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에 나타난 말씀(로고스)
요한복음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라고 시작하고 있다. 그리고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셨으며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1:1-3).
이처럼 예수님을 “말씀”(로고스)으로 부르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 왜냐하면 “로고스”란 말은 그 당시 독자들에게는 상당히 폭넓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 친숙한 개념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영지주의 사상, 스토아 철학, 필로의 사상, 유대교와 구약 성경 등 그 당시의 여러 배경과 사상들이 영향을 끼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과연 여기서 어떤 의미로 “로고스”란 단어를 사용하였을까? 이 단어의 배경은 무엇일까?
먼저 요한복음 서론(1:1-18)의 로고스는 구약 성경의 “다바르”(말씀) 또는 “토라”(율법)일 것이라는 가정을 생각해 보자. 구약에는 여호와의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말하는 곳이 여러 곳 있다.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시 33:6; cf. 창 1:3, 6, 히 11:2). 이것은 요한복음 1:3에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를 잘 설명할 수 있다. 또한 4-5절에서 “생명”과 “빛”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이것도 구약에서 증거된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 119:105).
그러나 C. H. 다드에 의하면 요한복음 서론에서 로고스의 개념을 구약 성경의 “말씀”이나 “율법”으로 이해할 때 두 가지 난점이 있다고 한다(C. H. Dodd, The Interpretation of the Fourth Gospel, 1953, p.273). 그것은 “그 말씀이 곧 하나님이셨다”는 구절(1절)과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구절(14절)이라고 한다. 하나님에 의해 말해진 “말씀”이 하나님이라는 사상은 구약 성경에서는 찾기 어렵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래서 다드는 지혜 문학에서 그 배경을 찾아 보고자 한다. 여기서 우리는 먼저 다드의 성경관을 지적하지 아니할 수 없다. 그가 말하는 지혜 문학이란 잠언과 솔로몬의 지혜서, 그리고 시락의 지혜서 등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잠언은 구약 성경이 아니란 말인가? 왜 잠언은 따로 떼어서 외경과 같은 부류에 집어 넣었는가? 오늘날의 현대 신학자들에게서 종종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다드에게도 뚜렷한 정경관이 없으며 구약 성경도 그저 하나의 인간의 작품, 곧 유대인들의 작품으로 보고 있음이 틀림없다. 그래서 그는 구약 성경에서 배경을 찾을 때도 사실은 구약과 유사한 유대 랍비들의 문헌 사이를 자유로이 드나들었던 것이다. 어쨌든 다드의 견해를 계속 살펴보기로 하자. 위의 지혜 문학들에 보면 지혜가 인격화되어서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잠 8:22, 30, 35, 지혜서 9:2, 7:20, 26, 시락 24:6, 8 등). 따라서 요한복음의 서론은 소위 “지혜” 학파의 사상과 유사하다고 한다(Dodd, p.275).
그러나 다드는 “그 말씀(로고스)은 하나님이셨다”는 진술에 대한 좀더 분명한 배경은 알렉산드리아의 필로(Philo of Alexandria)의 로고스 사상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본다. 예수님 직전에 살았던 필로는 스토아 철학을 따라 이 로고스를 둘로 나누어 이해했다. 곧 사람에게는 “내재적 로고스”(logos endiathetos)와 “표출된 로고스”(logos prophorikos)가 있다고 보았다. “내재적 로고스”란 마음속에 있는 이성적 생각(the rational thought in the mind)을 말하고, “표출된 로고스”란 그것이 구체적으로 표현된 말(the thought uttered as a word)을 뜻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신적 로고스에도 두 가지가 있다. 먼저 로고스는 하나님의 생각, 그의 영원한 지혜를 뜻한다. 이것이 후에 형태가 없는 비실재적인 물질로 발출되었고, 그것으로부터 실재적이고 합리적인 우주를 만들었다고 보았다(Dodd, p.66).
