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학

[스크랩] 청소년문제에 대한 목회신학적 연구

수호천사1 2016. 7. 6. 22:14

청소년문제에 대한 목회신학적 연구
 

              차            례
     
제1장 서    론 ------------------------------------------  2
      A. 문제의 제기  -----------------------------   2
      B. 연구 방법   -------------------------------  2

 제2장 현대 청소년의 문제      ---------------------          4
        1. 대중 문화와 청소년   ----------                5
        2. 목회에서의 청소년의 이해      ----------     13   
 제3장  청소년의 성과 비행문제    ----------------        17
        1. 비행청소년 이해               -------------- 17
        2. 청소년의 성문제에 대한 목회상담 ----------------- 22
 제4장 교회교육을 통한 청소년 교육 ---------------------- 34
        1. 학교교육에 대한 이해 ----------------------- 34
        2. 교회교육의 기능과 역활--------------------------- 37
        3. 대안으로서의 교회교육 ------------------------- 39
        4. 청소년 복음화와 교회교육         ----------- 45
 제5장 교회의 청소년 교육에 대한 실제            -----  48
        1. 실제적인 접근과 대안법--------------------------  48
        2. 교회교육의 프로그램         ---------------- 49
제6장 결론             ----------------------------------  55

 

 

 

 

                       제1장  서 론


A. 문제의 제기
  오늘날 급격한 사회 변동과 다양한 문화의 흐름 속에서 청소년에 대한 이해가 없이는 실제적인 교회의 미래를 이야기 하기가 힘들게 되었다. 청소년의 문제는 이제 세상 뿐 아니라  교회에도 대단히 충격적인 요소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회적 교육적 관심에 이어 교회 안에서도 청소년에 대한 관심은 고조되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장년중심의 목회를 해왔던 교회는 사실 청소년 문제를 비전문적인 부교역장에게 맡겨놓고 그 책임을 회피해온 것이 사실이다.
  靑少年기는 흔히 폭풍노도의시기라고 한다. 그래서 변덕스럽고 가치관이 자주 변한다. 이론 인해 신세대로 통칭되는 이 집단은 언제나 기성세대의 사고를 앞질러 간다. 이런 까닭에靑少年을 지도하는 敎育者, 敎役者 역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사실은 그저 변명만은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다음세대에 대하여 복음을 전할 책임이 있는 교회는 靑少年에 대한 진정한 책임과 사명이 있음을 인정하여야 한다. 본 연구자는 본 論文을 통해 靑少年 문제에 대한 교육목회학적 관점에서 청소년들의 실제적인 基督敎 윤리관의 필요성을 찾고자 하는 것이다.

B. 연구 방법 및 범위
  무엇보다도 靑少年에 대한 이해 없이는 이들을 올바르게 지도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본 연구자는 사회학적인 자료와 함께 신학적인 자료를 접목시켜 목회에서의 오늘날의 청소년을 먼저 이해 해 보려고 한다. 聖經적인 신학적 배경 속에서 언급하고 있는 청소년들의 이해와 아울러 그들의 현실을 진단하는 방향으로 갈 것이다.
  그리하여 서론에 이어 제2장에서는 大衆文化와 청소년들을 살펴보고, 목회에서 이러한 그들의 문화적 성향들을 수용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 목회학적 접근을 해 볼 것이며 제3장에서는 비행청소년들의 특징과 특히 性文化에 대한 靑少年의 문제점들을 다루기 원하며 聖經에 나타난 性에 대한 부분도 살펴보았다. 제4장에서는 學敎 敎育과 敎會 敎育을 살펴봄으로써 敎育의 문제점과 교회교육을 통한 청소년 문제의 해결을 위해 대안을 모색해보려고 한다. 제5장에서는 청소년 교육의 실제에 들어가서 그 접근과 대안 교회교육의 프로그램들을 제시 해볼 것이다.
    그러나 본연구는 다음과 같은 한계를 가진다. 그것은 본 연구는 청소년 문제에 대한 전반을 다루고 또 이에 대한 교회의 종합적인 대안을 다루는데에는 한게가 있다. 그러므로 소논문 형식으로 목회상당을 통하여 나타난 몇가지의 실레를 통하여 본 연구자의 교회를 중심으로 한 대안을 찾는데에 그 범위를 두고자 한다. 그러므로 필히 모든 교회의 청소년사역에 적용시키기에는 한계가 있다. 또 많은 청소년을 상대로 설문을 조사하거나 면담을 일일이 하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주로 신문이나 문헌등에 의해 그 실태를 파악하려고 하므로 본 연구자의 전문적인 주관성은 많이 결여 되는 면이 있음을 밝혀둔다.  
           제2장  현대청소년의 문제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을 선교를 위해 파송할 때 우선적으로 부과한 임무는 명백하다(마9:35-10:16). 그들은 예수의 이름과 권위 아래에서 예수의 선교(ministry)를 위해 파송 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선교를 위해 필수적으로 선결 되어야할 전제는 우리가 선교 하고자 하는 대상에 대한 이해이다. 이것이 목회이고 이것이 패스토랄 캐어라고 생각한다. 예루살렘을 복음화 하기 위해서는 예루살렘을 잘아는 마태가 필요하였고, 사마리아에는 스데반이 필요 하였으며 헬라를 선교하기 위해선는 사도 바울이 필요 했던 것처럼 청소년들을 복음화 하기 위해서는 그들을 잘아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1. 大衆文化와 청소년

  靑少年의 大衆文化를 서술하기에 앞서 먼저 大衆文化에 대해 간략하나마 살펴봄으로서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자 한다. 大衆文化에 대한 논의는 매우 다양하기 때문에 견해도 여러 가지이다. 왜냐하면 大衆사회란 현대 산업 전반에 적용하기에는 너무 포괄적인 개념이기 때문에 특정 사회, 특정 시기에 부각된 文化의 요소를 가지고 이것이 大衆文化이다고 주장을 연결시키기에는 무리가 따르기 때문이다. 굳이 大衆文化를 정의한다고 하면, “이윤 창출을 목적으로 대량으로 생산되며 대량으로 상업주의 文化라고 정의될 수 있다.
  원래“大衆”이란 용어 자체는 긍정적인 표현보다는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어졌는데 大衆의 개념은 프랑스 혁명에 앞서 유럽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투쟁 과정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어졌다. 귀족들의 반 부르조아 수사였던 것이 부르조아의 승리와 더불어 하층사회를 가리키는 말로 변형되었다. 19C에 이르러서는 도시 산업 노동자가 불만에 찬 하층계급들을 가리키는 경멸 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귀족들만이 소유하고 있던 文化의 요건들이 비천하고 천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文化의 요건들을 하나, 둘씩 소유하게 되고 누리게 되자 하층계급에 대한 상투적인 비꼬는 말로 시작된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大衆文化라 할 때도 산업 사회 속에서 大衆이 출현하고 이들을 위해 대량생산과 대량 소비 현상이 일어나면서 양산된 文化라고 보는 것이 옳은 개념이라 볼 수 있다. “mass culture로서의 大衆文化는 메스 미디어를 통해 복제되고, 양산되는 文化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mass culture자체가 경멸적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는 개성이 없고, 저질적이며 부정적 이미지를 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大衆文化라 하면 긍정적인 시각보다는 大衆 文化의 역기능에 대해서 전반적으로 부정적인 시각을 보게 된다.
  大衆文化는 이윤 창출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오락 지향적인 성격을 지니지 않을 수 업게 되는데 성별, 연령, 敎育 정도, 직업 등과 관계없이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상품을 만들려 하기 때문에 역기능이 초래하게 된다.
  모든 사람이 공통으로 느끼는 섹스, 폭력, 모험 등이 주된 소재가 되며, 인구구조에서 차지하고 있는 비중이 젊은이들과 여성의 취향에 맞게 형식과 내용을 갖추게 된다. 여기에서 상업성이 치중되며 퇴폐성, 사행성 조장, 부정적인 면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그렇다고 해서 “大衆文化를 본질적으로 저급한 文化라고 취급해서는 안된다. 다만 시장 구조에 따라 결과적으로 저급한 文化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양산된 결과로 특히 일부의 基督敎 시각에서는 더 더욱 부정적인 이미지를 인식하고 표현들을 한다.

1)新世代와 대중문화
  大衆 文化에 대하여 가장 민감하고 전적으로 수용하는 부류는 기성 세대가 아니라 新世代 즉, 엑스(X Generation) 세대이다. 요즘 흔히들 퇴폐의 온상의 이미지를 기성세대의 따가운 시선을 받고 있는 것이 이들 X세대인 만큼 大衆文化와 新世代의 관계는 떨어질 수 없는 관계이다. 엑스(X Generation)세대는 1965년부터 80년 사이에 출생한 젊은이를 지칭하는 社會的인 용어이다. 그러니까 최고 30살로부터 15세까지의 젊은이를 싸 감아 지칭하는 말이다. 원래 엑스(X)말은 여러 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불분명하다는 뜻도 있고 잘 모르겠다는 뜻도 있다. 또 틀렸다는 뜻이나 고약하다는 의미도 갖고 있다.” 
  엑스세대의 세대적인 성격을 묘사하는 단어로서 新世代(New generation)라는 말이 쓰이기도 하는데 보통 X 세대와 新世代를 한꺼번에 지칭해서 말하고 있는데 원칙적으로 구분하자면 新世代의 연령은 25세 미만의 젊은이들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X세대와 新世代를 꼭 구분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다만 우리가 우려하고 있는 세대가 25세 미만의 젊은이들이기 때문에 본 論文은 X세대와 新世代의 이중적인 용어 중에서 新世代라고 명명하고자 한다.
 "新世代는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찾아 도전하게 만드는 저항 인자를 담고 있는 세대이다." 그래서 新世代는 흔히 구세대나 기성세대에 대해 대비되는 말로 쓰이게 된다. 新世代는 구세대에 대해 늘 대항하고는 있지만, 어김없이 그들에 참패당하는 피해의 세대이다. 新世代는 기성세대의 기득권과 이해 관계 그리고 권위에 끊임없이 도전하기 때문에  그 대가로 패배를 약속 받고 있는 세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세대의 가치와 규범들과 단절하여 새로운 文化를 가꾸어 나가 보겠다는 세대이다.
  학벌을 중시하는 사회에서는 학벌이 부족한 사람이 아무리 성실하다 해도 소용없는 일이다. 우리 사회의 靑少年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성공의 조건은 아래 도표1 과 같다.
(표1)성공의조건
                                                (단위: 상단은 명, 하%)

구구제화와 지방화에 따른 청소년 문제라는 한국청소년 교육 연구소의 자료에 따르면   인생에서 성공하고 출세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 하나는 선택하라는 문항에 대하여 대부분의 靑少年들은 성실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꼽았으며, 다음 능력 요인을 꼽았다. 성실과 능력 요인을 합하면 90% 이상이 된다. 따라서 성공과 출세하는데, 기타 연줄이나, 경제력, 팔자, 학벌 등의 개인 외적 요인을 중요시하는 집단은 불과 10% 미만으로 나타났다. 집단별로 중요한 요인으로 꼽은 정도 또한 크게 차이나지 않음을 알 수 있고, 또한 고등학생과 대학생이 다른 집단에 비하여 능력 요인을 중요시하는 비율이 35.2%, 31.4%로 다소 높게 나타났다. 소수의 일부 靑少年들의 좋지 못한 인상으로 사회의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는 것도 있지만 위의 도표에 따르면 그래도 靑少年들의 사고를 긍정적인고 진취적인 것이다 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물론 위의 도표가 전체적인 면을 볼 때 다소 오차가 있으나 분석을 통한 흐름을 이해 하는 데에 의의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 靑少年들의 인생관은 어떠 한가.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문제 상황에 부딪히게 되고, 서로 갈등하는 가치에 대해 판단을 내려야 할 때가 있다. 이러한 경우에 어떤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가 하는 문제가 대두되는데"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라는 문항에 대해 靑少年들의 반응을 살펴본 결과는 아래 도표2 와 같다.

