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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성결교회가 주창하는 성결은 어떤 것인가?

수호천사1 2017. 2. 25. 11:28

성결교회가 주창하는 성결은 어떤 것인가?

  

 

 

들어가는 말

 

   '성결의 은혜란 무엇인가?' 이는 너무나 광범한 제목이다. 따라서 성결교회가 주창하는 성결의 정의에 국한시키기로 한다. 우리교회는 교회이름을 성결교회로 칭할 만큼 성결을 강조함으로 그 특징을 이루고 있다. 우리교회가 주장하는 성결은 어떤 것인가? 교회헌법에는 이는 곧 요한 웨슬레가 주장하던 '성결의 도리'라고 규정하고 있다. 더 나아가 성결교회의  헌법은 본 교회의 사명이 "웨슬레가 주장하던 성결의 도리를 그대로 전하려는" 데 있다고 천명하고 있다.

   웨슬레의 성결의 외침이야말로 18세기 누란(썩어져 가는 계란)과 같은 영국사회와 침체되었던 교회를 소생시킨 복음이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웨슬레가 가르친 성결의 도리가 가장 성서적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결을 말함에 있어 늘 성경의 빛 아래서 웨슬레의 가르침에 따라 조명하여 나가야 할 것이다.

 

 

Ⅰ. 성결은 성경의 도리요 온전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의 교리이다.

 

   먼저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웨슬레의 성결론은 성경에 근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웨슬레에 의하면, 신학의 최고의 권위는 성경이다. 초대 감리회는 한 마음이 되어 "모든 일에 있어서 성서적 그리스도인(Bible Christian)이 되기로 결심한 사람들이다. 또 그들이 어디에 있든지 단순하고 옛부터 내려온 성서적 기독교를 온갖 힘을 다하여 설교하기로 다짐한 사람들이다." 이것이 우리 성결교회가 이어 받은 전통이다. 성결교회는 그리스도와 그 사도들로 말미암아 나타낸 하나님의 계시 곧 성경말씀과 요한 웨슬레의 성경해석의 근본적 교리를 따라 교리와 신조를 제정했던 것이다. 어떤 이들은 성결의 도리가 웨슬레의 교리라고 비난했다. 웨슬레는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 교리는 웨슬레의 교리이기 전에 예수 그리스도의 교리이다. '너희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처럼 완전하라' 하신 말씀은 바로 예수님의 말씀이 아닌가! 그러므로 이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교리이다. 이는 사도 바울의 교리요, 사도 야고보의 교리요, 사도 베드로의 교리요, 사도 요한의 교리이다. 그것은 순수하고 온전한 복음(the pure and the whole gospel)을 전하는 모든 사람의 교리이다. 내가 이 교리를 언제 어디에서 발견했는지 한껏 간단명료하게 일러둔다. 나는 나의 영혼을 구원하려는 목적과 소원 이외에 다른 생각은 일체 없이 신구약 성경을 읽다가 바로 신구약 성경 안에서 곧 하나님의 말씀에서 이 도리를 발견한 것이다.

   웨슬레는 그의 신학을 지성과 논리에 호소하기보다는 성경과 경험에 호소하였다. 웨슬레는 신앙 체험을 중요시했지만, 그러한 개인의 신앙체험과 아울러 교회의 전통을 존중하였다. 그러므로 웨슬레의 성결의 교리는 헨리 카터(Henry carter)가 말한 대로, "어떤 당파적인 것이거나, 원래의 복음을 왜곡한 것이거나, 또는 역사적 기독교로부터 이탈한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웨슬레의 성결의 교리는 성경적 교리로서 경건한 기독교인들의 산 증거와 웨슬레 자신의 체험에 의해 확증된 교리요, 하나님께서 웨슬레와 메소티스트라고 불리는 사람들에게 주신" 위대한 유산(grand depositum)이다.

 

 

Ⅱ. 성결은 하나님 나라 백성의 기초요, 구원의 궁극적 조건이다.

