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선교사 알렌에 대해 왜 논쟁이 계속되고 있을까? 이 글에서는, 그 문제를 제기하는 감리회 사학자들의 주장을 자세히 살펴보고 이를 반증하는 여러 자료를 제시하려고 한다. 이를 통해 '첫 선교사'라는 말의 개념과 기준을 규정하려고 한다. 한국교회사에서 '바르게 쓰기'와 더불어 '겸손하게 쓰기'도 중요하다. - 필자 주 
  
▲ 매클레이 목사(왼쪽)와 알렌 의사.

1. 감리교회는 1934년부터 매클레이 목사를 한국 개신교의 첫 선교사로 주장해 왔다

한국 감리교회는 희년(50주년)이었던 1934년, 백주년이었던 1984년에 이어 최근 일부 감독과 역사학자들(서영석·김칠성·이덕주)이 나서서 매클레이(麥利和 Robert S. Maclay, 1824~1907) 목사를 한국의 첫 선교사로 만들고 올해(2015년)가 한국감리회 131주년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2014년 6월 있었던 협성대 교수 서영석의 세미나 발표 보도문, 목원대 선교학 교수 김칠성의 논문, 그리고 지난 3월 18일 '감리교회 선교 131주년 아펜젤러 스크랜턴 모자 선교 130주년 1차 학술 심포지엄'에서 감리교신학대학교 교수 이덕주의 발표문 보도와 참석자들의 주장 내용을 살펴보자.

 

양주삼 총리사의 강변, 1934년

1934년 9월 장로회가 선교 50주년(희년)을 기념하기 전 한국 감리회는 그보다 3개월 앞선 6월 19일 감리'교회'('선교'가 아님을 강조하면서) 50주년을 기념했다. 양주삼 목사는 매클레이가 1884년 6~7월 서울을 방문했을 때 선교사로 "공식적으로 임명받아"(officially appointed) 왔고, 고종(조선 정부)으로부터 교육과 의료 선교를 "공식적으로 허락받아"(official permission) 한국 개신교 선교의 문을 열었기 때문에 그를 첫 선교사라고 주장했다. (Charles A. Sauer ed., Within the Gate [Seoul: YMCA Press, 1934], 3.) 양주삼은 자신의 이 주장이 억지가 아님을 보여 주려고 다음과 같이 매클레이 이전에 한국을 '방문했던' 선교사들인 귀츨라프와 토마스는 공식적으로 임명받은 적이 없다고 해석했다.

1934년 희년 기념식 연설에서 양주삼 감독은 다음과 같이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면서 감리회가 최초를 장식했다고 강조했다.

"과거 50년은 한국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 많았던 시기였으며, 이 시점에 감리회가 온 것은 가장 중요한 사건의 하나였다. 왜냐하면 감리회는 근대 한국을 만드는 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감리회는 다음과 같은 일을 했다. 최초의 남학교, 최초의 여학교, 최초이자 유일한 여자대학, 최초의 여자병원, 최초의 맹아학교, 최초의 유치원을 세웠고, 최초의 한국인 목사를 안수했으며, 최초의 여자 의사, 최초의 훈련된 간호원, 최초의 훈련된 유치원 교사, 최초의 여자 철학박사를 배출했다. 따라서 감리회 선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직접 전도함으로써 사람들에게 영적인 복을 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한국의 대부분의 '최초'들에 대한 명예를 가진다." [J. S. Ryang, "Chairman's Opening Address," Within the Gate, 4. 강조는 원저자.]

이 최초의 목록에서 우리는 왜 양 감독이 매클레이를 첫 선교사로 삼아야 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감리회 선교가 한국을 근대화한 주된 세력이라고 보기 위해서는 그 목록의 첫 자리에 매클레이가 첫 선교사로 자리 잡고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감리교회의 교세는 장로교회의 1/5 수준이었다. 과거의 찬란한 '최초'를 강조한 이유가 실은 어두운 현재와 미래에 있었던 것이다. 이는 최근 매클레이를 다시 불러내는 감리회 지도자들과 사학자들의 동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

 

서영석·김칠성·이덕주의 주장, 2014~2015년

서영석은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김영헌 감독의 주장을 지지한다.

"맥클레이 선교사는 1884년 3월 31일에 한국선교회가 조직된 뒤 한국 선교 지방 감리사로 임명된 이후 같은 해 6월 23일 미국 개신교 선교사 최초로 조선 땅을 밟았고, 1889년까지 한국 선교를 지도했다." (서영석: <기독교타임즈>, 2014년 6월 20일 자; <당당뉴스>, 2014년 6월 20일 자.)

김칠성은 논문 '한국 개신교 선교 역사의 시작은 언제인가?'에서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이러한 중대한 역사적 사실에도 불구하고, 매클레이가 한국 개신교 최초의 선교사로 인정받지 못하는 결정적인 원인은 매클레이가 한국에 거주(residence)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는 서영석은 2014년 6월 20일 감리교본부 선교국에서 개최한 한 세미나에서 '한국 선교의 시작을 매클레이로 봐야'하는 이유를, 교육, 의료에 관한 고종의 선교 윤허를 득함과 더불어, 초기 감리교 한국 선교를 위한 매클레이의 활동과 공헌을 그 예로 들고 있다. 즉, 매클레이는 1884년 3월 31일 미국 북감리교 한국선교회가 조직될 때, 한국 선교지방 감리사(superintendent)로서, 그리고 아펜젤러, 스크랜턴 등 초기 감리교 선교사들이 한국에 입국한 1884년 이후부터 1889년까지 계속해서 한국 선교를 위해 노력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비록 그가 일본에서 주로 활동했지만, 매클레이는 여전히 한국 개신교 선교를 위한 개척자요, 활동가였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좀 더 논의가 필요하다고 보여 진다." [김칠성, '한국 개신교 선교 역사의 시작은 언제인가?' <韓國敎會史學會誌> 38 (2014): 199.]

결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매클레이를 첫 선교사로 지지했다.

