫기 위해 지혜의 필요성을 강조합니다. 지혜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말씀의 의미를 깨달아 이를 삶의 현장에 적용시키는 신적 도구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문에서 말하는 지혜는 인간의 지혜나 세상 지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하라고 주시는 신적 지혜입니다. “내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시 119:18).
본 환상의 일곱 머리와 열 뿔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느냐는 사실상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것이 가리키는 상징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면 족합니다. 짐승이 갖고 있는 일곱 머리 환상은 단 7:4-7에 언급된 네 마리 짐승의 일곱 머리를 배경 삼고 있습니다. 다니엘 본문에서 일곱 머리를 갖고 있는 네 마리 짐승은 종말에 하나님을 대적하며 성도를 핍박하는 악의 세력들을 총체적으로 가리킵니다. 계시록 본문에서는 이들 일곱 머리를 여자가 앉은 일곱 산과 일곱 왕으로 발전시켜 설명합니다(17:9). 여기서 여자가 앉은 일곱 산은 여자가 탄 붉은 빛 짐승과 표현상 일맥상통합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일곱 왕과도 동일한 대상임을 강조합니다. 따라서 이상의 내용을 정리하면 ‘여자가 앉은 일곱 산=붉은 빛 짐승=일곱 머리=일곱 왕’이란 등식이 성립됩니다. 이런 사실은 각각의 상징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느냐에 관심을 갖기보다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파악하는 것이 계시록의 관건입니다.
이상의 내용들을 고려할 때 결론적으로 일곱 머리가 상징하는 본의는 주님의 재림과 관련된 종말에 하나님과 성도를 대적하기 위해 출현하게 될 사단적 세력의 충만함을 총체적으로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10절은 일곱 머리를 상징하는 일곱 왕에 대해 보충설명을 더합니다. “다섯은 망하였고(과거), 하나는 있고(현재), 다른 이는 아직 이르지 않았으나(미래) 이르면 반드시 잠간 동안 계속하리라.” 일곱 왕에 대한 이런 표현은 종말에 나타날 충만하고 막강한 사단세력들은 과거에도 있었고, 지금도 활동하고 있으며, 미래에도 여전히 활동할 텐데 종말과 관련된 최후의 사단적 활동은 일시적일 뿐 그 결국은 멸망인 사실(20:7-10)을 묵시적으로 설명해 줍니다. 계속해서 천사는 “전에 있다가 시방 없어진 짐승은 여덟째 왕이니 일곱 중에 속한 자라. 저가 멸망으로 들어가리라“고 선포함으로 열 왕과 붉은 빛 짐승(무저갱에 갇힌 용)을 연계시키는 가운데 일곱 째 왕과 여덟 째 왕 및 장차 무저갱으로부터 잠시 풀려날 짐승 곧 용을 동일시합니다. 이상의 내용을 공식화하면 ‘일곱 째 왕=여덟째 왕=짐승’(무저갱의 용)이란 등식이 나옵니다.
결국 요한이 이처럼 여자와 짐승에 관한 비밀의 환상내용을 기술하는 의도는 하나님과 교회를 대적하는 가공스러운 짐승(용)의 세력이 역사 속에서 늘 있어 왔지만 최종적으로 나타나게 될 것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이 종말적 전투는 만주의 주시오 만왕의 왕이신 어린양의 승리로 마감될 것입니다(17:14).