 

   그러면 성결이 인류 구원론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가? 한국 성결교회가 "일반신자에게 성결의 은혜를 전하여 교회로 하여금 거룩되게 하기를 힘씀"을 교회설립의 목적으로 삼고 있듯이, 웨슬레는 그의 설교 사역을 통하여 모든 신자를 거룩케 하기에 힘썼다. 웨슬레는 하나님께서 메소티스트라고 불리는 사람들을 불러일으키신 것이 바로 이 성결의 도리를 선포하라는 뜻에서였다고 믿었다.

   성결은 하나님의 중심되는 본성으로써, 하나님 안에 존재하는 것으로 다른 모든 속성들의 바탕이며 하나님 자신의 활동 원리이기도 하다. 성결은 하나님의 나라 시민으로써의 기초(basis)이며 사귐(fellowship)의 기초이다. 그러므로 본래 사람은 "거룩함으로 지으심을"받았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게 명하신다. "너희는 거룩하라,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레19:2). 사도 베드로는 이 말씀을 인용하면서 권한다.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벧전1:15-16)

    "기독교의 최대목적은 처음 조상이 지은 죄로 완전히 잃어버린 거룩함을 되찾는데 있다. 즉,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함에 있다." 그러므로 사람이 궁극적으로 구원을 받기 위하여는 마침내 완전히 거룩해져야 한다고 기독교는 주장한다. 이렇게 주장하는 점, 즉 교리의 대의(the substance of the doctrine)에 있어서는 로마 카톨릭과 같은 고 교회(Higher Church)로부터 신비주의적 저 교회(Lower Church)에 이르기까지 전체 기독교가 동의하고 있다.

 

 

Ⅲ. 성화는 점진적이요, 또한 순간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면 이 성화의 과정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위에서 말한 대로, 하나님이 거룩하매, 신자가 궁극적으로 구원을 받기 위하여는 마침내 완전히 거룩해져야 한다는 대의(the substance of the doctrine)에는 모든 교회가 다 동의하고 있지만, 성화의 과정이 어떻게 이루어지느냐 하는 점, 곧 교리의 해석과 적용(The Circumstance of the doctrine)에 있어는 각 신학파 간의 설명이 서로 달라 각기의 특징을 이룬다.

   웨슬레는 성화(성결)의 과정에 대하여, 첫째로 로마 카톨릭의 입장을 비판하면서, 이는 사람의 행위나 공로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다른 한편 당시의 모라비안파들은 은혜를 신비주의적으로 주장하면서 사람이 거듭나는 순간에 아주 완전히 성화되어 더 이상 성장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주장하였다. 웨슬레는 이에 반론을 제기하면서, 마치 어린이가 점진적으로 성장하는 것처럼 거듭난 신자가 점진적으로 성장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그가 인간이 거듭난 후에도 아직 내재적인 죄가 남아있다고 보며,또한 성화에는 단계가 있다고 보기 때문이었다.

