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복음주의 구원관의 실상
오늘날 기독교는 어디를 향하여 가고 있습니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성경이 증거 하는 진짜 복음이 급속히 그 자취를 감추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영혼 구원을 위하여 나누어 주는 전도지, 각종 전도 집회의 설교나 강의 등을 유심이 살펴보면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날의 복음을 성경의 저울에 달아 보면 참된 회심에 반드시 필요한 요소가 결여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구원받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죄를 용서해 주실 수 있는 분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반드시 변화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 세 가지 조건이 성경이 증거 하는, 구원에 이르는 믿음의 핵심 진리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복음에는 이 세 가지 핵심 진리가 왜곡되어 있거나 또는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어떤 이들을 헐뜯거나 그들의 화를 돋을 목적으로 하는 말이 절대 아닙니다. 또한 누군가에게 책임을 묻거나 비판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오늘날의 복음은 극도로 피상적일뿐더러 복음이 가져야 할 본질의 상당 부분을 잃어버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죄인을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복음이 분명한 근본 진리가 빠져 버렸거나 왜곡 또는 변질되어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함보다 그분의 자비에 훨씬 그 비중을 두거나 그분의 진노보다 그분의 사랑만을 강조하는 식으로 구원에 이르는 복음의 진리의 균형은 깨어져 있습니다. 심지어는 죄를 깨닫게 하는 성경 말씀조차 언급되지 않기도 합니다.
벤드에 맞춘 흥겨운 찬양과 유쾌하고 감동적인 예화 또는 귀에 즐거운 세상 이야기가 예배의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러한 예배에는 죄의 어두움을 여지없이 폭로하여 복음의 빛을 환하게 드러내는 유일한 수단인 하나님의 말씀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생략되어 있습니다. 구원받기 위한 자신의 결단과 구원받은 삶에 합당한 희생과 헌신은 도외시하고, 예수를 믿음으로써만 생기는 부가적이 이득만을 강조하는 반쪽짜리 진리가 강단에서 활개를 치고 있습니다. 게다가 그 반쪽짜리 진리조차도 잡동사니 행상인과 다름 없은 일부 설교자들에 의해 헐값으로 처분되고 있습니다.
정규 신학교를 나왔다는 설교자들이 강단에서 외치는 메시지조차도 이 땅의 수많은 성도들을 잘못된 복음으로 이끌어 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잘못된 복음을 들으며 당연히 천국에 갈 것이라고 믿고 있다가, 훗날 죽음에서 깨어났을 때 천국이 아니라 지옥에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기겁하게 될 불쌍한 이들이 얼마나 많을지 심히 걱정됩니다.
죄를 엄히 다스리는 복음이 없다
무엇이 복음입니까? 하나님을 거역하고 하나님께 대항하는 자가 악한 행위를 일삼으면서도 행복하게 지낸다는 소식이 복음입니까? 쾌락에 빠진 젊은이에게 그저 ‘믿기만 하면’ 장래에 아무 것도 두려워할 게 없다고 확신시키는 것이 복음입니까? 오늘날 복음을 듣고 회심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이런 것들이 정말 복음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영적 분별력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이 죄인을 사랑하시고 독생자를 통해 죗값을 지불하셨기 때문에 ‘단지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영접하기만 하면’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죄가 용서 된다”라는 말이 돼지에게 진주를 던져 주는 것과 다름없는 것임을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구원에 있어서 성경이 가르치는 중요한 사실은 복음과 율법이 별개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복음은 그보다 앞서 주어진 하나님의 율법과 분리되지 않습니다. 복음은 하나님께서 자신이 정하신 공의의 원칙을 관대하게 변경하거나 또는 자신의 거룩함의 수준을 낮추셨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죄에 대한 하나님의 무한한 증오와 진노 그리고 그분의 거룩하고 의로운 속성을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이 땅에는 성경이 말하는 복음 전도자로서의 자격에 미달되는 많은 사역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육적인 결정과 영적 교만으로 인하여 신실한 성도들도 선뜻 시작하기를 꺼려하는 목회자의 길에 아무런 거리낌 없이 성급하게 뛰어든 사람들입니다. 오늘날에는 이처럼 자격 미달의 목회자들이 양산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도들은 이런 자격 미달자들에 의하여 세워진 교회에서 잘못되거나 변질된 복음을 듣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그들의 삶이 세속화되고 불완전한 구원을 붙잡게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성경이 증거 하는 복음은 결코 죄를 가볍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죄를 얼마나 엄하게 다스리시는지 분명히 보여 줍니다. 복음은 하나님이 죄에 대한 그분의 공의를 나타내시기 위하여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을 우리에게 보내셨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구원하기로 선택한 백성의 죗값을 지불하셨다고 증언합니다. 또한 복음은 율법을 무효화하기는커녕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저주인 죄에 대한 정죄와 심판을 완전히 감당하셨다고 가르칩니다.
