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장로교, 정체성을 말하다
1. 장로교, 어디서부터 왔는가
#개혁교회에서 장로교회가 탄생하다
장로교회는 16세기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에서 탄생했다. 중세 로마가톨릭의 타락과 부패에 항거해 일어난 종교개혁은 단선적이고 획일적인 운동이 아니라 매우 복잡하고 다양한 성격을 띤 운동이었다. 루터와 멜란히톤을 중심으로 하는 독일의 루터파, 츠빙글리와 칼뱅을 중심으로 하는 스위스의 개혁파, 스위스형제단으로부터 시작해 남부 독일과 네덜란드로 확산된 아나뱁티스트, 잉글랜드를 중심으로 하는 성공회 등으로 나뉘어 있었다. 장로교회는 스위스의 개혁교회 종교개혁 운동에서 비롯됐다.
역사적으로 볼 때, 장로교회가 처음 등장한 것은 1560년 스코틀랜드였다.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자 존 녹스(John Knox)가 1560년 '스코틀랜드 신앙고백'과 '스코틀랜드 교회치리서'를 제시함으로써 스코틀랜드 장로교회가 시작됐다.
장로교회는 교회 정치의 측면에서 보자면 교회 회중들의 대표인 장로들에 의해 다스려지는 구조를 뜻한다.
개(個) 교회는 목사와 장로로 구성되는 당회(session)에 의해 치리되며, 노회(presbytery), 대회(synod), 총회(general assembly)의 상위 정치구조를 가진다. 신학적 측면에서 보면 장로교회는 스위스의 개혁교회 특히 제네바의 칼뱅주의와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
#존 녹스, 장로교의 설립자
존 녹스가 언제 그리고 어떻게 로마가톨릭에서 프로테스탄트로 회심했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분명 패트릭 해밀턴(Patrick Hamilton)과 조지 위샤트(George Wishart)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해밀턴은 루터의 영향을 받고 프로테스탄트 성향의 설교를 하다가 이단으로 몰려 1528년 세인트앤드루스(St. Andrews)에서 24살의 나이에 화형을 당했다. 위샤트는 츠빙글리와 칼뱅의 영향을 받고 종교개혁 운동을 펼치다가 1546년 세인트앤드루스에서 33살의 나이에 화형을 당했다. 지금도 세인트앤드루스에 가면 해밀턴과 위샤트의 화형 장소에 그들의 이름 머릿글자가 새겨져 있으며, 그들을 기념하는 기념탑이 세워져 있다. 녹스가 조지 위샤트의 경호원이자 추종자였다는 사실은 초기 프로테스탄트 순교자들이 그에게 미친 영향을 짐작하게 한다.
이후 녹스는 프랑스 갤리선에서 사슬에 묶인채 19개월을 보내기도 했지만 1549년 잉글랜드에 정착해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자로서 활동을 이어갔다. 하지만 잉글랜드에 '피의 메리'라 불리는 메리 튜더(Mary of Tudor, 재위 1553~1558)가 모진 박해를 시작하자 망명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녹스가 피신했던 곳이 바로 칼뱅이 사역하고 있던 스위스 제네바였다.
녹스는 1556~1559년 동안 '칼뱅 강당'이라 불리는 곳에서 영어권 피난민들을 상대로 목회를 하면서, 칼뱅과 더불어 제네바의 종교개혁을 지도했다. 이처럼 스위스의 개혁교회 운동에서 많은 부분을 공감하고 배운 녹스는 마침내 1559년 5월 스코틀랜드의 에딘버러로 돌아갔다. 이제 녹스는 에딘버러 자일스(St. Giles)교회에서 강력하게 종교개혁 운동을 펼쳤고, 마침내 1560년 의회가 신앙고백과 교회치리서를 채택함으로써 스코틀랜드 장로교회가 출발했다.
이처럼 장로교회는 스위스의 개혁교회와 신학과 정체(政體)를 공유하기 때문에 동일하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유럽 대륙에서는 개혁교회로, 영국이나 미국이나 한국에서는 장로교회로 불린다.
#위그노와 청교도, 개혁교회의 확산
스위스의 제네바를 근거지로 확산되기 시작한 개혁교회 운동은 스코틀랜드뿐만 아니라 프랑스, 잉글랜드, 독일, 네덜란드는 물론이고 폴란드, 보헤미아, 헝가리 등 유럽 전역으로 확산됐다.
그 가운데서 프랑스의 개혁교회 신자들을 위그노(Huguenot)라 부르며, 잉글랜드의 개혁교회 성도들을 청교도(Puritan)라 일컫는다. 위그노라 불린 프랑스의 프로테스탄트들은 1559년 파리에서 전국적인 대회를 개최하고 '프랑스 신앙고백'을 채택함으로써 자신들의 입장을 확고히 했다.
그러나 1560년대로 접어들면서 위그노는 발루아왕조 및 로마가톨릭주의자인 기즈(Guise) 가문과 심각한 충돌을 빚게 됐다. 평화를 이루기 위한 회담이 열리기도 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결국 1562년 3월 바시(Vassy)에서 예배를 드리던 위그노를 기즈 가문이 집단적으로 학살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때부터 프랑스에 종교전쟁이 시작됐는데 이것을 흔히 '위그노전쟁'이라 부른다.
