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획특집: 유석근 목사와 알이랑신학에 대한 조덕영의 천박한 비방 분석①
조덕영교수가 유석근목사를 세대주의자로 매도한 저열한 목적
이스라엘의 구원을 말하면 모두 세대주의인가?
유석근
(알이랑코리아 대표, 한국기독교상고사학회 선임연구원, 알이랑교회 담임목사)
롬 11:25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함을 면키 위하여 이 비밀을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
26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 기록된 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치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27 내가 저희 죄를 없이 할 때에 저희에게 이루어질 내 언약이 이것이라 함과 같으니라
여기서 바울은 장차 있을 한 신비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완고한 마음”은 분명히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이방인들의(행 13:48) 충족수가 정점에 이를 때가 되면 이스라엘의 완고한 마음은 사라질 것이고 종국엔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온 이스라엘”(26절)은 25절에서 “더러는”이라고 표현된 일부 사람들과는 대조적으로 하나님 백성의 전체를 뜻한다.
1.
영국의 저명한 신약신학자 F. F. 브루스는 그가 쓴 로마서 주석서(틴델주석 시리즈 「로마서」, 기독교문서선교회)에서 본문 26절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방세계의 대규모적 회심 다음에는
이스라엘의 대규모적 회심이 따라올 것이다.”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이르게 되면 온 이스라엘, 즉 신실한 남은 자가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게 될 것이다.”
“‘온 이스라엘’은 유대문학에서 자주 나오는 표현이다.
그것은 하나도 예외 없이 모든 유대인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를 의미하는 것이다.”
“온 이스라엘”(pas Israel)의 범위는 무엇인가? 그것은 집단적 의미에서 “전체로서의 이스라엘”을 의미한다. 그것은 F. F. 브루스가 지적한 바처럼 하나도 예외 없는 모든 유대인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집단적인 뜻으로 ‘이스라엘 전체’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것은 개개인의 총계를 뜻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이를 유대인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 구원받는다고 볼 필요는 없다. 이스라엘은 늘 전체적(국민적)으로 취급된다. 그러므로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는 말씀은 이스라엘이 전체적으로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장차 온 유대인들이 복음을 믿게 될 것임을 말해 준다.
로마서 11장의 교훈에 따르면 복음에 대한 이스라엘의 거부는 부분적이고 또한 일시적인 것이다. 당분간은 완악해져 있는 이스라엘 백성(국가적 차원의 이스라엘)이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돌아와 구원을 받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선택된 남은 자”(11:5)와 “완악해졌던 그 밖의 나머지 사람들”(11:7)로 분리되었던 구분은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이르게 되면 온 이스라엘, 즉 신실한 남은 자가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게 될 것이다. 바로 이것이 이스라엘의 장래 운명이다.
언제까지 이스라엘의 일부가 완고한 채로 있게 되는가? “이방인들의 충만함이 차기까지”이다. 유대인들의 완고함은 부분적이며 또 어떤 시기까지만 지속될 것인데, 그때가 되면 전국적인 회심이 있게 되고 마침내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게 된다. 이 유대인들의 회심은 일부 특수한 사람들만의 것이 아니라 비록 그 민족에 속하는 모든 사람의 회심은 아니라 할지라도 전 민족에 걸치는 회심이 될 것이다.
따라서 마지막 때의 큰 징표 중 하나는 이스라엘의 회복이다. 박형룡은 그의 『교의신학』 제7권에서 재림 전의 대사변들 가운데 하나로 이스라엘 전국의 회심을 든다.
“구약과 신약이 다 이스라엘의 장래 회심을 말한다(슥 12:10~14, 13:1~6, 고후 3:15,16). 특히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롬 11:26)는 말씀은 그들의 회심이 전체적일 것을 강조한다. 여기서 ‘이스라엘’은 영적 이스라엘을 가리킨 것이 아니다. 민족으로서의 이스라엘을 의미한다는 것이 전 문맥에서 명백히 표시되며 특히 25, 28절에 의하여 입증된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민족적으로 영적 구원을 얻을 때가 장차 이른다는 것을 의미한다.”(박형룡, 『교의신학』 제7권, 보수신학서적 간행회, 1973, 186~187)
그렇다. 이스라엘의 장래 운명은 멸망이 아니다. 한 민족이 개심할 때가 예정되어 있는 것이다. 역사의 마지막에 이스라엘은 하나님에게로 회복될 것이다. 이스라엘의 구원의 확실성은 성경의 말씀에 근거한다(26절 하반절, 27절). 그리하여 F. F. 브루스는 그의 로마서 주석서에서 이스라엘의 회심이 재림의 직접적인 전조가 된다고 확언한다.
