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론

[스크랩] 성경적 직제이해(職制理解)를 위한 교회론적 배경

수호천사1 2017. 1. 20. 15:01

성경적 직제이해(職制理解)를 위한 교회론적 배경

 

 

I. 들어가는 말

이번 죽산강좌의 중심주제(中心主題)는 “개혁주의와 직제(職制)”이다. 한국교계의 현(現) 상황에서 특별히 본 주제를 선택한 데에는 분명히 숨은 의지(=뜻)가 있었을 것이다. 추측하건대, 아마도 혼란스러운 오늘의 상황에서 절실하게 요구되는 바, 먼저는 성경적 직제관의 ‘정립’(正立)이요, 또한 현실교회의 직제에 대한 신학적 검토와 성경에 의한 ‘갱신’(更新)의 필요성이 그 어느 때보다 절박하였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진정한 갱신은 올바른 이해가 선행될 때에만 가능하다.’는 명제(命題)가 참이라면, 본 강의의 목표는 단지 신학적 지식을 획득하는 일에만 제한될 수 없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의 목표 속에는 ‘교회로 하여금 교회되게 하라!’(Let the church be the church!)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결단까지 포함해야만 한다. 교회의 갱신이 우리의 궁극적인 지향가치(指向價値)이어야 한다.

상황(狀況)의 심각성

교회는 진공(眞空) 속에 존재하지 아니하고, 항상 구체적인 현실성(現實性)과 마주하고 있다. 현실은 ‘변화’를 필연적인 속성으로 한다. 부단한 과거의 변화 속에 현실이 있으며, 부단한 현재의 변화 속에 미래가 있다. 문제는 이 변화가 바람직한 방향에서의 향상(向上)이 아니라, 부정적으로 퇴행(退行)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교회가 속화(俗化)되고 있고, 그 속도는 점차 가속되고 있다는 평가는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 되어 버렸다. 교회의 교회됨에 있어서 나타나는 이 같은 병리현상의 배후에 혹시 ‘직제의 왜곡(歪曲)’이란 중요한 함수요인이 자리하고 있지는 않은지 깊이 고민해 보아야 한다.

그래서 문제 진단과 그 해결을 위한 논의과정을 다음과 같이 설정(設定)해 보려고 한다. 우선, ⑴ 성경자체의 목소리를 들어보고, 그 다음, ⑵ 역사 속에서의 반향(反響)을 들어 보고, 제기된 여러 문제들을 유념하면서 ⑶ 성경과 현실 사이의 간극(間隙)을 조정해 가는 작업을 개혁신학의 관점에서 시도해 보려고 한다.

II. 출발점 : 에베소서 4장 11-16절

우선 에베소서 4장의 본문을 주목해 보자. [한글개역] “11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12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13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14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15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찌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16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1. 번역(飜譯)의 문제

우선 4장 12절을 주목해 보자. 직분을 세우신 목적은 ‘성도를 온전케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하려 하심’이다. 헬라어 본문에는 세 개의 전치사가 등장한다. 한 개의 프로스와 두 개의 에이스이다. 애석하게도 한글개역성경에 이 전치사들의 의미가 충분히 반영되지 못한 것으로 사료된다. 우트레흐트(Utrecht) 대학의 신약학 교수였던 판 류우원(J. A. C. van Leeuwen)의 지적과 같이 프로스와 두 개의 에이스는 서로 다른 관계로 여겨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에이스는 카타르티스몬으로부터 독립될 수 있다. 어휘 의미론적으로 볼 때 본 논자의 판단에도 그의 주장이 일리가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 이유는 우선 이들은 서로 다른 전치사이며, 그리고 문맥상으로도 상이한 의미를 지닐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본문에 11-12절에 의하면, 여러 ‘은사와 직분들’은 성도들을 ‘훈련시키기 위하여’ 혹은 ‘준비시키기 위하여’(=to prepare, NIV) 혹은 ‘무장시키기 위하여’(=to equip, RSV, NEB, NLT), 혹은 ‘온전케 하기 위하여’(=for the perfecting, KJV) 그리스도께서 주시고 세우신 것이다. 그렇다면 성도가 직분을 통하여 훈련되고, 준비되고, 무장되고, 온전케 되어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 후반부에 등장하는 두 개의 에이스로 연결된 내용 가운데 나타나 있다: ① 첫째는 ‘섬기는 일’이며, ② 둘째는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한글 개역성경의 표현은 아래와 같은 약간의 조정이 필요할 것이다: 12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세우게 하려) 하심이라. 아쉽게도 한글 개역개정역의 개정 위원들이 이 부분을 개정할 때에 뒷부분은 그대로 두고 앞부분만 수정하였다.

2. “목사(牧師)와 교사”란 표현

교회의 직분들은 에베소서 4장 11절에 제시된 목록, 곧 주께서 “사도들”, “선지자들”, “복음전도자들”, “목사와 교사들”을 주셨다는 데서 알려진다. 일반적으로 개혁신학전통에서 행하여 온 교회 내 직분들의 분류방법에 의하면 앞의 세 직분들은 “비상직원”(Extraordinary Officers)에 속하며, 그 다음에 언급된 직분은 “통상직원”(Ordinary Officers)에 해당된다.

이 같은 개혁신학의 분류방법은 ‘구원사적 긴장’(救援史的 緊張)을 고려한 성경적 관점에 기초한다. 에베소서 4장 11절의 문맥에서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신약성경 전체의 맥락에서 볼 때에 통상적인 직원들 속에는 “장로”, “목사” 그리고 “집사”의 직분이 포함되는 것으로 박형룡은 제시하였고, 루이스 벌콥(Louise Berkhof)은 “장로”(Elders), “교사”(Teachers) 그리고 “집사”(Deacons)의 직분들이 포함되는 것으로 진술하였다. 그렇다면 이는 위의 두 신학자들의 견해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가? 혹 아니라면 무슨 이유로 두 번째 직분의 명칭에 차이가 생겨났을까?

문제해결의 실마리는 본문자체 속에서 발견된다. 하나의 동일한 정관사(定冠詞) 아래 두 명사, 곧 “목사”와 “교사”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 해결의 단서이다. “목사와 교사들”- 어휘 의미론적 관점에 입각하는 한, ‘한 직분의 두 가지 기능’이란 의미 외에 다른 해석은 불가능하다. 이 점에 관해서는 요한 칼빈(John Calvin) 역시 본 논자의 입장에 동의한다. ‘하나의 정관사’란 점은 해석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수렴할 수 있는 관건(關鍵)인 셈이다. 박형룡 역시 자신의 『교회론』에서 이 문제에 대해 칼빈의 해석에 주안점(主眼點)을 두고, 루이스 벌콥의 주장이 자신의 견해와 일치한다는 사실을 추론적으로 밝힌 바 있다. 그렇다면 위에서 제기한 명칭과 관련된 문제는 일단 해소된 셈이나 다름이 없다. 그리고 ‘목사와 교사’ 외의 두 다른 직분들(장로, 집사)에 관한 구체적인 논의나 혹은 장로직과 목사직의 관계에 대해 상론(詳論)하는 일 등은 본 강의의 의도(意圖) 및 지면(紙面)의 제약상 제외하려 한다.

