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그러진 성령의 얼굴
한국교회 성령운동이 무엇이 문제인가?
제1장 뒤틀린 성령의 음성
1. 직통계시를 받는 사람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만 성령의 근본적인 사역이 무엇이며, 그 사역의 특성과 패턴이 무엇인지를 파악할 수 있다. 성경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가장 깊은 비밀인 삼위일체와 삼위 하나님이 계획하신 구원의 경륜과 뜻을 밝히 계시해 준다. 성경에 계시된 이 진리를 따라 역사하신다. 그러므로 성령은 진리의 영이시다. (요14:17) 예수은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라고 말씀하셨다. 곧 예수님과 그분의 구속 사역에 관한 진리를 증거하신다는 말씀이다. 성령은 자유하시지만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진리의 테두리를 벗어나 일하지 않는다. 곧 예수님과 그분의 구속 사역에 관한 진리를 증거 하신다는 말씀이다. 성령은 자유하시지만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진리의 테두리를 벗어나 일하시지 아니하신다. 이것이 성령이 예수님과의 관계 그리고 그 분을 증거하는 성경 말씀과의 관계에서 보이시는 겸손하심이다.
그러므로 어떤 영적인 현상이 성령의 역사인지 미혹의 영의 장난인지 분별하는 척도는 성경이다. 성령의 자유로운 역사를 제한하면 안된다는 논리로 냉철한 성경의 검증과 분별을 거부할 때 교회 안에는 봇물 터지듯 온갖 종류의 사이비 가르침과 미혹하는 영의 역사가 밀려들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말씀의 굴레에서 벗어난 성령 운동은 이단들이 득실거리는 온상이다. 성경으로 입증되지 않은 영적인 현상과 체험을 비판이라도 하면 성령의 역사를 훼방하고 성령을 소멸한다는 식으로 위협하고 저주하는 것이 사이비 성령 운동의 상투적인 수법이다. 그들은 항상 성령의 주권적이고 자유로운 역사하심이라는 허울 아래 성경의 가르침을 교묘히 피해가려 한다.
그러므로 아무리 굉장한 표적과 기적이 일어났을지라도 그 것을 무턱대고 성령의 역사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성경은 거짓 선지자와 사탄도 이적과 기사를 행하니 거기에 미혹되지 말라고 가르친다. (마 7:15-16, 딤전 4:1, 7, 살후 2:9-10) 성경은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 (요일 4:1) 라고 가르친다. 따라서 진리의 잣대를 가지고 잡다한 영적인 현상을 진단하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중대한 사명이다. 성령의 자유로운 역사를 제한할까 두려워 성경적인 검증을 회피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며 오히려 성령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다. 성령을 가장하는 미혹의 영의 자유로운 역사에 문을 할짝 열어 주는 것이나 다름없다.
성령은 성경에 계시된 진리와 상층되는 가르침을 통해 역사하시지 않는다. 그 분은 그 누구에게도 재림 날짜를 계시하지 않으신다 그것은 그때와 시기는 아무도 모른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성경에 분명히 기록되어있기 때문이다. 과거 한국 교회를 떠들썩하게 한 시한부 종말론을 주장했던 ‘다미선교회’ 라는 집단은 1992년 10월 28일에 주님이 재림하신다는 계시를 받았다고 굳게 믿었다. 그러나 그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그들이 받았다는 계시는 결국 성령으로부터 받은 것이 아님이 드러났다. 이 사건은 성경 말씀과 상충되는 메시지는 메시지는 그것이 아무리 신비한 체험을 통해 들려 올지라도 성령의 음성이 아니라 다른 영의 속삭임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또한 성령은 성경이 알려 주지 않은 것을 계시하시지 않는다. 바울에게 있었던 가시가 무엇이었는가에 대해 궁금해하는 이들이 많다. 그에 대한 많은 추측과 해석이 있다. 그러나 그 모든 이론은 하나의 가설에 불과할 뿐이다. 어느 누구도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확실히 알 수 없다. 성경이 침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성령도 성경 말씀을 따라 침묵하신다.
천안에 있는 어떤 교회의 목사는 바울에게 있었던 육체의 가시가 무엇이냐고 하나님께 여쭈었더니 그것이 욕창이었다고 성령이 말씀하셨다고 한다. 하나님이 아직 아무에게도 알려 주지 않았는데 자신에게만 특별히 알려 주는 것이라고 하시며 가르쳐 주셨다는 것이다. 그는 과연 성령의 계시를 받은 것인가? 그는 성령이 아니라 미혹의 영이나 자신 안의 어떤 음성을 들은 것이 틀림없다.
필자가 교수 사역을 하고 있는 신학대학원에 그 목사를 추종하는 한 여자 신학생이 있었다. 그녀는 직통 계시를 받는다는 그에게 완전히 매료되어 그를 거의 하나님 수준으로 추앙했다. 필자는 학생처장을 맡고 있었기에 그녀와 몇 차례 면담을 했다. 그녀를 설득해 보려 했으나 도무지 필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았다. ‘신학 나부랭이나 논하며 땅에서 박박 기는 신학 교수가 높은 영계를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하나님와 직통하는 신령한 주의 사자를 어찌 알겠는가’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 목사는 하루가 멀게 입신하여 천국과 지옥을 갔다 온다고 한다 그리고 거기서 본 것들을 교인들에게 자주 이야기해 주는데 지금 지옥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극심한 고통을 받고 있고 천국의 삼층천에서는 솔로몬이 술람미 여인과 열애중에 있다고 한다. 그런 말이 대부분의 교인들에게는 황당하게 들리겠지만 그 영계의 거성에게 푹 빠져있는 그녀와 그 교회의 교인들에게는 어떤 성경말씀보다 은혜가되는 천상의 메세지로 들린다.
2. 천국을 들락거리는 사람들
요즘 입신하여 천국에 다녀온다는 이들이 많다. 토마스 주남여사가 쓴 “천국은 확실히 있다”라는 책이 날개 돋친 듯이 팔렸다. 영문판이 세계 각국어로 번역되었고 필자가 가지고 있는 한글 번역본은 무려 83쇄본이다. 그만큼 천국 체험담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많은 모양이다.
주남여사는 그 책에서 자신이 과거 7년동안 천국을 열일곱 번 다녀온 경험을 기록하였다. 예전에 시한부 종말론이 기승을 부릴 때도 천국을 보았다고 증언하는 책들이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재림 날짜에 대한 예언이 빗나가자 사람들의 관심을 그토록 끌던 그들의 천국 체험담은 외면당하고 거의 폐기처분되었다. 그러다가 주남 여사의 책으로 다시 천국 체험에 대한 관심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책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이런 체험담을 검증할 수 있는 어떤 잣대나 기준을 성경에서 발견할 수 있을까? 물론 어떤 특별한 영적 체험의 가능성을 완전히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런 경험은 극히 주관적일 뿐 아니라 환상적인 것이어서 그것이 참된 영적체험인지를 입증할 만한 객관적인 근거가 전혀 없다. 그녀의 말이 참일 수도 있고 새빨간 거짓말일 수도 있다. 전적으로 독자가 어떻게 믿느냐에 달려 있다.
만약 그것이 꾸며냈거나 환각에서 비롯한 것이라면 순진하게도 그 말을 굳게 믿는 이들은 완전히 바보가 되는 셈이다.
반면에 그 말이 그녀의 영적체험에서 나온 진술인데도 믿지 않았다면 성령의 계시를 의심하고 과오를 범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비록 그 진술이 그녀의 어떤 영적 체험에서 나온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성령의 계시나 역사라는 확실한 성경적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의심스러운 것은 그대로 믿기보다는 의구심을 가지는 편이 훨씬 지혜로운 일이며 성경 말씀을 신앙과 체험의 척도로 삼는 것이 올바른 신앙의 자세이다. 그녀는 주님이 친히 그 책을 쓰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을 거듭 강조한다. 주님이 마지막 때에 많은 영혼들을 주님께 돌아오게 하는 지상 명령을 성취하시기 위해 그 책을 썼단다. 과연 그럴까? 그녀는 지옥의 불구덩이에서 자신의 어머니와 친구들이 고통받는 장면을 보았다고 한다. 그 비참한 광경을 목격하고 슬퍼하는 자신을 위로하며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딸아 나는 네가 그들을 보는 것이 얼마나 가슴 아픈지 알고 있다. 그러나 너는 나를 위해 쓰는 책에 이 체험을 반드시 기록하여야 한다. 이것이 네 부모와 친구들을 보여 준 이유다. 너는 세상사람들에게 지옥의 실상을 경고해야만 한다. 내가 나의 교회를 내게로 거두어 들이기 위해 재림하기 전에 될 수 있는 한 많은 영혼들이 구원받기를 원한다”
이 대목에서 베일에 가려진 미혹의 영이 그 모습을 슬며시 드러낸다. 주님이 하셨다는 이 말은 성경에 기록된 주님의 말씀과는 아주 다르다. 누가복음 16장에 보면 나사로와 부자의 예화가 등장한다. 여기에서 나사로는 죽어 하늘에 올라가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고 부자는 죽어 음부에 내려가 고통을 받으며 아브라함을 보고 애원한다.
