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론

[스크랩] ‘교회란 무엇인가’ 가톨릭과 개신교의 당대 논쟁

수호천사1 2017. 1. 20. 15:01

‘교회란 무엇인가’ 가톨릭과 개신교의 당대 논쟁

 

 

제1장 교회

 

1. 교회의 속성(Nature of the Church)

 

교회란 무엇인가?, 교회에 대한 적합한 정의는 무엇인가? 교회의 자질들과 특권들, 표지들 또는 구분되는 특징들이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들은 논의할 만한 것들로서,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이 질문들은 로마가톨릭교회와 개신교 사이에 벌어진 깊고 영향력 있는 논쟁의 주제들이었다. 교황주의자들은 개신교도들과 논쟁이 시작되면 교회에 대한 일반적 주장들에 우위권을 나타내고자 항상 조마조마했다.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하나는 그들이 자신들의 의견에 있어 전적으로 오류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성경 안에 제시되고 있는 것 같이 교회에 대한 일반적 주제에 대해 말할 무엇을 충분히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즉 그들과 개신교도들 사이에 논의된 특별한 교리들과 관련하여 실제적으로 제시할 수 있는 것 그 이상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교회에 대한 일반적 주제에 대해 그들이 굳게 붙들고 있는 견해 때문이다. 즉 세워진 가톨릭교회가 개별적 모든 교리적 논쟁보다 더 우위에 있다는 견해이다. 그러한 견해로 인해 나타나는 실제적 결과는 그들이 교회를 모든 은혜의 배포자요 진리의 중보적 계시자로서 하나님의 방(room) 안에 세워둔 것이다. 또한 적어도 하나님 말씀의 방 안에서 교회를 신앙의 유일한 잣대로 세워둔 것이다. 물론 그 결론은 인간이 교회가 반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자신들을 복속시켜야 함을 시사한다.

이러한 사상적 바탕에 서 있는 로마교 교리의 핵심은,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세우신 교회는 매우 독특한 단체로서 항상 지속적으로 결함이 없는 단체요, 언제나 존재하며 가시적으로 누구나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 교회가 모든 다른 기관들, 시민법적인 것들 혹은 교회적 기관들과 구분되는 것이요 오류에 빠지지 아니하고 언제나 진리만을 반포하는 기관으로 믿고 있다.

즉 그들은 그리스도의 하나의 교회는 언제나 가시적이요 무오한 로마의 교회와 교제 속에 들어와야 한다는 것을 증명코자 노력했던 것이다. 로마의 교회만이 모든 교회의 어머니요 지배자이며 그리스도의 사제이다. 따라서 그의 교회의 군주인 로마의 주교에게 복종해야 함을 증명코자 한 것이었다.

반면 개신교는 교회를 그리스도에 의해 제정된 독특한 기관으로서, 일반적 혹은 전적으로 결함이 없다고 여겼다. 개신교 역시 교회는 결코 존재함을 멈추지 않는 것으로 믿는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명백하게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로마교회가 주장하듯 언제나 가시적이라고 예언하거나 약속하거나 시사한 그 어떤 주장도 성경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물론 주님의 이 교회는 언제나 있는 것이어야 한다. 깨어지거나 지속적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공적으로 조직된 기관이요 모든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그리스도의 교회로서 의연하게 서 있을 것이다. 그리고 개신교는 로마교회가 주장하는 것과 같이 교회가 무오하다는 것을 언급한 어떤 근거도 성경에 없음을 믿는다.

또한 교회는 언제나 무오하게 존재할 것이며 지상에 하나의 단체로서 가시적으로 사람들이 언제든지 쉽게 볼 수 있으며, 어떤 잘못이나 오류가 섞임 없이 항상 하나님의 진리만을 선포하는 교회로 존재할 것이라고 주장할 만한 성경적 진술이나 역사적 사실이 없음을 인정한다. 그리고 그와 같은 사실이 로마 교회 혹은 교황과 연계된 교회에 적용되는 것이 아님도 주장한다.

이와 같은 유형에 대한 질문들은 특성상 거룩한 성경 말씀을 살펴봄으로 말미암아 올바르게 결정될 수 있음이 명백하다. 개신교나 로마교가 다 하나님의 말씀임을 인정하고 있는 성경이, 교회에 대해 적절하게 정의하거나 설명하는 것이 무엇인지 조사함으로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언급하신 혹은 약속하신 교회의 특권들과 권리들과 관련된 것들도, 성경에서 규정한 것을 살펴봄으로서 결정할 수 있다.

실로 이러한 논쟁들은 본질적으로 다음의 질문을 하게 한다. 성경이 근거하는 교회에 대한 정의 혹은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는 교회에 대한 설명은 무엇인가? 교회에 대한 적절한 정의 또는 설명을 살펴보는 것은 종교개혁자들과 로마교회 사이에 있는 논쟁을 눈여겨보지 않을 수 없게 한다. 개혁파 교회들의 신앙고백서들은 다 성경적 교리의 중요한 조항으로서 교회에 대한 제대로 된 정의 혹은 설명을 제시하고 있다.


◈교회란 무엇인가에 대한 논쟁

교회에 대한 적합한 정의 혹은 설명이 무엇인지 성경으로부터 찾아 그 중요한 것을 분명하게 제시하기 위해, 나는 종교개혁자들과 로마교회주의자들 사이에 있었던 논쟁의 주도적인 부분이었던 것을 하나 언급하고자 한다.

로마교회주의자들은 다음의 논리를 주로 사용했다. 합법적 사역자가 없는 곳에는 참 교회가 없다는 것이었다. 개신교도들은 합법적 사역자들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참 교회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에 대한 개혁자들의 답변은 본질적으로 이것이었다. 참 교회가 있는 곳에는 합법적인 사역자가 언제나 있거나 있게 된다. 개신교도들은 참 교회이거나 아니면 교회의 참 지체이다. 그러므로 개신교도들이 적법한 사역을 올바르게 가지고 있거나 가지게 된다는 것은 당연해진다.

따라서 양측의 모든 논쟁은 근본적으로 '참 교회가 무엇이냐?' 라는 질문에 달려 있다는 것이 명백하졌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교회 참 속성에 대한 성경적 견해, 본질적인 특질들, 그리고 반드시 있어야 할 필요한 특징들에 대한 성경적인 견해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달려있는 것이다.

특히 모든 가능한 상황 속에서 적법한 사역을 가지는 것이 본질적인 것인가? 따라서 교황주의자들은 교회의 요소들을 가지고 정의를 내리되, 만일 성경이 허용하고 있거나 증명한다면 그 논쟁을 공식적으로 혹은 실질적으로 그들이 선호하는 입장으로 결론을 내리며 종식시킬 수 있도록 시도했다.

교황주의자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교리문답서에 보면, 교회란 '동일한 신앙을 고백하고 동일한 성례에 참여하며 그리스도의 대리인인 가시적 수장의 지도 하에 있는 합법적인 사제에 의해 다스림을 받는 모든 신실한 신앙인들의 회중'이다. 교황주의의 위대한 지도자인 Bellarmine 추기경은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Coetus hominum ejusdem Christianae fidei professione, et eorundum sacramentorum communione colligatus, sub regimine legitimorum pastorum, acpraecipue unius Christi in terris Vicarii Romani Pontificis(동일한 기독교 신앙고백 가운데 동일한 성례들의 교제로 함께 모이고 합법적인 목자들 특히 한 분 그리스도의 지상 대리인 로마 교황의 다스림을 받는 한 공동체)".

그는 여기에 즉시 덧붙이기를 매우 진실로 그리고 매우 단순하게(very truly and very simply) 다음과 같이 말했다. "Ex qua definione facile colligi potest, qui homines ad Ecclesian pertineant qui vero ad eam non pertinent(이 정의로부터 쉽게 추론할 수 있는 바, 교회에 속한 사람들은 진정 그것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다)".

우리가 수용할 수 있다면 이 정의는 분명히 몇 가지 중요한 질문들을 결정적으로 해소시킨다. 그러나 개신교도들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개신교도들은 늘 그렇듯 그 정의에 들어가 있는 다른 모든 요소들을 위한 성경적 증거들을 요구한다. 그들은 그것들 중 몇몇이 어떤 근거도 제시될 수 없다고 확신했다. 물론 이것은 우리에게 이 질문을 던지게 한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교회관은 정확하게 무엇인가? 어떤 개념들이 성경이 인준하고 있는 것이며, 우리의 정의 혹은 설명 속에 무엇을 담아내기를 요구하는가?

 

◈성경에서 말하는 교회란?

성경에서 일반적으로 교회라는 말로 번역된 에클레시아(εκκλησια)는 때로 회중 혹은 어떤 유형의 회집된 사람들의 모임에 적용되는 단어이다. 예를 들면, 에베소의 연극장에 모인 격앙된 군중을 묘사하는데 이 단어가 사용됐다. 그러나 이 단어는 더 제한적이거나 특별한 의미로 사용됐다. 예수 그리스도와 특별한 관계를 가진 사람들의 사회 혹은 집단을 묘사하는데 쓰인 것이다. 심지어 이런 제한적 의미로 사용됨에 있어서도, 우리는 그 단어가 매우 다른 양상들로 적용되고 있음을 발견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모든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라는 말씀, '그는 교회를 사랑하사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내어주셨다'는 말씀, '그가 교회를 영광스러운 교회로, 어떤 흠도 허물도 없는 교회로 나타내셨다'는 말씀, '우리가 전체 회집과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교회'라는 말씀을 각각 읽을 때, 우리는 여기 사용된 에클레시아라는 단어가 (우리 신앙고백서가 사용하고 있는 용어) 서술형으로 쓰였음을 조금도 의심할 수 없다. 즉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 앞에 한 가지로 모이게 될 모든 택함 받은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측면에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앞에 언급한 본문들에서는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에 의해 선택함을 받아 결과적으로 구원함을 받은 자들만 교회 안에 포함되는 자들로 간주된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택자들의 전체 모임에 구성되는 자들은 믿는 자들과 구원받은 자들이요, 그들은 그리스도를 통해 믿음과 구원에 이르도록 택함을 받은 자들이며 때가 되면 그 모임에 가담하는 자들뿐임을 읽게 된다.

더욱이 읽은 본문에서 사용된 그 단어의 참된 의미가 그런 것이라면, 단어의 특성상 그리고 일반적 범위와 대상 차원에서 볼 때 그 단어가 내포하고 있는 다른 의미들이 무엇이든, 실로 그 단어의 한 가지 뜻은 분명 이것이다. 즉 이끌며 안내하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이 부분을 남은 시간 동안 좀 더 생각하고 가다듬어야 할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개신교 목사들은 교회를 불가시적인 것으로 늘 말해왔다. 그들이 진정 드러내고자 하는 그 개념은 분명 한 가지이다. 생명에로 택함을 받은 자들은 확실하게 알려질 수 없다는 것이다. 혹은 개별적으로 사람들에 의해 인식될 수 없는 자들이다. 심지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믿는 자리로 나와 구원의 길로 들어서게 된 후에도 그 동료들 혹은 특히 그 모임을 구성하고 있는 자들에 대해 정확하게 그리고 확실하게 가시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방금 설명한 것과 같이 개신교도들로 하여금 불가시적 교회론을 주장하게 된 원인은, 로마교회가 가시성을 견지하고 그것은 외형적 조직을 포함한 것을 교회의 속성에 본질적인 요소로 간주했고, 이 견해 위에서 자신들이 주장하는 중요한 결말을 도출했기 때문이다.