이후 로마가톨릭과 위그노 사이에 여러 차례 유혈참극이 반복되다가 1598년 4월 13일 '낭트칙령'에 의해 비로소 프랑스의 종교전쟁이 끝이 났다. 그러다가 낭트칙령이 반포된지 100년도 채 지나지 않은 1685년에 루이 14세는 퐁텐블루칙령을 통해 낭트칙령을 취소하고 위그노들에 대해 또다시 대대적인 박해를 가했다.
그래서 한편으로 일부 위그노들은 광야에 숨어 살면서 자신들의 신앙을 지켜 나갔다. 소위 '광야교회'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지금도 프랑스 남부에 있는 위그노의 '광야박물관'에 가면 당시 위그노들이 어떤 어려움 속에서 신앙을 지켜냈는지 보여주는 역사의 흔적을 그대로 만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수많은 위그노들은 박해를 피해 유럽과 남아프리카의 여러 나라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다.
잉글랜드에서는 엘리자베스 여왕이 로마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갈등을 해결하고자 통일령을 반포해 '중도의 길'을 걷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은 그런 미봉책으로는 교회를 제대로 개혁할 수 없다고 판단해 하나님의 말씀에 따른 더욱 철저한 교회개혁을 요구했다.
원래 청교도(puritan)라는 이름은 교회 안에서 로마가톨릭적인 잔재를 깨끗이 정화해야(purify)한다는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을 비꼬아서 부른 별명이었다. 그러다가 엘리자베스를 이어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공동 왕이 된 제임스1세가 친(親)로마가톨릭 정책을 펼치면서 청교도와 더 심각한 대립을 초래했다.
결국 잉글랜드 안에서 끝까지 개혁을 추진하던 청교도 세력은 이후 정치적, 종교적 혁명을 일으켰는데 이를 '청교도전쟁'이라 부른다. 이 과정에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탄생했다. 하지만 잉글랜드에서는 더 이상 소망이 없다고 판단해 새로운 잉글랜드를 찾아 떠난 사람들도 있었으니 이들이 바로 '필그림 파더스(Pilgrim Fathers)'이다. 필그림 파더스는 스크루비, 레이던, 로테르담, 사우샘프턴, 플리머스를 방랑하다가 1620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자신들이 '뉴잉글랜드'라 부른 미국 동부에 도착했다.
#뉴잉글랜드를 넘어 한반도로
뉴잉글랜드에 도착한 필그림 파더스의 후손들은 미국장로교회를 세웠고, 그 교회를 통해 이 땅 한반도에도 복음이 전해졌다. 130여 년 전 미국의 북장로회와 남장로회, 캐나다 장로회, 호주 장로회의 선교사들이 복음의 씨앗을 들고 한반도에 옴으로써 한국 장로교회가 탄생했다.
- 박경수 교수/장로회신학대학교
2. 정체성의 근간, 신앙과 신학
장로교회는 개혁교회의 한 형태이고 장로교회의 신학은 '개혁신학'이다. 개혁교회의 첫 번째 신학자는 취리히의 종교개혁자 츠빙글리(Huldrich Zwingli)이고 개혁신학의 기초를 완성한 이는 주네브의 종교개혁자 칼뱅(Jean Calvin)이다. 따라서 장로교회의 신학 즉 개혁신학이 무엇인가 하는 이해는 16세기 종교개혁운동의 핵심적인 사고들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종교개혁운동의 핵심적인 사고는 세 가지 구호로 요약돼 왔다. 즉 '오직 믿음으로(sola fide)', '오직 은혜로(sola gratia)', '오직 성경으로(sola Scriptura)'라는 것이다. 이런 사고들은 모두 로마 가톨릭의 교리들에 대한 반작용이었다.
위의 세 구호 중 두 가지 즉 '오직 믿음으로'와 '오직 은혜로'는 구원론과 관계된 것들이다. 즉 우리가 의롭다 함을 얻는 것, 우리가 구원 받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 그리고 '오직 은혜로' 되는 것이라는 성경적 이해이다. 이것은 구원을 위해 선행을 강조한 로마 가톨릭의 교리를 거부하는 것이다.
'구원을 받으려면 믿음만으로는 안 되고 선행을 많이 해야 하며, 자기의 구원을 이루기에 충분하고도 남는 공덕을 쌓은 성자들의 잉여분의 공덕은 교회에 비축되고, 교회에 헌금을 하거나 면죄부를 사면 그만큼 교회에 비축된 잉여분의 공덕에 힘입어 연옥에 가서 지낼 기간의 얼마를 탕감 받을 수 있다'는 것이 그들의 교리였다. 그런 교리가 종교개혁자들에게 있어서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율법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1:17, 3:20ㆍ28)" 한 성경의 가르침을 정면으로 부인하는 것이었다.
'오직 믿음으로'라는 구원관은 결국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라는 구원관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로마 가톨릭의 '선행에 의한 구원' 교리나 '공덕주의' 교리, 그리고 이와 연관된 '면죄부' 교리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중보적 능력을 가졌다는 많은 성자들을 만들어냈고, 그 정점에 성모 마리아를 두게 됐다. 로마 가톨릭의 '마리아론'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인류의 공동대속자(coredemptrix)로 추앙하며 기도와 찬양의 대상으로 삼게 됐던 것이다.
