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의 성령론
바울과 성경에 대해서 핵심적으로 말씀 드리겠습니다. 제가 알기로 한국에서 성령론에 대해서 상당한 지상 논쟁이 있었던 것으로 알고 부분적으로나마 그 논쟁이 계속 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성령론의 토의가 대부분 사도행전을 중심으로 진행이 되었던 것 같아요.
상대적으로 사도행전에 많은 비중을 두고 사도행전은 소위 성령행전이라는 이런 별명을 가지고 있는데, 바울에 대한 성령의 가르침을 은사 쪽의 이야기가 되고 나머지에 대해서는 전반적으로 이해가 부족한 것이 아닌가 하는 그런 느낌을 갖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중요한 것은 이 사도행전에 나타난 성령론과 바울서신에 나타난 성령론은 상당히 신학적인 관점이 틀리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많은 학자들이 분간하지 않고 두루뭉술하게 이야기하는데서 많은 혼선을 빗고 있습니다.
간단하게 말씀드리면 이 사도행전의 성령론, 누가복음에 있는 성령론과 합쳐서 누가와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동일한 제자가 썼지요. 이 사도행전에 나타난 성령론은 구약시대의 prophetic 미누어스, 그러니까 선지자들의 선포사역 그 전통 위에서 --구약시대는 그랬습니다. 성령님이 주로 선지자들에 임할 때에 선포, 하나님의 선지자적인 선포를 위한 능력으로서 역사 했습니다. 성령님께서 선지자들에게 선포가 있기 전에 성령님이 거기 임해서 그 말씀을 주고 전할 수 있는 능력을 공급한 것입니다-- 그와 같은 전통 위에서 이 사도행전의 성령론은 복음 전파를 위해서 하나의 능력으로서 성령님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복음 전파를 위해서 부르심을 받았잖아요? 그러니까 우리의 온통 관심은 어떻게 하면 이 복음 전파의 사명을 잘 감당할 것이냐? 여기에 온통 기울여 있는 나머지 이 사도행전의 성령론에 최대의 관심을 지금까지 기울여 왔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성령론은 사도행전의 성령론과 모순되지 않으면서 더 근본적으로 성령님에 대한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성령론은 한마디로 구원론적인 성령론입니다. 자, 그러면 거기에 대해서 그 정도만 바울의 이야기를 하고 구체적으로 이 바울이 어떻게 성령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에 대해서 핵심적으로만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첫째, 바울의 성령론은 바울의 신학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성령론은 기독론과 종말론 그리고 교회론, 구원론 또는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실존인 모든 스팩트럼과 그리고 신학의 모든 스팩트럼과 관련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성령론을 이해하지 못하면 바울 신학을 이해하기가 힘이 듭니다. 사실상 이해한다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지요.
이 성령님을, 종말론적인 성령님의 오심을 바울은 한마디로 종말론적인 사건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여기서 종말론적인 사건이란 무엇이냐 하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다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종말론적인 사건입니다. 이 종말론을 이야기할 때 이것을 꼭 이해해야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이전과는 전혀 다른 시대로 도래했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메시지입니다. 이 메시지를 파악해야 여러분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에 대해서 제대로 선포할 수 있습니다.
이 새로운 시대는 이미 도래되었는데 이 시대는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완성이 될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오셨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새로운 시대가 도래되었고 이 도래한 시대가 나중에는 완성될 것이라는 것을 하나의 보증으로 보증하기 위한 것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런 신학적 사상을 표현하기 위해서 두가지 메타포(은유)를 고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는 로마서 8장 23절에 나오는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 )는 동격의 소유격입니다. 그래서 성령님, 즉 처음 익은 열매를 이야기합니다. 성령님 즉 처음 익은 열매입니다. 동격의 소유격입니다. 처음 익은 열매다 하는 어떤 메타포를 사용하고 있고 또 다른 하나의 메타포는 고린도전서 1장 23절에 나오고, 5장 5절에도 나오고, 에베소서 1장 14절에 나오는 '보증'이라는 것입니다.