"한국 감리교의 초대 총리사였던 양주삼은 1880년대 한국에 온 선교사들 중에 로버트 매클레이를 첫 번째 개신교 선교사로 보고 있다. 왜냐하면 매클레이가 1884년에 고종으로부터 감리교를 포함한 모든 개신교 선교사들의 선교(의료, 교육)에 관해 공식적으로 허락을 받았기 때문이다. 특히 매클레이가 보여 준 한국 정부와 한국 사람들을 대하는 정중한 태도는 오늘날 한국 개신교회들에게 매우 긍정적인 교훈을 주기 때문에, 우리는 매클레이를 한국에 온 첫 번째 개신교 선교사라고 고려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위의 논문, 215.]

이덕주도 매클레이를 첫 선교사로 지지한다. "초대 총리사를 지낸 양주삼 목사의 논문을 근거로 매클레이가 정주하지는 않았지만 정식으로 인정받은 최초의 선교사임을 인정하고 있다고 전했다." (<당당뉴스>, 2015년 3월 18일 자; <기독교타임즈>, 2015년 3월 18일 자.)

 

2. 나의 반론

 

1) 귀츨라프: 그는 화란선교회 소속으로 있다가 1828년 법적으로 선교가 금지된 중국 선교를 위해 독립 선교사가 되었으므로, 어떤 선교회가 특정 지역으로 '공식적으로 파송'하는 선교사가 아니었다. 근대 선교는 교회 선교사, 선교회 선교사에 이어 독립 선교사로 발전하고 있었는데, 귀츨라프는 독립 선교사의 선구였다. 또한 그는 토착 선교의 선구였다. 따라서 교회나 선교회 선교 입장에서 보면 그는 '괴짜'였다. 또한 1832년 서해안 방문이 비록 동인도회사의 무역 탐사 여행을 위한 '사업'과 연관이 있었다고 하지만, 당시 선교 여행을 위한 선박 수단은 그런 비즈니스 선박밖에 없었다. 1883년 개항이 되고 나가사키-부산-제물포로 운행하는 기선이 있던 시절과 달랐다. (이는 토마스에게도 해당된다.) 정기 항로가 개설되기 전, 선교 자유가 없기 전, 중국 선교는 대개 동인도회사 선박이나 아편 무역선을 이용하는 수밖에 없었다. 귀츨라프는 고대도를 비롯한 서해안에서 한국 실정을 탐사하고 성경을 반포하고 미래 선교 지부를 제주도에 설치해야 한다고 제안하는 등, 정상적인 선교 여행·방문을 했다. 선교의 자유가 없는 1830년대 초 조선에서 육지에 상륙하면 체포되어 사형을 당할 수도 있는 상황에서, 아직 외국인 선교사가 한 명도 없는 조선에 '공식 파송'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선교회의 공식 파송이 있어야 주재 선교사라는 개념은 교단이나 선교회 선교사의 경우에 해당한다. 귀츨라프는 독립 선교사로서 한국을 방문하고 선교했다. 그러나 방문 선교사라는 점에서는 매클레이와 다름이 없다.

2) 토마스: 그는 지푸에 있던 스코틀랜드성서공회(윌리엄슨 총무)의 임시 권서로 '공식 임명'을 받고 한국에 파송되었으며 백령도와 평양에 왔다. 따라서 그는 선교사로 한국을 방문했다. 그러나 그가 내한한 첫 정식 선교사는 아니며 방문한 선교사였다. '순교' 문제는 다른 주제이므로 생략한다.

  
▲ 귀츨라프 선교사(왼쪽)와 토마스 선교사.

3) 매클레이: 매클레이는 한국 방문에 대해 현재 알려진 것으로는 6개의 글을 남겼다. 첫 두 글은 서울 방문 당시에 쓴 글로, 1차 자료로 중요하다. 끝의 세 기고문은 1896년에 쓴 글로 서울 방문 후 12년이 지난 시점에 회고한 글로, 역사적 사실과 해석을 가미한 글이다.

① Maclay to Goucher, July 3, 1884 (Oak, Sources of Korean Christianity, 2004, 42)
② Missionary Review (Nov 1884) [Maclay to Reid, July 1884 발췌 소개]
③ Maclay to Ohlinger, Dec. 17, 1892 (Oak, ibid., 43)
④ "Korea's Permit to Christianity," Missionary Review of the World (April 1896): 287~290.
⑤ "A Fortnight in Seoul, Korea, in 1884," Gospel in All Lands (Aug. 1896): 354~360.
⑥ "A Fortnight in Seoul, Korea, in 1884," Gospel in All Lands (Nov. 1896): 498~502.

(②, ④, ⑤, ⑥은 이만열, <한국기독교수용사연구>, 1998, 146~173쪽에 수록.)

이 글들을 바탕으로 감리회 역사학자들의 견해를 검토해 보자.

 

공식 임명의 문제: 매클레이는 한국 선교사로 임명된 적이 없다

1884년 6월 매클레이를 한국 선교사로 공식 임명하고 파송한 단체가 있는가? 없다. 1884년 그의 한국 방문을, 이후 미국 북감리회 해외선교부 한국선교회 출발이라고 본 적이 있는가? 없다. 많은 공식 문서는 1885년을 그 기년으로 보며, 특히 1890년대 이후 연례보고서 첫 줄은 "한국선교회는 1885년에 시작되었다"로 시작한다. 1884년 그는 한국 선교사로 공식 임명받지도 않았고, 뉴욕 선교부의 파송도 받지 않았다. 선교부에서 한국 선교가 시기상조라고 거절하자, 가우처는 개인적으로 1883년 11월 16일 편지로 매클레이에게 한국 방문을 부탁했고, 매클레이는 한국으로 선교 '탐사 여행'을 갔다. 곧 귀츨라프처럼 한국 선교를 탐사하고 선교의 허락을 요청하기 위한 방문이었다. '공식 임명' 운운은 양주삼의 역사 왜곡이었다. 그는 장로회와 같이 시작한 감리회가 1934년에 와서 장로회에 비해 1/5의 교세밖에 되지 않는 상황을 약간이나마 타개해 보려고, 장로회와 같은 해에 선교가 시작되었을 뿐만 아니라 더 앞선다고 강변했다. 50년 동안 누구도 주장하지 않던 것을 그가 지어냈다.