종교개혁자들의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라는 구원관은 이런 로마 가톨릭의 마리아론이나 성자숭상의 관행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종교개혁자들은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행4:12)"고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행4:8)" 행한 증언을 그의 자칭 계승자들이 지어낸 말보다 더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오직 믿음으로'의 신학은 선행이나 의로운 삶의 필요성과 당위성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강조하는 것이며, 단지 그것들을 구원의 조건이나 수단으로 여기지 않을 뿐이다. 구원을 얻기 위해서 선행을 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선행을 하는 것이다. 택하심을 받고 믿음을 가진 이들에게 당연히 뒤따르는 결과가 선행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사역은 믿음을 주시고 그 믿음 때문에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 믿음에 걸맞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선을 행하며 의롭게 살게 하시는 성화의 역사로 계속되는 것이다. 성화의 삶은 구원 받은 열매이며 표지이고 증거이지 결코 구원의 전제나 수단이 아니다. 칭의와 성화는 모두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오직 믿음으로'라는 개신교의 핵심교리는 '행위에 의한 구원'이라는 비성경적 교리를 배격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믿음을 또한 하나의 행위로 환원시키는 오류를 범하기 쉽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는 말은 '내가 잘 믿어 구원받는 것'이라는 뜻이 아니다. '내가 잘 믿으면 구원받고, 못 믿으면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은 율법주의로의 회귀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잘 믿는지 아닌지를 보시고 이에 따라 구원의 여부를 정하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믿기도 전에 우리를 택하셨다. 그리고 그 택하심을 따라 정해진 때에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고, 당신께서 주신 그 믿음만을 보시고 우리를 의롭다 하시며, 또 성령의 역사로 우리를 실제로 의로운 존재들로 날마다 조금씩 변화시켜주시는 것이다. 따라서 구원의 모든 과정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역이다. '오직 믿음으로'라는 말은 그러므로 '오직 내가 잘 믿어서' 구원 얻음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직 나로 하여금 믿게 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로 인해' 구원을 얻는다고 말하려는 것이다.
여기서 '오직 믿음으로'의 신학은 자연스럽게 '오직 은혜로'의 신학일 수밖에 없음이 드러난다. '오직 은혜로'라는 사고는 '신인협력설' 혹은 '공역사상' 즉 우리의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만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의지와의 협력으로 이루어진다는 로마 가톨릭의 주장을 배척하는 것이다. 앞서서 믿음이 또 하나의 행위로 여겨져서는 안 된다고 말했거니와 그것은 믿음이 우리 자신의 의지와 결단과 노력의 산물이 아니라는 말이다.
사도 바울이 에배소서 2장 8~9절에서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고 말한 대로 믿음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이들에게 주시는 은혜의 선물이고, 우리가 스스로 믿어 구원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택해주시고 믿게 해주시는 것이며, 따라서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와 우리의 의지가 협력해서 이루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은혜로 행하시는 일이라는 것이 종교개혁자들의 확신이었다.
직접적으로 구원론에 관련된 것은 아니나 종교개혁운동의 한 핵심 사고로 구호화한 것이 '오직 성경으로'이다. 이것은 '교회의 전통'에 성경과 같은 권위를 부여한 로마 가톨릭의 신학에 맞서는 것이다. 즉 오직 성경만을 진리의 원천과 규범으로서 인정하는 것이다. '오직 성경으로'는 그 자체가 하나의 신학사상이기도 하지만 또한 하나의 신학방법론이기도 하고 하나의 신앙개혁의 방법이기도 했다. 종교개혁자들은 '원천으로 돌아가자(ad fontem)'는 당대의 문예부흥과 인문주의의 방법론을 적극적으로 수용해 중세교회의 해석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히브리어와 헬라어로 된 원문성경을 각 나라 말로 번역하고 출판해 보급함으로써 모든 사람이 직접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수 있게 했다.
이렇게 '오직 성경으로'의 신학은 성경을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듣는 노력이었으며 성경의 가르침에 어긋나며 우리의 하나님 경배와 신앙의 이해를 오도할 수 있을 모든 오류들을 철저히 제거하려 했던 신앙개혁운동이었다. '개혁교회'만 종교개혁운동으로부터 유래된 교회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유독 개혁교회에 '개혁'이라는 호칭을 붙인 것은 바로 이 교회들이 성경의 모든 증언과 가르침에 충실하려고 했으며, 따라서 그 교회들의 개혁운동이 총체적이고 철저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항상 개혁하는 교회, 그것이 바로 장로교회의 전통이다.
- 이수영 목사/ 새문안교회
3. 교직은 평등, 위계는 인정
보편 교회에 속하는 우리교단의 '대한예수교장로회(the Presbyterian Church of Korea)'라는 명칭이 보여주듯, '장로회(長老會)'(딤전 4:14; 장로의 회, the presbytery, the council of elders)라는 교회 정치체제를 가지고 있는 우리교단은, 좁게 말하면 '장로교회(長老敎會)'에 속하고, 넓게 말하면 '개혁교회(改革敎會)'에 속한다. 장로교회의 정치, 직제, 권징(치리; discipline)은 상호 불가분리의 관계 속에 있어서 함께 논의하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이번에 '장로교회의 직제'에 대해 먼저 기술하고, 다음호에서 '장로교회의 정치와 권징'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일상적으로 '교회의 직제'(office; 독어-Amt, 네덜란드어-ambt) 또는 '교회의 직분'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지만, 교단 헌법은 이것을 '교회의 직원(職員)'으로 표현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개혁교회는 4중직인 '목사, 교사(doctor; 신학대학교의 교수로서의 목사), 장로, 집사'를 주장하고, 장로교회는 크게 장로와 집사라는 직제를 주장하는데, 멜빌(Andrew Melville, 1545~1622)이 주장한 두 장로설을 받아들여 '목사로서의 장로', '치리 장로', '집사'로 세 직분을 구별한다.