이 두가지 메타포를 사용하고 있는데 첫째, 성령님은 처음 익은 열매이다. 이 처음 익은 열매이다. 이 개념은 구약의 이스라엘의 제사제도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 제도에 의하면 추수의 첫 단, 그러니까 처음 익은 열매는 하나님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것이었기 때문에 반드시 하나님의 제사에 드려져야 했습니다. 이 행위, 처음 익은 열매를 하나님의 것으로 인정하고 하나님께 드리는 행위는, 전체의 수확이 하나님께 있고, 그리고 full harvest 전체와 완전한 harvest가 거두어질 것이다는 확신의 표현이었습니다.
그런데 로마서 8장 23절에서 바울이 성령을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에게 줄 처음 익은 열매라, 구약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처음 익은 열매를 하나님께 드렸는데, 여기 로마서 8장 23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처음 익은 열매인 성령님을 자기 백성에게 주었다는게 좀 재미있지 않아요? 바로 이런 사실, 하나님께 처음 익은 열매로서 성령은 자기 백성에게 주었다, 허락하셨다, 선물로 허락하셨다. 로마서 8장 23절의 문맥을 보면 이 피조물과 하나님의 자녀가 종말론적 탄식을 하면서 종말론적인 완성을 고대하는 묘사가 나오고 있습니다. 그 문맥이 그렇습니다.
피조물과 하나님의 자녀가 종말론적인 완성, 주님의 재림으로 이미 이루어진 그것이 완성되는 것을 탄식하면서 고대하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데 바로 이러한 문맥에서 성령님이 처음 익은 열매로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것은 우리가 완성될 하나님 나라, 미래의 완성될 하나님 나라를 반드시 유업으로 이미 받으리라는 보증으로서의 성령을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을 좀 뒤집어 말하면 이미, 그러니까 성령을 받았다는 말은 미래에 완성될 하나님 나라가 이미 현재에 도래했다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성령님은 '보증금'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는 에베소서 1장 13절과 14절에 나오는 이 보증금은 미래에 완불하겠다,
미래에 완불하겠는데, 우리가 무엇을 구입하면 미래에 완불하겠지만 첫 불입금으로 얼마씩 10달러, 20달러 혹은 30달러 이렇게 내지 않습니까? 우리가 미래에 반드시 지불하겠는데 첫 불입금은 이런식으로 내는 것과 비슷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령을 받았다는 것은, 성령을 선물로 받았다는 것은 이 미래에 완성될 하나님 나라를 우리가 유업으로 반드시 받을 것이다는 것에 대한 보증이고 미래의 축복을 부분적으로 현재 선물로 받은 것을 의미합니다. 지금까지 너무 추상적인 이야기만 했습니까? 이것 상당히 추상적인 이야기인 것 같지만 여기에 대한 이해가 분명치 않으면 우리 말씀의 사역자로서 올바른 사명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이 신학교 M. Div 과정 속에서는 여러분에게 신학 대백과사전적인 지식을 머리 속에 집어 넣어주는 것은 아닙니다. 이 신학 M. Div 과정 속에서는 신학의 틀을 올바로 세워서 그 틀 안에서 여러분이 목회를 하시면서 창조적으로 생각을 하는 거예요. 그것을 위해 우리가 신학을 하는 것인데 여기서 신학을 할 때 이 틀을 올바로 세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신학의 틀이 세워지지 않았을 때에 중구난방입니다. 목회가 방향도 없고 목표도 없고 목적도 없고 그러는 거에요. 그래서 이러한 신학의 틀을 잘 세우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다음에 이 신학의 틀 속에서 항상 묵상하고 새롭게 창조적으로 사색을 하면서 우리가 목회를 하는 것이지요. 성령은 바로 이러한 새 시대가 도래하는 것을 의미하고 나중에 완성될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반드시 받을 것이다 하는 것에 대한 보증, 이러한 것을 지금까지 말씀드렸습니다.