만일 가시성이 교회 본성에 본질적인 것이라면, 사도 시대 이후부터 공적이고 깨뜨릴 수 없는 계승이 이어지는 집단으로서 지상에 반드시 존재해야 하는 것이 된다. 그것은 곧 그리스도의 참 교회로서 추정이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 위에 로마교회는 항상 로마의 교회의 선언들을 세워나감에 있어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한편 성경 안에서 만들어진 정의의 방편에 의해, 개신교도들은 한 몸 혹은 불가시적 교회로써 택자들의 전체 모임에만 적용 가능하다는 불가시적 교회를 주장하게 된다. 이는 교황주의자들이 가시적인 기관으로서 교회의 존엄성과 권위 및 무오성 교리를 내세웠기 때문이었다. 개신교도들은 앞에서 언급한 성경 본문들에서 찾아낸 교회라는 단어가 택함을 받아 궁극적으로는 구원받게 된 모든 사람들의 수를 지칭하는 단어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충분히 중명하면서, 성경만이 우리에게 불가시적 교회를 제시할 수 있다고 결론지었다.

그러므로 앞에서 설명된 입장에서 가시성을 추론하는 것은 오직 교황주의자들의 목적 달성을 위한 논리에만 해당되며, 적어도 그 주장은 성경에서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는 교회라는 단어가 보여주는 주도적 측면에서 볼 때 그리스도의 교회의 본질적인 특질은 아니다.

그렇다면 논의의 중요한 주제는 이것이다. 성경은 생명을 얻기로 예정되어 궁극적으로 구원함을 받게 되는 자들로만 구성된 교회, 즉 앞에서 설명된 불가시적인 교회를 말하고 있는 것인가, 아닌가? 개신교도들은 그렇다고 보지만 교황주의자들은 부정한다.

앞에서 인용한 본문들은 이것을 증명하고 있다. 그것들을 설명하고자 수고한 벨라마인과 다른 교황주의 저자들의 시도들은 전적으로 실패했다. 이 사람들은 실로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교회는 가시적인 것 또는 사람들의 관찰에 만져질 수 있는 교회를 말한 것이다.

그러나 개신교도들은 성경이 우리 앞에 제시하고 있는 것은 가시적 교회뿐 아니라 불가시적인 교회도 제시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 논쟁거리로 삼지 않았다. 교황주의자들이 흔히 말하는 것과 달리, 개신교도들은 이 특성들은 두 가지 독특한 혹은 구별되는 주제들이지, 두 가지 다른 유형의 교회들을 의미한 것이 아니었다. 다만 두 가지 다른 양면 혹은 본질적으로는 하나요 같은 것이지만 두 가지 측면이 있는 것으로 묘사하였다.

 

◈가시적 교회에 대한 성경적 증거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보편적 혹은 일반적인 가시적 교회의 존재에 대한 성경적 증거와 그 개념을 이끌어내 발전시킨 방식(the mode)을 간략하게나마 언급하고자 한다.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특정 장소에 위치한 특별한 교회들을 자주 접하게 된다. 그리고 특별한 지역의 교회들의 이름들을 만난다. 이러한 교회들은 가시적인 집단들임에 틀림없다. 그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식구들에 의해 구분되는 외적 표시를 지닌 교회들인 것이다.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 2:47)"는 말씀을 읽을 때, 이는 구원받은 사람들이 속하게 되는 집단이 이미 가시적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내포한다.

하나님나라 혹은 그리스도의 나라는 성경에서 종종 교회와 동일시하여 말하고 있다. 인용한 사도행전에 언급하고 있는 경우 주님께서 교회에 더해 주신 자들과는 엄연히 구별되는 특징을 가진 사람들이 포함돼 있다는 사실을 그러한 표현이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 둘을 화해시키는 것은 어렵지 않다. 어원학적으로나 사실적으로나 에클레시아는 총 회집 혹은 세상으로부터 부름 받은(πλητοι) 자들의 회중인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을 세상으로 불러내 그를 믿게 하시고 그의 권위에 복종케 하신다. 그리고 그 자신이 머리이시고 오직 그의 율례에 의하여만 다스림을 받는 조직된 집단의 일원으로 함께 연합시키신다.

성경을 통해, 우리는 분명한 한 구분을 할 수 있다. 그것은 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의 부름 사이 혹은 효과적 부름과 비효과적인 부름 사이의 구분이다. 다른 말로 사실 사도 시대에 이미 발생한 것과 같이, 그리스도의 부름에 순종한다고 고백하는 자들은 외적으로 플레토이의 집단에 합류한다는 것을 성경에서 충분히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아직 그들이 실제로는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그들의 구세주로 온전히 영접하지 않았거나 또는 마음으로 그의 권위에 복종하였든 외부적으로는 보이는 교회에 합류하게 되는 것이다.

효과적으로 부름을 받았고 은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개인적으로 자신의 구세주요 주인으로 영접할 수 있게 된 자들은 반드시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개인적인 고백과 그의 권위에 복종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기존 교회에 합류함으로서 해야 하는 의무들을 함께 감당하며 그리스도께서 수여하신 특권들을 즐기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뜻이요 요구사항이었다. 그러나 어떤 초강력한 수단을 만들어 신실하고 참되게 이 신앙을 고백하는 자들과 스스로를 속이는 자들 혹은 속마음과는 전혀 다른 고백을 하는 자들 사이를 지구상에서 정밀하게 구별하게 만드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뜻하신 바가 아니다.

따라서 복음 설교를 통해 그리고 사도들의 수고를 통해서, 일반 대중들과 가시적으로 구분되는 사람들의 모임이 탄생한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으며 그에게 복종한다는 개인적인 고백과 집단적인 고백으로 탄생된 모임이다. 이 모임에 외적으로 가입은 했지만 실제로는 진짜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가 아니었음이 금방 나타난 것이 사실일지라도 그런 현상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참된 플레토이에만 적법하고 엄격하게 적용되는 같은 이름들과 표시들을 가지는 자들은 필연적으로 복음에로의 초청에 순종한다고 고백한 자들의 모임에 가입된다. 그들은 결과적으로 가시적이고 외형적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과 관련을 맺게 된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불가시적인 교회와 구별되는 가시적 교회의 실재와 개념이 제기되는 것이다. 가시적 교회는 집단적으로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입으로 고백하는 자들, 그리고 사람들에 의해서 인식될 수 있는 외적 표시들을 가지고 있는 자들로 구성된 교회이다.

이들은 참되게 그리스도를 따르며 창세 전에 하나님에 의해 선택된 자들, 때가 되어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몸에 붙은 지체로서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들, 그리하여 마침내 그의 영광을 함께 누리게 되는 자들과는 명백히 구분되는 자들이다. 불가시적 교회와 구분되는 가시적 교회라는 개념은 비록 그것이 다른 교회를 말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특정 지역이나 도시에 위치한 교회나 교회들을 말할 때 성경에서 가장 명백하게 드러나는 개념이다.

그러나 공교회 개념 혹은 보편적 교회 개념이 가장 명백하게 그리고 가장 적법하게 적용되는 교회는 불가시적 교회 개념이다. 이 불가시적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모든 시대, 모든 족속, 모든 열방의 사람 개개인들을 포함하는 교회이다.

일반적인 그 개념을 동일하게 가시적 교회에도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은 부당한 처사가 아니다. 지금 복음 시대에 있는 교회는 율법 아래에 있었던 전과 같이 한 특정한 나라에 한정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교회 혹은 보편적 가시적 교회는 우리의 신앙고백서에 명시된 것처럼 '전 세상을 통해 참 종교를 고백하는 자들과 그들의 자녀들'로 구성되는 교회를 말한다.

이미 지적했듯 로마교회주의자들이 흔히 주장하는 것은 가시적인 교회와 불가시적인 교회에 대한 개신교도들의 주장이, 성경은 한 교회로의 연합 혹은 하나의 교회를 말하기보다 두 개의 교회로 만든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비판은 잘 알지 못하는 데서 기인한다. 개신교도 하나의 교회를 말한다. 다만 두 가지 다른 측면이 있음을 깊이 생각한 것이다. 즉 내적인 것과 외적 양면성이다. 둘은 다른 영역을 차지하고 있는 교회가 아니라, 한 영역 안에 있다.

가시적 교회는 불가시적 교회를 포함하거나 구성하고 있다. 비록 그 교회의 나타남이 완전하지는 않지만, 이 교회는 또한 열등한 요소들을 지니고 있다. 즉 가라지가 존재하는데 때가 되면 알곡으로부터 분리될 것이다.

 

◈보편적 교회의 구성원은?
그렇다면 성경이 과연 공교회 혹은 보편적 교회가 영생을 얻기로 작정되어 궁극적으로 구원함을 받게 된 그런 자들로만 구성되는, 그리하여 어떤 측면에서는 위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불가시적인 특성을 지닌 교회를 말하고 있는가? 이것이 핵심이다. 만일 그렇다면 그 증거는 충분하다.

이것은 명백히 에클레시아라는 단어의 원칙적 의미에 부착돼 적용돼 온 주도적 의미로서 필요성에 의해서든 형편에 의해서든 종속적인 것으로 간주돼야 한다. 만일 이것이 즉시 증명된다면 정기적인 외형적 조직을 포함하고 있는 가시성은 그리스도의 교회의 본질적 특질로 붙들 수 없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교회의 특권들과 권리들을 가시적 집단 혹은 가시적 집단의 특정한 분량에 굳이 적용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 논쟁의 요점은 이렇게 정리될 수 있다. 로마교회주의자들이 말하는 교회는 결함이 없는 완벽한 교회(indefectible)이며, 또한 결코 존재하기를 멈추지 않을 교회이다. 개신교도들도 이것을 동의한다.

그러므로 벨라마인은 "notandum est multos ex nostris tempus terere, dum probant absolute Ecclesiam non posse deficere: nam Calvinus, et eaeteri haeetici id concedunt: sed dicunt, intelligi debere de Ecclesia invisibili(우리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이 일로 시간을 허비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그들은 교회가 절대적으로 완전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실로 칼빈과 다른 이단들은 이에 주눅이 들어 교회를 보이지 않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고 말했다.

벨라마인이 말한 것과 같이 칼빈과 다른 이단들이 이 점을 인정하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시적 교회에 대한 것으로 이해돼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성경으로부터 입증될 수 있는 교회의 무결점을 말할 수 있는 한 가지 측면은 이것이다.

즉 그리스도께서 아버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올라가셨을 때로부터 항상 그곳에 좌정해 계시다가 다시 오시게 되기까지, 지구상에는 구원에 이르도록 택함을 받은 혹자들이 항상 존재했고 존재하고 있으리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들이 지구상에 머무는 동안 구원을 준비하는 자들이 항상 있을 것임을 뜻한다는 측면에서 그렇다. 이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지구상 모든 시대에 교회가 서 있고, 명백하게 나타나 있을 것이라는 사실 그 이상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개신교도들은 이 주제에 관하여 성경의 약속들이나 설명이 내포돼 있음을 입증하는 것 말고는 그 무엇도 아니라고 주장한다. 어쨌든 성경의 모든 진술들이 사실이라는 것을 증명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성경의 모든 예언과 약속들은 성취됐다. 비록 이것을 실감해온 것 그 이상이 아무것도 없어도 말이다.

로마교회주의자들은 이 무결점의 교회가 가시적이라고 주장한다. 그 교회가 존재하는 동안은 반드시 가시성을 소유해야 한다는 것이다. 개신교도들은 가시적 교회의 존재를 인정하지만, 택자들로만 혹은 믿는 자들로만 구성된 교회가 아니라고 믿는다. 심지어 '전 세계를 통틀어 참 종교를 고백하는 자들과 그들의 자녀들로만 구성된 보이는 공교회'에 대해 성경은 모든 시대에 계속 존재하거나 어느 특정한 나라에 존속한다는 것을 부정하고 있다.

그리고 가시적으로 서 있는 조직된 교회 기관 또는 사람들의 눈에 그리스도의 참된 교회로서 보여지는 교회가 항상 존재한다는 것을 성경은 부정하고 있음을 믿는다.