우리교단은 미국장로교회의 직제를 모델로 삼으면서도, 직제를 더욱 다양하게 발전시켜 항존직(목사로서의 장로, 치리장로, 집사)과 임시직(전도사, 권사, 전도인, 서리집사)을 구별하고, 목사로서의 장로와 치리 장로만 치리회(당회, 노회, 총회)의 회원이 될 수 있게 제정했다.
직제 유용론(有用論)
기독교 2000년 역사에서 교회의 직제에 대한 다양한 이해가 있지만,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직제 절대론(絶對論)의 입장이다. 직제 절대론의 입장은 로마 (천주)교회에서 발견된다. 여기서 교황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목자와 교사로서 말할 때, 그의 명령과 말은 신앙과 도덕에서 전적으로 무오(無誤)하다.
여기서 직제는 교회의 본질에 속하고, 교황은 '그리스도의 대리자'이다. 둘째는 직제 무용론(無用論)의 입장이다. 이런 입장은 기독교 역사 속에서 일부 '파라-처치(para-church)' 운동 속에서 자주 나타난다. 여기서는 '만인제사장직(the priesthood of all believers)'만이 주장되고, 다른 직제는 무용하고, 불필요하기에 전적으로 배제된다. 셋째는 직제 유용론(有用論)의 입장이다. 대부분의 기독교(개신교)가 여기에 해당되지만, 특히 장로교회로서의 우리교단은 여기에 해당된다. 여기서 직제는 교회의 본질에 속하지는 않지만, 교회 본질과 교회 구축과 성장 및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필요하며, 유익한 도구와 수단이 된다.
일반 직제(만인제사장직)와 특별 직제
비록 마틴 루터를 비롯해 종교개혁자 마틴 부처(Martin Bucer)와 칼뱅은 만인제사장직을 강조해 16세기 중세 로마(천주)교회의 직제 절대론을 강력하게 비판했지만, 직제 유용론의 입장에 서서, 일반 직제(만인제사장직)와 함께 특별 직제도 주장했다. 루터의 경우, 어린 아이도 만인제사장직의 관점에서 제사장이 될 수 있지만, 회중 속에서 설교하고, 성례전을 거행하고, 치리하는 것이 모든 신자들에게 허락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사명을 받고 훈련받아 그 기능을 수행하기에 합당하게 임직된 직분을 받은 자가 이 일을 시행하는 것이 올바르다고 판단했다.
칼뱅의 경우 교회의 직제는 교회의 본질(esse ecclesiae)은 아니지만, '좋은 교회(bene esse ecclesiae)'를 만들기 위해 필요하고도 중요한 수단으로써 일반 직제(만인제사장직)와 함께 교회의 특별 직제에 속하는 4중직(목사, 교사, 장로, 집사)을 주장했다. 우리교단도 모든 교인을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 정의함으로써, 일반 직제(만인제사장직)를 주장함과 동시에 특별 직제(항존직과 임시직)도 강조하고 있다.
직제 유용론의 입장에서 일반 직제와 특별 직제를 다같이 균형 있게 주장해야 할 한국 장로교회의 일부 목회자들이나 일부 성도들이 일반 직제와 특별 직제를 상호 배타적으로 이해해, 특별 직제만을 인정해 직제 절대론에 빠지는가 하면, 일반 직제만을 주장해 직제 무용론에 빠지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직제의 삼위일체론적, 교회론적 기초와 근거
장로교회에서 모든 직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권(Christocracy)과 성령의 통치권(Pneumatocracy) 하에 있어야 한다. 죽었다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도 주님으로서 그의 말씀(성경과 설교 등)과 그의 영(성령)을 통해 모든 직제 안에서 자신의 통치권을 행사하신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대한 자신의 통치권을 어느 누구에게도 양도하신 적이 결코 없다. 그러므로 교회의 직제는 기독론(그리스도론)적 근거와 기초를 가진다. 왜냐하면 그가 항상 교회의 머리이시기 때문이다.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제 안에서 통치하시고 현재하시고, 현존하시는 방법은 다른 방법이 아니라, 바로 말씀과 성령을 통한 방법이다.
종교개혁과 장로교회 전통 속에서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이라는 원리는 항상 절대적이다. 기독교(개신교)가 가지고 있는 공통된 교회의 표지는 하나님의 말씀이 올바르게 선포되는 곳에 교회가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직제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와 기초를 가진다.