둘째로 이 그리스도와 성령님에 대해서 살펴볼텐데 구약 속에서는 성령님에 대한 명칭이 다 성부의 하나님과 관련되어서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영, 하나님의 신 또는 우리 나라 성경에 의하면 여호와의 영, 여호와의 신 이런 식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도 성경을 이야기 할 때 하나님의 영, 또는 하나님의 영이라는 표현을 쓰지만 그러나 성경에 대해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을 시켜서 예수 그리스도의 영, 또는 그의 아들의 영, 또는 주의 영 --여기서 주라 할 때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야기합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을 이야기 했지만 신약 바울 서신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야기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과 연관지어 성령님에 대한 새로운 명칭이 바울 서신에서 주어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시다시피 하나님께서는 성결의 영, 즉 부활의 영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자 가운데서 일으키셨습니다. 로마서 1장 4절(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8장, 디모데전서 3장 16절에 있는 말씀입니다. 바로 이 성령님을 통해서 성령님을 통한 부활로 말미암아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습니다.
그 전에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었고 부활한 다음에 갑자기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아니고 지상 사역 때에 Sonship이 하나님의 아들의 신분보다는 차원이 새로운 더 높은 차원의 이런 하나님의 아들의 신분으로 들어가게 된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 부활이라는 것은 부활을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는 새로운 존재 형태를 부여 받았습니다. 우리가 쉽게 이야기해서 시공을 초월한 새로운 존재 형태, 정말 영광스러운 우리가 상상하기도 힘든 그 영광스러운 존재 형태를 부여 받으셨지요. 이제 이러한 부활하신 주님은 더이상 성육신, 이 지상 생활 때 취했던 육체의 연약함에 복종하지 않습니다. 이제 그리스도는 부활해서 모든 신적인 능력과 영광을 누리십니다. 바로 이 예수님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제 모든 신적인 능력과 영광을 누리시는데 바로 그것은 주님이 되시는 것인데, 만유의 주가 되시는 것인데, 그 만유의 주가 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령님을 통해서 자기의 백성인 교회를 다스리십니다.
고린도전서 12장 3절에 보면 성령님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님을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그랬는데 바로 이 말씀에 근거해서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교회를 모으시고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모으시고 다스리십니다. 이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택한 백성으로 하여금 참된 신앙고백을 하게 하시고 즉 예수님을 주라 시인하게 하시고 또 그것을 고백하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의 공동체인 교회로 자기 백성을 불러 모으십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령님을 통하여 자기 백성을 불러 모으실 뿐만 아니라 또한 교회의 여러가지 은사를 주셔서 교회를 세우시고 교회를 다스려 나가십니다. 그럼으로써 이 성령님은 구약시대 하나님의 영으로서 역사했지만 이제 신약시대의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서 역사하십니다.
그렇다 한다면 이제 성령님과 믿는 자와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가하면 주님께서 성령님을 통해서 자기 백성을 모으시고, 다스리고 세우신다 했는데 구체적으로 주님께서 성령님과 믿는 자와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가? 아마 여기에 여러분은 더 많은 관심이 있으리라 보여집니다. 자, 성령을 받았다. 이 성령님께서 우리 마음 속에 임하셨다는 것은 우리 믿는 자가 이제는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새로운 상태, 완전히 새로운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것도 종말론적 사건입니다.
우리는 이전에 어둠의 세력 밑에서 종 노릇하였습니다. 즉 우리의 옛 주인들은 죄와 마귀와 같은 지극히 악독한 어둠의 세력입니다. 또한 육체도 그렇게 변하고 있지요. 바로 우리는 이 성령님이 오시기 전에 악한 세력들의 종노릇하고 있었습니다. gang이라고 그러죠? 악당들의 무리에 자녀들을 빼앗기면 잔인한 발톱에 빠져 나올 수가 없습니다. 주님을 알기 전의 우리의 삶이 그러한 삶이었습니다.