오히려 개신교도들은 성경에는 율법 시대에도 그러했던 것과 같이 바알 신상에게 절하거나 무릎을 꿇지 아니한 7천 명의 남은 자들이 있었지만, 선지자 엘리야가 알아보지 못했던 것처럼 신약 시대에도 어떤 시기 동안 참된 교회가 제대로 갖추어진 보이는 교회의 모습을 가지지 못한 상태로 존재한다는 것을 시사하는 말씀이다. 그런 사례들은 성경에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고 믿는다.

로마교회주의자들은 더 선언하기를 무흠한 가시적 교회-지금 결점이 없는 교회이며 그들의 입장에서 항상 보이는 교회라고 하는 이 가시적 교회는 늘 존재하고 있고 흠이 없다고 주장한다. 이 교회는 언제나 어떤 오류나 뒤섞임 없이 순수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교회라는 것이다. 교황주의자들도 이러한 입장을 내세우고자 성경의 진술과 약속들을 찾아 주장하려고 무단히 애를 썼다.

그런데 문제는 성경의 그 약속들이란 어느 특정한 가시적 교회와 전혀 연관이 없다는 것이다. 가시적인 공교회와 관련이 없고, 그 교회의 어떤 지교회하고도 연관이 없으며, 그 말씀들은 다 하나님의 참된 백성들을 지칭하고 있는 것들이다.

심지어 그들과 연관지어 언급한 그 설명들이나 약속들은 모든 오류로부터 완전히 자유한 것이 아니며, 신앙의 모든 면에서 그들 사이에 완전한 통합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조차 없는 것들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시된 뜻에 대한 지식에는 어떤 오류가 섞여질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사람들을 능히 영생으로 이끌기에 충분한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영적인 설명들을 함께 적용하고 살펴보게 될 때, 이러한 일반적인 생각들은 오류의 원인이 무엇인지 설명해 준다. 그리고 로마교회가 논의의 일반적 주제로서 이 주제 주변에 얽혀 있는 궤변적 성향이 왜 존재할 수밖에 없는지를 설명한다.

교회의 무결함, 가시성 및 무오성에 대한 그들의 입장에서 우리가 그들의 일반적 견해에 동의한다고 할지라도, 그 교회의 최고 권위와 무오성을 내세우는 것을 보면 마치 로마교회가 그리스도의 참된 교회이거나 모든 교회들의 어머니 교회요 안주인인 것처럼 주장하는데, 이 원칙들을 로마교회에 적용하기 전에 먼저 설명되지 않으면 그냥 묵과할 수 없는 간격이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관찰들은 그 의미와 적용을 설명하는데 도움을 준다. 특히 이 주제에 대해 우리의 신앙고백서가 제시하는 성경적 근거를 납득하게 도와준다. '이 보편적 교회는 때로는 더 잘 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덜 보이기도 한다. 그 보편적 교회에 속한 개 교회들은 복음의 교리가 가르쳐지고 수용되는 것에 따라, 그리고 규례들의 집행에 따라 더 순결하기도 하고 덜 순결하기도 하다.

또한 공예배가 어떻게 진행되는지에 따라 더 순결하기도 하고 덜 순결하기도 한다. 하늘 아래 가장 순결한 교회들도 혼잡과 오류를 범한다. 어떤 교회들은 극도로 타락하여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라 사단의 회가 된다. 그럼에도  이 지상에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을 예배하는 교회가 언제나 존재한다.

회집을 뜻하는 에클레시아라는 단어의 기본 어원적 의미로부터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이다. 즉 그 단어가 참된 신자들 혹은 신앙을 고백하는 신자들의 전체 모임을 지칭하는 것으로 우선 적용해도, 이 전체 모임의 한 지점 혹은 지교회에 계속해서 그 개념이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사례들은 성경에 반복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예를 들어 예루살렘이나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라는 말을 읽을 때 그렇다. 성경에는 에클레시아가 하나의 회원을 지칭하는 사례가 전혀 없다고 확신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종교적 예배를 위해 모이는 한 지교회와 종체적으로 신앙을 고백하는 믿는 자들의 전체 모임 사이, 중개자적인 그 어떤 기관을 지칭하는 예가 전혀 없는 것이다.

이는 독립교회 혹은 회중교회 견해를 지닌 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입장이다. 몇몇 장로회주의자들, 예를 들면 애버딘의 캠벨 박사와 같은 이들도 그 견해를 지지한다. 성경에서 가장 흔히 사용하고 있는 에클레시아라는 단어가 양면성을 다루고 있음은 분명하다.

성경에는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하여 모인 한 회중에게 에클레시아라는 단어가 적용되고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여러 사례들을 보면 거리상 사방에 흩어진 다른 회중들에 대해서 말할 때 그들 역시 그 교회라고 말하지 않고 그 지역에 있는 교회들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용법이 성경에서 보편적이었다고 단정하지는 않는다. 즉 교회에 대한 그 용어가 한 지역 교회에 적용하는 근거 없는 일반적 원리로서 제시하는 타당한 토대를 세우는 보편적인 용법은 아닌 것이다. 또는 각각 지교회의 완전 독립성을 내세우는 근거로 사용하기 좋은 원리라고 인정하는 것이 아니다.

일상적 상황에서 개교회도 하나의 교회로서의 목적을 달성해 가기에 충분하다는 근거로 내세우는 일반적 원리로 사용된 용법이라고 인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웨스트민스터 총회가 마련한 교회정치 형태에 분명하게 제시돼 있다. '성경은 많은 지교회 회중들은 한 장로회 정치 체제하에 놓여 있는 것임을 붙들고 있다.'

나는 이 제안이 예루살렘과 에베소의 사례들 가운데서 충분히 예증되는 것들이라 생각한다. 오순절 성령의 부어주심으로 사도들의 설교를 통해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고백한 예루살렘의 회심자들의 숫자를 생각해 보자. 우리는 그들 전체가 공예배를 위해 한 장소에 다 모이기에 익숙해진 자들이었다고 주장할 수 없다. 그들은 구별된 회중들로서 다른 장소들에서 각각 함께 모였다고밖에 볼 수 없다.

몇 가지 측면에서 회중주의자들에게 옹호적인 주장을 한 모세임(Mosheim)은 장로회주의 입장이 아주 합당하다고 주장한다. 실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서 그 진리를 확실하게 못 박은 유명인사가 됐다.

"Aut nihil ego video, aut certum hoc est, amplissimam illam, quam Apostoli Hierosolymis collegerant, Christianorum multitudinem in plures minores familias divisam fussie, singulisque his familiis suos presbyteros, suos ministros, suos conventuum sacrorum locos fuisse(혹은 나는 보는 것이 전혀 없거나 혹은 예루살렘의 사도들이 교훈한 다음 사실이 확실하거나 할 것이다. 대다수 기독교인들은 많은 작은 가족들로 분화되었으며 그 각각의 가족들에게는 그들만의 장로들, 그들만의 사역자들, 그들만의 거룩한 처소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 개교회 회중들은 예루살렘에 있는 그 교회로서 반복적으로 언급되었다. 여러 회중들로 구성된 이 교회는 사도들과 장로들로 구성된 한 체제의 감독 하에 놓여 있는 자들로 묘사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에베소에서 3년간 사역한 사도 바울의 사역으로부터도 그 도성에 여러 회중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도 그들은 계시록에 보면 에베소에 있는 그 교회 혹은 에베소 교회(사본에 두 가지 형태로 읽을 수 있는 근거가 있음)로 묘사되어 있는 것이다. 그들은 사도행전 20장에 있는 바울의 고별사에서 사람들의 연합체의 감독 하에 있는 양무리로서 묘사되고 있다. 바울은 그 연합체를 장로들과 감독들로 구성된 모임으로 말하고 있다.

이러한 근거 위에 나는 성경에는 단수로 사용된 교회라는 용어가 한편 개 교회와 다른 한편으로 보편적 교회 혹은 공교회 사이에 있는 어떤 중개자에게 적용된다는 충분한 증거가 있다고 생각한다. 즉 외적 교제와 정치체제 하에 연합된 회중들의 숫자에게 적용되는 단어인 것이다. 물론 그러한 회중들의 연합은 합법적이고 타당한 것이다. 어떤 범위로 나아가든 연합 혹은 통합은 상황이 어떠하든지 합법적인 것으로 말하고 있다. 한 교회의 명칭과 한 교회에 해당되는 모든 일반적인 원리들과 규범들은 통합된 회중에게도 적용이 되는 타당한 것이다.

 


2. 교회의 표지

 

참된 교회의 기호 혹은 표지에 대한 주제는 개신교도들과 교황주의자들 사이에 있는 논쟁 가운데 중추적 자리를 차지한 것이었다. 그 주제는 가시적 교회와 그 교회의 다른 지교회 혹은 분파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다. 이 주제는 본질적으로 매우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교황주의자들이 로마교회의 선언들을 지지하기 위해 이 주제를 근거로 내세우고 있는 논쟁을 반박하는 데 필요하다.

물론 이것이 교리나 정치, 예배와 훈육에 있어 가장 순결한 고백적이고 가시적 교회임을 결정하는 내용임은 분명하다. 그 모든 요소들이 다 하나님 말씀에 의하여 인준돼야 하는 입장과 온전히 일치한다는 측면에서 그렇다. 하나님 말씀이 조직된 기관으로서 가시적 교회의 원칙적인 기능을 진리의 기둥과 터로 가르치고 있는 바와 같이,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진리를 지지하고 굳게 붙들어야 하는 기관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권위와 그의 말씀에 복종한다고 공적으로 고백하며 조직된 단체라면, 어느 모임이든 그 모임을 그리스도의 참된 교회라고 말하는 것을 거부할 수 없음이 사실이다. 그리고 이러한 근본적 진리들과 죄인들의 구원을 위해 반드시 의존해야 할 지식과 신앙이라는 바탕 위에 세워진 모임을 그리스도의 참 교회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들은 분명 참된 근본 원리들로서 그 문제에 적용되는 것이다. 그 적용에 큰 문제는 없다.

그러나 교황주의자들이 교회의 기호나 표지로서 이 주제에 대해 확고하게 내세우고 이로부터 끄집어낼 수 있는 중요하고 실천적인 결론을 내리고 있기 때문에, 이 점에 있어 그들의 왜곡된 주장을 간략하게나마 살펴보는 것이 적절하다고 본다.

로마교회자들이 로마의 교회가 유일한 참 교회가 된다고 주장할 때, 이는 그 교회 밖에 구원이 없음을 뜻한다. 그리고 로마 교회가 모든 교회들의 어머니요 유모가 되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자들과 그의 가시적 교회의 모든 회원들은 다 로마의 교회에 순복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러한 주장의 토대를 다지며 세워가도록 부름 받은 자들이다.

그 같은 주장을 위한 합법적 근거들은 성경의 진술 속에서만 찾아야 한다. 왜냐하면 첫째로 그러한 주장은 특성상 직접적으로 하나님 자신의 권위보다 다른 근거를 제시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둘째로 논쟁에 있어 두 기관 사이에 유일한 공통점은 성경에서만 찾아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견해의 지지자들과 반대자들이 견지하고 있는 유일한 표준은 성경에서 찾아져야 한다. 그러므로 논쟁에 있어 유일한 합법적 출발점을 이 두 사이에서 분명하게 솔직히 제시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교황주의자들은 성경의 근거에 의해 직접 그 문제를 다루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첫째로 그들이 가진 고집스러운 생각 때문이다. 그들이 그럴 듯하게 내세우는 것이, 무엇이든 성경은 그들의 주장에 대해 충분한 자료들을 제공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둘째 이유는 그런 논쟁에 진입할 경우 실질적으로 성경의 의미를 살피는 일이 매우 중요함을 그들 스스로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즉 중요한 이 질문을 해소시키기 위해 그들의 조직을 가동하여 개별적으로 사람들이 나서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뿐 아니라, 양측에서 제기되는 다른 문제들까지도 결정을 내림에 있어 합법적으로 고용해야 하는 동일한 과정을 밟아야 하기 때문에 선뜻 그렇게 할 입장이 못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 주제를 다룸에 있어 항상 다른 과정을 선호한다. 즉 그들은 믿을만한 동기들을 찾아 나선다. 예를 들어 성경에 의해 제시된 일반적으로 고려되어야 할 사항들, 그리스도의 교회에 대한 특질 혹은 특성들이 있다고 제시되는 분명한 견해들을 앞세우는 것이다.