성령께서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직제 속에서 현재케 하시고, 성령께서 말씀을 효과적이게 하시고, 성령께서 직제를 하나님의 은혜의 도구로 사용하셔서 능력 있게 하신다. 우리가 심고, 물을 준 것을 자라나게 하시는 분은 성령 하나님 자신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께서 교회의 주체이시다. 그리고 직제가 하나님의 은혜의 도구와 수단이라는 관점에서 모든 직제는 교회론적 근거를 갖는다. 모든 직제는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의 교회를 위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사용돼야 한다. 모든 신자들과 교회의 모든 직원(항존직과 임시직)과 교회의 모든 치리회(당회, 노회, 총회)는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대리자가 결코 될 수 없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통치와 주권과 권위 하에 수단과 도구와 섬김으로 항상 머물러 있어야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봉사(섬김) 속에 있는 직제
교회의 모든 직제는 교회의 주인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됐고, 모든 직분은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섬김과 봉사에로 부름 받은 직분이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어떤 사람을 직분자로 선출하는 교회나, 하나님으로부터 부름 받고 교회로부터 직분자로 선출된 사람은 그 직분이 하나님과 교회와 하나님 나라를 섬기기 위한 직분임을 철저하게 명심해야 한다. 왜냐하면 교회의 직제는 교회나 성도들에 대한 지배권이나 군림의 직분이 아니라, 봉사에로 부름 받은 종의 직분이기 때문이다.
본질상 동등성, 기능상 차이성 속에 있는 직제
로마(천주)교회에서는 직제 간에 계층구조적인 서열(hierarchy)이 심각하다. 그러나 종교개혁과 장로교회에서 모든 직제는 본질상 동등성(parity)을 가지며, 기능상 차이성을 보여준다. 동일한 성령께서 주신 각각 다른 은사와 기능에 기초한 직제는 제 역할과 기능을 다함으로써 하나님과 교회의 각 지체들과 하나님의 나라에 봉사의 사명을 다할 수 있을 것이다.
상호 균형과 상호 조화 속에 있는 직제
장로교회의 직제는 통일성 속에서의 다양성과, 다양성 속에서의 통일성을 추구해야 한다. 협의회성(collegiality; collegium)과 대표성의 원리에 입각해 구성된 치리회 속에서 어느 한 사람이나 어느 한 직제에 절대적 힘이 주어질 경우, 장로교회는 교황이나 감독교회로 변질될 수 있고, 그 반대로 다양성만 지향될 경우, 교회가 무질서해 혼란에 빠질 수 있다.
구속사적 적응성과 개방성 속에 있는 직제
장로교회는 성경적 관점으로부터 직제를 도출해야하는 동시에, 하나님께서 구속사(救贖史) 속에서 성령을 통해 각 교회에게 허락하시는 직제에 대해 항상 개방된 자세를 가져야 한다. 그러나 66권 정경(正經)이 확정된 이후, 구약의 예언자와 신약의 사도와 본질상 동등한 직제로 이해되는 직제는 절대로 허용될 수 없다.
마틴 부처와 우리교단이 주장하는 교회의 세 가지 표지(말씀 선포, 두 가지 성례집례, 치리 시행)를 따를 경우, 교회의 본질과 표지를 잘 유지하기 위해 장로교회는 기본적으로 '목양(牧羊)하는' 포괄적 기능 속에 '가르치는' 기능, '다스리는' 기능, '돌보는' 기능을 항상 균형 있게 포함시키고, 실천해야 할 것이다.
어떤 직분을 통해 이 중요한 기능을 구현할 지에 대한 문제는 성경을 표준으로 구속사적 적응성과 개방성을 가지고 교회가 결정해야할 것이다. 한국 장로교회는 미국 장로교회의 직제를 모델로 삼으면서도, 비(非) 장로교회로부터 또는 성경적 관점으로부터 전도사, 권사, 서리집사 같은 직제를 추가적으로 채택했다.
- 최윤배 교수/장로회신학대학교ㆍ조직신학
4. 바른 질서 위한 수단 '권징ㆍ치리'
하나님의 영광과 권위를 위한 권징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국민의 관심이 가장 높은 분야는 '경제'에 이어 '정치' 분야라고 한다. 일반 사회와 국가라는 '세상(세속) 정치'에 대한 국민의 지대한 관심은 때로는 실망해 부정적으로, 때로는 기대감으로 긍정적으로 나타난다. 기독교회사에서 일부 기독교 종파는 정부나 국가가 하나님을 대적(對敵)하는 것으로 이해해 정부나 국가를 완전히 무시했다.
장로교회는 정부나 국가를 하나님의 섭리와 창조 질서의 영역으로 이해해, 때로는 하나님의 선한 도구로서의 역할을 하는 정부나 국가에 대해 협조적이면서도, 때로는 악한 정부나 국가에 대해 비판적 자세를 취했다. 국어사전은 '정치(政治)'를 '국가의 주권자가 그 영토와 국민을 다스리는 일'이라고 정의한다.
