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척교회의 경계해야 할 사항
교회를 개척하는 목회자는 특별히 경계해야 할 대상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자기 자신과 가족들이다.
둘째, 함께 교회를 섬기는 사람 가운데 경계의 대상이 있다.
만일 이 경계할 일들을 경계하지 못하면 교회 개척은 실패로 끝나고, 상당히 자리를 잡은 교회도 성장이 둔화되며, 어떤 경우에는 피 땀을 흘려 개척한 교회에서 명분 없이 쫓겨나게 된다.
1. 목회자 자신이 가장 경계할 대상이다.
목사는 개인적인 야망 (가장 큰 교회, 위대한 교회, 멋있는 목회. 존경받는 목회, 화려한 생활 , 세상 적인 자랑 등등--)을 버려야 한다. 나는 이런 목사의 생각에 대하여 한 때 목회자의 이상과 꿈으로 생각을 했다. 이런 목회자의 허망한 꿈은 나만이 가진 것이 아니었다. 내 주변의 모든 친구들과 목회자들이 소위 하나님을 위한 이상과 꿈에 취해 목회자의 본래의 위치를 떠나 종교적인 사업가나, 어떤 일을 성취하기 위해 모험을 하는 몽상가로 변했다. 물론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 하나님의 종으로써 어떤 목회에 대한 계획과 설계를 하지 말라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이런 목회의 계획과 설계가 목회자의 꿈이 되면 안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종은 천성적으로 자기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선택된 사람이 아니고 살던지 죽던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기 위해 선택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의 이상과 꿈을 가지려면 하나님의 종의 이상과 꿈 이상의 것을 가지면 안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즉 우리의 것은 무엇도 없다. 오로지 하나님의 뜻이면 가기도 하고 오기도 하는 것이 우리들의 현실적 목표요, 우리들의 장래다. 이 점에 다하여 야고보가 잘 말을 해 주었다. “(약4:13-17)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
여기서 하나님의 뜻이 아닌 그 이상의 인간의 생각은 악한 것이라는 말씀을 그냥 지나치면 안된다. 아무리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고 해도 우리들만의 계획과 설계는 악한 것이 될 수 있다. 나는 오랜 목회자 생활 속에서 하나님을 위한 큰 꿈과 이상과 그것을 이루어 드리기 위한 우리들의 노력도 죄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즉 하나님을 위한 선한 욕망도 욕심이 되는 것이며, 어떤 경우에도 선한 욕심이 하나님 앞에서 정당화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여기서 한가지 더 부언할 것은 선한 욕심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이다.
어느 날 우리들에게 아주 잘 알려져 있는 목회를 아주 잘하시는 목사를 한 신학도가 찾아 왔단다. 그는
「목사님, 어떻게 하면 목사님과 같이 목회를 잘 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했길레 목사님의 교회는 단 시간 내에 이렇게 크게 성장을 했습니까?」
「목회를 잘 하고 못하고는 잘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지금 내가 잘하고 있는지 못하고 있는지도 잘 모릅니다. 오직 하나님의 종으로만 살려고 노력합니다. 그리고 짧은 시간 내에 교회가 이렇게 성장한 것은 잘못 보고하시는 말씀입니다. 우리 교회는 전도사님이 보신 것처럼 단 시간에 성장한 교회가 아닙니다. 저는 목사가 된지 이미 15년이 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부모님과 할아버지의 신앙 생활까지 합하면 거의 100여년의 시간이 됩니다. 그 오랜 시간의 기도와 하나님께 대한 충성심의 결실이 우리 교회입니다.」
주님께서는 심지 않는데서 거두시게 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뿌린 대로 거두게 하신다는 말씀이 있다. 노력하지 않고 크게 되려는 생각,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경쟁심, 자기의 푼수에 맞지 아니한 이상과 꿈, 하나님의 종의 자세를 귀중히 여길 줄 지배자의 야망, 세상의 부귀영화를 바라는 세속적인 출세 욕망, 막무가내 식의 성취 욕, 어처구니없는 자신감, 터부니 없는 시대적인 사명, 나만의 것을 고집하는 독선, 어리석은 비판에서 오는 교만과 방자함은 이런 모든 것들이 선하고 거룩한 이상으로 탈바꿈이 되어 젊은 목회자들을 타락시키고 호된 고통을 당하게 한다.
자격이 없는 사람이 자기의 것을 소중한 줄 모르고 터부니 없는 야망에 매여 달성 할 수 없는 목표를 향해 뛴다면 그의 인생이 무엇이 되겠으며, 그의 노력은 얼마나 허사가 될 것인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나의 나 됨을 아는 것이다. 나의 나 됨은 내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결정하시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원천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와 주권 하에서 살고 일하고 죽는다. 더욱이 하나님의 종으로 헌신된 사람이야 말해 무엇 할 것인가?
