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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한국교회의 신학과 중국교회의 삼자신학

수호천사1 2016. 9. 4. 22:53

한국교회의 신학과 중국교회의 삼자신학


 임회모(한일장신대교수)


1. 서론
본 글은 한국교회의 신학과 중국교회의 신학을 대면시켜 대화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글은 순수한 학문적 분석적 비판적 성격을 지닌다. 이러한 성격을 지닌 본 글은 두 가지 방법을 사용한다. 첫째, 비교의 방법이다. 비교를 통하여 각각이 지닌 독특성 (장점이나 보완점)을 노출시켜 상호 이해하고 대화하도록 할 것이다. 그동안 중국 교회는 사회주의 상황에서 삼자운동을 통하여 삼자신학을 발전시켜 이를 공식 신학으로 만들었다. 반면에 한국교회에는 발전과정에서 수 많은 교파가 생겼고 다양한 신학이 논의되어 왔다. 여기에서는 한국교회가 지닌 신학의 흐름을 세 가지로 분석하고 각 신학의 특징을 기술하려고 한다. 둘째, 양 교회의 신학을 비교하기 위하여 본 글은 토착적 실천 신학 (indigenous praxis theology)2) 이라는 준거틀 (frame of reference)을 사용하려고 한다.3) 이 신학은 민족문화적 내용과 해방실천적 내용을 포괄하는 신학이다. 이 신학은 한편으로 복음이 민족 문화를 만나 교회가 민족적 문화적 정체성을 확립하게 하고 또한편으로 복음이 지닌 사회변혁적 실천을 실현하게 하는 토착신학인 것이다. 이러한 신학적 틀을 사용하여 중국과 한국의 각 교회의 신학의 특성을 기술하고 향후 신학적 과제를 논하려 한다. 이 글은 좀 더 깊은 논의를 위하여 개략적으로 기술한 서론적 소개 글 정도로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


2. 한국교회의 신학들


1) 서구적 기독교와 민족적 기독교의 공존 상황

종교문화적으로 한국은 다종교 상황으로서 샤마니즘이 종교적 토양을 이루는 가운데, 불교, 도교와 유교가 중국으로부터 전래되어 토착화되었다. 중국보다 약 50여년 늦게 개신교가 미국 선교사들에 의하여 한국에 소개되었는데 지금의 한국교회는 다양한 모습을 지니고 민족을 섬기는 교회가 되려고 노력하고 있다.

한국교회가 창출한 신학을 분석하기 전에 한국교회가 형성된 역사적 배경을 간략히 서술할 필요가 있다. 첫 시기 (1894-1910년)의 한국 기독교는 민족주의적 요소를 띄고 있었다. 이 시기에 제국주의 침략과 반봉건주의에 저항한 동학농민혁명이 있었고, 조선왕조 마감과 일제에 의한 강제합병 시기로 한국민중이 민족구원과 연계하여 기독교를 정치적으로 수용하였다. 한편으로 미국의 선교사들은 한국교회에 정교분리 정책을 강요하여 일제의 합병을 묵인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문화적으로 한국민족 문화를 경시하고 파괴하였다.

둘째 시기 (1910-1945)에 한국민중들은 일제에 저항하여 1919년 3.1 독립운동을 일으키고 한국 교회 역시 민족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 이후 한국교회는 정교분리정책의 엄정 시행으로 완전히 탈정치화되었다. 당시 한국에 가장 많은 선교사를 파송한 미국 북장로교회가 1920년대 근본주의자와 현대주의자 논쟁에 빠지자 한국교회는 근본주의자들의 영향을 받아 교리적으로 극도로 경색되었다. 한국교회는 전반적으로 식민주의 하에서 겪는 정치 경제적 현실의 고통을 피안적인 신비주의적 부흥회 운동과 기도 운동으로 풀려고 하였다. 한편 한국교회는 영적 갱신과 도덕적 혁신을 통하여 신앙적 민족주의를 구축하려고 하였다.4)

셋째 시기 (1945-현재)는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해방과 1950년 한국전쟁을 거치며 수많은 미국형 교파 교회가 한국에 상륙하여 다양한 교회를 세우게 되었다. 1960년대 이후 박정희 군부 개발독재 시대가 열리고 정치적 민주화 문제, 경제적 빈부격차의 문제, 노동자 인권 문제 등이 대두되었다. 이러한 민중의 고난을 신학적으로 해석하고 이의 극복을 실천하는 신학으로 민중신학이 태동되고 발전되었다. 그리고 보수적 장로교회에서는 교파 분열이 극에 달하였다.5) 한편으로 1970년대 이후 한국경제의 규모가 커짐에 따라 한국교회도 경제적 규모가 커졌다. 신학적으로 미국으로부터 교회성장신학이 소개되고 1980년대 이후에는 급속도로 교회수와 교인수가 증가하게 되는데, 이러한 힘이 해외선교라는 이름으로 세계로 퍼져나가기 시작하였다.