특히 서영석은 "맥클레이 선교사는 1884년 3월 31일 한국선교회가 조직된 뒤 한국 선교 지방 감리사로 임명된 이후 같은 해 6월 23일 미국 개신교 선교사 최초로 조선 땅을 밟았고"라고 하여, 1884년 3월 31일 한국선교회를 조직한 후 '같은 해' 6월에 서울을 방문한 것처럼 말하고 있으나, 일본에서 한국선교회를 조직하고 첫 한국선교회 연회를 연 것은 아펜젤러와 스크랜턴이 일본에 온 후인 1885년 3월 5일이었다. 그나 기자가 연도를 착각한 것일까? 아니면 조직 후 같은 해에 파송된 것처럼 보이게 하려고 1885년 3월을 1884년 3월로 바꾸었을까? 김칠성도 1884년 3월 조직을 그대로 수용하고 있다. 다시 말하지만 1884년 3월 일본에서 조직된 한국선교회가 매클레이를 파송한 것이 아니라, 가우처 개인의 요청에 의해 매클레이는 탐사 여행을 갔다. 또한 서영석은 매클레이가 1889년 일본에 남아 한국 선교를 지원했다고 했는데, 이것은 기자가 잘못 옮긴 것으로 보인다. 매클레이는 1887년 은퇴했고, 캘리포니아 파사데나에 세워진 매클레이신학교(형이 상원의원으로 설립자, 현 클레어몬트신학교로 발전) 학장으로 봉사했다.

무엇보다 미국 감리교회 공식 역사에서 1884년 6월 서울에 간 매클레이가 한국 선교사로 공식적인 임명을 받고 간 것이 아니라 방문했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On June 24, 1884, Robert S. Maclay, pioneer Methodist missionary in China and founder of the Japan Mission, called at the United States Legation in Seoul. General Lucius H. Foote, first American minister to Korea, received Maclay cordially and procured a small Korean house near the legation for his use. His party included his wife, an interpreter, and a cook. He had with him two pack horses for carrying baggage.

Maclay had not been appointed as missionary to Korea but commissioned to make a tour of investigation. (중략) He arrived at Seoul on June 24, 1884, (중략) On July 3 he was notified by Kim Ok Kuin of the foreign office that the king approved the beginning of school and hospital work by the mission. [Wade C. Barclay, History of Methodism. Vol. II (New York: Board of Mission, Methodist Church, 1950), p. 741. 밑줄은 필자 표시.]

매클레이는 한국 선교를 타진하기 위해 방문했을 뿐이지 선교사로 파송, 임명되지 않았다.

 

고종 윤허가 '공식 허락'이었나? 그 의미는 무엇인가?

첫째, 매클레이는 고종을 알현하지 않았다. 이는 고종의 '정중한 허락'(자료②), '호의적 반응'(자료④), '기독교에 대한 왕의 허락'(자료⑥)이 김옥균을 통해 간접적으로 전달되었음을 말한다. 당시 김옥균은 매클레이에게 선교 사업에 대한 강력한 관심과 희망을 표하는 한편 위험을 암시했으나, 매클레이는 이를 신중한 태도로 좋게 여겼다. 그러나 5개월 후 갑신정변이 일어났고, 매클레이는 김옥균의 주선을 정적에 대항하기 위해 서울에 외국인 세력을 증가시키기 위한 행동이었다고 해석했다.(자료⑥) 서영석의 말대로, 고종은 서구 교육을 수용하기 위해 미국 선교사를 불러들일 필요가 있었다. 당시 <漢城旬報(한성순보)>는 개항한 항구도시들을 방역할 근대 위생 시설과 병원의 필요성과 이를 담당할 의사들의 양성이 시급함을 논하고 있었다. 그러나 재정이 부족한 조선 정부 입장에서는 교육과 의료 방면에서 선교사들을 이용하는 것이 한 방편이 될 수 있었다.

둘째, 매클레이는 고종으로부터 문서로 된 선교 허가서를 받지 않았다. (그런 언급이 전혀 없다.) 매클레이가 7월 3일 김옥균을 만나 고종의 반응을 듣고 이를 가우처에게 보고할 때 매클레이는 "the government would favor our enterprise."(자료①)로 해석했다. 그 문서에는 허락·승인·윤허라는 말이 없었다. 그 다음 날 다시 김옥균을 만난 후, 매클레이는 고종이 선교 사업을 정중하게 '허락·승인'했다고 편지했다. 그리고 개신교에 대한 반대는 없을 것이며 선교사들이 가는 길에 아무런 장애도 없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자료②) 그러나 사실 고종의 호의는 느슨한 형태의 허락으로, 김옥균의 말처럼 세부 사항이 없었다. 만일 그것이 수준 높은 정부의 '공식적인 허락'이 되려면, 미국 공사 입회하에 문서를 작성하고 외부 대신이나 고종과 미국 공사가 서명한 문서를 상호 교환하는 형식을 갖추어야 했다.

셋째, 고종의 호의에도 알렌이 서울에 도착한 1884년 9월의 상황은 공식적으로 "선교사의 입국을 허락하지 않았다." ("Our First Letter from Korea," Foreign Missionary [December 1884]: 303. 알렌이 1884년 10월 1일 서울에서 쓴 편지 전문.) 그러므로 푸트 공사는 알렌을 조선 정부에 미국공사관 의사로 소개했고, 정부는 이를 묵인하는 타협을 했다. 곧 매클레이가 김옥균으로부터 받았다는 '허락'은 공식적인 효력을 가진 것이 아니었다.