열 뿔의 해석(12-13절)
짐승의 열 뿔 환상은 단 7:1-8, 20, 24절의 반영입니다. 특별히 다니엘 본문에서 바다에서 나온 네 번째 짐승이 열 뿔을 가졌는데 이는 열 왕을 상징합니다(24절). 이들은 짐승과 연합하여 어린양에게 대적할 땅의 임금들을 상징적으로 묘사합니다(19:19-21). 이들도 13:1-2의 바다짐승처럼 용으로부터 일시적으로 권세를 받습니다. 그러나 보좌의 왕권은 아닙니다. 이들은 자원하여 연합세력을 구축하는 가운데 용으로부터 받은 능력과 권세를 짐승에게 이양합니다. 짐승과 연대해 어린양의 군대와 최후의 일전을 벌이는데 지휘체계의 일원화를 통해 전쟁수행의 효율성을 극대화시키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최후의 아마겟돈 전쟁의 승패는 악의세력의 총사령부인 ‘공기’(공중)의 초토화(16:17)로 용과 두 짐승과 바벨론의 종말적 패배 또한 명약관화합니다. 세상역사는 구속사입니다. 지금 세상 역사를 무대로 이런 종말적 성격을 띤 영적전투가 세계 도처에서 다양한 모습과 모양을 통해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에 유의해야 합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엡 6:12). 현대교회는 영적으로 전시체제 하에 놓여 있습니다. 현대교회는 영적 전투의 한 가운데 위치해 있습니다.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처럼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아다니는 비상시국에 처해 있습니다(벧전 5:8). 근신하고 깨어 기도하며 부단히 말씀으로 전신갑주를 입지 않으면 언제 미혹당할 지 모르는 비상사태에 직면해 있습니다. 성도의 믿음의 정절과 소망의 인내가 이런 이유로 절실히 요구됩니다.
어린양의 종말적 승리(14절)
14절은 어린양의 종말적 전투와 승리를 기술합니다. 9-13절에 소개된 일곱 머리와 열 뿔 가진 짐승은 결국 여덟째 왕으로서 시방은 없으나 장차 무저갱에서 나올 짐승(용)과도 동일한 대상입니다. 요한이 이처럼 어린양과 싸울 짐승(용)의 정체성을 다양한 상징을 통해 표현하면서 7과 10이라는 완전수와 충만수를 겸해서 사용하는 것은 그만큼 어린양과 짐승의 종말적 싸움이 치열할지라도 결국은 어린양의 승리로 끝날 것을 예시해 줍니다. 여기서 어린양의 승리의 이유는 어린양이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만주의 주시오 만왕의 왕이란 표현은 구약에서 창조주시오 전능하시며 유일하신 하나님께 사용하는 칭호입니다(신 10;17, 시 136:2-3, 단 2:47). 결국 어린양이 하나님과 함께 온 세상을 지배하시고 통치하시는 왕이시기 때문에 짐승과 열 왕이 연합해 대적할지라도 승리는 당연히 어린양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음을 강력히 시사합니다(롬 8:33). 이런 사실은 또 다른 관점에서 계 13:4의 “누가 이 짐승과 같으뇨 누가 능히 이로 더불어 싸우리요”라는 질문에 적절한 답변으로 간주할 수 있습니다. 계시록은 이런 식으로 사단의 세력들과의 최후의 종말적 전쟁 상황을 다양한 관점에서 조명해 소개합니다. 먼저 여섯째 천사가 대접을 쏟음으로 야기된 악의 추종세력들의 총체적인 멸망을 아마겟돈 전쟁의 이름으로 기술합니다(16:13-16). 다음으로 백마 탄 자(예수 그리스도)의 진영과 두 짐승의 진영과의 종말적 전쟁기사와 저들의 패배를 담은 종말적 전투기록입니다(19:11-21). 마지막으로 무저갱에 갇혔던 용이 석방돼 악의 세력을 부추겨 교회공동체를 대상으로 최후의 일전을 불사하나 결국은 사단마귀의 패배로 전쟁은 종식됩니다(20:7-10). 이상의 세 종말적 전쟁기사는 하나같이 하나님의 진영과 사단진영 간의 최후의 일전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투의 실상을 세밀히 관찰해 보면 악의 세력의 정체와 관련해 몇 가지 차이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아마겟돈 전쟁은 사단의 추종세력들을, 백마 탄 진영과의 전투에서는 두 짐승을, 무저갱에서 석방된 용과의 최종 전쟁은 사단과 마귀를 주 대상으로 삼아 종말의 전쟁을 수행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는 사단과 그의 추종세력들의 멸망을 보다 극적이고 구체적으로 서술함으로 상대적으로 어린양의 승리를 극대화시키려는 요한의 의도가 엿보입니다. 이런 사실은 요한 당시 절체절명의 신앙적 위기에 직면해 있는 일세기 교회들로 하여금 보증된 교회의 미래의 승리를 바라보며 믿음의 확신과 소망의 인내를 가지고 넉넉히 현실을 극복해 나가도록 위로와 격려와 결단을 촉구하기 위함입니다. 물론 이런 관점은 현대교회 성도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보편적인 신앙원리로 작용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현대교회는 일세기교회보다 훨씬 더 주님의 재림이 임박한 시대를 살아간다고 볼 수 있습니다(롬 13:11).