세상에서 이러한 특질을 다른 교회들에게 적용할 때, 그것은 로마교회의 독특한 주장들을 지지하고 동맹하는 자들에게만 해당된다. 로마 교회와 교제가 이루어지지 않고 그들의 법에 순복하지 않는 모든 다른 고백적 기독교인들은 배제된다.

그들이 이 주제에 대해 대체로 상세하게 부연 설명할 때, 그리고 그 주제를 상세하게 나타내고자 시도할 때, 로마의 교회가 좋아하는 주장들을 사람들이 선호한다는 전제 하에 대중적 지지를 받기 위한 모든 추측 혹은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는 것이다. 로마 교회는 그 목적을 위해 그들과 다른 교회 공동체의 삶을 살아가는 자들과 대조하면서 참 교회의 표지들을 여러 개 제시하는 데 매우 익숙한 자들이다.

예를 들어 벨라마인은 15가지 표지들을 제시한다. 예를 들면 일반적으로 로마가톨릭교회를 지칭하는 보편성인데, 이것은 로마교의 대적자들도 그렇다고 인정한다. 고대성. 침범된 적 없는 영속성 또는 수많은 신도들, 사도들로부터 지금까지 로마교회가 감독을 계승하고 있음, 고대 교회와의 교리적 일치성, 그들의 신도들과 교회 수장 간의 연합성, 교리의 거룩성과 효력성, 삶의 거룩성, 기적들의 영광, 예언의 빛, 대적자들의 고백, 교회 반대자들의 불행한 결말, 교회가 누리고 있는 더할 수 없는 행복감 등이다.

그러나 로마교황주의자들이 그 문제를 더욱 간결하게 다룰 때 또는 일반적으로 이 주제의 근본과 증명의 유효성을 논하는 것 때문에 더 정밀하게 다루어야 할 때, 그들은 언제나 참 교회의 표지로서 기꺼이 네 가지를 제시하는 데 만족한다. 그 네 가지는 니케아 회의나 콘스탄티노플 신경에서 교회에 준 표지들로부터 취한 것들이다. 즉 통일성, 거룩성, 사도성 및 보편성이다.

논쟁의 본질은 이것이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성경에 묘사되어 있다. 신경에는 하나요 거룩하며 사도적이요 보편적인 교회로 묘사한다. 로마 교회는 하나이며 거룩하고 사도적이며 보편적이다. 그러나 다른 교회 또는 고백적 신자들의 모임은 그러한 참된 교회의 표지들을 나타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로마 교회나 다른 교회들이 주장하는 이 표지의 실제적이고 상세한 적용 문제를 여기서 다루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의 교회와 함께 적용되는 문제를 다루고자 한다.

이미 우리는 교황주의자들의 주장에 내포된 몇몇 모호성과 궤변들을 지적했었다. 그리고 그들 교회의 무결함과 영구적 가시성 및 무오성에 대한 논쟁도 다루었다.

우리도 교회의 표지 문제와 관련해 내세울 수 있는 유사한 면들을 가지고 있다. 개신교도들도 일반적으로 니케아 신경을 건전하고 정통적인 가르침으로 수용한다. 그리스도의 교회가 하나요 거룩하며 사도적이고 보편적이라고 고백하기를 결코 거부하지 않는다. 그러나 개신교도들은 먼저 이 표지들을 교황주의자들이 취한 맥락과 같은 의미로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적용하는 방식도 로마 교회의 그것과는 다르다.

둘째로 개신교도들은 이 표지들이 그리스도의 교회에 부합하는 것으로 성경이 인준하고 있다는 로마 교회의 주장에 대해 지지하지 않는다. 이것들은 두 가지 구별된 입장이다. 그 주제에 대한 구체적 논의는 따로 분리해 다루는 것이 적절하다. 그러나 몇 가지 특징들에 있어, 지금 우리가 제시하고 있는 바와 같이 함께 다루는 것도 유익할 수도 있다.

그리스도의 교회의 통일성은 의심의 여지 없이 성경에 묘사돼 있다. 그리고 그의 참된 종들에게도 해당되는 입장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라고 시인하는 모든 자들은 고백과 삶의 모습에서 서로 하나임을 고백하고 나타내야만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교회 혹은 그리스도의 교회들에 속한 자들이라고 시인하는 모든 기관들도 마찬가지로 통일성을 고백하고 나타내야 한다.

이 점을 인정하는 개신교도들 사이에서는 여러 측면에서 하나 됨을 만드는 일에 큰 문제가 없다.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하는 개인들 안에서도 전체적으로 하나라고 말하는데 문제 될 것은 없는 것이다. 그들 모두 하나되어야 할 책임을 지니고 있다. 그들 신경의 근본적 조항들 안에서 참 성도들의 연합 혹은 하나 됨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리고 주도적인 요소들과 특징들 안에서 하나 됨을 표현하는 일은 어려운 것이 아니다.

진짜 그리스도의 교회들인 모든 기관들 혹은 그의 가시적인 보편 교회에 속한 기관들은, 교리와 실제에 있어 근본적 일치 또는 통일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계시하시고 그의 교회에 부탁하여 선포하게 하신 근본적인 교리들을 고백함에 있어 하나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주님의 이름으로 조직된 단체들을 특징짓는 예식들을 거행함에 있어서나 임무 수행함에 있어서도, 같은 통일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권위에 복종한다고 고백함에 있어서도 서로 하나이다.

여기서 내가 주목하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이론들을 설명한다든지 교회의 통일성에 대하여 로마 교회가 주장하는 논쟁에 답변한다는 것 자체가, 계시된 진리 조항들 가운데 근본적으로 중요한 요점을 시인하거나 구별성의 존재를 전제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구별성은 흔히 어떤 것들은 근본적인 것들이지만 다른 것들은 아니라고 말함으로 발생된다.

이러한 기본적 전제 위에서, 교황주의자들은 일반적으로 이 구분을 부정한다. 그러나 개신교도들은 일반적으로 인정한다. 이 구분을 가지고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들에게 적용되는 것들로 앞에서 언급한 중요한 진리들과 함께 교회의 통일성을 적용함에 있어, 교회의 표지가 무엇이냐와 관련해 진짜 관련성 있는 유일한 질문은 다음과 같다.

성경에 기술된 교회의 통일성에는, 모든 기독교인들 사이 신앙과 실제에 관한 모든 문제에 있어 전적으로 일치(uniformity)함을 함축하고 있는가? 또는 그리스도의 교회들이라 주장하는 모든 단체들이 다 하나의 기시적인 외적 교제 안에 포함돼야만 하는가? 그리고 가시적인 외적 통치에 복종돼야만 기관들인가?

그것은 쉽게 증명될 수 있다. 그리스도 교회의 통일성을 단정하고 있다고 주장할 만한 근거가 성경에는 없다. 그렇다면 로마의 교회 혹은 가시적인 하나의 단체가 그리스도의 하나 된 교회여야만 한다는 결론을 내릴 만한 어떤 근거도 없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모든 기독교인들의 단체들이 다 그 경계선 밖에 있다는 로마 교회의 주장을 수용할 만한 근거도 전혀 없는 것이다.

거룩성과 사도성 및 보편성의 표지들에 대해 크게 다룰 필요는 없다. 우리가 통일성을 주목해 본 것과 같이, 그 가능성은 충분히 숙지된다고 본다. 논쟁을 어떻게 해야 할지도 분명하다. 교황주의자들이 내세우는 참된 교회의 표지인 거룩성과 사도성 및 보편성에 대한 개념은 성경에 의해 근거된 것이 아니다. 이 점은 쉽게 입증할 수 있다. 참된 교회의 특징적 요소들로서 그러한 자질들을 성경이 표현하고 있는 한, 그것들을 특별하게 독점적으로 로마 교회에만 해당된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교황주의자들 입장에서 통일성과 보편성은 외형적인 교제 안에서의 통일성, 그리고 외적인 고백과 예전 및 의식을 수행함에 있어 연합성을 말하는 것이다. 더구나 모든 시대 지구상 전역에 퍼져 있는 교회의 통일성을, 참된 교회의 표지로 나타낸다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다.

그러므로 로마 교회가 의미하는 교회의 표지들은 성경적인 지지를 받을 수 없다. 거룩성과 사도성 역시 마찬가지다. 심령과 삶의 거룩성, 그리고 사도적 모형에 부합하는 것도 다른 교회들과 구별된 교회로서 로마 교회만 특별히 가진 것이 아닐 뿐 아니라, 그들의 주장에 맞서는 결정적인 논지를 제공하는 것이기도 하다.

로마 교회는 모든 측면에서 성경에서 우리에게 주고 있는 사도적인 교회 모습과 완전히 반대된다. 어떤 지역 교회도 사용하는 방편들과 기회들 가운데서 거룩성을 드러냄이 턱없이 부족하게 나타난 적도 없다. 그렇다고 도덕적 기준들을 그토록 많이 타락시킨 경우도 없었다. 도덕적 책임감을 근절시킨 적도 없었다. 그리고 모든 죄악의 온상이 된 적도 없었다.

그러나 교회가 사방으로 확산되고 흩어진 교회 회원들 간에 공통된 고백문 안에서 함께 긴밀히 연합하며, 그리하여 외적이고 가시적인 통일성 혹은 보편성에 제한적이지만 함께할 수 있다고 주장하더라도, 교리체계가 하나님 말씀에 부합되지 않는 한 어떤 교회도 사도성과 거룩성을 소유한 교회라 주장할 수 없을 것이다. 사도들이 세운 교회에 대해 성경이 우리에게 알려준 그 모델을 따라 형성된 교회가 사도적 교회이다.

사도적인 교회라고 칭해질 수 있었던 가장 모범된 교회들조차, 사도들이 제시하여 준 실천적 가르침에 충실하게 따랐던 그 모범으로부터 가장 멀리 이탈한 자들이 되었다. 개 교회들이 자신들의 입장과 그 가시적 교회의 다른 지교회들에 대한 입장을 평가함에 있어, 특별한 교회가 교회 정치나 제도와 같은 외적 요소들이나 또는 역사적인 가시적 계승권과 외형적인 예전과 제도들을 가지고 자신들의 우위권을 내세우고자 할 때, 그들 스스로 그리스도의 교회의 속성과 기능들 및 목적들에 미치는 가장 중요한 요점들 위에 심각한 오류를 낳게 한다는 것을 증명할 뿐이다.

그러므로 순결성과 사도성의 관점에서 보면, 그들은 계시된 기독교 진리의 본질을 고수하고, 그것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인식하며, 그 본질을 의도된 목적들에게 잘 적용시키는 교회들에 비해 훨씬 뒤떨어질 뿐이다.

사도 시대 이후로 급속히 그리고 폭넓게 타락한 가시적 교회의 부패와 이 모든 것을 옹호하거나 변명하고자 하는 시도는, 교회의 속성과 목적들, 법조항에 근거하여 올바르게 판단해야 하는 교회의 법적 요소들과 자질들과 관련해 매우 느슨하고 오류적인 입장들을 유입되게 했다.