이런 말씀이 있다. “(롬12:3)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하나님의 종의 생각은 하나님의 종의 생각으로 끝이 나야지 그 이상의 것도 생각하지 말며, 그 이하의 것도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종들은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쓰실 것이며 어느 만큼 쓰실 것인지를 알아야 하는 필연성이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종으로 어떻게 쓰임이 되며 얼마나 쓰임이 되는 가는 두 가지 요소에 의해 결정이 된다고 본다.
첫째는 하나님의 작정이다.
바울은 (롬9:21)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어리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하셨고 ”(딤후2:20-21) 큰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 이 점에 대하여 토기장이의 비유를 들었다.“라고 하셔서 하나님의 집인 교회에는 (광의 적인 의미의 교회) 여러 가지 그릇들(하나님의 일군들)이 있어야 함을 말씀하셨다.
내가 하나님께 금 그릇으로 지음을 받았다면 평생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이며, 질그릇으로 지음을 받고 지정되었다면 질그릇으로 살아야 한다. 그러나 모든 그릇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깨끗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런 하나님의 종들에 대한 말씀이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높아지고 스스로 잘난 체 한다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 하나님의 일을 하다 보면 나를 왜 금 그릇으로 만들어 주시지 않았을 까라고 생각나는 때가 많다. 성도들에게 멸시를 당하고, 아무리 기도하고 노력을 하고 헌신을 해도 교회가 잘 안되어 힘들고 어려울 때에 질 그릇되게 하신 하나님이 원망스러울 때가 있다. 그러나 나이가 들고 목회라는 것을 알게 되면 목회자의 그런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고 미련한 생각인가를 알게 된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고후4: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하신 말씀을 빨리 깨닫고 내가 금 그릇이던 질그릇이던 하나님께 귀히 쓰임을 받는 하나님의 착하고 충성스러운 종이 되는 것이다.
목회자의 성공과 실패는 야망을 이루고, 꿈을 성취하고, 이상을 현실화하는 것이 아니다. 한 달란트를 받았던, 10달란트를 받았던 주신 은혜대로 착하고 충성된 종이 되어 하나님께 잘했다 칭찬을 듣는 것이 바로 성공 실패의 결과인 것이다.
한 달란트를 받았으며 질그릇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10달란트를 받은 사람을 부러워 말며, 금 그릇되지 못한 것을 한탄하지 말라. 그것은 내가 자격이 부족해서 그런 것도 아니요, 지식이 모자라 그런 것도 아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뜻 가운데 하나님이 판단하실 때 내게 가장 좋은 것을 맡기셨다는 것을 알라.
둘째는 얼마나 하나님의 귀한 종이 되기 위해 하나님께서 어떤 훈련과 훈계의 과정을 거치는가에 달렸다.
모세는 바로의 궁중에서 40년을 살면서 모든 학문과 기예와 군사적 지식을 습득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도 부족해서 40년 동안을 광야에서 세상에 잊혀진 사람으로 살았다. 그 후에서 하나님의 종으로 부름을 받아 그 백성을 구하는 하나님의 종으로 산다. 우리가 이미 아는 것처럼 그의 생애는 시간적으로 40년, 40년, 40년이다.
그런데 모세의 생애를 기록한 출애굽기에서 궁중의 40년은 1-2장에 기록이 되어 있고,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고 그 백성의 지도자가 되어 산 기록은 3:1부터 마지 막장까지 기록이 되어 있다. 그러나 같은 시간인 이드로의 양 무리를 치던 시간의 기록은 3:1절 단 한 절에 기록이 되어 있을 뿐이다. 이것은 모세의 광야 생활은 하나님과의 대화가 없는 단절의 시간이요, 모세를 아는 모든 사람들에게 잊혀진 시간임을 말한다. 그 때에 모세의 심정을 어떠했을까? 요셉은 13년의 고통과 훈계의 과정이 필요했다.
예수님의 제자들인 사도들이 주님에게 부름을 받고 3년 동안 주님으로부터 특별한 교육을 받았다. 그런데 우리는 제자들이 얼마나 강도 높은 교육을 많은 시간 동안 받았는가를 잊어서는 안 된다. 주님의 교육 방식은 말씀하시고 그 말씀을 실천하시면서 또, 그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여 주시는 실물 교육이 였다. 그것은 제자들의 믿음을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교육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24시간 계속되었다. 주님은 그들을 교육하시기 위해 죽은 아비의 장사에도 참석하지 못하게 하셨으며, 장가를 가서도 안된다고 하실 정도로 철저히 세상과 단절하여 그들을 가르치시고 훈련시키셨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교육시키신 시간을 간단한 공식으로 계산을 하자면 24시간×365일×3년=26,280시간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많은 시간 동안 주님께서 직접적으로 이미 구약의 성경을 익히 알고 있는 사람들을 상대하여, 교육과 훈련을 하셨음에도 제자들은 주님의 마음에 흡족한 사람들이 되지 못했다. 그래서 오순절에 성령으로 충만케 하시므로 드디어 주님의 일을 감당할 만한 제자들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많은 하나님의 종들이 몇 가지 은사만 받고서도 사도들과 같이 온 천하를 다 달라고 하는가 하면, 신학교에서 3년 동안 공부한 그것으로 하나님의 모든 신학을 통달한 것처럼 비판적이 고 안하무인격이 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몇 번 읽은 것으로(성경 66권을 한 번도 읽지 않고 목사 노릇 하는 사람도 많이 보았다.) 스스로 말씀을 통달한 사람처럼 스스로 착각을 하고, 바울의 삼층 천을 체험하기커녕, 그 삼층 천의 실체도 모르면서 영계를 다 아는 것처럼 허풍을 떤다. 그리고 기도를 한다.
