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오웬의 성령론
- 개혁주의 성령론(이근수 옮김, 여수룬/1999)을 중심으로
Ⅰ. 존 오웬의 생애
'청교도의 왕자'라고 불릴 정도로 널리 인정받고 있는 존 오웬은 웨일즈의 좋은 가문에서 태어났다.1) 그는 청교도 운동의 중반기(청교도 3세대)2)로 접어든 1616년, 영국 옥스퍼드에서 북쪽으로 약8km 떨어진 스타드햄(Stadham)의 옥스퍼드셔(Oxfordshire)에서 청교도 목사인 헨리 오웬(Henry Owen)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헨리 오웬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존 오웬(John Owen)은 할아버지 때부터 벌써 명문으로 널리 알려진 웨일즈 지방의 청교도들이었다. 외가(外家) 쪽 할아버지 루이스 오웬은 웨일즈의 귀족으로, 북 웨일즈 메리오넷 지방의 대법관과 부장관으로서 중요한 일을 국왕과 상의하는 위치에 있었다.
할아버지 험프리 오웬은 루이스 오웬의 손녀 수잔과 결혼하여 열다섯 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가장 막내였던 헨리 오웬을 신앙적으로 잘 양육하였다. 헨리 오웬은 옥스퍼드대학교에서 언어, 철학, 신학을 공부하고 나서 옥스퍼드셔 지방의 스타드햄 교회 담임목사가 되었다. 그는 열심을 다해 교회를 섬기던 중 막내 오웬을 낳아서 교회에 바쳤다. 존 오웬은 세 명의 형제들과 한 명의 누이와 함께 성장하였다. 오웬의 유년기는 성실하고 능력 있게 목회를 하던 경건한 청교도 목사인 아버지 헨리 오웬과 어머니의 관심과 돌봄 속에서 신앙적인 훈련과 교양적인 훈련을 충분하게 받는 시기였다.
존 오웬의 학문의 기반
옥스퍼드 출신의 목회자이며 걸출한 신학자인 아버지와 외할아버지를 둔 가문에서 자란 존 오웬은 명석하고 천재성의 비범함을 보였는데, 그는 겨우 12살에 옥스퍼드 대학에 입학하여 10년간 공부를 하였다. 그는 학자의 기질이 있어 밤에 4시간의 수면만 취하면서 학문적 탐구에 몰두함으로 건강을 잃을까 염려하기도 하였다. 그는 종종 여가를 즐기기도 하였는데, 투창 경기를 즐겼으며 롱 점프 선수였고, 풀륫을 불었다.
웨일즈의 청교도 피가 흐르는 가문의 영향을 받아 하루 네 시간 만 잠을 자면서 너무나 열심히 공부하여서 훗날 건강으로 인해 많은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그는 옥스퍼드에서 성경 언어(히브리어, 헬라어는 물론)를 망라하여 라틴어와 고전어를 매우 우수한 성적으로 마쳤고, 학사와 석사과정을 거치는 동안에 많은 독서와 탐구 능력을 길렀다. 존 오웬은 청교도 정신을 물려받아 고상한 학문과 청결한 양심을 가정과 학교에서 배양하였다. 이러한 청교도 집안의 3대에 걸친 기도와 학문의 밑거름이 청교도 신학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작성하는데 기여한 많은 신학자들 중에서 가장 탁월한 인물로 기억되게 하였다.
그는 곧바로 학위를 받은 후, 대학의 설교자로 부름을 받아서 대학에 남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2년 선배인 리챠드 백스터(Richard Baxter)를 만났으며, 이 두 사람은 철저한 칼빈주의 신학자 리차드 십스(Richard Sibbs,1577-1635)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훗날 절친한 동료가 된 토마스 굳윈(Thomas Goodwin,1600-1679)과 함께, 오웬은 옥스퍼드 대학교로부터 명예 신학박사(doctor of divinity) 학위를 수여 받았다.
오웬의 생애적 변화
오웬은 정치에 있어서는 의회당을 지지하는 사람이었다. 오웬이 학문을 하는 동안 아버지가 경제적인 뒷받침을 해주지 못하였으므로, 그의 삼촌의 도움을 받았는데 삼촌은 왕당파를 지지하였으므로, 결국 둘은 결별하게 되었다. 그로 인하여 오웬은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그러나 런던으로 돌아오는 오웬에게 하나님께서는 평생 잊을 수 없는 귀중한 선물을 예비해 두고 계셨다. 그것은 다름 아닌 오웬의 영적 체험과 성숙이었다.
오웬은 옥스퍼드 대학시절부터 자신의 영적 상태에 대해 근심해 오던 것이 있었다. 그는 그 때까지만 해도 별다른 변화 없이 그대로였다. 물론 오웬은 이미 신학적 지식을 많이 갖춘 실력 있고 확신에 찬 칼빈주의자였다. 하지만 자신의 구원에 대해서만큼은 확신이 결여되어 있는 가련한 사람이었다. 오웬에게 있어 매우 중대한 변화는 친구들과 함께 런던을 방문하는 동안 당시 유명한 에드먼드 캘러미(Edmund Calamy) 목사의 설교를 들으러 성 미가엘 교회(St. Michael Church) 주일예배에 참석하게 되었을 때였다.
그날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캘러미 목사가 오지 않고 한 시골에서 올라온 무명의 목사가 설교를 대신하여 실망하게 되었다. 오웬의 친구는 다른 유명한 설교자가 설교하는 교회로 빨리 가자고 말했지만, 지칠대로 지쳐있던 오웬은 그냥 자리에 앉아서 설교를 경청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날의 설교는 마치 오웬을 위해 하나님이 예비하신 손길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전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오웬의 영적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
이 무명의 설교자가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신대 아주 잔잔하거늘”(마8:26)이란 본문으로 설교하는 동안 하나님은 이 방문 목사를 통해서 오웬의 심령에 구원의 확신 갖도록 역사하셨던 것이다. 일화에 의하며 런던에 돌아온 이후로 오웬은 여러 가지 상황의 변화 속에서 이전보다 더 격렬한 영적인 씨름을 하게 되었는데, 그에게 얼마나 깊이 영적 각성이 일어났던지 약 3개월간 다른 사람과 교제할 수 없었고, 대화도 나누기 힘든 상황이었다고 한다.
복음을 파수하는 실천적, 논쟁적, 구원론적인 신학자로
1644년, 오웬의 첫 목회지는 에섹스의 포드햄(Fordham)이라는 마을이었다.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에섹스에서 상업도시인 코게샬(coggeshall)로 사역지를 옮기면서, 그곳 출신의 메리 루크(Mary Rooke)와 결혼했다. 오웬은 1646년 주일에 출석교인이 2천 명인 런던의 한 교회에 초빙되었다. 이 시기에 그는 교회관의 많은 변화가 있었는데 장로교 제도보다 온건한 회중교회주의자가 되었다.
신학적 노선에 있어서 오웬과 당대의 청교도로 유명한 리챠드 백스터(Richard Baxter)와 존 호른(John Horne) 같은 탁월한 지도자들과 갈등이 있었다. 코게샬 (Coggeshall)에서 회중교회 목회를 하던 1648년, 오웬은 백스터와 논쟁을 하게 되는 데, 그의 저술이 상당히 반율법주의 경향을 담고 있다는 비판을 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칼빈주의자들 사이에 아주 흔하게 벌어지던 논쟁이 바로 반율법주의 논쟁이다. 오웬은 “구원은 거룩하신 예수 안에서의 선택이다”(salus electorum, sanguis Jesu)을 발표하였다.
1648년 6월에 페어팩스(Fairfax) 장군은 콜체스터(Colchester)를 포위하였다. 그때 오웬은 군인들을 위한 설교 초청을 받았다. 그는 많은 장교들과 친분을 맺었는데, 그중에는 올리버 크롬웰의 사위인 헨리 아이어턴(Henry Ireton)도 있었다. 오웬의 은사는 곧 소문이 퍼져 의회에 초청을 받았고 의회에서 가장 선호하는 설교자가 되었다. 그는 올리버 크롬웰의 군종으로도 임명되었다. 그는 14년간 크롬웰과 함께 영국의 개혁에 동참하게 되었다. 크롬웰은 오웬을 데리고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로 데리고 다니면서 군인들에게 설교를 하게하고, 점령지의 종교적 상황을 판단하고 크롬웰의 정치를 신학적으로 뒷받침하도록 했다. 이러한 활약에 힘입어서 크롬웰에 의해 1651년 의회파가 승리한 후에 하원의 투표에 의해서 장로교회 지도자였던 레이놀즈 박사를 제치고 옥스퍼드 ‘그리스도의 교회’ (Christ's church) 교수회장으로 선임되었다. 오웬의 탁월한 행정력은 눈부신 업적을 남겨놓았으니, 최고의 학자들을 초빙하여 대학을 맡기고 경건과 신앙심의 고취는 물론, 일반 교육수준을 크게 높이는 등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하였다. 많은 인재들이 큰 감동을 받고 배출되었다.
그는 마침내 크롬웰의 궁중목사가 되었다. 1652년, 그는 옥스퍼드 대학교의 부총장이 되었다. 다음해에는 성직자 임명과정을 감독하는 감독관으로 임명되기도 하였다. 그가 부총장이라는 직책은 각종 행정을 책임지는 자리였다. 그는 6년간의 재직 기간에 신학, 설교, 교리문답, 기도를 중심으로 살았다. 오웬은 옥스퍼드 시절 여러 권의 설교집과 강의서, 논쟁적인 글들, 주석, 교리 연구서를 남겼는데, 그의 저작이 지니기 가치와 중요성은 실로 막대한 것이다. 옥스퍼드의 질서는 약한 편이었지만, 오웬은 관대하면서도 확고했기 때문에 효과적인 행정을 할 수 있었다. 하나의 에피소드가 있는데 토론 때 한 학생이 상스런 말을 하였고, 그는 경고를 받았다. 그래도 말을 듣지 않자 오웬 자신이 그 학생을 힘으로 강의실에서 밖으로 내쫓았다고 한다.
오웬이 옥스퍼드를 떠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당시 대학의 행정자들을 지배하고 있던 대주교 윌리엄 로드 (William Laud) 가 로마가톨릭에서 내려온 온갖 미신적인 장식과 가톨릭적인 의식을 강요하면서, 거기에다가 새로운 수리를 하면서 온갖 장식을 고치고, 새 동상을 세우자는 고압적인 압력을 행사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청교도들의 분위기는 반발하려는 기운이 감돌자, 젊은 오웬은 가장 앞장서서 이러한 정치 목사의 행태에 비판을 가하고 강력히 거부하는 운동을 전개한 나머지, 학교의 설교목사직과 강사직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로부터 청교도들은 ‘신성의 특권’과 ‘고상한 양심의 자유’를 침해한 행동이라거나, 마땅히 거부해야할 인간의 명령에 대해서는 철저히 거부해 오고 있었다. 화형 속에서도 굴하지 않았던 리들리(Ridley)와 라티머 (Latimer) 목사를 높이 추앙해 왔던 것이다. 대주교 로드(William Laud)는 상하 구조의 국가체제를 따르는 ‘고교회’ (High church)주의자였다.1)
1657년, 전제정치를 실현하려는 크롬웰의 욕망에 반대하여, 오웬은 크롬웰과 결별하게 된다.2)
청교도 운동의 최전선에 우뚝 선 칼빈주의 신학자
1658년, 오웬은 회중교회의 목회자 모임에 나갔다. 이 모임은 런던의 사보이 궁(Savoy Palace)에서 열렸다. 그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기초한 고백서를 준비하기 위해서 토마스 굳윈, 필립 나이, 윌리엄 브리지, 윌리엄 그린 힐, 조셉 카릴과 함께 대표로 임명되었다. 이것이 나중에 알려진 사보이 선언(The Savoy Declaration)이다. 청교도 신학의 절정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3)인데, 여기에 참여한 많은 신학자들 가운데서 가장 탁월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 존 오웬이었다. 1658년 사보이에서 독립교회 지도자들의 모임을 주선하고, 신앙고백서를 따로 작성하고, 오웬이 서문을 썼다. 그러나 1660년 올리버 크롬웰의 죽음으로 인해서 오웬의 생애는 급작스런 변화를 겪게 되는데, 부총장의 자리는 다시 레이놀즈 박사로 교체되었다.
