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연구
로마서 개관 (1)
1. 로마서는?
로마서는 어떤 성경인가? 로마서는 죄, 구원, 그리고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 성경이다. 즉, 죄론(롬 1:18-3:20), 구원론(롬 3:21-11:36), 기독교 윤리(롬 12:1-15:13)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 성경이다. 이 가운데서도 특히 구원론을 깊이 소개해주고 있는 성경이다. 이것이 가장 간단하면서도 가장 정확한 로마서에 대한 소개라고 할 수 있다.
보다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로마서 1:18-3:20절까지를 통해 바울은 <죄론>을 다루고 있는데, 로마서 1:18-1:32절까지는 “이방인의 죄”, 로마서 2:1-3:8절까지는 “유대인의 죄”, 로마서 3:9절에서는 “우리의 죄”(구원받은 자들-그리스도인들-의 죄)에 대해 다루고 있다. 그리고 로마서 3:10-18절은 최종적인 “죄의 판결문”이라고 할 수 있고, 로마서 3장 19-20절에서는 “율법의 기능과 한계”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그리고 로마서 3:21-11:36절에서는 <구원론>을 다루고 있는데, 이 가운데서 로마서 3:21-8:39절까지는 구원론 중에서도 “구원의 질서”(order of salvation, ordo salutis)에 대한 것이다. “구원의 질서”란 칭의(justification), 성화(sanctification), 영화(glorification)에 이르는 전 과정을 의미한다. 즉, 한 인간이 칭의의 구원을 받고 죄적인 습관성을 청산하는 성화의 과정을 거쳐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기까지의 전 과정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그리고 그 과정을 어떻게 승리할 수 있는지에 대해 소개해주는 것이다. 이것은 개인의 구원에 대한 것이다. 이 부분을 보다 세부적으로 나눈다면, 로마서 3:21-4:25절까지는 “칭의”, 로마서 5:1-7:25절까지는 “성화”, 로마서 8:1-39절까지는 “영화”로 나눌 수 있다.
그리고 로마서 9-11장은 구원론 가운데서 “선택론”에 대한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서 어떤 사람이 선택받았고(선택) 어떤 사람이 선택받지 못했는가(유기)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 또한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과거와 현재, 미래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과거에는 어떠했고, 현재에는 어떠하며, 미래에는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해서 소개해주고 있는 것이다. 로마서 3-8장이 개인의 구원에 대한 것이라면, 로마서 9-11장은 역사의 구원에 대한 것이다.
정리해보면, 로마서 3장 21절부터 11장까지를 통해 바울은 구원론을 다루고 있는데, 3장 21절부터 8장까지는 개인의 구원에 대해서, 9장부터 11장까지는 역사의 구원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그리고 로마서 12-15장에서 바울은 <기독교 윤리>에 대해 다루고 있다. 기독교 윤리는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서 다루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바울은 하나님과의 관계, 교회와의 관계, 인간과의 관계, 국가와의 관계, 세상과의 관계, 교회 내 다른 신자와의 관계(강한 자와 약한 자의 관계) 등을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다.
2. 로마서의 저자
로마서의 저자는 바울이다(롬 1:1). 로마서의 저자가 바울이 아니라고 하는 이들도 있지만, 이것은 소수 의견에 불과하다.
3. 로마서의 수신자
로마서의 수신자는 “로마의 성도들”이다(롬 1:6). 특히 로마서 1:1-17절의 서론 부분, 로마서 15:22-16장의 결론 부분은 로마서의 수신자가 로마의 성도들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가장 오래된 로마서 사본들의 서두에 붙어 있는 “로마인들에게”(ΠΡΟΣ ΡΩΜΑΙΟΥΣ, 혹은 Προς Ρωμαιους, 프로스 로마이우스)라는 표제어도 로마서의 수신자가 누구인지를 분명히 해주고 있다.
어떤 이들은 로마서가 로마의 성도들에게 보내진 것이 아니라 회람서신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물론 로마서의 중요성을 감안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로마서를 돌려보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로마서가 로마의 성도들에게 가장 먼저 보내진 것은 확실해 보인다.
4. 로마교회의 설립
로마교회가 언제 설립되었는지, 그리고 누구를 통해 설립되었는지는 전혀 알 수 없다. 그것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가톨릭에서는 베드로가 로마교회를 세웠다고 하지만, 그것을 입증할 수 있는 객관적인 증거가 없다. 그리고 당시에 이방 지역에 있는 교회들을 대부분 개척해서 세웠던 이방인의 사도 바울이 로마교회를 세우지도 않았다. 바울은 로마서를 쓰고 있는 지금까지 로마에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롬 1:13).
우리는 바울이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이 서신(로마서)을 보냈다는 사실을 통해서 당시에 로마에 교회가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과, 그 교회는 무명의 전도자들에 의해서 세워졌다는 것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5. 로마서의 저작 연대와 저작 장소
1) 저작 장소
로마서는 “고린도”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고린도의 “가이오의 집”에서 기록된 것으로 보인다(롬 16:23). 이것을 입증해줄 수 있는 구체적인 근거들은 다음과 같다.
먼저, 로마서 16장 23절에서 바울은 “가이오”라는 사람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데, 그를 ‘고린도 교회의 식주’라고 소개하고 있다(롬 16:23). 이것을 보면, 당시 고린도에서는 가이오의 집을 교회로 사용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가이오의 집은 고린도의 예배와 교육과 교제의 중심이었던 것이다. (초대교회는 교회 건물이 따로 없었고, 가정을 교회로 사용한 가정교회였다.) 이 가이오라는 이름은 고린도전서 1장 14절에서도 등장하는데, 그는 바울이 고린도에서 직접 세례를 준 사람이었다. 고린도전서 1장 14절의 가이오는 전도될 당시에 고린도에서 살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에는 가이오라는 이름이 많았기 때문에 - 성경에도 동명이인인 가이오가 여러 명 등장한다. - 로마서에 등장하는 가이오가 고린도전서에 등장하는 고린도인 가이오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하지만 로마서에 고린도 교회의 식주인 가이오의 이름이 등장한 것은 바울이 로마서를 고린도에서 썼다는 하나의 증거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바울이 로마서를 고린도에 썼다는 것이 확실하다면, 둘이 동일인물일 가능성이 아주 크다. (이 책에서는 고린도 저작설을 인정하며, 둘을 동일인물로 본다.)
그리고 로마서 16장 23절에는 “에라스도”라는 이름이 나온다. 바울은 그를 ‘고린도의 재무’라고 소개하고 있다(롬 16:23). 그는 고린도의 재정을 담당하는 자였는데, 교회 안에서도 재정을 담당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이름은 디모데후서 4장 20절에도 등장한다. 로마서에서 고린도의 재무인 에라스도가 등장하는 것도, 바울이 로마서를 고린도에서 썼다는 하나의 증거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주목할만한 것은 고고학자들에 의해서 로마서에 기록된 고린도의 재무 에라스도의 것으로 보이는 비문이 고린도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바울이 사역하던 AD 1세기 경의 것으로 추정되는 이 비문은 1929년에 고린도 지역을 조사하던 고고학자들에 의해서 발견되었는데, 비문에는 에라스도라는 이름이 기록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비문의 내용은 “에라스도가 돈을 내어 (자비로) 이 도로를 포장했다”는 것이었다.
* 고린도에서 발견된 비문. 에라스도라는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당시 아이딜레(조영관)는 로마 도시의 내부 행정을 집행하는 고위직 관리였는데, 시의 일반 행정(도로, 공중 목욕탕, 음료수 관리), 식량 공급, 축제와 각종 경기 행사 등 공공 오락의 조직과 운영 등을 담당했다. 이 비문의 내용을 통해, 즉 에라스도라는 사람이 도로를 포장했다는 내용을 통해 우리는 에라스도가 아이딜레였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당시 조영관은 재무관을 지낸 사람만이 선출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 비문의 내용을 근거해서 생각해보면, 고린도의 재무관이었던 로마서 16장 23절의 에라스도가 나중에 조영관이 되었다고 추측해볼 수 있다. 물론 이 비문에 기록된 조영관 에라스도가 로마서에 기록된 그 재무관 에라스도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여러 가지 정황을 고려했을 때 동일인물일 가능성도 아주 높다.
바울이 겐그레아 교회의 “뵈뵈”에게 로마서의 전달을 맡긴 것은 로마서가 고린도에서 기록되었다는 것을 입증해주는 가장 결정적인 증거라고 할 수 있다(롬 16:1-2). 로마서 16장 1-2절을 보면, 겐그레아 교회의 뵈뵈는 로마서를 로마에 직접 전달한 사람이었다. 당시의 지도를 보면 겐그레아와 고린도의 위치를 정확하게 알 수 있는데, 지도에 나타난 겐그레아와 고린도의 위치를 고려해보았을 때, 바울이 고린도에서 로마서를 기록한 이후에 겐그레아 교회의 뵈뵈에게 전달을 맡겼다고 보는 것이 매우 타당해보인다.
당시 겐그레아와 고린도는 그리스(당시 명칭은 아가야)의 펠레폰네소스 반도에 위치해 있는 도시였다. 그리고 당시의 사람들은 고린도가 있는 펠레폰네소스 반도를 “영웅들의 섬”이라고 불렀다. 바울 당시에 펠레폰네소스 반도의 중심 도시는 고린도였지만, 그 이전에는 스파르타가 중심 도시였다. 그리고 도시 국가들로 구성되어 있던 고대 그리스에서 스파르타와 아테네는 그리스의 패권을 잡기 위해서 전쟁을 자주 벌였는데, 특히 스파르타에는 용맹한 사람들, 영웅들이 많았다. 그래서 펠레폰네소스 반도를 영웅들의 섬이라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펠레폰네소스는 섬이 아니라 반도이다. 그렇다면 왜 반도를 섬이라고 했을까? 지도를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는데, 그리스 본토와 펠레폰네소스 반도가 연결되는 부분은 아주 작고 가늘었다. 이 연결 부위가 너무 작고 가늘어서 펠로폰네소스 반도는 그리스인들에게 거의 섬처럼 생각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펠레폰네소스 반도를 반도가 아니라 섬이라고 했다. 이것에 대해서 말하는 이유는 뒤에 나오는 디올코스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서이다.
* 그리스 본토와 펠레폰네소스 반도가 연결되는 부위는 아주 작고 가늘었다. 그래서 그리스인들은 펠레폰네소스를 반도가 아니라 섬처럼 생각했다.
어쨌든 이 펠레폰네소스 반도의 중심 도시가 바울이 사역할 때는 고린도였다. 그리고 로마서의 전달자인 뵈뵈는 겐그레아 출신이었는데, 그녀가 있었던 겐그레아는 고린도의 남동쪽에 있는 항구도시였다. 그리고 고린도의 북서쪽에는 레기움(레카이온)이라는 항구도시가 있었다.
* 펠레폰네소스 반도의 사진. 고린도와 겐그레아, 레기움(레카이온)은 서로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었고, 고린도는 항구도시인 겐그레아와 레기움을 연결해주는 역할을 했다.
지도를 통해서 보면, 당시 펠레폰네소스 반도 밑으로는 지중해가 있었고, 레기움 쪽으로는 고린도만과 아드리아 해와 이오니아 해, 겐그레아 쪽으로는 사론만(사로닉만)과 에게 해가 있었다. 그리고 고린도는 고린도만과 사론만, 아드리아 해와 이오니아 해, 그리고 에게 해, 레기움과 겐그레아, 로마와 로마의 동부의 여러 도시들을 연결해주는 지리적으로 아주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당시에 사람들은 배를 타면, 지중해를 통해 여러 경로로 로마로 갈 수 있었지만, 레기움을 이용해서 로마로 가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 레기움은 일루리곤과 로마가 있는 이달리야 방면으로 갈 수 있는 아주 중요한 항구도시였다. 이달리야는 오늘날의 이탈리아다. 그리고 일루리곤은 바울이 로마서 15장 19절에서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고 했던 바로 그 일루리곤이다. 이 일루리곤은 오늘날은 알바니아와 옛 유고슬라비아 지역이다.
그리고 겐그레아는 아시아와 갈라디아, 수리아, 팔레스타인, 북아프리카 등이 포함된 로마의 동부, 즉 에베소, 안디옥, 예루살렘, 알렉산드리아와 같은 도시들로 나갈 수 있는 아주 중요한 항구도시였다. 당시 사람들은 겐그레아를 통해서 에베소나 안디옥, 예루살렘, 알렉산드리아와 같은 로마의 동부 지역으로 갈 수 있었다. 바울은 이러한 항구도시 겐그레아의 지리적, 선교적 중요성을 잘 알았기 때문에, 고린도 교회를 통해서 따로 겐그레아를 개척하게 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 겐그레아는 바울이 제 2차 선교여행을 끝마치며 머리를 깎고 서원을 했던 곳이기도 했다(행 18:18).
바울이 로마서를 쓴 것으로 보이는 고린도는 레기움과 겐그레아의 중간에 있는 도시였는데, 이 두 도시를 연결해주는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특히 당시 세계의 중심도시였던 로마로 가는 관문도시의 역할을 했다. 그래서 당시에 고린도는 교통과 상업의 중심지로 크게 번성을 누렸던 세계적인 대도시였다.
특히 고린도는 디올코스(미끄럼길)로 인해서 더욱더 중요성이 높아지게 되었다. 디올코스는 일종의 ‘육지운하’, 혹은 ‘최초의 철도’라고 할 수 있는데, 레기움과 겐그레아, 고린도만과 사로닉만, 이오니아해, 아드리아해와 에게해를 연결해주기 위해서 약 6km에 걸쳐 만든 특수도로였다. 이 도로는 1.5미터 간격으로 나란히 홈을 판 석회암 돌로 포장되었다.
* 겐그레아와 레기움을 연결해준 디올코스
앞에서 그리스 본토와 펠레폰네소스 반도가 연결되어 있는 아주 작고 가는 부분이 있다고 했는데, 사람들은 바로 이곳에 디올코스라는 특수도로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 도로를 이용해서 배와 배의 짐을 운반했다. 겐그레아로 온 배는 특수도로를 통해서 레기움으로 갔고, 레기움으로 온 배는 특수도로를 통해서 겐그레아로 갔던 것이다. 그리고 나서 레기움과 겐그레아를 이용해 계속해서 자신들의 목적지로 항해를 했다. 디올코스를 통해 배와 배의 짐을 끄는 것은 노예들의 몫이었다.
디올코스가 없을 때는 이곳을 지나가는데 약 4일 정도가 걸렸는데, 이것이 만들어지고 나서는 더 빨리 두 곳을 지나갈 수 있었다고 한다. 운하를 만들면 더 좋기 때문에 여러 차례 운하를 만들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고, 시간이 흘러 결국 19세기가 되어서야 운하가 만들어졌다. 이것이 세계 3대 운하 중의 하나인 고린도 운하다.
그렇다면 지중해를 이용해서 계속 배를 운항하면 될텐데, 왜 고생스럽게 디올코스를 이용해 육지로 배를 옮기려고 했을까? 오늘날 사람들은 이것이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지만, 당시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첫번째 이유는 안전때문이었다. 당시에 지중해를 배를 타고 건너는 것은 오늘날 태평양을 배를 타고 건너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이었다.
당시의 배는 오늘날의 배와 달리 바람을 이용해 움직였기 때문에, 속도가 너무 느렸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지중해는 서풍이 많이 불었고 일기 변화도 심했기 때문에, 바다에 오래 있으면 있을수록 생명을 잃을 수 있는 위기에 고스란히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특히 당시의 배는 오늘날처럼 튼튼하지 않았기 때문에 바다 위를 운항하는 것이 더더욱 위험한 일이었다.
당시 펠레폰네소스 반도 남단에는 말레아 곶이 있었는데, 때로는 사람들이 그곳을 통해서 배를 운항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곳을 이용해서 이동을 하면 날씨가 너무 나빠서 배가 파선될 때가 많았다. 그래서 안전 때문에 디올코스를 이용했다. 지중해보다는 만을 끼고 있는 에게해와 아드리아해, 이오니아해를 이용해서 운항하는 것이 훨씬 더 안전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당시에 지중해에서 배를 운항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는 것을 성경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사도행전 27장을 보면, 바울이 죄수의 신분으로 배를 타고 지중해를 통해 로마로 가고 있었는데, 갑자기 바다에서 유라굴로라는 광풍을 만나 배에 탄 모든 사람들이 죽을 위기에 처했다. 그런데 당시에는 이것이 아주 흔하게 일어나는 일이었다. 특히 유라굴로라는 지중해의 광풍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갑자기 일어났기 때문에, 안전한 배의 항해에 가장 큰 장애물이 됐다. 그래서 안전한 항해를 위해 디올코스를 만들어서 이용했던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거리를 단축시키기 위해서였다. 디올코스를 이용하면 말레아 곶을 거쳐서 바다로 항해하는 것보다 430km 정도 거리를 단축할 수 있었다고 한다. 반도를 돌아가는 것과 반도를 가로질러 관통하는 것은 당연히 거리상으로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런 이유로 당시에는 디올코스를 만들어 이용했다.
고린도와 겐그레아의 위치에 대해서 지리적으로 살펴보았는데, 이 두 도시는 약 10km 정도 서로 떨어져 있었다. 이것을 놓고 한 번 생각해보자. 바울이 만약에 에베소에서 로마서를 썼으면 그곳에 있는 사람을 통해서 로마서를 보냈을 것이다. 그렇지 않겠는가? 그리고 갈라디아에서 썼으면, 갈라디아에 있는 사람을 통해 보냈을 것이다.
그런데 겐그레아는 로마의 다른 동부 지역에서 보자면, 동부 지역의 여러 도시들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펠레폰네소스 반도에 위치한 도시였다. 예루살렘이나 안디옥, 에베소 등에서 가장 먼 곳에 있었던 도시였던 것이다. 그래서 로마나 아가야 지방에서 로마 동부의 여러 도시로 나아가는 초입과도 같은 역할을 했던 항구도시였다. 동시에 로마로 가는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도시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것을 감안했을 때, 바울이 고린도나 그 인근이 아닌 다른 도시에서 로마서를 썼다면, 로마 동부 지역에서 가장 먼 곳에 있는 겐그레아의 사람을 불러서 편지를 준 후에 편지의 전달을 맡긴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얼마나 비효율적이고 이상한 일인가? 그것은 최소한 2배 이상의 거리를 왔다 갔다 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겐그레아의 뵈뵈를 통해서 로마서를 보냈다는 것은 로마서를 고린도에서 썼다는 것을 보여주는 중요한 근거라고 할 수 있다. 바울이 로마서를 고린도에서 썼기 때문에, 고린도의 가장 인근에 있는 겐그레아 교회의 지체를 통해서 로마서를 로마에 보냈을 것이다.
그리고 로마서에는 당시 고린도의 모습과 흡사한 이야기들이 많이 등장하고 있다. 당시 고린도는 우상숭배와 성적타락이 매우 심각한 도시였다. 특히 성적타락의 문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아주 심각했다. 그래서 “고린도인(Corinthian)”이라는 말은 “성적으로 문란한 사람”, “매춘부”라는 말과 동의어일 정도였는데, 이런 성적타락의 누룩이 교회 안에까지 영향을 미쳐 고린도교회 안에서도 근친상간의 문제로 큰 혼란이 있었다(고전 5:1-2). 이런 고린도의 모습을 잘 알고 있었던 바울은 로마서 1장에서 이방인들의 죄에 대해서 지적하면서 우상숭배와 성적타락의 문제를 가장 강조하게 되었을 것이다. 물론 이것은 모든 타락한 인간들과 사회 안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죄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리고 고린도교회에는 당파 싸움이 매우 심각했다. 이것이 너무나 심각해서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바울파, 아볼로파, 베드로파, 그리스도파 등으로 서로 나누어져 있을 정도였다(고전 1:10-12). 바울은 로마서 14-15장을 통해서 강한 자와 약한 자의 문제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고, 로마서 2장 8절에서도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고린도교회 안에 있었던 당파 싸움이 로마교회 안에도 일어나는 것에 대한 우려의 표시라고 할 수 있다.
바울은 로마서를 쓰고 있는 지금까지 로마에 한 번도 방문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로마교회와 성도들의 상황을 정확하게 알 수 없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바울은 자신이 로마교회와 성도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처럼, 그리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를 정확하게 꿰뚫어보고 있는 것처럼 로마서를 쓰고 있다. 왜냐하면 그런 문제들이 고린도교회 안에 너무나 심각하게 일어나고 있는 상황에서, 당시의 세계 중심도시이며 가장 세속적인 도시였던 로마에 있는 로마교회와 성도들에게서는 그런 문제가 더더욱 심각할 수 있다는 것을 예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 로마교회와 성도들의 상황에 대해서 들었을 수도 있다. 이런 여러 가지 정황들을 고려해볼 때, 로마서가 고린도에서 저술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2) 저작 연대
로마서 저작 연대는 일반적으로 AD 57년 경으로 본다. 그 근거는 무엇인가?
로마서에서 바울은 이 서신을 쓴 이후에 자신이 예루살렘으로 갈 것이라고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다. 특히 자신이 예루살렘에 도착한 이후에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내어놓는 헌금을 그들이 기쁘게 받을 수 있도록 기도해달라고 기도를 요청하고 있다(롬 15:25,30-31).
앞에서 바울이 고린도에서 로마서를 썼다고 했는데, 사도행전에서 바울은 두 번에 걸쳐서 고린도를 방문했다. 바울은 세 번에 걸쳐서 세계선교여행을 했는데, 제2차 , 제3차 선교여행에서 고린도를 방문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가 고린도에서 헌금을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갔던 것은 제3차 선교여행에서의 일이었다. 그 때가 바로 약 AD 57년경이었다. 그래서 로마서의 저작연대를 AD 57년경이라고 보는 것이다. 바울은 AD 57년경에 고린도에서 3개월 정도 머물면서 로마서를 썼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바울이 고린도에서 3개월 정도 머물렀다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사도행전 20장 2-3절을 보면, 바울이 헬라에 3개월 동안 머물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바울이 사역하던 당시에는 그리스 지역을 헬라라고 하지 않고 아가야라고 했다. 그래서 정확하게 말하자면 아가야에서 3개월을 머물렀다는 것이다. 정확히 아가야의 어디에서인지는 모르지만, 일단은 아가야 지방에서 3개월 동안 있었던 것이다.
당시 아가야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는 아테네였다. 그리고 두 번째로 중요한 도시는 고린도였다. 앞에서 고린도에서 로마서를 썼다고 했지만, 바울이 제3차 선교여행에서 3개월 동안 아가야에 머물렀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바울이 최소한 아테네나 고린도에서 로마서를 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어떻게 아테네가 아니라 고린도에서 썼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먼저 바울이 아가야의 아테네나 고린도에서 3개월 동안 머무르면서 로마서를 썼다고 볼 수 있는 것은 바울은 선교여행을 할 때 항상 그 지역의 중심도시, 대도시를 중심으로 선교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가야 지방의 중심도시는 아테네와 고린도였기 때문에, 바울이 그 도시를 중심으로 선교를 했고, 그곳에 교회를 세웠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사도행전에서 바울은 아가야 지역의 경우 아테네와 고린도에서 선교를 했다.
하지만 사도행전을 보면, 아테네에서의 선교는 성공적이지 못했다. 그래서 아테네에 교회가 세워지지 못했다. 바울은 교회가 있는 곳에 여러 번에 걸쳐서 서신을 보냈는데, 우리가 잘 아는 고린도, 에베소, 갈라디아, 빌립보, 골로새, 데살로니가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그러나 바울이 에테네에 보낸 편지는 없었다. 그것은 아테네의 선교는 성공적이지 못했고, 그래서 그곳에 교회가 없었다는 것을 더욱더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아가야에서 3개월을 머물렀던 곳은 고린도라고 할 수 있다. 바울은 고린도에서 3개월을 머무르면서 로마서를 썼다. 그리고 그 때가 AD 57년 경이었다.