2) 한국교회의 신학들

일반적으로 한국교회의 신학은 신학사상사적으로 3가지로 갈래쳐지고 있다.6)

(1) 복음주의적 교회성장신학

박형룡7)으로 대변되는 근본주의 신학이 한국교회 특히 장로교회의 대부분을 지배하고 있다. 서구 선교사들이 전해준 교리와 가르침을 한국에서 변경없이 그대로 보수 유지하려는 신학이다. 오늘날 이들은 스스로 복음주의 교회라고 주장하며 교회 성장과 해외 선교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8) 성경에 대한 문자적 무오류성과 축자영감설의 강조, 교리적 절대성 고수, 개인적 영혼 구원, 이원론적 사고, 정교분리 원칙 고수, 율법적 경건의 강조 등이 그 특징이다. 그리고 다른 신학에 대하여 배타적이고 에큐메니칼 운동을 정죄하고 종교간의 대화를 거부한다.

(2) 문화토착적 종교신학

주로 한국 감리교회 신학자들에 의하여 진행된 이 신학은 복음과 기존 종교 문화를 대면시키고 대화시킴으로서 진행되고 있다. 이 신학의 형성기에 최병헌은 불변하는 것으로서 예수 복음과 변하는 것으로서 종교를 구분하여 종교신학을 발전시켰다. 1960년대에는 한국교회가 토착화 논쟁에 휩싸였는데, 유동식은 샤머니즘을, 윤성범은 유교를, 변선환은 불교를 주로 연구하여 종교간의 대화를 진척시켰다. 이들은 제국주의적 개종 보다는 종교간 대화에 강조점을 둠으로서 자유주의적 개방적 경향을 가지고 있다.

(3) 해방실천적 민중신학

김재준으로 대변되는 한국교회의 정치신학은 1970년대 중반 이후 민중신학으로 발전되었다. 1930년 대에 김재준은 성경고등비평학을 한국교회에 도입하여 예언자적 역할을 하였고 1970년대에는 반독재 민주화 투쟁을 통하여 정치신학을 발전시켰다. 1970년대에 들어 에큐메니칼 권에서 하나님의 선교 개념이 소개됨으로서 억압받는 자들을 위한 민중신학의 열풍이 불기 시작하였다. 서남동 (조직신학), 안병무 (신약신학), 김용복 (사회윤리) 등이 이 사회정치적 해방신학을 발전시켰다. 이들은 한국의 역사와 문화에서 조건지어진 민중을 신학화 하였다.

3) 한국교회 신학의 비판과 과제

먼저 이들 3가지 신학을 문화토착적 해방실천적 신학 차원에서 비판적으로 고찰하면 다음과 같다. 근본주의로부터 발전된 한국 복음주의적 성장신학은 한국의 정치경제적, 역사적 현실에 대하여 무관심하고 무역사적 신앙을 강조하여 편안한 복음 (값싼 은혜)를 전함으로서 많은 신도들을 교회로 끌어들이는 흡인력을 보이지만 복음의 사회윤리적 차원을 끌어내지 못하고 있다. 또한 선교사들이 전한 서구 기독교를 무조건 받아 수용함으로서 한국적 문화적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하고 있다.9) 이러한 복음주의적 성장신학은 수많은 교파를 양산하여 경쟁적으로 교세를 확장시켜 교회성장에 기여한 듯 하였으나 오늘날 교파의 많음은 오히려 대사회적 공신력을 약화시켜 교회의 질적 성장 즉 성숙을 저해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이러한 성장신학은 사회적 해방실천 차원에서도 오히려 암묵적으로 억압적 사회를 유지시키고 지배 계층을 편드는 역할을 하고 있다.

문화토착적 종교신학은 나름대로 한국민족 문화 신학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이 신학은 誠 (윤성범)이나 風流 (유동식) 등을 한국 문화의 고유성으로 보면서 이를 통하여 한국 신학을 재구성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접근은 신학방법론적으로 문제가 있다. 즉, 과거의 한 사상으로부터 현재의 문화를 분석하는 방법으로서 문화축소주의에 빠질 우려가 있다. 그리고 여전히 기독교 우월적 사고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성취론적 성향을 가지고 있다. 또한 밑에서부터 올라온 신학이 아니라 정태적 지적 신학으로 끝나고 있다. 오늘날 문화토착 신학의 제 2세대들은 민중신학과 대화함으로서 해방실천적 차원을 강조하고 있다.10)

정치적 민중신학은 민중 해방을 위한 당파적 이데올로기를 강조함으로서 해방 실천에 충실하고 있다. 민중이 한국적 개념임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종교문화적 접근은 부차적인 것으로 떨어져 있다. 그러므로 민중신학은 한국민족의 종교문화적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한 문화토착화에는 다소 관심이 약화되어 있다. 민중신학이 한국적인 신학임에는 틀림없지만 민중과 비민중, 혹은 민중과 민중 이외의 한국인을 구분하는 구도에서 보면 민중 신학은 그 당파성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은총과 화해의 대상으로서 전체 한국민족을 아우르기에는 한계를 갖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교회는 한국민족적 토착신학을 창조해야 할 과제를 갖는다. 이 신학은 한국민족의 종교문화적 정체성을 살리는 차원과 억압과 차별을 받는 민중의 해방을 위하여 사회변혁적 실천적 차원을 담는 신학이다. 또한 이러한 신학은 기존의 문화토착신학과 민중신학이 창조적으로 융합되는 과정에서 만들어질 신학이다.