「하나님. 21세기를 저에게 주옵소서」
「하나님. 이 나라를 저에게 주옵소서.」
「하나님. 서울을----- 강북을----- oo동을 저에게 주옵소서」 등등
하나님께서 무엇이 모자라 훈련되지도 않고, 실력도 없고, 하나님의 뜻도 모르고, 주신 사명은 내 팽개친 채 허황된 생각에 가득 사로잡혀 스스로 높아져 잘난 체 하는 사람에게 21세기를 맡기고 이 나라와 교회를 맡기시겠는가?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라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6:7) 여기 만홀이라는 말은 원래의 말뜻이 ‘코를 위로 올리고 벌림 거리면서 비웃는 짓’을 말한다. 하나님을 속이지 말라. 하나님의 종들이 하나님의 종 된 그 자체만으로 감사하고 주신 은혜대로 충성하지 않으면서 목회자의 이상과 꿈,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의 놀라운 성장, 하늘의 새벽 별, 사도 수준의 제자, 모세 같은 종, 아브라함의 믿음을 가진 족장 등의 꿈을 버리고 작은 일에 충성하면서 “(눅17:10)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 이라 할지니라”하는 진실된 종의 자세를 가지지 않으면 고생을 많이 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고생하는 것도 하나님의 종됨의 표시이므로 낙심하지 말고 감사하며 자기를 처 복종시킬 것이다. 목회자가 가장 조심하여 경계해야 할 점은 바로 자기 자신임을 나는 여기서 역설했다.
이런 목회자들의 개인적인 야망과 이상들이 목회의 형태로 나타난다. 이런 하나님의 종으로서가 아닌 자기 이상을 실현시키기 위한 몸부림이 결국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게 하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종교적인 사업가로 변신되어 버리는 경우가 생긴다. 우리 주변의 목회를 성공적으로 아주 잘했다는 어떤 목사들을 보면 그런 기분과 느낌이 많이 드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터부니 없는 믿음을 버리라. 하나님의 의지를 변경시켜서 자기의 의사를 관철시키려는 강제적인 기도와 금식을 하나님의 뜻을 움직이는 공로가 된다고 생각하는 비 성경적인 사고 방식을 버리라. 금식은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을 쫓아 자기의 욕심을 버리고 순종하도록 자기를 처 복종시키는데 더 큰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기도를 더욱 정성스럽게 드리며, 기도 중에 하나님과 자기 자신의 거리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를 가까이 오시도록 부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멀리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회개하면서 가까이 가도록 해야 한다.
2. 다음은 가족들이다.
목회자의 가정 관리는 목회자가 가지는 또 하나의 크나 큰 난관이다. 세상에 알려 지지 아니한 목회자의 가정 문제의 심각성은 오늘 언론에 나타난 세상의 그것 보다 훨씬 더 심각한 문제일 수도 있다. 목회자의 가정 문제 중에 가장 심각한 것은 목회자와 아내의 관계이다. 그러나 자식들의 문제도 간과할 수 없는 문제다.
우리는 흔히 목회자의 아내와 목사의 관계를 분리시켜 생각하는 오류를 범한다. 즉 목회자는 하나님의 종으로 부르심을 받았지만 아내 되는 사람은 그렇지 않다는 사고 방식이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천만번 위험하고 하나님의 종이 되는 길을 방해하는 적극적인 요소가 된다.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실 수 있는 축복 가운데 가장 크고 첫째 되는 축복은 부부의 인연일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인간사의 모든 것을 잘 아시고 통치하신다는 것을 믿는다면 부부의 관계가 두 남녀의 단순한 인간적인 사랑 때문만도 아니요, 우연한 만남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놀라우신 섭리 가운데 이루어진 것이라는 것도 믿어야 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목사의 부부 관계는 풀어 가야 한다. 목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면 목사의 부인은 그 부르심을 받은 목사의 돕는 배필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목사 부인도 목사와 같은 사명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는 종으로 목사와 동일 선상에 서 있음을 알 것이다. 이 사실을 모르거나 인정하지 않는 체 남편인 ‘목사는 목사고 나는 나다’라는 식으로 생각하거나 나는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 한 남자의 여자로서의 의무만 감당하면 된다는 사고방식을 하나님 앞에 용납될 수 없는 잘못된 생각인 것이다.