신대륙 미국에서 장로교회가 회중교회를 핍박하는 일이 발생하자 이를 격렬하게 항의하였고, 하버드대학교의 총장으로 부름을 받았을 때에도 이를 지적하면서 거부하였다. 더구나 오웬의 철저한 비타협적 자세와 다른 독립주의자들의 입장으로 인해서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당대 영국에서 교회를 장악하고 있던 인물들은 거의 다 칼빈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장로교회 제도를 바꾸게 하거나 근본적으로 수정하도록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는 점이다.
올리버 크롬웰이 사망하면서 장로교도들이 찰스 2세를 다시 불러들여 왕정복고를 이루는 과정에서 독립파는 불리한 위치에 서게 되었다. 장로교를 국교로 삼겠다고 약속했던 찰스는 오히려 청교도를 핍박하기에 이르면서 이전과는 모든 상황들이 다르게 전게 되었다. 그는 약10년 동안 옥스퍼드 교수와 목사로서 최선을 다하였다.
1660년 3월 13일에는 감옥에 갇혀있던 존 번연 목사의 석방을 위하여 노력한 일로 인하여 다시 한번 고향 스타드햄튼의 교회로 물러나게 된다.
1662년 ‘통일령’(The Act of Uniformity)4)으로 2,000여명의 청교도 목사들이 강단에서 추방되었을 때, 오웬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 후 핍박이 계속되는 동안 핍박에 굴하지 않고 오웬의 저항도 계속되었다.
1673년, 그동안 장로교회와 독립파 회중교회의 목사들은 각 교구에서 자주 대립하였는데, 리챠드 백스터의 제안으로 장로교회와 독립교회가 연합하자는 운동에 오웬이 적극적인 노력으로 많은 많은 갈등이 해소되었다. 백스터는 그동안 오웬의 비타협적 독립교회 제도에 철저히 반대하여오던 지도자였다. 오웬은 가톨릭식으로 상하관계가 형성되는 교회의 교구제도에 극렬히 반대하였다. 한 교구 내에는 그 지역을 담당하는 하나의 교회만을 세우되, 이를 노회 단위로 모이게 하는 일에도 반대한 것이다. 개신교 진영의 교회들이 연합하는 일은 매우 절실하였던 과제였고, 공적인 일에 항상 관여하여 왔던 그는 즉각적으로 환영하며 참여하였다. 하지만, 1571년 의회는 비국교도들에게 관용을 허용치 않는다고 발표하여 고난과 어려움을 안겨 주었다.
1660년 왕정복고 이후 그의 남은 인생을 반 추방형식으로 집에서 지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그 기간은 목사요, 설교가로서 오웬의 문서 활동이 크게 증가하는 시기였고, 그의 저술은 우리 세대의 청교도 비국교도주의 사상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탁월한 하나님의 사람 오웬은 우리들이 말로 형언하기 어려운 고난을 겪었다. 그는 메리 루크(Mary Rooke)와 결혼 후 31년간 11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딸아이 하나만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았고 나머지는 모두 일찍 죽었다. 그나마 살아남은 딸의 결혼도 깨어져서 친정에 돌아와서 산 지 얼마 안 되어 결핵으로 사망했다. 오웬은 1676년 훌륭한 그의 아내 메리 루크를 잃었다. 그는 18개월 후 재혼을 하였다.
그는 80권의 책을 저술하였다. 1647년에 그의 모든 저작 중에서 가장 훌륭한 작품인 “그리스도의 죽음에 있어서 죽음의 죽음”을 간행하였다. 이것은 난공불락의 책으로, 속죄에 대한 고전적이고 개혁주의적인 진술로 인정을 받았다. 1677-8년에 그는 기념비적인 “성령론”의 전반 두 부분을 간행하였다. 1681년에 그는 3편의 고전적인 논문을 썼다. “그리스도론”,“신령한 마음의 은혜와 직무”, “그리스도의 영광에 관한 묵상과 강화”가 그것이다.
1656년에 그는 “신자 안에 있는 죄 죽임에 관하여”라는 제목의 저서를 출간하였다. 이 책으로 인해 많은 신자들로부터 찬사와 감사를 받았다. 인간 영혼의 분석을 통찰력 있게 묘사하였다. 오웬은 로마서 8장13절에 근거하여 이 논문을 썼는데, 철처한 탐사를 통하여 우리 속에 감추인 동기와 정욕과 본능과의 싸움을 선언한다. 1658년에 그 뒤이어서 “유혹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또 하나의 책을 출간하였다. 그 책은 그들이 권력을 잡은 때에, 교묘한 도덕적 부패에 대하여, 잠복해 있는 바리새인들에 대하여 그들을 경계한다. 1668년에 그는 많은 책을 내었는데, 특히 “내재하는 죄”라는 책이 주목을 끌었다. 이것은 시편 130편을 강해한 것으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달려갈 길을 다 마친 후에
존 오웬 (John Owen)은 뜨거운 가슴으로 사역했던 목회자였다. 그의 거룩한 영혼은 하나님만을 더욱 더 즐거워했고, 건장했던 그의 육체는 완전히 쇠잔해졌다. 잦은 질병으로 고통을 당하고, 고된 업무로 인해서 완전히 탈진 상태에 빠진 것도 여려 차례였다.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했다.5) 70세에 못 미치는 그의 전 생애를 쉼이 없는 학문 연구와 목회자로서의 열정적인 삶에 바친 결과, 말년에 담석증과 천식으로 고생하다가 67세를 넘긴 1683년 8월 24일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런던 번 힐 묘지에 묻힘으로 영원한 안식에 들어갔다.
"나는 교회라는 배를 폭풍의 바다에 두고 떠납니다. 그러나 위대한 선장이신 하나님이 계시기에, 배 밑창에서 노 젓는 나 같은 사공 한 사람이 사라진들 문제될 것이 없을 것입니다."라는 위로의 유언을 남기고 오웬은 이 땅을 떠났다. 그러나 당대의 가장 위대한 신학자이자 목회자였을 뿐 아니라 아직까지도 가장 영향력 있는 청교도 중의 한 사람으로 손꼽히고 있다.
그는 어디서나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긴 인격자로 알려져 있다. 청교도 시대의 신학과 신앙을 연구하는 많은 이들은 오웬을 가리켜 '최후의 청교도 신학자'로, 그리고 종교개혁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가장 심오한 신학 저서를 방대하게 내놓은 저술가로 평가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오웬의 전집을 독파했던 패커는 그를 일컬어 “성경에서 파악된 인류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방법들을 드러내는 진실함, 당당함, 그리고 위엄에 있어서 필적할 사람이 없는‘ 사람으로 평한바 있다.6)
Ⅱ. 존 오웬의 저작들의 의미
존 오웬은 17세기 명실상고하게 영국의 최고 신학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의 책은 [John Owen, The Works of John Owen, 24 vols. (London: Johnston and Hunter, 1850-53), repr. Edinburgh: The Banner of Truth Trust:1967)]으로 남아 있다. 오웬의 신학은 한 마디로 실천적이며, 논쟁적이며, 구원론적 신학이다. 우리가 오웬의 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오웬이 당시 알미니안주의1), 소시니안주의, 백스테리안주의, 로마 카톨릭과의 관계 속에서 어떻게 자신의 신학을 정립하는지 지적이며, 역사적인 정황 속에서 살펴보아야 한다.2) 이러한 자유주의 신학이 파도와 같이 몰려오는 상황에서 그가 기독교신앙의 정통성을 수호했는지를 그의 저작들에서 살펴 볼 수 있다.3) 뿐만 아니라 오웬은 조지 폭스(1624-1691)가 주장하는 ‘내적인 빛’에 의존하는 ‘퀘이커파’도 단호하게 비판하였다.
‘청교도의 황태자’로 불리며, ‘영국의 칼빈’으로 불린 17세기 청교도 신학자 존 오웬의 명저 ‘삼위일체 신학’, ‘중생과 성화론’, ‘죄 죽임론’, ‘성도와 하나님과의 교제’, ‘성령론’, ‘죄와 유혹’ 등은 오늘날 목회자와 신학생들의 필독서이며, 넘어야할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오웬은 개혁주의 신학자, 보다 정확히 말하면 17세기 영국 청교도 신학자인 그는 기독 신자의 삶을 강조하고, 성령론을 매우 실제적으로 중요시하였다. 따라서 일부에서는 오웬의 영성이 탁월했다고 주장 한다 : “개혁주의 청교도들은 이념적으로, 관념적으로 치우친 사람들이 아니라, 오히려 영적인 감정과 정서를 중요시했다.”고 말한다.
문제는 청교도의 신학을 바르게 해석하고 계승해야 할 후대의 신학자들이 청교도들이 가졌던 감정과 정서를 무시하고, 계몽주의자들처럼 개념적으로 인식하는 오류를 범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오웬은 기독신자의 신앙생활에서 경험을 강조했으며, 그리하여 확신과 안정감을 갖게 된다고 말했다. 오웬은 당시 신비주의자들이 종교적 황홀감을 맛보기 위해서 그리스도에게 집착하는 문제에 대해서 지적한 바 있고, 합당하게 필요한 감정적 차원을 설명한 바 있다.4)
존 오웬은 격동의 삶을 살았던 사람이었다. 오웬 당시 시대상을 담고 있는 「왜 그들은 복음을 배반하는가」(Apostasy from the Gospel, 생명의 말씀사)5)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청교도 혁명의 성공과 실패, 카톨릭주의와 카톨릭의 득세를 목격하였고, 때로는 강단에서 쫓겨나기도 하였다. 당시 찰스 2세는 왕정복고 이후에 통일령을 발표하여 청교도들을 국교회 밖으로 몰아내었고, 찰스 2세는 임종 시에는 카톨릭 신앙을 고백하였다. 그의 동생 제임스 2세는 카톨릭 신자들을 정부 요직에 등용하였다. 이제 영국은 카톨릭화 하기 시작하였다. 오웬은 카톨릭과 카톨릭주의를 배교라고 규정하고 복음의 진리와 복음적인 삶과 예배를 수호하기 위하여 이 책을 출판하게 되었다.
오웬의 저술에서 그가 매우 분석적이고 조직적이며 탁월한 지성을 가졌음을 보여준다. 그의 글은 모두 그가 심오하게 이해한 은혜의 교리를 바탕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오웬의 문장 스타일은 현대인들에게는 쉽지 않다. 다행히도 로우(R.J.K. Law)의 수고에 의해서 오웬의 대표작들에 속하는 『성령론』(The Holy Spirit),『하나님과의 교제』(Commuinon with God), 『복음으로부터의 배도와 그리스도의 영광』(Apostasy from the Gospel and the Glory of Christ)이 요약되거나 현대어로 고쳐져서 나왔다. 계속해서 그의 작품들이 번역 출간되고 있어 우리들이 좀 더 쉽게 그의 신학의 세계를 접할 수 있게 되었다. (부록참조)
Ⅲ. 존 오웬의 신학적 배경과 이해
1.청교도 운동
1640-1660년, 20년은 청교도의 황금기로 ‘청교도 신학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작성되었다. 여기에 참여한 많은 신학자들 가운데서 가장 탁월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 존 오웬이다. 오웬의 신학은 청교도 운동의 배경에서 찾을 수 있다. 16,17세기의 영국에서 엘리자베스시대가 허용했던 것보다 더 발전된 영국 교회의 개혁과 갱신을 추구한 운동으로서 청교도를 일컫는 영어의 'puritan'은 'puritas(purity)'라는 라틴어에서 유래한 말로 “교회를 깨끗하게 정화하려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것은 'puritan', 깨끗한 척하려는 사람‘, 'precisian'1) ’꼬치꼬치 캐려는 사람‘이라는 조소적인 의미가 들어 있다. 청교도 운동은 바로 이들 청교도들에 의해 펼쳐진 종교개혁운동을 의미하는 것으로, 일세기 이상 동안 지속된 성직자와 평신도 운동이었으며, 종교뿐만 아니라 근대 서구 사회 전반에 걸쳐 영향력을 행사하고 개혁을 일으킨 세계관적 변혁이었다. 당시 영국의 국교파는 그들의 기도서와 예배의식, 예복 등의 준수를 강력히 요구하였으며, 이에 대해 대륙의 프로테스탄트의 영향을 받은 청교도들은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종교생활에 있어서 이런 형식이 아니라 내면에 있음을 강조하고, 성경 중심적인 경건과 청빈사상을 추구하였다. 그들은 성경을 근거로 영국국교파와 로마 카톨릭을 비판하였으며, 성경대로 살려는 엄격한 근본주의적 입장을 고수하였던 것이다.