3. 직분들과 회중(會衆)

앞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그렇다면 ‘섬기는 일’을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일’을 누가 해야 하는가? 당연히 회중들일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이 두 가지 일들이 회중에게만 적용될 의무는 아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해당되는 문제이다. 논리적 순서로 본다면 오히려, 직분자들에게 우선적으로 적용되어야 할 책무(責務)들이다.

한역(韓譯)에 ‘온전케 한다’는 의미로 번역된 헬라어 카타르티스몬의 다른 용례들을 살펴본다면, 그 의미하는 바를 더욱 명료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많은 용례들 가운데 마태복음 4장 21절, 마가복음 1장 19절, 베드로전서 5장 10절 등10에서 사용된 예(例)만 살펴볼지라도 의미는 분명해진다. 복음서에 나오는 두 구절들은 예수께서 첫 제자들을 부르시는 장면과 연관되어 있다.
 
첫 제자들의 직업이 어부였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온전케 한다”로 번역된 카타르티스몬의 의미가 보다 생생하게 다가올 것이다: “야고보와 ··· 그 형제 요한이 ··· 배에서 그물 깁는 것(카타르티존타스=mending)을 보시고”(마4:21), “··· 저희도 배에 있어 그물을 깁는데(카타르티존타스)”(막1:19). ‘찢어져 터진 그물망(網)을 수리하는 일’에 이 단어가 사용되었다는 점은 에베소서 4장 12절에 등장한 카타르티스몬의 의미를 보다 분명하게 한다. 모든 직분자들은 회 중의 찢어지고 터지고 상한 삶의 그물망을 수선하는 일에 주님께로부터 기용(起用)된 자들이다. 베드로전서 5장 10절에서는 그와 같은 일을 주님께 적용시켰다. 주님께서 고난 받은 성도들을 “온전케 하시리라”(카타르티세이)고 하셨으니, 안도하는 마음으로 충만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논의를 통해 우리는 ‘직분’과 ‘회중’의 관계, 역할과 의무에 관해 성경적 교훈이 무엇인지를 어렴풋하게나마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직분과 회중의 관계는 다만 하나님께서 세우신 신령한 질서일 뿐이며, 결코 이 세상에서 말하는 소위 ‘갑을관계(甲乙關係)’도 아니며, 관료사회(官僚社會)의 원리인 위계적(位階的) 질서도 아니다.

교회가 점점 관료화 되어 간다는 우리 시대의 보편적 인식은 우리로 하여금 가슴앓이를 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요인들 중 하나다. 동일한 고통은 다른 편에서도 발생한다. ‘왜곡된 직제’에 대해 극단적인 반작용의 정서(情緖)가 한국 교회 안에 팽배해간다는 사실이다. 이른 바 무교회주의 내지 직제 무용론적(無用論的) 폐해가 날이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직분자들’과 ‘회중’ 사이에 성경이 제시하는 온당한 질서와 균형이 있어야만 한다는 인식을 가지게 된다.

 

 

III. 기나긴 교회역사 속에서의 변화곡선(變化曲線)

이제 우리의 시선을 역사로 돌려, ‘교회론’(敎會論)의 역사를 간략히 고찰함으로써 주제에 대한 교리사적 조명을 시도해 보려고 한다. 보편적으로 속(續)사도 교부들은 교회를 ‘성도(聖徒)의 교통’(communio sanctorum)으로 이해하였으나 2세기로 넘어오면서 그와 같은 교회개념에 큰 변화가 왔다. 변화를 촉발시켰던 가장 중요한 요인은 당시의 교회적 상황이었다. 즉 주후 2세기경에 이르자 동시다발적(同時多發的)으로 다양한 분파와 이단들이 속출하게 되었는데, 그러한 상황에서 필연적으로 제기되었던 질문은, ‘이처럼 다양한 교회들 가운데 과연 어떤 교회가 참된 교회(ecclesia vera)인가?’ - 하는 교회의 본질이해에 관한 것이었다. 당시 교부들은 이에 대답하였으니, ‘참된 교회’란, ‘전체와 더불어 머무는 교회요, 보편적인 교회와 교통을 유지하는 교회’라는 해답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교회사적 맥락에서 교부 익나티우스(Ignatius)는 그 누구에 의해서보다 ‘보편성’(普遍性, catholicitas)/‘보편적’(catholica)이란 개념과 용어로써 교회를 묘사하기 시작하였다. 교회가 ‘보편적’이라 칭하여 질 수 있는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교회는 전(全) 지구상의 모든 시대와 모든 지역을 통하여 모든 신자들을 포함’하기 때문이며,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기’(extra ecclesiam, nulla salus) 때문이란 것이다. 이와 같이 동시다발적인 이단발흥의 특수상황을 지나면서 교회의 보편성에 대한 성격이해에 큰 변화가 온 것이다. 교회의 보편성에 관한 한, 영적인 차원에 대한 강조점이 점점 약하여지고, 이제는 배타적(排他的)으로 외적이며, 가시적(可視的)인 제도의 측면에 과도한 강조점이 놓이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관심의 전환은 상황으로부터 야기된 질문 배후에 깔려 있는 판단의 준거(準據)에 대하여 당시 교부들의 이해와 태도에 변화가 옴으로써 보다 신속하고도 공고하게 이루어졌다.

이 맥락에서 “교회 밖”(extra ecclesiam)이라고 할 때, ‘교회’(ecclesia)란 다분히 ‘외부적인 제도적 교회’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단발흥’이란 심각함, 교부들의 ‘신속한 대처’라는 정황 속에 - 물론 상황의 긴박성은 이해가 가지만 안타깝게도 - 신학적으로 좀 더 깊은 성찰을 가질 여유도 없이, ‘참된 교회’에 대한 정의(定意)는 이전보다 더욱 구체화 되었다: ‘사도적 계보에 올바른 노선에 서 있는 참된 전통을 따르는 감독이 있는 교회가 참된 교회이다.’ 이제 감독의 직(職)이 ‘참된 교회’ 여부를 판단하는 시금석(criterium)이 된 것이다. 이처럼 참된 교회를 입증할 수 있는 기준, 다시 말해 교회의 진정성의 표지(標識)가 외적이며, 제도적인 것에 놓이게 되자. 현실의 교회들은 급속도로 속화(俗化)와 부패의 길로 나아가게 되었다. 이와 같은 영적 현실에 대한 반발이 교회 일각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는데, 대표적으로 2세기 중엽 의 몬타너스파(Montanists, Montanism), 3세기 중엽의 노바시안파(Novatists, Novatianism), 그리고 4세기 초에 일어난 도나투스파(Donatists, Donatism)등이었다.
 
이들 종파(宗派)들은 각기 발생의 시기나 배경이 서로 다르지만,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교회의 부패와 속화에 대한 반작용에 의해 생겨났다는 점일 것이다. 이들은 교회 회원의 ‘성결’(sanctitas)이야 말로 참된 교회의 표지라는 인식을 공유하였다. 특별히 노바시안파와 도나투스파는 박해시 황제숭배의 죄를 범한 변절자들, 특히 변절한 감독들(lapsi)에 대한 사후 처리문제를 두고, 교회는 오직 하나님의 참된 백성으로 존재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설령 그들이 회개한다 할지라도 다시 교회의 회원으로 영입(迎入)할 수 없다는 도덕적 엄정주의(嚴淨主義)의 입장을 취했다. 이처럼 그들이 ‘성결성’을 교회의 본질로 주장한 점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면이 없지는 않지만, 그들의 반동적 성향이 도(度)에 지나쳐 ‘교회의 보편성’을 희생 시키면서까지 그리하였다는 것은 역시 잘못이었다.

