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꾸는 교회, 꿈대로 되는 교회
느헤미야 2:11-20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삶의 에너지가 여러 가지 있는데 그중의 하나가 꿈입니다. 꿈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의 무의식 세계에서 일어나는 꿈 곧 ‘드림(dream)’이고, 또 하나는 우리의 의식 세계에서 일어나는 꿈 ‘비전(vision)’입니다.
먼저 dream이라고 하는 꿈은 일반적인 꿈입니다.
잠잘 때, 보통 사람은 평균 하룻밤에 세 번 정도 꿈을 꾼다고 합니다. 꿈은 우리 안에 계시는 “하나님의 영적 메시지”입니다. 우리 안에 영으로 계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느낌과 어떤 상징으로, 어떤 말씀으로 메시지를 주십니다. 꿈은 나와 하나님의 관계를 연결해 주는 무의식의 통로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자주 꿈을 꿉니다. 그리고 그 꿈을 해석하는 지혜를 받습니다. 요셉이 그랬고 다니엘이 그랬습니다.
꿈에 우리가 많은 것을 보게 되는데, 그 중심에는 반드시 하나님이 계십니다. 때로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못되면, 꿈은 그것을 바로 잡으라는 신호를 보내고, 꿈은 하나님만 아시는 어떤 미래의 일을 미리 알리기도 하고, 대비시키시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꿈에서 전등이나 촛불이 꺼진 것을 보았다면, 그것은 자신의 신앙의 문제가 생겼거나, 교회 안에 어떤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꿈에 목욕을 하거나, 발가벗는 꿈을 꾸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질책 받을 만한 일을 내 마음속에 숨기고 있기 때문이고, 꿈에 집이나 자동차가 부서졌다면, 내 삶에 심각한 상처를 입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자주 꿈을 통해 말씀하시고, 꿈을 통해 우리의 현재와 미래를 조명해 주십니다.
그런가하면 비전(vision)이라고 하는 또 하나의 꿈은 하나님이 우리 의식 세계 속에 넣어주신 꿈입니다.
무의식의 세계 속에 상징적인 꿈으로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의식 세계 속에서도 분명한 메시지로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비전입니다. 일반적인 꿈이 우리의 의지 밖에 있다면, 비전은 우리의 의지 안에 있습니다. 애굽의 감옥에서 관원들이 꾼 꿈은 일반적인 꿈, 드림이었습니다. 그러나 에스겔이 그발 강가에서 보았던 환상은 비전이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에게 현몽했던 천사의 꿈은 드림이었습니다. 그러나 밧모섬에서 사도 요한이 보았던 것은 비전이었습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짓고 보았던 것은 드림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엘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신 꿈은 비전이었습니다. 요엘 2:28입니다.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여기서 말하는 ‘꿈’, ‘이상’이 비전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에게 비전을 두고 행하십니다. 이 비전을 세상적인 말로 표현하면 ‘열정’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미국의 존경받는 사상가인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열정을 상실한 인생보다 더 노쇠한 인간은 없다.” 영국이 낳은 세계적인 문호 윌리암 세익스피어는 “내 안에는 여름처럼 사그라지지 않는 열정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성공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그 안에 여름처럼 사그라지지 않는 열정, 즉 비전이 있다는 것입니다. 비전을 성경적인 말로 하면 ‘소원’입니다. 빌립보서 2:13입니다. “너희 안에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하나님은 우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십니다. 이 소원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비전을 주실 때에, 우리 마음에 생겨나는 마음의 태도입니다. 시편 37:4입니다.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에 소원을 주시고, 그 소원을 이루시기 원합니다. 열정적인 계절, 이 여름에 여러분 안에 사그라지지 않는 소원이 있으십니까? 여름교육을 준비하고, 60주년 기념관을 건축하려는 것도 우리 안에 있는 사그라지지 않는 소원입니다. 개인의 소원이든 교회의 소원이든 그 소원을 위해 최선을 다해 기도하고 노력하고 계십니까?
오늘 느헤미야가 보여준 메시지가 그것입니다. 느헤미야는 눈물의 사람이었습니다. 느헤미야 1장은 눈물을 주제로 합니다. 조국의 멸망과 예루살렘의 황폐함으로 인하여 느헤미야는 울었습니다. 그 눈물은 기도를 낳았습니다. 느헤미야 2:1~10은 느헤미야의 기도입니다. 느헤미야는 무너진 예루살렘을 재건하기 위해 페르시아 왕에게 나아가 조서를 요구했습니다. 조서는 왕의 도장이 찍힌 통행 증명서였습니다. 조서를 발급받아 예루살렘으로 가서 예루살렘을 재건하는 것이 그의 꿈이었습니다.