한편 어린양의 승리에는 교회공동체도 동참합니다(14절하). 교회는 항상 주님과 연합된 생명공동체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실을 본문은 “부르심을 입고, 빼내심을 얻고, 신실한 자들은 이기리로다”라고 기술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택하심과 부르심을 입은 하나님의 친 백성들로, 짐승의 핍박과 미혹가운데서도 하나님과 어린양에 대한 믿음의 정절과 인내를 가지고 충성을 다한 자들을 가리킵니다. 특별히 본문에서 ‘부르심을 입고, 빼내심을 얻은 자들’이란 표현은 다분히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연상케 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부르시고 빼내셨습니다. 그래서 저들을 구원하셨습니다. 이는 아브라함 언약에 근거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역사의 일환입니다. 이처럼 구원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종속됩니다. 왜냐하면 성도의 구원의 근거는 창세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수립하신 삼위하나님의 구원협약에 의존하기 때문입니다(엡 1:4-6). 이 구원협약에 따라 때가 차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 하셨고, 고난을 당하셨으며, 마침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사흘 후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복음의 양대 요지(要旨)입니다(고전 15;3-4).
이상의 모든 과정을 종합해 볼 때, 구원의 주체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의지의 발로입니다. 본문에서 부르시고 빼내신 분은 하나님의 의지적 활동입니다. 언약에 근거해서 말입니다. 그래서 구원의 근거는 창세전 하나님의 언약적 선택이지만(엡 1:4-6), 구원의 방법은 신적 믿음입니다(엡 2:8-9,롬 3:28). 그것도 자의적(自意的)인 믿음이 아닙니다. 타의적(他意的)인 믿음입니다(살후 1:10). 믿음의 성격은 단순한 입술의 고백이 아닙니다. 복음의 내용에 대한 전인적인 수납입니다. 그래서 단순히 믿는 것이 아니라 믿어지는 것입니다. 전자를 일컬어 자력(自力)구원이라 부르고, 후자를 타력(他力)구원이라 부릅니다. 자력구원은 조건적 신앙입니다. 인간의 종교적 행위가 선행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기복적이고 보상심리적인 요소가 강하게 뒤따릅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력구원은 본질상 우상숭배와 동질성을 띱니다. 인간의 현세지향적인 행복과 성공과 소원성취가 목적으로 기능하기 때문입니다. 반면 타력구원은 무조건적입니다. 이미 무한가치의 은혜의 산물인 하나님의 구원을 선물로 받았다는 감격과 감사의 마음이 신앙의 동기부여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자력구원의 목적이 인간의 행복과 성공추구를 통한 자기영광구현이라면, 타력구원의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영원토록 그 분으로 즐거워하는 삶을 살아가는 데 집중됩니다.
그런가 하면 예수님의 승리에 동참하는 교회를 가리켜 ‘부르심을 입고 빼내심을 얻은 자들’로 호칭할 뿐 아니라 또한 ‘진실한 자들’(14절하)이라고 부릅니다. 부르심과 빼내심이 아브라함 언약(창 12:1-3, 15:13-16)에 근거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의 사역이라면, 진실한 자들이란 표현은 성도들 편에서 하나님의 뜻을 좇는 순종하는 삶을 가리킵니다. 은혜는 은혜에 합당한 순종을 동반한다는 구속의 원리에 근거해서 말입니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딛2:14). 본문에서 전반부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사역을 통해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의 구원과 칭의를 진술합니다. 그러나 후반부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입은 자들은 마땅히 선한 일에 열심하는 하나님의 친 백성답게 살아가야 될 것을 요구합니다. 본문에서 ‘선한 일’이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 과 교훈’을 가리킵니다.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들의 모범적 삶의 실례는 계 14:4-5을 통해 구체적으로 증시됩니다.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 본문에서 이들의 정체는 이마에 어린양과 하나님의 이름을 가진 땅에서 구속함을 받은 십사만 사천인으로 소개합니다(계 14:1-3). 결국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에 깊이 접촉된 자는 받은바 은혜를 사랑의 빚으로 여기는 심정의 발로로 자원하는 마음으로 적극 순종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는 지적입니다. 소위 무익한 종의 고백이 이런 사실을 구체적으로 뒷받침 해 줍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을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찌니라”(눅 17:10). 결국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갚을 수 없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반응이며 발로요 표출이란 사실에 집약됩니다.