우리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종의 부부 관계를 호세아의 경우에서와 에스겔의 경우에서 찾아 볼 수 있다. 호세아는 하나님의 소개로 고멜이라는 아내를 얻었는데 그 여인은 창녀였다. 어느 누가 그것도 하나님의 종이 되는 사람이 몸을 파는 창녀를 아내로 맞이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고멜을 통해 그 백성에게 전할 복음이 있었기 때문에 호세아의 아내로 고멜을 선택했던 것이다. 그것은 아무리 타락한 백성들이라고 해도 언제나 하나님은 그 백성들을 사랑하신다는 것이 였다.
호세아와 고멜 사이에서는 4명의 자식들이 탄생했는데 그들의 이름을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짓게 된다. (호1:4)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그 이름을 이스르엘이라 하라 조금 후에 내가 이스르엘의 피를 예후의 집에 갚으며 이스라엘 족속의 나라를 폐할 것임이니라“
”(호1:6) 고멜이 또 잉태하여 딸을 낳으매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그 이름을 로루하마라 하라 내가 다시는 이스라엘 족속을 긍휼히 여겨서 사하지 않을 것임이니라“
”(호1:9)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이름을 로암미라 하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지 아니할 것임이니라“
여기서 이스르엘(뜻: 하나님이 뿌려 주심)이라는 곳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족속의 나라를 폐할 것이라는 뜻이 있고, 로루하마라는 말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한다 라는 뜻이며, 로암미라는 말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는 뜻이다. 누가 자식을 낳아 이런 이름을 붙이겠는가? 그러나 호세아는 그런 이름을 자식들에게 붙였을 때 사람들은 이상하게 생각을 해서 「아이들의 이름이 왜 그래요?」라고 물었을 것이고, 호세아는 그런 이름을 붙인 연유를 말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을 것이다.
에스겔의 경우도 그랬다. 어느 날 에스겔 선지자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셨다. “(겔24:16-27) 인자야 내가 네 눈에 기뻐하는 것을 한 번 쳐서 빼앗으리니 너는 슬퍼하거나 울거나 눈물을 흘리거나 하지 말며 죽은 자들을 위하여 슬퍼하지 말고 종용히 탄식하며 수건으로 머리를 동이고 발에 신을 신고 입술을 가리우지 말고 사람의 부의 하는 식물을 먹지 말라 하신 지라 내가 아침에 백성에게 고하였더니 저녁에 내 아내가 죽기로 아침에 내가 받은 명령대로 행하매 백성이 내게 이르되 네가 행하는 이 일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되는지 너는 우리에게 고하지 아니하겠느냐 하므로 내가 그들에게 대답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성소는 너희 세력의 영광이요 너희 눈의 기쁨이요 너희 마음에 아낌이 되거니와 내가 더럽힐 것이며 너희의 내버려둔 자녀를 칼에 엎드러지게 할지라 너희가 에스겔의 행한 바와 같이 행하여 입술을 가리우지 아니하며 사람의 식물을 먹지 아니하며 수건으로 머리를 동인 채 발에 신을 신은 채로 두고 슬퍼하지도 아니하며 울지도 아니하되 죄악 중에 쇠패하여 피차 바라보고 탄식하리라 이와 같이 에스겔이 너희에게 표징이 되리니 그가 행한 대로 너희가 다 행할지라 이 일이 이루면 너희가 나를 주 여호와 인줄 알리라 하라 하셨느니라 인자야 내가 그 힘과 그 즐거워하는 영광과 그 눈의 기뻐하는 것과 그 마음의 간절히 생각하는 자녀를 제하는 날 곧 그 날에 도피한 자가 네게 나아 와서 네 귀에 그 일을 들리지 아니하겠느냐 그 날에 네 입이 열려서 도피한 자에게 말하고 다시는 잠잠하지 아니하리라 이와 같이 너는 그들에게 표징이 되고 그들은 내가 여호와 인줄 알리라”라고 하셨고 에스겔은 두 말하지 않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였다.
주님께서 마리아에게 잉태되었을 때에, 천사의 계시를 받은 마리아는 ”(눅1:38) 마리아가 가로되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리다“하였다. 이는 그가 전적으로 하나님께 헌신된 사람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평생에 마리아는 주님만을 위해 살게 된다.
예수님 당시에도 그랬다. 주님을 따르는 많은 사람 가운데 저기의 것으로 주님을 수종드는 여인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전적으로 주님을 도와 헌신을 했다. 즉 자기 개인의 생활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디모데에게는 루디아와 요게벳이라는 어머니가 있었다. 우리는 성경에서 많은 여인들이 하나님의 종을 위해 이름도 빛도 없이 헌신된 것을 발견한다. 그 여인들은 이미 하나님께 선택이 된 하나님의 종들로써 그들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충성스러운 종들이 있을 수 있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목회자의 아내는 목회자에게 이런 돕는 배필의 역할을 잘해야 한다. 목회자가 하나님께 인정을 받음으로써 자기도 인정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결코 안될 것이다.