                                    (단위 : 상단은 명, 하단은 %)
 
  靑少年들은 살아가면서 가장 중요한 것을 행복이라고 생각하였다. 과반수가 가장 중요한 것으로 응답하였다. 다음으로는 사랑이라는 응답에 19.6%, 돈15.6%, 구원4.9%. 명예 3.2%순이었다. 靑少年들은 대체로 삶에서 중요한 것은 행복, 사랑, 돈, 구원, 명예 등의 순으로 꼽고 있다. 그런데 고등학교의 경우는 사랑이 중요하다고 응답한 비율이 18.2%인데 반해, 돈이라고 응답한 비율은 20.5%로 사랑보다 돈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음이 드러났다. 사랑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응답자의 비율은 중. 고. 대학생으로 학년이 올라갈수록 낮아진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중요한 사실은 비행 靑少年은 동일 연령층인 중. 고생보다 사랑이 중요하다고 응답할 비율이 높아, 이들이 가족과의 사랑을 비롯한 사랑의 중요성을 깊게 느끼고 있음을 추측해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문제아로 여기는 비행 靑少年들의 외적인 표현만으로 그들을 부정적인 시각으로 볼 수는 없는 것이다.
  敎會에서조차 이런 문제의 靑少年들을 거룩의 울타리밖에 소외시키고 내 팽개쳐 버린다면 그들은 정말로 한 인간으로서 설자리가 없는 것이다. 敎會만이라도 그리스도인들이 사랑으로 포용시키며 나아갈 때 그들이 보는 사회는 한층 더 밝아진 눈으로 보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회가 저들에게 냉정하다 할지라도 基督敎의 입장에 비추어 보면 저들도 영혼 구원의 한 주체인 것이다.
그 다음 오늘날 靑少年들의 종교관은 어떠 한가? 우리 사회 靑少年 중 상당수는 종교를 가지고 있다. 靑少年들이 가지고 있는 종교의 유형을 조사해 보면 다양하게 나타나겠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종교가 靑少年들에게 의미를 갖는가 하는 것이다.
(표3) 종교를 믿는 이유

                                              (단위: 상단은 명, 하%)
  위의 표3에 의하면 靑少年 집단의 약 80%가 종교를 가지고 있으며, 19.2% 정도는 종교는 필요 없다고 생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종교를 믿는 靑少年들 가운데에서는 종교는 위안을 얻기 위해 믿는다고 응답한 비율이 가장 높다.
  다음으로는 구원을 받기 위한 것이라는 응답은 12.7%이며, 인내심을 기른다거나, 친구를 사귄다던가 하는 이유로 종교를 믿는 비율은 매우 낮았다.
집단별 특징을 보면, 다른 靑少年 집단은 40~ 50%가 위안을 얻기 위하여 종교를 믿는다고 응답 한데 비하여 고등학생과 대학생은 60% 이상이 위안을 얻기 위하여 종교를 믿는다고 응답하였다. 더욱 아이러니 한 것은 비행 靑少年 집단은 다른 집단에 비하여 구원을 얻기 위하여 종교를 믿는다고 응답한 반면, 비행 靑少年은 30%이상이 구원을 얻기 위하여 종교를 믿는다고 응답하였다. 여기에 종교라는 부분은 基督敎, 로마 카톨릭, 불교.... 등을 포함시킨 것이다.
  그러나 흔히들 일부의 기성세대의 그리스도인들은 敎會의 靑少年을 볼 때, 단지 오락을 위해서 敎會에 나온다는 등, 敎會에 놀러 왔느냐는 식의 비웃 거리 기도한다. 물론 그런 靑少年들이 敎會에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위안과 구원을 얻기 위해서 종교를 믿는다는 분석은 基督敎가 더욱더 靑少年들을 위해 영혼 구원을 위한 최선과 저들이 누릴 수 있는 基督敎의 文化 공간의 자리는 어느 정도 내어 주어야 한다고 보며 그리스도인 우리들은 다시금 반성과 각성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靑少年들의 의식 부분에서의 도표 분석은 서울 대학교 사범대학 敎育 연구소에서 설문, 조사한 것을 발췌하여 옮겨 놓은 것이다.
  靑少年들의 의식에 있어서 부정적인 이미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돈에 대한 강한 집착으로 물질주의적으로 흘러 열심히 돈을 벌어 부자가 되는 것으로 인생의 목표를 삼는 경우도 있으며, 적당주의적 처세술을 가져 "요즘 세상에서 출세하기 위해서는 방법을 가릴 필요가 없다는 식의 표현도 마다하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자기 중심적 생활을 고집하여 자기들의 비위에 맞지 않는 것은 모두가 잘못된 것으로 간주하며 모든 것에 대한 기준을 자기에 맞추고 있는 이기적인 경향도 있다. 靑少年들은 기성세대에 강한 불신을 보여 기성세대 것이라면 고리 따분하고 지겨운 훈계 소리로  일관하여 버린다. 그러나 기성 세대들은 이러한 면들을 비추어 무조건 부정적인 시각으로만 본 것이 아니라 폐쇄적, 권위적, 이기적, 감각적, 획일적, 보수적인 것에서 탈피하여 이해와 관용으로 저들을 이끌어 나가야 할 것이다.
 
2) 大衆文化의 이해와 청소년

  ① 영상 文化
  新世代의 젊은이들은 영상 세대이다. "기성세대가 문법과 문법 사이를 이리저리 따지는 문자 세대인데 반해 新世代의 젊은이들은 컴퓨터 文化 세대이다" 컴퓨터 통신 文化도 그들의 일상적인 삶을 영위하면서 주어와 술어 관계가 묘한 표현들을 즐긴다. 그렇다고 대화에 어려움이 있는 것도 아니다. 단지 이들에게 있어서 글쓰기와 길게 표현하기는 곤욕스런 일이 될 뿐이다. 자기들의 감정의 표현에 있어서 아주 짧게, 그리고 현장성과 즉흥성만이 돋보이는 글을 쓸 뿐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컴퓨터의 약호 논리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新世代 젊은이들은 컴퓨터 통신의 소비 주체들이며 컴퓨터 광들이다. 그래서 시간과 공간에 구속받음이 없이 자기들의 정보와 文化를 주고받으며 창출해 나간다. 부작용도 없는 것은 아니다. 인터넷으로 통한 음란 물들을 디스켓으로 구입하여 자신의 컴퓨터에 넣어 보는 실정으로 치닫게 되었는데 더욱 고려해야 할 사실은 가상 현실을 통한 '사이버 섹스'도 실용할 단계도 이르렀다 하니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② 소비 文化
  우리 나라 靑少年들은“내가 번 돈은 내 마음대로 써도 좋다는 개인주의적 소비 의식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는데”  특히 대도시에 사는 靑少年이 소비 의식이 높았으며 계층별에 의하면 상류층에 있는 靑少年이 가장 높게 나타났다. 이것은 소득 수준이 높은 집안의 靑少年일수록 소비 의식이 강한 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소비 文化가 新世代의 특권 인 것처럼 저들은 상당히 소비에 심각할 정도로 보여주고 있는데 이것은 大衆 文化가 상업성 면에 비추어 볼 때 주로 대상이 新世代,  다시 말해서 靑少年 중심으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여러 항목들을 조목조목 나열하기보다는 직접 상업성의 시장 구조를 한 번 보는 것이 이해에 도움이 되리라 본다. 흔히 우리들이 말하고 있는 압구정동, 이태원등은 이미 新世代들에게 있어서 소비의 文化로 치닫게 하는 장소로 전락하여 한층 더 소비의 불을 부채질하고 있는 실정이다.
   ③ 모방 文化
  靑少年들의 文化는 우리 나라 고유의 전통 文化와는 동떨어진 서구 文化의 물결 속에서 영향을 받고 있는데 단지 서구 文化를 받아들이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좋지 못한 유해한 것까지도 받아들인 데에 그 문제가 있는 것이다. 의류를 보면 온통 난잡한 문구와 저질스런 문구 등을 등에 붙이고 거리를 활보하는 가 하면 음악도 온통 서구의 文化로 뒤범벅되어 그들의 소유인냥 중얼거린다.
  모방 文化가 이렇게 심각한 것은 내적의 요인보다 외적의 요인이 더 크다고 본다. 한국은 특수한 지리 환경과 내부적인 요인 속에서 현재의 文化가 표출된 것이 아니며, 외부적인 요인 즉, 서구의 文化가 한꺼번에 밀려와 역기능을 초래하게 된 것이다. 大衆文化에 대한 “한국의 사회 구조악은 단순히 인간의 성품과 개인적 도덕성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동서 이데올로기의 대립을 기초로 특별히 분단 상황을 이용한 외세와 군사 독재의 사생아란 것도 볼 수 있다.” 그래서 보다 더 나은 사회를 향한 국민의 애국적 희생을 상쇄시켜 버렸고 결국 한국 사회의 모순 구조를 심화시키고 말았던 것이다
  기성 세대가 大衆 文化 속에서 표현의 방식은 대체로 "과거 지향의 사회로 언급한다. 즉 미래보다는 현재를, 현재보다는 과거를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기에 과거를 말하는 것을 좋아한다. 말끝마다 과거가 좋았고, 과거가 아름다웠다는 것이다."
  新世代의 大衆 文化 표현 방식은 기성세대의 과거 지향보다는 대체로 현재의 성취 만족에서 나온 미래 지향적이다. 이것은 그들의 허무니 없는 발상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상업화에 따른 시장 경쟁의 치열 속에서 그들 스스로가 창출해 낸 것인데 현대의 기업, 경제, 정치, 사회등 전반적인 면을 볼 때 미래 지향적인 것으로서 그들의 생각과 또한 大衆文化가 맞물려 있는 것이다.

    2. 목회에서의 청소년의 이해
 
 1)청소년과 대중문화의 수용
  그리스도인들은 大衆文化를 거룩에 대한 신앙의 입장에서만 보려고 하는 경향 때문에 상당히 부정적인 견해가 높다. 심지어 일부에서는 배타적과 폐쇄적 시각의 견지에서만 바라보려는 부류도 있다는 사실은 부정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면 왜 부정적인 견해가 긍정적인 면 보다 더 우세 할 까? 하는 의문도 제기될 수 있는데 그것은 大衆文化가 하나의 세속적 文化, 다시 말해서 비基督敎 文化이라는 인식에 기로 해서 그런 표현들이 나온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의 시각에서 세속 文化라는 것은 문명화된 사회 환경에서의 물질 숭배적이고 인간 이성과 기술이 우상시되며 향락적이고 퇴폐성을 조장시키며, 현실 지향적인 文化라고 생각하여 하나님을 지향하고 복음 적인 하늘의 文化가 아닌 땅의 文化이라는 인식의 기초에서 평가하려고 하기 때문에 부정적인 면이 높다고 생각하는 바이다.
  基督敎의 복음과 文化는 그 자체로서 독특성을 지닌 것이지 절대로 배타적이거나 패쇄적은 아니다. 중세 유럽의 전반적인 모든 분야에서 그 시대의 大衆들이 만든 大衆 文化 속에서 함께 자리를 공유하면서 基督敎의 독특성을 전파하고 심어 주었다는 사실은 신학을 배우는 우리들에게 있어서 부인 할 수 없는 사실이다. 또한 우리 나라의 초기 大衆 文化도 基督敎와 함께 그 시대의 흐름 속에 상당한 상호 작용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물론 基督敎가 그 독특성까지도 상실한 채 공유해 온 것은 아니다.

