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기도의 기원
날마다 새벽 기도회로 모이고,
성도들이 합심하여 통성으로 기도하는 것은
다른 나라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한국교회의 자랑거리입니다.
1906년 가을, 길선주’장로의 주도로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시작하였습니다.
이 새벽기도회는 1907년 평양에서 촉발된 한국기독교 부흥의 시발점이 되었는데
300명에서 500명 가량 모였다고 합니다.
새벽 기도회와 함께 초기 부흥 운동의 특징 중 또 한 가지는
회중이 동시에 소리내어 기도를 드리는 통성기도였습니다.
선교사들은 조선 사람들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 뜨겁게 부르짖는 통성 기도를
신비로운 충격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맥큔 선교사는 자신의 선교 보고서에 통성기도와 회개 운동에 대해서 이렇게 소개했습니다.
"예배당 안은 `기도합시다'라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하나님께 기도 드리는 소리들로 가득 찼다.
예배당 안에 있는 교인들은 거의 모두가 큰 소리로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놀라운 광경이었다.
어떤 이는 울고 있었고,
어떤 이는 하나님께 자신의 죄목을 나열해 가며 용서를 빌고 있었다.
모두가 성령 충만을 간구하고 있었다.
많은 소리가 있었음에도 전혀 혼란스럽지 않았다.
모두가 일사불란했고 완전한 조화를 이루었다”
이런 새벽기도는 한국교회의 특징으로 인정되고 있으며,
이 전통은 세계교회에서 한국교회를 구별되는 특징임에는 틀림없지만,
실제적인 "새벽기도의 기원"은 예수님으로부터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새벽 오히려 미명에 일어나셔서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심으로 사역을 시작하셨다고
마가복음 1:35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새벽을 깨우는 일, 어려운 일이지만,
어려운 만큼 복되고 은혜의 시간이 될 것입니다.
새벽기도의 기원은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요?
<자료1>
외국에서도 새벽에 기도를 하는 종교인들도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 처럼 집단적으로 새벽에 기도를 하는 모임을 갖는 나라는 우리나라 뿐이라고 합니다.
성경에도 보면 예수님께서도 일찍 새벽부터 일어나셔서 기도를 했다는 구절이 많이 나옵니다.
이런 내용을 바탕으로 길선주목사가 처음으로 시도를 한 것이라고 전해집니다.
한국에서만 볼 수 있는 새벽기도의 유래에 대해서 알아보았습니다.
1. 한국 새벽기도의 유래
1906년 가을, ‘길선주’장로의 주도로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시작하였다. 이 새벽기도회는 1907년 평양에서 촉발된 한국기독교 부흥의 시발점이 되었다. 길선주장로는 국가가 어려운 상황(당시 일제 강점기)에 놓여 있는 것을 걱정하여 새벽에 교회에 나가 기도하였고, 이에 많은 교인들이 호응하여 같이 기도하기 시작하였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300-500명에 이르는 교인들이 모이기 시작하였다. 길장로는 새벽기도회의 규모가 커지자 당회에 정식허가를 얻어 공식적으로 새벽기도회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다음 해, 1907년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열린 사경회에 성령의 불이 떨어짐으로 많은 사람들이 통회자복하고 예수님께 돌아오는 역사가 이루어졌다. 이는 영국의 저명한 신문인 [더 타임즈(The Times)]에 기사화가 될 정도의 역사적 사건이었다.
2. 길선주목사(1869. 3. 15.-1936.11.26)
‘조선기독교의 아버지’ 또는 ‘가장 위대한 한국개신교 인물 중에 한 사람'인 [길선주(吉善宙)] 목사는 평안북도 안주에서 길봉순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일찍 학문을 시작하였고, 열 한 살이 되었을 때에 결혼하였다. 길선주는 한 때 병을 얻게 되어, 병도 고치고 도(道)도 닦을 겸, 한국 무교종파 중 하나인 관성교(關聖敎)에 심취하였으나 어떤 영적 만족도 얻을 수 없게 되자 21세부터 선도(仙道)수련에 몰두하였다. 길선주의 종교편력은 다양했지만, 영적인 갈증은 점차 더해져 갔다. 1893년 미국선교사 마펫(Samuel A. Moffett)이 평양에서 선교활동을 시작하였는데 길선주의 친구 김종섭이 마펫과 교분을 가지면서 길선주에게 여러 가지 기독교 교리서을 가져다 주었다. 학문적 탐구심이 강한 길선주는 그 책들을 탐독하면서 차차 기독교 진리에 대해 호기심을 가지게 되었고, 그를 기독교로 이끈 결정적인 책은 존 번연의 [천로역정]이었다.그는 기독교의 하나님을 알기 위해 기도를 하는 중에 그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고, 1897년(29세) 장대현교회에 다니기 시작했으면, 그래함 리(Graham Lee)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그는 1902년에 장로로 임명되었으며 1903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하고 1907년 졸업하여 평양장대현교회의 목사로 임명되었다. 그가 주도한 새벽기도회는 이후 한국교회의 전통이 되었다. 사실 그가 새벽 기도회를 시작한 것은 그의 종교편력과도 무관하지 않은데, 전통무교에서 새벽에 수련시간을 갖던 것에 익숙하였던 그는 기독교로 귀의한 이후에도 새벽에 일찍 일어나 기도하였다. 그러나 이전과 명확히 구별되는 점은 이제 드리는 그의 기도는 정확히 예배를 받으실 분을 향한 것이었다.