이러한 문화토착적 실천신학은 한국 교회에 세가지 가능성을 준다. 첫째, 한국교회로 하여금 한국 민족의 교회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게 할 것이다. 이 신학은 문화변혁을 일으켜 한국 교회내에 얼룩져 있는 서구 기독교적 문화를 벗겨내고 한국민족의 정서를 담아 한국민족적 기독교를 만들 것이다. 둘째, 무분별하게 수입된 미국형의 교파형 교회들을 하나되게 하여 민족을 위하여 연합사업을 벌이는 민족적 에큐메니칼 교회가 되게 할 것이다. 이러한 에큐메니칼 교회는 복음의 사회적 실천성을 드러냄으로서 한국 사회를 변혁하여 마침내 하나님의 샬롬을 이룰 것이다. 셋째, 이러한 토착문화적 실천신학은 한반도의 남북분단 상황 속에서 한국교회로 하여금 상이한 남북 문화를 통합하는데 기여하게 할 것이다. 즉, 통일을 향한 정치문화를 창출하여 민족 통일을 촉발시키고 진행시키고 성취하게 할 것이다. 궁극적으로 민족통일을 이루고 한국민족 문화의 정체성을 지닌 민족 교회를 세우도록 할 것이다.

3. 중국교회의 삼자신학


문화변혁적 실천신학 차원에서 삼자운동과 삼자신학을 분석하고 중국 교회의 과제를 논할 것이다.

1) 기독교와 중국의 만남: 중국 문화와 기독교 선교

기독교의 중국 선교 역사를 살펴 볼 때 중국에 전래된 기독교는 중국 인민들과 문화적 정체성을 공유하지 않고는 생존할 수 없었다. 중국화된 종교만이 중국에 뿌리를 두고 생존할 수 있었던 것이다. 먼저, 635년에 전래된 경교는 중국 당 황실의 보호 하에 20만 신자에 이르러 한 때 융성하였지만 황실의 배척을 받자 전멸하고 말았다. 민중문화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 종교가 존재할 수 없음을 말하여 준다. 원 시대에도 프란시스코회 선교사들이 중국에 파견되어 선교를 했지만 원의 멸망과 더불어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명나라 때 예수회의 마테오 리치 (Matteo Ricci, 1552-1610)가 중국문화의 가치를 인정하고 이를 수용하여 문화적응적 방법으로 선교함으로서 많은 신자를 거두는 결과를 맺었다. 그러나 중국문화를 배척하는 로마 교황청과의 갈등 즉 전례논쟁을 통하여 가톨릭 선교는 쇠퇴하여졌다. 이후 천주교 (기독교)는 중국문화를 존중하지 않는 양교 (洋敎)라는 멸시를 받게 되었다.

아편전쟁에서의 패배로 인하여 중국은 서구 열강과 불평등 조약을 굴욕적으로 체결하였다. 서구 열강은 아편 판매의 자유와 함께 기독교 (개신교와 천주교) 선교의 자유를 얻게 되었다. 선교사들은 치외법권적 지위를 가지고 중국에 선교를 하면서 신도들을 보호하고 때로는 민폐를 끼치게 되었다. 식민주의자들의 동반자로 여겨진 기독교에 대하여 反敎 감정이 중국 지식인들과 일반인들 사이에 넓게 퍼지게 되었다.11) 서구 열강들의 중국 침략이 거세어짐에 따라 反洋反敎 운동도 커지면서 1900년 의화단 사건으로 폭발하여 많은 선교사들과 신도들이 피살되었다.

1911년 중화민국 설립으로 민족12) 자립의식이 강하여졌고, 1915년 중국 자강을 강조한 신문화운동과 1919년 반제국주의를 외친 5.4운동 등을 거치면서 1922년부터 선교사와 제국주의의 연루를 주장하며 반기독교운동이 거세어 졌다.13) 이러한 반기독교 운동에 대하여 중국 기독교는 제국주의와 무관함을 강조하기도 하고 불평등 조약 철폐를 주장하기도 하고, 중국인 지도력을 키우려고 하기도 하고, 토착교회 운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서구 열강의 중국에 대한 제국주의 식민주의적 침략은 중국인들로 하여금 중국 민족주의를 일깨워 중국의 정체성을 세우려는 저항을 불러 일으켰다. 이러한 와중에서 기독교는 제국주의의 앞잡이로 간주되어 반기독교운동에 휩싸였고 중국 기독교는 중국 민족과 문화에 적합한 중국적 기독교에 대한 모색14)을 시작하였다.