음녀 바벨론의 멸망(15-18절)
본 절은 상반된 두 주제를 다룹니다. 음녀의 영광과 음녀의 비하입니다. 이는 사단의 교만과 멸망을 증시하는 듯합니다. 먼저 교만의 내용입니다. 15절은 1절의 연장선상에서 ‘많은 물 위에 앉은 큰 음녀’를 해석해 줍니다. 특별히 ‘음녀가 앉은 물’을 해석하면서 ‘백성과 무리와 열국과 방언들’이라고 정의합니다. 이는 온 세상 나라를 포괄하는 계시록적 표현입니다(14:6하, 7:9, 5:9). 결국 ‘많은 물 위에 앉은 큰 음녀’란 음녀의 미혹(바벨 사상/세속주의)에 넘어가 지배를 받는 온 세상을 은유적으로 가리킵니다. 음녀가 세상을 미혹하고 통치하는 수단들은 음행의 포도주로서 금잔 안에 가득한 온갖 세속적인 요소들을 포괄합니다. 세속주의의 정체를 압축해서 구분하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 요약됩니다(요일 2:15-16). 음녀는 이런 세속적인 요소들로 세상을 미혹하면서 현세적인 행복과 성공과 부를 약속합니다. 그래서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고 짐승의 표를 받은 ‘땅에 속한 모든 자들’이 한결 같이 음녀의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게 된다는 것이 계시록의 진술입니다(14:9-10). 이상 음녀의 음행의 포도주에 취한다는 의미와 짐승의 666표를 받는다는 의미가 본질상 동질성을 띠면서 결국은 욕심에 이끌려 세속주의에 미혹돼 물질에 종노릇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특별히 세속주의가 종교의 옷을 입고 나타나게 될 때에 기복주의와 상급주의 그리고 지성감천주의로 표출되는 것입니다.
다음은 음녀의 멸망의 내용입니다. 16절은 음녀의 죽음과 멸망을 다섯 단계를 통해 확인합니다. “네가 본바 이 열 뿔과 짐승이 음녀를 미워하고 망하게 하고 벌거벗게 하고 그 살을 먹고 불로 아주 사르리라.” 강도를 높여가며 철저하고 완벽하게 처치되었음을 강하게 강조하는 의도적인 설명입니다. 이처럼 본문은 음녀의 비밀 중 특별히 음녀의 비극적인 죽음과 종말에 주목합니다. 왜냐하면 음녀와 사단세력을 상징하는 바벨론과는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 절의 제목을 ‘음녀의 멸망’이라 않고 ‘음녀 바벨론의 멸망’으로 붙인 것은 음녀의 정체와 관련해 17장 자체에서 ‘큰 바벨론과 큰 성’이란 이름과 동일시한다는 사실에 근거합니다(5절, 18절). 이런 관점에서 음녀는 바벨론을 의인화시켜 바벨론의 죄악상을 음녀란 상징을 통해 진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이스라엘의 우상숭배와 불순종하는 패역한 행위를 선지자들이 영적 음행과 행음으로 기술했듯이 말입니다(호 1:2, 2:5, 4:10, 5:3, 9:11, 렘 3:1, 3:6-9, 5:7, 23:20, 계 2:20, 2:14).