2. 칼빈주의 수호자
개혁주의 신학자 패커(J.I.Paker)는 ‘성경적 신앙이 하나님 중심 사상이라는 것을 자신에게 가르쳐 준 사람이 다름 아닌 오웬이었다.’고 말한다. 또한 스펄전 역시 오웬을 칼빈과 칼빈주의를 잇는 가교 역할을 감당하였다고 보았다. 오웬의 저작들에는 펠라기안 이래로 면면히 흐르는 소시니안, 알미니안주의와 같은 이성주의, 인간 중심주의를 강력하게 비판하였으며, 로마 카톨릭의 형식주의에 대해 비판하였다. 그의 어조는 마치 하나님의 정염(情炎)에 불타는 구약의 선지자와도 같이 분노로 격앙되어 있었다.
3. 성경에 근거한 탁월한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인간에 대한 지식
청교도 신학의 최정상에서 거의 모든 주제들을 다루고 재정비한 신학자이며, 탁월한 저술을 가장 많이 발표한 오웬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오웬의 신학함의 깊이와 방대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아마도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지식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인간을 아는 지식일 것이다. 종교개혁자 존 칼빈이 [기독교강요] 1권 첫 소절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두었던 것은 그 중요성 때문이었다. 오웬의 신학 속에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인간을 아는 지식에 관하여 얼마나 분석적이며, 통찰력 있고, 해박하였는가를 보여준다. 오웬의 저작 가운데 인간 안에 내재하고 있는 ‘내면의 죄’, ‘죄 죽이기’는 매우 세미한 것을 살피는 통찰력을 볼 수 있고,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교제’, ‘그리스도의 영광’과 ‘삼위일체’, ‘기독론’, ‘성령론’은 하나님에 관한 그의 지식에 다시 한 번 놀라게 된다.
오웬은 이 모든 것을 성경에서 찾았으며, 한 사람의 목회자로서 그가 하나님과 인간에 관하여 경험한 모든 것을 다시 성경으로 해석했던 것이다. 오웬의 신학체계는 칼빈을 넘어 어거스틴과 교부들의 작품, 그리고 유대 랍비문서를 넘나들며 방대한 신학을 섭렵함을 통하여 세워진 거대한 저수지와 같다.
그는 성경을 근거로 목회적 경험을 치밀한 논리로 펼쳐서 하나님에 관한 지식과 인간에 관한 지식을 정초(定礎)하였다. 젊은 시절 오웬의 자신의 회심 폭풍 전야의 경험이 그를 더욱 겸손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작품 제6권에서 “사람들의 영혼을 겸손하게 하는데 적합한 두 가지 사항이 있으니, 하나님에 대한 바른 사고와 인간에 대한 바른 사고(思考)이다. 즉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거룩하심을 생각하고, 인간의 초라함과 비천함을 숙고해야 한다.”고 했다.
존 오웬은 "내가 익힌 학문과 '저 대장간의 힘'과 바꾸고 싶다" 고 할 정도로 존 번연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 시대에 겸손과 지성을 가진 목회자, 하나님의 말씀에 해박한 지식과 영혼을 해부하여 치료하는 영적이며 탁월한 하늘의사가 필요하다.
Ⅳ. 그리스도인의 삶과 성화론
오웬은 그의 『성령론』제4부에서 “성화”1)에 관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사람은 중생(regeneration)하고, 회심(conversion)을 한다. 이는 성령의 새로운 창조에 있어서 두 번째 부분(part)라고 할 수 있다.2) 성화의 주체이신 하나님은 ‘평강의 하나님’(the God of peace)은 우리의 본성과 인격을 성화시키셔서 하나님과 평강한 관계를 계속 유지하도록 하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전 본성(whole nature)을 성화시키셔서 완전한 영과 완전한 혼과 완전한 몸을 가지게 하시고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하나님의 평강 안에서 흠 없이 우리를 완전하게 보존하신다는 말이다.3) 성화는 그의 신학적 학문의 탐구와 지식은 다른 청교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위한 실제적인 지식이었다. 그는 칼빈과 마찬가지로 이 땅을 사는 그리스도인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은 성화라고 보았다. 그는 말하기를 “성화는 신자들의 영혼에 대한 하나님의 성령의 직접적인 역사로 그들의 본성을 죄의 오염(汚染)과 부정(不淨)으로부터 정결케 하고, 그 안에 하나님의 형상을 새롭게 함으로 그들이 은혜의 신령하고 습관적인 원리를 따라 하나님께 순종을 바칠 수 있게 하는 것이다.”고 했다. 그러므로 성화는 죄의 오염으로부터 죄인을 깨끗하게 하는 것이다.4)
그러나 성화는 그리스도인의 실존에 있어서 포괄적인 주제인 ‘하나님과의 교통’의 한 단면에 불과하다. 사실 하나님과의 교통 사상은 청교도 신학의 심장부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주제는 다른 모든 신학적 주제들과 연결되는 중심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인간의 문제에 방대하고 치밀한 관심을 가졌던 것은 모두 하나님과의 교통을 위해서였으며, 성화는 이 목적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이었다.
1. 신자 안에 ‘내재하는 죄'
오웬은 여전히 죄가 신자 안에서도 지배하고 싶어 한다고 말한다. 바로 여기서 그의 성화론이 출발한다. 죄는 결코 신자를 지배할 수 없지만, 신자가 죄의 영향력으로부터 자유한 것은 아니다. 즉 죄의 지배에 대해서는 자유하지만, 죄의 지배하려는 속성에 대해서는 자유롭지 않다. 이 속성과 신자는 싸워야 한다. 신자는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은혜 아래 사는 존재이다. 그리하여 신자의 마음은 전쟁터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복음은 죄를 이길 수 있는 계속적인 은혜의 공급으로 생명과 능력을 준다.
성경은 내재하는 죄가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이미 그 지배권을 잃었음을 선포한다.5) 간단히 말해서 신자는 은혜의 지배아래 있다. 그리고 불신자는 죄의 지배 아래 있다. 오웬의 성화 교리는 “한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순간 죄의 지배는 무너진다.”는 토대 위에 세워진다. 그의 성화 교리에 있어서, 죄와 은혜라는 이 두 가지 지배력 안에 모든 인류를 가둔다. 모든 인류는 죄와 은혜라는 이 두 가지 중 어느 하나에 속한다. 둘 다 속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여전히 신자 안에 내재하는 죄는 잔존하여 영향력을 발휘한다. 이 죄는 신자 안에서 신자를 지배할 법적인 근거를 잃었으나, 그것은 여전히 살아서 그 힘과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것은 계획을 세우고, 신자를 유혹하되, 열렬히, 광기(狂氣)를 가지고 신자로 하여금 죄를 짓도록 조장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지배할 수 없는 신자를 지배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그의 논문 ‘죄와 은혜의 지배’는 바로 내재하는 죄의 속성에 관하여 논하고 있다. 내재하는 죄는 계획하고, 충동하여 자신의 계획을 이루어 나가는 인격으로 의인화되어 묘사되고 있으며, 이것은 로마서를 기술한 바울의 관점에서 일치한다.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가 들어오기 전 불신자를 지배하던 죄의 지배아래 있었으나, 그가 그리스도의 구속의 공로를 힘입는 순간 죄의 지배는 완전히 무너졌다. 그 내면의 원리 또한 하나님께 순종하고자 하는 은혜로운 틀(frame)이 구축되었다. 그리하여 신자는 죄를 범할 때, 불신자와 다르게 그 것으로 인하여 고통스러워한다. 그러나 죄의 영향력과 힘은 여전히 신자에게 존재한다. 은혜와 죄 사이에는 항상 싸움이 있다. 은혜는 우리 영혼을 살찌게 하고 건강을 증진시키고 필요한 것이지만, 죄는 우리 영혼을 약화시키고 부패케 한다.6)
오웬은 바울이 설명한 롬7:21을 근거로 내재하는 죄를 “한 법”이라고 하였다. 신자가 은혜의 지배아래 있으면서도 또한 동시에 신자 안에 잔존하는 죄의 세력, 곧 그것의 힘을 축소시키지도 않는다.7) 그것은 인간 안에 계속 존재해 온 어떤 내재적이고 습관적인 원리이다. 오웬도 바울처럼 신자 안에 내재하는 죄, 곧 신자의 적인 죄를 인격과 같이 의인화하고 있다. 이 내재하는 죄의 본질은 ‘거룩한 하나님을 향한 적대감“이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반감(反感)이다. 싫어함(aversion) 또는 혐오, 진절머리 내는 것, 증오(憎惡) 마음이다. 이것은 반드시 신자가 자신 안에서 역사(役事)하지 못하도록 죽여야 할 원수이다. 왜냐하면 신자 안에 내재하는 그 죄는 반드신 신자를 하나님으로부터 떠나도록 파멸하도록 하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오웬에 의하면, “죄는 자신의 지배 자체를 빼앗겼을 뿐, 그 속성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죄의 파렴치한 속성들 중, 하나는 죄는 항상 악(惡)을 지향하되, 그것도 최대치를 갈망한다는 것이다. 죄의 최종적인 목표는 인간을 지배하는 것이다. 아무리 작게 남아 있더라도, 죄가 존재하는 곳에서는 죄의 속성이 나오기 마련이다. 그리고 지배권을 향한 그것의 열렬함은 죄의 속성으로써, 죄는 틈만 나면 그의 통치구조(frame)를 재건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죄를 남겨두면 내가 죽는 것이고, 죄를 죽이면 내가 사는 것이다.8)
죄가 계속해서 약화되지 않고서는 죄는 죽지 않는다. 우리는 죄의 힘을 파악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는 계속해서 죄의 요소와 죄의 활동을 주시하여야 한다. 이것이 신자의 의무이고, 이것이 우리의 소명이다. 우리는 몸의 행실을 죽여야 한다. 우리의 육체를 죽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이것을 할 수 없다. 이것은 오직 성령 안에서(in) 또는 성령에 의해서(by)서 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의 마음속에 있는 죄의 세력과 치세는 성령에 의해서 약화되고 손상을 받아 마침내는 멸망 받고 만다.
(1)성령께서는 우리들의 마음속에 있는 좋지 않은 습관적 요소, 성질, 행동 등을 뽑아 버리시고, 정반대의 마음을 주시고 좋은 습관, 요소, 행동 등을 심어 주신다. 육체의 욕심을 갖지 않는 것이 죄를 죽이는 일이다. 그리고 성령을 따라 행하는 것이 죄를 죽이는 것이다.
(2)성령께서는 죄를 죽이는 사역을 그의 은혜를 통하여 실제적으로 공급하고 지원하신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도우시는 힘으로 실천적으로 죄를 죽일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도와주시는 은혜를 따라 부지런히 주님의 은혜를 갈망해야 한다. 그럴 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들에게 우리들이 갈망하는 것을 주신다.