2) 중국에서의 삼자운동

중국의 삼자운동은 민족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토착 교회 운동이다. 1949년을 기점으로 하여 전과 후의 삼자운동이 차이가 난다. 이전 특히 1920년 대에 반기독교 운동 상황에서 두 가지 면에서 토착교회 운동 즉 삼자 운동이 일어났다.15) 먼저 에큐메니칼 차원에서 1922년 NCC와 1927년 Church of Christ in China가 만들어지지만, 외국 선교사들의 후원에 의한 것으로 중국적 뿌리가 약한 것이었다. 그리고 True Jesus Church, Little Flock, Jesus Family 등이 토착교회 운동을 벌이지만 이들은 종파적 성격을 지녀 사회성이 약한 것이었다. 그러나 반봉건적 반식민지적 상황에서 선교사들로부터 완전히 독립된 토착교회 운동을 전개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1949년 이전에 중국 기독교는 문화적응적 차원이긴 하지만 민족주의적 토착교회를 만들려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지만16) 사회변혁적 성격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1949년 이후 중국기독교의 토착교회 운동은 문화변혁적 의미를 갖는다. 중국교회는 그간의 문화를 변혁하려는 것으로 특히 서구 선교사적 기독교를 중국화된 기독교로 만들었다. 이전부터 서구 선교사들이 전한 제국주의적 요소와 봉건적 요소를 간직한 전통적 중국교회는 1949년 해방 이후 민족적 토착교회 운동을 벌이게 된다. 즉 중국화된 사회주의17)의 정치적 힘을 통하여 중국교회는 제국주의적 봉건적 요소들을 극복하며 민족적 토착교회 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중국사회주의 당국은 통일전선 정책을 실시하여 중국기독교를 포용하였다. 중국기독교는 그동안 서구 제국주의적 영향 하에 있었긴 하지만 중국 당국은 반제 반봉건 반관료 정책을 수행하고 사회주의를 건설하는데 있어서 중국 인민으로서의 중국기독교인들을 포용하였다. 이러한 통전정책을 통하여 중국인민과 중국기독교인은 공동목표 즉 사회주의 건설을 이루기 위하여 매진하였다. 중국 기독교인들에게 중국 사회주의는 한편으로 민족주의와 애국주의로 이해되었고, 또 다른 한편으로 반제 반봉건 반관료 운동으로 이해되었다. 이러한 민족적 애국적 사회주의 운동에 발맞추어 중국기독교는 삼자애국운동을 벌인 것이다.

중국교회는 이러한 삼자애국운동18)을 지도할 수 있는 민족적 애국적 기독교인들이 이미 오래전에 준비되어 있었다. 半식민지 상황에서 제국주의적 서구적 선교사적 중국기독교를 비판하고 민족적 토착적 중국적 기독교를 구상한 선진적 기독교지도자들이 있었던 것이다. 즉 오요종19)과 정광훈20)을 비롯한 진보적 기독교지도자들이 중국 사회주의 상황에서 삼자운동을 성공적으로 이끌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선진 지도자들의 지도 하에 중국 기독교인들이 신학대중화 운동을 벌여 기존 서구적 기독교를 중국화된 기독교로 재정립하였다. 이를 통하여 중국 기독교인들은 성경적 가르침을 중국 인민들과 더불어 실천함으로서 기독교를 洋敎의 오명으로부터 벗어나도록 하였다. 또한 중국교회는 선교사들이 가르친 신학들, 예컨대 인신칭의 교리를 재해석하여 교인들로 하여금 사회적 실천을 하도록 하여 애국하는 교회로 만들고, 선교사들이 심은 여러 교파를 통합하여 하나의 중국교회로 만듦으로서 교파이후시대의 교회를 구형하였다. 중국 교회는 삼자운동을 통하여 중국의 문화적 정체성을 인민들과 공유하며 중국 특색의 교회가 되었다. 중국교회는 중국에 자생한 것과 같은 중국 특색을 지닌 교회가 되었고, 애국애교하는 교회로 변모된 것이다.



3) 정치적 토착신학으로서 삼자신학

삼자 신학에서의 신학이란 "생각하는 교회"21)의 산물로 규정된다. 교회는 성경, 교회, 사회와 국가, 가치관 등을 반드시 사고하게 되어 있는데 신학이란 이러한 사고의 결과인 것이다. 또한 신학은 "그 사회문화적 환경과 조응해야 할 뿐만 아니라, 또한 교회 안의 광대한 신도들의 사상과 감정도 반영22)"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학은 신도들의 삶을 포함하는 모든 상황을 재료로 하여 비판적으로 사고하는 교회의 작업이다. 신학에 대한 이러한 이해를 통하여 중국교회의 신학을 몇 가지로 분석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중국교회의 삼자신학은 그 초창기에 아래로부터 위로 올라가는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상황 즉 삶의 현실에서 그리고 인민들의 생활에서 신학의 자료가 주어졌다. 1950년대에 신학대중화 운동을 통하여 기독교인들이 자신들의 중국인으로서의 삶을 신학적으로 표현하였다. 이들은 구체적 민족적 현실에서 경험을 통하여 신학을 하였고, 형이상학적 관념이나 추상적인 논리로부터 신학을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중국 삼자신학은 선교사들이 전한 서구기독교적 관념론적 신학을 비판하고, 중국의 구체적 현실과 상황으로부터, 그리고 인민들의 경험을 통하여 신학 행위를 하는 구조를 강조하였다. 신학자는 교회의 한 회원으로서 교회가 경험하고 살아가는 여러 문제들을 신학화하였다. 이러한 의미에서 중국의 삼자신학은 기본적으로 상황 (처경화) 신학의 성격을 지닌다.