목회자의 자녀들도 하나님께 헌신된 자녀로 길러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온 백성이 당신의 자녀임을 확증하시기 위하여 백성의 장자들을 모두 하나님께 받치도록 하셨고, 그 장자들을 대신하여 레위인을 선택하셨다. 그리고 그 레위인은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섬기는 지파가 되게 하신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모든 선택된 백성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하나님의 종들임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이다.
목회자의 자녀들이 꼭 목회자가 되고 목사의 부인이 되라는 말은 아니다. 다른 직업을 가지고 살더라도 그들은 태중에서 이미 거룩한 자녀로 선택이 된 하나님의 자녀들이며 종들인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이 거룩한 집단을 이루는 가정을 만들기에 상당한 어려움이 따른다. 특히 자녀들의 경우는 말할 필요도 없고, 목사의 부인들이 이런 점을 이해하지 못하고 헌신되지 않아 마음의 고생이 아주 심한 목사들을 많이 보았다. 그러므로 미혼인 헌신 자들은 하나님께 헌신된 여인을 결혼의 제일 조건으로 삼는 것이 좋을 것이다.
어떤 면에서 목사의 부인들은 목사들 보다 더욱 더 강력한 헌신을 요구받는다. 목사는 목사이기 때문에 목사의 대접을 받을 수도 있고 목사에게 상응한 위로도 받는다. 그러나 목사의 부인들은 전혀 그런 대우나 대접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목사의 부인뿐만 아니라, 목사의 자녀들도 교회를 개척하면서 받은 온갖 고생스러웠던 일에 대한 정당한 위로를 받지 못한다. 그러므로 개척 교회의 목사 부인은 목사 자신 보다 더 강력한 헌신과 희생을 강요당한다고 할 수 있으며 이런 면에서 목사 보다 더 교회 개척에 대한 사명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만일 개척 교회 목사 부인이 이런 사명감이 없어 교회를 개척하는 목사에게 걸림돌이 된다면 목사가 교회 개척에 결단코 성공할 수가 없을 뿐 아니라 목회에서 하나님께 잘했다는 칭찬을 듣지 못하게 될 것이다.
3. 사업적인 교회를 하지 말라.
앞에서도 말했지만 목회자는 종교 사업가가 아니다. 나는 여기에 이런 류의 인간들의 행태를 언급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그것은 매우 부끄러운 일이며 그리스도를 팔아먹는 수많은 사기꾼들 중에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여기 한가지 분명히 집고 넘어 가야 할 일이 있다. 우리는 흔히 교회를 개척하다가 너무나 많은 어려움이 겹쳐 할 수 없이 다른 장소로 옮기면서 신문에 광고를 낸다든지 아니면 다른 방법으로 임대된 장소를 다른 교회 개척자에게 넘겨주는 일을 보게 된다. 이 때 이미 사용하고 있던 성물들과 교회 장소가 되게 하기 위해 투자된 금액을 회수하려 든다. 이럴 경우 건물을 승계 받은 개척 목회자는 기존의 개척자에게 이 모든 성물과 투자 비용을 아무 대가도 없이 넘겨받으려고 한다. 만일 조건 없이 또는 현실성이 전혀 없는 아주 작은 금액이라도 요구하면 마치 교회를 팔아먹고 도망을 치는 사람쯤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버려야 할 것이다.
교회를 개척한다는 것은 정말 많은 어려움이 겹쳐 있게 되는데 그 중에 가장 큰 어려움은 경제적인 문제일 것이다. 사실 이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인하여 교회 문을 닫아야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런데 후발로 같은 장소에서 교회를 개척하는 사람이 전에 있던 개척자가 투자한 모든 것 내지 일부를 아무런 대가 없이 차지하려는 것은 같은 입장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이 든다. 투자된 모든 자금 보다 흡족할 수는 없지만 최선을 다해 고통받는 선배가 다른 곳에서 다시 교회를 개척할 수 있도록 자금을 확보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어야 마땅하다.
누구든지 교회를 개척하다가 실패를 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그리고 사실 한 곳에서 교회를 개척해서 성공적으로 목회를 하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아니하다. 나도 여러 번 교회를 개척하면서 장소를 옮겨 다녀야만 했다. (교회를 옮겨야 하는 필연적인 이유에 대해서는 다음에 다시 말하려고 한다) 그럴 때마다 이미 사용했던 성물들을 다음 사람에게 넘겨주고 떠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그러지를 못했다. 그렇다고 성물들을 팔 수도 없었다. 성물을 매매할 경우에 하나님의 성물을 팔아먹고 다닌다는 오해를 받을 수도 있고, 다음에 교회를 개척할 때 새로운 성물을 마련한다는 것이 경제적으로 너무 어려워 아예 모든 성물을 친구 목사의 창고나 빈 공터에 맡겨 두었다. 그렇게 성물을 친구 교회에 맡긴 후 그 성물을 가져 와 다시 교회를 시작하기까지 3년이 걸린 일이 있었다. 이 때의 나의 심정은 날마다 통곡이요, 회개요, 부끄러움이요, 교회에서 여러 말들이 많아도 그것을 감내 하므로 나를 도운 친구 목사에 대한 감사뿐이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나의 가장 절친한 친구들도 나를 오해했다. 그들은 교회를 팔아먹고 다니는 파렴치한 가짜 목사라고 나를 매도하지는 않았지만, 그런 사람과 비슷한 이해 못할 사람으로 나를 비방했다고 나중에 고백을 하면서 사과를 했다. 나는 그들의 그런 사과와 회개성 발언을 듣고 가슴을 오려 내는 아픔을 느꼈으나, 하나님의 섭리와 인간의 속 좁은 판단의 차이로 생각하고 그 괴로움을 참았다.