누가복음 16장 27~31절의 예화를 통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진리는 무엇인가? 성경말씀, 즉 모세와 선지자들로 대변되는 구약성경 말씀을 듣지 않으면 아무리 죽은 자가 살아나서 지옥의 고통을 생생하게 증언해도 별효과가 없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예화속의 부자와 같이 성경말씀보다는 죽었다가 살아난 자가 전하는 지옥과 천국에 대한 생생한 증언을 사람들이 더 잘 믿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주님의 판단은 그렇지 않다. 주남 여사는 이러한 주님의 말씀에 상충되는 세상적인 생각을 주님의 음성과 말씀인 것처럼 위장하여 전하고 있다. 이것은 전형적인 미혹의 영의 역사이다.
주님은 죽어서 실제 천국을 체험하고 지옥을 목격한 사람이 살아서 지상으로 돌아와 그 본 것을 증언해도 별 효과가 없다고 하셨다. 그렇다면 주남 여사의 증언은 훨씬 더 효과가 없을 것이다. 그녀는 죽어서 실제 천국과 지옥을 체험하고 부활해서 그것을 증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단지 어떤 환상 속에서 체험한 것을 진술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 죽었다가 부활한 사람의 말보다 훨씬 더 신빙성이 떨어질 것이다. 이런 황당한 이야기를 통해 사람들을 주님께로 돌이키게 하는 것이 주님의 뜻이라는 주장은 성경에 분명히 계시된 주님의 말씀을 뒤집어 엎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 계시의 말씀을 통해 사람들을 믿게 하는 것이 성경에 분명히 밝혀진 주님의 뜻이다. 이 복음을 듣고 믿지 않는 이들은 천국과 지옥에 대한 어떤 증언을 들어도 믿지 않는다. 믿음은 오직 성령의 감동으로만 가능한 것이다. 성령의 감동은 복음의 진리를 통해 역사한다. 이 복음의 진리를 제쳐놓고 허황된 천국 이야기에 집착하는 이들에게는 미혹하게 하는 어둠의 영의 은밀한 역사가 함께 한다. 천국을 봤다거나 경험했다거나 주장하는 것이 이단의 상투적인 특징이다. 제칠일안식교회 여선지자로 잘 알려진 앨런 화이트도 천국을 자주 들락거렸다고 한다. 하루는 하늘의 지성소에 들어가 십계명 돌비를 보았는데 제4계명(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에만 특별히 황금 띠 둘려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이런 천국 체험담이 성경 말씀보다 더 권위있게 받아 들여져 안식교에서는 제 4계명에 특별한 역점을 둔다. 몰몬교회 창시자인 조셉 스미스도 자신이 받았다는 하늘의 계시와 환상을 성경과 동등하게 취급하였다.
천국에 관한 이야기는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할지는 모르나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믿음를 갖게 하지는 못한다. 오히려 사람들의 관심을 성경 말씀에서 분리시켜 허황된 신화에 쏠리게 하고 말씀을 통해 믿음을 자라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방해하며 복음의 진리를 혼잡하게 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주남 여사는 천국을 방문할 때마다 몸에 심한 진동과 진통을 했다 고 한다.
“나는 내 몸이 침대에서 들려지는 것 같은 이상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모르면서 두 팔을 마구 휘두르기 시작했습니다. 배속에 있는 것들이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았습니다. 잠자리에 들려고 할 때 내 몸이 매일 저녁 8시가 되면 주님의 권능으로 인해 진동을 시작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렇게 진동이 오는 동안에는 성경을 읽거나 기도를 했습니다. 그런 다음에 침대에 누우면 5분 내지 10분 동안 나의 몸은 아주 격렬하게 진동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나의 위장은 조여들고 복부에 경련이 일어나곤 했습니다. “때로 초저녁에 주님과 두서너 시간을 함께 하는 경우에도 나는 지쳐 잠들어 버렸고 그러면 주님은 새벽 2시나 3시에 나를 깨우셔서 다시 두세 시간 일을 하게 하셨습니다. 그런 밤을 보내고 난 다음 날에는 몸이 너무나 지쳐서 얼굴이 수면 부족으로 인해 통통 부어 올라 있었습니다. 주님은 내손을 사용하셔서 머리 끝에서부터 발끝까지 내 몸의 모든 부분을 반복해서 만지셨습니다. 나는 마치 때를 씻어 이렇게 몸을 만지거나 내는 것처럼 손으로 나의 몸 전체를 문지른 다음 다시 더러워진 손을 씻는 것 같이 양손을 잡곤 하였습니다. 이 모든 것들을 내게 지시하시는 분은 성령이셨습니다.”
이렇게 몸을 만지거나 괴롭게 하는 것이 과연 성령의 역사라고 할 수 있는가? 그녀의 책에는 이같이 도저히 성경적이라고 볼 수 없는 해괴한 이야기들로 가득하였다. 성경은 신비한 책험을 자세히 간증하거나 진술하는 것을 전혀 권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행동이 아무런 유익과 의미가 없고 역효과만 자아낼 수 있다는 점을 주지시킨다. 그렇기에 바울 사도는 참으로 삼층천에 다녀온 체험을 했음에도 그것에 대해 침묵하였다. 사람들이 지나치게 생각할까봐 그에 대해 말하는 것을 자제하였다.
어째서 바울 사도는 그 놀라운 천국 체험담을 주남 여사처럼 그의 서신서에 기록하지 않았을까? 왜 그는 자신이 보고 경험한 천국을 전함으로 사람들을 주님께 인도하려 하지 않았는가?
그것은 주님이 말씀하신 바와 같이 그렇게 하는 것이 복음전도와 영적 성숙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또한 사람들이 그를 지나치게 좁혀 우상화할 수 있었고 영적 세계에 대한 수많은 억측과 공상들이 난무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런 바울의 태도가 성경에 분명히 명시된 주님의 말씀과 부활된 자세이며 말씀의 인도함을 받는 성령 사역자의 모습이다.
우리는 성경에 계시된 것으로 만족하는 신앙 생활을 해야 한다. 아직도 허락되지 않은 천상의 세계를 엿보려는 영적 관음증을 경계해야 한다. 이는 너무 성급하게 천국을 청구하려는 영적 조급함의 결과이다.
교인들이 천국에 대한 그런 증언을 잘 분별하도록 지도해야 할 목사들 중에서도 그런 증언을 대단한 권위라도 있는 계시처럼 신봉하는 이들이 있다. 어떤 목사는 그가 쓴 책 「지옥에 가는 크리스천들」에 주남 여사의 추천서를 실었다. 그 책의 표지에 예수님이 주남 여사에게 하셨다는 말씀을 인용하였다.
“「지옥에 가는 크리스천들」은 ‘천국은 확실히 있다.’ 와 연결되어 있다. 마지막 때 내가 변 목사를 쓸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을 쓰게 하였다. 나의 재림 전에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깨닫고 회개하게 하려고 이 책을 쓰게 하였다. 이 책은 내가 기뻐하는 책이며 내게 매우 중요한 책이다.”
또한 그 책의 마지막 부분에는 샨 볼츠라는 사람이 천국 도서관에 그 책이 있는 것을 보았다는 말이 기록되어있다. 「변 목사님 하늘나라에 목사님의 책이 많이 있습니다. 천국의 도서관에 목사님의 책들을 위한 책꽂이 같은 섹션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나 두셋이 아니라 매우 많은 책들이 거기에 꽃혀 있었습니다. 지옥에 가는 크리스천들도 천국의 도서관에 꽃혀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한국어 뿐 아니라 많은 다른 언어로 많은 나라에 목사님의 책이 번역될 것이고 전 세계로 그 책들이 뻗어 나갈 것입니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실로 그 목사의 책은 대단한 책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아마 지상에서 유일무이한 책일 것이다. 다른 책들은 기껏해야 권위있는 학자나 유명인사 추천을 받는 정도지만 그 목사의 책은 주님의 강력한 추천까지 받았을 뿐 아니라 천국 도서관에 영구히 보관될 책이니 말이다.