둘째, 중국의 처경화 신학은 넓은 의미에서 문화변혁적 토착신학이다.23) 이 신학은 중국의 특수한 역사적 발전 단계 즉 半식민지적 상황을 지나 사회주의 하에서 발전된 신학인 것이다.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중국에서는 어느 종교든지 간에 중국에 토착화되지 않고는 생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근대 중국에 기독교가 선교된 것은 불행하게도 제국주의적 침략과 동시에 이루어졌다. 선교사들과 기독교인들 일부는 반민족적 행위를 하기도 했고, 더러는 제국주의의 앞잡이 노릇을 하기도 하였다. 이렇듯이 얼룩진 중국 기독교가 중국에서 참된 중국적 기독교로 존립하려고 한다면 중국의 민족적 정체성을 갖지 않고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중국교회는 과거 서구 선교사적 기독교의 탈을 벗고, 중국 민족적 정체성을 갖는 기독교로 새롭게 거듭나게 되었다. 특히 1949년 중국이 사회주의화 되면서 중국교회는 중국적 토착교회 운동을 정치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되었다. 중국화된 사회주의는 통전정책의 일환으로 중국교회 자립 운동을 지지하였던 것이다. 마침내 1954년 중국삼자애국위원회가 조직됨으로서 중국교회의 자치와 자양 운동이 가속화되었다.

셋째, 중국의 정치적 토착신학인 삼자신학은 상황의 변화에 따라 강조점이 달라져 왔다. 1949년 해방과 더불어 정치성이 강조되는 삼자운동이 진행되었다면 1980년 이후에는 보다 교회성이 강조되고 있다. 1980년 중국기독교협회 (CCC)가 창립됨으로서 중국교회는 교회성을 강조하게 되었고 1998년부터는 신학건설 운동을 펴기에 이른다. 삼자 즉 자치 자양 자전은 기본적으로 상호 순환적 구조를 가지지만 시기적으로 강조점이 달리 나타났다. 삼자운동 시작 이후 정치적 의미를 지닌 자치와 자양 운동을 통하여 교회의 외피적 토착화가 강조되었다면, 1980년 이후에는 신학적 문화적 의미가 강조되는 신학적 자전 운동이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1998년부터 시작된 신학건설 운동을 통하여 중국교회는 교회의 지도력 구축, 신앙생활의 질적 향상, 교회의 내부적 토착화, 신학의 토착화를 진척시키려 하는 것이다. 이러한 신학적 토착화 운동을 통하여 중국교회는 질적으로 향상된 중국 특유의 처경화 교회를 만들어 가고 있다.

넷째, 이러한 삼자신학은 하나님의 선교 (missio dei) 신학에서 조명될 수 있다.24) 하나님의 선교 신학에 의하면, 하나님은 자기 자신이 선교사가 되어 선교를 하시고, 자기의 주권을 실현하시는데 있어서 특정한 세계관이나 이데올로기를 초월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기의 통치가 실현되는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 가신다. 이러한 하나님의 선교와 주권실현이 중국에서 삼자운동을 통하여 드러난 것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중국에 보내시고 성령과 더불어 삼자운동을 이끌었다. 우주적 그리스도가 중국문화와 삼자운동에 임하셨는데, 중국교회는 이러한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고 있다.25) 또한 삼자운동의 지도자들은 성령이 중국 인민과 중국 교회와 함께 일하시고26)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삼자운동이 진행되었음을 고백한다.27) 자본주의하의 기독교만이 하나님을 독점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처럼 주장되는 현실에서, 그리고 서구선교사들만이 하나님을 올바로 알고 믿고 있는 듯이 행세되는 현실에서, 삼자신학은 중국의 무신론적 사회주의 하에서도 삼위일체 하나님이 중국인민을 구원하고 있음을 증거하고 있다. 하나님은 교회나 선교사를 통하지 않고도 선교를 하실 수 있으며 자기의 주권을 실현할 수 있는 분이시다. 이러한 하나님의 선교는 중국인민을 구원하기 위하여 제국주의적 선교사들의 교회를 내려치고 그 대신에 중국교회를 만들고 자신의 선교에 동참하도록 하였다. 중국교회는 가난한 자의 해방을 지지하고 또한 하나님과의 화해를 선교의 주제로 삼는다. 그리하여 1949년 100년 이상 선교사들이 중국에서 전력으로 선교한 결과 기독교인 수가 고작 70만 (당시 인구는 3억 5천만) 이었다는데, 현재 1,500만 (인구 13억 명)이 넘는 기독교인이 삼자교회에 소속하게 되었다.