더구나 음녀의 죽음은 그동안 영적 동지관계를 유지하면서 하나님과 교회를 대적하는 일에 연합전선을 폈던 짐승과 열 뿔에 의해 살해당한다는 것이 더욱 의외성과 호기심을 자극합니다. 의외의 사건이기에 충분히 역설적으로 비밀이 될 수 있습니다. 8-13절에서 짐승의 비밀만 언급했는데, 4-6절에서 이미 소개되었던 음녀의 비밀에 이어 그녀의 남은 비밀이 여기 16절에서 음녀의 죽음을 통해 추가로 설명되는 셈입니다. 본문의 말씀은 겔 23:25-29의 말씀을 연상케 합니다. 에스겔 23장은 통일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분열된 사실에 근거해 북 이스라엘을 오홀라로, 남 유다를 오홀리바로 비유하면서 이들의 우상숭배와 불순종을 하나님께 대한 음행으로 간주해 저들의 죄악상을 고발합니다(겔 23:1-4). 이 과정에서 특별히 남 유다를 비유하는 오홀리바에 대한 하나님의 투기가 오홀리바와 연애하던 바벨론을 충동시켜 오홀리바를 적대시 여겨 무참히 짓밟고 강탈하며 불사를 것에 대해 기술하고 있는 겔 23:25-29절은 본 음녀의 처참한 종말에 관한 내용과 상당한 부분에서 병행을 이룹니다(호크마 종합주석, 484/이필찬, 738-739). 결국 바벨론 제국에 의한 남유다의 멸망은 하나님의 신묘막측 하신 구속사의 경륜 속에서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의해 주도된 사건임을 에스겔 선지자는 선언합니다. 세상역사의 본질은 하나님의 구속사입니다.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습니다(롬 11:36). 다시 말해 사단진영의 자중지란도 결국에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한 하나님의 절대주권적인 섭리역사의 일환이란 사실을 요한은 시사합니다. 이런 사실이 계시록 도처에서 소위 ‘신적 수동형’의 형식(13:5, 7절)을 통해 제시되고 있을 뿐 아니라, 본 음녀의 죽음 또한 동일한 원리 속에서 진행된 사건임을 기술합니다(17:17). 하나님의 절대주권사상을 믿음으로 수납할 수 있다는 것은 성경신학(not Biblical Theology, but Bible Theology)적 관점(신본주의적 역사성/계시의 점진성/모형론/언약적 구속사관)으로 성경을 해석한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참고로 하나님의 주권사상은 롬 9장에 논증된 ‘토기장이와 진흙 한 덩이 비유를 중심으로 명확하게 해명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사상은 하나님의 시각으로 만사와 만물의 시작과 전 과정과 결과를 해석하는 관점을 포괄합니다. 이 과정에서 인간의 자유의지는 그것의 성격이 타락전후의 여부를 떠나 본질상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의존되고 종속될 뿐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주권이 집행되는 과정에서 인간의 자유의지는 전혀 구속감이나 강제 당함을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자유롭게 발휘된다는 것이 신비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세상역사의 본질이 하나님의 구속사란 신학적 명제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이 세상역사를 방편삼아 하나님의 뜻을 최종적으로 성취시켜 간다는 사실을 포함합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 11:33).
이상의 사실과 관련해 본 음녀의 죽음 속에 담긴 구속사적인 의미를 살펴봅니다. 첫째, 음녀의 죽음과 멸망은 겔 23:25-29에 기록된 남 유다의 멸망과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역사의 연장선상에서 매사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종속돼 관장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17절). 둘째, 이 대목에서 바벨론과 동일시했던 음녀의 비참한 죽음과 철저한 멸망을 서술함은 바벨론으로 상징된 사단의 왕국과 권세가 철저하게 종말적 패배와 멸망을 당할 것에 대한 예고의 성격을 띱니다. 이런 사실은 이미 14:8에서는 다른 천사에 의해, 16:19에서는 일곱 번째 천사가 쏟은 대접재앙의 결과로 확증된 바 있습니다. 다시 말해 바벨론의 멸망이 기정사실화되었던 것이 여기 음녀의 죽음을 통해 보다 구체화 된다는 의미가 성립됩니다. 18장에서는 음녀의 실체인 큰 성 바벨론의 정체성과 멸망이 적나라하게 고발됩니다. 셋째, 음녀의 죽음은 사단의 속성상 자체 안에 균열의 소지를 안고 있음으로 사단적 왕국은 끊임없이 분열될 것을 암시해 줍니다. 다니엘서에 나타난 여러 제국들의 흥망성쇠가 이런 사실을 구체적으로 증거합니다. 넷째, 음녀의 죽음은 하나님께서 악한 세력을 징벌하시기 위해 사단의 세력을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시기도 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모든 경우를 선용하심으로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을 이루신다는 사실이 새삼 재확인되는 사건입니다(롬 8:28). 모든 경우란 악한 일까지도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위해 선용하신다는 의미도 포함됩니다. 바벨론을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셔서 범죄 한 남 유다를 징계하시는 사건을 통해 이런 사실이 구체적으로 확인됩니다(렘 25:9-11). 요셉의 생애 속에서도 이런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창 35:5-8, 잠 16:4). 이처럼 피조세계의 역사는 본질상 하나님의 구속사를 성취시키는 방편적 기능을 담당함으로 본질상 피조물 또한 창조주에게 종속돼 하나님의 절대주권 하에서 경영된다는 것이 성경의 종합적인 진술입니다(롬 11:36). 하나님께는 당신 백성들의 머리털까지 세신바 되었고, 심지어 참새 한 마리조차 하나님의 허락하심이 없으면 죽을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의 솔직한 지적입니다(마 10:29-30). 이런 관점에서 세상역사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종속돼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벗어나 스스로 존재하거나 활동할 수 있는 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역사의 알파와 오메가 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다 이루었다’(It is all done)라는 최종 선언(계 21:6)을 통해 세상역사가 종식되고 하나님의 구속사가 완성되었음을 선포하는 계시록의 기록은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절대주권사상을 명백하게 증시(證示)해 줍니다.