그런데 성령님의 능력으로 우리 주님의 십자가의 권세로 우리가 그런 상태에서 해방을 받아서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로 옮겼는데 바로 그런 하나님 나라 안에 있는 자는 성령님이 그 마음 속에 거하시는 성령께서 바른 구원을 구체적으로 실현시키십니다. 즉 우리가 구원 받았다 해도 우리는 악한 시대에서 완전히 이별한 것은 아닙니다. 이 악한 시대에 이 삶이 우리를 위협하지만 우리가 이 성령님, 믿음 안에서 우리가 믿음으로 성령님을 받았을 때에 우리는 그 악한 세력의 지배를 받지 않고 그 성령님을 통한 주님의 지배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새로운 실전을 이야기합니다. 우리의 이전의 삶의 원리는 이런 우리의 악한 무리의 옛 주인들에 순종하는 것이 삶의 원리였습니다. 이 악한 옛 주인들은 우리에게 악한 정욕과 악한 욕심을 심어주고 악한 계획을 심어주고 그대로 행하게 합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 우리의 삶을 지배하셔서 우리에게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게 하시고 하나님의 아들의 자유를 누리게 하십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이 성령님을 받고 이 성령님 안에서 산다는 것은 하나님 안에서의 완전히 새로운 실존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에서 상당히 드라마틱하게 나타납니다. 구약 출애굽 사건에서 이스라엘은 이집트에서 종살이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삶은 그야말로 종살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크신 능력으로 그들이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하나님 앞에서 세운 자유를 누리며 사는 삶을 살았습니다. 바로 이런 자유에서 하나님 백성으로서 자유의 삶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이제 이 성령님과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에 있어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성령님이 오심으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새로운 실전으로 서게 된 것이고, 좀더 구체적으로 성령님과 하나님의 삶에 대해서 말씀 드리겠는데, 우리가 성령님과 믿는 자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에 무엇보다 강조되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님이 하나님과의 공동체인 교회 위에 부어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성령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인 공동체인 교회 위에 부어졌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성령님과 하나님의 자녀의 삶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에 아주 중요한 사실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 13절에 보면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비록 교회 안에는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있고 또한 다양한 성령님의 은사들이 주어졌지만 믿는 자들은 성령님으로 세례를 받아서 한 몸이 되었습니다.
한 몸이 되었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에 연합된 것을 이야기합니다. 여기서 성령님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은 그리스도이신데 그 그리스도는 택한 자의 마음 속에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시인하는 참 믿음을 일으키시고 그 믿음을 생산해서 복음을 믿게 하십니다. 그럼으로써 그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인 교회 안으로 가입시키십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으로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과의 연합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굉장히 중요한 말입니다. 여기서 성령 세례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것은 무슨 다른 신비한 것이 아니라 교회론의 차원에서 우리가 이제 교인이 된 것,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지체가 된 것을 의미합니다. 바로 이런 관점에서 볼 때에 바울의 성령론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요소가 있는데 그것은 성령께서는 믿는 자 안에서 역사 하시는 성령님께서는 개인주의를 배척하고 하나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역사는 교회 안에서 어떠한 형태의 개인주의를 용납하지 아니하시고 하나되게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아주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축도할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을 그 이야기를 우리가 많이 하는데 성령님의 교통하심, 성령님의 충만하심, 역사하심 여러가지 표현은 합니다만 성경에서는 교통하심을 표현을 합니다. 그런데 이 성령님께서 내주하시는 사람들과의 상호 관계에 있어서 최고의 특징은 참된 교제입니다. 영적 fellowship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성령님에 대한 축복을 우리가 이야기할 때에 성령님의 교제, 참된 영, 성령님 안에서 영적 교제를 우리가 간구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2장 1절-4절에서 성령의 교제에 호소를 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에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성령님 안에서 교제하는 것은 우리가 서로 형제를 겸손과 섬김으로 받드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서로 하나되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또한 바울은 에베소서 4장 3절에서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말하고 있는데 여기서 평안이라는 것은 완전한 상호 조화를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인간 관계에 있어서 서로 조화를 이루면 그곳에 평화가 있습니다. 뭔가 조화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에 불화가 성립한 것 아닙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이와 같은 말씀들에서 모든 믿는 자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은 하나님의 자녀들 가운데서 가장 친밀한 유대 관계를 창조하십니다. 믿는 자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성령의 최고 사역은 하나님의 자녀들 가운데서 가장 친밀한 유대 관계를 창조하신다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성령님께서 하시는 사역의 참 중요한 부분은 이것입니다. 믿는 자들, 형제 자매들 안에 참된 교제를 창조하십니다. 