6. 저술 당시의 상황
1) Paul
바울이 로마서를 쓸 때 당시의 상황은 어떠했는가? 로마서 15장 25,30-31절을 보면, 로마서 저술 당시의 상황을 잘 알 수 있다. 로마서 15장 25,30-31절에서 바울은 로마의 성도들에게 자신의 예루살렘행과 그곳에 가서 헌금하는 것을 예루살렘 교회가 기쁘게 받도록, 그리고 그 이후에 자신이 로마에 갈 수 있도록 기도해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이것을 보면, 바울은 고린도에서 로마가 아닌 예루살렘으로 가야 하는 상황 가운데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울은 항상 로마로 가는 것을 간절히 원해왔다(롬 1:10,13,15, 15:22,32). 그리고 그는 로마를 거쳐서 당시에 땅 끝이라고 여겼던 서바나(스페인)까지 가기를 원했다(롬 15:23,28). 로마서에서도 바울은 이것을 여러 차례에 걸쳐서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하지만 그는 고린도에서 로마로 가지 못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야 하는 상황이었다(롬 15:25). 그런데 그가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만약에 예루살렘으로 간다면 로마에 가지도 못하고 예루살렘에서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사도행전 23:12-15절을 보면, 예루살렘에는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40일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않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무려 40여명이나 있었다. 바울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40인의 결사대가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들 안에 얼마나 뿌리 깊은 사도 바울에 대한 적대심과 반감이 있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래서 사도행전 21장 11절에는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면 화를 입을 것이라는 예언도 있었다. 그러나 바울은 죽음까지도 각오하고 예루살렘으로 갔다(행 20:22-24, 21:13). (그 이유에 대해서는 나중에 더 깊이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바울은 어떻게 해서든지 로마로 가기를 간절히 원했지만 어려움 가운데 있는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야 하는 상황이었고, 그러나 만약에 예루살렘으로 간다면 그의 미래를 조금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교회와 성도들을 향해 유언을 남기는 것처럼 비장한 마음, 찢어지는 마음으로 로마서를 기록했다. 이것이 바울이 로마서를 쓰는 당시의 상황이었다.
2) 로마교회와 성도들
로마서의 수신자인 로마교회와 성도들은 어떤 상황 가운데 있었는가?
로마서 1장 18-21절은 우상숭배와 성적타락으로 가득한 세속적인 로마 안에서 로마 교회와 성도들이 고통을 받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들은 세속적이고 타락한 로마 안에서 항상 신앙에 큰 위협을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로마교회와 성도들은 세속 정부의 심각한 박해 아래 있었다. 역사적으로 로마 제국 하에서 기독교에 대해 10번에 걸쳐 대박해가 있었다. 로마교회와 성도들은 이런 상황에서 아주 힘들게 신앙을 지켜야했다. 바울은 로마서 13:1-10절에서 교회와 정부와의 관계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데, 이것은 로마 교회와 성도들이 세속적인 정부의 권력과 긴장 관계 아래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나라와 국가라는 두 나라 안에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에 교회와 국가와의 관계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가지고 살아야 한다. 바울은 이 문제에 대해서 잘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로마교회와 성도들에게도 올바른 성경적 가르침을 제시해주기를 원했다.
로마교회와 성도들은 외적인 박해도 받았지만, 로마서 5-7장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성화의 과정에서 청산되지 않는 자신의 지난 날의 죄적인 습관성으로 인해서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 하나님의 형상된 자신과 죄적실존인 자신 사이의 심각한 내적인 갈등 가운데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실제적으로는 그들에게 있어서 가장 심각한 문제였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것은 모든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 안에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그리고 로마교회와 성도들은 전도와 목양, 재정 등의 문제로 인해서도 고통을 겪었을 것이다(롬 5:3,4, 8:18,35-36). 재정에 있어서는 실제 생활을 위해 필요한 물질과 교회 유지를 위한 재정 모든 면에 있어서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단과 사이비들로 인해서 신앙이 흔들리는 위기도 있었을 것이다.
또한 로마서 14-15장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교회 안에 강한 자와 약한 자의 갈등도 있었을 것이다. 강한 자는 진보적인 그리스도인, 약한 자는 보수적인 그리스도인, 강한 자는 이방인 출신의 그리스도인, 약한 자는 유대교 출신의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 역사에서 항상 이런 두 부류의 사람들의 분쟁과 갈등은 크든 작든 존재해왔다. 이것은 로마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것이 로마교회와 성도들이 처해있는 상황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7. 로마서의 신빙성
로마서의 신빙성을 문제삼는 사람은 거의 없다. 단지 마지막 16장에 대해서 문제를 제시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은 바울의 저작설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그 16장의 로마서 포함 여부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이들은 로마서 16장이 로마서가 아니라 에베소서의 일부나 다른 서신의 일부라고 주장한다. 이 의견은 다음과 같은 여러 고찰들에 근거하고 있다.
1) 바울이 방문한 적이 없는 교회에 그렇게 많은 개인적인 문안 인사를 보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바울이 어떻게 그들을 개인적으로 알았겠는가? 2) 아굴라, 브리스길라, 에베네도, 이 세 사람은 로마보다는 아시아와 더 관계가 있는 사람들이다. 3) 바울이 자신이 잘 알려지지 않은 교회에 뵈뵈를 천거한 것은 적절치 못하다.
그러나 이런 고찰은 얼마든지 다른 식으로도 설명될 수 있다. 1) 바울이 자신이 직접 개척해서 잘 알고 있는 교회의 성도들의 경우에 개인을 지목하며 안부를 전하는 것이 일반적인 것이 아니었고, 2) 로마를 왕래하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을 감안하면 바울이 로마의 많은 사람들을 알았다는 것과 아시아에 있다고 알려졌던 사람들이 로마에 있었다는 것이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3) 바울은 로마교회에 서신을 보낼 정도로 당시에 잘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로마 교회에 뵈뵈를 천거한 것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4) 로마서의 내부적인 증거에 의해 로마서 16장이 원래 독립된 것이고 에베소나 또는 다른 곳으로 보내진 것이라고 간주하기에는 증거가 불충분하다.
그리고 로마서를 보면, 결론으로 보이는 부분이 3곳이 존재한다(롬 15:33, 16:20,27). 로마서의 여러 고대 사본들을 보면, 이러한 인사들을 14장 끝, 15장 끝, 16장 끝, 14장과 15장의 끝 또는 14장과 16장의 끝에 두거나, 완전히 생략하고 있다. 이것으로 인해서 로마서의 신빙성에 대해 약간의 문제를 제기하는 이들도 있다. 물론 사본마다 이러한 부분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중요한 것은 이것이 로마서 전체의 내용에는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 부분은 부록처럼 붙어 있는 결론과 인사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 부분이 필요없다는 이야기는 결코 아니다.)
그리고 여러 사본으로 로마서를 옮기는 과정 가운데 이런 약간의 차이가 발생하는 것은 충분히 고려할 수 있는 일이다. 로마서가 처음에 로마에 먼저 보내진 이후에 회람용으로 많이 읽혀졌다면, 로마교회와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는 로마서 15장 후반부와 16장을 로마가 아닌 다른교회에서 삭제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삭제가 이루어졌던 때는 로마서가 성경으로 정식으로 인정되기 이전의 시대였기 때문에, 로마서의 본론의 내용이 훼손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이루어졌던 삭제 여부에 대해서는 보다 유연한 자세를 가질 필요가 있다고 본다.
로마서 개관 (2)
8. 로마서의 영향력
지금까지 로마서를 간략하게 개괄적으로 살펴보았는데, 이제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우리가 로마서를 공부해야 하는가? 왜 우리가 로마서를 공부하는데 우리의 소중한 시간을 사용해야 하는가?” 이것에 대한 답을 알기 위해서는 기독교 역사에 미쳤던 로마서의 영향력에 대해 우리가 깊이 살펴보아야 한다.
로마서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 가운데 한 명, 그는 바로 마르틴 루터(Martin Ruther)이다. 그는 영적 암흑기였던 중세 시대에 종교개혁을 일으켰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종교개혁의 기초요 중심이 되었던 것이 바로 로마서였다. 루터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 1:17)는 로마서의 메시지를 새롭게 깨닫고 발견한 이후에 일으킨 것이 바로 종교개혁이었다. 그리고 루터로 인해서 일어난 종교개혁은 오늘날의 개신교, 개혁교회를 낳았다. 이것은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가운데 하나이다. 중세의 종교개혁은 구원론의 문제로 일어났으며, 로마서는 그것에 대한 가장 분명한 해답이 되었다.
로마서로 인해 변화된 또 다른 중요한 인물 가운데 한 명은 감리교의 창시자인 존 웨슬리(John Wesley)다. 그는 영국의 교회의 개혁과 부흥, 세계 선교의 확장에 크게 기여했는데, 그 또한 로마서를 통해 근본적인 회심을 체험하게 되었다. 공개적인 기독교 모임에서 누군가가 읽어주는 마르틴 루터의 로마서 서문을 듣는 가운데 회심을 체험하게 되었던 것이다.
영국의 기독교 역사를 공부해보면, 존 웨슬리(John Wesley), 윌리엄 캐리(William Carey), 허드슨 테일러(Hudson Taylor) 등이 영국 뿐만 아니라 세계 기독교 역사와 세계 선교에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가운데서 존 웨슬리는 영국교회의 개혁과 부흥에 불씨를 던진 동시에, 그것이 활활 타오르게 했던 사람이었다.
특히 웨슬리에 의한 영국교회의 개혁과 부흥이 중요한 것은 그것이 미국교회의 개혁과 부흥에 큰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나중에 한국교회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미국교회의 개혁과 부흥으로 인해 수많은 미국의 선교사들이 자원해서 전 세계로 나갔고, 특히 당시에 세계에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던 나라인 한국에까지 와서 자신들의 고귀한 젊음을 바치고 피를 흘렸다. 그 결실로 한국은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들이 몰려 있고 세계에서 2번째로 선교사를 많이 파송한 영적 강국이 되는 축복을 받었다. 그리고 한국은 지금까지 중국에 수많은 선교사들을 파송했고, 이들 선교사의 헌신적인 사역으로 인해 중국은 현재 비공식적이지만 세계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많은 나라가 되었다(물론 그것이 중국교회 성장의 이유의 전부는 아니지만). 그리고 선교가 가장 어려운 중동을 포함한 제 3세계 국가들의 선교에 가장 앞장서며 이름도 빛도 없이 헌신하고 있는 이들이 한국 선교사들이다. 웨슬리의 회심과 변화가 이어지고 이어져서 이렇게 기독교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로마서는 그 웨슬리를 변화시킨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초기교회의 위대한 교부였던 성 어거스틴(St. Augustin)도 로마서로 인해 회심을 체험했다. 한 때 헬라 철학에 깊이 심취하고 마니교라는 이교에 빠져 있던, 그리고 사생아를 낳을 정도로 아주 허랑방탕한 삶을 살았던 그는 로마서 13장 12-14절의 말씀을 통해서 근본적으로 회심하고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그는 이후에 이교화될 수 있었던 초기교회를 지키는 동시에 기독교의 기초를 아주 견고하게 쌓은 위대한 사상가요 신학자가 되었다.
로마서는 20세기에도 위기 가운데 있는 교회를 살린 위대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쓰임받았다. 20세기에 가장 중요한 신학자 가운데 한 명인 칼 바르트(Karl Barth)는 <로마서 강해>를 통해서 자유주의로 흐르고 있던 당시 세계의 신학계와 교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자유주의자들의 놀이터에 던져진 원자폭탄"이라고 불려진 그의 로마서 강해는 상대화되고, 학문과 문서비평의 대상으로 전락했던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회복시키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로마서는 지금까지 기독교 역사에서 이렇게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그래서 로마서를 영적 병기창고라 한다. 병기창고는 병기를 보관해두는 곳으로, 전쟁을 하다가 병기가 떨어지면 언제든지 이곳에 와서 병기를 보충할 수 있다. 이런 병기창고는 전쟁의 승리를 위해서 필수적인 것이다. 그런데 로마서는 치열한 영적 전쟁 가운데 있는 교회와 신앙인들이 위기에 빠졌을 때, 그리고 병기가 떨어졌을 때, 그들을 다시 강력하게 영적으로 무장시켜 결국에는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는 병기창고로서의 역할을 충실하게 감당해왔다.
로마서가 기독교 역사에 남겼던 큰 영향들에 대해서 잠시 살펴보았지만, 이 외에도 로마서는 글로 다 쓸 수 없을 정도로 크고 작은 수많은 영향들을 기독교 역사에 미쳐왔다. 특히 로마서를 통해 구원받은 이들은 셀 수도 없을 정도로 아주 많을 것이다. (필자도 그리스도인이 되기 이전에 로마서 7장 15-21절을 통해서 처음으로 마음 깊이 성령의 감동이 임하는 체험을 할 수 있었다.)
이런 로마서의 중요성으로 인해서 지금까지 로마서는 모든 성경 중에서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에 의해서 가장 많이 연구되고 가르쳐져 왔다. 그리고 많은 목회자들은 로마서를 강해하는 것을 자신의 목회의 꽃이요 영광이라고 여기고 있다. 그래서 자신의 목회의 정점에서 로마서를 강해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필자는 로마서는 사역의 초기에 모든 가르침의 가장 기초로, 그리고 반복적으로 계속해서 전해져야 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로마서는, 특히 로마서의 구원론은 신앙의 가장 기초요 핵심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런 로마서를 배운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성경을 공부하기를 원다면 가장 먼저 공부해야 할 필요성이 있는 말씀이 바로 로마서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 역사에 미쳤던 로마서의 영향력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우리 또한 이 로마서의 말씀에 사로잡히면, 이 말씀에 의해서 불이 붙으면, 이 말씀에 의해서 변화되게 되면, 하나님의 역사에 놀랍게 쓰임받는 자들이 될 수 있다. 로마서를 공부하는 많은 사람들 가운데 단 한 사람만이라도 진정으로 변화된다면, 그 한 사람을 통해 기독교 역사의 물줄기가 바뀌고 세상이 변화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것이다. 그것이 지금까지 기독교 역사에서 항상 일어났던 일이었다. 지금의 시대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변화된 한 사람의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이 필요하다. 그리고 로마서는 그런 사람을 일으키는데 가장 탁월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로마서를 접하는 모든 사람들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 변화되는 것은 가장 바람직하고 이상적인 일이지만,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아도 크게 실망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단 한 사람만이라도 로마서를 통해서 제대로 바뀔 수 있다면 그것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로마서의 저자인 바울, 그리고 루터나 웨슬리, 어거스틴에게서 우리는 충분히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이들 한 명 한 명은 로마서의 메시지로 인해서 변화되어 하나님의 역사에 모두 거목과 같이 쓰임받았다.
오늘날 로마서를 공부하는 모든 사람들도 자신이 로마서로 인해서 변화되어 이전의 시대에 하나님께 위대하게 쓰임받았던 많은 사람들처럼 이 시대에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받고자 하는 소망을 가지고 로마서를 공부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먼저는 한 사람을 변화시키신다. 그리고 그 한 사람은 모든 사람을 변화시키고, 세계를 변화시키는 불씨가 된다. 그 한 사람은 바로 지금 로마서를 손에 들고 있는 내가 될 수도 있다. 로마서를 공부한다면, 충분히 그런 역사가 일어날 수 있다. 모든 하나님의 말씀이 그러하지만 로마서는 더더욱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로마서를 공부하는 이들이여, 이제 하나님으로부터 위대한 일을 기대하라. 그 위대한 일이 곧 나타날 것이다.
9. 로마서는 어떤 책인가?
1) 성경 중의 성경
로마서는 성경 중의 성경이다. 로마서는 사도 바울이 쓴 많은 서신들 중에서 가장 중요할 뿐만 아니라 66권의 모든 성경 중에서도 특별히 중요한 성경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로마서를 수식하는 많은 수식어들 가운데 하나가 “성경 중의 성경”이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왜 로마서를 성경 중의 성경이라고 하는가? 이것은 로마서가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성경이라는 것인가?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66권의 성경은 모두 고유의 독특성과 중요성을 가지고 있으며, 이것에 대해 결코 우열을 가리며 순서를 매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성경 중의 성경”이라는 의미는 무엇인가?
기독교와 성경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무엇인가? 그것은 구원이다. 기독교는 구원의 종교이며, 성경도 구원의 역사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로마서는 모든 성경들 중에서 구원론을 가장 깊이 다루고 있는 성경이다. 그런 의미에서 로마서를 성경 중의 성경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물에 빠져서 죽어가고 있다면, 일단은 그 사람을 살리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우선순위라고 할 수 있다. 아무리 고상하고 아름답고 멋진 구원의 방법을 말한다 할지라도, 실제로 물에 빠진 자를 구원할 수 있는 능력을 드러내지 못한다면 그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다. 경건의 모양이 아니라 경건의 능력이 중요한 것처럼(딤후 3:5), 구원의 모양이 아니라 구원의 능력이 중요하다. 그런데 하나님의 모든 말씀이 그러하지만 로마서는 더욱더 특별히 구원의 능력을 놀랍게 드러낸 말씀이었다. 그것은 로마서의 메시지의 핵심이 구원론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로마서를 성경 중의 성경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구원은 기독교의 핵심일 뿐만 아니라 기독교의 기초가 된다. 그것은 구원이 이루어진 이후에야 다른 모든 것이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다. 사람이 물에 빠졌다면, 일단은 그 사람을 물에서 건져놓아야 한다. 그래야 그 다음의 이야기가 진행될 수 있다. 물에서 건져내지 못한 상태에서는 다음의 것을 진행하려고 해도 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구원은 새로운 피조물의 탄생인 동시에, 새로운 피조물의 새로운 인생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물에 빠진 자를 살릴 것 뿐만 아니라 그를 이제 새로운 삶의 출발점에 놓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기초 위에서, 이 출발점 위에서 모든 것이 새롭게 시작될 수 있다. 성경 중의 성경이라는 말 안에는 구원론은 기독교와 성경의 핵심일 뿐만 아니라 기초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기독교의 모든 가르침들은 구원에 초점을 두고 있고, 구원의 문제가 정리된 이후에야 다른 모든 것들이 의미를 가지게 된다. 심지어 구원의 문제가 정리되지 않고 이루어지는 모든 것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윤리(도덕)의 문제는 구원 다음의 문제이다. 구원이 이루어진 이후에야 그것을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구원이 없이 윤리만을 가르친다면 그 가르침은 자유주의 신학과 다를 바 없으며, 그런 기독교는 세상의 다른 도덕 종교, 율법 종교들과 전혀 다를 바가 없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에서도 먼저는 구원론을 다루었고, 그 다음에 기독교 윤리의 문제를 다루었다.
죽어가는 영혼들을 살리는 것이 우선순위이다. 그 다음에 그 사람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가르쳐야 한다. 즉, 기독교윤리를 가르쳐야 한다. 죽어가는 영혼을 살리지 못하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먼저 가르친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죽으면 모든 것이 다 소용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도덕적 감화만 시키는, 그리고 도덕적인 메시지만 전하는 것에 대해서 지적하는 목소리가 많다. 이것은 그런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 무조건 나쁘거나 틀렸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보다 더 중요하고 우선적이고 본질적인 것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문제, 죄의 문제, 구원의 문제이다. 바울은 이것을 너무나 잘 알았기 때문에 로마서 전반부에서는 구원에 대해서, 후반부에서는 기독교 윤리에 대해서 가르쳤다.
기독교와 성경의 핵심이며 기초인 구원론을 가장 깊이 있게, 가장 체계적이고 교리적으로 잘 다루고 있는 로마서는 “성경 중의 성경”이라는 수식어가 아주 적합한 성경이다. 모든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성경 중의 성경”인 로마서, 즉 구원론을 가장 잘 가르쳐주고 있는 로마서를 배우는데 우선순위를 두어야 한다. 아니 이것에 사활을 걸어야 한다. 이것이 모든 꼬인 실타래를 풀 수 있고, 첫 단추를 올바로 꿸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2) 기독교 교리서
로마서는 기독교 교리서이다. 그래서 로마서를 공부하면 기독교 교리의 핵심을 모두 이해할 수 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구원론 뿐만 아니라 죄론, 그리스도론, 성령론 등의 기독교 교리를 깊이 다루고 있다. 바울은 성경에서 기독교 교리와 조직신학을 최초로 깊이 있게 다룬 인물이라고 할 수도 있다.
로마서에서 바울이 제시하고 있는 많은 교리들 중에서도 특히 중요한 것은 구원론과 그리스도론이다. 구원론과 그리스도론은 하나라고 볼 수 있지만, 구원론이 실제적으로 인간에게 임하는 구원에 대해 초점을 두고 있다면, 그리스도론은 그 구원이 인간에게 임하도록 하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에 대해 보다 초점을 두고 있다. 물에 빠진 자를 예로 든다면, 구원론은 물에 빠진 자가 구원의 밧줄을 잡음으로 인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에 초점을 두고 있는 것이고, 그리스도론은 그 밧줄을 던져준 자가 누구이며, 그것을 던져주기까지 어떠한 수고와 희생이 있었는지에 대해서 초점을 두고 있는 것이다.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행하신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해서 다루는 것을 화해론(속죄론)이라고 하는데, 그리스도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화해론(속죄론)이다. 그리고 구원론은 구원을 받는 우리에 대해 보다 초점을 두고 있는 것이며, 칭의론이 핵심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론의 핵심을 화해론, 객관적 구원이라고 한다면, 구원론의 핵심은 칭의론, 주관적 구원이라고 할 수 있다.
3) 구약의 해설서
로마서는 구약의 해설서이다. 다른 말로 하면 로마서는 성경의 해설서다. 바울은 로마서를 통해서 구약을, 성경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좋은 지침을 우리에게 제시해주고 있다.
오늘날 성경은 구약과 신약을 의미하지만, 바울이 사역하던 당시에는 신약이 없었다. 그래서 그 때 당시의 성경은 바로 구약을 의미하는 것이었다(롬 4:3, 10:11, 11:2, 15:4). 바울은 전 세계를 선교여행하면서 유대인들이 만들어놓은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쳤다. 그리고 자신이 개척해서 세운 교회에서도 사람들을 가르쳤을 것이다. 그 때 바울이 사용했던 텍스트가 무엇이었겠는가? 그것은 물론 성경이었는데, 바로 오늘날의 구약이었다. 구약성경을 가지고 가르쳤던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의 가르침의 핵심은 구약성경에 대한 해석과 설교였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예수님 또한 마찬가지였다. 예수께서도 구약(성경)을 가지고, 그 구약(성경)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서 가르치셨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 바울을 통해서 구약이 진정으로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알 수 있다.
바울과 예수께서 사역할 당시, 유대 사회에는 바리새인들, 율법학자들과 서기관들, 랍비들과 같은 많은 종교지도자들이 있었다. 그들도 예수 그리스도와 바울처럼 동일하게 오늘날의 구약인 성경을 가지고 많은 사람들을 가르쳤다. 그러나 그들은 구약성경의 진정한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은 점점 구약성경이 진정으로 가르쳐주고 있는 핵심과 본질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그 결과, 그들로부터 가르침을 받는 이스라엘 백성들도 성경의 본질로부터 벗어난 잘못된 신앙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문자로 기록된 성경도 중요하지만, 그것에 대한 해석도 매우 중요하다. 잘못된 해석은 결국 성경을 왜곡시키기 때문이다. 신약은 구약의 해석인 동시에 확장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것도 나중에 성경이 되었다. 로마서 또한 마찬가지인데, 로마서도 구약의 해석인 동시에 확장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로마서에서 바울은 구원론적인 문제와 관련해서 구약을 재해석해주고 있다. 바울은 구약을 텍스트로 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비롯한 모든 자들에게 구원론의 올바른 의미를 가르치려고 했는데, 이것은 이후에 로마서라는 또 다른 성경으로 남아 구원론에 대해 알려주는 영원한 시금석이 되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올바른 성경의 해석의 중요성을 알 수 있다.
해석의 중요성은 이 시대에 우리가 성경, 구약과 신약을 볼 때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이다. 지금 구약과 신약은 문자로 기록된 하나의 성경으로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데, 이 기록된 계시인 성경만큼 중요한 것이 이것에 대한 해석이다. 오늘날 성경을 해석하고 전하는 자들은 그것에 대해서 두려움을 가져야 한다. 무엇보다 성경을 올바르게 해석하고 전해야 한다. 그런데 로마서는 구약을 해석하는, 성경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아주 탁월한 시각을 보여주고 있다. 오늘날 성경을 해석하고 가르치는 자들은 로마서를 통해서 자신이 바울처럼 이렇게 깊은 성경에 대한 이해와 해석을 가지고 있는지 점검해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로마서를 깊이 공부하면, 구약을 바라보는 눈이 새롭게 열리게 된다. 구약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구약의 가르침의 본질과 핵심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혼자서 구약을 읽으면 이런 것들을 깊이 있고 정확하게 아는 것이 매우 어렵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신약보다 구약을 더 어려워하지 않는가? 어떤 사람들은 심지어 구약을 읽는 것만으로도 매우 힘들어한다. 그러나 우리가 로마서를 깊이 공부하고 나면, 구약성경의 핵심과 본질이 무엇인지를 깊이 있게 알 수 있게 된다. 특히 구원론과 관련해서 구약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지게 된다. 그래서 갑자기 구약이, 그리고 성경이 아주 흥미롭게 다가올 것이다. 이것을 깊이 배우고 싶은 강한 갈망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한 번 살펴보도록 하자.