이 조서는 영적인 의미에서 하늘의 왕이신 하나님께 기도하는 성도의 권세를 의미합니다. 누구든지 기도의 조서를 내밀면 안 될 일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안 되는 일이 없습니다. 기도하면 꿈이 생깁니다. 진정한 꿈은 기도에서 나옵니다. 기도해서 얻는 최고의 복은 우리 안에 꿈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기도하면 하늘의 문이 열립니다. 기도해서 얻는 최고의 변화는 환경의 변화가 아닙니다. 내 안의 변화입니다. 내 안의 변화는 언제나 내 밖의 변화보다 큽니다. 기도해서 얻는 최고의 복은 내 안의 사람이 커지는 것입니다. 내 안의 사람이 커지면 내 밖의 사람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비전입니다. 시편 81:10 입니다. “나는 너를 애굽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 네 하나님이니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우리가 입을 열어 기도하면 하나님이 비전으로 채우십니다.
기도하던 느헤미야의 마음속에 하나님께서 비전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예루살렘 성을 재건하는 일이었습니다. 그 비전이 느헤미야를 들뜨게 만들었습니다. 본문 11~12절을 보십시오. “내가 예루살렘에 이르러 머무른 지 사흘 만에, 내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 내 마음에 주신 것을 내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아니하고” 이 말씀 속에서 하나님께서 느헤미야에게 주시는 비전이 무엇인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내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 내 마음에 주신 것을” “내 하나님께서” 비전은 하나님께서 주십니다. 언제나 비전의 출처는 하나님이십니다. 야망과 비전은 다릅니다. 야망은 나에게서 나와서 나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비전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 목적도 다릅니다. 무엇을 위하느냐가 다릅니다. 야망의 목적은 자기 성취이지만, 비전의 목적은 ‘예루살렘을 위해서’ 입니다. 보다 더 큰 목적, 세상의 변화가 주된 목적입니다. “내 마음에 주신 것을” 하나님이 비전을 우리 ‘마음’에 주셨습니다. 야망은 내 육신에 임하고, 비전은 내 영혼에 임합니다.
11절에 보면 느헤미야가 페르시아에서 예루살렘에 돌아 온 지 삼 일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당시 느헤미야가 살았던 페르시아의 수산 궁은 지금의 이라크 유프라테스 강가에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1,200킬로미터 떨어진 곳입니다. 비행기도 고속버스도 없던 시절, 낙타를 타고 산 넘고, 강 건너 몇 달은 걸렸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지금 느헤미야는 몹시 피곤합니다. 움직일 수가 없을 만큼 지쳐있습니다. 11절, “내가 예루살렘에 이르러 머무른 지 사흘 만에” 그는 삼 일 동안만 누워 있다가 벌떡 일어났습니다. 이것이 비전의 힘입니다. 한 번 하나님의 비전이 사람 속에 들어가면, 그 사람은 견딜 수 없습니다. 사그라지지 않는 여름 태양 같은 열정이 그 속에서 타오릅니다. 하나님의 비전이 임하면, 우리는 이대로 잠잘 수 없습니다. 나를 잠 못 이루게 하는 꿈, 여러분에게도 이런 비전이 있습니까?
영국의 존 스토드 목사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넘어질 수 있는 각도는 무한대로 펼쳐져 있지만, 사람이 일어설 수 있는 각도는 단 하나뿐이다.” 사람이 넘어지는 이유는 다양합니다. 경제적인 이유로 넘어지고, 깨어진 인간관계 때문에 넘어지고, 안 풀리는 사업 때문에 넘어집니다. 그러나 일어나는 각도는 단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꿈”이 임하면 그때 일어납니다. 성경의 사람들은 꿈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수없이 넘어질 수 있는 환경에 있었고, 또 실제로 넘어졌지만 그들이 다시 일어나 위대한 삶을 살 수 있었던 한 가지 이유는 하나님이 주신 꿈과 비전 때문이었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이 주신 꿈은 자기를 살리고 남을 살립니다. 모세의 꿈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 꿈 하나를 위하여 살았습니다. 그 꿈은 그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신명기 34:7 말씀은 성경에 기록된 모세의 마지막 순간입니다. “모세가 죽을 때 나이 백이십 세였으나 그의 눈이 흐리지 아니 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 하였더라.” 모세의 마음속에 임한 하나님의 꿈인 ‘내 민족을 애굽에서 건져 내리라.’는 꿈이 너무 강했기 때문에 모세가 죽을 때까지 깨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꿈이 그의 기력을 붙든 것입니다. 나이가 많다고 늙은이가 아니며 나이가 적다고 젊은이가 아닙니다. 꿈이 없으면 나이가 적어도 애늙은이요, 꿈이 있으면 나이가 많아도 청춘입니다.