   이런 면에서 웨슬레는 당시의 칼빈주의자들의 토양에서 성화론을 개진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러나 그는 거기에 머무르지 않았다. 그는 점진적인 성화과정에 순간적인 요소가 결합되어 있음을 말하였다. 사람이 점진적으로 죽음에 이르지만 그에게 죽는 순간이 있듯이 신자가 이 체험에 도달하는 한 순간이 있다고 본 것이다. 그리하여 웨슬레는 성화의 점진적인 과정에 하나님의 직접적인 역사로서 보다 고차적으로 끌어 올려지는 단계가 있다고 보았다. 웨슬레에 의하면, 성화는 1)회개와 믿음으로 신생함과 함께 시작되며(이를 그는 초기의 성화, Initial sanctification라고 부른다), 그 과정에서 2)신자의 회개와 믿음으로 온전한 성화(Entire sanctification, 이를 흔히 성결이라고 부르기도 한다에 이르고, 마침내는 3)영화(glorification)의 순간에서 완결된다고 보았다. 동시에 그는 강조하기를 4)성화의 과정(process of sanctification)은 그 시작부터 이 목표를 향하여 목적론적(teleological)으로 계속 성장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런 웨슬레의 입장은 성경적이다. 우선 사도 바울의 데살로니가 교회에 쓴 서신을 보자. 데살로니가 전서 1장을 보면, 바울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교인들을 칭찬하고 있다. 이들에게는 믿음과 사랑, 그리고 소망이 있었다(살전1:3) 이는 복음을 능력과 성령과 확신으로 받아들인 결과이다. 곧 복음적으로 중생한 표적이다. 그러면, 이들은 정숙주의자들이 말하는 대로 더 이상의 여지가 없는 완전한 신자들인가? 아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3:10-13에서 이들을 위한 간절한 기도를 표현하고 있다. 곧 이들이 믿음에서, 사랑에서 보다 더 성장하기를 기원하고 있다. 그리고 소망과 연결시켜 이들의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기원하고 있다. 성도는 거듭남으로 거룩하여 졌다. 곧 "거룩하여진 상태"(        , the state of being sanctified)를 지니고 있다. 이는 실제적 성결(imparted holiness)이다. 그러나 성경 본문은 신자가 더 성결해져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이 웨슬레가 중생함으로 성화가 시작되고, 신자는 그로부터 성장하여야 한다는 주장은 성경이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4:3에서 바로 이런 성화 곧 성화의 과정(        , the process of sanctification)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상기시키면서, 순종할 것을 종용하고 있다.(4:8) 그리고 5:23에서, 이들을 위한 마지막 기도를 하고 있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여기에서 "거룩하게 하시옵소서"(       )라는 동사는 헬라어의 애오리스트 시상(Aorist tense)으로써 순간적이며 완결한 동작(action)을 나타낸다. 그러기에 이 기도는 신자가 성화의 과정에서 철저하게 성결해지기를 기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기도는 바울이 고후7:1에서 권면한 말에서 힘있게 뒷받침되고 있다. "우리 안에 있는 성결한 상태(        )를 완전케 해나가는 가운데,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단번에 순간적으로 그리고 온전히 깨끗게 하자(           )"고 바울이 교인들에게 권하고 기원한 것은 그들이 살고 있는 동안에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있었던 것임에 틀림없다. 즉, 모든 신자가 살아있는 동안에 온전한 성결의 은혜를 받으라고 강권하는 웨슬레의 입장을 힘차게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이어 이런 상태가 마지막 날까지 보존되기를 기원하고 있다.(5:23b). 그리고 또한 바울은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5:24)"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웨슬레가 성화의 과정에 순간적인 단계가 있다고 주장한 것은 성화가 인간의 수양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가능하며 또한 신자가 이 땅위에 살고 있는 현재 여기(here and now)에서도 가능한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은혜의 낙관론자였다. 이점에서 웨슬레의 성화론은 특징을 지니고 있거니와, 동시에 신학적 논쟁을 불러 일으키기도 했다. 그럼 이 핵심적인 논쟁점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Ⅳ. 온전한 성화(성결)는 성령충만의 은혜이며 기독자 완전 곧 동기에서의 완전이다.

 

   웨슬레의 온전한 성결의 은혜론은 19세기 미국의 성결교회에서는 성령론적으로 표현하기를 즐겼다. 19세기의 일어난 성령운동에서 그렇게 표현하는 것이 보다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사실, 우리 속에서 역사하시는 분은 성령이다. 죄를 회개하고 믿는 사람을 거듭나게(성결의 시작)하는 이는 성령이다. 성령은 신자 안에 내재하신다. 신자가 성령의 충만을 받으면 오순절에 보듯이 순간적으로 원죄에서 정결하게 씻음과 하나님을 봉사하기에 현저한 능력을 받게 된다. 이런 성령론적 해석에 대하여 웨슬레가 반대할 이유는 없다. 성령론적으로 설명할 때에 체험의 순간성(죄에서 씻음과 능력받음)을 고조하는데 장점이 있다. 그러나 웨슬레는 성결을 기독론적으로 설명하기를 선호했다. 이는 그 당시 열광주의자들의 과오를 경계하는 웨슬레의 입장에서 그리스도를 본받는 사랑의 생활에서 성결을 강조하는 데 장점이 있기 때문이다.

   웨슬레에 의하면 온전한 성화(성결)은 신자가 (내재적인 죄에 대한 신자의) 회개와 (성결케하는)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에서 마련하신 성결의 은혜를 받는다. 이렇게 설명하든 저렇게 설명하든, 성결은 하나님이 친히 (성령으로)하시는 일이며그 결과는 같다. 곧 신자는 온전한 성화의 단계에서 모든 내재적인 죄에서 씻음을 받으며 하나님의 부르심에 종사하기에 합당한 능력을 은혜로 받는다. 그러므로 웨슬레는 이를 기독자의 완전이라고 불렀다.