먼저, 로마서 1장 17절에서 바울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성경구절을 인용했다. 이 성경구절은 구약의 소선지서 중에 하나인 하박국 2장 4절에 나오는 것인데, 로마서의 주제이며 핵심구절이기도 하다. 로마서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를 바울은 구약의 하박국 선지자의 글에서 가져왔다. 로마서는 하박국 선지자가 전했던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의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에 대해서 주석을 단 것이다. 또 다르게 표현하자면, 하박국 2장 4절 한 구절을 놓고 목회자가 강해식으로 설교한 것과도 갗다. 이해를 돕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그리고 로마서를 살펴보면, 바울이 구약으로부터 아주 많은 성경구절들을 인용하고 있다. 어떤 주석가는 바울이 구약으로부터 58개의 구절을 인용하고 있다고 했다. 예를 들면, 롬 1:17, 2:24, 3:10-18, 4:1-22, 7:7, 13:9, 14:11, 15:9,10,11,12,21 같은 구절들이다. 이외에도 하나 하나 찾아보면 매우 많은 구약의 성경구절들을 로마서에서 찾을 수 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바울이 구약성경을 얼마나 잘 알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또한 바울은 많은 구약의 성경구절들을 암송하고 있었다. 로마서 3:10-18절을 보면, 바울은 로마서 3장 10절의 “의인은 없으니 하나도 없다”(모든 인간은 죄인이다)는 죄론의 결론을 성경의 구절들을 근거로 해서 최종적으로 선언하기 위해 구약으로부터 여러 성경구절들을 인용했다. 이것을 전문적인 용어로 “카라즈 ”(Karaz)라고 한다. 목회자나 신학자가 설교나 강의를 할 때, 자신이 전하는 메시지에 대한 성경적 근거를 제시하기 위해서 구약과 신약으로부터 관련 성경구절들을 가져오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구슬처럼 관련 성경구절을 많이 인용하면 할수록, 성경의 지식에 대한 그의 해박함과 탁월함을 드러낼 수 있다. 이것을 카라즈라고 하는 것이다.
당시 유대인들은 성경구절을 매우 열심히 암송했다. 오늘날 우리는 가죽으로 된 한 권의 성경을 가지고 있지만, 이전에는 두루말이로 된 성경을 이용했다. 한 권의 가죽성경은 휴대하기도 편하고 읽기도 쉽지만, 고대의 두루말이 성경은 휴대가 어렵고 읽기도 어려웠다. 그리고 하나의 두루마리에 많은 성경의 구절들을 담는 것도 불가능했다. 하지만 그들은 그런 상황에서도 열심히 성경을 공부하려고 했고, 특히 두루말이 성경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많은 성경구절들을 정성을 들여 열심히 암송했다. 그리고 말씀을 가르치거나 전할 때가 되면 두루말이 성경을 찾아서 여러 성경구절을 인용하기보다는 자신이 암송하고 있던 성경구절들을 폭포수처럼 쏟아냈다. 로마서 3장 10-18절에서 바울이 인용하고 있는 성경들도 바울이 이전에 암송하고 있던 성경구절들을 폭포수처럼 쏟아낸 것이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바울이 구약의 성경구절을 매우 열심히 암송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울은 원래 바리새인이었는데(행 23:6; 빌 3:5), 바리새인들은 기본적으로 모세오경을 모두 암송해야 가입이 가능했다.
오늘날 우리는 한 권으로 된 가죽성경을 가지고 있고, IT의 발전으로 인터넷에서도 수많은 성경구절들을 찾을 수 있다. 그리고 검색을 통해서 마음만 먹으면 수많은 관련성경구절들도 손쉽게 찾을 수 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이전에 불편한 두루마리 성경을 가지고 있었던 자들보다 더 성경을 읽지 않고 암송하지 않는다. 놀라운 문명의 이기를 누리고 있는 우리는 사도 바울을 비롯한 이전 시대의 신앙인들보다 더 열심히 성경을 읽고 암송해야 할 책임이 있다. 그래서 성경을 더 깊이 알고 이해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나중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이다.
사도 바울은 또한 구약성경의 숲을 볼 수 있는, 총론을 볼 수 있는 탁월한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구약성경을 전체적으로 아주 잘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먼저 바울은 로마서 4장에서 이신칭의에 대해서 설명하기 위해 구약의 아브라함과 다윗을 예로 들었다. 이신칭의의 가르침을 자신이 갑자기 새롭게 전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원래 구약성경에서부터 있어왔던 것이며, 율법과 할례를 통한 구원을 강조하는 당시의 유대인들이 오히려 구약성경의 가르침으로부터 벗어난 것임을 아브라함과 다윗을 통해 강조한 것이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었고, 다윗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사랑하고 존경하는 왕이었는데, 바울은 그들이 율법과 할례를 통해서가 아니라, 행위와 공로, 의식 등을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총과 그 은총을 받아들이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다는 것(이신칭의)을 성경을 근거로 해서 정확히 설명했다. 유대인들은 이러한 바울의 날카로운 성경해석에 대해 놀라움과 함께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바울은 로마서 9-11장에서도 이방인의 구원과 선택, 유대인들의 유기의 문제에 대해서 구약을 근거로 해 설명했다. 당시의 많은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이 선택을 받고 자신들이 유기되었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것은 잘못된 것이고 틀린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상황에서 바울은 구약의 에서와 야곱의 이야기, 호세아와 이사야 예언자의 글, 엘리야의 이야기, 남은 자 사상 등을 통해서 하나님의 선택과 유기에 대해서 변증했다. 이러한 구약의 가르침들을 근거로 해서 바울은 유대인들로 하여금 그들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백성인지, 혹은 하나님의 선택에서 유기되었던 구약의 인물들과 같은 모습은 아닌지, 그리고 그들의 신앙이 성경으로부터 심각하게 빗나가지 않았는지를 정확하게 점검해보록 했다.
구약의 하나님의 역사를 보면, 하나님의 백성들이라고 해서 하나님의 역사에 모두 선택받은 것이 아니었다. 같은 아버지인 야곱에게서 에서와 야곱이 태어났지만, 에서는 선택받지 못했고 야곱은 선택받았다. 바울은 이런 선택이 구약에서, 하나님의 역사에서,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서 항상 있었다는 것을 정확하게 말해주고 있다. 우리는 에서인가? 야곱인가? 에서라면 선택받지 못할 것이고 야곱이라면 선택을 받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에서는 선택을 받았고 야곱은 선택을 받지 못했는가? 바울은 이런 문제들을 로마서 9-11장을 통해서 깊이 통찰하고 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유대인들이기 때문에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올바른 성서적 사고가 아니다. 성경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구약성경을 깊이 보면 명확하게 드러난다. 바울은 이것을 정확하게 볼 수 있는 시각을 가진 자였다.
그리고 바울은 남은 자 사상에 대해서도 말한다. 남은 자 사상이란 하나님께서 남은 자들을 선택하시고, 그들을 통해서 역사를 열어가신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라 할지라도 그들이 모두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것이 아니라 그들 가운데서도 특별하게 구별된 7천인, 거룩한 씨, 즉 남은 자들이 있었고, 그들만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통해서 구원의 역사를 열어가셨다. 이것이 하나님의 역사였고, 구약의 역사였다. 하나님의 역사에는 항상 선택이 있으며, 그 선택에 합당한 자들만이 선택받을 수 있다.
바울은 로마서 2장 28-29절에서 유대인이 모두 유대인이 아니고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라고 했다. 유대인들 가운데서도 표면적인 유대인과 이면적인 유대인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표면적 유대인은 유대인이 아니고 이면적인 유대인이 유대인이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을 수 있는 남은 자들은 진정한 유대인, 이면적 유대인들이다.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 그런 자들-이면적 유대인들, 남은 자들-을 선택해서 구약의 역사를 열어오셨고, 이것은 신약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영적 교만으로 인해서, 표면적이고 거짓되고 위선적인 신앙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선택받지 못하고 버림받은 자들이 되었다. 그리고 구약에서 선택받았던 하나님의 백성들과 같은 믿음을 가졌던 이방인들이 오히려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다. 바울은 구약에 대해서 깊이 있고 총론적이며 통전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변증을 할 수 있었다.
만약에 바울이 없었다고 생각해보라. 우리가 구약을 해석할 수 있는 올바른 눈을 가지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구약이 전체적으로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지 깨닫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바울은 구약의 성경구절을 많이 알았고, 많이 암송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구약 전체에 대한 탁월한 해석적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구약 전체를 볼 수 있는, 그리고 그것이 주는 메시지를 정확하게 꿰뚫어 볼 수 있는 안목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게도 구약을 볼 수 있는 놀라운 시각을 열어주고 있다. 우리는 바울이 구약에 대해서 이렇게 깊은 이해를 가지고 우리에게 깊이 있게 가르쳐주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깊은 감사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바울처럼 구약에 대한, 더 나아가 성경 전체에 대한 올바른 시각을 가진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로마서 개관 (3)
10. 로마서에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
많은 사람들이 로마서가 성경에서 가장 조직적이고, 학문적이고, 교리적이고, 신학적인 성경이라고 한다.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자칫 잘못하면, 이것이 오히려 로마서를 공부하는데 있어서 가장 심각한 장애물이 될 수 있다. 실제로 그런 일들이 지금까지 매우 자주 일어났다.
성경에서 로마서가 차지하는 중요성으로 인해서 지금까지 로마서는 가장 많은 목회자들과 신학자들에 의해서 주석되고 연구되고 강해되어왔다. 그런데 그런 과정을 통해서 로마서는 더욱더 분명하고 뚜렷한 메시지를 가진 성경이 아니라 성경 중에서 가장 논쟁이 많고 난해한 성경이 되고 말았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고 하는 말처럼 되고 만 것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지극히 학문적이고 교리적인 측면으로 로마서를 연구하고 분석하다 보니, 로마서가 구원과 생명을 주는 성경이 아니라 절망을 주는 성경이 되었다. 그리고 화석처럼 딱딱하고 생동감 없고 재미없는 성경이 되었다. 이런 문제들은 모두 로마서가 어떤 성경인지, 그리고 로마서를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 지에 대해서 올바른 이해를 가지고 있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우리가 로마서가 어떤 서신인지 정확하게 이해하게 될 때, 로마서를 올바로 공부할 수 있다. 그리고 로마서를 통해서 많은 영적인 유익을 얻을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이것에 대해서 살펴보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1) 로마서는 편지이다.
로마서는 바울이 로마의 교우들에게 편지로 써서 보낸 것이다. 로마서를 공부함에 있어서 이것을 기억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우리가 지금 친구나 사랑하는 사람에게 편지를 쓴다면, 어떻게 편지를 쓰겠는가? 애정어린 마음으로, 그리고 편안한 마음으로 편지를 쓰지 않겠는가? 로마서는 바울이 친구에게, 사랑하는 사람에게 편지를 쓰는 그런 기분으로 쓴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로마서를 그런 편지를 읽듯이 읽어야 한다. 물론 이것이 우리가 로마서를 편지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읽어도 그 안에 담긴 메시지들을 모두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솔직히 로마서는 매우 어렵고 난해한 성경이다.) 하지만 로마서를 친구로부터,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온 편지를 받아서 읽는 것처럼 로마서를 읽는 것은 로마서를 공부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로마서를 공부하는 것은 너무나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이 되고 만다.
그리고 편지를 쓸 때는 상대방을 고려해서 쓰게 되어 있다. 즉, 상대방이 읽기 쉽게, 이해하기 쉽게 쓰게 되어있다는 말이다. 누가 상대방이 읽을 수도 없고 이해할 수 없도록 편지를 쓰려고 하겠는가?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로마서가 너무 어려워서 자신이 읽고 이해하기 힘든 서신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 (물론 이것이 사실인 측면도 없지 않아 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을 가지고 로마서를 보면, 로마서가 이상하게 더 어렵게 느껴진다.
로마서가 편지라는 것을 감안하면, 로마서는 로마의 교우들이 충분히 읽고 이해할 수 있도록 바울이 쓴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의 신앙을 실제적으로 도와주기 위해서 쓴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로마서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리고 이것을 통해서 신앙의 유익을 얻을 수 있지 않겠는가? 로마서가 비록 어렵게 다가온다 할지라도 기본적으로 이런 생각을 가지고 읽고 공부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럴 때, 우리에게 로마서를 공부하는 데 꼭 필요한 건강한 긴장감과 두려움은 살아있으면서 쓸 데 없고 근거 없는 두려움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될 것이다.
2) 대필이 쓴 편지이다.
로마서는 바울이 대필을 통해서 쓴 것이다. 로마서 16장 22절을 보면, 더디오라고 대필자의 이름도 정확하게 나와 있다. 바울이 더디오라는 대필을 통해서 로마서를 기록한 것이다. 이것을 쉽게 이해하려면 목회자가 설교를 하면 성도들이 그 설교를 적고, 교수가 강의를 하면 학생들이 그 강의를 받아적는 것을 연상해보는 것이 좋다. 열정적으로 말씀을 전하는 바울과, 그것을 열정적으로 받아적고 있는 더디오를 연상해보라.
바울에게는 다메섹에서의 놀라운 구원의 체험이 있었고,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놓고 기도하고 연구하고 묵상하는 가운데 열려진 말씀의 깊은 세계가 있었다. 바울은 그로 인해 뜨거워진 자신의 가슴을 스스로도 주체하지 못하면서 전 세계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며 불을 토해내듯이 열정적으로 메시지를 전했다. 사실 모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들은 이렇게 말씀을 전하지 않는가? 우리가 공부하고자 하는 로마서의 메시지 또한 이렇게 전해진 것이고, 그 메시지를 다른 사람이 대필해서 기록된 것이다.
바울은 아마도 이 로마서의 메시지를 전하다가 흥분해서 책상에도 올라가고, 책상을 내리치거나 메시지를 강조하기 위해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을 것이다. 너무 열심히 말씀을 전하다가 땀이 흘러내려 손수건으로 땀을 닦기도 하고 소매를 겉어 붙이거나 옷을 벗기도 했을 것이다. 심지어 속에서부터 솟아오르는 무엇인가를 주체하기 못해서, 말로 표현하지 못할 감동으로 밀려와서 노래를 부르기도 했을 것이다. 기쁨을 이기지 못해 웃기도 하고, 주님의 사랑에 감동되어 눈물을 흘리기도 했을 것이다.
로마서의 핵심은 구원론인데, 구원론에 대한 메시지를 전하면서 이런 모습을 가지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위대한 은혜와 사랑을 체험하고, 그것에 완전히 사로잡힌 사람이,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구원을 얻은 사람이 어떻게 무덤덤하고 냉정하고 차분하게 그것을 전할 수 있겠는가? 눈물과 감격, 흥분과 환호가 없이 구원론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 오히려 더 이상한 것이 아닌가? 그리고 이렇게 로마서를 전하지 못하는 자들은 로마서의 메시지를 진정으로 충분히 이해했다고 볼 수 없다.
로마서를 보면, "아멘"이라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롬 1:2, 9:5, 11:36, 15:33, 16:27). 바울이 열심히 말씀을 전하다가 자신을 압도해오는 은혜를 주체하지 못해서, 자신이 전하는 메시지에 자신이 은혜를 받아서 아멘이라고 이곳 저곳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로마서에는 찬가도 있다(8:31-39, 11:33-36). 뜨겁고 열정적으로 찬양의 노래를 부르는 것이다. 이것은 로마서가 학문적이거나 교리적인 목적으로 쓰여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즉, 로마서에는 바울 안에 있는 뜨거운 신앙, 눈물, 감격, 열정, 생명이 녹아져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로마서에 대한 지식을 얻는 것보다 이것을 깊이 있게 발견하고 깨닫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바울 안에 있는 신앙이 로마서에서는 아주 학문적이거나 교리적인 언어로 표현되었지만, 그것으로 인해서 그 안에 녹아있는 더 중요한 본질을 결코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바울이 로마서를 대필을 통해서 썼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바울이 학문적으로, 신학적으로 로마서를 쓰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만약에 바울이 그런 목적을 가지고 로마서를 썼다면, 대필을 하지 않고 책상에 앉아서 매우 꼼꼼하게 직접 친필로 로마서를 썼을 것이다. 즉, 여러 책들이나 자료를 쌓아놓고 책상에 앉아서 하나 하나 꼼꼼하게 따지고 분석하면서 로마서를 썼을 것이다. 아무래도 일어서서 말씀을 전하는, 그것도 성령의 능력에 취해서 아주 열정적으로 말씀을 전하는 설교나 성경강해와 책상에 차분하게 앉아서 꼼꼼하게 학문적으로 말씀을 기록하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물론 바울이 열정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아주 꼼꼼하게 공부하고 연구했던 시절이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책이나 논문을 쓰듯이 로마서가 기록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로마서는 오랜 시간 동안 쌓여지고 쌓여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공부와 연구, 깨달음들을 설교와 성경 공부 등을 통해 바울이 홍수처럼 쏟아낸 것이며, 그것을 대서가 받아서 기록한 것이다.
이것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로마서의 생명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물고기를 알기 위해서 해부해보면, 물고기를 알게 되지만, 결국 그 물고기는 죽게 된다. 해부를 통해서 물고기에 대해서는 알게 되지만 물고기의 생명은 없어지고 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로마서를 지나치게 학문적이고 신학적으로, 교리적으로 파고 들게 되면(물론 이것이 전혀 필요 없다는 것은 아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로마서에 대해 알게 되기는 하지만 오히려 로마서가 죽어버리는 역효과가 일어난다. 로마서의 생명력이 사라지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로마서를 통해 로마서에 대한 지식과 정보만이 아니라 바울의 뜨거운 신앙과 열정, 생명 또한 알 수 있어야 한다. 이것까지 알아야 로마서를 진정으로 알았다고 할 수 있다.
가수가 열정적으로 노래를 부르는 것과 무미건조하게 노래의 가사를 읽는 것, 그리고 그 가사를 분석하고 평가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 그리고 배우가 열정적으로 연기를 하는 것과 무미건조하게 대사를 읽는 것, 그리고 그 대본을 분석하고 평가하는 것에도 큰 차이가 있다. 이처럼 로마서의 메시지 또한 생명력 있게, 열정적으로 전하는 것과 무미건조하게 메시지를 책 읽듯 읽는 것과는 당연히 큰 차이가 있다. 로마서는 반드시 전자의 형태로 사람들에게 전해져야 한다. 그리고 로마서에 대해서 이성적으로 분석하고 평가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지만, 그것으로 인해 로마서의 생명력까지 훼손시켜서는 안 된다. 뛰어난 요리사는 살아있는 생선이 피를 흘리게 하지 않으면서 회를 뜰 수 있다. 이처럼 로마서가 어떤 성경인지 깊이 있게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로마서의 생명력을 잃게 하지 않으면서도 로마서를 학문적이고 교리적으로 깊이 다룰 수 있다.
로마서는 문자로 기록되어 있다. 이 문자로 기록된 로마서에 생명력을 불어넣어 로마서를 생생하게 살아있는 로마서가 되게 할 때, 그리고 바울이 로마서를 전했던 그 때 그 시절의 감동과 눈물과 열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로마서로 재현해낼 때, 그것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진정한 로마서의 진수를 만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왜 로마서가 '로마서'인지를 깨닫게 될 것이다.
3) 로마서는 유언장이다.
로마서는 유언장과 같은 서신이다. 앞에서 바울이 로마서 저술할 당시의 상황에 대해서 잠시 살펴보았다. 바울은 예루살렘 행으로 인해 예루살렘에서 죽을지도 모르는 심각한 상황에 있었고, 그 상황에서 고린도에서 로마의 교우들에게 마지막으로 유언장을 쓰는 것처럼 편지를 남겼다. 그것이 바로 로마서다. 그러므로 우리는 유언장을 받아서 보는 것 같은 기분으로 로마서를 공부해야 한다.
유언장은 한 사람이 마지막으로 가장 남기고 싶은, 다른 것은 몰라도 그것만큼은 꼭 남겨야 되는 것을 기록한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는 처절함과 절박함, 간절함, 진실함이 담겨 있다. 또한 유언장은 그것을 남기는 자보다 오히려 받아보는 자에게는 더한 떨림을 준다. 이런 세계를 우리가 정확하게 공유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로마서를 바울이 남긴 유언장으로 받고 있다고 할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로마서를 통해 바울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파장을 심각하게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바울은 세계선교에 나선 이후로 항상 로마에 가기를 간절히 원했다. 그래서 로마서에도 서론과 결론 부분에서 무려 두 번에 걸쳐 자신의 로마 방문 계획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로마서 1:10,13,15, 15:32절을 통해서는 자신이 로마에 가기를 간절히 원한다는 것을 아주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다. 이것이 바울 안에 있는 간절한 마음이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이 로마로 가는 것이 불가능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떨리는 마음으로 유언장처럼 로마서를 남겼다.
바울에게 있어서 로마로 가는 것은 자신의 생명보다 귀한 일이었다. 특히 그는 로마를 거쳐 서바나까지 가고 싶어했다(롬 15:23,29). 그는 로마를 넘어 땅 끝까지 나아가 복음을 전하고 싶었던 것이다(행 1:8). 그것은 바울의 개인적인 꿈과 야망의 차원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예수께서 유언으로 남기신 마지막 말씀이었고(마 28:18-20; 막 15:16; 행 1:8), 바울은 그 주님의 뜻, 주님의 유언을 이루어드리기 위해서 로마로, 서바나로 가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일로 인해서 주님께서 남기신 유언을 못다 이루고 죽어야 할 지도 모르는 상황에 있었다. 이것은 바울에게 가슴이 찢어지는 일이었다. 아니 죽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바울은 성령에 매인 바 되어 예루살렘으로 가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이 상황에서 바울은 자신이 그토록 가고 싶었던 로마를 향한 애타는 마음, 간절한 마음을 겨우 겨우 삭히며 처절하게 유언장을 남기듯이 로마서를 기록했다. 이 마음을 우리가 얼마나 깊이 느끼고 공유할 수 있겠는가?
유언장처럼 기록된 로마서를 유언장을 잃는 마음을 잃어버리고 그냥 일상적인 편지를 읽는 것처럼 무덤덤하게 읽는 순간, 우리는 로마서를 통해서 진정으로 얻을 수 있는 수많은 메시지와 감동을 잃어버릴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을 깊이 기억하면서 앞으로 로마서를 공부해야 할 것이다.
한 가지를 더 생각하자면, 유언장처럼 쓰여진 로마서는 바울이 남기는 최후의 역작과도 같은 것이었다. (물론 예루살렘에서 순교하지 않아 바울은 이후에도 여러 서신들을 남겼다.) 바울은 남기고 죽으면 한이 될 것 같은 가르침들, 즉 죄와 구원과 기독교 윤리의 문제를 로마의 교우들에게 혼신의 힘을 다해서 전했다. 그래서 결국은 오늘날 성경에 기록된 주옥과 같은 로마서의 메시지가 남아지게 되었다. 내일 죽을 것처럼 오늘을 살아가는 것,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로마서를 통해서 보게 된다. 우리가 하루 하루를 그렇게 살아간다면, 얼마나 위대한 것들을 풍성하게 남길 수 있겠는가?
로마서 제2강
죄론 (1) - 이방인의 죄
1. 이방인의 죄
1) 불경건과 불의 -> 하나님의 진노(심판) -> 유기 -> 사망
인간의 죄의 본질은 불경건과 불의이며, 그것에 대해 임하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이다(롬 1:18). 여기에서 불경건은 하나님에 대한 죄, 수직적인 죄이며, 불의는 인간에 대한 죄, 수평적인 죄이다. 타락한 인간은 수직과 수평으로, 즉 하나님을 향해, 인간을 향해, 만물을 향해 온통 죄를 지으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죄는 결국 하나님의 진노를 살 수밖에 없다.
두 개의 돌판에 쓰여진 십계명을 보면, 앞의 5개는 하나님을 향해서 범하는 죄, 수직적인 죄에 대해서, 뒤의 5개는 인간과의 관계에서 범하는 죄, 수평적인 죄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출 20:3-17). 십계명은 인간의 죄의 본질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꿰뚫어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울도 로마서 1장에서 이것을 정확하게 꿰뚫어보고 있다. 그래서 그것을 불경건과 불의라고 표현했다. 우리 또한 이러한 죄의 본질을 정확하게 알고, 또한 그것에 대해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다는 것을 알고, 이것을 청산하기 위해 힘써야 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서 어떤 이들은 하나님은 오직 사랑의 하나님이며 진노의 하나님이 아니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진노의 하나님은 구약의 하나님이고, 사랑의 하나님은 신약의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죄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은 진노라고 성경은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하나님은 죄인을 변함없이 사랑하시지만, 죄에 대해서는 진노하신다. 인간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죄에 대해 진노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랑이 없으셔서 진노하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진정으로 사랑하시기에 진노하신다. 진노는 하나님의 사랑의 또 다른 표현이다.