다섯째, 중국의 삼자신학은 에큐메니칼 성격을 지닌 신학이다. 먼저, 중국교회는 선교사들이 세운 각각의 교회 (교파)를 이들 교회가 지닌 장점을 살리면서 하나로 통합하여 단일한 교회를 만들고 교파이후의교회 (Post-denominational Church)시대를 열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단일화된 중국교회는 교회 내부적으로 에큐메니칼 하다. 그리고 이러한 중국 교회는 외부적으로 각 선교사들을 파송한 교회를 향하여 에큐메니칼 하다.

이렇듯이 에큐메니칼 성격을 지닌 중국교회의 신학은 세계교회를 향하여 에큐메니칼 기여를 할 수 있다. 특수한 교회로서 중국교회는 보편적 세계 교회의 한 부분을 구성한다.28) 성육신 신학에 의하면, 말씀이 육신이 되는 성육신을 통하여 그리스도가 중국의 문화와 인민 가운데 임하였다. 이 성육신된 예수 그리스도가 중국에서 활동하시며 중국 인민들에게 복음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 복음이 중국교회를 통하여 구체화되면서 세계 교회에 기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중국이라는) 지역적 특수성을 지닌 중국교회는 전세계적 보편교회에 대하여 신학적 다양성과 삶의 풍부성을 나눌 수 있는 것이다. 중국교회의 이러한 에큐메니칼 기여는 세 가지 면에서 나타날 수 있다. 첫째, 중국 교회의 경험이 제 3세계의 교회에 대하여 줄 수 있는 에큐메니칼 의미이다. 대부분의 제 3세계 교회는 제국주의적 선교사들에 의하여 생긴 것들인데 이들은 문화적 민족적 정체성을 지닌 토착 교회가 될 필요가 있다. 중국교회의 경험은 이러한 제 3세계 교회들의 토착교회 운동에 기여를 할 수 있다. 둘째, 특히 제 1세계의 선교하는 교회에 가르침을 줄 수 있다. 선교사들은 선교의 기본원칙을 삼자 (三自)를 중심으로 하는 토착교회 형성에 두고 이를 적극적으로 실천하도록 해야 한다.29) 셋째, 중국교회의 삼자신학은 세속 에큐메니즘을 활성화시키고 있다. 중국교회의 삼자운동은 무신론적 인민들과 연대하여 사회주의 사회 건설을 교회의 선교적 과제로 삼고 이를 이룩하였다. 교회는 공동의 목표를 향하여 세속적 시민운동 단체들이나 특정 조직들과 연대를 할 수 있는 것이다. 교회가 교회내의 영역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단체들과 더불어 하나님의 선교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중국교회는 삼자신학을 통하여 세계 교회에 에큐메니칼 가르침을 줄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삼자교회는 세계 여타 교회와의 교류와 대화에 있어서 소극적이다. 심지어 폐쇄적인 모습까지도 보이고 있다. 중국교회는 토착교회적 자신감을 가지고 에큐메니칼 차원의 대외 개방을 적극적으로 추진할 필요가 있다.



4) 중국교회의 신학적 과제

중국교회 역시 한국교회에서처럼 문화변혁적 실천신학이 필요하다. 이 신학을 통하여 중국교회는 중국 사회와 문화를 그리고 교회를 변화시킴으로서 하나님의 주권을 중국에서 실현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문화변혁적 실천신학 입장에서 현재의 삼자신학을 조명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중국 교회는 정치적 삼자신학을 통하여 민족적 정체성을 확립한 정치적 토착교회가 되었다. 중국교회는 중국 사회주의를 민족주의와 애국주의로 이해하고 삼자애국운동을 통하여 중국 사회주의 사회 건설에 임하였던 것이다. 중국교회는 이러한 삼자신학 운동을 통하여 중국 인민들과 삶을 나누는 애국적 토착교회가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정치적 삼자신학은 시간이 지나면서 중국교회를 위에서부터 지도하는 신학이 됨으로서 오늘날 아래에 있는 인민들의 생활상의 요구를 신학화하여야 할 것이다. 삼자신학은 세 가지 면에서 변화와 심화의 도전을 받고 있다. 첫째, 중국교회 지도자들은 사회주의의 중국사회가 억압과 착취로부터 해방된 사회라고 인식한다. 이러한 인식으로 인하여 중국 사회에서는 복음의 해방실천적 차원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30) 그러나 인간 세상의 모든 사회는 하나님 나라의 빛에서 조명되고 비판받아야 한다. 중국의 현실사회 역시 하나님 나라의 빛에서 조명해 볼 때 변혁되어야 할 대상으로 드러난다. 중국 문화 역시 복음이 지닌 변혁 실천성을 통하여 변화되어야 하는 것이다.