롬 11:15 저희를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되거든
그 받아들이는 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사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리요
이 구절을 F. F. 브루스는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사는 것”이란 ‘부활’을 의미한다. 따라서 15절의 의미는 이스라엘의 회심이 부활의 직접적인 전조가 될 것이라는 뜻이다. 부활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일치할 것이다(성도들의 부활은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F. F. 브루스 저, 권성수 역, 「로마서」, 기독교문서선교회, 1985, p.239).
이처럼 F. F. 브루스도 박형룡과 마찬가지로 재림 전의 대사변들 가운데 하나로서 이스라엘의 회심을 든다. 이스라엘의 구원이 재림의 직접적인 전조가 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2.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유대민족도 오직 복음으로만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예수를 그들의 메시아로 믿는 믿음을 통하지 아니하고는 이스라엘이 구원될 만한 다른 방법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회심을 위해 그들에게도 복음을 전할 전도자가 꼭 필요하다. 왜냐하면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다(롬 10:17). 이것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이 없는 구원의 과정이다.
현대 신약신학계를 대표하는 학자인 G. E. 래드 교수 역시 이스라엘의 종말론적 구원을 확신하는 학자다. 하지만 그는 유대인들의 회심이 재림하시는 예수를 보면서 즉각적으로 일어난다는 세대주의자들의 이론은 배격한다. G. E. 래드는 “이스라엘의 완악성과 최종 구원의 신비”라는 문서에서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는 로마서 11장 26절의 약속은 장차 그리스도인들의 복음전도에 의해 성취될 것이라고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로마서 11장 말씀에 관한 한, 이스라엘의 구원은 이스라엘을 교회로 인도할 거대한 전도운동을 통하여 일어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유대인을 복음화 시킬 이방인 신자들에 대해서는 침묵을 하고 있다 …<중략>… 바울은 이스라엘의 구원이 어떤 방법으로 이루어질 것인지에 대해서 설명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다. 그것은 그들의 구원이 이방인의 구원과 동일한 기본적인 조건하에서 이루어지리라는 사실- 즉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히신 메시아로 믿는 믿음을 통해서 구원을 받으리라는 사실이다.” (『신약신학』, G. E. Ladd 지음, 이창우 옮김, 성광문화사, 1988, P. 801).
G. E. 래드 교수는 유대인들이 구원을 받으려면 그들도 이방인들처럼 예수를 구세주로 믿어야 하고, 그것은 이방인 신자들의 거대한 전도운동을 통해 일어날 것이라고 단언하고 있다. 지당하고 바른 교훈이다. 세대주의자들은 이스라엘의 구원은 그리스도인의 복음 전도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오심으로써 성취된다고 한다. 즉 예수님이 오시는 것을 보고 즉각 회심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세상을 구원하는 그 구원의 길이 ‘복음’인데, 복음의 권세로 안하고 반 물리적으로 하는 것이다. 공평하신 하나님은 유대민족에게만 그런 특혜를 주시지 않는다. ‘재림을 보고’가 아니라 ‘복음의 능력’으로 회심을 해야 한다. 이게 바른 신앙이다.
지금이 은혜의 때요 구원의 날이다. 유대인의 회심은 이 ‘은혜의 시대’가 종결된 이후에 오는 어떤 특별한 국가적(민족적) 구원의 형식을 띠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 오로지 하나의 공통된 구원에 대해서만 말하며(롬 1:16), 바로 이 하나의 구원이 모든 인종과 지역으로 확장되는 것이다. 유대인들도 그들의 짝이 되게 된 이방인들과 똑같은 발걸음으로 ‘은혜에 의한 택함 받은 자들’(롬 11:5) 속에 걸어들어 와야 하는 것이다.