만약에 컴퓨터가 바이러스에 감염이 되었다면, 컴퓨터의 주인은 감염된 컴퓨터라 할지라도 여전히 사랑하겠지만 바이러스는 미워할 것이다. 컴퓨터를 사랑하면 할수록 바이러스를 더 미워할 것이다. 바이러스는 컴퓨터를 망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에는 컴퓨터를 정상적으로 회복시키기 위해서 바이러스를 없애려고 할 것이다. 컴퓨터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바이러스에 대한 미움과 진노가 없다면, 그리고 그것을 치료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오히려 비정상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 다른 예를 들자면, 만약에 병이 든 환자가 있다면, 의사는 환자는 사랑해야 하지만 병은 미워해야 한다. (환자도 병을 미워해야 한다. 그래야 병을 고칠 수 있다.) 의사가 병을 미워하지 않는다면, 더 나아가 병을 사랑한다면 이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이다. 그는 더 이상 의사가 아니다. 그는 환자의 병을 치유하지 못해 결국 환자를 죽게 만들 것이다. 그런데 이 진노조차 잘못된 것이라고 한다면 얼마나 잘못된 생각인가? 진노라고 무조건 나쁜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 무슨 동기로 진노하는가가 중요하다.
이것은 죄로 인해 병든 인간에게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신다고 하면서 죄에 대해서 진노하지 않으신다면, 그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라고 할 수 없다. 그 사랑은 결국 인간을 망치고 병들게 하고 죽이는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노는 죄인에 대한 지극한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자신의 분을 이기지 못해서가 아니라 인간을 위해서 진노하시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의 진노를 달갑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거의 없겠지만, 그 진노가 얼마나 귀한 사랑이었는지는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깊이 깨닫게 된다. 다른 사람에게, 특히 사랑하는 사람에게 듣기 싫은 소리, 쓴소리를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특히 오해를 받고 미움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 그렇게 하는 것은 더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이런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다면, 우리의 인생이 달라질 것이다.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도 죄에 대해서 진노해주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으로 인해 우리는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이것이 진정한 사랑, 깊고도 깊은 사랑이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진노는 타락한 인간이 혈기로 부리는 진노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타락한 인간들의 혈기와 분노의 감정에서 나오는 진노로 인해 깊은 상처를 받은 많은 사람들이 진노에 대해서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지만, 없애야 할 것은 진노 자체가 아니다. 잘못된 진노를 하는 사람을 고쳐야 하고 그 성품을 고쳐야 하는 것이다. 인간이 완전한 의인이 되지 않는 한, 하나님의 진노가 없기를 바라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모든 인간들이 하나님의 진노 없이도 살아갈 수 있을 정도로 성숙하게 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것을 하나님이 더 원하실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 모든 인간에게는 진노가 필요하다.
더군다나 타락한 인간은 보편적으로 죄에 대해서 잘 회개하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달콤한 죄의 유혹에 빠져서 계속해서 죄를 지으면서 살아가려고 한다. (술과 담배, 음란물 등에 중독된 사람에게 좋은 말로 끊으라고 한다면 통할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리고 죄를 사랑해서 죄와 벗하며 살다가 결국에는 완전히 죄로 고착된 존재가 된다(이것이 극대화된 존재가 사단이다). 그러나 그 끝에는 완전한 파멸만이 기다리고 있다. 어떤 이들은 이러한 결과를 알고 죄의 유혹을 끊으려고 하지만,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는 쉽게 끊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인간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알고 계시기 때문에 인간이 죄적인 존재로 고착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죄에 대해서 계속해서 진노하신다. 그리고 인간의 죄가 반복되면 될수록 하나님의 진노도 점점 더 커진다.
하나님의 진노는 즉각적으로 임하기도 하고, 더디 임하기도 한다. 인간의 죄에 대해서 즉각적으로 진노하기도 하시지만, 인간이 죄를 깨닫고 스스로 회개할 때까지 오래 참고 기다려주시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노에도 끝까지 돌이키지 않는 자는 하나님께서도 어찌하실 수가 없어 내어버려두신다. 이것이 유기이다.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유기된 자들은 멸망에 이를 수밖에 없다.
2) 이방인들의 유형
모든 인간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와 믿는 자의 두 부류로 크게 나눌 수 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와 믿는 자(유대인, 그리스도인)의 죄에 대해서 지적하고 있는데, 1장에서 먼저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 이방인들의 죄에 대해서 지적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방들의 유형은 크게 어떻게 나눌 수 있는가?
i) 무신론자
무신론자들은 하나님이 없다(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자들이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하나님이 분명히 존재하시며(히 11:6), 모든 인간이 하나님을 알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롬 1:21). 그리고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자들은 어리석은 자들이며(시 14:1, 53:1), 이들 중에는 선을 행하는 자가 하나도 없다고 했다(시 14:2-4, 53:1-4). 그리고 이들이 아무리 선을 행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영광에 미치지는 못하는 것이라고 한다(롬 3:23). 하나님은 존재하시는가? 존재하시지 않는가? 분명한 것은 이 세상에는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자들도 많지만, 하나님의 존재를 알고 있고, 더 나아가 그분과 깊이 인격적으로 교제하는 이들도 너무나 많다는 것이다.
ii) 적극적 무신론자 (반신론자 포함)
적극적 무신론자들은 하나님이 존재해도 믿지 않겠다고 하는 자들이다. 특히 반신론자들은 하나님을 적대시하며 적극적으로 반대한다. 이들은 하나님의 존재로부터 인간이 해방될 때, 인간이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사람들의 경우에 대부분 교회나 그리스도인들로부터 깊은 상처를 받은 경우가 많다. 이 부분에 대해서 바울은 로마서 2장의 유대인들의 죄에서 다루고 있다.
이 세상에 적극적 무신론자들이 존재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적극적이고 의지적으로 하나님을 믿지 않으려고 하는 자들은 사실 많지 않다. 다만 이런 저런 이유로 - 먹고 사는 것만으로도 바쁘고, 관심이 없다는 등 - 하나님을 생각하기 싫어하고, 하나님을 믿는 것을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자들이 많을 뿐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자들 가운데서도 이런 자들이 매우 많다. 그러나 결론적으로는 이런 자들과 적극적인 무신론자들이 다른 것은 전혀 없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살아가는 자들은 그것이 자신의 삶으로부터 얼마나 많은 것을 빼앗아가고 있는지를 전혀 알지 못한다. 그것은 부모가 없는 사는 아이가 그 삶에 너무 익숙하다보니 부모가 있는 삶의 풍요로움을 모르는 것과 같다. 하지만 부모가 있는 아이와 부모가 없는 아이는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가?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을 많은 자들에게 보여주어야 할 책임이 있다.
iii) 불가지론자
불가지론자는 하나님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다고 하는 자들이다. 그래서 이 문제에 있어서 중립에 서려고 한다. 하지만 결론적으로는 이들도 무신론자들과 다를 바가 없다. 그리고 이들은 무신론자들보다는 양심적이고 이성적으로 보이지만,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 답해야 할 인간의 책임을 교묘하게 회피하려는 더 간교하고 악한 생각일수도 모른다. 그리고 하나님의 존재의 문제를 단순히 이성의 유추의 문제로만 삼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이성만이 아니라 다른 통로를 통해서도 인간은 하나님의 존재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iv) 우상숭배자
우상숭배자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고 다른 우상숭배에 빠진다. 자신이 만들어낸 신을 섬기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섬기고 싶은 신을 만들어내서 섬기는 것이다. 그 하나님은 자신이 순종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에게 순종해야 할 대상이다.
v) 자연신론자
하나님이 존재하시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시계공처럼 생각한다. 시계공이 시계를 만들지만 만든 이후에는 시계가 저절로 돌아가고, 그것에 대해서 관여하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만드셨지만, 이 세상은 하나님 없이 저절로 돌아가고 있으며, 하나님은 관여하지 않으신다고 주장한다.
3) 신의 존재 논증
객관적
- 우주론적 논증: 우주를 보면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원인과 결과의 관계로 연결되어 있는데, 이것을 유추해보면 결국에는 모든 것의 처음 원인이 되는 궁극적인 대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이 존재를 바로 신이라고 할 수 있다: 제1 원인(토마스 아퀴나스), 부동의 동자(아리스토텔레스). 모든 만물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다(시 19:1-6). 하나님의 영원한 능력과 신성이 만물 가운데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롬 1:20).
- 목적론적 논증: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존재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고, 이것은 곧 그 목적을 부여한 창조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우연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분명한 존재의 목적을 가지고 있다. 시계는 시간을 알기 위해서 존재하고, 컵은 물을 마시기 위해서 존재한다. 창조되고 나서 이런 목적으로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이러한 목적을 가지고 창조된 것이다. 그리고 인간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들은 무질서하게, 그리고 우연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공생하며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어 살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다. 이러한 질서와 목적을 부여한 지적인 창조자가 분명하게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주관적
- 존재론적 논증: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완전한 존재가 신이다. 신은 ‘더 이상 완전할 수 없는 분’이다. 모든 인간은 선험적으로 이러한 신에 대한 개념을 가지고 있다. 모든 인간은 이성의 유추를 통해서 신의 존재를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성을 통해서는 신이 구체적으로 어떤 존재인지는 알 수 없다.)
파스칼은 내기 이론을 통해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는 것과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에 우리가 내기를 걸어야 한다면, 이성적인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것에 내기를 걸 것이라고 했다.
- 도덕론적 논증: 인간 안에 도덕심(윤리성)이 있다. 그리고 양심이 있다. 그래서 죄를 지은 사람은 모두 영혼이 불안해지고, 깊은 죄책감에 사로잡히게 된다. 도둑도 자신이 잘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 도둑질을 한다. 이런 마음은 인간 안에 선험적으로 주어져 있는 것이며, 이것을 심어주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다. 그리고 이러한 마음을 잃어버린 자, 양심에 화인을 맞은 자는 짐승과 다를 바가 없다. 이 도덕심이 있을 때 인간은 진정한 인간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 도덕심은 인간이 후천적인 교육이나 체험을 통해서 습득한 것이 아니라 창조주가 인간에게 새겨준 것이다.
- 실존론적 논증: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을 찾고 있다(시 42:1). 그리고 해바라기가 해를 바라듯이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을 바라고 있다. 아버지라는 말 안에는 아들이 있고, 아들이라는 말 안에는 아버지가 있는 것처럼, 하나님과 인간은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부르고 계시고, 인간의 실존 자체도 항상 하나님을 부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시공을 초월해서 모든 인간 안에는 하나님을 찾는 마음이 있다.
고대 인간들이 만든 무덤의 벽화에서 신에게 예배하는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인간은 종교적 존재이다. 터툴리안은 “인간은 날 때부터 크리스천”이라고 했으며, 어거스틴은 “하나님은 내 안에 계신데 나는 하나님을 밖에서 찾았습니다. 내 영혼이 하나님 안에 있기 전에는 내 영혼에 안식이 없습니다.”라고 고백했다.
4) 불경건
불경건: 교만,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것(롬 1:28).
불경건은 반드시 우상숭배를 초래한다. 인간은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다른 무엇인가를 믿게 된다. 누군가를, 무엇인가를 믿는 믿음이 없이는 결코 살 수 없는 것이 인간이다. 인간은 관계적인 존재이며, 그 관계의 문을 여는 첫 문이 믿음이다.
우상화된 하나님은 더 이상 하나님이 아니다. 하나님은 인간에 의해서 결코 객관화될 수 없는 분이시다(초월자 하나님):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니라”(출 3:14), “우상을 만들지 말라”(출 20:4-5), “하나님은 영이시니”(요 4:24). 인간은 항상 하나님을 우상화하려고 하지만, 그래서 자신만의 신을 만들려고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철저하게 거부하신다.
불경건과 우상숭배는 도덕적 타락을 초래한다. 불경건과 우상숭배에 빠진 인간은 결코 도덕적으로 살 수 없다(롬 3:23). 그리고 자신의 힘과 노력으로 도덕적 타락의 상태에서 벗어날 수도 없다. 이것은 인류의 역사를 통해서 분명하게 드러난 것이다. 모든 문제는 오직 불경건의 죄가 청산될 때 해결될 수 있다. 경건성의 회복 외에 진정한 도덕성 회복이 일어날 수 있는 다른 길은 없다.
불경건은 모든 죄의 뿌리가 되는 원죄이다.
5)불의
불의: 도덕적 타락. 불경건한 인간이 행하는 악한 행위들.
불경건한 인간은 반드시 불의에 빠진다. 가장 핵심적인 불의의 죄는 살인, 간음, 도둑질, 거짓 증거, 탐심이다(출 20:13-17, 십계명).
로마서에서 바울은 특히 성적 타락의 문제를 지적했다. 가장 심각한 불의의 문제가 성적 타락의 문제이다. 성적 타락은 사랑의 타락을 낳고, 생명의 타락을 낳는다.
성적 타락이 극악해지면 동성애로 이어진다. 순리가 아닌 역리의 세계가 열리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에는 창조의 질서가 총체적으로, 완전히 무너지게 되고, 멸망을 피할 수 없다. 동성애 뿐만 아니라 모든 부분에서 이러한 일들이 일어난다. 그래서 질서와 조화가 사라지고 무질서와 혼돈의 상태로 돌아가게 된다. 타락이 극악해지면 반드시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6) 심판
하나님의 심판이 즉각적으로 나타날 수 있다.
i) 아이가 신호등에서 빨간 불에 길을 건너려고 한다면, 부모는 즉각적으로 그러한 행동에 대해서 심판을 해주어야 한다. 심판은 옳고 그른 것을 정확하게 깨닫게 해주고, 그에 따라 어떠한 처벌을 받아야 하는지를 알게 하는 것이다. 죄에 대해서 부모가 정확하게 심판해주지 않으면 아이는 선악의 기준을 잃어버릴 것이고, 그것으로 인해 피해를 보게 된다. 그러므로 심판은 기본적으로 사랑의 행위이다.
ii) 다른 이들에게 죄에 대한 경각심을 심어주기 위해 대표적인 성격을 가지고 즉각적인 심판이 일어날 수 있다. 교회 안에 간음의 죄가 횡행하게 된다면, 교회는 결국 그 죄로 인해 완전히 무너질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러한 죄를 범한 자에 대해서 정확하게 벌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럴 때 많은 자들이 죄에 대해서 경각심을 가질 것이다. 이러한 목적으로 심판이 일어나는 것이다.
심판이 지연될 수도 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자들이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가능한 한 죄인들의 죄에 대해서 쉽게 심판하지 않으시고 참고 인내하신다. 하나님이 즉각적으로 심판하셔도 전혀 문제 없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그래서 심판을 지체하신다. (자신의 죄에 대해서는 너무나 관대하고,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해서는 매우 날카로운 시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심판이 지체되는 것에 대해서 불만을 가진다. 하지만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면 가장 먼저 심판받아야 할 사람이 바로 나일지도 모른다.)
심판은 반드시 임한다.
심판이 지체될 수는 있지만, 그것으로 인해 심판이 임하지 않는다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심판은 반드시 임하게 되어 있다. 학생이라면 누구도 학교에서 치르는 시험을 피할 수 없는 것처럼, 모든 사람은 결국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되어 있다. 자신의 일생을 통해서 죄인은 죄의 열매를 맺을 것이고 의인은 의의 열매를 맺을 것이다. 그리고 그 열매로 인해서 모두 심판을 받게 된다.
죄에 대해서 끝까지 회개치 않는 자들은 죄의 열매를 맺게 되어 있고, 그것으로 인해 부끄러움과 수치를 당하게 될 것이다. 세 살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 그리고 죄는 가면 갈수록 극악해진다. 바늘도둑이 소도둑이 된다. 그러므로 심판이 지연된다고 계속 죄를 범하지 말고,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깨닫고 죄에 대해서 철저하게 회개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죄의 삯은 사망이며(롬 6:25), 반드시 심판을 받게 되어 있다(히 9:27). 그래서 비참한 종국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 교회는 구원론을 전하기 전에 먼저는 이 죄와 하나님의 진노, 심판에 대한 메시지를 반드시 강력하게 전할 수 있어야 한다. 죄에 대한 진정한 고백과 참회가 없는 자에게는 구원이 임할 수 없으며, 그러한 구원은 진정한 구원이라고 할 수 없다.
7) 유기
하나님은 죄에 대한 진노에도 끝까지 회개치 않는 자들을 내어버려 두신다(유기).
하나님이 유기하시는 것이지만, 사실은 인간이 스스로 유기되는 것이다.
유기는 하나님의 무정과 무자비함의 산물이 아니라 오히려 죄인에 대해서 어찌할 수 없는 하나님의 무력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하나님의 무력함은 타락의 길로 치닫는, 그리고 집을 나가려는 자식을 막을 수 없는 부모의 무력함, 부모의 비참한 심정과 같은 것이다.
8) 사형선고와 사망
하나님은 떠난 자들은, 하나님의 품으로부터 유기된 자들은 그 자체로 사형선고를 받은 것과 같다. 이것은 아이가 부모의 곁을 떠나고, 물고기가 물을 떠나고, 식물이 뿌리를 잘라낸 것과 같다. 그래서 결국 사망에 이르게 된다.
죄론 (2) - 유대인의 죄와 우리의 죄
2. 유대인의 죄
1) 정죄 (판단)
자신이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는 자들은 자신의 죄와 문제는 보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의 죄와 문제에 대해서는 정죄하고 판단하기 쉽다(마 7:1-5).
유대인들은 자신이 노예로 태어나지 않은 것, 여자로 태어나지 않은 것, 이방인으로 태어나지 않은 것에 대해서 감사기도를 하는 자들이었다.
유대인들은 특히 이방인들은 지옥의 불쏘시개, 뗄감이 되기 위해서 만들어진 존재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들은 아무리 죄를 지어도 구원받지만, 이방인들은 아무리 의롭고 선하게 살아도 반드시 지옥에 간다고 생각했다. 자신들이 아무리 크고 심각한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아브라함이 지옥의 문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천국문으로 인도해준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러한 유대인들의 모습은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면 이후로 아무리 큰 죄를 지어도 자신은 천국에 들어간다고 생각하는 그리스도인들과 같다. 그러나 누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인가?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의 의미는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우리의 신앙은 내적인 것만이 아니라 반드시 외적으로, 존재와 삶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리고 열매로 어떤 나무인지를 알 수 있는 것처럼(마 7:15-23), 그의 존재와 삶을 통해서 그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말씀대로 살아감으로 올바른 열매를 맺는 인생이 되어야 한다(마 7:24-27). 행위로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지만, 구원받은 자는 반드시 행위와 삶이 변화되어야 한다. 기독교의 구원은 결코 구원받은 이후에 죄악된 삶을 살아가는 것을 조장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심판은 동일하게 임한다. 유대인들이라고 이 심판에서 면제되는 것은 아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동일한 심판의 선상에 서 있으며, 의에 대해서는 동일하게 상을 받고 죄에 대해서는 동일하게 벌을 받는다. 유대인들의 차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기 때문에 의와 죄에 대해서 더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말씀을 행하지 않으면 아무런 유익이 없다. 진정으로 구원을 얻은 자라면, 그리고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죄를 용서해주시는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만을 말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을 행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살아가려고 해야 한다. 이런 자들이 진정으로 구원을 얻은 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2) 은혜의 악이용 (도덕적 해이)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의 은혜를 악이용하는 죄가 있었다.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철저하고 정확하게 심판해주기를 원하면서, 자신의 죄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끝없이, 그리고 무조건적으로 용서해주시기를 바란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하신다고 생각하면서 더욱더 죄를 범하는 삶을 살아간다. 이러한 은혜의 악이용이 은혜를 잘못 이해한, 그리고 심지어 악이용하는 거짓된 그리스도인들에게 일어날 수 있는 문제이다.
은혜를 악이용하는 자들은 도덕적 해이에 빠져 죄를 범하며 살아가게 되어 있고, 결국은 심판과 멸망에 이르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행한 대로 보응하시는데, 참고 선을 행하는 자에게는 영생을, 불의를 좇는 자들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악을 행하는 사람의 영혼에는 환난과 곤고가 있고, 선을 행하는 사람의 영혼에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다. 이것을 기억하고 결코 도덕적 해이에 빠져 죄를 범하는 삶을 살아가서는 안 된다.
3) 완고 – 회개치 않음/고집부림
자신의 죄에 대해서 끝까지 고집을 부리며 회개치 않는 완고함(완악함)도 큰 문제이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죄와 문제를 보지 않으려고 하고, 그것에 대해 말하면 귀를 막고 듣지 않으려고 한다. 그리고 정직하게 죄를 시인하지 않고 끝까지 핑계를 대거나 혈기를 내고 고집을 부린다. 이들은 자신의 죄와 문제를 지적하는 올바른 말에 대해서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으며(행 7:57), 곧은 목(행 7:51)과 오만한 눈을 가지고 있다.
때로는 자신의 죄에 대해 단호하지 못해서 우유부단하게 넘어가는 경우도 많다. 마귀 중에 최고의 마귀, 가장 지독한 마귀는 ‘내일 마귀’이다. “내일 회개해. 내일 믿어. 내일 해.”라는 말에 쉽게 넘어가는 사람은 ‘내일 마귀’의 시험에 걸린 사람이다. 회개는 회개의 마음이 일어났을 때, 그 순간 즉시해야 한다. 그 때를 잃어버리면 언제 다시 회개할 수 있을지 누구도 알 수 없다. 오늘 회개하려고 했다 할지라도 내일이 되면 또 어떻게 바뀔지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자신이 문제가 있다는 것, 잘못되었다는 것을 발견하고 깨달으면 즉각 고쳐야 한다. 고치지 않고 두면 둘수록 그것이 더 고착화되어서 고치는 것이 더 어렵고 힘들어진다.
4) 외식 – 율법을 가르치지만, 율법을 지키지 않음(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음)
유대인들은 율법을 자랑했고, 율법을 지키는 자들만이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은 실제로 율법을 지키지 않았고, 위선적인 신앙에 빠져 있었다.
유대인들은 스스로 어리석은 자의 훈도요 어린아이의 선생이라며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고, 그것으로 자신이 다른 이방인들과 다르다고 했지만, 그들 자신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았다. 우상을 숭배하고, 살인하고, 간음하고, 도둑질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기는커녕 오히려 욕되게 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전에 자신을 가르쳐야 한다. 그리고 자신이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며 살아야 한다. 신앙의 외식(위선)에 빠지게 될 때, 우리의 신앙이 위기에 처하게 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을 받게 된다.
* 율법 이전의 사람들, 그리고 율법을 모르고 죄를 범한 자들은 죄가 없는가? 양심이 법이 된다. 자신의 양심이 자신이 죄를 범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정확하게 알려준다. 그리고 양심의 화인이 맞아 깨닫지 못하는 자들은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 최후 심판의 날에 모든 죄가 낱낱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5) 의식주의 – 할례는 의식을 상징. 할례를 행함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함.
유대인들은 태어난 지 8일이 지나면 할례를 행했고, 이것은 유대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의식이었다. 할례를 받지 못한 자들은 결코 유대인이 될 수 없었고, 이방인들도 유대인들이 되기 위해서는 할례를 행해야 했다. 할례는 오늘날의 세례와 같은 것으로, 오늘날의교회에서도 세례를 받은 자들만을 그리스도인으로 인정한다.
그러나 무할례자가 율법을 지키면 할례자와 같지만, 할례자가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무할례와 같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율법을 지키지 않는 자들은 이방인들과 같고, 이방인이지만 율법을 지키는 자들은 그리스도인들과 같다. 의식적으로만 행하는 할례, 세례는 의미가 없다. 표면적 할례가 할례가 아니며 이면적 할례가 할례이다. 진정한 할례는 마음에 해야 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삶의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6)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라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라 이면적 유대인이 진정한 유대인이다.
표면적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이면적 그리스도인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다.
겉모습이 아니라 내면이, 영혼이 진정으로 변화되어야 한다. 의식만 행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죽고 다시 살 아나는 중생을 체험해야 한다.
그런 자들이 삶에 있어서도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서 진정으로 변화된 삶을 살아갈 수 있다.
3. 우리의 죄
우리는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을 의미한다(롬 3:9).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원죄는 청산되었지만, 자범죄가 남아 있다.
성화의 과정을 통해서 이 자범죄를 청산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러야 한다.