참된 교제라는 것은 아주 친밀한 유대 관계를 말씀하시는 것, 하나된 것을 의미합니다. 물론 이 유대 관계라는 것은, 형제 자매들간의 유대 관계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부여하신 사랑, 십자가의 사랑을 깨달음에서 나온 형제 사랑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 13절 이하에서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하는 것이 모든 율법을 다 완성 시키는 것이다 했는데 그러면서 이 사랑은 성령님의 사역, 성령님의 열매, 성령님의 사역의 자연스러운 결과이다 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참으로 성령님의 지배를 받고 성령님의 다스림에 우리 자신을 맡기는 삶은 바로 형제 사랑으로 나타나고 형제를 섬기는 것으로 나타나고 형제간에 참다운 유대 관계가 형성이 되어서 -창조 되어져서- 그 하나님의 교회가 하나되는 것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님의 능력을 받고 성령 충만한 삶을 산다는 것을 다른 것에서 아닙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에 어떤 이적 같은 행하는 것을 성령 충만한 것을 찾으려 하는데 그것보다 근본적 중요한 것은 형제 사랑입니다. 은사에 대해서도 사도바울이 고린도전서 12장 7절에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러가지 교회를 위해서 많은 은사를 주셨습니다. 이 은사를 주신 목적은 교회를 세우는 것입니다. 교회는 곧 전체의 유익을 위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 7절에 그렇게 나와 있습니다.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유익하게 하려 하시기 위해서 교회의 전체 유익을 위해서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은사가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어떤 은사가 결코 참 교회의 표시라는지 일류 신자의 심볼로서 의도된 적은 없습니다. 어떤 은사가 더 중요한가 고는 덜 중요한가 거기에 대한 결정적인 기준은 어떤 은사가 교회를 세우는 데에 더 큰 공헌을 하는가 입니다. 이것이 아주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 3절-5절에서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하는 것이요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만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통역하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앞으로 목회 사역을 할텐데 성령님께서 이 교회에 임한 최대의 목적, 유일한 목적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은데 그것은 교회를 세우기 위한 것입니다. 또 우리 성도들 간에 좀 피부에 닿는 이야기를 하면 서로 친밀한 유대 관계를 창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즉 한마디로 말해서 흔히 쓰는 말로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서 성령이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여러분에게 제안합니다.
여러분의 목회의 목표는 사랑으로 공동체를 세우는 것으로 정해야 합니다. 서로 섬기고 성도들 간에 서로 사랑이 있고 섬김이 있고 서로 하나되는 일에 뜻을 두는 바로 그것, 사랑이 충만한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성령님이 오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성령은 공동체 속에서 역사하시면서 공동체 개개인의 삶 속에서 역사하십니다. 공동체 안의 개개인, 항상 공동체 안에 속한 공동체 일원으로서의 개인을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개인의 삶의 목표와 지양하는 바는 공동체의 지양하는 바와 항상 동일합니다.
우리의 공동체 일원으로서 개개인의 삶 속에 역사하시는 성령님에 대해서 우리가 이야기할 때에 굉장히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직설법과 명령법과의 관계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느냐? 직설법, indicative of slavation(구원의 직설법)을 믿는 자는 누구든지 다 성령을 받았습니다. 갈라디아서 4장 6절, 로마서 8장에서도 성령은 아들의 영으로서 믿는 자 마음 속에서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짖는 영이라 했습니다. 성령님을 통하지 않고 우리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고백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믿는 자들은 다 성령님을 받았습니다. 또 교회에 속한 사람들은 누구나 성령님을 받았습니다. 이것을 고린도전서 12장 13절에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다, 한 성령으로 우리가 세례를 받아서 한 몸을 이루었다, 그리스도의 몸,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되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고린도후서 1장 22절, 에베소서 1장 13절, 4장 30절에서 보면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성령님을 받았다. 성령님으로 세례를 받았다. 성령님으로 인치심을 받았다. 다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물론 약간 다른 의미로 쓰인 것은 사실입니다. 여기서 인치심을 받았다 이 말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통해서 믿는 자를 지키시고 보호하실 것이다는 것을 보증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물론 약간 다른 의미로 쓰였지만 아무튼 믿는 자가 성령님을 받았다. 또는 성령님으로 세례를 받았다. 성령님으로 인치심을 받았다는 것은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영광스런 구원의 사실입니다. 이미 이루어진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자들은 성령님을 새롭게 받으려고 기도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바울은 indicative에 근거한 명령을 다시 하는데, 바울은 한번 더 성령님으로 거듭나라, 성령님으로 세례를 받으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성령님을 이용해서 우리가 스스로 거듭날 수 있습니까? 불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거듭나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님으로 세례를 받아지는 거지요. 그렇지요? 우리는 성령으로 세례를 수동적으로 받은 거지 우리가 우리 행위로 그것을 좌지우지 하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성령님으로 인치심을 받으라 한번 더 이야기 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성령님으로 인치심을 받았다. 그러므로 바울은 우리가 거듭나고 성령님으로 세례를 받고 성령님으로 인치심을 받은, 물론 믿는 자들에게 바울은 이제 다시 거듭나라, 성령님으로 세례를 받으라, 인치심 받아라 이런 요구를 하지 않고 이미 거듭나고 세례를 받고 인침을 받은 사람에게 바울은 되풀이 해서 뭐라고 이야기 하냐하면 성령님의 충만을 받으라 하고 이야기 합니다.