     2) 우리의 방안
  大衆 文化에 따른 심각한 부작용이 基督敎 본질의 특수성과 文化의 영역까지도 침범하여 왜곡으로 비추는 것도 부인 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우리는 이런 것들에 대하여 폐쇄적인 이미지를 갖기보다는 오히려 우리들은 그것을 역이용해야 할 것이다.
  먼저 그리스도인들이 경건을 위해 大衆 文化를 무조건 부정적으로만 모든 것이 결코 聖經적이 아니다는 인식을 전제해야 한다.
특히 靑少年들과 大衆文化는 직접적인 관계가 있기 때문에 그 피해성은 짐작할 만 하지만 어른들의 돈만 벌면 그만 이라는 얄팍한 상술과 무관심의 사회 풍조가 저들을 병들게 하고 있는 만큼 基督敎의 그리스도인들도 책임이 없는 것은 아니다.
  大衆 文化에 대한 적극 자세가 필요하다.
  文化에 대한 聖經적인 시각을 갖지 못한 젊은 세대의 敎會에 대한 견해는 부정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새로운 형태의 大衆文化가 나타날 때마다 부정적인 면만 부각시키는 것이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젊은 세대는  특히 大衆 文化에 대한 연구와 가르침이 신앙 敎育과 병행하여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진심으로 大衆 文化의 유해성이 심각하다고 공감을 한다면 이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그 대안을 제시하는데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할 때라고 본다.
 敎會도 文化 공간을 마련하는 데에 적극적인 투자가 필요하다.
  현대의 大衆들은 그야말로 文化적인 충격 속에서 살아간다. 파악되지도 못하고 설사 '어떤 文化를 파악했다 하더라도 그 文化는 현대인의 지성에 이미 들어와 있는데 현대의 大衆文化이다. 이미 그렇게 습관 되어 버린 이들에게 基督敎는 이렇고 大衆文化는 저렇다는 식의 논리는 설득력이 없어진지 오래이다. 靑少年들에게도 따뜻한 관심과 文化 공간도 제공되어야 하는데 靑少年들이 가지고 있는 大衆文化에 대한 욕구를 인정해 주는 敎會, 敎會에 출석하는 젊은이들만을 위한 것이 아닌 그 지역의 모든 젊은 세대들을 위해 敎會가 열리고, 敎育관만이라도 文化의 장으로 제공되어진다면 이들이 인생 문제의 해결점을 결국 敎會 안에서, 말씀을 통해 찾게 될 것이 확실하다.
  敎會가 文化 공간을 위해 지금보다 더 적극적인 투자와 실천이 따를 때 基督敎의 복음 전파와 인격과 敎育의 장을 더욱더 아름답게 열매를 맺어 갈 것이다.
  大衆文化의 선용
  敎會가 새로운 大衆文化에 대한 시각을 제시하고 그것에 대한 수용 자세와 방향도 가르칠 책임이 있다. 요즘 일부의 靑少年들이 비디오, 음악, 컴퓨터.... 등에 퇴폐적인 요소도 안고 있어서 우려하는 목소리가 크다. 그러나 우리들은 포괄적인 배척보다는 비디오, 음악, 컴퓨터... 등을 基督敎의 文化는 창출하고 실현하는 데에 좋은 방향으로 선용한다면 매우 유익하리라 본다. 일부분인 단점을 가지고 따지기보다는 많은 유익한 장점을 가진 것을 선용하는 것이 비전과 발전에 비추어 볼 때 더 바람직하지 않을까!
 敎會 敎育에도 시대의 흐름 속에 적극적인 투자와 연구가 필요하다.
  분명 聖經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말씀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고 우리들의 가슴속에서 살아 역사 한다. 그러나 신학의 논리와 사상은 시대마다 다르게 작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이 시대의 大衆 文化의 흐름 속에서 敎育의 방법도 모색되어야 한다고 본다. 敎會 敎育과 大衆文化와의 관계도 상호 연관성이 있는데 敎會 敎育 자체도 文化적인 요소를 배제하지 않는다. 전통적인 敎會 敎育의 방법을 계승, 발전시키면서 새로운 창의성의 敎育도 수반 되다면 基督敎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보고 있는 이들에게도 그 인식의 폭을 훨씬 좁히게 될 것이라고 본다.
  창의성의 敎育이라고 해서 신앙이 배제된 채 인본주의 敎育으로만 치중하라는 이야기는 결코 아니다. 왜냐하면 "규범 없는 창의성은 하나님의 가치를 인간의 가치도 대체해 버릴 수도 있을 것" 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基督敎 敎育은 얼마만큼 大衆 文化와의 간격을 좁히고, 그에 따른 基督敎적 연구와 방안을 제시하느냐에 과제가 달려 있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우리들의 연구에 대한 관점에서도 과제임을 인식할 필요성이 있다는 데에도 같은 공감대 형성이 필요할 줄 안다.
  基督敎인이 敎會에서 사는가, 세상에서 사는가 ? 우리가 사는 곳에 이 두 가지 요소를 다 포함하고 있다. 이 사회는 하나님의 온전한 진리의 뜻이 이루어질 곳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敎會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만나고 세상에서 그 뜻을 따르며 적용해야 할 것이다.

제3장 靑少年의 性과 비행문제

  목회학적 관점에세 볼 때 패스토랄 캐어는 사람들의 요구에 따라 우선적으로 관계 형성을 통해 복음을 전달해 주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그 목적을 위해 행해지는 활동들과 구별되어져야 한다고 한다. 설교 종교교육, 교회행정, 심방, 상담, 예배집례, 그리고 기타 목사의 활동들이 패스트랄 캐어의 한 형태들이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사랑과 관심을 주는 관계형성이 없이 이런 형태들이 이루어 진다면 그것은 목사에게나 평신도들 에게나 환멸의 느낌을 가져다 줄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청소년들을 목회한다고 하면서 실제로 그들을 관게 하여 알지 못하며 그들의 번민과 갈등을 헤아리지 못한다면 그들의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실패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장에서는 청소년들의 가장 관심사인 성의 문제와 그들의 탈선 비행의 문제들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

   1) 비행 청소년 이해
  靑少年 비행이나 일탈에 관한 이론이나 연구들은 대체로 두 가지 경향을 나타내 왔다. 첫째는 靑少年의 비행의 원인을 개인적인 특성이나 社會的 부적응에 두고 개인적인 비행이나 일탈 행위가 일어나는 과정을 강조하는 심리학적 관점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비행이나 일탈 행위의 책임이 개인에게 돌려지는 반면에 사회구조와는 별 관계가 없는 경우도 있다. 둘째로는, 靑少年 비행이나 일탈 행위를 개인적인 문제라기 보다는 집단적인 현상으로 보며 그 발생 원인을 개인보다는 사회구조에서 찾으려는 사회학적 관점이나 이론 중에서 구조기능론에 치중되어 온 경향이 있다. 일반적으로 靑少年 비행은 사회 계층과 밀접한 관계가 나타나는데 중산층 이상의 靑少年들의 비행과 범죄율이 증가하여 과거보다 계층간의 비행 율의 차이가 줄어드는 경향을 보이고 있으나 여전히 중산층보다는 노동자 계층 靑少年의 비행 율이 더 높게 나타난다. 여기에서 중산층에 해당되는 학력을 대체로 대학교 졸업이나 중퇴 또는 일부 그 이하의 학력을 가진 사람으로 볼 때, 범죄로 인하여 보호 감별되는 靑少年들은 대부분 중산층 이하의 가정 배경 출신인 것을 알 수 있다. 靑少年 비행 율을 사회 계층별로 볼 때 사회 계층이 낮을수록 비행 율이 더 높은 경향이 뚜렷하다는 점이다. 최근에는 중산층 이상의 靑少年들의 비행, 일탈 행위, 범죄가 증가하여 비행과 사회 계층간의 관계가 없어지는 경향이 있는데 이러한 원인으로서는 첫째, 가족 성원간에 존재 할 수 있는 계층 의식의 불일치나 불안정으로 인하여 발생할 수 있다. 둘째, 삶의 기회에 있어서 유리한 계층적 배경으로 인하여 앞날이 보장된 중산층 이상의 靑少年들이 저지르는 비합리적이고 사치적인 비행 일수 있다. 셋째, 자신의 가치관이나 철학에 따른 社會的 의식이나 태도로 인하여 노동자 계층의 靑少年들과 동조하는 입장을 취함으로써 생길 수 있는 비행이나 일탈 행위일 수도 있다. 넷째, 중산층 이상의 靑少年들이 노동자 계층의 비행 文化에 매력을 느껴 영향을 받은 결과로 나타나는 비행일 수도 있다.
  우리는 흔히 동일한 빈민 계층이거나 동일한 빈곤의 조건 속에서도 범죄 또는 비행과는 거리가 먼 건전하고 창조적인 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사람들을 많이 본다. 즉, 가치관에 있어 윤리 규범을 중시하는 입장에서는 사람이면 어지간한 경제적 곤란도 쉽게 극복하여 즐거운 마음으로 생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난이 범죄와 비행과의 절대적인 근원이 되거나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하지는 않더라도 가난 때문에 겪어야 하는 社會的 활동의 제약과 물질적인 결핍 감정, 부모 형제간의 무의탁성, 주거지역과 주변 환경의 열악성이 간접적인 범죄의 원인을 제공하리라는 생각은 누구나 할 수 있다. 또한 절대적인 빈곤감 보다는 상대적인 빈곤감]에서 오는 물질적인 소외감 때문에 과잉한 욕구로 범죄를 범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악의 근원은 재물 그 자체가 아니라 재물에 대한 탐욕과 과잉 추구에서 오는 피해 때문일 것이다.
  우리 나라의 경우, 소년 범죄자의 생활 정도별 구성비로 나타난 도표 를 보면 이해에 도움이 되리라 본다.
       <표>  소년 범죄자 생활 정도별 구성비 (1986년 ~ 1990년)