이와 같은 도나투스의 엄정주의적 입장에 대해 아우구스티누스는 교회의 규율은 인정하면서도 절대적인 순수성을 지상교회가 이룰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관용론(寬容論)의 입장을 취하였다.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참된 교회의 표지는 두 가지로서, ⑴ 첫째는 ‘보편성’이며, ⑵ 둘째는 ‘사도적 연대성(連帶性)’이었다. 노바시안파와 도나투스파가 교회의 ‘보편성’을 희생시키면서까지 ‘거룩성’을 주장한데 반(反)하여 아우구스티누스를 비롯한 당시 교부들은 다시금 점차 감독제도를 강조하기에 이르렀다. 카르타고의 감독이었던 키프리아누스(Cyprianus)는 ‘감독들은 사도들의 참된 계승자요. 그들은 감독단을 구성하고, 이 감독단이 교회통일의 기초가 된다.’는 주장을 하였는데, 이와 같은 사상은 그가 남긴 것으로 전해지는 유명한 말 속에도 함의되어 있다.

:“Ecclesia est in episcopo”(=교회는 감독 안에 있다). 이처럼 아우구스티누스와 키프리아누스는 교회의 본질이해에 관한 한 사상적 공통성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교회(=사도적인 전통에 서 있는 감독이 있는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강한 기조(基調) 위에 다시 섬으로써 다시금 이전 교부들의 사상에로 회귀(回歸)하였다, 이와 같은 제도 우위론적인 교회본질 이해는 중세 천년 동안 로만 가톨릭교회에 의해 승계되었다. 위와 같은 전통은 16세기 종교개혁자들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성경적 관점으로 교정되는 은총을 누리게 된다. 다시 말해 종교개혁자들은 초대교부들의 교회 본질이해(=communio sanctorum)에로 돌아가면서 그동안 교회역사의 교훈을 거울삼아 교회의 ‘유기체적(有機體的)인 면’과 ‘제도적(制度的)인 면’ 사이의 균형을 중시하였다.

그동안 기나긴 교회역사 속에서 변화곡선(變化曲線) 가운데 나타난 모종의 주기현상(週期現狀)을 관찰할 수 있었다. 그리고 교회론의 역사를 통해 발견하는 중요한 사실은 교회의 본질이해에 있어서 균형을 유지하는 일이 현실적으로 매우 어렵다는 점이다. 어떤 시대에는 영적이며 ‘유기적(有機的)인 측면’이 과도하게 강조되었으며, 또 다른 시대에는 외적이며 ‘제도적(制度的)인 측면’이 지나치게 강조되었었다. 어떤 시대에는 ‘보편성’(Catholicitas)을 희생시키면서까지 ‘거룩성’(Sanctitas)을 강조하였고, 또 다른 시대에는 역(逆)으로 동일한 오류를 범하기도 하였다. 그렇다면 우리의 시대에는 어떠한가?

 


IV. 성경에서의 ‘직분 및 직제’ 개념

신약성경이 기록될 당시, ‘직분’을 지칭하는 단어들로서 헤 레이투르기아(공적인 직책), 토 디타스테리온(심판관), 헤 아르케(통치자)등이 있었지만, 신약성경에서 교회 안에서의 직무(職務)나 기능, 혹은 직분에 관해 언급할 때에, 결코 위와 같은 ‘세속적(世俗的)인 직분개념’, 곧 ‘군림(君臨)의 사상’을 내포하는 희랍어 단어들을 사용하지 아니하였고, 항상 디아코니아란 단어를 기용(起用)하였다는 점은 매우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언어발생의 통시적(通時的, diachronic) 관점에서 ‘디아코니아’의 일차적인의미는 ‘식탁에서의 섬김’이란 뜻이다. 그런데 이 ‘디아코니아’란 용어로 표현된 교회 안의 ‘직분’ 혹은 ‘직무들’은 하나의 예외도 없이 항상 ‘섬김’이란 근본개념을 내포하고 있다. 그것이 예사로운 일상적인 삶과 관련되었건, 혹은 고귀한 일로 여겨지는 일이건 간에 언제나 ‘섬김’의 근본 개념을 함의(含意)하고 있다.

신약성경에서도 ‘디아코니아’란 단어의 의미들 가운데 일차적인 의미로 사용된 용례는 적지 않다. 예컨대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눅10:40)라고 했을 때, 디아코니안이란 말이 사용되었고, 초대교회의 공동식사의 관리 역시 매일의 디아코니아로 불려졌다. 사도행전 6장 1절에서 헬라파 유대인들의 과부가 그 매일의 구제에서 빠진다고 했을 때에도, “그 매일의 구제”는 “엔 테 디아코니아 테 카데메리네”[=in the daily ministration(KJV), in the daily distribution (RSV)]라고 표현되어 있다. 그런데 이러한 용례들과 더불어 교회 안에서 보다 귀중한 것으로 여겨지는 일들, 예컨대 ‘말씀을 선포하는 일’(행6:24, 20:24)이나 복음 전도자의 ‘화목케 하는 일’(고후5:18) 등도 동일하게 ‘섬김’의 근본정신을 지닌 ‘디아코니아’와 연관되어 있다.

초대교회의 성장의 결과, 분망(奔忙)한 상황에 직면하였을 때, 사도들은 ‘사역의 분담원리’를 설정하고, 일곱 집사를 세우면서, 사도들 자신이 행할 일의 한계를 규명하였다: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행 6:4). 여기 “말씀 전하는 것”으로 번역된 “테 디아코니아 투 로구”를 직역하면 “말씀의 봉사”란 뜻이다. 말씀이 생명을 위한 양식으로 은유화(隱喩化)되어 말씀의 참된 봉사는 생명에 대한 궁극적 관심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의미까지 이 표현 속에는 함축되어 있다. 이처럼 교회의 본질상 가장 중요한 말씀 선포의 사역까지 섬김의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에베소 교회를 떠나면서 바울 사도는 송별사에서 자신의 결단과 각오를 밝혔다: “나의 달려 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4) - 여기 “사명”에 해당되는 헬라어는 “텐 디아코니안”은 곧 섬김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교회의 기초인 사도직의 사명조차도 섬김의 목적으로 주어진 것이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고후5:18) - 여기 “화목케 하는 직책”으로 번역된 “직책” 역시 “텐 디아코니안”이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과 관련된 인간의 모든 직책들은 전적으로 섬김의 원리 속에 있다.

이 모든 일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 속에는 깊은 신학적인 의미가 담겨있다. 문제의 본질은 그리스도 자신에게로 돌아간다. 제자들의 행동이 섬김으로 특징 지워지지만, 원래 그들은 섬기는 자들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원래부터 ‘섬기는 자’(디아코노스)로 우리 가운데 오셨다. 따라서 누구든지 섬기는 자가 되지 아니하고서는, 아무도 그리스도의 섬김에 동참할 수 없다. 이처럼 섬김(디아코니아) 개념의 깊은 뿌리는 기독론(基督論) 자체에 놓여있는 것이다.