대체로 사람들의 심령 속에 있는 가시적 교회는 불가시적 교회를 삼켜 버렸거나 뒤뜰에 내동댕이쳐졌다. 무엇이 그리스도의 참된 교회인가 라는 판단은 이제 외적 측면들을 보고 결정됐다. 성경에 접근 가능한 사람이 누구든지, 그들조차도 로마의 교회가 신약성경의 교회에 매우 근접한 것이라 믿는 것이 참으로 놀라울 지경이다.

성공회 식구들도 늘 그러하듯 지 교회들의 우월적인 입장과 기회들을 고려해 보면, 자신들의 교회가 순결하고 사도적이며 지상에서 가장 잘 조직된 교회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 자체도 이젠 놀랄만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에 비해 자신들의 종교개혁자들은(성공회도 종교개혁의 결과로 간주하기 때문-역자 주), 올바른 종교개혁을 달성하기에는 너무나도 부족하다는 것을 철저히 인식하고 있었다.

성공회가 항상 견지해 왔고 주장하고 있는 헌법과 제도들은 신약성경의 표준이 아니라, 인간적인 정책들과 세속적인 영향을 받은 것들이 너무나도 많음이 명백하다.

서창원

이제 그리스도의 참된 교회가 무엇인지 성경적인 교리에 더 친숙한 가르침을 살펴보자. '에클레시아'라는 단어의 가장 고귀하고 적절한 측면에서 그리스도의 참 교회는, 영생에 이르도록 하나님의 택함을 받아서 때가 되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로 부름 받아, 하늘나라에 합당한 자로 양육되어지는 자들로만 구성된 교회이다.


가시적 교회와 관련하여 우리의 모든 견해들과 표현들 및 행위 그리고 그 교회의 다른 지 교회들의 모습은 위대한 불가시적 실체에 해당되는 몇 가지 요소들에 의해서 규정되어져야만 한다. 따라서 우리는 가시적 교회들의 순결성과 효용성을 평가하게 될 것이다. 주로 영적인 특성들과 가시적 교회의 구성원들의 기능들과 관련해서 평가할 것이다.

우리의 기도와 수고의 위대한 목적과 같이 주님께서 매일 구원받는 자들을 더하게 하시는 교회, 그들을 모든 일에 있어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자라게 하는 교회를 소유하게 될 것이다.

 


3. 교회에 준 약속들

 

그리스도께서 자기 교회에게 주신 약속들을 논의하기 전에, 나는 같은 주제에 대해 성경이 일반적으로 말하고 있는 부분을 한 가지 짚고자 한다. 이것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25장에 기재된 것으로, 아직까지 설명하지 않은 부분이다.

내가 설명하려는 견해들은 일반적으로 교회와 관련해 같은 장에서 잘 설명하고 있고, 그 안에 포함되어 있는 입장들 대부분 확정적인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설명이 필요한 한 가지가 있는데, 여태 공식적으로 언급하지 않은 것이다. 물론 그에 대한 몇몇 원칙들에 대해 시사한 바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이것이다. 보편적 가시적 교회(앞에서 이 교회는 온 세상에 흩어져 있는 사람들, 특히 참 기독교를 고백하는 사람들과 그의 자녀들로 구성되는 교회라고 언급했다)에 '그리스도께서 사역과 하나님의 칙령들과 예전들을 주셨다. 이 세상에서 세상 끝날까지 성도들을 불러 모아 온전케 하도록, 그리고 그 자신의 임재와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것들을 효력적인 것이 되게 하신다.'

이 조항의 첫 번째 부분인 그리스도께서 사역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칙령들과 예전들을 교회에 주셨다는 내용은, 앞서 언급했던 종교개혁자들과 로마교회 사이에 벌어진 논쟁의 한 부분 속 중요한 논제에 해당한다. 즉 이것은 교회에 대한 적절한 정의와 설명의 중대성을 다루기 위한 것이다.

교황주의자들은 '유효한 사역이 없는 곳에는 참 교회가 없다'는 견해를 고수해 왔다. 종교개혁자들은 그 주장에 반대되는 견해를 내세웠다. 참된 교회가 있는 곳에, 유효한 사역이 있거나 있게 될 것이다. 종교개혁자들의 이 견해 위에,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사역을 주셨다는 신앙고백 선언문은 결과적으로 동일한 것이다. 반면 교황주의자들의 입장은 교회가 사역을 위해 존재한다는 가정 위에서 진행된 것이다.

개신교는 사역이 교회를 위한 것이라는 가정위에 서 있다. 로마교회는 사역이 목적이요 교회를 수단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개신교는 그 순서를 바꾸었다. 사역이 수단이요 교회가 목적이다. 목사들은 실로 교회 혹은 회중의 지도자들(rulers)이다. 분명한 임무가 있는 다른 교회 직분자들과 협력하되 군림하는 자는 아니지만, 그 모든 회중들 위에 권위 있는 지도자들로 제정된 자들이다.

그러나 이것이 목사들과 회중들에 대해선 맞지만, 이론적으로 사역은 종속적인 위치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자들에 의해 교회가 세워지고, 하늘나라를 위해 그들을 준비시키는 일을 하는 것인 까닭에, 사역이 교회 위에 있다는 우위성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은, 그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고 사람들을 다루시는 것이기 때문에 교회보다 사역이 우위에 있는 것이 아니다. 사역의 기관으로서 그리고 사역자들을 선발하여 세우는 것은 그 위대한 목적을 효과적으로 달성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제정하시기를 기뻐하신 은혜로운 수단들 중 하나였다. 이 개념은 신앙고백서가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사역을 주셨다고 선언함으로 말미암아 본질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이 교리는 사역에 대한 신적 기관과 모순되는 것이 아니다. 또는 교회의 일반적 회원들과 구별되는 지도자로서 사역의 권리와 권위적인 면과 불일치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간과하지 말아야 하는 중요 사안들이 제시돼 있다. 그것은 사역과 교회에 대한 특징과 계획과 관련하여 실천적인 영향을 미치는 사안들이다. 다시 말해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정함을 입은 자들의 구원, 참 교회를 세우고 훈련시키는 일은 이 세상을 보존하시고 그 모든 일들을 수행하시는 전체 섭리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이다.

그 목적에 기여함에 있어 하나님에 의하여 제정된 사역보다 더 높거나 승화된 직임은 없다. 여전히 하나님께서 제정하시기를 기뻐하신 그 수단의 체계는 언제나 그 목적을 이루는 일에 종속됨으로서 효과적이다. 예언이나 방언과 마찬가지로 사역도 종식될 날이 이를 것이다. 그 날은 모든 교회가 영광스러운 교회로 하나님께 나타나게 될 때이다. 인간 선생들과 지도자들의 역할들이 다할 때까지는 여전히 존속하겠지만, 많은 사람들을 의의 길로 돌이킨 자들은 하늘의 별과 같이 영원히 빛나게 될 것이다.

사역과 교회의 연관관계를 염두에 두고, 즉 사역이 교회를 위한 것이지 교회가 사역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개혁자들과 로마의 교회 사이에 논의된 원칙들은 이제 충분히 다뤄졌다고 생각한다. 만일 이 원리가 사실이라면 그리고 성경이 이 부분을 충분히 지지하는 것이라면, 이 두 가지 이론들은 그로부터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로 어떤 특별한 단체 혹은 고백적인 성도들의 모임이 참 교회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가, '그들이 유효한 사역을 가지고 있는가 아닌가?' 라는 질문보다 먼저 선행돼야 할 것이다. 둘째는 '성경이 명확하게 묘사하고 있지 않은 것 또는 유효한 사역 혹은 사역 중에서 특정한 임무에 대해 믿을 수 있는 타당한 근거를 확실하게 제공하지 않는 것을 참 교회의 본질적 표지로 주장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일반적 원칙 위에 사역의 주제나 특성들을 그렇다고 추론해서, 그것을 일반적인 규범으로 간주하여 교회의 특징과 위치가 무엇인지를 결론적으로 단언할 수는 없다.

이러한 근거들 위에서 종교개혁자들은 개신교도들이 그리스도의 참된 교회인지를 점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점을 다룸에 있어 다른 표지들도 확실히 하고 적용해야 했다. 단지 그들의 사역에 대해 규범적인지 비규범적인 것인지를 논의하기보다, 확실히 수용해야 하는 몇몇 다른 표준을 작성해야 했다.

그들은 복음을 선포하는 개인들의 근본적인 위대한 임무가 무엇인지에 대한 성경적 견해를 취하였다. 즉 복음 선포자들은 '사랑 가운데서 진리를 받아들이는 자'라는 견해였다. 그리고 교회의 가장 중요한 기능에 대해서도 성경적 견해를 취하였다. 그것은 신자들의 모임, 종합적으로 신앙을 고백하는 자들의 모임인 교회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진리를 굳게 붙들며 구원의 길을 전파하는 것이다.

개혁자들은 가시적인 몸 혹은 단체로서 참 교회의 본질적인 표지를 기독교 신앙의 위대한 근본적인 원리들에 대한 성경적인 견해를 고백하고 유지하는 것으로 만들었다. 그것이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자들의 명백한 의무요, 그의 권위에 복종하는 것이요 하나님을 예배함에 있어 수단과 기회를 가지고 있음으로서 서로 하나가 되는 것이 명백한 의무이다.

나아가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성례야말로 기독교인의 상징이요 심볼이다. 그리스도께서 설명하신 외적인 주요 예식들, 즉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방식대로 성례를 거행하는 것은 종교개혁자들에 의해 일반적으로 참 교회의 구별되는 특징적 요소로서 도입한 것이었다. 개신교 세계에서 이 원칙들의 중요성이 일반적으로 지켜지고 있다는 면에서, 매우 흥미로운 증거이다. 그리고 로마교회와 반대 입장에서 그것들을 유지하는 필요성 측면에서도 그러하다.

심지어 종교개혁으로 인해 생겨난 어떤 교회들보다 위계적 체계를 가진 잉글랜드 성공회에서조차 이것이 고양되고 있는 것이다(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성공회 개혁자들은 그들의 후계자들보다 그러한 위계적 정신을 훨씬 덜 소유한 자들이었다는 점이다). 성공회 신조 19조항에서 교회에 대한 설명을 이렇게 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가시적 교회는 신실한 성도들의 회집이다. 즉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이 선포되어야 하고 그리스도의 규례에 따라 집전돼야 하는 성례들을 신실하게 거행되어야 한다고 믿는 신자들의 회중이다.'

개신교 원리들은 교회의 정의나 교회의 본질에 속한 것이 무엇인지를 설명함에 있어, 외적인 예전이나 규칙들과 관련하여 어떤 특별한 무엇을 소개하는 일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 이는 잘 알려진 일이다. 합법적 목사들에게 복종하는 것과 그리스도의 대리인으로서 교황에게 복종하는 것은,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교회에 대한 교황주의적 정의를 구성하는 한 부분이다.