성령님의 충만을 받으라는 말, 이미 성령님으로 거듭나고 인침을 받고 세례를 받은 사람에게 주어지는 명령이 성령님의 충만함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또 이 말은 갈라디아서 5장 16절 성령으로 행하라는 명령으로 나타나고요 에베소서 4장 30절에서는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할지 말라. 이 말은 하나님의 성령님께 순종하라는 말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9절에서는 성령님을 소멸치 말라고 명하고 있습니다.
이와같은 여러가지 명령들,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성령으로 행하라.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성령을 소멸하지 말아라. 이와같은 여러가지 명령들 --직설법에 근거한 여러가지 명령들-- 한마디로 이 성령의 거룩하신 능력으로 거룩하심을 행하며 계속 성장하라는 이야기 입니다. 이 말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성령의 지배를 받으면서 살아라. 성령님께서 주시는 능력으로 살아라. 다른 표현으로 말하면 네 자신을 성령님께 온전히 드리라는 표현입니다.
그 전에 우리는 누구의 능력으로 살았습니까? 죄와 마귀와 이런 것들의 능력으로 살았습니다. 우리 힘으로 산 것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삶을 우리 스스로 좌지우지 못합니다. 그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우리의 실존입니다.
우리는 종노릇하는 거예요. 죄와 마귀의 종이 되는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종이 되느냐? 우리는 양자 택일을 할 수 밖에 없는 그러한 실존적인 존재입니다. 우리는 이전에는 죄와 마귀의 능력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는 성령님을 소유하고 있고 성령님께로부터 인치심을 받았으므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이제는 그러므로 이제는 네가 성령님을 소유하고 있음으로 성령님 안에서 하나님의 새로운 시대에 참여하였으므로 이제는 성령님의 능력으로 살아라. 성령님에 온전히 네 삶을 맡겨라 하는 그런 의미로써 성령님의 충만을 받아라. 성령님으로 행하라. 또는 하나님의 성령님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성령님을 소멸치 말라 하는 명령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기에서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이 성령 충만이라는 것은 우리가 추구해야 할 어떤 제2의 축복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 성령 충만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없는 새로운 것을 구하라는 것이 아니고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이 성령, 이미 우리 마음 속에 임하신 성령님, 하나님의 전능이신 이 성령님께 우리 자신을 복종하면서 살라는 명령입니다. 이것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그 축복을 계속 누리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이라는 것은 어떤 단회적인 것이 아니라 계속적인 사건입니다. 우리의 삶이, 크리스천의 삶, 우리 믿는 자의 삶 속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되어야 하는 것을 이야기 합니다.