   당시에 칼빈주의자들이 그랬듯이 어떤 사람들은 신자가 육을 가지고 있는 한은 죄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전제한다. 따라서 인간이 이 땅위에 살고 있는 동안 사람은 무지, 실수의 가능성 등 인간의 연약성(infirmities)을 지니고 있기에 죄인일 수밖에 없다고 단정한다. 그들은 인간의 연약성 자체를 죄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죄에서의 씻음에 대하여는 부정적이다. 웨슬레가 온전한 성화를 말하며 '죄에서의 온전한 씻음'을 주장하는 것을 맹렬히 공격했다. 또는 심프슨은 이 웨슬레안과 칼빈주의 케직파 간의 논쟁에서, 어느 한편을 들지 않고 "성결은 예수께서 신자의 생 속에 거하시는 것"이라고 애매한 입장을 취하였다.여기에 우리는 웨슬레의 입장이 독특한 특징을 지니고 있음을 인지하고, 그가 말하는 '온전한 성화 또는 기독자 완전'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똑똑히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웨슬레는 온전한 성화(또는 성령충만의 견해)를 소극적인 면과 적극적인 면에서 설명하고 있다. 이는 논리적이기도 하다. 방이 밝아졌다 하면, 이는 빛이 밝게 한 것이지만 동시에 어두움이 사라졌다는 이야기가 아니겠는가? 사도행전 15장 8-9절에서 베드로도 초대 신자들이 성령충만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마음의 성결함을 받았다는 면을 증언하고 있다. 그러면 웨슬레가 의미하는 온전한 성화는 어떤 상태인가?
   웨슬레는 이를 믿음의 관계에서 설명한다. 웨슬레가 죄에서의 씻음을 말할때에 그는 신자가 인간의 한계성 또는 연약성(infirmities)에서 벗어나, 실수, 무지, 타락의 가능성에서의 완전 자유를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런 완전은 영화의 순간에서 이루어지는 '절대적 완전'이다. 이 점에서 웨슬레는 개혁신학과 다를 것이 없다.
  
   그러나 웨슬레는 목회적 측면에서 이 '완전'을 '상대적인 완전'과 '절대적 완전'으로 구분하여 설명한다. 그리고 신자는 이 상대적인 완전 곧 온전한 성화의 은혜를 죽기 전에도 추구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성서가 약속을 하고, 권고하고 있으며, 또한 주님과 사도는 신자가 이 은혜에 이르도록 기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오순절의 성령충만을 체험한 신자들에게서 그 증거를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웨슬레가 말하는 완전은 철학적 완전이나 '절대적인 완전'이 아니라 성서가 요구하는 '그리스도인의 완전', 곧 '성서적 완전'이요 '상대적인 완전'인 것이다.

   웨슬레에 의하면 이 은혜체험을 통하여 신자가 하나님이나 천사와 같이 된다는 것이 아니다. 웨슬레가 말하는 '기독자의 완전'이란 인간의 연약성(infirmities)을 가지고 있는 그대로의 인간으로서의 완전이다. 웨슬레는 인간이 지니고 있는 불완전한 것들, 곧 무지, 실수의 가능성 등 인간의 연약성(infirmities)이 죄를 짓는 계기를 마련하지만 그 자체를 죄라고는 볼 수 없다고 믿었다. 사실, 유한한 것을 죄로 보는 것은 희랍의 이원론에서 기인한 것이지, 성서적 견해는 아니다. 하나님이 유한한 피조물을 보시고 '좋았더라'하셨지 악하다고 하시지 않으신 것과 같다.