3. 복음서에 나타난 새벽기도
흔히 새벽기도는 한국교회의 특징으로 인정되고 있으며, 이 전통은 세계교회에서 한국교회를 구별되는 특징임에는 틀림없지만, 실제적인 새벽기도의 기원은 예수님으로부터 찾아볼 수 있다. 예수님은 새벽 오히려 미명에 일어나셔서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심으로 사역을 시작하셨다고 복음서는 기록하고 있다(마가복음 1:35).-세계기독교역사상 유래없는 한국교회의 부흥의 원인중 하나가 '새벽기도'로 분석되자, 다른 나라교회에서도 새벽기도회를 여는 곳이 있으며, 현재 한국교회에서 파송한 선교사들은 선교지에서 새벽 기도회를 인도하고 있기 때문에 새벽기도는 더 이상 한국교회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출처 : 김인수, [한국기도교회사], 한국장로교출판사
<자료2>
한국교회 새벽기도의 기원 이야기
길선주 목사가 박치록 장로와 시작
근대 선교 역사에서 가장 놀라운 에피소드 가운데 하나는 길선주 목사의 7년간의 하나님 탐구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는 오늘날 한국에서 가장 큰 교회 담임목사입니다. 그 교회는 극동에서 몇 가지 면에서 가장 놀라운 교회인데 그것은 한국의 대부흥운동의 가장 전율적인 장면이 목도된 곳이 바로 여기였기 때문입니다.
기도 중에 있는 길선주 목사의 놀라운 사진이 근래 평양 지역 개척 선교사 가운데 한명이자 대단한 열정과 정결한 사역자인 소안론 선교사의 펜으로 “Korea Mission Field”에 나타났습니다.
평양의 큰 장대현교회 담임 목사, 길선주는 일종의 냉랭함이 그 도시 교인들 가운데 임했음을 한동안 느끼고는 그의 동료 장로 중 한명과 함께 매일 새벽 교회에 가서 기도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겸손하고 신뢰할만한 신앙을 가진 이들 두 사람은 그래서 2개월 동안 매일 새벽 4시가 약간 지난 시간에 만나 기도회를 가졌습니다. 그것을 어느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고, 사실 나는 어느 누구도 그것을 알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그 사실이 점차 소수에게 알려지게 되었고, 몇 십 명 혹은 그 보다 많을까 하는 사람들이 그들과 함께 이 기도회에 합류했습니다. 그러자 길선주 목사는 교회에 그와 함께 기도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보고 주일 오전 예배 때 누구든지 그들과 기도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해도 되고, 이를 위해 4시 30분에 종을 울리겠다고 교회 앞에 광고했습니다.
“다음날 새벽 1시에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 새벽 2시까지 몇 백 명이 모였습니다. 종이 울리자 사오 백 명이 참석했습니다. 며칠 지나자 매일 새벽 6,7백 명이 참석했습니다. 새벽기도를 드리던 네 번째 날에 전 회중이 갑자기 자신들의 무관심, 냉랭함, 사역에 대한 사랑과 열정의 결여에 대한 죄를 통회하면서 울부짖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후 사죄의 기쁨과 하나님에 대한 사역의 길과 방식을 나타내는 강한 열정이 회중들 가운데 임했습니다. 그래서 그로부터 4일 새벽은 기도하고 찬양하며 하나님의 인도를 갈구하면서 보냈다. 이제 길선주 목사는 무언가를 할 때라고 생각하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온 종일을 나가 불신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하겠는지 물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손을 들었습니다. 그런 후 그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틀을 그렇게 할 수 있겠는지 물었습니다. 다시 거의 모든 사람들이 손을 들었고, 3일을 요청하자 그 보다 적은 사람들이 손을 들었습니다. 그렇게 4일, 5일, 그리고 6일을 할 수 있는지를 물었는데 점차 손을 든 사람들의 수가 줄어들었지만 심지어 7일을 이 일에 헌신할 사람 손을 들라고 했는데 꽤 여러 명이 손을 들었습니다. 그 후 그 전교회는 열정적으로 밖으로 나가 다른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했습니다.