(3)우리를 지도하시고 도와주시는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죄를 박멸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고, 죄를 죽이는 사명을 또한 주셨다. 일반적인 훈련을 통해서 감당하는 우리의 의무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러나 죄를 죽이기 위해서 용의주도하게 계획된 속에서(in) 또는 계회에 의해서(by) 각각의 독특한 경우에 알맞게 우리는 대처하고 적용해야 한다.9)
성령께서는 이 사역의 목적을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우리들 가운데 성취하신다. 오직 그리스도의 죽음만이 이러한 죄 죽임의 의무를 성취케 한다. 성령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고, 교제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죽음에 연합하고, 일치되게 하심으로 그리스도의 죽음의 효과가 우리에게 유효하여 죄 죽임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10)
2. 은혜 언약의 핵심 : 그리스도와의 연합(Union with Christ)
3. 성화의 목표 :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
우리의 전 본성(whole nature)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형상으로 지은 아담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주셨다.12) 그는 초자연적인 생명(Supernatural Life)의 소유자로 창조되었고, 하나님을 향해(to God) 살아드리도록 창조되었다.13) 그러나 죄가 들어옴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형상은 손상을 입었고, 그리고 그것을 잃어버렸다. 이것은 우리 영혼의 어떠한 하나의 능력이(one power) 소멸된 것이 아니고, 한 부분(part)이 떨어져 나간 것이 아니며, 기능이 떨어져 나간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전본성(whole nature)을 잃어버린 것이다. 따라서 성경은 우리의 본성이 전적으로 타락했다고 말한다.14) 아담의 범죄로 하나님의 형상은 말할 수 없는 손상을 입게 되어 다시금 하나님께로 돌아갈 길이 전혀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제 외부적인 도움이 없다면 인간은 구원받을 수 없게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복음을 주셨다. 세상에 아들을 보내시고, 아들의 공로를 죄인들에게 덕 입게 하셔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셨다. 이러한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연합으로 말미암는 중생과 성화의 사역으로 하나님의 형상이 우리 안에서 회복되게 하셨다. 오웬에게 있어서 성화의 본질은 깨어진 하나님의 형상을 복원하는 것, 곧 재창조의 사역이다. 그것은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회복이다.
4. 성화의 과정
오웬은 “성령론”에서 성화를 씨에 비유한다. 오웬에게 있어서 중생은 성령 하나님의 사역인 반면에 성화는 신적인 사역인 동시에 여기에 순종하는 인간적인 반응을 요하는 인간적인 사역이라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성화의 주체는 성령이시오, 인간은 그분에게 피조물로서 마땅히 드려야할 순종을 드린다는 의미에서 인간적인 사역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이 인간이 하나님과 협력하여 무엇을 이루어 간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성화는 하나님의 영의 직접적인 사역이다(Sanctification is an immediate work the Spirit of God)’15)라고 그는 성화의 주체는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인간은 피조물로서 창조주 하나님께 마땅히 순종해야 하며, 성화는 그 순종의 과정을 통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우리를 구원하시고 이끄시는 하나님의 주권과 그의 구원하심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것은 인간의 책임이다. 인간의 순종이 결코 인간의 공로가 될 수 없다. 이것마저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은혜가 아니고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순종이 결코 공로가 될 수 없다. 인간이 하나님의 이끄심에 순종으로 반응하는 선한 행위는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점이 개혁주의 성화론의 놀라운 신비이다.
5. 신자의 의무 : ‘죄 죽인다’는 의미
성화는 계속적인 의무 수행을 필요로 한다. 의무란 원래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피조물로서 또한 성도들에게는 새로운 피조물로서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책임 전체를 말한다. 사람의 의무와 성도의 의무는 동일하다. 그러나 이러한 의무를 순종할 수 있는 존재는 오직 성도뿐이다. 성경에 계시되어 있는 이 의무는 성도의 새로운 본성과 일치하며, 성령의 도움 없이는 실천될 수 없는 것으로서, 반드시 믿음으로만 시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복음은 신분의 자유와 내적 자유를 동시에 준다. 이로써 영혼 위에 역사하던 죄의 권세나 영혼 안에 역사하는 죄의 권세는 모두 파괴된다. 내재하는 죄는 완전주의자들의 주장과 같이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영광의 단계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이것이 성경과 오웬이 동시에 주장하는 바이다. 내재하는 죄가 여전히 한 법으로서 그 내부에서 역사하고 있는 신자의 실존이 그에게 죄 죽임(Mortification)이라는 중대한 의무를 요구한다. 그러나 동시에 있지 말아야 할 것은 복음이 이미 신자에게 죄의 지배를 파과하고 자유를 주었다는 사실이며, 이 사실이 신자로 하여금 그 의무를 자유롭고 담대하게 이행하게 하는 촉진제 역할을 한다.
오웬은 우리에게 신자가 어떻게 성화를 위한 삶의 지침으로 ‘죄 죽이기’를 말한다. 그는 롬8: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에서 이 교리를 이끌어 낸다. 그리고 신자는 일평생 죄를 죽이는 것을 자신의 일로 삼아한다고 말한다.
오웬이 죄를 ‘죽인다’는 말은 완전히 ‘제거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 안에서 죄가 역사하지 못하도록 그 힘을 약화시킴으로써 죄의 세력이 신자에게 영향을 주지 못하도록 죄를 억제하는 것을 말한다.
죄 죽임의 필요성에 대해 오웬은 매우 강하게 말하고 있다. “이 죄 죽임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다면 은혜는 고갈되고 욕망은 충만해지며 마음의 구조는 점점 더 악해진다. 주님은 이런 상태가 어떤 절망적이고도 두려운 일들을 일으키는지 잘 알고 계신다. 죄 죽임을 무시함으로써, 죄가 거대한 승리를 거둔 곳마다 영혼의 틀은 파괴된다.(시31:10) 그리고 인간을 약하게 하고 아프게 하며 죽게 만든다. 그리하여 결국 그들은 고개 들 수도 없게 될 것이다. 연약한 피조물이 고난과 실패와 상처 속에서 그들 자신을 일으켜 활발한 대적을 할 수 없을 때, 그들은 죄의 속임으로 인한 굳은 마음 이외에는 어떤 것도 기대할 수 없을 것이고 그 결과 그들의 영혼은 피 흘리며 죽어갈 것이다. 태만(怠慢)에서 오는 이러한 일은 정말 슬픈 일이다.
신자는 죄의 정체와 그것의 전략을 파악하고, 죄가 신자가 마땅히 수행해야할 영적이고,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살기위한 노력들을 무너뜨리려 침해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죄가 신자 안에서 역사하지 못하고 죽어있는 증거이다. 이러한 일은 오직 ‘성령’의 사역이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믿음과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 통해서 죄를 죽이는 일이 가능하도록 신자 안에 역사하신다. 그러므로 성령의 일하심에 신자의 순종이 뒤따라야 한다. 신자는 총체적인 순종 곧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방편들 - 기도, 말씀, 묵상, 하나님과의 교제(사귐) 등 -을 부지런히 활용하여 이 싸움에서 이겨야 한다. 피 흘리기까지 자신과 싸워야 한다. 이 싸움에서 승리할 때 비로소 우리는 더욱 그리스도와 연합을 이루어 ‘하나님과 친밀하게 교통’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영광을 받으신다.
Ⅴ. 오웬의 성령론
1. 성령론 <원서명 : THE HOLY SPIRIT HIS GIFT AND POWER, 여수룬,1999.>
오웬은 종교개혁이 일어난지 150년이 지난 후에 성령론을 발표하였다. 따라서 그는 개혁신학의 발아와 진행과 찬란한 꽃 봉우리를 모두 평가하였고, 그것들을 17세기 청교도 신앙인들의 사회생활에 적용시켰다. 1,200쪽에 달하는 방대한 그의 성령론은 후학들의 감탄을 자아내게 하였다. 오웬은 종교개혁의 정수를 드러냈던 칼빈 신학에서 매우 중요한 근본 진리는 ‘성령의 신학’이라고 생각하였고, 나중에 벤자민 워필드가 이해 한 것처럼 칼빈을 ‘성령의 신학자’라고 인식하였다. 그리고 성령론은 종교 개혁 신학에서 가장 독특한 부분이라고 확신하였다.
이렇게 성령론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이유는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정당한 판단이라고 할 수 있는가? 성령의 사역에 대한 종교개혁자들의 강조는 구원을 로마 카톨릭 교회의 손에서 빼내오는 것과 같은 기능을 한다. 그가 성령론을 쓰게 된 것을 이렇게 말한다. 첫째, 그 때까지도 성령에 대해서 완벽하게 소개하는 책이 없었다. 둘째, 당대에 잘못된 성령에 관한 사상들이 난무하였기 때문에 바로 잡으려는 의도에서 나왔다. 셋째, 비성경적인 성령주의자들 곧 그들은 개인적인 성령의 계시를 강조하였는데 그들은 성경의 중요성을 약화시키고 소위 성경의 그리스도를 능가하는 ‘내 속에 계신 그리스도’를 주장하였다. 또 하나님의 말씀의 빛 위에 있는 ‘내적인 빛’을 추구하였다.
“성령론”은 오웬이 신학으로 완숙기인 1677-8년에 간행된 것으로 그의 저서 가운데 기념비적인 저작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그의 성령론을 "만약 그의 저서들 중에 걸작이거나 아니면 하나의 견본이다"라고까지 말한다. 이 책은 오웬이 서문에서 밝혔듯이 ‘성령과 그의 사역’이다. 이 책에서 존 오웬은 성령에 대한 깊은 내용과 뜨거운 경건을 담고 있다. 성령에 관한 이만큼 방대하고 박식하며 귀한 책을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성령에 관한 깊은 진리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오웬의 “성령론”에 나타난 경험 혹은 체험에 관한 부분이다. 오웬은 방대한 분량의 작품들 속에서 매우 빈번하게 체험 혹은 경험에 관한 이야기를 언급한다. 이것은 오늘날의 많은 신학서들과는 놀라울 정도로 대조적인 것으로, 패커(J.I.Parker)가 오웬의 신학에 관하여 말한 대로 청교도들의 한 특징이었던 ‘하나님 중심의 경험적 경건’의 토대 위에 세위졌다는 것을 암시한다.
오웬이 이런 성령의 은혜를 확신하고 깨닫는 체험을 하게 된 것은 성령의 사역의 패러다임을 알게 되면서 부터다. 성령은 주권적으로 사역하고, 그리스도 중심적이며, 성경적 사역을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오웬을 광범위하게 박식한 신학자나 논객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는 진실된 신자로 성령에 관하여 저술한 체험 신앙인이었다.
그는 자신의 성령론의 서문에서 저술 방법과 의도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나는 과연 성경이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가를 찾아보고 정리하여, 성령에 대해 알지 못하고 성령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의심 없이 공감할 수 있도록 하려고 한다. 그리고… 고대 교회가 지지하고 오늘날의 신자들이 경험하는 바를 정리하려고 한다.”1) 그의 글들은 오히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깊은 체험에서 나온 것이라는 느낌을 독자들에게 전해주기에 충분하다.2)
2.목차(Contents)
이 책의 전체 주제는 "성령과 그의 사역"이다.
▶ 제 1부 성령에 대한 일반적인 원리와 그의 사역, 성령의 이름과 명칭, 신성과 인격, 창조 때의
성령의 특수 사역, 성령의 시여 방법 등
▶ 제 2부 구약성경에서의 성령의 특수사역, 새로운 창조에 대한 성령의 일반적 시여, 그리스도의
인성과 관련 한 성령의 사역, 그리스도의 신비스러운 몸의 지체들에 대한 성령의 일반
적 사역
▶ 제 3부 새 창조에 있어서의 중생시키는 성령의 사역, 중생을 준비시키는 성령의 사역, 죄로 인
한 마음의 부패 또는 타락, 생명과 사망, 영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에 대한 비교, 중생의
성격, 원인, 방법 등
▶ 제 4부 성화에 관한 것으로 성화에 관한 전반적인 내용을 다룸. 복음이 가르치는 성화와 거룩의
본질, 성화의 목적과 거룩의 실체, 죄의 오염, 결과, 씻음, 성화에 있어서 성령의 적극적
사역, 거룩한 사람의 행실과 의무, 죄의 본성, 죄의 원인, 죄를 죽이는 것 등
▶ 부 록 기도할 때의 성령의 역사와 보혜사로서의 성령의 역사.
본 논고에서 다루게 될 범위는 회심 이후의 그리스도인의 성화의 과정에 하나님의 일하심과 인간의 행위 사이의 관계이다. 특별히 성화에 있어서 하나님의 직접적인 사역으로서 은혜의 체험과 그리스도인의 의무의 위치와 관계에 초점을 맞추어보고자 한다.