예수님의 일생의 꿈은 잃어버린 사람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 한 가지 꿈을 향해서 일생을 달려갔습니다. 누가복음 19:10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들을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오직 한 가지에 목숨을 건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리고 반드시 소득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3년의 짧은 공생애를 살았지만 부활로 승리한 이유는 이 비전의 집중력 때문입니다. 이것저것 많이 한다고 성공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꿈에 집중하는 것이 우리의 성공 비결입니다. 예수님의 일생을 지배한 꿈인 ‘잃어버린 자를 찾으리라.’ 는 이 꿈이 오늘 날 이 땅의 교회의 꿈이어야 합니다. 성경의 사람들은 비전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비전은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은 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은 성령의 감동의 통해 우리 안에 헌신의 감정을 불러일으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은 우리를 강하게 하고 담대하게 하고 끝까지 승리하게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비전은 또 하나 중요한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대가를 지불해야 얻는다는 사실입니다. 느헤미야에게 예루살렘을 재건하리라는 비전이 임했습니다. 그러나 그 비전을 이루기까지 준비가 필요하고, 과정이 필요하고, 대가가 필요했습니다. 이제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성의 재건을 위해 구체적인 준비를 착수합니다. 그가 첫 번째로 한 일이 무너진 성벽을 시찰하는 일이었습니다. 무너진 성벽의 상태는 어떠하며, 앞으로 공사를 어떻게 해야 될지를 생각하며 성벽 시찰을 시작했습니다. 13절입니다. “그 밤에 골짜기 문으로 나가서 용정으로 분문에 이르는 동안에 보니 예루살렘 성벽이 다 무너졌고 성문이 불탔더라.” 성벽은 다 무너졌고, 잿더미 상태로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잡초도 무성하고, 폐허가 된 성벽은 형편없었습니다. 14절입니다. “앞으로 나아가 샘문과 왕의 못에 이르러서는 탄 짐승이 지나갈 곳이 없는지라.” 얼마나 성벽이 심하게 무너졌는지 길도 없고 나귀가 지나갈 수가 없어서 느헤미야는 시찰을 포기하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날 밤, 시찰한 예루살렘 성벽의 현장은 느헤미야에게 예루살렘 재건의 구체적인 준비를 할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예루살렘의 재건을 꿈꾸며 성벽을 돌아본 느헤미야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이 있습니다.
첫째, 시찰의 시점입니다. 느헤미야는 밤에 갔습니다.
15절입니다. “그 밤에 시내를 따라 올라가서” 왜 느헤미야가 밝은 낮에 순찰하지 않고 밤에 갔겠습니까? 낮은 밝지만 방해꾼이 많습니다. 이미 예루살렘 성을 재건하기 위해 느헤미야가 왔다고 긴장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19절 이하에 나오는 산발랏, 도비야, 게셈 같은 사람들이 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느헤미야가 잘못 되기를 바라며, 성벽재건을 반대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틈을 주지 않으려고 느헤미야는 아무도 없는 밤에 순찰을 떠났습니다. 부지런한 사람이 항상 인생에서 승리합니다. 남들이 잘 때 안 자고, 어두울 때 새벽을 준비한 사람만이 내일의 주인공이 됩니다. 여러분들도 이 뜨거운 비전의 열정으로 결코 잠들 수 없는 밤에 비전의 성취를 위해 준비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느헤미야는 혼자 갔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의 총독이었습니다. 높은 지위에 있었던 그는 얼마든지 비서나 군대를 동원하고 부하들을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혼자 갔습니다. 이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신앙은 하나님과 갖는 고독한 밀월입니다. 아무도 하나님과 나 사이를 대신할 수 없습니다. 다른 것은 남이 대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계는 대신할 수 없습니다. 내가 기도하고, 내가 예배해야 합니다. 영혼의 깊은 밤에 혼자 하나님 앞에 선 자 만이 낮에 많은 사람들 앞에 섭니다. 지도자는 하나님 앞에서 고독한 사람입니다. 하나님 앞에 혼자 서 있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늘 함께 계십니다.
셋째, 시찰의 순서입니다.