음녀의 죽음과 관련해 이를 해석하고 있는 계 17:14절의 내용이 이런 하나님의 절대주권사상을 분명하게 제시합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뜻대로 할 마음을 저희에게 주사 한 뜻을 이루게 하시고 저희 나라를 짐승에게 주게 하시돼 하나님 말씀이 응하기까지 하심이니라.” 본문은 짐승과 세상 왕들이 연합해 음녀를 죽이고 멸망시킨 사실과 심지어 짐승과 세상 왕들이 단결하여 득세하는 연합의 기간도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의해 좌우되고 있음을 강력히 시사힙니다. 이런 사실은 세상적 관점에서 비록 악의 세력들이 악한 목적을 위해 연합해서 하나님과 교회를 대적할지라도, 우주적 관점으로 보면 악한 세력의 연합과 일치까지도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목적을 이루시는 데 선용될 뿐임을 강력히 시사해 줍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주권(sovereignty)의 성격은 시종일관 절대적(absolute)이지 결코 제한적(restricted)이지 않습니다. 따라서 17절 후반부에 ‘하나님의 말씀이 응하기 까지’란 허용 기간의 설정이 의미하는 바는 가깝게는 음녀의 심판을 가리키고, 보다 근본적으로는 종말적 심판으로 인한 사단세력의 최종멸망과, 어린양과 교회의 승리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약속의 궁극적 성취까지를 망라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18절은 1절에 소개된 음녀의 정체성을 5절과 더불어 큰 성 바벨론의 상징이란 사실을 밝히면서 온 세상 권세 위에 군림하는 정치세력임을 증거해 줍니다. 이는 바벨론의 타락과 죄악상을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음녀에 비유해 고발한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이런 표현의 이면에는 음녀가 마땅히 받아야할 심판의 결과로 바벨론의 최종 멸망 또한 기정사실임을 확증시켜 줍니다. 큰 성 바벨론은 요한 당시 하나님과 교회를 대적하는 적대세력과 권세를 상징한다는 의미에서 로마의 정치세력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교회를 핍박하는 초역사적인 사단의 악한 세력과 제도를 총칭해 가리킵니다.
이런 관점에서 이 시대에도 음녀의 바벨론 사상은 여전히 세속적이고 육신적인 행복과 성공과 부를 보장하며 미혹의 덫을 놓고 있습니다. 각종 주의와 주장 및 철학과 헛된 속임수, 그리고 이런 모든 것을 포괄하는 세속주의와 인본주의 및 물질만능주의, 기복주의, 포스트모더니즘, 종교다원주의 등등 성경의 가치를 역행하는 다양한 시대적 풍조를 통해 하나님을 대적하고 교회를 세속화시키며 신앙을 도구화시키는 일에 혈안이 돼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나 그 결국은 심판과 멸망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이 이 모든 세상역사를 당신의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 섭리적으로 주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맥락의 연장선상에서 18장은 바벨론의 정체성을 폭로하면서 그 종말적 심판을 적나라하게 고발합니다.