사실, 이 문제는 교회사상 많은 문제와 이단을 낳았던 주제로서 펠라기우스 이단이나 알미니우스 논쟁 등은 다 이 문제와 관련된 것이었다.3)
3.중생(regeneration), 회심(conversion)과 성화(sanctification)의 관계
우리의 전 본성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 그러나 죄가 들어옴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형상은 손상을 입었고, 그리고 그것을 잃어버렸다. 이것은 우리 영혼의 어떠한 하나의 능력이(one power) 소멸된 것이 아니고, 한 부분(part)이 떨어져 나간 것이 아니며, 기능이 떨어져 나간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전본성(whole nature)을 잃어버린 것이다. 따라서 성경은 우리의 본성이 전적으로 타락했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사람은 먼저 중생(regeneration)하고 회심(conversion)을 한다. 중생은 성도를 성화로 인도한다.4) 이와같이 거룩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God)이시다. 하나님은 모든 거룩함의 영원한 샘이시고, 근원이 되신다. 그 누구도 거룩을 창조할 자는 없다. 다만 하나님에 의해서 거룩하게 되어 질 수 있다.5)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살전5:23)6)에서 αujto;" de; oJ qeo;"(Even God himself) 성화는 전적인 하나님의 사역이다. 성화는 하나님의 영의 직접적인 사역이다. 성화는 믿는 자의 영혼을 죄의 오염과 더러움에서 깨끗하게 하는 것이다. ‘깨끗하게 한다’는 말은 인간의 본성을 변화시킨다는 말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사람들 속에 새롭게 갱신하는 것이다. 중생(regeneration)이란 성령에 의하여 우리의 본성이 전적으로 혁신(renovation)되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형상이 우리 속에 이루어지는 것이다.7)
중생과 성화는 다른 것이다. 주된 차이는 역사하는 양식(manner)에서도 확연히 나타난다. 중생의 사역은 단번에(instantaneous) 창조적인 행위로 완성된다. 이것은 단독적으로 창조적인 행위로 되어지는 것이다(creating act). 그러나 성화는 진보적이며 발전적으로 일어난다.8) 중생의 경험을 그 심령에 사모하지 않는 자는 생명이 없는(lifeless)자이며, 우리들 가운데 중생의 능력을 맛보지 못한 사역자는 무익한 사역을 하는 자인 것이다.
본성이 타락된 상태로 살고 있거나 죽어가고 있는 사람들이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은 분명하며, 또 더 이상 확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구원은 중생에 의해 이루어지며, 또한 마땅히 그래야만 한다. 성령 하나님은 이러한 중생의 일을 담당하시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시는데, 택하신 백성을 성화시키시며, 중생은 성화의 근원과 시작이 된다. 중생에 있어 성령의 역사하는 방식은 무엇인가?9)중생이나 회심에 있어서 성령께서는 전파된 말씀이나 그 말씀으로부터 이끌어내어진 빛과 진리의 적용을 통해 그와 같은 도덕적인 권고를 사용하신다. 그러나 이것은 성령의 전체사역이 아니고, 중생된 모든 자들의 영혼 속에는 은혜로운 영적 생명의 원리를 주입하여 주는 성령의 실제적인 작업이 있다.10)중생과 관련하여 인간들의 마음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이러한 내적인 효력은 인간들을 중생시키는 일과 관련하여 절대로 실수나 실패함이 없으며 항상 유효하게 작용한다. 이 주장은 인간의 자유의지와 관련하여 많은 반대를 받는다.11)그러나 중생에 있어서 성령의 사역은 우리의 본성, 곧 우리의 마음과 의지와 성정(性情)에 적합한 것이다.
성령은 우리의 의지의 자유를 사용케 하시어,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회심과 중생을 효과적으로 이루어 내신다. 중생의 성격, 즉 중생이 내적이며 영적인 일이다. 성경은 믿음과 회개와 회심 자체가 하나님의 역사라고 말하고 있다.12)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단순히 수동적인 도구로 만들지 않으시며, 우리의 의지도 강제를 받을 수 없다. 성령의 권능은 내적으로 비밀스럽게 작용하여 우리의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향해 돌아서려는 의지를 창조해내신다.13)하나님은 우리 안에 믿음과 회개를 주시고 움직이신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믿음과 회개를 이루는 방식 또한 다음과 같은 사실을 분명히 해 준다. 하나님은 절대로 틀림이 없는 효과적인 능력을 통해 그 일을 이루시며 이것은 인간의 의지에 의해 결코 거부될 수 없다.14)하나님은 회심케 하시는 일을 유효하게 하시기 위해서 모든 장애물들과 방해물들을 제거해 주신다고 약속하신다(신30:6; 골2:11; 신29:4; 겔36:26, 27; 렘24:7; 사44:3,4; 렘31:33).
하나님을 위해 사는 일이나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일에 있어 돌 같은 ‘굳은 마음’(겔36:26,27) 곧 하나님의 은총이 대한 완고하고도 고집스러운 반대와 반감을 가졌던 우리의 마음, 즉 우리의 본성이 가지고 있는 무기력과 적대감을 하나님께서는 “제해버리겠다”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마음에 할례를 받음으로써 하나님께로의 회심을 방해하는 여러 가지 편견들과 함께, 죄 가운데 포함되어 있는 무지와 완고함과 강퍅함의 모든 요소들이 전부 제거된다. 하나님은 그것들을 제거하기 위해 노력하겠다거나 제거하도록 설득하거나 돕겠다고 하시지 않는다. 절대적이고도 적극적으로 그 일을 손수 하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제거(除去)’와 함께 하나님은 새로운 마음과 새로운 영을 그들 속에 두신다. 이러한 새로운 마음속에 하나님께 대한 거룩한 복종의 원리가 들어있고, 이 거룩한 복종의 원리가 우리 속에서 생성되는 것은 우리의 회심을 통해서이다. 그래서 율법을 마음속에 기록하시는데 이 일은 하나님께서는 우리 속에 실제로 생성된 복종의 원리를 통해서 수행하시는 것이다.15)
중생은 하나의 새롭고도 영적이며 초자연적인 역동적 은총의 원리가 성령의 권능을 통해 각 사람의 영혼 속에 주입됨으로써 사람들의 영적이고, 초자연적이며, 역동적인 믿음과 순종의 행위를 할 수 있게 한다. 성령을 통해 새로이 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위해 살 수 있게 하는 하나의 새로운 영적 순종의 원리이다.16)중생은 물론 뒤이어 오는 거룩한 성화의 작업에 있어서도 우리가 가지고 행사하는 모든 능력은 중생할 때 성령께서 주입해 주시는 새로운 영적 생활의 원리로부터 생겨나오는 것이다.17)
성화는 하나님의 영에 의해 우리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다.18)성령께서는 모든 믿는 자들을 직접, 그리고 독특한 방법으로 거룩하게 하신다. 성령님은 모든 사람들을 성화시키는 분이시고, 성화의 창시자이시다.19)성화에는 중생에서와는 달리, 정도(degrees)의 차이가 있다. 즉 이 사람이 저 사람보다 더 거룩하게 될 수 있고 저 사람이 이 사람보다 성화된 성품이 뒤떨어질 수 있는 것이다. 성화는 이처럼 차등이 있는 것이다.20)성화는 우리들의 전 본성이 성령에 의하여 직접적으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사역이다. 성화는 우리를 그리스도와 계속해서 평화를 유지하게 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변화되며, 완전하게 하나님과 평화(peace)를 유지 하게 한다. 그리하여 티 없이 보호받으며 살고, 끝까지 하나님과 은혜스러운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21)
Ⅵ.하나님의 은혜와 신자의 의무와의 관계
성도는 하나님을 향해 사는 사람이고 의 앞에서 사는 사람이고 성화 앞에서 사는 사람이다. 성화는 은혜의 습관을 수반하는 능력(power)이 있고, 은혜의 습관을 행하려는 경향과 성질도 가지고 있다. 본질상 우리는 영적인 일을 수행할 ‘힘이 없으나’ 중생(regeneration)의 은혜와 성화(sanctification)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해 살아드릴 수 있는 힘과 능력을 우리는 부여받는다.1)
‘성화는 하나님의 영(the Spirit of God)에 의하여 우리 속에 일어나는 일’이다. 성화에 대한 우리의 의무(duty)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명령을 하셨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는 약속을 주셨다. 명령이란 약속을 위한 어떤 여지가 없는 것이고, 약속이란 명령의 권위가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만일 거룩하게 되는 일이 우리의 의무라면 여기에 은혜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만일 거룩하게 되는 일이 은혜의 결과라면 거기에는 의무라는 것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은 논쟁은 ‘육체적 지혜’의 산물이다. ‘위로부터 온 지혜’는 우리에게 다른 것을 가르친다. 실로 성화에 있어서 은혜와 행함은 상반되는 것이다. 즉, 모순이란 말이다. “만일 성화가 행함으로 된 것이라면 은혜는 없는 것이고, 만일 성화가 은혜로 되었다면 행함이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의 의무와 하나님의 은혜는 성화의 문제에 있어서 상반되거나 모순되는 점이 없다. 성화를 위해서 우리의 의무와 하나님의 은혜는 상호 필요한 조건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우리의 의무'를 행할 수 없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셨다 할지라도 우리가 우리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목적이 이루어지지 못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기 위해서 의무를 이행하라고 명령하신 사실을 거부하는 자는 곧 하나님의 약속을 거부하는 자요, 결국 성경 전체를 거부하는 자이다.2)
어떤 이들은 성령의 약속된 사역을 이유로 해서 스스로 나태함과 소홀함에 빠지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은 성령의 약속에 무관심한 자들이다.3)하나님의 은혜와 우리의 필수적인 의무는 일치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한 손을 가지고는 온전히 일을 할 수 없는 것과 같이 성령의 은혜로우신 역사에 우리의 의무(duty)가 종속되어야만 더 큰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단지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탁월한 은혜를 받은 사람이 드물고 우리들 자신도 그렇다. 하나님은 부지런하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셨다. 순종이 그토록 중요한데 사람들은 태만하고 나태에 잠겨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들을 도와주려고 하시다가도 저들의 행동을 보고 오히려 미워하시게 된다.4)
만일 우리 안에 모든 은혜들, 즉 모든 은혜의 정도들과 결과들이 성령과 그의 뜻에 기인한다면 우리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 자신의 노력과 성실한 것은 소용없다. 더 거룩해져야 함과 순종의 의무들을 수행하기 위해 수고할 필요가 없다. 그러면 우리 자신이 노력할 것을 명백히 의도한 성경의 모든 명령과 경고와 약속과 권고들은 어떤 목적으로 주어진 것인가? 오웬은 이렇게 스스로 예상하는 반론을 제기하고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 하나님의 영에 의해 주어지지 않은 영적인 선함이 우리들 안에 어느 정도라도 있다고 하는 것은 복음의 은혜를 무너뜨리는 행동이다.
성령께서는 사람이 일하는 곳에서 역사하시고 사람이 아무것도 하시지 않는 곳에서는 성령께서도 아무것도 하시지 않으신다. 은혜를 주시는 정도(degrees)는 모든 신자에게 각기 독특하게 나타난다. 여기서 신자들은 그들의 의무들을 실행할 수 있는 능력과 권능을 공급받는다. 은혜와 거룩함의 향상은 대부분 신자의 의무수행에 달려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 자신의 의무를 나태하고 소홀하게 해도 된다는 것을 성령의 유효한 사역으로 입증하려는 것은 야만적인 무지(無知)이다. 하나님께서는 은혜의 한 방편으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이와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의무의 한 방편으로서 요구하시는 것이 있다.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서(in) 역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령께서는 우리를 통하여(by) 역사하시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의무는 하나님의 명령들을 열심히 순종하는 것이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명령들을 순종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또한 성령의 사역인 것이다.5)
그러면 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의무수행을 위해 힘쓰는 모습을 보여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삶이 변화되지 아니하는가? 그리고 그들의 거룩함이 향상되지 아니한다면 그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오웬의 대답은 분명하다. 그는 예수님의 중보기도 가운데 “나의 영광을 보게 하시기를”(요17:24) 주석하면서 :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가졌다고 말하는 자들 중에도 그분의 영광을 이해하고 그분의 형상(likeness)으로 변화하는 자는 소수뿐이다. 단지 그리스도의 행동을 본받음으로써는 아무도 그분과 같이 되지 못할 것이다. 오직 그리스도의 영광을 체험하는 것만이 믿는 자를 그리스도와 같이 만들 힘을 가지고 있다.6)
한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깊이 있는 영적 생활의 체험을 경험하는가?’는 그의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 그분을 얼마나 생각하고, 얼마나 기뻐하느냐에 비례한다(갈2:20). 우리가 참신자라 한다면 하나님의 은혜는 영적으로 다시 세워진 우리의 머리와 가슴 속에서 역사하사 우리가 그 명령을 이행하도록 도우실 것이다.7)그리고 그들은 변화산상에서 제자들처럼 압도되고 만다.