느헤미야가 시찰한 지역은 낮은 곳에서부터 높은 곳으로 갔습니다. 13절입니다. “그 밤에 골짜기 문으로 나가서 용정으로 분문에 이르는 동안에” 14절입니다. “앞으로 나아가 샘문과 왕의 못에 이르러서는 탄 짐승이 지나갈 곳이 없는지라.” 낮은 골짜기에서 출발해서 ‘용정’이라는 우물을 지나 오물을 버리는 ‘분문’을 통과했습니다. 그리고 ‘샘문’을 지나 ‘왕의 못’까지 갔습니다. 처음부터 좋은 곳이 아니었습니다. 골짜기부터 시작해서 왕의 못까지 갔습니다. 어려운 단계들을 하나하나 밟고 나아갔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비전은 언제나 고난의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골짜기 하면 생각나는 성경 구절이 있습니다. 시편 23:4입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이스라엘에는 광야로 나아가려면 반드시 골짜기를 통과해야 합니다. 그런데 골짜기가 마냥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골짜기는 위험하고 힘든 곳이기도 하지만 골짜기에는 물이 있습니다. 물이 있기에 풀도 있고, 꽃도 핍니다. 이스라엘에 엔게디라는 골짜기는 험준하기가 이를 데 없지만 거기에는 ‘백합화’가 핍니다. ‘샤론’이라는 골짜기에는 언제나 장미꽃이 피어 있습니다. 그리고 골짜기는 통과하는 곳입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이 말씀을 영어 성경에는 “through the valley of the death.” “비록 내가 사망의 골짜기를 통과할지라도”입니다. 골짜기는 통과하는 곳입니다. 지나가는 곳입니다. 목적지가 아닙니다, 경유지입니다. 비전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는 골짜기를 통과해야 합니다. 골짜기를 통과하지 않으면 샘물도 없습니다. 인생의 골짜기를 너무 힘들어 하지 마십시오. 골짜기를 통과하기로 굳게 마음을 먹는 순간 골짜기는 더 이상 골짜기가 아닙니다. 그 때부터 골짜기는 아름답습니다. 세상의 좋은 일도 이 고난의 골짜기를 통과할 때 일어납니다. 자동차의 대명사 헨리 포드도 각고의 노력 끝에 40년 만에 871대의 자동차를 만든 후에야 겨우 자동차를 한 대를 만들었습니다. 비전은 고난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고난의 골짜기를 통과해야 비전의 언덕이 나옵니다.
우리는 비전 자체에 관심이 있지만 하나님은 비전의 사람에게 관심을 두십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살리려고 요셉을 애굽의 감옥에서 훈련하셨습니다. 그가 감옥에서 모진 고난을 이기고 나오는 순간, 이스라엘은 흉년에서 구출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정탐꾼을 살리려고 여리고의 기생인 라합을 준비하셨습니다. 라합으로 하여금 그토록 부끄러운 삶속에서 모질게 연단 된 후 보아스의 어머니가 되고 다윗왕의 증조모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말구유에 아기 예수를 숨겨 두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모든 고난을 이겨 내셨을 때, 드디어 죽음을 이기는 부활의 승리가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언제나 비전은 고난을 통해 이루어지고 골짜기에서 이루어집니다. 여러분, 골짜기를 통과하십시오. 그냥 이루지는 비전은 없습니다.
이제 고난에 대한 느헤미야의 신앙고백을 들어 보십시오. 20절 앞부분입니다. “내가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하늘의 하나님이 우리를 형통하게 하시리니 그의 종들인 우리가 일어나 건축하려니와” 비전의 사람 느헤미야는 그에게 닥쳐오는 수많은 고난을 이겨내고 결국 승리했습니다. 그 원동력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늘의 하나님’ 때문 이었습니다. “하늘의 하나님이 우리를 형통하게 하시리니 그의 종들인 우리가 일어나 건축하려니와” 여러분, 이 하늘의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여러분이 받은 비전은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까? 하나님의 그 비전을 우리를 통해 이루실 것을 믿으십니까? 하나님이 주신 꿈, 모든 일은 하나님의 계획대로 되며, 하나님의 꿈대로 됩니다.
우리 교회는 이제 창립 60주년을 앞두고 있습니다. 우리는 송파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송파는 지금 다른 지역과는 비교할 수 없는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120층 롯데타워가 세워지고, 위례신도시, 가든파이브, 법조타운 등 명실 공히 송파는 서울의 중심 지역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교회 주변도 많이 달라질 것입니다. 어떤 모양으로든지 우리 교회는 이 시대의 변화의 요구에 수용을 해야 되고, 그 흐름에 지혜롭게 편승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시점에서 저와 여러분은 오늘 어떤 비전을 가져야 합니까? 여러분, 오늘 이 시간 느헤미야의 가슴으로 우리의 심장에 타오르는 열정을 회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주신 그 비전을 견고하게 붙들고 다시 일어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위대한 꿈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이 부름 앞에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함께 힘을 모아 한 방향과 한 목표로 가야 합니다. 고난을 이겨내고 반드시 요단강을 건너야 합니다. 영적으로 구비하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기에 좋은 사람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사람을 훈련시켜 목자, 교사, 지도자로 만들어야 합니다.
누구든지 **교회에서 꿈과 비전을 이룰 수 있기를 바랍니다. 꿈과 비전을 가진 하나님의 백성들을 통하여 지역사회와 민족이 꿈을 이루게 됩니다. ‘하늘의 하나님’이 그것을 가능케 하십니다. 그 하늘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남은 생애, 하나님의 꿈을 이루는 인생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CCM 주님같은 반석은 없도다 (만세반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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