1910, George T. B. Davis, KOREA FOR CHRIST
번역: 박용규
<자료3>
세계 최초 새벽기도회
1885년에 그의 가족은 평양으로 이주했고, 이듬해 그곳에서 상점을 내고 장사를 시작했다가 1년도 못되어 실패하고 말았다. 이때부터 그는 점차 염세적인 경향을 띠기 시작했고, 현실보다는 종교적인 것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영계는 19세때 관우를 신으로 섬기는 관성교(關聖敎)에서 읽는 보고문(譜告文)을 만독하는 것으로 수행을 시작했다. 약 9년간 선도수행에 힘써 영계가 도인으로 소문나자 배우려는 사람들이 몰려 들었다. 후에 그와 함께 한국 장로교의 지도자들이 될 김종섭(金鍾燮), 김찬성(金燦星), 정익노(鄭益魯) 등도 그 무렵에 찾아와 도를 배우던 사람들이었다. 1893년 평양에 기독교가 들어오자 영계도 이 낯설고 새로운 도에 흥미를 가졌다. 그는 먼저 자기 밑에서 공부하던 김종섭을 마펫(S.A.Moffett)에게 보내 그들이 믿는 도가 어떤 것인지를 알아보게 했다. 그런데 기독교에 입교한 김종섭이 그를 찾아와 끈질기게 전도하였다. 기독교에 대한 이야기와 김종섭이 권하는 한문으로 된 기독교 서적들을 읽었는데, 영계는 특히 '천로역정'(天路歷程)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는 책을 읽는 과정에서 기독교에 대한 오해가 사라지고 급격히 발전하는 기독교에 대해 알기 위해 노력하였다. 마침내 1896년 가을에 영계는 '예수가 참 구주이신지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간절히 기도하던 중에 총소리같은 소란한 소리가 들리며, 공중에서 '길선주야, 길선주야, 길선주야'라고 부르는 소리가 들려, 그가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여, 나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나를 살려 주옵소서'라고 기도하면서 방성대곡하는 '인격적' 하나님을 체험하였다. 1896년 초겨울부터 교회예배에 참석한 영계는 성서를 읽으며 본격적인 기독교 연구에 들어갔고, 가족에게도 전도하여 부인과 자녀들도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는 장대현의 땅 800평을 비롯한 전재산을 교회에 헌납하였고, 1897년 8월 15일에 리(Graham.Lee)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1898년에는 평양 널다리골 교회의 영수(領袖)가 되었다. 이때 영계는 널다리골 교회 안에 '예수학당'을 차리고 교육사업을 시작했는데, 이것이 후에 숭덕(崇德)과 숭현(崇賢)학교로 발전하였다. 교회도 급진적인 발전을 보여 널다리골에서 장대현으로 옮겨 1900년에 2000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웅장한 한국식 교회건물을 마련하게 되었다. 1905년 을사조약의 체결로 외교권이 일제에 의해 강탈당하자 9월 장로회 공의회에서 영계의 발의에 따라 그해 11월 감사절 다음날부터 일주일간에 걸친 구국기도회를 열었는데, 이를 기점으로 전국 각지의 교회에서는 나라를 위한 기도회가 폭넓게 진행되었다. 1907년 1월 6일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대부흥운동의 불길이 점화되었다. 이미 부흥사로 명성을 떨치고 있던 영계가 이 집회 준비를 위한 새벽기도회 인도에 나섰다. 그가 1905년 친구 박치록(朴致錄)장로와 함께 세계교회사상 최초로 시작했던 새벽기도회의 뜨거운 열정은 이 대부흥운동의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다. 그리고 교인들이 예배 도중에 함께 소리를 내어 기도하는 의식인 통성(通聲)기도도 그의 창안이었다. 이처럼 그는 영적 감응을 선천적으로 타고난 당대 대표적인 부흥사였다. 첫날부터 성령의 불길이 일어나기 시작한 평양사경회는 집회가 계속되면서 더욱 고양되었다. 사경부흥회 기간에 있었던 회개의 역사는 이러한 개인의 내면적 죄를 고백하는데 그치지 않고, 사회 도덕적으로 이웃에게 피해를 입힌 행위에 대한 깊은 뉘우침과 용서를 비는 실천적인 회개운동으로 진행되었다. 평양부흥회가 끝난 다음달에는 서울 승동교회(勝洞敎會)에서 영계의 부흥회가 개최되었으며, 8월에는 의주에서 사경회가 인도되었다. 