넷째, 1934년 50주년 행사 때 배재학교 연극에서는, 김옥균·윤치호·매클레이·푸트가 미국공사관에서 선교 윤허를 받기 위해 미국공사관에 모여 한자리에서 의논하는 것으로 묘사했으나(E. Wagner, "At the Hermit Gate, in Within the Gate", appendix, p. 8), 이는 연극일 따름이었다. 매클레이 글에 그런 장면은 없다. 매클레이는 요청 편지를 김옥균에게 전달했고, 김옥균은 매클레이에게 고종의 호의를 전달했다.

다섯째, 정리하자면 이 프로젝트를 추진한 김옥균이 1884년 12월 갑신정변 실패로 사라지고 청군이 서울을 장악하자, 1884년 12월부터 1885년 4월 초까지 상황은 그 '공식적인 선교 윤허'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1884년 7월 2일 고종의 '윤허'는 학교와 병원 사업에 한정된 것으로 '복음을 전하는' 전도의 자유는 아니었다. 스크랜턴과 아펜젤러는 알렌이나 헤론이나 언더우드처럼 한국인에 대한 직접 전도 없이 첫 해를 보내야 했다.

 

고종의 윤허가 선교 장애물을 제거하고 선교의 문을 열었나?

다음 연표는 1884년에 일어난 사건들이다.

3월: 뉴욕의 맥윌리엄스(McWilliams), 한국 선교 위해 6,000달러 기부.
4월: 북장선교부, 헤론(John W. Heron) 의사를 첫 한국 선교사로 임명.
6월 8일: 상하이의 알렌 의사, 엘린우드 총무에게 서울 전임 요청 편지 보냄.
6월 24일: 매클레이, 서울 도착.
7월 3일: 매클레이, 교육 의료 선교 허락받음.
7월 21일: 엘린우드 총무, 알렌 의사에게 한국 전임을 허락하는 전보 발송.
7월 28일: 북장선교부,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를 한국 선교사로 임명.
8월: 일본의 해리스(M. C. Harris) 선교사, 오하이오 클리블랜드 방문. 스크랜턴과 스크랜턴 대부인에게 한국 선교 권함.
9월 22일: 알렌, 서울 도착.
9월 23일: 알렌, 미국공사관 의사로 임명.
10월 26일: 알렌, 가족 데리고 서울 재도착. 첫 주재 개신교 선교사가 됨.
12월 4일: 갑신정변.

매클레이 한국 방문 이전에 이미 북장로회는 중국의 헌터와 리드의 한국 파송 요청을 거절한 후, 1884년 4월 한국에 파송할 첫 선교사로 헤론 의사를 임명했다. 이어 1884년 6월 8일 자 편지로 한국행을 요청한 알렌(Horace N. Allen) 의사의 서울 전임을 전보로 허락했다. 즉 매클레이가 서울에 와서 고종의 허락을 받기 약 한 달 전에 알렌은 그런 요청을 했다. 이어서 7월 말 언더우드를 임명했고, 9월 8일 선교부 실행위원회는 한국선교회 설립을 승인했다. 매클레이의 노력은 북감리회의 한국 선교의 문을 연 것은 사실이지만, 북장로회의 한국 선교는 다른 경로로 열렸다. 한미조약(1882)과 그리피스의 책 출판(1882)으로 한국에 대한 관심이 일어났을 때, 1883년 일본에서 세례를 받은 장로교인 이수정의 '마게도니아인의 요청' 편지가 한국 선교를 고려하도록 만들었고, 중국의 여러 선교사들(헌터, 리드, 헨더슨 등)의 노력이 있은 후 알렌의 한국 지원으로 그 문이 열렸고, 알렌이 첫 주재 개신교 선교사가 되었다.

 

소결론

1) 1934년 양주삼이 언급한 공식 임명, 공식 허락은 원자료에 없다. 감리회가 장로회에 대해 가진 열등감은 역사 미화로 극복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런 태도가 1984년에 표출되었다가 다시 2014년에 표출되었다.

2) 매클레이는 한국 선교사로 임명되거나 파송된 적이 없으며 방문자였다.

3) 매클레이가 고종으로부터 받은 선교 허락은 문서로 된 공식적인 것이 아니라 구두로 전해진 제한적인 승인이었다. 김옥균의 프로젝트로서 그가 갑신정변으로 몰락하면서 상당 부분 효과가 사라졌다.

4) 매클레이가 받은 그 허락은 북감리회 한국 선교를 개시하도록 만들었으나, 북장로회 선교는 다른 경로로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 내한한 초기 개신교 선교사들(1887년 초, 서울, 촬영자 스크랜턴 의사). 앞줄 왼쪽부터 엘러스 간호원, 알렌의 딸, 알렌 의사, 엘리스 아펜젤러, 알렌 부인. 뒷줄 아펜젤러 부부, 스크랜턴 부인, 언더우드, 헤론 부부, 스크랜턴 대부인. 엄연히 알렌 의사 부부가 이 자리에 있다. (사진 제공 옥성득)

3. 왜 감리회 역사가들은 알렌을 첫 개신교 선교사로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가?

 

이는 매클레이를 첫 선교사로 보려는 인식과 짝을 이루는 동전의 뒷면과 같다. 앞의 글에서 매클레이가 공식 임명된 첫 선교사가 아니라 방문한 선교사임을 밝혔으므로, 이 글은 왜 알렌 의사가 첫 공식 (주재) 선교사인지 당시 1차 사료로 밝히려고 한다. 목원대 김칠성 교수가 2014년 발표한 논문 '한국 개신교 선교 역사의 시작은 언제인가?' <韓國敎會史學會誌> 38 (2014): 181~216쪽을 먼저 살펴보자. (*'알렌'보다는 '앨런'이 발음대로 적은 표기이지만, 흔히 알렌으로 알려져 있으므로 이 글에서는 '알렌'으로 통일한다.)