로마서 5-7장을 통해서 더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죄론(3) - 죄의 판결문과 율법의 역할과 한계
4. 죄의 판결문
바울은 이방인의 죄, 유대인의 죄, 우리의 죄를 지적한 이후에 결론적으로 “의인은 한 명도 없다” (롬 3:10)고 했다. 로마서 3장 22절에서도 “모든 사람은 죄를 범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죄인이다.”(롬 3:23)고 했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신 그리스도 외에 모든 인간은 죄인인 것이다.
로마서 3장 10절을 통해 모든 인간이 죄인이라고 분명하게 선고한 후에, 로마서 3장 11-18절을 통해 그러한 선고를 내린 이유에 대해서 죄의 판결문을 읊는 형식으로 죄론을 결론짓고 있다.
마음과 생각(롬 3:11), 입(롬 3:13-14), 행동(롬 3:15-18)의 모든 것이 총체적으로 부패함(롬 3:12): 완전부패, 완전타락(Total Depravity; 혹은 전적부패, 전적타락)
시편과 이사야서를 통해 인간이 죄인인 이유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카라즈).
결론적으로 죄의 근본이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의 상실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 잠 1:7) 여기에서부터 모든 죄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5. 율법의 역할과 한계
1) 율법의 역할
율법은 인간이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줄 수 있다.
율법은 구원과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깨닫게 하고, 구원과 그리스도를 향해 죄인들이 나아오게 한다.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 바울의 사역 당시에는 율법의 역기능이 크게 드러남: 사람을 위해 율법이 있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위해서 사람이 존재하는 것 같은 본말의 전도가 일어났다.
* 안식일을 지키라는 계명을 지키기 위해서 수많은 시행세칙을 만들었는데, 이 시행세칙을 지키기 위해서 안식일이 안식일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많은 사람들에게 짐만 되었다.
2) 율법의 한계
죄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고, 죄인을 구원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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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장 18-32절 강해
롬 1:1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롬 1:19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롬 1: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롬 1: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롬 1:22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둔하게 되어
롬 1: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롬 1:2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버려 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롬 1:25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롬 1:26 이를 인하여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버려 두셨으니 곧 저희 여인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롬 1:27 이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인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일 듯 하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저희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 자신에 받았느니라
롬 1:28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버려 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롬 1:29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 하는 자요
롬 1:30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롬 1:31 우매한 자요 배약(背約)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롬 1:32 저희가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
죄론의 중요성
지난 시간까지 로마서 서론 부분을 살펴보았는데, 이제는 로마서 본론으로 들어갈 차례입니다. 그리고 로마서 본론 가운데서도 가장 먼저는 죄론을 살펴볼 것입니다. 로마서 본론은 로마서 전체 16장 가운데 약 14장에 해당하는 로마서 1장 18절부터 15장 13절까지이고, 이 가운데서 죄론은 로마서 본론의 전반부인 로마서 1장 18절부터 3장 20절까지입니다.
바울은 로마서를 통해서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들을 로마서 1장 18절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하고 있는데, 여기서부터의 내용이 정말 중요합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여기에서부터가 진정한 로마서의 시작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로마서의 본론을 어떻게 시작하고 있습니까? 로마서를 보면, 바울이 로마서의 본론을 죄론으로 시작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로마서 본론 부분에서 바울이 가장 먼저 다루고 있는 것이 죄론인 것입니다. 바울은 죄론으로 로마서의 본격적인 문을 열고 있습니다.
앞에서 우리가 로마서에 대해 서론적으로 살펴보면서, 로마서의 핵심은 구원론이라고 했습니다. 로마서는 구원론을 가장 깊이 있게, 가장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는 서신입니다. 그렇다면 왜 바울이 로마서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구원론을 먼저 다루지 않고 죄론을 먼저 로마서에서 다루었겠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구원론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리고 구원론의 메시지가 실제로 구원의 능력을 드러내는 메시지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죄론을 먼저 깊이 있게 살펴보는 것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로마서의 본론, 그 가운데서도 로마서의 죄론을 깊이 공부하려고 하기 전에, 먼저 바울이 로마서에서 보여주고 있는 죄론과 구원론의 메시지를 전하는 순서를 깊이 주목해보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복음전파의 현장에서 복음을 전할 때도 아주 중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구원론 이전에 죄론을 먼저 다룬 바울을 통해서, 우리는 죄론을 먼저 다루지 않고 바로 구원론으로 넘어가는 것은 결코 올바른 성서적 복음 제시가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복음을 전해서는 진정한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낼 수 없습니다. 바울은 로마서를 통해서 이것을 우리에게 정확하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우리 또한 로마서 본론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전에, 이것을 먼저 정확하게 짚어보고 넘어갈 수 있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로마서 본론 가운데서 죄론은 로마서 1장 18절부터 3장 20절까지인데, 바울은 이 부분을 통해서 로마인들 가운데 있는 죄를 낱낱이 드러냈습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들의 죄(롬 1:18-32)와 하나님을 믿는 자들(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 안에 있는 죄(롬 2:1-3:9)를 날카롭게 지적했습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온 인류를 향해서 죄의 판결문을 선포했습니다(롬 3:10-18). 의인은 하나도 없다고, 모든 인간이 죄인이라고 분명하게 선언한 것입니다(롬 3:10). 바울은 이 죄론의 메시지를 통해서 모든 자들이 자신이 죄를 깨닫고, 자신의 죄를 깊이 시인할 수 있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자들이 자신의 죄로부터 구원을 얻고자 하는 소원을 가지고 구원과 그리스도에게로 나오기를 간절히 원했을 것입니다.
물론 바울은 로마의 사람들이 죄론의 메시지를 매우 거리껴할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리고 자신이 죄론의 메시지를 전함으로 인해서 많은 로마의 사람들이 자신을 싫어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것에 대해서 조금도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담대하게 로마서에서 구원론을 다루기 전에 먼저 죄론을 다룰 수 있었습니다. 어떤 측면에서 보면, 바울은 로마 교우들을 향한 부드럽고 따뜻한 인사가 끝나자마자 완전히 표변한 것처럼 날카롭게 로마인들의 죄를 지적하고 나왔습니다. 이러한 바울의 모습에서, 우리는 바울이 사람에게 좋게 하는, 사람들이 듣기 좋아하는 메시지를 전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을 좋게 하는,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메시지를 전하는 자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갈 1:10).
그렇다면 바울이 로마서에서 죄론을 가장 먼저 다룬 이유가 무엇이었겠습니까? 그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죄에 대한 메시지를 듣고 싶어하지 않고, 자신의 죄를 지적받는 것도 좋아하지 않지만, 죄가 분명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전해지는 구원의 메시지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바울이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죄를 지적하지 않고 적당하게 넘어가는 것보다 오히려 죄를 정확하고 날카롭게 지적해주는 것이 더 큰 사랑, 참된 사랑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문제에 대해서 회피하거나 두루뭉술하게 넘어가지 않고, 정면 돌파를 시도했습니다.
우리 또한 로마서를 통해서 구원론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로마서 1장 18절부터 3장 20절까지의 죄론을 깊이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보기 싫다고, 혹은 구원론이 빨리 보고 싶다고 곧바로 로마서 3장 21절로 뛰어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구원은 죄로부터의 구원이기 때문에 죄를 모르면 구원도 있을 수 없습니다. 구원의 메시지가 진정한 구원의 메시지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쓴약을 삼키는 마음으로 죄론을 공부하며 죄에 대한 메시지를 깊이 새겨들어야 합니다.
앞에서 죄를 모르면 구원도 있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병을 모르면 병을 고칠 수도 없는 것과 같습니다. 병이 무엇인지 모르는데 어떻게 병을 고치겠습니까? 그리고 자신이 병에 걸렸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끝까지 고치지 않고 계속해서 숨긴다면, 결국에는 그 병으로 인해 죽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에 의사가 환자가 병에 걸렸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말해주지 않아서 환자가 결국 죽게 된다면, 그것은 명백한 직무유기요 살인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지적하는 것, 죄를 정확히 드러내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이것은 생명이 걸린 문제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죄를 깊이 보지 않으면, 그리고 죄의 메시지를 전하지 않아서 죄를 정확하게 드러내지 않으면, 항상 이런 문제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로마서의 죄론을 깊이 살펴봄으로 이러한 문제에 결코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바울은 죄론의 메시지가 정확하게 선포되지 않으면 이런 문제가 반드시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에, 매우 어렵고 힘든 일이기는 하지만 로마서를 통해서 먼저 죄에 대해 정확하게 말하기를 원했습니다.
이것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정리를 해봅시다. 교회가 죄를 깊이 보지 않으면, 죄에 대해서 지적하지 않으면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됩니까? 죄를 보지 않음으로 죄가 숨겨지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입니까? 죄가 저절로 없어지는 것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 교회는, 그리고 그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은 반드시 죄로 인해 썩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 어떻게 되겠습니까? 썩은 기둥이 때가 되면 무너지듯이, 교회와 교회 안의 성도들 또한 무너져서 완전히 망하게 됩니다. 타락한 세상과 사람들 안에 있는 죄 또한 분명하게 고발되지 않고 은폐되면, 나중에 반드시 썩어지게 되어 있고, 그래서 결국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몸에 곪은 곳이 있다면 조금의 미련도 없이 짜내거나 도려내야 하듯이, 그렇지 않으면 곪은 상처가 썩고 썩어서 나중에 더 큰 문제가 되듯이, 죄로부터의 진정한 자유와 구원을 위해서도 힘들고 고통스럽겠지만 죄를 정확히 드러내고 도려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죄를 정확하게 도려내기 위해서 사람들에게 죄의 메시지를 전할 때, 힘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자신의 죄에 대해 지적을 받을 때, 대부분의 경우 정직하게 자신의 죄를 시인하고 회개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죄의 메시지를 듣지 않으려고 귀를 막습니다. 목을 곧게 하고 눈을 오만하게 하며 자신의 죄를 지적하는 자에게 대적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죄의 메시지를 전하는 자를 아주 미워하고 싫어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교회를 떠나기까지 합니다. 자신의 죄를 정직하게 시인하지 않고 핑계를 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상처를 받거나 깊이 자학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때로는 “나에게 무슨 죄가 있습니까? 왜 나를 죄인이라고 합니까? 그리고 이 세상이 무엇이 그렇게 잘못되었다고 하는 것입니까?”라고 말하며 반발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이들은 자신이 죄인이고, 이 세상이 문제가 있다는 것을 완강하게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죄인이 아니며, 세상 또한 나름대로 아름답고 평화롭게 유지되고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들이 말하는 평화는 진정한 평화가 아니라 위장된 평화, 은폐된 평화에 불과합니다. 언젠가는 깨어지고 말 한계적이고 불완전한 평화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도 이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철저하게 위장과 은폐 속에서 살아가면서 자신의 실체를 조금도 드러내려고 하지 않습니다. 동시에 자신의 실체가 완전히 드러나는 것에 대해 극한 두려움과 떨림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심판의 때가 되면 은밀한 그 모든 것까지 반드시 드러나게 됩니다(롬 2:16; 히 9:27). 열매로 나무를 알 듯이, 모든 것이 결국에는 열매로 분명하게 맺혀지기 때문입니다(마 7:13-20; 롬 6:23). 이것이 하나의 최종적인 심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죄 없는 인간은 한 명도 없으며(롬 3:10), 그의 의가 아무리 대단하다 해도 하나님의 영광에는 결코 미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롬 3:23). 이러한 인간들에 의해서 이 세상도 타락한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분명한 인간의 실존이고, 세상의 현실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신의 모든 것이 드러나면 나중에 더 큰 수치와 부끄러움을 당할 수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철저하게 기만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로마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자신들의 죄를 지적하는 바울을 향해 로마의 지식인들, 그리고 로마의 엄청난 영광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던 자들은 이것을 끝까지 거부하며 “우리가 무슨 죄가 있습니까? 그리고 왜 화려하고 영광스러운 로마, 위대한 로마가 잘못되었다고 합니까? 또 우리에게 무슨 구원이 필요합니까? 우리에게는 모든 것이 넉넉하고 충분합니다. 모든 것이 잘 되고 있습니다. 오히려 당신이 구원을 받아야 할 야만인이 아닙니까?”라고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이것은 죄를 고발하는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이 시대의 동일한 반응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죄론을 통해서 인간이 왜 죄인인지, 왜 구원이 필요한 자들인지에 대해서 분명하게 이야기합니다. 이 말씀으로 우리를 깊이 점검해봄으로, 죄로부터 진정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자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많은 자들에게도 이 말씀을 전해서, 그들이 죄를 깊이 깨닫도록 도와줄 뿐만 아니라 죄로부터 구원을 얻을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자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이방인의 죄
로마서의 죄론 가운데서 로마서 1장 18절부터 32절까지는 “이방인의 죄”에 대한 것인데, 이 부분을 통해서 바울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크게 보면, 세 가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1) 첫째는 죄악의 세계에, 그리고 이방인들에게 현저하게 보이는 현상이 불경건과 불의라는 것입니다. 불경건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것입니다(롬 1:28). 그렇다면 불의는 무엇입니까? 불경건으로 말미암아 행하여지는 온갖 죄악들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세상 가운데 가득 차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2) 둘째는 불경건과 불의는 반드시 우상숭배와 도덕적 타락, 특히 성적 타락을 초래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3) 셋째로 자신의 죄에 대해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받고 멸망당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1) 바울은 죄의 핵심을 불경건과 불의라고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불경건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짓는 죄입니다. 그리고 불의는 인간과의 관계에서 짓는 죄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불경건은 수직적인 관계에서 짓는 죄이고, 불의는 수평적인 관계에서 짓는 죄입니다. 바울은 로마인들을 향해서 “로마인들이여, 당신들은 종과 횡으로 죄를 짓고 있지 않습니까?”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불의의 죄에 대해서도 깊이 관심을 가져야 하지만, 먼저는 불경건의 죄에 대해서 깊이 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모든 죄의 뿌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것, 하나님을 믿고 섬기기 싫어하는 것에서부터 모든 문제가 시작됩니다. 이 불경건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않은 채 불의의 문제만 해결하려고 하는 것은, 풀을 뽑는데 이파리만 뜯고 뿌리는 뽑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2) 또한 바울은 불경건은 반드시 우상숭배를 초래한다고 했습니다. 불경건한 자들 가운데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상숭배입니다. 물론 자신은 결코 우상숭배를 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자들도 있겠지만,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모든 자들은 반드시 무엇인가를 하나님처럼 우상화해서 섬기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것에 대해 구체적으로 사람, 금수, 버러지 형상의 우상이라고 말했습니다(롬 1:23). 이외에도 사람들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것들을 우상으로 숭배합니다. 그것들은 모두 하나님의 놀라운 영광에 비하면 버러지 같은 것입니다.
바울은 우상숭배에 빠져 있는 로마의 이방인들을 향해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분은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피조물인 인간은 하나님과 함께 있을 때 가장 행복한 것인데, 당신들은 하나님을 버러지와 같은 형상으로 바꾸고 있습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당신들은 불경건으로 인해 영광스러운 하나님을 버릴 뿐 아니라 하나님의 자리를 벌레 같은 다른 형상으로 바꾸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것들을 섬기며 우상숭배에 허덕이고 있지 않습니까?”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 로마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우상숭배가 심각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이전의 시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문명화 되었다고 자부하는 오늘날에도 별로 큰 차이가 없습니다. 아니 오늘날이 더 심각한지도 모릅니다. 이 시대의 많은 사람들이 사람(자신을 포함해), 돈, 권력, 정욕, 명예, 그리고 식물, 동물, 광물, 천체 등의 자연만물 등을 우상으로 숭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들이 하나님이 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인간은 하나님을 섬기지 않으면 아무것도 섬기지 않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우상숭배에 빠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것들을 우상화해서 하나님처럼 섬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믿지 않는 인간들에게는 반드시 다른 무엇인가가 그들에게 하나님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을 섬기던지 우상을 섬기게 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 외에 다른 것들을 하나님처럼 섬기면, 그 때부터 여러 가지 심각한 문제들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거기에서부터 수많은 불의의 죄들이 파생되어 나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특히 현저하게 도덕적 타락에 빠지게 됩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섬기는 가운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져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을 따라서 살 수 있는데, 그래서 진정한 생명과 기쁨과 영광을 누릴 수 있는데, 이 지식이 없어서 여러 가지 심각한 문제들 가운데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불경건과 우상숭배로 인해 초래되는 문제들입니다.
3) 앞에서 불경건과 불의의 뒤에는 반드시 우상숭배와 도덕적인 타락이 따라 오게 된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우상숭배와 도덕적 타락에 빠진 인간의 종국은 어떻게 됩니까? 결국은 망하게 됩니다. 그 길에는 오직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과 멸망(사망)만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로마가 망하게 된 중요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리고 영원할 것 같았던 수많은 강대국들이 왜 망했습니까? 또한 수많은 사람들이 망하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이 문제가 아닙니까? 그리고 오늘날 이 시대와 사람들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가 이 문제에 빠져서 허덕이고 있지 않습니까?
정리해보자면, 불경건은 우상숭배와 불의를 낳습니다. 특히 도덕(윤리)의 타락을 초래합니다. 그리고 도덕의 타락은 인간성의 완전한 상실을 초래합니다. 인간이 비인간화되는 것입니다. 즉, 인간의 본 모습을 잃어버리고 완전히 타락한 죄인, 부패한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고 버러지 형상, 죄의 형상, 악의 형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이 인간성을 다 잃어버리고 인간의 참 모습을 잃어버리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결국은 멸망하게 됩니다. 자기 파멸에 이르게 됩니다. 이 사도의 날카로운 지적을 우리가 깊이 주목해서 보아야 합니다. 이것에 대해서 로마서 1장 강해를 통해서 보다 깊이 살펴볼 것입니다.
불경건과 불의
이제 본격적으로 로마서 1장 18-21절을 보겠습니다.
롬 1:1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롬 1:19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롬 1: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롬 1: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로마서의 죄론은 로마서 1장 18절부터 3장 20절까지입니다. 그 가운데서 로마서 1장 18-21절은 전체 죄론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이방인들 안에 있는 죄일 뿐만 아니라 거짓된 하나님의 백성들 안에도 있는, 즉 모든 죄인들에게 있는 죄의 본질과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굉장히 수준이 높고 박식한 사도였습니다. 그리고 예리하고 날카로운 통찰력을 가진 자였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1장 18-21절을 통해 죄인들 안에 있는 죄의 핵심을 너무나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정곡을 찌르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불경건과 불의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로마서의 죄론, 그리고 로마서 1장의 이방인의 죄를 공부하는 가운데 반드시 기억해야 할 두 단어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로마서 1장 18절부터 32절까지를 통해서 먼저 이방인의 죄를 지적하고 있는데, 특히 로마서 1장 18-21절을 통해서 이방인들을 향해 “당신들 안에 있는 불경건과 불의, 즉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고 하나님을 떠나 자신의 마음대로 살려는 것, 그리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살지 않고 자신의 더러운 욕망을 좇아 살려고 하는 것이 바로 죄입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되
바울은 로마서 1장을 통해 가장 먼저 인간 안에 있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불경건의 죄에 대해서 지적했는데, 이러한 바울의 지적에 대해서 “저는 하나님을 몰라서, 아니면 하나님이 계신지 안 계신지 확실하지 않아서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라고 말하는 자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라고 확신을 가지고 말하는 자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자들에 대해서 바울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21절을 보십시오.
롬 1:21a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바울은 21절에서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1장에서 이방인의 죄에 대해 지적하고 있는데,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안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 이방인의 죄를 말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을 알면서도 모른다고 부인하는 것,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이 죄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방인들이 가지고 있는 죄의 본질이요 핵심입니다.
그리고 21절을 보면, 바울은 신의 존재증명을 통해서 신의 존재를 사람들에게 증명하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 주제를 로마서에서 다루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바울은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안다는 것을 기정사실화하고 다음 논의로 들어가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존재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사람들도 이것을 분명하게 알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을 알되”라는 이 바울의 선포에 대해서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이것에 대해서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터툴리안이라는 초대교회의 교부는 “인간은 날 때부터 그리스도인(크리스천)”이라는 아주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이 말을 들을 때, 이방인들은 “어! 나는 예수를 믿은 적이 없는데, 혹은 교회를 다녀본 적도 없는데 왜 나를 그리스도인이라고 하지?”라고 말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아주 이해하기 어려운 말입니다. 어떻게 인간이 날 때부터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영접해야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왜 터툴리안이 이런 말을 했겠습니까? 그리고 이 말의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인간은 날 때부터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의 의미는 인간이 비록 교회에 나가지 않아도,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해도, 또한 종교적 의식 등의 다른 것들을 통하지 않아도, 인간의 영혼이 이미 시공을 초월해서 항상 하나님을 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해바라기가 항상 해를 향하고 있듯이 인간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인간의 영혼이 항상 하나님을 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지식과 경험을 넘어서 하나님을 아는 선험적 지식을 가지고 있고 영혼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고 있고, 또한 그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본래적인, 본질적인 인간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바로 그렇게 창조하셨습니다. 그런 면에서 인간은 날 때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인간의 본질이요 실존입니다.
그리고 『고백록』(혹은 『참회록』)에서 어거스틴은 “하나님은 이미 내 안에 와 계신데 나는 하나님을 밖에서 찾았나이다. 내가 하나님 안에서 안식을 얻기 전에는 내 영혼에 진정한 안식이 없었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영혼의 진실한 고백입니다. 하나님은 먼 곳에 계신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십니다. 이것은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영혼의 창을 통해서 항상 하나님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영혼의 순수함을 회복하면, 마음이 청결해지면, 언제든지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어거스틴의 고백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우리의 존재 자체가 이미 하나님을 알고 있고, 하나님을 항상 간절하게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은 단 한 순간도 하나님 없이 살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안에서만 인간은 진정한 영혼의 평안과 안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어거스틴의 고백을 보면, 인간이 스스로도 이러한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집과 부모를 떠나면 고생만이 기다리고 있듯이, 하나님을 떠난 인간에게는 오직 고생만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그러한 관계성 가운데 있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인간을 생각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해를 생각하지 않고 해바라기를 생각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물론 때로는 우리가 하나님이 없는 것 같은 생각에 사로잡힐 때도 있습니다. 이것은 때때로 먹구름이 해를 가려서 마치 해가 없는 것처럼 생각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도 해는 항상 그 자리에 있고, 해바라기도 항상 해를 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구름이 지나가면 해는 다시 자신의 모습을 드러냅니다. 해는 없어진 것이 아니라, 잠시 구름에 의해서 가려졌던 것일 뿐입니다. 이처럼 어떠한 어두운 죄의 구름이 인간과 하나님의 사이를 가로 막고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분명히 살아계시고, 인간의 영혼은 계속해서 하나님을 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간절히 하나님을 찾고 바라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드리워진 죄의 먹구름이 사라지기만 하면, 우리는 다시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마 5:8).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비유하기도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구체적으로 어떤 관계입니까?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 완전히 독립되어 있는 개별적인 존재이기는 하지만, 그러면서도 동시에 개별적인 존재로 완전히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바로 이런 관계성 속에 있는 것입니다.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자면, 아버지라는 말 속에는 아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아들이라는 말 속에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아버지가 있기 때문에 아들이 있는 것이고, 또한 아들이 있다는 것은 아버지가 있는 것입니다. 둘은 개별적인 존재이지만 결코 서로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습니다. 분리해서 생각하는 순간, 서로가 불완전해지고 맙니다. 그리고 서로에게 모두 큰 결핍이 있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나,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가 바로 그러한 관계라는 것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필요하고, 하나님도 우리가 필요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없으면 큰 결핍을 느끼는 것처럼, 하나님도 우리가 없으면 큰 결핍을 느끼십니다.