이제 교회 안의 직무(職務), 기능(機能), 직분(職分)을 지칭하는 “디아코니아”를 주제와 관련하여 세 가지 국면 - 그리스도, 회중, 직분자 - 으로 나누어 간략하게 고찰하려 한다.

1. 그리스도 자신의 디아코니아

복음서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생애를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섬김’(디아코니아)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그렇게 이해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근거는 예수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들 중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루트론=ransom)로 주려함”(막10:45, 마20:28)이라고 하신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실로 ‘고난 받는 여호와의 종’으로 표상(表象)된 메시아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었다는 사실(사61:1-2, 눅4:16-21)은 예수님의 ‘종’ 되심과 그의 ‘섬김’이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관계임을 시사한다. 이 땅에 오신 메시아로서의 예수님의 이 같은 섬김은 그 자신의 삶을 통해 분명히 드러났다. 그것은 최후의 만찬을 드신 후,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서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디아코노스)로 너희 중에 있노라”(눅22:27)고 하신 주님의 말씀 속에서 확인된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예수님의 섬김이 구속적(救贖的, redemptive) 성격의 것으로 규정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것은 위에서 인용된 바와 같이 예수님의 섬김은 “많은 사람의 대속물(루트론)”로 자신을 내어주려는 것이란 내용에서 확인된다. 그 섬김을 단지 우리를 위한 도덕적 모범으로서 윤리적 차원(倫理的 次元)에서만 그 의미를 찾는다면 그것은 본문에 대한 심각한 곡해(曲解)일 것이다. 예수님은 무엇보다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속하시기 위한 대속물로 이 땅에 오셨다(마1:21). 그러므로 자신을 “섬기는 자”로 말씀하신 것에서나 혹은 “인자의 온 것은 ··· 도리어 섬기려 한다.”는 말씀 속에 내포된 ‘섬김’의 의미는 무엇보다 구속적 성격의 것이었으며, 그것은 이미 그의 공생애를 통해 드러났고, 마침내 십자가의 죽으심에서 그 절정에 이르렀었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사상은 복음서에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다. 바울 서신에서도 나타난다. 사도 바울은 기독론(基督論)을 자기비하(自己卑下)의 측면에서 다루었는데, 앞서 살펴 본 ”디아코노스“(눅22:27)란 어휘 대신 “둘로스”(빌2:6-8)란 용어로 대체되었다. 그런데 이 용어들은 둘 사이에 본질적인 차이가 없으며, 어휘 의미론적으로 등가 개념(等價槪念)이다.

앞서 ‘고난 받는 여호와의 종’으로 표상(表象)된 메시아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었다는 사실을 언급한 바 있는데, 이사야서에 기록된 ‘여호와의 종’은 삼중 직무를 가진 것으로 묘사되었다. 먼저는 선지자로서(사42:1ff.)의 면모, 다음으로는 제사장으로서(사49:1-9, 50:4-11, 52:1ff.)면모, 그리고 마지막으로 왕으로서(사42:1-7, 41:27, 50:4)의 면모이다. 이는 칼빈이 그리스도의 사역을 ‘중보자의 삼중적 직무’(munus triplex mediator)로 구별한 것과 연관 이 있다. 그가 이 같은 구별을 하게 된 중요한 이유는 ‘그리스도’란 명칭에 있었다. ‘메시아’ 곧 ‘그리스도’는 ‘기름부음 받은 자’란 의미를 지녔으며, 구약에 의하면 선지자, 제사장 그리고 왕은 그들의 임직시 수유식(受油式)을 거행했었다. 이와 같은 배경 속에서 그리스도는 그 유일한 예언자(사61:1-2, 행3:22, 눅4:18, 21), 그 유일한 제사장(히5:5, 6, 9:22), 그 유일한 왕(시2:6, 89:35-37, 단2:44, 눅1:33, 고전15:25, 계19:16)이셔야 한다는 주장을 칼빈이 하게 되었으며, 그 이후 이러한 견해는 개혁교회 안에서 보편적인 전통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2. 회중의 디아코니아

성경의 가르침은 ‘그리스도의 섬김’이 ‘회중의 섬김’과 직결된다는 것이다. 고로 메시아에게 속한 자들은 그 누구이든 ‘섬김’이란 말로 특징지어진다. 이 일은 그리스도의 교훈을 통해 누가복음을 제외한 다른 복음서들의 여러 곳에서 현시되었다: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거든,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막9:35, 48, 마18:3-4, 마20:25-28, 막10:42-45, 요13:12-17). 복음서에서 뿐만 아니라 성경은 또한 교훈하기를 모든 성도는 그들이 주께로부터 받은 바, 각양 은사들을 가지고 서로를 섬기기 위하여 부름을 받았다(벧전4:10)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체 회중의 정체성(Identity)은 디아코니아에 의해서 특징지어진다고 이해할 수 있다.

이 같은 사실은 누가가 초대교회 성도들의 삶을 기록하며 묘사할 때에도 분명히 드러난다: “믿는 자들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에이콘 하파그타 코이나)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디에메리존 아우타 파신 타도티 안 티스 크레이안 에이켄)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2:44-47, Cf., 4:34ff.). 물론 누가의 기록 속에서 ‘디아코니아’란 용어 자체는 발견되지 않지만, 그와 같은 삶의 모습들이 바로 디아코니아적인 삶의 다양한 양상인 것이다.

동일한 사상은, 이미 강의의 서론 부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바울에게서도 여전히 발견된다. 다시금 반복하지만, 에베소서 4장 11절 이하에서 바울은 기록하기를 그리스도께서 사도들과 선지자들과 복음 전하는 자들과 목사와 교사를 주셨는데, 이는 성도로 하여금 봉사의 일을 하도록 하기 위함(에이스 에르곤 디아코니아스)이라고 기록하였다.

이상에서 살펴 본 바를 따라 결론을 내린다면, 이 같은 ‘섬김’(디아코니아)의 개념이야말로 그 회중으로 하여금 그것이 그리스도의 회중임을 인식케 하는 특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 직분자들의 디아코니아

지금까지 “그리스도의 디아코니아”와 “회중의 디아코니아”와 관련하여 살펴보았다. 이제 직분자들과 관련된 디아코니아의 문제를 살피려 한다. 이미 서론 부분에서도 논의한 바와 같이 성도를 온전케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하기 위한 목적에서 특별한 직분자들을 주께서 세우셨다(엡1:11-12). 그 직분자들 가운데는 ‘비상직원’(Extraordinary Officers)과 ‘통상직원’(Ordinary Officers)이 포함된다. 전자에 속하는 사도의 직무(롬 11:13)와 전도자의 직무(딤후4:5) 역시 디아코니아란 용어로 기술되고 있다.

