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안의 인본주의
인본주의에 익숙한 우리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극도의 인본주의적 사회를 형성하고 있다. 그 가운데 살면서 그에 익숙해진 우리는 교회에서도 그러한 경향성을 가지고 종교적 사회 분위기를 형성해 갈 때가 있다. 그러한 분위기가 한 개인이 아닌 집단적 차원으로 발전하려 할 때 그것을 적절히 견제하지 않는다면 누룩이 되어 전체 교회를 약화시키게 될 우려가 있다.
인간은 본래 인본적이요 자기 중심적이다. 자신의 이성과 경험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게다가 이 세상에서 가장 부패하고 거짓된 것이 사람의 ‘마음’임을 하나님께서 친히 증거하셨다.(렘 17:9)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마음에서 발생하는 것들을 삼가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인간의 본질적 성향을 알기에 우리 자신의 생각과 삶을 늘 말씀의 잣대로 재어보고 교정해 나가지 않을 수 없는 필요성에 매여있는 것이다. 이를 소홀히 하게 될 경우 인본주의적 사고가 여과되지 않고 교회로 흘러들어가 구체적인 위험 요소로 드러나게 된다.
인본주의적 교제의 위험성
필자는 교회의 가르침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보다 교회에서 더 재미있고 관심을 가질 만한 것으로 인식되는 것은 우상이 될 수 있음을 늘 경계 받는다. 이를 달리 말하면 우리는 자신뿐만 아니라 이웃을 우상 숭배에 빠지게 할 위험을 늘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말씀이 옳은 것으로 지지하지 않는 자신의 개인적 취향과 관심의 영역으로 이웃을 끌어들여 함께 즐거움을 추구할 뿐 아니라 취향이 같은 다수의 사람을 통해 이를 괜찮은 것으로 인정받으려고 할 위험 말이다. 이는 함께 어울려 잘 노는 것이 곧 좋은 것이 되는 세상의 친목 단체나 추구할 인본주의적 가치관이지 주께서 세우신 교회가 취할 자세는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 안에서 이웃과 만나고 교제할 때 말씀을 덮어놓고 우리의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함께 누리며 그 안에서 기쁨을 찾고 친목을 도모할 것이 아니라 말씀을 펴 놓고 그 바탕위에서 교제하는데 힘써야 한다.
앞으로 이웃과 만나서 대화하며 교제를 나눌 때 우리가 무엇을 가지고 기뻐하고 있고, 무엇을 가지고 즐거워하고 있는지를 냉철하게 살피자. 만일 하나님이 역겨워하시는 것을 가지고 함께 즐거워하며 박수치고 있다면 이는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
우리가 올바른 본을 보이지 못하면 우리의 자녀들이 우리를 보고 물들 위험이 있다. 하나님을 모욕하며 조롱하는 세상의 문화를 교회로 가지고 와서 그것들을 매개로 교제하며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우리의 자녀들은 세상에 대한 경계심을 풀고 저마다 취향에 맞는 누룩들을 교회에 잔뜩 뿌리게 될지도 모른다.
자기 중심적 관계 설정의 위험성
교회는 성찬을 중심으로 한 식탁공동체다. 내가 좋아서 혹은 내가 마음에 들어서 교회를 선택하거나 서로의 형제 됨을 승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선택하시고 예수님의 피로 맺어져 천상에까지 함께 이르는 영원의 관계이다. 이러한 교회의 본질적 의미를 생각지 않고 자기 중심적 관계 설정을 하게 될 때 인본주의적 위험성이 교회적 관계를 위협하게 된다.
사람은 저마다의 관계에서 친하다고 느끼는 정도나 이유가 다 다르다. 즉 주관에 속한 자기의 감정이나 성향이 서로의 관계를 평가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생각이 교회를 바라보고 인식하는 태도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즉, 내가 인정할 만하고 내가 친하다고 느끼는 이들은 교회의 울타리 안에서 한 형제로 지낼만하고 그렇게 느끼지 않는 사람들은 좀 덜 그런 것 같이 생각할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출생적 혈연을 통해 일시적 가족으로 맺어진 관계에서는 서로를 보면서 누구는 좀 더 가족 같고 누구는 덜 가족 같다는 인식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궁극적 관계에 속한 교회 공동체에서는 그와 같은 인식으로 접근하는 경우가 있음을 본다. 말하자면 자기 중심적 관계 구분이 생기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맺어주신 관계가 아닌 내가 인식하고 생각하는 관계 중심으로 교회를 바라보고 해석할 경우에 생기는 문제들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그 중 하나만 생각해 보자면 친목을 다져서 그 바탕위에서 무언가 해보려 하는 오류가 있을 것이다.
교회는 친목 단체가 아니다. 내가 친하다고 느끼는가 그렇지 않은가는 교회의 교회됨에 중요한 것이 아니다. 내가 좀 더 친해져서 함께 교회 생활을 잘 해봐야겠다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맺어주신 관계이기 때문에 그에 요구되는 합당한 자세와 책임 의식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 이에 대해서는 성경 여러 곳에서 말씀하고 있으나 한 곳만 살펴보자면 로마서의 말씀을 잘 생각해보면 좋겠다.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만한 믿음이 있고 연약한 자는 채소를 먹느니라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음이니라(롬 14:1-3)
우리는 자신의 말과 행동이 교회에 끼칠 영향을 늘 생각하는 가운데 교제해야 하며 돌아서서 자신을 냉철하게 해석하고 돌아볼 수 있어야 한다. 물론 그 바탕은 자신의 이성이 아닌 기록된 말씀의 잣대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를 통해 우리 안의 인본주의적 위험성을 제대로 인식하고 경계해 나가야 할 것이다.
인본주의적 시각의 위험성
인간은 옳은 일도 얼마든지 그릇 되게 행할 수 있는 존재이다. 우리의 행위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일지라도 그것 자체가 우리의 올바름을 보증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섭리의 하나님이시나 또한 심은대로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 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물론 후자의 말은 구원과 관계된 본문이지만 전체 성경의 기록을 통해서 우리는 인간의 철저한 부패와 그러한 인간을 통해서도 자신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 놀라운 하나님의 경륜을 볼 수 있다.
이 말은 교회 안에서 우리가 정당하게 행한다고 생각하는 일이라도 늘 기록된 말씀에 비추어 냉철하게 해석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는 늘 우리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을 이루는 길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핑계로 우리의 죄악과 그릇됨을 변명할 수 없다.
즉 하나님의 섭리가 우리에게 올바름의 보증이 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신다는 로마서의 약속을 보증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를 우리의 교회적 삶에 잘 적용하는 것 또한 참으로 중요한 일일 것이다.
“성부께서 성자를 내어주셨고,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몸을 내어주셨으며, 그리고 유다는 그의 주님을 내어주었는데, 왜 이렇게 내어주는 일에 있어서 하나님은 공의로우시고 사람은 죄악된가? 그것은 모두 똑같이 내어주는 일을 했으나, 원인이 동일하지 않다는데 있는 것이 아닌가?”(아우구스티누스)
우리는 우리의 비뚤어진 인본주의적 시각을 말씀의 안경을 통해 잘 교정해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사고와 판단력이 말씀을 의지하지 않고 인본주의적 이성을 거쳐서 나가게 될 때, 우리는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이웃과 교회 전체를 위태롭게 할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교회를 돌아보는 우리의 생각이 더욱 깊어지는 가을이 되기를 바라며 오늘은 이만 줄이려 한다. 우리안의 인본주의가 늘 경계되고 말씀을 통해 잘 걸러지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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