   웨슬레는 '기독자의 완전'이라는 저서에서 말하기를, 기독자 완전은 곧 의도의 순수성(purity of the intention), 마음의 할례요, 또 다른 각도에서 볼 때, 이는 온전한 성별(full consecration), 그리고 또 다른 각도에서 볼 때 이는 '완전한 사랑'으로 설명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고 보았다. 사랑은 소극적인 의미에서는 바로 죄적인 것을 모두 추방하며, 적극적인 의미에서는 사람의 마음을 채워 사람의 모든 말과 행동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서가 말하는 기독자의 완전의 전부는 바로 완전한 사랑(perfect love), 곧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웨슬레는 기독자 완전을 하나님과의 신앙의 관계, 또는 동기에서 이해한다. 행동의 결과에서의 완전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곧은 나무 막대기가 물속에 비치는 것을 보면 굽어보이듯이 사람의 동기가 아무리 순수하더라도 그가 인간의 연약성을 지니고 있는 한 그 행동의 결과가 남이 볼 때에 완전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은혜나 죄를 물건처럼 생각하여(thing- thinking approach) 이해해선 안 된다. 하나님과의 동적인 관계에서 이해하여야 한다. 그럴 때에 우리는 성결에서의 소극적인 면과 적극적인 면, 그리고 완전하지만 동시에 더 성장하여야 되는 성결의 성격을 포괄적으로 이해하게 된다. 곧 사랑은 '순수'한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무한히 성장하는 것이다.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있는 신자들의 '사랑의 풍요함'을 인하여 감사하면서, 동시에 그 사랑이 더욱 많이 넘치기를 위해 기도한 것처럼, 기독자 완전은 완전한 것이나 동시에 부단히 더욱 완전으로 나아가야 하는 기독자 완전인 것이다.

   이와 같이 '기독자의 완전' 또는 '성결'을 이해할 때, 이 교리에 대한 많은 오해를 제거한다. 곧 사랑이라는 것은 정적(static)인 것이 아니고 동적인 인격적 관계에서 이해되는 것이다. 사랑의 실재는 인격적인 결단과 관계에서 이해된다.

 

 

Ⅴ. 성결은 전도와 사회봉사의 원동력이다.

 

    사랑은 윤리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완전한 사랑으로 표현되는 성결 또는 기독자 완전은 윤리적으로 나타나야 한다. 웨슬레가 말하는 성결은 마음과 생활에서의 성결이지 신비적인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웨슬레가 강조하는 성결론은 전도와 봉사 곧 홀리시틱한 전도(Holistic Evangleism)의 원동력이 되었다. 이와 같이 성결 또는 기독자 완전의 본질을 사랑으로 보며 강조하는 웨슬레에게 있어서 성결은 사회적 성격을 띠고 있다. 웨슬레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단순히 종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종교(social religion)를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단순한 성결(mere holiness)은 없고 사회적 성결(social holiness)이 있을 뿐이다. 기독자 완전의 길이와 넓이 그리고 깊이와 높이는 바로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다. ....사실에 있어, 자기 형제를 사랑하되, 말로만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셨듯이 사랑하는 자는 그 누구나 '선한 일'에 열심을 아니 낼 수가 없다. 그의 영혼에는 형제들을 위하여 사역하고 함께 있어 주기를 열망할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기회가 있을 때에, 주님이 그랬듯이, 선한 일을 하려고 할 것이다.
 
   웨슬레에 의하면 사랑의 행동은 곧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나타난 것이다. 행동으로 이어지는 사랑을 떠나서는 성결은 그 내용이 없어지고 마는 것이다. 그대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행하여야할 것이 아닌가. 하나님의 사랑은 폭넓은 사랑(comprehensive love)이다. 따라서 우리의 사랑도 그러한 사랑이라야 한다. 그러므로 메소티스트는 첫째로 복음을 전파하여야 하며 또한 사랑의 봉사를 하여야 한다고 웨슬레는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메소티스트는 전도와 아울러 경제적으로 어려운 자들을 도와주며 공장사역과 교육을 통하여 어두운 사회를 밝게 변화시키는 일을 하였다. 웨슬레는 당시의 노예문제, 감옥의 상태 또는 산업에서 가진 자들의 착취행위에 대하여 항변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웨슬레는 메소티스트가 교회와 사회를 변화시키는 성결의 누룩의 역할을 해야한다고 믿었다. 성결에 대한 이와 같은 웨슬레의 강조는 그의 전도와 사회참여를 통하여 18세기 영국전역에 큰 영향을 끼쳤다.

 

 

Ⅵ. 성결은 믿음으로 순간순간 주를 의지함으로써 유지되는 완전이다.