그 목사는 그들의 말이 과연 사실인지를 판명할 아무런 객관적이고 성경적인 근거가 없음에도 그 말을 마치 주님의 말씀인 양 인용하였다. 우리는 여기서 주님의 말씀이라는 주장이 얼마나 남용되기 쉬운지 자칫 잘못하면 한 개인의 선전용으로도 이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게된다.
3. 예언자인가, 점쟁인가
얼마 전 한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청년 점술가가 출연했다. 그는 같이 출연한 연예인들의 과거와 현재의 문제를 족집게처럼 잘 집어내고 그들의 미래를 예언했다. 모두 그의 신통력에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는 어떤 이를 보면 그의 운이 바닥을 치고 있고 재물이 흩어지며 사람들도 그를 배신하고 떠나는 것이라 했다. 그에게는 17세 때부터 이런 신기가 나타났는데 하루는 학교에서 한 선생님을 보는데 그가 큰 교통 사고를 당하는 것이 보였다고 한다. 자신도 그런 기이한 체험은 처음이고 그것이 미래를 예시하는 것인지 확실치 않아 미처 말해 주지 못했는데 그 선생님이 자신이 본 그대로 성수대교에서 대형 사고를 당했다는 것이다. 그 후부터 그는 개인이 운명뿐 아니라 사회의 정치, 경제의 미래까지 예측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주식이 언제 오르고 내릴지, 앞으로 어떤 사업을 해야 할지 어디에 투자해야 할지를 예언한다.
필자는 그를 보면서 요즘 한국교회에서 활개치고 있는 자칭 예언자들이 이 점술가와 얼마나 흡사한지를 새삼 발견하게 되었다. 어떤 예언자라는 이들은 기독교라는 탈을 쓴 점쟁이와 다름없다. 자녀들이 어떤 학교에 가야 하고 무슨 사업을 해야 하며 심지어 어디로 이사해야 하는지까지 예언한다. 그러니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나 미래가 불안하고 궁금할 때 마다 점쟁이를 찾아가듯이 이런 예언자들을 찾아다니는 교인들이 꽤 많다. 필자와 상담했던 한 여성은 예언하는 신통력이 있다는 여전도사가 자신이 만나고 있는 청년이 결혼할 대상이 아니니 헤어져야 한다고 했다는 것이다. 평소 여전도사의 예언을 거의 절대적으로 믿고 따르는 그녀의 어머니가 한사코 그 청년과 결별할 것을 강요하니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 난감하다고 했다. 청년이 그리스도인인데다가 혼인해서는 안 될 만한 사유가 전혀 없는데도 결혼 대상에서 완전히 제외된 것이다. 단순히 미래를 미리 내다보는 점괘가 그렇게 나왔기 때문이다. 과연 이러한 예언은 성령으로 부터 온 것일까?
성경에서 이런 유의 예언은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우리의 미래를 알려 주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가 미래를 알지 못하도록 하셨다. 그래서 내일 일을 다 주께 맡기고 오늘 하루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기 원하신다. ‘내일 일은 나 몰라요 하루 하루 살아요’ 라는 찬양가사 처럼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을 신뢰하는 모험보다는 우리의 앞날을 미리 아는 안전을 원한다. 이것은 피조물의 한계를 벗어나 미래를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도록 우리 휘하에 두고 싶어하는 교만의 발로이며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선하심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는 불신의 결과이다.
미래를 미리 안다면 하나님의 원하시는 믿음의 삶은 불가능해진다. 그 뿐 아니라 믿음의 삶 속에서 누리는 무한한 선택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여 그 선택의 책임을 다하는 인간으로 성숙할 기회를 박탈당한다. 만약 우리가 원하는 대로 미래를 훤히 내다 본다면 우리는 이미 정해져 어찌할 수 없는 냉혹한 운명의 꼭두각시가 될 것이다. 운명의 주사위가 이미 던져 졌으니 이제 달리 선택할 자유는 전혀 없다. 미래가 탄탄한 대로임을 안다면 안일과 나태에 빠질 것이며 반대로 고통스럽고 암울한 미래가 보인다면 자포자기한 채 그 불운한 말로를 기다리며 공포와 불안에 떠는 삶을 살 수 있는 자유의 전당이 아니라 모든 꿈을 앗아가고 우리를 가두는 감옥이 된다. 미래가 우리에게 알려질 때 그것은 모든 희망과 믿음의 가능성에 대해 닫힌 냉혹한 운명이 된다. 그러면 우리는 더 이상 미래를 만들어 가는 자유로운 개척자가 아니라 그 미래에 철저히 억압 당하는 비참한 노예로 전락하고 만다.
하나님은 미래를 알지 못하게 하심으로 우리의 자유를 보장해 주시고 믿음과 소망의 삶을 살게 하셨다. 희망찬 미래를 바라보며 사랑의 수고와 책임을 다하는 성숙의 기회를 주셨다. 이렇게 미래를 우리 앞에 열린 상태로 놓아 두심으로 하나님의 뜻에 맞춘 우리의 비젼과 갈망에 의해 미래를 빚어 가게 하신 것이다. 미지의 미래가 우리 앞에 하얀 종이처럼 펼쳐저 있기에 우리는 그 화폭 위에 우리의 비전과 꿈의 나래를 한껏 펼쳐 나간다. 하나님은 미래를 우리에게 숨기심으로 장래에 예비해 두신 풍성한 은혜의 깜짝쇼를 즐기게 하신 것이다.
미래가 우리에게 드러나지 않았기에 우리 앞에는 놀라운 자유의 길이 열려 있다. 우리가 결혼할 대상은 무한히 많다. 이 사람과 결혼할 수도 있고 저 사람과 결혼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사람과 결혼하도록 운명론적으로 점지해 두셨다고 생각하기에 그를 꼭 찾아내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에 사로 잡힌다. 그래서 금지된 미래를 엿보려는 강한 충동을 느낀다. 기도를 통해 계시를 받거나 예언자들의 신통한 예측을 듣기 원한다.
물론 하나님은 모든 것을 예정하셨다. 그러나 그 예정하신 것을 우리가 미리 다 알지 못하도록 하셨다. 마치 우리의 자유로운 선택에 의해 미래가 결정되기라도 하듯이 우리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신비로운 방법으로 우리의 미래를 예정하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현재 하나님의 뜻 가운데 거하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책임있게 우리의 자유를 활용한다면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과 부합될 수 있다.
두 사람의 결혼 상대가 있는데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둘 다 좋고 호감이 간다고 하자. 실제 이런 상황은 드물겠지만 한번 가정을 해보면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둘 중 한사람은 하나님이 정해두신 배필이 아니니 그를 어떻게 해서든 속출해 내야할까? 아무리 기도를 해도 어느 쪽을 택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알 수 없을 때라면 어떻게 해야할까? 예언자를 찾아가야 할까? 열심히 기도하고 최대한 지혜를 모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가늠해 보는 노력은 물론 필요하다. 성령이 당신의 마음과 판단을 인도하시어 점차 어느 한쪽에서 더 끌리게 하실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할까? 아무리 애써 봐도 확실한 판단이 서지 않을 때는 두 사람 중 누구를 택하던 그것이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이 정해두신 사람을 찾아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당신의 미래를 펼쳐갈 수 있는 지혜다.
성경에 분명히 계시된 하나님의 뜻에는 선택의 여지가 전혀 없다. 우리가 거룩하게 살며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는 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다. 여기에는 전혀 융통성이 없다. 그러나 성경에 계시되지 않은 하나님의 뜻, 예를 들어 어떤 직장을 택하며 누구와 결혼하며 자녀를 몇이나 낳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선택의 자유가 주어졌다. 하나님의 뜻이 꼭 이 직장을 선택하는 것이라고 못 박아버릴 수는 없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길을 택할 수도 있고 저 길을 택할 수도 있도록 우리의 미래에 대해 놀라울 정도로 융통성을 허용하신다 어떤 길을 택하든 하나님을 중심에 둔 삶의 목적과 원리 가운데 내린 선택이라면 그것이 바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될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정해진 미래로 우리를 옴짝 달싹하지 못하게 묶어 두지 않으시고 미래를 열어두셨다. 당신은 A와 결혼할 수도 있고 B와 결혼 할 수도 있다. 둘 다 하나님이 금하신 결혼 상대가 아니라면 누구와 결혼 하든 하나님이 그 결혼을 축복하실 것이며 그것이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될 것이다. 혹여 A가 하나님이 정하신 배필인데 B와 결혼 했기에 자신의 결혼 생활이 불행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은 깨끗이 떨쳐버려야 한다. 그러나 당신의 자유로운 선택에는 책임이 따른다. 하나니의 영광과 뜻을 우선적으로 구하는 가운데 내린 선택이어야 한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당신의 지혜를 최대한 활용하여 내린 판단에 근거한 선택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알려 주시지 않는 미래를 미리 훔쳐보게 하여 하나님이 뜻하신 모든 유익을 앗아가며 자유를 박탈하고 믿음과 소망의 삶을 파괴하는 것은 분명한 마귀의 것이다. 성경에 기록된 미래에 대한 예언은 모두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이루는 특별한 목적을 띠고 있다. 이 구속사와 직접 관련이 없는 개인의 사적인 일을 점치듯 예언하는 예를 성경에서는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4. 정말 하나님이 말씀하셨을까?