둘째, 오늘날 중국교회는 중국 사회의 개혁 개방에 대처해야 하는 과제를 갖는다. 중국의 개혁개방 정책 실시와 이에 따른 중국 사회의 변화는 수많은 사회 문제를 발생시키고 있다. 이러한 사회문제를 해결하고 이 정책의 희생자들을 치유하고 돌보는 선교가 필요하다. 또한편, 중국 당국이 개혁개방 이후 종교에 대하여 이해의 폭을 넓힘에 따라,31) 중국교회 역시 교회 (신도들)의 사고 (의식)를 개방 확대시켜야 한다. 특히 교회 (신도들)가 길들여져 온 집단적 사고 성향을 개인적 다원적 사고 방향으로 전환시키도록 도와야 한다.32) 이러한 사고의 변화를 통하여 중국 인민들의 삶 역시 변화를 겪을 것이다. 중국교회는 상기의 사회실천적 과제33) 이외에 이러한 문화 변혁적 과제를 수행하는 신학을 발전시켜야 할 것이다.

셋째, 중국 삼자신학은 교회의 급속한 양적 성장과 이에따른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것이다. 중국교회는 외적인 양적 성장에 대응하여 지도자 양성을 서둘러야 하고, 교회 등 시설부문을 확충하여야 한다. 그리고 교회 내적인 질적 성숙을 이룩해야 한다. 중국교회의 대부분은 1920년대 이래 서구 선교사들이 전한 신학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그러므로 중국교회는 이러한 서구신학적 잔재를 털어버리고 중국의 토착화된 신학을 창조하여야 한다. 특히 중국 특유의 교회론을 정립하여 서구화된 교회의 문제 (서구 기독교 문화 예컨대, 교회 건축, 예배 예전, 신학 등)를 변혁 과제로 삼아야 한다.34) 이러한 신학적 변화가 있어야만 중국교회의 정치적 삼자신학은 중국에서 진정으로 토착화된 삼자신학, 즉 중국적 문화변혁적 실천신학이 될 수 있을 것이다.

4. 결론:

 

문화변혁적 사회실천적 신학의 필요성


자본주의 하의 한국교회와 사회주의 하의 중국교회는 그들의 역사적 경험을 통하여 문화변혁적 실천신학의 입장에서 서로 교훈을 줄 수 있다. 그동안 중국교회는 삼자운동을 통하여 민족 정체성을 확립하여 정치적 차원에서 민족적 토착교회가 되었다. 중국교회는 인민들과 더불어 이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이를 통하여 인민들에게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사회의 개혁 개방과 교회의 양적 성장에 직면하여 복음의 건강성을 드러내는 사회비판과 문화비판을 실천하여야 할 것이다. 중국교회는 교회 안과 밖에서 진정한 복음을 실천하여야 할 과제를 갖게 되었다.

한국교회는 다양한 모습의 교회들이 존재한다. 한국교회는 민족정체성을 찾는 문화토착신학과 사회실천성을 찾는 민중신학이 상호 수렴되어 조화롭게 재창조될 필요가 있다. 이러한 한국적 문화토착적 실천신학은 몇 부문에서 사회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복음이 한국에서 알맞게 열매를 맺도록 할 것이다. 이것은 교회를 성숙하게 하여 자본주의 하에서 경쟁적으로 분열된 교회분파를 극복하게 할 것이다. 그리고 서구화되어 한국문화와 관계가 없는 듯이 보이는 교회성장적 복음주의 교회들을 비판함으로서 복음의 토착성과 실천성을 나타내도록 할 것이다. 또한 이러한 토착적 한국신학은 분단된 남북을 하나로 만드는 통일신학의 역할을 할 것이다. 이 신학은 점차 이질화되어 그 정도가 심화되어 버린 남한과 북한의 문화를 복음 (혹은 하나님 나라)의 빛에서 통합하고 변혁하면서 민족적 토착교회를 세우게 할 것이다.

본문주석


1). 본 논문은 한민족선교정책연구소 편, 『21세기 한국과 중국의 교회와 신학』, 한민족과 선교, 2001, 37-61에 같은 제목으로 실려 있다.

2). 이 용어는 복음이 문화변혁적이고 사회비판적인 과정을 통하여 토착화됨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본 논문에서 용어는 다르더라도 문화변혁적이고 사회비판적 실천적 의미가 있다면 이 용어와 같은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3). 다음의 책을 참조하라: 로버트 슈라이터, 신학의 토착화 (Constructing Local Theologies), 가톨릭출판사, 1991, 특히 39-46쪽.

4). Kenneth M. Wells, New God, New Nation: Protestants and Self-Reconstruction Nationalism in Korea 1896-1937, Allen & Unwin: Sydney, 1990.

5). Hee-Mo Yim, Unity Lost - Unity to be Regained in Korean Presbyterianism: A History of Divisions in Korean Presbyterianism and the Role of the Means of Grace, Peter Lang: Frankfurt am Main, 1996.

6). 유동식, 한국신학의 광맥: 한국신학사상사 서설, 전망사, 1982; 송길섭, 한국신학사상사, 대한기독교서회, 1987; 심일섭, 한국 토착화신학 형성사 논구, 국학자료원, 1995; 주재용, 한국 그리스도교 신학사, 대한기독교서회, 1998.

7). 그는 평양 숭실전문대학을 마치고, 당시 평양신학교 교장이던 Samuel A. Moffett의 재정 지원을 받아 1921-23년에 남경 금릉대학에 유학하여 문학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8). 박용규, 한국교회를 깨운 복음주의 운동, 두란노, 1998.