    주:1. 범죄 분석
       2. (  )안은 %

  위의 표에 의하여 1986년과 1990년을 비교하여 보면 하류가 88.6%에서 82.7%로 5.9%가 낮아졌고, 중류가 10.5%에서 16.7%로 6.2%가 높아 중류층 생활 출신 소년들의 범죄가 증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그 동안의 국민 생활 수준이 전보다 풍요로운 것을 반영한 탓도 있지만, 개인적으로도  스스로가 중산 계층이라고 자족함으로써 생겨진 현상일 수도 있다. 그러나 어느 수준까지가 중류 생활인 지의 여부는 그 기준 자체가 애매한 실정이지만, 분명한 것은 가난 때문에 범죄가 저질러지기보다는 우발적인 행동에 의한 기회 범죄가 중산층에서 증가하고 있음은 자명한 사실인 것이다.
  예방과 대책에 있어서는 社會的인 연구 대상과 基督敎에서 靑少年을 연구함에 있어서 대상을 학생으로만 국한시켰던 점에서 탈피하여야 한다. 우리 나라 靑少年 비행 중학생의 비율이 약 2/5 정도이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연구의 대표성이 문제가 된다. 학생을 대상으로 할 때의 가장 큰 문제점은 상당수의 비행 靑少年들이 비행 때문에 퇴학을 당했거나, 스스로 자퇴한 경우가 많은데 현재 재학 중인 학생만이 연구 대상이 대표성을 잃게 될 뿐만 아니라 상당수의 靑少年 비행이 학교를 졸업한 이후에 발생됨으로 학생 비행에 대한 연구는 제한점을 갖게 된다. 한편, 대부분의 연구가 대도시 특히 서울 지역에 있는 고등학교를 표본으로 선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표본의 선정이 확률적인 표본이라고 보기가 힘들다. 전국적인 조사는 거의 없어 조사 결과를 일반화시키는데 무리가 있다. 그러므로 한국 靑少年 비행의 총량을 정확히 추적하기 위해서 전국적 규모의 피해자 조사가 시급하다. 대부분의 연구에서 사용한 자기 보고식 척도로 여러 한계점으로 인하여 비행량을 추적하기에는 매우 미흡하다. 실태에 대한 정확한 인식 없이 원인과 대책에 대한 연구는 거의 불가능하다.
   2) 문제 靑少年에 대한 관심
  社會的으로 문제 靑少年이라 함은 정상적인 가정 생활이나 사회 생활을 이탈하여 불건전한 단체나 행습에 빠져 있는 靑少年들을 일컫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敎會 내에서의 문제 있는 靑少年이란 신앙 성장을 멈추었거나 잘못 비뚤게 성장하는 경우를 지칭할 수 있다. 靑少年들의 비행은 살기가 어려운 시절보다 풍요로운 사회에서 더욱 많이 발생함을 알 수 있다. 한국 심리학 회장을 지낸 바 있는 이상로 교수는 “고생하면서 자란 사람들 중에 정신병이나 신경증에 걸리는 경우가 적다고 하면서 靑少年들에게 적절한 시련을 극복할 수 있는 내성을 길러 주어야 한다고 하면서 고생 요법이라는 방법을 소개한 바 있다.”
  오늘 靑少年들에게 일할 기회가 거의 주어지지 않고 있음은 큰 잘못이 아닐 수 없다. 특히 문제의 靑少年들에게 올바른 선도의 목적으로 봉사 정신을 기를 수 있는 대책보다는 따돌림과 년대의 현 시점에서 그들이 社會的인 밀접한 관계와 사랑을 느끼기 위해서는 환경 봉사, 고아원, 경로당의 봉사가 필요하다고 본다. 이런 봉사가 지속적으로 나갈 때 그들이 비로소 社會的인 관계를 올바로 정립할 수 있고 무엇보다도 그들의 가치관이 변화 될 것이다. 땅을 밟고 땀을 흘리는 일을 하고 난 뒤 한 컵의 물이 엄마나 달콤하며 찬 없는 밥 한술이라 할지라도 얼마나 감사한지 경험하지 않고서는 깨닫지 못한다. 많이 듣고 배우지만 이제 靑少年들에게 봉사 활동의 기회를 통하여 산 敎育이 있어야 한다. 몇몇 중. 고등학교에서 문제 靑少年들을 선도의 목적으로 봉사하게 한다는 것은 좋은 방안 중의 하나이다.

     2. 청소년의 성문제에 대한 목회상담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문제가 있던 없던 그들은 인격을 가진 동시에 똑같은 靑少年들이다. 사회에서 정립하지 못한 그들이 영혼 구원을 외치는 敎會가 냉담한다면 과연 어디에 설 것인가 ? 일부의 敎會는 문제를 가진 靑少年들이 들어오지 않기를 바라고 있으며 설사 들어온다 하여도 敎會 밖으로 나가기를 바라고 있다. 하나님 안에서는 평등하다는 것을 가르치면서도 그들을 차별하는 차별 주의, 학교와 가정에서 올바르게 敎育하면 되지 이런 것까지 해야 하는가 하는 책임전가, 문제 靑少年은 내 알바 아니다는 무관심… 등을 우리는 여러 면에서 찾아 볼 수가 있다. 실로 靑少年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다면 그들에게 진정한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이 무엇인지 한 번 실천해 보기를 바란다. 계속적인 관심과 기도, 잔소리가 아닌 주님의 가르침을 통하여 구속 자이신 예수그리스도를 그들에게 심어 주어야 한다. 당장 그들이 꽃을 못 피웠다 하더라도 지속적인 것이 병행할 때 씨가 박히고 싹이 움돋을 것이다. 사회가 냉담하였다 할지라도 敎會가 진정한 주님의 사랑으로 실천 할 때 비로소 저들은 또 다른 아름다운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靑少年은 이방인이 아니다. 그들은 우리의 가장 귀중한 가족이며 애정의 대상이다.” 우리는 그들을 우상화 할 것도 없으며 두려워하거나 서먹서먹 대하기 보다 진실된 마음의 대화를 갖도록 노력해야 한다.
  창조주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았으므로 가장 창조적이어야 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 사회는 靑少年들의 꿈을 지나치게 단순하게 만든다. 더 중요한 것은 “참된 基督敎적 가치관을 심어 주는 일에는 지적인 내용을 전수하는 일 보다 더 큰 성령의 역사가 필요하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1) 靑少年 문제로서의 性 문제
  과거보다 현대의 靑少年들은 性에 대해서 대체로 빠른 지식을 얻게 된다. 같은 또래 집단에 의해서 음란물, 비디오, 컴퓨터, 性敎育… 등 여러 가지로 통해서 그들이 빨리 性에 대해서 눈을 떴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性的 호기심을 자극시키고 性慾을 일으키는 충동이   우리 나라는 조상 대대로부터 性에 대해서 말하는 것, 심지어 생각하는 것조차 부끄럽게 여겼으며, 자연적인 性慾의 본능도 억지로 눌렀기 때문에 그다지 性에 대한 것들을 내색하지 않았으며 자손들에게도 금기시 되는 듯한 부분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은 과거에 쉬쉬했던 性이 큰 문제로 부상함에 따라 조기 性敎育이니 하는 프로그램이 많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性的 충동을 자제하지 못한 일부 靑少年들이 일으키는 性 폭력, 미혼모 증가, 그에 따른 낙태 등이 이미 우리의 현실의 주소로 볼 때 敎育이 시급한 실정이라고 본다. 분명 예전과는 달리 靑少年들의 性의 가치관이 변하고 있다. ‘내만 만족하면 돼’라는 性 폭력, ‘사랑하는 사랑을 위해서는 결혼까지 갈 필요 없다’는 性 윤리관의 가치관이 하락하고 있는 이 시점에서도 大衆매체의 영향과 잘못된 性文化로 말미암아 靑少年들이 희생당하고 있는 점에서 우리는 더 나은 敎育과 대책이 수립되지 않는 한 앞으로도 이 문제가 더 심각하게 나타날 것이다.
① 상담 사례
  다음의 내용은 상담 편지로 본 십대들의 고민을 십대들의 쪽지에서 발췌 한 것이다.

사례 1) 性 폭행 당하고 나서 …
  저는 불과 며칠 전 만해도 순수하고 희망에 꽉차 있는 고3 소녀였습니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불결하고, 무섭고 남자라는 인간을 모두 죽여 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며칠 전 일입니다. 우리 반 친구의 소개로 남자 친구를 만났지요. 나이는 나랑 똑 같은 고3이구요…친구가 생일인데 여자 친구를 한 명씩 데리고 오기로 했다면서 같이 가 달라고 해서 저와 제 친구는 곧이 곧데로 믿고 따라 갔습니다. 실제로 간 곳은 그 애의 친구 집이었습니다. 부모님은 나가시고, 가기에는 5명의 다른 남자 애들이 있기에 진짜 생일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어요 내 친구는 다섯 명에게 폭행을 당했고 전 3명에게 내 모든 것을 잃었답니다.  …눈만 감으면 그때 그 일이 생각이 나서 미치겠어요. … 난 이런 모든 일이 남의 얘기인 줄만 알았지 실제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 날 줄은 몰랐어요.

사례 2) 이성 교제를 하면서…
  저는 중학교 2학년때 까지만 해도 이성에 대해 생각 해 본적이 없었는데 3학년이 되면서 좋아하는 애가 생기고 부터는 이성이란 사귀어 볼 만하다고 생각하는 소녀였습니다. 지금도 좋아하는 애가 있어요. …그런데 그 애는 저를 좋아한 것 같으면서도 표현이나 내색을 하지 않아요. 남자가 적극적이지 못한 것이 전 무척 자존심이 상합니다. 어떻게 하면 그 애를 적극적으로 만들 수 있을까요. 그리고 제가 이렇게 신체적 접촉을 원하는 것은 나쁜 일일까요 ?

사례 3) 자위 행위로 인한 고민
  중학교에 다니는 여학생입니다. 누구에게라도 털어놓지 않으면 미칠 것 같습니다. …저는 자위행위를 합니다. 자위행위가 뭔지도 모르던 제가 그것을 시작 한 것은 국민학교 6학년 때 였습니다. 친구가 그르더군요 그것이 자위행위라고, 저는 정말 창피합니다. 사람들이 모두 저한테 손가락질을 하는 것 같습니다. 십대를 대상으로 하는 잡지들을 보면 자위행위를 하는 아이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전 연애 소설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런 것을 보면서 자위행위를 합니다. …정말 무서워요 전 처녀이고 싶었는데 그러면서도 전 자위행위를 멈출 수가 없습니다.

  자위행위로 인한 靑少年의 고민은 대부분의 靑少年이 자위행위에 대한 심한 죄책감과 죄의식을 갖고 그곳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해 공부와 생활에 지장을 받는 경우가 많다.
  어느 부모님의 경우, 자위행위를 하는 아들을 앉혀 놓고 그런 짓을 자꾸 하다 보면 머리가 나빠지고 공부도 못하게 된다고 엄포를 놓아 이 학생은 실제로 자신은 머리가 나빠진 것 같고 생활에 의욕을 잃는 경우가 있었다. 또 어느 남학생의 경우 생물 선생님께서 자위행위를 심하게 하면 일찍 죽는다고 했다면서 자기는 일찍 죽지만 않으면 모든 것을 다 열심히 할 자신이 있다고도 상담 해 왔다. 학교에서나 가정에서 性敎育의 부재는 靑少年들에게 잘못된 性 지식을 습득하게 하는 기회를 주고 있다. 자위행위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가르쳐 줌으로 해서 靑少年들이 갖는 공포심과 죄책감을 덜어 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아직도 말하지 않는 게 나은 것, 모르는 게 약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性敎育의 부재로 가장 많은 피해를 당하는 것은 역시 여학생이다. 손을 잡고 싶고 팔짱도 끼고 싶은 것은 자연스러운 감정이지만, 대부분의 여학생들이 남자와 여자의 “性 충동의 차이”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당하는 어려움이 많다. ‘내가 손을 잡으면 저 애도 손을 잡은 것에 만족하겠지’하는 안일한 생각이 가까운 상대에게 순결을 잃게 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靑少年들에게 글을 통한 전달과는 달리 T. V.의 영상 매체는 직접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는 데 비뚤어진 性文化를 내세우는 드라마는 시청자로 하여금 사랑이란 육체적 관계만을 의미하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든다. 이것은 실제로 많은 사람들의 순결 의식을 잃게 만들었다.