이처럼 성화의 과정이 우리 인간의 노력 여하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연합을 통한 은혜의 체험에 결정적으로 관련됨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성경의 단순한 지식으로는 삶이 변화되거나 거룩함의 향상이 따르지 않는다 :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의 영광에 대해 성경에서 얻는 단편적인 지식과 같은 단순한 개념으로 만족한다면 그런 개념에는 삶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전혀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8)
이제 성화에 있어서 은혜의 체험과 우리의 의무를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1.은혜의 체험
성도의 성화에 있어서 체험이 차지하는 비중은 결코 적다고 할 수 없다. 오웬은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령한 욕구를 갖고 있으며,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는가?’라고 질문한다.9)우리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너무나 실제적인 것이어서, 하나님 보시기에는 교회를 구속(救贖)하시려고 행하시고 고난 받으셨던 일이 마치 우리가 직접 행하고 고난 받았던 것처럼 여겨진다.10)사도바울은 교회를 자신에게 주신 것과 양자(兩者) 사이에 연합이 이루어진 것을 큰 비밀로 묘사한다(엡5:23). 그러나 그것이 비밀이라고 해도 우리는 각 신자가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구나”(아2:16)라고 말 할 수 있는 이 관계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다.11)
오웬은 은혜 체험에 관하여 이렇게 설명한다 : 성령께서는 신자들에게 믿음의 진리와 실제, 그리고 탁월함을 경험하게 하여 그들을 거룩하게 하신다. 경험(experience)이란 것은 은혜로운 양식(food)이다. 그러므로 경험은 성도를 성장시키고 강화시킨다. 믿음으로 얻어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믿음의 맛(taste)이고, 이러한 믿음의 맛은 성도를 무게 있게 하고 키를 크게 한다. 이렇게 하여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약한 교회를 기르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교회가 그의 능력과 신실하심을 경험하도록 하신다. 믿음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도 그가 믿는 것들의 실제적이고 능력 있는 특별한 경험들에 의해서 그의 믿음이 성장하고 강화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성령께서는 성도들에게 영적이며 지각할 수 있는 실제적이며 능력 있는 경험을 주신다.12)
이 체험은 분명하게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보내주시는 사역과 더불어 교회에 주신 성령의 역사와 관련이 있다. 성령은 메마르고 열매를 맺지 못하고 타서 갈라진 땅과 같은 인간의 심령에 부어지심으로 사람의 심령이 샘이 되게 하시며 거룩하고 의로운 열매들을 맺게 하신다는 것이다(히6:7). 이와 같이 성령에 의해서 그리스도께서도 “벤 풀에 내리는 비같이 땅을 적시는 소낙비같이 임하신다”(시72:6). 선하신 주님은 우리들에게 이러한 물들과 새롭게 하시는 소낙비를 항상 주신다.13)
물론 초대교회의 기초를 놓는 데 필요했던 성령의 특별한 권능의 발휘가 그쳤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분의 전체적인 은혜의 역사는 오늘도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 가운데서 오순절 때와 조금도 다름없이 수행되고 있으며, 교회를 가르치는데 필요한 성령의 은사 역시 계속해서 부여되고 있는 것이다(엡4:10이하). 그러므로 성령의 역사를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오늘날의 모든 신자들이 해야 할 중요한 일 중 하나인 것이다.14)
오웬은 ‘때때로 참된 신자들은 이생에서도 그리스도를 아는 데서 발견되는 기쁨을 조금은 경험한다.’고 말한다. 일단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되면, 믿는 자의 마음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게 되기까지는 항상 들떠 있을 것이다. 이생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믿음으로 볼 수 있다.15)성경과 성령이 그리스도 안에서 빛나는, 창조되지 아니한 하나님의 영광을 느끼게 하여 그것은 그들의 영혼을 형언할 수 없는 기쁨과 평안으로 가득 채울 정도이다. 이런 경험은 흔치 않은데 그것은 우리의 나태와 신령한 빛의 결핍 때문이다. 우리가 만일 그리스도의 영광을 묵상하는 일에 열심을 내면 영광의 서광은 우리 영혼에 보다 자주 비춰올 것이다.16)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도 신령한 참 축복에 관심도 없이 지극히 분별없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들은 주 그리스도께서 보혜사 성령으로 하여금 우리에게 가져다주게 하신 거룩한 영적 상쾌함을 알지 못한다. 그런 축복에는 영적 평화, 신선한 위로, 말로 다 할 수 없는 기쁨과 복된 확신이 포함된다. 이런 체험이 없다면 우리 기독교는 무정하고 생명이 없고 아무 쓸모가 없는 것이다. 지금 이 땅에서 이 영적 축복을 누린다는 약속을 믿지 못한다면 어떻게 하늘의 영원한 영광에 관한 약속을 믿는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런 영적 신선함을 주는 수단들이 있음으로 해서 그분과 함께 즐기게 된다(계3:20 참조). ‘그런 축복을 어떻게 받을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그 대답은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바라봄으로써’ 이다.(벧전1:9,10 참조)17)그런데 안타깝게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 안에서 복음의 능력과 은혜를 체험하려는 노력을 포기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알 수도 있었을 그리스도의 영광을 결코 발견하지 못한다.18)
성도의 영적 체험에는 늘 은혜로우신 성령께서 찾아오시는 체험만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때에는 성도들이 하나님이 떠나가시는 체험을 하게 된다. 오웬은 이 체험도 놓치지 않고 설명한다 : 우리의 마음이 영적 본분을 다함에 있어 점점 냉냉해지고 생기가 없게 되면, 주 그리스도께서 잠시 우리를 떠나신 것이 틀림없다.19)
구약성경에 나타난 성령의 사역을 살펴보면, 성령은 어떤 사람들로부터 떠나신다(삼상16;14). 성령의 떠나심은 전체적(total)이거나 부분적(partial)이다. 어떤 사람들은 성령의 은사를 많이 받았고, 그 은사들이 계발되어졌으며 또한 확신 가운데 복음을 소유해왔고, 많은 직무들을 행해왔다. 그러나 그가 시험에 빠져들게 되고 자신의 정욕에 정복당하게 되고 자신이 시작했던 선한 일들을 포기하고 어리석음으로 다시 돌아간다면, 그와 같은 사람들로부터 성령은 완전히 떠나신다. 성령은 그들을 포기하시며 그들 자신의 마음의 정욕대로 내버려두신다. 그래서 그들의 모든 은사들은 고갈되며 시들게 된다. 그들의 빛은 사라지며 그들은 미래에 대한 꿈(vision)대신에 어두움을 가지게 된다. 이와 같은 경우는 참으로 비참할 때 일어난다. 만일 그들이 은혜의 성령에게 분노를 더하여 성령의 전체적인 일에 경멸을 더한다면 그들의 경우는 일반적으로 회복할 수 없는 것이다(히6:4,6; 10:26).20)
성도로부터도 성령께서는 떠나실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부분적이며, 일시적이다. 왜냐하면 은혜의 언약 안에서 성령이 성도들에게 주어졌기 때문에 성령께서 성도들로부터 완전히 그리고 전적으로 결코 떠나시지 않으실 것이라는 그 약속들이 성경에 표시되어 있기 때문이다(사59:21; 렘31:33; 32:39,40; 겔11:19).
성령께서 하나님의 은혜와 조명, 위로의 크기와 이와 같은 것을 느낄 수 있는 효과면에 있어서 얼마동안은 이러한 사역을 중지하실 수도 있다. 성령은 얼마 동안은 그의 백성을 돌보지 않으시며 내버려 두실 수도 있다. 성도는 영적 고갈과 심한 연약함에 내버려질 수 있다. 이때부터 성도들은 자신들이 철저히 내버려지고 기억되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사40:27; 54:7). 그러나 이와 같이 성도로부터 성령은 절대적으로나 완전히 결단코 떠나지 않으신다.21)
2. 성도의 의무
(1) 기 도
오웬은 『성령론』부록 제1편에서 기도할 때 성령의 역사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다. 기도의 의무는 성령의 사역과 분리될 수 없다. 성령은 우리들 안에 있는 모든 은혜의 조성자이시고, 근원이시며 유일의 원인이시다. 하나님은 ‘간구의 영’(a Spiritual of Supplication)이신 성령을 우리에게 부어주신다. 그래서 성령께서는 우리들 안에 기도의 의무(duty)를 감당할 수 있는 은혜스러운 성향을 주셔서 영적으로 그리고 기쁨으로 기도하게 하시며, 기도의 능력도 주신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직접적인 교통(communication)을 하게 하시고, 특별히 기도의 방법(way)을 통해, 기도의 훈련(exercise)을 통해 모든 성령의 은혜를 주신다. 우리는 이 약속의 성취를 이미 받았다.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Abba Father)’라고 부를 수 있게 하셨느니라”(갈4:6; 참조, 요1:12; 딤후1:7; 롬8:15).1)
사도 바울은 “이와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르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8:26). 성령도 우리를 연약함을 아시고, 기도하신다. 성령께서 우리 연약함을 위해 기도하신다고 하는 것은 우리도 기도 할 수 있고, 또한 기도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가르치는 말씀이다.
이렇게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기도가 무엇인지 알게 하시고 기도할 마음을 주신다. 기도가 필요 없다고 하는 사람이 없도록 기도하고 싶은 마음을 주셔서 기도하게 하신다. 그러므로 기도는 우리의 타락한 본성의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이다. 우리의 부패한 본성, 우리의 어두워진 총명, 심술궂은 우리의 의지, 영적인 것들을 싫어하는 싫증을 고칠 수 있는 것은 기도이다.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은 죄를 용서해 주시고 긍휼을 베풀어 주시고, 죄를 모두 옮겨 주시고, 날마다 우리 영혼을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도록 새롭게 하여 주신다.