그렇다면 기독교 및 교회와 관련된 '교회 정치'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어떠한가? 항간에 '그 목사는 지극히 정치적이다'라든지, '그 장로는 지극히 정치적이다'라는 말 속에 '교회 정치'가 매우 부정적으로 이해된 나머지 정치에 관심하거나 정치에 관련된 목회자나 성도는 '지극히 세속주의적이며, 거룩하지 못하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장로교회 입장에서 과연 '교회 정치'는 이처럼 부정적으로만 이해돼야하는가? 세상 정치에 대해서도 다양한 이론들이 있듯이 교회 정치에 대해서도 다양한 이론들이 있다. 장로교회의 정치에 대해 살펴보기 전, 먼저 교회 정치에 대한 몇 가지 견해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17세기 중엽 영국의 퀘이커교도(Quakers)는 모든 교회 정치를 원리상 거부했다. 그들에 의하면, 모든 외형적인 교회의 형성은 필연적으로 부패하여 기독교 정신과 정반대의 결과를 초래하며, 교회의 외형적 정치제도는 신적 측면을 희생시키고, 인간적 요소를 증가시킨다는 것이다.
둘째, 에라투스(Eratus, 1524~1583)를 따르는 에라투스주의자들은 교회는 국가가 제정한 법규에 따라 존재하며, 형성된 일종의 사회로 간주한다. 교회의 직원들은 말씀을 가르치고 선포하는 자들인데, 정부나 국가의 지도자들로부터 위임받은 권한을 제외하고는 그들에게 다스릴 권한이나 능력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교회를 치리하고, 권징을 시행하고, 심지어 파문(破門)을 선고하는 것도 국가에 위임된 기능이다. 교회의 견책은 그 시행이 교회의 합법적인 직원들에게 위임된 경우라 할지라도 국가나 정부가 주는 형벌이다.
셋째, 감독제도를 주장하는 사람들에 따르면,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운영을 직접적으로 그리고 전적으로 사도들의 후계자들인 고위 성직자들 또는 감독들에게 위임하셨으며, 이 감독들은 구별되고, 독립적이며, 무제한으로 계속할 수 있는 성직으로 만드셨다고 말한다. 이 교회 정치제도에서 신자들의 공동체는 교회 정치에 절대로 참여하지 못한다.
교회사에서는 초기에 로마(천주)교회가 이 같은 정치 제도를 채택했다. 영국에서는 이 같은 정치 제도가 에라투스주의 정치제도와 결합되어 나타났다.
넷째, 로마(천주)교회의 교황정치제도는 감독제도의 논리적 귀결이다. 로마(천주)교회의 제도는 자신들의 교회 안에 사도들의 후계자들이 포함돼 있으며, 특별히 사도들 가운데서도 수위를 차지하는 베드로의 후계자가 자신들 안에 있음을 강조한다. 그들 가운데 있는 베드로의 후계자는 그리스도의 특별한 대리자가 되는 셈이다. 이 교황 밑에 성직자들이 계층구조적인 질서를 통해 서열화돼 있다. 신자들은 교회 정치에 대해 발언권이 거의 전무하다.
다섯째, 회중파 또는 회중교회제도는 소위 독립교회의 제도로 부를 수 있다. 이 제도에 의하면, 교회 또는 회중은 독립된 완전한 교회이다. 이 같은 교회에서 교회의 치리권은 독점적으로 자신들의 일을 규정할 수 있는 교회의 회원들에게 있다. 직원들은 단지 지교회에서 가르치고, 교회의 제반사를 관리하도록 임명되었을 뿐, 교회의 회원으로서 그들이 소유하고 있는 것 이상으로 다스릴 권한이 전혀 없다. 필요할 경우, 공동의 유익을 위하여 여러 교회들이 서로 연합하여 교회 회의나 지회나 지방회(地方會)를 구성할 수는 있으나, 이 연합체의 결정 사항은 권고적이거나 선언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떤 특정한 교회에 법적인(교회법적인) 구속력을 갖고 있지 않다.
개혁교회와 장로교회의 정치제도는 대체로 두 가지 방향에서 발전했다. 국가교회를 형성한 개혁교회와 장로교회에서는 국가의 통수권자가 교회의 수장의 역할을 했고, 정교분리(政敎分離)의 원칙에 따라서 국가로부터 독립한 자유(自由) 개혁교회와 자유 장로교회에서는 교회 자체가 독립적인 교회정치법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 두 경우 모두, 교회 정치는 하나님께서 교회의 유익을 위해 허락하신 합법적인 질서, 곧 '하나님의 질서(the order of God; ordo Dei)'에 속한다. 우리 교단은 정교분리 원칙에 입각해, 자유 장로교회에 속한다. 또 두 장로설에 기초해 목사(설교와 치리를 겸하는 자)와 장로(치리만 하는 자)로 구성되는 당회, 노회, 총회라는 치리회(治理會)를 가지고 있다. 각급 치리회는 고유한 특권이 있으나 순차대로 상급치리회의 지도와 감독을 받는다.
칼뱅은 교회의 권위를 교리, 입법, 재판에 관한 권위로 구별하고, 권징을 재판과 밀접하게 연결시켰다. 대체로 칼뱅과 자유 장로교회 전통을 따라, 교단의 '헌법'은 크게 네 가지 내용, 곧 교리, 정치, 권징, 예배와 예식을 담고 있다. 헌법의 내용은 항상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을 표준으로, 구속사와 교회 속에서 성령의 역사(役事)에 대한 개방성을 가지고 제정돼야 한다.