이를 확인하여 보자면, 로마서 11장 13절에서 사도인 바울은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라.”고 고백하였다. 여기 “내 직분”으로 번역된 원(原) 헬라어 표현은 “텐 디아코니안 무”이다. 사랑하는 믿음의 아들인 디모데에게 바울은 권면하기를: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딤후4:5)라고 하였을 때, “네 직무”에 해당되는 헬라어는 “텐 디아코니안 수”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사실들은 단지 사도의 직분이나 전도자의 직분에만 배타적으로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공(公)히 모든 직분에 동일하게 적용된다. 사도 바울이 ‘은사’와 ‘직분’과 ‘사역’에 관해 말하면서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고전12:4-6)라고 하였을 때, 분명히 ‘은사일반’, ‘직분일반’, ‘사역일반’에 관해 말한 것이지, 여러 직분들 가운데 어느 특정한 직분만 제한적으로 말한 것이 결코 아니며, 그 때의 “직분” 역시 헬라어 디아코니온이란 점은 위의 주장을 입증한다. 동일한 사상은 네덜란드의 신약신학자, H. N. 리델보스(H. N. Ridderbos)의 주저(主著), 바울의 신학』(PAULUS-Ontwerp van zijn theologie)에 나타난 그의 진술 속에서도 확인된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회중 가운데서의 은사(=천부적인 재능)는 통상 섬김으로 작용하며, 이 섬김의 성격에서만 그것(=은사 혹은 천부적인 재능)의 지향할 바와 규준을 발견하게 된다.” 여기서 리델보스의 의미하는 바는 회중 안에서의 모든 은사와 재능의 존재 목적은 오직 ‘섬김’에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교회 안의 모든 직분들은 어느 하나의 예외도 없이 전체로서의 그리스도의 몸을 섬기는 일에서 그 궁극적인 목적을 찾아야 할 것이며, ‘섬기는 종의 형상’은 교회 안의 모든 직분개념에 있어 그 본질을 이루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주께서 모든 직분들을 교회 안에 주신 것은 ‘봉사의 일을 위함’(엡4:12)이며, ‘덕을 세우기 위함’(고전14:26)이고, 파괴하려는 것이 아니라 ‘세우려하심’(고후10:8, 13:10)이다.

4. ‘권위/권세’(엑수시아)의 국면

지금까지 교회 직분의 디아코니아적인 면, 곧 봉사적인 성격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이는 직분이란 실체의 한 국면일 뿐이다. 그렇다면 직분의 실체를 이루는 다른 면을 살피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권위’(엑수시아) 혹은 ‘권세’의 문제와 연관된다. 교회 안의 모든 직분은 ‘디아코니아’와 ‘엑수시아’의 양면, 곧 ‘섬김’과 ‘권세’의 두면을 지닌다. 이제 이 사실을 아래의 논의에서 살필 것이다.

주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사람들이 자기를 누구라 하느냐는 질문을 던지시고, 베드로에게 동일한 질문을 하셨을 때,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라고 한 그의 답변에 대해 칭찬하신 후, “너는 베드로라 내가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18-19)고 하셨다. 주께서 베드로에게 주신 권세는 ‘천국 열쇠의 권세’이었다(마16:19). 그런데 이는 사도들에게도 적용되었으며(요20:23), 심지어 권징과 관련하여 교회에게 주신 권세로 언급되어 있다(마18:18). 성경을 보다 자세히 살펴보면, 이 권세는 먼저 사도들에게 주어졌지만 교회 일반, 곧 회중(會衆)에게도 비록 적은 정도나마 주어졌음(고전5:7, 13, 6:2-4)을 알 수 있다. 이 모든 관련 문맥들로부터 귀납적으로 내릴 수 있는 주경학적 결론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것의 여부(與否)를 따라 교회가 천국(=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인간의 관계를 판단할 수 있는 권세를 주님께로부터 받았다’는 것으로 이해된다. 박윤선은 이 ‘천국열쇠’에 대하여 주석하기를 열쇠는 “주관하는 권세”를 의미하며, “사도의 직권은 그리스도의 대리행사(代理行使)로서 교회를 ··· 직접 치리할 수 있는데 그것은 그들에게만 있었던 권세”였으며, 사도 이후 시대의 목사들은 “직접 치리권을 가진 것이 아니라”, “사도들의 명한 말씀에 순종하여 교회의 치리에 사역 행위(Ministerial works)를 할 뿐”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박윤선은 사도직의 단회성(單回性)에 근거하여 그 직분적 기능의 단회성을 강조하는 해석을 하고 있지만, 교회 치리와 관련된 목사들의 기능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다. 단지 목사의 기능이 사도들의 것과는 구원사적 긴장을 달리하기 때문에 우선 둘 사이에 불연속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해야 하며, 또한 연속성을 말할 때일지라도 사도의 교훈에 순종하는 차원에서 치리의 성격을 이해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 이는 구원사적인 통찰을 지닌 예민한 본문관찰로부터 나온 견해로 여겨지며, 동시에 이 같은 박윤선의 의식 속에는 로마교의 교황제도를 비판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음이 인지(認知)된다. 네덜란드의 주경신학자 흐로쉐이드(Grosheide)는 이 ‘천국 열쇠’에 대해 그의 『마태복음 주석』(Het Heilig Evangelie volgens Mattheus)에서 설명하기를 교회 영역에서 무엇이 금지되고, 무엇이 허용되는지를 결정할 권세라고 하였다. 이는 박윤선이 구원사적 긴장을 고려해 제시한 해석학적 통찰과 조화되게 수용할 수 있는 견해로 여겨진다. 동일한 사상은 교회의 신조들 속에서도 확인된다. 구미(歐美) 개혁파 신앙의 표준문서인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서』(Der Heidelberger Katechismus)에서의 진술은 다음과 같다: 천국 열쇠는 “거룩한 복음의 선포와 교회의 권징과 회중으로부터의 출교이다. 이로써 천국이 한편으로는 신자들에게 열려지고, 반면에 다른 한편으로 불신자들에게는 닫혀진다.”(마16:18,19, 18:15-18). 동일한 사상은 역시 장로교 신앙의 역사적 표준문서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The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제 30장 2절37에서도 발견된다. 위의 논의와 더불어 관련 문헌들의 내용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천국열쇠’란 참회하는 자들을 위하여 천국을 여는 권세요, 회개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천국을 닫는 권세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간과치 말아야 할 중요한 점이 있다면, 그것은 이 권세의 기원(起源)에 관한 것이다. 이는 교회 자체가 스스로 소유한 권세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그리스도께로부터 기원된 것이며 그로부터 위임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그 권세의 성격은 독립적이거나 주권적이지 않고, 대리적(代理的)일 뿐이다(마20:25, 26, 23:8, 10, 고후10:4, 5, 벧전5:8). 대리적이기에 그 권세는 위임하신 분의 뜻과 의지를 따라 수행해야만 하며, 바로 그 점에서 봉사적 성격을 지닌다. 실로 주께로부터 교회에 부여된 이 권세는 오직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의 말씀과 성령의 뜻을 따라 수행되어야 할 성격의 것이다. 이처럼 교회의 권세는 그리스도와 말씀과 성령과 관련된 섬기는 권세인 것이다(엡1:22, 5:26, 행20:24). 그렇다면 당연히 그 권세는 강압적으로 혹은 물리적 강제를 통해 수행되어서는 안 되며, 오직 사랑을 기초로 한 설복과 설득의 방법으로 역사해야 할 성격의 것임이 분명하다.

 

5. 직제(職制)의 근본원리

이는 그리스도의 삼중직무 및 회중과 직분들 사이에 내재하는, 성경이 제시하는 원리로서, 지금까지 논의한 내용에 근거하여 지역 교회 안의 직제와 관련된 근본원리들을 정리, 규명해 보려고 한다.