9). 미국 선교사들과 한국교회의 관계에 대하여 다음 논문을 참조하라: Suh David Kwang-Sun, "American Missionaries and a Hundred Years of Korean Protestantism", in: International Review of Mission, Vol. LXXIV No. 293 (Jan. 1985), 5-18.

10). 박종천, 상생의 신학, 한국신학연구소, 1991, 13-102.

11). 이 시기의 제국주의의 침략과 반기독교운동은 다음의 책을 보라: 이시악 외, 근대중국의 반기독교운동, 고려원, 1992.

12). 중국은 오늘날 漢족을 중심으로 56개 민족으로 구성된 국가이다. 본 논문에서 자주 등장하는 "민족" 혹은 "민족적" 이라는 용어는 식민주의, 제국주의 혹은 서구 기독교 등에 대하여 중국의 자주적 정체성을 말하는 차원에서 언급되는 광범위한 것이다.

13). 이 시기 운동들에 관한 간략한 서술은 다음의 책을 보라: W. 프랑케, 동서문화교류사, 단대출판부, 1976, 특히 145-190.

14). 이 시대의 토착신학자들에 관한 저작은 다음을 참조하라: Chu Sin-Jan, Wu Leichuan: A Confucian-Christian in Republican China, Peter Lang: New York, 1995; Winfried Glueer, Christliche Theologie in China: T. C. Chao 1918-1956, Guetersloher Verlagshaus: Gerd Mohn, 1979.

15). Philip L. Wickeri, Seeking the Common Ground: Protestant Christianity, the Three-Self Movement, and China's United Front, Orbis Books: Maryknoll, 1990, 40-42.

16). Wing-Hung Lam, Chinese Theology in Construction, William Carey Library, Pasadena, 1983.

17). 송영배, 중국사회사상사: 유교사상, 유교적 사회와 마르크스주의의 중국화, 한길사, 1986.

18). NCCCUSA (compiled), Documents of the Three-Self Movement: Source Materials for the Study of the Protestant Church in Communist China, 1963; 홍성현 편저, 중국교회의 전기와 새로운 중국의 신학, 한울, 1992, 37-91.

19). Chi-Rong Chen, Wu Yao-tsung, Ein Theologe im Sozialistischen China, Diss. (Heidelberg Universitaet), 1992.

20). Raymond L. Whitehead (ed.), No Longer Strangers, Selected Writings of Bishop K. H. Ting, Orbis Books: Maryknoll, 1989; 정광훈 (김종구역), 정광훈 문집: 사랑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도서출판 민중사, 1999.

21). 정광훈, 상게서, 350.

22). 상게서, 328.

23). 일반적으로 토착신학 (indigenous theology)은 상황신학 (contextual theology)보다 좁은 의미에서 쓰인다. 토착신학은 기존 문화와의 관계를 중시한다면 상황신학은 정치경제적 사회적 현실과 그 변혁을 강조한다. 그러나 본 글은 문화변혁적 토착신학을 상황신학보다 넓은 의미로 사용하고자 한다. 그 이유는 두 가지이다. 먼저, 삼자 운동의 강조점이 달라지고 있다. 초기 삼자운동은 해방과정에서 정치사회적 변혁적 의미를 강조 했다면 지금의 삼자운동은 교회와 신학 등 문화적 관계를 중시하고 있다. 둘째로, 일반적으로 정치와 경제 등 인간의 모든 삶의 부문은 넓은 의미의 문화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24). 정광훈 주교는 내용적으로 이미 이러한 개념을 쓰고 있다. 참조: Raymond Whitehead (ed.), op. cit., 131f.

25). 정광훈, 상게서, 142-155.

26). 상게서, 240-242.

27). 상게서, 467-476; Raymond Whitehead, op. cit., 185f.

28). Philip Wickeri, op. cit., 281-291.

29). 정광훈, 상게서, 470.

30). 상게서, 62-63, 287.

31). 장기성, 군중성, 민족성, 국제성, 복잡성을 종교의 5성으로 본다. 그러나 예사오원은 현실 차원에서 종교의 문화성과 사회성을 첨가하고 있다. 예사오원(葉小文), "최근 중국의 종교문제: 종교의 다섯가지 성격 (宗敎五性)에 관한 재탐구", 중국복음선교회, 중국교회와 선교, 제 5호 (1998. 12), 50-84.

32). Philip Wickeri, "전환기의 중국과 교회", 한아선교봉사회 편, 아시아와 한아선교, 한아선교봉사회, 1998, 30-31.

33). 김종구, "21세기로 향하는 중국기독교협회의 선교과제와 전망", 중국복음 선교회, 중국교회와 선교, 제 7호 (1999.9), 83-96.

34). 중국교회의 대부분은 농촌 지역에 존재한다. 그리고 이들을 인도할 지도자들이 신학적으로 충분히 훈련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농촌교회 신도들은 여러 민간종교적 요소와 미신적 요소를 가지고 있고, 심한 경우 잘못된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출처 : 은혜동산 JESUS - KOREA
글쓴이 : 임마,누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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