그러므로 '헌법'의 내용은 항상 성경에 종속되는 동시에 성경의 내용과 정신을 올바르게 반영해야 한다. '헌법'은 '하나님의 질서'로서의 '교회 정치'를 올바르게 구현하기 위한 중요한 수단과 도구와 방법이다. 치리회를 중심으로 갈등은 언제든지 일어 날 수 있으며, 교회가 제정한 '헌법'은 성경만큼 완전한 것은 아니므로, 부족한 부분은 치리회를 통해 개정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질서'로서의 헌법은 항상 '교회 정치'로서 최대한 존중돼고, 실천돼야 한다.
한국 장로교회의 '교회 정치'를 중심으로 가끔 덕이 되지 않는 일부 목회자와 성도의 행동과는 별도로, 일부 목회자나 일부 성도에게 가끔 발견되는 '교회 정치'에 대한 퀘이커교도적이거나 회중교회적인 사고는 반드시 지양(止揚)돼야 한다. 네덜란드의 개혁파 윤리학자 까이떼르뜨의 책 제목인 '모든 것이 정치적이지만, 정치가 모든 것은 아니다(Alles is politiek, maar politiek is niet alles)'라는 말은 한국 장로교회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겠다. 칼뱅과 마르틴 부처는 '인간의 법'에 기초해 교회와 교인을 얽어매는 로마(천주)교회의 전제적(專制的) 교회 정치와 성경에 기초한 하나님의 질서로서의 교회법을 완전히 부정하는 무질서한 급진파 종교개혁 진영을 동시에 비판함으로써, 성경에 기초한 교회 정치의 원리와 실천을 통해 교회와 성도의 참된 자유를 실현시켰다.
마르틴 부처(Martin Bucer)는 '참된 목회학'(1538)에서 권징을 교회의 표지로 매우 강조했다. 우리 교단도 권징을 교회의 표지로 간주하지만, 칼뱅은 권징을 교회의 표지로 간주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칼뱅은 그리스도에 대한 구원하는 '교리'를 '교회의 영혼(anima)'으로, '권징'을 '교회의 근육(힘줄, nervus)'에 비유할 만큼 '권징'을 강조했다. 칼뱅은 권징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주장하면서도, 권징의 절차와 방법에서 신중하게 접근하여 엄격주의를 배격하고, 온유한 심정과 사랑(갈 6:1; 고후 2:7~8)을 강조했다.
마르틴 부처와 칼뱅에게서 권징은 '사랑의 매'로서의 '치유와 구원의 수단'에 해당된다. 일부 기독교 교파는 권징을 선택론과 결부시켜 '출교(ex-communicatio)' 받은 사람을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히 저주받은(anathema) 자로 간주한다. 그러나 마르틴 부처와 칼빈과 장로교회는 '출교' 조차도 선택론과 결코 결부시키지 않는 신중함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 교단은 장로교회의 권징에 대한 성경적 이해를 잘 계승했다. 우리 교단의 헌법에 따르면, '권징'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주신 권리를 행사하며 그 법도를 시행하는 것으로써 헌법과 헌법이 위임한 제 규정 등을 위반하여 범죄한 교인과 직원 및 각 치리회를 권고하고 징계하는 것'이다. 또한 권징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과 권위를 위하여 범죄를 미연에 방지하고 교회의 신성과 질서를 유지하고 범죄자의 회개를 촉구하여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게함'이다.
칼뱅이 권징을 강조하고, 마르틴 부처와 대부분의 세계 개혁교회와 장로교회가 권징을 교회의 표지로 간주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성화와 성결을 통한 교회의 도덕성과 거룩성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강조한 결과이다. 먼 나라에 있는 개혁교회나 장로교회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몇 십 년 전의 한국 장로교회의 당회록을 읽어보아도, 우리는 성경과 온유한 심정에 기초한 올바르고도 책임적인 권징을 통해 성도와 교회의 성화의 삶을 강조하고 실천함으로써 성도와 교회의 거룩성을 잘 유지해 그 당시 한국사회에 모범과 귀감이 돼 존경과 신뢰를 얻었음을 알 수 있다.
- 최윤배 교수/장로회신학대학교ㆍ조직신학
5. 그리스도인의 존재의 목적 '예배'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그 분께 예배하도록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또한 그 분께 예배하도록 우리에게 명령하셨다.”
장로(개혁)교회 예배를 연구한 신학자 휴스 올리펀트 올드는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이 그 분께 예배하도록 하기 위함이라면서, 그렇기 때문에 예배는 우리 인간 존재의 중심에 자리한다고 했다.
예배가 우리 삶의 중심에서 멀어질 때,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신앙도 멀어지고,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존귀한 피조물로서의 인간의 위치도 변두리로 밀려나게 된다. 인간은 하나님을 중심에 두고 예배함으로써 참 인간일 수 있고, 온 피조물의 중심에 위치할 수 있다.
오늘의 교회, 특별히 한국 장로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지금 어디쯤 자리하고 있는가? 우리 개인과 교회의 중심에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분명하게 자리하고 있는가? 아니면 예배가 가장자리로 밀려난 채 다른 것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지는 않는가? 그리고 그것 때문에 지금 한국교회와 신자들은 중심을 잃고 영적 거리를 방황하고 있지는 않는가?
왜 예배하는가
"너희 권능 있는 자들아 영광과 능력을 여호와께 돌리고 돌릴지어다.
여호와께 그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예배할지어다(시 29:1~2)"
우리는 장로교 신앙의 근본을 요약한 웨스트민스터 요리문답을 잘 알고 있다. 요리문답의 제1문항은 '인간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인가'를 묻고 있으며, 이에 대한 대답은 '인간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 분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다'라고 명시하고 있다.