그러나 개신교도는 교황만이 아니라 합법적인 목사들(정규 목사)도 교회의 본질적 표상으로 간주하지 않았다. 즉 고백적 신자들의 모임이나 교회가 그리스도의 교회를 형성하고 있든 아니하든, 종합적으로 모든 상황에서 반드시 그리고 즉각적으로 세워져야 하는 본질적이고 중요한 표준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개혁자들은 이 원칙이 기독교 사역에 대한 신적 지침과 불일치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또는 목사의 감독 하에서 규칙적인 회중과 함께 교제하는 고백적 신자들에게 주어진 임무들과도 불일치한다고 보지 않았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정상적이고 일반적인 방식으로 앞에서 기술한 정식 목사로 세워진 목사의 지도 하에, 혹은 전에 목사들이었던 자들에 의해 주장된 예전에 의해 부여된 임무들과도 모순된 것이라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개혁자들은 그 수단이 그 목적 달성에 종속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것과 같이, 그리고 외적인 규례들이 전혀 실천되지 못하고 있는 특별한 상황들에서 때때로 수단보다는 목적과 관련해 안내자로 그리고 보다 높은 표준으로서 다음의 두 가지 실천적 결론들이 실행될 수 있다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첫째는 정상적인 방식으로 세워진 정기적 사역 부재인 경우 또는 일시적으로 사역이 완전히 중단된 경우, 고백적 신자들의 단체를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라고 여길만한 충분한 증거가 없다. 둘째로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사역을 주셨기 때문에, 신실한 믿는 자들의 모임을 하나의 사역으로 칭해질 권리가 있는 것이다. 만일 그들이 섭리 가운데 정상적이고 규칙적인 방식으로 훈련된 사역자를 가질 수 없는 위치에 처해 있다면, 그들을 위하여 사역자를 세울 수 있는 권리가 있다. 그 사역은 비록 정규적인 것은 아니지만 여전히 유효한 것이다.

이러한 근거 위에서 종교개혁자들은 일반적으로 하나님 말씀을 읽거나 듣는 것으로부터, 로마교회의 교제 안에 남아있는 것이 죄라는 자각을 가지게 되는 자들은 그러한 로마교회를 떠날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한 구별된 모임을 구성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예전에도 동참할 수 있다고 했다.

그들이 처해 있는 특별한 상황 가운데 그러한 것들을 도저히 실천할 수 없는 위치에 있다면, 즉 정상적 방식으로 정식 사역자를 가질 수 없는 상황이라면 직임에 있어 이미 따로 세움을 입은 사람들에 의해 증명 되는 자가 있다면 그들은 이미 교회이기 때문에 그리고 교회에 그리스도께서 사역을 제정하여 주셨기 때문에 그들 자신을 위해 사역자를 세울 권리가 있는 것이다. 그들 중 성경적인 자질들을 소유하고 있으면서 사역자로 부름받기를 기다리는 자가 있다면 말이다. 유용성에 대한 어떤 의심도 없이 그의 손에서 성례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종교개혁자들의 교리였다. 나는 그것이 교회론과 사역론에 일치된 견해라고 확신한다. 그 둘의 관계성에 있어서도 성경에서 우리에게 주고 있는 원리와 부합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것이 신앙고백서 안에 담겨진 원칙이요 선언하고 있는 본질이라 믿는다. 즉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사역을 주셨으며, 칙령들과 규례들을 주셨다는 선언은 본질적인 것이라고 믿는다.

교황주의자들은 항상 개혁자들이 정규 사역과 유효한 사역 사이를 구분하는 것 자체를 부정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정규적인 것이 되지 않는 한 유효한 사역은 없다는 입장을 고수한다. 예를 들면, 기독교 양 무리를 치는 목양의 기능들을 수행하도록 임명되지 않는 한, 어떤 상황에서든 그 사역을 수행할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일반 정규 방식 안에서 사역을 허락받지 않는 한, 누구도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워가는 일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예전을 집전할 수 없다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교황주의 원리와 정면으로 대치되는 것이다.

그들은 우리가 설명한 그 기초 위에서 행동한다. 종교개혁가들은 정규 사역과 유효한 사역의 차이를 견지했다. 그리고 앞에서 지적한 교황주의 원리를 배격한다. 사역은 교회에 주어졌다. 교회에 속한 것이다. 또는 사역이 교회에 어떤 측면에서 종속적이다. 결과적으로 정규성 문제가 대두될수록, 통상적 방식의 관찰은 더욱 규칙적인 법안 제정을 하게 된다. 그 규칙은 외형적인 수행 과정과 관련된다. 정 필요하다고 요구된다면 교회의 건강과 덕 세움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교회가 소유하도록 주신 권리를 즐거워하는 교회의 중요성을 요구하는 것이다.

개혁자들은 지금도 여전히 우리가 하고 있듯이 정규 목회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또는 일반적으로 그리고 모든 통상적 상황에서 정규 목회에 요구되는 자질들이 무엇인지, 사람이 목회직을 수행할 만한 근거가 되는 것으로 필요하다는 그 특별한 질문과 관련해, 로마교회주의자들과 항상 다투어야만 했었다.

이 점에 있어 로마교회주의자들은 언제나 자신들은 항상 고교회 성직자들의 가르침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다는 입장이었다. 교권적 안수식에 의해 세움 받는 것 외에는 누구도 정규 사역에 임하도록 허용된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것 역시 사도들에 의해서 주어진 안수식을 계승하고 있는 것으로서 결코 깨어질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종교개혁자들은 사역에 들어서고자 하는 자들을 허락하는 문제와 관련해, 성경에 기재된 일정한 규범이 있음을 인정한다. 일방적인 규율로서 이 규정들을 무시하는 것은 죄악이다. 반드시 고려해야 할 사항이다. 어떤 경우에도 그 규율들을 무시하거나 어기는 것을 용납할 수 있는 경우는 없다. 물론 특별 상황에서 발생하는 필요한 경우는 예외이다. 교회의 덕을 세움에 대한 것이 명백하게 훼손되는 경우는 예외이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은 일반적으로 사역의 정규성과 관련된 규례에 있어 안수식이 교권 인사들에 의해 집전돼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것이 사도들에 의해 제정된 안수식이기 때문에 누구도 깨지 않고 계승돼야 한다는 주장도 거부했다.

그들은 교권적 안수식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근거를 성경에서 전혀 찾지 못했다. 또 교권적인 직임의 존재가 필요하다는 주장도 찾지 못했다. 장로회에서 손을 얹고 디모데에게 안수식을 거행한 것 같이, 사람이 안수식을 통해서 임직받는 것으로도 충분한다고 생각했였다. 안수식은 사도들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것으로 반드시 필요한 의식이라는 것과 관련해, 그것이 교권적인 기구에 의한 안수식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원칙, 물론 일반적으로 그 둘이 항상 병행돼 온 것은 분명할지라도 이것은 반드시 장로에 의해 성립되어야 한다는 것은 성경 어디에서도 찾아질 수 있는 법령이 아니다.

나는 어떤 장로교인도 그러한 어리석은 죄악된 생각을 하고 있다고 생각지 않는다. 그런 생각은 성경적 중요한 원칙들과 조화되지 않는다. 신약성경 전체를 놓고 살펴볼 때 그러한 생각은 신약의 정신과 모순되는 것이요, 기독교 전 역사에 의해서도 증명될 수 없는 것이다.

이제 나는 교회와 관련해 성경적 약속들을 좀 더 관찰하고자 한다. 이 점을 다룸에 있어 이어진 역사 안에서 교회의 실제적 역사 속에 드러난 주도적 양상들에 대해, 사람들의 견해가 어떠했는지에 대한 해석을 따라 살펴보고자 한다. 교회를 향한 그리스도의 약속들은 본질적으로 교회와 더불어 항상 함께하시겠다는 확신으로 집약된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의 임재하심과 인도하심이 지속적으로 있겠다는 확신이다.

교황주의자들은 이러한 약속들은 기독교 신앙이 전 세계적으로 폭넓게 확산된다는 것만이 아니라, 어떤 오류도 섞임 없이 하나님의 모든 진리를 선포함에 어떤 방해도 받음이 없는 가시적 모임으로 항상 이어진다는 사실을 시사하거나 보장하신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이러한 점이 분명히 약속됐고 그것은 로마 교회를 통해서 실로 충분히 확인된 사실이라고 주장한다. 또는 교황권과 함께 교제하며 복속된 가시적 교회 안에서 실현된 것이라고 단언한다.

개신교도들은 교회 안에 그리스도께서 항상 함께하시며, 그의 영이 함께 하겠다는 약속들은 그러한 의미를 담고 있다든지 아니면 그러한 결과를 기대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어떤 공정한 해석에 의해서도 그러한 논리를 입증할 수 없다고 한다. 즉 그리스도의 임재하심, 그리고 성령의 역사하심에 의하여 주님의 교회가 즐거워하며 영향을 미치게 하신 의도를 충분히 누리며 효과를 보게 하신다는 해석, 그 이상을 뛰어넘는 것은 결코 증명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에 의해 영생에 이르도록 택함을 받은 자들은 모두 예수 안에 있는 진리를 아는 지식과 신앙으로 인도될 것이며, 하늘나라에서 만날 수 있도록 훈련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섬기는 직임에 들어선 자들은 모두 그들 자신을 담대하게 그리스도의 뜻을 성취해 드리는 일에 전적으로 헌신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그리스도께서 부여하신 임무들을 수행함에 헌신해야 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에게 충실함으로 인해 어떠한 손실도 감수하는 고난을 담당하되, 그러나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확신을 가져야 한다.

그 약속들은 분명 다음과 같은 것들을 시사하지만, 그것이 일반적 또는 영구적으로 교회에 적용 가능한 것이라도 증명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도들만이 아니라 그들이 자부하는 무오한 안내를 받았다 할지라도 이 이상을 뛰어넘는 무엇을 내포한 것은 아니라고 확신한다. 그리스도의 임재하심에 대한 약속들과 교회 안에서 성령께서 역사하신다는 약속들은, 우리가 이해하는 한 지상에 하나의 교회를 세우시고 보전하시는 하나님께서 뜻하신 계획과 관련하여 생각해야 한다. 항상 함께 하시고 인도하신다는 약속들은 교회가 어떠하든 그것을 보장한다.

그러나 그 약속들 자체가 의도하신 뜻과 관련하여 우리에게 어떤 특별한 정보를 주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그 계획 안에 내포된 어떤 무엇을 실제로 보장한다고 추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지상에는 항상 광범위하게 확대된 교회 또는 가시적인 모임이 항상 존재할 것이요, 그 가시적 모임은 어떤 오류가 섞임 없이 하나님의 모든 진리를 견지하고 선포함이 그리스도의 목적이요 의향이라는 사실을 성경을 떠나 독립적으로 입증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약속된 그리스도와 그의 영의 임재하심은 그 결과를 효과적으로 달성하게 된다는 보증이요 수단으로 적절하게 간주될 수 있다.

그러나 독단적인 증거에 의하여 성취할 수 있음을 의도한 것이 아니라면, 그의 지속적 임재와 축복에 대한 약속들에 의해 그것이 달성될 수 있다는 기대는 허망하다. 그의 임재하심과 그의 영의 역사하심으로, 그리스도는 그의 교회 안에서 그의 교회에 의해 그의 의도가 무엇이든 뜻하신 바를 달성하신다. 사람들은 그것을 기대할 이유를 충분히 가지고 있다. 그러나 개신교도들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광범위하게 확장된 가시적 교회가 어떤 오류로부터도 항상 자유롭게 보존되어진다고 기대해도 될 만한 이유를 우리에게 주신 적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그의 지속적인 임재 약속들이 이것을 보증하는 것으로 간주돼선 안 된다. 나아가 그리스도께서 성경을 통해 명백하게 가시적 교회가 훨씬 폭넓게 그리고 뿌리 깊게 타락할 수 있다는 정보들을 충분히 주셨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그의 임재와 성령의 역사에 대한 약속으로 말미암아 그러한 결과를 나타내기로 의도하신 말씀으로 주신 것이 아니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그리고 교회 역사를 살펴볼 때 수많은 오류와 부패가 교회 안에 존재했다는 것을 금방 발견할 수 있다. 성경에 있는 정보들이 그것을 기대하게 한다. 그러한 일이 발생할 때 우리는 예언의 성취로 간주하고, 그리스도의 신적 임무에 대한 증거가 무엇인지 알게 된다. 성경적 진술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해석하여 확정하거나 단정짓는 것이다.