최근 들어서 한국교회에 자칭 예언자들이 부쩍 늘어나고 있다. 우후 죽순처럼 일어나는 예언 훈련 학교에서 선무당 같은 어설픈 예언자들을 무더기로 배출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공통된 특징은 하나님 또는 주님이 말씀하셨다는 말을 서슴없이 사용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엄청난 혼란이 야기된다. 자기 머리 속에서 떠오른 생각이 주님의 말씀으로 둔갑하는가 하면 마귀적 음성까지 주님의 말씀으로 위장되기 일쑤다. 순진한 교인들은 그들이 직통으로 계시된 말씀을 전하는 것 같아 성경말씀보다 그들의 예언에 더 솔깃하게 된다. 더 심각한 문제는 성경의 진리에 의해 전혀 입증될 수 없는 온갖 허튼 소리들이 주님의 말씀이라는 명분으로 범람하여 교회를 혼란하게 한다는 것이다.
주님이 말씀하셨다는 말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은 구약의 선지자들과 신약의 사도들만이 사용할 수 있었다. 우리는 그 계시가 기록된 성경 말씀을 전할 때에 한해서만 주님이 말씀하셨다고 말할 수 있다. 성경 말씀과 다른 말을 하면서 주님이 말씀하셨다고 선언하는 것은 성경 외에 다른 계시를 주장하는 것과 다름없다. 자칭 예언자들은 자신들의 예언이 성경 말씀과 같은 권위를 가진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교인들이 성경 말씀보다 그들의 예언에 더 의존하게 만든다. 그러니 성경보다 그들의 예언이 훨씬 더 실질적인 권위가 있는 셈이다.
성경 말씀을 듣기는 원하지 않으나 예언자들의 말을 들으려고 모여드는 이들은 많다. 성경을 강해하는 설교에는 은혜를 못받아도 직통으로 주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것 같은 예언자의 말에는 엄청난 은혜를 받는다. 평소에 늘 설교를 통해 들어도 별 감동이 없던 말도 예언자의 입을 통해 들으면 큰 감동으로 와 닿는다. 작은 일에 충성하는 것을 하나님이 귀히 보신다는 말씀을 설교를 통해 수없이 들어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똑같은 말씀을 예언자가 “네가 지금 작은 일에 충성하고 있구나. 착한 종아, 내가 너를 귀히 여기노라. 내가 앞으로 너에게 더 큰 일을 맡기리라” 는 식으로 말씀한다면 설교를 통해 누리지 못한 큰 위로를 받는다. 왜 그럴까? 만약 예언자들이 하나님이 말씀하셨다고 말하는 대신 내 마음에 이런 감동이 왔다는 식으로 솔직하게 말한다면 교인들이 그렇게 큰 은혜를 받을 까? 주님이 말씀하셨다고 단언함으로써 마치 주님이 예언자의 입을 통해 나에게 직접 말씀하신다고 믿도록 교인들의 심리를 교묘히 조종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들이 일부러 사람들을 속이기 위해 그렇게 주장한다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 그들 중에는 교인들을 위로하고 권면하기 위한 선한 의도를 가지고 그런 예언사역을 하는 이들도 있으리라고 본다. 필자가 염려하는 것은 그들의 주장이 야기하는 혼란이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그리스도인에게는 특별한 성령의 감동이나 메시지가 마음에 더 오를 때가 있다. 그러나 지혜로운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확신과 마음의 감동이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을 알기에 섣불리 그것이 주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우리 마음은 성령뿐 아니라 육신의 욕망과 마귀적인 세력에 의해 자극된 온갖 잡다한 생각과 메시지가 복잡하게 교차하는 곳이기에 어떤 생각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쉽게 단장해서는 안 된다.
요즘 예언하는 이들에게는 이런 지혜와 신중함이 결여되어 있다. 자기 마음에 일어난 감동을 주님의 말씀이라고 함부로 확언하는 것은 아주 경솔할 뿐 아니라 진실하지 못한 태도다. 병고침 집회에서 “주님이 지금 눈에 문제가 있는 사람을 만지고 계십니다. 방금 무릎 관절이 치유받은 이가 있습니다. 주님이 신장에 이상이 있는 이를 고치고 계십니다” 라고 말하는 것을 자주 듣게 된다. 정말 하나님이 그 사실을 자신에게 어떤 식으로 알려 주신 것일가? 소리를 들은 것인가, 아니면 마음속에 어떤 인상을 받은 것인가? 그 계시가 확실하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참으로 하나님이 알려 주지 않으셨는가? 왜 정확히 누가, 어떤 병에서 나았다고 알려 주지 못하는가?
과거 미국의 한 교회에서 열린 집회에서 강사가 회중 가운데 한 사람의 이름과 그의 사정을 정확하게 말하면서 주님이 그를 치유하기 원하신다는 메시지를 전하였다. 그 복음 사역자는 자신도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라고 했다. 하나님이 그렇게 특별한 방식으로 일하실 수 있는 가능성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대부분의 예언은 마음 속에 즉흥적으로 일어난 감동이나 느낌 또는 예측을 발설하는 것이다. 그것이 100% 주님의 말씀인지 자신도 확실히 알지 못하면서 하나님께로부터 온 메시지라고 과감히 믿고 선언하는 것이다. 그러나 확실치 않은 것을 직통 계시를 받은 것 같이 말하는 것은 진실하지 못한 행위이며 청중을 교묘히 조종하고 기만한는 것이다. 비록 의도하지는 않았을지라도 그런 말을 듣는 사람들은 그를 굉장한 존재로 생각하게 된다. 이는 미국의 신유집회에서 허풍쟁이 사역자들이 즐겨하던 행위인데 한국의 사역자들이 그것을 아무런 성경적인 검증도 없이 그대로 따라하고 있다.
예언 집회나 예언 훈련학교에서는 예언 받기를 원하는 이들에게 일일이 예언을 해준다. 수많은 예언집회를 쫒아 다니며 예언을 받았던 한 교인은 이렇게 증언한다.
“하나님이 우리 형제님의 삶 속에 함께하시는데요 지금 앞에 일곱 가지 빛이 보입니다”혹은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축복하고 축복하노라 네 사업이 번창할 것이다”“네 눈물과 기도를 들었노라” 혹은 “지금 예수님의 모습이 보이는데요 우리 형제님과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시는 모습이 보입니다. 우리 형제님에게 지금 답답한 문제가 있는데요” 하나님은 결코 외면하지 않으시고 우리 형제님의 삶을 인도하실 것입니다. 계속 꾸준하게 인내하며 기도를 쉬지 말라고 말씀하시는데요, 우리 형제님이 인내하면 그 열매들이 열릴 것입니다. 지금 수많은 포도나무가 보이는데요, 우리 형제님이 지금 물질의 축복을 간구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이제 우리 형제님뿐만 아니라 형제님의 가족도 물질의 궁핍함이 없을 것입니다” 라는 등 이런저런 예언을 많이 받았는데 순간적으로 감동을 받았지만 실제로 현실에서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고 오히려 몸만 병이 들었습니다.
이 증언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대부분의 예언이 이런 식으로 행해지고 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예언을 받으려 나온 사람을 보고 마음에 떠오르는 대로 즉흥적으로 말하고는 그것을 주님의 말씀이라고 하니 얼마나 웃기는 일인가? 성경에서 예언하는 이는 성령이 주권적으로 역사하시어 메시지를 주실 때만 예언할 수 있었다. 그런데 요즘 자칭 예언자들은 자신이 원하면 아무 때나 누구에세나 예언을 해준다. 이는 성령을 자기들이 필요할 때 호출하여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하수인처럼 취급하는 행위다.