사례 4) 약물 중독과 본드 흡입
  저는 지금까지 세상의 부정적인 모습만을 바라보면서 너무나 동떨어진 세계에서 살아 온 것 같습니다. 삶에 회의마저 느껴 두 번이나 자살을 시도해 보았습니다.
 …제 나이 열 아홉에 세상의 모든 환각을 다 알아 버린 것 같습니다. 중2때 친구들의 권유로 본드와 술, 담배를 알게 되었습니다. …이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먹게 된 ‘루비킹’과 ‘너미널’이란 환각제를 지금까지 먹고 있습니다. …이제 주위의 친구들은 대마초의 일종인 ‘마쟁이’라는 것도 서슴없이 피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것만은 하지 않고 있습니다. …저에게 도움을 줄 수 없습니까 ? 전 지금도 제 마음을 다스릴 수가 없습니다. 그저 담배만 뻑뻑 피우고 있고 본드 생각이 납니다. (고2 학생)

  기성세대들은 ‘우리는 이렇게 살지만 너희는 이렇게 살아서는 안된다.’‘ …하지 말라’고 여전히 외치고 있다. 긍정적인 면을 보면 기성세대들의 참회일 수도 있고, 靑少年에 대한 더할 수 없는 아낌일 수 있다. 그러나 부정적인 면을 보면 이러한 말들은 순전히 자기 정당화의 표출일 수밖에 없고 그 과정에서 靑少年은 기성세대들의 자기 정당화를 위해 동원된 수단일 수밖에 볼 수 없는 것이다.
  이외에도 靑少年의 문제만 따져 본다면 많이 나올 것이다. 가정 문제, 열등감, 경쟁, 친구, 물질, …등등. 그러나 이러한 문제가 끊임없이 발생되고 나타나는 것들은 무엇보다도 먼저“그들에 대한 신뢰와 희망과 사랑의 상실이었기 때문이다.” 고 말 할 수 있다.

 

      제4장 교회교육을 통한 청소년 교육


  비행문제이든 性에 대한 문제이든 그리고 그리스도이든, 비그리스도인 이든 간에 공통의 인식은 이 시대의 가장 큰 문제는 性의 윤리와 도덕성의 결여라는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사실 목회의 목표라고 할 수 있다. 즉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사람들을 구원 시킨 다음에 이들을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천국 백성으로 키워 나가는 것이 목회의 목표요 본질인 것이다.

   1.학교敎育dp 대한 이해

  오늘의 우리 사회가 가지는 敎育的 기능이 부정적인 것은 더 논할 나위가 없다. 배금주의, 물량주의, 그래서 물질적 성공 위주의 삶만 노래되는 것이 敎育이 부정적인 면이라 할 것이다. 오늘날의 학교敎育 중심 제도는 현대 사회의 새로운 敎育的 요구에 성공적으로 대응하고 있지 못하다. 이제 학교敎育은 종래의 학교敎育이 곧 敎育의 전부라는 절대적인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니다. 학교敎育은 더 이상 敎育의 전부를 의미하지 않는다. 다만 일정한 시기에 체계화 된 지식을 가르치는 것이다. 학교 본위 敎育 체제 아래에서의 敎育 시기를 보면 이론상 기간 학제는 각급 학교에 해당하는 연령이 정해져 있다. 초등 학교는 6세~11세, 중학교는 12세~14세, 고등학교는 15세~17세, 대학교는 18세~21세 등으로 정해져 있어서 가능하면 해당 연령에서 敎育을 마치도록 전제되어 있다. “현재의 학교敎育 제도는 어떠한 이유에서건 일단 학교 노선에서 이탈하면 되돌아가기가 어렵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성인들이 뒤늦게 敎育을 시작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실현성이 매우 낮다. 결국 현재의 학교敎育은 성인과 노인 층을 위한 敎育的 욕구를 충족시키기가 어렵게 되어 있다.”
  敎育 기회 분배의 측면에서 보더라도 학교敎育은 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 근대 시민 사회로 넘어 오면서 신분제도가 무너지자 사람들의 자질과 능력을 가려 줄 선발 장치가 필요 해 졌다. “즉 귀속 주의가 더 이상 정당화되지 못하면서 개인의 자질과 능력을 입증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게 되었고 그 장치로서 학교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학교는 능력과 노력에 따라 성적을 매기고 진급시키는 업적주의의 전형적 표현으로 보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敎育 기회의 분배가 개인의 귀속적 배경에 따라 불평등하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비판이 높다. 학교敎育은 자유주의적 敎育 이상, 즉 새로운 세대를 사회에 통합시키고 학교敎育을 통해 사회 평등을 구현하며, 인성의 조화로운 발달을 통해 자아실현을 이루고자 하는 세 가지 중요한 기능을 충족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자본주의의 체제에 순치 된 노동력을 양성함으로써 기존의 계층 구조를 정당화하고 불평등을 재생산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학교는 모든 계층의 사람들에게 평등하게 敎育 기회를 분배함에 있어 기본적인 결함이 무엇인지 대안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고, 불우층이나 소외 계층의 敎育을 책임질 수 있는 정책이 없는 한 敎育의 부정적인 기능은 더 확대될 것이라고 본다.
 오늘의 敎育 현실에서, 제도나 학습 구조나 내용 등에서, 敎育이 인간의 성숙, 인간다운 인간이기를 기한다고 하는 것은 敎育 자체에 대한 형이상학적 본질의 개념적 잔영일 뿐 실제는 아니다. 사회 구성의 효율적 배분을 위하여 靑少年의 가능성은 기계적으로 재단된다. 사회 구성의 성층을 위하여 敎育의 한계가 과해진다.
 “가능성은 공간적, 시간적 제약으로 구체화되면서 그 제약은 구체성, 곧 가능성의 현실화로 설명되고 그것이 삶을 영위하는 인간의 정체성이라고 설득된다. 그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 과정 속에 깃들 수 있는 靑少年의 비인간화 가능성이다.”
  과거의 사회는 상부상조의 사회였으며 경쟁과 협동이 공존하는 사회였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아동기부터 경쟁을 요구한다. 경쟁 사회에서 조기에 경쟁을 체험케 함으로서 앞으로 닥칠 계속되는 경쟁에 대처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지만 현재의 경쟁은 살인적이다. 내신 성적 때문에 옆에 앉은 친구와도 적이 되고 경쟁에 탈락(입시에 낙방)하면 인생의 낙오자가 된다. 최소한 대학 입시까지 靑少年기의 모든 욕망을 억누르고 모든 인간 敎育을 포기한 채 입시 경쟁으로 내몬다. 여기에 낙오하고 탈락하는 대부분의 靑少年은 근원적으로 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이에 저항하고 소외되고 일탈 행동 가능성의 문제를 가지고 있다고 보아야 하며 경쟁에 이기고 성공하는 많은 학생도 신경증이나 열등감 등의 문제에 시달리게 된다.
  그러면 학교교육의 부족을 메꿀 대안이 없는가? 현대의 학교 敎育은 새로운 敎育 욕구를 만족시키기에는 너무 형식화되어 있으며, 급격히 팽창하는 大衆 敎育에 부응하지 못함으로써 전인적인 발달을 돕지 못하고, 학교 敎育 울타리 밖의 사람들에게 계속 敎育의 학습을 제공하지 못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실제적 생활 경험을 통한 적합성 있는 敎育을 되살리고 개인의 요구와 자발성을 기초로 인간 중심의 敎育을 소생시키며 사회 변동에 계속적으로 재 적응하고 나아가 근대화에 필요한 가치관을 불어넣기 위해서는 학교 敎育의 기능을 보완하고 인간을 재 사회시키며 사회 발전의 수단으로 작용할 수 있는 사회敎育이 요구된다.”  사회 敎育은 형식 敎育을 거의 받지 못한 靑少年들, 그리고 성인들에게 문명 퇴치를 비롯하여 직업敎育, 전문직에 대한 현직 敎育, 계속 敎育 등 다양한 敎育이다. 그러므로, 사회敎育은 사회 발전에 관련된 태도나 가치관을 전수하면서 새로운 지식과 기능을 敎育시킴으로서 학교 敎育과의 단절된 독자적 敎育이 아닌 서로를 연결하는 敎育이 되어야 할 것이다.

    2. 敎會 敎育의 기능과 역할

  학교敎育과 敎會 敎育은 敎育的인 면으로 볼 때 공통적인 면들이 없지는 않으나 엄밀히 따져 보면 서로 다르다. 다시 말해서 차원이 다르다는 것이다. 인본주의 중심으로서 사회에서 적응을 하고 성공하기 위한 수단을 가르칠 목적으로 하는 것이 학교敎育이다. 또한 결과는 무신론이다. 이와는 상반되게 敎會 敎育은 신본 주의로서 가정, 사회, 敎會 등의 모든 행동과 실천이 결국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목적과 목표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신론을 배제한 신본주의 즉 하나님 중심이다.
敎會 敎育은 전인으로서의 인간의 전 생애를 포괄하는 과정이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근본적인 변화를 체험한 사람은 그의 전 생애를 통하여 성화의 과정을 밟아 나간다. 이 성화는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사람이 관계하는 모든 사물과 인간, 그리고 그가 접하는 모든 환경 속에서 일어나는 삶의 변화를 말한다. 그러기에 基督敎 敎育은 전 생애를 포괄하며, 인간의 삶이 영위되는 모든 영역과 관련된다.
  위로는 하나님을 섬기고, 옆으로는 이웃에 대한 바른 개념을 정립하고, 선교의 사명을 새롭게 하며, 자기 자신에게 주어진 재능을 개발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그 목적을 두어야 한다. 그러므로 敎會 敎育은 그 자체가 평생 敎育的 속성을 갖는다.
  敎會 敎育의 목적은 누가복음 2장 52절에 있는 말씀을 중심으로 하여 그리스도 화한 인격을 4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첫째, 우리의 육체가 성령이 거하시는 전이라는 사실(고전 3 : 17)을 알도록 하는 신체적인 목적(Physical goals)이다.
둘째, 성령 충만(엡 5 : 18), 인내(살전 5 : 14), 순종(골 3 : 20), 그리스도로 옷 입음(롬 13 : 14), 온유(롬 12 : 12), 절제(롬 12 : 21), 거룩함(벧전 ! : 15 ~ 17)의 성품을 이루어 가도록 하는 것이 敎育의 영적 목표(Spiritual goals)이다.
셋째, 헛된 것을 피하며 (딤전 4 : 7 ; 6 : 20) 생각의 정확성과 사상의 독립성(골 4 : 6 ; 엡 5 : 6)을 길러주며 그리고 계속적인 신앙을 갖는 것이(롬 1 : 17) 정신적 목적(Mental goals)이다.
넷째, 타인을 존중하며(롬 14 : 13), 분쟁과 대적함(고전 4 : 6)이 없이 선한 친분(고전 5 : 13)을 맺도록 함으로써 마침내 빛과 소금의 역할(마 5 : 14 ~ 16)로 살도록 하는 것이 敎會 敎育의 社會的 목표이다.
그러면 왜 敎會 敎育이 필요한가? 靑少年 시기에 올바른 가치관을 형성하여 그 가치관이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고려해 볼 때 “靑少年기의 적절한 신앙 敎育은 基督敎적 삶의 형태를 가지도록 하며 성숙한 그리스도 인의 삶을 살 수 있도록 한다는 점에서 敎會 敎育이 필요한 것이다."  오늘날 靑少年의 敎會 敎育의 필요성은 社會的, 文化적인 요소에서 찾아 볼 수 있다. 퇴폐적인 상업주의로 靑少年들이 물들어 가고 그 영향으로 심각한 문제들이 발생되고 여기에다 서구의 文化와 왜색 文化까지 합세하여 靑少年들을 육체적, 정신적으로 피해를 안겨다 준다. 과거에 비하여 靑少年의 범죄에 있어서도 심각한 지경에 이른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자신을 낳아 준 부모를 상해 및 살인까지 범하는 패륜적인 범죄가 우리들의 현실을 안타깝게 하여 靑少年기의 의미조차도 상실해 가는 것이 우리의 현 주소이다. 그러기에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하여 靑少年들을 영육간에 건전한 가치관을 심어 주며 신앙을 통한 敎會 敎育이 절실히 요구되는 것이다.