 

   하나 더 고찰하고 넘어가야 할 것은, 웨슬레가 성결한 신자도 무지, 실수의 가능성 등 인간의 연약성(infirmities)을 지니고 있다고 했는데, 그러면  어떻게 '성결(정결)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느냐'는 문제이다. 이면에서 많은 학자들이 웨슬레는 불가능한 가능(imposible posibility)을 말한다고 비판한다. 웨슬레는 주장하기를, 성결한 신자는 무지, 실수의 가능성 등 인간의 연약성을 지닌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 정죄함 없이 거룩한자(성도)로 설 수 있다고 말한다. 과연 사람이 그런 연약성을 지니고 죄악 세상에서 살면서 범죄하지 않을 수가 있다는 말인가? 사실상, 범죄치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말하기를, 웨슬레의 성결론은 하나의 이상(ideal)에 불과하다고 한다. 이에 대하여, 어떤 성급한 성결론자들은 이런 반론에 응수하기를, '실수(mistake)는 죄가 아니다'라고 변명을 하기도 했다. 우리가 알 것은, 양자 모두 웨슬레를 올바로 이해하지 못한 데서 나오는 변론이다. 이런 질문이나 반론은 웨슬레의 신학방법론을 이해 못하고서는 해답될 수 없다.

   웨슬레는 그의 설교에서 사람들이 고의적으로 짓는 죄, 곧 유의적 죄(有意的罪, The voluntary transgression of the known law of God)를 주로 지적하고 회개를 촉구했다.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웨슬레는 신자가 무의식적으로 범하는 죄도 죄라고 인정한다. 이를 전자와 구분하여 '무의적 죄(無意的罪, The involuntary transgression of the perfect law of God)' 라고 불렀다. 이 죄는 자신이 알았던 몰랐던 간에 하나님의 법을(the perfect law of God, known or unknown) 무의식적으로 범한 죄다. 이 죄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효험없이는 하나님의 형벌을 면할 수 없다고 웨슬레는 말한다. 혹자가 웨슬레는 자범죄만 인정하고 후자는 죄로 인정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렇다면, 어찌 사람이 죄를 범하지 않고 살아 갈 수가 있단 말인가? 그렇다. 웨슬레에 의하면 성결의 은혜를 받은, 완전한 기독자(the perfect)도 그들의 연약성으로 인하여 죄를 무의식적으로 짓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완전한 자라도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는 기도를 드려야 한다고 웨슬레는 말한다. 그러면 루터가 말한 대로 신자는 의롭다함을 받아도 동시에 죄인(Simul justus et pecattor)이라는 의미인가? 신자는 성결한 상태를 유지할 수 없다는 말인가?

   여기에 양자의 입장이 아주 흡사한 것 같다. 그러나 사실은 다르다. 웨슬레는 논리적인 추리나 추상적인 접근(speculative approach)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그가 그의 신학적 인간론에서 그랬듯이, 구속론적인 콘텍스트에서 무의식중에 범죄하는 신자의 무의적 죄(involuntary transgrassion of the perfect law of God)를 다루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웨슬레는 성결한 자가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를 순간순간 의존하는 순간 그가 무의식중에 범하는 죄는 우리 죄를 씻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성결을 유지하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빛 가운데 거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우리를 죄에서 계속 씻으시는 것이다.웨슬레는 '신자의 회개'라는 설교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당신을 사랑하여... 당신의 죄를 그의 몸으로 친히 감당하신 예수를 계속하여 믿으시오! 그는 항상 효험 있는 그 보혈로 인하여 당신을 모든 정죄함에서 구원하십니다. 이리하여 우리는 의롭다함을 받은 상태에 계속 머무르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여,
나에게는 순간순간 당신의 죽으심의 공로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또한 우리는 믿음의 확신을 가지고 다음과 같이 외칩니다.
'주여,
나에게는 순간순간 단신의 죽으심의 공로가 효험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생애와 죽음, 그리고 우리를 위한 그의 중보의 기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순간순간 새로워져서 아주 깨끗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지금 정죄함이 없을 뿐 아니라 또한 주님께서 우리의 마음과 생활을 깨끗하게 씻기심으로 전에 있었던 형벌에 대한 두려움도 지금은 없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같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순간순간 우리 위에 머물러 있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느낍니다. ...이 믿음에 의해 우리는 영적 생활을 계속할 수 있습니다.