이 성령님 충만의 삶은 능력 충만의 삶입니다. 성경에 보면 이 성령님과 능력은 아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계신 곳에, 하나님의 성령이 계시는 곳에, 하나님의 성령님이 역사하시는 곳에 하나님의 능력이 일어나고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는데 그 놀라운 일들이 무엇이냐 하면 우리가 잃어버렸던 것을 회복하는 것인데 그리스도의 모습이 믿는 자 안에서 점점 선명한 빛 가운데로 드러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령님의 능력이 역사하시는 곳에 반드시 그 열매에서 나타나는 것이 있는데 사랑입니다. 성령님이 궁극적으로 나타나는 것 한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사랑입니다. 성령님의 아홉가지 열매는 한 마디로 사랑으로 압축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님의 절대적인 지배를 받을 때 우리 안에 나타나는 것은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바로 우리의 존재를 규정짓는데 하나님은 사랑입니다. 그런데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셔서 놀라운 일을 일으키시는데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사랑하게 하는 것이고 사랑이신 하나님의 형상이 우리 안에 이루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형상은 사랑의 화신이신 우리 주님이십니다. 그로써 우리 가운데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닮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세상의 경이로운 것이 많이 있지만 타락할 대로 타락해서 악마와 짐승의 모습을 가진 인간이 영광스런 우리 하나님, 영광스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되찾는 것, 그 모습을 취하는 것보다 더 경이스러운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와같이 우리가 사랑의 사람이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이 우리 안에 이루어지면서 그리스도의 몸인 하나님의 교회, 교회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 성장해 가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사역은 한마디로 기쁨이 됩니다.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시고 그리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공동체 일원이 되게 하시고 하나님의 공동체를 사랑으로 섬기게 함으로써 그 공동체 전체가 그리스도의 모습을 띄며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 성장케하는 그러한 사역이 성령의 유일하고 최대의 사역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목회의 방향과 목표는 이 성령의 사역에 따라서 행해져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이 목회에 성공했느냐는 얼만큼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변화되어 가느냐 입니다. 거기에 우리는 그것을 측정 기준으로 삼아야지 수가 많이 모이느냐? 재정이 얼마나 걷히는가? 다른 것 가지고 하는 것은 비성서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참으로 우리가 서로 예수그리스도의 모습으로 사랑하고, 예수그리스도의 몸으로 키워나가고, 또 예수그리스도의 모습으로 지역 사회를 섬길 때 그 교회는 자연스럽게 성장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님에 대하여 신비한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고 굉장한 능력을 받아서 사람들을 깜짝 깜짝 놀라게 해줌으로 말미암아 그 교회를 단숨에 부흥시키려고 하고 그런 생각은 다분히 미신적인 사고 방식입니다.
참으로 성령님충만한 사역자들은 사랑으로 섬기는 자기 자신을 우리 주님처럼 불살라서 교회 양떼들을 위하여 죽도록 사랑하는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충만이라는 것은 하나의 제2의 축복이 아니고 우리에게 이미 주어진 그 축복을 계속 누리는 것을 이야기 합니다. 그런 차원에서 볼 때에 바울의 성령론은 사도행전에 나타난 성령론과 상당한 관점의 차이가 있습니다. 사도행전에서는 복음 전파를 위한 하나의 능력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반해서 바울의 성령론은 그보다 훨씬 근본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믿음의 시작도 성령님이시고 우리가 사는 모든 것이 삶의 원동력이 성령님을 이야기 하고 있고 근본적으로 우리를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회복시키는 그 능력으로서의 성령님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런다고 해서 제가 누가복음에 나타나 있는 특별히 사도행전에 나타나 있는 우리가 복음 사역을 할 때에 성령님의 능력을 무시해야 된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우리가 복음 사역을 할 때에 반드시 성령님의 능력을 의지해야겠지요. 그러나 그 목표가 무엇이냐 하는 것에 우리는 더 많은 강조를 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성령론 가지고 고민하다가 제 나름대로 논리를 세우려다 혼돈 상태에 있어서 상당히 만족스럽지 못한 상태로 이 강단에 섰더니 제가 만족 못하니까 헤매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헤매고 있어도 중요한 이야기는 다 했습니다. 제가 헤맨 것은 사실입니다. 하다가 보니까 아주 불만족스럽습니다. 중요한 것은 성령님과 교회의 관계, 성령님의 교회를 세우시는 사역, 성령님의 교제, 궁극적으로 성령님께서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의 모습을 우리 가운데 공동체를 이루시는 관계, 여기에 성령님의 유일한 절대적인 사역, 이것이 성령님의 절대적인 유일한 사역이라 명심하시면 됩니다
- 홍인규 교수/백석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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