그러나 사업적인 욕망을 성취하기 위해 교회를 개척한다는 것은 주님을 욕되게 하는 짓이다(마 21:12-13). 어떤 경우에 한 상가 건물에 여러 교회가 들어 서 있다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20-30명 정도의 사람들이 모이면 어떤 구실을 붙여 교회를 팔아먹으려고 광고를 내는 사람도 있는 모양이다. 그래서 일년에 몇 곳에 교회를 새로 시작을 하고 될 수 있는 데로 빨리 교회를 팔아 버리는 것이다. 그들은 판다고 말하지 않고, 설립금이나 권리금을 받는다고 말한다. 이런 종교 사기꾼들은 하나님께 저주를 받을 것이다.
4. 교회 분리를 이용한 교회 개척.
①. 목사가 교회를 분리해 나가는 경우가 있다.
정말 못할 노릇이다. 오직 했으면 그런 짓을 할까 마는 정말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한 교회에서 목사가 겪는 위기는 3년, 5년, 7년, 18년이라고 한다. 목사가 교회에 부임하여 3년은 신선미의 매력을 잃지 않는다. 성도들은 목사의 새로운 면을 발견해 가는 재미로 설교에도 은혜를 받고 치리에도 순종한다.
그러나 3년이 지나면 그런 신선미는 없어지기 시작을 한다. 그렇게 서서히 2년이 더 지나면 성도들은 목사에 대해 어떤 충격적인 새로운 것을 요구하게 된다. 목사도 이 시점에서 교회를 어떤 방향으로 이끌고 가야 하는지 고민을 하게 되는 것이다.
5-6년쯤 되어 목사가 성도들에게 새로운 목회 방향을 제시하고 성도들이 이를 좋게 여겨 수용하면 7년을 무사히 넘길 수 있다. 그 사이에 목사는 진실로 자기를 위해 기도해 주고 아껴 주는 힘있는 성도들을 확보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이 때쯤 되면 목사에게 서서히 식상하는 무리들이 교회에 생기게 되기 때문에 그들의 세력을 견제할 목사의 세력이 필요하게 된다는 말이다. 이 고비를 넘기면 일단 목사는 목회의 안정기에 접어들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한 고비가 남아 있다. 목회 18년째가 되면 교회의 모든 성도들은 18년된 목사의 노후 문제를 생각하게 된다. 즉 20년 교회 시무에 따르는 원로 목사 문제가 대두되는 것이다. 이것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100% 원로 목사에 대한 경제 문제다. 어떤 교회는 이 문제로 인해 18년 또는 20년이 몇 달 남지 않는 목사를 몰아 내는 경우가 있다. 나는 이런 교회를 너무 많이 알고 있다. 정말 참담한 목사의 노후의 문제지만 사실이 그렇다. 교회는 10년이고 20년이고 평생 교회를 위해 살아 온 목사의 노후를 책임지려 하지 않으며 더욱이 목사의 가족들을 책임지지 아니한다.
이런 위기를 당하여 목사가 교회를 사임하게 되었을 때에, 자기를 지지하는 성도들을 이끌고 가까운 곳에 교회를 개척하여 새롭게 시작하는 경우가 생긴다. 특히 교회를 부임한 후 5-10년 어간에 교회를 사임해야 하는 목사일 경우에 더욱 이런 일이 생긴다. 그렇게 해서 교회를 분리해 개척된 교회가 모 교회 보다 더 크게 성장한 경우도 있다.
나는 그런 목사들의 행태를 충분히 이해하고, 그렇게 되기까지 목사와 가족들과 교회가 함께 겪어야 하는 괴로움과 슬픔과 고통을 이해한다. 우리 한국 교회에 이런 일들이 없었으면 좋겠지만 많은 경우에 이런 사건이 발생한다. 그러나 아무리 이해를 하고 좋게 생각을 한다고 해도 교회가 하나 되기를 소원하시는(요 17: ) 주님 앞에서 이런 일들은 바람직하지 못한 것 같다.
할 수 없이 이런 일이 벌어질 경우에는 목사가 성도들을 이끌고 나와 교회를 개척할 것이 아니라 성도들이 교회를 나와 목사를 청빙하는 형식을 취한다면 그래도 좀 모양이 좋지 아니할까 싶다. 즉 목사가 교회를 깨뜨려서 성도들을 데리고 나가 교회를 세웠다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서다. 이 말이나 저 말이나 그게 그거지만 이런 현실이 안타까워 해 보는 말이다.