인간의 본성은 소경이기 때문에(nature is blind) 이러한 눈을 가지고서는 죄를 죄로 보지 못한다. 이러한 사람은 자만에 사로잡혀 있고, 어리석고, 죄에 대해 무감각하고, 죄를 죄인지 모르는 채 인사불성(insensible)으로 살아간다. 기도할 때 우리는 마음속에 내재하는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은혜와 성화와 영적인 특권들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다.2)
기도할 때 우리는 일시적인 것에 대해, 현세에 대해 가지던 관심이 바꾸어진다.3) 성령께서 신자들의 마음속에 기도를 통하여 “비애와 경건한 슬픔”을 가지게 하시어 간절히 간구하게 하신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뜨거움과 기쁨을 가지게 되는 경우가 있다. 이 마음이 커져서 때로는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고 이웃에게는 좋은 영향을 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도우실 뿐 아니라 친히 우리를 위해 간구하신다(롬8:23,27). 그러므로 성도는 마음을 다하고 영혼을 다하여 항상 기도의 의무를 감당해야 한다.4) 마음속에서 부터 뜨거운 마음,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끓어오르고 커질 때 그 기도는 생명력이 있는 것이다. 전 심령이 기도의 문제로 인하여 기도의 틀(frame)이 짜여져 있어야 하고, 그 속에 들어가 기도에 전념해야 하며, 언제나 기도로 육을 쳐 복종시켜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의 의무를 계속해서 잘 감당하겠다고 하는 뜨거운 마음의 결심을 해야 한다. 우리의 의무는 기도하는 것이다. 5)
오웬은 성도들이 기도할 것을 간절히 촉구 한다 :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 그런데도 어리석게 기도에 게으른 사람은 누구인가? 회개하기를 더디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이렇게 하는 사람은 성령을 얼마나 슬프시게 하는 것인가! 그리고 우리의 심령은 얼마나 손상을 당하는 것인가! 우리가 날마다 기도해야 할 의무에 게으를 수 있단 말인가? 성령의 은혜로운 호의를 어떻게 무시할 수 있단 말인가? 기도하지 않고 습관적으로 육적으로만 살아갈 수 있을까? 아,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사람들은 기도할 수 있는 성령의 은사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기도할 줄 모른다. 심령으로 속사람이 기쁨으로 은사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기도할 줄 모른다. 이것이 얼마나 큰 죄인가! 오늘날은 특별히 유혹이 많고 위험이 도처에 많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기도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세상적인 말은 적게 하고 기도를 더 많이 한다면 모든 일이 더욱 잘 되어질 것이다.6)
기도야말로 하나님이 성도의 성화를 위해 주신 방편이다. 마치 장인(匠人)이 그의 직업의 기술을 연마해야 하듯이, 우리는 믿는 자들을 단련시킬 목적으로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방도들을 사용해야 한다. 이 방도 중 첫째가는 것은 열심 있는 기도이다. 모세처럼 하나님 영광을 보여 달라고 기도하라(출33장 참조). 바울처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엡1:17)라고 기도해야한다.7)
성화의 방법은 학습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마음 가운데 기도를 통해서 된다고 할 수 있다. 성화는 은혜의 성령과 간구에 의해서 되어지는 것이다. 기도할 수 있는 신자는 기도를 함으로, 그리고 성화의 성령이 성도들 가운데 역사함으로 성도가 거룩하게 되는 것이다. 성령은 우리를 계속 지원해 주시며 온전하게 되시기를 원하신다. 만일 우리가 지혜롭게 기도를 통하여 우리들의 마음속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사역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우리들 마음속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은혜에 의한 사역에 대해서 대단히 많이 이해하는 것이다.8)
(2) 묵 상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서 깊이 묵상해야 한다. 하나님은 항상 은혜의 보좌에 계신 분이시다. 우리는 중재자이시고 중보자가 되시는 그리스도를 깊이 묵상해야 한다. 우리는 기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유익을 주시는 은혜의 보좌에서 주 그리스도의 효과적인 도움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은혜를 받기 위해서 우리의 마음은 언제나 준비되어 있어야 하며 훈련되어야 한다.9) 오웬은 성도가 그리스도의 영광을 묵상함으로써 얻는 유익을 그의 최후의 저술인 『주님 영광에 대한 묵상이 신자에게 주는 유익/위로』(1684)에서 밝혀주고 있다. 그는 “만약 우리의 장래 행복이 그리스도께서 계시는 곳에 있으면서 그분의 영광을 보는 것을 의미한다면, 그것에 대한 준비로서 그 영광에 대한 생각으로 우리 마음을 가득 채우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을 것이다”라고 서문에서 제안한다.10) 따라서 성경 각권을 보면서 그리스도의 영광에 관해 기쁨을 가지고 묵상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은 천상에서 그 영광을 보고자 하는 참된 소망을 갖지 못할 것이다.11)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끊임없이 묵상함으로 비롯되는 유익들로는
1)우리가 하늘나라에 적합한 자로 지어질 것이다.
우리의 현재 영광에 대한 지식은 장래의 영광을 알기 위한 준비이다.
2)그리스도의 영광에 대한 참된 견해는 우리가 그리스도처럼 되기까지 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후 3:18)
3)그리스도의 영광에 관한 규칙적인 묵상은 우리 영혼에 안식과 만족을 줄 것이다.
왜냐하면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기’ 때문이다(롬8:6).
4)그리스도의 영광을 아는 지식은 우리의 영원한 축복의 근원이 되는 것이다.12)
우리는 있는 그대로 그분을 봄으로써, 그분처럼 될 것이다(살전4:17, 요17:24, 요일3:2 참조)
‘평강과 위로와 기쁨과 확신을 가지고 그리스도와 더불어 즐기는 그런 축복을 어떻게 받을 수 있으냐’고 묻는다면 그 대답은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바라봄’으로써 이다.(벧전1:9,10 참조)13) 심지어 한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심도 있는 영적 생활의 체험을 갖느냐’하는 것도 그의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에 대해 얼마나 생각하고 얼마나 기뻐하느냐에 비례하는 것이다(갈2:20 참조).14) 오웬은 묵상의 유익과 성화생활의 비결로서의 묵상을 소개하면서 묵상의 의무를 수행할 것을 권면한다 : 우리는 성경에서 얻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아는 지식에 관해 자주 묵상해야 한다.
(3)죄 죽임(mortification)과 은혜 살림(vivification)
오웬의 죄 죽임의 교리는 종교개혁자 칼빈의 죄 죽임과 은혜살림의 교리를 이어받아 더욱 견고히 했다. 칼빈에 따르면 우리는 그리스도와의 연합(Union with Christ)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다. 이 은혜는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轉嫁)받는 것 곧 법정적 칭의(稱義)와 둘째, 우리의 전인(全人)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거룩케 하시는 사역을 통하여 경험적으로 그의 형상을 닮아가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법정적인 의(義)의 전가에 대한 신자의 마땅한 반응은 회개(repentance)이다. 칼빈에게 있어서 이 회개는 실질적으로 성화와 동의어이다. 칼빈의 회개(悔改)에 대해 정의하기를 "우리의 인생을 하나님을 향하여 진실로 돌이키는 것, 그분께 대한 순전하고 열망 있는 두려움으로부터 비롯된 돌이키는 것이며, 그리고 이것은 우리 육신과 옛사람이 죽는 것과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이 사시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고 말한다. 이처럼 회개와 성화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죄 죽임(mortification) 과 그리스도 안에서 받은바 '은혜를 살리는 것'(vivification)인데 이 둘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달려 있다.
죄 죽임(mortification)은 그 자체가 완전한 것이 아니고 그 짝이라고 할 수 있는 은혜살림(vivification)이 동반되어야 한다. 이 은혜살림은 거룩하고 헌신된 삶의 방식으로 살려고 하는 열망, 즉 거듭남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은혜 살림은 하나님께 대한 거룩과 경건을 향한 갱신된 열망이며 태도이다. 15)
죄를 죽이는 것은 곧 은혜를 살리는 것이다. 죄를 죽이는 일은 마음 안에 있는 죄를 제거함으로써, 우리의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활기차게 자라게 하기 때문에 중요하다. 마음 안에 있는 죄는 항상 신자의 내면에 거하므로 우리는 항상 그것을 죽여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얻은 것도 아니요, 온전하여 진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죄 죽임의 필요성에 대해 오웬은 매우 강하게 말하고 있다. 성령께서 우리를 살피시고 온전하게 만들어 주시고 우리의 성장을 방해할 요소를 제거시켜 주셨다고 하더라고, 만일 우리가 어떠한 죄든지 허락하고 거기에 빠져버린다고 하면 우리가 아무리 잘 성장했고, 많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안다고 하더라고 우리는 결국에는 전면적으로 부패하게 될 것이다.16)
그러므로 성화의 본질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죄를 보는 견해에 개선이 있어야 한다.17) 그러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성도는 타고난 죄의 본질과 결과에 대해 알도록 힘써야 한다. 비록 우리가 성령의 도움이 없이는 이 일을 제대로 이행할 수 없긴 하지만, 그래도 우리에게는 다음과 같은 의무들이 요구된다 :
1)우리들 스스로의 모습을 비추어주는 거울인 성경을 자세히 살피라. 성경을 통해서도 스스로의 일그러진 모습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타락한 채로 살다가 저주받은 채로 죽을 수밖에 없다.
2)자신의 타락된 상황과 관련된 성경의 증거를 이미 받은 사람은 그 증거를 통해 자신을 살핌으로써 자 신의 더러운 모습을 한층 더 확실하게 깨닫게 된다. 실로 그들은 거울 속에 비친 불결한 사람을 향하 여 “부정하다! 부정하다! 부정하다!”고 외쳐댈 것이다.
3)하나님의 빛과 인도함을 받기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의무이다.18)
이렇게 볼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즉, 우리는 성령으로부터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정결케 하는 힘과, 우리를 죽은 행실로부터 깨끗하게 해 주는 그의 피 뿌림을 계속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우리는 매일 우리 스스로를 더럽힌다. 따라서 만일 우리가 매일 그리스도의 정결케 하는 샘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우리는 곧 완전히 불결하게 되어 버린다.19)
여기에 죄를 죽임의 당위가 있다(롬8:13; 골3:5 참조). 죄를 죽인다는 것은 부패한 본성의 모든 힘과 정력을 끊어버리고, 세상적이고 육체적인 것으로 기울어지는 성향을 근절시킨다는 것이다. 죄의 행동을 유발시키는 세력을 죽이고, 행동을 못하게 하여 그 목적이 달성될 때까지 그것을 없애버리는 것이다. 이것은 계속해서 항상 행하여야만 한다.20) 그래서 죄에 대한 우리의 가장 큰 의무는 죄를 억제하고 죽이고 처형시키는 것이다. 아픔 없이는 죄를 죽이지 못한다. 오른 손을 자르고 오른 눈을 뽑는 아픔이 있어야 한다. 감정적 격렬함이 없이는 죄를 죽이지 못한다.21)
우리가 죄를 죽이는 일을 하지 않으면 죄가 마음을 어둡게 하고 육신의 정욕이 잡초처럼 자라게 된다.22) 신자는 날마다 자기 안에 있는 죄의 세력을 죽이는 것을 자신의 의무로 삼아야 한다. 죄를 죽이지 않으면 죄가 신자를 죽인다.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과 능력으로만 죄를 죽일 수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를 죽이는 일의 주체는 참 신자이다. 성령께서 우리의 자유의지를 보존하시므로 죄를 죽이는 일은 성령에 대한 우리 신자의 순종의 일로 남아있기 때문이다.23) 그러므로 죄를 죽이는 의무를 소홀히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원수를 대적하기 위해 주시는 도움을 거부하는 것이다.24) 죄를 죽이기를 원하는 자가 기도하고 탄식하고 근심하며 구원을 갈망하지만 경건한 독서, 기도 생활, 하나님과의 묵상을 게을리 하면서 자기 생활 속에서 죄가 세력을 보유하고 있는 이유를 알고자 한다면 이는 어리석은 일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것이 사람들의 일반적인 상태이다.25)
(4) 성화의 대적 : 게으름
성도의 의무들을 행하는데 가장 큰 대적은 ‘게으름’과 ‘나태함’이다. 오웬은 대단히 많은 곳에서 이 성화의 대적을 지적하고 있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영적인 일에 게으르거나, 의무를 이행하지 않거나, 은혜받기 위한 훈련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의심할 것 없이 우리는 우리 자신이 부패한 것이고 ‘다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이다.26)
만일 어떤 사람에게 성화에 진전이 없다면 그 이유로는 세 단계의 ‘게으른 측면’이 있다. 첫째는 이미 완전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사람들은 교만하며 미련한 속임수로 자신을 속인다. 그리고 모든 본성과 복음적인 거룩한 임무를 파괴한다. 둘째로는 그들은 우리는 이미 거룩하게 되었으니 성화에 대한 열망함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셋째로는 성화를 반대하는 심령 속에는 피곤과 낙담이 일어난다. 사람들에게서 너무나 많이 이러한 어려운 상황을 발견한다. 성화를 반대하는 곳에는 부패와 유혹이 있고 세성의 일들만 있다. 이 사람들은 결국에는 세상에 항복하고 만다.27) 사실 우리들 대부분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체험하는 것]에 관하여 심각하게 생각하느라 시간을 허비하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 그리스도의 영광을 생각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너무나 높고 너무나 어려운 것이다. 우리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즐거워하다가도 오래지 않아 싫증을 내고 곧 그런 생각으로부터 돌아서 버린다.28) 그래서 영적 삶에 게으르고 나태한 영혼은 결코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던 것과 같은(출애굽기 33장 참조)] 이런 영광의 체험을 얻지 못한다.29) 우리의 이러한 지독한 게으름으로 인해 하늘의 것들에 관해 묵상하는 것을 소홀히 하는 경우가 너무도 잦은 것이다.30)
VII. 결론 : 평가
종교개혁자 칼빈이 죄 죽임(mortification)과 은혜 살림(vivification)의 교리를 말하였고1), 오웬은 그리스도인의 체험을 신학화하므로서 신자의 삶에 빛을 던져 주었다. 청교도들에게 있어서는 신앙 체험에 대한 남다른 관심과 신학화 작업이 이루어졌다. 이런 의미에서 싱클레어 퍼거슨이 특별히 오웬의 신학에 이르기까지의 언약신학의 발전에 관하여 지적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 언약신학이 16세기에는 성경을 해석하는 열쇠였는데, 17세기에는 그것이 기독교 체험을 해석하는 열쇠가 되었다.2)
오웬은 신앙체험을 신학화하는 탁월함에 있어서도 다른 청교도 신학자들과는 구별된다. 이 17세기의 체험 신학자 존 오웬이 『성령론』(1674)을 발표한지 약 70여년 후인 1747년에는 조나단 에드워즈가 신앙감정론(Religious Affections)을,3) 그 후로 또 약 70여년 후인 1810년대 초에는 구 프린스톤의 아키발드 알렉산더에 의해 Thoughts of Religious Experience가4) 출간되었다. 이 두 저서는 개혁주의 입장에서 그리스도인의 체험을 본격적으로 다룬 몇 안 되는 걸작들이다.