하나님과 인간은 분리할 수 없는, 뗄 수 없는 관계에 있고, 이로 인해서 우리의 영혼은 항상 간절히 하나님을 찾고 있습니다. 시편의 기자는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다고 했습니다(시 42:1). 우리 안에 있는 영혼이 사슴이 시냇물을 그리워하듯이 간절히 주를 찾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실존입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 있는 이 영적인 갈망, 갈급함은 아무리 다른 것으로 채우려고 해도 결코 채워지지 않습니다. 그 자리는 오직 하나님으로만 채워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아이가 어머니를 잃어버렸는데, 그 어머니의 빈자리를 다른 것으로 채울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 아이에게 세상의 모든 것을 준다 할지라도, 아이는 결코 그것을 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이 어머니를 대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자리는 오직 하나님만이 채우실 수 있고, 우리의 영혼은 그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만을 간절히 찾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빈자리가 채워질 때, 진정으로 내가 나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본래적인 나를 되찾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을 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올바로 알 수 있고, 올바로 믿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에서는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가르칩니다.) 그것은 특정한 종교의 신봉자가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잃어버린 나를 다시 찾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나 되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은 본래적인 내가 비본래화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없이 살 수 없는 인간이, 하나님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인간이 그 본래적인 모습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현재 타락한 인간의 자리입니다. 그런데 신앙을 회복함으로, 그래서 하나님께 나아옴으로 본래적인 나로 다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독교 신앙은 우리에게 진정한 하나님을 가르쳐주고, 우리가 그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있도록, 나아올 수 있도록 도와주는 통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통로가 되시는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아주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본래적인 자신을 회복하고 본래의 자신으로 돌아가는 것에는, 즉 하나님을 믿는 것에는 아무런 조건이 없다는 것입니다. 단지 인간의 영혼의 간절한 소원대로 하나님께 나아가기만 하면 됩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그저 하나님께 돌아오기만 하면 됩니다. 지금 이 순간도 우리가 하나님을 간절히 부르짖으면, 하나님께서는 즉시 우리에게 찾아오십니다. 우리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십니다. 아니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우리에게 먼저 찾아오셔서 우리를 구원으로 초대하고 계십니다. 문밖에 서서 문을 열어달라고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계 3:20). 우리의 마음의 문에 항상 다가 오셔서 마음의 문을 열라고 문을 두드리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항상 한량없는 은혜와 사랑의 손길을 내밀고 계십니다. 단지 우리가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살아갈 뿐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깨닫고 마음의 문을 열고 받아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이것을 바울은 “믿음”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세상의 모든 종교가 장사꾼과 같습니다. 왜 장사꾼과 같습니까? 하나님께 나아가는 통로가 되어야 할 것이 종교인데, 오히려 종교가 하나님을 향하고 있는 인간의 영혼을 막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통로에 앉아서 자신들이 하나님께 나갈 수 있는 길을 알려준다고 하면서 장사를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장사를 하고 있습니까? 그들이 원래 진정으로 가르쳐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인간이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 나아가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 아닙니까? 인간의 영혼은 항상 간절히 하나님을 찾고 있고, 하나님께서도 인간들이 당신에게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계시다는 것이 아닙니까? 이것을 가르쳐주는 종교가 진정한 종교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 세상의 모든 종교들은 인간이 있는 모습 그대로가 아니라 자신의 종교에서 요구하는 종교적인 의식이나 행위 등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종교적인 의식과 행위 등을 요구하면서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을 막고 있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서 인간이 하나님 앞에 서는데 있어서 점점 많은 율법의 짐들을 지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지적하셨던 유대종교지도자들, 바리새인들의 문제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23장에서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운다고 하시며 바리새인들을 날카롭게 책망하셨습니다(마 23:4). 왜 사람들이 무거운 짐을 지게 된다고 표현하셨겠습니까? 바리새인들이 백성들에게 “이것을 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고, 저것을 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인간에게 행위와 공로가 있어야, 그래서 자격이 되어야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무조건적이고 일방적인 하나님의 은총, 값없는 하나님의 은총을 전해야 할 자들이, 그것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은혜를 맛보게 해주어야 할 자들이 행위의 공로, 의식 등을 팔면서 장사꾼의 노릇이나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을 통해서 사람들을 자신의 종교에 얽어매려고 합니다. 이것이 바리새인들의 죄였고, 이 세상의 모든 종교들의 죄요 문제입니다.
그런데 그런 자들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사람들의 마음은 점점 더 무거워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에 대해서 점점 더 절망감을 느끼게 됩니다. 도저히 넘을 수 없는 큰 장벽이 하나님과 인간을 막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불가능하게 여겨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을 수는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결국 종교에서 요구하는 행위와 의식 등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가려고 노력하게 됩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런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과 점점 더 멀어지게 됩니다. 때로는 그런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기도 하지만, 참된 하나님이 더 가려져서 보이지 않게 됩니다. 이것이 장사치가 된 타락한 종교, 거짓된 종교의 모습입니다. 마태복음 11장 28절을 봅시다.
마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당신께로 초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값없이 쉼을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에는 아무런 이유와 조건이 없습니다. 많은 자들이 자신들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을 수 있는,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체험할 수 있는 길에 있어서 아무런 이유와 조건이 없다는 것입니다. 단지 주님께 나아오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값없이 얻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목이 마르면 생수의 강이신 당신께 와서 그곳에서 값없이 물을 떠 마시면 된다고 하셨습니다(요 7:37). 주님께서 베풀어주시는 포도주와 젖을 값없이 사면 되는 것입니다(사 55:1). 그런데 이 놀라운 은총, 무조건적인 은총을 가르치고 베풀어야 할 종교가 심각하게 변질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나아오는 통로가 되어야 할 종교가 오히려 심각한 장애물이 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의 탕자의 비유를 보면, 탕자가 아버지에게로 다시 돌아갑니다. 잃어버린 나를 찾아 다시 아버지께로, 아버지의 집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품속으로 돌아가는 탕자가 아버지의 품에 안기는 데는, 그리고 다시 이전처럼 아버지의 아들이 되는 것에는 아무런 조건이 없습니다. 그저 아버지의 넓고 따뜻한 품에 안기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리고 탕자의 아버지는 상거가 먼데도 불구하고 탕자를 향해 먼저 달려오시는 사랑의 아버지입니다. 죄책에 눌린 영혼, 상한 영혼을 위로하시고 치유하시는 자비와 긍휼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리고 그의 죄와 이전의 삶에 대해서 하나도 묻지 않으시고 무조건적으로 용서하실 뿐 아니라 풍성하고 기쁜 잔치까지 베풀어주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이 하나님 안에 있는 놀라운 사랑과 은혜의 세계입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을, 그 놀라운 사랑의 세계를 주님은 평생 동안 목숨을 바쳐서 증거하려고 하셨습니다.
로마서 1장에서 바울은 너무나 세속적인, 세상의 어떤 나라나 도시보다 부패했던, 아니 인류 역사상 가장 부패했던 시대 가운데 하나였던 시대를 살아가고 있었던 로마의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당신들이 하나님을 알지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으려고 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로마인들이 하나님을 알고 있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로마의 수많은 이방인들을 향해서 “당신들이 비록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타락했지만, 그럼에도 당신들은 하나님을 알고 있습니다. 당신의 영혼이 하나님을 간절히 부르짖고 있습니다. 당신들도 그것을 알고 있지 않습니까?”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만하고 불경건한 로마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로마의 사람들에게 어떻게 들렸겠습니까?
형사들이 범인을 잡기 위해 범죄 수사를 시작하면, 가장 먼저는 범인이 소변을 눈 곳을 찾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꼼꼼하게 찾아보면 반드시 그런 곳이 있다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인간은 하나님이 지으신 선한 피조물이기 때문에 죄를 지을 때 영혼이 불안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변을 누는 것입니다. 신비롭게도 인간 안에 이런 마음이 있습니다. 더 이상 가망이 없어 보이는 흉악한 범인조차도 그 안에는 완전히 지워지지 않은 하나님의 형상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형상이 있기 때문에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어떠한 흉악한 자라 할지라도 죄를 지으면 반드시 영혼이 불안해집니다. 죄를 지으면 불안해지는 이 마음은 바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것입니다. 아무리 흉악한 범죄자라 할지라도, 아무리 거짓되고 악한, 부패한 죄인들이라 할지라도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많은 자들은 하나님을 끝까지 거부하고 부인하면서 살아갑니다.
이 시대의 많은 현대인들도 하나님 없이 살아가고 있고, 그로 인해 여러 가지 병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불안이라는 병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믿지 않고 살아가는 이 시대의 현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병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불안은 도대체 어디로부터 오는 것입니까? 사람들이 불안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사람들은 그 원인을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불안에 시달리면서도, 자신의 영혼 안에 있는 불안의 원인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1) 이것은 먼저는 죄로 인한 불안입니다. 이것을 죄책이라고 합니다. 자신이 지은 죄로 인해서 불안해하는 것입니다. 2) 그리고 이 불안은 인간이 하나님을 잃어버림으로 인해 초래된 것이기도 합니다.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죄사함의 은총을 알지 못하는 영혼, 그리고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 없이 오직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만 살아가야 하는 영혼이 얼마나 불안하겠습니까? 연약하고 부족한 인간이 전지전능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없이 어떻게 진정한 영혼의 평안을 누리며 살 수 있겠습니까? 그 삶이 얼마나 불안하겠습니까? 이러한 것들로 인해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은 불안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영혼의 불안은 바로 하나님을 찾는 영혼의 몸부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현대인들 안에 무엇이 있습니까? 고독이 있습니다. 그 고독의 자리는 하나님을 잃어버린 자리입니다. 아무리 많은 사람을 만나고, 세상의 모든 것을 가지고 있어도, 문득 문득 찾아오는, 자신도 왜 그런지 모르는 이상한 고독함이 인간 안에 있습니다. 때로는 이 세상에 수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나는 혼자인 것 같습니다. 이 세상에 나 혼자만 존재하는 것 같이 외롭습니다. 그래서 ‘군중 속의 고독’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때로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너무나 잘해주지만, 이상하게도 그들이 아무리 잘해주어도 그것만으로 완전히 만족되지 않습니다. 그 고독은 오직 하나님을 통해서만 채워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고독에 모든 자들이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절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자들의 인생은 절망적입니다. 심지어 겉으로 보기에는 매우 큰 희망을 가지고 사는 것 같은 사람들조차도 때때로 자신의 영혼에 찾아오는 깊은 절망을 느끼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을 바울은 다른 말로 허무의 영이라 했습니다. 때로는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처럼 생각되어서 모든 것이 절망적으로 보이기 때문에, 즉 불가능이라는 큰 장벽에 막혀서 아무리 해도 되지 않을 것 같은, 그것이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 같은 것 같은 생각이 들기 때문에, 그리고 때로는 모든 것이 유한하고 헛되게 보이기 때문에,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크고 작은 허무에 빠져 있습니다. ‘다 헛된 것인데 내가 이렇게 아둥바둥거리며 열심히 살아봐야 뭣하나?’, 혹은 ‘아무리 해봐도 안 될텐데 열심히 한다고 뭐가 달라지겠나?’ 하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인생을 최선을 다해서, 그리고 모든 열정을 불태우며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인생에 진정한 행복과 만족, 성취감을 느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아주 심각해지면, 사람들은 마지막으로 자살을 선택하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문제들에 - 불안, 고독, 절망(허무) 등 - 대한 해답을 찾지 못해서 고통스러워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들은 도대체 어디에서 우리에게 찾아온 것입니까? 왜 우리가 이러한 병에 사로잡혀 있는 것입니까? 많은 자들이 이 문제에 대해서 해답을 찾고 있지만, 근본적인 해답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은 점점 더 짙은 불안과 고독, 절망에 사로잡혀 가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해답은 세상에서, 사람들에게서 아무리 열심히 찾아도 결코 찾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문제는 영적인 문제, 하나님이 없는 영혼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찾을 수 있는 해답입니다.
이 시대의 많은 사람들이 왜 죄를 짓습니까? 불안해서 짓습니다. 심심해서, 허무해서 짓습니다. 할 일이 없으니, 그리고 너무 무료하고 심심하니 무엇인가 재미있고 짜릿한 것을 맛보기 위해서 죄라도 짓는 것입니다. 심심하다는 것을 경험해 보았습니까? 사랑을 해보십시오. 인간적인 사랑에라도 빠져 보십시오. 결코 심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것과 비교할 수 없는 사랑의 하나님을 알아보십시오. 그래서 강렬한 하나님의 사랑을 영혼과 존재 가득히 채워보십시오. 그리고 그분과 날마다 아름다운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 삶을 살아보십시오. 반드시 놀라운 변화가 인생에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놀랍고 충만하고 영원한 인생의 행복과 기쁨, 만족, 생명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자신의 마음에 하나님을 두지 않기 때문에 불안해지고 고독해 지는 것입니다. 절망적이 되고, 염세적이 되고, 허무에 빠지고, 생명 없는 무미건조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이미 그것을 다 알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자신의 영혼에 하나님이 없어서 이런 문제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자신의 영혼이 하나님을 찾고 있다는 것을 다 알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교만한 인간은 끝까지 그것을 시인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아무리 의식적으로 하나님을 찾고 있는 자신의 영혼을 억압한다 할지라도, 인간의 마음 안에 있는 양심이, 영혼이 바로 그 순간에도 계속해서 작동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은 이미 하나님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1장 21절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이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는 한 우리 인생에 참된 기쁨과 행복은 결코 찾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롬 1: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바울은 21절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했는데, 20절에서는 보다 구체적이고 객관적으로 만물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만물에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이 보인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영혼의 진실한 고백을 외면하는 자들에게, 이것은 과학적이지 않고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것이라고 하는 자들에게 객관적인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존재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헬라어에 로고스와 코스모스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우주를 코스모스cosmos라고 합니다. 코스모스는 질서를 의미하는 것인데, 우주는 난잡하거나 무질서한 세계가 아니라, 혼돈의 세계가 아니라 아주 질서정연한 세계라는 것입니다. 마치 시계와 같이 정교합니다. 그리고 이 우주 가운데 있는 질서, 원리, 진리를 로고스logos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정교하게 우주를 만드셨고, 그 안에 우주가 온전히 지탱될 수 있는 법칙을 두신 것입니다.
바울은 20절에서 너무나 정교하게 만들어진 이 세상을, 만물을 창조하신 이가 하나님이시라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분이 계시지 않는다면, 이렇게 질서정연한 세계가 결코 만들어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연히 만들어지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자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은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비과학적인 것이 아닙니까? 볼 수 없다고 해서 그것이 없다고 하는 것은 점점 더 비과학적인 말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들이 예로 들 수 없을 정도로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바울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어디에 계시는가? 만물에 분명히 보인다. 오늘의 이 세계를 보라. 이 세계의 놀라운 조화를 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우주와 만물을 깊이 주목해보면,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살아계신다는 것을 결코 핑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아주 작고 사소해 보이는 시계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리고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집도 깊이 생각해보십시오. 시계와 집이 우연히 만들어질 수 있습니까? 수 천 년, 수 만 년, 수 억 년의 세월이 흘러도 그런 일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아니 영원히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시계와 집은 우연히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만드는 자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계와 집을 만든 자가 분명한 목적과 의도를 가지고 (시간을 알기 위해서, 생활하기 위해서) 시계와 집을 만들었기 때문에 그것이 이 땅에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우연히 존재하게 된 것이 없습니다. 그것을 만든 창조자가 분명하게 있고, 그것을 만든 창조의 목적도 분명하게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이 지은 창조자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창조자가 없다고 하고, 인간은 우연히 창조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한 번 생각을 해봅시다. 시계와 집이 자신을 만든 사람을 자신들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자신이 우연히 만들어졌다고 주장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리고 자신들이 저절로 생겨났다고 주장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이것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생각입니까? 이것이 매우 잘못된 생각이 아닙니까? 그리고 비과학적이고 비이성적인 생각이 아닙니까? 자신과 다른 차원의 존재가 있는 것이고, 그 존재가 자신을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과학적이고 이성적인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과 인간이 창조한 것들과의 관계에서도 충분히 성립되는 것이고, 더 나아가서 인간과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동일하게 성립하는 것이 아닙니까?
보지 못해도 자신을 만든 자가 있는 것이고, 자신이 존재하게 된 것은 자신을 존재케 한 또 다른 존재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매우 과학적이고 이성적이지 않습니까? 다른 말로 하면, 디자인 되어서 나타난 것은 그것을 디자인한 디자이너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정상적인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성적인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바울은 “시계나 집 하나도 결코 우연히 만들어질 수 없는데, 하물며 놀랍도록 오묘하고 정교하게 이루어진 우주의 창조에 있어서랴?”라고 되묻고 있습니다. 우리가 정말 이성적이고 과학적이라면 우주와 셀 수조차 없이 엄청난 개체의 피조된 모든 만물들을 보며, 그리고 그것들이 이루고 있는 아름다운 질서와 조화를 보며, 그것이 우연히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오히려 창조된 세계를 보고 이것을 창조한 분이 계시다고 생각하는 것이 정상적인 것이 아닙니까? 그것이 이성적이고 과학적이지 않습니까?
바다 거북이를 보면, 어미 바다 거북이는 바다에서 계속 생활하다가 알을 낳을 때만 육지로 올라옵니다. 그리고 육지로 올라와서 알을 낳은 후에는 모래로 알을 파묻고 다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바다로 되돌아갑니다. 그 후로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면 새끼 거북이들이 알에서 부화합니다. 그런데 알에서 부화한 새끼 거북이들이 모래를 뚫고 나온 이후에 어떻게 하는지 압니까? 신기하게도 모든 새끼 거북들이 바다를 향해 달려갑니다. 한 마리도 빠짐없이 모두 바다를 향해 달려갑니다. 왜 새끼 거북이들은 알에서 깨어난 후에 산으로 올라가지 않고 모두 바다로 가는 것입니까? 어떻게 한 마리도 빠짐 없이 바다로 갑니까? 누가 그것을 가르쳐주었습니까? 그들에게 다른 누가 그것을 가르쳐준다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새끼 거북이들에게 태어나자마자 바다로 가도록 미리 지식을 넣어주신 분이 계시기 때문에 그러한 일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그 새끼 거북이들에게 그 지식을 주신 분은 누구입니까?
요즘 미국을 포함해서 전 세계적으로 아주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먼저 신학대에서는 요즘 성경을 깊이 보지 않고, 오히려 학생들에게 논리적이고 분석적인 지식들만을 가르친다고 합니다. 성경을 신앙의 눈으로 보지 않고, 논리적이고 분석적으로만 분석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의 종이 되기 위해 신학교에 들어간 신학생들이 신학공부를 하면서 신앙이 좋아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앙이 이상하게 되는 경우가 많이 생기고 있습니다. 그러한 분위기, 경향이 많다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신앙을 떠나는 자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 과학자들 가운데서는 이전보다 신실한 신앙을 가진 자들이 더 많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진실하고 뜨겁게 신앙을 하는 자들 가운데 과학자들이 많다고 합니다. 과학이 발전하니 과학의 발전이 종교를 없어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종교를 더 부흥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때에도 종교지도자들보다, 서기관들과 교법사들보다 하늘의 별을 보던 동방박사들이 주님이 오시는 때를 먼저 알았습니다(마 2:2-3). 자연을 보고 만물을 보면서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서 볼 수 있는 눈이 과학자들에게 열려진 것입니다. 자연과 만물을 만드신 창조주의 손길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우연히 만들어지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점점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앞에서 만물을 통해서 하나님을 아는 것을 떠나서, 모든 인간은 이미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선험적인 지식을 분명하게 가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사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을 부인하게 하려는 부패하고 거짓된 이성의 간교에 우리가 결코 넘어가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알만한 지식을 우리에게 이미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영혼이 이미 하나님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연만물을 통해서 하나님의 존재를 알게 되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하나님을 아는 분명한 선험적인 지식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선험적인 지식이 여러 자연만물을 보며, 성경을 공부하며,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 안에서 인생을 살아가며 더욱더 정교해지고 깊어지고 견고해져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찾기 위해 먼 곳을 돌아다니지 말고, 자신의 양심에 대해서 정직해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계십니다. 자연만물을 보지 않아도, 우리 안에서 이미 하나님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보려고 하지 않아도, 우리의 영혼이 계속해서 하나님을 찾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지식이 부족해서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간교하고 거짓되고 악한 이성과 양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을 믿지 못하게 하는, 우리의 이성과 양심을 흐리고 미혹하는 사단의 존재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다음의 일화는 인간이 얼마나 하나님을 분명하게 알고 있는 지를 보여줍니다.
어떤 사람이 물에 빠졌다가 간신히 살아 나왔습니다. 물에 빠져서 계속해서 물속으로 들어갔다 나왔다 하고 있었는데, 다른 사람이 건져내줘서 겨우 살아나온 것이었습니다. 강에서 빠졌다가 나온 사람을 본적이 있습니까? 물속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나오는 시간이 정말 짧은 시간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하는 말이 물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그 짧은 순간에 자신의 인생이 다 보였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자신이 잘했던 것과 잘못했던 것이 다 보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들어갔다가 나오는 그 짧은 시간에 자신의 죄를 깊이 회개하고 앞으로의 삶을 하나님께 드리기로 결단하는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오 아버지 하나님, 제가 다시 살아나기만 한다면 제 남은 삶을 모두 당신께 드리겠습니다”라고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응답하셔서 그를 살려주셨습니다. 그렇게 신기한 영적 체험을 한 이후에 그는 예수를 믿고 신앙의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영이 다 알고 있습니다. 무엇을 알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 그리고 자신이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특히 인생의 위기에 처하게 되면,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는 도무지 어떻게 할 수 없는 절망적이고 한계적인 상황에 처하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 저를 도와주세요. 저를 살려주세요. 저를 구원해주세요”라고 외치게 됩니다. 이런 위급한 상황에서는 타락하고 거짓된 이성이 아니라 인간의 순수한 영혼이 먼저 반응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부인하던 사람도 이렇게 절망적인 순간, 한계적인 순간이 되면 하나님을 찾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로마서 1장에서 이방인의 죄를 지적하면서 “왜 하나님을 알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느냐?”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로마를 향한 바울의 고발을 계속해서 들어봅시다.
우상숭배
롬 1:22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롬 1: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바울은 이제 우상숭배의 죄에 대해서 지적하고 있습니다. 성서신앙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상을 섬기지 않고 만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십계명의 제일 첫 번째, 두 번째 계명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먼저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출 20: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신을, 우상을 섬기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출 20:4-6). 이것을 우리가 깊이 묵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셨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대상화 될 때, 그 하나님은 이미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 의해서 결코 대상화가 되실 수 없고, 언제나 하나님 자신으로 존재하시는 것입니다(출 3:14). 누가 뭐라고 한다 할지라도 그것으로 하나님은 완벽하게 설명될 수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십계명의 첫째 계명이 얼마나 훌륭한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특정한 대상이나 이미지로 우상화되는 순간, 하나님에 대해서 왜곡된 이해가 생길 뿐 아니라 그것으로 인해 인간 또한 왜곡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특히 심각한 문제는 무엇입니까?
도덕적 타락
롬 1:2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버려 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우리가 우상에 빠지게 되면, 철저히 그 우상에게 종속되게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그 다음 수순은 무엇입니까? 결국 인간성이 상실되고 윤리적인 몰락이 오게 됩니다. 이것이 필연적인 수순입니다. 기둥이 무너지면 집이 다 무너지는 것과 같습니다. 불경건은 반드시 우상숭배를 낳고 불의를 낳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종교적 타락은 반드시 도덕적 타락, 윤리적 타락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로마의 모습이었고, 모든 불경건한 시대와 사람들의 모습이었으며, 오늘날 불경건한 우리와 이 시대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반대로 진정한 신앙이 회복되면, 경건이 회복되면, 도덕적 회복이 일어납니다. 개인이 변화되고, 사회가 변화되고, 국가가 변화되고, 세계가 변화됩니다. 이것도 항상 필연적인 수순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잃어버린, 하나님을 믿지 않으려고 하는 인간이 왜 우상숭배와 도덕적 타락에 빠지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잃어버린 인간은 영혼의 허전함을 느끼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빈자리를 다른 것으로, 때로는 더러운 욕망으로 채우려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 외에 다른 우상으로, 더러운 욕망으로 우리 영혼의 빈자리가 채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으로 하나님의 빈자리를 결코 채울 수 없습니다. 그 그리움은 항상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다른 어떤 것으로도 그것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이나 더러운 욕망을 추구하면 할수록 인간의 영혼은 더욱더 고통을 맛보게 됩니다. 이것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도 거짓된 인간들은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않고, 오히려 계속해서 무엇인가 더 강렬하고 자극적인 것을 찾으려고 합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점점 더 멸망으로 치닫는 것입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없습니다. 손바닥으로 해를 가릴 수 없습니다. 가린다 해도 그것이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처럼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을 가리려고 해도, 그리고 아무리 하나님이 없다고 해도, 우리의 영혼이 여전히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이 여전히 움직이고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이 잠자지 않고 계속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을 간절히 부르짖고 있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의 고백처럼 사슴이 시냇물을 그리워하듯이 우리의 영혼은 항상 주를 찾기에 갈급합니다. 이것이 죄인들에게는 너무나 고통스러운 문제입니다.