김칠성의 주장 (위의 논문 199~203쪽)

1) "알렌이 다른 개신교 선교사들과 비교해 볼 때 가장 먼저 한국에 거처를 마련한 최초의 거주자(first resident)임에는 틀림없다." (199)

2) "그러나 알렌을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로 볼 것인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쟁적이다." (200) "그가 보여 준 삶의 행적들 가운데 몇 가지 사항들은 어떤 사람들로 하여금 그의 선교사적 정체성을 의심하게 만드는 여지를 남겼는데 필자는 여기서 그중에 두 가지만 지적하겠다. 첫째, 알렌은 자신이 선교사임을 밝히지 않았다. (후략)" (200)

3) "둘째, 선교를 위해 직접적으로 활동했거나 공헌했다는 뚜렷한 증거가 없다는 사실이다." (201) "제중원 설립으로 서양 의학을 한국에 소개하고 의료 부문의 발전에 기여한 점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선교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었다고 보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202) "정리해 보자면, 알렌은 미국 북장로교의 파송을 받은 한국 최초의 거주자 선교사였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지만, 그는 초기 3년 동안만 선교사 타이틀을 유지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선교사 신분을 떳떳하게 밝히지도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알렌이 선교 사역을 직접 하거나 선교를 위해 크게 기여했다는 뚜렷한 증거를 찾을 수 없다."

4) 바로 이런 이유들 때문에 캐나다 출신이면서 초기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로 활동했던 제임스 게일(James Scarth Gale, 1863~1937)은 "알렌의 이름을 선교사 명단에서 빼야 한다. 왜냐하면 그는 한국에 들어올 때부터 1905년 그의 뚜렷한 업적을 이룰 때까지 계속해서 외교관(diplomatist)이었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J. S. Gale, Korean in Transition, 163.)

5) "민경배는 한국 장로교가 희년(50주년)을 기념했던 1934년까지 알렌을 한국 선교의 시점으로 보았지만, 고종 앞에서 자신의 선교사 신분을 밝히지 않은 일이 선교사들 사이에서 문제가 되어 그 후부터는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상륙한 1885년 4월부터 한국교회 역사가 기산된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민경배, '한국 근대화와 알렌의 선교', 한국기독교선교130주년대회위원회, '초기 세 선교사의 삶과 지역 - 한국 기독교 선교 130주년 대회 출범 예배 및 기념 포럼'(자료집, 2014), 33.]

6) "장로교 선교사 클라크(Charles Allen Clark)는 좀 다른 입장을 보이고 있다. 즉, 클라크는 장로교 희년(50주년) 기념 자료집에 실려 있는 'Fifty Years of Mission Organization Principles and Practice'라는 자신의 글에서 (중략) '한국 내의 모든 (장로)교회들이 하나의 기관으로 연합하고자 하는 첫 번째 시도는 1889년에 있었는데, 그때는 (장로교) 첫 번째 선교사가 한국에 도착한 지 4년 후였다.' [C. A. Clark, “Fifty Years of Mission Organization Principles and Practice,” The Fiftieth Anniversary Celebration of the Korea Mission of the Presbyterian Church in the USA. June 30-July 3, 1934, eds. Harry A. Rhodes and Richard H. Baird (Seoul: YMCA Press, 1934), 62.]라고 한다. 즉, 장로교의 첫 번째 선교사는 1889년보다 4년 전인 1885년에 도착했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1884년도에 처음 한국에 도착한 알렌이 아닌 언더우드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즉, 비록 1934년에 한국 장로교 선교 50주년을 기념하지만, 장로교 첫 번째 선교사를 '알렌'이 아닌 '언더우드'로 보는 시각이 당시에도 존재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클라크의 글을 통해서 짐작할 수 있다." (203)

 

나의 반론

번호 순서대로 하나씩 반론해 보자.

1) 알렌이 첫 거주 선교사였다. 여기엔 이론이 있을 수 없다.

2) 공사관 의사라는 정체성 문제: 1884년 9월 22일 서울에 도착한 알렌이 23일 미국공사관 의사로 임명을 받고, 푸트 공사와 함께 고종을 알현하는 자리에서 '공사관 의사'로 소개되었다. 그 이유는 앞에서 밝힌 대로 선교사의 입국이 허락되어 있지 않은 상황이었으므로, 푸트의 적절한 충고에 따라 자신이 선교사로 활동하는 게 아니라 공사관과 외국인을 위한 의사로 활동할 것이라고 지혜롭게 말한 것이다. 조선 정부 입장에서는 서양 의사가 필요하지만 선교사는 받아 줄 수 없기 때문에, 공사관 의사라면 수용 가능했다. 선교의 자유가 없는 상황에서 있을 수 있는 이러한 정치적 타협을 놓고, 알렌이 그 자리에서 선교사라고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선교사로 보기 어렵다는 말은 단순한 해석이다.

3) 선교사로서 알렌의 활동: 미국북장로회 해외선교부 한국선교회의 공식 선교사로서 알렌의 활동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선교 부지 매입. 개척 선교사의 주요 일 중의 하나가 선교 부지 부동산 구입이다. 둘째, 선교회 회의 참석. 1885년 4월부터 북장 한국선교회 의장, 회계직 겸직 후, 1885년 6월 회계직을 언더우드에게 넘겨주었다. 이후 정기 회의에 참석하여 선교 사업과 정책을 논의했다. 셋째, 의료 선교. 장소는 정부 병원인 제중원이지만, 상업적인 의료 행위가 아니었다. 치료 대상은 대개 일반 주민으로 그의 의료 사업 결과 일반 시민이 미국 선교사를 만나고 개신교에 대한 인식이 변화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직접 전도는 아니었으나, 인도주의와 기독교 사랑의 표현으로서의 선교, 넓은 의미의 선교였다. 선교의 자유가 없는 상황에서 이것은 스크랜턴 의사의 첫 해와 비슷했다. 한국어를 모르는 상황에서 이루어진 의료 행위는 알렌이나 스크랜턴이나 전도라기보다는 기독교 사랑의 표출이요, 직접 전도를 위한 준비였다. 넷째, 제중원 활동으로 선교사 입국이 어려운 상황에서 다른 선교사들(언더우드, 헤론, 스크랜턴, 엘러스, 언더우드 부인)이 서울에 정착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다섯째, 3년간만 선교사로 활동했다고 해도 그 3년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4) 게일의 알렌 평가(1909): 게일의 아내인 헤론 부인은 1890년 헤론 의사 사망 이후 알렌과 사이가 좋지 않았고 감정적으로 화해하지 않았다. 따라서 게일과 알렌의 관계도 썩 가까울 수 없었다. 김칠성이 논문 202쪽에 인용한 게일의 말(1909)은 다음과 같다.