 

개신교도들은 역사적 사실을 의심 없이 받아, 초대교회 시작 때부터 이미 오류와 타락이 있었다고 믿는다. 교리나 정치제도, 예배와 권징에 있어 성경적인 표준으로부터 벗어난 분파들이 여럿 존재했다. 그러한 것들이 가시적인 교회들 가운데서 급속도록 번졌다. 이 부패는 더욱 깊어졌고 증폭됐다. 광범위하게 배교 상태로 이어질 때까지 끊이지 않았다. 널리 확산된 이단의 잘 조직된 체계와 우상 숭배와 폭력 등은 짙은 어둠에 속한 것들로서 거의 천년 동안 가시적인 교회 전체에 내재되어 있었다. 그것은 종교개혁의 빛에 의해서 축출되기까지 존재한 것이었다.

 

개신교도들은 교회 역사에 대한 일반적인 이러한 견해의 건전성이 성경의 명백한 가르침과 관련하여 그렇게 해석될 수 밖에 없는 사실임을 충분히 증명한다고 믿는다. 그들은 교회에 주신 그리스도의 약속들 안에서 이러한 사실을 의심하게 한다거나, 믿지 못하게 하는 그 어떤 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와 반대로 그들은 성경에서 그러한 결과를 기대하게 만드는 고정되고 의도된 무엇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서창원


4. 교회사에 대한 다양한 이론들

 

교황주의자들은 교회에게 한 약속들에 대한 자신의 해석에 맞게, 교회의 실제 역사에 대해 전혀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다. 실로 그들 고백적 그리스도인 사이에서도 얼마 안 가서 오류와 타락이 나타나게 되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러한 오류들은 적어도 이 교회가 오류들을 거부하고 정죄하고 있는 한, 결코 자신들의 교회를 오염시키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더욱이 그런 오류들을 붙들고 있는 자들을 교회로부터 추방해 버리고 있기 때문에 자신들의 교회는 안전하다고 주장한다. 로마의 교회 감독과 교제 가운데 있는 가톨릭교회는, 어떤 오류도 섞이지 않은 순수하고 부패되지 않은 사도적 신앙을 견지하고 있는 교회라고 주장한다. 이 교회는 신앙을 바꾼 적이 없으며 그렇다고 교회 자체와 어떤 모순된 점을 나타낸 적이 없다고 말한다.

이 교회가 지니고 있는 모든 교리들은 사도시대 이후 견고하게 붙들고 있는 것들이요, 여기엔 어떤 변절도 없다. 물론 때로 이 교회는 더 풍성하고 명백한 정의를 시대에 따라 내리기는 했어도 말이다. 그리고 이단들의 주장들을 대적함에 있어 충분한 설명을 더하는 일들이 발생했어도 말이다.

이 교회는 미신이나 우상 숭배 또는 폭군과 같은 현상으로 전락해본 적이 결코 없는 교회라는 것이다. 이 교회는 모든 시대를 통틀어 언제나 순결하고 온유하며 그리스도의 신실한 신부의 모습을 잃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단들과 분리주의자들을 제외한 모든 훌륭한 가톨릭 신자들과 모든 고백적인 신자들에 의해 교회가 항상 그래왔다는 것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교황주의자들이 가지고 있는 교회 역사에 대한 이해이다.

그런데도 이상한 것은 교황주의자들 중 학식이 많고 유능한 자들 가운데, 다음과 같은 사실을 견지하고 있는 자들도 적지 않다는 사실이다. 첫째는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약속하셨기 때문에 교회는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든지, 그리스도께서 그의 교회와 계속 함께 하시겠다는 것이 교회는 언제나 안전하다는 것을 보장한다는 주장에 대해 의심하고 있는 자들이 상당수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둘째는 교회 역사가 그렇게 세워져 갔고 세워져 갈 것이라는 점에 대해 의혹의 시선을 멈추지 않는 자들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로마교회의 저술가들은 어쩌면 이러한 검증 체계 속에 자신들이 있어 왔다는 것에 대해 매우 흡족히 여겼을지도 모른다. 거기에 살아있고 가시적이며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무오한 해석이 있을 것이요, 또 그래야만 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보다 나은 방편들을 추구해 왔다는 우월감이 매우 강한 자들이었다.

즉 실제로 제정된 한 가지 해석을 보여주기보다, 그리고 그의 임무들을 충실하게 수행해 왔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보다 그러한 방편들을 시도했다는 자부심에 뿌듯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역사적 증거들을 보고도 결코 움츠려들지 않고, 이미 지적한 것과 같이 말도 안 되는 그 이론들을 역사적으로 세우려고 저극 시도했던 것이다.

우월적 증거와 관련해 개신교도들은 이미 우리가 설명한 것과 같이, 그리스도께서 모든 오류로부터 항상 자유로운 가시적 모임을 지구상에 영속적으로 세우시고 보존하시고자 하셨다는 어떤 증거도 성경에는 없다고 반박한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로마교회에 이러한 특권을 수여하시겠다는 의도는 더더욱 발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임재하심에 대한 약속과 성령은 로마교회의 우월적 지위를 보장하지 않는다. 그렇다. 성경에는 가시적 교회의 역사가 그들의 이론이 제시하고 있는 것과 매우 다른 양상을 나타내고 있음을 보여주는 분명한 사실들이 있는 것이다.

나아가 성경은 로마의 교회는 배교의 길에 떨어질 것이며, 타락의 온상이요 사단의 회당이요 범죄의 신비로운 처소가 될 것임을 나타내고 있다. 이에 더해 개신교도들은 그 사례의 특징에 적용될 수 있는 일반적 증거로 말미암아 심층 있게 조사하여 확정한 문제점들을 인식하기를 원했다.

특정한 시대의 가시적 교회 혹은 그 지류들의 특성과 교리는 사실상 일반적인 원칙들과 역사적 증거의 자료들을 적용시킴으로써 확정되는 것이다. 어떤 교회 혹은 개별적 교회의 특성과 교리가 문제에 적용될 수 있는 적절한 방편들과 증거에 의해 보편적인 것으로 확정될 때, 그것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표준에 의하여 판단되거나 평가돼야 한다.

교황주의적 체계의 특성들은 모두 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인준되지 못하고 반대되는 것일 뿐 아니라, 그것들 중 상당수가 의심의 여지 없는 역사적 증거에 의하여 사도 시대보다 훨씬 뒤에 출범된 것임을 분명하게 입증할 수 있다. 즉 초대교회에는 전혀 생소한 체계였다. 로마교회의 옹호자들이 역사적 증거에 의하여 자신들의 이론과 교회의 실제 역사적 사실들을 옳은 것으로 여겨야 하는 원칙들이요 주장이라고 말하는 것은 매우 대범하고 억지스러운 짓이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시도하였다.

그러나 성과는 미미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그런 시도의 대담성은 아주 흥미진진한 생각으로 추구되고 있다. 교회사에 대한 그들의 모든 이론은 개신교도들이 지지하는 이론과는 매우 다르다. 교회사의 모든 자료들을 우리가 익히 숙고해 온 방식과는 달리 전혀 다른 양상으로 바꿔버린 교황주의자들의 교회사관에 주목하는 것은 어떤 측면에서 흥미로운 일이요 유용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교회사에서 가장 훌륭한 작업은 종교개혁 직후에 출판됐다. 그 저작들은 일반적으로 '막데부르크 센트리에이터(Magdeburgh Centuriators)'라고 한다(이것은 1559년 바젤에서 인쇄된 것인데, 주로 루터파 학자들이 막데부르크에서 모여 기독교 역사를 세기별로 구분하여 저술한 5권의 책이었다. 그 책들을 일명 막데부르크 센튜리에이터라고 한 것이다.-역자 주).

이 책은 로마의 교회에 반하는 역사적 정황들을 열거하는 것이었다. 배교는 교회사에 대한 다른 견해를 제공할 필요성을 제기했다. 이 목적을 위하여 추기경 바로니우스의 연대기가 마련됐다. 이 훌륭한 작품에서 저자인 추기경 바로니우스는 로마 교회의 모든 교리가 사도시대로부터 이단들과 분리주의자들을 제외한 모든 기독교 세계에서 붙들고 있는 것이었음을 증명하고자 했을 뿐 아니라, 로마교회의 예배형식을 방해하거나 변형시키려는 모든 예전들과 의식들은 이미 다 초대교회 시대로부터 존중된 동일한 것임을 추적하여 증명하고자 했다.

모든 로마교회주의자들은 또 교황의 무오성을 변호하고 나선 수호자 바로니우스도 개의치 않았다. 바로니우스는 교황은 자신이나 전임 교황들 누구와도 모순되게 행한 것이 하나도 없음을 증명하고자 사력을 다했다. 또 교황 중 누구도 오류나 이단으로 빠진 자도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솔직히 특별히 9세기와 10세기의 몇몇 교황들이 덕스럽지 못한 개인적 성품을 지니고 있던 자들임을 인정했다. 그리고 베드로의 자리를 차지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가장 타당치 못한 방편이라고 인정하였다. 그러나 물론 교황권의 무오성에 대한 다른 옹호자들과 마찬가지로, 바로니우스도 교황들 중 누구도 오류나 이단에 빠진 인사는 한 사람도 없음을 주장하거나 인정하려고 힘을 다했다.

로마교회는 교리들과 우월성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도 분명하게 반대하는 것이 아닌 주장들이라고 고수하고 있다. 그러나 이 교리들과 우월성은 명백한 역사적인 사실들에 의해 완벽하게 검증될 수 있고 뒤집어질 수 있다.

그들의 옹호자들이 떠맡은 로마의 감독들이 베드로를 계승하고 있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대리자들로 간주된 것이라고 역사로부터 증명하고자 시도할 때, 또 사실과 법적으로도 가시적 교회의 군주들이었다는 것과, 교회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의지와 생각에 전적으로 일치하여 교회를 가르치고 다스리는 기능을 수행해 왔음을 증명코자 시도하는 일은 참으로 무서운 것이다.

몇몇 로마가톨릭인들은 교회사를 검토하면서 그들에게 맡겨진 임무의 무게와 난제를 변형한 몇 가지 원칙들을 고수했다. 그들은 교리문제에 대해 무오성을 주장하는 것으로 한정시켰다. 그리고 의식들과 예전 및 훈육의 문제에 있어 어떤 변화나 변혁을 시도한 적은 없었다고 주장해야 할 필요까지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이러한 문제들에게 있어 교회가 필요시 수정할 권리와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로마교회의 모든 예전들과 의식들 및 권징이 사도 시대로부터 존재해 온 것이라고 추적해 입증할 수 있다고 내세우는 부담감보다, 이 일반적인 원칙을 주장하는 것이 더 안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들은 가련한 바로니우스 추기경이 신음하며 고심한 그 무거운 짐을 그들의 어깨에서 내려놓은 것이다.

그리고 몇몇 사람들 특히 갈리칸 자유주의(교황제한주의-역자 주)를 옹호하는 프랑스 저자들은 교황의 개인적 무오성을 부인하였다. 그들은 무오성을 일반 종교회의에 한정시켰다. 물론 스스로 모순되게 행하는 교황은 없다는 것을 증명할 필요성으로부터 자유케 한 것이었다. 또 정통의 표준으로부터 벗어난 교황은 한 사람도 없다고 증명할 부담도 벗어버린 것이다.

잔센주의자들(Jansenists)과 같은 이들은 신앙 문제에 있어서 교황 개인의 무오성을 부정하지는 않았을지라도 그것을 사실의 문제에 있어서 까지는 확대하지 않았다. 따라서 만족스러운 역사적 증거에 의하여 교황들이 실수를 저지른다든지 심지어 죄를 지을 수 없고, 전적으로 거짓된 자가 될 수도 없다는 것을 강제적으로 인정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던 것이다.