 

   3. 대안으로서의 敎會 敎育

1) 聖經교육의 중요성
  목회자, 靑少年을 담당하고 있는 교역자, 그리스도인들 모두가 이 말에 부인하거나 부정적인 표현이 없을 줄 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다. 모든 신학이 聖經으로부터 출발되듯이 靑少年에 관한 敎會 敎育도 마땅히 聖經의 조명을 받고 聖經으로부터 출발되어야 한다고 본다. 聖經은 敎育에 관하여 분명히 언급하고 있다.
“모든 聖經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敎育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라”(딤후 3 : 16 ~ 17)
여기에는 敎育의 목적도 잘 드러내 주고 있다고 본다. 그것은 敎育 자체가 하나님의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기 위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야 한다는 간접적인 암시가 있다는 것이다.
구약을 보면 포로 전 시대에는 사무엘 선지자가 聖經 학교를 세웠고(삼상 9 : 9 ; 10 : 5, 7) 엘리사가 선지자 학교를 세워 제자들을 양성하였다.(왕하 2 : 3 ~ 5 ; 4 : 38 ; 6 : 1) 포로 후 시대에는 느혜미야가 靑少年들에게 聖經을 가르쳤으며(느 8 : 1 ~ 8), 말라기 선지자로부터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400여년 기간동안에는 가정에서 부모가 가르쳤다. 아울러 회당에서 랍비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하였다.
  예수님 당시에 예루살렘 성안에는 약 460개의 聖經 학교가 있었다고 한다. 신약의 4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사역을 살펴보면 예수님 역시 회당이나 성전에 들어가서 가르쳤음을 알 수 있다.(마 4 : 23 ; 막1 : 21 ; 눅4 : 15 ; 마9 : 25 ; 막6 : 2 ; 12 : 13 ~ 14 ; 요6 ; 59) 예수님은 靑少年뿐만 아니라 어린이들에 대해서도 동일한 관심과 사랑을 표현하셨다.(마 10 : 13 ~ 16) 예수님은 어린이들을 축복하셨고 안수도 하셨다. 어른들은 구약의 전통에서 미성년자들을 제한했지만 예수님은 오히려 그들을 어른들의 모범으로 세우신 것이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靑少年들은 어른과 똑 같은 인격이고 주체이었다. 이외에도 우리는 敎育에 관하여 얼마든지 聖經으로부터 돌출하여 언급할 수 있다.
  개혁주의적 敎會 敎育은 인간의 방법이 우선시 되는 것이 아니라 聖經으로부터 기초와 전제를 함으로서 성령의 조명이 반드시 있어야 될 것이며 다음으로 우리들이 敎育에 대한 최선의 노력이 다고 본다.

   2) 靑少年 신앙 성장에 관심 있는 敎育
  일반 社會的 개념에서 문제아라고 낙인찍히는 靑少年들은 대부분 가정과 사회에서 탈선과 물의를 일으키는 부류라고 말할 수 있으나 敎會 내에서 문제의 靑少年들은 근본적으로 신앙이 없거나, 있어도 신앙 성장이 멈추는 부류이다.
  대부분 敎會에서 靑少年의 敎育은 미흡하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근본적인 신앙 성장의 敎育이나 방안이 취약하다고 볼 수 있다. 예배 시간에 쫓기는 듯한 聖經 공부, 찬양 연습 등이 매주일 반복적으로 이루어진다. 靑少年들을 위해 큰 행사이다 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일년에 두 번 실시되는 하계, 동계 수련회이다. 좀더 신경을 쓰는 敎會는 문학의 밤, 친구 초청 잔치, 등 1박2일에 이루어지는 행사가 고작이다. 이런 행사로 말미암아 靑少年의 敎育과 부흥을 바라다 보려는 것은 무리가 따른다. 물론 그 행사의 양과 질에 따라서 敎育의 패턴도 달라지겠지만, 근본적인 신앙 성장을 꾀할 수 있는 대안이 없이는 靑少年들에게 하나의 형식적인 전례 행사밖에 볼 수 없는 것이다. 신앙 성장은 단 시일 내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적인 敎育이 병행되어야 만이 신앙의 성장이 오를 수 있다.
  3) 靑少年들로 하여금 의미 있는 봉사 기회들을 제공하는 것도 가치 있는 敎育이다.
  靑少年들이 敎會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의 요소중 하나는 敎會가 너무 교리적이어서 고리 따분하다는 것이다. 학교敎育의 대부분이 암기 위주의 공부이기 때문에 지칠 대로 지친 그들에게 敎會에서도 딱딱한 교리만을 가르치고 암기 위주의 방식으로 흘러간다면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다.
  복음은 구원의 진리만을 전파하는 이론적인 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실생활에서 복음의 열매가 맺어지는 전 과정이 복음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들이 신앙의 敎育의 바탕으로 敎會 안에서나, 사회에 의미 있는 봉사를 제공받을 때 그 일로 통하여 靑少年이 삶의 보람을 찾게 되고 가치관 형성에 좋은 영향을 미칠 것이라 본다. “이웃 사랑이란 직접적으로는 다른 세 영역의 피조물(무생물, 생물, 동물)과 다른 인간을 인간으로서 존중하는 것을 본질로 한다. 이웃 사랑은 창조 세계의 다양성과 독특성을 분별(discern) 하는 데서 출발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 질서와 敎會라는 새로운 공동체의 본질을 인식하고 공동체적 삶과 이웃사랑에 관심을 靑少年들로 하여금 敎育의 실천 속에서 의미 있는 봉사의 기회들을 제공하는 것도 의미 있는 敎育이라고 보겠다.
  4) 가정敎育
  敎會 敎育 敎會에서, 가정敎育은 가정에서, 이렇게 구분 짓는 것보다 敎會 敎育의 연장인 가정에서도 敎育이 필요하다. “실제로 가정敎育과 가정에서의 분위기야말로 敎育의 기본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망각하고 있는 부모가 많다. 부모敎育을 위한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이를 보급할 수 있는 방안도 연구하고 실천할 필요가 있다.” 자녀를 위한 부모들에게 세미나, 연구 발표회, 사례 발표 등을 실시하고 敎會 안에서도 더 이상 靑少年들을 “경쟁심만을 길러 주어 경쟁을 위한 인간 기계로 만들어서는 안된다. 폭 넓은 사랑과 바른 인간관계속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인성을 계발해 주어야 한다. 사랑을 받은 자만이 사랑을 줄 수 있다. 부모들이 사랑을 먼저 보여 주면서 자녀들의 인성을 계발해 주는 것이 진정한 자녀 敎育이다”
“가정은 각 가족들을 양육하도록 하나님께서 세우신 특별한 유기체이다.” 그러기에 자녀들을 敎育기관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가정에서 먼저 사랑이 우러나오는 신앙과 敎育이 나올 때 자녀들은 힘과 긍지를 느끼면서 하나님의 백성과 더불어 조화 있는 관계를 유지할 것이며 나아가서는 예수그리스도께서 주신 사랑 때문에 세상 안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담당 할 것이므로 가정敎育은 비중 있는 敎育이라고 할 수 있다.

   5) 만남의 敎育
  “ 靑少年은 분명한 인격체이다. 그들은 신앙적으로 지도하는 데 있어서 많은 지도자는 민감해져야 한다. 敎育은 가르침을 의미하는데 이 가르치다 는 것은 배우는 것을 도와주는 것이다.” 라고 정의할 수 있다.
“무엇보다 基督敎 敎育은 본질적으로 만남을 조성시켜 주는 일이다.”즉 “靑少年과의 대화를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 이 대화는 인격적 대화를 의미한다. 교사는 그들의 敎育에 만남을 이끌어 들이기 위해 노력해야 하며 그러한 만남을 통해서 궁극적으로 靑少年들의 전인적인 敎育이 이루어져야 한다. 만남의 敎育은 인간의 영혼과 영혼이 맞 부딪히며 개성적인 삶으로 서로 영향을 줄 때 결과적으로 되어 나오는 인간의 영적, 도약적 변화 그 자체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진정한 만남의 자리는 대화가 일어나는 자리이다. 대화는 교사가 일상적으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깊은 내면적 고뇌, 즉 소외가 인간의 진정한 문제이며 이 속에 있는 인간과 복음이 서로 대할 수 있는 매개를 설정해 주는 것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깊게 들어가면 상담에 관한 구체적 훈련이 준비되어져 있어야 한다. 상담적 훈련은 만남에 있어서 가장 효과적인 준비 방법이다.
   6) 영적인 敎育
  “ 하나님과의 진실한 인격적 관계는 예수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삶을 사는 靑少年들에게는 정서적일 뿐 아니라 영적인 것이다." 이러한 신앙 생활은 성숙함이 있는 동시에 미숙함이 있을 수 도 있다. 그러한 것이 십대들의 생활에 깊이 영향을 주고 있지만 아직은 기복이 심하며 결실의 시기와 그렇지 못한 시기에 따라 좌우되고 실수를 범하거나 의혹을 품으며 이상주의와 합리주의에 빠지게 된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십대들의 응답 속에서 많은 모순이 예상될 수 있다. 그러한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기독 靑少年들과 뜻 깊은 관계를 갖게 되며 예수님과 그의 말씀에 따라 기본적인 생활을 하게 되고 이러한 과정 속에서 차츰 성숙될 것이다.
  靑少年들을 위해 敎會에서는 특별한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여러 가지 신앙 훈련을 할 수 있으나 결코 그러한 것들만으로는 목표가 성취되지 않는다. 도리어 이러한 것은 역반응을 일으키며 靑少年들이 敎會를 떠나게 되고 하나님과의 참된 교제를 갖지 못한 채 멀어지게 하는 고정된 악순환으로 나타날 수 있다.
  靑少年들이 하나님께 간구하며 영적 성장을 가져올 수 있도록 하는데 무엇이 필요한가 ? 聖經은 분명하게 대답한다.‘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골 1 : 27), 즉 하나님과의 교제이다. 십대들이 자기 지도자(본 받을 만한 모델)의 삶 속에서 예수님을 발견하게 될 때 영적 敎育이 이루어 질 수 있다.