하지만 이것을 끝까지 거부하고, 이 영혼의 소리를 억압하며 하나님을 외면하는 자들, 그리고 우상숭배에 빠진 자들은 어떻게 됩니까? 타락하게 됩니다. 여기에서부터 본격적인 타락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정욕의 노예가 됩니다. 하나님이 없는 곳은 반드시 이러한 일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자신에 대해서, 자신의 영혼에 대해서 거짓된 자가 다른 모든 일에도 거짓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 자신의 마음대로 살게 되면, 도덕적 타락이 일어나는 것은 필연적입니다. 하나님 없이도 얼마든지 아름답고 고상한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그것은 착각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어느 정도 가능해 보인다 할지라도, 결코 하나님의 영광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우리가 앞으로 살펴볼 로마서 6장을 보면, 죄의 병기와 의의 병기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의 핵심은 우리가 불경건에 빠지게 되면, 우리의 몸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의의 병기가 되는 것이 아니라 욕망의 도구가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기억하고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상숭배에 빠지지 않도록, 불경건에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도덕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영원히 찬송 받을 유일한 분, 하나님
롬 1:25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바울은 25절에서 우상숭배의 죄에 대해서 지적하면서, 죄악으로 가득한 타락한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이 없다고 하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세상 가운데서, 심지어 반신론과 살신론까지도 판을 치는 세상 가운데서 오직 자신만은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섬기고 경배하겠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자신만은 하나님을 향한 참 신앙과 참 사랑을 가지고 살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바울로 인해서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서처럼 위로와 기쁨을 얻으셨을 것입니다. 바울의 이 고백이 또한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내어버려 두셨으니: 유기
롬 1:26 이를 인하여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버려 두셨으니
바울은 이제 26절에서 “내어버려 두셨으니”라고 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유기”입니다. 우상숭배에 빠진 자들,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기를 싫어하는 자들을 하나님께서는 결국 내어버려 두신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이 매우 중요합니다. 자칫 잘못하면, 이것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면, 신앙에 있어서 큰 오해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선택과 유기의 문제는 신앙에서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먼저 바울은 본문에서 유기가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유기는 왜 일어나는 것입니까? 이것을 잘 살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물리의 세계에 질량 보존의 법칙이 있습니다. 이것은 영적인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죄는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죄는 쌓여지는 것입니다. 죄를 지을 때마다 죄가 쌓여지고, 쌓여지고, 쌓여지고, 계속해서 쌓여진다는 것입니다. 죄의 삯은 무엇입니까? 사망입니다(롬 6:23). 이것은 패망이 온다는 것입니다. 자기 파멸이 온다는 것입니다. 죄의 삯이 왜 사망입니까? 죄는 쌓여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자면, 우리가 잠을 잘 자지 않으면 피로가 계속해서 쌓이게 되고, 그것이 계속해서 심각해지면 만성피로가 되어서 온 몸이 완전히 망가지는 것과 같습니다.)
회개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회개는 자신이 걸어가던 길에서, 자신이 살아가던 삶에서 방향을 전환하는 것입니다. 그 방향으로 고집을 부리며 계속해서 가지 않고, 자신을 그 방향으로 가도록 그냥 내버려두지 않고 방향을 전환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죄는 무엇입니까? 죄를 향해서,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는 자신을 그냥 방치하는 것입니다. 정욕대로, 자신의 마음대로 살도록 자신을 내어버려두는 것입니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죄를 향해,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점점 더 극악해지게 됩니다. 그러다 결국은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죄를 짓는 것이 매우 어렵고 힘든 일입니다. 어떤 인간도 죄를 짓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작은 죄라 할지라도 일단 죄를 지으면 인간의 영혼은 매우 불안해집니다. 또한 극도의 죄책감에 시달리게 됩니다. 그런데 그런 인간도 계속해서 죄를 짓다보면, 죄에 대해서 무덤덤해집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죄를 짓는 것이 습관화, 관성화, 고착화됩니다. 이것에 대해서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 혹은 ‘바늘도둑이 소도둑이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덧 시간이 지나면 완전히 양심의 화인을 맞은 자가 되어 있습니다. 죄가 쌓이고 쌓여서 인간이 완전히 망가져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브레이크가 고장난 자동차와 같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브레이크를 밟아도 차가 멈추지를 않습니다.
인간이 한 번 욕망의 노예가 되면, 그것에서부터 돌이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빨리 달리는 자동차가 갑자기 돌아서는 것이 어려운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죄를 짓는 삶이 계속되면 될수록 그것에서 회개하고 돌이킨다는 것은 점점 더 어려운 일이 되고 맙니다. 나중에는 돌이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일이 됩니다. 하지만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를 때라고, 그 때라도 돌아서면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죄에 대해서 회개치 않으면, 즉 하나님께서 때로는 죄에 대해 진노도 하시고 심판에 대한 징조를 끊임없이 주심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돌이키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어쩔 수 없이 결국 하나님께서도 내버려 두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제는 얼굴을 돌리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바울은 “내어버려 두사”라고 표현했습니다.
우리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죄에 대해서 진노하시는 것입니다. 이 진노를 사랑의 진노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이 죄를 지어도 하나님께서 전혀 진노하지 않으신다면, 하나님은 죄를 짓는 것을 좋아하시는 하나님이 되시거나, 죄에 대해서 방치하시는 무책임한 하나님이 되실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죄로 인해 멸망으로 치닫고 있는 인간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는 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종류의 진노가 있습니다. 말 그대로의 진노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잘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 진노는 무엇입니까? 먼저 하나님이 진노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이 분노하신다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너희가 믿는 신은 질투하고 분노한다고 하는데, 어떻게 신이 질투하고 분노할 수 있느냐? 그러한 감정을 가지는 것이 진정한 신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느냐?”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것을 다 설명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분명히 하나님의 진노, 하나님의 질투가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의 의미를 올바로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라는 표현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한국어와 한국인의 정서에서는 이것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 좋은 접촉점이 있습니다. 바로 한(恨)이라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영어로 번역하기 매우 힘든 단어입니다. 한은 원한(怨恨)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한이 무엇입니까? 예를 들면 다음과 같습니다. 자녀에게, 사랑하는 자에게 다가가면 갈수록, 사랑하면 할수록 점점 더 자신에게서 멀어집니다. 다가가면 갈수록, 사랑하면 할수록 그것을 더 싫어하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생기는 정서를 한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을 대하시는 하나님 안에 있는 마음의 고통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진노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결코 강제로 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자신의 자유의지로 스스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의 본질이요 속성입니다. 강제된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랑을 더럽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신데, 이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항상 스스로의 자유의지로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그 사랑에 응답하여 자신의 자유의지로 당신을 진정으로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신앙은 어떤 강압적인 힘이 아니라 스스로의 자발적인 의지와 선택과 결단, 사랑의 동기에 의한 것이 되어야 진정한 생명이 있습니다. 억지로 하나님을 믿도록 신앙을 강요하는 것은 하나님께서도 결코 원치 않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지만, 인간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면 할수록 인간은 자신의 자유의지로 하나님에게서 점점 더 멀어집니다. 하나님을 점점 더 싫어합니다. 때로는 그 사랑을 자신을 향한 속박으로 여기기도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 안에 있는 고통과 슬픔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대하는 타락한 인간, 악하고 거짓된 인간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사랑 앞에서는 무력하신 하나님(Powerless God)이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Almighty God)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면 할수록 인간이 하나님에게서 멀어진다면,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할 수밖에 없도록 인간을 만들겠습니까? 강제적으로 사랑하도록 하겠습니까? 그렇게 하실 수 없습니다. 결국은 인간을 내어버려둘 수밖에 없습니다. 그가 하고 싶은 대로, 원하는 대로 두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강제로, 힘으로 어떻게 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고통이요 비참함, 한 맺히는 마음입니다. (이것은 탕자의 비유에서 탕자가 아버지를 떠나려고 할 때, 그를 끝까지 붙잡지 못하고 떠나가게 둘 수밖에 없었던 아버지의 비참함과 같습니다.)
그리고 유기된 인간,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어떻게 됩니까? 결국 자신의 육체의 욕망을 따라서 살아가다가 비참한 파멸을 경험하게 됩니다. 아버지 곁을 떠나서 먼 곳으로 가 허랑방탕하는 삶을 살다가 모든 것을 허비하고 순식간에 거지가 된 탕자와 같습니다. 그리고 그런 자리에서 결국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자들도 있지만, 결국은 돌아오지 못하고 영원한 멸망의 구렁텅이로 빠지는 자들도 있습니다.
바울은 인간이 하나님을 끝까지 거부함으로 인해서 하나님이 빠져 나가시는 자리, 하나님이 내어버려 두시는 자리가 바로 진노가 임하는 자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 대해서 완전히 손을 놓으시는 것입니다. 인간은 그것을 너무나 간절히 원하겠지만, 그 순간부터 인간은 완전한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고삐 풀린 망아지가 되어서, 철로를 이탈한 기차가 되어서 헤어 나올 수 없는 도덕적 타락의 구렁텅이로, 늪으로 빠지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패망하게 됩니다.
악은 반드시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죄는 반드시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죄의 본질은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바울은 이것을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가는 것,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것, 이것이 죄의 핵심입니다. 이 죄를 범하는 순간, 이미 패망은 예고되어 있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회개치 않는다면 더 이상 그의 인생에 희망은 없습니다. 그것은 부모의 품을 떠난 어린 아이는 죽을 수밖에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든 문제의 핵심은 도덕적인 문제, 윤리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불경건의 죄가 가장 심각한 문제입니다. 하나님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인간이 오히려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고 자기 분깃을 요구하는 데서부터, 하나님과 자신을 나누는 데서부터, 하나님을 떠나려고 하는 데서부터 모든 문제가 시작됩니다. 인간은 그것만이 진정한 자유를 얻는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그 자유의 대가로 그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과 인도를 완전히 잃어버리는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원래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될 인간인데, 그렇게 살아가는 것을 선택하는 순간부터 인간은 완전히 궤도를 이탈하게 됩니다. 철로를 벗어나서 탈선하게 됩니다. 그래서 죄악의 구렁텅이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너무나 잘 알고 계시지만, 끝까지 하나님을 거부하는 인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도 더 이상은 어떻게 하실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바울이 말하고 있는 유기입니다. 그런 점에서 유기는 하나님의 선택이 아니라 인간의 선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유기하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 유기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진노와 심판과 유기를 원하는 분이 아니라 구원과 선택을 원하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은 그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짓밟고, 지울 수 없을 정도로 크고 깊은 고통을 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많은 타락한 인간들은 지금도 자유라는 미명하에서 스스로 유기되는 길을 선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함, 유기, 타락, 그리고…
롬 1:28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버려 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28절부터 32절까지를 통해서 바울은 자신이 지적했던 이방인들 안에 있는 죄에 대해서 한 번 더 정확하게 정리를 해주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죄의 목록입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서 특히 중요한 것이 28절입니다. 바울은 28절에서 이방인들 안에 있는 아주 중요한 죄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로마에 사는 이방인들 안에 있는 가장 본질적인 문제는 무엇입니까? 로마인들이 가지고 있는 죄 가운데 가장 심각한 죄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죄의 원인이요 뿌리입니다.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합니다. 이 마음이 모든 타락한 인간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한다고 해도 그렇게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인간에게 있어서 매우 골치 아프고 심각한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바로 그 순간에도 계속해서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자기 안에서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마음과 하나님을 찾는 마음이 계속해서 치열한 싸움을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불경건은 교만일 뿐만 아니라 부정직(기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기를 속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교회를 나가고 안 나가고의 문제, 하나님을 믿고 안 믿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사실 나를 속이는 것입니다. 내가 정직해지느냐 부정직해지느냐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은 자신의 영혼과 존재와 삶에 항상 거리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찾는 마음과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마음이 서로 갈등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코 진정한 영혼의 만족과 행복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어떤 자들은 이런 문제로 갈등을 겪는 것이 싫어서 하나님을 완전히 잊고 살려고 합니다. 자신의 영혼의 소원을 완전히 무시하고 덮어두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절대로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데서부터 모든 다른 죄들이 파생되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은 깨닫지 못하고 있지만, 이 세상에 가득한 갈등과 투쟁, 불안과 절망, 눈물과 고통, 패망이 알고 보면 모두 여기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은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본질적인 문제가 되어야 합니다. 가장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입니다. 모든 인간들은 하나님을 마음에 두고 싶은 마음, 가슴 깊은 곳에 새기고 싶은 마음, 하나님과 깊은 사랑의 교제를 나누고 싶은 마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이것을 회복하기 위해서 가장 우선적으로 힘써야 합니다. 이것을 회복하는 순간부터 신기하게도 다른 모든 것들이 회복되기 시작합니다.
이것을 전화국의 비유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과 전화통화가 되지 않는다면, 그 사람과 만나서 문제를 풀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전화국에 연락을 해서 그 문제를 해결할 것입니다. 그리고 전화국에 의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면 다른 사람과 통화를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 안에 있는 많은 문제들에 대해서도 사람들과 해결하려고 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 앞에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잘못된 것이 없는지 점검하고, 그것을 먼저 정확하게 해결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문제가 해결되면, 그렇게 많아 보였던 많은 문제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던 문제들이 어느새 눈 녹듯이 사라져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푸는 것이 절대 불가능할 것처럼 보였던 꼬인 실타래들이 풀려질 것입니다.
이 세상에 일어나는 많은 문제들이 표면적으로 보면 인간과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문제 같아 보이지만, 본질적으로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문제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다른 문제들이 풀려지지 않고, 때로는 문제가 더 심각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끝까지 외면하면서 다른 해결의 대안을 찾는 것은 전화가 되지 않는데 옆집과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해서는 결코 문제를 풀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 없이 아름답고 멋있는 세상을 만들어보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런 시도는 지금까지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 없이 우리가 아무리 멋있는 세계를 꿈꾼다 할지라도, 그리고 아무리 멋있는 제도를 만들어서 멋있는 세계를 만든다 할지라도 그것은 다 허깨비 같고 신기루 같은 것입니다. 순간적으로는 가능할지는 모르지만, 영원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코 인간을 아름답고 조화롭게 살아가도록 해줄 수 없습니다. 공산주의가 하나의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공산주의는 무신론적 종말론입니다. 무신론적 종말론이란 하나님 없는 하나님 나라를 꿈꾸는 것입니다. 한 때는 이 공산주의의 바람이 전 세계의 절반을 휩쓸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 없이 아름다운 세상을 만든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오직 우리가 하나님 앞으로 돌아갈 때, 참 신앙을 회복할 때, 모든 인간들이 진정으로 하나 되는 역사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문제들, 그리고 이 세상에 산적해 있는 많은 문제들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모두 하나님 앞에 돌아가는 것입니다. 불경건의 죄성을 완전히 뿌리 뽑고 모두가 하나님을 향한 참 신앙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이것만이 유일한 길입니다. 모든 인간들은 자신의 마음에 하나님을 두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진정으로 아름다운 사랑의 교제를 나누며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 모두가 근본적으로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이 세상에 가득해질 때 세상이 근본적으로 달라지게 됩니다. 사자와 어린 양이 함께 뒹구는 멋진 세계가 이 땅 가운데 오는 것입니다(사 11:6).
무신의 세계, 하나님이 없다 하는 세계, 더 나아가 반신의 세계, 하나님을 증오하는 세계가 바로 죄의 출발, 죄의 시작입니다. 그리고 이런 내면을 가지고 사는 것이 지옥이 아니겠습니까? 다른 무엇이 아니라 불경건이 가장 심각하고 모든 죄의 뿌리가 되는 문제라는 것을 우리가 분명히 해야 합니다. 자연은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인간이 자연과 가까워지면 질수록 더욱더 선해집니다. 모든 것의 문제는 바로 나이며, 인간입니다. 나와 하나님 사이에 일어나는 불화, 긴장과 갈등이 가장 본질적이고 심각한 문제인 것입니다.
바울이 로마서 1장의 죄론을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원래의 나를 발견하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원래의 나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자아를 발견할 때에 자아를 실현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원래의 자리는 무엇입니까? 원래의 인간의 모습, 진정한 인간의 자아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피조물이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인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마음에 두고 살아야 할 자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마음에 두게 될 때 진정으로 내가 나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로마에 있는 사람들, 그리고 많은 이방인들은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를 싫어한다는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떠나서, 하나님 밖에서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려고 합니다. 인간은 마땅히 하나님을 마음에 두고 살아야 하는 것인데, 타락한 인간은 결코 그렇게 하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바울은 불경건의 죄,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죄에 대해서 거듭해서 로마서 1장을 통해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것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안에 일어나는 모든 문제는 어디에서부터 생기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잃어버리는데서 부터, 하나님과 떨어지는데서 부터 생기는 것입니다. 이사야서 11장 9절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온 세상에 넘치면 모두가 서로 사랑하는 아름다운 사랑의 세계가 온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넘쳐나는 세계 안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진정한 교제 안에서 하나님을 온전히 알아감으로 이러한 아름다운 세계를 풍성하게 맛보며 살아가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성적타락과 동성애: 창조의 질서의 파괴(무질서)와 혼돈, 그리고 총체적 파멸
롬 1:26 이를 인하여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버려 두셨으니 곧 저희 여인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롬 1:27 이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인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저희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 자신에 받았느니라
그리고 바울이 지적하고 있는 도덕적 타락, 특히 성적 타락에 대해서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바울은 26,27절을 통해서 성적타락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데, 하나님과의 아름다운 아가페의 사랑, 영적인 사랑을 모르는 자는 에로스의 사랑, 육체적인 사랑만을 할 수밖에 없으며, 결국에는 성적 타락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아가페의 사랑, 영적인 사랑의 기초가 되지 않은 인간적인 사랑, 육체적인 사랑은 반드시 사랑의 타락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성적 타락 가운데서 특히 동성애에 대해 지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아름다운 질서의 파괴, 순리의 파괴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가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창조의 질서인데, 거룩하고 아름다운 하나님의 뜻과 창조의 질서,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이 가려지게 되면 극심한 성적인 타락이 일어나게 되고, 결국에는 사랑의 질서가 완전히 깨어져서 동성애까지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을 때,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를 알지 못할 때, 그리고 진정한 사랑의 세계를 알지 못할 때, 이런 총체적인 혼돈과 혼란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로마만의 이야기입니까? 로마만을 향해서 바울이 외치고 있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로마만을 향한 바울의 분노가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 시대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우리 시대에 대한 고발이기도 합니다. 28절을 다시 보십시오.
롬 1:28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버려 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바울은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인간을 하나님께서도 어떻게 하실 수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인간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버려 두시고, 이로 인해 인간은 결국 합당치 못한 일, 해서는 안 될 일을 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인간에게서 하나님이 떠나가시면, 성령께서 떠나가시면, 반드시 이런 일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죄와 어둠과 사망의 권세가 뒤덮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질서와 혼돈이 판을 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 하나님 앞에 합당치 않은 죄를 짓고 살다가 결국에는 총체적인 파멸을 맞이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더 멋있고 아름답고 위대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합당치 못한 일을 하며 살아가게 된다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하고 살아야 합니다. 인류의 역사와 이 시대의 모습이 그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생명이 사라지는 곳에 죽음이 오는 것이 아닙니까? 빛이 사라지는 곳에는 어두움이 임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바람이 불지 않는 곳에는 부패가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까? 햇살이 들어오지 않으면, 그리고 바람이 불어 공기가 들어오지 않으면 모든 것이 썩게 됩니다. 이것은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햇살로(마 5:45), 그리고 성령을 바람이라고 표현했습니다(요 3:8; 행 2:2). 창세기에서도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생기를 불어넣었다고 표현했습니다(창 2:7). 이것이 아주 멋있는 말입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의 사랑이 없으면, 그리고 성령의 신선한 바람이 없으면 모든 것이 죽게 됩니다. 썩게 됩니다.
봄에 베이징을 가면, 지독한 황사가 온 도시를 뒤덮고 있어서 앞이 하나도 안보일 정도입니다. 황사는 누런 모래바람입니다. 황사가 불면 해가 있어도 모든 것들이 고통을 받게 됩니다. 이처럼 죄로 인해서 하나님과 멀어지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면,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에서 멀어지면, 성령의 바람에서 멀어지면, 우리의 인생이 매우 고통스럽게 됩니다. 창세기를 보면, 하나님과 가깝게 대화하고 호흡했던 때에는 사람들의 수명이 길었습니다(창 5장). 그것을 문자 그대로 믿던 안 믿던, 그 자체가 아주 중요한 메시지를 우리에게 주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질 때, 생명의 근원으로부터 멀어질 때, 우리가 메말라져 버려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썩어지게 됩니다.
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나타납니다. 독수리가 그 주검을 먹기 위해 모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로마 군대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독수리는 로마의 군대의 상징이었는데, 로마의 군대가 가는 곳마다 살육과 피 흘림과 죽음이 있었습니다. 반대로, 생명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이 계신 곳마다 생명이 아름답게 꽃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의 사람들, 하나님의 백성들 안에 계십니다. 그래서 이들을 통해서 아름다운 생명의 역사가 확장되어 갈 수 있습니다.
이사야서 46장 11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내가 동방에서 독수리를 부르며 먼 나라에서 나의 모략을 이룰 사람을 부를 것이라 내가 말하였은즉 정녕 이룰 것이요 경영하였은즉 정녕 행하리라”(행 46:11)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의 독수리는 로마 군대의 상징인 독수리가 아니라 생명을 주는 독수리, 즉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이 독수리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독수리인데,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로운 생명의 역사가 온 땅을 뒤덮게 되는 역사를 반드시 이루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끝 날에는 동방의 독수리를, 그리스도를 너희에게 보내리라”고 하셨고, 그것을 정녕 행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리스도께서는 죄와 사망으로 가득한 이 땅 가운데 오셔서 새로운 의와 구원과 생명의 역사를 열어내셨습니다. 그리스도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기 때문에(요 14:6) 이 땅 가운데 가득한 어둠, 혼돈과 무질서, 사망을 흔적도 없이 도말하실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는 온 세상에 가득한 어둠, 죄와 사망의 권세를 거두어내고 새로운 생명의 역사를 일으키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에스겔서 37장과 같이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해야 합니다. 그래서 마른 뼈와 같은 자들에게 살이 붙고, 그들이 일어나 큰 군대가 되는 역사를 이루어야 합니다. 이러한 역사는 인간의 힘과 능력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지는 곳에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놀라운 능력을 드러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힘써 하나님의 말씀을 전함으로 성령의 능력 가운데 의와 생명의 역사를 열어가는 자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죄의 목록들
롬 1:29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 하는 자요
롬 1:30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롬 1:31 우매한 자요 배약(背約)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이것은 죄의 목록입니다. 바울은 불경건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수많은 죄의 목록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곳에서 생기는 죄는 무엇입니까? 어떤 죄들이 가득 차게 됩니까? 위의 죄의 목록은 그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을 항상 읽고, 우리 안에 이러한 죄가 없는지 날카롭게 볼 줄 아는 신앙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 외에 성경에서 죄의 목록을 적어 놓은 곳은 다음과 같습니다.
막 7:21-22 / 롬 1:29-31 / 롬 13:13 / 고전 5:10-11,6:9-10 / 고후 12:20-21 / 갈 5:19-21 / 엡 4:31, 5:3-4 / 골 3:5 / 딤전 1:9-10 / 딤후 3:2-5
출 21:12-27, 22:19 / 레 19:11-20:27 / 신 27:15-26 / 호 4장
이런 말씀들을 깊이 주목하고, 이 말씀으로 우리 안에 있는 죄를 깊이 살펴보도록 합시다. 진리의 눈으로 죄를 보면, 그리고 진리의 빛을 죄에 대해 비추면 죄가 도망갑니다. 예수님께서도 어두움이 빛을 이기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 8:12). 우리는 진리의 말씀을 알고, 말씀 안에 거하는 자들이 되어야겠습니다. 그럴 때 어둠이 우리를 이기지 못할 것입니다.
사형
롬 1:32 저희가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
바울은 수많은 죄를 범한 죄인인 인간들에게 결국 사형선고, 사망선고가 내려진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롬 6:23). 우리가 죄를 지으며 살아가면, 하나님의 최종 심판대에서 우리에게 “사형” 선고가 내려질 것입니다. 이것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죄에서부터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는 지혜로운 자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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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서론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성서신앙의 핵심은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서 이것을 가슴에 깊이 새기고 살아가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것이 신앙의 가장 중요한 기초요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성장하기를 진정으로 원한다면, 기록된 계시인 성경,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에 힘써야 합니다. 이것 외에 우리의 믿음이 성장할 수 있는 다른 길은 없습니다.