Ⅲ. 결론
17장은 19:10 까지를 포함해 큰 성 바벨론의 멸망기사를 소개합니다. 이 과정에서 사단의 세력을 총체적으로 상징하는 큰 성 바벨론의 심판과 멸망의 당위성은 근본적으로 일곱 번째 천사가 쏟는 대접재앙으로 인해 사단의 사령부인 ‘공기’(공중)가 초토화되는 사건(16:17)과 밀접하게 연관됩니다. 왜냐하면 ‘공중’의 파괴는 종말적 심판현상 중의 하나인 큰 지진을 유발시켜 이내 큰 성 바벨론의 심판으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19절). 이런 식의 종말적 심판의 집행이란 맥락에서 바벨론의 죄악상을 상징하는 음녀의 정체와 심판을 다루고 있는 17장이 우선적으로 소개됩니다. 따라서 음녀의 죽음과 멸망은 곧 큰 성 바벨론의 심판예고와 직결됩니다. 이런 사실을 18:1-19:10에 걸쳐 살펴보게 될 것입니다.
큰 성 바벨론을 상징하는 음녀는 음행으로 세상 권세자들과 함께 취했으며, 짐승의 표를 받고 그 우상에게 절했던 땅에 거하는 자들로 하여금 음행의 포도주에 흠뻑 취하도록 미혹합니다. 이는 타락한 본성을 충동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 구성된 세속주의와 인본주의의 및 기복주의와 물질만능주의 등을 추구하게 함으로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며 불순종하게 만드는 패역한 죄악상을 가리킵니다. 이 과정에서 음녀는 성도들과 순교자들의 피에 취하게 됩니다(17:6). 이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과정에서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않고 신앙의 정절을 지킴으로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하나님과 어린양의 이름을 가진 자들입니다. 계시록은 이들의 영혼이 하늘의 제단 앞에서 자신들의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신원의 기도를 드리는 장면을 소개됩니다(6:9-10, 8:3-5). 이런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음녀 바벨론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의 성격을 띨 뿐 아니라 성도의 신원의 기도에 대한 응답의 형식을 담고 있음을 간파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지상의 교회가 복음의 본질에 깊이 접촉돼 진리성과 진정성을 추구하는 일로 불가피하게 겪을 수밖에 없는 억울함과 원통함은 결국 이런 식으로 사단의 세력들을 멸망시키는 종말적 심판을 통해 최종적으로 성취됩니다(6:10-11, 8:3-5, 16:4-7, 17:6). 성도가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며 시종일관하게 믿음의 정절과 소망의 인내로 살아가야 하는 이유가 이에 있습니다.
한편 음녀와 짐승과 세상의 권세자들이 연합하여 하나님과 교회를 대적하던 과정에서 돌연 자중지란이 일어납니다. 이 과정에서 짐승과 세상 권세자들이 단결하여 음녀를 무참히 살해합니다(16절). 이는 사단의 파괴적 속성을 드러내며 자체 안에 분열의 소지가 있음을 시사합니다. 17절은 이 모든 일련의 과정이 하나님의 절대주권 하에서 관장되고 있음을 확증시켜 줍니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께로 돌아가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사상을 강력히 뒷받침 해 줍니다(롬 11;36). 결국 음녀의 돌연한 죽음과 멸망을 통해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절대 통치를 발견하게 됩니다. 모든 권세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옵니다. 하나님만이 세상의 참된 주관자가 되시고 기뻐하시는 뜻을 좇아 하늘에서 이루신 것같이 이 땅에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 전능자가 되심을 봅니다. 결국 세상역사는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 진행될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알파와 오메가가 되십니다. 성도의 위로와 소망이 이에 있습니다. 어린양의 승리 안에서 사단의 멸망은 불가피한 것이며, 성도의 궁극적인 승리 또한 철저히 보증돼 있다는 사실을 음녀바벨론의 죽음과 멸망은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이런 관점에서 구원은 복의 본질이며 상급의 실체라는 사실을 계시록은 시종일관하게 증거합니다. 이런 이유로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추구하는 것이 성도의 존재이유이며 구원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것이 신앙생활의 궁극적인 목적이란 사실은 지극히 합당한 결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구속함을 받은 지상의 성도는 본질상 하늘에 속한 십사만 사천인의 자격으로 하늘의 영광을 누리는 자들로 존재합니다(엡 2:6). 주님의 재림으로 이 모든 사실들이 현실화될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중에 나타나리라”(골 3;4).
remnant7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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