(1) 직분자의 정체(正體)

직분자의 정체는 그리스도 자신의 섬김, 곧 중보자의 삼중직무(munus triplex mediator)에 근거한다. 유일(唯一)하게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인 중보자 그리스도의 선지직(先知職)으로부터 목사의 직무가 유래되며, 그리스도의 제사장직(祭司長職)으로부터 집사의 직무가, 그리고 그리스도의 왕직(王職)으로부터 장로의 직무가 유래된다. 이와 같은 기원을 가진 교회 안의 모든 직분자들은 오로지 그리스도의 사역을 수행하는 수단들일 뿐이다.
 
그렇지만 그들은 결코 무인격적(無人格的)인 수단이나 도구일 수는 없다. 어느 직분자에게나 그 정체성을 구성하는 일에 있어 본질적으로 중요한 요소들이 있을 것인데, 사도 바울의 경우를 주목해 보면 그에게서 직분자의 정체와 연관된 여러 중요한 면들을 발견하게 된다. 사도직을 수행하는 일과 관련하여 바울 자신의 고백과 그의 섬김의 태도를 통해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이러하다: ‘그리스도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로서 바울은 철저하게 자신을 보내신 주님을 의존한 그리스도의 종(둘로스)이었지만, 동시에 그는 회중을 섬기는 자(디아코노스)로 살았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회중을 섬김에 있어서 바울은 사람들의 종이 아니었고, 다만 회중을 위한 그리스도의 종이었다.’ 이 모든 점들은 직분자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일에 있어 그 본질적인 요소들임이 분명하다.

(2) 회중의 정체

이미 앞서 회중의 디아코니아 부분에서 살펴보았듯이 특별한 직분을 가진 자들만이 아니라, 믿는 자들, 곧 회중 역시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들로 성경이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롬12:11, 14:18, 골3:24, 살전1:9, 벧전2:16)은 지극히 당연한 일로 이론(異論)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그리스도의 몸의 속한 회중은 개인적으로나 전체적으로나 주님을 섬기는 자들이다. 그들은 제도적인 교회 안에서나 흩어지는 교회로서의 세속적인 삶 속에서의 생활에 있어서 어떤 모양으로든지, 모든 일에서 어떤 일이나 어떤 직업을 통해서든지, 자기 자신이나 사람들이 아니라, 오직 주님을 섬겨야만 한다.
 
그러할지라도 동시에 주님께로부터 받은 은사(恩賜)들을 가지고 회중 가운데서 서로 서로를 섬겨야 한다(고전12:7, 갈5:13). 이와 같은 서로의 수평적인 섬김을 통해 성도의 교통(communio sanctorum의 디아코니아의 측면)은 참되게 이루어진다. 이 섬김에 있어서도 수직적(垂直的)인 차원은 수평적(水平的)인 차원을 앞선다.

(3) 삼중적(三重的) 소명과 특별직분들

중보자의 삼중직무(三重職務)는 모든 신자들 각자에게 삼중적 소명(三重的 召命)으로 나타난다. 첫째, 중보자의 선지직으로부터 모든 믿는 자에게 선지자로서의 소명이 주어지게 되고, 둘째, 중보자의 제사장직으로부터 모든 믿는 자에게 제사장으로서의 소명이 주어지게 되며, 셋째, 중보자의 왕직으로부터 모든 믿는 자에게 왕으로서의 소명이 주어지게 된다.
 
그래서 모든 신자들은 주님의 이름을 고백함(롬10:10)으로써 선지자로서의 소명에 응답하게 되고, 자신들을 주님께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림(롬12:1, 6:12, 13, 벧전2:5, 9)으로써 제사장으로서의 소명에 응답하게 되며, 청지기로서 피조물에 대한 주재권(主宰權)을 가지고 문화명령에 순종하며(창1:28), 선한 양심을 가지고 죄와 마귀에 대항하여 싸움으로써 왕으로서의 소명에 응답하게 된다. 이처럼 중보자의 삼중직무로부터 유래되는 모든 신자들에 대한 삼중적 소명은 무엇보다 먼저 믿는 자, 각자에게 적용되어지지만, 그 후,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특별한 직분들(목사의 직분, 장로의 직분, 집사의 직분)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4) 광의(廣意)와 협의(狹意)의 직분개념

우리가 직분에 대해 논할 때 반드시 유념해야 할 점이 있다면, 그것은 모든 직분들이 그리스도의 삼중직무와 연관된다는 사실이며, 따라서 교회 안의 모든 직분들은 타락된 것을 다시 세우기 위한 구원의 유일한 중보자이신 그리스도의 사역에 근거하여 ⑴ 광의(廣意)의 직분개념과 ⑵ 협의(俠意)의 직분개념으로 구별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신자들은 전자에 속하며, 특별한 직분들은 후자에 속한다.

(5) 병존성(竝存性)과 의존성

회중 가운데 협의(俠意)의 특별한 직분들이 세워졌다고 하여 광의(廣意)의 믿는 자들의 직분이 불필요하게 된다거나, 없어지는 것이 결코 아니다. 광의 의 직분은 항상 협의의 직분과 더불어 또한 협의의 직분은 항상 광의의 직분과 더불어 존재한다. 특별한 직분은 결코 그 스스로 교회를 대표할 수도 없을 뿐더러 그 스스로는 교회 위에 서 있는 위계적(位階的) 성격의 한 성직자단(聖職者團)일 수도 없다. 왜냐하면 협의의 특별한 직분들은 그 직분자들을 세우는 믿는 자들, 곧 회중으로부터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협의의 직분과 광의의 직분은 항상 공존(共存)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양자는 병존적(竝存的)이며, 특별한 직분자들은 항상 믿는 자들, 곧 회중으로부터 나온다는 의미에서 전자는 후자에 대해 의존적이라 할 수 있다. 여하튼 중요한 것은 협의의 직분과 광의의 직분이 항상 더불어 존재해야 한다는 사실일 것이다.

(6) ‘권위/권세’(엑수시아)의 근거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교회 안의 모든 직분은 ‘섬김’과 ‘권세’의 두 국면을 지닌다. 이제, 이 ‘권위’ 혹은 ‘권세’의 근원과 관련된 내용을 살필 것이다. 회중은 그리스도의 신비로운 몸으로서(엡1:23), 그 안에 성령께서 내주하신다. 하나님의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로서(딤전3:15), 그 안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한다. ‘성령’과 ‘말씀’ - 이는 교회 안의 모든 질서 속에 내재하는 바, 성령께서는 말씀과 더불어(cum) 역사하시며, 말씀은 성령에 의해(per) 역사한다.
 
말씀은 인식의 객관적인 원리이며, 성령의 내적인 증거(testimonium Spiritus Sancti internum)는 인식의 주관적 원리이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그리스도의 말씀은 회중 가운데서 통치권을 행사하게 된다. 말씀의 권위에 순종하는 자는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권위에 순복하는 것이며, 말씀의 권위에 복종치 아니하는 자는 교회의 왕이신 그리스도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이 된다. 교회 안의 모든 권세는 오직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 자신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그 권세는 일차적으로는 회중에게, 이차적으로는 특별한 직분자들에게 그들의 사명수행을 위해 추가(追加)되었다.
 
우리의 육신이 몸에 속한 각 기관들에 의해 움직이듯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역시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기관들을 가질 때에만 정상적인 움직임이 가능하다. 그런데 이 몸에 속한 각 기관으로서의 특별한 직분들은 회중의 고안물들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자신의 교회를 위해 제정하신 신적 기원을 가진 것들이다(엡4:11, 고전12:28). 이처럼 교회 안의 모든 권세는 전적으로 그리스도 자신으로부터 부여된 것이기에 회중이나 특별한 직분자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권세는 그 성격상 대리적이며, 봉사적(奉事的)이다.