 


    4. 靑少年 복음화와 교회교육

  1)상담을 통한 교육
  신앙을 가졌다는 이유 때문에 친구 관계 속에서 혹은 가정에서 얼마든지 갈등을 경험하게 된다. 따라서 이에 적절한 도움을 제공해야 한다. 또한 어린 시절 주입식으로 배운 敎會에 대한 의문에도 답변을 하면서 신앙에 유익을 주어야 하며 실제적인 신앙생활로 인도 할 필요가 있다. 靑少年기에 나타나는 상당한 특징들을 신앙과 만남에 있어서 많은 충돌이 불가피하다. 따라서 靑少年들을 향한 敎育的 상담은 뚜렷한 인도의 역할에 더욱 필요하다. 예를 들어 이들이 많은 갈등 가운데 외국에서는 허용되어지는 금주와 흡연 문제, 이성 교제, 진로 등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된다.
  많은 靑少年들에게 예외 없이 나타나는 문제는“열등감”문제이다.
특히 신앙적 갈등이 열등감과 연관되어 질 때 잘못된 신앙관과 성격이 형성되기 쉽다. 또 한가지 문제는 敎會 안에서 나타나는‘불신’문제이다. 그런데 대부분 靑少年 지도자들은 학생과의 상담을 부담스럽게 여긴다.
   敎會 밖의 불신 靑少年들에 대해서도 상담을 통하여 도울 수 있다. 그리고 그 역할은 1차적으로 전도가 그 목표이다. 따라서 불신 靑少年들을 향해서 敎會는 그들을 敎會 안으로, 일단 들어오도록 노력해야 한다. 靑少年의 공통적인 문제인 입시, 이성 교제, 인생의 문제 등에 대한 상담 교실 운영도 그 방법일 수 있다. 가장 어려운 대상은 敎會 밖의 靑少年 가운데 ‘비행 靑少年들’에 대한 문제이다.
  靑少年들의 범법 행위는 범죄(Criminal)라고 하지 않고 비행(Delinquency)이라고 부른다. 해가 거듭 될 수록 靑少年들의 강력 범죄가 증가하며 각종 靑少年들의 강력 범죄가 증가하며 탈선이 증가되고 있다. 특히, 폭력, 마약, 가출, 자살 등의 靑少年 문제는 사회의 문제가 되고 있다.
  靑少年을 이해하려는 시각의 변화와 그들을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노력이 병행되지 않는 한 靑少年들을 그리스도안에서 올바르게 양육할 수 없음을 느끼게 한다.  학문적인 뒷받침도 중요하기에 靑少年 敎育을 위한 전문 사역자들이 소중한 시대임이 틀림없다.

   2) 靑少年 복음화에 대한 실제적 제안
  靑少年의 복음화를 이루어 나가기 위해서는 가장 기본적이고 효과적인 것이라 할 수 있는 방법은 "십대로 하여금 십대에게 말하게 하는 (Teen telling Teen)또래 전도이다."  靑少年들은 같은 또래와의 관계 속에서 성장하고 발달한다. 부모보다 많은 시간을 친구와 함께 보내고, 친구에서 더욱 동조되며, 친구와의 관계에서 많은 社會的 능력이 배양되고 동시에 심리적 지지를 얻는다.
  그러므로 중생한 그리스도인 靑少年으로 마땅한 사명으로 알고 가까운 이웃(친구들)에게 전도하는 靑少年 복음화의 기본적인 방법이다. 대다수의 비基督敎 靑少年들이 基督敎인들은 자신들의 종교를 강요한다고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여, 불신 친구들에게 자연스럽고 부담되지 않게 복음을 소개하는 법을 배우고,  연구하며 훈련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삶의 문제가 뒤따를 때 가능하고 서로를 신뢰할 수 있는 가까운 친구들을 전도하는 것이 더욱 효과적이라는 사실 역시 명심해야 할 것이다.
  상담에 있어서도 靑少年들은 자기 또래와는 허물없이 터놓고 이야기를 하지만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연령층이나, 상담 자에게는 자신의 내면적인 것을 보이는데 부담스러워 한다. 그러므로 "친구들을 상담해 줄 수 있는 靑少年 또래 상담자 敎育" 으로 통하여 복음을 전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제자 훈련을 실시해야 하는데 다만 하나의 프로그램과 형식적인 제자 훈련은 복음의 성과를 거둘 수 없다. 체계적이고 집중적인 제자 훈련이 필요하다. 잘 훈련된 제자가 같은 도래들을 복음의 제자화로 만들 수 있는 훈련의 성과가 크기 때문이다. "제자 훈련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 영적인 성숙에 이르러 그가 영적인 재생산을 할 수 있도록 성장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敎育은 반드시 이론과 실천이 병행되어야만 한다. 신앙을 가진 우리 그리스도인 자체가 믿음과 실천을 의미하기 때문에 제자 훈련의 이론적인 동기도 관심을 가져야 되나 아울러 실천적인 결과 즉, 나타나는 열매에도 관심을 가져야 된다고 본다. 다음으로는 基督敎 학교와 그리스도인 교사들을 통한 靑少年 복음화 사역이다.
  靑少年들은 자기 또래들에게 많은 영향을 받지만, 영향력에 있어 그들의 학교와 교사는 무시할 수 없는 존재이다. 신실한 그리스도의 교사는 많은 학생들에게 학과의 내용과 더불어 인격과 신앙의 성장을 위한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할 수 있다.
  실제적인 靑少年 복음화를 위해서 "지역 敎會가 敎會 중, 고등부가 일반적으로 하는 활동을 넘어서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이다" 靑少年의 대부분이 공부와 성적 문제에 고민하고 있는데, 敎會가 활용 가능한 공간과 인적 자원을 활용하여 공부방과 도서실 운영하는 것이다. 지역 사회에 중, 고등부가 할 수 있는 가능한 범위 내에서 적극적인 봉사와, 敎會의 敎育관을 靑少年들의 도움에 잘 활용한다면 基督敎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과 편견을 가진 지역사회의 사람들에게 새로운 이미지를 심겨 주는 데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고 본다. 그리고 敎會 자체에 적지 않은 부담감을 가진 靑少年들이 敎育관 시설을 잘 활용함으로서 그들에게 자연스러운 복음을 접할 수 있을 것이며, 나아가서는 靑少年들의 영혼 구원에도 많은 열매를 맺으리라 생각하는 바이다.
 

제5장   靑少年의 基督敎 윤리관 정립을 향한 제언

  아무리 좋은 聖經적 윤리관을 제시하고 정립하였다고 할지라도 그것에 靑少年의 삶에 있어서 형성이 되지 못한다고 하면 하나의 이론적 지식만을 보존한 윤리 지침서밖에 되지 못한다. 가장 큰 문제는 靑少年의 삶에 얼마만큼 형성되고 작용하느냐 것이다.
    1.실제적인 접근과 대안법
 
청소년들에 대한 이해와 그들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사랑이 가장 큰 해결책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론이고 실제적으로는 그들을 향한 배려와 가르침 그리고 프로그램으로 나타나야 할 것이다.

  1)성문제의 대안
먼저 성문제를 중심으로 살펴 본다면 
  性에 대한 敎會의 실질적인 고찰이 필요하다.
  현대 사회의 性文化는 과거에 비해 개방적으로 흘러가고 있다. 급변하고 있는 우리의 性文化는 그 변천 과정에서 비판되어야 할 많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깊이 있는 윤리적, 심리적 성찰이 행해지지 않고 있는 상태에서 많은 靑少年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 물론, 이러한 변화는 개인의 욕구를 존중하지 않았던 과거의 性 윤리에 대한 하나의 도전임에 틀림없다. “현대 性 文化가 갖고 있는 개방성에는 이기주의가 아닌 진정한 개인주의를 갈망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긍정적으로 평가될 수 있는 면이 있다.” 그러므로 敎會는 性에 대하여 숨길 것만 아니라 靑少年의 性 문제를 실제적으로 다루고 그 영향의 정도를 파악하여 올바른 삶의 길로 인도하는데 연구와 관심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性에 대한 윤리적 지침이 있어야 할 것이다.
  基督敎인들은 敎會 밖으로만 나가면 혼전 性관계나, 혼전 임신, 낙태, 성병 등의 문제에 둘러싸여 있고, 그 누구와도 이런 문제들에 관해 마음놓고 이야기하지 못하는 고민에 빠져 있는 한편, 敎會 안으로만 들어가면 자신이 性的인 존재라는 사실조차 잊은 체 경건한 신앙인으로 가장한다.
  그러나 敎會는 더 이상 침묵을 지키면서 시간의 사치를 부릴 여유가 없다. 敎會는 올바른 性 윤리의 지침을 가지고 선포해야 할 것이다.“敎會는 性 차별 주의를 청산하고, 敎育을 통해 과거의 性에 대한 그릇된 인식을 바로 잡아 주는데 앞장서야 할 것이다.”
  형식적인 性敎育을 탈피하여 체계적인 性敎育이 시급하다.
  靑少年의 性 문제에 대해 하나의 세미나를 연상케 하는 형식적인 敎育은 실제로 靑少年의 마음에 심어 주지 못 할 뿐더러 삶의 질을 높일 수 없다.
  호기심이 강한 그들에게 막연하게 절제와 기다려라 는 것은 性敎育 개념은 더 이상 효과를 볼 수 없다. 근래에 미국 敎育계의 일부 반성 운동으로서“아예 처음부터 섹스를 거절하도록 강한 윤리 의식을 넣어 주어야 한다” 고 말한다.
그러므로 敎會는 이 문제를 이론상의 敎育이 아닌 근본적인 敎育으로 전환하여 聖經에서 증거하고 있는 性의 실체와 체계적인 性敎育을 실시하여야 한다. 막연한 敎育, 형식 위주의 敎育 프로그램, 유혹의 호기심 등이 지금도 저들을 병들게 하는 하나의 요소인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性 상품화로 靑少年의 정신을 유혹하는 것으로부터 基督敎는 강한 비판 의식을 가져 있어야 한다. 靑少年의 호기심을 이용하여 돈벌이하는 악덕 업자의 상업 위주성, 말초신경을 자극하여 性的 충동을 일으키는 음란물 등의 상업성에 대하여 강한 비판 의식과 함께 근절하는데 우리 모두 연합해야 한다고 본다. 性의 상품화에 가장 큰 피해를 보는 것은 말 할 것도 없이 靑少年들이다. 그러므로 책임 있는 우리 모두는 靑少年들의 性的 호기심이 다른 것으로 승화되도록 유도해야 하며, 가능한 한 性慾을 자극하지 않도록 할 의무가 있다.
  몇 몇 뜻있는 사람이나 단체들이 이러한 추방 캠페인에 활동하고 있지만 이제는 온 敎會가 이 운동에 참여 해 나갈 때 靑少年들의 미래는 한층 더 밝아 질 것이라고 본다.
  그리스도의 구속과 성령으로 말미암아 靑少年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다.
  흔히들 기성세대는 요즘 靑少年들의 긍정적인 이미지보다는 부정적으로 보려는 경향이 짙은 것이 사실이나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靑少年 자신들의 잘못이라고만 할 수 없다. 그것은“곧 기성세대의 축소판이고 기성세대가 넘겨 준 악의 유산이고, 社會的 구조적 제도에서 오는 악의 결과이기도 하다.”
  靑少年 지도자의 육성
  靑少年 문제를 해결하려 함에 있어서 지도자의 육성은 매우 중요하다. 어린이 敎育도 마찬가지이지만 敎會에서 靑少年 敎育은 거의 방치하다시피 한 경우가 많다. 예배 참석, 聖經 공부가 거의 주를 이루고 있고, 찬양대 연습이나 특할등이 겨우 뒤따르고 있는 실정인데 앞으로 이를 위해 전문적으로 훈련받고 봉사할 수 있는 인력을 확보하고 이들을 육성하는데 힘을 기울일 수 있어야 하겠다.
  靑少年 사회 활동의 확장과 文化 시설의 확보.
  복음주의 학생운동들의 활동을 단순히 선교나 신앙 敎育 차원에서만 靑少年들의 삶의 전반적인 분야까지도 지도 할 수 있도록 선교 영역을 확대하는 일이 필요 할 것이다. 또한 敎會가 敎育 차원에서 지원과 관심이 증대되어야 할 것이다. 위의 글로 통하여 靑少年 敎育이 매우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敎會는 이들을 수용 할 정책도, 인력도, 시설도 갖추고 있지 못하다. 이제 敎會는 敎會를 건축하는 경쟁 같은 양상을 지향하고 敎育관 시설을 보다 실제적으로 확보 할 필요가 있다. 敎育관 건축에서 반드시 靑少年 文化 공간을 확보해야만 한다. 연극 공연장, 친교실, 음악 감상실, 전시실 등을 마련하여 靑少年의 정서 함양에 도움을 주어야 한다. 상담실 등을 설치하여 이들의 고민과 갈등을 말씀과 신앙의 견고한 기초 위에서 지도할 수 있어야 하겠다. 또한 도서관 설치를 통해 신앙적인 도서를 나누어 볼 수 있게 하고 독서실을 두어 입시 전쟁에서 그리고 가정 환경의 불화로 갈등하는 靑少年들이 도움을 받을 수 있게 해야 한다.
 2)성경적 모범적 삶과 실천
 "基督敎인은 자격증을 받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것을 삶으로 보여주는 사람이다. 基督敎인은 특수한 위치에 놓이게 되며 그것을 행위를 보여야 하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또 基督敎인은 본래적 의미의 위치에서 벗어나 행위를 보이려 하거나 일상화하려는 유혹을 받는다." 그러므로 교역자, 敎育자가 첫째로 삶을 통해서 윤리의 모범을 제시해 주는 것이 敎育의 목표 중에서 하나의 요소로 작용할 수 있을 것이며, 실제적 보다는 형식적인 면만 내포하는 위험성에서 벗어나야 한다. 칼빈(Calvin) 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 윤리적 삶이라고 하였다. 基督敎 靑少年 윤리관은 삶의 형성에서 반드시 정립해야 하며 또한 그것이 나타나야만 基督敎적 윤리관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우리는 靑少年들이 基督敎적 윤리관을 소화해 내고 나타나는 것에만 즉, 너무 결과에 집착하는 공리주의와 실용주의에 빠져서는 안될 것이며 형식주의와 율법주의로 전락해서는 안될 것이다.
  요8 : 3-11에서 예수님은 간음을 죄로 인정함으로써 율법의 요구를 수용하셨으며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하심으로써 율법의 엄함도 인정하시고 계신다. 그러나 그는 율법 자체보다는 그것을 지키려는 사람이 평등하며 다 지킬 수 없으면서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기 위해서는 용서가 가장 좋은 길임을 보여 주신 것이다. 왜냐하면 용서는 사랑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용서는 화해의 길이요 다시 힘을 합해 공동체를 이루는 길이요 죄의 엄함에 대한 경험을 간접적으로나마 할 수 있는 길로서 다시는 범죄 하지 않고 사회의 질서를 지키면서 더불어 살아가는 기술을 배우는 것이다.
  靑少年들에게 聖經을 통하여 基督敎 윤리의 삶의 모형들을 제시함으로 윤리관을 정립하는데 또한 삶의 형성에 있어서 많은 도움이  되리라 본다. 基督敎 윤리는 어디까지나 聖經으로부터 돌출 되고 제시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세상의 윤리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진리의 독특성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님이 삶의 모형들을 靑少年들에게 제시해 주어야 할 것이다. 예수님의 삶의 모형은 사랑의 행위로서 생명을 얻게 하는 것이며 결과적으로 평화와 기쁨을 갖게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모형을 여기에 보인 것은 우리가 예수님과 같이 행동은 못하지만 닮으려는 은혜를 받고 노력을 하기 위해서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계명을 완성하는 길을 따르려는 예수님의 제자의 길이기도 하다. 이것은 하나의 뜻에 근거하여 많은 좋은 행위의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함이다.
  그리스도인 우리가 聖經의 말씀대로 삶속에서 基督敎적 윤리의 모형을 지속적으로 나타내고 제시한다면 그 자체로서 基督敎 윤리관을 靑少年들에게 심어 줄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사람과 더불어 , 사랑을 전하는 것이 이론의 윤리가 아니라 삶속에서의 윤리라서 基督敎 윤리관 토대로서 정립 될 것이 다고 본다.