"While the Hon. H. N. Allen, M. D., as a medical missionary opened the work, in the mind of the writer he is disassociated from the missionary list. He was a diplomatist, from his first entry till the close of his distinguished career, in 1905. His name stands high in Korea, honored and beloved by native as well as foreigner, for he served many years in behalf of Americans and this people faithfully and well." [J. S. Gale, Korean in Transition (New York: Laymen's Missionary Movement, 1909), 163.]

게일은 알렌이 비록 의료 선교사로 선교 사업의 문을 연 것은 인정했으나, 1887년 이후 1905년까지 18년간 외교관으로 활동했으므로, 그의 한국 행적에 대해 외교관으로서 공은 인정했으나 정규 선교사로는 간주하지 않았다. 인용 부분 번역은 "필자 생각에 그(알렌)는 선교사 명단에 들어 있지 않다(나라면 그를 선교사 명단에 올리지 않는다)" 정도가 좋을 듯하다. 그 다음 단락 첫 문장이 "But of missionaries proper, Underwood and Appenzeller were the clerical, and Heron and Scranton the medical"이기 때문이다. 곧 게일은, 이 네 사람은 제대로 된 정규(proper) 선교사이지만, 알렌은 외교관에 더 가깝다는 것이다. 당연히 그랬다. 선교사 생활 3년 대 외교관 생활 18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의 생애 전체가 아니라 첫 3년에 대한 것이며, 이 점에서 게일도 알렌이 의료 선교사로서 선교 사업의 문을 연 공은 인정했다.

여기서 우리는 게일이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이해하기 위해,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정규 선교사'가 무엇을 의미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것의 완전한 의미는 '죽을 때까지 평생 전임으로 헌신한 선교사'를 의미했다. 그것은 결혼과 마찬가지로 일생을 걸고 선교부와 계약하는 관계로, 선교부는 선교사와 그의 가족의 생계와 안전을 책임지는 대신, 선교사는 평생 헌신하고 선교부의 정책을 따르며 선교부의 승인하에 안식년 등을 가져야 했다. 죽음만이 그 관계를 무효화할 수 있었다. 따라서 개척 선교사에게 요구되는 가장 중요한 조건은 첫째 건강, 둘째 30세 이전의 나이였다. 서른 이전이라야 건강하고 새 언어를 배우고 새 문화에 보다 쉽게 적응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Martha Huntley, To Start a Work (Seoul: Presbyterian Church of Korea, 1987), 69.]

따라서 ①선교지 도착 후 몇 년 안에 적응하지 못하고 떠나거나 ②사역을 하다가 중간에 그만두고 다른 직업으로 가거나 ③30대에 일찍 사망했을 경우 온전한 의미의 선교사로 인정되지 않았다.

한국 초기 선교사 중 한국까지의 여행비 등 선교부 자금만 낭비한, 가장 비판을 받은 경우인 ①에 해당한 자는, 1888년 가을에 내한하여 1년 만에 떠난 파워 의사, 1889년에 내한했으나 몇 개월 후 떠난 가드너와 그 여동생이었다. ② 때문에 망각된 선교사는 목사 스크랜턴 의사였다. 그는 1885년 내한하여 1907년 북감리회 선교회를 떠났는데, 20년 사역에도 선교회는 그를 정규 선교사로 인정하지 않았다. (독신 여자 선교사가 중간에 다른 선교회 소속 선교사와 결혼하여 갈 경우 이해는 했으나 선교부 입장에서는 큰 손해이므로 좋아하지는 않았다.) ③에 해당하는 첫 선교사는 헤론 의사였다. 5년 사역 후 사망했기 때문에 그도 잊히고 그동안 별로 거론되지 않았다.

알렌 의사는 사역 3년 만에 외교관으로 변신했으므로 ②의 대표적인 사례였다. 한국 선교 25주년을 앞두고 20년 사역의 스크랜턴마저 정규 선교사로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에서, 3년간 선교한 알렌을 두고 게일이 정규 선교사 목록에 올리지 않은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김칠성 교수는 게일의 말을 인용하여 알렌의 선교사 정체성을 의심하고 있다. 그렇다면 동일한 기준을 감리교회의 매클레이에게 적용해 보자. 그는 선교지에 거주하지도 않았고, 한국 선교에 헌신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장로교회의 알렌에 비해 정규 선교사가 될 신용 점수가 전혀 없다. 어떤 사실을 비교 평가할 때 한 사람에게만 적용하고 다른 사람에게 적용하지 않는 것은 바로 팔이 안으로 굽기 때문이다.

5) 민경배의 오류(1982): 알렌이 선교사가 아니라 공사관 의사라고 한 것 때문에, 언더우드가 문제를 삼았다고 밝힌 첫 글은 민경배 교수의 대표작인 개정판 <한국기독교회사>에 나온다. 민경배 교수의 글을 보자.

"언더우드가 '언제부터 사실상 한국에서 선교가 시작되었는지 명확하게 날짜를 결정하기는 어렵다'고 했을 때, 다분히 그는 알렌의 불명료한 태도를 맘에 두고 이런 말을 한 것이 확실했다." [민경배, <한국기독교회사>(대한기독교출판사, 1982), 150쪽.]

그런데 민경배는 1908년 언더우드의 글을 오역한 후 인용했다. 영어 원문을 보자.

… Dr. Allen arrived in September, 1884, procured property, and settled in Seoul, next to the U. S. Legation.