이처럼 평양의 장로교, 감리교 연합부흥회와 평양신학교 부흥회를 통해 평양은 부흥운동의 발원지가 되었다. 1907년의 부흥운동은 곧 '백만명구령운동'으로 발전되었다. 이 운동은 영계가 1908년 압록강 연안 순회집회를 마치고 평양에 돌아오면서 구체화되었고, 1910년 제 4회 노회에서 그가 부회장에 당선되고 전도국장을 겸임함으로써 정식으로 이 문제를 제안하여 백만명구령운동위원회를 설치하고 전도대를 전국에 파송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 운동의 결과 교인수가 급격히 늘어나, 1907년 3만 7000여명에서 1911년에는 14만 4000여명으로 4배이상 증가되었다. 1910년 한일합방을 겪은 후 이른바 105인사건으로 1912년 영계도 수난을 당했다. 당시 선천 신성학교 교사로 근무하던 그의 장남 진형이 사건에 연루되어 2년간 옥고를 겪다가 풀려났으나 고문 후유증으로 병을 얻어 1918년에 죽는 등 개인적인 고통을 겪기도 했다. 1912년 9월에는 지방별로 조직된 7개 노회가 연합하여 제 1회 조선예수교 장로회 총회를 창립했을 때, 영계는 한국인을 대표한 부회장 겸 전도국장에 선임되었다. 이때 그는 한국교회에 활기를 불어넣기 위해 중국선교를 제안하여 중국 산동성에 선교사를 파송하기도 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영계는 기독교계를 대표하여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다. 서울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할 때에 그는 참가하지 못했고, 그날 오후 황해도 장연읍교회의 특별사경회를 마친 뒤 상경하여 체포되었다. 이로 인해 그는 미결수로 2년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석방된 뒤 1922년부터 영계는 북간도를 비롯하여 전국을 대상으로 순회하면서 부흥집회를 인도하였다. 그의 부흥회 행적은 35년간 설교 2만여회, 청강자 연 380만여명, 교회 설립 60여곳이며, 이수(里數)로는 연 6000리 총 20만리에 이르며, 그에게서 세례받은 사람이 3000명 이상이고 개종자가 7만명에 이른다. 그는 부흥집회 외에도 청년운동, 농촌운동, 금주운동 등의 사회운동집회에도 종종 연사로 나가 민족의 살 길을 외쳤다. 그러나 1926년 장대현 교회 청년계층 교인들이 길선주 목사 배척운동을 벌인 것과, 1933년에는 결국 길선주 목사가 자신을 지지하는 일부 교인들과 따로 이향리(履鄕里) 교회를 세우게 된 것 등은 그의 말년의 비극이었다. 이는 교회 안의 청년-원로, 진보-보수 집단의 갈등에 기인한 것이기도 했지만, 사회주의적인 진보이념을 가진 이들이 그의 보수적 신앙에 대해 저항한 것이었다. 영계가 급격하게 '말세'를 강조한 것은 1931년부터였다. 그해 만주에서 일어난 한-중 농민분쟁인 만보산 사건이 터지고 이어 만주사변이 일어났다. 평양에서는 그 여파로 한국인들이 중국인 화교들을 습격하고 살해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때부터 그의 종말론적 신앙은 더욱 강화되어, "예루살렘 멸망!" "평양멸망!"을 외쳤고, 자기 고향 평양의 멸망을 예언하였다. 1934년 영계는 북간도와 함경북도를 순회하였고, 1935년 8월 평북 선천 월곡동교회에서 사경회를 인도하던 중 뇌일혈로 쓰러졌다. 그는 어느 정도 건강이 회복되자 그해 11월 20일 평서(平西) 노회 사경회가 강서군 고창교회에서 열렸을 때 이를 인도했는데, 마지막날인 26일 집회의 폐회축도를 마치고 그 자리에서 다시 뇌일혈로 쓰러져 6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임종 때 들은 마지막 찬송은 '예수가 거느리시니'였다. 영계의 장례식은 평양 노회장으로 12월 3일에 평양시내 각 교회의 종이 울리는 가운데 엄숙하게 거행되었다. 영계는 한국기독교회의 기초를 다진 인물이며, 한국 장로교 노회 조직의 선봉이자 한국 교회의 대부흥가이다. 특히 그는 성경공부와 열성기도를 중심한 한국기독교의 특성을 세운 목회자로 기억되고 있다. <사진>길선주 목사 가족사진. 맨 오른쪽이 길선주목사. 글/김 탁(철학박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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