갈보리의 십자가는 인류의 전 역사를 통틀어 죄에 대한 하나님의 증오가 가장 무섭고 엄숙하게 드러난 사건입니다. 그런데도 삶 속에서 죄를 사랑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영접하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는 메시지가 복음의 권위를 높이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만일 그렇다면 여러분은 복음을 왜곡하고, 자신을 속이며, 그리스도를 모욕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방탕한 것‘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유다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그들은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경건하지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방탕한 것으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유 1:4)
복음에 대한 진정한 반응이 빠져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저의 말이 다소 냉소적이고 너무 단호하다고 생각하며 이렇게 반문할 수도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냐는 질문에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며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행 16:31)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오늘날 우리도 죄인들에게 그와 같이 전하는데 무엇이 잘못이란 말입니까?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전하지 않았습니까?” 네 사실입니다. 성경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사도행전 16장 31절은 빌립보 간수, 즉 진정한 회심을 원했던 사람에게 주어진 말씀입니다. 그 말씀의 정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단편적인 지식만을 앞세운 사람들은 말씀 한 구절을 모든 사람에게 적용해도 문제될 것이 없다고 결론짓습니다.
분명히 알아야 될 것은 성경 해석에는 원칙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문맥을 무시하면 안 됩니다. 문맥에 따라 해석하고 적용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성경을 깊이 묵상하고 상고하고 또 오래 연구해야 합니다. 오늘 이 땅에 무익하고 값싼 메시지가 판을 치고 있는 이유는 사람들이 바로 이 점을 무시하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16장 31절을 살펴보십시오. 바울이 어떤 상황에서 누구에게 “주 예수를 믿으라”고 말했습니까? 일곱 가지로 나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 일곱 가지는 진정으로 복음을 접한 사람의 영적 특성이기도 합니다.
사도행전 16장 26-30절 말씀을 통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간수가 자다가 깨어 옥문들이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도망한 줄 생각하고 칼을 빼어 자결하려 하거늘 바울이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 하니 간수가 등불을 달라고 하며 뛰어 들어가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리고 그들을 데리고 나가 이르되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하거늘”
첫째, 그는 하나님의 기적을 목격했습니다(26절),
둘째, 그는 기적을 목격하고 자포자기할 정도로 깊은 충격을 받았습니다(27절).
셋째, 그는 자신을 밝혀줄 빛을 원했습니다(29절).
넷째, 그는 자만심이 철저히 깨졌습니다(29절).
다섯째, 그는 하나님의 종들을 공경했습니다(30절).
여섯째, 그는 자신의 영혼에 관심을 기울여 다음과 같이 물었습니다(30절).
바울에게 믿음을 권고 받은 빌립보 간수는 경솔하고 부주의하고 무관심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보여 준 태도는 그의 내면에서 이미 하나님의 권능이 역사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확실한 증거였습니다. 그의 영혼은 이미 깨어났습니다. 사도들은 이미 회개의 태도를 취하고 있는 간수에게 회개의 중요성을 강조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비참한 상태를 스스로 의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주어진 말씀을, 죄로 인하여 자신이 타락한 상태임을 인식하지 못한 채 하나님에 대해 무지한 사람들에게 적용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입니다. 저의 설명을 반박하기 전에 먼저 사도행전을 꼼꼼히 읽어 보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사도들이 일반 대중이나 우상을 숭배하는 이방인에게 그저 단순히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말했는지 확인해 보기 바랍니다.
세상은 신약 성경 이전에 구약 성경이 필요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의 사역을 경험하기 전에 그분보다 먼저 와서 회개의 메시지를 전한 세례 요한의 설교에 귀를 기울여야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은 복음과 함께 율법을 통해 죄가 무엇이며 또한 어떻게 죄로부터 벗어나는지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
삽이나 쟁기로 땅을 갈지 않고 씨앗부터 뿌린다면 그것은 공연히 시간만 낭비하는 행동일 것입니다. 자신의 육적 욕망에 사로잡혀 죄를 짓는 데 여념이 없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가 베푸신 구원의 공로를 전하는 것은 돼지에게 진주를 던지는 것과 같은 행동입니다. 비신자는 먼저 그리스도의 온전한 성품과 그분의 의로운 요구가 무엇인지 깨달아야 합니다.