First Period: wide seed-sowing. It is not easy to clearly mark out any periods in Korean mission work. From the very beginning, we have been permitted to see results, and the work has been steadily progressing with an ever-increasing momentum up to the present time. [H. G. Underwood, The Call of Korea (New York: F. H. Revell, 1908), 134.]

인용한 문장을 번역하면 "한국 선교 사업에서 어떤 시기를 명확하게 구분하는 것은 쉽지 않다"가 된다. 그 다음 이어지는 말에서 보듯이, 다른 선교지에서는 10년 가까운 준비기를 거쳐 복음을 전파하고 이어서 개종자가 나오는 단계로 넘어갔기 때문에 1기(준비기)가 명확했으나, 한국의 경우는 "1기: 광범위한 파종기"가 되었다는 뜻이다. 이 문장은 앞의 알렌을 언급한 문단과 다른 새 문단이다. 민경배 교수는 이 문장을 "언제부터 사실상 한국에서 선교가 시작되었는지 명확하게 날짜를 결정하기는 어렵다"라고 잘못 번역한 후, 언더우드가 "알렌의 불명료한 태도를 맘에 두고 이런 말을 한 것이 확실했다"고 잘못 단정했다. 심각한 오류이므로 수정해야 한다.

6) 클라크: 김칠성 교수가 이 한 마디를 끄집어내서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1934년 50주년 기념 논문집이나 그 전후에 나온 수많은 다른 글들은 무시한 채, 모래사장에서 조개껍질 한 개를 들고 나오는 격이다. 그리고 이 조개껍질도 알렌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인용된 부분은 교회의 자급과 연합을 말하는 부분이므로, 의료 사역이 아닌 전도 사역, 곧 목회 선교사의 활동과 교회의 자급과 장로회 선교회들의 연합 사역을 위한 공의회 조직을 다룬다. 따라서 첫 목회 선교사인 언더우드가 온 1885년에서 4년 후에 공의회가 조직되기 시작한 것을 말한 것뿐이다. 50주년 기념 연설문들을 읽어 보면 이미 앞에서 알렌을 첫 선교사로 자세히 밝혀 놓고 있다.

 

추가 설명

 

가. 내한한 공식적인 '첫 선교사'의 개념

1) 방문 선교사와 주재 선교사로 구분하고, 후자의 첫 선교사를 내한한 첫 선교사로 한다.

2) 임명일보다 임명지 도착을 기준으로 한다. 임명지란 초창기에 모두 서울이었다. 부산과 제물포 도착은 임명지 도착일이 아니다. (이 부분은 합의되지 않았음.)

3) '주재'의 완전한 개념은 '정착'이다. 곧 공사관이 그의 도착을 인지하고, 법적으로 주택을 구입하여 반영구적으로 임지에서 살기 시작한 시점으로 본다. 결혼한 기혼 선교사의 경우는 가족을 데리고 와서 함께 살 때 온전한 정착으로 본다. 미혼 선교사는 사택 입주일을 정착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4) 이 기준으로 볼 때 알렌 의사는 1884년 9월 22일 임지인 서울에 도착하여 한국 개신교의 첫 주재 선교사가 되었고, 10월에 주택을 구입한 후 10월 26일 부인을 데리고 와서 정착함으로써 온전한 첫 주재 선교사가 되었다.

 

나. 과연 초기 선교사들은 알렌을 첫 선교사로 언급하지 않았나?

북장로회 선교사들이 인정한 경우를 보자.

1) 언더우드는 1891년 캐나다 연설에서 "첫 개신교 선교사(알렌 의사)는 1884년 가을에 도착했다"(옥성득, <언더우드 자료집> 1,323쪽)고 했고, 1904년 9월 22일 서울에서 미국북장로회 해외선교부 한국선교회 선교 20주년 기념 대회가 열렸을 때 언더우드는 연설을 통해 알렌 의사를 지목하며 "20년 전 이 나라에 정착할 목적을 가진 첫 개신교 선교사가 도착했다"고 말했다(Korea Field [Nov. 1904]: 205.).

2) 기퍼드(D. L. Gifford)는 'Every-Day Life in Korea'(1898) 129쪽에서 헤론이 1884년 봄에 한국 선교사로 처음 임명받았고, 매클레이 목사가 "a flying visit to Korea to spy out the land" 했지만 "내한한 첫 개신교 선교사는 알렌 의사였다"라고 못 박았다.

3) 1909년 북장 선교 25주년 때 발간한 책 <Quarto Centennial Papers Read Before the Korea Mission of the PCUSA>에 미국에 있던 알렌의 글이 수록되어 있다. 알렌의 선교 시작 당시를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이 책에는 마페트가 알렌을 언급한 글도 있다.

4) 1934년 선교 50주년 때 맥큔이 상술한 초기 역사에서 알렌을 한국에 임명된 첫 선교사라고 밝혔다. "This first missionary to Korea was appointed to the US Legation…"이라고 썼다[G. S. McCune, "Fifty years of Promotion by the Home Baord and Home Church," Harry A. Rhodes and Richard H. Baird eds. The Fiftieth Anniversary Celebration of the Korea Mission of the Presbyterian Church in the USA (Seoul: YMCA Press, 1934), 24] 또한 <조선예수교장로회 50주년 역사 화보>(1934)를 보면 총회장 이인식 목사의 권두사에 "1884년에 선교 의사 안련 씨가 도래하고"라고 하였고, "조선 최초 선교사 안련 의사(1884)"(15쪽)나 "1884년 미국인 알렌 의사가 장로교 선교사로 도착하다"(16쪽)는 서술이 등장한다.

5) 클라크: 1937년에 출판된 그의 대표작 <Nevius Plan for the Mission Work in Korea> 76쪽에, 초기의 여러 접촉 후 "First Entry of Resident Missionaries" 항에서 알렌이 1884년 9월 20일 선교지에 도착했다고 서술했다.

 

북감리회 선교사들도 동일하게 인정했다

대부분의 글은 감리회의 시작만 말하고 장로회 선교회 시작은 말하지 않기 때문에 알렌에 대한 언급은 많지 않다. 굳이 말할 필요가 없었다.