신앙과 교리에 대한 모든 문제에 있어 적어도 가시적 교회의 순결성을 지속적으로 유지해 왔고, 사도 시대로부터 이 교회의 모든 교리들이 변형되었다는 것을 포함하고 있는 교회사에 대한 이러한 이론은, 본질적으로 로마의 교회가 주장하는 원칙들 안에 내포된 것이다. 로마교회가 그것을 버릴 수 없다면, 그 원칙들과 함께 서든지 아니면 망하든지 할 것이다. 그러므로 로마의 교회는 역사적 증거로부터 치명적인 상처를 받게 될 운명에 처해 있다. 그 상처는 피할 수 없는 것으로서, 타락과 역사 왜곡에 의한 상처이다.

개신교도들은 그들 자신의 원칙들을 세워감과 로마의 교회에 대항하는 사례를 만들어 감에 있어서 교회의 역사로부터 검증할 때 유용한 도움을 받는다. 그러나 개신교도들은 그것에만 의존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만 의존할 때 자신들이 추구하고자 하는 것에 치명적인 것이 될 수 있는 공격은 하지 않는다.

개신교도들로서, 그들은 로마의 교회로부터 이탈자요, 로마의 배교를 대적하는 항거자들이라는 그들의 위치에서 교회사의 특정한 이론을 수용할 필요는 없다. 그렇다고 자신들의 이론을 지지하거나 또는 적대자들로부터 지켜내기 위해 역사의 증언에 침묵하거나 왜곡할 필요도 없다.

성경, 오직 성경만이 개신교도들의 종교이다. 성경의 신적 기원과 권위가 인정되고 증명될 때, 개신교도들은 그들이 주장하는 모든 것들을 이 성경으로부터 유추할 수 있었다. 그 어떤 영역으로부터, 즉 역사적 증언으로부터도 공격당하지 않는 모든 원칙들을 성경에서 자신 있게 세워갈 수 있었던 것이다.

이에 비해 로마교회는 다른 입장에 서 있다. 로마교회는 교회사의 특정 이론을 고수하는 원칙들과 주장들을 강제로 내세웠다. 그러나 그 이론은 교회사에 대한 사실적 연구로부터 적절하지 못한 것이라는 결과여서, 그들의 모든 체계를 죽이는 상처를 입게 했다.

따라서 개신교도들은 교황주의자들이 교회사를 연구함에 있어 취한 그 동일한 위험성을 택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교황주의자들과 함께 가는 것은 생사가 달린 문제이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성경이 말하고 있는 대로 그 체제 안에서 모든 불의의 속임수를 짊어진 것이었다.

우리는 교회사를 통해 교황주의 논찬객들이 드러내고자 했던 그 과정들이 무엇이었는지를 설명해 왔다. 특별히 교리사를 추적하면서 설명했다. 그들이 익히 잘 알고 서약하는 원칙들은 그렇게 추구하도록 요구할 뿐이다. 교회의 영구적 가시성과 무오성과 관련하여 그들이 붙들고 있는 그 원칙들을 고수함에는 그들은 역사의 변천 과정에서도 교회는 변함없이 동일한 교리들을 가르쳐 왔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전통의 권위를 붙들고 있는 그들의 원칙 안에서 지금 교회가 근본적으로 선언하고 있는 모든 교리들이 그 당시에는 기록하도록 위탁받은 것이 아니었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와 그의 사도들에 의해 잘 가르쳐진 것이요 전달된 것이었음을 증명해야만 했었다.

그러나 개신교도들에 의해서 거부된 로마의 교회의 어떤 교리든, 로마 교회는 역사적 정황에서 어떤 만족스러운 입장을 끄집어내 증명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성경에 의해 제정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의 교리가 그리스도와 그의 사도들에 의해서 말로 전수되고 가르쳐진 것이라는 어떤 증거도 제시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 주장은 긍정적으로 증명될 수 없는 것들이다. 그 원칙들은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전혀 알지 못하는 것들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교회의 설립자들에 의해서도 가르쳐진 적이 없는 것이다.

이것은 개신교 저자들이 종종 주장했던 것들이었다. 결과적으로 현 시점에서 교리사가 진지하게 검토되거나, 특히 독일 학자들에 의해 철저하게 연구되어 파헤쳐졌을 때, 그들의 주장이 잘못됐음을 이 시대만큼이나 확고하고 충분히 증명할 수 있었던 시대는 없었다.

옛 교황주의가 붙들었던 것이 성립될 수 없다는 명백한 논거는 지금 하나의 새로운 기대감을 솟아나게 만들었다. 그것은 점진적인 이론(개발 이론)이다. 이 이론은 그 주제에 대해 쓴 뉴먼의 글에서 세세히 설명되었다.

그는 신약성경의 기독교에다 갖다 붙인 로마교회의 주장들을 옹호하기 위하여 적용된 이론이었다. 그 이론의 핵심은 이것이다.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합법적으로 발전시켜왔거나 혹은 시대가 흘러가면서 그 교리들 자체에 함축되었다거나 추론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개념들을 이끌어내 가르친 교리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단지 그것들은 모호하며 거리가 먼 연관성을 지닌 것들에 지나지 않는 것들이다. 외적인 객관적 계시의 권위를 부인함으로서 그 취지나 성향이 다분히 이교도적인 이 이론은 이 시대에 폭넓게 확산되어 있는 사상과 어떤 면에서 잘 부합되어 있는 것이다.

물질적인 세계에서나 도덕적인 영역에서든 뭐든지 발전논리로 해결하고자 할 때, 주관적인 것에 더 큰 무게를 두고자 할 때 또는 무엇이 참인지에 대한 근거와 잣대로서 인간 자신 안에서 발견하는 것에 더 무게를 둘 때 이 시대의 흐름과 잘 맞아떨어지는 이론이다.

현재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것은 이 새 이론을 수용하는 것은 이전의 교황주의 논객들을 지배했던 근간을 포기하는 것을 담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 교회가 요구하는 것을 성립시키기 위한 익히 알려진 이론들의 모든 근간을 버리는 것이다. 이것은 그들의 근거가 유지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으로 압축되는 것이다.

교회의 무오성 교리는 일단 정해져서 공정하게 그리고 온전히 적용된다면 어떤 것이든 덮고 옹호하기에 적합한 것이라는 생각에는 추호의 의심도 없다. 그러나 더 많은 교황주의의 법률적 논객들이 교회의 무오성 교리에 그 교리가 감당할 수 있는 것보다 너무 과한 짐을 지우는 것에 대해 염려하고 있는 것이다.

실로 그들은 그 교리를 세우거나 지지하는 어떤 증거나 물증을 가짐이 없이 그 교리에만 안주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무모하고 파렴치한 교황주의자들 몇몇은 교회의 무오한 권위가 신앙의 새로운 조항을 성립시키고 제정할 수 있는 권한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어쩌면 그들은 감동하심을 입은 자들이 가르쳤던 것을 현 시대의 유행적인 어법에 맞게 발전시키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더 많은 교황주의의 법적 옹호자들은 이러한 극단적인 견해를 취하기를 몹시 두려워하고 있다.

한편 트렌트 공회에서 전통에 대한 주제를 다루면서 그들의 모든 교리들이 기록된 말씀에 내포되었거나 혹은 기록되지 않은 전통에 함축되어 있는 것이어야 한다고 고수했다. 물론 그들이 가르치는 모든 것이 성경에 의해 지지를 받거나 또는 그리스도와 그의 사도들의 가르침에 도달하는 다른 방도를 통해 추적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고 우리는 그렇게 생각한다. 이 나라의 로마교회 지도자들은 뉴만 박사의 발전 이론의 장점을 취하고자 애쓰면서 한편으로 그것을 증명하거나 거부하려는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 교황주의 정책의 특징적인 표본이다.

그들이 하나라고 주장하는 것도 미국에 있는 로마교회의 고위층 몇몇 지도자들조차 그것이 이단적이요 매우 위험한 사상이기에 버린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하였다는 사실에 의해서 모순되는 것이다.

교회사를 공부함에 있어 이러한 논점들을 잘 간직하고 있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실제로 지난 1,500년간의 교회사는 대체로 교황주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심지어 그 당시에도 죄악의 신비가 성행하고 있음을 우리에게 자각시키고 있다.

그 이후 모든 세대들에서 우리는 더욱더 명확하게 그러한 불법의 씨앗들이 드러남을 발견할 수 있고 그것이 온전히 드러났을 때 그것은 교황주의 체계로 굳어진 것이었다. 사단은 600-700년에 걸쳐 발전시켰고, 자신의 위대한 대변인으로서 앞에서 지적한 그러한 모습으로 숙성시켜온 것이다.

실로 교황주의의 몇몇 특성들은 중세시기에 오기까지는 개발되지 않았었다. 가시적 교회의 큰 덩치가 대단한 어둠과 미신과 우상숭배 속에 잠겨버리기까지는 말이다. 심지어 종교개혁 이후로도 교황주의 상태나 노력들이 고백적 교회의 일반적인 상태에 미치는 영향이 적잖다는 것이다.

지금 이 시대에도 그 긴 시간 동안 영향을 준 것보다 더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러므로 그 배도적이고 적그리스도적 체계가 가시적 교회의 역사 안에서 두드러지고 힘찬 영향력을 계속 발휘할 것이라고 믿을 만한 근거는 충분히 가지고 있다. 심지어 우리 주님께서 그의 입 기운과 더불어 모든 것을 소멸할 때까지도 말이다. 그의 오심의 밝은 날에 모든 것을 멸하실 때까지도 그 영향력은 줄어들지 않을 것이다.

실로 그리스도의 교회 역사를 개괄적으로 살펴봄에 있어 어둠과 매우 낯선 일들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교회의 순결성을 쉽게 잃어버리거나 오류와 타락에 쉽게 떨어지는 일들이다. 이 오류와 타락에서 우월성을 쉽게 획득하고 결과적으로 근 1천년 동안 가시적 교회를 삼켜버린 것이다.

역사신학 서창원 historical theology
윌리엄 커닝햄 박사의 <역사신학(historical theology)> 1960년 판.

교황주의자들은 이러한 환경의 장점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접근한다. 그들이 이것을 믿을 것인지 그리스도와 성령의 지속적인 임재하심의 약속들과 관련하여 로마교회에 주신 것이라고 믿을 수 있도록 다가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교회사에 있어 주도적 요소들이었다고 보는 것이 옳은 판단이라고 하면서 믿게 만들어 왔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전제들 안에 있는 그 어떤 것도 그들의 우월성을 증명하기에 충분하다는 것을 부정한다. 그렇지가 않기 때문이다. 우리로 하여금 그럴 것이라고 기대하게 하는 다른 정보를 성경에서 가지고 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의 표준에 의해서만 교리들의 진위를 판단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라고 믿는다.

그리고 적합한 역사적 증거에 의해서만 사실들의 진위를 판단한다. 우리는 모사시오 기묘자이신 주님의 계획들과 목적들을 만들 수 없는 자들이다. 하루가 천년과 같고 천년이 하루와 같은 그 분과 함께 그런 일을 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육체 가운데 자신의 아들을 명백하게 나타나시기 이전에 사람들을 다루신 역사 속에서 기독교 교회사에 대한 개신교의 견해가 신적 행위의 진행과정과 혹은 영적 축복들에 대하여 사람들에게 규칙적으로 소통하신 하나님의 일하심으로부터 추적할 때 전혀 모순되는 것이 아님을 확신하게 하는 충분한 자료들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이것과 관련하여 사람들을 대하신 하나님의 발전적인 행사들과 관련해서 볼 때 주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에게 그의 명백한 지혜와 그의 변함없는 신실함을 더 온전하게 나타내실 것이라는 것도 전혀 의심할 수 없는 것이다.

 

윌리엄 커닝햄의 <역사신학>/서창원 박사

출처 : 은혜동산 JESUS - KOREA
글쓴이 : 죤.웨슬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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