이런 식으로 사이비 예언이 범람하게 되면 한국의 기독교는 머지 않아 무당 종교로 변할 것이다. 이러한 혼란을 막기 위해 주님이 말씀하셨다는 말을 함부로 사용하는 것을 금해야 한다. 자기 마음에 떠오른 생각이나 마음속에 일어난 감동을 말하면서 그것을 주님의 말씀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 지금은 그 누구도 구약의 선지자들 같이 하나님이 말씀하셨다고 주장 할 수 없다. 그들과 같이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 무오한 하나님의 계시를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서신에서 바울 사도는 예언을 사모하라고 했다. (고전 14:1) 자칭 예언자들은 주로 이 말씀에 근거하여 예언의 은사가 중요함을 역설한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에 나타났던 예언은 하나님의 말씀과 동등한 권위를 가진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류가 있는 인간의 말이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한 사람의 말만 듣지 말고 두세 사람이 예언하게 하고 다른 이들은 그 말을 분별하라고 했다. 이 말은 예언의 진정성을 검증해 보고 잘 분별하여 참과 거짓을 가려내라는 말이다. 그들의 예언은 사도들의 가르침과 성경 말씀에 의해 항상 점검받아야 했다. 그러므로 성경말씀보다 열등한 권의를 가진 것이었다.
고린도 교회에 있었던 예언은 덕을 세우고 권면하며 위로하기 위해 또는 숨은 죄를 드러내기 위해 성령이 마음에 순간적으로 떠오르게 하신 인상파 메시지는 인간이 잘못 이해하고 해석하여 잘못 전달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바울은 철저한 검증과 분별을 명한 것이다. 이런 유의 예언이 지금도 존재하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고 아직 연구해야 할 부분들이 많이 남아 있다. 확실한 결론이 내려질 때까지 이와 유사한 예언을 하는 이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은 주님이 말씀하셨다고 말하는 것을 자제해 달라는 것이다. 자신의 예언적인 의견과 생각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명명하는 것은 합당치 않다. 자신의 예언적인 통찰을 꼭 말해야 한다면 차라니 “주님이 내 마음에 이런 생각이나 인상이 떠오르게 하시는 것 같다” 라는 식으로 말하는 것이 훨씬 더 솔직하고 진실한 태도이며 많은 혼란을 방지할 수 있는 길이다.
성경 말씀을 전할 때는 담대하게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외쳐야 하지만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말을 하면서 그렇게 선언해서는 안 된다. “당신이 지금 하는 일이 번창할 것이라고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라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반드시 금지되어야 한다. 이런 사이비 예언이 난무할 때 교회에 극심한 혼란이 일어나며 기독교 신앙을 허무는 미혹의 영이 가장 무섭게 역사한다. 아무리 신통한 예언의 능력이 있을지라도 주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며 예언할 때 교인들은 성경 말씀보다 예언자의 말에 더 귀를 기울이며 그 말을 실제적으로 더 의존하게 된다.
사람은 자신이 가장 의존하는 것에 지배를 받는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예언자의 말에 더 의존하게 되면 예언자의 오류와 부폐를 통해 역사하는 거짓의 영이 수많은 사람들을 미혹할 수 있다. 그렇기에 예언은 교회를 허무는 미혹의 영이 가장 교묘하면서도 무섭게 역사하는 영역이며 교회를 최악의 혼돈으로 몰고 갈 수 있는 위험성을 안고 있다.
그러므로 예언에 관한 한 아무리 주의를 기울여도 부족하다. 어떤 예언적인 의견의나 통찰은 반드시 성경에 의해 점검되어야 한다. 그것을 함부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선언해서는 안 된다. 교인들이 예언자의 말보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분명한 말씀에 의존하는 삶을 살도록 지도해야 한다. 고린도 교회에 예언이 성행했던 이유는 아마도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신악 성경 전체가 아직 보급되지 않은 상황에서 그 말씀의 공백을 잠정적으로 메우는 역할을 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하고 조심스럽게 추측해 본다.
지금 우리는 그들이 누리지 못했던 완전한 성경 말씀을 가지고 있다. 이 말씀만으로는 부족하여 예언자들의 엑스트라 말씀을 쫒아다니는 것은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고린도 교회에 있었던 예언의 역할을 지금은 성경 말씀을 전파하는 설교가 더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
예언은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위로하기 위함인데 이 일을 하기에 성경 말씀보다 더 적합한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성경은 성도를 세우고 위로하며 주의 계명으로 권면할 은혜로운 말씀으로 가득한 진리의 보고다.
또한 고린도 교회에 있었던 예언은 죄를 드러내는 것이었는데 성경말씀은 좌우에 날 선 예리한 검처럼 우리의 완악함 마음을 찔러 조개어 숨은 죄악을 드러낸다. 성령의 대표적인 사역은 말씀을 통해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시는 것이다. 또한 말씀은 가장 중대한 장래 일을 예언한다. 죽음 후에심판이 있다는 것과 주님의 재림과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예언한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율법의 말씀에 근거하여 이스라엘의 멸망과 회복을 예언했듯이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 예언적인 메시지를 전한다. 만약 교인들이 성령을 따라 살면 새 언약의 풍성한 은혜를 누릴 것이나 성령을 거스르고 육신을 따라 살면 과거 이스라엘 민족과 같이 하나님의 혹독한 징계를 받을 것이라고 선포한다
설교를 하고나면 교인들이 “목사님은 어쩌면 그렇게 내 사정과 고민을 잘 아는지 모르겠다”고 말하곤 한다. “내 일을 훤히 다 아는 것처럼 내 마음을 꿰뚫어 보는 것처럼 말씀하신다.”라는 말도 심심찮게 듣는다. 또 자신이 처한 상황과 직면한 문제에 꼭 적중한 말씀을 해주어 고맙다는 교우들도 자주 접한다. 바울 사도가 말했듯이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함”이다. 성령은 이 성경 말씀을 통해 역사하심으로 교인들 각 사람에게 꼭 필요한 메시지와 은혜를 공급하신다.
그러므로 진정한 영적 부흥은 말씀의 부흥이다. 예언자의 말이 판을 치고 성경 말씀이 뒷전으로 밀려난 최근의 성령 운동은 부흥이 아니라 심각한 영적인 탈선이며 쇠퇴다.
5. 세미한 음성 가운데 계시는 성령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성경을 벗어 나거나 성경에 의해 검증될 수 없는 천국에 대한 이야기, 신비 체험, 하나님께 받았다는 직통계시, 주님의 이름을 빙자한 예언은 진리의 영이신 성령의 역사라고 볼 수 없다.
성령은 복음의 세미한 음성을 통하여 말씀하신다. 이것을 무시하고 기적과 환상, 입신과 예언 같은 인간이 보기에 신비하고 경이로운 현상과 경험에서 주로 성령의 임재와 역사하심을 찾는 것은 성경적인 성령 이해가 아니다. 복음의 세미한 음성에 함께하심이 성령이 즐겨 택하시는 방법이다. 이 사실은 성령에 대해 갖는 우리의 통상적인 기대와 생각을 뒤엎는다.
하늘에서 불을 끌어내렸던 불의 사자 엘리야 선지자도 그의 사역 말년에 가서야 이 진리를 터득하였다. 엘리야는 갈멜 산에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과 맞서 제단 위에 불이 떨어지게 하는 놀라운 기사를 통하여 여호와가 참 하나님이심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극적으로 보여 주었다. 엘리야는 이렇게 바알 선지자들과의 대결에서 대 승리를 거둠으로써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오랜 우상숭배의 고질적인 병폐가 척결되고 야훼 신앙이 회복되리라고 믿었다. 그렇기에 그 기대가 여지없이 무너졌을 때 그는 더 이상 사역을 계속할 수 없을 정도로 의욕을 상실하고 깊은 실의에 빠져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나이다”(왕상 19:4)라고 한탄하면서 죽기를 원했다.
하나님은 그렇게 낙심하여 탈진한 엘리야를 위로하시고 양식으로 힘을 북돋우어 호렙산에 이르게 하시고 거기서 그를 만나 주셨다. 하나님이 엘리야에게 산에 서 있으라고 하시고 그 앞을 지나가시는데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었지만 바람 가운데 하나님이 계시지 않았고 바람 후에 지진이 있었지만 지진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계시지 않았다.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었지만 불 가운데도 하나님이 계시지 않더니 불 후에 세미한 음성 가운데 하나님이 계셨다.