    2.교회교육의 프로그램
 
  1) 基督敎 文化 창달
  基督敎 윤리관을 정립하고 제시하는 데에는 다양하고 좋은 의견들, 그리고 많은 도서들이 나와 있는 줄 알고 있다. 본인의 관점으로는 基督敎 文化 창달 으로서의 基督敎 윤리관을 정립할 수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인간 활동의 모든 영역들의 집합체가 文化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文化라는 말은 '경작하다' '개간하다('to till' or 'to cultivate')라는 뜻의 라틴어 'colore'에서 온 말이다. 이것은 땅을 가는 것 뿐만 아니라 정신, 마음, 또는 감정을 도야하는 것이라는 의미도 지닌다." 그러므로 세상 속에서의 文化를 基督敎 文化의 창달에 경작하고 개간함으로써 좀 더 적극적인 윤리관을 제시해 줄 수 있다고 본다.
  文化의 근본적인 행위자는 인간이며 그에 따른 활동이라고 본다. 文化의 긍정적인 요소와 부정적인 요소는 어떤 힘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사용하는 인간의 행위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만일 인간이 창조되지 않았다면 文化라는 것도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文化란 인간이 만드는 것이다."
  “基督敎 文化는 강제적 성격이나 폭력 방법을 사용하지 않으면서도 文化의 갈등을 일으키지 않고 오히려 본을 보이며 결의론적 모형을 만들어 모방하거나 응용할 수 있게 하는 방법도 찾을 수 있다. 基督敎는 그 文化 형성 과정에서 基督敎적 성격을 나타내야 하고 종말론을 통해 미래적 성격을 나타내야 하고 현장의 일반 文化를 基督敎적 시각으로 보면서 文化 창출에 기여해야 한다."
  물론 그리스도인이 세상과 더불어 공유하고 있지만 “세상과는 분리되되 세상 속에 있는 그리스도인이 일상의 삶 속에서 基督敎 文化가 무엇인지를 정의하고 그것의 한계를 규정짓는 일이란 결코 쉽지 않다.”
 세상의 일반 文化는 基督敎 文化를 상당히 부정적인 시각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존재라는 점에서는 같으나 근본적인 文化관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基督敎 文化는 인간의 행위 목표가 하나님 영광이지만 세상 文化는 인간의 행위 목표가 자기만족에서 오는 쾌락감으로 규정지을 수 있다. 基督敎 文化는 세상과 공유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세상의 일반 文化와 동화되는 것은 아니다.
  혁명적인 방법으로 권위나 무력의 수단으로 이루어 나가려고 한다면 치열한 전쟁 인식의 상처만 남길 뿐이다. 그렇지 않아도, 두 文化가 상당한 대립이 야기되고 있는데 위의 방식이 대입된다면 주님이 명하신 땅 끝까지의 복음화 실현은 어려울 것이다.
  세상의 일반 文化를 근본적으로 하나 하나씩 基督敎 文化로 개혁해 나가고 창달하는 것이 좋은 길이라 생각된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개혁한다는 자체가 세상의 文化와 동화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인식해야 할 것이다.“그리스도 안에 있는 삶과 세상 안에서의 삶이란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이 세상에는 우리의 삶에 작용하는 두 개의 서로 갈등하는 영향력인 두 가지 세력이 있다는 것이다. 이 세력들은 각기‘악의 왕국’(Kingdom of evil)과 ‘그리스도의 나라’(Kingdom of Christ)에 속한다. 삶이란 악의 나라와 그리스도의 나라 사이의 긴장 속에서 전개되는 것이다.”
  불의, 탐욕, 사기, 퇴폐,…등 이런 모든 문제들을 우리가 개혁해 나가야 하는데 진정으로 基督敎 윤리관 정립의 의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비聖經적, 비윤리에 그리스도인은 도전하면서 올바른 基督敎 文化가 창달될 수 있도록 유도해 나가야 할 것이다.
  “基督敎 文化는 다른 文化와 대립하여 基督敎 文化를 우월감을 가지고 우위에 두려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갈등을 느끼게 하려는 것도 아니었다, 즉 基督敎 文化는 자기 정체를 보존하면서 基督敎적 특성을 갖는 文化를 형성하여 삶의 양식을 만들어 보자는 것이었다. 基督敎 文化는 基督敎 복음이 현장에 정착하는 것을 말한다. 그것이 때로는 일반 文化의 옷을 입을 수도 있으나 근본적인 정신의 차이가 있다. 基督敎 文化는 반드시 基督敎인들에 의하여 형성되어야 하며” 그것이 삶으로 표출되어야 한다.
  靑少年에 基督敎 윤리를 정립하고 제시하는 데에는 다 같은 믿음의 백성들의 공동체 연합이 필요하다. 따라서 개개인이 우선 변화되고 변화된 그 아름다운 것을 靑少年에게 심어 주고 가르쳐 주어야 할 것이다.
  시대와 사람들은 변화하고 그 변화된 모든 문제들을 도전하고 개혁해 나가야 함으로 基督敎의 윤리관도 시대의 흐름 속에 끊임없이 발견하고 제시할 수 있는 연구가 앞으로도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오직 聖經으로 통하여 그리스도 인의 삶에 형성되고 표출되어 비 그리스도인에게 올바른 삶을 제시해 줌으로 하나님께 영광 되는 것이 基督敎 윤리의 목적이 아니겠는가 ?

 

                제6장    결 론.

  靑少年들은 희망과 소망을 품고 있는 존재들이다. 그들을 긍정적인 시각, 또는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기성세대들도 역시 분명 靑少年 시절을 겪고 왔다. 물론 그 시대의 상황과 여러 형편들은 지금 한창 피어나는 靑少年들과는 다르다. 문제는 시대의 변화가 아니라 얼마만큼 이해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그들을 이해한다고 해서 잘못된 것들조차 용납하자는 것이 아니다. 문제들에 대하여 너무 예민하게, 부정적인 시각부터 보지 말자는 것이다. 靑少年에게 있어서 敎育은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들에게 올바른 가치관을 제시하고 보다 나은 삶을 위하여 가르칠 수 있는 길이 바로 敎育이다. 특히 敎會는 영혼구원에만 치중하는 편파적인 길로 걷기보다는 사회 참여도 함께 병행되어야만 한다. 聖經의 진리를 전파하고 그 복음의 열매가 사회 참여로서 나타내야 한다고 본다. 靑少年을 위한 社會的인 도움과 함께 基督敎에서도 전진적인 활동이 어느 때보다도 절실히 필요한 시대임을 우리는 인식해야 할 것이다.
  한사람의 靑少年이 참다운 敎育과 신앙의 바탕 위에서 자라나서 훌륭한 일군이 되었을 때, 그 靑少年은 후배를 위하여 더 나은 아름다운 길을 제시해 줄 것이다. 이제 우리는 문제의식에 너무 집착하는 경향에서 탈피하여 아름다운 미래를 바라보는 소망의 확신 속에서 저들을 관심과 신앙의 敎育으로 자라 가게 하는데 아낌없는 노력이 있어야 하겠다.
  靑少年들은 우리와 멀리 떨어져 있는 존재들이 아니라 바로 곁에 있는 존재들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예수님의 사랑을 나누어주어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 인간의 수단과 방법으로 점철된 것으로 그들을 변화시키기보다는 신앙을 통한 가르침으로 인도해야 할 것이다. 기도의 눈물과 헌신의 노력이 우리에게 있을 때 靑少年들을 진리의 길로 인도 할 수 있을 것이라 보면서 본 論文의 결론에 가름하고자 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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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은혜동산 JESUS - KOREA
글쓴이 : 임마.누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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