물론 필로는 경건한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유대교의 신관을 물려받았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은 천지를 지으신 창조주로서 이 세상을 초월하신 분이시다. 그래서 그는 이 세상이나 그것의 일부를 신으로 보는 스토아 철학에 반대하였다. 필로는 로고스를 하나님과 동일시하지 않았으며 로고스는 하나님에게서 나온다고 보았다(p.66). 우주의 질서와 의미는 초월하신 창조주의 생각을 나타낸다. 그러나 필로에게서 로고스는 단지 우주에 나타난 의미나 계획만이 아니라 그것은 또한 창조적 능력이었다. 이 창조적 능력(로고스)을 통해 우주가 생겨나고 유지되고 있다. 그것은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하나님의 지혜”일 뿐 아니라 또한 “하나님의 능력”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생각일 뿐 아니라 또한 행동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이 점이 바로 필로에게 있는 히브리적 요소라고 말할 수 있다(p.277). 이러한 로고스는 또한 신적 통치의 매개자였다(p.68). 로고스는 “만물의 통치자이며 운행자”이며(De Cher. 36), 세상에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들의 사환“이다(Quod Deus 57). 로고스는 또한 세상이 하나님께 나아갈 때에도 매개자가 된다(De Vit. Mos. II,134).
다드는 이러한 사상적 배경에서 요한복음의 서론을 이해하려고 한다. 그런데 로고스란 단어가 요한복음의 서론 외에서는 이런 의미로 사용되지 않았다는 중요한 문제점이 있다. 그러나 다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필로적 의미를 유지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는 필로의 로고스 사상과 유사한 로고스 교리의 실체가 요한복음 전체에 걸쳐 나타나 있다고 결론짓는다(p.279). 따라서 요한복음의 서론에 나오는 로고스는 스토아 철학에 나오는 바와 유사한, 그러나 필로에 의해 조정된, 그리고 또한 다른 유대인 저술가들에 나타나는 지혜 개념과 유사한 개념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것은 우주 속에 있는 이성적 원리이다. 그것의 의미와 계획과 목적은 신적인 인격으로 생각되어졌으며, 그 인격 안에서 영원한 하나님이 계시되고 활동하셨다”(p.280).
그러나 우리는 다드처럼 필로의 로고스 개념이 요한복음 서론의 “말씀”(로고스)의 배경이라고 보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요한이 말하는 “말씀”과 스토아 철학 또는 필로가 말하는 “로고스 사상”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비록 그 당시 요한복음의 독자들이 스토아 철학에 익숙해 있었으며 그리고 혹 필로의 사상을 접해 알고 있었다 할지라도(이것은 의문이다),
사도 요한이 그러한 스토아적, 필로적 개념에서 “로고스”라는 단어를 사용했다고 보는 데는 무리가 따른다. 이러한 무리는 다드가 요한복음 1:1에서 “관사 없는 하나님”(theos)과 “관사 있는 하나님”(ho theos)을 구별할 때 분명히 드러난다. 그는 여기서 전자(theos)는 필로의 “로고스”(logos)를 가리키고, 후자(ho theos)는 “신성의 원천”(Fons deitatis)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관사가 있고 없고에 따라 이렇게 구별하는 것은 옛날에 오리겐이 범한 바와 같은 실수를 다시 범하는 것으로서(오리겐은 그의 「요한복음 주석」에서 관사 있는 하나님은 성부를, 관사 없는 하나님은 성자를 가리킨다고 보았다), 문법적으로 오류임이 이미 밝혀졌다. 여기 1절에서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다”(theos èn ho logos)에서 “하나님”(theos)에 관사가 붙지 않은 것은 이 단어가 그 문장에서 술어(predicate)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Colwell의 법칙).
C. H. 다드나 그와 유사한 주장을 하는 오늘날 많은 신학자들의 주장의 근본적인 잘못은 요한복음의 “말씀”(로고스)을 기본적으로 스토아-필로의 사상의 관점에서 설명하려고 한 데 있다. 그들은 스토아-필로의 사상 배경에서 “로고스” 개념을 먼저 설정해 놓고서 이 개념이 어떻게 “예수”에 들어맞는가를 설명하려고 한다. 그러기 위해 그들은 갖가지 어려운 설명을 시도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시도가 성공할 수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스토아 철학의 비인격 로고스가 결코 인격체 예수님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필로의 경우는 스토아적 로고스 개념이 구약의 배경을 거치면서 많이 수정되기는 했지만 그 기본 구도에는 여전히 스토아적 한계가 남아 있다고 본다.