왜 하나님은 이런 방식으로 엘리야에게 나타나셧는가? 그것은 엘리야에게 중요한 교훈을 깨우처 주시기 위함이다 엘리야는 하늘에서 불을 끌어 내리는 획기적인 기사를 통해 하나님의 일을 성취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는 기적보다 사람들에게 거의 인지되지 않을 정도로 세미한 음성을 통하여 일하기를 원하신다는 교훈을 엘리야에게 그리고 성경을 읽는 모든 사람에게 깨우쳐 주고 계신 것이다. 엘리야가 행한 획기적인 기적을 절정으로 하여 구약에서 기적은 서서히 사라졋다. 엘리야와 그의 제자 엘리사 이후에 본격적으로 선지 시대가 도래했는데 거의 모든 선지자들은 불의 기적이 아니라 세미한 음성을 따라 선지 사역을 수행했다. 큰 기사를 행함보다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만을 대언하였다.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도 귀를 막아 듣지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사자들을 핍박하는 패역한 백성들을 향하여 선지자들은 오래 참음과 눈물로 사역하였다. 자신을 거역하는 자들을 오래 참으심과 인자하심으로 관용하시며 부드럽고 온유한 음성으로 설득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을 따라 일한 것이다.
세미한 음성 가운데 하나님이 함께하신 사건은 구속사적인 깊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구약 성경 속에 이미 신악 성경의 하나님이 계시되었다. 예수님의 구속을 통해 죄인들을 복음의 세미한 음성으로 부르시는 은혜와 용서의 하나님이 암시되어 있다. 모세의 율법을 통해서는 죄인들을 향해 진노하시는 무서운 심판의 하나님이 계시되었다. 하나님이 시내산에 강림하셔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실 때 온 산이 진동하고 우래와 번개가 치며 불 가운데 하나님이 임하셨다. 그러자 백성들은 심히 두려워 떨며 감히 산에 접근하지 못했다. 만약 죄인들이 가까이하면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가 그들을 멸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같이 율법을 통해 계시된 하나님은 죄인들이 근접할 수 없는 무섭고 엄위하신 공의와 심판의 하나님이시다. 죄인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는 것이 두려워서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에게 제발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직접 말씀하시지 않게 해달라고 애원하였다 만약 그렇게 되면 자신들이 죽을까 두렵다고 했다. 결국 그들은 모세라는 중보자를 통해서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엘리야 앞에서 일어난 강한 바람, 지진과 불은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실 때 일어난 현상과 유사하다. 온 산이 크게 진동하며 불가운데 하나님이 강림하신 것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번에는 율법을 통해 말씀하실 때처럼 불 가운데가 아니라 그 후에 들린 세미한 예수님의 중보 사역이 예시되어 있는 것이다. 예수님이 우리 죄인들을 대신하여 율법의 저주를 받은 바 되시여 말세에 하나님이 악인들을 향해 쏟아 부으실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남김없이 돌이키심으로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를 진정시켰다. 예수님의 중보 사역 때문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무시무시한 진노의 낯빛이 사랑과 기쁨의 얼굴빛으로 변했다. 우리를 향해 노하시던 하나님의 음성이 부드러운 음성으로 바뀐 것이다.
지금 우리가 복음을 통해 우리 마음에 세미하게 들리는 하나님의 온유하고 인자하신 음성을 들으며 사랑과 기쁨이 넘치는 하나님의 빛나는 얼굴을 심령에 느끼며 살게 된 것은 예수님의 대속으로 인해 우리에게 부여된 놀라운 은혜이며 특권이다 중보자 예수님 없이는, 그분의 피흘리심을 통해 이루어진 중보사역 없이는 우리 마음에 진정한 평안과 쉼을 주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다. 오히려 시내산의 율법을 통해 계시된 무서운 진노의 하나님의 음성만이 우리를 공포에 떨게 할 뿐이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복음의 세미한 음성 가운데 역사하신다. 이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복음의 세미한 음성보다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불 같은 기적과 기이한 현상들로 사람들을 끌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의 중보사역을 헛되게 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법을 근본적으로 오해한 것이다. 하나님은 엘리가 생각했던 것처럼 거창한 기사나 천지개벽 같은 사건을 통해 그분의 일을 성취하시지 않는다. 오히려 세미한 음성같이 사람들이 보기에는 아주 미미하고 약해 보이는 것을 통해 아주 은밀하고 조용한 방법으로 구원 역사를 진행해 가신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처럼 복음의 세미한 음성은 무력해 보인다. 강퍅한 사람들을 구원하고 변화시키기에는 너무도 미약하고 효력이 없어 보인다. 사람들이 잘 듣지 않고 들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십자가의 복음만을 전하는 것은 참 미련해 보이기도 한다. 그에 비해 기적과 표적이 전도에 훨씬 더 효과가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굉장한 기사를 통해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두렵게 하여 꼼짝없이 하나님을 섬길 수 밖에 없도록 만들 수 있을지는 모르나 그들 마음속 깊이 도사리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적개심과 원수 된 마음을 새롭게 하지는 못한다. 어떤 기적이나 표적도 인간의 부패한 본성을 변화시키지 못한다. 인간의 강퍅하고 완악한 마음은 오직 십자가의 사랑과 은혜를 전하는 복음의 부드럽고 세미한 음성만이 녹일 수 있다. 그렇기에 바울 사도는 이 십자가의 복음이 그 당시 헬라 사람들에게는 미련하게 보이고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지만 믿는 자들에게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담대히 선언했다. 십자가 복음의 세미한 음성만이 죄인들을 구원하는 유일한 비결이며 능력이다. 성령은 우선적으로 기적과 표적이 아니라 세미한 음성가운데 역사하신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복음의 세미한 음성이 모두 약하고 미련해 보이듯이 복음을 통해 일하시는 성령 또한 약해 보이고 어리석어 보인다. 그러나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약하심이 구원의 능력이 되듯이 성령의 약하심 또한 우리의 구원이 된다. 이 점을 놓칠때 우리는 과거 유대인들과 같이 큰 오류를 범하게 된다. 구약 성경에서 유대인들이 가장 좋와하는 부분은 아마도 엘리야가 불의 기적을 일으키는 대목일 것이다. 그들은 거기서 자신들이 원하는 메시야 상을 발견하였다. 그들은 엘리야의 능력을 가지고 자신들을 구원해 줄 영광의 메시야를 대망하였다. 그렇기에 십자가에 달려 죽는 약한 메시지를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래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향해 “하나님의 아들이면 너 자신을 구원해 보라” 고 외쳤던 것이다. 곧 “네가 메시야면 엘리야가 하늘에서 불을 끌어 내려 여호와가 참 하나님이심을 증명했듯이 너의 능력을 보여 달라”고 요구했던 것이다. 유대인들은 엘리야의 불의 기적이 아니라 세미한 음성 속에 예시된 십자가의 메시야를 보지 못했다.
과거 유대인들뿐만이 아니라 요즘 성령운동을 하는 이들 중에도 이와 유사한 과오를 범하는 이들이 많다. 그들은 불 같은 기적을 통해 역사하는 만능의 메시야를 원한다. 굉장한 표적과 기적을 동반하는 성령의 강력한 역사를 갈망한다. 십자가 복음의 세미한 음성을 통해 역사하시는 성령의 약한 방법을 꺼리고 부끄러워한다. 그렇게 부드러운 방법으로 사람들을 설복시키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오래 참음과 기다림의 수고가 수반된다. 그렇기에 사람들을 쉽게 제압할 수 있는 길을 택하는 것이다. 시내산에서 불 가운데 임하신 하나님을 보고 두려워하듯이 사람들은 기적. 환상. 예언 등 하나님의 신비한 현현 앞에 경이로움과 두려움으로 압도된다. 이런 방법은 아주 쉽고 간단하게 사람들을 굴복시킬 수 있다. 여기에는 사람들의 불순종을 오래 참아 주며 기다리는 고통을 감수할 필요가 없다. 그런 불순종을 일격에 날려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사람들의 광적 열심을 자극하는 데 효과만점이다. 뿐만 아니라 영적 물직적 에너지와 자원을 유도하는 데도 특효가 있다.
6. 영적인 폭력
복음이 약하고 부드러운 방법보다 율법의 세고 거친 방법이 훨씬 더 효과적이고 실용적인 것 같다. 몇 년 동안 말씀을 열심히 전해도 교인들이 좀처럼 변화되지 않을 때 설교자는 지치고 탈진한다. 복음 전파 사역이 시간과 에너지를 마냥 소모하는 일 같이 느껴진다. 자신의 청춘을 낭비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하나님은 왜 이렇게 맥없는 말을 주셨는가? 불을 좀 내려 주시지 하는 푸념까지 생긴다. 오랫동안 사역의 열매가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을 때 복음 전파자는 최대의 위기를 만난다. 아무리 말씀을 전해도 변하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는 서서히 복음의 능력에 대한 믿음을 잃어간다. 과연 복음에 사람들을 구원하고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는가에 대해 회의가 들게 된다. 많은 사역자들이 불순종하는 이들을 오래 참고 기다리는지 하고 고통스러운 십자가의 길을 견디지 못하고 율법의 쉬운 길를 택하려 한다. 편법을 동원하려는 유혹에 굴복한다. 기적과 표적으로 사람들을 놀라 까무러치게 하여 그들을 제압하고 굴복시키려 한다.