오늘날 이 땅의 목회자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죄가 아닌 지옥에 가는 것으로부터만 구원하시는 분이라고 소개한다면 그것은 구원의 본질을 심각하게 왜곡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정욕과 죄에서 구원받기는 원치 않으면서 지옥의 불못 만 피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이토록 많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신약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첫마디는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 1:21)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는 죄의 심각성을 깨닫고 양심의 무거운 가책을 느끼며 죄짓는 자신을 혐오하고 죄의 권세에서 놓이기를 간절히 바라는 사람들을 위한 구원자입니다. 그리스도가 죄를 사랑하는 사람을 지옥에서 구원하는 분이시라면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들과 한패가 되어 그들의 사악함을 용납하시는, 죄의 사역자라는 뜻밖에 되지 않습니다. 이는 거룩한 그리스도를 모욕하는 무서운 불경죄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누군가가 “나는 그리스께서 나를 구원하실 때 죄의 심각성을 의식하지 못했고 죄책감에 짓눌려 머리를 깊이 조아리지도 않았습니다”라고 말한다면, 저는 지체 없이 “그렇다면 당신은 아예 구원받지 못했거나 당신이 생각하는 시점에서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았거나 둘 중 하나일 것입니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물론 그리스도인은 은혜 가운데 성장하면서 죄의 정체가 하나님께 대한 반역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더욱 깊이 죄를 슬퍼하거나 미워하게 됩니다. 하지만 성령의 역사를 통해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하나님 앞에서 죄를 깊이 뉘우친 적이 없는 사람이 그리스도에 의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은 분명히 잘못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 라야 쓸 데 있느니라”(마 9:12)고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병으로 고통을 당하는 사람,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일과 영혼을 더럽히는 죄악에서 구원받기 원하는 사람만이 영혼의 위대한 의사이신 주님의 구원을 간절히 구할 수 있습니다.
죄에 대한 회개가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은 죄의 권세, 죄로 인한 수치와 형벌 또한 죄를 사랑하는 마음으로부터의 구원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복음을 증거 하는 자들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죄가 무엇인지를 알려 주는 것과 그 죄로부터 구원에 대해 설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죄 문제를 설교의 주제로 삼아 죄의 본질을 규명하고 죄의 심각성을 밝히며 마음에서 이루어지는 죄의 다양한 작용을 설명하고 죄의 댓가가 영원한 형벌뿐이라는 것을 알리는 것입니다.
이 책을 읽은 사람들 중에는 “죄에 대한 평범한 사실 몇 가지를 나열하는 데 그치지 않고 매번 설교할 때마다 하나님이 죄를 어떻게 보시는지 설명하면 교인들이 불편해하지 않을까? 그런 설교는 틀림없이 외면당할 거야. 교인수가 줄어들어 헌금이 적게 걷히면 목회사역을 순조롭게 해 나가기도 어렵겠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적당히 포장된 설교로 육신을 만족시켜 성령님을 내쫓기보다는 진실한 설교로 사람들의 죄를 내쫓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오늘날 복음을 전하는 자들 가운데 그리스도의 구원을 잘못 전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구원은 죄인이 아무것도 할 필요 없이 가만히 있어도 은혜로 값없이 주어지는 선물이기 때문에 그저 믿기만 하면 된다고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구원에 대하여 그렇게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소위 정규 신학교에서 신학을 배웠다는 목회자들 중에서도 이러한 구원관을 설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변질된 복음이 거짓과 오류 못지않은 반쪽 진리에 불과하다는 저의 주장에 대하여 이 땅의 많은 사역자들이 그것은 행위로 말미암는 구원을 전파하는 것이며 또한 그리스도의 완성된 구원 사역을 모욕하는 것이라는 비난을 저에게 퍼부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러한 위험을 무릅쓸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물론 구원은 오직 은혜로 주어집니다.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위해 모든 것을 이루셨다”라는 말은 성경이 증거 하는 사실입니다. 타락한 인간은 어떤 공로를 세우더라도 행위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의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거룩함의 원칙을 거스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은혜는 죄와 타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값없이 주어지는 은혜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죄를 깨닫고 자신의 빈손을 주님에게 내미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선물이지, 손으로 세상을 부여잡고 있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선물이 아닙니다.