현재 효력을 발휘하고 있는 그 ‘은혜의 수단’을 도외시하고는 유대인에게는 과거든 현재든 미래든 다른 아무 소망이 없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를 떠나서는 제2의 기회란 전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거기에는 ‘차별’(곧 아무런 차이점)이 없다(롬 3:22).
그러므로 로마서 11:26에 약속된 온 이스라엘의 구원은 G. E. 래드의 지적과 같이 이방인 신자들의 거대한 전도운동을 통해 실현될 것이다. 그런데 G. E. 래드 교수는 바울이 유대인을 복음화시킬 그 이방인 신자들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고 언급한다. 왜 바울은 유대인을 복음화시킬 그 이방인 신자들에 관해서는 침묵했을까? 사도 바울은 거기까지는 계시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가 이 사건의 경과 과정을 머릿속에 그려보거나 그 시점을 계산해 볼 수 있는 아무런 지시도 주지 않는다.
3.
그렇다면 과연 이스라엘은 언제 어디에서 복음을 가져간 이방인 신자들을 통해 복음화될 것인가? 그것에 관한 계시는 구약의 대선지자 이사야와 성경의 마지막 책을 쓴 신약의 대선지자 사도 요한이 받았다.
선지자 이사야는 사46:10~13, 41:25~27, 52:7, 55:1~9에서 마지막 때에 예루살렘으로 복음을 가져갈 이방인 백성에 관해 예언하였다. 이 구절들이 목적하는 진정한 의미에 관해 필자는 저서 “알이랑민족”에서 면밀한 주해의 과정을 거처 상세히 설명했다.
사도 요한은 계시록 7:1~8에서 이스라엘이 언제 어디에서 출동한 이방인을 통해 복음화될 것인가를 예언하였다. 요한계시록 7장 1~8절은 로마서 11장 26절에 기록된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는 약속의 구체적 성취의 때와 방법을 예언하고 있는 말씀이다. 마지막 때에 관한 계시의 책인 요한계시록에 역사의 끝에 회개하고 주님 앞에 돌아올 유대민족의 구원에 대한 계시가 없을 리 없다.
필자는 저서 『알이랑 고개를 넘어 예루살렘으로』에서 계시록 7:1~8은 바울이 예언한바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롬 11:26)는 약속이 구체적으로 언제 어느 곳의 이방인 신자들을 통해서 성취될 것인가를 계시한 말씀이라는 것을 자세히 설명했다.
순서대로 클릭
<사 41:25~27>, <사 52:7>, <사 46:10~13>, <사 55:1~9>, <계 7:1~8>
4.
고 하용조 목사(온누리교회) 역시 이스라엘의 회심과 종말론적 구원을 확신하고 적극적으로 가르치신 분이다. 그는 “로마서 강해 40 실패와 성공”에서 다음과 같이 역설했다:
“이스라엘의 구원은 온 인류의 구원이다. 따라서 이방인의 구원과 이스라엘 구원이 짝이 맞아야 역사의 종말이 온다. 구원의 완성이 온다. 이스라엘 선교, 이스라엘에 대한 성경적인 관점이 없으면 선교의 허무주의에 빠지게 된다. 이스라엘 선교가 끝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이스라엘에 대한 계획이다.”
도널드 거쓰리 교수도 그의 저서 「신약신학」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완전히 회복시킬 것이라고 설명한다. 월터 카이저 교수 역시 교회가 이스라엘을 대체했다는 대체신학(Replacement Theology)을 오류라고 비판하면서 이스라엘의 종말론적 구원에 관해 가르치는 학자이다. 이러한 신학자들을 전부 열거하자면 지면이 부족하다.