(7) ‘믿는 자들’의 직분, 그 기능과 역할

앞서 논의한 바와 같이, 분명한 것은 믿는 자들의 직분, 곧 광의의 직분은 협의의 직분, 곧 특별한 직분들의 제정과 더불어 없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믿는 자들의 직분이 계속 존재하며 수행해야 할 기능과 역할이 무엇인가? 그것은 특별한 직분자들을 판단하고, 그 직분을 평가하여 바르게 세우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일은 오직 믿는 자들의 직분이 특별한 직분들 곁에서 그들과 더불어 역할을 할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이 ‘더불어’의 관계를 올바로 인식하지 못하거나 혹은 이 원리를 버리게 될 때, 교회는 여러 가지 오류와 난관에 직면하게 된다. 그 어려움이 ‘로마교회’(Roman Catholic church)와 ‘회중교회’(congregational church)란 양 극단의 양상으로 표출될 수 있다.

전자, 곧 로마교회는 교회를 ‘가르치는 교회’(ecclesia docens)와 ‘듣는 교회’(ecclesia audiens)로 계층화하여 분리시키고, 성직자단(聖職者團)인 가르치는 교회가 그리스도와 회중 사이에 중보적 위치에 자리함으로써 듣는 교회인 회중들을 가르치는 교회에 전적으로 의존케 만들어 삶의 모든 영역을 제도적 교회 아래 종노릇하게 하였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는 필연적으로 신자들의 모든 권리가 무시될 수밖에 없다.

다른 한편으로 후자, 곧 회중교회의 위험 역시 망각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반대편에서 동일한 오점(汚點)을 남겼다. 즉 회중교회의 정체(政體)에 의하면 권위는 전적으로 회중에게 주어진다. 비록 교회 내에서의 그리스도의 왕적 통치를 그들이 인식하였다 할지라도, 실제로는 권위를 일방적으로 회중의 모임에 둠으로써 원리적으로 회중, 곧 백성의 절대권을 인정하는 조합주의(組合主義)의 오류에 빠진 것이다. 이로써 그들은 특별한 직분이 지니는 성경적 가치를 몰이해(沒理解)하는 우(愚)를 범하고 말았다.

(8) 동등한 입장, 추가적(追加的) 권세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요, 왕이시다.’ 이는 성경에 근거한 교회론적 명제로서 이 표현 속에 이미 머리와 모든 지체들 사이의 관계, 왕과 그의 통치를 받는 모든 백성들 사이의 관계가 어떠해야 할 것인지가 함의(含意)되어 있다. 그 의미하는 바를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절대적 권위와 절대적 권세는 오직 그리스도께 속해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 안에서 그가 어떤 특별한 직분을 맡은 자이든, 혹 단지 그리스도를 믿는 이름 없는 신자이든, 그 누구를 막론하고 그리스도인 모두는 그 분의 통치를 받아야 한다는 점에서 서로 동등한 위치에 있다. 바로 이 점이 위의 교회론적 명제, 그 속에 담겨진 근본사상으로부터 이끌어낼 수 있는 의미론적 결론일 것이다.
 
모든 신자의 위치는 이 질서의 틀 속에서만 올바른 자리매김이 가능해 질 것이다. 예컨대, 순종의 문제를 두고 볼 때, 하나님 앞에서는 인생 중, 그 누구도 치외법권적(治外法權的)인 존재는 있을 수 없다. 믿는 자 모두는 순복해야 하며, 또한 특별한 직분을 가진 자 역시 순종해야만 한다. 자유와 권위의 문제를 두고 볼 때에도 동일한 원리는 적용된다. 자유와 권위는 협의의 특별한 직분자들에 의해서만 주장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광의의 직분인 모든 회중에 의해서도 마땅히 주장되어야 한다. 이처럼 성경적인 영적 질서의 관점에서 광의의 직분과 협의의 직분은 상호 동등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관점은 단지 진리의 일면일 뿐이다.

이에 더하여 특별한 직분자들에게 주께서 더하여 주시는 이른 바 ‘추가적 권세’에 대해 더 말해야 한다. 주께서 특별한 직분자들을 세우시고, 그들이 자신들의 직무를 온전히 수행할 수 있도록 추가적 권세를 더하여 주신다. 이와 같은 관점은 개혁신학의 통찰로부터 주어질 수 있는 성경적 혜안(慧眼)이다.

이처럼 광의의 직분과 협의의 직분 사이에 ‘동등’(同等)과 ‘구별’(區別)이란 성경적 질서를 견지함으로써만 로마교나 회중교회가 범했던 일방성의 오류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회중(會衆)은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가지고 있는 자유를 결코 박탈당할 수 없다. 그들이 그리스도와 맺은 연합은 직접적이기에, 결코 특별한 직분에 의해 저지되어서는 안 된다. 이처럼 회중에게 나누어주신 은사들이 직분에 의해 저지되어서는 안 되는 것처럼, 은사들 역시 직분을 불필요한 것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둘의 관계는 상호 배타적이라기보다 상보적(相補的)이다.

이유는 직분 자체가 곧 은혜의 선물(恩賜)이기 때문이다(롬1:5). 직분은 은사의 기초 위에 세워진다. 그리고 직분은 은사들에 대해 ‘제한’과 ‘활성화’의 두 기능을 가진다. 전자는 은사들이 상반된 목적으로 작용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며, 후자는 은사들의 공동 목적인 하나의 몸을 세우는 것을 돕기 위함이다. 이 모든 일들은 ‘광의의 직분’과 ‘협의의 직분’ 사이에 ‘동등’과 ‘구별’의 질서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지금까지 주제(=개혁주의와 직제)와 관련하여 논의한 전체 내용들을 종합적으로 유념(留念)하면서 문제의 핵심적인 원리에 속하는 ‘그리스도’와 ‘회중’과 ‘직분자’ 사이에 내재한 성경적 질서들을 요약적으로 정리해 보려고 한다.

[그리스도, 회중, 직분의 관계]

① 모든 것이 그리스도로부터 내려온다. 그는 구원과 모든 권세/ 권위(엑수시아)의 원천이시다.
② 그리스도와 회중 사이의 관계는 가장 본질적(本質的)이고 우선적이다.
③ 그리스도와 직분 사이의 관계도 역시 본질적이며 불가결한 것이다.
④ 회중과 직분, 직분과 회중 사이에는 교호적(交互的)인 관계에 있다.
⑤ 모든 관계들은 말씀과 성령을 통하여 작용한다.
⑥ 직분은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나타나며, 회중의 대(對, versus)로서 작용한다. 
⑦ 회중은 선거와 중재(仲裁)와 비평적인 견제(牽制)를 통하여 직분에 작용 한다.

이렇게 전체 회중과 직분자들은 그리스도와의 관계 속에서 그 어느 한편도 무시되거나 과대평가 될 수 없는 위치에 서 있다.