과거 미국의 한 한인 교회에 수위 ‘불의 사자’가 있었다. 그 목사가 안수하면 사람들이 불이 붙은 것 같이 뜨거워서 견디지 못하고 팔짝팔짝 뛰며 나둥그러지곤 했다. 필자가 아는 장로도 그 목사에게 안수를 받았는데 팔뚝에 불이 붙은 것처럼 뜨거워서 양탄자가 깔린 바닥에 엎드려 팔뚝에 불을 끄기 위해 팔뚝을 바닥에 계속 내리첬다고 한다. 그러면서 눈물을 흘리며 회개했다고 한다. 그가 그런 방법을 통해서라도 회개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성령이 그렇게 통닭구이를 만들어서 인간을 변화시키신다고 보기는 힘들다.
대학생들을 상대로 사역하는 한 목사는 교회에 처음 방문한 청년이 예배에 참여하지 않고 그냥 돌아가려고 하자 그를 향해 예수의 이름으로 서라고 명했다. 그러자 그 청년의 발이 바닥에 붙어 꼼짝 못하게 되었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엉덩이가 의자에 붙어 몇 시간이고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또 그 목사가 어떤 사람의 귀에 대고 눈이 멀게 되리라고 속삭였더니 정말 그의 눈이 안 보이게 되었다고 한다. 그 목사는 설교를 잘 경청하지 않은 회중을 향해 자주 소경이 되라고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는데 그럴 때마다 실제로 그런 현상이 일어난다고 했다. 이런 이야기들을 기독교 TV 방송에 자랑스럽게 늘어놓고 있다.
그는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사도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을 때 하늘의 강력한 빛에 의해 눈이 멀었던 사건을 예로 들면서 그런 신기한 현상이 초대교회에 나타났던 대단한 성령의 역사인 것처럼 말한다. 그러나 다메섹에서 바울이 경험한 것은 부활신 주님의 현현이었다. 그가 부득불 눈이 먼 것은 찬란한 영광가운데 계신 주님을 대면함에서 비롯된 지극히 부수적인 형상에 불과했다. 더욱이 인간의 명령으로 이루어진 일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에 의한 것이었다.
부활하신 주님이 바울에게 나타나신 영광스러운 사건이 아무런 체험의 내용이나 의미도 없이 사람들의 눈을 멀게하는 해괴한 짓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그는 사람들이 복음을 잘 듣지 않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과 구령의 열정 때문에 그런 기사를 행한다고 했다. 그렇게 사람들을 까무러치게 하고 두렵게 하는 기사를 통해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분명히 보여주어 그들의 불신을 일격에 날려 버리고 그들의 완고함과 교만함을 꺽어 버려야 폭발적인 전도의 효과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과연 그것을 성령의 역사하심이라고 할 수 있을까? 성경 어디에도 성령이 그런 식으로 일하신다는 증거를 찾아볼 수 없다.
그는 또 바울이 살라미 섬에서 전도할 때 행했던 일을 예로 든다. 바울은 총독 서기오가 복음을 믿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박수 엘루마를 꾸짖고 한동안 눈이 멀게 했다. 그러나 거기서 바울은 복음을 잘 안 듣거나 설교 시간에 졸고 있는 교인들을 눈 멀게 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를 정면으로 대적하는 마귀의 사악한 궤계와 역사를 제압했던 것이다. 그러한 사실은 바울이 박수 엘루마를 꾸짖은 말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모든 거짓과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요, 주의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 바울 사도가 이런식으로 대적한 자들을 제압한 것은 극히 드문 일이다. 바울은 복음 전파를 방해하는 세력들을 항상 그런 통쾌한 방법으로 무찌르지 않았다. 주로 원수들로 부터 핍박과 모진 고초를 속수무책으로 당하며 복음을 전파하였다. 교인들에게는 더더욱 온유함으로 복음을 전했다. 그는 에베소에서 3년 반 동안 겸손과 눈물과 오래 참음으로 복음 사역을 하였다. 그는 드로아에서 다락에 모인 교인들에게 밤 늦게까지 강론할 때 깊이 졸고있던 유두고를 향해 눈이 멀라고 외치지 않았다.
열심히 말씀을 전하는데 설교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딴전을 피우거나 조는 이들을 보면 속이 무척 상하는 것이 모든 설교자들이 겪는 아픔이며 안타가움이다 동시에 큰 시험거리이기도 하다.
복음에 한없이 느리게 반응하는 교인들의 연약함을 오래 참음과 온유함으로 감수하지 못하는 데서 혈기찬 반응이 나오게 된다. 혈기에서 나온 열심이 교인들에 대한 안타까움과 복음에 대한 열정으로 교묘히 위장되고 합리화되게 자기 기만의 위력은 엄청나게 커진다. 여기에 복음전파의 성과가 신속하게 나타나지 않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조급증과 성취지향적인 성향이 맞물리면 성령의 원칙보다는 변칙적인 방법으로 사람들을 제어하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조정하기 원하는 유혹은 극대화된다. 이렇게 오래 참음과 기다림의 과정을 통해 인간을 설복하시는 성령의 방법을 떠나 복음의 열정으로 가장된 육신의 성급함과 성취 지향적 성향에 이끌릴 때 미혹의 영이 역사하기 쉽다
이 점이 우리가 심각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다. 복음전파의 좋은 의도를 가지고 표적을 행하고 그렇게 해서 전도의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고 모든 것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눈에 나타나는 즉각적인 효과나 변화가 반드시 복음의 참된 결실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설교할 때마다 교인들에게 눈이 멀라고 엄포를 놓는 것은 성경의 진리과 성령의 역사하심에 확실히 벗어난 행위이며 그런 외침에 따라 사람들의 눈이 안보이는 기이한 현상 또한 성령의 역사라고 보기 힘들다. 초자연적인 현상으로 젊은이들을 제압하여 그들의 지성을 마비시키고 의지를 강압적으로 조종하여 하나님을 섬기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것이 과연 성령의 역사하심인지 심히 의심스럽다. 최대한 좋게 생각해도 그것은 강제로 믿게 하는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일종의 영구적인 폭력이라고 볼수 있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굉장히 무례한 행위다. 우리가 비록 비천하고 추한 죄인들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무례하게 대하지 않으신다. 폭군처럼 초능력으로 두렵게 하시어 우리의 자유의지를 억압하고 인권을 유린하지 않으신다.
유진 피터슨의 말처럼 “하나님은 힘으로 제압하는 혹은 위협하는 표적을 사용하셔서 우리의 자유와 존엄을 해치지 않으신다.” 믿음은 그렇게 강요될 수없다. “믿도록 위협을 받거나 부추겨지거나 조종당한다면 우리는 믿게 되는 것이 아니라 위협감, 강탈당한 느낌 혹은 이용당했다는 느낌만 갖게 된다. 그 결과 오히려 믿음에서 더 멀어지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초자연적인 현상이나 표적 앞에 우리의 자율성을 쉽게 포기하고 굴복해서는 안된다. 기적의 노예가 되는 것에 결연히 항거해야 한다. 말씀 앞에 엎드리는 것은 참으로 지혜로운 일이나 기적 앞에 무분별하게 고꾸라지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다. 한국 교회에는 가야하고 초자연적인 현상으로 인해 광적인 열심을 내는 이들은 많으나 복음의 진리에 사로잡혀 불꽃같이 타오르는 건강한 신앙을 가진 이들은 희소하다.
복음 사역자들은 자신도 모르게 인간에게 영적인 폭력을 휘두를 수 있다는 무서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비록 선한 의도에서 비롯되었을지라도 그러한 방법은 성령이 원하시는 방법이 아니며 오히려 십자가의 도에 거스르는 것이다.