☞→▶ 교회가 이스라엘을 대체했다고 믿는 대체신학은 오류
☞→▶ 이스라엘을 못보게 만든 마귀의 대체신학, 하용조목사(롬11장-1)
그런데 앞서 언급한 F. F. 브루스, G. E. 래드, 도널드 거쓰리, 월터 카이저, 박형룡 박사 등 이스라엘의 회심에 관해 가르치는 이 모든 저명한 신학자들은 세대주의자가 아니다. 하용조 목사 역시 세대주의자는 아니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종말론적 구원을 가르친다 하여 그들을 죄다 세대주의로 규정하는 학자가 있다면 그는 양심이 없거나 아니면 세대주의가 뭔지 잘 모르는 3류 학자가 분명할 것이다.
필자 역시 이스라엘의 회심과 구원에 관한 책을 1990년 처음 출간한 이후 3권이나 썼지만 세대주의자는 아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회심을 가르친다는 이유로 유석근 목사를 세대주의자로 매도하는 인물이 있다. 그는 평택대학교(전 피어선신학교) 겸임교수라는 직함을 갖고 있는 조덕영 목사. 조 목사는 한민족의 기원을 셈족 욕단의 후예라는 주장은 세대주의에 기초한 억지라면서, 『알이랑 민족』이란 책을 통해 이스라엘의 종말론적 구원 방식을 자세히 논증한 유석근 목사를 세대주의자로 날조했다(2016년 5월31일).
5.
조덕영 목사는 대체신학(Replacement Theology)을 추종하는 인물이다. 대체신학을 신봉하는 자들은 이스라엘의 지위는 교회가 대체했다고 믿으므로 당연히 한 민족 이스라엘이 선민이라는 사실에 정당성을 부여하지 않는다. 한 나라와 민족으로서의 '선민' 이스라엘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들의 사상이다. 물론 이러한 신앙은 오류이다.
그런즉 조 목사가 하나님께서 감추어 두신 제2의 선민이 지구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이해할 리는 전혀 없다. 제1선민의 존재도 부정하는 인물이 제2선민의 존재를 인정할 리는 만무하다. 교회가 이스라엘을 대체했다고 믿는 그에게는 제1선민도, 제2선민도 전부 ‘사설’일 뿐이다.
그러나 사람이 눈에 보이는 겉사람이 있고 눈에 보이지 않는 속사람이 있듯이, 선택된 백성도 보이도록 겉으로 드러난 선민이 있고, 안 보이게 속으로 감추인 선민이 있다. 전자는 아시아 서쪽의 이스라엘이요, 후자는 아시아 동쪽의 코리아이다. 알이랑민족 한국인은 하나님이 나중에 쓰시려고 동방의 땅 끝에 감추어 두신 제2의 성민이다.
하지만 대체신학의 포로인 조덕영 목사에게 '선민'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교회가 이스라엘을 대체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조 목사는 최근 “알이랑(하나님과 함께)은 한국교회의 신앙 혼란만 부추기는 사설”이라는 제목의 문서를 유포하여 유석근 목사의 저서 「알이랑민족」에 수록된 내용을 사이비 교설이라고 비방하고 나섰다. 아주 오만하고 독선적인 작태다. 자기의 관점만 옳은가? 그 결과 조 목사는 거만하기 짝이 없게도 유석근 목사만이 아니라 추천의 글을 쓰신 다수의 교계 저명인사들을 싸잡아 모욕하는 방약무인(傍若無人)의 무례를 범했다. 「알이랑민족」은 지금까지 18판이 리프린트된 스테디셀러다. 이 책은 아래에 명기한 교계 인사 열 분들이 추천의 글을 쓰셨다:
최복규 목사(한국중앙교회 원로), 한화영 박사(트리니티신학대학교대학원 한국대학원장, 전 장신대 미주지역 총동문회장), 최성규 목사(인천순복음교회 담임 ․ 전 한국기독교총연합회 회장), 강갑산 박사(한영신학대학교 대학원장), 김선기 목사(전 침례신학대학 원어교수, 페트라성경원어연구원장), 안준배 목사(문화평론가 ․ 기독교문화예술원장), 손종태 목사(예수촌 교회 담임), 김석연 박사(뉴욕주립대학교 명예교수, 누리글선교센타 원장), 주영자 교수(이화여자대학교 음대학장), 안종숙 기자(신앙계 편집장)
☞→▶ "또하나의 선민 알이랑 민족" 추천의 글들 읽기
6.