②. 교단이 분리될 때나 교회가 분리될 때 나타난다.
우리 한국의 교회에서는 과거에 이런 일들이 너무 많았다. 하나님의 교회가 어떤 문제로 인하여 서로 비방하고 험 뜯기를 다반사로 한 시절이 있었다. 서로 상대방에 대한 증오나 미움이 교회를 개척하는 것으로 표출되는 것이다. 세력이 밀려 정든 교회를 떠나는 일단의 집단들이 다른 곳에 교회를 세우면서 다니던 교회 보다 훨씬 더 튼 교회를 만들겠다고 호언장담을 한다. 그러기 위해 전에 섬기던 목사 보다 더욱 훌륭한 목사를 찾는다. 그렇게 새워진 교회는 이미 예배를 드릴 장소도 있고 상당한 재력도 있어서 교회를 개척하고자 하는 목사에게는 정말 좋은 조건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교회를 개척하려는 목사에게 이것은 커다란 함정이다. 교회를 떠나 교회를 개척하는 성도들은 대개의 경우 목사와의 트러블 때문에 교회를 떠난다. 즉 목사와 목사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세력에 밀려 교회를 집단적으로 떠나게 되고 교회를 개척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목사와 부딪치는 원인의 상당 부분이 목사의 목회 방침에 불만을 품는 경우가 있다. 다시 말해서 자기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목사가 따르지 않기 때문에 교회를 떠나게 된 경우다. 그런 사람들은 교회를 개척한 후에 청빙된 목사가 자기들의 말에 전적으로 따라 와 주기를 요구한다.
삼양동에 한 교회에서 여러 가지 이유로 장로 8명과 그의 가족들과 그들을 지지하는 몇몇의 사람들이 교회를 분리하여 새로운 교회를 개척했다. 그리고 그 교회에서 전도사로 인기가 높았던 목사를 청빙했다. 그러나 그들은 목사에게 온갖 정성을 다하는 것 같았지만 결국 목사를 그들의 시녀로 부리기를 원했다. 그렇게 되니 목사가 소신껏 목회를 할 수가 없었고 8명의 장로들이 목사에게 요구하는 요구가 각각 달라 목회에 엄청난 혼선이 생겼다. 목사는 설교부터 마음 대로할 수 없었다. 그 교회는 편협하고 고집이 세고 자기 식으로 교회를 이끌고 나가려는 장로들과 그 가족들의 교회였다. 그러므로 교회가 성장할 리가 없는 것이다. 결국 목사는 그들을 아주 멀리 그들을 떠나 교회를 다시 개척해야 했고, 장로들의 교회에서 시무한 3년의 세월을 목회의 한가지 경험으로만 유익했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어도 그런 부류들이 모인 교회를 부임하지 말 것이며, 그런 동기나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규합하여 교회를 세워서는 안 된다. 결국 뼈아픈 추억만이 남을 것이며 허송 세월을 하게 되고 말 것이다.
5. 교단 명의를 바꾸어 상업적 방법에 의한 개척 교회
이 말은 교회의 간판에 따라서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것을 이용하는 것을 말한다. 대한 예수교 장로회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목사나 사람들이 장로교 간판을 걸어야 사람들이 모인다고 생각하여 양심의 가책도 없이 교파의 간판을 도용하는 것이다. 이것은 자기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의 상호를 도용하는 것과 같은 짓이다. 이런 목회자는 목회 윤리나 법과 제도가 무슨 상관이 있으며, 나와 아무 관계가 없는 일이라고 큰 소리를 친다. 그래서 교리나 윤리와 관계없이 교회를 세우고, 간판을 바꾸어 달고, 교단까지 바꾸는 등 온갖 수단 방법을 다 써서 대 교회를 하겠다고 한다. 과연 그렇게 해서라도 대 교회만 되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인가?
지금은 옛날과 달라서 교파의 개념이 아주 희박한 시대가 되어 버렸다. 성도들이 교파에 그렇게 삼한 구애를 받지 아니하며, 교파에 의해 교회를 선별하여 선택하는 경우가 점점 흐려져 간다. 더욱이 초신 자나 새로이 주님을 영접하는 사람에게는 교파가 그렇게 중요한 교회 선택의 요소가 아니다. 교파나 교회의 소속 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목사의 설교와 인격과 생활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어려울지라도 목사가 배운 신학의 긍지를 가지고 교회를 개척 성장시키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내 개인적으로는 이단적 요소가 없는 한 교리가 좀 다르다고 상대방의 교회를 비방하고 격하시키는 일들은 이제 전 근대적인 교역자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광의 적인 교회는 이런 저런 특징을 가진 교파와 교단들이 합해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내가 속한 교단의 교리에 의해서만 하나님의 교회가 온전해 진다는 극단적인 자기 개인(교단)주의적 사고방식은 하나님의 전체 교회를 세우시는데 별반 득이 되지 않을 것이다. 사도 마태가 누가를 비방하지 않고 누가가 요한을 비방하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의 교회는 다양성 속의 질서 있음으로 온전히 이해되고 설립되어 완성된다.