   웨슬레는 무의식적으로 범죄하는 신자의 고백(회개)과 믿는 자에게 효험되는 그리스도의 보혈의 효험에 대한 믿음과의 긴장을 유지하면서, 하나님의 은혜가 더 풍성함을 강조한 것이다. 바울이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나니....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고 한 것처럼. 웨슬레는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종교개혁자들보다는 보다 더 깊이 그리고 다이나믹하게(dynamic)보는 은총의 낙관주의자였다.

   이러한 이해와 강조의 차이는 우리의 생명력 있는 눈(eyes)과 물질인 안경(eye glasses)에 적절히 비유된다. 안경은 아무리 철저히 물로 닦아서 써도 조만간 먼지가 쌓인다. 청결함을 유지할 수가 없다고 결론지어야 할 것이다. 물질을 다루듯이 이 교리를 접근하면(thing- thinking approach in theology), 신자는 순간적으로 씻음을 받아도 그 성결을 유지할 수 없는 죄인이라고 결론 내릴 것이다. 그러나 살아있는 사람의 눈은 먼지가 들어옴에도 불구하고 그 정결한 상태를 유지한다. 그것은 먼지가 눈에 안 들어와서가 아니라, 눈에는 눈물이 항상 흘러 먼지를 씻기 때문이다. 성결한 자가 자신의 연약성 때문에 무의식적인 죄를 범할 지 몰라도 그가 그리스도를 계속 의지함으로 주의 보혈의 효험으로 계속 씻음을 받아 성결을 유지할 수 있다는 웨슬레의 이해는 바로 이렇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웨슬레가 말하는 성결한 삶은 신자가 자기 안에 아직도 남아 있는 내재적인 죄와 자기 무능을 회개하며 예수를 믿음으로 온전히 성결해질 뿐만 아니라, 바로 그 믿음으로 순간순간 주를(회개와 믿음으로) 의지하고 걸어감으로 유지되는 성결이다. 따라서 성결은 그리스도 중심의 삶이다. 이는 소극적 의미에서 그가 하나님 앞에 두려움 없이 서게 할뿐만 아니라, 적극적인 면에서는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아가는 헌신과 사랑의 삶인 것이다.

 

 

맺는 말

 

   요약해서 웨슬레의 메시지의 핵심은 삶과 사회를 변화시키는 성결의 복음이었다. 우리 죄인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 마련하신 구원은 온전한 구원, 온전한 복음(the whole Gospel, Full Gospel) 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웨슬레가 그의 구원론에 있어 성화론을 강조함으로 신자와 교회의 생활에서의 새로워짐을 촉구하게 되었다. 18세기의 교회의 갱신과 사회변화는 바로 이 효과를 역사적으로 증명한다.

   웨슬레가 주장한 온전한 성화(성결) 또는 기독자의 완전은 신자를 향한 도전이었다. 신자는 모름지기 초보의 믿음에 머물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가야 한다. 하나님 앞에 깨끗할 뿐만 아니라 더 많은 사랑의 생활로 나아가야 한다. 이런 설교의 메시지는 18세기 영국교회와 사회를 부흥케 하였다. 이런 운동은 19세기 미국에서의 성결 오순절 운동에서 다시 꽃을 피웠다. 이런 성결의 메시지와 강조는 명목상의 신자(nominal Christians)들이 성령충만의 생활을 추구하게 하였다. 이 성결의 메시지는 명목적인 신자들로 가득 차 있는 오늘의 교회에 큰 도전과 호소가 될 것이다.

   여기에 우리는 성령세례 또는 성령충만으로 순간적인 성령체험을 강조함과 동시에 성결을 기독론적으로 설명하며 성결 곧 온전한 사랑을 고조했던 웨슬레의 가르침을 조명하여 우리교회의 유산을 빛내게 되기를 바란다. 우리 교회는 웨슬레가 주장하던 성결의 도리를 그대로 전하려는 사명 하에 있기 때문이다.


조종남 박사/서울신학대학교 전 총장

출처 : 크리스찬 영의 세계
글쓴이 : 죤.웨슬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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