V. 맺는 말

교회는 진공 속에 존재하지 아니하고 항상 구체적인 역사적 정황 속에 존재하여 왔다. 따라서 교회와 역사적 정황 사이에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일들이 있어왔다. 한국사회와 한국교회 사이에 있어서도 이러한 현상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지난 한 세대 동안 한국교회 안에 있어왔던 변화는 필자가 보기에 문자 그대로 변화무쌍(變化無雙)했었다. 사회 전반에 깔려있는 시대사조, 한 사회 혹은 공동체의 지향성(志向性)에 영향을 미치는 절대가치의 변화, 이와 맞물려 나타나는 전반적인 사회 질서의 변화, 그리고 세속정치에서의 구조 및 질적 변화 등은 교회 내 직제형성 및 그 이해에 있어서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으리라 생각된다.
 
수직문화로부터의 수평문화에로의 전향, 군사문화로부터 문민사회로의 진입과 변화, 획일주의적(劃一主義的) 성향으로부터 다양성 선호기질(氣質)로의 변화, 또한 이러한 모든 변화들에 대한 반작용적 현상 등 이 모든 것들은 교회 내 직제형성과 그 이해에 있어서 작용할 수 있었던 함수요인들 중, 성경 외적인 요인들일 것이다. 교회가 점점 세속화 되어가고 있으며, 교회직제가 점점 관료화 되어가고 있다는 평가라든지, 혹은 교회가 점점 사회의 결사단체(結社團體)처럼 변하여가고 있다거나, 혹은 교회 내 권위들이 점점 무시당하는 현상들이라든지, 혹은 이른 바 ‘교회 밖의 교회운동들’이 점점 확산되는 현상 등은 그 원인이 매우 다중적(多重的)이며 복잡하다.

우리는 이 작은 글을 통해 위에 언급한 모든 문제들에 대해 접근, 분석, 대안 제시를 시도했던 것이 아니었다. 다만 이런 다양한 변화와 외적 영향 속에 존재하고 있는 오늘의 교회들에게 성경적인 교회직제와 그 방향제시를 위한 일환(一環)으로 교회론적 주제를 다루었었다. 그런데 논의의 내용은 ‘성경적 직제의 원리(原理)’에 해당되는 문제이었기에 실은 교회구조와 관련된 개개의 혹은 총체적인 모든 사안들이 필연적으로 연관될 수밖에 없는 포괄성을 지닌 것은 사실이다.

한편, 요즈음 평신도의 위치와 역할에 대한 신학적 자성(自省)이 교회 일각에서 새롭게 일어나고 있는 것은 바람직한 일로 여겨지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그리스도 중심이라기보다는 인본주의적인 강조점이 그 배후에 맥동치고 있는, 중세의 사제주의적(司祭主義的) 기풍이 잔재 세력으로 한국교회 안에 남아 있는 듯하다. 그러나 지금까지 논의해 온 성경적 교훈의 빛에 비추어 볼 때, 이제 우리는 여태껏 감추어졌던 회중(會衆)의 잠재력을 활성화해야 할 강한 요청을 받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이 같은 활성화의 요청은 특별히 삶의 모든 영역에 하나님의 주권신장(主權伸長)을 목표로 하는 개혁 신학적 입장을 신앙과 삶의 기조(基調)로 삼고 있는 우리에게는 더욱 절실하다.

다른 한편, 오늘날 조국 교계의 영적 형편으로부터 발생할 수 있는 문제들중, 현실교회의 도덕적 부패와 영적 무기력(無氣力), 혹은 교회직제의 세속화(世俗化) 및 관료화(官僚化) 등에 대한 지나친 반작용으로 나타날 수 있는 위험에 대해서도 사려 깊은 성찰이 요구된다.

이러한 문제들에 더하여, 오늘의 목회현장에서 계속 유념하며 점검해 가야 할 사안(事案)이 있다면, 그것은 요즘 한국교회 안에 유행하고 있는 목회사역의 패러다임 전환(paradigm shift)과 맞물려 나타날 수 있는 현상으로서 보다 신중을 요하는 일들이 있다. 물론 경직되고 제도화된 기존 교회형식의 취약점들을 극복하려는 선한 동기에서 출발하였겠지만, 사역의 패러다임 전환 속에 목회자 자신들도 스스로 의식하지 못할 수 있는 ‘잠재의식적 성향’에 의해 초래 될 수 있는 불균형의 문제이다. 이러한 정황에서 우리 자신에게 절실히 요구되는 것은 과거 이천년의 기나긴 교회역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던 ‘진자운동’(振子運動), 그 진자운동의 연속선상에 우리 자신 역시 서 있을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진지한 반성이다.

[더 연구해야 할 과제]
- ‘섬김’(디아코니아)과 ‘권세’(엑수시아)의 관계이해
- 은사와 직분의 관계
- 성령과 직분의 관계
- 목회의 구조 및 사역과 관련하여 목회의 ‘주체’와 ‘객체’의 문제
- 직제와 관련하여 ‘지역교회’와 ‘보편교회’와의 관계이해
- 개혁파 혹은 장로파 제도의 근본원리

지금까지 ‘성경적 직제이해를 위한 교회론적인 배경’이란 제목의 고찰을 통해 새로운 인식(認識)이나 지속적인 관심사로 유념(留念)해야 할 점들이나 혹은 유익이 있었다면, 첫째로 우리의 교회현실을 성찰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는 점이며, 둘째는 우리가 고민하고 있는 문제가 비단 우리 시대만의 문제가 아니라, 현실 속에 존재하는 모든 교회들이 지속적으로 고민하며 풀어가야 할 항구적 과제라는 점에 대한 인식이며, 셋째는 그래서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져야 한다.’(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는 개혁신학적 명제가 현실적 진리로서 입증되었다는 점이며, 넷째로 직제의 갱신은 ‘성경적 교회개념’이라는 보다 큰 틀 속에서만 정당하게 이루어질 수 있다는 점이며, 다섯째, 따라서 성경적인 직제갱신을 위해서는 성경적인 교회관의 정립이 논리적으로 우선해야 한다는 점 등이다.

이 모든 점들을 감안해 볼 때, 여전히 풀어가야 할 우리 시대의 중요한 신학적-목회적 과제는 교회의 ‘유기체적인 면’과 ‘제도적인 면’, 혹은 ‘거룩성’과 ‘보편성’ 사이에 균형을 유지해 가는 일일 것이며, 또한 이 균형 안에서 디아코니아로서의 직분개념의 회복과 실천을 통해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워가는 일일 것이고, 그리고 ‘그리스도-회중-직분’ 사이의 관계를, 성경적 안목을 가지고 현실교회 안에서 실천해 나아가는 일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처럼 절실한 신학적-목회적 요구에 의해 지금까지 연구한 결과들을 목회현장에 정착시켜 역사화해 가는 일에 부디 주님의 은총으로 말미암는 풍성한 결실이 있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이 글은 총신대 신학대학원에서 조직신학을 담당하는 최홍석 교수가 「신학지남」에 기고한 논문이다. 교회가 가지고 있는 직제는 무엇인가? 교회의 직제는 기나긴 교회의 역사 속에서 변화를 겪어 정착해 왔다. 그 직제를 성경적 관점에서 이해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다. 오늘날 교회는 직제는 돈을 주고 사는 개념으로 인식하기도 하고, 어떤 벼슬이나 권력의 자리처럼 이해하기도 한다. 과연 이것이 성경적 직제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인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출처 : 은혜동산 JESUS - KOREA
글쓴이 : 죤.웨슬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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