따라서 우리는 요한복음 서론의 “말씀”(로고스)을 바로 이해하려고 하면, 우리의 모든 사고의 틀을 바꾸어서 인격체이신 “예수님”에게서 출발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도 요한은 지금 여기서 어떤 신적 원리를 가리켜 “말씀”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라 “선재하신 그리스도”(pre-existent Christ)를 가리켜 “말씀”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요한은 여기서 어떤 추상적 원리나 개념을 가지고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상에 나타나시고 그와 함께 계셨으며 직접 눈으로 보고 귀로 들었으며 손으로 만져 보았던 그 인격적 예수님을 토대로 하여 그의 복음서를 쓰고 있는 것이다. 그들 가운데 오셔서 증거하시고 역사하셨던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하기에 앞서 이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시기 전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또한 그 자신이 하나님이셨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태초부터 계셨으며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하셨던 예수님, 곧 선재하신 그리스도를 요한은 여기서 “말씀”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사도 요한이 (선재하신) 예수님을 “말씀”이라고 부른 것에 대해 우리는 요한복음에 많이 나타나는 비유와 상징의 사용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
예수님을 가리켜 “빛”이라고 했을 때(요 1:4,5, 3:19, 8:12 등) 이것은 상징이다. 이것은 “빛”의 속성 중 어떤 것이 예수님의 어떤 면을 나타내기에 합당하기 때문에 그런 의미 범주 내에서 그렇게 불리는 것이다. 따라서 “빛”이라는 물체를 가지고써, 예를 들어 광양자(光量子)가 어떻게 예수님이 되는가를 설명하려고 시도한다면 그것은 가능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어리석은 일이다.
또 예수님께서 “나는 포도나무요”라고 했을 때에도(요 15장), 어떤 사람이 포도나무를 보고서 그것이 예수님이라고 믿고 그 앞에 절하고 숭배한다면 그것은 바로 미신이요 우상숭배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자신과 우리의 관계를 포도나무와 가지의 관계로 설명하시면서,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어야만 영양을 공급받아 과실을 맺는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께 잘 붙어 있어야만 풍성한 과실을 맺을 수 있다는 것을 이 비유를 통해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사도 요한은 예수님을 “말씀” 곧 “태초부터 계셨으며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계신 말씀”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서론에 나타나는 “말씀”(로고스)에 대해 우리는 처음부터 인격적인 예수님, 곧 선재하신 그리스도를 생각해야 한다. 3절에서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다”고 할 때에도 무슨 스토아적인 “표출”(prophorikos) 사상을 생각할 것이 아니라, 바로 인격적인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천지창조를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14절의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도 하나님의 생각이 이제 “표출”되고 “구현”되었다는 식으로 설명할 것이 아니라 선재하신 그리스도, 곧 성자 하나님이 인간이 되셔서 이 땅에 오셨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왜 선재하신 그리스도를 요한이 여기서 “말씀”으로 불렀는가 하는 것에 대해서는 좀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다른 단어들이 많이 있었지만 “말씀”으로 비유한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사도 요한이 밝히고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확신 있게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신약 성경과 그 가운데 있는 요한복음도 하나님의 말씀이며 하나님이 제 1 저자이심을 생각할 때 그 배경은 아무래도 구약 성경이라고 생각된다. 다드처럼 잠언을 제외한 구약이 아니라 잠언을 포함한 구약 성경이 그 배경에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곧 창세기 1장과 시편 33장에 나타나 있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천지를 지으셨다는 구절들과 잠언 8장에 있는 바와 같이 “인격화된 말씀/지혜”가 중요한 배경을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말씀”은 한 인격체의 뜻과 사상을 전달하는 도구, 곧 계시의 매개체가 된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전달하는 계시자로서 이 땅에 오셔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나타내셨기 때문에(요 1:18, 12:45 14:9 등),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계시자”(revealer) 되시는 예수님을 비유로 지칭하는 데 있어서 “말씀”은 좋은 단어가 되었으리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어쨌든, 요한복음 서론의 “말씀”의 배후에는 이미 이 세상에서 오셔서 하나님 아버지를 나타내셨고 우리 죄인들을 위해 죽으셨다가 사흘만에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다. 이러한 구속사적 사실들이 요한복음의 배후에 놓여 있으며 사도들에게 직접 생명의 말씀을 증거해 주신 그리스도가 그들 앞에 계시는 것이다.
이것을 요한은 그의 서신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자니라”(요일 1:1-2).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열 두 제자 중 하나였던 요한이 이 땅에 오신 생명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친히 경험하였으며 또한 그를 이 세상에 증거하다가 나이 많아서 이 세상을 떠날 때가 가까워오던 1세기말에 기록한 것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된다. 다시 말하자면, 요한복음은 어떤 철학자의 책상 앞에서 “로고스” 철학을 전개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요 복음 전도자였던 사도 요한이 이미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기록한 책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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