1) 아펜젤러: 1886년 4월 2일 편지에서 아펜젤러는 알렌이 고종 시의(侍醫)로 고종과 왕비를 치료하고 고관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한 등등의 일을 "성실한 선교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을 따름"이라 평가했다(이만열, <아펜젤러> 287쪽). 또 <Appenzeller and Jones, The Korea Mission of the MEC>(1905) 30쪽에서 "1884년 여름에 중국 남경의 알렌 의사가 한국을 방문하고 남기로 결정했다. 첫 선교를 시작한 명예와 한국에 의료 사업과 기독교 사업의 문호를 개방한 명예는 그의 것이다"라고 했다.

2) 존스(1918): 한국 감리회 역사를 정리한 선교사는 존스이다. 그는 <한국교회형성사>(1918)(옥성득 역, 홍성사, 2013) 28쪽에서, "한국에서 기독교 선교의 문을 실제적으로 활짝 연 것은 한국의 첫 주재 미국 선교사 호러스 알렌 의사의 성공이었다"고 말했다.

3) 참고로 그리피스는 <아펜젤러 전기>(1912)에서 알렌을 첫 주재 선교사라고 썼다.

 

4. 결론

 

북장로회 해외선교부 총무 브라운은 1936년 선교부의 대 역사 <One Hundred Years>를 쓰면서, 408~410쪽에서 조선의 첫 선교사들을 다음과 같이 명확하게 말했다.

첫 개신교 방문 선교사 = 귀츨라프, 1832년
두 번째 방문 선교사 = 토마스, 1865~66
첫 한국 개신교 선교사로 임명된 자 = 헤론 (부부), 1884년 4월
첫 한국 주재 선교사 = 알렌 (부부), 1884년 9월

이는 당시 한국에 있던 장로회와 감리회 선교사들의 공통된 견해였다. 다만 양주삼 목사만 일종의 호기를 부려 이에 반론을 제기하는 수준이었다.

감리교회가 매클레이를 첫 선교사로 보려 하는 주된 근거는, 알렌이 1884년 9월에 서울 주재 선교사로 오기 전, 6월에 서울을 방문하고 고종으로부터 선교 윤허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에서 밝힌 대로 그것은 문서로 된 공식적인 것이 아니라, 구두로 전해진 제한적인 승인이었다. 당시 개화를 추진하던 김옥균의 프로젝트의 하나였는데, 그가 갑신정변으로 몰락하면서 그 구두 윤허는 실제적 효과가 사라졌다. 매클레이가 받은 그 허락은 북감리회 한국 선교를 개시하도록 이끌었으나, 북장로회 한국 선교는 다른 경로로 이미 시작되고 진행되고 있었다. 즉 6월의 매클레이 방문 전인 1884년 3월에 뉴욕의 맥윌리암스가 한국 선교를 위해서 6,000달러를 북장로회 해외선교부에 기부했으며(1월에 이수정의 선교 요청 편지가 뉴욕에 알려졌다), 이를 바탕으로 4월에 선교부는 헤론(John W. Heron) 의사를 첫 한국 선교사로 임명했고, 6월 8일에 중국 상하이에 있던 알렌 의사는 엘린우드 총무에게 서울 전임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기 때문이다.

 

첫 선교사라고 할 때 그 개념은 첫 주재 선교사이며, 임명일이 아닌 임명지 도착일을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이 점에서 여행 경유지인 부산이나 제물포 도착일은 내한 시점이 아니며, 임명지인 서울에 도착한 날을 내한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그리고 더 공식적으로는 주택을 마련하고 살기 시작한 정착 선교사라야 정규 선교사로 규정할 수 있다. 따라서 매클레이 목사는 방문 선교사의 한 명이었으며, 첫 임명자인 헤론 의사가 아닌 알렌 의사가 한국 개신교의 첫 주재 선교사요 정착 선교사이다.

굳이 따지자면, 목사가 아닌 평신도에 의해, 신학이 아닌 의술에 의해, 기독교 복음보다 기독교 문명에 의해 한국 개신교 선교가 열렸다. 1884년 9월 22일 알렌이 서울에 도착한 날이 개신교 첫 선교사가 한국에 도착한 날이다. 그는 10월 26일 가족과 함께 서울에 다시 와서 정착했다. 1884년 10월 26일이 개신교 첫 정규 선교사가 가족과 함께 서울에 정착한 날이다. 그날 이후 40일이 지난 12월 4일 갑신정변이 일어났다. 그러나 온전한 의미에서 그는 선교사가 아니었다. 3년 후 외교관으로 옮겨갔기 때문이다. 첫 선교사의 급성공과 발 빠른 변신은 이후 한국교회의 급성장과 변신과 쇠락을 미리 보여 주는 듯하여 뒷맛이 씁쓸하다.

 

1884년 첫 개신교 선교사에 대한 논쟁은 식당 원조 논쟁의 본질과 유사한 면이 있다. 원조는 굳이 원조를 내세우지 않고 맛과 서비스로 고객을 만족시킨다. 원조가 아닐수록 약점을 보충하기 위해 과잉 광고나 제스처를 한다. 한국은 1등, 일류, 최고의 간판 따기 욕망에 사로잡혀 있다. 교회사도 예외가 아니다. 아름다운 2등을 위한 겸손한 역사 쓰기가 필요하다. 원조라면 교회의 사명인 세상의 소금과 빛의 사명을 실천하면 된다. 고객은 귀신같이 간과 맛이 변한 것을 안다.

  

  

옥성득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주립대학교(UCLA) 아시아언어문화학과 임동순·임미자 석좌 부교수(한국기독교)이다. 서울대학교 영문학과와 국사학과를 졸업한 후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과 대학원을 거쳐 미국 프린스턴신학교와 보스턴대학교에서 기독교 역사를 공부했다. 2002년부터 UCLA에서 한국근대사와 한국종교사를 가르치고 있다. 저서로는 <The Making of Korean Christianity>, <한반도 대부흥>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