그리고 ‘성’(聖)이라는 한자를 분석해보면,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는 성경의 말씀과 관련된 아주 중요한 메시지를 얻을 수 있습니다. ‘거룩함, 성스러움, 온전함’을 의미하는 ‘성’이라는 한자는 뜻을 나타내는 귀 이(耳) 부와 음을 나타내는 정(呈)의 전음(轉音)이 합해져서 이루어진 글자인데, 여기에서 한자 귀 이(耳)는 말 그대로 귀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정(呈, 정→성으로 변음)이라는 한자는 ‘가리켜 보다’, ‘똑똑히 나타나다’, 또는 ‘바로 나가다’(壬, 정)나 ‘근거가 있다’(程, 정)의 뜻과 통합니다. 그래서 ‘성’이라는 글자는 ‘귀가 잘 들리다’, ‘사리(事理)에 잘 통하고 있다’라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고, 성인(聖人)은 ‘들을 귀가 열린 사람’, ‘무엇이든지 다 알고 있는 사람’, ‘우주의 이치와 사리를 아는 사람’, ‘진리를 아는 사람’, ‘진정한 성숙함, 온전함에 이른 사람’ 등을 일컫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거룩할 성(聖)자에 귀 이(耳)자가 들어간 것이 우리에게 주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듣는 것을 통해서 인간이 진정한 거룩함, 성스러움, 온전함에 이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인(聖人)이 되기 위해서는, 즉 거룩하고 성스러운 하나님의 말씀, 계시를 온전히 깨닫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많이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듣는 귀가 열려야 합니다. 이것은 ‘성’이라는 글자에 대한 단순한 한자 뜻풀이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는 성경의 메시지, 그리고 바울이 로마서에서 전하고 있는 메시지와도 정확하게 일치합니다(롬 10:17).
예수님께서도 이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셨기 때문에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마 11:15, 13:9; 막 4:9,23; 눅 8:8, 14:35)고 여러 차례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들을 귀를 가질 때,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계시를 수용할 수 있는 들을 귀가 우리에게 열릴 때, 말씀의 놀라운 세계가 우리에게 나타날 것입니다. 역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들을 귀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면, 하나님께서 아무리 많은 말씀을 하셔도 그 말씀이 우리에게 제대로 전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에서 말씀을 들을 수 있는 들을 귀를 가지는 것, 즉 말씀을 듣고자 하는 겸손한 마음과 간절한 소원을 가지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리고 말씀을 한두 번 정도 듣고 공부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세계가 온전하게 나타날 때까지 꾸준히, 특히 사람들이 매일 세 끼 밥을 챙겨 먹듯이 날마다 시간을 구별해서 말씀을 공부해야 합니다.
이것과 관련해서 한 가지 일화를 소개하겠습니다. 이전에 신학대학에 다닐 때 조직신학이라는 과목을 공부했는데, 하버드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분이 그 과목의 교수님이었습니다. 그 교수님은 학생들에게 “저는 여러분 같은 젊은 대학생 시절에 학교에서 굉장히 많은 책을 읽고 정리하는 숙제를 하면서 공부했습니다. 제가 그랬던 것처럼 여러분 또한 이 수업을 통해 많은 책을 읽고 정리하는 숙제를 하면서 공부할 수 있도록 지도하려고 합니다”라고 하신 후에 정말로 엄청난 양의 숙제를 매주 마다 내주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런데 숙제가 어찌나 많고 어려웠던지 그 한 과목을 공부하느라 다른 과목은 손도 대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어려운 책들을 숙제로 계속해서 내주시는 그 교수님이 너무나 미웠습니다.
그래서 ‘숙제를 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하고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 두 가지 방법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학교를 그만두는 것이었습니다. 학교를 그만두면 숙제를 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죽는 것이었습니다. 죽으면 숙제를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또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 학교를 그만 둘 수도 없었고, 죽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남은 길이 무엇이었겠습니까? 그것은 죽을 각오로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 외에 다른 길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교수님이 숙제로 내주신 책들은 그런 각오를 가지고 공부해도 따라가기가 어려울 정도로 내용이 너무너무 어려웠습니다. 어느 정도로 어려웠냐면, 책의 앞부분을 읽은 후에 뒷부분으로 넘어가면 앞부분의 내용이 전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다른 학생들 또한 이것 때문에 불평이 너무 많아서, 하루는 용기를 가지고 교수님을 찾아가 “교수님, 학생들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책들을 읽고 정리하라고 하시면 어떻게 합니까? 학생들이 이것 때문에 너무나 힘들어합니다”라고 학생들의 고충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저를 쳐다보시며 “누에를 아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안다고 말씀드리자 “누에가 뽕잎을 먹을 때, 자신에게서 비단실이 나올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뽕잎을 먹느냐?”고 하시고, “아무것도 모른다 할지라도 일단 열심히 뽕잎을 먹으면 나중에 그 누에에게서 반드시 좋은 비단실이 나오게 되지 않느냐. 이처럼 지금 공부하는 책들이 어렵기는 하겠지만, 그 책들과 씨름하며 열심히 공부를 하다 보면 그것들이 나중에 누에에게서 나오는 비단실처럼 반드시 좋은 것으로 나오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의 의미를 깊이 깨달은 것은 그 때 이후로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였습니다.
만약에 누에가 자신이 뽕잎을 먹어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하며, 혹은 뽕잎에서 어떻게 비단실이 나올 수 있느냐고 하며 뽕잎을 먹지 않는다면, 그 누에에게서는 결코 비단실이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유를 불문하고 일단 열심히 뽕잎을 먹기만 한다면, 반드시 아름다운 비단실이 나오는 것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는 데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지금부터 로마서를 공부하려고 하는데, 어떤 이들에게는 로마서가 아주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자신이 로마서를 공부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잘 모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누에가 되어 누에처럼 열심히 말씀을 듣다보면, 어느 순간부터 귀한 말씀의 비단실이 여러분에게서 빠져나오는 것을 반드시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영적누에가 되는 일 외에 귀한 말씀의 비단실이 나올 수 있는 다른 길이 없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기억하고, 끝까지 들을 귀를 가지고 겸손하게, 그리고 성실하고 꾸준하게 로마서를 공부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로마서의 중요성: 반지의 다이아몬드
그렇다면 왜 우리가 로마서를 공부하는 것이 중요합니까? 그런데 여기에서 로마서의 중요성을 특별하게 강조하지 않아도, 이미 많은 사람들이 로마서가 매우 귀하고 중요한 성경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가장 공부하고 싶어하는 성경 가운데 하나가 로마서입니다. (그것은 이 책을 손에 든 분들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이들은 로마서가 66권의 성경 가운데 가장 중요한 성경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로마서가 중요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아주 많지만, 실제로 로마서를 깊이 있게 공부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로마서를 깊이 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로마서가 어려운 성경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로마서가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로마서가 어렵다는 생각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로마서를 실제로 공부하는 것에 대해서는 주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로마서는 어렵다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가 반드시 공부해야 할 필요가 있을 정도로 매우 중요한 성경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지금 아주 귀한 시간을 들여서 로마서를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로마서를 공부하고 나면, 왜 로마서가 중요한 성경인지를 더 깊이 깨닫게 될 것입니다. 또한 로마서가 비록 어렵다 할지라도, 아무리 높고 험한 산이라 할지라도 좋은 가이드가 있으면 쉽고 편하게 오를 수 있는 것처럼, 로마서 또한 좋은 로마서 교사를 통해서 배우면 아주 쉬우면서도 깊이 있게 로마서를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로마서 강해는 험하고 높아 보이는 로마서라는 산을 여러분이 보다 쉽게 오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좋은 교사, 좋은 길잡이가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로마서가 모든 성경 가운데서 특별히 중요한 성경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기독교의 역사를 살펴보면 그 이유를 보다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중세 시대에 마르틴 루터는 기독교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사건인 종교개혁을 일으켰는데, 로마서의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 1:17)는 말씀을 붙들고 종교개혁을 시작했습니다. 그 종교개혁을 통해서 오늘날의 개신교가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감리교의 창시자인 존 웨슬리는 마르틴 루터가 쓴 로마서 서문을 다시 읽으면서 회심을 경험하게 되었고, 이후에 감리교라는 교파를 만들었습니다. 이것을 보면, 로마서가 아주 많은 사람들을 변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런 자들을 통해서 기독교 역사에 중요한 획을 그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을 감안해보면, 로마서가 중요한 성경이라는 사실을 더욱더 분명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비유적으로 표현하자면, 로마서는 반지가 있으면 그 속에 박혀 있는 다이아몬드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제 이렇게 중요한 로마서 말씀을 본격적으로 공부하려고 하는데, 이번 강해를 통해서는 전체 로마서 16장 가운데 로마서의 전반부에 해당하는 로마서 1장부터 8장까지의 내용을 먼저 살펴보려고 합니다. 어렵고 힘들 수도 있지만 동시에 매우 의미 있고 소중한 여정이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로마서 안에는 반드시 다루어야 할 중요한 내용들이 매우 많을 뿐만 아니라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도 많고, 논쟁적인 주제들을 포함하고 있는 부분도 많기 때문에, 이것을 모두 깊이 있게 다루다 보면 1장도 제대로 끝내지 못하고 강해를 마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 강해가 앞으로 어떻게 진행될 지에 대해서 제 스스로도 확신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이 로마서 강해를 얼마나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을지도 지금으로서는 전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사도신경의 고백처럼 “성령을 믿으며” 로마서의 깊은 세계로 함께 들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반대로 짧은 시간 안에 매우 많은 것들을 살펴보려고 하면, 즉 로마서 1장부터 8장까지의 내용 전부를 주어진 많지 않은 시간 안에 모두 강해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강해를 하면, 충분히 깊이 있게 로마서를 다루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마치 수박 겉핥기처럼 강해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강해가 이렇게 이루어질 가능성이 높을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강해를 시작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런 부분을 보완하기 위해서 이번 한 번만이 아니라 앞으로 여러 차례에 걸쳐 계속 로마서를 강해하면서 점점 더 깊이 있게 로마서를 살펴볼 것입니다. (로마서 강해는 앞으로 7권 정도로 만들어질 것입니다.)
로마서 구분
로마서는 전체 16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다음과 같이 크게 3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8장 : 인간의 죄와 하나님의 의의 실현에 관하여
9-15장 : 선민 유대인들과 하나님의 의의 실천에 관하여
16장 : 마지막 인사
이것이 로마서의 전체적인 구조와 각 부분의 핵심적인 주제입니다. 우리가 로마서를 공부함에 있어서 먼저는 위와 같은 로마서 전체에 대한 큰 그림을 가지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리고나서 로마서를 현미경으로 보는 것처럼 아주 섬세하고 깊이 있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로마서의 각 장과 절, 단어 등에 대한 세부적인 이해는 가지고 있으면서도 로마서가 전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지는 전혀 모르는 상황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전체를 보지 못하고 부분만 본다면, 즉 큰 그림을 그리지 못하고 작은 조각 그림만 그린다면, 아주 작고 사소한 문제를 가지고 쓸데없이 지나치게 물고 늘어질 수 있고, 침소봉대할 수도 있습니다. 그 결과로 원치 않게 쓸모없는 수많은 논쟁들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지금까지 이런 일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이런 것들은 우리가 전체적인 로마서에 대한 이해를 가진다면 상당부분 해소될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런 면에서 로마서의 전체적인 구조를 잘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도 앞으로 로마서를 강해하면서 아주 세부적으로 로마서를 하나 하나 깊이 있게 살펴볼 것인데, 이런 과정을 통해서 그 안에 지나치게 함몰되지 말고 계속해서 로마서의 전체적인 윤곽을 잘 그려갈 수 있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로마서의 나무뿐만 아니라 숲까지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게 되었을 때, 로마서를 진정으로 깊이 있게 이해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는 편지다
이제는 로마서를 공부하는 데 있어서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몇 가지 중요한 요소들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것에 대해 먼저 여기에서 잠시 요약해서 말하자면, 로마서가 편지라는 것, 대서를 통해서 기록된 편지라는 것, 그리고 유언장처럼 기록된 편지라는 것을 기억하면서 로마서를 공부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것을 기억하고 로마서를 공부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로마서를 공부하는 데 있어서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큰 차이가 발생하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로마서 공부를 통해서 얻게 되는 결과도 매우 달라지게 될 것입니다.
먼저 로마서는 편지입니다. 로마서가 편지라는 사실을 깊이 이해하는 것이 로마서를 공부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로마서가 편지라는 사실이 주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울이 로마서를 쓸 때, 이것을 통해 로마의 성도들에게 자신의 대단한 신학적 견해를 드러내려고 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가 로마서를 기록하는 주목적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이성의 힘을 빌려서 아주 체계적이고 논리적으로 로마서를 쓰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편지를 책이나 논문 쓰듯이, 교리서 쓰듯이 쓰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편지는 그냥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대로 부드럽고 편하게 쓰는 것입니다. (물론 때로는 자신이 쓰고자 하는 것이 글로 표현이 잘 되지 않아서 머리를 집어 뜯을 때도 있고, 여러 번 종이를 구길 때도 있습니다.) 로마서는 바울이 자신의 친한 친구에게, 사랑하는 사람에게 편지를 보내듯이 아주 편한 마음으로 자신의 신앙의 고백을 적어서 로마의 교우들에게 보냈던 것입니다.
또한 바울의 가슴 속에는 불같은 선교의 열정, 복음 증거의 열정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복음으로 인해서 뜨거워진 자신의 가슴을 로마의 교우들에게도 전하고 싶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를 통해 차가운 이성이 아니라, 즉 단순한 신학적이고 교리적인 지식과 정보가 아니라 자신 안에 살아있는 뜨거운 가슴, 뜨거운 열정, 뜨거운 생명, 뜨거운 신앙을 전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의 성도들에게 이 로마서라는 편지를 쓴 것입니다. 로마서에 기록되어 있는 아멘과 같은 용어들(롬 1:25, 9:5, 11:36, 15:33, 16:27), 찬가들(롬 8:31-39, 11:33-36) 등에서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더욱더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의 성도들에게 로마서를 보내며 그들도 자신처럼 분명한 신앙의 고백과 뜨거운 신앙의 열정, 복음 증거의 열정, 선교의 열정을 가진 자들로 변화되기를 소망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의도를 가진 바울이 무슨 말인지 전혀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복잡하고 난해하게, 그리고 아주 학문적으로 로마서를 쓰려고 할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물론 바울은 로마서를 통해서 전하고자 하는 분명한 메시지를 가지고 있었고, 그것을 또한 아주 체계적이고 논리적으로 정교하게 로마서에서 전했지만, 이성의 힘을 빌려서 체계적이거나 논리적으로 메시지를 전하려고 하기 보다는 성령의 은혜 안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메시지들을 자신의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흘러나오는 대로 가감 없이 전했고, 그것을 기록한 것이 로마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는 대필을 통해서 기록된 편지다
그리고 로마서는 서신 중에서도 친필서신이 아니라 대서(代書)를 통해서 기록된 서신, 즉 대필서신입니다. 옛날의 유명한 문호들은 대부분 대서를 두었습니다. 그래서 문호들은 대서를 통해서 자신의 가르침을 기록하고 정리해서 책으로 남길 수 있었습니다. 로마서도 그렇게 기록된 서신입니다. 바울 사도에게도 대서가 있었는데, 바로 그 대서를 통해서 로마서를 기록한 것입니다.
대서가 기록했다는 것을 통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그림을 떠올려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놓고 간절히 기도하면서 연구와 묵상에 전념합니다. 그런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의 깊은 세계가 열려져서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그 뜨거운 가슴을 도저히 주체하지 못해 바울은 자신이 있던 자리에서 일어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심지어는 책상 위에까지 올라가서 자신에게 임한 하나님의 말씀을 뜨겁게 전합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씀에 사로잡혀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면 앉아 있는 사람이 그것을 듣고 열심히 받아 적는 것입니다. 그가 바로 대서입니다. 그가 바울을 대신해서 적는 것입니다. 로마서는 바로 이렇게 기록되었습니다.
로마서는 바울 사도가 책상에 앉아서 냉정한 이성을 가지고 아주 체계적이고 논리적으로, 학문적으로 기록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가슴에 있는 뜨거운 것을 자기 스스로도 주체하지 못해 열정적으로 - 예배의 설교나 성경공부 등을 통해서 - 마구 퍼부어내면, 그것을 대서가 대신해서 받아서 적은 것입니다. 이것은 목회자가 열정적으로 설교하면 그것을 성도들이 받아 적고, 학교에서 교수가 열정적으로 강의를 하면 학생들이 그것을 받아 적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엄밀하게 따지자면 이렇게 기록된 로마서가 학문적인 것이 될 수가 없습니다. 말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도 성령의 불을 받아서,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열정적으로 쏟아내는 것이기 때문에 글로 쓰는 것보다 체계성과 논리성이 약간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그런 측면에서 로마서를 분석해보면, 약간씩 부족한 부분들을 로마서 이곳저곳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에게 로마서가 어떤 서신인지 더욱더 정확하게 규명해주는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로마서에서 아주 재미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로마서를 대서한 대서의 이름이 로마서에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대서를 통해 기록된 다른 바울의 서신들에는 대서의 이름이 들어가 있지 않은데, 독특하게 로마서에만 그 이름이 들어가 있습니다. 이것이 아주 독특합니다. 로마서 16장 22절을 보십시오.
롬 16:22 이 편지를 대서(代書)하는 나 더디오도 주 안에서 너희에게 문안하노라
대서가 누구입니까? 더디오입니다. 더디오가 대서했습니다. 이것이 정말 재미있습니다. 대서의 이름을 기록해놓았습니다. 로마서 16장은 바울이 인사하면서 로마의 교우들에게 마지막으로 안부를 전하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이 부분에는 로마의 교우들에게 안부를 전하고 싶어하는 다른 사람의 이름들도 몇 명 정도 들어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받아쓰던, 대서하던 더디오도 “나도 로마의 교우들에게 인사해야겠다. 내 이름도 넣어도 되겠지”라고 하면서 자신의 이름을 살짝 집어넣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그 이름을 빼지 않고 그대로 남겨두었습니다. 아마도 이 편지를 최종적으로 검토했을 텐데, 그 이름을 빼지 않았습니다. “나만 인사하면 되겠느냐? 대서하는 너의 이름도 넣어서 너의 인사도 전해라”고 배려해준 것입니다.
그렇다면 대서를 통해서 기록했다는 것을 강조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대서를 했다는 것은 매우 의도적이라는 것입니다. 무엇이 의도적이라는 것입니까? 로마서를 학문적으로 쓴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의도로 로마서를 기록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의도로 로마서를 썼다면, 바울이 대서를 통해서 로마서를 기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마도 책상에 앉아서 친필로 아주 꼼꼼하게 로마서를 기록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지만 대서를 통해서 기록했음에도 불구하고, 로마서는 책상에서 쓴 것처럼 아주 체계적이고 논리적으로 기록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보며 우리는 바울이 아주 특별히 심혈을 기울여, 자신이 지금까지 전했던 모든 메시지들을 총정리해서 사람들에게 남기려는 목적으로 이 로마서의 메시지를 전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바울은 성령의 은혜에 취해서 열정적으로 말씀을 전해도 아주 체계적이고 논리적으로, 정교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을 정도의 수준에 이르러 있었던 사람이었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되기까지는 깊고도 오랜 기도와 성경연구, 묵상의 세월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차가운 이성을 가지고 꼼꼼하게, 체계적이고 논리적인 측면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치열하게 씨름했던 세월도 있었을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오늘날의 신학교육과 같은 교육을 받았을 것입니다. 실제로 바울은 당시에 학문적인 면에서 아주 충실하게 훈련되어 있었던 뛰어난 지성인이었습니다. 그는 가말리엘의 제자이기도 했고, 헬라의 학문과 철학을 깊이 공부하기도 했던 당대의 뛰어난 석학이었습니다. 이런 것들이 모두 바울이 메시지를 전하는 데 있어서 크고 작은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대서에 의해서 기록된 로마서가 전혀 체계적이거나 논리적이지 않다고, 학문적이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리고 이런 것들이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 전혀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것도 아주 잘못된 생각입니다. 오히려 바울은 이런 것들이 복음을 전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의 모든 서신들은 체계적이고 논리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고, 그 가운데서도 로마서는 바울이 쓴 다른 어떤 서신보다 특히 그런 면모가 잘 드러나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리성과 체계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데 있어서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즉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즉, 체계성과 논리성은 복음을 전하는 데 있어서 필요한 많은 도구들 중에 하나일 뿐이지, 그것이 복음을 전하는 목적이요 전부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이전에 가졌던 모든 것들을 배설물처럼 버렸다고 표현하기도 했고(빌 3:8), 자신은 설득력 있는 말과 세상의 지혜가 아니라 오직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만 메시지를 전한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고전 2:4). 이것은 이런 것들이 전혀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라, 더 중요하고 본질적인 것이 우선된 이후에야 이런 것들이 필요하고 의미를 가지게 된다는 것을 바울이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가 어떻게 기록되었는지에 대해서 우리가 분명하게 이해를 했다면, 학문적으로만 로마서에 접근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자세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바울이 로마서를 통해 전하고자 하는 진정한 로마서의 진수를 놓치게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지금까지 로마서 연구와 강해에 있어서 이것이 가장 큰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특별히 강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학문적인 측면에서보다는 자신 안에 있는 신앙의 뜨거움을 자신도 주체하지 못해 열정적으로 말씀을 전하고 있는 바울과 그것을 열심히 대서하고 있는 더디오를 상상하면서 이 로마서를 보아야 합니다.
로마서는 대서인 더디오를 통해서 쓴 것이라고 했는데, 바울이 모든 서신을 대서하게 한 것은 아닙니다. 친필로 쓴 것도 있습니다. 자신이 직접 쓴 것도 있다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4장 18절과 데살로니가후서 3장 17절을 보십시오.
골 4:18 나 바울은 친필로 문안하노니 나의 매인 것을 생각하라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살후 3:17 나 바울은 친필로 문안하노니 이는 편지마다 표적이기로 이렇게 쓰노라
이런 곳을 보면, “내가 너희에게 친필로 쓰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서신들은 바울이 직접 친필로 쓴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른 서신들은 어떻게 기록되었겠습니까? 대서를 통해서 기록되었습니다. 로마서를 본격적으로 공부하기에 앞서, 이것을 계속해서 강조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것을 정확하게 가슴에 새기고 나서 로마서를 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로마서를 공부하는 가장 핵심적인 포인트 가운데 하나입니다.
로마서를 공부하면서 우리는 지식적이고 학문적인 관점으로만 로마서를 보지 말고, 그것보다 먼저 바울 안에 있는 신앙적인 뜨거움에 더 깊이 주목해야 합니다. 여기에 초점을 두어야 합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 초점을 분명하게 하지 않으면, 그래서 이 초점을 잃어버리게 되면,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지식적이고 학문적으로만 로마서에 접근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가 너무 어렵고 힘들게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또한 로마서를 통해 바울이 전하고자 하는 본질적인 메시지에서도 벗어나게 될 것입니다.
제가 수련회 등의 집회나 성경공부 모임, 예배의 설교 등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매우 어려운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말씀을 전하는 것 자체가 어려운 것은 아닙니다. 가장 어려운 것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지나치게 학문적으로만 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목회자이지만 동시에 교수이기 때문에, 학문적으로 말씀을 가르치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학문적이 되면, 하나하나 분석하게 됩니다. 물론 학문적이 되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되면 자칫 잘못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가진 생명력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즉, 말씀에 대한 지식만 전달하고, 말씀 안에 담긴 뜨거운 신앙의 열정을 온전하게 전달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가슴이 아주 뜨거워져서 목소리 높여 외쳐야 할 부분이 있는데, 그 부분을 아주 냉정하고 무덤덤한 목소리로 책 읽듯이 읽는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또한 그 부분에 대해서 이성적으로 접근해서 따지고 분석하면서 재단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이것은 자칫 잘못하면 자신도 원치 않게 하나님의 말씀의 숨통을 완전히 끊어놓는, 즉 생명력을 완전히 죽이는 결과를 낳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를 강해하면서도 얼마든지 그렇게 흘러갈 수 있는 우려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충분한 로마서 강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바울이 진정으로 원하는 로마서 강해도 아닐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로마서를 공부하면서 지나치게 학문적이 되지 말고, ‘어떻게 로마서를 통해 바울이 대서에게 불러주었던 그 마음을 오늘 우리의 자리에서도 동일하게 느낄 수 있을까? 그 마음을 우리가 함께 따라갈 수 있을까?’에 대해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로마서는 학문적으로 접근하면 할수록, 즉 학문적으로 깊이 파고 들어가면 갈수록, 학문적으로 분석하면 할수록 굉장히 어려워지게 됩니다. 그러나 대서에게 서서 불러주는 바울의 이 마음을 느끼려고 하면, 신기하게도 로마서가 매우 쉬워지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아, 그런 것이구나! 로마서가 그런 책이구나!”라고 하며 로마서를 대하는 자세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그래서 로마서 안에 있는 전혀 다른 세계가 보이고 깨달아지기 시작합니다. 우리 또한 이런 모습을 가지고 로마서를 살펴볼 수 있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로마서 공부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요소입니다. 좀 더 강조를 한다면, 로마서의 생명과 직결되어 있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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