유석근 목사와 알이랑신학에 대한 조덕영 목사의 천박한 비방질에 대해서는 본 기획특집에서 조목조목 연속기사로 자세히 다룰 것이다. 필자가 여기서 우선 지적하려는 것은 조 목사가 유석근 목사를 세대주의자로 매도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회심과 구원을 논하면 누구나 세대주의자인가? 조덕영 목사가 과연 조직신학을 전공한 신학자라면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누구보다 본인 자신이 잘 알 것이다.
만약 필자가 세대주의자라면 앞서 소개한 박형룡 박사, F. F. 브루스, G. E. 래드, 도널드 거쓰리, 월터 카이저, 하용조 목사 등도 모두 세대주의자가 될 것이다. 조 목사는 이들을 향해서도 세대주의라고 함부로 비방한 적이 있나? 놀랍게도 필자의 이러한 논박에 대해 조 목사는 논점에서 한참 벗어난 다음과 같은 궤변으로 응수했다:
“고 박형룡 박사나 고 하용조 목사의 뒤에 숨어... 고인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여 자신을 보호하려는 태도는
오히려 돌아가신 분들을 모욕하는 것이니 조심함이 옳다.”
이것이 과연 신학자의 글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월터 카이저 교수는 왜 누락시켰나? 그는 현존하는 학자이니, 고인이 아니기 때문인가? 그러면 유 목사는 월터 카이저, F. F. 브루스, G. E. 래드 교수도 자기 편으로 끌어들여 그들을 모욕했나? 이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조덕영 목사는 논지에서 이탈한 이런 궤변 대신 유 목사를 세대주의자로 지목한 것을 사과해야 옳았다.
7.
더욱이 조덕영 교수는 허위사실까지 적시하여 유석근 목사의 명예를 훼손했다. 아래는 조 목사가 근자에 유포한 “알이랑(하나님과 함께)은 한국교회의 신앙 혼란만 부추기는 사설”이라는 비방 문서에서 발췌한 것이다.
“기독교진리수호협회는 이 문제의 토론을 위해 유 목사에게 지속적 기회를 주었으나 매달 참석을 기피하더니 급기야 참석을 거부하고 필자의 실명을 거론하며 신학 토론이 아닌 고(故) 박형룡 박사나 고 하용조 목사의 이름 뒤에 숨어, 진지한 토론을 하려하지 않고 필자를 궤변의 조씨라 지칭하면서 인신공격의 태도를 취하고 있다.”
나는 조 목사를 “궤변의 조씨”라고 지칭한 적이 전혀 없다. 이것은 명백히 허위사실유포다. 뿐만 아니라 나는 소위 “기독교진리수호협회”라는 단체로부터 매달 참석해달라는 요청을 받은 적도 없다. 그러므로 “유 목사에게 지속적 기회를 주었으나 매달 참석을 기피하더니 급기야 참석을 거부하고...”라는 문구는 아전인수격 주장이며 허위사실유포다.
조덕영 교수는 의도적으로 유석근 목사의 인격에 흠집을 내었다. 이것은 인격살인이며 인신공격이다. 이게 목사이며 신학 교수가 할 짓인가? 양심이 있나? 조 목사의 거짓 증거는 인터넷상에서 떠돌고 있다. 엄연히 허위사실유포에 의한 명예훼손죄가 성립된다.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해 가르친다고 세대주의라고 비방한다면 그는 앞서 언급했듯이 양심이 없거나 아니면 가방끈이 짧은 3류 학자가 분명할 것이다. 그러나 조덕영 목사는 후자는 아닌 것 같다. 그는 평택대학교 겸임교수라는 직함을 갖고 있는 신학자가 아닌가? 그러면 조 목사는 왜 유석근 목사를 부당하게 세대주의자로 매도했는가? 유 목사의 사역에 부정적 이미지를 덮어 씌우려는 악의를 표출한 것이다. 야비하지 않은가? 조덕영 목사는 필자에게 정중히 사과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 앞에 예물을 드리기 전에 말이다.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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