탕자의 예를 보십시오. 그는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로 허기를 채우는 비참함을 겪은 후에야 먼 타국을 떠나 다시 아버지에게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이는 죄인이 스스로 해야 할 행동입니다. 물론 그런 행동을 한 대가로 구원받는 건 아니지만 그런 행동을 하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탕자가 아버지께 죄를 지은 상태로 여전히 먼 타국에 머물러 있었다면, 그는 자신에게 입을 맞추고 가락지를 끼워 준 아버지의 은혜를 받지 못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구원은 ‘믿는 것’이상의 믿음의 행위를 요구합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강퍅한 마음이 아직 남아있다면 이는 구원에 이르는 신앙이 아닙니다. 먼저 그 마음이 진정한 복음의 말씀으로 깨져야 합니다. 예수님은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눅 13:3)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원받으려면 믿음에 동반된 죄에 대한 회개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는 선택 사항이 아니라 필수 사항입니다.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마 21:32)라는 말씀대로 먼저 회개하지 않으면 믿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는 말씀으로 구원의 순서를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회개는 죄를 깨닫고 그 죄를 슬퍼하는 것이며, 마음으로 죄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또한 회개는 기필코 죄를 버리겠다는 마음의 결심입니다. 죄를 거부할 때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거룩함에 이르게 되므로 참 회개가 이루어지는 곳에는 값없는 은혜의 사역이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복음을 전하는 사역자들은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사 55:7)고 외쳐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이 의무는 하나님이 사역자들에게 부여하신 거룩한 의무입니다. 복음을 듣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대적하는 죄의 무기를 내려놓고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의 은혜와 긍휼을 구하라고 권해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는 문제점은 무엇입니까? 복음 아닌 복음을 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구원의 방법이 잘못 제시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옥의 형벌을 모면하고 천국에 들어가려면,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영접해야 한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런 가르침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것은 진수에서 벗어나 껍데기만 남은 복음에 불과하며, 복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인정하지 않은 채 구원자로만 영접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어떤 설교자는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영접하게 되면 차츰 그분을 주님으로 깨닫게 되며 또한 복종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죄에 대한 회개를 통하여 그리고 삶을 통하여 그리스도께 복종하지 않아도 천국 가는 데는 지장이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마귀의 거짓말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리스도의 권위를 무시하고 그분의 멍에를 거부하더라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영적 소경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죄와 불의를 용납하신다고 말하는 것은 그분은 은혜를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분의 은혜를 떨어뜨리고 그분을 수치스럽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주님과 구원자로 영접하지 않는다
그리스도께서 행하시는 일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존하고 그분의 통치에 협력하며 또한 그분의 율법을 집행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두 가지 호칭을 언급하는 누가복음 1장 46-47절, 사도행전 5장 31절, 베드로후서 1장 11절과 2장 20절, 3장 18절을 읽어보면 그리스도께서 ‘구원자와 주님’이 아니라 항상 ‘주님과 구원자’로 일컬어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왕권에 복종하고 그분의 마음과 삶의 보좌에 모시지 않으면서 그분을 구원자로 믿고 있다고 생각하는 삶은 스스로를 속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미몽을 깨우쳐 주시지 않는 한 “오른 손에 거짓 것(사 44:20)을 들고 영원한 멸망에 들어가고 말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히 5:9)이 되십니다. 하지만 그분의 주권에 복종하지 않는 사람은 ”이 사람이 우리의 왕 됨을 원하지 아니하나이다“(눅 19:14)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책을 읽는 이 순간 솔직하게 자신의 삶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당신은 주님의 뜻에 복종하고 있습니까? 또한 진정으로 그분의 말씀을 지키려 애쓰고 있습니까?
참으로 안타깝게도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성경을 통하여 제시하신 ‘구원의 방법’을 잊어버리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시하시는 구원을 잘못 전하는 사람들과, 구원의 본질을 오해하는 사람들이 이 땅에는 너무나도 많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천국을 향해 가고 있다고 믿고 있지만 사실 그들은 지옥으로 가는 발걸음을 재촉하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가 가는 길이 어떻습니까? 교회는 어디를 향하여 나아가고 있습니까? 또한 여러분은 어디에 서 있습니까? 오늘날 교회의 영적 상황은 매우 심각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저는 성경의 예언을 가지고 이러저러한 사변을 일삼고 싶지는 않습니다. 섣불리 앞날을 예측했다가 스스로 어리석음에 빠져드는 실수는 범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다만 저는 바른 복음을 증거 하는 것이야말로 시대를 막론하고 가장 중차대한 사명이라고 믿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새로운 영적 부흥을 허락하지 않는 한 머지않아 “어둠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사 60:2)는 결과가 도래할지 않을까 무척 염려스럽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시대적 상황 앞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엡 5:11)하는 것입니다. 어둠이란 말씀의 빛을 거부하는 모든 것을 가리킵니다.
오늘날의 어둠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변질되고 왜곡된 복음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어둠을 거부해야 합니다. 변질되고 왜곡된 복음을 전하는 설교자는 빛이 아니라 어둠을 전하는 사람들입니다.
진정으로 자신의 죄를 회개하지 않아도 또는 그리스도의 주권에 절대적으로 복종하지 않아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설교자는 거짓 복음을 전하는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은 행위로 구원을 얻고 또한 스스로의 노력으로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 못지않게 위험한 잘못을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더 핑크(A. W. P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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