그러면 무엇을 통해서 우리 인간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 분으로 인해서 영원토록 즐거워 할 수 있는가? 그것은 우리가 늘 드리는 바로 그 '예배'다. 예배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께 언제나 영광을 돌리며, 또한 하나님께 드리는 그 예배를 통해서 그 분이 주시는 은혜와 사랑을 입으며 늘 즐거워 할 수 있는 것이다.
장로교는 어떻게 예배하는가
지상의 모든 교회는 한 하나님을 믿지만 그 하나님을 예배하는 방식은 다양하다. 각 교회나 교파의 전통에 따라서 우리는 다양한 형식과 모습으로 하나님을 예배한다.
그러므로 모든 교회들은 자신이 속한 교회(교파)의 전통을 이해하고, 이를 오늘의 예배 현장에서 적용할 수 있어야 한다.
한국 장로교회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는 세계교회의 일원이면서 한편 장로교회로서의 예배에 대한 정신과 고유한 원리를 갖고 있다.
먼저 장로교회의 예배는 '하나님의 주권'에 초점을 맞춘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창조주시요, 우리 인간은 그 분 앞에 연약한 피조물이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께 나아가 마땅히 그 분께 영광을 돌리고 그 분께만 예배해야 한다.
그러나 오늘의 예배 현장을 보면, 하나님의 주권과 영광은 사라지고 인간들이 만든 의식과 떠드는 소리만 넘치고 있다. 하나님이 없이 우리 인간들이 인간의 기쁨을 위한 시간을 예배라는 이름으로 포장해서 진행하고 있다. 오늘의 장로교회는 자신들의 예배가 하나님의 주권과 영광을 위한 예배일 때, 진정한 예배의 의미와 가치를 갖게 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둘째로 장로교 예배는 '성경'에 근거해야 한다.
장로교 신학의 창시자인 칼뱅은 예배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충실해야 한다는 입장에서, 자신의 예배 형식의 근간을 사도행전 2장 42절에 두었다. 그래서 '말씀', '교제(봉헌)', '성찬', '기도'를 예배의 핵심 요소로 규정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의 장로교회 역시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서 어떤 예배를 원하시는지를 분명히 알고, 이를 실천하는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 성경은 모든 예배의 정신과 원리를 제공하는 교과서가 되기 때문이다.
셋째로 장로교 예배는 '설교'를 예배의 핵심 요소로 간주하고 있다.
물론 예배의 모든 순서들은 하나하나가 다 중요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예배 시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설교는 개신교 전통에 따라 예배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다. 따라서 장로교 설교자들은 예배를 위한 준비와 함께 설교를 위해 최선을 다 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있고 생명력 있게 역사하는 예배 현장에서는 오늘도 사도행전의 역사가 반드시 일어날 것이다.
넷째로 장로교 예배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중요시 한다.
기독교 예배는 성령의 사역(work)이다. 즉 인간들에 의해 준비된 예배가 성령의 역사하심 속에서 완성되어진다는 사실이다. 신령한 예배는 성령의 인도하심 속에서 이루어진다. 따라서 모든 예배인도자들은 성령의 역사가 예배의 원동력임을 알고, 예배 시간을 통해 겸손히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하고 의지해야 한다. 성령이 없는 예배에는 인간들의 삭막한 의식만 있을 뿐이다.
예배, 교회 존재의 근거
신학교에서 예배의 중요성에 대한 강의를 하면서 학생들에게 이런 말을 한다. 교회가 1년 구제와 봉사를 안한다고 해서 교회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설령 교회가 1년 이상 전도를 하지 않는다고 해서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만일 1년 간 교회가 예배를 드리지 않았다고 생각해보자. 과연 그 교회가 존재할 수 있을까?
예배는 교회가 교회로 존재할 수 있는 근간이요, 개인의 신앙을 보존케 하는 토대가 된다. 교회는 예배 없이 존재할 수 없다. 교회는 예배를 통해서 복음의 본질과 신앙을 지킬 수 있으며, 또한 그것을 계승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오늘 한국 장로교회와 목회자들은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해야 한다. 교회와 목회자가 해야 할 가장 첫째 되는 사명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와 예배를 통해서 선포되는 말씀이다. 교회는 이 일을 가장 우선으로 알고, 이를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
목회자 역시 마찬가지다. 예배와 설교가 제대로 되지 않는데, 다른 것을 아무리 바쁘게 따라다녀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것은 헛된 수고일 뿐이다. 목회자는 예배와 설교에 대한 기본적인 훈련과 함께 거기에 대한 충분한 지식과 능력을 갖추고, 그 다음에 다른 것들(선교, 교육, 봉사, 행정, 상담 등)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오늘의 한국교회 문제는 예배의 문제다. 과연 지금 한국교회와 목회자들이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를 바로 이해하고, 그 예배를 위해서 최선을 다하며, 예배 현장마다 영적 생동력과 은혜가 넘쳐나고 있는가? 하나님 보시기에 지금 우리 예배 현장은 어떠한가? 온전한 예배는 온전한 교회를 만들고, 거룩한 예배는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을 만들어 낼 것이다.
- 이현웅 교수/한일장신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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