오늘날 21세기 교회에 17세기 오웬의 신학은 적시성을 지니는가?라는 질문에 답부터 말하자면 ‘그렇다.’ 그 때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말씀은 동일하시며, 또 그 말씀을 대하는 인간들의 본성 또한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오웬이 인간의 마음을 분석하여 체험을 설명해준 그의 신학적 저작들은 오늘날에도 또한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다. 그러므로 오늘날 재천명되어야할 오웬의 가르침을 살펴보면,
첫째, 회심에 대한 깊은 이해와 강조.
인간의 노력이 회심이나 성화를 가져올 수는 없다. 오웬은 특히 신자의 중생과 회심을 강조한다. 중생이 없는 성화는 없기 때문이다. 성화에 있어서는 인본주의적인 알미니안, 백스테리안, 카톨릭과 카톨릭주의를 배격하고, 하나님의 주권적인 성령에 의한 사역임을 강조한다. 오늘날 교회가 신자의 중생과 회심에 대해 무관심 내지는 안일하게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 오웬은 오늘날과 같은 많은 교회들에서 통용되는 천박한 회심의 견해에 대해서 전혀 용납하지 않는다. 이것은 청교도들, 특별히 오웬에게 있어서는 죄악된 것이며, 교회를 깨뜨리는 요소이다.
둘째, 성령의 은혜와 성화의 의무 강조
셋째, 성화에 있어서의 성화의 의무들을 수행함을 강조
오웬은 은혜체험과 신자의 의무, 둘 다를 동시에 강조하고 있다. 신자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힘써야 한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유일한 성화의 본보기가 되신다. 우리는 그를 닮아야 하고, 더욱 영적으로 은혜스러운 영향을 많이 받아 예수님이 사신 것처럼 우리도 살고, 예수님이 행하신 것처럼 우리도 행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의 의무(the duty of faith)를 잘 감당해야 한다. 신자는 성화를 위한 의무들, 곧 ‘기도’와 ‘묵상’, 그리고 ‘죄 죽임(과 은혜살림)’을 지속적으로 수행하며, ‘게으름(나태함 혹은 태만)’과 맞서 싸워 이겨야 한다. 오늘날처럼 신비주의적 영성이 기독교적인 진정한 영성인양 대두되는 시점에서 더 더욱 이러한 개혁주의 신학의 유산인 ‘실천적 영성’은 더 강력하게 요청된다.
넷째, 성화의 소극적 차원에 대한 말할 수 없는 강조
위에서 살펴본 바대로 종교개혁 이후로 가장 뛰어난 청교도 신학의 거장 존 오웬은 ‘성령론 신학자’였다. 그의 신학이 공허한 이론이 아니라 실제적이며, 실천적인 이유는 그가 누구보다도 치열한 삶을 살았으며 성경에서 그 답을 찾았기 때문이다. 신학은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한 학문이다. 그러한 것에 관하여 가장 진지한 고민을 했던 청교도 오웬이 한 사람의 목회자로서 남겨 놓은 성령론의 중생과 회심 그리고 신자의 성화의 삶에 관한 촉구는 오늘날과 같은 혼돈의 시대에 신자의 삶에 나아가야할 길에 빛을 던져 주고 있다.
부록 * 참조1 * 1.청교도 세대구분
청교도 인물들 | |
청교도 선구자들 파두아의 마르실리우스 (Marsilius of Padua, Marsiglio:1270-1342) 존 위클리프(John Wycliff,1324-1384) 윌리엄 틴데일(William Tyndale,1495-1536) | 존 후퍼 (John Hooper,1495-1555) 존 칼빈 (John Calvin,1509-1564) 존 낙스 (John Knox,1513-1572) 존 폭스 (John Foxe,1516-1587) |
청교도 1세대들 리처드 그린햄 (Richard Greenham,1531-1591) 에드워드 데링 (Edward Dering,1540-1576) 리차드 로저스 (Richard Rogers,1550-1620) 존 도드 (John Dod,1550-1645) | 윌리엄 퍼킨스 (William Perkins,1558-1602) 헨리 스미스 (Henry Smith,1560-1591) 아서 힐더샘 (Arthur Hildersam,1563-1631) 존 로저스 (John Rogers,1566-1636) |
청교도 2세대들 로버트 볼턴 (Robert Bolton,1572-1631) 윌리엄 구지 (William Gouge,1575-1653) 토마스 테일러 (Thomas Taylor,1576-1632) 윌리엄 아메스(William Ames,1576-1633) | 리차드 십스 (Richard Sibbes,1577-1635) 로버트 해리스 (Robert Harris,1578-1658) 제레마이어 버로우즈 (Jeremiah Burroughs,1599-1646) |
청교도 3세대들 윌리암 브리지 (William Bridge,1600-1670) 토마스 굳윈 (Thomas Goodwin,1600-1679) 존 오웬 (John Owen,1616-1683) | 토마스 맨톤 (Thomas Manton,1620-1677) 토마스 왓슨 (Thomas Watson,1620-1686추정) 스테판 챠녹 (Stephan Charnock,1628-1680) 존 번연 (John Bunyan,1628-1688) |
청교도 후예들 요한 웨슬리 (John Wesley,1703-1791) 조지 휫필드 (George Whitefield,1714-1770) 윌리암 윌버포스 (William Wilberforce,1759-1833) | 로버트 맥체인 (Robert McCheyne,1813-1843) 존 라일 (John C. Ryle,1816-1900) 찰스 스펄젼 (Charles H. Spergeon,1834-1892) 로이드 존스 (Martin Lloyd-Jones,1899-1981) |
미국의 청교도들 존 카튼 (John Cotton,1584-1652) 존 데이븐포트 (John Davenport,1597-1670) 토마스 쉐퍼드 (Thomas Shepard,1605-1649) | 나다니엘 구킨 (Nathaniel Gookin,1656-1682) 조나단 에드워드 (Jonathan Edward,1703-1758) 데이비드 브레이너드 (David Brainerd,1718-1747) 윌리암 스프레이그 (William Sprague,1795-1876) |
* 참조2. 존 오웬의 저작 중 번역 출간된 책들
1.죄 죽이기(SFC출판부) 2.죄와 유혹(은성)
3.성도의 견인(생명의 말씀사) 4.그리스도의 영광(지평서원)
5.개혁주의 성령론(여수룬) 6.성도와 하나님과의 교제(생명의 말씀사)
7.영적 사고방식(청교도신앙사) 8.왜 그들은 복음을 배반하는가(생명의말씀사)
9.성령이 도우시는 기도(지평서원) 10.참된 믿음과 신앙의 특성들(생명의말씀사)
* 참조3. 존 오웬 전집 16권의 내용 분류
그의 전집은 영어로 된 신학서의 최대 보고이다. 오웬은 '청교도들의 다윗 왕'이라고 불린다. 이것은 우리가 그의 가르침을 전반적으로 신뢰할 수 있다는 뜻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는 당시의 도전과 압력에 대응하기 위해서 책을 썼다. 그러나 그의 모든 글에는 힘과 일관된 사상이 있고, 항상 성경의 권위에 충실했다. 오웬의 가르침의 균형과 예리한 통찰에 있어 맞설 자가 없다는 것은 여러 실례로 증명될 수 있다. 예로써 『성령의 인격과 사역』(The Person and Work of the Holy Spirit-Works, vol. 3), 『그리스도의 영광』(The Glory of Christ), 『죄 죽임』(The Mortification of sin, vol.6) 등이다. 그의 『양심의 자유』(Liberty of Conscience, vol.13)는 당시처럼 오늘날에도 적실성이 있는 저서이다.
참 고 문 헌
Owen, John. The Works of John Owen. Ed. William H. Goold. Edinburgh: The Banner of Truth
Trust, 1966.
---------. 『개혁주의 성령론』이근수 역. 서울: 여수룬.
---------. 『주님 영광에 대한 묵상이 신자에게 주는 유익/위로』조주석 역. 서울: 나침반.
---------. 『성도의 견인』서문 강 역. 서울: 생명의 말씀사.
---------. 『성도와 하나님과의 교제』황을호 역. 서울: 생명의 말씀사.
---------. 『그리스도의 영광』 서울: 지평서원.
---------. 『죄 죽이기』서문 강 역. 서울: SFC.
---------. 『죄와 유혹』엄성옥 역. 서울: 은성.
---------. 『영적 사고방식』서문 강 역. 서울: 청교도 신앙사.
---------. 『성령이 도우시는 기도』. 박홍규 역, 서울: 지평서원.
---------. 『영적 사고방식』서문 강 역. 서울: 청교도 신앙사.
Packer, James. 『청교도 사상』박영호 역. 서울:기독교문서선교회.
원종천. 『칼빈과 청교도 영성』(서울: 하나, 1994).
김남준, 『죄와 은혜의 지배』(서울: 생명의말씀사, 2005).
김남준, 『은혜와 부패』(오웬의 시130편 주해를 설교, 묵상집) (서울 : 생명의말씀사, 2005).
김남준, 『청교도들의 마음지킴의 교리』
김남준, 『존 오웬과 나의 목회』(제4회 열린교회세미나) 2003.
아키발드 알렉산더, 『영적 체험: 회심에서 임종까지』 서문 강 역 (서울: 지평서원,1987).
조나단 에드워즈, 『신앙과 정서』 서문 강 역 (서울: 지평서원, 1994).
장호익,『청교도 신학의 현대적 적용: 존 오웬의 신학사상과 실천목회』
김재성,『개혁신학의 정수』 서울: 도서 출판 이레서원, 2003. 제8장 청교도 사상의 정수(Ⅱ) 참조.
김재성, 『현대 영성신학의 현상과 문제점』(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존 칼빈, 『기독교 강요 3권』 김종흡,신복윤,이종성,한철하 공역 (서울: 생명의 말씀사, 2001)
박홍규,『존 오웬의 구속에 대한 삼위일체적 이해』(John Owen's Trinitarian Understanding on the Atonement)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 있는 죽음의 죽음”(침례신학대학교)
Gerstner, John H. The Rational Biblical Theology of Jonathan Edwards, vol.1. Powhatan, Virginia:
Berea Publications, 1991.
Furguson, Sinclair B. John Owen on the Christian Life. Edinburgh: The Banner of Truth Trust, 1987.
조남구 목사 /열린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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