하나님은 벌레같은 인간들을 위해 처참하게 죽어주시기까지 존중하고 사랑하신 한없이 인자하고 온유하신 분이다. 이 주님을 가장 효과적으로 증거하는 방법은 바로 온유함으로 전하는 것이다. 인간을 놀라 까무라치게 하는 기적이 아니라 복음의 세미한 음성을 통해 역사하시는 성령의 역사는 하나님의 성품과 꼭 들어맞는 방법이며 십자가의 사랑과 은혜를 깨닫게 하기에 가장 적합한 방법이다. 성령이 복음을 통해 주님의 온유한 음성을 듣게 하시고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의 얼굴빛을 비추어 주셔야만 하나님에 대한 참된 믿음과 사랑의 반응이 우리에게서 우러나온다.
하나님은 우리를 강압적으로 다루시지 않고 부드럽게 대하심으로 우리가 충분히 자율적으로 선택하고 행동하신다. 우리에게 너무도 많은 불순종의 자유를 허용하시는 위험 부담까지 친히 끌어 안으시면서 말이다. 성령의 임재는 잘 느껴지지 않고 그분의 음성은 너무도 세미하여 잘 들리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얼마든지 무시해 버리고 살 수 있다. 우리는 성령의 임재를 확연히 느끼기를 원한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우리는 더 부자연스럽게 되며 믿음보다 느낌과 체험에 더 의존하는 삶을 살기 쉽다. 성령은 자신의 존재를 숨기심으로 우리가 온전한 자유함 가운데 믿음으로 살기를 원하신다. 많은 표적은 상대적으로 믿음의 약화를 수반한다. 그만큼 믿음의 필요가 줄어들고 믿음이 성숙할 기회를 앗아가기 때문이다.
성령은 우리를 너무도 약하게 다루시는 것 같다. 단숨에 교만과 완고함을 꺽어 우리를 하루 아침에 뒤바꾸어 놓지 않으신다. 물론 우리가 원한다면 그렇게 하실 수 있지만 고집을 부리면 우리에게 져 주신다. 오래 참고 기다리신다. 어떤 교인은 성령도 자기 성질은 못고치신다고 하는데 신성모독적인 말이지만 전혀 일리가 없는 말도 아니다. 성령은 강제적으로 우리의 나쁜 성질을 뜯어 고치시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자원할 때까지 간절히 원할 때까지 기다리신다.
많은 경우 우리는 죄의 삶에 신물이 나야, 죄가 주는 일락의 마지막 한 방울까지 남김없이 들이키고 난 후에야, 죄의 쓴 열매로 인해 삶이 더 이상 비참할 수 없을 정도로 비참하고 곤고해져야 죄의 길에서 돌이키기 원한다. 죄의 삶에서 아직 숨 쉴 여유가 있는 한 우리는 성화의 길에 들어서지 않는다. 릭 워렌의 말처럼 “변화에 대한 두려움을 능가할 정도로 고통이 커질 때 비로소 우리는 변화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회복의 길로 들어서는 것 외에 다른 방도가 없을 때에야 비로소 그 길을 택한다.”그래서 대개의 경우 성화는 더디게 진행된다. 평생 성화가 거의 진전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완고한 옛 자아가 평생 성령을 이겨버린 것이다.
교회에 변화되지 않은 교인들이 많은 것은 성령이 우리와 함께하시지 않는 증거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성령이 우리 가운데 오래 참고 기다리시는 증거이며, 그만큼 그분이 온유하시고 인자하시다는 사실의 반증이기도 하다. 동시에 우리가 얼마나 완악하고 목이 곧은 존재인지가 여실히 드러나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신학자는 2천년 교회 역사는 성령의 수난의 역사라고 말했다. 우리 개인의 신앙 역사 또한 성령이 우리 안에서 고난받으시는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당하신 고난뿐 아니라 성령이 우리 안에서 슬퍼하시고 탄식하시는 고난 덕분에 구원받는 것이다. 성령의 오래 참으심은 결국 우리의 구원이 된다.
신앙 생활을 하면 할수록 하나님이 우리를 너무도 오래 참고 기다려 주셨고 우리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너무도 인자하게 대해 주셨다는 것을 더 뼈저리게 절감하게 된다. 우리의 사악함과 완고함은 더 밝히 보이는 반면에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신실하심은 더 깊이 깨닫게 된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사랑의 끈질긴 설득에 의해 우리의 완고한 마음이 서서히 설복되는 것이다.
많은 경우, 성령 운동은 성령을 따라가는 이 느리고 힘든 길을 회피하고 빨리 성과를 내기 위한 방편이 된다, 기적의 전법과 초능력을 도입하여 사람들을 압도하려 한다. 종교의 주식 시장에서 기적만큼 인기 있는 상품은 없다. 어떤 목사들은 온갖 세미나를 돌아다니며 쓰러뜨리는 기술, 방언과 예언하는 법을 습득하고 병 고치고 귀신 쫓아내는 권능을 전수받아 정채된 목회의 돌파구를 찾으려고 몸부림친다. 말씀을 아무리 전해도 별 변화가 없지만 병 고치는 능력을 받아 암 환자라도 고쳐서 그 소문이 퍼지면 텅 빈 교회당이 금세 가득 찰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어찌 이 달콤한 유혹을 뿌리칠 수 있겠는가?
복음 사역자들은 비록 느릴지라도 사역의 성과가 잘 나타나지 않아도 정도를 따라 주의 일을 해야 한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사역하는 것은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서 그랬던 것처럼 모든 겸손과 눈물과 오래 참음으로 일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좋은 하나님의 소모품이라는 말이 있다. 복음 사역이 무한히 에너지와 시간을 소모하는 무의미한 일같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소모적으로 보이는 사역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낭비하시는 사랑과 은혜가 밝히 증명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 귀한 은혜와 사랑을 자격없고 가치없는 자들에게 무한이 탕진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이 하나님의 사랑이 탕자를 돌이키게 하듯이, 복음 사역자들의 소모하는 것 같은 사역을 통해 결국 완고한 죄인들이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설복되는 것이다.
목차보기
1장 뒤틀린 성령의 음성
직통계시를 받는 사람들 | 천국을 들락거리는 사람들 | 예언자인가, 점쟁이인가 | 정말 하나님이 말씀하셨을까 | 세미한 음성 가운데 계시는 성령 | 영적인 폭력 | 성령의 약하심
2장 성령의 얼굴에 나타나는 수줍음
거룩한 수줍음 | 금니 소동 | 성령의 원리인가, 무신론의 원리인가 | 과연 성령의 뜻일까 | 성령을 팔아서 사기 치는 자들 | 기독교 신앙의 근간을 뒤흔드는 성령운동 | 성부 하나님이 소외된 성령체험 | 성령체험의 삼박자
3장 치유는 과연 하늘의 터치인가
성행하는 치유집회 | 월요 치유집회 방문기 | 방문 후기 | 지금도 기적적인 치유가 일어나는가 | 성경 시대의 치유 | 성경 시대의 치유와 오늘날의 치유의 연속성과 불연속성 | 왜 오늘날에는 치유 기적이 잘 나타나지 않을까 | 기적인가, 의술인가 | 왜 많은 사람들이 고침받지 못하는가 | 고쳐주시지 않는 신비 | 영광의 신학 | 영적인 사기 | 치유사역의 필요성 | 치유사역의 지침
4장 방언은 과연 하늘의 언어인가
한국 교회를 다시 강타한 방언 열풍 | 하늘의 언어 | 방언, 정말 하늘의 언어인가 | 방언은 고귀한 하늘의 언어 | 방언은 모든 신자가 받아야 할 은사인가 | 지금도 방언은 존재하는가 | 방언에 대한 잘못된 견해 | 방언에 대한 균형 잡힌 견해
5장 성령의 불세례를 받았는가
성령의 불세례를 받은 제자들에게 나타난 놀라운 변화 | 구약에도 계셨던 성령께서 오셨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 지금도 성령의 불세례를 기다려야 하는가 | 믿은 후에 성령세례를 받은 사례가 있는가 | 믿은 후 성령을 받은 유일한 사례 | 성령세례에 대한 확실한 성경적 증거는 전무하다 | 성령세례 교리가 이 시대에 유행하는 이유 | 전무후무한 은혜를 헛되게 하지 말라
6장 오순절로 돌아가는 길
오순절에 임하신 성령 | 오순절로 돌아가는 길을 막는 새로운 십자가 | 십자가의 능력이 떠난 강단 | 시들게 하는 성령의 바람 | 죽음을 통한 새 생명 | 살았다고 하나 죽은 교회 | 열린 하늘 체험 | 성령으로 충만하라 | 실패한 이들을 위한 은혜
-박영돈 교수(고려신학대학원 교의학), ‘일그러진 성령의 얼굴: 한국교회 성령운동, 무엇이 문제인가’(IVP)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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