6. 호기심에 의한 교회 개척
소위 성공적인 목회를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성공담을 듣고 나서 목회 초년생들이 가장 많이 겪는 경우다. 물론 그들의 말을 듣고 그대로 해서 성공한 목회자도 있을 것이나, 사실 나타나지 않는 실패자가 훨씬 많이 있을 것이다.
교회를 개척하는 것은 호기심이 아니고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는 사명감이다. 목회자가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는 목회의 성공은 하나님도 기뻐하시고 목회자 자신에게도 큰 영광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목회자 자신의 영광을 탐하지 말라. 그것은 하나님에게 충성한 사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면류관이며 우리는 그것을 가지는 것이 아니고 다시 하나님에게 드리는 것이다.(계 4:10) 교회를 개척하는 목회자의 마음은 주님의 마음 즉 죄인을 구원하겠다는 그 단순한 마음에 되어 있어야 한다.
7. 직업 의식을 가지고 시작하는 교회 개척.
오늘 날 우리 나라의 현실은 교회를 개척하는데 마치 상업이나 사업에 투자를 하듯 개인의 사유 재산을 투자한다. 개척 교회의 재정 운영을 볼 때 개척자의 사유 재산을 들인 경우가 50%가 되고, 독지가에 의한 것이 20%, 기타가 30% 정도가 될 것이다. 주님을 위한 사유 재산의 연보는 정말 아름답고 거룩한 사랑의 표현이 되어야 할 것이다. 목사이건 성도이건 간에 일단 하나님께 드린 재산들은 나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로지 교회를 위해 쓰여지는 하나님의 재산으로써 이미 거룩해진 재물인 것이다. 그런데 간혹 어떤 사람은 보상 의식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연보를 한다. 즉 백 배, 천 배가 되 되돌아오는 것을 바라고 드리는 십일조와 감사 헌금들, 아이들이 좋은 학교를 가기 위해 드리는 소원 예물들, 심지어 어떤 성도는 그 동안 지은 죄를 속죄하기 위해 드리는 속죄 재물도 있다. 이와 같은 조건부의 연보나 (헌금이라는 말 보다 연보라는 말이 훨씬 더 좋은 말이다) 어떤 신앙적인 행위를 나는 기복 적이라고 정의한다. 오늘 날 우리 교회에는 이런 기복 적인 조건부 연보와 헌신이 이제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만연되어 있다. 주신 은혜에 대한 감사에도 이런 조건들이 함축되어 연보나 헌신에 대한 본질이 훼손되어 버렸다.
교회를 개척하는 목사들도 이런 범주의 사고 방식을 벗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 즉 먹고살기 위해 교회 사업을 하는 것을 말한다. 누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교회를 개척하겠는가 라고 묻는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기독교 윤리 실천 협의회의 홈 페이지나, 여기 저기의 목사들의 홈과 교회 홈들과 기독교 단체들의 홈을 찾아다니면서 성도들의 말을 들어보면 목사의 직업 의식에 대한 질타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그리고 이미 성도들의 생각에 목사를 하나의 직업으로 보는 경향이 아주 뚜렷하다는 것을 발견할 수가 있다.
이와 같은 현상은 그런 생각을 하는 성도들에게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런 생각을 하도록 만들어 버린 목사들 자신에게 더 큰 원인이 있다고 본다. 11조와 감사의 예물을 앞에 두고 기도하는 목사들의 한결같은 기복 적인 축복 기도들을 보라. 성도들의 작은 헌신에 대한 지나친 칭찬과 격려와 축복을 보라. 어느 누가 기복 적인 신앙에서 벗어 날 수가 있다는 말인가?
교회를 개척하는 것은 이것저것을 다 해 보다가 거듭 실패를 한 사람이 할 수 없이 신학교를 나와 먹고살기 위해 하나의 사업체를 일으키는 그런 일이 결코 아니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교회를 시작하면 모두 실패를 하고 말 것이다.
교회 개척을 위해 재정적 투자를 한 사람은 그것을 투자라고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에게 드린 신성한 헌금이나 헌물이라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어떤 사람이 교회를 설립하는데 상당히 많은 재정을 후원했다가 목회자와 마음이 틀려 그 교회를 떠나면서 자기가 드린 돈과 이자를 합하여 받아 가는 경우도 보았는데, 그 사람은 장차 그 일로 인하여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한 죄를 면치 못할 것이다. 하나님에게 드려진 물질은 어떤 경우에서도 하나님의 것이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하나님 앞에 약속한 것을 거짓 말을 하며 드리지 않은 죄로 즉살을 당했다.(행 5:1-16)
- 글의 출처 : 김청수 목사 (목사의 적, 목회의 적, 금기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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